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을유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올해 기근이 든 상황은 팔로(八路)가 모두 마찬가지인데, 국가가 이에 대해 요리하고 진구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근래 듣건대 영남(嶺南) 지방의 기근 현상이 동로(東路)나 북로(北路)보다 못하지 않아 풀뿌리와 나뭇잎을 먹는 등 전 지역이 모두 그러한데 왕왕 죽는 자까지도 나온다고 합니다. 현재 세금을 거두어들일 시기가 이미 박두했습니다만, 목숨을 구하기에도 여념이 없는 백성들로서는 마련해 낼 힘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급한 상황을 풀어 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방법을 모두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에서 비축을 해두는 것은 급할 때 의지하려는 것인데 단지 강도(江都)의 미곡만 남아 있는 형편이니 정말 위급할 때가 아니면 가벼이 의논하여 가져다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목숨이 경각에 있고 일에는 경중이 있는데, 굶주리는 백성의 입에 들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가면서 옮겨다 쓸 변통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 이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 채 끝내 구휼해 주지 않는다면, 중하고 위급할 때 써야 한다는 목적에 어긋나는 점이 어찌 없겠습니까. 듣건대 강도에 미조(米租)가 아직 10여만 석이 있다 하니, 지금 적당히 덜어 내어 해조의 경비(經費)로 쓰도록 하고 영남의 전세(田稅)를 가져다 추수 때에 바치게 하여 그 액수를 상환하게 함으로써 곤궁한 백성들이 당하는 목전의 위급함을 풀어 줄 수 있도록 한다면 일이 매우 온당하게 되겠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의논해 처리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도에 우박이 떨어지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왔다. 황주(黃州)에 화재가 발생해 60여 가옥이 연소되었으며 불타 죽은 사람과 우마(牛馬)도 많았다. 이를 감사 정만화(鄭萬和)가 보고하니,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행 부호군 조경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집이 북로(北路)와 접해 있는데, 듣고 보는 것 모두가 의지할 곳 없이 넘어져 쓰러지는 북로(北路) 유민(流民)들의 참상뿐입니다. 노인과 어린이 할 것 없이 서로 부여잡고 끌며 혹 5, 6인이나 8, 9인씩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혹 십여 명씩 무리를 이루기도 하는데 모두들 쑥대머리에 귀신 같은 형상으로 사람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길에서 먹을 것을 지닌 행인이라도 만나게 되면 파리떼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입을 벌리고 먹을 것을 요구하는 등 도대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모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또 길가에 나도는 이야기를 듣건대, 북쪽에서 내려와 걸식하는 유민들이 품안의 어린애를 전사(傳舍)에 맡기면서 내일 와 찾아가겠다고 약속하고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냥 길가에 내버리고 가는 자도 있다 합니다. 이를 미루어 보건대,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근거를 잃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몸에는 누더기옷 하나 걸치고 손에는 빈 바가지 하나 든 채 마른 입술과 주린 배를 다 참으며 기진 맥진한 상태로 걸어가다가 장차 어디에서 그 걸음을 멈추게 되겠습니까. 십여 일이 지나지 않아서 굶어 죽은 시체들이 경기 교외에 즐비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삼가 경기 감사가 열읍(列邑)에 행회(行會)한 글을 보건대, 지부(地部)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황정(荒政)을 거행하는 것이 극진하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부모이신 전하께서 어찌 차마 우리 백성 노소들로 하여금 죽음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방책을 강구하여 진휼해야 온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노신이 혼미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경기 열읍의 창고에 비축된 곡식이 한계가 있어 본토의 백성들도 주리는 기색이 역연하니, 아무리 창고의 곡식을 다 털어 내놓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북도 백성들의 급한 사정까지 아울러 구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썩어 가는 곡식을 조금 덜어 내어 구제해 줄 방도를 여유 있게 해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지난해에 팔도 어느 곳 할 것 없이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관북(關北)이 가장 심하여 천리 땅이 황량해지면서 열에 아홉은 집안이 텅 비고 말았으니, 앞으로 아무리 지혜를 가진 자라도 그들을 위로하여 다시 오게 하고 안정시켜 머물러 살 수 있게 할 계책을 낼 수 없게 될까 신은 두렵기만 합니다. 아, 관북 지방이야말로 성조(聖祖)께서 왕업을 일으킨 터전인 동시에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니, 현재 국가의 급선무로는 북쪽 지역의 백성들을 진휼해 구제하여 주는 것 이상의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명나라의 신하 도융(屠隆)이 지은 《황정고(荒政考)》 1책(冊)을 바치면서 아뢰기를,
"예로부터 황정을 논한 것이 많았습니다만, 옛날을 원용하여 오늘날에 증험하면서 빠짐없이 다 갖추어 놓은 책으로는 이것이 최고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옛사람들이 구황책(救荒策)을 말할 때면 반드시 용관(冗官)을 감축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였습니다. 용관도 감축해야 하는데, 하물며 재야의 신까지 국름(國廩)을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봉록(俸祿)을 취소하면 굶주리는 백성 수십 명을 살릴 뿐만 아닐 것이니, 유사에게 명하여 신이 매달 받는 봉급을 회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달한 말과 책자야말로 구황하는 격언(格言)들이니, 내가 깊이 유념하겠다. 경은 안심하고 녹봉을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경상도 칠곡(漆谷) 지역에 눈이 내렸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4월 2일 병술
조귀석(趙龜錫)을 사인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부교리로, 변급(邊岌)을 충홍 수사(忠洪水使)로 삼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도승지 김수항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말하고 싶은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여탑(旅榻)에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나라 일에 대해 생각하노라니 염려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근래 듣건대 이조의 초기(草記) 때문에 정원에 빈번하게 하문하신 일이 있다고 하는데, 신은 이 점에 대해 진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이 기축년에 헌부에 재직하고 있을 때 일찍이 이 일을 가지고 탑전에서 진달드린 바가 있었고, 지난해에도 언젠가 선왕의 분부를 직접 받든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그 이야기를 상세히 해 보라."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근래 전하께서는 일이 내사(內司)에 관계되기만 하면 아까워 하는 뜻을 보이시는 것 같은데, 이 점이야말로 인심(人心)의 거취(去就)와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시험삼아 한 가지 일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전에 내포(內浦)에서 고변(告變)한 일이 있었을 때 무함을 당했다가 풀려난 자에 대해 선왕께서 식량을 주어 보내도록 명하신 일이 있고, 지난번 해서(海西)에서 잡혀온 사람이 변백(辨白)된 뒤에도 역시 식량을 지급해 주도록 하면서 나졸(羅卒)이 빼앗아 간 가산(家産)을 모두 찾아 되돌려 주도록까지 하셨으므로, 그 두 도의 인심이 그렇게 기뻐들 할 수가 없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면 정령(政令)을 한 번 낼 때마다 인심의 향배(向背)와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사의 일에 대해서는 계해년 초만 하더라도 유신(儒臣)이 모두 혁파하기를 청했었는데, 근년에 와서는 아무리 고쳐야 할 고질적인 폐단이 있어도 곧장 감히 혁파할 것을 청하지 못한 채 그저 이따금 바로잡도록 청하기만 하고 있으니, 역시 세태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내사의 크고 작은 공사 모두를 반드시 이조의 관유(關由)를 통하게 한 것이야말로 조종조의 구규(舊規)입니다. 그런데 신이 기축년에 논계할 때에, 먼저 정원의 관유를 거친 뒤에 다시 이조의 검토를 받게끔 하자고 말씀드렸더니, 선왕께서 이르시기를 ‘그렇게 하면 일이 번잡스럽게 될 듯하니, 단지 이조로 하여금 일에 따라 복계(覆啓)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번에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품달드린 일이 있었는데, 종이 한 장에 부표(付標)하신 곳이 자그마치 13곳이나 되었습니다. 판서가 복역(覆逆)한 것이야말로 제대로 체례(體例)를 갖춘 것인데 성명께서 살피지 못하시고 불평하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내셨으니, 또한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주(尙州)의 대승사(大乘寺)에 대해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 따라 원당(願堂)의 혁파를 명했었는데, 이번에 이조가 초기(草記)를 올리면서 또 담양(潭陽)의 사찰에 원당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으로 말했기 때문에, 이를 정원에 하문하여 조사해 아뢰도록 한 것이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경연에서 송시열에게 하교하시기를 ‘여러 신하들 모두가 부귀하게 되려고만 하여 국가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경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 하는 것이다. 경이 나라 일을 위해 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진심으로 들어주겠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해 주시니 정말 국가의 다행입니다. 정령(政令)을 내리는 사이에 여망에 차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만, 공주(公主)의 제택(第宅)은 어찌하여 이렇게도 높고 웅장하며, 전장(田庄)을 떼어 받는 것은 어찌하여 이렇게도 넓기만 하단 말입니까.’ 하자, 선왕께서 이르시기를 ‘여러 신하들도 모두 자손을 위해 계책을 세워 주고 있는데, 나만 그만두라는 말인가. 이 일이 지극히 온당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이 이것을 이야기한다면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뒤에 어사를 떠나 보낼 때에 시열로 하여금 어사가 염문(廉問)해야 할 조목을 열거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 사찰 원당의 폐단도 듣는 대로 아뢰도록 하는 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도(諸道)의 어사들이 성상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 봉행하지 못했는데, 오직 경상도 어사였던 민유중(閔維重)만이 그 일을 꽤나 상세하게 보고하였었습니다. 이를 미루어 보면 제도에 똑같이 시행했던 것을 알 수 있으니, 명하가 방계(防啓)했던 것도 선왕의 뜻을 넓히고 전하의 덕을 찬조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이런 곡절을 모르고 그저 담양은 영남 지방이 아니라 물어 본 것일 뿐이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모든 정령(政令)을 내는 데 있어 아침에 명했다가 저녁에 고치는 것도 미안한 일인데, 더구나 선조(先朝) 때 두서가 잡힌 일을 지금 해조의 초기로 말미암아 힐문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이것이 어찌 아랫사람들이 전하에게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그리고 옛날에는 직전제(職田制)가 실시되어 대군(大君)과 공주는 1백 80결(結)이었고 왕자와 옹주는 그보다 바로 아래였는데, 이 제도가 무너지면서 절수(折受)하는 폐단이 일어났으니, 대신과 호조에 자문을 구하시어 옛 제도를 부활시키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복제(服制)에 대해 수의(收議)한 공사(公事)를 꺼내니, 수항이 그것을 읽었다. 송시열의 헌의(獻議) 가운데 ‘이황(李滉)이 수숙(嫂叔) 간의 복(服)으로 잘못 정했다.’는 대목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기대승(奇大升)이 그것을 반박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명종 대왕조에 공의전(恭懿殿)께서 위독하셨을 때에 상례(喪禮)를 의논하였는데, 그 때 선정신(先正臣) 이황이 수숙 간의 복을 적용해야 한다고 하자, 기대승이 힐난하기를 ‘대통(大統)을 이은 의리로 보면 신하의 도리가 있고 아들의 도리가 있는데 어떻게 수숙 간의 복으로 복제를 정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황이 깨닫고는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하마터면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뻔했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일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목(許穆)이 또 상소하였는데, 경은 얻어 보았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아직 얻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우승지 이은상(李殷相)이 나아가 허목의 소를 읽고 이어 그가 바친 상복도(喪服圖)를 올렸다. 준길이 상복도를 살펴보고 아뢰기를,
"‘서자(庶子)는 첩의 아들을 일컫는 말이다.’고 한 이것이 소(疏)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정체(正體)인데 승중(承重)하지 못한 경우’라고 하는 것은, 장자(長子)가 아비에게 죄를 얻었거나 폐질(廢疾) 상태가 되어 후계자가 못 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신들은 ‘적처(嫡妻) 소생이라도 둘째 아들부터는 서자(庶子)이다.’라고 생각하는 반면 허목은 서자를 첩의 아들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말이 상반되는 것입니다. 신과 시열의 생각은, 둘째 아들이 대통을 계승했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 3년복을 입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疏)027) 의 설을 보면 글의 뜻이 각각 다른데, 그래서 말들이 이렇게 같지 않은 것인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고례(古禮)에 ‘아비는 장자를 위해 3년복을 입어 준다.’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 예문(禮文) 중에는 근거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고례를 따라 행해 왔었습니다. 주자(朱子)도 장자를 위해 3년복을 입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허목의 소를 보건대 모두 조목별로 나열했습니다만, ‘정체부득승중(正體不得承重)’이란 아무리 장자라도 일찍 죽거나 폐질 등에 걸려 무후(無後)한 경우를 말하고, ‘체이부정(體而不正)’이란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말하며, ‘정이불체(正而不體)’란 적손(嫡孫)이면서도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경우를 말하는데, 《의례(儀禮)》에서 논한 것은 사부(士夫) 간에만 적용될 뿐 아니라 제왕가(帝王家)까지 통틀어 말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장자가 일찍 죽거나 폐질로 죽었을 경우에는 3년복을 입어 주는 것이 부당하니, 따라서 둘째 아들의 상을 당했을 때 3년복을 입어야 하겠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장자를 위해 3년복을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첩의 아들에게는 3년복을 입어 줄 수 없습니다. 소현(昭顯)의 상을 당했을 때 이경석(李景奭)과 이무(李堥) 등이 3년의 복제를 행할 것을 청했는데, 인조 대왕께서 답하기를 ‘아조(我朝)에서 3년의 복제로 행한 경우가 없었다.’ 하고, 기년복(朞年服)만 입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소현의 상 때는 3년복을 입었어야 했고 효고(孝考)의 상 때에는 3년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대왕 대비께서도 어찌 인조의 뜻을 따라서 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초상(初喪) 때에는 그저 아조에서 행해 왔던 예를 따라 해 놓고는 이제 와서 뭇 의논들이 고례를 따르지 않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고 있는데, 그래서 실록(實錄)을 조사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의 복제에 관한 공사는 사관(史官)이 오는 것을 기다려 답하겠다."
하였다.
4월 3일 정해
우의정 정유성이 면직되었다. 유성이 집안의 변고를 스스로 불안하게 여겨 열 차례나 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 힘써 부응하라는 뜻으로 유시했었다.
이조가 아뢰기를,
"지난해 비국이, 경상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도내(道內) 열읍(列邑)의 사찰을 조사한 결과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에 소속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정파(停罷)시키고 본읍에 도로 소속시킴으로써 지지(紙地) 등의 역(役)에 이바지받게 하자는 내용으로 복계(覆啓)하여 윤허를 받은 뒤 행회(行會)한 것이 정녕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사(內司)의 공사(公事)를 보건대 상주(尙州) 대승사(大乘寺)와 담양(潭陽) 옥천사(玉泉寺)는 동평위(東平尉)와 흥평위(興平尉)의 원당(願堂)이라는 이유로 잡역을 시키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소원대로 들어주는 것으로 계하(啓下)를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각처의 사찰에 대해 한편으로는 정파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다시 설치하고 있으니, 나라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주인 없는 황무지를 절수(折受)받았다 하더라도 불법으로 점유했다는 원망을 초래하기 십상인데, 하물며 망망 대해의 경우이겠습니까. 더군다나 절수 지역의 본관(本官)이 타량(打量)028) 한 것은 더욱더 근거없으니, 인평위(寅平尉)의 집에 거제(巨濟) 지역의 해양을 절수해 주기로 한 공사도 아울러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안동(安東)의 사인(士人) 송형구(宋亨久)가 역법(曆法)의 내용으로 진달한 소를 관상감에 계하하셨습니다마는 신들은 역법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관(日官) 12인 중에서 오직 반호의(潘好義)가 말하기를 ‘차라리 구법(舊法)을 존속시키면서 아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역법도(曆法圖)를 가져다 바치면서 아뢰기를,
"형구는 말하기를 ‘측후(測候)하는 방법은 오직 육합(六合)을 위주로 해야 하는데, 시헌 역법(時憲曆法)은 전혀 이를 적용치 않고 있으니, 잘못이다.’ 합니다. 그러나 일관들은 말하기를 ‘반드시 형구의 주장대로 한다면 천만년이 지나도 역법을 고치지 말아야 할 것이니, 계산을 위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는데, 이는 대체로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면 도수(度數)가 점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역법도 고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이유에서입니다.
대통 역법(大統曆法)은 원조(元朝) 때 허형(許衡)이 만들었는데, 대명(大明) 말년에 탕약망(湯若望)029) 의 역법을 얻어 고쳐 보려다가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그 뒤 청(淸)나라 사람들이 북경(北京)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탕약망으로 하여금 개정하게 하였습니다. 고(故) 상신 김육(金堉)이나 고 참판 여이징(呂爾徵)은 역법을 상세히 알고 있었는데도 역시 시헌력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았으며, 일관을 사신 편에 들여보내어 다시 조사 확인하고 오도록 했었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 법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저 나라에서 반포하였으니 폐기하기도 곤란합니다. 따라서 양쪽 역법 모두 존속시키면서 뒷날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데, 인출(印出)하는 데 따른 물력(物力)을 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통 역법이 없어져 전해지지 못한다면 애석한 일이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정폐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때의 일관들이 모두 있으니, 옛 법을 적용하여 찬출(撰出)해 낸다 해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1본(本)을 인출(印出)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아뢰기를,
"만약 대통 역법으로 인출할 경우 2개의 역(曆)이 있는 셈이니, 저 사람들이 알면 후회되는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관상감에 분부하여 2건(件)을 잘 만들게 하되 하나는 보관해 두고 하나는 진상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좌참찬이 진언하기를 ‘대군(大君)과 공주 이하에 대해서는 옛날에 직전(職田)이 있었을 뿐 절수(折受)하는 규정은 없었으니, 지금도 이를 본따 행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였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준길의 말이 옳습니다. 절수(折受)는 한정이 없는데, 만약 직전제를 부활한다면 누가 감히 외람스럽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조에서 생각할 때 득실(得失)이 어떠한가?"
하니, 판서 허적이 대답하기를,
"현재 절수된 곳은 모두 면세(免稅)의 혜택을 받고 있는데, 만약 직전법을 부활시킨다면 본조의 세입(稅入)이 반드시 증가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대군의 경우 직전이 2백 25결(結)이니, 1년에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공사(公私)간에 두루 편할 도리를 생각해서 조용히 의논해 정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부제학 유계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송시열이 면세전(免稅田)과 원당(願堂)에 관련된 폐단을 진달하며 바로잡으려 하다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입시했으니, 이 자리에서 의논해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솔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하였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아뢰기를,
"강원도는 큰 산맥을 넘는데 그곳에 시장(柴場)을 설치하고 재목을 벌채하며 이익을 독점할 계책을 꾸미고 있으니, 이것은 더욱 근거 없이 하는 일입니다."
하고,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면세(免稅)에 대한 일은 경솔하게 변통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원당(願堂)·시장(柴場)·해량(海梁) 등을 절수한 곳은 일체 혁파하여 민폐를 덜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원도의 시장은 조사해서 혁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억이 각 아문에서 절수받은 곳도 아울러 혁파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원당도 일체 정파(停罷)시킨다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난색을 표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렇듯 즉위하신 초기를 당하여 사람들이 눈을 씻고 새롭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니, 단지 일개 궁가(宮家)에서 지지(紙地)를 거두어들이는 곳에 불과한 원당에 대해 여러 신하들이 청한 대로 쾌히 따라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례궁(明禮宮)의 원당 외에 여러 궁가의 원당은 모두 혁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5일 기축
밤에 서리가 내렸다.
정유성(鄭維城)을 판중추로, 윤경(尹絅)을 판돈녕으로, 이완(李浣)을 한성 판윤으로 삼았다.
4월 6일 경인
밤에 서리가 내렸다.
4월 8일 임진
식년(式年) 생원 진사과 복시(覆試)의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생원 이희택(李喜澤) 등 1백 인과 진사 김하진(金夏振) 등 1백 인이 합격하였다.
외방에 거주하는 종실에게 녹봉 지급을 정지하였다. 당시 나라에는 종실이 외방에 거주해서는 안 된다는 금령(禁令)이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자급 자족할 수 없는 빈한한 종실로서 시골에 내려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려 39원(員)에 달했는데도 계속 녹봉을 지급받고 있었다. 호조가 아뢰기를,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대부라도 시골에 있으면서 올라오지 않을 경우에는 녹봉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 곧 규례(規例)입니다. 지금 외방에 거주하는 종실 역시 무턱대고 녹봉을 받아서는 안 되니, 4월부터 시작해서 녹봉을 지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요즘 들어 사습(士習)이 날이 갈수록 더욱 불미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유적(儒籍)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야말로 학궁(學宮)의 중벌(重罰)로서 삭제된 벌이 풀리지 않는 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것이 원래 예로부터의 관례입니다. 그런데 새로 합격한 생원 홍석범(洪錫範)은 그의 숙부를 장사지내기 전에 과거에 응시했다는 이유로 사학(四學) 전체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당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풀리기도 전에 공공연히 복시(覆試)에 보란듯이 응시하여 합격자 명단에 끼이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행동을 단속할 줄도 모르는 무례한 인간을 그대로 놔두어 뒷날의 폐단을 열게 할 수는 없는데, 이와 함께 그의 부형(父兄)이 된 자 역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생원 홍석범은 합격자 명단에서 취소해 버리고, 그의 아비인 전 찰방 홍흥지(洪興祉)는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9일 계사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의 병이 위중하다고 정원이 보고드리니, 상이 속히 어의(御醫) 유후성(柳後聖)을 보내 가서 살피게 하고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약물(藥物)을 내리게 하였다.
