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을묘
상이 직접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가주서(假注書) 유명윤(兪命胤)이 서계하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문의현(文義縣)의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도착하여 있는 곳에 가서 전유(傳諭)하니, 그가 말하기를 ‘신이 삼가 윤선도(尹善道)의 소장 내용을 보건대 그가 의례(議禮)의 득실에 대해 공척(攻斥)한 것은 신처럼 어두운 사람으로서는 진실로 감히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타 신의 죄에 대해 공척한 것도 하나도 옳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선도가 너무 심각하게 논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신이 망언을 한 잘못은 비록 자공(子貢)이 와서 변론하더라도 참으로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도가 공척한 것은 오로지 신의 한 몸에 있는데, 송준길(宋浚吉)까지 아울러 연좌율(連坐律)을 입게 되니, 신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속죄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또 신이 일찍이 한 문제(漢文帝)가 남월왕(南越王)에게 준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내용에 「짐은 고황제(高皇帝)의 측실(側室)의 아들이다.」 했었습니다만, 당시에 이 때문에 한 문제를 부족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뒤 국가에 변고가 많았었으나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주인 노릇 해 온 것은 모두 문제의 자손이었습니다. 4백 년 뒤에 이르러 소열(昭烈)이 한중(漢中)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사마광(司馬光)은 이를 당각(唐恪)에 대하여 명확히 평가하기 어려운 데에 견주었으나 주자(朱子)는 그의 잘못된 견해를 쓸어버리고 대서 특필로 정통(正統)임을 밝혔습니다. 따라서 측실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정통을 전수해 가는 데에는 본래 해가 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선대왕(先大王)의 차적(次嫡)인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의 우견이 이러했기 때문에 참작할 줄 모르고 경솔하게 망령되이 말한 것입니다. 논례(論禮)에 대한 일로 말하더라도 참람하게 분수를 범하고 도리에 어긋난 단서가 어찌 작겠습니까. 그렇다면 선도가 신을 죄주는 것이 아니라 신이 스스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인신(人臣)으로서 이미 이런 죄를 졌으면 감히 스스로 인류(人類) 사이에 설 수 없다는 것은 도리상 너무도 분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감히 성명께서 신의 본의를 양지하지 못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이 거침없이 흘러 연기(練期)가 임박했다는 하유(下諭)에 이르러서는 신이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피눈물이 마구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진 죄가 너무도 무겁고 또 천질(賤疾)이 고질이 된 탓으로 더 나아갈 방도가 없어 북쪽으로 천문(天門)을 바라보며 스스로 눈물을 삼킬 뿐입니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 등이 상차하기를,
"전 승지 박세성(朴世城)은 당일 하명한 일을 즉시 거행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한 전지에 ‘임금을 무시하고 명을 거역한 적[侮君逆命之賊]’이라고 한 여섯 글자에 이르러서는 세성이 죽어도 원통함을 머금을 뿐만이 아니라 성상의 인서(仁恕)를 위주로 하는 정사에도 손상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역명적(逆命賊)’이라는 세 글자는 삭제하라."
하였다.
5월 2일 병진
상이, 우찬성 송시열이 고향을 떠나 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정원에 명하여 서둘러 도신(道臣)에게 하유해서 식물(食物)을 실어보내게 하고 모든 어렵고 궁핍한 일을 일일이 돌보아주게 하였다.
상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어 비가 내렸다는 것으로 김수항(金壽恒) 등 세 승지에게 숙마(熟馬)를 상으로 하사하고 전사관(典祀官) 이하에게는 차등있게 논상하였다.
이경억(李慶億)을 승지로, 이정기(李廷虁)를 대사간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집의로 삼았다.
5월 3일 정사
상이 경모전(敬慕殿)에 저녁 상식(上食)을 직접 거행하기 위해 승지와 사관에게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졸곡(卒哭) 뒤에 상식을 직접 거행하는 것은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또 위에서 직접 거행할 경우에는 백관들이 배제(陪祭)하게 되어 대제(大祭)와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전에 없던 예(禮)를 지금 창시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지와 백관들은 모두 참제(參祭)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상차하기를,
"지난번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복제(服制)에 대해 하문하셨을 적에 신이 대략 의견을 진달하였습니다만 다시 한 통의 차자를 올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윤선도(尹善道)의 소장이 마침 이럴 즈음에 나와 겉으로는 논례(論禮)를 가탁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사람을 무함하였는데, 그 조의(造意)가 음흉하고 궤휼스럽기 그지없어 듣기에 놀랍고 의혹스러웠습니다. 신도 마음이 떨리고 기운을 잃어 감히 그 사이에 혀를 놀려 다시 논열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생각하여 보니 여기에 징계되어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대례(大禮)를 그르치게 한다면, 이는 실로 목구멍이 막힌 것 때문에 밥먹는 것을 폐하는 것에 가까운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마음에 품은 생각이 있는데도 끝내 침묵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길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다시 구겨버린 글을 거두어 우러러 지엄한 신청(宸聽)을 번독스럽게 하려 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찰하여 주소서.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장자(長子)를 중자(衆子)와 구별하여 반드시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주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가 장차 조부(祖父)를 계승하고 전중(傳重)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장차 조부를 계승하고 장차 전중할 사람을 위해서도 삼년복을 입어주는데, 하물며 이미 조부를 계승하였고 전중한 경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대부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제왕가(帝王家)이겠습니까. 제왕가는 오직 종통을 중히 여기는 것이므로 제후는 지손(支孫)이라도 종통을 계승하고 천자는 서자(庶子)라도 적자(嫡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곧 고훈(古訓)인 것입니다. 이미 순서에 따라 계승하고 전중하여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었으면 종통도 여기에 있는 것이고 적자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 문제(漢文帝)와 당 태종(唐太宗)은 방계지손(傍系支孫)으로 들어와 대통을 계승하였지만 이미 보위(寶位)에 올랐으면 이것이 곧 한 고조(漢高祖)의 적자인 것이고 당 고조(唐高祖)의 장자인 것입니다. 한나라와 당나라가 서로 전해간 통서(統緖)가 이를 제쳐놓고 어디에 귀결시킬 수 있겠습니까. 역대의 계통(繼統)에 이와 유사한 것이 매우 많아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의례(儀禮)》 참최조(斬衰條)의 ‘장자(長子)를 위하여’라는 대목의 주소(註疏)에 ‘제1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嫡妻) 소생의 제2장자(長者)를 취하여 후사로 세우는데 또한 장자(長子)라고 이름한다.’ 했습니다. 지금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곧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제2자(第二子)이시니 주소에서 이른바 적처의 소생인 제2장자가 아닙니까. 또 말하기를 ‘적자(適子)라고 말한다면 오직 제1자에 의거해야 되는 것이고 장자(長子)라고 하면 통칭 장자를 적자로 세우는 것을 말한다.’ 했습니다. 그 뜻은 적자라고만 말한다면 제1자 이외에 차장(次長)으로서 전중받은 사람은 참여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장자라고 하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제2자 이하로서 종통을 이어받은 사람들도 통틀어 모두 삼년복을 입어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으로서 그 뜻이 분명합니다. 이 논설이 단연코 오늘날 논례(論禮)의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인데, 하필 억지로 서자(庶子)를 후사로 삼으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규례[例]를 끌어다가 스스로 의혹스럽게 한단 말입니까. 상하(上下) 주소(註疏)의 이야기가 판이하게 두 조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도 기필코 이것은 버리고 저것을 취하려 하니, 진실로 개탄스럽습니다.
참최복을 두 번 입지 않는다고 한 것을 여기에 이끌어다 비유하는 것은 더욱 부당합니다. 이른바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본디 남의 후사가 된 경우를 위해서 한 말인 것입니다. 이미 입후(立後)되어 참최복을 입고 나서 또 친부모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이는 근본이 둘이 되는 것이어서 인도(人道)가 문란해지는 것입니다. 여자(女子)로서 남에게 시집간 경우도 그렇게 하는데, 이는 중히 여겨야 할 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모가 장자를 위하여 복을 입는 것은 본디 조상을 높이고 종통을 중히 여겨서인데, 제2자나 제3자가 승중(承重)하여도 모두 조상을 높이고 종통을 중히 여기는 의리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세 번 참최복을 입더라도 근본이 둘이 될 혐의가 뭐가 있겠습니까.
만일 《실록(實錄)》에 없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긴다면 신은 또한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아조(我朝)의 상례(喪禮)가 잘 갖추어진 것은 전고(前古)보다 월등합니다만, 의장(儀章)·도수(度數)에 관해서는 열성(列聖)께서 손익(損益)한 것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삼년상에 오사모(烏紗帽)와 오각대(烏角帶)로 시사(視事)하는 법규는 처음 선묘조(宣廟朝)에 고친 것인데, 전에는 겨를이 없어서 못하다가 오늘날을 기다리게 한 것인 줄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 강례(講禮)는 이미 끝났고 연일(練日)이 또 임박했으니 신의 고설(瞽說)이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결단을 내려 행하는 것은 전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일 연일(練日)에 대왕 대비께서 그대로 최복(衰服)을 입으시고 갑자기 길복(吉服)으로 바꾸지 않으신다면 예(禮)는 이미 시행된 것이 됩니다. 당초에 절문(節文)을 고친 번거로움이 없었으니 지금이라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는 대례(大禮)이니 의당 극진히 강구하여야 합니다. 선조(先朝) 때부터 예우를 받아온 사람들 가운데 이유태(李惟泰)·심광수(沈光洙)·허후(許厚)·윤선거(尹宣擧)·윤휴(尹鑴) 같은 사람들도 의당 참여하는 반열에 있어야 하는데, 시골에 있는 신하들은 형편상 미칠 수 없겠으나 성중(城中)에 있는 사람에게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조속히 아울러 순방(詢訪)하시어 의견을 널리 채집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소서."
하니, 예조에 계하(啓下)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윤선거는 지금 향리(鄕里)에 있습니다. 이유태·심광수·허후·윤휴 등에게는 차자의 내용에 따라 아울러 문의하여 아뢰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임(原任) 영의정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졸하였다.
시백은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장자이다. 광해군이 모후(母后)를 폐하자 이귀가 시백(時白) 및 막내 아들 시방(時昉)과 함께 은밀히 광복(匡復)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반정(反正)하고 나서 시백이 정사 공신(靖社功臣) 이등(二等)에 참여되었다. 병자년037) 에는 수어사(守禦使)로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서성(西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적의 잠사(潛師)가 공격하여 왔다. 이때 시백은 갑옷도 입지 않은 채 몸소 사졸들에 앞장서서 활을 쏘았는데 두 번이나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으나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며 싸움에서 이긴 뒤에야 비로소 화살을 뽑으니 피가 흘러 등에 흥건하였다. 동성(東城)·남성(南城)·북성(北城)의 사졸들은 체부(體府)의 미지(微旨)를 받고서는 일제히 외치며 궐(闕)을 핍박하면서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신하들을 결박하여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유독 시백이 거느리고 있는 서성의 군대만은 끝내 동요가 없었다.
오랫동안 서전(西銓)을 맡았으며 총재(冢宰)038) 를 거쳐 정승으로 들어갔다. 타고난 천성이 충효스럽고 인애스러웠으며, 젊어서 정승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면서 조익(趙翼)·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과 친구가 되었다. 비록 질박하였으나 일찍이 《소학(小學)》을 수천 번을 읽었는데 집에 있을 적에는 항상 이것으로 자신을 통제하였다. 38년 동안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청렴하고 삼가고 공손하고 검소한 것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인조가 일찍이 박승종(朴承宗)의 옛집을 이귀(李貴)에게 하사하였으므로 시백이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는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 이름하는 한 떨기 꽃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된 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액정(掖庭)의 사람이 와서 상의 명이라고 하면서 옮겨가려 하자 시백이 몸소 꽃나무에 가서 뿌리째 뽑아 던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국세(國勢)가 조석(朝夕)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 주상께서 어진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나무를 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차마 이 꽃나무로 임금에게 아첨하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이런 내용으로 계달(啓達)하였다. 뒤에 상이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이는 그의 진규(進規)를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는 뜻에서였다. 기축년039) 3월 상이 세자와 함께 어수당(魚水堂)에 임어하여 시백 등 몇 사람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상이 직접 술잔을 잡고 마시기를 권하면서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가 팔다리처럼 여기고 있으니 너도 뒷날 나처럼 대우해야 한다."
하니, 시백이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나왔다.
효묘(孝廟) 초년에 자점(自點)의 역옥(逆獄)이 일어났는데, 시백이 자점과 인척(姻戚)이었던 탓으로 외손 세창(世昌)이 복주(伏誅)되자, 시백이 궐문 밖에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상은 시백을 불러 국문(鞫問)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뒤에 반목하는 사람이 있자 상이 그를 귀양보내고 시백을 위유(慰諭)하기를,
"청백(靑白)한 지조와 충적(忠赤)한 마음을 어찌 국인들만 알고 있겠는가. 실로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 성유(聖諭)는 실로 시백의 정성을 잘 표현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위독하여졌는데 자상하게 하는 말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물어보게 하려 했으나 연제(練祭)가 임박한 탓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급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다. 시백이 유소(遺疏)를 입으로 불러 말하기를,
"신이 두 조정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니 은혜가 분수에 넘쳤습니다. 그런데도 티끌만큼의 보답이 없었으므로 단지 근력이 미치는 한 노력하면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 하였습니다. 다행히 성명을 만났는데 운명(殞命)이 이미 박두하여 대궐을 우러러 바라보니 천안(天顔)을 뵈올 길이 영원히 막혔습니다. 신의 구구한 생각은 단지 성상의 덕업(德業)이 진수(進修)되는 데 있습니다. 형정(刑政)을 삼가서 큰 죄인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통쾌하게 여기지 마시고 반드시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소서." 하였는데, 소고(疏藁)가 반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기운이 끊겨 버렸다. 사관이 도착하니 막 속광(屬纊)040)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아들 이흔(李忻) 등이 반쯤된 소고를 올리니, 상이 이르기를,
"이 유차(遺箚)를 살펴보니 애통스러운 마음 매우 간절하다. 이것이 완성되지 못한 글이기는 하지만 그 간절한 충정과 연연한 성심을 띠에 써 두고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특별히 관재(棺材)와 어의(御衣)·비단 이불을 하사하여 염습(殮襲)에 쓰게 하였으며 대내(大內)에서 특별히 전수(專需)를 준비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모두 특이한 은수(恩數)였다.
미시(未時)에 겹 햇무리가 지고 무지개 형상의 흰 기운이 햇무리를 가로질러 해를 가리켰으며 좌우에 극(戟)이 있었는데 안은 적색이고 밖은 청색이었다.
예조가 우상 원두표(元斗杓)의 차자에 의거하여 이유태·심광수·허후·윤후에게 문의하였다. 유태는 아뢰기를,
"신은 식견이 없는 캄캄한 사람이라서 억지로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예(禮)에 대해서는 신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과 논의한 지 오래되었는데 소견이 처음과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신하가 망령되이 논했다는 것으로 지금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이니, 신이 어떻게 감히 다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허후는 아뢰기를,
"예에 대해 의논한 여러 신하들이 각기 자신의 소견을 갖고 극진히 논변하여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 두 의논을 참작하고 자세히 헤아려 지당한 데로 귀결시키기를 힘쓰는 것은 오직 성명께서 헤아려 처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윤휴는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대례(大禮)인데 대소 신료들이 각기 소견을 고집하면서 모두 논설을 내놓고 있으니, 성상께서 헤아려 간택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는 인심(人心)에 입각한 대경(大經)에 관계된 것이니 선왕의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행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고, 광수는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서로 강론하여 우러러 천청(天聽)을 번거롭힌 내용을 보건대 모두 예경(禮經)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지만 종통(宗統)이 중하다는 것이 사리에 맞는 것 같습니다. 성상께서 그 경중을 살펴 스스로 결단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예조가 이유태 등 여러 신하의 의논이 명백하지 않은 것 같다는 것으로 상에게 아뢰고 다시 대신(大臣)에게 물어볼 것을 청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국제(國制)는 곧 성조(聖祖)께서 정한 것이고 열성(列聖)들이 준행하여 온 것인데, 인조께서 소현(昭顯)의 상사(喪事)에서 행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대왕 대비께서도 이를 따라서 복(服)을 입었던 것인데, 이제 와서 변경한다면 예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여기에 대해 말을 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정태화(鄭太和)·심지원(沈之源)은 아뢰기를,
"당초 의정(議定)할 적에는 단지 국제에 의거하여 했었는데, 실록을 고증해 보건대 삼년복으로 행한 기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탑전에서 이미 상제(喪制)는 선조(先祖)를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대답했었으니, 지금 와서 어떻게 감히 다시 입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유성(鄭維城)은 아뢰기를,
"처음 기복(期服)으로 의정했던 것은 예제(禮制)에 근거가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실은 선조를 따른다는 뜻에서 나온 조처였습니다. 따라서 이제 와서 의논들이 분분하다 하여 임시하여 고친다는 것은 신은 생각지도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다수의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으므로 이미 정한 기년(期年)의 복제를 행하게 되었다.
