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권, 현종 1년 1660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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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정사

예조가 아뢰기를,
"공조 판서 민응형(閔應亨)이 아뢴 바에 따라 공상지(供上紙)를 헤아려 감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이는 백성을 보살펴 폐단을 제거해 주려는 것인 만큼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용동(聳動)되고 있습니다만, 일상의 용도에 부족하게 되면 또한 일이 구차하게 될 듯싶으니, 삭봉(朔封) 30권(卷) 가운데 5권만 감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5권은 너무 적으니 우선 7권을 감하도록 하라."
하고, 또 중전(中殿)에 올리는 삭봉 3권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지평 민광소·여성제가 소명을 받고도 나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3일 기미

영의정 정태화가 첫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행 대사헌 김남중 등이 아뢰기를,
"통제사(統制使) 김적(金逷)은 연로한 데다 풍증(風症)까지 있어서 근무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많이 있으니, 파직하소서. 몇 년 전 면천 군수(沔川郡守) 윤제(尹璾)가 죽어 상을 치를 때에 어떤 완악한 백성 하나가 옷을 벗은 채 알몸으로 일행을 매도하며 모욕을 가하였고, 또 지난해 군수 황덕유(黃德柔)의 상 때에도 이런 변을 당하였는데 패거리들이 결탁하여 말썽을 피우면서 경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난민(亂民)들을 그냥 놔두고 다스리지 않으면 앞으로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본도 감사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여 계문하게 한 뒤 처치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경기와 해서(海西)의 죄인 가운데 사면령을 통해 석방된 자가 몇 사람밖에 안 되니 겉치레로 끝나 버릴 듯하다. 품질(稟秩) 및 잉배(仍配)된 자 중에서 그 죄명이 용서할 만한 자를 헤아려 다시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

 

나이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세찬(歲饌)과 의자(衣資)를 하사하였는데, 승지 강백년(姜栢年)의 청을 따른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감시(監試) 때 거자(擧子)를 대상으로 조흘(照訖)하는 법을 다시 밝히고 자문지(咨文紙)의 사용을 금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승지 조형(趙珩) 등으로 하여금 송시열에게 보내는 유지를 대신 초안하게 하고, 가주서 김석지(金錫之)를 보내 시열에게 전유하기를,
"경이 조정을 떠난 뒤로 내 마음이 허전하여 밥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고 누워도 잠자리가 편안치 못하니 좌우 수족을 잃어버린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아, 그동안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이 말한 차마 듣지 못할 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간악하고 흉특한 자가 유언 비어를 조작해 내어 경을 축출할 계획을 한 그 정상에 대해서는 내가 참으로 환히 알고 있다.
지금 그동안의 유언 비어를 들어 보건대, 심지어 부마(駙馬)가 들어와 참소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경이 결연히 떠나가게 된 것도 오로지 이 때문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나의 심정에 대해서는 이미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에서 모두 밝혔다.
예로부터 충현(忠賢)이 무함을 당한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 모두가 위와 아래가 서로 막혀 정의(情義)가 미덥지 못한 데 기인한 것으로서 이에 참소하는 말이 틈을 타고 일어나 끝내는 진퇴 양난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으므로 내가 일찍이 전대(前代)에 대해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와 경의 관계는 속마음을 서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참소하는 자가 많아도 나의 털끝 하나 움직이기에도 부족하다 할 것이다.
경은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으로서 세상의 모범이다. 그래서 선왕께서 심복(心腹)으로 의지하셨고 나 소자(小子)를 경에게 맡겨 주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경을 의지하는 것이 어떻다 할 것이며, 경의 책임이 또 어떻다 하겠는가. 봄날의 기온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고 예전에 앓던 병도 쾌유되었을 것이니, 속히 조정에 돌아와 간사한 말을 깨뜨리도록 하라."
하였는데, 석지가 돌아와 시열이 대답한 말을 아뢰었다. 시열이 대답하기를,
"신은 지난해 병석에 누워 있다가 졸지에 떠들썩한 말이 한번 일어나는 것을 듣고는 속마음이 온통 타는 듯하여 엉겁결에 내려왔는데, 실제로 원기(冤氣)가 지탱해 주고 심화(心火)가 발동된 덕분으로 오는 도중에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서 길게 침석(枕席)에 누워 이따금 한 번씩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은 죄가 산처럼 쌓여 그저 갑자기 죽어 버려 아무 것도 모르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성상의 돌보아 주심이 갈수록 융숭해져 윤음(綸音)이 멀리까지 내려왔으므로 신은 정말 감격하여 쏟아 붓듯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언(流言)에 관한 성상의 유시(諭示)는 더욱 황감(惶感)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데, 이는 신이 신하 노릇을 형편없이 한 결과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신이 스스로를 꾸짖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만큼, 감히 남을 탓할 마음은 가지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동시에 참소한 자의 말이 혹시라도 성상 앞에 들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감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머물러 있지 못하고 꼭 돌아와야만 했던 데에는 대개 이유가 있습니다. 승모(勝母)라는 고을 이름을 보고 증자(曾子)는 그 고을에 들어가지 않았고, 조가(朝歌)라는 이름의 고을 앞에서 묵자(墨子)는 수레를 돌렸습니다. 인신(人臣)으로서 이미 그와 같은 이름을 얻은 이상 또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군부(君父)를 섬기겠습니까.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소장에 대해서는 신이 보지 못했으니 감히 함부로 진달드릴 성격이 아니고 또 그와 더불어 서로 따지고 싶지도 않으며, 또 많은 사람들까지 함께 누를 끼치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신은 그저 신의 몸에 있는 죄만을 스스로 드러내고 싶을 뿐입니다. 이번에 성상께서 신에게 올라오도록 유시하셨는데, 죽음을 참고 올라가 궐하(闕下)에서 한번 사죄드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보잘것없는 신의 병세가 앞에서 진달드린 바와 같으므로 단지 스스로 눈물만 떨굴 뿐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1월 6일 임술