4월 10일 갑오
심지원(沈之源)을 좌의정으로, 원두표(元斗杓)를 우의정으로 삼았다.
전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기를,
"신이 좌참찬 송준길이 차자를 진달하여 상복(喪服)을 논한 절목(節目)을 얻어 보건대, 신이 주장한 것과는 크게 서로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모두들 예(禮)에 의거하여 쟁론하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예(禮)이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대례(大禮)에 있어서 이 예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예라고 하겠습니까.
신이 주장하는 것은 적자(嫡子)를 세워 장자(長子)로 삼는다고 하는 의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장자를 위해 3년복을 입어 주는 이유는 부모에 대해 정체(正體)가 되기 때문이며 또 전중(傳重)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이 죽어 적처(嫡妻) 소생의 둘째 장자(長子)를 후계자로 세울 경우에도 그를 장자라고 이름하는데, 그를 위해 입어 주는 복이 《의례(儀禮)》 참최(斬衰) 3년조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소위 ‘이미 첫째 아들을 위해서 참최복을 입었을 경우 둘째 아들을 위해서는 3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구절은 경전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죽으면 3년복을 입어 주고 둘째 아들의 경우 역시 3년복을 입어 주고 그런 식으로 하여 다섯째 여섯째 아들에게까지 모두 3년복을 입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비유에 대해서는 신은 그 말하는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아비와 아비를 잇는 정체(正體)가 된다고 하는 것이지 첫째 아들을 위해 참최복을 입어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복전(喪服傳) 주(註)를 보면 ‘적처(嫡妻)의 소생은 모두 적자(嫡子)라고 한다.’ 하였고, 또 ‘적처 소생의 둘째 장자는 중자(衆子)이다.’ 하였으며, 또 ‘서자(庶子)는 첩(妾)의 아들을 부르는 칭호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자라는 표현을 써서 말한 경우는 오복도(五服圖)에서 ‘장자를 위해서는 참최 3년복을 입어 주고 중자를 위해서는 부장기복(不仗期服)을 입어 준다.’고 한 것이 그것으로서, 중자라는 표현 속에는 서자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자라고 할 때는 장자의 아우·첩의 아들·출가하기 전의 딸 등도 마찬가지로 이 속에 집어 넣어 크게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자라는 표현을 써서 말한 경우는 ‘서자에게는 장자처럼 3년복을 입어 줄 수 없다.’고 한 것이 그것으로서, 서자라는 표현 속에는 중자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데, 장자와 크게 구별하기 때문에 첩의 아들과 동일한 칭호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외에는 적자와 서자를 같은 표현 속에 포함시켜 부른 적이 없습니다.
대개 상복전을 가지고 말하건대, 대부의 적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대부의 복을 입어 주는 데 반해, 대부의 서자가 대부가 된 경우에는 그가 부모를 위해선 대부의 복을 입는 반면 대부는 그 서자에게 강복(降服)을 하고 있으니, 적자와 서자의 구분이 이만큼 엄격한 것입니다. 심지어 ‘승중(承重)한 자라 하더라도 3년복을 입어 줄 수 없는 경우’의 주(註)를 보건대 적자·서손(庶孫)·서자·적손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적(嫡)과 서(庶)에 대해 매우 명백히 구분하여 적처 소생은 모두 적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서자라는 칭호는 첩의 아들의 명칭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적자·서자를 막론하고 첫째 아들이 아닌 한 3년복을 입어 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예경(禮經)》에서 소위 ‘장자를 위해 3년복을 입어 준다.’고 한 것은 첫째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정체(正體)의 자격을 갖추고 후계자가 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효고(孝考)는 인조(仁祖)의 뒤를 이어받은 적자로서 이미 종묘(宗廟)를 받들고 한 나라의 임금이 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제(喪制)에 3년의 복제(服制)를 쓰지 않고 기년(期年)으로 강복한다면, 체이부정(體而不正)한 경우에 해당되는 기년복이란 말입니까, 정이불체(正而不體)에 해당되는 기년복입니까, 아니면 후계자가 되긴 했지만 정체(正體)가 못 되는 데에 해당되는 기년복이란 말입니까. 신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주장하는 것과는 대체적인 뜻이 이미 어긋나 있으므로 조목조목 모두가 상반되고 있습니다. 예가(禮家)는 원래 해석의 가능성이 끝이 없어 주장들이 각각 분분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예로부터 취송(聚訟)의 문(門)이라고까지 불려 왔습니다. 하지만 상복(喪服)의 대절(大節)만큼은 조리가 엄격하고 분명하게 되어 있으니 문란시킬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삼가 상복(喪復)에 있어 장자를 위해 참최 3년복을 입는 경우와 기년복을 입는 경우 및 적자·서자의 구별에 대한 것을 조목별로 나열해 도표를 만들어서 바치고자 하는데, 경전에 근본을 두고 주소(註疏)를 참고하여 경중(輕重)과 상하(上下)의 구분을 일목 요연하게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으니, 삼가 성명께서는 헤아려 택하소서."
하였는데, 그가 바친 상복도(喪服圖)는 다음과 같다.
상복도
아비가 장자를 위해서 입는다.
주(註):적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은 상하(上下)를 통틀어 말하기 위해서이다.
석(釋):적자라는 칭호는 오직 사대부에게만 적용될 뿐 천자와 제후에게는 통하지 않는데, 이는 태자(太子)라고 말할 때 역시 상하에 모두 적용되지 않는 것과 같다.
주(註):이 역시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석(釋):적처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이름한다.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장자(長者)가 잇는다.
전(傳):어째서 삼년복을 입는가. 위에 정체(正體)가 되기 때문이고,
소(疏):그의 부조(父祖)가 모두 적자로서 서로 이어 왔고, 그 또한 이미 적자로서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傳):또 장차 전중(傳重)할 바이기 때문이다.
소(疏):종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정체와 전중, 이 두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만 3년복을 입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전(傳):서자에게는
소(疏):서자는 아비의 후계자가 된 사람의 아우이다. 서자라고 말한 것은 분명히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석(釋):서자는 첩의 아들의 칭호이다. 적처 소생의 둘째 장자는 중자(衆子)인데, 지금 똑같이 서자라고 이름한 것은 장자와 분명히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첩의 아들과 같은 칭호를 쓴 것이다.
전(傳):장자처럼 3년복을 입어 줄 수 없으니, 그것은 조(祖)를 잇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기(小記):조(祖)와 예(禰)를 잇지 못하는 것이다.
주(註):승중(承重)했더라도 3년복을 입어 줄 수 없는 경우가 네 가지 있다.
1. 정체(正體)이나 전중(傳重)하지 못한 경우이다.
석(釋):적자이긴 하나 폐질(廢疾) 또는 다른 연고가 있거나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전중하지 못하는 자이다.
신이 살펴 보건대, 부자간이 체(體)가 되는 것이고, 적자와 적손은 정(正)이 되는 것이며 서자와 서손은 부정(不正)이 되는 것입니다.
2. 전중(傳重)했으나 정체(正體)가 못 되는 경우이니, 서손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 이것이다.
3. 체(體)이긴 하나 부정(不正)한 경우이니, 서자를 후계자로 세운 것이 이것이다.
신이 살펴 보건대, 소(疏)와 주(註)에서는 적처의 소생을 모두 적자라고 이름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죽었을 때는 적처 소생의 둘째 장자를 취해 세우는데, 이 때에도 그를 장자라고 이름합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복은 이미 참최 3년조에 나와 있는 만큼, 다시 그를 ‘체이긴 하나 부정하다.’고 하여 ‘승중(承重)했지만 3년복을 입어 줄 수 없다.’는 항목에 놔두는 것은 부당하니, ‘서자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 이라고 할 때의 서자는 적처의 소생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4. 정(正)이긴 하나 체(體)가 아닌 경우이니, 적손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 이것이다.
신이 살펴 보건대, 이상 네 가지에 대해서 적자·적손·서자·서손을 서로 대응시키며 구분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적자와 서손을 구별하고 있는 것은 ‘장자처럼 3년복을 입어 줄 수 없는 서자’를 장자와 완전히 구별할 목적에서 첩의 아들과 동일한 칭호로 불렀던 경우와는 같지 않습니다.
어미가 장자를 위해서 입는다.
소(疏):어미가 장자를 위해 입는 복이 자최조(齋衰條)에 있는 이유는, 이 어미를 위해 자최복을 입는데 어미도 자식이 그를 위해 입어 주는 복 이상으로 입어 줄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자최복을 입는 것이다.
부모라고 해도 장자에 대해서는 그가 본디 선조(先朝)의 정체(正體)가 되기 때문에 압강(壓降)하는 의리가 없다. 따라서 아비가 살아 있다고 하여 장자에게 입어 주는 복을 낮추어 기년(期年)으로 할 수 없으니, 어미가 장자를 위한 복을 입을 때에는 아비의 생사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전(傳):어째서 3년복인가.
아비가 강복(降服)하지 못하는 것이니 역시 감히 강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註):자기가 높다고 하여 감히 조예(祖禰)의 정체(正體)가 되는 사람에게 강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년복(朞年服)
소(疏):천자와 제후가 정통(正統)의 친(親)과 후(后)와 부인(夫人)과 장자와 장자의 처 등에 대해 입어 주는데, 강복하지 않으며, 나머지 친족에 대해서는 입어 주지 않는다.
신이 살펴 보건대, 이미 경(經)에 ‘장자를 위해서는 3년복을 입는다.’ 하였고, 기년복 조의 소에 또 ‘천자와 제후가 정통의 친과 후와 부인과 장자와 장자의 처 등에 대해서는 강복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3년복을 입어 주어야 할 장자는 기년복 조에 포함되면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기년복을 입어 주어야 하는 장자는,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승중했더라도 3년복을 입어 줄 수 없는 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장자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라 할지라도,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았을 경우에는 3년복을 입어 주고, 서자를 세워 후계자로 삼았을 경우에는 기년복을 입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상이 답하기를,
"상소한 사연은 실록을 조사해 낸 다음에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1일 을미
종친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호조의 계사를 보건대, 시골에 내려간 종실들에게 4월부터는 똑같이 녹봉(祿俸)을 지급치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종실이 법을 무시하고 시골에 내려간 것은 참으로 죄가 되는 행동입니다만, 빈한해서 자급 자족할 수 없었던 사정이 진정 해조에서 아뢴 것과 같고 보면, 정상이 불쌍하여 죄를 용서해 줄 만합니다. 그리고 신들이 종부시의 거안(擧案)030) 을 조사해 보건대, 외방에 거주하는 종실로서 직무를 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국휼(國恤)031) 을 당한 뒤의 일로 말하더라도, 문안을 드리고 거둥하실 때에 와서 참여한 경우를 보건대, 많은 경우는 50, 60회이고 아무리 적어도 십수 회를 밑돌지 않았으니, 시골에 있으면서 올라오지 않았던 사대부들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즉위하신 초기에 새로 교화를 펼치는 날을 당하여 보통 백성들도 살 곳을 잃은 탄식이 없게끔 되었는데, 유독 종실들만이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조종(祖宗)을 몸받아 친족을 인자스럽게 대해야 하는 우리 전하의 의리로 볼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계사의 내용처럼 직무를 폐하지 않고 있다면, 녹봉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부당할 듯하다."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외방에 거주하는 종실이 무려 39인이나 되는데, 이들은 범연히 왕래하는 자들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노년에 이를 때까지 집을 짓고 그곳에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먼 경우에는 천리나 떨어진 양남(兩南)에서 살기도 하고 보통의 경우 3백, 4백 리쯤 떨어진 곳으로 아무리 가까워도 일정상 며칠씩 걸리는 곳이어서 보통 때에는 원래 입경(入京)하는 일도 없습니다. 지금 국휼을 당한 후 거둥하실 때에 와서 참여했다고 말합니다만, 아무리 미관 말직의 전임관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달려와 궐문 밖에서 호곡(號哭)을 했는데, 하물며 종척(宗戚)의 명분을 지닌 사람으로서 만약 와서 곡하지 않았다면 그 죄가 어찌 파직하고 녹봉 지급을 정지하는 정도로 끝날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해부의 계사가 이러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묘당이 복계하기를,
"호조가 처음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그리고 조관(朝官)으로 군직(軍職)에 붙여진 인원 가운데 시골에 가 살면서 녹봉을 받는 자들 역시 조사해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오정위가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에는 변장(邊將)과 수령이 하직(下直)하거나 차원(差員)이 올라올 적이면 인견하고서 경계시키며 단속하는 거조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께서 건강이 계속 좋지 않으시니 감히 우러러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예전대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지금 만물을 길러 주는 여름철을 맞아 서리와 눈이 내리는 재변을 당했으니, 민심이 놀라고 동요하는 것이야 말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성명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선조 때에는 외방의 조그마한 재변을 당해도 반드시 삼공(三公) 및 삼사(三司)의 관원을 인견하여 재해를 해소시킬 방법을 강구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전례(前例)를 상세히 알지 못해 늘 혼자 걱정하면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이런 말을 들었으니, 어찌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이후원(李厚源)이 임종 때 남긴 차자가 있는데, 끝 부분에 군병의 액수(額數)를 줄이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종친들의 녹봉을 줄인 것도 흉년 때문이었고 보면, 위급한 일이 없는 지금 호위 군관(扈衛軍官) 같은 것은 혁파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 중에 어렵게 여기는 이가 있고, 또 선조(先朝)와 관계되는 일이라서 감히 경솔하게 혁파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찬성의 상소 내용 가운데 ‘헐뜯는 말이 갈수록 더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생각건대 전일 뜬 소문이 아직까지 잠잠해지지 않아 왕래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그에게 전했기 때문에 감히 마음 편케 가지지 못해 상소에 언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조윤석(趙胤錫)이 아뢰기를,
"홍득기(洪得箕)가 상소한 내용을 시열이 잘못 들었기 때문에 전의 소에서도 ‘서로 따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한 것인데, 이것을 미루어 보면 전해진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성상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가엾게 여기는 분부를 내리시며 신을 돌아오도록 부르셨는데, 신이 질병으로 시달리던 나머지 끝내 달려가지 못했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고 할 것입니다. 삼가 신의 죄를 바로잡게 하지 않으신 성자(聖慈)의 관대한 용서를 받았고, 기왕에 또 액정(掖庭)의 대인(儓人)을 특별히 보내 신의 질병을 친히 물어 주시며 약물(藥物)과 식물(食物)을 내려 주셨으므로, 사방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며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은혜를 융숭히 받으면 받을수록 지은 죄는 더욱 깊어만 가고 성상께서 신의 사정을 보아 주면 보아 주실수록 물론(物論)이 헐뜯는 소리가 더욱 더 일어나는데, 이런 때에 은명(恩命)을 또 내리시어 신을 이공(貳公)032) 에 제수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이 죄를 기다리다가 관직을 옮기게 되고 물러남을 인하여 승진하게 되었으니, 사리로 따져 보아도 이렇게 어긋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어 직명을 깎아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 가운데에 표현된 말을 보건대 흉악한 뜬소문을 믿고 있는 듯하다. 경은 어찌하여 올라와서 나라 사람들의 의아해 하는 마음을 해소시켜 준 뒤 다시 내려갈 의논을 하지 않는 것인가. 나의 성의가 미덥지 못해 오래도록 뜻을 바꾸려고 아니하니, 가슴속의 상념을 어떻게 말로 다하겠는가."
하였다.
4월 13일 정유
좌상 심지원(沈之源),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모두 잇따라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임의백(任義伯)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4월 16일 경자
박세모(朴世模)를 사간으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홍처윤(洪處尹)을 형조 참의로,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심유(沈攸)·정수(鄭脩)를 지평으로 삼았다.
첫 번째 기우제(祈雨祭) 지내던 날 감찰 권도경(權道經)이 승전(承傳)이 지나간 뒤에 의막(依幕)에 들어가 관대를 벗고 누웠고, 제사를 끝낸 뒤에는 또 평복을 입고 말을 타고서 헌관 이정영(李正英)이 앉아 있는 곳을 마구 지나갔다. 정영이 그 일을 헌부에 말하니, 장령 오두인(吳斗寅)과 지평 정석(鄭晳)·경최(慶㝡)가 단지 권도경을 체직시키라고만 아뢰었다. 정영이 드디어 스스로 자신을 논핵하기를,
"제사는 나라의 큰일인데, 재계를 삼가지 않았으니, 다른 일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가 신이 스스로 진계하여 그 죄를 밝히지 못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도경을 잡아다 추문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오두인 등이 모두 법률을 적용한 것이 마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이 처치하여 체직을 청하고 아뢰기를,
"정영이 곧바로 진계하지 아니하고 다만 하리로 하여금 법부에 말을 전하게 했으니, 매우 일의 체모를 잃었습니다. 정영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7일 신축
이무(李堥)를 지평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8일 임인
봉교 송창(宋昌)이 서계하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적상 산성(赤裳山城)에 가서 삼가 양조의 실록 상하 십여 권을 고찰해 보니,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예종 대왕에 대해서는 소상(小祥) 후에 바로 길복(吉服)을 입었다는 말이 있고, 문정 왕후(文定王后)가 인종 대왕을 위한 복제에 있어서는 명백하게 나타난 곳은 없었으나, 그 사이 간혹 상복 제도에 관한 의논으로서 증빙하여 고찰할 만한 것이 있으면 아울러 모두 베껴 와서 예람(睿覽)에 대비하였습니다. 또 세종 대왕이 덕종 대왕을 위해서 명종 대왕이 순회 세자(順懷世子)를 위해서, 행하였던 복제에도 혹 참고할 만한 것이 있을까 하여 역시 베껴 써서 올립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지금 소상(小祥)의 연관(練冠)과 중의(中衣)에 대한 절목은 다만 기축년의 예에 의거해서 마련하여 계하하였습니다. 바깥 의논이 혹 최복(衰服)을 빨지 않는 것과 요질(腰絰)을 바꾸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들 하는데, 신들은 처음에 생각하기를 ‘당시의 왕이 예를 제정할 때 최복을 빨지 않는 것은 반드시 단궁 주소(檀弓註疏)에 있는 정복(正服)은 바꿀 수 없다는 설에 의거하였을 것이다.’고 여겼고, 요즘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역시 이를 행하고 있는 자가 많이 있기 때문에 일찍이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운운하고 있는 설들은 반드시 의거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예가(禮家)의 여러 설들에 대하여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으나, 《가례(家禮)》를 고찰해 보면 ‘공포(功布)는 익힌 것을 쓴다’는 설이 있고, 단궁(檀弓)에도 역시 ‘갈포(葛布)로 만들 요질(腰絰)’이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최복과 요질은 모두 변경하여 바뀐 절목이 있습니다. 다만 국가의 제도가 이미 정하여져서 받들어 시행한 지가 또한 오래되었으니, 감히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예법에 있어서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미진함이 있다면 때에 맞추어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대신과 유신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돈녕 이경석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고찰해 보니, 《의례(儀禮)》에는 연포(練布)를 쓴다는 글이 없고, 《가례》에 중의(中衣)와 관은 연포를 쓴다는 설이 실려 있었습니다. 《의절가례(儀節家禮)》에는 연복의 제도가 갖추어 실려 있는데, 예를 아는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가례》를 따르는 자가 많습니다. 지금 의논하고 있는 자들도 역시 의거하는 바가 없지 않을 듯하나, 기축년에 이미 시행한 예법은 당시의 왕이 제정한 것이고, 옛날 예의 뜻을 선왕이 준행한 것이니 오늘에 시행한다 하더라도 미진할지에 대하여는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공자께서 ‘선왕의 법을 따르고서 지나친 자는 있지 않다.’고 하신 말로써 아룁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번에 예조에서 마련하여 계하한 연복 절목(練服節目)은 요즘 예법을 지키는 사대부의 집안에서 행하는 바와 차이가 있으니, 의논하는 자들의 말이 있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겠으나, 《오례의(五禮儀)》는 국가의 정해진 제도로서 받들어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제 와서 다시 고치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좌참찬 송준길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의례통해(儀禮通解)》의 상복 도식(喪服圖式)을 살펴보니 연제 수복도(練祭受服圖)에 ‘중의(中衣)와 관은 연포로써 만들며 최(衰)와 상(裳)은 졸곡(卒哭) 후에 관을 쓸 때 받아 입는다.’ 하였는데, 졸곡 후에 쓰는 관은 바로 대공복의 칠승포(七升布)로 만듭니다. 대공복에 쓰는 베를 《의례》에는 원래 연포로 쓴다는 글이 없습니다. 지금 마땅히 관과 중의는 연포로써 만들고 최(衰)와 상(裳)은 대공복의 칠승포를 써서 고쳐 만들되 누이지 않고 만든다면 실로 옛날의 예법과 합치될 것이며, 또한 ‘정복(正服)은 바꾸지 않는다.’는 소가(疏家)들의 글과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연포를 쓴다는 장횡거(張橫渠)의 의논과 같은 것은 비록 별도의 한가지 설로서는 의의가 있겠으나, 바르게 옛 제도를 따르는 것만은 못합니다.