삼가 살피건대, 윤휴는 혼조(昏朝) 때의 얼신(孼臣)인 효전(孝全)의 아들로 젊어서부터 영리하여 스스로 학문에 의탁하여 세루(世累)를 숨기고 발신(拔身)할 계책을 세웠다. 병자년 이후에는 또 대의(大義)를 가탁하여 산림(山林)에서 높은 명망을 배양하였으므로 송시열이 처음에는 매우 추허(推許)하였었다. 윤휴의 친우 김극형(金克亨)이 민정중(閔鼎重)과 매우 좋게 지내는 사이였는데, 윤휴를 일컬어 율곡(栗谷)이 【이이(李珥)의 호(號)이다.】 다시 나왔다고 했기 때문에, 정중이 인하여 서로 친하게 사귀게 되었다. 그리하여 효종(孝宗)에게 천거하며 제갈량(諸葛亮)에게 견주기까지 하면서 직접 임어(臨御)하도록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성문(聲聞)이 크게 드러났으나 시골에 살면서 행하는 일은 음특(陰慝)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아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미워하였다.
윤휴는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잘못된 것이라고 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다시 지었다. 시열이 이단(異端)이라고 공척(攻斥)하였으나 윤휴는 승복하지 않았다. 시열이 전관(銓官)이 됨에 이르러서는 그를 진선(進善)에 의망(擬望)하려 했으나 좌이(佐貳) 이일상(李一相)·조한영(曺漢英)과 승지 홍중보(洪重普) 등이 모두 그의 선루(先累)를 이유로 저지하였다. 중보가 또 그가 시골에서 행한 일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였으나 시열이 따르지 않고 끝내 의망하여 제수하였다. 이후원(李厚源)이 그 소식을 듣고 시열에게 이르기를,
"공이 윤휴를 이단이라고 공척한 적이 있는데, 이제 세자로 하여금 이단을 배우게 하려는 것인가?"
하니, 시열이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육상산(陸象山)을 이단이라고 극력 공격하였지만 상산이 남강(南康)에 이르자 제생(諸生)들로 하여금 상산의 강의를 듣게 했었으니, 오늘날의 일은 유래가 있는 것이요."
하자, 후원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공이 연소배들의 의논에 핍박당한 나머지 부득이 제수한 것인데 이처럼 말을 하니, 공의 이기기 좋아하는 성미는 말할 수가 없소."
하였다. 어느날 시열이 윤휴를 찾아가 만나고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도 주자의 주(註)를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니, 윤휴가 발끈해서 말하기를,
"공은 자사(子思)의 뜻을 주자 혼자서만 알고 나는 모른다고 여기는 것인가."
하였다. 이때 극형(克亨)이 좌석에 있으면서 자못 윤휴를 편들고 나서니 시열이 극형에게 말하기를,
"춘추법(春秋法)에 당여(黨與)를 먼저 다스리라고 했으니, 이제 공을 먼저 공척해야 되겠소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시열이 곧 윤휴와 절교하였으므로 윤휴가 속으로 유감을 품고서 스스로 ‘시열이 살아 있으면 내가 세상에 행세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모해(謀害)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효종이 승하한 처음에 이르러 윤휴가 대왕 대비의 복제는 삼년복으로 해야 된다는 설을 제기하였는데, 후원이 말하기를,
"영보(英甫)의 【시열의 자(字).】 뒷날 화근이 이미 여기에서 싹트고 있다."
하였다. 윤휴가 처음에는 단지 자최 삼년설(齊衰三年說)을 주장하였고 시열은 사종설(四種說)로 변박(辨駁)했었는데, 윤휴가 또 내종(內宗)은 모두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설을 인용하여 증명하니, 시열이 말하기를,
"내종이 대왕(大王)을 위하여 모두 참최를 입는 것은 감히 사사로운 척친(戚親) 관계로 임금의 복을 입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대행 대왕은 대비(大妃)에게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는데, 대비가 그만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입는 복을 입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휴가 또 무왕(武王)이 문모(文母)를 신하로 삼았다는 설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아들이 임금이 되면 어머니도 신하인 것이다."
하니, 시열이 말하기를,
"무왕이 문모를 신하로 삼았다는 설(說)은 주자(朱子)가 이미 유시독(劉侍讀)의 말을 인용하여 ‘아들이 되어서는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가 없다. 이는 읍강(邑姜)을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뒷사람으로서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윤휴는 그래도 강변(强辨)하여 마지않았는데 허목(許穆)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에게 창언(昌言)하여 끝까지 논할 것을 권하였으며 또 은밀히 윤선도(尹善道)를 사주하여 상소하게 하였다. 【권시(權諰)가 서한을 보내어 윤휴를 꾸짖기를 ‘공이 선도(善道)에게 상소하라고 권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 했는데, 윤휴가 이를 숨기자, 권시(權諰)가 꾸짖기를 ‘내 딸에게서 들었는데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른바 나의 딸이라고 한 것은 곧 윤휴의 자부(子婦)를 말한다. 선도가 찬배(竄配)당하기에 이르자 선도의 아들 예미(禮美)가 앞장서서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윤휴의 말을 들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점점 비등하게 되었다. 윤휴가 다시 자신의 이제(姨弟)인 송규정(宋奎禎)에게 준 서한에 ‘선도의 흉패(凶悖)스러움과 성재(誠宰)의 잘못된 말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했는데, 권시의 자(字)가 사성(思誠)인데다가 당시 우윤(右尹)으로 있었기 때문에 성재(誠宰)라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원두표(元斗杓)가 차자로 여러 신료에게 문의하기를 청하여 윤휴에게 복제(服制)에 대해 문의하니, 윤휴가 이에 양다리를 걸친 채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는 그때 바야흐로 선도(善道)를 율(律)에 의거하여 다스리라고 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휴가 사람을 대할 적에는 반드시 선도를 흉윤(兇尹)이라고 일컫고 헌의(獻議)도 또 이러하였으니, 그가 이랬다저랬다하는 음흉하고 간사스러운 작태를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가 있다. 이로부터 사류(士類)들이 모두 윤휴가 화심(禍心)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정중(鼎重)도 절교하였다. 윤휴가 또 반궁(泮宮)041) 의 뒷 동리에 거처를 정했는데 오정창(吳挺昌) 및 종실 정(楨)·남(枏) 등의 집과 서로 가까웠기 때문에 밤에 서로 상종하면서 은밀히 함께 모의하여 점차로 공교하게 참소하는 말을 궁금(宮禁)으로 유입시키므로써 마침내는 사류(士類)들을 일망타진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20여 년 동안 빚어낸 화단(禍端)을 추적하여 보면 거의 나라를 전복시킬 뻔했던 것은 모두 윤휴가 주동이 되었었다. 요컨대 윤휴의 무리가 예론(禮論)을 가탁하여 화심(禍心)을 부렸으니, 예설(禮說)의 시비에 대해서는 그다지 변론할 가치도 없었으나 피차의 논의가 분분하게 진정되지 않았었다. 뒤에 기미년042) 에 송상민(宋尙敏)의 소장이 나옴에 이르러서 그 이야기의 동이(同異)와 득실(得失)에 대하여 다시 미진함이 없이 다루었다. 뒷사람은 이에서 살펴보면 스스로 환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자의 서자[聖庶]는 적자(嫡子)가 될 수 있다.’는 이것은 옛사람의 대훈(大訓)인데, 윤휴가 이 이야기를 인용하여 종통(宗統)이 여기에 있고 장자(長子)가 여기에 있다고 하면서 시열(時烈)이 종통을 둘로 하여 임금을 비하시켰다고 공척하였다. 대저 이미 ‘될 수 있다[奪]’고 하였으면 본연(本然)의 장자(長子)와는 다름이 있기 때문에 복을 낮출 수 있는 것이며, 이미 서자(庶子)가 적자(嫡子)가 되었으면 적통(嫡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무왕(武王)의 통서(統緖)를 누가 감히 적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나무의 곁가지가 곧은 줄기에 통관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실로 정자(程子) 정의(正義)의 이야기인데, 이미 곧은 줄기가 되어버렸다면 다시 곁가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이미 끊겨진 원래의 줄기에 다시 싹이 돋았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것이 원래의 줄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자가 기필코 곁[傍]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윤휴의 무리가 남을 무함한 이야기는 또한 많은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66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왕실-의식(儀式) / 향촌(鄕村) / 사법-탄핵(彈劾)
[註 041] 반궁(泮宮) : 성균관(成均館).[註 042] 기미년 : 1679. 숙종 5년.
그러다가 원두표(元斗杓)가 차자로 여러 신료에게 문의하기를 청하여 윤휴에게 복제(服制)에 대해 문의하니, 윤휴가 이에 양다리를 걸친 채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는 그때 바야흐로 선도(善道)를 율(律)에 의거하여 다스리라고 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휴가 사람을 대할 적에는 반드시 선도를 흉윤(兇尹)이라고 일컫고 헌의(獻議)도 또 이러하였으니, 그가 이랬다저랬다하는 음흉하고 간사스러운 작태를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가 있다.
이로부터 사류(士類)들이 모두 윤휴가 화심(禍心)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정중(鼎重)도 절교하였다.
윤휴가 또 반궁(泮宮)041) 의 뒷 동리에 거처를 정했는데 오정창(吳挺昌) 및 종실 정(楨)·남(枏) 등의 집과 서로 가까웠기 때문에 밤에 서로 상종하면서 은밀히 함께 모의하여 점차로 공교하게 참소하는 말을 궁금(宮禁)으로 유입시키므로써 마침내는 사류(士類)들을 일망타진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20여 년 동안 빚어낸 화단(禍端)을 추적하여 보면 거의 나라를 전복시킬 뻔했던 것은 모두 윤휴가 주동이 되었었다. 요컨대 윤휴의 무리가 예론(禮論)을 가탁하여 화심(禍心)을 부렸으니, 예설(禮說)의 시비에 대해서는 그다지 변론할 가치도 없었으나 피차의 논의가 분분하게 진정되지 않았었다. 뒤에 기미년042) 에 송상민(宋尙敏)의 소장이 나옴에 이르러서 그 이야기의 동이(同異)와 득실(得失)에 대하여 다시 미진함이 없이 다루었다. 뒷사람은 이에서 살펴보면 스스로 환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자의 서자[聖庶]는 적자(嫡子)가 될 수 있다.’는 이것은 옛사람의 대훈(大訓)인데, 윤휴가 이 이야기를 인용하여 종통(宗統)이 여기에 있고 장자(長子)가 여기에 있다고 하면서 시열(時烈)이 종통을 둘로 하여 임금을 비하시켰다고 공척하였다. 대저 이미 ‘될 수 있다[奪]’고 하였으면 본연(本然)의 장자(長子)와는 다름이 있기 때문에 복을 낮출 수 있는 것이며, 이미 서자(庶子)가 적자(嫡子)가 되었으면 적통(嫡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무왕(武王)의 통서(統緖)를 누가 감히 적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나무의 곁가지가 곧은 줄기에 통관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실로 정자(程子) 정의(正義)의 이야기인데, 이미 곧은 줄기가 되어버렸다면 다시 곁가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이미 끊겨진 원래의 줄기에 다시 싹이 돋았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것이 원래의 줄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자가 기필코 곁[傍]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윤휴의 무리가 남을 무함한 이야기는 또한 많은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5월 4일 무오
지난밤 2경(更)에 연주(練主)043) 를 쓰고 이날 4경(更)에 상이 직접 연제(練祭)를 지냈다.
상이 다시 단오절(端午節)의 절제(節祭)를 직접 지내려 하니, 정원·약방 및 대신들이 상이 잇따라 세 번 제사를 지내게 되면 건강을 손상시킬까 우려하여 섭행(攝行)하게 할 것을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약방이 두 자전(慈殿)에게 아뢰어 대내(大內)에서 중지할 것을 권하도록 청하니, 상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그래도 직접 주다례(晝茶禮)를 거행하였는데, 일이 지난 뒤에야 아랫사람들이 비로소 알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연제(練祭) 때 위에 올린 관구(管屨)를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고증해 보니 졸곡(卒哭)과 연제(練祭) 후에도 모두 고친 절차가 없었습니다. 《가례(家禮)》의 참최 제도에 관구가 있는데 3년 안에는 또한 고친다는 글이 없습니다. 상의원(尙衣院)에서는 단지 경인년044) 의 등록(謄錄)에 ‘흰 가죽신을 대내(大內)로 들여갔다.’고 한 글만 보았으므로 지난밤 연복(練服)을 올릴 때 잘못 흰 가죽신을 올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살펴보면 3년 안에는 별로 고칠 일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상의원의 관원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정기(李廷虁)가 아뢰기를,
"대각(臺閣)의 체례(軆例)에는 공공(公共)으로 중히 여겨 발론(發論)한 모든 것은 본래 쉽사리 정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동료끼리 상회례(相會禮)를 행하지 않았다면 더더욱 한 사람의 의견으로 갑자기 그 의논을 어떻게 정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선도(善道)의 소장은 이미 더없이 흉참(凶慘)스러운 것이었는데 권시(權諰)의 소장이 또 뜻밖에 나왔으니, 그들이 간사한 자를 편당들어 올바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위아래에서 현혹시킨 정상에 대해 온 나라 사람이 다같이 놀랍게 여기고 공의(公議)가 다같이 통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비를 밝히고 사정을 변해(卞解)하는 도리상 통렬히 공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초 본원(本院)에서 파직시킬 것만을 청한 것도 말감(末減)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박한 형벌도 오히려 허락을 얻지 못하고 며칠 동안 책임만 메우다가 끝내는 갑자기 정지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공의(公議)를 무시한 것이 그리도 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이 어제 아침에 나와서 신명(新命)에 대해 숙배(肅拜)하였는데 원중(院中)에는 또 다른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과 아직 상회례(相會禮)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우선 멈추었다가 회의(會議)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언 권격(權格)이 혼자서 자신의 뜻에 따라 멋대로 중론(重論)을 정지시켰으니, 이는 실로 전에 있지 않던 일입니다. 신이 외람스럽게 수석(首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료에게 경시당하였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홍주삼(洪柱三)도 경시당하였다는 것으로 인피(引避)하니, 상이 모두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권격이 아뢰기를,
"삼가 이정기가 인피한 내용을 살펴보니 두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사정(邪正)과 시비(是非)가 이미 판별되었다면 파직시키기를 청하는 계사(啓辭)를 가지고 오랫동안 버틸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여겼으며, 또 대각(臺閣)의 법규에, 수석(首席)을 막론하고 상회례를 행하지 않았으면 통간(通簡)을 보내어 묻거나 기다리는 일이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정지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장관(長官)의 준열한 공척을 받았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5월 5일 기미
사간 박세모(朴世模)도 세성(世城)과 일가가 되는 혐의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 감히 동료를 처치하지 못하겠다고 인피하였다. 지평 이지익(李之翼)이 아뢰기를,
"일찍이 듣건대 전석(銓席)에서 불만스럽게 여겨 일을 미루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으니, 공의(公議)를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무슨 면목으로 구차스럽게 대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가슴의 통증이 갑자기 극심해져서 배제(陪祭)하는 반열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장령 오두인(吳斗寅)은 아뢰기를,
"지난번 윤선도를 율(律)에 의거하여 다스리라는 계사를 정계(停啓)할 때 마침 잇따라 재계(齋戒)가 있었던 탓으로 장관(長官)과 상회(相會)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부의 통보를 기다리지 않은 채 정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정기가 피혐한 내용을 보니 신은 의당 스스로를 탄핵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감히 태연히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모두에게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정박(鄭樸) 등이 청하기를,
"권격(權格)·박세모(朴世模)는 체직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군(護軍)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여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하니, 상이 불러서 접견하고 이르기를,
"호군이 올라오기를 귀기울이고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돌아가려 하는가?"
하니, 유태가 아뢰기를,
"신에게 노모(老母)가 있어 멀리 떠나 있을 수가 없는데 연기(練期)가 임박한 탓으로 감히 바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연일(練日)이 이미 지났고 또 노모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사정을 진달하고 급히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윤선도의 흉소(凶疏) 때문에 좌참찬이 갑자기 돌아갈 것을 결단하였고 우찬성도 고향을 떠나 대죄(待罪)하고 있는데 호군도 내려가려 하니, 나의 마음이 매우 불안하다."
하니, 유태가 아뢰기를,
"신이 돌아가는 것은 실로 노모의 병 때문이요 선도(善道)의 일에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선도는 본디 버린 사람이라서 진실로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만, 계속해서 권시의 소장이 나왔고 기관(機關)이 매우 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성명 덕택으로 처치가 온당하게 되었으니 이를 보고 듣고서 누군들 열복(悅服)하지 않겠습니까. 옛말에도 ‘임금이 한 사람에게 상을 주면 천만 인이 권면되고 한 사람에게 형을 주면 천만 인이 징계된다.’고 했습니다. 세도(世道)의 승강(昇降)과 사정(邪正)의 소장(消長)은 임금의 호오(好惡)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송준길(宋浚吉)이 물러가기는 했습니다만 또한 반드시 올라올 것이고, 송시열(宋時烈)도 어떻게 감히 아주 떠나고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이번의 처치는 모두 위에서 홀로 결단하신 데에서 나온 것이니, 송시열 등도 어찌 천지처럼 큰 도량에 대해 유감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동궁에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의 교훈을 받았는데 지금은 비록 군신 사이이지만 나의 마음은 동궁에 있을 때와 다른 것이 없다. 나는 그들이 현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겠는데, 선도(善道)는 어떻게 홀로 그것을 안단 말인가. 예문(禮文)은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것인데, 선도가 또한 어떻게 홀로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삼년의 복제가 십분 옳다고 하더라도 선도의 마음이 과연 예제(禮制)를 논하는 데 있는 것인가."
