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갑신
성후설(成後卨)을 장령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병조 참지로, 오시수(吳始壽)를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정기(李廷虁) 등이 고묘에 대한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외임(外任)으로 있으면서 주관했던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경우에는 간혹 잉임(仍任)시키는 법규가 있습니다만, 새로 대간(臺諫)에 제수되었는데 본도의 치계(馳啓)를 인하여 외임에 잉임시키는 경우는 전에는 없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정언 이동로(李東老)는 평안 도사(平安都事)로서 임기가 만료됐고 또 주관하던 일도 거의 완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때의 사세(事勢)는 혹 완급(緩急)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조정의 체례(體例)에 있어서는 경중의 구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정언 이동로를 도사에 잉임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상차하여 속히 고묘례(告廟禮)를 행할 것을 청하고 겸하여 가뭄을 걱정하는 뜻을 진달하면서 성탕(成湯)의 육책(六責)으로 자신을 책할 것을 청하였다. 또 청하기를,
"사치를 금하여 풍속을 깨끗하게 하고 기강을 확립하여 조정을 바루고 어진이들을 초청하여 천위(天位)를 함께 하고 간언을 받아들여 언로를 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대신(臺臣)이 패려(悖戾)한 일개 수령을 논박하려 한 것은 진실로 사체상 합당한 것으로 원래 지나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풍헌(風憲)의 장관이 된 사람이 도리어 자신의 사사로운 뜻을 개입시켜 입락(立落)을 어긋나게 했으니, 이 말을 듣고서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또한 그 사람에게 잘할 것을 책할 것만은 아닙니다. 역시 전하께서 황극(皇極)의 중도(中道)를 세우고 일월(日月) 같은 현명함을 확충시켜 가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비(是非)로 하여금 형감(衡鑑)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면 신하들 중 누가 감히 정백(精白)한 자세로 계칙하고 면려하여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성학(聖學)을 힘쓰시어 더욱 성감(聖鑑)을 밝히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묘에 대한 일은 따르지 않겠다."
하였다.
함경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하기를,
"본도에서 겨울부터 진구(賑救)를 개시하였으므로 5월에 이르기까지는 가까스로 사망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만, 본도의 진곡(賑穀)이 이미 고갈된 탓으로 지금은 사망한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영남(嶺南)의 곡물(穀物)이 여태 도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10여 일이 경과하게 되면 사망하는 사람이 필시 더욱 많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영남의 운미(運米)가 지체되고 있는 이유를 하문하니, 비국이 아뢰기를,
"영남 의 곡식 1천 석(石)을 영남에서 운반하여 영동(嶺東)으로 가져다 놓고, 영동에서는 이를 운반하여 안변(安邊)으로 가져다 놓는 것으로 지난 3월 복계(覆啓)하여 분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뒤 경상 감사의 보장(報狀)에 의거하여 쌀 1천 석 중에 5백 석은 강원도에서 배를 보내어 운반하고 5백 석은 본도에서 강원도로 운반하여 일각도 지체시키는 일이 없게 하라는 내용으로 경상 감사에게 행회(行會)하였습니다. 이어 강원 감사 박장원(朴長遠)의 보장(報狀)을 접하니, 북도로 운반하여 갈 쌀을 이미 발송시켰다고 했습니다. 이는 해로(海路)가 멀고도 험하여 배의 운항이 매우 어려워서 이렇게 지연되는 것 같습니다만, 이제 장원의 보장을 보건대 이미 안변(安邊)에 도착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6월 3일 병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열세 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이에 앞서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강원도의 시장(柴場)을 절수(折受)하는 폐단에 대해 탑전(榻前)에서 진계(陳啓)했는데, 영상 정태화가 먼 도(道)의 시장을 파기할 것을 청하니, 상이 강원도의 시장 가운데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에 절수된 곳을 모두 조사해 내어 혁파시키게 했었다. 감사 박장원(朴長遠)이 장계(狀啓)하기를,
"춘천(春川)·홍천(洪川)·강릉(江陵) 등지에 모두 공주가(公主家)의 시장이 있는데 강릉의 경우는 방금 혁파했습니다."
하였다. 호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춘천·홍천 두 고을의 시장도 강릉과 똑같이 혁파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탑전에서 결정한 것은 단지 강릉 한 고을 때문에 발론된 것이지 강원 일도(一道)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이 회계(回啓)는 매우 본의를 모른 것이다. 강릉 이외에는 혁파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거행 조건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홍명하가 아뢴 것은 일반적으로 강원도의 시장(柴場)을 혁파해야 된다고 일컬었고, 영상도 먼 도(道)의 시장을 먼저 혁파해야 된다는 것으로 진달했을 뿐, 별도로 강릉 한 고을의 일만을 거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강원도의 시장 가운데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절수받은 곳을 본도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하여 아뢴 뒤 아울러 혁파할 것으로 하교하였으므로, 이미 이에 따라 본도에 행회하였습니다. 중외(中外)에서 이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제 강릉 이외에는 혁파하지 말라고 하교하시니, 당초 여러 신하들이 건백(建白)한 뜻과 다름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혜택이 일도(一道)에 고르게 시행되지 않아서 도리어 백성들이 서운해 함을 야기시키게 될까 우려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연신(筵臣)이 아뢴 것은 강원도 강릉에 대한 이야기였고 나도 강릉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강릉이란 두 글자가 거행 조건의 문서(文書)에 누락된 것인데, 실로 나의 본의가 아니다."
하자, 정원이 다시 아뢰어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당히 많은 말을 하여 기운이 매우 피곤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여러 공주가(公主家)에서 시장을 절수받은 데서 생기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므로 전후 진달한 신료들이 매우 많았는데, 상이 간혹 윤허하여 따를 때도 있었으나 끝내 견제당하는 데가 있어 쾌히 결단을 내려 혁파시키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함경 감사가, 도배(徒配)되었다가 탈옥한 죄인 조영록(趙永祿)을 체포하여 5차의 형문(刑問)을 시행하고 연한을 정하지 않고 충군(充軍)시키겠다는 것으로 치계하였다. 형조가 복계하자, 상이 도배중에 도망한 사람은 그 죄를 가볍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경옥(京獄)으로 잡아다가 조율(照律)하여 처단하도록 명하였다. 또 해조에서 방치하고 잘 살피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이날 형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정원에 나아가 청대(請對)하였는데, 상이 몸이 조금 불편하였으므로 말하고 싶은 것을 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중보가 서계(書啓)하기를,
"법전(法典)을 조사하여 보건대 도배 중에 있다가 도망간 경우에는 그때마다 본죄(本罪)에 한 등급을 더 올리고 장 일백(杖一百)만 쳐서 도로 배소(配所)로 보낸다는 조문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죄인 조영록은 처음 도 삼년(徒三年)으로 정배(定配)되었으니, 감사(減死)된 사람이 도망한 것과는 차이가 있는만큼 갑자기 일죄(一罪)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5차에 걸쳐 엄한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면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 충분한 것이고, 연한을 정하지 않고 충군시킨 것은 바로 본죄에 한 등급을 더 가한다는 법에도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장계(狀啓)에 의거하여 시행하자는 뜻으로 복계(覆啓)했던 것입니다. 법에는 과조(科條)가 있는 이상 마음대로 높이고 낮출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장 일백에 연한을 정하지 말고 먼 변방에 충군시킬 것으로 처단하라."
하였다.
6월 4일 정해
비가 내렸다.
대사간 이정기(李廷虁)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정원에 내린 하교를 보건대, 너무도 개연(慨然)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궁가(宮家)에서 입안(立案)한 것은 오늘날 국가의 큰 폐단이 되고 있는데, 먼 도(道)의 시장(柴場)을 널리 점유한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근거할 데가 전혀 없습니다. 이를 조사하여 아뢰라는 명이 신화(新化)를 베푸는 처음에 나왔으므로 궁벽한 산골의 백성들이 모두 흔연히 기뻐하여 좋은 정사를 기대하게 되었는데, 도신(道臣)의 사계(査啓)가 있은 뒤 이런 뜻밖의 하교가 있게 되었습니다. 연석(筵席)에서의 건백(建白)과 성교(聖敎)의 간곡함이 거행 기사(擧行記事)에 기재되어 있으며, 조신(朝臣)이 보고서 안 것이 이와 같고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들은 것이 이와 같은데도, 이제 그만 처음에 내린 명령을 고친다면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신들은 궁가의 소실(所失)이 얼마이고 소관(所關)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국가가 백성을 병들게 하고 신의를 잃는 피해와 견주어 본다면, 그 차이가 어떠하겠습니까. 강원도의 사계(査啓)에 들어 있는 각처의 시장(柴場)을 모두 혁파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소장을 올려 병든 상황을 진달하면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6월 5일 무자
전남 감사가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도내(道內)의 각 영장(營將)은 병부(兵符)를 가지고 있어도 각 고을 병부의 왼쪽 것이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있고 영장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급박한 일이 발생하여 군사를 조발(調發)하는 일이 있게 되어도 각 고을을 호령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回啓)하기를,
"병부(兵符)의 왼쪽 것을 정원으로 하여금 조속히 만들게 하여 삼도(三道)의 각 영장에게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6일 기축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집의로, 목겸선(睦兼善)을 사인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 병사(慶尙兵使) 민응건(閔應騫)을 체직시켰다.