또 《의례》를 살펴보니 ‘졸곡을 하고 질과 대를 벗는다.’는 조항의 주(註)에 ‘마포를 바꾸어 갈포로 받는다.’ 하였고, 도식에도 역시 실려 있는데, 《가례》에는 졸곡으로부터 소상에 이르기까지 ‘대(帶)를 바꾼다.’는 절목이 없습니다. 명나라의 선비인 구준(丘濬)은 《가례의절(家禮儀節)》을 지었는데, 소상(小祥)의 요질은 옛날 예법의 뜻을 써서 갈포를 세 겹으로 고리를 만들고 네 가닥으로 끈을 꼬아 만든다 하였으니, 또한 의심 없이 따를 만합니다.
또 도식(圖式)을 살펴보니, ‘참최(斬衰)의 교대(絞帶)를 포로 바꾸어 입되 칠승포로 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가례》를 따르면 비록 우제를 지낸 후에 바꾼다는 절목은 없으나, 연제(練祭) 때의 요질(腰絰)을 이미 옛날의 예에 따라서 갈포를 사용하니 교대 또한 마땅히 연포를 써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도식(圖式)이라고 하는 것은 곧 면재 황씨(勉齊黃氏)가 친히 주자의 지결(旨訣)을 받들어서 만든 것인데, 그가 정한 연복의 제도가 그러합니다.
대개 예법에는 절문(節文)이 있는데, 옛날 제도에는 초상으로부터 길복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감쇠하는 변화의 곡절이 매우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었는데, 온공(溫公)의 《서의(書儀)》는 세속의 예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소략합니다. 주자의 《가례》는 다시 《서의》를 많이 인용하였는데, 초년에 기록한 원고를 아이들이 훔쳐 간 이후로는 다시 수찬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이는 완성되지 못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의 병이 위독해지자 제자들이, ‘마땅히 《서의》를 따를까요?’ 하고 물으니, 선생께서 ‘소략하다.’ 하였고, ‘마땅히 《의례》를 따를까요?’ 하고 다시 묻자, 그제서야 선생께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니, 주자의 뜻을 역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가례》는 진실로 완성되지 못한 책이지만 연복 절목(練服節目)은 더욱 명확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만약 옛날의 복제대로 최(衰)와 부판(負版)을 제거하고 별도로 새 옷을 짓지 않는다면 이른바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를 제거한다.’는 등의 말은 마땅히 역복조(易服條) 아래에 있어야 하며, ‘하루 전에 연복을 진열한다.’ 아래에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시골의 빈한한 선비들 중에는 예법의 뜻은 알지 못하고 다만 옛날 그대로 복을 입는 자가 있는데, 신은 일찍이 그 매우 촌스러운 것을 딱하게 여긴 적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당당하게 행하는 예법이 도리어 시골의 가난한 자들이 행하는 바와 같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옛날의 예법에서 질정해 보고 가례를 참고해 보아도 근거가 없습니다. 예법에서 작은 것이 의심스런 것은 그래도 그냥 지나갈 수 있지만, 연복을 변제(變除)하는 것은 실로 대단한 절목이며 도식에서 논한 바도 또한 아주 명백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어찌 묵은 관례에만 집착하고 바른 옛 예로 변통하지 않는 것입니까.
《오례의》에 실려 있는 것은 비록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열성 이래로 시대에 알맞게 개정을 한 것이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또 어찌 굳게 고집하면서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하들이 입고 있는 복제가 본디 옛날의 제도가 아니나 이른바 모전(茅纏)과 지과(紙裹) 같은 것에 대하여는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유독 성상께서 입으시는 최복에 대하여 마음을 쓰는 것은 반드시 올바른 예로써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아 한 시대의 제도를 정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신이 일찍이 시골에 있으면서 삼가 들으니, 지난 경인년 연제를 행하던 때에 고(故) 상신 조익(趙翼)이 이와 같은 뜻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연제 날짜가 하루밖에 남지 않아서 의논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스럽게 개탄하며 차자를 갖춰 품었던 생각을 진술하려 하던 차에 마침 성상의 하문을 받들어 감히 이렇게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 의 의견을 대신 및 우윤 권시(權諰), 호군 이유태(李惟泰), 좌랑 이상(李翔)에게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태화(鄭太和)·심지원(沈之源)·권시·이유태는 모두 준길의 의논이 옳다 하였고, 이상은 미관 말직으로서 감히 국가의 중대한 예법을 논하는 데 참여할 수 없다고 대답하니, 상이 좌참찬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말하였다.
공조 좌랑 이상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듣건대 그물에 벼리가 없으면 펼칠 수가 없고 실에 실마리가 없으면 다스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사물에 있어서 강령(綱領)이 없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그물에 벼리가 있고 실에 실마리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정에는 한 가정의 기강이 있고 한 마을에는 한 마을의 기강이 있으며 한 고을에는 한 고을의 기강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방백(方伯)이 현을 거느리고 육조가 방백을 거느리고 삼공(三公)이 육조를 거느리며, 삼공과 군주가 가부를 살펴서 정령을 내리는 것이 바로 한 나라의 강령(綱領)입니다. 그러나 강령은 저절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임금이 세워야만 합니다. 만일 터럭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생각을 가지고 지극히 공정한 도를 해치게 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따르기를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하여 역시 그들도 각기 사사로이 행할 것입니다. 사사롭게 되면 마음이 천만 가지가 될 것이니 어떻게 사방의 마음을 하나로 할 것이며 어떻게 온 나라의 일을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타고나신 뛰어난 자질로, 내리시는 호령을 인심에 맞게 하시려고 애쓰시니, 전하의 마음을 신이 엿보아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오늘날 정치와 교화가 행해지지 않는 것으로 본다면 아직도 전하께서 사사로움을 다 떨쳐 버리지 못하시어 국가의 기강을 해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하게 스스로 자책하시고, 순수하게 왕도(王道)로서 자임하여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지극히 공정한 도를 잡아, 몸에 체득하고 정치에 베푸는 것이 모두 쇠퇴한 기강을 진작하는 일이 되게 하소서. 그러면 온 나라의 백성들이 장차 스스로 분발하고 힘써서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게 될 것이니, 출척과 상벌을 일일이 몸에 가하지 않더라도 예의의 풍속과 염치의 습속이 이미 크게 바뀌게 될 것입니다. 국조의 법전이 비록 삼대의 제도와 모두 합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법과 기강으로 유지한다면 이로써 태평한 시대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눈 뜻이 완전히 없어지고 모든 관리들은 태만하여 여러 가지 공적이 모두 무너져 쇠퇴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험삼아 신이 담당하고 있는 부서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를테면, 서울과 지방의 선박과 장인(匠人)들의 녹안(錄案)을 관리하는 법이나, 여러 고을의 닥나무·옻나무·뽕나무·과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법, 각 관사에 시장(柴場)을 절수하는 법, 가옥의 건축과 규모에 관한 법, 도량형률(度量衡律)에 관한 제도들은 법전에 자세하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조종조에 일대를 경륜하던 남은 법을 볼 수 있는데, 돌이켜보면 지금에는 태반이 해이해져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선박은 모두 여러 궁가(宮家)와 권문 귀족들이 차지해 버려서, 본조의 장부에 남아 있는 숫자는 매우 적습니다. 닥나무·옻나무·뽕나무·과일나무 등을 심고 가꾸는 법도 역시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백성들의 전지에서 취하고 있으며, 시장을 절수하는 법규도 역시 궁가에게로 옮아 갔고, 가옥의 건축과 규모에 관한 제도도 법전과 비교해 보면 또 그의 몇 배가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도량형률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각기 제도를 만들어서 크고 작은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기준으로 삼을 것이 없습니다. 수부(水部) 한 곳만을 보더라도 해이하여 무너진 것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옛날의 법을 닦아 밝히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기강을 세우고 나서야 첫머리로부터 정리가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일, 하나의 물건 사이에서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말단적인 일이라고 하겠으나, 신이 이 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일찍이 한 두어 조목을 아뢰어 모두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이 닦여지지 않는다면 머지않는 장래에 다시 해이해져 허물어질 것이므로 성상께 기강을 세우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근래 경연의 신하가 아뢴 바를 따라, 여러 궁가(宮家)의 원당(願堂)과 시장(柴場)·염분(鹽盆)·어량(漁粱) 등의 절수한 곳을 모두 혁파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선왕께서 남기신 뜻이니, 유업을 계승하는 성스러운 덕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성상의 분부 가운데 ‘지금으로부터 절수하고자 하는 것은 금지하는 것이 옳겠다.’고 하셨는데, 만약 ‘지금으로부터’라고 말씀하신다면, 이것은 이제까지 절수받은 것에 대하여는 그대로 두어 혁파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한이 있는 토지를 가지고서 이미 궁가의 토지 대장에 소속시켜 버렸으니, 아직 완전히 절수되지 않은 곳이 있다고 하더라도 형편상 반드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혁파한다는 이름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 혁파하는 효험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장차 ‘전하와 같은 상급의 성인으로서도 오히려 사사로이 연연함을 면하지 못하였다.’고 할 것이니, 소문을 들으면 사람들이 모두 맥이 풀려서 반드시 온 마음으로 받들려 하지 않고 각자가 사사로이 일신만을 도모하며 옛날의 습속대로 하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쇠퇴한 형세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거듭 유사에게 명하시어 새로이 절수하였거나 예전에 절수하였거나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혁파토록 하여, 혹은 공가에 귀속시키고 혹은 가난한 백성들의 생업으로 삼게 하여 고질된 폐단을 과감하게 씻어 버리고 백성들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소서. 그러면 옛 습속대로 안일하게 지내려는 버릇이 개혁하려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기강을 진작시키는 방법은 이보다 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강을 진작시키는 일이 공평 무사한 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이르는 방법을 찾아본다면 이치를 밝히고 힘써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시급하게 힘쓰셔야 할 일은 진실로 학문에 나아가는 것보다 큰 것이 없는데, 상중에 몸이 허약해져서 화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섭양하느라 세월만 흘러가서 하루 이틀 날을 보내는 사이에 학업은 쉽게 황폐해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주 유신들과 접하여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시되 지나치게 서두르지 마시고 누워서 듣는다면 눈의 힘을 허비하여 상하게 되는 근심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자께서 일찍이 병중에서도 강론을 그치지 않으시므로 제자들이 손님을 사절하고 휴식을 하라고 청하였더니, 주자께서 ‘내 스스로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 보지 않는 사람의 경우는 저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이로 본다면 선현께서 학문으로 병을 다스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오직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학문을 하는 방법이며 또한 기를 기르는 방법입니다. 만약 정치를 하는 여가에 눈을 감고 마음을 기울여서 사려를 신중히 하고 망동하지 않도록 노력하신다면, 심기는 너그럽고 화평하게 되며 수기(水氣)는 오르고 화기(火氣)는 내리게 될 것입니다.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사이에 스스로 사체가 가볍고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니 천 가지 처방과 만 가지 약이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채택하여 받아들이신다면 은혜가 매우 크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바의 일은 지극히 약석과 같은 의논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마음에 깊이 새겨서 실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 진언하여 부족한 바를 도우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 대비 복제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였습니다. 영돈녕 이경석은 ‘신은 처음 헌의를 할 때에 이미 선왕의 제도를 따르자는 뜻으로 아뢰었습니다. 지금 장령 허목(許穆)이 옛날의 예법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신은 다시 의논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영상 정태화는, ‘처음에 예관이 대왕 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대신과 유신들에게 묻도록 청하였을 때, 신은 원래 예문에 대하여 어두워 정론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다만 나라의 제도에 근거하여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여러 대신과 두 유신(儒臣)의 생각도 역시 모두 다름이 없었습니다. 지금 허목의 상소를 보니 대부분 옛날 예법을 인용하면서 기복(朞服)을 그르다고 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하여 다시 의논을 드리겠습니까. 오직 예법을 알고 있는 신하에게 다시 자문하여 처리하소서. 또 생각하건대 일찍이 당황하고 급작한 사이에 실록을 참고해 내지 못했는데,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예종 대왕에 대한 경우와 문정 왕후가 인종 대왕에 대해서 이미 시행한 제도를 아울러 마땅히 상고하셔서 참작하여 정하소서.’ 하였습니다.
영중추 심지원(沈之源)은 ‘당초 대왕 대비 복제를 의논하여 정할 때에, 신의 어리석고 변변하지 못한 소견은 이미 여러 대신들과 다름이 없었으니, 지금 감히 다시 의논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를 아는 신하에게 자문하시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판중추 원두표(元斗杓)는 ‘처음 상례를 의논할 때에 신은 본디 《예경》에 어두웠으며 또 신이 내국(內局)에서 대죄하던 중 갑자기 왕의 상을 당하고 보니 정신을 빼앗기고 혼몽한 가운데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대왕 대비전의 복제에 대하여 물으시므로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의례에 따라 의견을 올렸습니다. 지금 허목의 상소를 보면, 그가 논의에 의거한 바는 모두 경전에 밝혀져 있는 글이니 어찌 감히 다시 다른 의견을 내세워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에 이르러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 폐단을 더욱 절감하겠으며, 지극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예법에서 이른바 사종(四種)의 설033) 은 대개 부왕이 서자를 위한 상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모후가 적통을 이어 사직을 맡은 적자를 위하여 강복(降服)으로 기년복을 입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당초 잘못된 실수를 어거지로 고집하여서 다시금 매우 중요한 예전을 그릇되게 하여서는 아니되겠기에 감히 어리석고 비천한 의견을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우찬성 송시열은 ‘신은 병든 몸으로 엎드려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라 정신과 지식은 혼몽하여 일용과 사물에 있어서도 모두 잊어버려 조금도 기억이 없는 형편입니다. 더구나 지금 의논하는 일은 제왕의 종통에 관한 막중한 것이며, 지극히 정미한 예의 뜻에 대한 것입니다. 당초에 망령되이 의논을 하여 이제 대신과 대간들의 공격을 받았으니, 다시 무슨 말이 용납되겠습니까. 다만 이미 큰 예절을 망령되이 의논한 실수가 있었으니 감히 다시 곡절을 진술하여 일을 그르친 죄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처음 예조의 낭관이 대왕 대비의 복제를 개정하는 일로 와서 의논하는 것을 들었을 때, 신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별도로 의거할 만한 예문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으며, 이로써 지난날 의논했던 설에 대하여도 결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신과 대간들이 의논한 것을 보니 위징(魏徵)의 소릉(昭陵)의 일과 서로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헌의할 때에 원래 이 《의례주소(儀禮注疏)》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주소의 설에 의문이 전혀 없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경솔하게 의심스러운 소설(疏說)을 원용(援用)하여 매우 중요한 변례(變禮)를 결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깝게 명나라 제도를 따르는 것이 오히려 허물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허목이 올린 상소를 보니, 인용하여 증거한 것이 비록 많으나 그 긴요한 것은 다만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장자가 죽어서 제2장자를 세운 경우에도 역시 장자라 이름하여 그에 대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서자를 세워서 후사를 삼으면 3년복을 입을 수 없는데 그것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부터 의심하여 알고자 하던 것은 바로 이 조목에 있었으며, 허목이 지금 분명한 증거라고 든 것도 역시 이 조목에 있습니다. 지금은 실로 신이 의혹을 풀 때이니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른바 ‘장자가 죽는다.’는 것은 어느 때에 죽는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성인이 되고 나서 죽어서 그 아버지가 이미 참최 3년복을 입은 후에 다시 차적자를 세워서 장자라 하고, 그 차적자가 죽게 되자 다시 참최 3년복을 입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와 같다면, 정통(正統)은 둘이 될 수 없고 참최복은 두 번 입지 않는다는 예법의 원칙은 어찌 됩니까. 아니면, 어릴 때 장자가 죽어서 함(含)과 증(贈)도 하지 않고 신주도 세우지 않으며,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해 복을 입지 않아 그가 적통이 되지 못한 경우에, 차적자를 세워 후사로 삼아 차장자라고 하다가, 그가 죽으면 이에 3년복을 입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만일 과연 이와 같다면 허목의 설은 정설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서자가 후사가 되면 3년복을 할 수 없는데 이것은 첩의 자식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진실로 소설(疏說)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첩의 아들이기 때문[妾子故]’이라는 세 글자는 허목 자신이 붙인 것으로 소설에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른바 서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첩의 자식을 말하는 것이지만, 차적자 이하는 비록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역시 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례소(儀禮疏)에서는 ‘서자는 첩의 아들을 칭하는 것이지만 적자의 제2자도 함께 서자라 이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효종 대왕을 인조 대왕의 서자라고 하더라도 틀릴 것이 없습니다. 서(庶)라는 것은 천한 칭호가 아니고 여럿[衆]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예경》에서 고찰해 보더라도 이러한 경우가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의례소에서 말하고 있는 서자라는 것이 과연 첩의 아들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차적자 이하는 포함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소가(疏家)의 본의를 이미 자세하게 알 수 없는 데다가, 다시 다른 글에서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신은 이것을 의심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대저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실로 신이 의심하면서 감히 결단하지 못하던 것입니다. 지금 허목은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있는데, 다만 이 의례소에만 근거를 두어서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글에 증거할 만한 근거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허목에게 물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왕가에서는 대개 사직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예로부터 장자를 버려 두고 서자를 세우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것은 실로 성인이 제정한 권도(權道)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제정하고 법을 세우는 뜻에서는 언제나 차서에 대하여 삼가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왕이 나라를 전할 때에 백읍고(伯邑考)를 제쳐놓고 무왕을 세웠지만 주공이 예문을 제정함에 미쳐서는 반드시 장자와 서자의 차례를 분별하기에 힘썼습니다. 오늘날 의논하는 바도 다만 이 예문에 관해서인데, 마땅히 주공이 예문을 제정한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의례(儀禮)》는 주공이 경(經)을 짓고, 자하(子夏)가 전(傳)을 지었으며 정현이 주(註)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차자로 장자를 삼는다는 설은 없었으며,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이르러 비로소 이 설이 있게 되었습니다. 가공언은 이름 있는 선비이며, 또한 황면재(黃勉齊)가 통해(通解)의 속편(續編)에 거두어 기술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자(程子)·주자(朱子)가 분명하게 증명하지 않은 것이어서 그 설의 본의가 과연 허목이 말한 바와 같은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 지금에 와서 결단코 시행하는 것은 미안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또 소설(疏說)에서도 이미 ‘차자를 장자로 세워도 3년복을 입는다.’ 하였고, 그 아래에 다시 ‘서자가 승중(承重)하면 〈부모가 그 아들에 대하여〉 3년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두 말은 저절로 서로 모순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허목이 기필코 서자를 첩의 아들이라고 여겨 차장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이제 반드시 차장자는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明文)을 얻은 연후에야 허목의 설을 좇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한때의 소견만으로 경솔하게 단정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외에 또 한가지 설이 있으니, 가씨(賈氏)의 소에서는 첫째 아들이 죽은 경우만을 말하였고 첫째 아들이 후손이 없이 죽은 경우는 말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첫째 아들이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일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점인데, 지금 허목의 설은 글의 본뜻을 자세히 생각하여 보지도 않고 갑자기 자기의 주장을 내세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遊)의 최복(衰服)은 과연 모두 생각할 일이 못 되는 것이겠습니까. 또 사람의 인정과 일의 형편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장자가 성인으로 죽었는데도 차장자를 모두 장자로 이름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된 자로서는 한 몸에 참최복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지극히 존귀합니다. 여자가 출가하여도 오히려 감히 〈아버지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지 않는 것이니, 이를 보아도 참최복은 두 번 입을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물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해서 이미 첫째 아들에게 참최복을 입었는데도, 다시 둘째 아들 이하로 수없이 참최복을 반복하여 입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허목은, 제2자로서 승중한 자에게 〈부모가〉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이 《예경》에 보이지 않는 것만을 알고, 제1자가 성인으로 죽었을 경우에 제2자로서 승중한 자에게 참최복을 입는다는 것도 또한 《예경》에 보이지 않음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어찌 하나만을 고집하고 다른 하나를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또 세종 대왕의 경우를 두고 말한다면, 가령 성수(聖壽)를 무강(無彊)하게 누리시다가 문종이 불행하게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면, 세종이 문종의 상사에 마땅히 참최복을 입고 제1대군을 세워서 사자(嗣子)를 삼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1대군이 또 불행하게 일찍 죽을 경우 다시 참최복을 입고 또 제2대군을 세우고, 이렇게 하여 제8대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최 3년복을 입는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문종과 세조를 아울러서 아홉 번의 3년복을 입게 되는 것이니, 3년씩 아홉 번이면 27년이 됩니다. 