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권, 현종 즉위년 1659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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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정해

영의정 정태화,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 등이 청대하여 입시하고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할 것을 극력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한 몸 때문만이라면 어찌 여기에 그냥 있으면서 진정시키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두 자전의 뜻은 그대로 계시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혼전(魂殿)이 여기에 있으므로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혼전은 이안(移安)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이처럼 굳이 청하니, 이어할 뜻을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라."
하였다. 혼전은 계상당(啓祥堂)에 받들어 옮겼는데 전랑(前廊)을 또한 조성(造成)하였다.

 

관학(館學) 유생 윤항(尹抗) 등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선조(先朝) 때 허락하지 않았던 일을 경솔하게 처리할 수 없다."
하였다. 소를 다섯 차례 올리고, 파주(坡州) 및 황해도 유생들도 누차 소를 진달하여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민광소가 상소하여 성지(聖志)를 세울 것, 성학(聖學)에 힘쓸 것, 폐정(弊政)을 개혁할 것, 실효(實效)를 책려할 것을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12월 2일 무자

김수흥(金壽興)을 이조 정랑으로, 이무(李袤)를 사간으로, 성후설(成後卨)을 장령으로, 이무(李堥)를 정언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남구만(南九萬)을 교리로 삼았다.

 

집의 이후(李垕) 등이 아뢰기를,
"대체로 대석(臺席)에서 일단 논을 주장했다가 물러나서는 그만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고 논핵당한 사람에게 예쁨을 받으려고 하는 행위야말로 이랬다 저랬다하는 장사꾼의 행태라 할 것입니다. 지난번 김익렴(金益廉)이 장령이었을 때에 ‘산릉(山陵) 택길(擇吉)에 5월의 제도를 어긴 점이 있다.’는 이유로 예조 당상의 추고를 청했었는데, 곧바로 판서 윤강의 아들 윤지미(尹趾美)에게 글을 보내 ‘동료 황준구(黃儁耉)가 발론(發論)한 것인데 나는 그냥 따라 참여했을 뿐이다.’고 하였답니다. 이것이 비록 윤지미가 익렴을 변호해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일이 실제로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분개하자, 익렴이 이에 여러 명사(名士)들이 회좌(會坐)한 자리에서 준구를 맞대 놓고 배척하며 전에 한 이야기를 실증하려고 하였으니, 어쩌면 이토록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떤 이름있는 재상이 그의 음험하고 사특한 정상을 탄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자, 익렴이 하루 동안에 세 차례나 준구에게 글을 보내 자기를 위해 해명해 주기를 요구하는 등 시종 일관 간사스런 정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차마 정시(正視)하지 못하게 하는 점이 있습니다. 김익렴을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황준구는 추고를 청한 논에 같이 참여했으면서 윤강을 찾아가 보았으니, 비록 해명한 사실이 없다 하더라도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은 혐의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처음에 장령 정박(鄭樸)이 맨 먼저 이 논을 발했는데, 장령 정계주(鄭繼胄)가
"준구의 잘못이 익렴처럼 크지 않은데 똑같은 벌을 시행하는 것은 부당하다."
는 이유로 마침내 인피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후 등이 양쪽 모두 체직시키고 등급을 나누어 이와 같이 논핵한 것이다.

 

좌참찬 송시열이 장차 소를 진달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려고 하자, 옥당이 상차하여 만류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그대들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나를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 대해 깊이 감탄하는 바이다.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올린 소장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무엇 때문에 이런 쓸쓸한 말을 하여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가. 그리고 듣건대 경이 며칠 안으로 나갈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가슴이 떨려 온다. 경은 어찌하여 이토록 박절하게 떠나려고만 하는가. 경이 나의 낭패스러운 상황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선왕께서 쏟아 주신 특별한 은총을 잊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니 나도 모르게 비통해지며 눈물이 나온다. 서로 만나보지 못한 지가 벌써 수십 일이 지났으니, 그리워하고 답답해하는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날씨가 그렇게 혹독하게 춥지는 않으니 내일 아침에는 들어오라. 그러면 그 다행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12월 4일 경인

