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정해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내려온 것이 유언(流言) 때문이긴 합니다만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는데, 그 말이 감히 성명에게까지 들어갔으리라고 신은 생각하지도 않고 또 조신(朝紳)들을 교란시켰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신이, 신의 역할을 형편없이 했기 때문에 상서롭지 못한 말을 들었던 것이기에 직접 스스로 물러나와 자책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동요되지 말고 흉인(凶人)으로 하여금 기대함이 없게끔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는 아직도 성상께서 미천한 신의 본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인만큼 허실(虛實)을 막론하고 그냥 놔둔 채 다시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신의 질병이 위독한 상태라서 아무리 힘써 억지로라도 조정에 돌아가고 싶어도 그렇게 할 방법이 없는데, 그냥 직명(職名)만 차지하고 있는 지가 이미 반 년이 넘었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체직시켜 주소서.
그리고 신이 삼가 듣건대 식물(食物)을 내리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선조(先朝) 때부터 이 은전(恩典)을 받았습니다만, 그 때는 신에게 노모(老母)가 계셨기에 이로써 영예롭게 봉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의 어미가 계시지 않아 그저 미치지 못하는 비통함만 더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신은 가난하게 생활하는 것이 원래의 분수로서 구복(口腹)을 채우며 그런대로 연명해 갈 수 있는데 반해 현재 길거리에는 굶주린 자들이 가득하니, 신이 음식을 받더라도 차마 혼자 먹으면서 목구멍으로 넘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옛날 제(齊)나라 임금이 굶주리는 자에게 음식물을 주자 그 굶주린 자가 말하기를 ‘원하건대 온 나라안에 굶주리는 자들에게 주십시요.’ 하였고, 송(宋)나라 때 상신(相臣)이 이천(伊川)에게 비단을 보내자 이천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상공께서 비단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온 세상의 헐벗은 사람들에게 두루 나눠줄 수는 없을 것이오.’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노신(老臣)만을 염려하지 마시고 속히 취소하는 명을 내리시고 제나라 백성과 이천이 했던 말을 생각하소서. 그리하여 좋은 음식을 대하면 굶주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시고 좋은 옷을 입게 되면 추위에 떨며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참혹한 모습을 생각하소서. 늘 이 점을 염려하시어 선왕의 유민들로 하여금 모두 죽어 넘어지는 근심이 없게끔만 하신다면, 신은 비록 텅 빈 골짜기에서 굶어 죽는다 하더라도 더불어 영광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장의 내용을 살펴 보건대 경의 마음이 풀리는 것이 있는 듯하니, 나의 기쁜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고 국가로 볼 때도 그만한 다행이 없다. 경이 개의치 않는다면 어째서 화창한 봄철에 올라와 지극한 회포를 풀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음식물은 미미하기 그지없는데, 경의 말은 지극히 광대하기도 하구나. 내가 따뜻하게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어찌 경의 말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고서 수령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군 이유태도 상소하여 사직하고 음식물을 사양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2월 3일 무자
상이 흥정당에서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이경석이 입시했다가 아뢰기를,
"조종조 고사를 보건대, 6승지가 각방(各房)의 문서를 가지고 입시한 규례가 있습니다. 지금 복고(復古)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긴급한 공사인 경우에는 승지들에게 직접 품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2월 4일 기축
원임(原任) 우의정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이 죽었다. 후원의 자(字)는 사심(士深)이다. 체격은 옷을 못 이길 것 같았으나 기상은 사람을 쏘는 듯 빛이 났다. 나이 26세 때 정사 공신(靖社功臣) 에 참록(參錄)되었는데 늑장을 부리며 군읍(郡邑)에서 살다가 만년에 등제(登第)하였으며 대성(臺省)을 두루 역임하는 동안 엄격한 풍도로 스스로 견지하였다. 젊어서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로 수학했는데 장생이 극구 칭찬하였으며 송시열 등과도 벗으로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시열 등이 조정에 있게 되면서는 서로 공동으로 의논들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상대편 사람들의 질시를 받게 되었고 급기야는 홍여하(洪汝河)로부터 나라를 그르친다는 배척까지 받았지만, 사류(士類)의 추중(推重)을 받은 것 또한 바로 이 점에서였다. 당시 부귀에 탐닉하지 않은 훈신(勳臣)과 귀척(貴戚)이 드물었건만 후원만은 청렴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고수하면서 끝까지 아름다운 이름을 잃지 않았으며, 고사(故事)를 익히 알고 사리를 분명하게 따지는 점에 있어서는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비견할 만한 자가 흔치 않았다. 임종할 때에 유차(遺箚) 8조(條)를 진달했는데, 상이 보고 나서 정원에 하교하기를,
"간절하기 그지없는 충성심이 언외(言外)에 넘쳐 흐르니 더욱 비감이 든다. 늘 좌우명으로 삼아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추후에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그에게 내렸다.