비록 사서인이라도 마땅히 이렇게 할 수가 없는 일인데, 하물며 제왕과 같은 존귀한 위치로서 그 정통을 지극히 엄하게 하는 경우이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르기를 ‘제왕가에서는 마땅히 즉위한 이를 정통으로 삼아야 하는 것인데, 효종은 이미 종묘 사직을 받들었으므로 〈대왕 대비께서〉 3년복을 입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말도 역시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기로 한다면 하필 차적자에 대하여서만 그러하겠습니까. 비록 잉첩의 소생에 대해서도 모두 3년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광해군이 초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도, 역시 인목 대비가 3년복을 입었어야만 했겠습니까. 만일 ‘임금의 상사에는 비록 시마복(緦麻服)을 입을 친족의 부녀자라도 역시 반드시 참최복을 입는 것이니, 여기에 의하여서도 대왕 대비께서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함을 알 수 있다.’라고 한다면, 이 말도 역시 옳지 않을 듯합니다. 대저 신하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원래 감히 대공(大功)·소공(小功)·시마(緦麻)의 복제로서 대왕의 복을 입지 못하는 법입니다. 지금 효종 대왕은 대왕 대비에 대하여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있는데, 대왕 대비께서 어찌 도리어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제로 대왕을 위하여 복을 입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의심스러운 점들입니다. 원임 대신들이 말하고 있는 바 ‘〈기년복이란〉 대개 부왕이 서자를 위하는 상복 제도요, 모후가 정통을 계승하여 종묘 사직을 받든 적자를 위하여 강복(降服)으로 기년복을 입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하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깨달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오늘의 논쟁하는 초점은 다만 차적까지를 아울러 서자로 호칭하는지에 대한 여부와, 서자를 위하여 마땅히 기년복을 입느냐 하는 여부일 뿐입니다. 부왕이 이미 서자라고 하여 3년복을 입지 않았다면, 비록 이미 정통을 계승하였다고 하더라도 모후가 어찌 감히 홀로 3년복을 입겠습니까. 하물며 대왕 대비께서는 소현 세자의 상례 때에 이미 인조와 더불어서 장자에 대한 복제로써 시행하였으니, 그 의리를 어찌 오늘에 와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대저 신이 예법을 논하는 데에서 실수한 것은, 소(疏)의 의미가 과연 어떠한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우선 명나라의 제도를 좇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명나라의 제도가 과연 옛 성인의 의사에 합치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으나, 공자께서는 ‘지금 주(周)나라의 제도를 쓴다면 나는 주를 따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일에 정한 복제에 대하여 신은 홀로 망령되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지금 허목이 올린 상소가 이러하니, 만일 이것을 강구하시어 십분 지당한 데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 다만 한때의 다행일 뿐이겠습니까. 옛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군신의 복제를 수숙(嫂叔)의 복제로 잘못 정하였다가 기대승(奇大升)의 논박하는 말을 듣고 놀라서 그전의 소견을 고치면서, ‘만일 기대승이 아니었더라면 영원히 죄인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신이 허목에게 바라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을 뿐입니다. 대저 시비가 엇갈리고 피차가 맞서는 것에 대해서는 정자(程子)·주자(朱子)와 같은 커다란 안목과 역량이 없는 한, 한때의 소견만으로 갑자기 여러 사람이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은 어려운 법입니다. 마땅히 의심되는 것은 그대로 남겨 두는 방법으로 처리하여 후세에 바로잡기를 기다리고, 우선은 명백하고 의심이 없는 것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공자께서 말씀하신 ‘의심 나고 편안하지 않은 것은 그대로 둔다[闕疑闕殆]’는 방도인 것입니다. 이는 비록 옹졸하고 껄끄러워 명쾌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관중 역문(關中役文)034) 의 폐단보다는 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감히 달리 드릴 말씀은 없으며 그대로 지난날의 고집과 망령으로 잘못 저지른 죄를 청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병으로 의견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여러 대신들과 우찬성 송시열의 의견을 아울러 서계합니다. 좌찬성 송준길의 차본(箚本)은 비록 예람을 거쳤으나 참고할 일이 있을 듯하여 역시 입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록은 이미 고출(考出)하였다. 다시 대신 및 유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호군(護軍) 윤선도가 상소하기를,
"성인이 상례에 있어서 오복(五服)의 제도를 마련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을 가정에서 쓰면 부자간의 윤리가 이에 밝혀지게 되고, 국가에서 쓰면 군신간의 분별이 이에 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과, 종묘 사직의 유지와 멸망이 여기에 관계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러한 점이 매우 중요하여서 털끝만치라도 틀려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적통을 이은 아들은 할아버지에 대해서 체(體)가 되는 것이니, 아버지가 적자의 상에 대해서 반드시 참최(斬衰) 3년복을 입는 것은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종의 적통을 잇는 때문에서입니다. 사사로운 가정에서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국가에서이겠습니까. 삼대(三代)의 태평한 세상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말세의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불순한 무리들이 틈을 노리는 것을 끊어 버리는 것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국가가 이 예에 대해서 삼가지 않을 수 있겠으며,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잠시라도 소홀히 하여 버려 둘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선왕인 효종 대왕의 상에 있어서 대왕 대비의 복제를 《예경》에서 고찰해 보면, 성인께서 하신 일은 실로 할아버지에 대해서 체(體)가 된다는 뜻에 있었으며, 성인이 예를 제정함에 있어서는 천리(天理)에 근원을 두고 종통을 정한다는 뜻에 있었으니, 마땅히 자최(齊衰) 3년을 입어야 함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초 예관이 의주(儀註)하여 기년(期年)의 복으로 정하자 조야의 신민으로서 식견이 있는 자는 괴이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렇게 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국가의 종통이 이로 인하여 분명치 못한 바가 있으며, 또한 정해지지 못한 바가 있는 듯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통을 밝히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며 종묘 사직을 견고히 하는 예법이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게 되니 놀랍고 한심스럽습니다. 이는 진실로 곧바로 의논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연기(練期)가 장차 급박하였는데도 한 사람도 국가를 위하여 이 말을 올리는 자가 없습니다. 신은 연거(宴居)하며 깊이 생각하는 중에 종묘사직에 대한 근심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에 들으니, 전 장령 허목이 《예경》에 근거로 상소를 올렸다고 하니 신은 진실로 국가에 인재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 허목의 말은 비단 예법의 커다란 원칙을 논하였을 뿐 아니라, 실로 이것은 국가를 도모하는 지극한 계책인 것입니다. 만약 천리(天理)의 절문에 밝지 않고 신하로서의 충성과 믿음이 순수하지 않다면 이런 말은 할 수 있겠으며 감히 이런 말을 올리겠습니까. 이것을 빠뜨리고 듣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마땅히 진심으로 결단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경전에 의거하여 바로잡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송시열에게 하문하신 것은 유신을 우대하는 뜻에서였습니다. 시열은 마땅히, 전날 문순공(文純公) 이황이 기대승(奇大升)의 바로잡을 것을 논박하는 말을 듣고 놀라서 전번의 소견을 고치면서, ‘만약 기대승이 아니였다면 거의 천고의 죄인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라고 한 것과 같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열은 이에 오히려 잘못을 이루고 허물을 수식하려고 하여 《예경》의 문자를 주워 모아 자기의 생각을 부회하고 있으니, 그 말이 매우 번잡합니다. 《예경》에서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참최복을 입는 까닭은 다만 할아버지에 대하여 체(體)가 되는 까닭에서이고 성인이 이 법을 엄히 하게 한 것은 다만 종묘의 적통을 잇는 큰 뜻에 있는 것인데도, 끝내 견해가 미치지 못하여 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으니 신은 실로 그의 말에 승복할 수 없으며 그의 의사를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비록 배운 지식이 없고 본래 《예경》에 어두우나 천리가 있는 것과 성인이 예를 제정한 주된 바에 대해서는 역시 일찍이 이해한 바가 있으며, 그 큰 뜻을 살핀 바가 있습니다. 시열이 잘못 인용한 설에 대하여 신은 청컨대 그 대강의 요지를 뽑아서 조목대로 논하여 변론코자 합니다.
시열은 소설(疏說)에서 ‘차장자를 세워도 역시 3년이 된다.’는 글을 인용하였고, 그 아래 다시 말하기를 ‘지금 반드시 차장자는 서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명확한 글이 있은 연후에야 허목의 말을 인정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야말로 실로 어불성설입니다. 지금 우리 효종 대왕은 바로 인조 대왕의 차장자가 되며, 소설에서도 이미 차장자를 세워도 3년복을 입는다는 명확한 글이 있으니, 대왕 대비께서 자최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터럭만큼의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당연히 행하기만 하면 될 뿐인데 하필이면 다시 ‘차장자는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확한 글을 찾아내라고 허목에게 힐책하는 것입니까. 시열은 말하기를 ‘문왕이 나라를 전해줄 때 백읍고(伯邑考)를 놔두고 무왕을 세웠는데, 주공이 예를 만들 때에 필히 장자와 서자를 구별하기에 힘썼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문왕의 일은 성인이 의를 제정하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권도(權道)가 되며, 주공의 예법은 성인이 법을 세운 떳떳한 도리인 것이니, 이것은 두 성인이 때에 따라 합당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주공이 어찌 백읍고를 위하여 이 예문을 만들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예문을 고집하여 효종 대왕이 적장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대왕 대비께서 3년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의 논의 중에 ‘장자가 성인이 되고 나서 죽은 자’라고 두세 번 말하면서 긴요하게 단정하여 하는 말이 ‘장자가 비록 성인으로 죽었더라도 차장자를 모두 장자라고 이름하여서 참최복을 입는다면 적통이 엄해지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아마도 반드시 성인이 되고 나서 죽었다는 사실에 요점을 맞추려 하는 것입니다. 그 의도는 아마도 ‘장자가 성인이 되고 나서 죽은 경우에는 적통이 장자에게 있으니, 차장자가 비록 원래 동모(同母)의 형제이거나, 비록 이미 할아버지와 더불어 체가 되었거나, 비록 이미 왕위에 나가 종묘를 계승하였더라도 끝내 적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니, 이 말은 역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적(嫡)이라고 하는 것은 형제 중에서 대적하여 짝이 될 수 없다는 칭호이며 통(統)이라고 하는 것은 왕위를 받아서 모든 백성 위에서 위를 계승하여 아래로 전한다는 호칭인 것입니다. 차장자를 세워서 후사를 세웠다고 하여 적통이 다시 다른 곳에 있다는 것입니까. 차장자가 아버지의 명을 받고 천명을 받아서 조상을 계승하고 제사를 주관한 후에도 오히려 적통이 될 수 없으며 적통이 아직도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면, 가짜 세자라는 말입니까. 왕위를 섭정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또 차장자로서 대신 선 자는 이미 죽은 큰 아들의 자손에게 대해서는 감히 임금이 되지 못하여,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은 역시 차장자로 대신 선 자의 신하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시열이 만약 그의 말이 잘못된 것을 깨닫는다면, 반드시 회피하는 말로 변명하여 말하기를, ‘「적통이 엄하지 못하게 된다」라고 한 말은, 다만 만세토록 장유(長幼)의 차례를 엄하게 하기 위하여 한 말이다.’라고 하겠지만, ‘적통이 엄하지 못하게 된다.’는 글의 아래 위의 문장의 형세는 그와 같지 않으니, 누가 그 뜻이 이와 같다는 것을 믿겠습니까. 또 하물며 한갓 장유의 차례만을 엄하게 하고 임금과 신하의 분수는 엄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예로부터 천하에 어찌 이런 의리가 있겠습니까. 하늘의 이치와 성인의 법이 과연 이와 같겠습니까. 아, 고공(古公)이 비록 계력(季歷)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태백(泰伯)에게 후손이 있었다면 고공의 적통은 오히려 태백의 후손에게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온 나라의 인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며, 계력의 자손은 어찌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문왕이 비록 무왕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백읍고가 후손이 있었다면 문왕의 적통이 오히려 백읍고의 후손에게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천하의 인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며, 무왕의 자손이 어찌 보전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이, 종통(宗統)은 종묘 사직을 계승한 임금에게 돌리고, 적통(嫡統)은 이미 죽은 장자에게 돌리려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적통과 종통이 나뉘어서 둘이 되는 것이니 또한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시열 자신도 역시 두 정통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하였으니, 시열의 소견과 지식이 비록 미치지 못한 바는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렇게까지 어두운 데 이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성인으로 죽은 경우’라고 세 번이나 말하고, 다시 ‘적통이 엄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 말에 대하여 신은 감히 그 의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시열은, 망령되지 않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국가의 중대한 예법을 어찌하여 반드시 이러한 사람에게 묻고 의논하여 정하는 것입니까.
시열은 또 ‘아버지된 사람의 일신상에 참최복이 너무 많지 않은가’라고 말하면서, 세종조의 여덟 대군으로서 말을 만들어 실례를 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서는, 세종이 비록 오래도록 천수를 누리시고 여덟 대군이 비록 단명하여 일찍 죽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여덟 대군이 각각 3년씩 섰다가 죽게 되어서, 문종과 세조 두 대왕을 아울러 아홉 차례나 3년복을 입게 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비록 소진(蘇秦)과 같은 궤변으로도 감히 이런 말을 하여 사람의 말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송준길이 차자에서 ‘가령 대부나 사(士)로서 적처의 소생이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첫째 아들이 죽어서 그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3년복을 입었는데 둘째 아들이 죽어서 다시 3년복을 입고 불행하게도 셋째 아들이 죽고 넷째 아들이 죽고 다섯·여섯째 아들이 죽었다고 한다면, 이들을 위하여 모두 3년복을 입어야 하겠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은, 마찬가지로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치인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맞아 떨어져 참으로 이상하니, 똑같은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시열은 의논에서 말하기를 ‘대왕 대비가 소현 세자의 상례에서 이미 인조 대왕과 더불어 함께 장자에 대한 복을 입었으니, 그 의리를 어찌 오늘에 와서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시열이 말하는 그 ‘장자에 대한 복’이라는 것은 어떤 복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 때에 과연 참최 3년의 복을 입었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도 마땅히 소설(疏說)의 ‘차장자를 세워 후사로 삼았으면 부모는 역시 그 아들을 위하여 3년복을 입는다.’는 원칙에 의거하여 3년복으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 혹시라도 기년복으로 시행했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예관이 예를 잘못 처리한 소치이든가, 아니면 혹시 인조 대왕께서 그 사이에 무슨 의사가 있었던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었는지 저것이었는지에 대하여 신은 전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때에 비록 기년복으로 시행하였다고 할지라도, 오늘 효종 대왕의 복제에 있어서는 대왕 대비께서 자최 3년복을 입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열은 말하기를 ‘부왕이 이미 서자라고 여겨서 3년복을 입지 않았다면, 비록 이미 왕통을 계승하였다고 하더라도 모후(母后)가 어찌 감히 3년복을 입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더욱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태자의 태(太)자는 적(嫡)자·장(長)자의 뜻이기도 하지만 더욱 그 이름을 특별하게 드러내어 호칭하는 말입니다. 세자의 세(世)자 또한 적자나 장자의 뜻이지만 더욱 그 호칭을 구별하여 드러낸 것입니다. 태(太)라고 이름하고 세(世)라고 이름하였다면, 그것은 제사를 주관하고 대를 이으며 할아버지와 더불어 체(體)가 된다는 뜻이, 적자나 장자의 두 경우에 있어서보다 더욱 현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세자가 되었는데도 장자라고 부를 수 없다면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소설(疏說)에서 차장자를 세운다는 말이 있게 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에서입니다. 그러나 처음 즉위할 때에 있어서는 차장자라고 지칭한다 하더라도, 이미 즉위하고 나서는 의리상 마땅히 바로 장자라고 이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자가 되었다면 장자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가 죽게 되면 참최복을 입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왕통을 계승하여 임금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장자라고 부르지 않고 그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지 말라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시열은 말하기를 ‘소설에서 이미 「차장자를 세우더라도 역시 3년복을 입는다」고 하였고, 그 아래에서 또 「서자로서 승중을 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두 가지 설은 서로 모순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서자(庶子)가 과연 정실(正室)의 여러 아들에 대한 호칭이라고 한다면 진실로 위의 글과 더불어 모순이 되겠지만, 만약 첩의 소생을 가리켜서 말하였다면 위의 글과 더불어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시열은 무엇에 의거하였기에, 여기에서는 첩의 아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아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확실하게 단정하여 서로 모순이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하여는 진실로 족히 변론할 것도 없습니다. 인조 대왕께서 천시(天時)를 따르고 문(文) 무(武)를 본받으시어, 효종 대왕을 세자로 삼았는데, 효종 대왕께서 이미 세자가 되고 난 후에도, 장자라고 부르거나 적자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서자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물며 국가에 있어서 우두머리가 되고 임금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역시 장자라고 부르거나 적자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서자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까. 시열이 끝내 효종 대왕을 서자로 비견하려는 데에 대하여 신은 또한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시열은 또 ‘참최복은 두 번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근거를 삼고 있는데, 《예경》에서 말하고 있는 ‘참최를 두 번 하지 않는다’는 설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때에 두 지존(至尊)한 이가 동시에 있지 않다는 뜻에 불과합니다. 상례(喪禮)의 시기가 서로 같지 않고 그 지존한 위치에 있어서도 변화가 없다면, 어찌 앞의 상례에서는 참최복을 입고 뒤의 상례에서 참최복을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소에서 ‘차장자를 세우는 경우에도 역시 3년복을 입는다.’는 설이 있게 된 까닭이 되는데, 이 말은 진실로 천리와 성경에 일치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효종 대왕께서 세자가 되셨을 당시를 논한다면 우두머리가 되고 존귀한 것이 소현 세자와 비등하였습니다. 임금으로 부임한 이후에 대하여 논한다면 우두머리가 되고 존귀하기가 소현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소현에 대하여는 유독 참최복을 입어야 마땅하면서 효종에 대해서는 유독 참최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시열의 이 말은 비단 소설(疏說)에 배치될 뿐만 아니고 실은 성경(聖經)에 배치되며, 비단 성경에 배치될 뿐만이 아니라 실은 천리에도 배치되고 있습니다.
시열은 또 말하기를 ‘효종 대왕이 대왕 대비에 대하여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있는데, 대왕 대비께서 도리어 신하가 임금에 대해 입는 복제로 대왕의 복을 입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더욱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성인이 예법을 제정할 때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 것이 아들이 아버지에 대하여 입는 복으로 입는 것이 아니겠으며, 임금이 세자에 대하여 참최복을 입는 것도 신하가 임금에 대하여 입는 복으로 입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말을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아, 선조로부터 아주 믿고 의지하여 전권을 위임해 준 자로는 두 송씨와 같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이오(夷吾)에 대하여 첫째도 중부(仲父)요, 둘째도 중부였으며, 한(漢)나라 소열(昭烈)이 공명(孔明)에 대하여는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으나 어느 누가 이 경우보다 더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창고를 맡은 이로 하여금 곡식을 계속 대어 주고, 주방을 맡은 이로 하여금 계속 고기를 대어 주게 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진 이를 크게 대접하는 예법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조가(朝家)에서는 어진 선비라 지목하였고, 이 두 사람도 역시 유현(儒賢)의 이름을 사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야의 공론은 이들을 어질다고 여기지 않고 있으며, 신과 같이 우매하고 어리석은 자도 역시 그들을 어질다고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맹자는 말하기를 ‘군자가 이 나라에 거처함에 그 임금이 임용하여 주면, 임금은 편안하고 부귀하며 존귀하고 영화롭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임금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이 저와 같이 온전하며, 또한 오래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편안, 부유, 존귀, 영화에 대하여는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임금의 편안, 부귀, 영화에 대하여는 아직껏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어진 선비로 대우하였다면 사부(師傅)로서의 책임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왕을 제대로 보좌하여 인도하지 못하여 함궐(銜橛)의 근심035) 까지 있기에 이르렀으니, 간하여도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떠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직위에 있어 그 책임을 부여해 보자면, 부(傅)가 덕의를 펴고 보(保)가 신체를 보전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심지어 재궁(梓宮)을 제대로 쓰지 못한 일과 같은 것은, 일찍이 만고로부터 어느 국가에서도 있지 않았던 변고입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장사지내는 일은 죽은 이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주자께서도 ‘종묘에 제사드리는 것을 영구하게 하는 계책’을 상소로써 힘써 역설하였으니, 땅의 길흉이 관계된 바가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매우 길한 곳을 버려 두고 결점이 있는 곳으로 나간다면, 묘지를 잘 가려서 편안하게 모시는 도리가 아닙니다. 만세토록 묻히게 될 무덤이 이와 같다면 그 불안한 것이 어찌 한때 뿐이겠습니까. 재해가 잇따라 일어나고 기근이 거듭 겹치게 되니 공사가 모두 빈곤하게 되어 국가는 궁핍하며 백성은 떠돌고 있습니다. 임금께서 ‘비록 함께 풍족하게 살고자 하더라도 백성도 없이 어떻게 임금 노릇을 할 것인가.’하는 근심을 밤낮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부유하다 하겠습니까. 복을 내리고 위엄을 내리는 권한이 윗사람에게 있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있다고 한다면, 진실로 존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오히려 적자나 장자가 될 수 없으며, 조가(朝家)에서 대우하는 예법에 있어서도 오히려 여러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대우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비단 천리(天理)와 성경(聖經)에 크게 어긋날 뿐만 아니라 존귀하지 못한 것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편안하지 못하고 부귀하지 못하며 존귀하지도 못하다면, 영화롭지 못함은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쓴 효험이 이와 같다면, 예로부터 천하 국가에서 누가 어진 이를 쓰는 것이 귀하다고 하였겠습니까.
