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4권, 현종 1년 1660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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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갑인

약방 도제조(藥方都提調) 이경석(李景奭) 등이 문안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신들의 마음에 매우 불안스럽게 여기는 점이 있습니다. 윤후익(尹後益)이 입직(入直)한 것은 오로지 성후(聖候)가 미령하기 때문인데, 삼가 듣건대 지난밤 유문(留門)시키고 나아가게 명하였다고 하니, 신들이 약방에 몸담고 있으면서 감히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이 교합하여 만물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상하가 막히게 되면 군정(群情)이 답답해 하는 법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심기를 평이(平易)하게 지녀 중화(中和)의 덕을 힘써 닦으시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서 일월 같은 현명함을 밝히시면 함양(涵養)하고 조섭(調攝)하는 방도에 있어 겸하여 극진히 할 수 있고 아울러 잘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어제 약방에게 문안하지 말게 했는데 지금 어찌하여 문안하는가."
하였다. 경석 등이 다시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삼가 성비(聖批)를 받드니 더욱 걱정스럽고 초조한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성상께 바야흐로 환후(患候)가 있으신데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문안하지 않는다면 이는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만 있는 것이요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는 의(義)로 합쳐졌다고 하지만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정분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혹 노하여 엄히 책하더라도 아들이 어떻게 정성을 극진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성상께서 처음에 신들에 대해 무슨 노하신 것이 있었습니까. 단지 정원의 계사(啓辭)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으신 것입니다. 을(乙)에 대한 것을 갑(甲)에게 옮기는 것은 정당한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신들이 반복하여 생각하여 보아도 성상의 불평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어제 내린 엄지(嚴旨)를 환수하시고 속히 문안을 허락하여 입진(入診)한 다음 약을 진상하게 함으로써 신민(臣民)들의 기대를 위로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른바 을에 대한 것을 갑에게 옮겼다는 것에 관해서는 내가 그 뜻을 모르겠으니, 경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경석 등이 구전(口傳)으로 세 번째 아뢰기를,
"신들의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하여 하교가 이와 같으니 더욱 황송하고 민망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입진(入診)·진약(進藥)·탕세(湯洗) 등의 일에 대해 따라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들은 감히 문안을 중지할 수 없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인심이 아름답지 않아서 의원(醫員)에게 보이고 약을 진상하는 것이 모두 무익한 일이고 문안 또한 겉치레일 뿐이다. 이런 때문에 문안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던 것인데 도제조가 오래도록 나아가지 않고 있다고 하니, 겉치레일지라도 문안은 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석 등이 구전으로 네 번째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받드니 감격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단, 인심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하교에 대해서는 성의(聖意)의 소재를 모르겠습니다. 정원의 계사를 가지고 말한다면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인심이 아무리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군부(君父)의 질환을 누가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문안을 허락했으니 이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만 입진할 수 없다면 참으로 겉치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날이 이미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입진하게 하시고 또 약물의 진상도 허락하여 주신다면 다행스럽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도제조가 이처럼 누차 아뢰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엄한 비답을 받들고 나니 마음과 뼈속이 함께 떨려 지금까지도 안정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군신은 부자와 같은 것인데, 한때의 책망과 노여움 때문에 스스로 부모를 외면하고 감히 다시 진달하지 않는다면 효도와 공경을 극진히 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옥후가 미령하시자 대소 신료들 중에 걱정하면서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더구나 직책이 근밀한 자리에 있는 경우야 그 마음이 의당 또 어떠하겠습니까. 진달한 두 가지 일은 하나는 뒤폐단을 우려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일을 중히 여겨서인 것으로 모두 구구한 충애(忠愛)의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인하여 성상의 마음을 격하게 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교하신 내용은 참으로 정외(情外)에서 나온 것인데 또 의관을 내어보내고 문안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화평한 사기(辭氣)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우레 같은 위엄을 거두시고 뭇 신료에게 결단코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곡진히 살피시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시고 의관을 내보내고 문안하지 말게 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때 동부승지 이진(李𥘼)이 복제(服制)를 당하였는데도 출사(出仕)하여 윤집(尹鏶)과 함께 아뢰었다.

 

삼공(三公)이 차자를 올려 다시 엄지(嚴旨)를 환수하고 특별히 정원의 신하들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경들의 청이 누누이 더욱 간절하니, 내가 끝내 어떻게 억지로 어길 수 있겠는가. 의당 차자의 내용대로 하도록 하겠다."

 

집의 이연년(李延年)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정원이 소회를 진달한 것은 대개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갑자기 내린 엄한 분부에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에 온 정원을 거의 텅 비게 만들었습니다. 약방은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자리인데 심지어 의관들을 모두 파출(罷黜)시키고 제조들에게는 문안하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우레 같은 노여움이 밤이 지나고서도 풀리지 않은 채 갈수록 더욱 가중되고 있어 이를 보고 듣는 온 조정이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경상(景象)이란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화평한 마음으로 곰곰 따져보시고 이미 내리신 전지를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대신(大臣)에게 하유하였다."
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다시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생각하여 보소서. 어제 정원에 내린 하교가 과연 이것이 신하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겠으며 일찍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적이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성상께서 반드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이런 하교를 내려 황송하고 송구스러워 감히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이것이 어찌 성심으로 아랫사람을 접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이런 등등의 기교가 익숙해져서 자꾸 번져나감으로써 군신 상하의 성의(誠意)가 미덥지 못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이러고서도 지치(至治)를 이루고 교화를 완성시킨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대저 한번의 과오는 대현(大賢) 이하로는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허물을 능동적으로 고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면 허물이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그 덕이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허물임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이를 비호하면서 간하는 말을 저지시킴으로써 갈수록 더 가중되게 한다면 작은 허물이 곧 큰 착오를 이루게 되어 말 한마디가 끝내는 나라를 잃는 데 이르게 되는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의관에게 직임을 제수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승전을 아직 봉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감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참으로 그러했습니까. 일개 의관에게 수령을 제수하는 것이 이 얼마나 미세한 일입니까. 어떻게 이 때문에 경솔하게 성색(聲色)을 동하여 보고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십니까. 삼가 성상께서는 안으로 성찰을 더하여 분명한 교지를 내려 성의(聖意)의 소재를 환히 보이신 다음 내리신 엄지(嚴旨)를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곽지흠(郭之欽)이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였는데, 헌신(憲臣)이 진달한 내용과 같았다.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안진(安縝)이 월과(月課)를 짓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7월 2일 을묘