2월 7일 임진
국청 대신이 아뢰기를,
"김두영(金斗榮)이 이미 승복하여 옥체(獄體)가 당초와 같지 않게 되었고 죄인이 궐내에 출입하는 것도 타당하지 못한 듯하니, 본부(本府)에 옮겨 추국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2월 8일 계사
햇무리가 졌는데, 위에 관(冠)이 있고 아래에 이(履)가 있었으며, 안은 적색이고 밖은 청색이었다. 무지개 같은 흰 기운이 왼쪽 이(珥)에서 나왔는데, 한참만에야 사라졌다.
이응시(李應蓍)를 이조 참판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의로, 목겸선을 검상(檢詳)으로, 유심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이 때 상의 안질(眼疾)이 매우 위중하여 붓을 잡고 낙점(落點)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망단자(望單子)에 부표(付標)하고 계자(啓字)를 찍어 내려 보내 대신 낙점하게 하였는데, 상의 질환이 좀 나아진 뒤에도 이 규례를 그대로 적용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침(李郴) 등의 상소에 따라 삼척(三陟) 경내에서 국릉(國陵)을 찾도록 하라고 이미 성명(成命)이 계셨습니다만, 이처럼 흉년이 든 때에 감사가 작업을 행하게 되면 필시 많은 폐단을 끼치게 될 것이니,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할 때에 도제조 이경석(李景奭)이 진달하기를,
"듣건대 공청(空靑)002) 이 안질(眼疾) 치료에는 기막힌 특효약이라고 하는데, 서촉(西蜀)과 진주(辰州)에서만 생산되어 중국에서도 지극히 귀하다고 합니다. 사신 일행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습니다만, 급히 달려가 유시하여 이자(移咨)해서 구해 오거나 값을 주고 사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자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니, 사신에게 말해 구해 오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1일 병신
좌참찬 송시열과 동부승지 이유태 모두 음식물을 사양하여 받지 않는다고 도신(道臣)이 보고하니, 상이 다시 수송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승지들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해서 나아와 읽은 뒤 재결(裁決)을 받도록 하였다. 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급하지 않은 공사야 잠시 지체시킨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금방 침을 맞으셨는데 재결하시느라 시간을 보내면 혹시라고 더치시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직접 살펴보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조금도 방해될 것이 없다."
하였다.
2월 12일 정유
상이 침을 맞은 뒤에 약방 제조 등에게 이르기를,
"며칠 동안 계속 침을 맞으니 안질이 잠시 나아지는 듯하다."
하니, 이경석이 아뢰기를,
"종묘 사직과 신민(臣民)들의 다행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현재 조용히 조섭하는 중이시니 진강(進講)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송준길 같은 사람들을 때때로 불러들여 터득한 것을 진달하게 하면, 몇 마디 정도의 말이라도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정신도 이양(怡養)할 수 있을 것이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그러한데, 일찍이 만나보려 하다가 실행을 못하였다."