처음 응건의 아버지 민함(閔涵)이 조씨(趙氏)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조씨에게 다른 형이나 동생이 없었으므로 그 어머니가 딸을 따라 와서 민함의 집에 의탁하고 있었다. 딸이 죽고 나서 민함이 후처(後妻)를 맞아들이게 되자 조씨의 어머니는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대로 후처와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후처가 처음 딸 하나를 낳자 조씨의 어머니가 스스로 자기 딸로 삼고서 자기의 재산을 모두 그에게 주었다. 그뒤에 민함이 아들 셋을 낳았는데 유건(有騫)·중건(重騫)·응건(應騫)이었다. 유건은 용력(勇力)이 뛰어났고 중건도 힘이 대단하였는데 성질이 모두 거칠고 패려스러웠다. 유건이 장성하자 조씨의 어머니가 드디어 자신이 지급하여 준 양녀(養女)의 재산을 반으로 나누어 유건에게 주자 유건의 누이가 이 때문에 유건을 원망하게 되었고 중건은 재물을 얻지 못한 것 때문에 또한 유건을 원망하게 되었다.
드디어 누이의 아들 이무선(李茂先)과 함께 유건의 생일(生日)을 이용하여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유건의 가노(家奴)와 마을의 포수(砲手) 몇 사람을 시켜 밤을 틈타 도적처럼 하여 유건(有騫)의 부처(夫妻)를 살해하고 칼로 음부(陰部)를 잘랐다. 이때 유건의 두 아들이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중건이 다시 같은 당여(黨與) 2인과 함께 그의 아들에게 부음(訃音)을 전하러 갔다. 허의(許儀)라는 사람이 사찰(寺刹) 곁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가노(家奴)가 오지 않고 포수가 온 것을 괴이하게 여겨 절의 중들과 마을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여 둘러싸고 호위하여 가게 하였기 때문에 중건이 그의 아들을 살해할 수 없었다.
유건이 죽던 날 도적이 그의 가산(家産)을 가져가지 않고 유독 문기(文記)를 보관한 상자만 가지고 갔으므로 이웃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중건의 소위인 줄 알았는데, 유건의 아들은 감히 이를 고발(告發)하지 못했다.
응건은 이때 북도(北道)의 임소(任所)에 있었으므로 전연 그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그뒤 중건이 죽고 나서 응건이 경상 병사가 되었는데, 무선(茂先)이 가노(家奴)를 추쇄(推刷)하기 위해 응건의 병영에 갔었다. 그런데 추쇄당한 가노는 곧 유건을 살해할 적에 함께 악당이 되었던 가노였다. 체포되어 옴에 이르러 가노가 응건을 마주 대하고 곧바로 중건과 무선의 사주를 받아서 유건을 살해한 사상(事狀)을 매우 상세하게 고하니, 응건이 크게 놀라 즉시 무선을 체포하여 함양(咸陽)의 감옥에 가두고는 가변(家變)을 만난 탓으로 직책에 있을 수 없다고 감사에게 보고 하였다. 감사가 이 사실을 장문(狀聞)하니, 병조가 아뢰어 응건을 체직시켰다. 무선은 장(杖)을 참고 승복하지 않은 채 죽었다.
세대가 내려올수록 풍속이 나빠져 민풍(民風)이 허물어진 탓으로 재물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는 변이 동기(同氣) 사이에서 발생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사대부의 가정에서는 있지 않았던 변고이다. 중건은 집안에서 편히 죽었고 무선도 장하(杖下)에서 죽어버려 정법(正法)에 의한 주참(誅斬)을 행하지 못하였으니, 통탄스럽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나서 비가 내렸다는 것으로 헌관(獻官)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우의정 원두표(元斗杓) 이하에게 상을 내렸는데, 차등있게 말도 내리고 물품도 내렸다.
정원이 특별히 유지(諭旨) 두 통을 지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찬성 송시열(宋時烈),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에게 전유(傳諭)하여 올라오게 하였는데, 이는 연석(筵席)에서의 상의 하교를 따른 것이다.
대사헌 채유휴(蔡𥙿後)가 옥당의 배척을 받아 체직되었는데, 지돈녕(知敦寧)을 제수하였으나 숙배(肅拜)하지 않고 양주(楊州) 땅으로 나갔다. 실록청(實錄廳)이 아뢰기를,
"도청 당상(都廳堂上)이 전적으로 감수(監修)를 관장하고 있으므로 잠시도 비울 수가 없으니, 소환(召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유후가 상소하여 다시 사직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물의의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체직시켜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영천 군수(榮川郡守) 홍주세(洪柱世)가 오랫동안 시론(時論)에 버림받고 있었는데, 명하가 청로(淸路)에 앉히려고 누차 대망(臺望)하였으므로 물의가 비난하였다. 이 때문에 명하가 스스로 불안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참판 이응시(李應蓍), 참의 이경휘(李慶徽)도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였다.
6월 9일 임진
상이 왼발 엄지 발가락에서 네째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소양증(搔癢症)으로 종창(腫瘡)이 생겼다. 약방 제조가 의원(醫員)들을 데리고 들어와 진찰하였다. 상이 침을 맞았다.
장생전(長生殿)에서, 본전에 저장된 황장판(黃腸板)이 거의 다 되어 간다는 이유로 경차관(敬差官)을 강원도로 뽑아보내 겨울이 되기 전에 베어서 실어오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황장목(黃腸木)을 몰래 베어가는 폐단이 근래 더욱 극심하여, 전혀 국용(國用)에 합당한 재목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가 지방관이 삼가 살피고 돌보지 않은 소치이니, 경차관에게 두루 돌아다니면서 자세히 살피도록 신칙하여 범한 것의 경중을 조사해서 입계(入啓)하게 한 다음 논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0일 계사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하문하기를,
"이조의 삼당상(三堂上)이 서로 잇따라 인입(引入)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김수항(金壽恒)이 대답하기를,
"홍주세(洪柱世)를 청망(淸望)에 주의(注擬)한 것 때문에 물의가 그르다고 하고 있는데 그래서 인입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옛날에 왕부(王符)059) 는 외가(外家)가 없어도 오히려 명인(名人)이 되었다고 일컬었으며, 개가(改家)한 사람의 자손들도 공경(公卿)이 된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문지(門地)를 갖고 서로 내세우기 때문에 시론(時論)이 이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항오(行伍) 사이에서 발탁하여 경상(卿相)을 제수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홍주세는 풍령군(豊寧君) 홍보(洪靌)의 아들로 문재(文才)가 있어 한때의 저명 인사들과 많은 교제를 가졌다. 그러나 주세는 성품이 어리석고 학술이 잡스러운데다가 과부가 된 그의 누이 동생이 음행(淫行)이 있었으므로 물론(物論)에 배척을 받았다.
효묘(孝廟) 초년에 송시열·송준길 등이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에 나아와서 논의함에 있어 격탁 양청(激濁揚淸)을 힘썼으므로 신면(申冕)의 당여들이 사론(士論)에 공척당하였었다. 주세(柱世)가 이때 재랑(齋郞)으로 있으면서 신면과 좋게 지냈고 시열 등과도 종유(從遊)하였는데, 사류(士流)들의 논의가 과격하다는 것으로 소장을 올리려 하다가 소장을 올리기 전에 말이 누설되었다. 그 의도는 대체로 조정(調停)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은 신면의 처지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물의가 떠들썩하게 일어났으며 대계(臺啓)에 따라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 뒤에 급제하였으나 오랫동안 한산(閑散)한 처지에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홍명하가 문재(文才)를 애석하게 여겨 누차 청선(淸選)에 주의(注擬)하였으나 물의가 비등하였다. 그래서 이조의 좌이(佐貳)들도 모두 불안하게 여겨 인입(引入)한 것인데, 상이 괴이하게 여겨 하문한 것이다. 그러나 경석(景奭)이 진달한 바 왕부(王符)의 일은 또한 어긋난 비유라고 하겠다.
오준(吳竣)을 좌참찬으로, 성태구(成台耉)를 사간으로, 심재(沈梓)를 지평으로 삼았다.