정익을 우부승지로, 이유태(李惟泰)를 동부승지로, 안후열(安後說)을 부교리로, 이시함(李時馠)·김만기(金萬基)를 지평으로, 이여발(李汝發)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내의원 도제조 이경석(李景奭)이 들어와 진찰하는 기회를 인하여 진달하기를,
"자전(慈殿)의 증후(症候)가 아직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여태 복선(復膳)하지 않고 계시니 안타깝고 걱정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해마다 크게 흉년이 들어 백성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 호조와 병조 각사에 비축된 것을 아끼지 말고 써서 백성의 급한 상황을 구한다면, 죽어 넘어져 나뒹구는 환란을 그런대로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북로(北路)는 공부(貢賦)를 크게 견감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또 듣건대 단천(端川)의 은광(銀壙)이 이미 다 채굴되었는데도 아직 수납하지 못한 은이 무려 4천여 냥에 이르는데, 단지 1천 냥만 견감받았다고 하니, 3천 냥을 앞으로 어떻게 마련해 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4천 냥 모두 탕척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경석이 또 흉년에는 말에게 곡식을 먹이지 않는 의리에 대해서 진달하고, 인조조의 고사에 의거하여 태복시의 마필(馬匹)을 줄이도록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필의 숫자를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경석이 또 송시열과 이유태 등에게 세시(歲時)에 문안하고 음식을 보내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1월 7일 계해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어제 삼가 듣건대, 상신(相臣)이 공안(貢案)을 개정할 일로 연석(筵席)에서 진달드렸는데, 말하는 과정에서 사소하나마 사실과 다르게 말한 것이 있었기에, 신이 부득불 대략적으로 진달드릴까 합니다.
신이 선조(先朝) 때 공안에 대해서 언급하자 선왕께서 미천한 신을 돌아보시며 이르기를 ‘이 일은 열성조(列聖朝)에서 늘 변통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경이 시험삼아 몇 사람과 함께 개인적으로 서로들 상의하여 고칠 수 있으면 고치고 불가능하면 그냥 놔둬도 무방하다. 오늘날은 인정이 걸핏하면 분분해지니, 이서배(吏胥輩)들이 만약 공안을 장차 고친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시끄럽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편해질 듯싶다. 따라서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먼저 헛소문을 내어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다.’ 하셨습니다.
이에 신이 명지(明旨)를 받들고 나와, 현재 우상(右相)인 신 정유성(鄭維城) 및 연성군(延城君) 신 이시방(李時昉)과 함께 공동으로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이 다시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이는 많은 것을 덜어 적은 것에 보태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 균등하게 해 주려는 것일 뿐이니, 대단하게 견감할 곳은 없을 듯합니다. 다만 그 가운데 어공(御供)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데도 재물을 허비하는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가장 심한 경우를 말씀드린다면, 천하기 짝이 없는 도라지 나물 같은 것이 그 예입니다. 여염의 하천배들도 싫증을 내고 내버리는 물건인데 1년 동안 어공에 쓰느라고 드는 비용이 무려 백미(白米)로 3백 90석(石)이나 됩니다. 또 이시방의 말을 듣건대, 어공을 담당하는 곳에서 그것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기 때문에 호조에서 매년 더 지급해 준다고 합니다.’ 하였더니, 선왕께서 크게 놀라시며 이르기를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이런 종류는 일일이 써서 가지고 오라. 긴요하지 않은 것들은 내가 모조리 감하겠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외방에서 진상하는 물건 가운데 혹 냄새가 좋지 못하다 하여 내버리는 것들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재물을 소비하는 것이 적지 않으니 매우 아까운 일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대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모름지기 명(明)나라의 법을 준용하여 공상(供上)에 관계되는 일체의 물건은 모두 안에서 사서 쓰도록 한 뒤에야 백성들이 그나마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선왕께서 분부하기를 ‘앞으로 시험삼아 조용히 상량(商量)해 보도록 하자.’ 하였는데, 그 뒤 일이 완결되기도 전에 선왕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아, 비통한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상신(相臣)이 말한 바 ‘그 뒤 계달하지 않은 것은 필시 편리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인 듯합니다.
《주역》에 말하기를 ‘궁(窮)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하였는데,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적게 변하면 적은 이익이 있고 크게 변하면 큰 이익이 있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볼 때 백성의 곤궁함과 재물의 고갈됨이 이토록까지 극도에 이르렀는데 팔짱만 끼고 바라만 본 채 끝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선왕께서 당시에 가지셨던 마음과 매우 배치된다 할 것입니다. 신이 직접 덕음(德音)을 받든 것이 늘 귀에 들리는 듯하기에 지금 감히 눈물을 흘리며 진달드렸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양찰하시어 용서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달한 말들은 곧 경이 선조(先朝) 때 명을 받든 일인데, 경이 있지 않다면 아무리 우상과 연성군이 있다 하더라도 장차 그들만으로 어떻게 해나가겠는가. 바라건대 경은 흉측한 말에 동요되지 말고 마음을 바꿔 올라와서 국가의 대사로 하여금 선조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라. 오로지 경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하였다.