하였다. 조형(趙珩)이 아뢰기를,
"근일 상의 건강이 갑자기 위중해지셨으니, 아랫사람들로서 그 누가 황급해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시골에 물러가 있는 송시열 같은 경우는 필시 근심하는 것이 배나 될 것입니다. 이런 때에 상께서 또한 병이 들어 더욱 간절하게 생각난다는 내용으로 하유하시어 올라오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오래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 왔는데, 승지의 말이 좋으니, 정원은 내 대신 글을 잘 작성하여 하유하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이유태에게도 하유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2월 15일 경자
전한 이수인(李壽仁)이 외방에서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승지들에게 명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2월 16일 신축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부호군 송준길도 입시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현재 진휼하는 정사를 시급히 행해야 하는데 경비마저 고갈되었으니 어떻게 손을 쓸 길이 없습니다. 옛말에 ‘1년을 버틸 저축도 안 되어 있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반 년을 버틸 비축량도 없으니,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따라서 용도를 절약하고 줄여 지탱할 계책을 세울 수밖에는 없습니다. 도성 안의 군병에게 지급하는 늠료(廩料)가 너무 많은 만큼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한데, 그렇다고 경솔하게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니, 해조로 하여금 각 항목 별로 상용(常用)하는 것 가운데 줄일 수 있는 것들을 조목조목 아뢰어 올리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거 기근이 든 해에 뭇 의논이 백관의 녹봉(祿俸)을 감하려고 하였는데, 선왕께서 특별히 어공(御供)을 줄이도록 하시고 백관의 녹봉은 그대로 두라고 하셨다. 지금 아무리 궁핍하다 하더라도 어공만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민응형(閔應亨)의 계사(啓辭) 가운데 군병의 액수(額數)를 줄이자고 한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때 설치하여 시행한 일을 경솔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그리고 흉년이 들었다고 하여 군졸을 해산시켜 알아서 먹고 살도록 한다면, 불쌍할 뿐만이 아니라 뒷날 걱정이 또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금군(禁軍)의 액수가 증가되어 1천 명을 채우기에 이르렀는데, 졸지에 감할 수 없다면 우선 궐원(闕員)이 있을 때만이라도 보충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군병도 금군의 예에 따라 처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대장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함경 감사의 장계에 ‘단천(端川)의 김숭의 보(金崇義堡)는 높고 험한 고개에 위치하여 오곡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백성이 생활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김숭의는 사람 이름인데 그가 이 지역에서 얼어 죽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금 15리(里) 정도 되는 평지에 옮겨 설치하기에 적당한 곳이 있는데, 보의 이름을 개정하여 그냥 숭의라고만 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질환이야말로 옛날 제왕들에게는 있지 않았던 증상인데, 하늘이 전하에게 기대하는 것이 지극히 깊은 나머지 할 수 있는껏 경계하고 단속시켜 덕업(德業)을 닦아 발전시키도록 일대 계기를 마련해 주려고 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뜻밖의 병이 갑자기 발작하여 거의 실명할 뻔하였다. 다행히 나아가고 있는 중이긴 하다만 근심되고 두려워지는 마음이야 어찌 조금이라도 사라진 적이 있겠는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주자(朱子)도 만년에 안질을 앓았는데, 이에 눈을 감고 정좌(正坐)하여 한 곳에 정신을 모으고는 말하기를 ‘일찍 눈이 아프지 못했던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상께서도 이와 같이 존심 양성하시면 병을 조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2월 18일 계묘
권격(權格)을 지평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참판으로, 윤순지(尹順之)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대사헌 홍중보 등이 아뢰기를,
"과거 시험장에서 난동을 부린 거자들이 문 자물쇠를 부수면서 기필코 파장(罷場)시키려 했던 정상이야말로 난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앞장 서서 주도한 사람을 이미 수금(囚禁)하긴 했지만 관례를 따라 형추(刑推)하는 것만으로는 그 악행을 징계시키기에 부족하니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엄하게 형신하도록 하시고, 같은 패거리들도 구문(鉤問)하여 모두 먼 변방에 정배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거자가 난동을 부리는 이유가 대부분 개제(改題)한 것 때문입니다. 개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일찍이 인조조에 사목(事目)을 엄격히 세웠는데, 이번에 일어난 변고는 실제로 의(疑)003) 와 의(義)004) 두 제목 가운데 하나는 고치고 하나는 고치지 않은 것에서 발단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변고가 발생했을 때에 제대로 선처하지 못한 잘못이 또한 없지 않으니, 2소(所)의 시관(試官) 및 감시관(監試官)을 모두 중하게 추고하소서. 그리고 지금부터는 서제(書題)를 일단 출제한 뒤에는 일체 변경하는 것을 허락치 말고, 먼저 올라와 개정을 요구하는 자는 장옥(場屋)에서 난동을 부린 율(律)로 논하게 하소서.