6월 11일 갑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니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 등이 의원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진찰하였다. 상이 침을 맞았다.
교리 이익(李翊)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근일 대각(臺閣)이 쟁집하고 있는 바 시장(柴場)을 절수받는 데 대한 폐단이야말로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 가운데 큰 것입니다. 일찍이 연신(筵臣)이 아뢴 것을 인하여 본도에서 사핵(査覈)하는 거조가 있었는데 뜻밖에 어제의 하교에서 처음의 명령을 변경하니, 이는 너무도 신하들이 성상에게 기대한 뜻이 아닙니다.
신이 과거 선조(先朝) 때 외람되이 안렴(按廉)하라는 명을 받고 직접 수교(手敎)를 받들었는데, 십행(十行)의 윤음(綸音)이 간곡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곧 여러 궁가와 각 아문, 사대부(士大夫)의 둔장(屯庄)·염분(鹽盆)·어전(漁箭)·선척(船隻)·원당(願堂) 등 모두 폐단을 일으키는 데에 관계된 사건(事件)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선대왕(先大王)이 이미 초치하기 어려운 신하들을 초치하고서 그들의 말을 써주고 그들의 도(道)를 행하게 함으로써 장차 큰 일을 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등등의 누적된 고질적인 폐단 가운데 한 가지 일이라도 백성의 피해가 되는 것이 없게 하고 내척(內戚)의 잗단 사사로움이 털끝만큼이라도 정치를 하는 데 하자가 되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난번 전하께서 즉시 연신의 소청을 허락하신 것이야말로 선왕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성대한 마음인 것으로서, 그야말로 사심(私心)을 제거하고 공의(公義)를 확충하여 대업(大業)을 경륜(經綸)함으로써 계속 천명(天命)을 이어갈 기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근일 이래 갑자기 소망이 어긋나게 되었으니, 전하의 이목관(耳目官)이 된 사람으로서는 광구(匡救)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계속 고집하시면서 따르실 뜻이 없으시니, 신은 이렇게 하기를 마지않는다면 사사로움을 제거하려 해도 제거할 수 없고 공의를 확충시키려 해도 확충시킬 수 없게 되어 그럭저럭 세월이나 보내는 타성에 젖어 끝내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귀결될까 염려스러워 삼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지난번 유신(儒臣)이 진달한 소장은 모두가 오늘날의 급선무인데 전하께서 쓸 만한 것이라고 포장(褒奬)하였으니, 참으로 국가를 위하여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전하의 한 마음이 대공 지정(大公至正)함을 따라서 수연(粹然)히 왕도(王道)를 가지고 스스로 면려하지 않는다면, 신은 그저 겉치레만 될 뿐 끝내 볼 만한 실효가 없게 되어 진언하는 사람이 반드시 오래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한 명의 선비를 잃고 내일 또 한 명의 선비를 잃게 된다면 나라가 텅 비게 되어 위망(危亡)이 금방 닥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시장(柴場)에 대한 한 조항은 일이 궁가(宮家)에 관계된 것인 만큼 전하께서도 자유로이 조처할 수 없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하의 뜻이 일단 확립되면, 지성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인데 어찌 감동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미세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관계된 바는 매우 중하니, 삼가 원하건대 고식적인 것을 편안히 여기지 마시고 사사로움에 가리워지는 일이 없이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청명(淸明)한 정치를 환히 밝히소서."
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그 말을 쓰지는 못하였다.
대사간 이정기(李廷虁), 헌납 최일(崔逸), 정언 이지익(李之翼)·최관(崔寬)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삼가 약방(藥房)의 계사(啓辭)를 보건대, 의관(醫官) 최유태(崔有泰)가 입시했다가 나온 뒤에야 제조 이하가 비로소 성후(聖候)가 미령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신들은 너무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약방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성궁(聖躬)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대신(大臣)이 반드시 제조를 겸하게 한 데에서 임무가 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옥후(玉候)가 혹 좋지 않을 때가 있으면 제조가 여러 의관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한 연후에 약을 의논하는 것이 본래의 구규(舊規)인 것인데, 이제 그만 한 의관으로 하여금 먼저 입시하게 해놓고 제조는 까마득히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크게 사체를 손상시켰고 또한 뒤폐단에도 관계가 됩니다. 지금부터는 다시 이렇게 하지 말도록 하소서.
전남 우수사(全南右水使) 이동현(李東顯)은 한 척의 배에다 미포(米布)를 가득 싣고서 그 배까지 아울러 이조 참판의 집으로 보냈는데, 이조 참판 이응시(李應蓍)가 그 글을 받지 않고 전임관(前任官)에게 핑계대었습니다. 그러나 전임 참판인 이일상(李一相)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서 쌀을 실은 배를 강가에 오래도록 정박(定泊)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말할 수 없이 자자하게 전파되어 있는데, 보낸 물건이 결국 어느 곳으로 귀착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동현이 멋대로 뇌물을 보내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래도 징계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탐독스러운 습관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잡아다가 국문한 다음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동현의 일만 따랐다.
부사과(副司果) 김효순(金孝純)이 상소하기를,
"신은 효종 대왕께서 심양(瀋陽)에 계실 적에 외람되이 편비(偏裨)의 반열에 있었으므로, 어제(御題) 한 장이 다행히도 미신(微臣)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어필(御筆)·어압(御押)을 그대로 사실(私室)에 머물러 둘 수가 없어 이에 감히 봉헌(奉獻)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삼가 완상(玩賞)하기도 전에 비통한 감회를 느끼게 하였다."
하고, 이어 첨사(僉使)에 제수하도록 하였다.
해가 저물녘에 상이 다시 여러 의관들에게 들어와서 진찰하라고 명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청하기를,
"제조 와 의관들을 모두 숙직하게 하여 야간의 불시에 있을 하문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제조는 단지 승지만 입직(入直)하게 하였다.
6월 12일 을미
상이 침을 맞았다. 이경석이 약방 도제조로 입시하였다가 아뢰기를,
"신이 현재 총재직(摠裁職)을 맡고 있는데 사국(史局)의 일에 우려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도청 당상(都廳堂上)이 사사(史事)를 전담하고 있는데 지사(知事) 채유후(蔡𥙿後)는 교외(郊外)에 나가 있고 대제학 이일상(李一相)과 이방 당상(二房堂上) 이응시(李應蓍)는 모두 자신들의 이름이 대계(臺啓)에 들어 있다는 것 때문에 감히 행공(行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실은 어떻든 간에 대론(臺論)이 중하게 말하였으니 결말을 기다려야 합니다. 만일 동현(東顯)이 올라와서 변결(辨決)되기를 기다린다면 사사(史事)가 점점 지체될 것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은 아뢰기를,
"이 일은 곡절이 있습니다. 당초 동현이 일상(一相)에게 글을 보냈었는데, 그 글의 내용은 변성(邊姓)을 가진 사람이 오래된 퇴선(退船)을 매매한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조 참판이라고 썼기 때문에 뜯어 보았던 것인데, 일상은 당초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시임 참판인 이응시(李應蓍)에게 보냈던 것이며, 응시도 이런 일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 모두 서한을 써서 동현에게 문의하였던 것입니다. 동현이 과연 위조된 글 한 통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에 오래된 퇴선을 매매하는 데 관한 일이 있었고 그 끝에 일상(一相)이란 이름을 썼습니다. 그러나 자획(字劃)과 문리(文理)가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결코 사부(士夫)의 글이 아니었습니다. 비국의 여러 재신들이 이를 목도하고서 놀라고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 일의 곡절은 이러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미포(米布)를 실은 배가 와서 정박해 있다고 한 일은 매우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하고, 윤강(尹絳)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동현의 글이 먼저 일상에게 도착한 것을 응시에게 전송(轉送)했다고 하는데 대간은 먼저 응시에게 보냈다고 말하였습니다. 일상이 먼저 그 글을 보고 나서 응시에게 보냈다면 일상에게 원래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상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의당 남이 알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어찌 응시에게 전송했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두 사람의 성명이 모두 대계(臺啓)에 들어 있으니, 행공(行公)하게 하더라도 어떻게 태연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에서 대신(大臣)들에게 하문하시어 조속히 처치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대계에 이미 미포를 가득히 실은 배 한 척이 오래도록 강가에 유치되어 있다고 한 말이 있으니, 적간(摘奸)하게 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호조·공조에서 낭관을 보내어 강가에 정박해 있는 동현이 보낸 미포를 실은 배를 적간하였으나 끝내 찾아낸 것이 없었다.
채유후(蔡𥙿後)를 공조 판서로, 이원로(李元老)를 경상 우병사로, 노정(盧錠)을 전남 우수사로 삼았다.