상이 족부(足部)에 산침(散鍼)을 맞았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경연직에 있다는 것으로 소장을 올려 아뢰기를,
"정원의 신하들에게는 다른 뜻이 없었으니 쾌히 너그럽게 용서하는 뜻을 보여 특별히 불러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대신에 대한 비답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영중추 정유성(鄭維城) 또한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화평스런 하교를 내리시어 대죄하고 있는 승지들을 소환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삼공의 청을 허락한 바 있다."
하였다.

 

좌부승지 윤집(尹鏶), 동부승지 이진(李𥘼)이 아뢰기를,
"본원(本院)의 동료들이 궐문 밖에서 석고대죄하고 있으면서 나갈 수도 물러갈 수도 없는 처지에 있은 지가 이미 사흘에 이르렀는데도 성상께서는 관대히 조처하는 뜻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채 단지 입직(入直)만 하게 하였습니다. 본원의 사무는 한때도 잠시나마 비울 수 없는 것이니 궐문 밖에서 대죄하고 있는 신하들을 패초(牌招)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김수항(金壽恒) 등이 패초하였는데도 나오지 않으니, 상이 이르기를,
"내일 아침 다시 패초하게 하라."
하였다.

 

도승지 김수항(金壽恒), 좌승지 오정위(吳挺緯), 우승지 남용익(南龍翼), 우부승지 조윤석(趙胤錫) 등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들은 근밀한 자리에 있으면서 단지 일에 따라 끝까지 극진하게 아룀으로써 우리 임금을 허물이 없는 경지로 올려놓으려 했었는데 오늘날 갑자기 차마 들을 수 없는 엄한 분부를 받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들은 혼백이 놀라고 털이 곤두서서 곧바로 죽고 싶었으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궐하에서 석고대죄하면서 바야흐로 부월(鈇鉞)의 주책(誅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상의 도량이 하늘처럼 커서 현륙(顯戮)을 가하지 않고 또 뜻밖에 패초를 내리셨습니다. 신들은 황송하고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렸으니 즉시 공손하게 나아가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만 죄명을 돌아봄에 만번 죽는 형벌도 오히려 가벼운 것인데 어떻게 감히 다시 얼굴을 들고 뻔뻔스럽게 무릅쓰고 지척의 자리로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속히 삭직을 명하시고 이어 신들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다음날 수항 등이 다시 패초를 받들었으나 또 다시 소장을 진달하여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유시했으니 사퇴하지 말고 조속히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7월 3일 병진

이은상(李殷相)을 병조 참의로, 정박(鄭樸)을 정언으로, 이민서(李敏敍)를 부교리로 삼았다.

 