그런데 외방에서 1개 군(郡) 전체를 정거(停擧)시키고 삭적(削籍)시키는 폐단이 있어 온 지가 대체로 오래되었는데, 한 고을에서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으면 그 당사자만 뽑아 내어 정거시키든가 삭적시키든가 해야 할 것입니다. 한 고을의 선비 모두를 온통 싸잡아 같이 처벌하는 까닭에 사태가 격렬하게 발전되어 급기야는 장옥에서 난동을 부리고 고을의 정사를 마비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니, 신칙시켜 그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또 이르기를,
"난동 부린 거자를 먼 변방에 정배하는 일은 결말을 보아 가며 처리하라."
하였다.
행 부호군 송준길이 재차 상소하여 돌아가 성묘하기를 청하니, 상이 면유(面諭)하겠다고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2월 19일 갑진
예조 판서 윤강이, 간원이 해조 당상의 추고를 청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일단 봉입(捧入)한 데다가 중신(重臣)이 올린 소장이기 때문에 비답을 내리긴 하였다. 그러나 이미 행공(行公)하라는 전지(傳旨)를 받은 터에 사직하는 소장을 어떻게 봉입한단 말인가. 만약 사직을 한다면 행공하는 의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행 부호군 송준길도 명을 받고 뒤따라 들어왔다. 도승지 조형(趙珩) 등이 차례로 공사를 읽어 가다가, 익산(益山)에 있는 김장생(金長生)의 서원에 사액(賜額)을 청한 것은 중첩된다 하여 예조가 방계(防啓)한 일에 이르자, 상이 좌우에 하문하기를,
"서원에 사액할 때 중복해서 시행한 예가 없었는가?"
하니,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대답하기를,
"송준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말씀드리겠습니까. 김장생은 곧 신의 스승인만큼, 신이 이 점에 있어서 혐의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리고 사리상 합당한지 아닌지만 말하면 될 것인데, 무슨 혐의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서원으로 강릉(江陵)과 해주(海州)에 있는 것이 모두 사액을 받았으니, 중복 시행한 예는 원래 있습니다."
하니, 상이 말로 판부(判付)하며 조형으로 하여금 받아쓰게 하기를,
"선비들이 이렇게까지 청하니, 지금은 특별히 그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또 영남 유생들이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 및 정온(鄭蘊) 등의 서원에 사액을 청한 것을 예조가 방계한 일에 대해 하문하기를,
"이 일은 어떠한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김굉필·정여창 두 사람은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정온은 절개를 세운 사람입니다. 신이 일찍이 영남 인사들의 말을 듣건대, 모두들 사당을 세워 제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조형에게 이르기를,
"아까 판부한 것과 똑같이 쓰도록 하라."