6월 13일 병신
대사간 이정기(李廷虁), 헌납 최일(崔逸), 정언 최관(崔寬)이 아뢰기를,
"그저께 본원의 회좌(會坐) 때 동료가 이동현의 미포를 실은 배에 대한 이야기를 석상(席上)에서 발론했는데, 신들은 말하기를 ‘이 이야기는 전파시킨 자가 있으나 그 상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으니 다시 더 듣고 보고 난 다음 조처하고 싶다.’ 했더니, 동료가 답하기를 ‘대각에서 일을 논함에 있어서는 풍문(風聞)에 의거하여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따라서 이미 들은 것이 있었으니 어떻게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현을 잡아다가 추문하면 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했습니다.
대체로 이응시(李應蓍)·이일상(李一相) 등은 한때의 명류(名流)들로서 스스로 청근(淸謹)한 행동을 견지하고 있으니 비록 부언(浮言)이 있더라도 누가 이 두 사람에게 의심을 품겠습니까. 다만 동현이 쌀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미 전파되었으니, 버려 두고 논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료의 의견은 이와 같은 데 불과했기 때문에 신들도 이를 옳게 여겨 상의하여 논계한 것입니다. 그리고 쌀을 실은 배가 서강(西江)에 정박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즉시 서강의 이임(里任)을 불러 그 사상(事狀)에 대해 물어 보았으나 모두들 수영(水營)의 배는 원래 도착한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반복하여 힐문해 보았습니다만 끝내 단서가 없었으므로 신들은 이미 의아해 하고 있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엊그제 들어가 진찰할 적에 대신(大臣)·근신(近臣)이 진달한 내용은 신들이 논계한 내용과 크게 서로 달랐으므로 신들은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일상이 동현에게 촉탁하는 글을 보냈다는 것은 곧 사람을 위하여 퇴선(退船)을 사주기를 청한 일이었는데, 위조한 흔적이 분명한 것을 비국의 여러 재신들이 모두 눈으로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미포(米布)에 대한 이야기는 본디 잘못 전파된 것으로서 그 글에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동현의 글이 먼저 일상에게 전달되었는데도 신들이 응시에게 먼저 전달되었다고 했으니, 이 또한 사실과 어긋난 것으로 일을 논함에 있어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이지익(李之翼)은 아뢰기를,
"이동현이 배에 미포(米布)를 싣고 와서 그 배와 아울러 이조 참판의 집으로 보냈는데 전후 참판이 서로 미루고 있다는 이야기는 4월 사이에 나온 것이니, 누군들 듣지 않았겠습니까. 당초 보낸 물건이 이응시에게로 잘못 납입되었기 때문에 응시가 그 글을 뜯어보고서 그 물건을 받지 않자 또 이일상에게 납입했는데 일상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색리(色吏)와 선격(船格)이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즉시 도망쳤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말이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자자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이미 이런 이야기가 있었고 보면 두 사람의 도리로서 당연히 놀라 당황하여 스스로 논열(論列)하고서 구별되기를 기다렸어야 하는데, 끝내 진변(陳辨)하는 일이 없었음은 물론 숨긴다는 혐의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 사이의 정적(情迹)을 자못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 척의 배에 미포를 실은 것은 이미 보통의 궤유(餽遺)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두 사람은 한때의 명재(名宰)로서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함이 없이 요행히 사건이 소멸되기만을 기다리는가 하면 끝내 애매모호하게 변백(辨白)하려 하지 않으니, 국가의 기강이 엄하지 않고 세도(世道)가 한심스럽게 된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전에 동현을 잡아오기를 청한 계사(啓辭)는 신이 혼암하여 분명히 살피지 못한 탓으로 아울러 두 사람을 논하지 않았으므로 물의(物議)가 모두 이를 그르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들어가 진찰할 적에 대신·근신이 진달한 이야기가 신이 논한 것과 서로 틀렸는데, 동료가 또한 이 때문에 인피(引避)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동현에 대한 논의를 제일 먼저 발론했으니, 신의 잘못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모두 사퇴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장령 성후설(成後卨)이 처치(處置)하기를,
"대각이 일을 논함에 있어 풍문에 의거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근거없는 논의와 같다면 전도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쌀을 실은 배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오히려 장황하게 잘못을 꾸미는 것은 없는 것을 날조했다는 것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정기·최일·최관·이지익을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끝에 논하기를,
"더욱 조섭(調攝)을 삼가고 더욱 성학(聖學)을 힘쓰고 희로(喜怒)를 반드시 중도에 맞게 하고 형정(刑政)은 반드시 삼가소서. 그리고 크고 작은 일을 잘 헤아려 생각하여 천심(天心)에 합치되게 함으로써 국운이 영원하고 천명을 계속 맞이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시골에 있으면서 소망하고 있는 것은 오직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뜻은 사관(史官) 편에 유시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조속히 마음을 바꾸어 돌아오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다."
하였다.
6월 15일 무술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이 들어가 진찰하는 것을 인하여 아뢰기를,
"자점(自點)의 흉역(凶逆)은 전고(前古)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만, 그가 반역을 하지 않았을 때를 당하여서는 조신(朝臣) 가운데 친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고, 신도 서로 알고 지냈었습니다. 전 감사 이시만(李時萬)의 경우 김적(金賊)과 서로 친하다는 이유로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대사헌으로 있을 적에 논계하여 폐고(廢錮)시켰는데 지금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용서할 수 있는 방도가 없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원이 선왕께 계달(啓達)했었는데, 선왕께서 특별히 서용하기는 어려우니 6월 세초(歲抄)를 기다리라고 하교하였습니다. 이미 품고 있던 이야기이기에 이에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곡절을 내가 상세히 알 수 없다."
하였다.
함릉군(咸陵君) 이해가 다시 상소하여 치사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70세에 치사한다는 것이 비록 고사(古事)라고는 하지만, 재국(才局)과 덕량(德量)이 중임을 감내할 만한 사람이 한결같이 고규(古規)라고 하면서 이렇게 굳이 청한다면,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고서 조속히 직무를 수행하라."
6월 16일 기해
이진(李𥘼)을 승지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경최(慶㝡)·안진(安縝)을 정언으로, 오두인(吳斗寅)을 헌납으로 삼았다.
실록청이 아뢰기를,
"총재관 이경석이 들어가 진찰할 적에 아뢴 내용을 대신(大臣)들에게 문의하였더니,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는 말하기를 ‘이동현의 당초의 글 내용과 이일상이 위조된 글을 추현(推現)한 곡절을 신들이 이미 상세히 알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탑전에서 대신들이 남김없이 진변(陳辨)하였으며 헌부의 처치도 매우 명백하니, 이일상·이응시는 다시 인혐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생각건대 이동현을 잡아다가 추문하라는 청이 이미 윤허를 받았으니, 이 일이 끝나기 전에는 조정의 사체로 보아 두 신하의 형편은 행공(行公)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만일 별도의 처분이 없다면 억지로 출사(出仕)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였으며, 영중추 정유성(鄭維城)도 말하기를 ‘간원의 많은 관원들이 이미 사실과 어긋났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으니, 이일상 등에게는 다시 털끝만큼도 인피해야 할 혐의가 없습니다.’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은 이제 인입(引入)할 일이 없으니, 조속히 출사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 이 출사(出仕)하였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분부에 핍박되어 병든 몸을 부축하고 무릅쓰고 나아왔습니다만 국사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년에 또 흉년이 들게 되면 백성을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이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를 바라다가 비가 내렸는데 또 개이지를 않고 있으니 거꾸로 수재(水災)가 날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산군(山郡)에도 대동법(大同法)을 지금 설행해야 됩니다. 따라서 의당 해관 당상으로 하여금 본도에 이문(移文)하여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이미 강정한 것이 있어 1결(結)마다 작목(作木) 1필씩 내게 되어 있는데, 1필의 절미(折米)는 7두(斗)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시방(李時昉)의 의논은 기필코 1두를 감하려고 했는데, 그 또한 의견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강정해야 할 것은 7두와 6두의 당부(當否)가 어떠한가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산군(山郡)에는 쌀 5두를 작목 1필로 쳤는데 호남(湖南)의 경우는 쌀값이 호서에 견주어 상당히 쌌기 때문에 당초 의정(議定)할 적에 7두를 항식(恒式)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뒤 이시방이 말하기를 ‘1결(結)에 13두를 준봉(准捧)하는 것은 부당하니 의당 1,2두를 감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원미(元米)를 감하는 이상 쌀로 작목(作木)하는 숫자가 7두에 이른다면 원수(元數)가 많이 부족하게 되니, 의당 6두를 항식으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도로 말한다면 7두를 작목(作木) 1필로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積)은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반드시 곡진하게 민정(民情)을 따르려 한다면 7두로 정하더라도 백성들이 만족할 줄을 알겠습니까. 호서의 경우를 논하여 본다면, 5두로도 1필을 사기가 어려우니, 산군에 대해 고집하여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읍(海邑) 또한 어찌 단지 5두만 상납(上納)할 뿐이겠습니까. 이름은 5두이지만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반드시 6, 7두를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산군이 반드시 해읍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전세(田稅)는 1석(石)을 작목 3필 반으로 치는데 1필의 쌀값은 곧 4두 2승(升)이므로 쌀을 바치는 고을에서는 모두 작목으로 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대동 작목(大同作木)으로 하는 고을만 더 고통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호남은 쌀값이 싸다고는 하지만 6두로 정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결에 13두로 하고 작목(作木)은 2필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이는 6두 5승을 작목 1필로 하는 것이니, 6두와 7두 사이로 절충하신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정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상이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이유태(李惟泰)의 상소에서 초출(抄出)한 것을 태화에게 내어 보이게 하고서 이르기를,
"이 상소의 내용은 채용해야 할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 상소의 내용은 조목이 매우 많아서 창졸간에 진계(陳啓)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외에 또 향약(鄕約)에 관한 책이 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묘조(宣廟朝) 때 향약을 행하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 선정신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옛법이 좋기는 하지만 지금은 행할 시기가 아니다.’ 했습니다. 유태가 이른바 기다리는 것이 있어서였다고 한 것은 반드시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지금이 과연 행해야 될 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은 결정하여 행하고자 한다."