하였다. 은상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어찌 간흉(奸凶)을 미워할 줄을 몰랐겠습니까. 오직 조기에 통렬히 공척하지 못한 탓으로 결국에는 옹폐당한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성명께서 그 간상(奸狀)을 통촉하셨기 때문에 인심이 진정되고 조정이 안정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도가 예문만 논했다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예론(禮論)을 가탁한 흉칙하고 궤휼스러운 속셈을 헤아릴 수가 없다. 심지어 재궁(梓宮)과 산릉(山陵)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의도가 두 신하만을 가리켜 배척하려는 것일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마음이 편하겠는가. 밖의 의논은 간혹 내가 선도를 애호하여 대론(臺論)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는 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당연히 죽여야 되는데도 죽이지 않는 것은 차마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대간(臺諫)이 법을 집행하기 위해 하는 말을 그르게 여겨서이겠는가."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아랫사람들이 어찌 성의(聖意)의 소재를 모르겠습니까. 저 사람이야말로 선조(先朝)의 사부(師傅)이기 때문에 관대히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께서 그가 잠저(潛邸)에 있을 초년의 사부였기 때문에 예우했었는데 말년에는 그의 마음 씀씀이를 알았으므로 총권(寵眷)이 갑자기 쇠하여졌다."
하였다. 은상이 아뢰기를,
"이 사람은 선조 때에도 누차 정인(正人)에게 추욕(醜辱)을 가하는 소장을 올렸었습니다. 선왕께서도 그가 불량하다는 것을 잘 알았으나 노망한 것으로 여겨 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내가 형률을 가하지 않는 것도 선조의 뜻을 본받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은상이 아뢰기를,
"성의(聖意)는 있는 데가 있는데, 선도를 위하여 구해(救解)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은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도를 구제하는 사람은 모두 불선(不善)한 사람이고, 대간에서 법을 집행하기 위해 하는 말이 옳다."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현재 조정이 분열되어 수습할 길이 없는데, 속히 시열 등을 불러 함께 국사를 잘 이끌어 간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군(護軍)도 힘써 머물러 있도록 하라."
하자, 유태가 아뢰기를,
"두 신하는 진실로 인망(人望)이 있는 사람이니 의당 전하께서 방치하지 말고 부르셔야 됩니다. 그러나 신 같은 사람은 시골에서 자랐는데 선조(先朝)께서 글을 읽은 사람인 줄 잘못 알고 누차 은혜로운 소명(召命)을 내렸으니, 어찌 국가에 크게 욕을 끼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권시(權諰)의 소장에 대해서는 더욱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있는데, 이는 모두 신과 같은 무리까지 섞여 나온 탓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도의 소장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통촉하였거니와 권시가 또 이런 소장을 올릴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가 오래도록 시강(侍講)하였으므로 나의 마음에 더욱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이번의 사기(事機)는 매우 중대합니다. 위에서 선처(善處)하시더라도 뒤폐단이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선도를 중히 조처하지 않으면 혹 간사한 사람이 이를 인하여 기치를 세울 것입니다. 반드시 형률을 가한 연후에야 시비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저들이 종통(宗統)을 가지고 말을 하는데 이는 예문(禮文) 밖의 것입니다. 저들이 화심(禍心)을 부리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기화로 삼아 기피하지 않고 함부로 말함으로써 뒷날 구실삼을 자료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세자(假世子)니 섭황제(攝皇帝)니 하는 말은 더없이 흉참(凶慘)스러운 것이었다."
하자, 유태가 아뢰기를,
"섭황제라는 칭호를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마다 모두 심장(心膓)이 있으니 누군들 선도가 흉패스럽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유독 권시가 그를 위해 변명하였으니 어찌 일촌(一寸)의 심장이 이러한 줄 알았겠는가."
하였다. 은상이 아뢰기를,
"유태가 선조(先朝) 때 만언소(萬言疏)를 진달하려 했었는데 미처 소장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앞서 그 소본(疏本)을 진달하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일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하려고 하니 호군이 소장을 가지고 들어오면 함께 상의하고자 한다."
하였다.
공조 좌랑 이상(李翔)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송시열·송준길은 모두 석덕(碩德)으로 중망(重望)을 지닌 사람들인데 참소의 예봉(銳鋒)에 곤욕을 당하여 낭패해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신 같은 무리는 있으나마나한 사람이니 한번 물러가는 것 이외에 다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진강(進講)할 적에 번번이 사정(邪正)을 분변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반복하여 전하에게 진달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군자와 소인은 물과 불 및 얼음과 숯불이 상반되는 것과 같아서 그 성쇠와 승부의 기미가 그야말로 국가의 치란과 존망의 분기점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인을 제재하는 방도는 단지 조기에 분변하여 엄히 다스리는 데 있을 뿐입니다. 윤선도 같은 자는 그의 심적(心迹)이 드러난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가 불칙한 마음을 품고 국가에 화(禍)를 끼치려는 의도가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으니, 그의 죄가 어찌 유찬(流竄)시키는 데에서 그칠 수 있겠습니까.
권시(權諰)는 유사(儒士)라는 명칭으로 선조(先朝) 때부터 남달리 우대한 은혜가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권시는 두 신하에 대하여 스스로 평생의 교분이 있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함께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도리어 좋아하는 데 치우쳐 드디어 흉인(凶人)을 위해 비호할 계교를 내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음으로써 스스로 악인을 편들어 정인(正人)에게 추욕을 가하는 결과에 빠져들었으니, 아, 이상한 일입니다.
성명께서 위에 계시어 공의(公議)가 점점 신장되고 있으니, 선도 같은 무리가 많이 나온다 해도 어떻게 감히 가슴속의 계교를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권시의 경우는 도리어 사림(士林)의 복심(腹心)에 병이 발생한 것이니, 이는 가라지가 곡식을 병들게 하고 자색(紫色)045) 이 주색(朱色)046) 을 혼란하게 하는 것으로 그 폐해는 더욱 극심한 점이 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분명히 변별하여 통렬히 공척해야 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 그들을 엄하게 대하지 않고 조금이나마 가차(假借)하는 뜻을 보인다면 흉사(凶邪)한 무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니, 사림(士林)의 화(禍)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또 듣건대, 근래 박세성(朴世城)의 일 때문에 누차 엄한 전지(傳旨)를 내렸으므로 뭇 신하들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전하의 노여움이 혹 중도(中道)에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이 일뿐만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본(大本)이 확립되지 않으면 희로애락이 혹 절도에 맞지 않게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본원(本源)에 공력을 들이소서.
그리고 신은 이와 관련하여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선도(善道)의 소장에 ‘임금의 권세가 아래로 옮겨 갔다.’고 했고, 권시의 소장에는 ‘아래로 옮겨갔다는 것을 실증하겠다.’고 참소하였는데, 이는 모두 공동(恐動)시키기 위한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 두 개의 말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어서 대간을 겸제(鉗制)하여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이미 그들 두 사람의 계교에 빠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때 실정이 없는 일을 가지고 이런 지나친 하교를 내리시어 조신(朝臣)들로 하여금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게 하십니까. 전하의 하교가 우연히 나온 것이라면 모르겠습니다만, 진실로 두 사람의 참언(讒言)에 동요되어 의혹을 제거할 수 없어서였다면, 성상의 예권(禮眷)이 아무리 근실하다 하더라도 송시열 등은 반드시 다시 올 기약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간사한 부류들은 반드시 야유하면서 기세를 돋구게 될 것이니, 신은 국사가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장의 내용은 모두가 나를 깨우쳐주는 말이었다. 내가 일간 면대하여 논란함으로써 상하가 서로 막힌 뜻이 없게 하려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서둘러 돌아가기를 결단하는 것인가. 아주 떠날 계획을 하지 말고 머물러서 나의 미흡한 점을 보좌하라."
하였다.
5월 6일 경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첫 번째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대사간 이정기(李廷夔), 정언 홍주삼(洪柱三) 등이 다시 권시(權諰)를 파직시킬 것을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부호군 이유태(李惟泰), 공조 좌랑 이상(李翔)을 인견하였는데, 승지 1인만 정원에 남아 있고 나머지 승지들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상이 이상에게 이르기를,
"근래 윤선도가 올린 흉소(凶疏) 때문에 좌참찬이 뜻밖에 내려가 버렸고 우찬성은 연제일(練祭日)에 올라오려 했다가 또한 중지했으니, 국가의 불행이 어떠하겠는가. 두 신하를 기필코 올라오게 하여 진정시킬 여지를 만들고 싶지만 성의가 천박한 탓으로 그들이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릴 수 없을까 염려스럽다. 지금은 호군과 좌랑만이 조정에 있을 뿐인데 모두 물러가려고 한다. 따라서 개강(開講)하는 때가 있어도 특별히 입시하게 할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호군은 노친(老親)이 시골에 있으니 사세상 머무를 수가 없는 형편이지만, 좌랑은 친가(親家)가 서울에 있는데 갑자기 돌아가서야 되겠는가."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신은 출계(出繼)한 사람이어서 가묘(家廟)가 시골에 있습니다. 그리고 근일 고질병이 점점 극심해져 스스로의 힘으로 버틸 수 있는 형세가 전혀 없습니다. 더욱 마음을 두렵게 하는 것은, 권시는 유사(儒士)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결국 은미한 죄상이 드러나고 말았으니, 신처럼 무식한 사람은 한층 더 물러가고만 싶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를 일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부끄러워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억지로 머무르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권시의 일 때문에 말하는 것이라면 사리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신의 병상(病狀)으로서는 결코 힘을 다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로 노부(老父)를 찾아뵈면서 자유로이 왕래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랑 의 소장 내용에 나의 뜻을 자세히 모르는 것 같은 점이 있었다."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윤선도의 소장에서는 ‘위복(威福)이 아래로 옮겨갔다.’고 했고, 권시의 소장에서는 ‘아래로 옮겨갔다는 것을 실증하겠다.’고 한 참소가 있었는데, 갑자기 박세성(朴世城)에 대해 임금을 모욕하고 명을 거역했다는 하교가 있어 마치 그들의 소장 내용을 채납한 것 같은 뜻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진달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선도의 소장 내용은 호번(浩繁)하기 짝이 없었는데, 금방 보아 넘겼을 뿐 실제로 유의하지는 않았다. 어찌 채용할 리가 있겠는가. 세성의 일은 당초 우연히 글자를 놓았던 것인데, 좌랑의 소장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이제 성교(聖敎)를 들으니 신도 마음이 풀립니다."
하였다. 이때 이유태가 상소하면서 선조(先朝) 때 올리려 했던 상소를 별단(別單)에 써서 진달했는데 그 내용이 1만여 언이었다. 이날 상이 이유태와 상의하려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고 다시 뒷날 들어오게 하였다. 우부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근일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을 오래도록 내리지 않고 있는데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5월 9일 계해
상이 다시 부호군 이유태, 공조 좌랑 이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승지 남용익에게 유태의 소장을 읽게 했는데 그 소장의 내용이 2만여 언이나 되었다. 상이 구절에 따라 하문하면 유태가 부연 해석하여 대답하였다. 그 소장의 끝에
"선왕(先王)께서는 등극한 이후 절대로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께서 술맛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유태가 아뢰기를,
"이 말이 참으로 사실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선왕께서 조신(朝臣) 가운데 술마시기를 숭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술을 끊기가 어렵지 않은데 그렇게 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고 하교하셨다."
하였다. 유태가 소장 내용의 말을 인하여 앙문(仰問)한 것인데 상의 답이 이와 같았다. 용익이 다 읽고 나서 아뢰기를,
"이 소장을 이미 탑전(榻前)에 진달하였으니, 비국(備局)에 내려 처리를 의논하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소장을 다 보고 나니 모두가 오늘날에 행해야 될 것이었다. 정원으로 가지고 가서 호군(護軍)과 상의하여 큰 요점을 뽑되 행할 만한 조목을 초출(抄出)하여 도로 들여오게 하라."
하였다. 그뒤 며칠이 지난 다음 비국에 계하(啓下)하였다. 제1조는 풍속을 바로잡는 데 대한 것이었는데 그 조목이 세 가지였다. 그 내용은,
"1. 향약(鄕約)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여씨(呂氏)가 창안했고 주자(朱子)가 상세히 부연하였고 이이(李珥)가 증손(增損)을 가한 것입니다. 일찍이 선묘조(宣廟朝) 때 정신(廷臣) 가운데 이 법을 실행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이가 곧바로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 법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다리는 것이 있어 그랬던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제(國制)의 예전(禮典)·형전(刑典)을 조사하여 보건대 향약의 뜻이 간략하게나마 들어가 있었습니다만, 강령(綱領)과 절목(節目)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반드시 여씨의 제도를 취하여 시의(時宜)를 참작해서 조정한 다음 착실히 행한다면 교화가 이루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질 것이며 백성이 윗사람을 친히 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는 의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신이 따로 한 책으로 엮어 예람(睿覽)에 편리하도록 아울러 진달하겠습니다.
2. 오가 작통(五家作統)에 관한 것입니다. 이른바 오가 작통이란 것은 《주례(周禮)》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나라의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전(國典)을 살펴보건대 강령만 있을 뿐 절목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 법을 상세히 살펴보고서 5가(家)로 통(統)을 만들어 통에는 통주(統主)를 두고 25가에는 정(正)을 두고 1백 가에는 장(長)을 두고 2백 가에는 유사(有司)를 두어 향약과 서로 표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명(姓名)·연령(年齡)·사조(四祖)를 호적(戶籍)에 써서 한 사람도 누락되는 사람이 없게 하여 좌목(座目)을 한번 열어보게 되면 온 나라의 백성의 수를 앉아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호적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송사(訟事)하여도 청리(聽理)하여 주지 않게 하며, 이를 청리하는 수령은 죄를 주게 합니다. 죽거나 장사를 지낼 적에도 돌보아주지 못하게 하며 돌보아주면 벌포(罰布)를 내게 합니다. 이사(移徙)할 경우에는 반드시 문장(文狀)을 받아서 이사가는 고을에 접부(接付)하게 한 연후에야 거접(居接)을 허락하게 합니다. 이는 곧 《주례》에 이른바 ‘따라서 준다.’고 한 데 대한 정주(鄭註)에서 ‘죄악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고 한 뜻입니다. 문장(文狀)이 없는데도 사사로이 거접을 허락한 경우에는 1백 가(家)에게 벌포(罰布)를 내게 한다면 사람들이 사사로이 옮겨다닐 수 없게 될 것입니다.
3. 사창(社倉)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주자(朱子)가 이미 행한 법규로서 지금 여러 고을의 조적법(糶糴法)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고을의 대소가 같지 않은 탓으로 조적의 다과(多寡)가 고르지 않고 또 이사(里社)에서 행하지 않고 있으니, 저축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한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여러 고을에는 1결(結)마다 4석(石)씩을 계산하여 유치(留置)하게 한 다음, 2석은 분급(分給)하고 2석은 저축하게 하며, 이사(里社)에는 사람마다 각기 벼를 내게 하여 유사(有司)가 주관하게 한 다음, 집집마다 2석씩을 분급하여 그에 대한 이식(利息)을 거두어 들이게 하고 또 2석은 유치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게 한다면, 공사(公私)가 모두 1년의 저축이 있게 될 것은 물론, 흉년에 대비할 수 있고 유사시에도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상 세 조항은 풍속을 바로잡고 저축을 많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였다. 제2조는 인재(人材)를 배양하는 데 관한 것이었는데, 조목이 다섯 가지였다. 그 내용은,
"1. 학교(學校)에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이이(李珥)가 정한 것을 보건대 학교의 모범(模範)과 스승을 선택하여 선비를 배양하는 방법과 학궁(學宮)의 규범을 제시한 몇 개의 조목이 있었는데, 선비들의 인격을 양성시키는 법이 대략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2백 가(家)가 있는 중간 지점에 양몽재(養蒙齋)를 설립하고, 조관(朝官)·생진(生進)047) ·학생(學生)048) 가운데 학행(學行)이 있는 자를 스승으로 임명하고, 사창(社倉)의 공곡(公穀)으로 기르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태어나서 10세가 되면 대부(大夫)·사(士)의 아들에서부터 서얼(庶孽)과 양민(良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는데, 국전(國典)에 의거하여 유음(有蔭)과 무음(無蔭)별로 각기 장적(帳籍)을 만들어 둡니다. 15세가 되어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가운데 한 가지를 능통하게 되면 사학(四學)이나 향교(鄕校)로 올려보내 주고 능통하지 못한 자는 그 위(衛)로 돌려보내게 합니다. 도사(都事)가 매년 여러 고을을 순행하면서 시험을 보이되 60세 된 사람과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두 가지 책을 강(講)하게 하여 불통(不通)된 사람은 모두 도로 오위(五衛)에 예속시키게 합니다. 그리고 강(講)을 할 때에는 교유(敎諭)에 주안점을 둘 것이요 어려운 것을 가려서 도태시키기 위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읍재(邑宰)와 감사(監司)가 반드시 예(禮)에 의거하여 대우한 연후에야 교안(敎案)에 외람되이 들어오는 걱정이 없어질 것이고 생도(生徒)들을 훈도하는 방도가 서게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전(國典)을 살펴보건대 주현(州縣)에 각각 외교관(外敎官)을 설치하고 그 근만(勤慢)을 조사하여 품계를 올려준다고 되어 있는데, 이 법이 착실한 것 같지만 구차스럽게 충당시키는 걱정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사대부 가운데 치덕(齒德)과 학술이 있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가 있는 사람 하나를 스승으로 삼아서 회부(會簿)의 공곡(公穀)으로 기르는 것을 지금 군직(軍職)에 붙이는 것처럼 하고 늠식(廩食)을 차등 있게 주는 것을 송(宋)나라 때 사관(祠官)의 예(例)와 같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교에 들어가 제생(諸生)들을 강습하게 하되, 30세 이상은 통독(通讀)하게 하고 30세 이하는 배강(背講)하게 하여 상벌을 주게 한다면, 사장(師長)은 구차스럽게 충당시키는 걱정이 없게 되고 제생들은 보고 느끼는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례(周禮)》의 향선생(鄕先生)의 뜻인 것입니다.