하였다. 조형 등이 공사 읽기를 끝마치자, 준길이 한식(寒食) 때에 맞춰 돌아가 성묘하고 이어 분황(焚黃)하게 해 줄 것을 간청하니, 상이 개유(開諭)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김일손(金馹孫)은 연산조(燕山朝) 때 참화(慘禍)를 입었고, 송인수(宋麟壽)는 충효가 지극하고 덕선(德善)이 구비된 인물인데 역시 정미년에 참화를 당했으니, 모두 증작(贈爵)해야 마땅합니다. 오윤겸(吳允謙)은 인조조(仁祖朝)의 명재상으로서 청백하고 유아(儒雅)한 인물인데 임종 때에 그 자손들을 경계시키며 시호를 청하지 못하게 했으니, 겸양하는 그 뜻이 또한 가상합니다. 오윤겸과 송인수에게 특별히 시호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관시(館試)의 액수(額數)가 50인에 불과한데 근래 원점(圓點)005) 에 찬 선비의 숫자가 1백 명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시취(試取)할 때에 탈락될 자가 거의 반이나 될 텐데 고생하며 공부하다가 끝내 낙막(落莫)하게 될 것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성묘조(成廟朝)에 도기(到記)006) 를 가져다 보고 시제(試製)하거나 시강(試講)한 뒤 직부 회시(直赴會試)를 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한 경우도 있었는데, 성상께서도 이렇게 하시면 선비들을 용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금년은 성상께서 즉위하신 원년(元年)이고 또 세신(歲新)007) 에 해당되기 때문에 덕업(德業)을 닦아 발전시키시라는 뜻으로 하나의 문장을 지어 바쳐 권면하는 뜻을 붙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장력이 짧고 졸렬하여 그 뜻을 이루기가 어렵겠기에 옛사람들이 자기 임금을 경계시킨 말들을 주워 모은 뒤 그 사이에 어리석은 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몇 첩(帖)으로 썼습니다. 이에 감히 바칩니다."
하고, 소매 속에서 꺼내어 올렸다.
2월 21일 병오
김만기(金萬基)·오시수(吳始壽)를 지평으로, 이지형(李枝馨)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삼았다.
공조 참의 심광수(沈光洙)가 상소하여 경연에 입시하는 것을 사양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과거에 삼가 보건대, 선왕께서는 경연에 임하실 때에 한결같이 성의(誠意)로 아랫사람들을 대하시면서 책을 펼치고 논란을 벌이며 심오한 뜻의 단서를 찾아내려 하셨는데, 낭랑한 목소리로 부지런히 구해 마지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옛날 치란(治亂)의 유래와 시비의 단서를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는데, 아랫사람의 말이 마음에 꼭 들어맞으면 기뻐하는 모습이 안색에 드러났으며 날이 저물도록 피곤한 줄을 모르셨으니, 삼대(三代) 때 군신 간의 아름다운 모임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정원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주서(注書)가 기사(記事)한 책을 가져다 보건대,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이런 일을 기록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선왕께서 재위하신 10년 동안 모두 후세의 법도가 될 만한 선왕의 아름다운 계책과 말씀들 가운데 간책(簡冊)에 실려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신이 그 때 나름대로 개탄해 마지않으면서 생각하기를 ‘경연에서 강의한 것을 따로 책자로 만들게 하여 하나는 어안(御案)에 올리고 하나는 옥당(玉堂)에 비치한다면, 성상께서 보실 때 보탬이 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고 또 뭇 사람들이 함께 보게 되어 필시 멀리까지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이것을 위에 우러러 청하려 하였는데, 신규(新規)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주저하다가 꺼내지 못한 중에 하늘이 어찌나 좋지 않게 대하는지 갑자기 큰 환란을 당하게 하는 바람에 미천한 신이 마음에 간직했던 소원을 당시에 이루지 못한 채, 선왕의 훌륭하신 전범(典範)을 후세에 누락되게 하였으니, 이 또한 신이 선왕께 지은 하나의 큰 죄라 할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덕이 닦여진 세상에는 요망한 재앙이 일어나지 않고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에게는 많은 복이 스스로 이른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시행한 일치고 하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을 일이 없었으니, 성상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가 바로 회복되는 경사를 맞게 된 것이야말로 천지 신명이 보호해 준 덕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계속 이대로 해 나가시면서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잃지 마소서. 