 

1월 9일 을축

조위 차왜(吊慰差倭)가 부의(賻儀)를 가져왔는데, 침향(沈香) 3근(斤), 촉(燭) 2백 자루, 세포(細布) 20필, 탁자 1개, 촉대(燭臺) 1개, 화병(花甁) 1개, 향로 1개였다. 역관(譯官)이 부산에서 인솔해 오자 예조가 계청하여 안에 들였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내가 어찌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노고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고 싶지 않겠는가. 최근 들어 좌참찬이 결연히 돌아가 버려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이 때에 또 경마저 체직시킨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억지로 핍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가벼이 체직시킬 수 없다. 그런데 경은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체직만 당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군신 간에는 오로지 정성을 간직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이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펴 목말라 하는 듯한 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1월 10일 병인

대비전(大妃殿)이 상례(喪禮)를 매우 고집스럽게 지켜 질환이 있는데도 권도(權道)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대신(大臣)과 삼사(三司) 및 백관이 며칠에 걸쳐 진달하여 아뢰었으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약방에 하교하였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직접 권하여 마지않으시니 부득이 따르도록 하겠다."

 

이 때 호서(湖西) 지방의 재해로 인해 1결당 1두씩 수미(收米)를 감했는데, 부여(扶餘)와 석성(石城) 두 고을은 더욱 재해를 입었으므로 다시 1두를 더 감하였다. 부여 현감 박유상(朴由常)이 소장을 진달하여 부세(賦稅)를 완전히 감해 주기를 청하자 또 두 고을의 전세(田稅) 미두(米豆)를 1결당 1두씩 감하였다.

 

1월 11일 정묘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태복시의 말 20필을 감하였는데, 이경석(李景奭)의 말을 따른 것이다.

 

서얼(庶孽)을 허통(許通)시킨 뒤에 과거에 응시토록 하는 법을 다시 밝혔다.

 

1월 13일 기사

강원도 진사(進士) 박진해(朴震諧) 등과 평안도 생원(生員) 윤인(尹隣) 등과 함경도 유생 이지담(李之𩡝) 등과 충홍도(忠洪道) 유생 오익삼(吳益三) 등이 서로 잇따라 소장을 진달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상이 제도(諸道) 유생에게 이미 유시하였다고 모두에게 답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이 아뢰기를,
"올해의 기근 현상은 모든 도가 마찬가지입니다만, 강원도가 특히 심합니다. 듣건대 충주(忠州)의 전 목사 원두추(元斗樞)가 관청에 미곡 2천 1백 석을 비축하였고 모조(耗租)도 7천여 석이나 있다 하니, 미곡 1천 석과 모조 3천 석을 관동(關東) 지방으로 옮겨 진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뒤에 운송이 곤란한 관계로 도로 중지하였다.】 유성이 또 아뢰기를,
"두추가 곡물을 많이 비축한 것은 대체로 절약하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니, 격려하고 권면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시상하고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다. 유성이 또 이경석(李景奭)의 차사(箚辭)를 인용하면서 강원도에서 납부한 대동미(大同米) 2천여 석을 그곳에 남겨 두어 본도의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하고 그 대신 각 아문에 비축된 미포(米布)로 그 미곡량을 보상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유성이 또 아뢰기를,
"함경도의 굶주린 백성들이 양서(兩西) 지방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는데, 수령들이 뒷날 쇄환(刷還)하지 못하면 해유(解由)받는 데 구애되는 폐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으니,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진휼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은 도사(都事)로 하여금 주관하면서 검찰하게 하고, 후일 어사를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하도록 하라. 그리고 만약 1명이라도 누락되어 굶어 죽는 경우가 생기면 수령과 도사를 중률(重律)로 다스리도록 하라. 또 함경 감사로 하여금 각 고을의 유민(流民)을 조사하여 사실대로 숫자를 계문토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복양이 상소하여 함경도에서 납부하는 삼(蔘)과 포(布)를 견감토록 청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유성이 반감(半減)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 참판 이응시가 아뢰기를,
"본도 영(營) 내에 비축된 것이 적지 않으니, 이것으로 1년치의 삼과 포를 대납(代納)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5일 신미

영동 지방의 재해 입은 고을에 전삼세(田三稅)001)  와 노비 공포(奴婢貢布)를 차등 있게 감해 주었는데, 이는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로 청한 것을 따른 것이었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나이가 찼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런 일은 행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어찌 오늘날에 와서 꼭 갑자기 시행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세 차례나 상소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두 번이나 사직하다니, 뭐라고 유시해야 할지 모르겠다. 등대(登對)할 때 면유(面諭)하겠다."