상이 좌참찬 송시열을 인견하였다. 시열이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간절한 말로 만류하였다. 시열이 감히 다시 물러가기를 청하지 못하고 소장을 진달하여 아뢰기를,
"신이 정세(情勢)에 쫓긴 나머지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가기를 청했는데, 삼가 성상을 뵈옵건대 곡진하게 타이르시며 선조(先朝) 때의 일까지 언급하셨으므로 신은 감히 천안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신 역시 목이 메어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구구한 소회를 만에 하나도 토로하지 못한 채 물러나와 여관에 엎드려 있자니 슬픈 마음만 더욱 절실해질 뿐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성상께서 분부하여 신을 타이르신 것이 그렇게 간절할 수 없어 귀신도 울릴 만하니,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어떻게 감격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끝내 감히 우러러 받들지 못하는 것은 그에 따른 매우 부득이한 사정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오래전부터 이 점을 낱낱이 진달드리고 싶었습니다마는, 신의 입장에서 볼 때 대체로 차마 말씀드리지 못할 점이 있었고,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망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전하의 입장에서도 차마 듣지 못할 점이 있었기 때문에 침묵을 지킨 채 홀로 마음만 썩이면서, 그저 곧바로 죽어 온 천하 사람들의 마음에 사죄하지 못한 점을 한스럽게 여길 따름이었습니다.
대체로 신은 젊어서부터 예서(禮書)를 읽었습니다만, 어리석어 변통할 줄을 알지 못했으므로 향리에 예송(禮訟)이 있을 때면 번번이 꽉 막혔다는 비난을 받곤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보건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어도 다시 소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예(禮)에 3일이 지난 뒤에 염(斂)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조간자(趙簡子)039)  는 10일이 지난 뒤에도 소생하였으니, 3일이 되기 전에 염하는 것은 모두 이치상 죽이는 점이 있게 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미상불 몸이 떨리고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이것이야말로 신자(臣子)된 사람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점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에는 분한(分限)이 있으니, 2일 만에 소렴(小斂)하고 3일 만에 대렴(大斂)하는 것은 사대부에 해당되는 것이고, 인군의 경우에는 3일 만에 소렴하고 5일 만에 대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저 촉박하게 되어 있는 기한을 늘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단 여유를 둔 기한만큼은 절대로 단축함으로써 혹시나 하고 바라는 신자(臣子)의 심정을 상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은 평소 이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금년 5월 5일에 중사(中使)가 ‘지금 날씨가 무더워 뜻밖의 근심이 있을까 두려우니 오늘 소렴을 했으면 한다.’는 내지(內旨)를 전유(傳諭)하였을 때, 신이 삼가 대답하기를 ‘예가 이미 그렇지 않을 뿐더러 또 뜻밖의 근심이 있다 하더라도 재궁(梓宮)의 공간이 넓으니 반드시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6일 장차 일을 마무리하려 할 때에 신이 또 생각하기를 ‘예서(禮書) 소렴조(小斂條)를 보건대, 아직 끈으로 묶지 않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효자(孝子)가 그래도 소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때때로 그 얼굴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 예는 신자가 차마 위배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신이 또 여러 신하의 의견을 거부하면서까지 고집하며 ‘예서에 있는 대로 해야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 곡반(哭班)에 나아가고 보니, 대신 이하가 끝내 ‘근심이 있을까 우려된다.’는 내지 때문에 곧바로 변통하였습니다.
대개 신도 또한 걱정스러운 일이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대로만 하려고 했던 것은, 신이 일찍이 《예경(禮經)》을 보건대 군상(君喪) 때 쓰는 의복이 무려 1백 28벌이나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은 이것을 보고 인군의 관곽(棺槨)은 필시 그 공간이 매우 넓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인데, 아조(我朝)의 재궁(梓宮)에 곧 척도(尺度)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처음의 생각과 일이 달라지자 일을 받든 여러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여러 대신 이하가 모두 들어와 봉심(奉審)하였고 다음날 아침에는 원임(原任) 대신 이하가 또 들어와 다시 살폈고 보면, 인사(人事)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은 십분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구(舊) 재궁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신(新) 재궁을 또 합목(合木)하기까지에 이르렀으니, 이는 전고(前古)에 있지 않던 변고였습니다. 이에 조야(朝野)가 떠들썩하게 일어나 모두 신에게 허물을 돌리면서 신이 고집을 부려 일을 그르쳤다고들 하였습니다.
대저 생각건대, 백세토록 잊지 못할 우리 선왕의 지극히 위대한 인덕(仁德)에 대해서, 신자(臣子)된 자의 입장에서 이미 그 몸을 백 번 바쳐 속죄하지도 못했고 또 목숨을 바쳐서 하찮은 정성도 하지 못한 채, 상례 때 나름대로 성신(誠信)을 바치려고 했던 것마저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으니, 신의 종족이 없어진다 한들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것이며 사람들의 말에 사죄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목을 놓아 통곡할 뿐 정말 천일(天日) 아래에 얼굴을 들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신은, 산릉(山陵)을 복정(卜定)하던 날, 수원(水原)이야말로 천재 일우(千載一遇)의 땅이라고 뭇 사람들이 의논하였는데도, 그만 감히 앞장 서서 이론을 제기해 결국 옮기게 하였습니다. 신은 지리(地理)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정(人情)으로 헤아려 보거나 신도(神道)로 따져 보면 이번에 복정한 곳이 진선 진미(盡善盡美)한 곳이라고 여겨지는데, 계속 사람들의 말이 이어지면서 갈수록 심각도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대저 우리 선왕의 온 나라를 뒤덮은 성덕(聖德) 신공(神功)과 피부에 스며든 심인(深仁) 후택(厚澤)을 생각하건대, 세상을 떠나신 후 억조 창생이 슬퍼하고 사모하며 길토(吉土)를 얻어 영원한 안식처로 모시고 싶어하는 정성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신이 근거 없는 말을 가지고 이미 결정한 계획을 어지럽힘으로써 반드시 정성껏 해야 한다는 신자의 도리를 위배하고 오늘날 옳지 않다는 이름을 초래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 점에서 또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지난번 성후(聖候)가 편찮으시던 날 중외(中外)가 황급해 하며 무슨 일이든 다 해보려 할 때에 그만 감히 혼자서 뭇 의논들을 어기고 말하기를 ‘태의(太醫)는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있으니, 절대로 그로 하여금 약을 처방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그 뒤에 결국은 그가 처방한 약을 써서 통쾌하게 효험을 보아 성체가 강령해지셨으니, 이는 실로 종묘 사직과 신민의 복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논하는 자들은 신이 군부(君父)의 질환을 급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신의 마음을 차분히 따져 보지 못한 소치라고 할지라도, 신의 행동을 추적해 본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 습니까.
신이 이와 같은 세 가지 큰 죄를 지었으니, 유사(有司)의 주벌(誅罰)을 면할 수 있었던 것만도 요행이라 할 것인데, 더구나 직책을 가지고 병을 조리하며 도성에서 편안히 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공의(公議)와 왕법(王法)을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인산(因山) 뒤에 곧장 소장을 올려 스스로 탄핵하고서 만약 성상께서 애달프게 여겨 용서만 해 주신다면 곧바로 시골에 돌아가 두문 불출하고 죽기만을 기다리려 하였는데, 잊지 못하는 변변찮은 충정으로 차마 바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건대 이런 이야기들을 상중에 계신 성상에게 말씀드려 비통해 하실 단서를 더 만들어 드리면 안 된다고 여겨졌기에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났고 한 해도 끝나 가려 하는 때인만큼 다시 인순 고식(因循姑息)적으로 끝내 면하게 되기를 기대할 수만은 없기에 감히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대략 한두 가지를 진달드렸습니다마는, 그래도 감히 다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으니, 아, 신의 사정이 또한 애처롭다 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굽어살펴주소서. 그리하여 만약 ‘그 죄는 크지만 동기는 용서할 수 있으니 중하게 따질 것까지는 없을 듯하다.’고 여겨지시거든, 우선 신을 체직시켜 돌아가 죽도록 허락하심으로써 변변찮은 분수에 편안하게 해 주소서. 그러면 실로 천지 부모가 처음부터 끝까지 생성해 주는 은혜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장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반절도 채 읽지 않아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심회(心懷)가 끓어올랐다. 말하고 싶은 뜻이 무궁하다마는 다 갖출 수가 없으니, 개략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것을 가지고 유시할까 한다.
부모의 상을 당해 염습(斂襲)할 때 흠이 없게 하고 좋은 장지(葬地)를 택해 영원한 안식처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 모두의 희망일 것이다. 내가 아무리 불민(不敏)하다 하더라도 어찌 무망(誣妄)한 것을 지어내는 사람들보다야 못하겠는가. 합목(合木)에 대한 일도 그렇다. 만약 미진한 점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경 때문이라고 하여 미진한 일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며 지금까지 문제삼지 않았겠는가. 이 일은 정말 미진한 점이 없었으므로 애통하고 절박하기 그지없었던 나의 심정이 그래도 조금 풀릴 수 있었던 것인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것이 첫번째 이해하기 쉬운 점이다.
수원(水原)이 국릉(國陵)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말한 사람은 경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쓴 능강(陵岡)도 수원에 못지않다. 아무리 망령스럽고 허황된 논의가 사면에서 일어난다 하더라도 귀담아 듣지 말도록 하라. 이것이 두 번째 이해하기 쉬운 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일은 내 마음에 더욱 미안한 점이 있다. 이 일은 어떤 사람의 말을 막론하고 내가 곧장 물리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이해하기 쉬운 점이다.
그런데 경이 이 세 가지 일 때문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내가 만약 허락하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더욱 감히 허락할 수 없으니, 경은 사세(事勢)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살펴 주기 바란다. 속히 돌아갈 뜻을 바꿀 경우 나의 다행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경은 이렇듯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 이후(李垕) 등이 상차하고, 우의정 정유성 역시 사직하는 차자를 통해 송시열이 떠나는 것을 만류하기를 청하고, 관학 유생 남이성(南二星) 등도 잇따라 상소하여 만류하기를 청하니, 상이 모두에게 정성을 다해 만류하겠다는 뜻으로 답하였다.

 

12월 5일 신묘

남구만(南九萬)을 이조 정랑으로 삼고,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발탁하고, 박장원(朴長遠)을 예조 참판으로 발탁했다.

 

상이 여차에 나아가 이조 판서 송준길, 장악원 정 이유태를 인견하였다. 유태가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소를 지니고 들어오라는 분부를 받들었습니다만, 음관(蔭官)이 어떻게 경연에 들어와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소초(疏草)라는 것도 옛사람들의 여론(餘論)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조(先朝) 때에 위에 진달하려다가 미처 못했고 지금도 가지고 오지 못했는데, 물러가 올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장악 정이 늘 어버이 곁을 떠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여름에 그의 동생을 기전(畿甸)의 읍으로 바꿔 제수하도록 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거행하지 않았는가?"
하니, 준길이 대답하기를,
"외부에서 어떤 이가 의논하기를 ‘그의 형이 현재 내자시 직장으로 있는데 머지 않아 임기가 만료된다. 만약 6품으로 오르면 기전의 읍을 제수해도 타당할 것이다.’ 하였는데, 신이 감히 진달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자, 상이 그의 형을 6품으로 올리도록 명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니 더욱 황공스럽기만 한데, 또한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상 반드시 백성의 숫자를 알아야만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씨(呂氏)가 향약(鄕約)을 만들고 주자(朱子)가 그것을 증감(增減)했는데, 이것을 제대로 다시 밝히기만 하면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의 전 소장에도 이 일을 언급했는데, 돌아가 병든 모친을 보고 나서 글로 올리겠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유태를 머물게 하시려고 이런 특별한 거조를 행하시는데, 유태가 어떻게 물러가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나라 일이 어렵고 걱정스러우니 협력해서 구제해야 마땅합니다. 더구나 송시열이 바야흐로 내려가려고 하니, 사방에서 듣고 보는 이들이 성상께서 끝까지 보살 펴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아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전형(銓衡)을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 대신으로 하여금 당상 가운데 승진시켜 발탁할 만한 자 4인을 초계(抄啓)하도록 했었습니다. 그런데 윤문거(尹文擧)와 박장원(朴長遠) 두 사람은 아직까지 승진시켜 발탁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정사(政事)에서 가선(嘉善)의 직책에 제수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장원의 경우에 대해서는 외부의 의논이 ‘강원도의 【장원이 그 때 강원 감사였다.】  진휼하는 정치가 바야흐로 급한 때이니 생소한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를 체직시키지 말고 그냥 자급(資級)만 제수해야 한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체직시켜도 별로 관계될 것이 없다.’ 합니다. 이 두 조항을 가지고 대신에게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다음날 인대(引對)하였는데, 대신은 체직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부제학 유계는 아뢰기를,
"새서 증질(璽書增秩)은 옛날부터 있어 온 일이니, 이처럼 진휼하는 일이 바야흐로 급한 때를 당해서 체직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은 외방이 오히려 더 중하니, 그냥 자급만 제수하고 감사는 체직시키지 말라."
하였다.