서원(書院)의 건립에 이르러서는 학문에 뜻을 둔 선비를 배양할 수 있으니 유익함이 적지 않습니다. 단지 사장(師長)을 두지 않고 또 공가(公家)에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유생들이 서로 모여서 방자하고 멋대로 하는 탓으로 이미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이 없고 또 학문을 연마하는 공효도 없게 되는데, 국가에서 이를 설립한 본의는 반드시 이렇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이이(李珥)가 중국의 법제에 의거하여, 큰 지방의 서원에는 동주(洞主)·산장(山長)의 인원을 설치하고 녹봉(祿俸)을 주게 하되 학행이 있어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과 벼슬을 쉬고 물러가 있는 사람 가운데에서 가려 그 직임에 앉히고 이끌어 나가게 할 것을 청했었는데, 이 뜻이 진실로 좋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일이 많을 때를 당하여 이미 향교의 사장(師長)에게 봉름(俸廩)을 주고 또 동주와 산장에게도 봉름을 주기에는 힘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각 서원에서 어찌 사장을 대우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2. 연영원(延英院)에 관한 것입니다. 이른바 연영원은 곧 정자(程子)의 말입니다. 삼가 듣건대 국가에서도 일찍이 하나의 당사(堂舍)를 태학(太學)의 곁에다 설립하였었는데 그 유지(遺址)가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언제 창건하고 언제 폐기시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난번 정신(廷臣)이 또한 건립을 아뢰었으나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하나의 당사를 설립하고 공론으로 추천된 사람과 시골에 있는 어진 사람을 반드시 여기에 초치하여 예우를 극진히 하되 갑자기 벼슬에 임명하지 않고 여럿이 모여 학문을 강마하여 그 재능을 완성시키게 한 다음, 특별히 소대(召對)를 내려 치도(治道)를 자문(咨問)하여 그의 재식(才識)과 기능(器能)을 살펴본 연후에 벼슬시킨다면, 호학(湖學)의 학문을 강마하는 실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주(周)나라 때의 사황(思皇)의 성대함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049) 3. 과거법(科擧法)에 관한 것입니다. 국가에서 사람을 뽑는 법규가 모두 옛날의 공사법(貢士法)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3년에 한 번씩 보이는 대비과(大比科) 이외에는 다시 별시(別試)나 정시(庭試)를 설행한 일이 없었고, 간혹 설행하였더라도 반드시 강경(講經)을 보인 뒤에 뽑았기 때문에 경술(經術)에 능통한 선비들이 빈빈(彬彬)하여 볼 만했습니다. 지금 과거(科擧)를 자주 설행하는 것은 곧 뒤로 오면서 생긴 폐단인데, 경학(經學)은 힘을 쓰지 않고 오로지 사장(詞章)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학장구(大學章句)》도 통달하지 못하면서 출신(出身)하여 현달한 벼슬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관(文官)을 전강(殿講)케 하는 것은 실로 학문을 권장하기 위한 아름다운 뜻인데, 조신(朝臣)들 사이에는 술이나 마시고 시나 읊는 것을 고상한 풍치로 알고 경학(經學)을 하는 것은 고역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비들의 강경도 구두(口讀)만 익숙할 뿐 글의 뜻은 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삼대(三代) 때의 제도를 다 회복시킬 수는 없겠습니다만, 선비를 시험보일 때에는 반드시 강경으로 하고 강경에는 반드시 글의 뜻을 위주로 하게 한다면, 결코 오늘날처럼 거칠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또 신이 삼가 국전(國典)을 살펴보건대, 조종조(祖宗朝)에서 사람을 쓰는 방도는 시재(試才)를 통하여 했었는데, 크게는 문무과(文武科)로부터 작게는 음잡과(蔭雜科)에 이르기까지 시재하지 않고 곧바로 기용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재능이 있는 사람이 등용되고 요행의 문이 막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국법이 해이된 탓으로 사로(仕路)에 지름길이 있게 되어 사람들이 각기 재주를 부리고 취재(取才)는 하지 않기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등용할 적에도 단지 보고 들은 것에 의거할 뿐입니다. 비록 천거하는 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또한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국전을 신명(申明)시켜 시재를 위주로 하는 것이 낫습니다. 신이 또 국전을 살펴보건대 무과(武科)에는 경서(經書)의 강(講)이 있는 반면 문과(文科)에는 무예를 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지금 문신들을 시사(試射)하는 법규가 아이들의 장난과 다를 것이 없는데, 이는 평소 익힌 것이 없는 데에서 온 소치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오늘날을 위하여 계교한다면 반드시 문과에 대해서는 강경과 제술 이외에 또 사후(射帿)하는 한 가지 기예를 더 설치하는 것을 여경(餘經)의 법식과 같게 한다면, 《주례(周禮)》에 사마(司馬)가 재예(才藝)를 논하여 선비를 뽑는 성대함을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4. 오위(五衛)에 관한 것입니다. 국가에서 오위를 설치한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중위(中衛)·좌위(左衛)·우위(右衛)·전위(前衛)·후위(後衛)가 있습니다. 공경(公卿)에서부터 서인(庶人)의 자식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조상의 덕[蔭]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각기 소속되는 데가 있게 됩니다. 그런 연후에 음관(蔭官)의 취재(取才)와 무예(武藝)의 시재(試才)에 대한 법규가 있게 되는데, 이는 모두 권장하여 성취시키기 위한 방도인 것입니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이 법이 이미 무너져 사람이 통속되는 데가 없어짐에 따라 온갖 폐단이 모두 생겨나서 만사에 기강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영(御營)에 경포수(手砲手)·아병(牙兵)·속오(束伍)를 새로 설치한 것은 부득이한 거조였습니다. 반드시 오위법(五衛法)은 다시 실시하되 고금의 사의(事宜)를 참작하여 해야 됩니다. 모든 백성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숙학(塾學)에 들어가는데 15세가 되면 선발하여 학교로 올려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오위에 예속시킵니다. 오위에 예속될 사람은 반드시 무예에 능한 자로서 시취(試取)해야 하며 능하지 못한 사람은 관에서 베 두 필씩을 거두어 들여 군자 별창(軍資別倉)에 수송하여 상번군(上番軍)의 초식(稍食)050) 으로 쓰게 합니다. 상번(上番)은 1만 명이 1번(番)이 되어 서로 교대하며 초식은 군자 별창에서 나옵니다. 오위장(五衛將)에게 이들을 거느리고 항상 무예를 익히게 하고는 수시로 취재(取才)하여 음관(蔭官)을 제수한다면, 이미 궁금(禁宮)을 숙위(宿衛)할 수 있고 또한 흥기하고 진작시키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신은 근래 도시(都試)에서 혹 직부(直赴)를 내리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다시 오위의 하번(下番) 때에도 시장(試場)을 설치하고 재예를 시험보이되 1만 명 가운데 2, 3 인을 뽑아 전시(殿試)에 직부하게 하여 매번 이렇게 하고 매년 이렇게 하여 상식(常式)으로 삼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사모하여 상경(上京)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줄 모르게 될 것은 물론 당번(當番)이 되면 기꺼이 달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속오(束伍)는 폐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향약청(鄕約廳)의 좌목(座目)을 조사하여 공사천(公私賤) 가운데 15세 이상은 무재를 시취하여 능한 자는 모두 충정(充定)시키되, 사천의 경우 본주인 집에서 부리는 사람은 충정시키지 말게 하며 공천으로서 재예가 없는 자는 법규대로 베를 거두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속오의 각 개인들은 군자창의 베를 적당량 정급(定給)하여 생활하게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재예가 뛰어난 사람은 공천일 경우에는 면천(免賤)시키고 사천일 경우에는 본주인에게 대가(代價)를 지급한 다음 또한 면천시켜 오위에 충정함과 동시에 초식은 군자 별창에서 지급합니다. 이밖에 여러 가지 군병들의 호칭은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군(漕軍)·수군(水軍)은 모두 정해진 숫자가 있으니, 먼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거처하는 고을에서 법규대로 베를 거두어 연해(沿海)의 고을에 보내어 그 역사(役事)를 돕게 해야 합니다. 또 무예를 익히는 법은 《관자(管子)》 내정편(內政篇)에 매우 자세하고 편리하게 되어 있으니 이를 모방하여 행한다면, 영장(營將)이 두루 돌아다니는 수고로움이 없더라도 사람들이 각기 스스로 익혀 기예도 절로 정예롭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내정편을 가져다 보시고 나라에 시행하여 보소서. 5. 군자 별창(軍資別倉)에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전(國典)을 살펴보건대, 군자창(軍資倉) 이외에 또 별창(別倉)을 설치하고 공적으로 거두는 모든 물품을 여기에 저장하고, 제도(諸道)의 어전(漁箭)과 염분(鹽盆) 등에서 받아들인 세금으로는 곡식을 사서 모두 군자(軍資)에 보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있는 각 고을에도 창고를 설치하여 놓고 있는데 진장(鎭將)·군관(軍官)·교관(敎官)에게 공급하는 것도 모두 이 창고에서 나온다고 하니, 이는 실로 오늘날 당연히 서둘러 수거(修擧)해야 될 것입니다. 각처의 어염(魚鹽)을 하나도 사문(私門)으로 들어가는 것이 없게 하고 각도의 감사·목사·별장(別將)이 사사로이 쓰는 것과 오위에 들어가지 않은 자와 속오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거둔 베는 모두 이 창고에 수납(輸納)하게 해야 합니다. 내수(內需)·각사·각관 및 각 시위(寺位)의 노비(奴婢)의 공포(貢布)와 전지(田地)의 출세(出稅) 또한 그 숫자를 통틀어 계산하여야 합니다. 궐내(闕內) 각사의 소용(所用)은 상식(常式)이 있는 것이고 충훈(忠勳) 등 부(府)의 소용도 정수(定數)가 있는 것이니, 그 숫자 이외에 남는 것은 일체 모두 이 창고에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위 상번(上番)들의 초식(稍食)도 모두 여기에서 지출하게 해야 합니다. 또 각조·각사·각관에 입번하는 하리(下吏)들의 초식도 모두 여기에서 지급하게 하고 관원들의 추종가(騶從價)도 여기에서 지출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응수(應需)하는 물품은 수입을 헤아려 지출한다면 고르지 않은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례(恩例)와 사패(賜牌)도 의당 국전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합니다만, 생각건대 오늘날은 보통 때와 다르니 다시 절량(節量)해야 합니다. 이상 다섯 가지 조항은 인재를 배양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방법으로 치법(治法)의 본보기입니다." 하였다. 제3조는 구폐(舊弊)를 고치는 데 대한 것이었는데 조목이 여덟 가지였다. 그 내용은, "1. 내수(內需)에 관한 것입니다. 왕자(王者)는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 도리인데 민간에 폐를 끼치고 있다는 내용으로 전후 유신(儒臣)들이 아뢴 말이 간절했고 논한 것이 상세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국전(國典)을 살펴보건대, 대내에서 쓰는 미포(米布)·잡물(雜物)·노비(奴婢)는 별제(別提)가 이를 맡아서 관장하게 되어 있는데, 그뒤 그 법규가 점점 변해 이부(吏部)의 낭관(郞官)이 그 출납을 참여하여 알게 되어 있었으나 실은 간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실로 잘 변통시켜 공적으로 조처하게 하는 동시에 관원(官員)에게 맡기고 중관(中官)에게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용(內用)은 항상 숫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니 그 나머지는 군수(軍需)로 돌려야 합니다. 위에서 이렇게 한 뒤에 아래로 충훈부·각사·관둔전(官屯田)·시위전(寺位田) 등의 전지에서 나오는 것과 노비의 공포(貢布)를 모두 별창(別倉)에 수납하게 하고 또 연해의 염분(鹽盆)·어전(漁箭)·선세(船稅)도 모두 별창으로 수납하게 하여 하나의 물건도 사용(私用)하는 것이 없게 하면, 일국의 화리(貨利)를 모두 군국(軍國)의 수요에 충당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때에 복식(卜式)051) 같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스스로 곡식을 바칠 것인데, 어떻게 각기 사사로이 소유함으로써 공실(公室)을 좀먹게 할 수 있겠습니까. 궁가(宮家)에서 전장(田庄)을 설치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첫째가는 큰 폐단입니다. 이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꼴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가죽이 있지 않으면 털이 붙을 곳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민심을 잃어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되면, 궁장(宮庄)이 있다고 한들 그것만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2. 공안(貢案)에 관한 것입니다. 국가에서 토지를 맡기고 공세(貢稅)를 바치도록 만든 법은 고법(古法)에서 나온 것인데, 연산군(燕山君) 이래 공물(貢物)이 매우 번거롭게 되어 백성들이 그 명을 감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뒤 상당히 절감하였습니다만 그래도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난리가 있은 뒤로 식공(式貢)이 고르지 않아서 쓸 데 없는 물건과 긴요치 않은 수요가 한갓 백성들의 폐단이 되고 있을 뿐이니, 오늘날 유신(儒臣)들이 기필코 개혁하려고 하는 것이 어찌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팔로(八路)에 대동법(大同法)을 고르게 시행하여 1년 동안 어용(御用)에 드는 숫자를 항정(恒定)하여 놓고 시장에서 사다 쓸 것이요 먼 곳에서 구하여 오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공안(貢案)은 고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쳐질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주(周)나라의 반록법(頒祿法)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임금은 경(卿)의 봉록(俸祿)의 10배이다.’ 했으니, 이것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어용의 숫자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부세(賦稅)에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제(國制)를 살펴보건대 공물(貢物)은 무겁고 세금(稅金)은 가벼워서 선왕(先王)의 법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지금 정전법(井田法)은 폐기되었지만 양전법(量田法)은 근거할 데가 있습니다. 결복(結卜)의 등차(等差)에 따라 전답의 수확을 비교하면 꼭 들어맞지는 않더라도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도(諸道)에 모두 양전법을 거행한 연후에 세금과 공물을 분간하지 말고 통틀어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숫자로 백성에게 취한다면, 한번 전안(田案)을 열어보기만 하면 팔도의 세입(稅入)을 앉아서도 셀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경용(經用) 이외에 여유가 있게 되면 백관들의 녹봉을 더 줄 수도 있고 흉년에 대비하여도 힘입을 수가 있으며 군국의 수요(需要)도 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넉넉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면세법(免稅法)에 대해서도 논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국전(國典)에 의하면 제전(諸田) 가운데 세금이 없는 것은 곧 역전(驛田)·원전(院田)의 유(類)로 모두 공적인 토지 아닌 것이 없는데, 내수사의 전지(田地)도 세금이 없는 것 가운데 들어 있으니, 이는 왕은 사사로이 하는 것이 없다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구나 여러 궁가(宮家)와 공신(功臣)의 전지에 대해 면세시키는 법규가 국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폐단만 극심할 뿐인데야 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의 망령된 의견으로는 직전(職田)의 법규가 폐기되면서 여러 궁가와 공신들만이 일방적인 은혜를 받아서 이런 면세받는 별전(別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연혁(沿革)의 전말에 대해 신이 소상하게 밝힐 겨를이 없으므로 정사의 대체만을 개론하겠습니다. 훈척(勳戚)에게 하사하는 물품은 뭇 신하들과 달리 할 수 있습니다만, 전세(田稅)라고 하는 것은 공공의 부세(賦稅)인데 어떻게 혼자서만 면제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내수사·제궁가·공신·각 아문에 대해 면세시키는 법규를 일체 혁파시켜 일국의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똑같이 차별없이 사랑한다는 뜻을 환히 알게 한다면, 위로는 요행을 바라는 문이 막히게 되고 아래로는 고르지 않다는 탄식이 없게 될 것입니다. 4. 