 

1월 16일 임신

김수항(金壽恒)을 대사간으로, 성이성(成以性)을 부응교로, 김만기(金萬基)를 교리로, 임한백(任翰伯)을 부수찬으로, 남로성(南老星)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윤강을 판의금부사로, 권시를 동지의금부사로, 박경지(朴敬祉)를 통제사(統制使)로, 이인하(李仁夏)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昉)이 죽었다. 시방은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의 막내 아들로서 정사훈(靖社勳) 이등(二等)에 참록(參錄)되었으며, 외방으로 나가 관찰사를 두루 역임하고 오랫동안 호조 판서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자계(資階)가 1품에 이르러 선혜청과 상평청의 당상(堂上) 및 수어사(守禦使) 등을 겸임하였는데, 절약하여 비축을 많이 하였다. 호서(湖西) 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할 때에 그 일을 전담하였는데, 정성을 다해 계획을 세우고 경영하면서 이 때까지 온갖 심혈을 기울이다가 쓰러져 죽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연성군은 과거에 공을 세운 훈신(勳臣)으로서 이제 갑자기 죽었으니, 내 마음이 참담하게 서글퍼지면서 어떻게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예장(禮葬)토록 하라."

 

유학(幼學) 박승후(朴承後)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좌참찬 송시열이 참소를 당해 서울을 떠났으니, 더욱 성의와 예의를 가하여 불러들이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1월 18일 갑술

영상 정태화가 여덟 번째 정사(呈辭)하니,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며칠 뒤에 김두영(金斗榮)의 상변(上變)으로 말미암아 소명(召命)을 받고 출사하였다.

 

강원 감사 박장원(朴長遠)이 치계하기를,
"양양(襄陽) 등 5개 고을에 기근이 더욱 심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여 구제해 살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영남(嶺南) 해변 영해(寧海) 등 고을의 원곡(元穀) 2천여 석을 차례로 현(縣)에 선운(船運)하여 진휼하기를 청하였다.

 

1월 19일 을해

홍명하(洪命夏)를 대사헌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정언으로, 유심(柳淰)을 형조 참판으로, 원만석(元萬石)을 병조 참지로 삼았다.

 

이판 송준길이 네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체직을 허락하였다.

 

1월 20일 병자

사은사 익평위 홍득기, 부사 정지화(鄭知和), 서장관 이원정(李元禎)이 청나라로 갔다.

 

1월 21일 정축

경조(京兆)가 충효(忠孝)·절의(節義)·청백리(淸白吏)·전망인(戰亡人)의 자손을 초록(抄錄)하여 아뢰니,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라고 명하고, 후손이 없는 자의 처(妻) 및 동생과 조카에게도 똑같이 시행하라고 하였다.

 

1월 22일 무인

홍명하(洪命夏)를 이조 판서로,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조귀석(趙龜錫)을 집의로 삼았다.

 

대사간 김수항(金壽恒) 등이 논하기를,
"인동(仁同) 사람이 부사(府使) 유정(兪椗)을 미워하고 원망하여 몰아낼 계책을 세운 나머지 대계(臺啓)를 꾸며 만든 뒤 그 대략적인 내용까지 써서 인근 고을에 전파시켰으니, 본도 감사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 적발하여 중률(重律)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군위 현감(軍威縣監) 윤이명(尹以明)을 추관(推官)으로 정해 조사를 한 결과 인동 사람 유후원(柳厚元)과 유배원(柳培元) 등이 말하기를 ‘대계는 장학(張澩)의 손으로 꾸며져 나왔다.’고 하였는데, 장학은 말하기를 ‘후원 등이 혐의가 있어서 날조한 것이다.’고 하는 등 서로 떠넘기기 때문에 명백한 언근(言根)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에 홍처후가 윤이명으로 하여금 모두에게 더 신문하도록 하였으나, 모두 불복(不服)하였다. 그런데 장학은 일찍이 참봉(參奉)을 거친 사람이었는데도 같이 뒤섞여 형장(刑杖)을 맞았는데, 홍처후가 뒤늦게야 그가 조관(朝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금부에 이송하여 처치할 것을 청하였다. 금부가 여러 차례 형신(刑訊)했으나 3인이 끝내 불복하니, 모두 장 일백(杖一百)에 도삼년(徒三年)으로 조율(照律)하였다. 이는 대체로 세 사람 모두 토주(土主)를 미워하고 원망한 흔적이 있었던 데다가 말을 만들어낸 일이 요컨대 세 사람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죄를 부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홍처후와 윤이명이 당초 장학이 참봉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뒤섞어 형신을 가한 것 또한 매우 놀라운 일인데, 조정에서는 그저 추고만 시행했으니, 어떻게 비난하는 의논을 면할 수 있겠는가.

 

1월 24일 경진

평안도의 석방 대상자 및 미대상자에 관한 계본(啓本)을 인하여 금부(禁府)가 회계하니, 판하하기를,
"이후광(李后光)과 민련(閔堜)은 일벌 백계(一罰百戒)하지 않을 수 없으나 모두 논하지 말라. 유후성(柳後聖)과 조징규(趙徵奎)는 자전의 증상이 어느 때고 발작하는 상황이니 오래도록 원도(遠道)에 유배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석방할 수도 없으니, 서울과 가까운 직로(直路)에 연한을 정하여 이배(移配)토록 하라."
하였다. 또 경상도의 계본을 인하여 금부가 심총(沈棇)을 감등(減等)하여 정배(定配)할 일을 회계하니, 분부하기를,
"지금의 사면도 전의 사면과 다를 것이 없으니, 심총은 예전대로 놔두어라."
하였다.