 

부제학 유계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두 현신(賢臣)은 그 도덕과 공적이 아직도 분명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 장보(章甫)의 무리가 누차 상소하여 진달하였습니다마는, 신들이 다시 평소 부형과 사우(師友)로부터 들은 것을 가지고 아뢸까 합니다.
이이는 상지(上智)의 자질과 중용의 덕에 맞는 행동의 소유자로서 지행(知行)이 병진(並進)하고 체용(體用)이 모두 갖추어졌기 때문에 언론에 나타난 것과 저술에 드러난 것이 원대하고 뛰어나 정미롭고 밝으며 두루 융해시켜 탈속한 감을 느끼게 합니다. 조정에 임했을 때의 그의 태도를 말하건대 항상 임금을 요(堯) 순(舜)처럼 되게 하려는 것과 이 세상을 경륜하여 구제하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는데, 임금을 바로잡으려는 그의 정성과 백성을 구제하려는 그의 뜻이 소장을 올리고 아뢰는 사이에 간절히 드러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맑게 갠 하늘의 태양처럼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바입니다.
성혼은 가정의 훈도를 이어받아 본디 연원(淵源)이 있는데 돈후하고 장중하며 학행에 독실히 힘을 기울여 행동거지가 한결같이 법도를 준수하는가 하면 진퇴에 있어 모두 성현을 본받았으니 엄격하게 절조를 지켜 혼자 있을 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효제(孝悌)의 행실은 신명(神明)과도 통했다 할 것입니다. 덕기(德器)가 성취되어 표리(表裏)가 한결같았으므로 온 세상이 태산(泰山) 북두(北斗) 이상으로 그를 높이고 우러러보았으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옛날에 이른바 백세(百世)의 스승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이 두 신하가 도를 같이하고 뜻을 합쳐 성학(聖學)을 강론하여 밝히고 후진의 모범이 되어 인도함으로써 여지없이 쇠퇴해진 뒤끝에 오현(五賢)의 도를 떨쳐 일어나게 한 결과 선비된 자들로 하여금 학문에 종사하고 예의를 존중할 줄 알도록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암흑 시대로 들어가 의관(衣冠)의 나라가 금수(禽獸)의 지역이 되었어도 그래도 풍성(風聲)에 힘입어 의열(義烈)의 일맥(一脈)이 소멸되지 않음으로써 국가가 다시 회복되고 인류가 완전히 멸망당하지 않은 채 오늘날의 아름다운 상태에 이르게끔 한 것은 누구의 공이라고 할 것입니까.
이렇게 보건대 두 신하의 도덕과 공적은 실로 오형보다 빛나는 것으로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해야 한다는 청이야말로 만세가 지나도 바뀔 수 없는 공론이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상께서는 속히 유생의 소본(疏本)을 내리시고 여러 대신 및 유현(儒賢)인 인사들에게 문의하신 뒤 깊이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성대한 의전(儀典)을 거행케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두 현인에 대한 사실은 유생들의 소장에 빠짐없이 실려 있다. 그대들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선조(先朝) 때에도 어렵게 여기던 일인데, 그대들이 어떻게 몇 구절 적힌 1척(尺)의 종이쪽으로 나의 마음을 감동시키겠는가."
하였다.

 

12월 6일 임진

상이 여차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판 이시방이 강도(江都)에 비축된 선혜청의 미곡 3천 석을 가져다가 산릉(山陵) 및 경모전(敬慕殿) 제선(祭膳)의 값을 보상해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아약(兒弱)과 도고(逃故)에게 거두는 포목을 탕감해 준 숫자는 각도 각영(各營)에 비축된 양의 절반을 분정(分定)하여 충당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판 정치화가 아뢰기를,
"송시열은 이미 결연히 돌아갈 뜻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번 인견한 뒤에 물러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도성을 떠나는 데 따른 애달파하는 기색이 보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애써 만류했지만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치화가 또 아뢰기를,
"두 현신(賢臣)을 종사(從祀)하도록 선비들이 잇따라 소장을 올리며 궐문 앞에서 호소하는데 천청(天聽)은 갈수록 아득하기만 하고,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 역시 화평함이 결여되었으니, 이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집의 이후(李垕)가 아뢰기를,
"신중히 처리하시려는 성명의 뜻을 아랫사람이라면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상께서 결정을 내리신 것이 지극히 엄하여 황송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가 비답이 엄했다는 이유로 인죄(引罪)하고 이어 사기(士氣)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차자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한 것이 아니니,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헌 윤문거(尹文擧)가 상소하여 새로운 직질(職秩)을 환수해 줄 것과 물러나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7일 계사

집의 이후 등이 강화 유수 서원리(徐元履)의 처사가 전도된 것과 내관(內官) 윤완(尹完)의 방자한 정상을 탄핵하고, 모두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윤완에 대해서는 재계(再啓)하자 따랐으나, 서원리에 대해서는 누차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만웅(李萬雄)의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가 곧이어 용서하였다.
처음에 왜차(倭差) 귤성반(橘成般)이 공목(公木)의 승품(升品)이 점점 거칠어진다는 이유로 복구시켜 주기를 청하고, 또 공목의 태반을 미곡으로 바꿔 주기를 청하였는데, 개비(改備)해야 될 공목이 1천여 동(同)에 이르렀다. 그는 우리 나라가 졸지에 개비하기는 곤란하리라는 것을 알고 늘 이를 트집 잡아 말하였는데, 실제로 그의 의도는 미곡으로 많이 바꾸려는 데 있었다. 조정에서 3백 동만 바꿔 주도록 허락하자 귤성반이 끊임없이 더 주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귤성반이 종왜(從倭) 20명을 이끌고 곧장 부산(釜山)의 관사(館舍)로 들어와 떠나지 않고 머물면서 반드시 요구가 받아들여진 뒤에야 물러나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만웅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책망하고 타일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만웅이 치계하기를,
"주사(舟師)를 정돈하여 돌아갈 길을 차단하고 육군을 조발(調發)하여 엄습해 시살함으로써 한 사람도 탈출해 돌아가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어 ‘차왜가 약속을 위배하고 제멋대로 행하므로 약조에 따라 간과(干戈)로 종사(從事)했다.’는 내용으로 도주(島主)에게 글을 보내게 하소서. 또 이 뒤로 오는 왜선(倭船)은 한결같이 화친하지 않았을 때처럼 취급하여 절대로 정박하지 못하게 한다면, 도중(島中)에서 듣고 필시 두려운 마음을 품어 감히 경거 망동하지 못할 것이며, 강호(江戶)에서 안다 하더라도 내부 사정이 위태롭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어찌 기꺼이 도주(島主)를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하겠습니까."
하고, 잇따라 소장을 올려 청하였다. 귤성반이 이를 듣고 의구심을 갖게 되었으나 한편으로 도로 물러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시정(李時挺)이 타이르기를,
"오늘은 곧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발인일(發靷日)로서 대소 인민들이 객사(客舍)에 모여 곡(哭)을 해야 하니, 더욱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하니, 귤성반이 마침내 물러갔다. 조정이 ‘만웅이 과격한 행동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변경에 흔단이 생겨 왜가 말썽을 피울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게 될까 염려스럽다.’는 이유로 잡아 오도록 청하였던 것이다.

 

12월 9일 을미

상이 경모전(敬慕殿)에서 납향제(臘享祭)를 직접 거행하였다.