사간 곽지흠 등이 아뢰기를,
"일찍이 흥정당(興政堂)으로 옮겨 거처할 내용으로 아뢰어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지금 듣건대 아직도 옮겨 거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근래의 더위는 전에 견주어 더욱 혹독한데 엄려(嚴廬)가 협착하여 조섭에 방해가 있으며 제조(提調)를 입시하지 못하게 하신 것도 또한 여기에 연유된 것이니, 즉시 흥정당으로 옮기시어 조섭하기에 편케 하소서. 이어 약방 제조로 하여금 진찰하거나 침을 맞을 때 입참(入參)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허락하고 난 뒤 그 실당(室堂)이 역시 현재 있는 실당만 못하였기 때문에 옮겨 거처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전의현(全義縣) 강춘립(姜春立)의 집 뒷산이 무너져 춘립과 처자 3인이 압사했는데, 도신이 이를 보고하였다.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비국 부제조 유계(兪棨)가 상의 명을 받들어 오가작통(五家作統)·호패(號牌)·향약(鄕約) 등 세 건의 일에 대한 편리 여부를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에게 문의하였다. 경석이 차자를 올려 답하기를,
"옛날 태종조(太宗朝) 때 이미 호패를 만들었었는데 3년 만에 도로 중지했고 인조조(仁祖朝) 때 또 호패를 시행했었으나 정묘 호란 때문에 파기했습니다. 수년 동안의 주획(籌劃)을 허비하고 다소의 인명(人命)을 죽여가면서 완성시켜 놓은 다음 도로 파기했으므로 의논하는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가령 그때 파기하지 않았더라도 어떻게 장구히 갔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법령이 가혹하고 엄하기로는 난폭한 진(秦)나라보다 더한 예가 없었습니다만 창대를 잡고 한번 외치자 해내(海內)가 메아리처럼 호응하였습니다. 일을 옛법에 따르지 않으면 의지하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오가작통의 경우는 곧 삼대(三代)의 유제(遺制)로서 성조(聖祖)들께서 행하였었고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단지 큰 난리를 겪은 뒤에 다시 수명(修明)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이유태(李惟泰)의 말은 경전(經傳)의 전거를 고증한 것이니 채택하여 행해도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신은 기축년065)  에 외람되이 수상(首相)의 자리를 더럽혔었는데 오가작통은 시행할 만하다는 말을 가지고 비국에서 의논했었습니다만 당시의 의논 중 소요가 일 것을 우려하는 이도 있었기 때문에 신이 감히 강요하지 못했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오가작통이 호패만 못하다 하는데, 선왕(先王)의 정사를 닦지 않고 유자(儒者)의 말을 행하지 않으면서 위엄으로 제압하는 혹독한 법을 행한다면 깊고도 장구함을 생각하는 데 흠이 있지 않겠습니까.
향약 같은 경우는 본디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상직(相職)에 있을 적에 이 법의 시행에 대해 의논했었는데, 한결같이 여씨(呂氏)의 향약을 따를 경우에는 혹 지금에 합당하지 않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대강(大綱)만을 뽑아서 먼저 경계하여 고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형에게 공경하지 않는 자와 젊은 사람이 어른을 무시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무시하는 자 및 효도하고 공경하는 행실이 있는 자는 경외(京外)로 하여금 규찰하고 천거하게 한다.’ 했습니다만, 비루한 습속에 젖은 무식한 무리들은 하찮게 여길 뿐만이 아니라 또 따라서 비웃기까지 했으므로 잘 봉행하는 사람이 극히 적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법을 봉행할 줄 아는 사람은 무리(武吏)라고 하더라도 또한 힘써 행했습니다. 신이 서새(西塞)에 유배되어 있을 적에 들은 말에 의하면 정주(定州)에 불효한 자가 있었는데 법령이 내려졌다는 말을 듣고서는 자기의 어미를 맞이하여 봉양하였으며, 변방 고을의 어린 아이들도 왕왕 효제(孝悌)의 도리를 깨우쳤다고 했습니다. 또한 서울 시전(市廛)에 화목하지 못한 형제가 있었는데 법령을 듣고서는 조심할 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종실(宗室) 공성령(恭城令)의 아들이 불효 막심했는데 그 동리의 사람들이 감히 밝혀 말하지 못하고 있던 중 규찰하는 법이 내려졌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고발하여 복법(伏法)되었다고 합니다. 장구하게 시행한다면 크게 일변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가르치지 않아서 스스로 방자하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신이 직위를 떠남에 이르러서 이 법이 드디어 해이하게 되었고 월삭(月朔)의 문부(文簿)도 헛된 겉치레가 되었을 뿐이니 진실로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행하려고 한다면 단지 상께서 학문에 뜻을 두고 성심에 한결같이 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인데, 이 마음으로 유사(有司)를 책려(策勵)한다면 풀 위에 바람이 부는 듯한 교화를 점차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제릉(齊陵)·후릉(厚陵)의 제사를 송도 유수(松都留守)가 직접 행하지 않았고 또한 헌관(獻官)도 택차(擇差)하지 않고 외람되이 금옥(金玉)의 자급(資級)을 얻은 송도의 백도(白徒)를 차송(差送)하였습니다. 지방관으로서 자기가 가려 하지도 않고 교생(校生)에게 대행시켰으니, 외람되고 잡스러워 불경스러움이 큽니다."
하고, 이어 청하기를,
"제릉과 후릉은 유수가 직접 행하게 하되 유고(有故)하면 품계가 높은 수령을 택차하게 하며, 방악(方岳)·해독(海瀆)의 제사는 감사가 모관(某官) 모(某)를 헌관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거행 즉시 계문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회계(回啓)하기를,
"뒷날 등대(登對)할 때 품정(稟定)하게 하고, 차자 말단의 일은 일체 차자의 내용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7월 4일 정사

상이 침을 맞았다.

 

우승지 남용익(南龍翼)에게 명하여 가서 전옥(典獄)을 검열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시키게 하였다.

 

사간 곽지흠(郭之欽) 등이 아뢰기를,
"옥체를 진찰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어찌 의관에게만 맡기고 약방 제조의 입시를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일의 모양이 너무 미안스럽습니다. 아무리 엄려(嚴廬)가 협착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제조 한 사람이 들어가 입시할 만한 자리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찰하고 침을 맞을 적에 제조를 입시시킬 것을 허락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조 참의 이경휘(李慶徽)가 정사(呈辭)하니, 첫 번째인데도 체직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이는 상의 노여움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7월 5일 무오