 

1월 25일 신사

예조가 헌부의 계사(啓辭)를 가지고 복계하기를,
"국가에서 대비(大比)의 과거를 실시하면서 초시(初試)에서는 사장(詞章)으로 뽑고 회시(會試)에서는 경학(經學)으로 뽑도록 한 그 의도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요즘 들어 이 법이 해이해졌는데 향시(鄕試)의 경우가 더욱 심합니다. 거자(擧子) 가운데 실학(實學)한다는 이름만 있으면 【나라 사람들이 강경(講經)으로 업(業)을 삼는 사람들에 대해 실학한다고들 한다.】  제술(製述)이 형편없어도 방문해 가면서 뽑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중외(中外)의 시관(試官)을 신칙하고, 혹시라도 제술이 형편없는 자를 뽑는 경우에는 시관과 거자 모두 용사(用私)한 죄로 단안을 내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재령(載寧)에 사는 백성 김두영(金斗榮)이 상변(上變)하였는데, 끌어댄 자가 70여 인이었다. 내병조(內兵曹)에 국청을 설치하고, 대신 및 금부 당상을 패초하여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두영이 일단 봉초(捧招)한 이상 국청의 체례(體例)로 따질 때 고발된 자 전원을 잡아 오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만 두영의 사람됨을 보건대 정신이 비정상인 듯한데 허다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잡아들여 신문하면 외방에 소요만 끼칠 듯합니다. 그리고 불궤(不軌)를 도모한 자가 이렇게 많은데도 그가 족인(族人) 이후남(李厚男)에게 들었다고 하는 것도 허무 맹랑한 일인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신(諸臣)은 각각 소견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자, 판의금 윤강이 아뢰기를,
"용모를 살피고 말을 들어보니 정상인이 아닌 듯한데, 만약 사실이 아닌 일로 소요를 일으키게 한다면, 손상되는 점이 무척 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끌어댄 사람들 전원을 잡아들여 신문하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두영이 그를 통해 얻어 들었다고 한 사람을 먼저 잡아들여 신문하도록 하라."
하니, 뭇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국청 대신과 판의금 및 양사(兩司)에게 모두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하문하기를,
"경들이 죄인의 공초(供招)를 보건대 옥정(獄情)이 어떠하던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처음부터 허탄한 일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는데, 지금 보니 과연 그 판단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오계창(吳季昌) 등과 면질(面質)시킬 때의 말을 보건대, 두영이 공초한 것은 완전히 상세한 사실을 결여하고 있었다. 다시 국문하여 상세하게 알아내도록 하라."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계창의 말을 들어보건대, 두영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정신이 이상했으며 유리(流離)하여 어디로 갔는지를 알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고변(告變)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얽어 만든 모양을 살펴보건대 두영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후남에게 들었다고 했다가 다시 어린아이에게서 들었다고 고쳤는데, 이 말을 다시 힐문하도록 하라. 죄인들 모두가 노비 문제로 서로 싸웠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사이에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두영이 아무리 무고(誣告)했다고는 해도 소위 안광립(安光立)의 말이라고 하는 그 말은 흉악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다."
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옥사의 일이 지극히 중한 관계로 아래에서 감히 청할 수 없습니다만, 상께서 통쾌하게 결단을 내리시어 분명히 사방에 보여 주신 다음에야 사방에서 듣고 보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선조(先朝)에서 당진(唐津) 사람이 고변했을 때 선왕께서 그 간사한 정상을 통촉하시고 즉시 여러 수인(囚人)들을 석방하심과 동시에 의탁할 곳이 없는 죄인들에게 모두 의복과 식량을 주어 보내셨는데, 고발한 자를 국문한 결과 혐의 때문에 무고했다는 사실을 자복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우선 물러가서 몇 가지 문제되는 일로 두영을 추문하라. 그러면 허실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국청이 두영이 무고한 정상을 상달(上達)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감 중인 사람들은 선조(先朝)의 예에 의거하여 각각 돌아갈 양식을 주어 보내라. 그리고 금부의 하인들이 그들을 잡아올 때 필시 빼앗은 물건이 있을 텐데, 그것들도 아울러 즉시 찾아서 내주어 조정에서 긍휼히 여기는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사정(司正) 이상(李翔)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는 중인만큼 정해진 대로 개강(開講)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자주 유신(儒臣)을 접하여 경사(經史)에 대해 질문도 하시고 시정(時政)을 묻고 의논하소서."
하고, 이어 경연(經筵)에 출입하라는 명과 서책(書冊)을 반사(頒賜)토록 한 명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여 경계시키고 깨우치려는 정성을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연석(筵席)에 출입하며 옛날의 회포를 풀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낮에 흥정당에 나아가 《중용》을 강하였다.