아, 이 두 사람의 학식과 심술(心術)에 대하여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일과 행적을 살펴 헤아려 보건대, 어질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저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유독 예에만 밝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일생토록 강론한 바가 예학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학으로 추존을 하고 있으며 자신도 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커다란 예법에 대한 소견에서의 잘못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자신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더불어 논할 수 있겠으며, 국가를 견고히 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계책을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아, 딱하다고 하겠습니다.
송시열은 의논 끝 부분에서 말하기를 ‘만약 이것을 강론하고 밝혀서 십분 지당한 데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 다만 한때의 다행한 일일 뿐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시열이 진실로 이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시비를 가려 바로잡는 말을 꺼려 하지 않을 것이니, 시열의 이 말은 진실로 취할 만한 것입니다. 송준길이 의논한 끝 부분에서도 이르기를 ‘천하의 의리는 끝이 없으며 글 뜻에 대한 견해는 각기 다르니, 또 어찌 그렇고 그렇지 않은 것을 하나로 단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자기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뿐만이 아니라면, 이 역시 취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선대에서는 자기 아랫사람의 복제에 대해서는 대부분 간략한 것을 좇아서 강복을 하였으므로 3년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찌 지금에 와서 다시 옛날의 예법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등(滕)나라의 대부가 선조의 단상(短喪)의 설을 따르는 것은 예가 되고, 맹자가 문공(文公)에게 3년상을 행하도록 권한 것036) 은 예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또 옛날 국가가 견고한 때에는, 비록 강복을 하더라도 다만 이것이 실례가 되어 수치가 될 뿐이요, 종묘 사직에는 그래도 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상하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기가 되어서는, 어찌 이러한 대통(大統)을 밝히는 큰 예법을 조금인들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이들은 당초에 일이 이미 잘못 정하여졌으므로 이제 미루어 복제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옛날 송나라에서는 임금의 상사에 다만 천담색(淺淡色)으로 상복을 만들어 입었는데, 유신인 주자(朱子)가 건의하여 추후로 고쳤으니, 오늘날에 기년복으로 강복을 하는 것이 송나라에서 천담복을 입은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면, 주자가 추후로 건의하여 고쳤던 것과 같이 하더라도 이것은 실로 멀리 오래되지 않은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뜨거운 것을 잡고도 찬물에 담그지 않으며, 서리를 밟으면서도 장차 얼음이 얼 것을 경계하지 않다가 끝내 아랫사람들에게 국가 종통이 정하여지지 않았다는 의심을 갖게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규곤(閨壼)에서 상을 행하는 것은 남자의 경우와는 다르니 3년의 제도로 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 같다.’라고 하는데, 이는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효자가 상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역시 ‘시기를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서 이를 행한다.’고 하는 글이 있습니다. 지금 대왕 대비의 복제는 3년으로 의주(儀註)를 고쳐서 팔방에 행회(行會)하고, 대소 신민으로 하여금 조정의 의논에 다른 뜻이 없음을 확실하게 알도록 하여, 이로써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로써 국시를 정하며 이로써 국가의 형세를 태산과 같이 편안하게 놓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규곤에 관한 세세한 절목들은 한결같이 ‘시기를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서 이를 행한다.’는 《예경》의 교훈을 따른다면 어찌 안 될 일이 있겠습니까. 대개 소설을 지은 사람들은 성인이 아니었으니, 어찌 한마디라도 성경에 합치되지 않는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천리에 미루어 합치되지 아니하고 경전을 헤아려서 합치되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리에 미루어 합치되고 경전을 헤아려서 합치되는 것이라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의 설에서 이른바 ‘차장자를 세워도 역시 3년복을 입는다.’는 설은 진실로 천리와 성경에 합치되고 있으니 이는 실로 명백하게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예법을 논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이 설을 따라야 할 것이요, 다른 것에서 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기년으로 복을 마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며 3년상으로 정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말한 바는 모두 신이 만들어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실로 이는 성인께서 《예경》에 남긴 뜻으로서, 천리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바로잡기를 도모하소서. 신은 묘충(畝忠)을 이기지 못하여 다만 군부와 종사가 있는 것만을 알고 저 자신은 돌아보지 않은 채 시휘(時諱)를 저촉하고 위망한 말을 올렸으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람이 못났다고 해서 말까지 버리지 마소서. 신은 이 상소가 들어가고 들어가지 않음과 이 말이 시행되고 시행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임금의 권세가 굳건하고 굳건하지 못함과 나라의 운수가 길고 짧음을 점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소를 정원에 올렸다. 승지 김수항(金壽恒)·이은상(李殷相)·오정위(吳挺緯)·조윤석(趙胤錫)·정익(鄭榏)·박세성(朴世城)이 아뢰었다.
"지금 부호군 윤선도(尹善道)의 상소가 승정원에 도착하였는데, 그 상소의 말을 관찰해 보니 예법을 논한다고 가탁하고 있으나 생각이 음흉하여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이고 현혹하는데 조금도 꺼림이 없었습니다. 왕명의 출납을 맡은 도리에 있어서는 이러한 상소를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지만, 다만 생각건대, 옳고 그른 것과 사악하고 바른 것이 성감(聖鑑)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상소를 받아들인 이후에 오직 성상께서 그 실정을 통촉하시어서 밝게 가려서 엄히 배척하는 데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지레 먼저 물리쳐서는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소를 받아들인 뜻을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상소를 어찌하여 이미 알고도 받아들였는가?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고는, 드디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 참의 윤선도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며, 감히 음험한 상소를 올려 상하의 사이를 헐뜯고 참소하기를 매우 낭자하게 하였으니 그 죄가 피할 곳이 없다. 마땅히 엄한 법률로 적용해야 하겠지만 차마 벌주기 어려운 바가 있으니, 일단은 가벼운 법률을 적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쫓아내라."
하였다.
4월 19일 계묘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엎드려 비망기를 보니, 윤선도의 관직을 삭탈하여 쫓아내라는 명을 특별히 내리셨습니다. 사설을 통렬히 배척하는 말의 뜻이 엄절하여 해와 달의 밝음으로 허황된 작태를 통촉하시는 상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무릇 보고 듣는 자로서 누구인들 흔쾌하게 여기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다만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이미 윤선도의 상소를 듣고는, 감히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이미 성문 밖을 나갔다고 합니다. 요즘 성상께서 오직 이 사람만을 의지하고 계시는데, 문득 음흉한 말로 무고를 당하여 황급히 성문을 나갔으니, 아름답지 못한 형상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현인의 진퇴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합니다. 상께서 별도로 위로하고 타일러서 지극한 정성으로 머물도록 권면하신다면, 거의 선조께서 예로 대우하신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며 준길도 역시 어찌 차마 조정을 떠나려는 생각을 품겠습니까. 신들이 가깝게 모시는 자리에 있으므로 감히 구구한 생각을 아뢰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들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우찬성이 떠나간 이후로 심사가 편하지 못하여 오직 좌참찬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지금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놀라고 기가 막혀서 말할 바를 모르겠다. 경황이 없어 말이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곧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가주서 유명윤(兪命胤)이 명을 받들고 송준길에게 전유하니, 아뢰기를,
"신은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도 조금의 보탬이 없으니, 마음에는 항상 부끄럽고 두려운 나머지 마치 깊은 연못과 계곡으로 떨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 더러 지나치게 외람되다고 책망을 하거나 전도되고 망령되다고 꾸짖는 자가 있더라도 신은 진실로 이를 마음 속에 달게 받아들여야지 어찌 마음에 감정을 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번에 윤선도의 상소를 살펴보니 그 생각과 말을 꾸민 것이 실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차마 읽지 못하겠고 또한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비록 합문(闔門) 밖에서 주륙을 당하더라도 그래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진실로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거적을 깔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뒤에 들으니, 성상의 분부에 이미 지휘함이 있었다고 하니, 신은 감히 다시 이러한 거조를 하여 거듭 성상의 심회를 피곤케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감히 도성 안에서 태연히 지내면서 다시 조종 진신의 반열을 더럽히겠습니까. 강 밖으로 물러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성상께서 깊이 생각해 주시어 멀리 사관을 보내 간절하게 위로하여 타이르시니, 신은 받들어 거듭 읽으며 눈물이 쏟아져 진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비록 어둡고 보잘것없으나, 어찌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또한 어찌 임금의 간절하고 절박한 뜻이 말에 흘러 넘치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신이 이미 이러한 비방을 받고 있는데, 또다시 재신들의 반열에서 양양거리며,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게 된다면, 사방에서 보고 듣는 것이나 거리에서 헐뜯고 의논함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사부(士夫)의 처신에서는 염치가 중요한 것인데, 이미 염치를 잃었으니, 장차 무엇으로써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진실로 전하께서 신을 가엾게 여겨 신에게 죄를 가하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역시 마땅히 신을 체직시켜 신이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신으로 하여금 문을 닫고 허물을 반성하게 하여 사람들의 말에 대하여 보답하고 말년의 절개를 보존하게 해 주소서. 이는 실로 천지 부모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낳고 이루게 하는 덕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 교리 안후열(安後說), 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도승지 김수항도 입시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어제 윤선도의 상소를 입계한 후에 상께서 처리하신 것은 진실로 지당하여 여러 사람들이 흔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다만 그 상소 중의 말이 매우 흉악하여, 심지어는 신하된 자로서 차마 하지 못할 말까지 장황하게 멋대로 늘어 놓아 마치 고변(告變)을 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무릇 악역(惡逆)으로 사람을 무함하려는 자에 대해서는, 끝내 실정이 사실과 같지 않을 경우 반좌(反坐)를 하는 것이 예입니다. 송시열과 송준길의 죄가 과연 선도의 말과 같다면 저절로 이에 해당하는 죄율이 있겠으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선도의 죄는 결코 시골로 쫓아내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세정과 후열이 모두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뜻이 정하여지지 못하였다.’든가, ‘안위(安危)에 관련된 바’라는 등의 말은 매우 흉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상소에서 이른바 ‘이 상소가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함’이라는 말과, ‘나라의 운수가 연장되고 연장되지 못한다’는 등의 말은 더욱 흉참하다. 나의 생각으로도 역시 그의 죄가 마땅히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니 일단 가벼운 법을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수항은 말하기를,
"이 사람을 비록 엄한 법률로 다스린다고 할지라도, 송준길은 이미 황급하게 도성을 떠났으며 송시열이 조정에 돌아오리라는 것도 역시 기약할 수 없으니, 그의 흉계는 이미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시열이 내려갈 때의 이른바 유언 비어도 필시 또한 이 무리에게서 나왔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우찬성이 내려갈 때에 세 가지 일로서 상소하여 인책하였는데, 지금 여기 선도의 상소에서 재궁(梓宮)과 산릉(山陵)의 두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고 있으니, 그것을 이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상소 중의 말뜻은 흉참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심지어 위로 선왕을 범한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마음이 애통하고 이가 갈림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성상의 덕으로서는 비록 차마 엄한 벌을 주지 못하겠다고 하시더라도, 국경 변방 끝에 던져 버리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상소도 역시 의례대로 돌려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땅히 조정에 보이도록 하여 그 죄상을 밝히고 태워 버리도록 하소서."
하고, 수항이 말하기를,
"그의 죄상을 따져 보면 국문을 해도 되겠습니다. 시골로 쫓아내는 것으로는 그의 죄악을 징계하기에 부족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전지(傳旨) 중에 ‘시골로 쫓아내라.’는 말은 ‘국경의 변방으로 쫓아내라.’는 말로 부표(付標)를 고치고, 그 상소는 대신들이 함께 모였을 때 보여 주고 처리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수항이 말하기를,
"선도는 평소 불길한 사람으로 칭해지고 있었는데 시대에 버림을 당하게 되자 쌓여 있던 울분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였다. 유계가 말하기를,
"지난해 선도가 역시 소를 올린 적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무슨 상소였는가."
하고 물으니, 유계가 아뢰기를,
"정개청(鄭介淸)이 은사를 배반하고 간인에게 붙었다가 일찍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죽었는데, 그 무리들이 사우를 지으려 하자 송준길이 일찍이 경연 중에 아뢰어 이를 헐게 하였습니다. 선도가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장황하게 상소를 아뢰었으나 그 때 상의 건강이 편안치 못하여 정원에서 계품하여 환급하였더니, 지금에 또 상소를 하여 임금을 현혹시킬 계책을 삼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유명윤을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가 좌참찬이 있는 곳에 갔을 때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
하니, 명윤이 아뢰기를,
"감동하여 우는 외에 별로 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신이 묻기를 ‘상께서 만약 조정으로 들어올 것인가에 대하여 묻는다면 마땅히 어떻게 아뢰면 되겠는가.’ 하니, ‘이번만큼은 결코 다시 들어가기 어렵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고 물으니, 수항이
"서빙고 강가에 있습니다."
하였다. 명윤이 아뢰기를,
"상께서 기필코 불러서 대면코자 하신다면, 잠시동안 마주보고 얘기하는 정도는 아마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수항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준길을 만났더니 말하기를 ‘상께서 머물라는 권고가 은근하고 간절하며 또한 연기(練期)가 눈앞에 닥쳤으므로 차마 결단해서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지체하며 머물게 되었는데, 지금 뜻밖의 일을 만나고 보니 머무르면서 연일(練日)까지 기다려서는 안 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상께서 지금 이미 그 흉측한 말을 통촉하셨으니, 만약 지극한 정성으로 머물도록 만류하신다면 어찌 가벼이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승지는 가서 내가 말한 대로 전하라. 음흉한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속의 흉계를 펴려고 조정을 괴란시키고 있는데, 그 사이에 말해 줄 만한 일이 많이 있으니 모름지기 한번 들어와서 서로 잠시라도 만나 봐야겠다."
하였다. 수항이 명을 받들고 가서 유시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당한 바를 돌이켜 보면 이는 실로 심상하게 비방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성상께서 통촉하시어 신에게 엄한 벌을 내리지 않으시나, 신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향리로 물러나와 문을 잠그고 허물을 반성하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어찌 은총과 영예를 탐내고 그리워하여 이로써 더욱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4월 20일 갑진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도승지 김수항에게 하교하기를,
"좌참찬 이 비록 떠나려 하고 있지만 그를 머물도록 권하는 도리는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대는 다시 가서, 반드시 한번 들어와서 상견하라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유시를 전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수항이 대답하기를,
"지난번에 신이 준길에게 ‘서계한 외에 만약 상께서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을 하면 되겠는가.’하고 물으니, 준길이 ‘다시 들어가서 배사하고 싶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상께서 바야흐로 상소한 사람을 다스리는 이 때에 태연히 들어가는 것은 염치에 관계되니, 다만 마음을 상소로 진술하여 이로써 성상의 처분만을 기다리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사간 박세모(朴世模) 등이 아뢰기를,
"윤선도의 상소는 주장한 이론과 생각이 매우 흉참하여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상복에 대한 문제로 서로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오직 《예경》에 맞게 하여 합당하게 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종사의 편안함과 불안함이나 국조가 연장되고 연장되지 못하는 것이 어찌 털끝만치라도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선도는 예를 논한다고 가탁하고는 흉계를 이루고자 하여, 이에 감히 ‘대통(大統)이 밝혀지지 않아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않고 종사가 견고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며, 장황하게 현란시키고 천청(天聽)을 어지럽혔으며, 반드시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 꾀했다는 죄를 어진 선비에게 덮어씌우려 했습니다. 이것은 다만 사람을 무함하여 고변(告變)을 하는 글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선한 이들을 질투하여 기회를 틈타 해치려는 소인들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어찌 흉악하고 사특한 것이 이보다 심하였겠습니까. 아, 두 신하에 대해서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재궁(梓宮)과 산릉(山陵)의 일을 가지고 창언하여 어지럽혔으며, 심지어는 함궐 등을 말하기까지 했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신하된 도리로서 차마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감히 다시 선왕을 범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꺼림이 없으니 더욱 마음이 놀라고 몸이 떨림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선도의 죄가 위로는 종묘 사직과 선왕에 관계되어, 결코 죽음으로도 용서되지 못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왕법으로 논하자면 결코 유배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청컨대 속히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어찌 그대들의 청을 기다리고 나서 이를 따르겠는가.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였다.
"신은 허물을 쌓고 은혜를 저버린 탓으로 비방을 받은 것이 태산과 같아서 기로에서 방황을 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성상께서 헤아려 살펴 주신 덕으로 비단 엄한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침에는 사관을 보내고 저녁에는 승지를 보내어 자세하고도 지극히 간절한 생각을 전유하시니 남달리 특별한 은혜는 천고에 뛰어났습니다. 신은 진실로 감격하여 죽을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모멸한 후에 사람들이 모멸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은 평소의 언행이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탓으로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상대방이 천하게 얕잡아 부르는 칭호가 대단히 치욕스러운 것은 아니나, 그런데도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을 확충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개 치욕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신은 비록 보잘것이 없으나, 사대부가 나가고 들어오는 도리에 있어서 나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여긴다는 의리에 대하여는 익숙하게 알고 있습니다.
신의 죄상이 진실로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비록 대궐에서 주륙을 당하더라도 역시 남은 죄가 있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분별하여 밝히셔서 유사의 법률로 논하지 않게 하려 하셨으나, 신의 할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마땅히 몸을 이끌고 물러나 두려운 마음으로 숨을 죽이고 있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때에 스스로 ‘사람들이 비록 말을 할지라도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여, 은혜를 믿고 은총을 의지하여 눈썹을 치켜 뜨고 기염을 토하며 거듭 대궐을 드나들면서 다시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다면, 바로 옛날 사람이 말한 바 ‘수치를 모르는 인간’인 것입니다. 어찌 선비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스스로 비루한 인간이 되는 것을 달게 여기겠습니까.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역시 인간의 도리는 알고 있으며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다른 사람보다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상을 뵙고서 간절한 심정을 모두 아뢰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만, 일이 궁색하고 이치가 막히게 되어 몸둘 곳도 없게 되었으니, 아, 역시 운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신에게 하교하시고자 하는 것에 대해 진실로 이미 마음속으로 묵묵히 알아차렸습니다. 신이 우러러 아뢰려고 하는 바에 대해서 전하께서 어찌 묵묵히 헤아리지 못하시겠습니까. 직접 얼굴을 맞대고 깨우쳐 주고 나서야 비로소 상하의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번 송시열이 떠날 때에 신은 굳이 떠날 것은 없다고 여겼습니다. 탑전에 이르러서 아뢰기까지 하였으니, 신이 어찌 일찍이 이러한 거조를 하고자 하였겠습니까. 다만 지금의 경우는 실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신이 비록 잠시 머물려고 하더라도 역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지극한 마음을 헤아리시어 시급히 신의 직책을 면하도록 허락해 주소서. 신으로 하여금 분분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벗어나 조용하게 물러나서 문을 닫고 허물을 반성하도록 하시어서, 온전히 만년의 절개를 지켜서 사람들에게 천하고 악한 물건으로 버림받는 것을 면하게 하여 주신다면, 천지 부모가 낳고 이루어 주는 은혜를 비록 죽더라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외에는 달리 구구하게 지극한 바람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물러나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어찌 감히 밥 먹고 쉬는 겨를이라도 우리 임금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신명으로 말미암아 그래도 갑자기 죽지나 않는다면, 다시 앞 자리에서 모시게 될 것을 어찌 기약하지 못하겠습니까. 감정이 앞서고 목이 메어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나라가 불행하여 참소하는 흉악한 말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경의 불행일 뿐이겠는가. 경이 만일 돌아갈 뜻을 굳혔다면, 내가 감히 독촉을 하겠는가. 상견하는 일이야 인정으로 보나 이치로 보나 조금도 구애될 것이 없을 듯한데, 어찌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하다고 말하는가. 경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체득하여 들어와서 지극한 바람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4월 21일 을사
충홍도 홍주(洪州) 상전리(上田里)에 길이가 2장, 두께가 4척이나 되는 큰 돌이 있었는데, 가까운 거리에 거꾸로 섰다. 지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보았는데, 목사 김우형(金宇亨)이 가서 보니 돌 끝에 한 척쯤이 흙색을 띠어 땅에 묻혔던 흔적이 확실하였다고, 도신이 아뢰었다.
경상도 대구(大丘)·경주(慶州) 등 아홉 고을에 이번 4월 5, 6, 7일 밤 연이어 서리가 내렸고, 진주(晋州) 지리산에는 5일에 눈이 가득 쌓였다고 도신이 아뢰었다.