하니, 우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이것은 고법(古法)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연영원(延英院)은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선조(先朝) 때 이 의논을 내었으므로 이미 강정(講定)한 말이 많이 있습니다. 오위(五衛)는 지금은 그 이름만 있을 뿐 그 실상이 없는데, 지금 고제(古制)를 모두 회복시키려 한다면 지금의 각종 군병들을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소장 내용에 내수사(內需司)에서 출납하는 물품에 대해 이부(吏部)가 참여하여 알게 해야 한다는 말은 필시 상세히 살피지 않아 그런 것일 것입니다."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이 소장의 내용에 공안(貢案)을 고칠 것도 아울러 언급했습니다만, 논하는 사람들 모두가 말하기를 ‘지금의 공안은 연산조(燕山朝)의 폐정(弊政)의 산물이다.’고 하나 이는 정확한 의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공안을 고칠 경우에는 폐단이 도리어 지금보다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20년마다 다시 양전(量田)하는 것은 본디 국가의 정해진 법제로서, 인조조갑술년060) 에도 삼남(三南)에 양전을 행했었습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경기의 양전에 관한 일은 선조(先朝) 때 이미 결정하였습니다만, 흉년이 든 탓으로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전은 의당 팔도(八道)를 통틀어서 해야 된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양전사(量田使)는 적격자를 구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만일 등제(等第)를 정할 적에 상세히 살펴서 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폐단이 있게 되는 법이니, 반드시 사람을 가려서 맡겨야 합니다. 이른바 용관(冗官)을 도태시켜야 한다고 한 데 대해서는, 지금 현존한 관원도 이미 《대전(大典)》에 있는 숫자보다 감한 것이라서 간혹 제대로 모양을 갖출 수 없는 때도 있으니, 다시 의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임(久任)시키는 것이 좋기는 합니다만 반드시 적격자를 얻은 뒤에 바야흐로 그 공효를 책임지울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신들과 이조의 책임입니다. 이른바 사치를 금단시켜야 한다는 한 조항은 위에서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들이 물러가서 마땅히 그 소장을 가져다가 조목별로 의논하여 아뢰겠습니다."
하고, 두표는 무변 당상(武弁堂上)에 인재가 모자라는 데 대한 폐단을 진달하고 아뢰기를,
"병조에서 곧바로 발탁하여 기용할 것을 청하는 것은 감히 못할 바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에서 주목관(州牧官)을 천거하는 예에 의거하여 영장(營將)에 적합한 사람을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초계(抄啓)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일상 등에 대한 일은 하문에 따라 헌의했습니다만, 이동현을 잡아다가 추문한다면 일상 등이 필시 감히 출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일은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귀결되었으니, 다시 동현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동현은 잡아다가 추문하지 말라."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이경석(李景奭)이 이시만(李時萬)의 일 때문에 신의 이름을 거론하기까지 하였다 하는데, 감히 그 곡절을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그때 마침 헌장(憲長)으로 있으면서 자점(自點)의 당여(黨與)인 이시만(李時萬)·이지항(李之恒) 등 여러 사람을 논하였는데 그들 모두 죄를 받았습니다. 비록 한때의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영원히 폐기하는 것은 부당할 것 같기에 신이 선조(先朝)께 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미처 성명(成命)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듣건대 별군직(別軍職) 가운데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진소(陳訴)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속(贖)바치게 해 줄 것을 청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효성(吳孝誠)이란 자가 선왕이 심양(瀋陽)에 있을 적에 군관(軍官)이었기 때문에 과연 불러서 접견했었는데 별로 진소(陳訴)한 일은 없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가 어떻게 감히 차비문에서 직접 진소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그 아들의 신역(身役)을 속바치게 해 주고 싶으시면 또한 마땅히 정원에 말하여 거행해야 할 것이요, 사사로이 하교하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고, 유계(兪棨)는 아뢰기를,
"이 일이 하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조짐이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뒷날 군사들이 교만해지는 폐단이 여기에서 연유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필할 수 없으니, 그 조짐을 통렬히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판(刑判) 홍중보(洪重普)는 아뢰기를,
"이시백(李時白)의 병이 위중해졌을 적에 신이 가서 만났더니, 시백이 말하기를 ‘병자 호란 때 남한 산성에서 성첩(城堞)을 지킬 적에 어떤 군사가 와서 적병이 성으로 올라왔다고 하기에 깜짝 놀라 일어나서 보니 적병 하나가 갑주(甲胄)를 갖추고 성 위에 서 있었다. 군관(軍官) 송의영(宋儀英)이 가지고 있던 몽둥이로 쳐서 성 밖으로 떨어뜨리고 이어 그 운제(雲梯)를 빼앗았는데 그 때문에 적병이 올라올 수 없었다. 인조 대왕이 즉시 불러보고서 금은으로 상을 내렸는데, 그 군사는 이를 이유로 가자(加資)해 주었지만 의영은 단지 첨사(僉使)가 되었을 뿐이었다.’ 하고서, 신으로 하여금 진계(陳啓)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대신(大臣)이 운명할 때 한 말에 관계되기 때문에 감히 진달합니다."
하고, 병판(兵判) 정치화(鄭致和)는 아뢰기를,
"신은 그때 종사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 군사의 이름은 난복(難福)입니다. 그날 적장이 성 위로 올라왔는데도 성중에서는 전연 몰랐었으니, 난복이 살펴보지 않고 의영이 쳐 죽이지 않았다면 위태할 뻔했습니다. 서성(西城)의 공은 의영이 제일이었는데 단지 첨사가 되었을 뿐이어서 곤궁한 나머지 스스로 보존할 수도 없게 되었으므로 시백이 일찍이 딱하게 여겨 박한 급료를 받는 직에 붙였었습니다. 시백이 죽은 뒤 의영이 신을 찾아와서 울며 말하기를 ‘이제 또 박한 급료를 받는 것도 잃게 되었으니, 장차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국가에서 공이 있는 이에게 상을 주는 법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당상(堂上)으로 올리게 하라."
하였다.
6월 17일 경자
간원이 전에 아뢴 고묘(告廟)에 대한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6월 18일 신축
예조 참판 이일상(李一相), 이조 참판 이응시(李應蓍)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모두에게 답하였다.
"내가 이미 그 실상을 통촉하고 있는데 경들은 무엇 때문에 말단의 일을 분분하게 일삼고 있는가.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그리고 조속히 직무를 수행하라."
상이 흥정당(興政堂)으로 나아가니, 약방 제조 등이 의원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창환(瘡患)을 진찰하였다. 상이 어의(御醫) 윤후익(尹後益)을 불러 앞으로 가까이오게 하고 이르기를,
"그대는 나의 왼쪽 안구(眼球)를 살펴 보라."