 

12월 10일 병신

좌참찬 송시열이 성밖으로 물러 나가 소장을 진달하며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을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서로 만나 보고 회포를 풀 수야 없겠는가."
하고,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 들어오도록 유시하게 하였다. 시열이 대답하기를,
"전후의 소장에서 신의 생각을 갖추어 진달드렸습니다마는, 감히 다 아뢸 수 없는 것은 끝내 감히 다 아뢰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신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면서 어떻게 해 볼 계책이 없기에 성상께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한 채 곧바로 도성 문을 나와 버렸으니, 신의 죄는 참으로 속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거꾸로 온유한 비답을 내리시며 사관을 보내 ‘서로 만나서 흉금을 털어 놓자.’는 내용으로 유시하셨으니, 신이 아무리 어둡고 완고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감격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신이 정말 어쩔 수 없어 일단 곧장 나와 버리는 죄를 범한 이상, 차라리 형벌을 받을지언정 도로 들어갈 수 있는 이치는 없을 듯합니다.
신은 젊어서부터 옛사람들의 글을 읽어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행동은 실로 떳떳한 도리와 예(禮)를 위배하는 패역스러운 짓으로서 너무나도 은덕을 저버리는 것이 됨에도 불구하고 감히 피할 수 없었고 보면 신의 종적(蹤跡)이 애처롭다 하겠습니다. 신이 저 멀리 영릉(寧陵)을 바라보자니 송백(松栢)이 창연(蒼然)히 아스라하고 고개를 돌려 대궐을 쳐다보니 천일(天日)이 아득히 멀기만 한데, 원한과 괴로움과 비통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품은 채 그저 스스로 피눈물을 닦을 뿐이니, 신의 사정에 대해서는 오직 귀신이나 알아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수찰(手札)을 정원에 내려 이르기를,
"지금 사관의 말을 듣건대, 말한 내용이 비통하여 말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며 가슴속이 놀래 무너지는 듯하여 스스로 안정할 수가 없다. 경이 기필코 떠날 뜻을 굳혔다 하더라도 한번 얼굴이라도 보여 주고 떠난다 해서 또한 안 될 것이 없다. 경이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내가 한번 가서 보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 승지 오정위(吳挺緯)를 보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정위가 회계하기를,
"신이 송시열에게 전유하였더니 어찰(御札)을 받들어 읽고는 감읍(感泣)하며 목이 메이면서도 결단코 돌아갈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상께서 양도(兩道) 감사로 하여금 그에게 말을 지급하고 호송하게 한 것이 넉넉하게 예우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시열이 차마 곧바로 결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그가 또한 어찌 성상께서 알아주는 은혜를 생각지 않음으로써 듣고 보는 이들이 의혹을 가지게끔 하는 행동을 취하겠습니까. 더욱 성의를 가하시어 다시 사관을 보내 한번 만나 보자는 뜻으로 유시하시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말을 지급하라는 비망기(備忘記)를 봉환(封還)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솔하게 가서 만나 볼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뢴 내용이 매우 타당하니, 승지가 다시 가서 꼭 서로 만나 보고 싶다는 뜻으로 잘 말을 만들어 전유(傳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열이 대답하기를,
"엎어 놓은 옹기 밑에는 하늘의 태양도 비춰 주지 못하는 법인데 두 번이나 승지를 보내어 도로 들어오라고 유시하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신이 전하를 부모처럼 제대로 섬기지 못해 아직 속에 감춘 마음이 있는 탓으로 성상께서 그래도 신이 들어올 수 있는 의리가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은 행실이 형편없어 사람들이 신을 사람으로 대우해 주지 않으면서 신하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이야기를 신의 몸에 가하였습니다. 신이 곧장 스스로 죽어 없어져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필부(匹夫)처럼 고지식한 행동을 하여 성상의 지극히 인자하신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일도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은인 자중하며 구차하게 살면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만, 또한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천문(天門)에 들어가 천안(天顔)을 뵐 수 있겠습니까. 신이 끝내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고 이제 멀리 이별하게 된 마당에 돌아보니 눈물만 나올 뿐 더 이상 진달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비망기를 내려 혼전(魂殿)·국장(國葬)·산릉(山陵)의 3도감(都監)에 상격(賞格)을 시행하였다. 총호사 좌의정 심지원에게 안구마 1필을 하사하고, 제조 병조 판서 정치화, 공조 판서 김남중, 익흥군(益興君) 홍중보(洪重普), 호조 판서 허적, 예조 판서 윤강, 판윤 이시방, 도청(都廳) 수찬  조윤석(趙胤錫), 금성 현감(錦城縣監) 이만영(李晩榮)·부사직 정만화(鄭萬和), 사복 정 홍처윤(洪處尹), 사인 이경휘(李慶徽),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 이조 판서 송시열, 서사관(書寫官)  【시책(諡冊)의 서사도 겸하였다.】  참찬 송준길, 시책 제술관(諡冊製述官) 행 부호군 조경(趙絅), 애책 제술관(哀冊製述官) 이조 참판 이일상(李一相), 서사관 좌윤 신익전(申翊全), 보전문(寶篆文) 서사관 우승지 김수항(金壽恒), 우주 제주관(虞主題主官) 좌참찬 오준(吳竣)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여러 집사(執事) 및 초상(初喪) 때의 집사자들에게 모두 차등 있게 논상하였다. 봉릉관(封陵官) 집의 이유태(李惟泰)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자격상 준직(准職)이 아니라서 통정(通政)에 오르지 못하자 상이 특별히 제수하였다.

 

경기·관동(關東)·호서(湖西)·호남(湖南) 지역에서 거두는 대동미(大同米)를 차등 있게 감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4도(道)가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2일 무술

정원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명을 받들고 송시열을 뒤쫓아 갔는데 벌써 광주(廣州)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의 서계(書啓)의 조어(措語)를 보고 놀랍고 괴이한 심정을 가눌 수 없어 ‘차마 듣지 못할 이야기’라고 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말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두 번 세 번 자꾸 청하자 그 때에야 말하기를 ‘《춘추(春秋)》에서 말하는 무장(無將)040)  이요, 한(漢)나라 법으로는 부도(不道)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나를 배척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일단 들은 이상 감히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좌승지 이정영(李正英)이 아뢰기를,
"이 말은 다시 자세하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우승지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이 일의 전모가 끝내 밝혀지지 않으면 범부(凡夫)라 할지라도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을 텐데, 하물며 이 사람의 경우이겠습니까."
하고, 동부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대신에게 물어 조치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시열에게 어찰(御札)을 내려 그가 결연히 돌아가게 된 이유를 묻고 이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유지를 전하게 하였는데, 시열이 대답하기를,
"삼가 듣건대 사람들이 말하기를 ‘시열은 전하를 섬기면서 전일(專一)한 마음이 없다.’고 한다 합니다. 이는 신하로서 극죄(極罪)에 해당되는데 어찌 감히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재차 승지를 보내 수찰(手札)로 가지 말도록 만류하시면서 신이 꼭 떠나려고 하는 이유를 더욱 괴이하게 여기시기에 신이 어쩔 수 없어 승지가 전유할 때에 대략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또 사관을 보내 하문하시니 신이 감히 끝내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할 때 여러 신하들이 서로 경악할 만한 유언 비어의 실상에 대해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이야기를 조작해 낸 사람을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을 경우, 이로 말미암아 현로(賢路)가 막히고 말 것이니, 누가 기꺼이 조정에 서기를 원하겠는가. 나라의 정세가 위태로운 이 때를 당하여 초야의 인사들도 쉴 틈없이 찾아 나서야 할 판인데, 조정에 있던 현인이 이런 일을 당하여 떠나가고 말았으니 어찌 작은 걱정이겠는가."
하였다. 오정위가 아뢰기를,
"밝은 임금께서 위에 계시는데도 간사한 자가 더러운 계책을 내어 이렇듯 현인을 질시하는 흉악하고 간특한 일을 저질렀으니, 앞으로 또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있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대사간 정지화가 아뢰기를,
"그 실상을 조사해 내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집의 이후(李垕)와 함께 시열을 위안시키며 타이르도록 청하였다. 이 때 이유태(李惟泰)도 물러가 버렸으므로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 전유(傳諭)하고 들어오도록 하였다. 상이 정위에게 하문하기를,
"전유하러 간 예관은 들어왔는가?"
하니, 정위가 아뢰기를,
"방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가자(加資)한 일과 그의 형을 경기 고을에 제배(除拜)한 일을 감히 받들 수 없었기 때문에 결연히 내려간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하였다.