사간 곽지흠(郭之欽), 헌납 김만기(金萬基), 정언 여성제(呂聖齊)·정박(鄭樸)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건대 정자(程子)의 말에, 노여움은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사욕(私慾)을 극복해야만이 노여움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훌륭한 말입니다. 실로 마음을 다스리는 정문(頂門)의 일침(一針)인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움직여서 칠정(七情)이 되는 것이고 칠정이 치열하게 되면 그 본성을 해치게 되는 것이니, 그 가운데 어느 것인들 군자로서 의당 정밀히 살펴 힘써 다스려야 될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유(先儒)가 특별히 노여움[怒]이라는 한 글자를 끄집어 낸 것은 노여움이란 그 기(氣)가 사물에 감동되면 발하는 것이 천둥 벽력 같고 솟구치는 것이 산악 같아서 억제하여 누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학문의 공력을 가하지 않고 멋대로 발로되게 한다면 결국은 스스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노해서는 안 될 데에 대하여 한때의 격뇌(激惱) 때문에 사리의 시비를 살필 수 없게 된다면 어찌 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선유가 입언(立言)하여 훈계를 전함으로써 뒷사람을 가르친 이유입니다.
엊그제 전하께서 분노한 일이 있었는데 그 발로가 절도에 맞지 않은 점이 있었던 탓으로 뭇사람들이 놀라고 흉흉하여 기상(氣像)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물론 성상의 덕에 누가 됨을 면치 못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풍뢰(風雷)처럼 속히 고침을 힘입어 일월(日月)이 다시 회복됨을 모두 우러르게 되었으니, 대역(大易)의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것과 성탕(成湯)의 허물을 고침에 있어 인색하지 않았다는 것인들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건대 의리는 순일하게 하기가 어렵고 인심은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한때의 잘못은 깨우칠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통렬히 극복하여 다스림으로써 타파하여 없애지 않는다면 그 병근이 마음속에 잠복해 있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촉발되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발작하게 되는 법입니다. 더구나 성상의 마음이 중도에 어긋남은 매양 노(怒)자에 달려 있는데 첫 번째는 민광소(閔光熽)에게 발로되었고 두 번째는 박세성(朴世城)에게 발로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 벌써 세 번째입니다. 그렇다면 또한 어떻게 훗날 다시 오늘날과 같은 지나친 거조가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반드시 허물이 있은 다음에야 고친다면 이루 다 고칠 수 없는 점이 있어 결국은 길을 잃은 것이 너무 멀어서 돌이킬 수 없다는 흉(凶)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전관(銓官)의 사면(辭免)과 허체(許遞)의 경우는 진실로 예사(例事)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 번 정고(呈告)하자 대번에 체직을 명한 것은 상규(常規)와 다른 점이 있는데, 그런 일이 마침 이런 때에 나왔으므로 신들에게도 미안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제수하라는 승전(承傳)을 제때에 즉시 거행하지 못하는 일은 평상시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혹 어렵게 여기고 신중을 기하는 뜻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 사세로 인하여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는 일개 의관(醫官)을 수령에 제수하지 않은 것이니 본디 작은 일인데, 성상께서는 아직도 다 풀지 못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는 계속 의리를 가슴속에 채워서 발로되기 전에는 함양이 깊게 하고 발로된 뒤에는 성찰을 더욱 정밀하게 하여, 사의(私意)·기필(期必)·고집(固執)·사기(私己) 때문에 동요되어 본성을 해치지 않고 기혈(氣血)과 물루(物累)에 침탈당하지 않게 되어 바로잡아 변화시켜 본성을 회복함으로써 사물을 응접하고 처리함에 있어 말끔히 하자가 없게 하십시오.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힘써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백공(呂伯恭)이 젊었을 때 성질이 거칠고 난폭하여 음식이 뜻에 맞지 않으면 곧 가사(家事)를 타파(打破)했었는데 《논어(論語)》를 읽다가 자신 책하기를 각박하게 하고 남 책하기를 너그럽게 하라고 한 글을 보고서는 의사(意思)가 일시에 평온하여져 드디어 일생 동안 불끈 화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신들이 듣건대 전하께서 춘궁(春宮)에 계실 때 강관(講官)이 이 말을 외어 진달하니 전하께서는 환한 얼굴로 경청하시고 나서 논의를 주고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에 신들은 전하께서 이 말을 음미하여 힘을 쓸 데를 알게 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거칠고 난폭한 성품도 오히려 그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성질(聖質)이 순수하시고 속마음이 맑고 고요하시니, 이런 병통을 제거하는 것은 큰 화로에다 눈송이 하나를 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들이 삼가 듣건대 지난번 승지가 시장(柴場)의 일 때문에 탑전에서 진달하였더니 전하께서 승지는 대간이 아니라고 하교하였다고 했습니다. 아, 전하께서는 여기에서 실언하신 것입니다. 승지는 근밀한 지위에 있고 후설(喉舌)의 직임을 맡고 있으니 군덕(君德)의 궐실과 합당하지 못한 정령(政令)에 대해 일에 따라 바로잡지 못한다면 자신의 직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비록 말을 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독려하고 유도하여 말을 끝까지 다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진달하는 것이 있으면 한결같이 꺾어 눌러 다시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이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를 높이는 성색(聲色)인 것으로 천리 밖의 사람을 막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재야(在野)의 어진이를 오게 해서 숨겨진 인재가 없다는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언로(言路)가 이로부터 폐쇄될까 매우 두렵습니다.
옥당의 장관에게 답한 데 이르러서는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교하셨는데 이 또한 도리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소공(召公)이 무왕(武王)에게 경계하기를 ‘잗단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마침내 대덕(大德)에 누를 끼치게 된다.’ 하니, 무왕의 덕으로서도 오히려 감히 잗단 일이라 해서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일의 득실(得失)과 사리의 당부(當否)는 논하지 않은 채 대단한 데 이르지 않는 것이라 핑계대고 한결같이 지나쳐 버리고 잠규(箴規)를 따르지 않는다면 일에 해가 되는 것이 이루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또한 전하께서 의당 반성하여 고치기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깊이 나의 병통을 경계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두려워하여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처윤(洪處尹)을 승지로,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의로, 곽제화(郭齊華)를 지평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응교로 삼았다.

 

해서(海西)의 황주(黃州)·봉산(鳳山)·장연(長淵)·옹진(甕津)·해주(海州) 등지에 황충(蝗虫)이 날로 치성하여 곡식을 손상시켰으므로 수령이 직접 들로 나아가 전지(田地)의 주인을 독촉하여 잡아서 묻게 했는데 한 두둑에 두어 말씩이나 되었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한진기(韓震琦)가 군무(軍務)에 대해 직계(直啓)한 일 때문에 총융사(摠戎使) 구인기(具仁墍)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인기가 ‘진기가 새로 한정(閑丁)을 얻었다고 한 것은 모두 그 숫자를 헛되이 과장하여 속여 계문(啓聞)한 것입니다.’고 아뢰니, 비국이 파추(罷推)하라고 회계(回啓)하였다. 상이 그가 속여서 조정에 보고한 것을 노엽게 여겨, 잡아다가 신문하여 장(杖)을 친 다음 도배(徒配)하라고 명하였다.

 

고양(高陽)의 수촌(水村)에 사는 백성이 사복시(司僕寺)의 풀베는 사람 2인을 타살(打殺)하여 물속에 던져 넣었는데 본시(本寺)에서 이 사실을 계문(啓聞)하였다. 상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사하여 잡아내게 하였으나 죄인을 끝내 체포하지 못하였다. 사복시의 초장(草場)이 물가에 있어 상촌(上村)·하촌(下村) 사람들이 날마다 풀을 베어 배로 운송하여 본시로 실어날랐는데, 권귀(權貴)와 세가(勢家)로서 입안(立案)하여 사사로이 점유한 자들이 도리어 이를 가로막고 하지 못하게 하면서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권세를 믿고 사람을 죽여도 끝내 잡을수가 없게 되었으니, 국가에 기강이 없는 것이 이러하였다.