 

1월 26일 임오

잇따라 주강을 열었다. 강이 끝나자 호군(護軍) 송준길이 아뢰었다.
"정경세(鄭經世)가 인조조(仁祖朝)에 강관(講官)으로 경석(經席)에 출입하였는데, 하루는 신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기쁜 일을 만났다. 상께서 강하시는 책을 마침 여기에 가져왔는데, 그 속에 흰 종이로 된 서산(書算)을 보니 접고 펴고 하며 많이 읽으신 흔적이 있었다.’ 하였습니다. 인조께서 학문에 열심히 매진하셨던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진달드린 바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늘 가슴속에 간직하시고 대략적으로 수습하셔야 하겠습니다만, 너무 마음을 동요시킨 나머지 오히려 내심으로 해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험삼아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건대, 재이(災異)가 일어나고 기황(飢荒)이 든 것이 예전에도 없었던 일이라서 성상께서 스스로 편안하게 여길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고 안정된 마음으로 고요히 몸을 닦고 반성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통감》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오래도록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도 지금 하루에 주강과 석강에 모두 나아가시니 이런 경사가 없습니다. 뭇 사람들이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고,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저간에 완급(緩急)과 허실(虛實)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일단 상변(上變)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경석(經席)을 여셨으니, 성상께서 물정(物情)을 진정시키고 학문에 매진하시는 것에 대해 그 누가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월 27일 계미

홍중보(洪重普)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상이 사정(司正) 이상(李翔)을 인견하였다. 이상이 아뢰기를,
"경연에 출입하는 것은 분의(分義)상 미안할 뿐만이 아닙니다. 신은 평소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증세가 있어서 평상시 대화할 때에도 보통 사람처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엄한 곳을 출입하면서 경의(經義)를 강론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다만 신이 시강(侍講)하는 일을 겪은 뒤로 미천하나마 성상께 향하는 정성만큼은 일찍이 한 번도 줄어들지 않았으므로 늘 다시 한 번 천광(天光)을 우러러 뵙고 소회(所懷)를 일단 진달드린 다음에 떠나고 싶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늘 전날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서 기쁘고 다행으로 여기는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인견한 것이다. 사정이야말로 전일에 시강했던 사람이니, 경석(經席)에 들어와 참여하여 도의를 강론하는 일을 사정 말고 누가 하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사정은 마음속으로 진달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하였다. 이상이 아뢰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병을 안고 살았는데, 혹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고질병이 홀연히 몸에서 떠나는 듯한 반면, 혼자 쓸쓸히 있다 보면 병고(病苦)가 더욱 심해 왔으므로 늘 친구가 찾아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신이 일찍이 경험한 것이기에 성상께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날마다 유신(儒臣)을 접하여 치도(治道)에 대해 강론한다면, 국사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성상께서 조섭하시는 데에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또한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생각건대 중망(重望)을 지닌 신하들이 모두 핑계를 대고 떠나갈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들과 이야기하며 병고를 풀어 버리고 싶어도 될 수 있겠는가. 사정과 같은 자가 물러나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경저(京邸)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나 또한 모든 것을 말한 대로 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치국(治國)의 방법을 듣고 싶다."
하자, 이상이 아뢰기를,
"신처럼 정신이 흐리고 졸렬한 자가 어떻게 감히 이에 대해 언급하겠습니까. 다만 여러 서책에서 본 것을 가지고 논하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근본을 바르게 한 뒤에야 모든 일이 다스려지는 법인데, 근본을 바르게 하지 않고도 그 말단을 제대로 다스린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근본만 말하고 말단을 빠뜨리는 것은 부유(腐儒)들의 오활(汚濶)한 논이고, 말단에만 의지한 채 그 근본을 탐색하지 않는 것은 속사(俗士)들의 공리(功利)에 입각한 이야기들인데, 근본과 말단이 모두 거행된 뒤에야 국사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진달하기를,
"관의 적곡(糴穀)에 모곡(耗穀)을 징수하는 이유는 창고의 곡식이 쥐로 인해 손상되기 때문인데, 아직 바치지 않은 적곡에까지 모곡을 징수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지난번 민유중(閔維重)의 소(疏)를 인하여 이미 바치지 말게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지금 듣건대 다시 징수한다고 하니 신임을 잃는 것이 또한 큽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예로부터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백성에게 신임을 잃으면 제대로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모곡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 작은 일이는 하지만, 이처럼 신임을 잃는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다. 해조에 분부하여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정익이 아뢰기를,
"즉위하신 초기에 유신을 인견하고 접하시며 학문과 치도(治道)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선조(先朝) 때 경석(經席)에 출입하도록 한 사람 가운데 아직 입시(入侍)하지 않은 이가 또한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구인가?"
하자, 정익이 아뢰기를,
"전 승지 심광수(沈光洙)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후일에 그도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8일 갑신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윤집(尹鏶)을 예조 참의로, 심광수(沈光洙)를 공조 참의로, 이단상(李端相)을 사인으로, 김수항(金壽恒)을 동지 성균으로, 이정영(李正英)을 병조 참판으로, 정만화(鄭萬和)를 황해 감사로, 남구만(南九萬)을 부교리로, 김남중(金南重)을 한성 판윤으로, 이상(李翔)을 종부시 주부로, 성이성(成以性)을 발탁하여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삼았다.