하니, 후익이 상세히 살펴보고 대답하기를,
"안구의 광채는 오른쪽과 다름이 없습니다만, 동자(瞳子)는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눈꼬리에 이물감(異物感)을 느껴 손으로 문질렀더니, 막히고 아픈 증세를 깨달을 수 있었는데 흡사 눈병이 처음 생길 때와 같았다. 그리고 근래에는 가까이서 보면 분명히 보이는데 멀리서 보면 연기나 안개 같은 것이 중간에 끼인 것 같은데, 이는 날이 무더워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다시 전의 병이 도져서 그런 것인가. 좌우 양쪽 모두에 침을 맞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경석이 아뢰기를,
"물러가서 약에 대해 의논하겠으며, 또한 침을 맞을 날을 의정(議定)하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6월 19일 임인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곽지흠(郭之欽)을 사간으로, 신상(申恦)을 장령으로, 윤지미(尹趾美)·이동로(李東老)를 지평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이민서(李敏敍)를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눈병 때문에 침을 맞았다. 입시한 승지에게 이르기를,
"공조 참의 이유태(李惟泰)를 비국으로 가서 회좌(會坐)하게 하여 그가 올린 소장을 상의하고 토론하여 들여오게 하라."
하고, 또 원궤(元簋)의 조율(照律)이 너무 가볍다는 것으로 하교하기를,
"수령들이 형장(刑杖)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엄히 계칙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여전히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은 채 분한 김에 사람을 죽이기를 마치 풀을 베듯이 하고 있다. 백성은 수령의 백성이 아니고 곧 국가의 백성인데, 어떻게 감히 이렇게까지 혹독한 짓을 멋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원궤가 1차의 형신(刑訊)으로 갑자기 사람을 죽게 하였고 또 그 시체마저 내어주지 않았으니, 어찌 통분스럽기 그지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윤강(尹絳)이 【약방 제조로 입시하였음.】 대죄(待罪)하고 또 아뢰기를,
"원궤의 일은, 그가 사핵(査覈)하는 것을 막은 죄만으로 대간이 감단(勘斷)했기 때문에 이렇게 조율한 것입니다."
하였다.
공조 참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나의 뜻은 이미 전후 소장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속히 출사하여 행공(行公)하고 비국의 의논에 참여하여 의견에 서로 구애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6월 20일 계묘
주서(注書) 맹주서(孟胄瑞)가 우찬성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에게 전유(傳諭)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시열은 말하기를 ‘신은 죄려(罪戾)가 산처럼 쌓였는데도 과분하게 큰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몸이 가루가 되도록 보답하기를 도모하는 마음이 감히 조금이나마 남보다 뒤질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다시 내린 성지(聖旨)는 사의(辭意)가 더욱 간절하여 군신이 있은 이래 신하로서 군부에게 이런 은총을 받은 경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용렬하고 비루하기가 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근일의 일은 신이 실로 화근을 만든 것입니다. 신이 우러러 성명을 믿고 말을 절제하지 않았던 탓으로 사람들의 망극한 말을 초치하게 되어 끝내 궤열(潰裂)되고야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유독 그 사람의 죄일 뿐이겠습니까. 더구나 지금도 사설(辭說)이 그치지 않은 채 갈수록 더욱 분분하여지고 있습니다. 물의(物議)가 신을 무죄라고 하지 않는데, 신이 이에 감히 성명을 믿고 도리어 죄가 없는 것으로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죄려가 더욱 가중되어 그저 우러러 성명에게 누를 끼치기에만 알맞을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가면 갈수록 논의가 더욱 격하여지고 명목(名目)이 더욱 커지게 되면, 성명께서 신을 보호하려 하여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신이 감히 머리를 내밀지 못하는 것은 물의를 두려워하는 것이요, 감히 성명께서 혹시라도 살피지 못하신 것이 있는가 하고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했습니다.
준길은 말하기를 ‘근시(近侍)가 멀리 와서 별유(別諭)를 가져다 전하여 주었는데, 미신(微臣)이 품고 있으면서 말하려고 하던 마음속의 정리를 성유(聖諭)에서 이미 먼저 다 말하였습니다. 신이 되풀이하여 경건히 읽노라니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신이 변변치 못하기는 하지만 또한 옛사람이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도구를 간직하고 시기를 기다려서 세상을 위하여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 임금과 뜻이 맞아서 밖으로는 군신의 의리에 의탁하고 안으로는 마음속 깊이 계회(契會)를 맺는다면, 참언하는 사람이 1백 수레나 된다고 하더라도 의당 굳게 앉아 동요하지 않고 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은 물론, 잠시 물러가는 것을 면할 수 없다 해도 임금이 돌아올 것을 명하면 그에 따라 즉시 다시 나아와서 정성을 다하여 보답할 것을 도모하면서 죽은 다음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고사(古事)를 논할 것 없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계미년061) 의 일 같은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지금 신의 사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신은 본래 아둔하고 잔약하고 병이 많아 백 가지에 한 가지도 능한 것이 없으므로 평생 스스로 기약하는 것이 조용히 산속에 거처하면서 큰 허물이 없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으로, 실로 당세(當世)를 위하여 공효를 베풀 수 있는 포부와 역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대왕께서 잘못 헛된 이름을 듣고 외람되게도 융숭한 권애(眷愛)를 베푸셨습니다. 그리하여 몇 년 사이에 우뚝하게 상경(上卿)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천하 고금에 전혀 없던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은 명실(名實)이 상반되어 닥치는 일마다 전도되었으니, 사람들이 비난하고 귀신이 책하는 것은 이치상 반드시 이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조(先朝) 때부터 당저(當宁)에 이르기까지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한 것이 간절하고 긴박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당초 지난번의 일 같은 것을 미리 우려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번의 일은 성명께서 통촉하시었고 공의(公議)가 아주 정하여졌으니, 신이 어찌 이를 인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할 의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형편이 본래 이러한데다가 지금은 쇠병(衰病)이 날로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억지로 엄한 소명(召命)에 따라 달려가다가 혹 쓰러져 죽는 지경에라도 이르게 된다면 이는 또한 성주(聖主)께서 병든 사람을 보살펴 주시는 인자함이 아닌 것입니다. 신은 배회하고 주저하면서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했습니다."
공조 참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비국에서 회의(會議)하라는 명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식물(食物)도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은 금년 봄에 이미 은혜를 받아 죽어 나뒹구는 신세를 면하였는데, 지금 또 이것을 받는다면 죽음에서 면하기만 하면 될 뿐이라고 한 훈계를 살펴볼 때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논하는 사람들은 신 때문에 종사(宗社)가 불안하고 민지(民志)가 안정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신이 오래도록 스스로 반성하여 보았으나 참으로 그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귀를 편안히 여기고 영화를 존숭한다는 꾸짖음에 대해서는 실로 그런 점이 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람들의 노한 안색에서 증험하고 사람들의 비난하는 소리가 나온 뒤에야 깨닫는다.’고 했는데, 지금 신의 경우는 안색에 증험하고 소리에 발현된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신령스럽지 못하고 사리에 어두운 금수(禽獸)일 뿐인 것입니다. 신이 지극히 어리석기는 하지만 아직 여기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이제 전하께서 기필코 이 직명(職名)을 더럽히게 하고 이 은사(恩賜)를 받게 한다면, 총애한다고 하는 것이 곧 죄를 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가을을 기다려 올라오게 하였다.
6월 21일 갑진
상이 침을 맞았다.
도목정(都目政)이 있었다. 이연년(李延年)을 응교로, 김만균(金萬均)을 부교리로, 이수인(李壽仁)을 부응교로 삼았다.
6월 23일 병오
상이 침을 맞았다.
양사(兩司)가 유후성(柳後聖)·조징규(趙徵奎)를 석방시키는 것을 환수하라고 하는 계사(啓辭)를 정지하였다.
6월 24일 정미
호서(湖西)의 보은(報恩)·청안(淸安)·서천(舒川) 등지에 계속 폭우가 내려 사람과 가축이 산사태와 벼락에 맞아 많이 죽었는데,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유태의 소장에 대해 신들이 이유태와 강론(講論)하였으므로 지금 탑전에서 품정(稟定)하겠습니다. 그의 소장에서는 백성의 숫자를 알고 전결(田結)의 숫자를 아는 것을 대지(大旨)로 삼고 있고, 그 나머지 조건들은 모두가 절목(節目)에 관계되는 일이었습니다. 유태가 이른바 향약은, 실은 호패와 같은 성격의 것이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들 향약을 행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패를 행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만, 호패를 갑자기 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양전(量田)에 관한 일은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의당 조금 풍년이 든 곳부터 먼저 거행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가작통(五家作統)을 하면 백성들의 숫자를 알 수 있으니, 실로 호패와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우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오가작통이 좋기는 합니다만 누락될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향약을 행한다면 누락되지 않게 할 수 있는데, 국가의 기강이 해이되어 이 법을 행하는 것도 기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좌상 심지원은 아뢰기를,
"잇따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무리 좋은 법과 아름다운 행정이 있다고 하여도 갑자기 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입시한 신하들에게 각기 생각을 진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예판(禮判)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호패는 절목(節目)이 매우 번거로워 법을 엄히 하고 형을 무겁게 하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습니다. 좌상이 이른바 백성과 함께 휴식(休息)해야 된다고 한 것이 바로 이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백성의 숫자를 알려고 한다면 도리어 폐단없는 오가작통이 낫습니다."