 

7월 6일 기미

상이 의관에게 입진(入診)하라고 명하였다.

 

청주(淸州) 사람 전 찰방(察訪) 박정린(朴廷麟)은 집이 매우 부자였는데 명화적(明火賊)에게 살해당하였으므로 감사가 장문(狀聞)하였다. 승지가 또한 탑전에서 진달하니, 상이 본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은밀히 기포(譏捕)하게 하였다. 이에 병사 유여량(柳汝𣛀)이 도내에 귀양 와 있는 김지건(金之鍵)과 그의 군관(軍官) 장양(蔣諒)을 시켜 충주(忠州)에 사는 도적 14명을 기포하였는데, 승복받고 나서 정린을 살해한 도적이라고 계문하였다. 그러나 옥정(獄情)이 분명하지 않아서 무복(誣服)에 관계되었으므로 이를 들은 사람들은 여량이 조정을 속였다고 하였다.

 

7월 7일 경신

충청도 보은현(報恩縣)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 하였으며 곡식이 손상되었다.

 

장령 이광재(李光載)가 아뢰기를,
"이달 2일 동성(同姓) 사촌의 손자 이준평(李浚平)이 동접인(同接人)인 이보(李堡) 등에게 살해당하였으므로 장차 정장(呈狀)하려 하는데 전 현감(縣監) 민충량(閔忠亮)이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이보 등의 세객(說客)이 되어 들어가 시체 앞에서 곡(哭)을 하면서 시체를 살펴볼 것을 자청하였습니다. 보고 나서는 상처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여 정장하는 것을 저지시키려 했습니다. 신 또한 죽은 자의 친척으로서 노여움을 억제하기 어려워 그와 함께 다시 시체를 살펴보려고 서로 잡고 분노하여 다투다가 그의 소매를 비틀어 찢어지게까지 하였습니다. 대직에 있는 몸으로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 또한 너무 심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형조의 좌기에서 이보의 아비 봉성령(蓬城令) 이형중(李炯仲)이 정장(呈狀)하여 신을 무함하면서 옥사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신의 성명이 사패(司敗)의 문안에 오르내렸으니, 결단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렵습니다."
하고,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체직시키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처음 사인(士人) 이준평(李浚平)이 그의 친우 김상형(金尙炯)과 상형의 처남 이보(李堡)·유태번(柳泰蕃)·유태성(柳泰盛) 등 4인과 동접(同接)하고 있었다. 하루는 상형이 해가 저문 뒤에 준평의 아우 준형(浚亨)에게 말하기를,
"너의 형이 어제 술을 마시고 그대로 누워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하였다. 준형이 달려가서 보니 준평은 온몸에 타박상이 낭자한 채로 죽어 있었으므로 드디어 형조에 정장(呈狀)하였다. 그리하여 상형 등 4인을 체포 신문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았다. 준평이 자신의 비첩(婢妾)을 상형의 집에다 기탁하여 둔 적이 있었는데 상형이 간범(奸犯)하였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대부분 여자 때문에 다투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준평의 비첩까지 아울러 신문하니, 비첩이 서로 간통한 정상을 자복하였다. 상형은 누차 엄형을 받았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고 이보 등 3인도 형신(刑訊)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형조가 옥정(獄情)이 의심스럽다는 것으로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시장(屍帳)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준평의 죽음은 분명한 타살입니다만 간증인(看證人)이 없는데다 4인이 동모한 정상도 분명히 알기 어려우며 상형이 정범(正犯)이라는 것 또한 드러난 형적이 없습니다. 이는 의옥(疑獄) 가운데서도 더욱 의심스러운 것이어서 신이 지난번에 죄없는 사람을 죽이기 보다는 차라리 실형(失刑)의 책임을 감수하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진달했던 것입니다. 이미 목숨으로 보상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석방시킬 수도 없으니, 성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영중추 이경석(李景奭), 판중추 정유성(鄭維城)은 모두 아뢰기를,
"이는 밝히기 어려운 의옥(疑獄)인데 상형의 아비가 심리를 받으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이미 장폐(杖斃)되었으니, 상형을 계속 신문한다면 또 부당하게 죄에 걸렸다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차라리 실형의 책임을 감수하는 것이 낫다는 의논이 사리에 맞는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4인을 똑같이 감사(減死)시켜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7월 8일 신유

정지화(鄭知和)를 대사간으로,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수찬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사간 곽지흠(郭之欽) 등이 아뢰기를,
"장령 이광재(李光載)는 법관이 된 몸으로 남과 다투다가 소매를 잡고 찢기까지 하여 마치 천례(賤隷)들이 서로 싸우듯이 하였으니, 스스로 체면을 손상시킴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이준평(李浚平)이 피살당한 것에 대해서는 그 곡절을 알 수 없습니다만 이미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민충량(閔忠亮)은 관계 없는 사람으로서 직접 시신을 살펴보고 변호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가 하면 대관(臺官)과 얼굴을 맞대고 욕을 하면서 다투기까지 하였으니, 사대부의 소위가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풍천(豊川) 사람 김팔립(金八立)의 형 김육립(金六立)이 장련(長連)의 수군(水軍) 박진(朴進)에게 살해당하였고 박진은 도주하였다. 팔립이 거짓 그와 사사로이 화해하는 것처럼 하여 박진을 유인해 찔러 죽이고 스스로 풍천부(豊川府)에 수금되었다. 감사가 직접 묻기를,
"너는 형제가 셋인데 너만이 형의 원수를 갚았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는다는 것은 본래 상법(常法)인데 너는 응당 죽을 줄 알면서 죽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네 살 때 어미가 죽고 다섯 살 때 아비가 죽었으므로 형 육립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이름은 형제이지만 은혜는 부모와 같습니다. 몸을 떨쳐 원수를 갚음에 있어 진실로 응당 죽을 줄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이에 감사가 아뢰기를,
"팔립이 형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거짓 화해하는 체하면서 원수를 꾀어 손으로 찔러 죽이고 즉시 관(官)에 분고(奔告)하여 스스로 형륙(刑戮)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가 원수를 갚은 일의 정상이 이처럼 명백하니 무단히 서로 살해한 것과 일례(一例)로 논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일을 형조로 내렸다. 형조가 아뢰기를,
"해조로서는 법대로 집행할 뿐 법밖의 일을 가지고 처벌을 높였다 낮췄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팔립을 참대시(斬待時)로 해당시켜 아뢰었다. 모두 삼복(三覆)하여 아뢰니, 상이 정리로 보아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하교하고 특별히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게 하였다. 팔립의 당시 나이 23세였다.