 

전 경성 판관(鏡城判官) 홍여하(洪汝河)를 황간(黃澗) 신풍역(新豊驛)으로 정배하였다. 여하는 영남 사람으로 고 대사간 홍호(洪鎬)의 아들인데, 성격이 다혈질이었으며 글을 잘했다. 시종(侍從)을 거쳐 변방 수령으로 보임되자 뜻을 얻지 못해 울적한 심정으로 있다가 상소하여 이후원(李厚源)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배척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후원이 송시열 등에 대해 원조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음관(蔭官)으로 자의(諮議)를 삼았다고 송시열을 배척하였는데, 그가 모함하는 것에 대해 조정이 미워하면서도 죄는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여하가 북병사(北兵使) 권우(權堣)와 사이가 나빠졌는데, 권우가 여하의 죄상(罪狀)을 극히 낭자하게 치계(馳啓)하자 이에 걸려 편배(編配)된 것이다. 권우도 일찍이 사류(士類)의 빈척(擯斥)을 받고 불우한 생활을 하다 죽은 자인데, 그가 여하를 탄핵한 것은 당초 사류의 기대를 받고자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남도 유생 신성윤(愼聖尹) 등 3백 40인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월 29일 을유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 등이 아뢰기를,
"제사지내기 전에, 문안하는 예를 본떠서 들어가 임곡(臨哭)하는 일에 대해 일찍이 하문하셨을 때, 신 경석이 그렇게 하는 것은 예(禮)가 아닐 듯하다고 감히 의논드린 바가 있습니다. 삼가 선현(先賢) 신 이황(李滉)이 논한 것을 상고하건대, 그가 말하기를 ‘죽은 이를 산 사람처럼 섬기는 것은 성의로 볼 때는 응당 이렇게 해야 하겠지만, 죽은 뒤에 문안드리기까지 하는 것은 외설스러운 일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의 물음에 답한 내용입니다. 이를 미루어 말하건대, 집과 나라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극하기 그지없는 성상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일개 선비도 행하지 않는 일일 뿐더러 선왕의 예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상께서 행하신다면, 슬픔 심정을 나타낼 때에도 절도에 맞게 해야 한다는 점에 위배되니, 원하건대 제사 전에 들어가 임곡하시는 의절(儀節)을 중지하시어 아랫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제사 전에 먼저 곡하고 싶다는 것을 수의(收議)할 때 문안하고 싶다고 잘못 말했는데 사실은 조곡(朝哭)을 가리킨 것이었다. 상(祥) 이전에 조석으로 곡하는 것은 또한 예문(禮文)에 있는데, 해서는 안 된다는 이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집의 조귀석(趙龜錫)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덥거나 춥다고 해서 정강(停講)하는 것은 원래 바른 의리가 못 됩니다. 선왕께서는 늘 여름과 겨울철에도 자주 소대(召對)하셨는데, 이것이야말로 전하께서 본받으셔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봄철로서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으니, 날마다 경연에 세 번씩 나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주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정치의 득실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전 판서 송준길의 사직소에 대한 비답에서 ‘겨울철인데도 날씨가 따뜻하다. 이렇게 날씨가 절기에 맞지 않는 것은 하늘이 경을 위해 병을 조리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셨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말씀을 한 번 하시면서 두 가지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아, 겨울철이 봄날처럼 따뜻하여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는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변고입니다. 이는 실로 음기(陰氣)와 양기(陽氣)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탓으로 사계절의 질서가 서로 어긋난 것인데, 옛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음이 성하고 양이 미약해진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절기를 잃은 것을 근심하지 않으시고 이런 분부를 내리셨다면 이는 재변을 즐기는 것과 비슷하게 되고, 걱정스럽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짐짓 희롱하셨다면 이는 현인을 불성실하게 대하신 것이 됩니다. 그런데 더구나 말이라는 것은 마음속의 생각이 나타나는 것인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진실로 전하께서 놀라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면 필시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지난번 이시매(李時楳)를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하신 일이야말로 즉위하신 이래로 있지 않았던 큰 과오였습니다. 밖의 유사(有司)나 안의 중관(中官)이나 명을 받들어 감독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당시의 중관 윤완(尹完)은 일시적으로 특명을 직접 받들고 적간(摘奸)해 오기도 하고 문안하러 오는 경우의 중관과 비교하면 예모에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시매에게 조금 미진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개 미천하기 짝이 없는 환관(宦官)이 어떻게 감히 존엄한 재신(宰臣)을 깔볼 수 있단 말입니까. 윤완(尹完)이 나가서 능역(陵役)을 감독할 때 규정 외의 월권 행위를 한 것이 많았는데도 누구 하나 감히 말하지 못했고, 도감(都監)의 관원들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번번이 그들의 예하(隸下)를 책망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없이 기염을 토했으니, 당당한 성조(聖朝)에서 어떻게 일개 내시에게 이토록까지 방자하게 굴도록 허용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언로(言路)의 개폐(開閉)는 안위(安危)와 직결됩니다. 처음에는 대각(臺閣)의 논이 사주를 받아서 나온 것이나 아닐까 하고 의심하시다가, 다시 앞장 서서 발론(發論)한 자를 찾아내라고 정원에 책문(責問)하셨는데, 이는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은 의심하고 조사해서는 안 될 것을 조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상의 위엄이 진동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말 해드리고 싶은 마음을 중단하게 하고 감히 아뢰려고 하는 입을 막아 버리게 하였으니, 언로에 해가 되는 것이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불불(弗咈)하는 아름다움으로 끝에 가서 물린(勿吝)하는 훌륭한 결과를 이루기를 하였지만, 조금이라도 의혹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석연치 못한 점을 가지고 계신다면, 일이 이미 지나간 것이라 해도 앞으로 적지 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신이 누누이 아뢰면서 그칠 줄 모르는 이유입니다.