 

12월 14일 경자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은 형편없이 신하 노릇을 하여 시끄럽게도 떠들썩한 말들이 나오게 하였습니다. 이에 경황 없이 서울을 떠나 오느라 감히 전하께 작별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세 차례나 근시(近侍)를 보내어 도로 들어오도록 타이르셨는가 하면 ‘직접 찾아가 만나겠다.’는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어찌 신하가 들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낭패스러운 심정으로 숨이 차고 땀이 나면서 그럴수록 감히 잠시라도 머물 수가 없게 되었는데, 이미 멀리 천문(天門)을 떠나 와 애처롭게 사모하는 마음만 깊어질 뿐입니다. 보잘것없는 신의 속마음을 성상께서는 혹 이미 잘 이해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어 직명(職名)을 교체해 줄 것과 새로운 자급(資級)을 환수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떠나는 것을 끝내 만류하지 못했으므로 깊은 밤에 조용히 생각해 보아도 자나 깨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하루 내내 근심하며 탄식하느라 밥 먹는 것조차 잊어 버렸다. 나의 정황이 이러하니, 차라리 세상에서 도망쳐 이런 간교한 무리들이 암암리에 나라를 좀먹을 궁리를 하는 정상을 보지 않게 되었으면 더 좋겠다. 그러나 경이야 이치로 볼 때 개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은 깊이 생각해 마음을 고쳐 마지막까지 나를 버리지 말라. 이것이 나의 지극한 소원이다. 태복(太僕)의 직임에 대해서는 억지로나마 경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2월 15일 신축

새벽에 토성(土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집의 이후(李垕)가 상소하여 연 소왕(燕昭王)이 악의(樂毅)를 대우한 것과 한 광무(漢光武)가 풍이(馮異)를 대접한 일을 인용하면서 급히 사관(史官)을 중로(中路)에 보내 송시열의 마음을 위로해 풀어 주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선묘(宣廟)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연중(筵中)에서 진언하기를 ‘예로부터 인군이 처음 정사를 시행할 때는 맑고 밝아 정인(正人)이 등용되므로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바른 말을 하고 잘못이 있으면 곧장 말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인주(人主)가 마음속으로 염증을 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뒤에는 간사한 사람들이 틈을 타고 아첨하여 비위를 맞추는 법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어제 탑전에서 앞으로의 일이 매우 염려된다고 진달드린 뜻도 실로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소한 내용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므로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미 사관을 보내 잘 헤아려 조처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12월 16일 임인

밤에 연기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기운이 성안에 가득 찼다가 한참 뒤에 흩어졌다.

 

12월 17일 계묘

이응시를 예조 참판으로, 이익(李翊)을 교리로, 심유행(沈儒行)을 부수찬으로, 오두인(吳斗寅)을 헌납으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이경석(李景奭)을 내의 도제조(內醫都提調)로, 홍명하(洪命夏)·이응시·김수항(金壽恒)을 승문 제조(承文提調)로 삼았다.

 

주서 권두추(權斗樞)가 아뢰었다.
"신이 송시열을 죽산(竹山) 읍내까지 뒤쫓아 가서 상소에 대한 비답을 전유(傳諭)하였더니, 시열이 말하기를 ‘범연히 붙여 진달할 수가 없으니 다시 소장으로 진달드리겠다.’ 하고 그대로 내려갔습니다."

 

밤에 어제 밤처럼 기운이 성안에 꽉 찼다가 삼경(三更)에야 흩어졌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불행히도 근거 없는 말이 유신(儒臣)에게 마구 가해져 끝내 그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게끔 만들었으니, 이 점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기운이 위축됩니다. 그러나 상께서 잇따라 간절한 분부를 내리시어 반드시 초치하겠다는 정성을 보이신다면, 시열이 출사(出仕)하지 않았을 때와는 그 진퇴(進退)가 다른 만큼 어찌 차마 갈증에 물을 찾는 듯하는 우리 성상의 정성을 저버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보잘것없기는 하나 감히 뼈에 새겨 정성을 다하지 않겠는가. 기필코 마음을 바꿔 올라오도록 한 뒤에 그만두도록 하겠다."
하였다.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서울을 떠난 지 6일 만에야 겨우 죽산(竹山)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는 병든 몸이 피곤에 지쳐 노정을 감당하지 못해서였을 뿐만이 아니라 마음속이 텅 빈 듯하고 허전하여 차마 빨리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비방을 받은 신하가 어찌 한 둘이겠습니까마는 신처럼 참혹하게 당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애처롭게 여겨 용서해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융숭하게 예우해 주시는 것이 갈수록 더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근시(近侍)를 보내시어 성비(聖批)를 뒤따라 선포하게 하셨는데, 종이 가득 쓰인 사의(辭意)가 어느 것 하나 귀신을 울리고 감동시키지 않을 것이 없었으므로, 보잘것없는 미천한 신으로서는 더욱 마음을 잡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신의 직명이 아직도 다 체직되지 않았습니다. 숭반(崇班)의 높은 작위는 죄과로 얼룩진 신의 종적에는 매우 어긋난 것이고, 또 덕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할 국가의 명기(名器)를 오래도록 황야 속에 내던져 둘 수는 없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모두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이치로 볼 때 꼭 체직될 필요가 없는데 왜 이다지도 굳이 사양하는가. 조용히 마음을 고쳐 잡고 나의 지극한 소망을 잊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9일 을사

성이성(成以性)을 집의로, 이연년(李延年)을 부응교로, 민응형(閔應亨)을 공조 판서로, 윤강을 판돈녕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병조 참지로 삼고, 특지(特旨)로 권시를 발탁하여 우윤으로 삼았다.

 

상이 이판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들어 재변이 없는 날이 없고 조정 역시 조용하지가 못하다. 그래도 과인이 믿었던 사람은 좌참찬인데, 하루아침에 뜬소문 때문에 훌쩍 돌아가고 말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끼리끼리 모여서 지껄이며 근거도 없고 형적도 없는 말을 지어낸 것들은 입에 담아서도 안 되는데, 하물며 군상(君上)이 듣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도 위에서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문하셨기 때문에 감히 숨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상께서 덕을 잃은 일이 없으신데 재변이 이와 같으니, 어떤 화기(禍機)가 잠복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성상께서는 더욱더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실덕(實德)을 닦으소서. 옛날에도 ‘그 상(象)만 나타났지 응(應)은 없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어영 대장(御營大將) 유혁연(柳赫然)이 뒤따라 입시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송시열이 물러나 돌아간 것이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할 일입니다. 선왕 10년에 정성스럽게 초치하니 올라와서 국가의 정무를 담당하였는데, 일 처리가 강직하여 조정에서 그를 능가하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런 뜻밖의 말을 듣게 된 나머지 갑자기 결심하고 돌아가게 되었는데, 반드시 이 사람을 돌아오게 한 뒤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환(召還)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될 듯하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유언(流言)이 아무 형적도 없다는 것은 삼척 동자도 압니다만, 세도(世道)가 한심할 따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한심하다 뿐이겠는가. 앞으로의 일이 정말 우려된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상께서 이와 같이 통촉하고 계시니 다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세도를 만회하는 것은 오직 군상(君上)의 덕화가 널리 행해지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옛말에 ‘하루를 공경하게 하면 하루의 효과가 있고 한 달을 공경하게 하면 한 달의 효과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런 식으로 조금도 끊어짐이 없이 공력을 쌓아 나가소서."
하였다.
이에 앞서 홍이룡(洪以龍)이라는 자가 상소하면서 전조(銓曹)를 침해하는 말을 하였으므로 준길이 이 때문에 사직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승지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홍이룡의 소를 아직도 내리시지 않았는데, 외부의 의논이 혹 이 때문에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비방을 허용하는 게시판을 세운 적도 있었습니다만, 사람이 어떻게 일마다 모두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발인(發靷)할 때 외방에서 와서 참석한 사부(士夫)들을 본조에서 명을 받고 초계(抄啓)했었는데, 이 사람이 상소하면서 영남인이 누락되었다는 이유로 전조를 침해하였습니다. 전조의 행동이 중외(中外)의 인심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면 어찌 이런 말이 나왔겠습니까. 이는 신이 오래도록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인데, 송시열이 당한 일이야말로 신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어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준길이 또 물러가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고, 백년이 아뢰기를,
"유현(儒賢)이 조정에 있는 것은 호랑이나 표범이 산에 있는 것과 같은 형세인데, 어떻게 물러가는 것을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홍이룡이 정소(呈疏)할 때 정원에서 불러 물어 보니, 영남 사람과 함께 상의해서 한 것이라고 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이와 같은데, 상소하면서는 영남 사람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면 되겠는가."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이는 필시 남의 사주를 받고 한 일로서 그 죄가 가증스럽습니다만, 만약 심각하게 다스리기라도 한다면 언로에 해가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사람은 서울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백년이 아뢰기를,
"그는 북도(北道) 사람으로서 말[馬]을 바치고 승자(陞資)된 자입니다. 법대로 쇄환시킨 뒤 서울에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초계(抄啓)한 인사 가운데 이상(李翔)과 송기후(宋基厚)에 대해서는 관직을 제수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당시 해당되는 직책에 빈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송서(送西)하여 군직(軍職)에 붙였었습니다. 기후는 벌써 하향(下鄕)했습니다만 이상은 현재 서울에 있으니 때때로 경연에 입시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고, 백년이 아뢰기를,
"이 사람들은 일찍이 자의(諮議)를 거쳤는데, 참하(參下)에는 합당한 직책이 없으니, 6품으로 승진시켜 직책을 제수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백년이 또 아뢰기를,
"노인과 오갈 데 없는 외로운 사람들을 너그럽게 보살펴 주는 일이야말로 왕정(王政)에서 급선무로 삼아야 할 일로서 선조(先朝) 때에 이미 시행한 규례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충효인·절의인(節義人)·전망인(戰亡人)·청백리(淸白吏)의 자손들에게까지도 세시(歲時)에 식물(食物)을 내려 주었고, 1백 세나 90세가 된 노인들에게는 또한 의자(衣資)와 찬물(饌物)을 지급하였습니다.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고, 또 80세 이상 된 노인들에게도 모두 식물(食物)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시백과 준길 등이 또 기민(飢民)을 진구할 대책과 요역을 견감시킬 방도에 대해 논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큰 일에 있지 않습니다. 지난날 특별히 내수사의 면포(綿布) 20동(同)을 내려 군역(軍役)에 보충하게 하자 사람들이 모두 용동(聳動)하였습니다. 또 ‘원도(遠道) 사람이 상언(上言)할 때 격식에 위배되는 일이 있더라도 뽑아 내버리지 말라.’는 분부를 하시자 중외(中外) 백성들의 마음이 또한 모두 감격하여 칭송하였습니다."
하였다. 시백이 또 어영군의 부대 편성에 관한 일을 논하고 유혁연이 진도(陣圖)를 만들어 올렸다. 당시 시백이 어영청 도제조를 겸하고 있었다.