관학생 이재(李㘽) 등 1백 35명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윤선도가 예를 논한다고 칭탁하고는 감히 사설을 아뢰어 매우 음흉한 말로 천청(天聽)을 현란시켰으며, 심지어 우찬성 송시열과 좌참찬 송준길의 이름까지 거론하여 마음대로 훼방하고 배척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꺼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종사를 편하게 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대통(大統)을 하나로 한다.’는 것인데 그 말을 만들고 마음을 쓴 것이 실로 기회를 보아 함정에 빠뜨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 간사한 작태가 역시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준길이 조정에서 불안해 하며 이미 성문을 나가 한강을 건너려 하고 있습니다. 조야에서 탄식하며 애석해 함과, 사림에서 희망을 잃은 것이 그 어떠하겠습니까.
이 두 신하는 은거하며 뜻을 기르고 산림에서 덕을 쌓다가, 다행히도 전고에 없는 선왕의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에 힘입어, 초야에서 발탁되어 재추(宰樞)의 반열에 서게 되어, 이로써 경연에서 성심껏 인도하였고, 이로써 세자를 보좌하여 인도하였습니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하를 보필한 사심 없는 순수한 충성과 바르고 깨끗한 인망이 오랠수록 더욱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지난번 떠도는 말이 한번 일어난 일로 세상의 모범이 되는 어진 이가 낭패하여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세상의 도가 불행한 것이 진실로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귀신과 같이 간사한 것이 또 몰래 기회를 보아 해치려는 계획을 내어, 어진 이를 모멸하고 옳은 이를 욕보이기를 남김없이 끝까지 하니 무릇 듣고 보는 자로서 누가 원통해하고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 이미 그 흉악하고 사악한 사정을 깊이 헤아려 살피셔서, 특별히 엄한 견책을 내려 쫓아내시니 사람들이 모두 성상의 밝으심을 흠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가기는 어렵더라도 물러나기는 쉽다는 마음을 가지고, 호연하게 떠날 뜻을 결정하여 한강 가에 나가 머물며 막 길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아마 전하께서도 이미 들으시어 알고 계실 것이며, 또 오직 전하께서도 이미 머물도록 만류하셨을 것입니다만, 간사한 인간이 날조하여 모함하는 것이 이와 같이 참혹하니 어진 선비의 거취는 오직 의에 따를 뿐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성의를 다하고 예를 다하여 그의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전하를 위하여 구차하게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선왕께서 전하를 보필하도록 위촉한 신하가 일찍이 몇이 되지 않았는데, 연이어 떠나 가서 지난번에 이미 그 한 사람을 잃었으며 지금 또 한 사람을 잃게 된다면 전하께서는 누구와 더불어서 옳은 일을 할 것이며, 정치에 있어서 통하지 않는 곳이 있거나 의문나는 일이 있을 때에 누구에게 자문하여 처리하겠습니까. 군자는 믿을 곳이 없게 되고 소인들은 거리끼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니, 말학 후생들은 역시 어떻게 덕을 고찰하고 학문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신들과 같은 이는 이름이 성균관에 편성되어 외람되이 장보(章甫)에 끼이게 되었으므로, 이와 같이 고명한 스승을 얻은 것을 긍식(矜式)으로 여기고 있으며, 가르쳐 인도하는 사이에 유익함이 진실로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승의 자리를 치워 버려 강론과 해석을 들을 길이 없게 되니,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며 모두들 그가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아직 돌아가지 않은 이 때에, 그가 머물도록 더욱 정성과 예를 힘쓰시어 온 나라 많은 선비들의 바람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정성과 예가 부족하여 그의 뜻을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낯이 부끄러워 어떻게 유시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성의를 가지고 머물도록 만류해 보겠다."
하였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堥), 정수(鄭脩)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보니, 앞머리에서는 ‘오늘날의 국가 안위가 조석에 달려 있다.’하였고, 끝에서는 ‘임금의 권세가 견고하고 견고하지 못함과, 국가의 운수가 연장되고 연장되지 못함’이라고 하여 흉악한 말과 어그러진 말들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마치 조급하게 변고를 아뢰는 듯이 하여 성상을 놀라게 하고 인심을 현란시키고 있으니, 그가 마음을 쓰고 있는 흉악하고 사특한 형상은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를 의논하는 일이 종사의 안위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감히 ‘종통(宗統)이 밝지 못하여 여러 사람의 뜻이 정하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멋대로 장황하게 늘어 놓는 것입니까. 또 재궁과 산릉 두 가지 일을 가지고 두 신하를 얽어 날조하려는 자료로 삼아, 심지어는 ‘보좌하여 인도하지 못하여서 함궐의 근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 말은, 위로는 선왕을 범하여 더욱 흉악하고 어그러졌습니다. 원근에서 이것을 듣는 자들은 누구인들 마음이 애통하여 이를 갈지 않겠습니까. 그의 속마음은 아마도 예를 의논한다는 이름을 빗대어서 선한 이들을 무함하여 해치려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니, 아, 역시 가혹하다 하겠습니다. 지난번 송시열이 떠날 때에 이른바 유언 비어를 필시 이 사람이 만들어 냈으리라는 것은 진실로 성상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습니다. 극악 무도하다고 사람을 무함하는 경우에는 저절로 반좌(反坐)시키는 법률이 있거늘, 하물며 말이 선왕에게 관계되고 일이 종사에 관계되었으니 어찌 평범한 유배에 그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속히 윤선도를 국문하도록 명하시어 법률에 따라 처단하소서.
무릇 대간에서의 논의는 동료들이 서로 상의한 후에는 다시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체모나 의례로 당연한 것입니다. 지난 저녁에 신들이 장령 강호(姜鎬)와 더불어 대청에서 상회례(相會禮)를 행하고 이어 윤선도의 일에 대해 말을 꺼냈는데, 초안을 잡으려다가 마침 대궐문을 닫으려 하여 곧바로 파하여 나오면서 오늘 아침에 서둘러 일찍 모여 의논하기를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모두 모인 후에 강호는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병이 어느 정도 심한지는 비록 알지 못하겠으나, 바야흐로 공공의 의논이 형성되는 즈음에 현격하게 모면하여 회피하려는 흔적이 있습니다. 대간의 일과 체모로 어찌 이와 같은 일을 용납하겠습니까. 장령 강호를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어찌 경들의 청을 기다린 후에 이를 따르겠는가. 마음에 차마 할 수 없는 바가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강호를 체차시키는 일은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이 아뢰었다.
"윤선도(尹善道)를 법률에 따라 처벌하자고 청한 것은 실로 법을 밝히고 죄를 다스리자는 뜻에서 나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성상의 비답을 받고 보니, ‘내가 어찌 너희들의 청을 기다렸다가 이를 따른단 말인가. 마음속에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들도 성상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돌아보건대 선도의 죄는 반드시 복주하여 용서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고 있으며 국가의 법이 지극히 엄밀하니, 성상께서 비록 보살펴 주고자 하시더라도 사사로이 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선도의 상소는 밖으로는 예를 논한다고 가탁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가슴에 품은 생각을 마음대로 하여 장황하고 현란한 것이 끝이 없으니, 한 글자 한 구절도 화를 일으키려는 흉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대통(大統)이 밝지 못하므로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못하고 종사가 불안하다.’고 한 것은, 바로 종사를 위험하게 도모한 죄를 송시열 등에게 덮어씌우려는 것입니다. 재궁(梓宮)과 산릉(山陵)의 일을 가지고 몰래 미혹하여 어지럽히고 날조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기미로 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위복(威福)이 아래로 옮아 갔다.’든가 ‘주상의 위세가 견고하지 못하다.’는 등의 말은, 신하로서는 매우 흉악한 죄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천하에 아주 못된 죄인 것입니다. 시열 등이 이미 이러한 죄상이 없다면 선도가 어찌 날조하여 모함한 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무릇 극악 무도한 죄로 다른 사람을 무고한 자에 대해서 반드시 그 법률로써 반좌시키는 것은, 어찌 무고(誣告)한 죄가 악역(惡逆)한 죄와 같아서가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간사하고 흉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해치고 국가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임금이 그에게 속아 화란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었는데, 지금 다행스럽게도 성상께서 하늘의 태양처럼 위에 계셔서 터럭만큼도 남김없이 정상을 모두 살피셨으니, 죄를 징벌하는 법전을 엄하게 하여 참소하는 적들의 날뜀을 막는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물며 상소 중에 위로 선왕을 범한 말은 오늘날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말이 아닌데도, 선도가 이에 감히 함부로 말하며 꺼릴 줄 모르고 있으니 이는 실로 선왕의 죄인인 것입니다. 어찌 그대로 유배에 그치게 하여 세상에서 살아 숨쉬는 것을 허락하는 것입니까. 윤선도를 법률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22일 병오
도승지 김수항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강가로 달려가서 분부대로 좌참찬 송준길에게 유시를 전하였더니, 준길이 말하기를 ‘상소를 올려 너그러운 살핌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곧바로 다시 도승지를 보내어 유시를 전하게 하시니 신은 이에 더욱 감동하여 흐느끼며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상소에서 이미 모두 진술하여 아뢰었으므로 다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원하옵기는 성상께서 더욱 애긍히 살피소서. 신이 북쪽으로 머리를 돌려 궁궐을 바라보니 다만 저절로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세 번이나 명을 받들고 송준길에게 유시를 전하였으나 끝내 그가 떠나는 것을 저지시켜 성상의 간절하신 뜻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송준길의 행차가 이미 강을 건넜을 것이므로 다시 미칠 수 없겠으나, 성상께서 더욱 정성과 예를 힘쓰시는 도리는 역시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별히 편지를 내려, 지금은 떠나더라도 속히 조정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뜻을 담아 지극한 정성으로 거듭 타이르신다면, 준길도 역시 어찌 끝내 돌아오지 않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쇠약하고 병든 사람이 개인의 말을 타고 길을 떠나자면 반드시 어렵고 고생스러운 염려가 많을 듯하니, 유시를 내려 말을 지급하도록 하는 거조가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정성과 예가 부족하여 그가 떠나는 것을 붙잡아 머물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허전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였다. 이어 양도(兩道) 감사에게 명하여 말을 내려 주고 호송하도록 하였다. 준길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밤에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아 보니 한 통의 서찰 열 줄 속의 내용이 진실로 간절하였으며, 심지어 사관으로 하여금 유시를 전하게 하시고 아침이 되자 또 승선을 보내어 들어와 대면하기를 재촉하시니 신과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분수에 넘치는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성상의 비답에서 다시 ‘반드시 상견하고 떠나라.’고 하셨는데, 신은 목석이 아니어서 또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성상의 분부가 없었더라도 성상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고 떠나고자 하는 생각이야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종적은 이미 매우 위태롭습니다. 하물며 지금 바야흐로 대각에서 의논이 일어나 법률의 적용을 매우 엄하게 하고자 하며, 또 듣자하니 성균관에서도 상소가 있었다고 하니 더욱 그 어지럽고 번거로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이러한 때에 얼굴을 바로 들고 조정에 나아가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게 된다면, 이는 비단 신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도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간절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생각과 처지를 가련히 여기시고 신의 충심을 살피시어 속히 신의 직책을 체직시켜, 신으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해 주소서. 또한 신이 떠난다는 것으로 성상의 마음에 개의치 마시고, 더욱 성스러운 옥체를 보중하시고 더욱 성스러운 학문에 힘쓰소서. 큰 명을 받아 이으시어 이로써 큰 대업을 이루신다면, 신이 비록 물러가 시골에 엎드려 있다고 하더라도 앞 자리에서 가깝게 모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은 매번 선정신 이이(李珥)가,
배를 타고
차마 종남산을 멀리할 수 없어
사공에게 일러
돛 올리지 말게 하네
라고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세 번을 반복하여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신의 심정과 처지가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출발을 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할 말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이미 돌아갈 뜻을 굳히니 나의 서운한 마음과 그대가 황급히 돌아가는 형색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그대가 비록 이미 물러간다 하더라도 속히 마음을 바꾸기를 도모하라. 내가 날마다 이를 기다리고 있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헌납 목내선(睦來善)이 1소(所) 강경 감시관이 되어, 1소에서 강(講)에 응시한 거자들의 수가 2소의 두 배인데도 고시를 신중히 하지 않고 출방(出榜)을 너무 서둘러서 거자의 원망이 있게 되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지평 정수(鄭脩), 대사헌 김남중(金南重)도, 1소의 시관이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다. 양사에서 처치하여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내선은 불러도 나오지 않고 다시 인피하였다. 간원에서 처치하기를,
"드러나지 않은 물의를 스스로 일으켜서는 끝내 고범(故犯)에 이르게 되었으니 일이 매우 구차합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아마도 내선은 윤선도를 법률에 따라 처리하자는 의논에 참여하고자 아니해서였다.
4월 23일 정미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윤선도의 상소 중의 말뜻은 진실로 감히 모두 진달하지 못하겠으나, 그중에서 재궁(梓宮)에 관한 일은 소신이 홀로 책임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또 예법을 논할 때 예로써 결단하여 정하지 못하고, 다만 국가에서 이미 행한 법규에만 의거하여 우선 진달하다 보니 이 때문에 점차로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감히 허물을 감당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지는 못하겠으나 진실로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송 참찬이 떠나가서 지금 애석하게 여기고 있는데 경마저 물러가고자 한다면 내가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하였다. 좌상 심지원(沈之源)은 아뢰기를,
"그 때에 소신이 총호사(摠護使)로 있었으니 만약 잘못이 있었다면 마땅히 신이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다만 영상뿐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단 경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 불안하다. 오늘 예를 의논하는 일에 있어 대신들도 감히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으니 내가 장차 무엇을 가지고 정하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말하기를,
"허목의 상소는 예에 의거하여 진달하였으나 송시열 등이 말한 바도 역시 예문에 의거하였습니다. 스스로 예법에 밝은 자가 아니라면 진실로 감히 결단하여 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과 같은 자는 일찍이 예가에 종사해 본 적이 없으니 무슨 소견으로 감히 커다란 예법을 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의 예법에는 아들을 위하여 3년복을 입는 제도가 없기에 신은 이것으로 의견을 올립니다. 대신과 유신, 그리고 대간들이 지금 모두 입시하고 있으니 하문하소서."
하였다. 상이 각기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뢰도록 하니, 지원(之源)이 아뢰기를,
"상례와 제사는 선조를 따르는 법인데, 조정에서 행하지 않던 일을 오늘에 행한다면 신은 그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는 아뢰기를,
"허목의 설에는 모순이 많으며 송시열의 말이 옳습니다."
하고, 대사간 이경억은 아뢰기를,
"예론은 송사와 같은 점이 있어서 이설이 많으니 만약에 절충하기 곤란하다면 선왕이 이미 행한 법규를 따르는 것이 낫습니다."
하고, 장령 윤비경(尹飛卿)은 아뢰기를,
"조종에서 이미 시행한 관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입대한 모든 신하에게 소견을 말하도록 하니,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신은 본래 예서를 읽지 못하였으며 장자·서자 등에 관한 설은 더욱 망연하여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고는 하나 어찌 소견이 없겠는가."
하니, 적이 말하기를,
"옛날 예법에 대하여 이미 적실한 소견이 없는 바에야 차라리 국가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판윤 이완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의논에 참여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반드시 시비를 정할 필요는 없으니 각기 소견을 말해 보라."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국가의 제도가 좇을 만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아뢰기를,
"부화 뇌동하여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신하들이 이미 모두 진달하였으니 신이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끝내 기년의 제도를 가지고 그대로 시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장계를 보니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나오고자 한다.’ 하였다."
하니, 태화가 말하기를,
"이에 대하여는 허실을 알지 못하겠으나, 설사 나와서 따르기 어려운 청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무기를 잡고 종사하는 데야 이르겠습니까. 들으니, 섬 안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생활이 지극히 어렵다고 하니, 쌀 3백 석을 내려 주어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를 따랐다.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상의 눈병이 쾌유되었다 하여 다시 사당에 고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들으니, 신릉(新陵)의 전석(磚石)이 한 곳에는 색이 변하였고, 한 곳에는 한두 푼쯤 우묵 들어간 듯하다고 하는데, 비록 그 까닭은 알지 못하겠으나 겨울철의 공사로 인해 혹시 이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봉심(奉審)한 뒤에 고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정치화(鄭致和)가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이와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만약 장마를 지나고 나면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장마가 지난 후에 봉심하라고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들으니, 궁궐의 경계가 엄하지 못하여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이 자주 궁궐에 드나들며 때로는 유숙까지 한다고 하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장성한 아들을 말함인가, 아니면 어린 아들을 말함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장성한 아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나 지금은 선조 때와는 다르니 궁중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친한 사람을 친하게 대하는 도리는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일이 사사로운 집안 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또한 선왕 때와도 같지 않으니 비록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분수와 의리를 엄히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몇 달 뒤에 상을 마치기를 기다려 마땅히 조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윤선도의 상소 때문에 송준길이 지금 내려가고 있다고 하니 진실로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송시열이 당한 경우는 준길의 경우보다도 더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마땅히 유시를 전하시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말하기를,
"선도의 흉악한 말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개의하지 말고, 가능한 대로 빨리 올라오라는 뜻으로 각별하게 말을 꾸며 유시를 내리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4월 24일 무신
예조가 아뢰었다.
"연제 복제 절목(練祭服制節目)에 대해서, 좌참찬 송준길이 아뢴 의논을 다시 고찰해 보니, ‘관(冠)과 중의(中衣)는 마땅히 연포(練布)를 쓰며, 최상(衰裳)은 대공(大功) 칠승포를 써서 다시 만들되 누이지 말고, 소상(小祥)의 요질(腰絰)은 갈포로 만들되 세 겹으로 고리를 만들고 네 가닥으로 끈을 꼬아서 만든다. 또 요질을 이미 옛날 예를 따라서 갈포를 쓰면 교대(絞帶)도 역시 연포를 써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최상이라는 것은 최복과 하의를 말하는 것이니, 최복과 하의는 칠승포를 쓰되 누이지 않으며, 요질은 칡을 쓰고, 요대는 연포를 씁니다. 왕대비전이나 중궁전의 복제에 대해서는 비록 유신들이 논한 바가 없으나, 마땅히 상의 복제에 의거하여 변경하여야 하므로 최복은 칠승포를 쓰되 누이지 않습니다. 대왕 대비전의 복제는 이미 기복(朞服)으로 의논을 정하였으니 저절로 변제(變除)의 절목이 있으나, 연제를 지낼 때는 소복(素服)을 입고 제사를 행하는 것이 인정으로 보거나 예로 보거나 합당할 것 같습니다. 백관의 복제는 마땅히 성상의 복제를 따라 시행하소서."
하였다. 원계목(元啓目) 중에 아울러 부표(付標)를 붙여 들이니 상이 이를 따랐다.
우윤 권시가 상소하기를,
"지금 선도의 상소를 보니 모르는 사이에 등골에 식은 땀이 흐릅니다. 시열과 준길에 대해서, 만약 쇠한 것을 일으키고 어지러운 것을 뿌리 뽑을 만한 재주가 있어서, 선왕의 뜻을 이어 훌륭한 일을 이루어 보려는 성상을 반드시 잘 보필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은 감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적어도 본보기가 될 만한 선인으로서, 이미 옛날 사람들이 학문하던 커다란 요체를 알고 있으며, 그의 인자하고 너그러우며 충실한 마음은 이미 조야에서 믿고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조종에 서서 어려운 일로 전하를 책임지우게 하고 선을 베푸는 일을 날로 계속하게 하여 세월이 쌓이게 한다면 전하께서 쇠한 것을 일으키고 어지러운 것을 뿌리 뽑는 사업에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 하늘에 빌어서 국가의 명을 영원토록 하는 터전이 역시 반드시 여기에서 시작되지 않는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신은 평소에, 신하된 자가 상의 인정을 받아 조정의 요직에 앉으면 모름지기 자신의 과오를 말하는 자로 하여금 날마다 임금 앞에서 아뢰도록 하고 그러한 뒤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계하고 힘써서 허물이 있는 경우에는 고치고 허물이 없다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러하지 못하고, 한 사람이라도 허물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몸을 받들어 물러나고, 이어서 그 말한 자를 죄준다면, 이는 장차 백성의 입을 막는 것입니다. 이것은 묻기를 좋아하고 살피기를 좋아하며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어 양단을 잡고서 치우침이 없는 뜻에 어떠하겠으며, 방목(謗木)을 세우는 뜻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이미 ‘비방’이라고 한다면 그 가운데에는 부도한 말도 역시 많았을 것인데도 오히려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었으니, 이것이 당(唐) 우(虞)의 태평스러운 다스림이 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러한 뜻으로 자책하지 않으시고, 신린(臣隣)을 책하시는 것입니까.