홍이룡(洪以龍)이 상소한 것을 보건대, 그 뜻이 정말 가증스러우니 진언(進言)했다고 인정해 줄 수도 없는 정도인데, 다만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하면서 죄를 주기까지 한 것은 너무 지나쳤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리시면서 그저 멀리 물리치는 뜻만 보이셨으면 충분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어찌 꼭 앞에서는 사문(査問)하게 하고 뒤에 가서는 편배(編配)시키면서 마치 중죄(重罪)를 지은 자를 다스리는 것처럼 해야만 되었겠습니까. 말을 듣는 도리로 말하면, 반드시 죄를 줄 만한 말을 한 자에 대해 용서하는 자세를 보여 주어야만이 뭇 간언을 오게 할 수 있고 다양한 계책들이 나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청이야말로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입니다. 그런데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자꾸 상소하는 것에 대해 염증을 내는 뜻이 없지 않으신데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두 글자[勿煩]의 분부는 많은 선비들을 더욱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덕을 숭상하고 현인을 본받아야 할 거조를 이처럼 그들을 낙심하게 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는 일도 결국에는 시끄럽게 된다는 이유로 중지되고 말았습니다. 그중에는 혹 허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었는데, 단지 요청한 것에 선후의 차이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허가하기도 하고 부결시키기도 하였으니, 어찌 흠전(欠典)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유사(有司)로 하여금 마땅히 먼저 행해야 할 곳을 선정하게 하여 허락한다면 불균등하다는 탄식은 없어질 듯합니다.
헛된 이야기가 나돌아 현자(賢者)가 서울을 떠났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흉악한 인간이 무함하는 말을 지어낸 뒤 궁금(宮禁)을 가탁(假托)하여 유언 비어를 퍼뜨리면서 임금을 속이고 현인을 무함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지금 만약 시열을 빨리 불러들이지 못하게 되면, 머뭇거리는 사이에 혹 틈을 타고 이간질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는데, 그 결과 호오(好惡)에 대한 우리 임금의 판단에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 경우, 훗날 벌어지는 사태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점이 있게 될 것이니, 이 점이야말로 성상께서 깊이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도감(都監)에 상전(賞典)을 내리는 것은 모두 구례(舊例)가 있습니다만, 지신(知申) 에게 거듭 자급을 제수한 것은 실로 격외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장원(朴長遠)의 경우, 그의 재주와 식견으로 볼 때 본래 선발되는 것이 마땅하니, 직질(職秩)을 올려 소환한다 해도 본디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휼하는 정사에 구애받은 관계로 곧바로 제수하는 명을 정지시켰다면, 그에게 수여한 자급(資級)도 함께 환수하고 서서히 그의 직질이 만료되는 시기를 기다렸다가 초탁(超擢)하는 것이 본래 당연한 것이지, 새서(璽書)로 포상한다는 이름을 빌려 한갓 그 몸을 영광스럽게 해 주려고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원이 극력 사양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유태(李惟泰)의 자급을 올린 것도 특전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축년에 송준길이 봉폐관(封閉官)이었을 당시에 그의 자품(資品)이 미달된다 하여 이미 상을 준 뒤에 환수한 일이 있었습니다. 유태가 차라리 도망쳐 숨을지언정 명에 응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그것이 상격(常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진정 그가 어진 것을 알고 높이 등용하려 하신다면, 어찌 저번에 권시에게 행했던 것과 같은 전례가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찌 꼭 고전(故典)에만 의지하면서 그의 불안해하는 마음을 더해 주려 하십니까.
인주(人主)의 치화(治化)의 근본은 궁위에서부터 창도(唱導)되는 것이니, 엄숙히 삼가게 하여 밖의 말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의 말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왕자와 왕손(王孫)도 응당 출입을 간략하게 하고 당폐(堂陛)를 엄숙히 해야 하는 법인데, 더구나 선조(先朝) 때와는 일이 달라 절도 있게 예를 지켜야 하는 자들의 경우이겠습니까.
제배(除拜)할 즈음에 근척(近戚)을 비의(備擬)할 경우 비답이 내리는 것을 보면 높은 이를 떨어뜨리고 낮은 이를 쓰는 적도 있었습니다. 성상께서야 마침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선발하셨을지 몰라도, 하천배들까지 함부로 뭐라고들 떠들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전하에게 없으시다면 더욱 노력하시어 치우치지 않게 하는 도리를 일층 넓히심으로써 소인배들로 하여금 천심(淺深)을 엿보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대의 정성을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마음에 새기지 않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살피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감군(監軍)과 순장(巡將)은 모두 그대로 계속 번(番)들게 하라."
하였다. 이 때 상의 안질(眼疾)이 점점 악화되어 낙점하는 것도 방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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