 

12월 20일 병오

정원이 아뢰기를,
"본원이, 소장을 진달한 홍이룡(洪以龍)을 불러들여 다른 소장을 읽어 보게 한 결과 겨우 문자나 해독할 줄 알 뿐 구절을 떼지도 못하였으니, 그는 결코 소장을 지어 올린 자가 아닙니다. 함께 일한 사람에 대해서 힐문하였더니, 영남 사람 여효맹(呂孝孟)에게 미루었는데 효맹은 벌써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허위로 속인 정상이 하나하나 모두 드러났으니, 남의 사주를 받고 무망되게 소장을 올린 정상에 대해 통렬히 징계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잡아 가두고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2일 무신

상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처음에 예조가 이어할 때 상하의 복색(服色) 및 대왕 대비의 여련(輿輦)과 의물(儀物)에 대해 여러 대신 및 송시열·송준길 등에게 물어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은 의논드리기를,
"경모전(敬慕殿)에 행례(行禮)할 때 반드시 최복(衰服)으로 한다면, 이번에 받들어 옮길 때 수가(隨駕)하는 복색도 차이가 없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대왕 대비께서 현재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계시는 만큼 삼년상과는 구별이 되니, 여련과 의물에 검은 색을 써야 하겠습니다."
하고, 송준길은 아뢰기를,
"대왕 대비께서는 선왕에 대해서 실로 모자(母子)와 군신(君臣)의 의리를 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처음에 일단 기년복으로 정했고 보면, 평일의 복색과 의물을 모두 과연 순전히 백색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례의》에 기년복 중의 복색에 대해서 반드시 마련해 둔 것이 있을 것이고 조종조에서도 이미 행한 것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예관이 근거를 상고하여 처리하기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고, 송시열은 아뢰기를,
"대왕 대비께서 안에서는 최마복(衰麻服)을 입으시고 밖에서는 현흑(玄黑)의 복색을 쓰시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인 듯합니다. 대체로 오복(五服)을 당한 사람들이 상차(喪次)에서는 흰색을 위주로 하고 다른 장소에서는 흑색 위주로 하는 것은 후세의 잘못된 습관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압굴(壓屈)해야 할 곳이 항상 많기 때문에 정자(程子)도 말하기를 ‘애통함을 무릅쓰고 상도(常道)를 지키는 것을 금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군(人君)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춘추》의 의리로 볼 때 인군에게는 ‘나간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이는 대체로 아무리 하읍(下邑)이라도 본디 궁궐 안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나라 안 모두가 스스로를 펼 수 있는 지역으로서 왕자(王者)에게는 밖(外)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대왕 대비께서 선왕의 복을 입고 계시는데 변개(變改)하는 여지가 있게 됨을 면치 못한다면 《춘추》의 의리에 위배될 듯싶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시열의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12월 24일 경술

상이 날씨가 춥다고 하여 옷을 헐겁게 입은 군사들에게 솜옷[襦衣]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는데, 모두 1백 10인이었다. 또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을 적간하게 하고 경범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즉위하신 처음부터 백성의 일을 유념하시어 어공(御供)을 견감토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두 분 자전(慈殿)의 경우 외에는 진상(進上)에 관계되는 방물(方物)을 봉진(封進)하는 것을 일체 정지시키도록 하셨으니, 듣고 보는 자로서 그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내년 탄일(誕日)만큼은 절일(節日)과 비교할 성질이 아니니, 향상(享上)하는 도리상 봉진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기근이 들어 백성이 곤궁한데 어찌 탄일이라고 하여 봉진할 수 있겠는가. 봉진하지 못하게 하여 내 마음을 편안케 하라."
하였다.

 

12월 25일 신해

전 판서 조경이 치사(致仕)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심지원이 열일곱 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렇게까지 굳이 사양하니, 본직은 우선 억지로나마 뜻대로 따라 주도록 하겠다."

 

행 대사간 정지화 등이 아뢰기를,
"당상 선전관 이익달(李益達)은 일찍이 전라 좌수사로 있으면서 수군을 조련할 때 제대로 시기를 살펴 선처하지 못한 탓으로 1천 명에 가까운 수군들을 한꺼번에 익사하게 하였으니, 군율(軍律)을 면할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서용(叙用)하라는 명이 내리자마자 바로 본직을 제수하였으므로 물의가 모두 놀라워하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6일 임자

경상도 금산군(金山郡)에 지진이 일어났다. 서쪽에서부터 1만 대의 수레가 달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으며 집이 흔들리고 산 위의 꿩들이 모두 울었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이후선(李厚先)을 장령으로, 조윤석(趙胤錫)을 승지로 삼고, 이인(李𡐔)을 발탁하여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삼고, 임한백(任翰伯)을 교리로, 이유태(李惟泰)를 공조 참의로, 심지원(沈之源)을 영중추부사로, 원두표(元斗杓)를 판중추부사로, 이동현(李東顯)을 전남 좌수사로 삼았다.

 

사복시 첨정 유정(柳頲)이 상언(上言)하기를,
"계후자(繼後子)가 몹쓸 병에 걸려 일을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계후를 취소하여 시양자(侍養子)로 해 주고, 당형(堂兄)인 진천군(晋川君) 유구(柳䪷)의 아들을 다시 계후자로 삼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허락해 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상이 파격적으로 특별히 시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유구가 소장을 진달하여 당초 아들을 유정에게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우승지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친족 중에서도 부자(父子) 관계야말로 큰 인륜(人倫)에 해당됩니다. 일단 계후하였으면 자기 아들과 마찬가지인데, 만약 자꾸 계속해서 옮겨 바꾸도록 한다면 큰 인륜이 정해질 때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계후자를 도로 취소하는 것에 대해서는 본래부터 법문(法文)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입후조(立後條)에 이른바 ‘양가(兩家)의 아비가 함께 명하여 입후하도록 한다.’고 한 것도 모두 인륜을 중히 여기고 뒷날의 폐단을 염려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번에 유정이 계후자를 취소하기를 청한 것은 법례(法例)에 위배될 뿐만이 아닌데, 심지어 유구가 허락하지도 않은 아들을 자기 멋대로 정하여 입후하겠다고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해조가 법에 의거하여 막은 것이야말로 바꿀 수 없는 정론인데, 이렇듯 ‘파격적으로 특별히 시행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부자 간의 인륜은 관계되는 점이 작지 않은 만큼, 한때 파격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해조가 복계(覆啓)한 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다만 그 정상이 애처로워 허락했을 뿐인데, 그대의 말이 합법적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헌부가 뒤미처 유정을 논하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7일 계축

조귀석(趙龜錫)을 사인으로, 목겸선(睦兼善)을 부수찬으로, 성이성(成以性)을 부교리로, 권격(權格)을 정언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집의로, 이단상(李端相)을 부응교로 삼았다.