인역(人役)에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전을 살펴보건대 외거 노비(外居奴婢) 가운데 나이 16세 이상 60세 이하에게는 각각 면포 1필씩을 신공(身貢)으로 거두게 되어 있는데, 신은 감히 이 면포의 승척(升尺)이 얼마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갖가지 징포(徵布)에 그 수효가 같지 않아서 고헐(苦歇)이 현격하게 다릅니다. 의당 국전을 살펴 참작하고 지금 행하고 있는 법규를 참고하여, 공천(公賤)과 양민(良民)으로서 보인(保人)에 보충한 경우에는 모두 오승포(五升布)에 길이는 35척짜리 2필로 할 것을 통행하는 법규로 정할 것이며, 사천(私賤)이 본주인에게 주는 신공 또한 이 법규와 같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 본주인이 더 징수할 경우 드러나는 대로 이를 징계하여 다스린다면 또한 고르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또 국전을 살펴보건대 군사들에게 군보(軍保)를 지급하는 것에 차등이 있었습니다. 두 보인(保人)이 매달 면포 반 필 씩을 내게 되어 있는데, 외람되이 더 징수할 경우에는 논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역(人役)을 똑같게 하는 법규를 만든다면 모두에게 거두어 들인 면포를 모조리 군자 별창에 저장해 두어야 하고, 지금 행하고 있는 어영청(御營廳)의 법규처럼 속오(束伍)로서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는 본 고을에서 초식(稍食)을 지급하고 오위(五衛)와 양민(良民)으로서 입번한 자와 각사의 노(奴) 가운데 입번한 사람들에게는 초식을 별창에서 나누어 지급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온 나라에서 베를 내는 백성들의 고헐(苦歇)에 차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5. 양전(量田)에 관한 것입니다. 20년에 한 번씩 다시 양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조종(祖宗)의 법입니다. 지금 삼남(三南)에서 이미 행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에서 갑술년052) 까지는 이미 20년이 넘었습니다. 따라서 시내와 골짜기가 변하여 전지의 경계(經界)가 서로 어긋난 탓으로 서원(書員)이 농간을 부리는 일이 많은데다가 수령들은 은결(隱結)을 두는 폐단이 있으니 지금 수거(修擧)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육도(六道)가 제일 급한데 경기는 토질은 척박한데도 부세가 무거우니, 지금 측량하더라도 그 등제(等第)를 모두 중하(中下)로 따르게 한다면 부역(賦役)이 고르게 되어 사람들이 원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6. 용관(冗官)을 도태시키는 데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우리 나라의 크기를 중국과 견주어 보면 중국의 한 도(道)만도 못한데, 중국의 관직과 아문은 우리 나라의 배도 되지 않으니, 우리 나라의 관사(官司)가 너무 번잡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간에 정신(廷臣)들의 건의에 따라 줄이거나 병합시킨 것이 많았습니다만 용관은 아직도 많습니다. 추종(騶從)들이 많은데 이는 더욱 감소시켜 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또 국전을 살펴보건대 각조·각사의 서리(胥吏)들은 모두 그 숫자가 있는 것이니, 지금 계책을 세운다면 국전에 의거하여 다시 절감시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서리들은 한 관사에 오래 예속시켜 두지 말고 여러 관사를 돌게 만들어 1년 만에 교체하게 한다면 이익을 노리고 멋대로 농간을 부리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궐내에서 부리는 것에도 정수(定數)가 있으며 각도·각읍의 하리(下吏)도 정수가 있고 관노비도 정수가 있으며 공장(工匠)도 정수가 있는 것이니, 남는 하리들은 오위에 송부하고 관노들은 속오를 만들며 여기에 참여되지 않는 자들은 법대로 면포를 거둔다면, 병식(兵食)의 수요에 큰 도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7. 구임(久任)시키는 데 관한 것입니다. 모든 관원은 반드시 사람을 잘 가려서 구임시킨 연후에야 공효를 책임지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이이(李珥)가 선묘(宣廟)께 진달하기를 ‘한때의 인재들을 다 거두어 들이되 신구(新舊)를 논하지 말고 귀천을 따지지 말고 관직에 맞는 인재를 가리소서. 그리하여 덕망과 도량이 있고 도리를 아는 사람은 묘당(廟堂)에 있게 하고, 경술(經術)에 능통하여 임금을 잘 보도할 수 있는 사람은 경악(經幄)에 있게 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공정하고 현명한 안목을 지닌 사람은 전형(銓衡)을 맡기고, 재화를 증식시키는 방도에 능통한 사람은 탁지(度支)를 맡기고, 예법을 강론하여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은 종백(宗伯)053) 을 제수하고, 병무를 잘 알고 원대한 모유(謨猷)를 지닌 사람은 사마(司馬)054) 를 제수하고, 마음이 충신(忠信)하고 명쾌히 결단할 줄 아는 사람은 형옥(刑獄)을 다스리게 하고, 일을 주간(主幹)하여 폐단이 없게 하는 사람은 공역(工役)을 주관하게 하고, 행신(行身)을 바르게 하여 상대를 규검하는 사람은 풍헌(風憲)의 중임을 주고, 몸가짐을 정직하게 하고 말을 끝까지 다하는 사람은 간쟁하는 직책을 제수하고, 풍도가 아래 관리들을 압도할 수 있는 사람은 방백(方伯)의 직임을 맡기고, 청렴함이 이민(吏民)을 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임금의 걱정을 나누어 백성을 친히 대하는 수령의 직임을 맡기소서. 내외 대소의 관직에 모두 적임자를 가려서 전일하게 맡겨 오래가게 하여 공적을 이룰 것을 기약하되 세월을 한정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그 사이에 재주가 직위보다 뛰어난 자는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시키고, 재주가 그 지위에 걸맞지 않는 사람은 좌천시키고, 재주가 직위와 걸맞는 자는 일생 동안 한 직책을 맡겨도 됩니다. 질병이 있더라도 경솔히 체직시키지 않는 것을 반드시 한(漢) 나라 때의 법과 같게 하여 만 3개월이 되어야 면직(免職)시키게 하소서. 간혹 한 관직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병을 핑계대고 사피(辭避)하는 자가 있으면 대간이 드러나는 대로 논박하여 체직시킨 다음 다시는 관직을 제수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 말이 오늘날에 행해지면 관직은 비는 일이 없게 되고 일은 잘 거행될 것입니다. 지금 모두 적격자를 얻어서 일시에 관원에 충당시킬 수는 없겠습니다만, 오늘 그 가운데 더욱 뛰어난 사람 하나를 발탁하고 내일 더욱 뛰어난 사람 하나를 발탁하여 나간다면, 인재를 다른 세대(世代)에서 빌어오지 않아도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8. 사치한 풍습을 금하는 데 관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제일의 급선무입니다. 위로 궁가(宮家)에서부터 아래로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사치 풍조가 끝이 없는데, 온갖 폐단의 발생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되는 것입니다. 계속 이렇게 한다면 몇 년이 못 가서 나라가 나라꼴을 이룰 수 없게 될 것인데, 말하자면 혀가 닳겠고 생각하면 마음이 오싹해집니다. 신이 삼가 《오례의(五禮儀)》의 세자(世子)가 빈(嬪)에게 폐백으로 보내는 단자를 살펴보건대, 왕자(王子)는 납폐(納幣)에 초단(綃緞)을 쓰고 제군(諸君)은 주단(紬緞)이나 면포(綿布)를 쓰게 되어 있으며, 대군(大君)의 혼례에는 의복은 면주(綿紬)·목면(木綿)을 쓰고 부인(夫人)의 성식(盛飾)에는 면주·목면을 쓰게 되어 있으며, 왕녀(王女)가 하가(下嫁)할 때는 역시 성식에 면주·목면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종친(宗親)이나 문무관 1품 이하의 혼례에 쓰는 폐백은 모두 면주·목면을 쓰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 국전을 살펴보건대 당하관 이하는 혼인할 때 사라(紗羅)·능단(綾緞)·계담(罽毯)을 쓴 경우에는 모두 장 팔십(杖八十)에 처한다고 되어 있는데 기타도 이와 비슷했으니, 조종(祖宗)께서 예법을 만든 뜻이 어찌 정미롭고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으며 백성을 가르치고 풍속을 교화시킨 방법이 어찌 엄하고도 올바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세도(世道)가 날로 비하되어 인심이 날로 사치에 빠지고 있는데,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절실하게 금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위를 정리(整理)하지 못한 채 전적으로 여염(閭閻)의 백성들만 책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이를 슬프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법령은 엄하지 않으면 시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염의 백성들도 위에서 반드시 금한다는 뜻을 보인 연후에야 사람들이 피할 줄 알아서 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헌부의 1원(員)에게 사치를 금하는 한 가지 일을 전담시켜 오래도록 교체하지 말 것이며,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거처하는 방(坊)의 유사(有司)에 벌포(罰布)를 내게 하고 외방도 그렇게 하고 법금을 범한 것이 크면 전가(全家)를 북변(北邊)으로 옮기게 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명령하면 행하고 금하면 중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 아홉 조항은 구폐(舊弊)를 개혁하고 옛법을 회복시키는 일이고 변통시키는 기요(機要)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겨나는 이유를 의인(醫人)이 증세를 살펴 약을 투여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살피지 못한다면, 동쪽에 견제당하고 서쪽에 간섭받으며 저것은 잘되지만 이것은 잘못되어 회통(會通)을 관찰하여 전례(典禮)를 행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먼저 경제사(經濟司)를 세워 이이(李珥)가 논한 것처럼 하되, 먼저 선조(先朝)의 대소 신료들이 소장과 차자로 아뢴 것 및 근래 조야에서 전지(傳旨)에 응하여 진언한 것들을 모아 합쳐 상세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육조·각사의 관원과 외방의 감사·병사로부터 수령·첨사·만호·찰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형지안(形止案)055) 을 만들게 하여, 관리·관노비·둔전(屯田)이 얼마이고 여러 궁가와 각사의 전답과 노비가 얼마이고 각종 군병이 얼마이고 관사(官舍)가 몇 칸이고 관곡(官穀)이 얼마이고 그 경내의 진산(鎭山)·진도(津渡)·점사(店舍)·사찰(寺刹) 등을 일일이 기록하게 하며, 또 자신의 소견에 따라 각기 폐단을 진달하게 하여 대신이 이를 총체적으로 관리하고 낭청이 보좌하여 폐습을 모두 고친 다음 옛법에 따라 재정(裁定)을 자품(咨稟)하여 일대(一代)의 법규를 만든다면, 폐단이 없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이유태(李惟泰)는 본디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나이에 자발적으로 스승을 찾고 벗을 취하였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자질과 학문은 양송(兩宋)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한때의 명성이 또한 성대하였다. 효묘(孝廟) 때를 당하여 차례로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은우(恩遇)가 함께 융중하였다. 위에 올리기 위해 대소(大疏)를 지어 경제책(經濟策)을 극진히 논하였으나 미처 올리지 못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올렸다. 상도 가상히 여겨 포장(褒奬)하고 모두 행할 만한 것이라고 하면서 묘당에 계하하였으나 끝내 채용한 실상은 없었다. 이제 그 소장을 살펴보건대 군덕(君德)과 치도(治道)에 대해 논하면서 경계할 것을 진달하고 폐단을 말한 것이 만천언이나 되는데, 간간이 정밀하고 합당하게 하는 것에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또한 쓸 만한 말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기록한 것은 단지 상이 초출하라고 명한 조건(條件)만을 취하여 그 대략을 적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6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구휼(救恤) / 재정-창고(倉庫)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법제(法制) / 수산업(水産業)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군역(軍役)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호구-호구(戶口)
[註 047] 생진(生進) : 생원 진사.[註 048] 학생(學生) : 사학(四學) 유생(儒生).[註 049] 호학(湖學)의 학문을 강마하는 실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주(周)나라 때의 사황(思皇)의 성대함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송(宋)나라 때 호원(胡瑗)이 호주(湖州)에 설립한 학교로서 제자들에게 경의(經義)와 시무(時務) 2과(科)로 나누어 가르쳤음. 사황(思皇)은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된 것을 말하는데, 이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나오는 말로 주(周)나라 문왕의 덕이 훌륭하여 어진 인재가 많음을 찬미한 것임.[註 050] 초식(稍食) : 녹미(祿米).[註 051] 복식(卜式) : 한(漢)나라 때 사람으로 양(羊)을 길러서 부자가 된 사람인데 당시 흉노(匈奴)를 정벌하는 비용에 쓰라고 재산의 반을 헌납하였고 또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주었음.[註 052] 갑술년 : 1634 인조 12년.[註 053] 종백(宗伯) : 예조 판서.[註 054] 사마(司馬) : 병조(兵曹).[註 055] 형지안(形止案) : 각종 노비(奴婢)의 원적부(原籍簿)를 작성한 뒤 매 3년마다 이들의 동태를 상세히 기록한 보조부임.
3. 과거법(科擧法)에 관한 것입니다. 국가에서 사람을 뽑는 법규가 모두 옛날의 공사법(貢士法)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3년에 한 번씩 보이는 대비과(大比科) 이외에는 다시 별시(別試)나 정시(庭試)를 설행한 일이 없었고, 간혹 설행하였더라도 반드시 강경(講經)을 보인 뒤에 뽑았기 때문에 경술(經術)에 능통한 선비들이 빈빈(彬彬)하여 볼 만했습니다.
지금 과거(科擧)를 자주 설행하는 것은 곧 뒤로 오면서 생긴 폐단인데, 경학(經學)은 힘을 쓰지 않고 오로지 사장(詞章)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학장구(大學章句)》도 통달하지 못하면서 출신(出身)하여 현달한 벼슬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관(文官)을 전강(殿講)케 하는 것은 실로 학문을 권장하기 위한 아름다운 뜻인데, 조신(朝臣)들 사이에는 술이나 마시고 시나 읊는 것을 고상한 풍치로 알고 경학(經學)을 하는 것은 고역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비들의 강경도 구두(口讀)만 익숙할 뿐 글의 뜻은 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삼대(三代) 때의 제도를 다 회복시킬 수는 없겠습니다만, 선비를 시험보일 때에는 반드시 강경으로 하고 강경에는 반드시 글의 뜻을 위주로 하게 한다면, 결코 오늘날처럼 거칠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또 신이 삼가 국전(國典)을 살펴보건대, 조종조(祖宗朝)에서 사람을 쓰는 방도는 시재(試才)를 통하여 했었는데, 크게는 문무과(文武科)로부터 작게는 음잡과(蔭雜科)에 이르기까지 시재하지 않고 곧바로 기용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재능이 있는 사람이 등용되고 요행의 문이 막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국법이 해이된 탓으로 사로(仕路)에 지름길이 있게 되어 사람들이 각기 재주를 부리고 취재(取才)는 하지 않기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등용할 적에도 단지 보고 들은 것에 의거할 뿐입니다. 비록 천거하는 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또한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국전을 신명(申明)시켜 시재를 위주로 하는 것이 낫습니다.
신이 또 국전을 살펴보건대 무과(武科)에는 경서(經書)의 강(講)이 있는 반면 문과(文科)에는 무예를 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지금 문신들을 시사(試射)하는 법규가 아이들의 장난과 다를 것이 없는데, 이는 평소 익힌 것이 없는 데에서 온 소치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오늘날을 위하여 계교한다면 반드시 문과에 대해서는 강경과 제술 이외에 또 사후(射帿)하는 한 가지 기예를 더 설치하는 것을 여경(餘經)의 법식과 같게 한다면, 《주례(周禮)》에 사마(司馬)가 재예(才藝)를 논하여 선비를 뽑는 성대함을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4. 오위(五衛)에 관한 것입니다. 국가에서 오위를 설치한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중위(中衛)·좌위(左衛)·우위(右衛)·전위(前衛)·후위(後衛)가 있습니다. 공경(公卿)에서부터 서인(庶人)의 자식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조상의 덕[蔭]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각기 소속되는 데가 있게 됩니다. 그런 연후에 음관(蔭官)의 취재(取才)와 무예(武藝)의 시재(試才)에 대한 법규가 있게 되는데, 이는 모두 권장하여 성취시키기 위한 방도인 것입니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이 법이 이미 무너져 사람이 통속되는 데가 없어짐에 따라 온갖 폐단이 모두 생겨나서 만사에 기강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영(御營)에 경포수(手砲手)·아병(牙兵)·속오(束伍)를 새로 설치한 것은 부득이한 거조였습니다. 반드시 오위법(五衛法)은 다시 실시하되 고금의 사의(事宜)를 참작하여 해야 됩니다.