하고, 호판 허적(許積), 판윤 이완(李浣), 이조 참판 이응시(李應蓍), 좌윤 유혁연(柳赫然), 부제학 유계(兪棨)는 모두 호패를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지금 생민(生民)들이 가까스로 생활해 가고 있는데 어떻게 또 신법(新法)을 행하여 놀라고 동요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강정(講定)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금년에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양전(量田)에 관한 한 조항은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이미 귀일되었는데, 반드시 팔로(八路)에 풍년이 든 연후에 행하려 한다면 행할 날이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의당 먼저 조금 풍년이 든 도(道)를 가려서 행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호조로 하여금 이런 내용을 미리 알리게 하고 추수가 끝난 뒤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유태가 이른바 군자 별창(軍資別倉)이라는 것은 땅에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 지부(地部)062) 로 귀속시키려는 것으로서 예컨대 내수사(內需司)의 소입(所入) 또한 이 별창에 나누어 보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면세(免稅)를 혁파시키자는 것이 더욱 그의 주의(主意)인데, 내수사와 같은 경우 어떻게 하루아침에 혁파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두표·지원 등은 장학(張澩)의 형추(刑推)를 지나친 것이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 사람은 고 유신 장현광(張顯光)의 족자(族子)인데 취복(就服)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참작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이것이 장학의 소위가 아니라 필시 유배원(柳培元)의 소위일 것 같다. 대계(臺啓)가 얼마나 중한 것인데 이렇게 위조한단 말인가. 그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미루어 핑계대는 단서가 있는 것 같고 사특한 말이 많았기 때문에 엄형(嚴刑)을 시행하여 실상을 알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한더위에 형신을 받다가 만일 목숨을 잃게 된다면, 이는 실로 지나친 일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금부에서 참작하여 조율(照律)하라."
하였다. 사간 곽지흠(郭之欽)이 전에 아뢴 시장(柴場)에 대한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시장을 혁파하는 데 대해서는 당초 나의 뜻이 단지 강릉(江陵)에만 있었는데, 그때 거행 조건(擧行條件)을 저물녘에 입계(入啓)하면서 강원 일도(一道)라고 혼칭(混稱)했는데도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이 일에 대해 대간이 논집하고 있으나, 처음의 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따르지 않은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승지 윤집(尹鏶)이 아뢰기를,
"이 일 때문에 뭇 신하들이 매우 서운해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대간이 아니니 우선 잠자코 있도록 하라."
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이미 소회(所懷)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고, 유계는 아뢰기를,
"승지가 소회를 진달했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니, 어찌 언로에 손상되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단한 일이 아니니 버티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정언 경최(慶㝡), 헌납 오두인(吳斗寅) 등이, 김경신(金景信)의 일에 대해 처음에 조사받은 원궤(元簋)만 논하고 추관(推官)은 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물론(物論)이 그르게 여기자,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25일 무신
상의 두부(頭部) 오른쪽에 조그만 종기가 나서 뜸을 뜨게 되었는데, 날이 덥고 궁전이 좁다는 이유로 약방 제조의 입시(入侍)를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곽지흠(郭之欽) 등이 아뢰기를,
"금산 군수(金山郡守) 원궤는 이미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사핵(査覈)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도의 추관(推官)이 한 해가 지나도록 지체시키고 있고 여섯 번이나 행문(行文)했는데도 즉시 조사하여 보고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심(私心)을 따라 지체시킨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공조 참의 이유태가 모친의 병으로 정사(呈辭)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접견하려고 했으나 오늘은 마침 몸이 불편한 관계로 인접(引接)하지 못하니, 이런 내용으로 유태에게 이르라."
하였다. 유태가 시정(時政)에 대해 상소하여 진달했는데도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들이 저지하여 시행하지 못하게 되자 드디어 정사(呈辭)하고 갔다.
6월 26일 기유
이유태가 소장을 진달하고 내려가니, 상이 세 번이나 예관(禮官)을 보내어 모친의 병이 조금 차도가 있으면 조속히 올라오라고 하유하고 역마(驛馬)를 지급하였다.
해가 저물녘에 의관이 들어와 진찰하였는데 인하여 뜸을 떴다. 상이 임어한 곳이 좁다는 이유로 제조 1인과 사관(史官) 1인만 입시하게 하였다.
평안도 각 고을의 기민(飢民)이 1만 2천 2백 10여 구(口)이고, 북도(北道)의 유민은 7백 93명이었다. 3월부터 진구(賑救)하기 시작하여 보리를 수확할 때에 이르렀는데, 쓰여진 곡물(穀物)이 6천 20여 석(石)이었다.
개성부(開城府)의 기민은 4백 10구(口)인데, 4월부터 진구하기 시작하여 6월에 이르러 정지하였다.
6월 27일 경술
약방이 아뢰기를,
"엄려(嚴廬)가 협착하여 막혀서 답답한 것이 너무 심한데, 이런 혹독한 더위를 당한데다가 두부(頭部)와 손발의 병환이 있으니, 흥정당(興政堂)으로 이어(移御)하여 조섭(調攝)에 편하게 하소서."
하니, 형세를 살펴보고서 조처하겠다고 답하였다.
6월 29일 임자
오정위(吳挺緯)를 승지로, 이연년(李延年)을 집의로, 김만기(金萬基)를 헌납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의관 양제신(梁濟臣)을 수령에 제수하라는 유지(有旨)를 내렸는데도 정관(政官)이 주의(注擬)하지 않았으므로 전지(傳旨)를 내려 준절하게 나무라고 이어 제신을 특별히 금천 현감(衿川縣監)에 제수하였다. 망통(望筒)을 밤이 새도록 내리지 않았으므로 정관이 정청(政廳)에서 아침이 되도록 있었다.
평안도 용강(龍岡) 등 18고을이 모두 수재(水災)를 입었는데, 안주(安州)·가산(嘉山)·태천(泰川)이 더욱 심하여 가옥이 물에 떠내려가고 사람과 가축이 물에 빠져 죽고 산사태에 깔려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황해도 장연(長淵) 등 8고을도 수재를 입었다.
정원도 약방의 계사(啓辭)처럼 흥정당으로 이어할 것을 청하였는데, 다시 날씨를 보아가면서 조처하겠다고 답하였다. 삼공(三公)들도 이어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들이 이렇게까지 요청하니 차자대로 하겠다."
하였다. 상이 이어하겠다고 윤허하였으나, 실제로는 이어하지 않았다.
6월 30일 계축
정원이 아뢰기를,
"정관(政官)이 하직(下直)한 뒤에도 끝내 아무런 발락(發落)이 없어 궐내에서 밤을 지새게 하였으니 이는 전에 없던 일입니다. 정관이 잘못한 것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당초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은연중 불평스럽게 여기는 뜻을 보이면서 정석(政席)063) 이 끝난 지 오래 되었는데도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생기(省記)가 없는 관원으로 하여금 정청(政廳)에서 밤을 새우게 하였으니,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의관이 들어가 진찰하고 침을 놓을 적에 제조가 입시하는 것은 사체상 당연한 것인데도 시종 어렵게 여기면서 쾌히 허락하지 않으시니, 신하들이 바야흐로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제조가 막 입시할 것을 청하자 갑자기 이미 침을 맞았다는 하교가 내려왔습니다. 옥체(玉體)에 침을 맞는 것이 얼마나 중한 일인데, 단지 의관들에게만 맡긴 채 제조로 하여금 참여하지 못하게 하시니 이는 너무도 미안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신들은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감히 소회를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뜻은 나의 심열(心熱)을 격발시켜 병근(病根)을 첨가시키려 하는 것이지만 나의 생사(生死)와 안위(安危)는 또한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이 계사 때문에 더 위태롭게 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의 계교가 졸렬한 것이 개탄스럽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 뒤로 의관은 대령시키지 말고 모두 내보내게 하라. 약방 제조도 내일부터 문안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도승지 김수항(金壽恒), 좌승지 오정위(吳挺緯), 우승지 남용익(南龍翼), 우부승지 조윤석(趙胤錫) 등이 궐문 밖에 대죄하였는데, 좌부승지 윤집(尹鏶)만 병으로 전계(傳啓)할 때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원중(院中)에 머물러 있었다. 상이 정원에 하문하기를,
"의관들은 내어보내고 약방 제조는 문안하게 하지 말 것으로 분부했는가."