그리하여 뜻을 세우기를 선왕처럼 견고하게 하시고, 정령(政令)을 낼 때 선왕처럼 인(仁)을 베푸는 방향으로 하시고, 몸을 단속하여 선왕처럼 절검(節儉)하시고, 어진 이 좋아하기를 선왕께서 옆 자리를 비워 놓으신 것처럼 하소서. 그러면 억만년토록 이어질 기틀이 진정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장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비감이 들며 목이 메이는 것을 금할 수 없다. 경연에 입시하도록 한 것은 내가 특별히 분부해서가 아니라 선왕 때에 이미 성명(成命)이 계셨던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주서 맹주서(孟胄瑞), 봉교 송창(宋昌)·정중휘(鄭重徽)가 심광수의 상소를 통해 기사(記事)가 소루했다는 배척을 받았다고 하여 소장을 진달하고 궐직(闕直)하였는데, 금부에 내려 추고하도록 하였다.
2월 22일 정미
연안 부사(延安府使) 성하명(成夏明)에게 처음에 어사(御史)의 포계(褒啓)로 인하여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대계(臺啓)에 따라 그 명을 도로 거두고 숙마(熟馬) 1필을 내렸다.
2월 23일 무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와 우상 정유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송준길이 ‘관시의 원액은 50명인데, 원점 3백 점을 통과한 유생이 90여 명에 달해 참여되지 못할 자가 또한 많으니, 따로 시강(試講)해 뽑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였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3백 점을 통과한 사람들 모두가 원방(遠方)에서 온 유생들인데, 몇 년동안 고통을 참으며 노력해 오다가 해액(解額)에 참여되지 못하면 매우 낙심할 것입니다. 준길이 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도 식당(食堂)의 도기(到記)를 가져다가 낙점(落點)해서 시강해 뽑은 일이 있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만약 낙점해서 시강하면 참여되지 못할 자가 필시 많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시강을 하지 말고 모아서 제술 시험을 보인 뒤 가려 뽑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어 파하고 나갔다. 이튿날 승지를 성균관에 보내 관관(館官)과 함께 성균관의 유생을 시험하여 소두산(蘇斗山) 등 10인을 뽑았는데, 두산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그 다음은 직부 회시(直赴會試)하게 하거나 차등 있게 분수를 주었다.
2월 24일 기유
허목(許穆)을 장령으로, 이단상(李端相)을 부응교로, 심유행(沈儒行)을 교리로,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박이명(朴而㫥)를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삼았다.
강원 감사 박장원(朴長遠)이 각읍의 기민(饑民)을 조목별로 아뢴 계본(啓本)에 의하면, 양양(襄陽)에서 사망한 자가 21명이었고 간성(杆城)에서는 사망자가 23명이었다. 또 그의 장계에 의하면, 삼척(三陟)에서 산불이 일어나 민가에까지 불길이 번졌는데 알몸으로 탈출한 자가 1백 60여 명이었고 불타 죽은 자가 5명이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일찍이 기민을 진구하는 일을 인하여 상께서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을 경우에는 중률(重律)로 다스리라고 특별히 하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장계를 보면 그 두 읍에서 사망한 자가 44명이나 되니 정말 한심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죄를 무겁게 다스린다면 앞으로 사실과 다르게 보고할 폐단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감사와 그 두 읍 수령을 중하게 추고만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 뒤로는 예전대로 답습할 경우 나문(拿問)하여 처치하리라는 뜻으로 엄히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봄 가뭄이 너무 심합니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빠르긴 하나 대신에게 의논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이 모두 의논드리기를,
"늦고 빠르고를 따지지 말고 즉시 기우제를 지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7일 임자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조형(趙珩)을 동지 성균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부수찬으로,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집의로 삼았다.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소명을 사양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조용히 올라오도록 하였다.