모든 백성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숙학(塾學)에 들어가는데 15세가 되면 선발하여 학교로 올려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오위에 예속시킵니다. 오위에 예속될 사람은 반드시 무예에 능한 자로서 시취(試取)해야 하며 능하지 못한 사람은 관에서 베 두 필씩을 거두어 들여 군자 별창(軍資別倉)에 수송하여 상번군(上番軍)의 초식(稍食)050) 으로 쓰게 합니다. 상번(上番)은 1만 명이 1번(番)이 되어 서로 교대하며 초식은 군자 별창에서 나옵니다. 오위장(五衛將)에게 이들을 거느리고 항상 무예를 익히게 하고는 수시로 취재(取才)하여 음관(蔭官)을 제수한다면, 이미 궁금(禁宮)을 숙위(宿衛)할 수 있고 또한 흥기하고 진작시키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신은 근래 도시(都試)에서 혹 직부(直赴)를 내리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다시 오위의 하번(下番) 때에도 시장(試場)을 설치하고 재예를 시험보이되 1만 명 가운데 2, 3 인을 뽑아 전시(殿試)에 직부하게 하여 매번 이렇게 하고 매년 이렇게 하여 상식(常式)으로 삼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사모하여 상경(上京)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줄 모르게 될 것은 물론 당번(當番)이 되면 기꺼이 달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속오(束伍)는 폐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향약청(鄕約廳)의 좌목(座目)을 조사하여 공사천(公私賤) 가운데 15세 이상은 무재를 시취하여 능한 자는 모두 충정(充定)시키되, 사천의 경우 본주인 집에서 부리는 사람은 충정시키지 말게 하며 공천으로서 재예가 없는 자는 법규대로 베를 거두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속오의 각 개인들은 군자창의 베를 적당량 정급(定給)하여 생활하게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재예가 뛰어난 사람은 공천일 경우에는 면천(免賤)시키고 사천일 경우에는 본주인에게 대가(代價)를 지급한 다음 또한 면천시켜 오위에 충정함과 동시에 초식은 군자 별창에서 지급합니다. 이밖에 여러 가지 군병들의 호칭은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군(漕軍)·수군(水軍)은 모두 정해진 숫자가 있으니, 먼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거처하는 고을에서 법규대로 베를 거두어 연해(沿海)의 고을에 보내어 그 역사(役事)를 돕게 해야 합니다. 또 무예를 익히는 법은 《관자(管子)》 내정편(內政篇)에 매우 자세하고 편리하게 되어 있으니 이를 모방하여 행한다면, 영장(營將)이 두루 돌아다니는 수고로움이 없더라도 사람들이 각기 스스로 익혀 기예도 절로 정예롭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내정편을 가져다 보시고 나라에 시행하여 보소서.
5. 군자 별창(軍資別倉)에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전(國典)을 살펴보건대, 군자창(軍資倉) 이외에 또 별창(別倉)을 설치하고 공적으로 거두는 모든 물품을 여기에 저장하고, 제도(諸道)의 어전(漁箭)과 염분(鹽盆) 등에서 받아들인 세금으로는 곡식을 사서 모두 군자(軍資)에 보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있는 각 고을에도 창고를 설치하여 놓고 있는데 진장(鎭將)·군관(軍官)·교관(敎官)에게 공급하는 것도 모두 이 창고에서 나온다고 하니, 이는 실로 오늘날 당연히 서둘러 수거(修擧)해야 될 것입니다. 각처의 어염(魚鹽)을 하나도 사문(私門)으로 들어가는 것이 없게 하고 각도의 감사·목사·별장(別將)이 사사로이 쓰는 것과 오위에 들어가지 않은 자와 속오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거둔 베는 모두 이 창고에 수납(輸納)하게 해야 합니다.
내수(內需)·각사·각관 및 각 시위(寺位)의 노비(奴婢)의 공포(貢布)와 전지(田地)의 출세(出稅) 또한 그 숫자를 통틀어 계산하여야 합니다. 궐내(闕內) 각사의 소용(所用)은 상식(常式)이 있는 것이고 충훈(忠勳) 등 부(府)의 소용도 정수(定數)가 있는 것이니, 그 숫자 이외에 남는 것은 일체 모두 이 창고에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위 상번(上番)들의 초식(稍食)도 모두 여기에서 지출하게 해야 합니다. 또 각조·각사·각관에 입번하는 하리(下吏)들의 초식도 모두 여기에서 지급하게 하고 관원들의 추종가(騶從價)도 여기에서 지출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응수(應需)하는 물품은 수입을 헤아려 지출한다면 고르지 않은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례(恩例)와 사패(賜牌)도 의당 국전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합니다만, 생각건대 오늘날은 보통 때와 다르니 다시 절량(節量)해야 합니다.
이상 다섯 가지 조항은 인재를 배양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방법으로 치법(治法)의 본보기입니다."
하였다. 제3조는 구폐(舊弊)를 고치는 데 대한 것이었는데 조목이 여덟 가지였다. 그 내용은,
"1. 내수(內需)에 관한 것입니다. 왕자(王者)는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 도리인데 민간에 폐를 끼치고 있다는 내용으로 전후 유신(儒臣)들이 아뢴 말이 간절했고 논한 것이 상세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국전(國典)을 살펴보건대, 대내에서 쓰는 미포(米布)·잡물(雜物)·노비(奴婢)는 별제(別提)가 이를 맡아서 관장하게 되어 있는데, 그뒤 그 법규가 점점 변해 이부(吏部)의 낭관(郞官)이 그 출납을 참여하여 알게 되어 있었으나 실은 간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실로 잘 변통시켜 공적으로 조처하게 하는 동시에 관원(官員)에게 맡기고 중관(中官)에게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용(內用)은 항상 숫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니 그 나머지는 군수(軍需)로 돌려야 합니다. 위에서 이렇게 한 뒤에 아래로 충훈부·각사·관둔전(官屯田)·시위전(寺位田) 등의 전지에서 나오는 것과 노비의 공포(貢布)를 모두 별창(別倉)에 수납하게 하고 또 연해의 염분(鹽盆)·어전(漁箭)·선세(船稅)도 모두 별창으로 수납하게 하여 하나의 물건도 사용(私用)하는 것이 없게 하면, 일국의 화리(貨利)를 모두 군국(軍國)의 수요에 충당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때에 복식(卜式)051) 같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스스로 곡식을 바칠 것인데, 어떻게 각기 사사로이 소유함으로써 공실(公室)을 좀먹게 할 수 있겠습니까.
궁가(宮家)에서 전장(田庄)을 설치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첫째가는 큰 폐단입니다. 이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꼴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가죽이 있지 않으면 털이 붙을 곳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민심을 잃어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되면, 궁장(宮庄)이 있다고 한들 그것만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2. 공안(貢案)에 관한 것입니다. 국가에서 토지를 맡기고 공세(貢稅)를 바치도록 만든 법은 고법(古法)에서 나온 것인데, 연산군(燕山君) 이래 공물(貢物)이 매우 번거롭게 되어 백성들이 그 명을 감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뒤 상당히 절감하였습니다만 그래도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난리가 있은 뒤로 식공(式貢)이 고르지 않아서 쓸 데 없는 물건과 긴요치 않은 수요가 한갓 백성들의 폐단이 되고 있을 뿐이니, 오늘날 유신(儒臣)들이 기필코 개혁하려고 하는 것이 어찌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팔로(八路)에 대동법(大同法)을 고르게 시행하여 1년 동안 어용(御用)에 드는 숫자를 항정(恒定)하여 놓고 시장에서 사다 쓸 것이요 먼 곳에서 구하여 오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공안(貢案)은 고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쳐질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주(周)나라의 반록법(頒祿法)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임금은 경(卿)의 봉록(俸祿)의 10배이다.’ 했으니, 이것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어용의 숫자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부세(賦稅)에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제(國制)를 살펴보건대 공물(貢物)은 무겁고 세금(稅金)은 가벼워서 선왕(先王)의 법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지금 정전법(井田法)은 폐기되었지만 양전법(量田法)은 근거할 데가 있습니다. 결복(結卜)의 등차(等差)에 따라 전답의 수확을 비교하면 꼭 들어맞지는 않더라도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도(諸道)에 모두 양전법을 거행한 연후에 세금과 공물을 분간하지 말고 통틀어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숫자로 백성에게 취한다면, 한번 전안(田案)을 열어보기만 하면 팔도의 세입(稅入)을 앉아서도 셀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경용(經用) 이외에 여유가 있게 되면 백관들의 녹봉을 더 줄 수도 있고 흉년에 대비하여도 힘입을 수가 있으며 군국의 수요(需要)도 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넉넉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면세법(免稅法)에 대해서도 논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국전(國典)에 의하면 제전(諸田) 가운데 세금이 없는 것은 곧 역전(驛田)·원전(院田)의 유(類)로 모두 공적인 토지 아닌 것이 없는데, 내수사의 전지(田地)도 세금이 없는 것 가운데 들어 있으니, 이는 왕은 사사로이 하는 것이 없다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구나 여러 궁가(宮家)와 공신(功臣)의 전지에 대해 면세시키는 법규가 국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폐단만 극심할 뿐인데야 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의 망령된 의견으로는 직전(職田)의 법규가 폐기되면서 여러 궁가와 공신들만이 일방적인 은혜를 받아서 이런 면세받는 별전(別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연혁(沿革)의 전말에 대해 신이 소상하게 밝힐 겨를이 없으므로 정사의 대체만을 개론하겠습니다.
훈척(勳戚)에게 하사하는 물품은 뭇 신하들과 달리 할 수 있습니다만, 전세(田稅)라고 하는 것은 공공의 부세(賦稅)인데 어떻게 혼자서만 면제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내수사·제궁가·공신·각 아문에 대해 면세시키는 법규를 일체 혁파시켜 일국의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똑같이 차별없이 사랑한다는 뜻을 환히 알게 한다면, 위로는 요행을 바라는 문이 막히게 되고 아래로는 고르지 않다는 탄식이 없게 될 것입니다.
4. 인역(人役)에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전을 살펴보건대 외거 노비(外居奴婢) 가운데 나이 16세 이상 60세 이하에게는 각각 면포 1필씩을 신공(身貢)으로 거두게 되어 있는데, 신은 감히 이 면포의 승척(升尺)이 얼마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갖가지 징포(徵布)에 그 수효가 같지 않아서 고헐(苦歇)이 현격하게 다릅니다. 의당 국전을 살펴 참작하고 지금 행하고 있는 법규를 참고하여, 공천(公賤)과 양민(良民)으로서 보인(保人)에 보충한 경우에는 모두 오승포(五升布)에 길이는 35척짜리 2필로 할 것을 통행하는 법규로 정할 것이며, 사천(私賤)이 본주인에게 주는 신공 또한 이 법규와 같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 본주인이 더 징수할 경우 드러나는 대로 이를 징계하여 다스린다면 또한 고르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또 국전을 살펴보건대 군사들에게 군보(軍保)를 지급하는 것에 차등이 있었습니다. 두 보인(保人)이 매달 면포 반 필 씩을 내게 되어 있는데, 외람되이 더 징수할 경우에는 논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역(人役)을 똑같게 하는 법규를 만든다면 모두에게 거두어 들인 면포를 모조리 군자 별창에 저장해 두어야 하고, 지금 행하고 있는 어영청(御營廳)의 법규처럼 속오(束伍)로서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는 본 고을에서 초식(稍食)을 지급하고 오위(五衛)와 양민(良民)으로서 입번한 자와 각사의 노(奴) 가운데 입번한 사람들에게는 초식을 별창에서 나누어 지급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온 나라에서 베를 내는 백성들의 고헐(苦歇)에 차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5. 양전(量田)에 관한 것입니다. 20년에 한 번씩 다시 양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조종(祖宗)의 법입니다. 지금 삼남(三南)에서 이미 행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에서 갑술년052) 까지는 이미 20년이 넘었습니다. 따라서 시내와 골짜기가 변하여 전지의 경계(經界)가 서로 어긋난 탓으로 서원(書員)이 농간을 부리는 일이 많은데다가 수령들은 은결(隱結)을 두는 폐단이 있으니 지금 수거(修擧)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육도(六道)가 제일 급한데 경기는 토질은 척박한데도 부세가 무거우니, 지금 측량하더라도 그 등제(等第)를 모두 중하(中下)로 따르게 한다면 부역(賦役)이 고르게 되어 사람들이 원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6. 용관(冗官)을 도태시키는 데 관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우리 나라의 크기를 중국과 견주어 보면 중국의 한 도(道)만도 못한데, 중국의 관직과 아문은 우리 나라의 배도 되지 않으니, 우리 나라의 관사(官司)가 너무 번잡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간에 정신(廷臣)들의 건의에 따라 줄이거나 병합시킨 것이 많았습니다만 용관은 아직도 많습니다. 추종(騶從)들이 많은데 이는 더욱 감소시켜 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또 국전을 살펴보건대 각조·각사의 서리(胥吏)들은 모두 그 숫자가 있는 것이니, 지금 계책을 세운다면 국전에 의거하여 다시 절감시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서리들은 한 관사에 오래 예속시켜 두지 말고 여러 관사를 돌게 만들어 1년 만에 교체하게 한다면 이익을 노리고 멋대로 농간을 부리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궐내에서 부리는 것에도 정수(定數)가 있으며 각도·각읍의 하리(下吏)도 정수가 있고 관노비도 정수가 있으며 공장(工匠)도 정수가 있는 것이니, 남는 하리들은 오위에 송부하고 관노들은 속오를 만들며 여기에 참여되지 않는 자들은 법대로 면포를 거둔다면, 병식(兵食)의 수요에 큰 도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7. 구임(久任)시키는 데 관한 것입니다. 모든 관원은 반드시 사람을 잘 가려서 구임시킨 연후에야 공효를 책임지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이이(李珥)가 선묘(宣廟)께 진달하기를 ‘한때의 인재들을 다 거두어 들이되 신구(新舊)를 논하지 말고 귀천을 따지지 말고 관직에 맞는 인재를 가리소서. 그리하여 덕망과 도량이 있고 도리를 아는 사람은 묘당(廟堂)에 있게 하고, 경술(經術)에 능통하여 임금을 잘 보도할 수 있는 사람은 경악(經幄)에 있게 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공정하고 현명한 안목을 지닌 사람은 전형(銓衡)을 맡기고, 재화를 증식시키는 방도에 능통한 사람은 탁지(度支)를 맡기고, 예법을 강론하여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은 종백(宗伯)053) 을 제수하고, 병무를 잘 알고 원대한 모유(謨猷)를 지닌 사람은 사마(司馬)054) 를 제수하고, 마음이 충신(忠信)하고 명쾌히 결단할 줄 아는 사람은 형옥(刑獄)을 다스리게 하고, 일을 주간(主幹)하여 폐단이 없게 하는 사람은 공역(工役)을 주관하게 하고, 행신(行身)을 바르게 하여 상대를 규검하는 사람은 풍헌(風憲)의 중임을 주고, 몸가짐을 정직하게 하고 말을 끝까지 다하는 사람은 간쟁하는 직책을 제수하고, 풍도가 아래 관리들을 압도할 수 있는 사람은 방백(方伯)의 직임을 맡기고, 청렴함이 이민(吏民)을 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임금의 걱정을 나누어 백성을 친히 대하는 수령의 직임을 맡기소서. 내외 대소의 관직에 모두 적임자를 가려서 전일하게 맡겨 오래가게 하여 공적을 이룰 것을 기약하되 세월을 한정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그 사이에 재주가 직위보다 뛰어난 자는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시키고, 재주가 그 지위에 걸맞지 않는 사람은 좌천시키고, 재주가 직위와 걸맞는 자는 일생 동안 한 직책을 맡겨도 됩니다. 질병이 있더라도 경솔히 체직시키지 않는 것을 반드시 한(漢) 나라 때의 법과 같게 하여 만 3개월이 되어야 면직(免職)시키게 하소서. 간혹 한 관직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병을 핑계대고 사피(辭避)하는 자가 있으면 대간이 드러나는 대로 논박하여 체직시킨 다음 다시는 관직을 제수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 말이 오늘날에 행해지면 관직은 비는 일이 없게 되고 일은 잘 거행될 것입니다.
지금 모두 적격자를 얻어서 일시에 관원에 충당시킬 수는 없겠습니다만, 오늘 그 가운데 더욱 뛰어난 사람 하나를 발탁하고 내일 더욱 뛰어난 사람 하나를 발탁하여 나간다면, 인재를 다른 세대(世代)에서 빌어오지 않아도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8. 사치한 풍습을 금하는 데 관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제일의 급선무입니다. 위로 궁가(宮家)에서부터 아래로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사치 풍조가 끝이 없는데, 온갖 폐단의 발생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되는 것입니다. 계속 이렇게 한다면 몇 년이 못 가서 나라가 나라꼴을 이룰 수 없게 될 것인데, 말하자면 혀가 닳겠고 생각하면 마음이 오싹해집니다.