 

7월 9일 임술

의관에게 여차(廬次)에 들어와 진찰하라고 명하였다. 대계(臺啓)를 윤허하고 난 뒤였는데도 제조(提調)는 여전히 입시하지 못하였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에게 일로(一路)에서 제전(祭奠)을 지내주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앞서 대신과 훈척이 귀장(歸葬)할 적에는 경유하는 각 고을에서 으레 제전을 설행했었는데 정유년066)   이후 감사의 장계를 인하여 아울러 정파(停罷)시켰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시백에게 특별히 제전을 내린 것은 특이한 은수(恩數)이다.

 

7월 10일 계해

집의 이연년(李延年), 지평 윤지미(尹趾美)가, 이광재(李光載)를 처치하면서 조어(措語)가 정당성을 잃었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7월 11일 갑자

호남(湖南)의 산군(山郡)에 대동법(大同法)을 행하였다.

 

이때에 영남(嶺南)에 잇따라 흉년이 들어 토적(土賊)이 날뛰고 있었는데, 경주부(慶州府)에서 자물쇠를 부수고 창고의 곡식을 겁탈해 간 변고가 있었다. 흥해 군수(興海郡守) 조석구(趙碩耉)가 염탐꾼을 널리 배치시킨 다음 기관(機關)을 설치하고 사찰하여 그 토적을 체포했는데 경상(境上)에서 효시(梟示)하였다. 그리하여 석구에 대해 논상하여 자급을 올려주었다.

 

이때 권세가의 노예들이 대낮에 사산(四山)의 소나무를 베어냈는데 산지기가 이들을 잡으면 도리어 그 떼거리를 데리고 와서 몽둥이를 들고 겁박하였었다. 해사(該司)가 이를 계문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는 국가의 기강이 엄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노예로 하여금 법금을 범하게 했으니, 그 주인이 실정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그 주인도 똑같이 가두고 무겁게 규핵하라고 명하였다. 형조가 법을 어기며 나무를 벤 자를 신문하니, 이에 영양군(嶺陽君)·인평위(寅平尉)·동평위(東平尉) 집의 노예들이었다. 형조가 장문(狀聞)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법을 어기며 나무를 벤 자의 가주(家主)에게 앞서 내린 명을 적용시킬 수는 없으나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징계시키라."
하였다.

 

7월 12일 을축

6월 이후 평안도에 장마가 계속되었고 황충(蝗虫)이 곡식을 해쳤는데 강계(江界) 등지가 더욱 극심하였다.

 

예조가 과장(科場)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거나 함부로 난입하는 데 대한 법금을 거듭 밝힐 것을 계청하였다.

 

7월 13일 병인

김수항(金壽恒)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후(李垕)를 집의로, 성후설(成後卨)을 장령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지평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사인(舍人)으로, 안후열(安後說)을 수찬으로, 이정기(李廷虁)를 병조 참의로 삼았다. 정기가 일찍이 간장(諫長)으로 있으면서 이동현(李東顯)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는 계사(啓辭)에 참여한 적이 있어 거듭 시휘(時諱)를 범했었으므로 다시 청선(淸選)에 조용(調用)되지 못하였으며 은대(銀臺)의 망(望)에도 주의(注擬)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기가 뜻을 얻지 못하여 답답한 심사를 사색(辭色)에 드러냈었는데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정기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일경(一卿)이 지쳤으니 벼슬 한 자리 제수해야겠구먼."
했는데, 일경은 정기의 자(字)이다. 이때에 이르러 말망(末望)으로 주의했는데 낙점(落點)을 받았다. 이때 일상(一相)을 비호하는 자들 중에는 미선(米船)에 대한 이야기를 간원의 망론(妄論)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경기 감사 조형(趙珩)이 일상의 집에 술자리를 베풀었었는데 정기의 집이 가까웠으므로 맞이하여다가 함께 마시면서 화론(和論)을 한다고 하였다. 서로 주고받고 하는 즈음에 정기가 술잔을 들어 일상에게 전하니, 일상이 노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사대부가 정기의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정기는 머리만 수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7월 15일 무진

회양(淮陽) 땅에 산이 무너져 세 사람이 압사하였다. 상이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해서(海西)에 황충이 크게 치성하였다. 온 도내에 만연되지 않은 곳이 없어 밭 곡식을 다 갉아 먹고 나서는 논으로 옮겨 갔으며 여염에도 가득 차고 도로에도 넘쳐 흘렀다. 관리들이 잡아서 땅에 묻도록 엄히 감독하였으나 그치게 할 수가 없었는데, 평산(平山)·서흥(瑞興) 등지가 더욱 극심하였다.