승지 이유태가 도성에 들어와 소장을 진달하여 자급(資級)을 거두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그대가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그중에 대소(臺疏)를 가지고 말한 것은 실로 마음속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당초의 일을 가지고 사양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직(本職)을 제수한 것은 응당 행해야 할 통규(通規)인데, 어찌 전의 일을 가지고 뒤의 일을 사양한단 말인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아 속히 출사하도록 하라."
도승지 조형이 경연 석상에서 진달하기를,
"사관(史官)은 임무가 중하니 잠시도 자리를 비우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봉교 정중휘(鄭重徽)와 송창(宋昌)이 현재 나추(拿推) 중이라서 겸춘추(兼春秋)가 대신 입직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구차스럽게 되었습니다. 전 검열 유명윤(兪命胤)이 부자간에 상피(相避)해야 할 일로 부직(付職)이 안 되었는데, 현재 다른 인원이 없으니 예문관으로 하여금 품달하여 변통케 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가 의논드리기를,
"상번(上番)과 하번(下番) 사관이 모두 신문을 받고 있는데, 달리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부제학 유계를 체차하고 그 아들 명윤을 도로 사직(史職)에 붙여 속히 신천(新薦)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9일 갑인
비가 내렸다. 기우제를 지낼 때의 헌관(獻官)이었던 참판 이응시 등에게 각각 말을 하사하고, 여러 집사(執事)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대사간 김수항(金壽恒) 등이 탄핵하기를,
"해미 영장(海美營將) 이필(李泌)은 일찍이 국상(國喪)의 공제(公除) 전에 파주 목사(坡州牧使) 유탄연(柳坦然)과 공해(公廨)에서 대좌하여 보통 때처럼 술과 고기를 먹었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며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탄연은 이미 이 때문에 죄를 받았는데 이필만이 면할 수는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홍주 영장(洪州營將) 이익달(李益達)은 일찍이 호남 수사(湖南水使)로 있으면서 주사(舟師)를 조련하던 때에 뭇 사람들의 의견을 억지로 어기고 제멋대로 함부로 하다가, 끝내는 1천 명 가까운 군졸들을 한꺼번에 물에 빠져 죽게 하였으므로 호남 사람들이 지금도 원망하며 욕하고 있습니다. 당초 군율(軍律)을 면하게 한 것만도 실형(失刑)했다고 할 것인데, 다시 사판(仕版)에 끼워 넣었으므로 물정이 분개하며 놀라고 있습니다. 장령(將領)의 임무를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듣건대 춘추관이, 도승지가 아뢴 사관(史官)의 일을 인하여 전례(前例)를 끌어대어 당상을 체직시키고 아래에 있는 자를 쓰도록 청했다 합니다. 이것이 부득이해서 나온 일이긴 하겠으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이 일이 매우 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조정의 처사는 어느 것 하나라도 윤기(倫紀)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새로 정사를 펼치는 때로서 표준을 세우는 일이 큰 문제로 대두되는 시점인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삼강(三綱)이 반드시 밝혀지도록 노력해도 오히려 잘 되지 않을까 걱정인데, 아랫자리에 있는 아들을 임용하려고 당상의 직책에 있는 아비를 체차해서야 되겠습니까.