신이 삼가 《오례의(五禮儀)》의 세자(世子)가 빈(嬪)에게 폐백으로 보내는 단자를 살펴보건대, 왕자(王子)는 납폐(納幣)에 초단(綃緞)을 쓰고 제군(諸君)은 주단(紬緞)이나 면포(綿布)를 쓰게 되어 있으며, 대군(大君)의 혼례에는 의복은 면주(綿紬)·목면(木綿)을 쓰고 부인(夫人)의 성식(盛飾)에는 면주·목면을 쓰게 되어 있으며, 왕녀(王女)가 하가(下嫁)할 때는 역시 성식에 면주·목면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종친(宗親)이나 문무관 1품 이하의 혼례에 쓰는 폐백은 모두 면주·목면을 쓰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 국전을 살펴보건대 당하관 이하는 혼인할 때 사라(紗羅)·능단(綾緞)·계담(罽毯)을 쓴 경우에는 모두 장 팔십(杖八十)에 처한다고 되어 있는데 기타도 이와 비슷했으니, 조종(祖宗)께서 예법을 만든 뜻이 어찌 정미롭고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으며 백성을 가르치고 풍속을 교화시킨 방법이 어찌 엄하고도 올바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세도(世道)가 날로 비하되어 인심이 날로 사치에 빠지고 있는데,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절실하게 금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위를 정리(整理)하지 못한 채 전적으로 여염(閭閻)의 백성들만 책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이를 슬프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법령은 엄하지 않으면 시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염의 백성들도 위에서 반드시 금한다는 뜻을 보인 연후에야 사람들이 피할 줄 알아서 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헌부의 1원(員)에게 사치를 금하는 한 가지 일을 전담시켜 오래도록 교체하지 말 것이며,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거처하는 방(坊)의 유사(有司)에 벌포(罰布)를 내게 하고 외방도 그렇게 하고 법금을 범한 것이 크면 전가(全家)를 북변(北邊)으로 옮기게 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명령하면 행하고 금하면 중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 아홉 조항은 구폐(舊弊)를 개혁하고 옛법을 회복시키는 일이고 변통시키는 기요(機要)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겨나는 이유를 의인(醫人)이 증세를 살펴 약을 투여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살피지 못한다면, 동쪽에 견제당하고 서쪽에 간섭받으며 저것은 잘되지만 이것은 잘못되어 회통(會通)을 관찰하여 전례(典禮)를 행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먼저 경제사(經濟司)를 세워 이이(李珥)가 논한 것처럼 하되, 먼저 선조(先朝)의 대소 신료들이 소장과 차자로 아뢴 것 및 근래 조야에서 전지(傳旨)에 응하여 진언한 것들을 모아 합쳐 상세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육조·각사의 관원과 외방의 감사·병사로부터 수령·첨사·만호·찰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형지안(形止案)055) 을 만들게 하여, 관리·관노비·둔전(屯田)이 얼마이고 여러 궁가와 각사의 전답과 노비가 얼마이고 각종 군병이 얼마이고 관사(官舍)가 몇 칸이고 관곡(官穀)이 얼마이고 그 경내의 진산(鎭山)·진도(津渡)·점사(店舍)·사찰(寺刹) 등을 일일이 기록하게 하며, 또 자신의 소견에 따라 각기 폐단을 진달하게 하여 대신이 이를 총체적으로 관리하고 낭청이 보좌하여 폐습을 모두 고친 다음 옛법에 따라 재정(裁定)을 자품(咨稟)하여 일대(一代)의 법규를 만든다면, 폐단이 없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이유태(李惟泰)는 본디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나이에 자발적으로 스승을 찾고 벗을 취하였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자질과 학문은 양송(兩宋)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한때의 명성이 또한 성대하였다.
효묘(孝廟) 때를 당하여 차례로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은우(恩遇)가 함께 융중하였다. 위에 올리기 위해 대소(大疏)를 지어 경제책(經濟策)을 극진히 논하였으나 미처 올리지 못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올렸다. 상도 가상히 여겨 포장(褒奬)하고 모두 행할 만한 것이라고 하면서 묘당에 계하하였으나 끝내 채용한 실상은 없었다.
이제 그 소장을 살펴보건대 군덕(君德)과 치도(治道)에 대해 논하면서 경계할 것을 진달하고 폐단을 말한 것이 만천언이나 되는데, 간간이 정밀하고 합당하게 하는 것에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또한 쓸 만한 말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기록한 것은 단지 상이 초출하라고 명한 조건(條件)만을 취하여 그 대략을 적은 것이다.
자전(慈殿)의 환후가 평복(平復)되었다는 것으로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귀양가 있던 어의(御醫) 유후성(柳後聖)·조징규(趙徵奎)를 모두 방송(放送)시키게 했는데, 이는 의약(議藥)한 것이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찬성 송시열이 스스로 죄를 진 신하라고 일컬으면서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일찍이 의례(議禮)를 잘못한 탓으로 물의(物議)가 매우 시끄러웠으며 심지어는 소장을 진달하여 변석(辨析)하면서 신의 죄를 논하기까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원소(原疏)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조어(措語)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략 대체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살펴보건대 신이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기를 도모한 것처럼 했습니다.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죄명을 받았으니 즉시 몸을 멸하고 종족(宗族)을 없애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감히 얼굴을 쳐들고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감히 집에서 거처하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감히 무릅쓰고 국문(國門)으로 들어가 사패(司敗)056) 에게 몸을 맡길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당혹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나아와 길가에 엎드려 삼가 조정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가 먼저 신을 삭직(削職)시킨 다음 율(律)에 의거하여 다스려 주소서."
하니, 상이 한 소열(漢昭烈)과 공명(孔明)처럼 군신 사이에 뜻이 잘 맞아야 한다는 것을 인용하여 답하고, 또 이르기를,
"군신 사이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것이다. 경이 나의 마음을 안다면 어찌하여 이런 지나친 일을 행하여 나로 하여금 편히 잠을 잘 수 없게 한단 말인가. 일기가 아직은 심히 덥지 않으니 경이 출발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경이 오지 않는다면 국사가 어떻게 되겠는가. 경의 거취는 국가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 멀리하려는 마음을 속히 돌리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다."
하였다. 【소장이 들어간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비답을 내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71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註 056] 사패(司敗) : 법관(法官).
5월 11일 을축
수릉관(守陵官) 평운군(平雲君) 이구(李俅)와 시릉관(侍陵官) 오이공(吳以恭)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경모전(敬慕殿)의 종실(宗室) 이하에게 말과 물품을 차등있게 내렸는데, 연제(練祭) 뒤에 으레 내리는 은전이었다. 제주관(題主官) 오준(吳竣)에게도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또 상의 체후(體候)가 평복(平復)되었다는 것으로 약방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는데, 제조 윤강(尹絳)과 부제조 조형(趙珩) 및 의관(醫官) 2인에게는 아울러 가자하였다.
이수인(李壽仁)을 사간으로, 최관(崔寬)을 정언으로, 윤집(尹鏶)을 대사성으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조복양(趙復陽)을 예조 참의로, 이경석(李景奭)을 영돈녕부사로 삼았다. 고(故) 영의정 김육(金堉)에게 문정(文貞)의 시호(謚號)를, 좌의정 조익(趙翼)에게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예조가 상의 체후가 평복되었다는 것으로 고묘(告廟)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권시(權諰)를 파직시키라는 일을 연계(連啓)하고, 또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정상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전에 없던 경사입니다. 따라서 고묘(告廟)하는 일은 본디 전례가 있던 것이니, 특별히 해조로 하여금 속히 고묘례(告廟禮)를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유후성(柳後聖)·조징규(趙徵奎) 등의 죄악은 신인(神人)이 다 같이 통분스럽게 여기는 것으로서 온 나라의 여정(輿情)이 모두들 죽여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끝내 형장(刑章)에서 벗어났을 뿐만이 아니라 편배(編配)되었다는 이름은 있어도 그 실상이 없는 채 지금껏 도성에서 버젓이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공의(公議)가 불만스럽게 여겨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평상적인 사람처럼 노고에 보답하는 은전을 내리는 것으로 대우할 수 있겠습니까. 후성(後聖) 등을 석방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고 권시만 파직시켰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행 부사직 윤문거(尹文擧)가 상소하여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하고, 또 새로 승급시켜 준 자급(資級)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였다.
"내가 경을 핍박하지 않는데 아주 떠날 계획을 할 필요가 뭐 있는가. 사퇴하지 말고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의 미흡한 점을 보필하라."
전력 부위(展力副尉) 조실원(曺實遠)이 상소하고 선묘(宣廟)의 어필(御筆)·어화(御畵)와 선왕(先王)의 어찰(御札)을 진달하니, 상이 6품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헌관이 쟁집하면서 명을 환수하라고 누차 아뢰자 윤허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윤선도(尹善道)는 본디 흉험(凶險)한 사람으로 문변(文辯)이 조금 있으나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것 때문에 물론(物論)에 버림을 받았으므로 원독(怨毒)을 품고 은밀히 틈을 노려 기필코 조정에 일을 내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위태로운 말을 날조하여 선량(善良)들을 무함하여 해치려 하고 있으니 그 조의(造意)가 매우 가혹하여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성상께서 위에 계시어 즉시 유찬(流竄)시켰으므로 사림(士林)이 이를 힘입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급된 독염(毒焰)의 여파로 지금도 유현(儒賢)들이 흩어져 나아가고 사설(邪說)이 메아리처럼 따라붙고 있으니, 그 화기(禍機)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권시에 이르러서는 양조(兩朝)에서 예우하고 총애하여 발탁한 신하인데도 이런 잘못된 이야기를 제기하면서 스스로 참적(讒賊)을 비호한다는 이름을 달갑게 여기고 있으니, 아,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선도를 논함에 있어 처음에는 참저(讒詆)·모질(媢嫉)이라고 했다가 곧 이어 감히 허여한다고 하였으며, 송시열을 논함에 있어 처음에는 충실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천명(天命)을 영구히 이어가게 할 바탕을 다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가 다시 말을 트집잡아 선비를 살해했다는 것으로 지목했습니다. 한 사람의 말인데도 마치 두 입에서 나온 것 같으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선도를 위하여 기치(旗幟)를 세우는 자는 모두 논례(論禮)를 빙자하여 종통설(宗統說)을 가지고 일세(一世)의 사람들을 공갈 협박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말을 할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만, 신들은 여기에 대해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것은 매우 드문 것으로 어쩌다 있는 것입니다. 오직 사세(四世) 동안 적장(嫡長)인 경우에만 삼년복을 입는 것입니다. 또 차적(次嫡)으로서 승중(承重)한 경우도 장자(長子)와 다름이 없습니다만, 그 형이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거나 연고가 있어 폐기(廢棄)된 경우가 아니면, 다시 거듭 복을 입는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 승중하였는데도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는 논설이 매우 많습니다. 만일 적자에서 적자로 서로 전승하여 부모가 아들을 위하여 반드시 삼년복을 입게 되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그 종통이 전해진 것으로 여긴다면, 천하 고금에 가국(家國)의 종통이 끊기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어찌 복(服)을 강쇄(降殺)했다고 해서 종통이 둘이고 통서가 끊겼다고 하는 혐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왕(帝王)의 제도는 대대로 연혁이 있는 것인데, 중국과 아조(我朝)의 경우 당초부터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다는 예문이 없었으며, 또 국통(國統)이 이 때문에 단절될까 의심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말을 하는 자들은 단지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後嗣)로 삼는다는 예문만 보고서 제 2적자(嫡子)가 서자(庶子)가 된다는 뜻은 버려두고서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는다는 서(庶)자를 첩서(妾庶)의 서자로 귀결시켜 단정함으로써 성청(聖聽)의 노여움을 감발시키고 일세를 미혹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미 이러하니, 그 논의가 어떠하겠습니까.
사설(邪說)을 공척하는데도 정사(正士)가 이르지 않고 어진이를 기뻐하는 마음이 깊은데도 어진이를 등용하는 공효가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올바른 도리를 믿지 않고 나라에는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앉아서 기회를 잃고 있으니, 결국 쇠란(衰亂)으로 함께 귀결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천고의 지극한 한스러움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성상께서는 더욱 사정(邪正)의 분별을 밝혀 길이 참적(讒賊)의 입을 막고 급급히 유현(儒賢)들을 돌아오게 하여 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렸다.
5월 12일 병인
헌부가 아뢰기를,
"의관(醫官) 양제신(梁濟臣)을 약을 의논한 노고가 있다는 것으로 수령에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것이 어찌 처음 즉위하여 신중히 상을 내린다는 도리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그의 재능은 따져 보지도 않고 단지 한때의 방술(方術)이 능했다는 이유로 문득 자목(字牧)의 직임을 제수한다면 뒷날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13일 정묘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고묘례(告廟禮)를 거행하는 것에 대해서 전에 이미 진달하였고 대간도 지금 또 누차 아뢰고 있는데 윤허하지 않으시므로 뭇 사람들이 민망하고 답답함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따를 만한 것이라면 당초에 어찌 따르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장령 오두인(吳斗寅)이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고 청하였으나, 상이 또한 따르지 않았다. 교리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모든 길흉사에 고묘(告廟)하는 것은 바로 조종조에서 이미 행하여 온 법규인데, 지금 와서 행한다고 하여 어찌 겸양하는 덕을 해치는 것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제 행했었는가."
하자, 만기가 아뢰기를,
"선묘조(宣廟朝) 때 행했었습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신이 사기(私記)를 본 적이 있는데, 선묘조 때 고묘하고 나서 반사(頒赦)했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승지 남용익(南龍翼)도 계속해서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께서 미령(未寧)하셨다가 정상을 회복하였을 적에도 고묘례를 거행한 적이 없었는데, 어찌 유독 나의 몸에 이르러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간 이정기(李廷虁)가 소회를 진달하기를,
"호남 에 대동법(大同法)을 설행한 뒤 각 고을에서 사목(事目)을 준행하지 않아서 난잡한 일이 많이 있으니, 의당 신칙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면 무거운 율(律)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뒷날 어사(御史)가 염문(廉問)할 적에 현발(現發)되면 함부로 받아들인 수령은 장율(贓律)로 다스리고, 또한 해청(該廳) 해도(該道)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한 다음 처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돈의문(敦義門)이 시어소(時御所)와 매우 가까운데 인마(人馬)가 마구 답지하고 있으니, 그 문을 굳게 닫게 하소서. 그리고 칙사(勅使)를 맞이할 때만 잠시 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화 유수 유심이 아뢰기를,
"강도(江都)에서 아직 거두어 들이지 못한 조곡이 3백여 석(石)인데, 이는 모두 유망(流亡)하거나 절호(絶戶)된 것입니다. 탕척(蕩滌)시켜 줄 것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탕척하라. 그러나 이 뒤로는 이를 전례로 삼지 말라."
하였다. 만기가 아뢰기를,
"《중용(中庸)》 1건(件)을 선사(繕寫)하여 장진(粧進)하였으니, 【상에게 눈병이 있어서 경서(經書)와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의 책을 모두 옥당으로 하여금 글자 모양을 크게 써서 올리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개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재야의 유신(儒臣)이 이제 이미 물러가 버렸습니다. 부제학 유계(兪棨)는 문학(文學)이 모두 훌륭하니 입시(入侍)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규(常規)에는 부제학의 입시는 으레 상번(上番)으로서 진강(進講)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유계는 비국의 겸임(兼任)이 있고 또 질병이 많습니다. 따라서 상하번(上下番)은 전례에 의거하여 진강(進講)하게 하되 유계는 특별히 입시하게 하여 문의(文義)를 진달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듣건대 인조조 때 정경세(鄭經世)가 부제학으로서 상하번 이외에 특별히 입시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 전례에 의거하여 하게 하소서. 부제학에서 체직되더라도 그대로 입시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행 사직 윤문거(尹文擧)가 두 번째 소장을 올려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서울 에 머무르면서 나의 미흡한 점을 보필하여 주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전의 유지(有旨)에 따라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문거가 세 번째 소장을 올려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5일 기사
상이 직접 망전(望奠)을 행하였다.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이무(李堥)를 지평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승지로, 이시술(李時術)을 발탁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홍문관 부교리 김만기(金萬基) 등이 상차하여 유후성(柳後聖) 등을 석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논하고, 또 아뢰기를,
"정원은 직책상 왕명의 출납(出納)을 진실하게 해야 되는데, 지금 이 사리에 맞지 않는 명령을 일에 따라 복역(覆逆)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였다. 도승지 김수항(金壽恒) 등이 옥당의 논척(論斥)이 매우 준열했다는 것으로 소장을 진달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삼사(三司)의 논의가 비록 법을 집행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들로서의 지정(至情)을 가지고 말한다면 기쁘고 다행스런 마음 참으로 한량할 수 없는 것이니 아까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따라서 약을 의논한 공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옥당의 차자 내용에 대해 나는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 경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안심하고 직무를 수행토록 하라."
하였다.
5월 16일 경오
헌부가 박세성(朴世城)을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한 계사(啓辭)를 정지하였다.
경상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우윤(右尹) 권시의 소장을 보건대, 장학(張澩)·유배원(柳培元)의 원통하고 억울한 정상에 대해 극론하였습니다. 장학은 인동(仁同)의 토호(土豪)로 본래 사납고 사특하기로 일컬어진 자로서 대론(臺論)을 만들어 내어 토주(土主)를 죄에 얽어 넣었는데, 그 조어(措語) 중에 흉참(凶慘)스러웠던 것이 모두 장학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기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원(培元)의 무리가 따라서 증익(增益)시켜 낭자하게 전파시켰습니다. 유정(兪椗)이 무인(武人)이기는 하지만 대강 사리를 아는 사람이니 침해당하고 비방당하는 큰 곤욕을 받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인수(印綏)를 버리고 몸을 빼어 달아났겠습니까.
이는 실로 도내(道內)에서는 전에 없던 큰 변고인데 어떻게 원래 실상(實狀)이 없었다고 핑계대고 버려둔 채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득이 추관(推官)을 정하여 추변(推辨)할 적에, 추관이 신이 써서 보낸 글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함부로 형신을 가하였으니, 진실로 그 죄를 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옥사(獄事)가 한창 진행중인데 먼저 추관을 죄준다면 교활한 토호들의 기세가 이를 인하여 더욱 떨쳐 일어날 것이고 그에 따라 송원(訟冤)하는 사람이 떼 지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장차 그 분요스러움을 견뎌낼 수 없겠기에 우선 결말을 기다려 준의(準擬)하여 처치하려 한 것인데 이는 신의 잘못입니다.