 

예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또 진달하기를,
"빈접사(儐接使)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양서 지방에 든 기황(飢荒)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관향(管餉)의 모곡(耗穀)을 덜어 관서 지방의 유민들을 진휼하소서. 또 해서 지방에서 세금으로 내는 5두(斗)의 미곡을 견감하고 본도의 공곡(公穀)으로 대신 경창(京倉)에 수송케 했다가 추수 때에 바치도록 하여 그 곡식을 갚도록 하소서."
하고, 끝 부분에 진달하기를,
"송시열이 유언(流言) 때문에 서울을 떠났는데, 성상께서 지성으로 권하며 만류하셨어도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으니, 중외(中外)에서 놀라워하고 의아해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시열이 물러갈 때 신은 아직 조정에 돌아오기 전이었는데, 요즘 자못 전하는 이야기들을 들어 보건대, 시열이 궁중에까지 불측한 말이 흘러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고 황급한 심정에서 결연히 물러갔다고 하였습니다.
유언이 과연 궁중에까지 들어갔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아실 일이겠습니다만,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 텐데도 중간에서 지어 내어 서로들 퍼뜨리고 떠드는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흉악한 인간들이 유현(儒賢)을 몰아내고 진신(搢紳)들에게 화를 끼칠 계책을 하는 것이 분명한 것인 동시에, 심지어 성상께서도 무함을 받고 계시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성지(聖旨)를 분명히 내려 허실을 환히 밝히시고, 정성에서 우러나오는 예(禮)를 더욱 돈독히 하시어 기필코 소환하도록 하신다면, 간악한 음모를 좌절시키고 조정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서로(西路) 백성의 일에 대해서 경이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끝 부분에 언급한 일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니 직접 만나 의논하겠다."
하였다.

 

12월 28일 갑인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가 교외로 나가서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일 좌참찬 송시열이 떠나가자 같이 조정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서운해 하였습니다. 그 뒤 시열이 서계(書啓)로 진달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모두들 놀라워 하였는데, 좋지 못한 인물이 중간에서 이런 설을 지어 내어 조정을 어지럽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삼가 사대부들 간에 서로 전하는 말을 듣건대, 시열의 이른바 차마 듣지 못할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곧 신이 들어가 전하에게 참소한 말이라는 것이었고, 이어 말들하기를 ‘이 말이 대궐 안에 자자하게 퍼져 어떤 사람이 이를 시열에게 전하자 시열이 이 때문에 소장을 올리고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경악을 금치 못한 나머지 곧장 목을 찔러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설사 신이 조금이라도 참소하는 말을 했다고 가정해도, 그 일은 전하만이 알고 계실 뿐 다른 사람은 참여하여 들을 수 없는 것일 텐데, 또 어떤 연유로 대궐 안에 자자하게 퍼진단 말입니까. 신은 지금 세상으로부터 현인을 참소했다는 이름을 얻고 있으니, 신을 파직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죄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간사한 인물이 망극한 말을 지어 내자 좌참찬이 이 때문에 결연히 돌아가기까지 하였는데, 나의 마음속을 쪼개어 보여 줄 수도 없는 처지라서 요즈음 울적하고 안타깝기만 하여 그저 세상을 도망쳐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그런데 경이 또 어찌하여 유언(流言)에 동요되어 이렇게 소장을 진달하는 일을 한단 말인가. 경이 이런 말을 했다고 지목하는 것도 간사한 인물이 떠넘기려고 하는 계책이다. 경이 아무리 마음이 편치 못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소장을 진달하여 마치 다투어 변론하는 것처럼 해야만 하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들어오라."
하였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우상 정유성, 예판 홍명하, 호판 허적을 인견하였다. 상이 명하에게 이르기를,
"어제 경이 상차한 내용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잇따라 홍득기의 소장을 보고는 더욱 놀라움과 괴이함을 금치 못하였다. 과연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말한 자가 있다면 언근(言根)을 알 수 있을 텐데, 물어볼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만약 언근의 출처를 따진다면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되지 못할 듯하니, 분명히 성지(聖旨)를 내려 그 무함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유성이 아뢰기를,
"승지로 하여금 대신 말하게 하되, 글을 작성할 때 가능한 한 간절하게 하여 특이한 은전을 보이도록 하면, 유언(流言)이 저절로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이야기는 필시 미천한 자가 지어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부마(駙馬)가 들어가 참소했다고 지목해 말하는 것도 그 말의 단서를 엄폐할 목적으로 거꾸로 그런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번의 뜬소문은 성상의 입장에서도 무함을 받으신 것이 많으니, 다시 더 돈독하게 유시(諭示)하시어 기필코 올라오도록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하유해서 올라오게 할 수만 있다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허적이 함경 감사가 공물(貢物)을 견감해 주기를 청한 장계(狀啓)를 가지고 조목별로 품정(稟定)하니, 상이 대신과 논란하여 각양 물종(物種)을 임시로 1년 동안 감해 주고 단천(端川)의 세은(稅銀) 1천 냥은 영구히 감면해 주도록 하였다. 또 명하가 상차하면서 진달한 바 양서(兩西) 지방을 진대(賑貸)할 일을 가지고 모두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공조 판서 민응형(閔應亨)도 이날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였는데, 아뢰기를,
"올해의 기근 현상은 예전에 없던 일인데, 이는 병자년 이후 청나라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는 관계로 공안(貢案) 외에 또 과외(科外)의 징수 행위가 있었고 공안 상으로 헤아려 감해 준 바가 없었기 때문에 하늘의 노여움과 백성의 원망이 점점 축적되어 이와 같은 재앙을 불러일으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훈국(訓局)의 정규군이 지나치게 많아 도성 안의 민력(民力)이 거의 대부분 여기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군사는 처음에 3천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가액(加額)한 숫자가 지금은 6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호조의 1년 경비가 12만 석(石)인데 그중에서 군향(軍餉)으로 들어가는 것이 8만 석입니다. 옛날에는 3년 농사를 짓고 나면 1년의 식량이 남고 9년 농사를 지으면 3년 동안 식량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堯) 임금이나 탕(湯) 임금 때에 홍수와 가뭄의 재해를 당했어도 나라에 먹지 못하는 백성이 없었던 것은 축적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향을 제하고 나면 호조의 경비가 4만 석밖에 안 되는데, 급재(給災)를 하면 또 이 숫자에도 차지 않으니, 무슨 축적이 있다고 굶주린 백성을 보살펴 구제하겠습니까.
이런 이상 보살펴 구하는 방책은 다른 데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각사(各司) 공물(貢物)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헤아려 재감해야 마땅한데, 공상지(供上紙) 같은 것은 더욱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 특별히 바치지 말도록 허락해야 할 것이며, 어공(御供)하는 말린 숭어[乾季魚]의 척촌(尺寸)도 재감해야 할 것입니다. 각도 주군(州郡)에 군기(軍器)를 비치하도록 달마다 부과하는 것을 우선 모두 정파(停罷)시킬 경우 그 가미(價米)를 남겨 저축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규군에 대해서는 물고(物故)나 노약(老弱) 대신에 다시 인원을 보충하지 말고 지난해 더 뽑았던 7백 명을 모두 해산시켜 돌려보낸다면, 그만큼 절약된 군량으로 또한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수 있을 것인데, 어영군이 감소된 훈국 병사 숫자를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을 테니 군정(軍政)도 소루하게 되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럭저럭 전철을 답습하기만 하고 재성(裁省)해 주지 않는다면, 내년에도 기근이 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고 나라의 형세도 더욱 위태롭게 되고 위축되고 말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그 나라 스스로 해친 뒤에야 다른 나라가 해치는 법이다.’ 하였는데, 지금 이 너무 많은 정규군들이야말로 스스로를 해치는 것 가운데 큰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분 자전(慈殿)의 공상지는 감할 수 없겠지만, 내가 쓰는 것은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응형이 또 아뢰기를,
"호남(湖南)에 대동법을 실시하라고 선조(先朝) 때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내년 봄에는 실시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내년 가을에 거행하라고 이미 행회(行會)하였으니, 지금 와서 또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응형이 또 외방의 군정(軍政)이 해이해지고 피폐된 문제점을 진달하고, 이어 아뢰기를,
"군정 중에도 주사(舟師)가 더욱 긴요한데, 통제사 김적(金逷)은 연로하고 병이 많습니다. 이회(李襘)가 청백하고 재지(才智)가 많으니 그를 장수로 차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금년 봄에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주사도 아울러 살피게 했는데 어사가 미리 앞질러 돌아왔으니, 다시 차견(差遣)해야 하겠습니다.
옛날 주 성왕(周成王)은 대풍(大風)의 재해를 만났으나 금등(金縢)의 글을 부여잡고 울기까지 함으로써 끝내 대도(大道)의 정치를 이룩하였고, 주 선왕(周宣王)은 가뭄의 재해를 만났으나 겸허한 마음으로 수행(修行)하여 또한 중흥의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난 재해는 대풍이나 가뭄에 비길 바가 아니니, 몸을 단속하고 일을 바르게 하는 데 있어서 하지 않는 바가 없으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이 진달드린 몇 가지 조목은 모두 긴요하고 급한 일인데, 전하께서는 그저 공상지(供上紙)를 감하라고만 하시니, 자못 채택하여 쓰시는 실상이 없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일들도 내가 이미 자세히 들었으니 서서히 줄이도록 하겠다."
하였다. 응형이 아뢰기를,
"수재(水災)는 음(陰)의 기운에 말미암은 것으로서 병란(兵亂)의 상징입니다. 계해년에 큰물이 졌는데 갑자년에 변이 발생했고, 을해년에 큰물이 졌는데 병자년에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금년의 수재는 흉작으로 농사를 망치게 했을 뿐만이 아닌데, 뜻밖의 근심에 대해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 성공(魯成公) 1년에 얼음이 얼지 않았는데, 전(傳)에 이르기를 ‘얼음이 얼지 않은 것은 더운 기운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정사(政事)가 느슨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의 상징입니다. 음(陰)으로 꽉 막혀 꽁꽁 얼어붙어야 할 이 때를 당하여 대낮에 안개로 뒤덮이는 현상이 한 달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정치에 해이한 점이 없지 않아 그런 것인 듯싶습니다."
하고, 유성이 아뢰기를,
"지난번의 대풍(大風)으로 남산(南山)의 소나무가 많이 부러졌는데, 이 역시 보통 변고가 아닙니다."
하였다. 응형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천문서(天文書)를 상고하건대 ‘이쪽에서 정치가 잘못되면 저쪽에서 변이 발생한다.’ 하였습니다. 밝은 임금이 이를 보고 깨달아 허물을 고치고 하늘에 사죄를 드리면 화가 없어지고 복이 이르지만, 이와 반대로 하면 복이 없어지고 화가 이르는 법입니다. 한(漢)나라 문제(文帝)나 송(宋)나라의 태종(太宗)과 진종(眞宗)은 홍수나 가뭄의 재해를 만나면 꼭 신하들에게 물어 재해를 해소시킬 방책을 극진히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재해를 만났을 때 반드시 허물을 생각하고 더욱 극진히 자신을 닦고 반성한다면 전화 위복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잘 다스린 임금은 모두 검약을 숭상한 데 반해 혼란스럽게 만든 임금은 모두 사치를 숭상하였습니다. 《논어(論語)》에 ‘쓰는 것을 절약해서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였는데, 반드시 검약을 숭상한 뒤에야 쓰는 것을 절약할 수 있고, 쓰는 것을 절약한 뒤에야 백성을 사랑할 수 있는 법입니다. 선유(先儒)가 송 인종(宋仁宗)의 검덕(儉德)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41년 동안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다.’ 하였는데, 이 또한 전하께서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신은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고 지극한 소원을 이미 다 아뢰었는데, 평소에 귀가 잘 들리 않는 데다가 나이도 80이 넘어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지가 벌써 8년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헛되이 직명(職名)을 갖고 있을 수 없으니, 원하건대 신의 말은 써 주시고 신의 직책은 교체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조는 한직(閑職)이다. 노신(老臣)이 조정에 있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인데, 체직하지 않고 그 말을 쓴다면 또한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12월 29일 을묘