 

7월 16일 기사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 등이 아뢰기를,
"편좌(便坐)로 인접하여 옥후를 살필 수 있게 하시고 이어 신료들을 면대하여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통하게 해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잇따라 병환이 있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진찰하는 거조를 폐하였었다. 근래는 일기가 조금 서늘한데 두부(頭部)인 얼굴과 귀의 병만 없다면 무엇 때문에 입진(入診)을 어렵게 여겨 불신(不信)한다는 비난을 자초하겠는가."
하였다. 경석 등이 다시 아뢰기를,
"지난번 대계(臺啓)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사세가 곤란한 것을 인하여 의관의 진찰까지 아울러 폐기한 것은 진실로 안타깝고 우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불신한다는 비난이 있었다는 등의 하교에 이르러서는 매우 미안스러운 것인 듯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안타깝고 민망하게 여기는 것은 실로 성후(聖候)를 상세히 살필 수 없는 데에 있으니, 어떻게 감히 불신한다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비난한다[刺]는 글자는 더욱이 신하들로서는 감히 마음먹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난한다는 글자는 의도가 있어 그렇다는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계사(啓辭)가 여기에 이른단 말인가."
하고, 또 입진을 허락하지 않았다.

 

헌납 김만기, 정언 여성제·정박 등이 아뢰기를,
"삼가 약방에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황송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군신은 부자와 같은 것이므로 아버지에게 질환이 있으면 부축하고 주물러주고 긁어주는 것은 아들이 반드시 직접 해야 할 일로 어찌 그 사이에 구애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소세(梳洗)를 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제조의 입시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이미 너무도 미안한 일입니다. 신들의 망언 때문에 의관의 입진도 따라서 그쳤으니 신들의 죄가 진실로 너무 큽니다. 더구나 신하가 되어가지고 감히 불신한다는 비난을 임금에게 가하였다면 그 죄는 여기에 이르러 용납할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아, 예로부터 신하가 임금에게 진계(進戒)함에 있어 으레 궐실(闕失)을 지적하여 뜻을 거슬려가면서도 숨김없이 다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현명한 군주는 그것을 기자(譏刺)라고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진언하는 것이 인신의 직분이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군상의 도량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위징(魏徵)이 태종(太宗)에게 간하기를 ‘폐하께서는 매양 「나는 성신(誠信)으로 천하를 통치한다.」고 하십니다만 지금 즉위하신 지 오래지 않았는데도 자주 신용을 잃으셨습니다.’ 하니, 태종이 가상하게 여겨 흔연히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후세에 모범이 되기에 충분한 것인데 어찌 전하의 성명(聖明)하심으로 여기에 부족한 점이 있으십니까.
신들은 외람되이 언관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보익(補益)한 것은 없이 도리어 정외(情外)의 하교를 받들게 되었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사직하는 소장을 올리면서 진언하기를,
"전하께서도 군신이 서로 힘을 합쳐야 치공(治功)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위세로 말하면 군상은 지극히 존엄하고 신하는 지극히 낮은 것이어서 이는 마치 하늘과 땅이 정해진 위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곤(乾坤)이 정하여졌고, 낮고 높은 것으로 판진(判陳)하니 귀천(貴賤)의 자리를 나누게 되었다.’ 했으니, 그 분수의 엄정함이 이처럼 확연합니다. 그런데 문왕(文王)이 역(易)을 만들면서 하늘을 위에 두고 땅을 아래에 둔 것을 비괘(否卦)로 만들고 땅을 위에 두고 하늘을 아래에 둔 것을 태괘(泰卦)로 만든 것은 무슨 까닭에서입니까. 서로 뒤바꾸어 아래에다 둔 것은 바로 서로 마음을 교통(交通)시킨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가 교합해야 만물이 형통되고 상하가 교합되어야 지의(志意)가 같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천지는 정해진 위치가 있지만 하나의 기(氣)가 오르내리기 때문에 세공(歲功)을 이루고, 군신은 정해진 분의가 있지만 하나의 마음이 서로 미덥게 되기 때문에 왕공(王功)을 일으킵니다. 대기(大氣)는 한없이 드넓은 것으로서 만물을 발육시키는 것이므로 천지 사이에 차 있는 것들은 모두 그 대기를 받아서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물고기·동물·식물이 각기 본성대로 살고 어둡고 밝고 춥고 더움이 각기 질서를 이루지만, 하늘이야 무슨 작위(作爲)가 있었겠습니까. 역시 하나의 기가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그렇게 됩니다.
성인(聖人)은 등극(登極)하여 하늘을 본받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위에서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아 있어도 뭇 신하들은 아래에서 직무를 수행하게 되고 슬기가 있는 자는 그 사려를 다 기울이게 되고 용기가 있는 자는 그 힘을 분발하게 되며, 재능이 있는 자는 그 재주를 다 바치게 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필부 필부에 이르러서도 위의 신임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어 사공(事功)이 흥발(興發)되고 덕업(德業)이 창명(彰明)되니 성인이 어찌 자신의 총명을 쓴 적이 있었겠습니까. 또한 한 마음이 서로 미덥게 되어 뭇 신하들이 교화를 받든 효험입니다.
이런 때문에 태(泰)의 반대가 비(否)인데, 비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상하가 서로 교통되지 않는 데 연유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상(象)이 천지에 있어서는 소락(消落)·폐장(閉藏)·음한(陰寒)·참각(慘刻) 같은 상이 되는 것이고, 국가에 있어서는 군신(君臣)이 서로 어그러지고 사정(邪正)이 자리가 뒤바뀌고 온갖 직무가 해이해지고 백성들이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상이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역경(易經)》 가운데서 비(否)·태(泰) 두 괘(卦)를 취하여 성인이 괘를 만든 본뜻과 제유(諸儒)들이 경문(經文)을 해석한 훈설(訓說)을 살펴보신다면 반드시 음양의 소장(消長)과 국가의 치란(治亂)에 대한 기미를 환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소공(召公)의 고문(誥文)에 ‘태어난 아들의 선악은 그가 태어난 처음에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달려 있다.’ 했는데, 방금 새로운 정치가 시작됨에 만방(萬方)이 눈을 닦고 기대에 차 있습니다. 