시열과 준길이 서로 잇따라 서울을 떠나서 일로 책임을 지우고 권면하여 선을 베푸는 공이 날마다 해이해진다면, 신은 장차 무엇을 믿고서 여러 관료들의 말석에서 구구하게 처하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연고 없이 백성을 죽이면 선비가 떠나고, 연고 없이 선비를 죽이면 대부가 떠난다고 합니다. 항간에서 시열과 준길의 잘못을 말하려고 해도 감히 하지 못하고 마음에 그르게 여기고 속으로 비방하면서도 입으로 말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태평 시대의 기상이라고 하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조정을 위하여 이를 근심하였고, 두 신하를 위하여 이를 걱정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대왕 대비의 이번 상례는 마땅히 3년의 제도로 하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서, 지금 비록 의로써 세우더라도 백세를 통해 질정해 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유사로 하여금 널리 여러 서적을 고찰하도록 하신다면 그 허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시열·준길·유계와 같이 어진 이로서도 마땅히 3년이 되어야 하는 뜻을 살피지 못하였기 때문에 거리에서 말하고 골목에서 의논하는 자들이 마음에 흡족하게 여기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는 이 의논이 이미 조정에서 발론이 되었는데도 여러 사람들이 그래도 미혹된 것을 고집하고 돌이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열이 말한 바 ‘선왕이 서자가 되어도 무방하다’는 말은 매우 잘못된 말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그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선도의 참소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도가 모함하여 참소하고 시기하여 질투한 것은 진실로 극히 미워할 만하지만, 자신에게 반드시 화가 닥치게 될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감히 다른 사람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으니, 그 역시 과감하게 말을 하는 선비라고 할 것입니다. 신은, 성조(聖朝)에서는 과감하게 말하는 장점은 취하고 비방하여 참소하는 단점은 덮어 주어, 천하의 좋은 말들을 모이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조종의 의논이 매우 격렬하여 이 지경으로 극도에 이르러 ‘권세가 아래로 옮아 갔다.’는 참소를 실증하니, 연고 없이 선비를 죽이는 일이 불행하게도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선도는 일찍이 선왕께서 세자로 계실 때에 사부에 있었던 옛 은혜가 있어, 비록 그의 옳지 못한 것을 통촉하셨으나 그의 장점을 취하여 아끼고 보살펴서 지위가 중대부(中大夫)에까지 이르렀으니, 가벼이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조종에서 만약 선도의 말을 용서하여 주고 아울러 신의 죄를 용서하여 준다면 신은 거의 머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선도를 엄한 법률로 다스린다면 신은 어찌 떠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조정에서 시험삼아 선도의 죄를 용서하고, 전하께서 특별히 준길에게 유시하여 군신간에는 성실한 마음으로 서로 믿어야지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떠나서는 결코 안 된다는 말로 타이르신다면 준길이 어찌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장학(張澩)과 유배원(柳培元)이 토주(土主)를 모함하였다고 하는 것은 원래 실상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것은 시골 풍속의 근거 없이 떠도는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유정(兪椗)이 참언을 듣고 잘못된 것을 그대로 믿고는 일을 그릇 망령되이 처리하였습니다. 장학은 본디 조관(朝官)으로서 갑자기 관리에게 넘겨져 가혹한 형벌을 당했는데도 감히 그 잘못을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장학과 배원은 역시 하나의 무고한 백성인데 이들에 대해서 왕옥을 일으켜 위로 성상을 번거롭게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국가의 운수가 불행하여 흉흉한 말이 끝이 없으니, 말로 하자니 기가 막히고 생각하자니 한심하다. 윤선도의 죄는 여러 사람이 분개하는 바로서 그를 주살하자는 의견은 비록 너무 중하다고 하겠으나, 유배에 처하는 것은 끝내 여러 사람의 생각을 물리칠 수 없겠다."
하고, 또 등대(登對)시에 면전에서 말하겠다고 유시하였다.
상이 권시가 상소한 일을 인하여 사관에게 명하여 좌참찬 송준길에게 유시를 전하도록 하였다. 승지 김수항(金壽恒)·오정위(吳挺緯)·조윤석(趙胤錫)·정익(鄭榏)·박세성(朴世城) 등이 아뢰기를,
"권시가 상소한 말은 대개 먼저 선도의 죄를 용서해 주고, 이어 준길에게 유시하여 그로 하여금 돌아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선도의 음흉한 실상은 여러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는 바로서 양사(兩司)에서 함께 발의하여 엄한 법률로써 논한 것인데, 어찌 한 사람의 말로 인해서 거센 공론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선도의 죄는 이미 용서할 수 없는데, 선도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곧바로 준길에게 전유하는 것은 또 권시의 본래의 의도가 아니니, 상소의 말에 의거하여 전유하라는 명령은 봉행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상소에서 선도를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극렬하게 말하였고, 심지어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감히 말한다고 하는 것은 충성스럽고 우직하게 감히 말하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선도의 상소 중에서 두 신하를 무함하여 날조한 형상에 대하여는 일단 놔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위로 선왕을 범한 어그러진 말에 대하여도 역시 ‘과감하게 말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소견은 서로 매우 다르지는 않는 것이기에, 그 말의 패려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명께서는 이미 반드시 통찰하셨겠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겠기에 아울러 이를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군신간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것인데 어찌하여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알지 못하는가. 선도의 죄로 말하면 죽음으로도 피하기 어려우나,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므로 죄를 감하여 멀리 유배에 처한 것이다. 또 선도를 용서하자는 명령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것이 어찌 한 사람의 말로 인하여 거센 공론을 막는 것인가. 내 생각으로는, 비록 선도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권시가 상소한 말 가운데 ‘흉악한 말에 동요할 필요는 없다.’는 뜻을 취하여 유시를 전하면, 혹시라도 다행히 생각을 바꾸지 않을까 여겨서였다. 경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일단 전유를 멈추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 옥당(玉堂)에서 청대할 때에, 부제학 유계가 윤선도의 상소를 조당에 보이고 태워 버리자고 청하였는데, 상께서 대신들이 함께 모일 때 보여 주고 나서 처리하도록 하교하셨습니다. 그 상소를 이미 여러 대신들에게 전하여 보도록 하였는데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태워 버리라고 하였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별도로 우찬성 송시열에게 유시하였다.
"그대가 조정을 떠난 지 벌써 5개월이 되었다. 그대를 생각하는 일념은 주려서 허기진 듯하며, 마음을 바꾸기만을 바라며 오직 날마다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경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더욱 멀리 떠날 생각을 굳히고 있으니. 진실로 나의 정성이 부족하고 예가 부족하여 경의 생각을 감동시켜 돌이키게 하지 못한 때문에서이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마다 매번 매우 부끄러울 뿐이다.
지금 윤선도가 상소를 올려 흉악한 짓을 마음껏 하며 예측할 수 없이 음흉하고 참혹한 말로 경들을 얽어 무함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이로 인해 불안해 하며 황급히 돌아가 버렸다. 아, 내가 기대하고 우러러 의지하는 자는 유독 그대와 좌참찬뿐인데, 전후로 좌절하여 서로 이어서 떠나가니, 나의 마음은 허전하기가 두 팔을 잃어버린 것보다 더하고 국가의 일은 무너지고 흩어져서 다시 가망이 없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린다. 지난번 그대가 떠나갈 때 이른바 떠도는 말들도 역시 이 무리들이 터무니없이 말을 만들어 속이려 했던 것이니, 진실로 애통한 일이다. 그러나 선도의 흉악한 말과 어그러진 설이 위로는 선왕을 범하여 마음대로 거리낌이 없는 데에 이르렀으니, 돌아보건대 경들에 대해서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예로부터 군자로서 무함을 받고 참소를 당한 자 중에, 간혹 임금에게 의심을 당하거나 혹은 세상 의논에 용납되지 못하여 그 의리상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이미 그 정상을 통촉하고 있으며, 공론이 함께 일어나서 분개하고 있다. 그대와 나 사이에 합치되는 긴밀함은 진실로 그대로이다. 비록 백 명의 선도가 있어서 그 혀를 놀려댄다고 하더라도 어찌 경들에게 병이 되겠는가. 경이 만약 몸을 깨끗이 하고 영영 떠나서 끝내 마음을 바꾸기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바로 참소하는 자들의 계획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경은 학식이 고명하니 출처(出處)의 의리에 있어서 굳이 나의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밖으로부터 오는 흉악한 말 때문에 마음을 굽히지 말고, 속히 곧고 굳은 뜻을 돌이켜 서로 이끌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국가의 형세를 존중하게 하고 간흉이 담이 떨어지게끔 하라. 이것은 나의 지극한 바람이기도 하거니와, 그대들의 처신에서도 올바른 도리가 아니겠는가.
아, 세월이 빨리 흘러 연기(練期)가 촉박하니 어버이를 잃은 무한한 비통함은 이루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대가 만약 선조께서 돌보아 대해 주던 은혜를 생각하고 나의 외로운 마음을 생각해 보면, 역시 반드시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 것이다. 어찌 차마 끝내 나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가. 이에 마음과 속을 다하여 지성으로 고해 주노니 경은 나의 생각을 애긍히 헤아리라."
4월 25일 기유
남용익(南龍翼)을 승지로, 정석(鄭晳)을 장령으로, 김옥현(金玉鉉)을 헌납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박세모(朴世模) 등이 아뢰기를,
"윤선도가 예를 논한다고 가탁하고는 흉측한 계책을 마음대로 내어, 위로는 성명을 무함하고 아래로는 온 세상을 현혹시켜, 선한 이들을 해치고 국가에 해를 입히고자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흉악한 인간의 사특한 참소가 어느 때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이와 같이 꺼림 없이 마음대로 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법에 따라 처벌하기를 바라는 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삼가 권시의 상소를 보건대, 그 대강의 요지는 마치 두 신하에게 의탁하여 그 사이에서 조제(調劑)하려는 듯하지만, 실은 두 신하에게 허물을 돌리고 선도를 구원하여 죄가 없는 지경으로 올려 놓기 위해서였으니, 내용은 괴벽하고 말이 조리가 없어 신들은 삼가 그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악역 부도라는 죄명으로 사람을 무고하는 것은 신하된 자로서 차마 듣지 못하는 바인데, 그 의도가 오히려 받아들여 허물로 삼아 있으면 고치도록 하고자 했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권시로 하여금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하게 한다면 그의 처신이 과연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선도가 저주하여 참소하고 시기하여 질투한 것은 진실로 지극히 미워할 만하다.’라고 말하고 나서, 다시 말하기를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었으니 그 역시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를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라고 여기고 있다면, ‘저주하여 참소하고 시기하여 질투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과연 ‘선도가 저주하여 참소하고 시기하여 질투하였다.’고 여기고 있다면 마땅히 통렬하게 배척하여 확연히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다만 ‘양단을 잡고 중용을 쓴다.’고 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데에 급급하는 것입니까.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는 것은 비록 당우(唐虞) 시대의 기상이라고 하였지만, 사흉(四凶)과 같은 악인에 대해서는 축출하여 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소하는 말을 미워하고 사악한 것을 물리쳐 버려 의심을 않는 것뿐이니, 참특하다고 지적하면서도 이어서 이를 용서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상하의 설이 저절로 서로 모순되어 판연히 두 사람의 말과 같은데도, 임금의 생각이 정해지지 못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이 떳떳함을 잃게 되다면, 이는 비단 언어의 잘못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그 병통을 궁구해 보자면 바로 근본에 있는 것이니 선도를 선비라고 여겨서 그의 죄를 성토하는 것을 무고하게 선비를 죽이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인 듯합니다. 위복(威福)의 권한이 아래로 옮겨지는 것은 국가의 권력을 잡은 권세 있는 간신들이 하는 바로서, 선도가 두 신하를 날조하여 모함하였던 것이 이것이며, 조종을 놀라게 한 것도 역시 이것입니다. 뜻밖에도 지금 선도를 대신하여 말하는 자들이, 양사(兩司)에서 법을 집행하는 의논에 대해 논란을 하면서, 섞여서 함께 돌아가게 되는 것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 않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신들은 흉악한 사람의 죄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다가 오히려 전에 없는 추잡한 욕설을 당하였으니, 어찌 감히 편안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글을 쓰다가 무심코 지나쳐 버려서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 어찌하여 말씨가 이다지도 지나친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堥)가, 역시 권시의 배척을 당한 것으로 인피하여, 권시가 윤선도를 비호하는 상소의 말이 황당한 형상에 대하여 극언하였다. 상이 간원에 비답한 내용으로 답하였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엊그제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으며 또 권시의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에서 처치하여 이경억·박세모·윤비경·이무는 출사하도록 청하였고, 남중은 체직시키도록 청하였는데, 부름을 받고 나오지 않은 때문이었다. 상이 이를 따랐다.
상이 허목이 아뢴 상복도(喪服圖)와 여러 신하들이 연복(練服)에 대하여 아뢴 의견을 가지고 사관으로 하여금 우찬성 송시열에게 가서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사관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연복에 관한 의논은 이러하다.
"소상에서의 최복은 간혹 누이기도 하며 간혹 누이지 않기도 하는데, 경문을 고찰해 보면 두 가지 모두 실려 있지 않습니다. 소설(疏說)과 장자·주자·황씨(黃氏)의 설을 고찰해 보면 두 가지 모두 근거가 있어서 참으로 그 사이에서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황씨의 상복 도식이 가장 잘 갖추어져 있는데, 이는 실로 주자의 명을 받아서 수찬한 것입니다. 지금 이 설을 따라서 중의는 연을 하고 연포로 관을 만들고, 최복은 조금 가는 생포로 만들고 이어 갈질(葛絰)로 바꾼다면 옛날 제도에 합치될 듯합니다. 허목이 도설에서 변론한 의견은 각기 원도(原圖)의 본 조목 밑에 부기하여 올립니다."
그의 의논은 이러하다.
"위아래로 통용하여, 대부나 사(士)의 아들이 가문을 계승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이 천자, 제후가 왕통을 이어서 국가를 전수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중요한 점입니다. 이 주소(註疏)의 내용이 이와 같이 분명한데도 지금에 의논하는 자들은 오히려 가정과 국가는 같지 않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으니,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서자를 세워서 후사를 삼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여기에서 논쟁하고 있는 바는 바로 이 한 조목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개 아래위의 소설(疏說)로 살펴본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위한다.’는 조항에 이미 ‘제2장자도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고 하였고, 그 아래에 또 ‘제2장자는 함께 서자라고 이름한다.’ 하였으며, 그 아래에 또 이르기를 ‘체(體)가 되면서도 부정(不正)인 경우는 서자가 후사가 된 경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설은 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며, 같은 때에 기록한 것입니다. 같은 조항이기는 하지만 항목[貫]은 달라서 이것을 주장하여 저것을 공격하거나, 저것은 옳고 이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마땅히 반복적으로 참고하여 아래위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다시 어리석은 소견이나마 조목별로 열거해 보고자 합니다. 이른바 ‘제2장자를 모두 장자라고 이름하여 그를 위하여 3년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아마도 제1장자가 어린 나이에 죽었거나, 혹은 폐질이 되어서 그의 아버지가 3년복을 입지 않은 뒤에 제2자를 세워서 역시 장자라고 이름하고 이를 위하여 3년복을 입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만약에 제1장자가 가계를 전하여 받아야 하는데, 사망하여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3년복을 입었다면, 비록 제2자를 세워서 적통을 계승하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역시 서자라고 불러야 하며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아래위의 소설의 내용은 크게 차이가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제2장자를 함께 서자라고 이름한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제2적자(嫡子)를 첩의 아들과 구별하고자 할 때는 적(嫡)이라고 부르고, 장자와 구별하고자 할 때는 서(庶)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진실로 일에 따라서 호칭을 달리 하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서자를 이미 첩의 아들과 차적(次嫡)을 아울러 호칭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래에서 이른바 ‘체이기는 하지만 바르지 못한[體而不正] 서자’에, 유독 첩의 아들만 포함되며 차적의 경우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른바 ‘체이기는 하지만 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서자가 후사가 된 경우이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여기에서의 ‘서자’는 위에서 이른바의 서자와 한 가지의 내력인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유독 첩의 아들만을 지칭하는 것이고 차적의 경우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가씨가 여기에서 반드시 말을 바꾸어서 구별을 하였을 것이고, 위의 조항과 한 가지 조목으로 만들어 후세 사람들이 의혹을 일으키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매우 의심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삼가 기복소(期服疏)를 안찰해 보니 ‘임금의 정실 부인 둘째 아들 이하 및 첩의 아들을 모두 서자라고 이름한다’ 하였고, 주자는 말하기를 ‘무릇 정체(正體)로서 위에 있는 자는 하정(下正)도 오히려 서(庶)라고 한다. 정체라는 것은 할아버지의 적(嫡)을 이르는 것이고, 하정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적을 말하는 것이다. 정(正)이 비록 아버지에 대해서는 바로 적자가 되더라도, 할아버지에 대하여는 서(庶)가 되기 때문에 그를 서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의 설은 여기에서 그쳤습니다. 이른바 ‘정체로서 위에 있다.’고 하는 것은 적자가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른바 ‘하정’이라는 것은 차적(次嫡)의 적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정(正)이라고 말하고 나서 다시 오히려 서(庶)가 된다고 했느냐 하면, 적(敵)이 되기 때문에 정(正)이라고 한 것이고, 차(次)이기 때문에 서(庶)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비록 적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아들에 이르러는 서라고 일컫거늘, 하물며 그 자신에게 있어서야 서라고 칭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기복소와 주자의 설을 통해서 본다면, 여기에서 이른바 ‘서자로서 후사가 된 자라고 한 것은 반드시 첩의 아들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차적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실로 신이 확실하게 믿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명확한 증거를 보지 못하고서 갑자기 의견을 내세워 혹시라도 소가(疏家)의 본의가 아니게 된다면, 일에서 마땅함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전하고 모르는 것은 버려 둔다는 뜻에 대하여 어떠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은 끝내 감히 잘라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성명께서 널리 물으시고 살펴서 택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부교리 김만기(金萬基), 부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윤선도의 죄악은 성명께서 이미 통촉하셨으며 양사에서 갖추어 모두 열거하여 논하였으니, 지금 낱낱이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른바 ‘대통이 밝지 않아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못하고, 종사가 불안하며 인심이 의심하여 불안해 한다.’는 등의 말은 앞장 서서 선동하는 말로서, 음흉하고 흉참하여 똑바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함궐’ 등의 말은 오늘날 신하된 도리로서 차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며, 심지어 ‘가세자(假世子)’, ‘섭황제(攝皇帝)’와 같은 말은 감히 군부에게 빗댈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선도가 상을 범하고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은 죄는 결단코 용서할 수 없으며, 어진 선비를 날조하여 얽어서 악역 무도한 죄에 빠뜨린 것도 저절로 그에 대한 법률이 있습니다.
원악한 흉인을 모든 사람이 함께 분개하고 있으며, 대각의 공론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 권시가 이에 감히 비호하려는 계책을 부렸으니, 공론을 무시하고 조정을 가벼이 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선도를 칭하여 한 말 중에,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으니, 이 역시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과감하게 말하는 장점을 취한다.’고 하였습니다. 아, 음흉하고 참특하여 선한 이들을 무고하여 해코지하는 자를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라고 한다면, 이는 순임금이 참설을 미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시인(詩人)이 굳이 참소하는 자를 맹수에게 던져 주라고 읊지는 않았을 것이고, 주관(周官)에 유언 비어를 처벌하는 법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치이겠습니까. 하물며 상을 범하고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설을 가지고, ‘과감하게 말한다’고 여겨서 이를 취하자는 것입니까. 또 말하기를 ‘아무 연고 없이 선비를 죽이면 대부는 떠나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선도가 죄를 당한 것 때문에 그가 떠나고자 결심하였다면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권시가 선도를 논하면서 ‘질투하는 형상은 진실로 매우 미워할 만하다.’ 하였으니, 권시도 선도의 죄가 없다고 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그의 죄악이 위로는 선왕을 범하여, 나라에서 벌을 주는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하늘에서 죄를 성토하고 다섯 가지 형벌로써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일찍이 간악한 흉인이 주륙을 당한다고 하여 어진 선비가 물러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이 설은 비록 아녀자나 어린아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라도 역시 속일 수 없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선도의 죄를 용서하자고 하는 것은 어진 이를 머무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선도를 구제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 권시는 이미 두 신하를 추앙하여 존중해 놓고 이어서 비난하고, 선도에 대해서는 시기하고 역시 이르기를 참소하고 질투한다고 지적하였다가 다시 ‘과감하게 말한다’고 칭하면서 한 번은 억누르고 한 번은 치켜세우고, 겉으로는 주고 속으로는 빼앗고 있으니, 그 마음의 은미한 곳은 끝내 감출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여기에서 통렬하게 성찰하지 않으신다면, 참소하는 적들의 입과 바른 것을 싫어하는 무리들이 장차 기회를 틈타서 사방에서 몰려들 것이니, 그것이 국가의 일에 대해서 어떠하겠습니까. 원컨대 성명께서는 시비를 밝게 분별하시어 권시의 잘못된 말에 흔들리지 마시고, 빨리 공론을 따라 선도의 간특하고 흉악한 죄를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이미 통촉하여 알았으니, 저절로 처치하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 어찌 한 편의 상소로 인하여 졸지에 나의 생각을 바꾸겠는가."
하였다.