유계는 유명윤의 아비이고, 그 직책은 동관(東觀)008) 이라는 존엄한 곳입니다. 아들 때문에 그만 그 아비를 체차시킨다면 윤서(倫序)가 문란해지고, 아무리 한원(翰苑)009) 이 중해도 동관을 거꾸로 가볍게 취급한다면 사체상으로 어긋난 것입니다. 왕정(王政)과 국법(國法)은 보고 듣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법인데, 만약 혹시라도 부자간의 윤기를 소홀히 할 경우 다른 것은 거론할 가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러합니다. 정중휘(鄭重徽) 등의 행위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만, 성인께서도 작은 허물은 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씻고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해 준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늘을 본받아 인(仁)을 베푸는 것으로서 만물과 더불어 봄 기운을 나누는 것이 될 것이니, 한 시대를 용동시킬 뿐만 아니라 후세의 법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여러 대신에게 물어 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실로 의리에 합치되니 그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여 전 봉교 정중휘(鄭重徽)와 송창(宋昌)에게 직책을 도로 제수하도록 하였다.
사관(史官)에게 상피(相避)할 일이 발생한 경우에는 상대방이 윗자리에 있는 자라 하더라도 춘추(春秋)의 직에서 체직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데도 이경석이 부자의 윤리를 가지고 말했으니, 또한 현실 사정에 어둡다 하겠다.
2월 30일 을묘
영의정 정태화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영부사 이경석의 차자를 보건대, 부제학 유계를 체직시킨 잘못을 극구 말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준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춘추관(春秋館)의 계사(啓辭)라는 것은 곧 신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신이 참으로 형편없이 사리에 어두운 나머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억측하여 제멋대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신식(申湜)이 동지춘추(同知春秋)로 있었을 때 그 아들이 바야흐로 하번(下番) 한림(翰林)으로 있게 되자 이 이유를 들어 고 상신 이덕형(李德馨)과 이항복(李恒福) 등이 동지춘추의 체직을 청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당시 상번(上番) 사관(史官)이었던 고 상신 이경여(李敬輿)가 무척 자세하게 항상 말했었습니다. 또 부자(父子)가 일시에 승지와 사관이 되었을 때 그 아비의 춘추를 감거(減去)했던 경우가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어리석고 망령스럽게도 이것을 근거할 만한 예로 삼았던 것이었습니다.
정중휘(鄭重徽)와 송창(宋昌) 등을 즉시 복작(復爵)시켜야 한다는 논이 이미 수일 전에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신도 실제로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속습(俗習)이 놀랄 만하여 연소한 명관(名官)들이 자기만 높일 줄 알지 사체는 돌아볼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금부에 명하여 추고하도록 한 것이야말로 선묘조(宣廟朝)에 한림 이선복(李善復) 등을 잡아다 추문한 것과 부합되는 것이기에 곧바로 서용(叙用)를 청하는 것은 감히 하지 못할 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계사(啓辭) 가운데에 미처 병론(並論)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 일이 삼강(三綱) 구법(九法)에 관계되어 새로이 펼치시는 교화에 누를 끼치고 윤서(倫序)를 문란케 할 줄은 깨닫지 못했으니, 이쯤 되어서는 신의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여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의견에 이치상 어찌 전도된 점이 있겠는가. 이는 피차간에 일리(一理)가 있다고 주장한 것에 불과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도 춘추관의 계사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전 참판 신익전(申翊全)이 죽었다. 익전은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집안 대대로 유아(儒雅)했는데 익전 역시 문사(文辭)에 뛰어났다. 사람됨이 순박하고 겸허하였으며, 명가(名家)의 자제로 화현직(華顯職)을 역임하였는데, 권요(權要)의 직책에 당하게 되면 사양하며 피하고 처하지 않았다. 형의 아들 신면(申冕)이 권력을 좋아하여 패거리를 끌어 모으자 마음속으로 매우 싫어하며 늘 이 점을 자제들에게 경계시켰다. 신면이 이미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딸이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시집갔어도 화복(禍福)의 갈림길에서 전혀 오염을 받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들 인정하였다. 만년에 더욱 염정(恬靜)한 생활로 일관하며 세상 일에 참여하지 않고 끝까지 아름다운 이름을 간직하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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