이에 앞서 중사(中使) 윤완(尹完)이 공조 참판 이시매(李時楳)를 수리소(修理所)에서 만났는데, 시매가 그에 대해 예(禮)를 표하지 않자 윤완이 이에 노여움을 품고는 진배(進排)를 지체시켰다는 이유로 공조의 이속(吏屬)에게 장(杖)을 가하였으므로, 지평 민광소 등이 윤완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 뒤 상이 시매가 중관(中官)을 멸시한 것도 잘못인데 대간이 그를 아울러 탄핵하지 않은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 하고 이어 시매의 파직을 명하였다. 승지 김수항(金壽恒) 등이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내관(內官)의 파직을 논한 것은 방자하게 구는 습관을 바로잡으려 한 것입니다. 어찌 사주를 받고 시매를 위하려 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성상의 분부는 억지에 가까우니 자못 대각(臺閣)을 너그럽게 용납하는 도리가 못 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군명(君命)을 멸시한 사람을 변호하면서 임금이 억지부린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이어 어떤 승지가 먼저 이런 뜻을 내어 이와 같은 계사(啓辭)를 작성했는지 하문하였다. 수항 등이 대답하기를,
"네 사람이 같이 청사에서 회합을 가지고 합사(合辭)로 초안을 작성했을 뿐 처음부터 먼저 뜻을 낸 사람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어찌 이다지도 참되지 못한가. 먼저 말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텐데 어찌하여 바르게 대답하지 않는가. 정말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수항 등이 세 번째 아뢰어 대죄하고 또 물러 나가 소장을 진달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고 유시하였다. 광소 등도 인피하고 물러 나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이어 패소(牌召)에도 응하지 않자 상하가 자못 의심하여 멀리하였다. 그러다가 이 때에 이르러 상의 마음이 비로소 풀어졌는데, 부제학 유계, 응교 이시술(李時術), 교리 김만기(金萬基), 수찬 심유행(沈儒行) 등이 청대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소회(所懷)를 물어 아뢰게 하였다. 유계 등이 아뢰기를,
"이시매를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일로 엄한 분부가 거듭 내려졌는데 사기(辭氣)에 크게 화평함을 잃으셨으므로 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조정의 예법은 매우 엄하니, 사대부가 중관에 대해서 그가 직접 전명(傳命)을 받든 자가 아니면 서로 접하는 예가 없는 법입니다. 시매가 그에 대해 예모를 취하지 않은 의도가 혹 여기에 있었을 법도 한데, 대신(臺臣)이 시매를 아울러 논핵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설령 시매와 대신 모두에게 미진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먼저 시매에게 추함(推緘)을 발하여 실상을 알아낸 뒤에 헤아려 처치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임금의 명을 멸시한 죄를 준다면 아랫사람들의 심정이 석연하지 못할 것은 물론 앞으로 내시(內侍)들이 방자하게 구는 습관을 조장해 주기에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각의 체면으로 말하면 매우 중한 것인데 어떤 기력(氣力)이 있는 자가 감히 사주하려는 마음을 낼 것이며, 또 대신이 된 자로서 그 누가 또한 남의 사주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겠습니까. 따라서 이는 정말 실정 밖의 죄를 가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원은 근밀한 자리에서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만큼 일에 따라 진달하는 것이야말로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어찌 시매의 입장을 변호해 주려 한 것이겠습니까. 전후에 걸쳐 비답을 내리신 것이 갈수록 미안하기만 한데, 전하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펴 보시면 반드시 마음이 풀리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화평하게 속마음을 털어 놓고 말한 것이야말로 성심(誠心)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옥당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이시매는 파직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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