이 때 한재가 있어서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차자를 올려 여러 대신에게 물어서 죄수를 풀어 주도록 청하였다. 상이 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죄안(罪案)을 가지고 여러 대신에게 나가 의논한 뒤 그 중에 정상과 죄가 용서할 만한 자는 개록(開錄)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갔다. 승지가 문안을 가지고 입시하여 금부와 형조에 갇혀 있는 죄수 및 정배 죄인을 소결하였는데, 석방한 자는 16인, 감등자는 7인이었다. 도승지 김수항이 아뢰기를,
"지난번 권시의 상소를 가지고 송준길에게 전유하도록 명하셨으나, 그 상소에서 윤선도를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극언하고 있으니 준길에게 전유하자는 것은 그의 본래의 의도가 아닙니다. 신이 그렇기 때문에 받들어 행하지 못하였는데, 계달을 할 때에 말의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여 ‘군신 사이에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중하다.’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권시가 상소한 말을 가지고 좌참찬에게 유시를 전하려고 했던 것은, 다만 혹시라도 마음을 바꿔 돌아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선도의 죄를 용서해 주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였겠는가."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권시의 상소는 좋아하고 미워함과 옳고 그른 것이 서로 현란하여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도의 죄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각기 소견이 있는 것이니 그를 죽이는 것은 지나치다는 말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라고 하기까지 한 것은 의도를 세운 것이 괴이하고 말을 만든 것이 어그러졌습니다. 권시는 송시열의 무리와 더불어 의사가 서로 통하는데 공공의 의논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이 때에 이와 같은 상소를 올렸으니, 무너지고 흩어지는 근심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그 상소는 황잡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4월 26일 경술
우윤 권시가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원에서 이를 아뢰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러한 선비들이 거의 모두 도성을 떠나가 버리니 나의 허전한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곧 사관을 보내어서, 비록 지금 떠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속히 마음을 바꾸도록 도모하라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유시를 전하라."
하고, 아울러 양도 감사에게 명하여 말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이날 여러 승지들을 모두 기우제 제관으로 선발하여 보냈는데 유독 우부승지 정익과 동부승지 박세성이 정원에 남아 있었다. 세성이 장차 ‘유시를 전하라’는 명령을 멈추어 주도록 청하려 하였으나 머뭇거리는 사이에 날이 이미 저물었다. 상이 묻기를,
"유시를 전하라는 명을 내린 뒤로 사관이 갔다가 돌아왔을 만한데, 본원에서 아직껏 거행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세성이 아뢰기를,
"지금 계품할 일이 있게 되어 아직 받들어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로 품계할 일도 없는데 아침에 하명한 일을 어찌하여 아직까지 머물려 두고 시행하지 않는가?"
하였다. 세성이 아뢰기를,
"권시의 상소 중에 윤선도를 비호하는 말이 있기 때문에 양사의 많은 관리들이 인피하며 준엄하게 배척하고 있는데, 대관이 피사(避辭)하는 것은 역시 탄핵하여 죄를 바로잡는 한 가지의 방도인 것입니다. 지금 성상의 교지가 비록 우대하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하겠으나, 예에 따라 받들어 행하는 것은 대간을 우대하고 공론을 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 부족한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곧바로 생각한 바를 진술하여 아뢰려 하였던 것인데, 창졸한 가운데 쉽게 써서 아뢰지 못하고 날이 저물게 되었습니다. 거듭 분부를 내리게 하여 성상을 수고롭게 하였으니, 죄를 기다리며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은 세성이 애초에 품계하지 않고 끝내는 이루어진 명령을 받들어 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여러 차례 하교를 내려 심히 책망하였다. 심지어,
"세성이 감히 소인의 태도를 드러내어 명예를 낚는 계책을 내었으니, 대간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음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임금을 능멸하고 명을 거역한 역적이다. 이와 같은 것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임금은 임금이 될 수 없고 신하는 신하가 될 수 없다. 붙잡아 국문하고 죄를 정하여 이로써 다른 이들을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박세성을 붙잡아 국문하라는 전교를 보니, 말의 뜻이 매우 엄하여 신하된 도리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었습니다. 거룩하고 밝은 세상에 이렇게 중도를 벗어난 거조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유시를 전하라는 명을 받은 후에 곧바로 아뢰지 못하고 날이 저물게 된 것에 대하여는 참으로 명령을 지체시킨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명령을 게을리하려는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그의 의도는 아마도, 권시가 바야흐로 물의 때문에 성문을 나가는데, 어진 이를 대하는 예로써 그를 대우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마음속에 느낀 바를 아뢰려고 하였던 것인데, 아뢰려고 하다가 아뢰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날이 이미 저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엄한 교지를 내리신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성명께서 등극하신 아래로 마음을 미루어 아랫사람을 대하고 성의를 다하시어, 일찍이 한 번도 일을 의심하여 사람을 처벌한 경우는 있지 않았는데, 유독 오늘 하늘과 같은 위엄을 거듭 진동하시고 근밀한 신하를 갑자기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심지어 ‘임금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명을 거역한 역적’이라고 하교하신 데 이르러서는, 보고 듣는 자가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아량으로 살피시어 세성을 붙잡아 국문하라는 명령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만약 생각한 바를 진술한 후에 명령을 거행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이러한 말을 했겠는가. 아뢰지도 않고 바로 자기가 받들어 행하지 않고는 감히 ‘피사(避辭)하는 것은 엄하게 물리치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감히 받들어 행하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명을 거역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용익이 다시 아뢰었다. 대략에,
"신이 패를 받고 숙배를 마친 후에 곧바로 청에 들어가 보니, 세성이 정익과 함께 앉아서 이 일을 가지고 품계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짓는 구상은 짧고 둔하며 말은 사리에 부족하여 한 글자를 쓰고는 곧 고치고 붓을 잡았다가는 바로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성상께서 여러 차례 재촉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황급하게 초를 잡아 아뢰었으나,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하여 거듭 중한 견책을 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만약 ‘일을 보는 것이 너무 느리며, 무르고 느슨하여 직책을 제대로 수행치 못했다.’고 한다면 세성이 실로 마음으로 감수하여야 하겠지만, 명령을 거역한 죄를 적용한다면 어찌 심히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처럼 번거롭게 하는가. 그대가 비록 비호하여 구원하려고 하지만, 교만하게 마음대로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은 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용익이 세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정익이 소를 올려 세성과 더불어 함께 처벌받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이미 그 담당이 있으며, 또 주장한 자가 아니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후에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과 사간 박세모(朴世模)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권시의 상소를 보니, 주된 의도는 괴벽하고 언론은 어그러졌으며, 기필코 허물을 두 신하에게 돌리고 윤선도의 용서를 청하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어진 이와 사악한 이를 구분하지 않고 옳고 그른 것을 전도하였으니, 그 병통의 근원을 따져 보자면 비단 언어에서의 잘못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번 피사(避辭) 중에서 진술하여 변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오히려 말투가 너무 지나치다는 비답을 받들고 보니, 신들은 진실로 이미 죄송하고 송구스럽습니다. 나아가 엎드려 정원에 내린 교서를 보니 말의 취지가 매우 엄중하였으며, 심지어 ‘대간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고 하교하신 데에 이르러서는 신들은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 등의 직책을 삭탈하소서."
하였다.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정수(鄭脩)가 시소(試所)에서 돌아와, 윤선도를 법에 따라 안찰하자는 청에 참여하였다가 권시에게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역시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월 27일 신해
장령 정석(鄭晳)이 아뢰기를,
"동료들이 모두, 박세성을 잡아 국문하라는 비망기 중의 말이 너무 엄중하다 하여 인피하였는데, 신의 형인 익(榏)이 이미 세성과 벌을 함께 받겠다는 뜻으로 소를 아뢰었으니, 신이 어찌 감히 동료를 처치하겠습니까. 또 윤선도의 죄는 북쪽 변방에 던져 버리더라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겠으나, 만약 사형의 법률로 적용하신다면 아마도 성스러운 세상에서 하실 일이 아닐 듯합니다. 부족한 의견이 이와 같으니, 논의가 준엄하게 일어나는 때에 더욱 언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교리 김만기(金萬基) 등이 차자를 올려 양사를 처치하기를,
"정원에 엄한 교시가 내려온 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양사에서 법을 지키는 신하에게 무슨 인혐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대사간 이경억, 사간 박세모, 정언 권격, 지평 정수·이무, 장령 윤비경은 출사하도록 하고, 장령 정석은 억지로 잘못된 소견을 진술하여 법을 집행하는 의논을 흔들리게 하였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부제학 유계, 교리 심유행, 부교리 김만기, 부수찬 심세정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근래에 윤선도가 흉참한 상소를 올려 조정에 일을 일으켜 세상 사람들이 끝없이 흉흉하게 놀라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권시의 상소가 뜻밖에 다시 나오게 되니, 일의 형상이 더욱 아름답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승지 박세성이 전지(傳旨)를 머물려 두고 곧바로 아뢰지 않은 탓으로, 붙잡아 국문하라는 명령이 내리기까지 하였는데, 온 조정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모두들 세성에게 허물을 돌리면서, ‘이 어찌 임금의 마음을 이다지도 괴롭게 하여 이와 같이 중도를 벗어난 거조에 이르도록 하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세성은 진실로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세성의 죄가 하교하신 바와 같지는 않아서 행여 용서할 만한 실정이 있다고 한다면, 대성인의 치우치지 않고 공평 무사한 도리가 또한 어찌 여기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우리 나라의 옛 제도에서는 대각을 우대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무릇 대각의 의논이 일어나는 때에는, 비록 중대한 일이 있더라도 정원에서는 으레 전지를 곧바로 받들지 않는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가까운 신하를 한 번 보내어 옛 은혜가 있는 신하에게 유지를 전하도록 하시는 일이 어찌 일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겠습니까마는, 반드시 복역을 하기까지 한 것은, 보고 들은 것이 있어서 그 뜻이 ‘권시에 대해서 삼사가 논의를 하고 있으니 이는 탄핵을 받은 경우와 다른 바가 없다. 너그럽게 용납하는 예를 죄를 논박받고 있는 사람에게 베풀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고사에 어긋남이 있을 것이다.’라고 여긴 것일 따름입니다. 그의 본심을 헤아려 본다면 아마 임금을 허물이 없는 지위에 들이려고 하였던 것인데,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사이에 지체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어찌 믿는 바가 있어서 감히 임금의 명령을 무시하였겠습니까.
지금 간사한 흉적들의 죄는 아직도 살펴서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데 먼저 잘못된 과오를 가지고 가까운 신하를 국문하도록 하셨으니, 비록 성스러운 뜻은 변함이 없으시어 노여움을 거듭 옮기지 않는다고 하나, 준엄한 교지가 한번 퍼지자 모든 여론이 놀라며 의혹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자들이 혹 성명께서 세성에 대하여 깊이 노하고 계시는 것이 오늘날의 의논에 대해 간섭해서라고 의심한다면 어찌 성덕을 손상시킴이 크지 않겠으며, 그 해도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세성을 잡아 국문하라는 명령을 속히 거두시어, 중외로 하여금 성의가 있는 곳을 확실히 알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좌승지 오정위(吳挺緯), 우부승지 조윤석(趙胤錫)이 청대하여 입시하여서, 박세성에게 엄한 죄를 주는 것이 부당함을 힘써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대간에서 비록 직접 권시의 죄를 청한 경우이더라도 세성이 계품하지 않고 지체시키면, 이것도 오히려 옳지 않은 것이다. 하물며 대간의 피혐하는 말에 잠시 거론한 자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한두 시각을 지체하였더라도 불가한 것인데 하물며 아침에 하명한 일을 사시(巳時)가 지나도록 거행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하였다. 정위가 아뢰기를,
"신들이 향(香)을 받아 가지고 떠나갈 때 여러 동료들과 서로 의논하기를 ‘공론이 한창 일어나고 있으니 권시에게 전유하라는 교시는 환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성이 임금의 명령을 지체하게 된 것은 실로 신들 때문에 말미암은 죄입니다."
하고, 윤석은 아뢰기를,
"신들이 이와 같이 번거롭게 하는 것이 매우 황공합니다만, 다만 듣건대 옛날 사람 중에도 역시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간한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마음을 평온하게 하시고 관용을 베풀어서, 세성의 본래의 마음을 통찰하시어, 그의 죄명을 감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박세성을 잡아 국문하라는 전지를 어제 이미 내렸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받들지 않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어제 3계(三啓)에 대한 비답이 오늘에야 비로소 내려왔는데, 오늘 청대가 겨우 끝났기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받들어 들입니다만, ‘명을 거역한 역적’이라는 말이 끝내 여러 사람의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으니, 지우고 고치소서."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정언 권격(權格)이 계를 올려 윤선도를 율에 따라 처단하자고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박세성을 잡아 국문하라는 전지를 보니, 위엄이 진동하고 말씨가 극히 엄하여 신하된 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성스러운 세상에 이와 같은 거조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세성이 계품을 하고자 하여, 전교한 명을 지체시킨 죄는 없을 수 없겠습니다만, 어찌 임금을 모반하고 명을 어기고자 하여서 그러하였겠습니까. ‘믿는 바가 있어서 이름을 낚고자 하였다.’는 등의 말씀은 모두가 실정을 벗어난 말로서 무릇 보고 듣는 자가 놀라서 두려워 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성인의 화평한 기상에 흠이 될 듯합니다. 박세성을 잡아 국문하라는 명령을 거두어 주소서.
윤선도의 상소는 예를 논한다고 가탁하고는 선한 이들을 모해하려는 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말이 선왕을 범하여 멋대로 도리를 거스르고 모만하였으니, 그 죄악이 어찌 대불경(大不敬) 죄에 그치겠습니까. 무릇 신하된 자가 매우 통분스럽게 여겨서 나라의 법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 것은, 인정이 진실로 그러한 것이고 왕법에 용서하기 어려워서인 것입니다. 우윤 권시는 대간의 의논이 한창 일어나는 때에 몸을 던져 소를 올려서 흉인을 비호하여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라고 지목하여 곧바로 관대하게 용서할 것을 청하였으니, 언론이 잘못 어긋나고 시비가 전도되었습니다. 조정의 의논을 무시하여 거리낌이 없는 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시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어찌 꼭 윤선도를 죽이고 나서야 그만두려고 하는가. 머나먼 변방에 안치시키면 될 것이다. 아, 세성이 이유 없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는데도, 그대들은 명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고들 하니 무슨 심사인가. 또 대간의 의논이 준절하기가 비록 지금의 열 배가 된다고 할지라도 감히 품계하지 않고 함부로 제멋대로 받들지 않는단 말인가. 이는 대간의 의논만을 믿고 임금의 명령이 위중함은 알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이와 같은 죄를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임금 노릇을 하겠으며, 그대들은 무엇으로써 신하 노릇을 하겠는가. 이와 같이 된다면 권세는 아래로 귀결되어 군주는 위에서 약하게 될 것이다. 세성의 죄를 법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그를 죽이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는데, 잡아서 국문하라고 한 데 이르러서는, 비록 죄가 세성 정도가 아닌 경우에도 역시 그렇게 한 적이 있었다. 하물며 임금을 모만하고 무도한 짓을 한 세성을 추문 못할 것이 무엇인가? 그대가 이른바 ‘전교한 명령을 게을리 늦추었다.’고 한 것은, 해석하자면, 임금의 명령을 게을리한 것이다.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아 전혀 조리가 없으니, 끝내 그 간악한 형태를 가릴 수 없을 것이다.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였다.
4월 28일 임자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장령으로, 정유성(鄭維城)을 영중추로 삼았다.
지평 정수(鄭脩)를 패로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이날 인피하였다. 정언 권격이 역시 엄한 교지를 받았다 하여 인피하였고, 헌납 김옥현(金玉鉉)도 역시 윤선도에 대한 안률이 너무 지나치다 하여 인피하였다.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오두인이 처치하여, 정수와 옥현은 체직시키고 권격은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이를 따랐다.
4월 29일 계축
장령 오두인이 아뢰기를,
"윤선도의 죄악은 결코 안치시키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속히 국문하도록 명하시어 율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박세성이 서둘러 품계하지 않고 유지를 전하는 일을 지체시킨 것은 진실로 죄가 있다고 하겠으나, 만약 임금을 모멸하고 명을 어겼다는 것으로 그의 죄안을 만든다면 어찌 성조에 있어 지나친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우레와 같은 위엄을 조금 누그러뜨리시어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윤비경이 상소하기를,
"윤선도의 상소가 이미 극도로 흉참하였는데, 권시의 상소가 다시 좇아서 현란하였으니, 사류들이 맥이 풀리고 일의 모양이 참담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전하께서 마음으로는 비록 옳고 그른 큰 구분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만 이를 처리하는 방도가 극진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선도가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도 형벌을 가하려 하지 않으시며, 이미 권시의 설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하게 배척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 선도는 예를 논한다고 가탁하고는 그 흉계를 마음대로 하여 멋대로 꺼림이 없습니다. 무릇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신들이 법률에 따라 안찰하자는 청은 그만둘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권시가 감히 비호하여 구원하려는 계책을 내어 이치를 벗어난 말을 마음대로 하였으니 상의 귀를 속이고 공론을 멸시한 상황은 더욱 놀랍다고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선한 이를 모함하고 해치며 국시를 전도시키는 무리들을 애석하게 여기시고 오히려 아껴 주는 뜻을 보이시어, 시비가 밝혀지지 않고 현사(賢邪)가 구별되지 않게 하여서, 음험하고 아첨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더욱 거리낌이 없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선도의 죄를 너그럽게 하셨기에 이 권시와 같은 상소가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권시의 상소를 명확하게 밝히고 엄히 배척하지 않는다면, 음험한 세력이 장차 감당 못할 정도로 자라게 될 것이니, 사람에게 반드시 화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신은 깊은 우려로 탄식하며, 인피하는 글에 대략을 진술했습니다. 어제 엎드려 정원에 내린 교지를 보니 말씨가 매우 엄중하여 놀라고 황공하여 결코 대각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명하여 신의 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다만 계(啓)자만 찍어 체직하였다.
도승지 김수항, 우승지 남용익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상이 결재를 마치자 수항이 아뢰기를,
"박세성이 비록 지체한 죄는 있지만 전지(傳旨) 중에 ‘명을 거역한 역적’이라는 말은 실로 세성의 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또한 성인의 화평한 덕에도 흠이 될 듯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상께서 명하시어 ‘명을 거역한 역적’이라는 말을 삭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에서 나에게 이미 실정에 없는 말을 하였는데, 나만 유독 세성에 대하여 실정에 없는 하교를 하여서는 안 된단 말인가?"
하고는, 윤비경(尹飛卿)의 상소를 꺼내어 승지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상소의 말을 보면, 내가 선도를 죽이지 않는 것이 마치 내가 그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줄로 여기고 있는데, 어찌 그러하겠는가. 선도는 바로 선왕의 사부였으니 나의 도리로서 어찌 차마 그를 죽이겠는가. 먼 변방에 안치하더라도 그 죄를 징계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하였다.
이시술(李時術)을 부응교로, 홍주삼(洪柱三)을 부수찬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경최(慶㝡)를 지평으로,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이익(李翊)을 정언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삼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도중에서 소를 올려, 교외(郊外)에 자주 사관을 보내고 승지를 세 번 보내어 들어와 시직하도록 유시한 것에 대해 사례하고, 아울러 본직과 겸대하고 있는 좨주(祭酒)를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나의 감정과 생각은 앞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 어찌 굳이 번거로운 말을 하여 돌아가는 경의 마음을 아프게 하겠는가. 속히 마음을 바꾸도록 도모하여 나의 마음을 태우지 말도록 하라. 사직하고자 하는 직책은 본래 번잡한 자리가 아니니 겸대하고 가더라도 조금도 안 될 것이 없다.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4월 30일 갑인
양사에서 윤선도의 죄를 안률하자는 논의를 멈추었다. 선도를함경도 삼수군(三水郡)에 안치하였다.
대사간 이경억, 사간 박세모 등이 상소하기를,
"권시의 상소 말이 어긋난 것은 지금 자세하게 다시 거론할 것이 없으나, 선도를 보아 가며 거취를 하고 선도와 더불어 표리가 되어서 성상을 현혹시키고 공론을 막아 보려 하였으니, 그 마음씀을 보면 단지 보잘것없는 하나의 소인일 뿐입니다. 신들이 마땅히 논핵을 하여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만, 지금 박세성을 대간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으로 죄안을 삼아 그를 잡아 국문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본원에서는 다시 그 명령을 환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니, 신들은 무릅쓰고 나오기가 결단코 어렵습니다. 나와서는 시비를 논하여 열거하지 못하고 물러가서는 드러나게 견책을 받지도 못하였습니다. 서둘러 면직시키소서."
하였다. 지평 이무도 정원에 내린 교지의 말이 극히 엄중하다는 것으로 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다.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태학생 이혜(李嵇) 등 1백 42명이 상소하여, 윤선도의 죄상을 극렬히 진술하고 공론에 따를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미 양사에 유시한 내용으로 답하였다.
식년 문과에 소두산(蘇斗山) 등 35명을 선발하고, 무과에 전 만호 유정준(劉廷俊) 등 42명을 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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