왕옥(王獄)을 수고롭게 하고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했다는 데 이르러서는, 장학이 일찍이 관명(官名)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감히 멋대로 결단할 수 없어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장학과 배원이 함께 죄수가 되어 있습니다만 그 죄목(罪目)은 본디 서로 같지 않습니다. 장학이 죄가 없다면 배원이 죄가 있는 것이고 배원이 죄가 없다면 장학이 죄가 있어야 하는데, 범벅이 되어 두 사람 모두 죄가 없다고 하니, 의도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권시(權諰)는 한때의 유현으로서 논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잘못이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9일 계유
비변사가 계청하기를,
"각부(各部)에 신칙하여 성중(城中)의 염병인(染病人)을 두루 조사하여 활인서(活人署)로 보내게 하고, 약물은 의사(醫司)로 하여금 찾아서 지급하게 하소서. 양식이 떨어진 사람은 상평청으로 하여금 제급(題給)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0일 갑술
사헌부가 아뢰기를,
"거창(居昌) 사람 김경신(金景信)이 금산군(金山郡)에서 피살되었는데, 그의 아내가 남편을 위해 송원(訟冤)하였으므로 본부와 해조가 여섯 번이나 본도에 행문(行文)하여, 자세히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였으나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본 고을의 군수 원궤(元簋)가 막고 버텨 빚어진 소치에 불과하니 잡아다가 국문하고, 감사는 추고(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두 번째 아뢰니, 따랐다.
고사(故事)에 실록청(實錄廳)의 한림(翰林) 1원(員)은 날마다 사진(仕進)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한림이 단지 2인뿐이어서 이들이 상하번(上下番)이 되었다. 전 한림 유명윤(兪命胤)은 아버지 유계(兪棨)가 바야흐로 부제학으로서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상피(相避)로 인해 체직된 뒤 다시 들어가지 못하였다. 총재관(摠裁官)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단지 유계의 수찬관만 감하고 경악(經幄)의 장관에서 체직시키지 않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도가 될 수 있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변통시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을미년057) 사이에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지춘추(知春秋) 이후원(李厚源)과 상피되어 수찬관을 감하(減下)했었으니, 이것이 곧 근례(近例)입니다."
하고, 이조는 아뢰기를,
"김익희의 일이 이미 근례가 되어 있으니, 부제학 유계의 수찬관은 의당 이에 의거해서 감하하고 실록 겸춘추(實錄兼春秋)로 계하(啓下)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유계가 처음에 그의 아들 명윤이 한림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부제학에서 체차될 적에, 경석이 삼강(三綱)의 윤리에 어긋난다는 것으로 쟁론했었는데, 지금은 명윤의 일 때문에 유계의 겸대춘추(兼帶春秋)를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실직과 겸직은 다를 것이 없는데 전후의 조처가 달랐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부제학 유계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듣건대 연신(筵臣)이 외람되이 신의 성명(姓名)을 거론하여 실정에 지나치게 일컬으면서 잘못 천총(天聰)에 진달한 탓으로 경연(經筵)을 여는 날 특별히 입시하게 하라는 명이 있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신이 변변치 못하나 이미 그 직책에 몸담고 있으니 직명(職名)에 의거하여 입시하는 것은 그래도 부끄러움을 머금고 억지로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법규 이외에 특별히 입시케 하여 유현(儒賢)을 인접(引接)하는 예(例)와 같게 한다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랄 것은 물론 사체를 손상시키는 것도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감히 죽어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5월 21일 을해
윤집(尹鏶)·조윤석(趙胤錫)을 승지로, 이유태(李惟泰)를 공조 참의로, 이후산(李後山)을 강원 감사로, 유명윤(兪命胤)을 대교로, 조복양(趙復陽)을 대사성으로, 목겸선(睦兼善)을 부응교로, 임한백(任翰伯)을 수찬으로, 곽지흠(郭之欽)을 장령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집의로, 홍명하(洪命夏)·채유후(蔡𥙿後)·이일상(李一相) 【이상은 모두 도청(都廳)의 당상(堂上)임.】 ·허적(許積)·김남중(金南重)·윤순지(尹順之)·이응시(李應蓍)·오정일(吳挺一)·정지화(鄭知和)·김수항(金壽恒)·남용익(南龍翼)·오정위(吳挺緯)·조복양(趙復陽)·유계(兪棨)·이은상(李殷相)을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으로 삼았다.
5월 22일 병자
장령 오두인(吳斗寅)·곽지흠(郭之欽), 지평 이무(李堥)·경최(慶㝡), 집의 박세모(朴世模), 정언 홍주삼(洪柱三)이 실록 겸춘추로서 즉시 숙배(肅拜)하지 않아 추고받았다는 것으로 모두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다.
5월 23일 정축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홉 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이런 어려운 때를 당하여 영상이 병으로 인입(引入)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우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이 편치 못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자, 모두들 아뢰기를,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유태(李惟泰)의 소장에 대해서는 상의하여 조처할 일이 많은데 역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에서 북도(北道)로 옮겨다가 진구(賑救)할 곡식을 이제야 비로소 들여보냈습니다. 그러나 배로 천리 길을 운반해야 하는데 굶주린 백성이 먹여주기를 기다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매우 우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이 뒤로는 다시 옮길 수 있는 곡식이 없다. 근일의 한재(旱災)가 봄 가뭄보다 더 심하니, 금년에 또 흉년이 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 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장학 등 3인을 엄히 형문(刑問)할 것으로 하명하였습니다만, 이는 곧 의옥(疑獄)인데 곧바로 장하(杖下)에서 죽게 된다면 옥사를 삼간다는 의의에 매우 어긋나게 됩니다. 그리고 유학원(柳學元)은 단지 들은 것을 자기 형 배원(培元)에게 전한 것뿐이니 똑같이 형신(刑訊)을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학원을 먼저 조율(照律)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바깥 의논의 준열함과 완만함이 다른데, 어떤 사람들은 부박(浮薄)스러운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뒤폐단이 우려되니 자세히 추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명하가 또 아뢰기를,
"근래의 모든 일은 다들 청촉(請囑)을 우선으로 하고 있으니, 관절(關節)을 금하는 것을 엄히 신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는 아뢰기를,
"관절을 통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일일이 금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적으로는 반드시 형세(形勢)가 있는 자라야 관절을 할 수가 있는데, 지금 여기에 입시한 신하들이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부터 스스로 검칙한다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연소한 명관(名官)으로서 대각(臺閣)에 있는 사람이 이런 등등의 일을 저지르면 다시는 청직(淸職)에 통망(通望)하지 않는 것이 옛법인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관이 된 자가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근일 명관들이 얼굴도 모르는 수령에 대해 곧바로 관절(關節)을 통한다고 하니, 진실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윤강(尹絳)은 아뢰기를,
"고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은 평생 관절을 위한 서찰(書札)이 없었습니다."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항복은 스스로 이렇게 면려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현상(賢相)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근래에 고 상신 이시백(李時白)이 관절의 일 때문에 죄를 받았었는데, 그 뒤로는 평생토록 두번 다시 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고, 윤강은 아뢰기를,
"고 상신 김류(金瑬)가 전관(銓官)으로 있을 적에 시백(時白)이 이런 일을 저질렀는데, 마침 관절이 분분하다는 말이 연석(筵席)에서 발론되어 계속 추핵(推覈)하자 시백이 자수하여 죄를 받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사(各司)에 말을 하여 만일 관절을 하는 일이 있으면 그에 따라 즉시 적발하여 자세히 추궁해야 된다."
하였다. 이때 윤강이 평시 제조(平市提調)였으므로 또 여러 궁가(宮家)에서 강제로 사무(私貿)를 행하기 때문에 시민(市民)들이 감내할 수 없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발각되는 대로 법사(法司)에 보고하여 금지시키게 하라는 뜻으로 진계(陳啓)하였습니다만, 위에서 ‘무엇 때문에 이런 나약한 말을 하는가. 법부(法府)의 위엄을 빌릴 필요없이 적발되는 대로 나에게 고하면 내가 의당 무겁게 조처하겠다.’고 한 승전(承傳)을 받들었습니다. 그런 뒤로는 그 폐단이 상당히 종식되었습니다만, 명령이 오래되어 금하는 것이 완만해진 탓으로 다시 전의 습관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윤강이 잘못입니다. 궁가에서 억지로 강매하는 폐단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으면 당연히 이름을 지적하여 죄줄 것을 청해야 합니다. 어떻게 범연히 궁가들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윤강이 아뢰기를,
"일이 전에 있었던 것이어서 잘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때 이미 승전을 받들었으면 이에 의거하여 신명(申明)시켜 금억(禁抑)해야 한다."
하였다.
5월 24일 무인
상이 숙휘 공주(淑徽公主) 집의 역사(役事) 때문에 방(防)에 나아갈 군사 5백 명을 조발하여 2일 동안 부역(赴役)하게 하였다. 좌부승지 윤집(尹鏶)이 아뢰기를,
"방에 나아갈 군사를 사가(私家)의 일에 부역하게 하는 것은 이미 법례(法例)가 아닙니다. 더구나 한더위를 당하여 먼 곳으로 나아갈 군대에게 갑자기 과외(科外)의 토역(土役)을 책임지우게 되면 반드시 고통스러워 원망하는 일이 많게 될 것입니다. 앞서 연신(筵臣)·대신(臺臣) 가운데 이를 말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신이 해방(該房)에 있기 때문에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사(役事)할 데가 너무 많은데 5백 명을 2일 동안 부역하게 한 것만도 매우 짐작해서 한 것이다. 그러나 계사(啓辭)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1백 명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아, 지금이 어떤 때인가. 어렵고 걱정스러움이 극심하여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가고 있는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경의 재덕(才德)으로 서서 보기만 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경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첫째 이유이다. 호군(護軍) 이유태(李惟泰)가 선조(先朝) 때 진달하지 못했던 소장을 오늘날 올렸는데 그것을 보니 비감(悲感)이 더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시행할 만한 것과 쓸 만한 것이 많았으므로 내가 경과 의논하려고 했다. 소장이 올라온 지 이미 오래인데도 한 가지 일도 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경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둘째 이유이다. 기타 미세한 일에 대해서는 다 기록하기 어려우니, 나의 이런 뜻을 몸받아 지극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종부시(宗簿寺)가 아뢰기를,
"종실(宗室)은 외방에 거처할 수 없다고 법전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난번 호조에서 계품(啓稟)하여, 시골에 있는 자는 초출(抄出)하여 녹봉(祿俸)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폐습(弊習)을 개혁하려는 뜻에서 나온 조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한 사람도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또 듣건대 오랫동안 시골에 있으면서 또한 폐단을 끼치는 일이 많다고 하니, 종실들이 거처하고 있는 각 고을에 일일이 신칙시켜 올려보내게 하고, 끝내 올라오지 않는 자는 법에 의거하여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백년(姜栢年)을 예조 참의로, 이익(李翊)을 교리로, 성태구(成台耉)를 집의로, 이원정(李元禎)·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윤원거(尹元擧)·심재(沈梓)를 지평으로, 홍주삼(洪柱三)을 부수찬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정언으로 삼았다.
행 사직 윤문거(尹文擧)가 소장을 남겨놓고 돌아갔는데, 그 대략에,
"죽음을 무릅쓰고 봉장(封章)을 올린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습니다만, 성유(聖諭)가 부드럽고도 자상하여 전후로 간곡하였습니다. 중대한 명을 용렬하고 비루한 몸이 받는다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하지 못하겠기에 여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만, 하루를 머물면 다시 하루의 죄를 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세(理勢)가 극에 달하여 감히 다시 번독스럽게 하지 못하고 쇠잔한 몸을 이끌고 고향을 향하여 돌아가 죽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이 이미 내려갔으니 병이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조속히 올라와서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공조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여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내가 국사를 맡기려고 하고 있다. 아무리 노모(老母)가 있더라도 왕래하면서 서로 만나본다면 정리(情理)에 있어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다. 평안한 마음으로 사퇴하지 말고 조속히 나아와 직무를 수행하라."
영의정 정태화가 열 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태화가 다시 소장을 진달하여 사면(辭免)을 청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7일 신사
이 해에 각처의 유민(流民)들이 많이 도성에서 구걸 행각을 하였다. 상평청(常平廳)에서 3월 10일부터 5일 간격으로 간량(乾粮)을 지급하여 진구(賑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미 보리를 추수할 때가 되었으므로 드디어 진구를 정지하고 각각 15일 분의 양식을 지급하여 해산해 돌려보냈다.
금부(禁府)가 누이를 죽인 죄인 막립(莫立)을 추국(推鞫)하는 일 때문에 삼성 교좌(三省交坐)를 설행할 것을 청하였다. 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막립이 범한 것은 강상범(綱常犯)과는 차이가 있으니, 삼성 교좌의 예(禮)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영돈녕(領敦寧)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누이를 죽인 것은 형을 죽인 것과 똑같게 윤기(倫紀)의 큰 변고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형제가 서로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안옥(按獄)이 참고하여 증거로 삼을 만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우의정 원두표(元斗杓)는 아뢰기를,
"윤기의 변고가 중하기는 하지만 강상범과는 차이가 있으니, 본부(本府)에서 추국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금부로 하여금 전례를 조사해 내게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본부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건대, 일찍이 무자년058) 에 형을 죽인 죄인 김응철(金應哲)을 잡아다가 본부에서 전례에 의거하여 삼성 추국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습니다. 기타 윤기에 관계된 죄가 진실로 한둘이 아니었습니다만, 전부터 삼성이 안옥(按獄)한 것은 강상에 관계된 것으로 이는 곧 삼강 오상(三綱五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윤기의 죄를 범한 것은 오상에 들어가는 것 같으니, 윤기의 죄인을 삼성 추국하는 것은 잘못된 예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경석의 의논에 따르도록 명하였다.
막립은 정주(定州)에 살면서 도둑질을 했는데, 항상 자기의 누이가 어머니의 전지(田地)를 팔아서 자기에게 나누어 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누이의 원수인 해봉(海奉) 등과 함께 공모하여 나무 몽둥이로 누이 부부와 아들 딸 모두 8구(口)를 때려 죽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일이 발각되었는데, 능지 처사(凌遲處死)하였다.
강원도 강릉(江陵) 등지에 5월 7일부터 13일까지 퍼붓듯이 큰비가 내렸고 바람과 천둥이 함께 쳤다. 비가 내린 뒤에는 된서리가 잇따라 내려 초목(草木)이 모두 말라 죽었으며 목화(木花)와 서직(黍稷)도 모두 얼어서 손상되었다.
5월 28일 임오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남원 부사(南原府使) 홍주일(洪柱一)을 탄핵하기 위해 지평 심재(沈梓)에게 간통(簡通)하여 문의하니, 심재가 장관과 상회(相會)하기를 기다려 의논해서 조처하고 싶다는 것으로 답하였는데, 왕복한 것이 두서너 번이나 되었다. 이에 비경(飛卿)이 드디어 경시당하였다는 것으로 인피하였고 심재도 인피하였다.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가 처치하기를,
"주일(柱一)이 청로(淸路)에 저지당하였으나 이재(吏才)는 아깝습니다. 그리고 부임한 뒤에 논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논하는 방도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도리이기는 하지만, 동료가 간통(簡通)하였는데도 억지로 지체시키면서 기다리게 한 것도 모두 명백하지 못한 처사이니,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도승지 김수항(金壽恒)이 예조의 기우제(祈雨祭)에 관한 공사를 나아와 읽고 나서 인하여 아뢰기를,
"가뭄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전부터 이럴 때에는 간혹 친제(親祭)한 경우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성후(聖候)가 미령하시니 대신(大臣)을 보내어 대행(代行)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늘에 정성을 바쳐 재해를 구제하는 방도는 모두 극진히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의 병이 차도가 없어 직접 거행할 수가 없으니, 종묘·사직에 대신을 보내어 대행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들이 또 삭제(朔祭)도 대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당 병세를 보아가면서 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근일 밤의 시각이 매우 짧은데 밤이 깊어서 취침(就寢)하는 것은 눈병에 해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밤중이 되어서야 잠을 자는 것이 평소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늘 이렇게 해 왔다."
하였다. 우부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3경(更)에 공사(公事)가 내려오기도 하는데, 틀림없이 상께서 취침하지 않고 계실 때일 것입니다."
하고, 좌부승지 이은상(李殷相)은 아뢰기를,
"밤중이 되어서야 주무시는 부지런함은 실로 성덕(盛德)이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조섭(調攝)에 해가 된다면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수항은 아뢰기를,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에게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지금 본도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시열이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다시 보내게 하라고 하고, 좌참찬에게도 제급하도록 명하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 옥당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시열 등을 소환(召還)하라는 뜻으로 진달한 데 대해 위에서 특별한 하유가 있어야 합니다."
하고, 은상은 아뢰기를,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수서(手書)를 내려 시열을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눈병이 있어 직접 쓸 수가 없으니, 경들이 간절하게 말을 만들어 두 사람에게 함께 올라오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조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세 번째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 또 식물(食物)도 사양하니, 상이 답하였다.
"진달한 내용을 시행하려면 직책에 있은 뒤에야 서로 의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퇴하지 말고 속히 출사(出仕)하여 직무를 수행하라. 사양한 하찮은 음식물도 사양하지 말고 수령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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