하니, 윤집이 아뢰기를,
"동료들이 모두 이미 나아가 대죄(待罪)하고 있는데, 신은 심한 이질(痢疾) 때문에 거동을 할 수 없어서 혼자 원중(院中)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하교하신 내용이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라서 감히 분부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누차 하교하여 독촉하니, 윤집이 감히 분부하지 못하겠다는 내용으로 네 번이나 아뢰기에 이르렀고, 앞서 내린 하교를 정지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윤집이 또 아뢰기를,
"만일 신료들로 하여금 즉시 도로 들어가게 하지 않고 끝내 궐직(闕直)하기에 이르게 된다면 국체에 있어 어떠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의관을 내어보내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그리고 본원(本院)의 신하들로 하여금 속히 도로 들어가서 임무를 수행하게 하여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승지는 입직(入直)하게 하라."
하였다.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 제조 윤강(尹絳)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정원에 내린 하교를 보건대 모발(毛髮)이 송연(竦然)합니다. 이는 실로 신들이 직무를 형편없이 수행하고 성의가 보잘것없어 있으나 없으나 일에 영향을 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신들은 부끄럽고 두렵고 놀라워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달려 나아가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이 병든 사람의 마음을 곡진히 체득하였다면, 병중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원에서 병든 사람의 마음이 격하게 되도록 도발하고 있으니, 그 마음의 소재가 매우 해괴하다. 그럴바엔 차라리 의관을 끊고 약을 끊는 것이 낫겠기에 약방으로 하여금 문안하지 말게 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대죄한다는 말을 하여 다시 한 가지 증세를 첨가시키는가. 경들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경석 등이 또 재삼 진계(陳啓)하여 엄한 위엄을 거두고 이미 내린 유지를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홍문관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의 오늘날 일은 처음에는 대단한 데 관계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초 정관(政官)이 정청(政廳)에서 명을 기다리면서 밤을 새우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성인(聖人)이 공평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성궁(聖躬)에 침을 맞는 일에 이르러서도 약방으로 하여금 참여하여 알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체상 지극히 중한 것으로서 더욱 논집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정원의 계사가 완곡(婉曲)한 것은 부족하지만 본심은 오로지 임금을 보좌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인하여 갑자기 내린 엄한 비답에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방의 사람들이 듣게 되면 반드시 놀랄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는 모두 성상께서 불평스럽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런 지나친 거조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거슬리는 것이 있게 되면 올바르게 조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송(宋)나라의 신하 정호(程顥)가 말하기를 ‘발로되기는 쉽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는 오직 노여움이 제일 심하다.’고 했습니다. 다만 노할 때에 갑자기 그 노여움을 잊고 사리의 시비를 살핀다면 생각하여 깨닫는 것이 많게 될 것이니, 시험삼아 체험하여 보시고 속히 우레같은 위엄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날 의관 윤후익(尹後益)이 내국(內局)에 머물러 있으면서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상이 밤에 사람을 시켜 문을 열고 내어보내게 하였다.
포도청이 아뢰기를,
"변응립(邊應立)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일상(李一相)의 서간(書簡)을 위조하여 전라 우수영(全羅右水營)에서 선척(船隻)을 사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고 하기에, 일이 놀라운 데에 관계되기 때문에 은밀히 체포하게 하고 먼저 그의 처자(妻子)에게 물으니, 양영남(梁穎南)이란 사람이 위조하여 써주었다고 했습니다. 영남이 이미 사실임을 실토했으니, 중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장차 뒷사람을 징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엄형을 가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그뒤 형조가 양영남은 도배(徒配)하고 하효달(河孝達)은 분간(分揀)할 것으로 계품하니, 상이 특명을 내려 영남은 연한(年限) 없이 먼 변방에 충군(充軍)시키고, 효달은 원도(遠道)에 도배(徒配)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해조 당상의 계사(啓辭)가 흐릿하였다는 이유로 아울러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용산(龍山)의 뱃사람인 변응립이 우수영(右水營)의 오래된 퇴선(退船)을 사기 위해 청탁하는 서간을 얻어 수사(水使) 이동현(李東顯)에게 보냈었는데, 동현이 즉시 답을 써서 보냈다. 그리하여 하리(下吏)가 이일상(李一相)의 집에 서간을 전하니 일상이 이를 뜯어 보고서 자신에게 온 서간이 아니라고 받지 않았다. 이때는 일상이 이조 참판에서 막 체차되고 응시(應蓍)로 교체되었을 때였다. 그들이 이조의 이참판(李參判)으로 통칭됐기 때문에 그 하리가 또 응시의 집으로 가서 전하였는데 응시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여 ‘동현이 쌀을 실은 배를 일상에게 주었는데 그 글이 잘못 응시의 집으로 전하여지자 일상이 누설된 것을 혐의하여 남에게 미루면서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최후에 대론(臺論)이 처음 발론되어 동현을 잡아다 추문하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그 뒤에 실록청에서 아뢰기를 ‘사사(史事)가 바야흐로 급한데 동현을 잡아다가 추문하게 되면 사건을 끝마무리짓기 전에는 일상은 사세상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 또 돌아다니는 말은 믿을 수 없으니 쌀 실은 배가 정박(定泊)해 있는 곳을 적간(摘奸)하여 허실을 증험해야 한다.’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공조랑(工曹郞)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말하기를 ‘강 가 10리(里)의 지역에는 남녘에서 온 배가 원래 없었다.’ 했으며, 또 강간인(江干人)은 ‘봄·여름 이래 이러한 배는 있지 않았다.’ 하였다. 이에 대계(臺啓)가 사실이 아니라 하여 동현을 잡아오라는 명을 도로 중지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일상과 응시가 동현에게 절간(折簡)을 보내어 그에 대한 곡절을 묻고 또 전일에 청탁한 서찰을 찾아가지고 와서 비국의 회좌(會坐) 때 보였다. 그것을 보니 짤막한 서간으로 졸필(拙筆)이었고 말이 서로 이어지지 않아 위조서(僞造書)임이 분명하였다. 그 위조서의 출처를 추핵(推覈)하니, 응립이 맹인(盲人) 하효달에게서 얻고 효달은 사노(私奴) 묵석(墨石)에게서 얻고 묵석은 일상의 집과 친한 초관(哨官) 양영남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효달이 처음에는 직초(直招)하지 않고 이미 죽은 사람인 박세문(朴世𣐀)에게서 얻었다고 핑계대었으나 효달 아내의 고발을 인하여 영남을 체포하여 취복(取服)하자 효달이 비로소 실토하기를 ‘과연 영남에게 사주당하여 죽은 사람을 끌어다가 지명하였다.’고 하였다. 묵석은 이것을 효달에게 전해 주었을 뿐 당초 영남에게 청탁한 일이 없었다.
응립을 체포할 즈음에 그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의 아내가 도피한 곳을 몰랐다. 효달이 일상(一相)의 뜻으로 지송(指送)하여 그의 집 전사(田舍)에 숨겼다는 이야기가 포도청에서 추문(推問)할 때 나왔으며, 또 쌀을 실은 배에 대한 비방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졌는데도 일상은 한번도 소장을 올려 스스로 논열(論列)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형조에서 영남 등을 조율(照律)한 것이 또 가벼웠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하기를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일상의 친구여서 이렇게 가볍게 조처하였으니, 더욱 일상이 의심스럽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영남의 일은 한때의 의옥(疑獄)으로서 사람들의 말이 자자했으므로 비록 일상을 편드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속으로 의혹을 품어 명백하게 가리켜 진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상이 처음 영남에 대한 의율(擬律)이 너무 가벼운 것을 통렬하게 변백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큰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상이 서간을 가지고 비국에 갔을 때 응시가 이미 그것이 먼저 일상의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뒤 임인년064) 2월에 허적(許積)이 상의 앞에 또한 그 서간이 일상에게 먼저 도착했다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하지만 일상에게 과연 배를 사기 위해 서간을 통한 일이 있었다면 먼저 그 서간을 보고서 응시의 집으로 추송(推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점이 당초 동현과 상응하여 청탁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대체로 오래된 퇴선(退船)을 사기 위해 청탁하는 것이 본디 조금이나마 근신할 줄 아는 사대부로서는 할 짓이 아닌 것이다. 배에다 쌀을 가득 실어 선물로 보냈다는 데 이르러서는 너무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일상은 평소 청렴하다는 이름이 부족했고 오랫동안 요로(要路)에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일 만들기를 좋아하여 비방을 조작하는 자들이 그 사이에서 떠들썩하게 가리켜 문제삼음으로써 끝내 탐오스럽다는 비방을 받게 되었으니, 이 점은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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