이것이 또 군신 상하가 지성으로 서로 감동시키고 한 마음으로 서로 호응하여 사람들의 뜻을 흥기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여 좋은 정치를 베풀어 아름다운 교화를 완성시킬 하나의 큰 기회입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전하의 한마음이 형통해지면 이것이 곧 만물이 다 형통해질 수 있는 기회이고 전하의 한마음이 비색해지면 이것이 곧 만물이 다 궁색해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궁색을 꺼리고 형통을 구하는 것은 항물(恒物)의 대정(大情)인 것이니 조정에서 누군들 전하의 부성(孚誠)을 바라지 않겠으며 사방의 백성이 누군들 전하의 덕음(德音)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성인이 천하의 뜻을 통달시키고 만물의 마음을 극진히 하는 방법은 단지 감응(感應)시키는 이치 하나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비태(否泰)에 대한 이야기에 정성을 기울이는 이유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선정(善政)을 베푼 것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신하들의 기대에는 석연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신처럼 어리석고 졸렬한 자질로도 깊이 우려하고 크게 걱정하는 것은 전하께서 혹 교태(交泰)의 뜻을 어겨 점차 비폐(否閉)의 상(象)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소 신료들에 대하여 지성으로 도와주기를 구하는 뜻이 없어 대신(大臣) 가운데는 고굉(股肱)의 임무를 부탁할 사람이 없고 근신(近臣) 가운데는 심복(心腹)의 직임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억지로 편안하고 구차스럽게 용납되기만을 생각하여 마음을 다하는 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책이 묘당에서 강론되지 않고 얼굴을 바로하여 과감히 말하는 기풍이 대각에서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계옥(啓沃)하여 선언(善言)을 진달하는 직무도 경연에서 끊어졌는가 하면 백관과 유사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태만하여 직무를 폐기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상하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만사가 날로 실추되고 풍속이 날로 투박해지고 조론(朝論)은 날로 비하되고 사기(士氣)는 날로 저상되며 민생(民生)은 날로 곤궁해지고 국세(國勢)는 날로 떨어집니다. 당당한 만승(萬乘)의 나라가 누적된 병이 오래되어 쇠하여진 탓으로 혈맥이 시들어 금방 목숨이 끊길 것 같은 사람과 같아서 청명하고 성대하게 분발하고 진작시키는 상(象)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의 기상을 살피시건대 형통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비색에 가깝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 군신들만의 죄이겠습니까. 또한 전하께서 호오(好惡)를 치우치게 따르심에 따라 이런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은 태평한 정치를 이루는 데 크게 뜻을 두고 있었는데, 어느날 천장각(天章閣)을 열고 보신(輔臣)을 불러 입대(入對)하게 한 다음 필찰(筆札)을 지급해 주고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조목별로 진달하게 했습니다. 이에 범중엄(范仲淹)은 치무(治務) 열 가지 일을 올리고 부필(富弼)은 당세의 급무 십여 조항과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 관한 열세 가지 방책을 올렸는데, 인종이 모두 채용했습니다. 그리고 구양수(歐陽修) 등은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날마다 일에 대해 아뢰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일찍이 이런 거조를 해보셨습니까. 전하께서 인종과 같은 일을 했는데도 신하들이 응하지 않는다면 이는 군신들이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만 전하께서 주춤거리면서 잘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뜻이 없다면 이는 전하께서 신민(臣民)을 저버린 것이 됩니다. 신하들이 전하께 말을 아뢰어도 써주지 않는다고 하여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믿지 않는 것이고, 전하께서 신하들 가운데 내 뜻에 합당하게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하찮게 여기신다면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신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교통되지 않는 것에 대해 신이 논하는 이유입니다.
대체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진현(進見)이 드물게 되면 정의(情義)가 돈독하지 못하게 되고 청납(聽納)을 소홀히 하면 심지(心志)가 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신하들을 소외하여 인접하는 것이 매우 드문가 하면 평상시에도 예절에 구애되고 시일에 제한을 받습니다. 근래 옥체가 미령하실 적에도 와내(臥內)에 들어가서 문병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신하들이 청광(淸光)을 우러르지 못한 것이 이미 한 달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준례에 따라 책임이나 메우기 위한 엉성한 장주(章奏)에 대해서도 혹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또한 한결같이 물리치십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정원에 대해 노하신 것은 결코 중화(中和)에서 발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야흐로 전하의 노기가 치성할 적에 대신과 삼사의 말이 거절당하여 봉입(捧入)할 수 없었으므로 대소 관원들이 어쩔 줄 모르고 걱정하면서 여러 날을 안정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시장(柴場)의 일 같은 것은 지극히 미세한 것인데도 한 달이 넘도록 서로 버티면서 지금까지도 따르지 않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일에 대해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원이 약방(藥房)의 일에 대해 논한 것은 전하께서 이미 윤허하시고도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간언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보다 그 해가 더 심합니다. 그리하여 간신(諫臣)으로 하여금 모두 편안히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이런 일들을 서로 미덥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본관(本館)은 직책과 지위가 친밀한 것은 물론 논사(論思)하고 헌가 체부(獻可替否)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열성(列聖)들께서는 너그럽게 우대하여 지기(志氣)를 편히 펴게 하고 충려(忠慮)를 개도(開導)하셨습니다. 그 은의(恩意)가 매우 두터웠던 것은 고사(故事)에서 증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한두 번 차자를 올려 진달해도 모두 살펴주시지를 않은 채 단지 번거롭게 하지 말라[勿煩]는 두 글자로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을 보이기 때문에 빈 집에서 짝지어 숙직만 할 뿐 날마다 하는 일이 없으니, 명주(明主)께서 대우하는 것이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어리석고 망령된 신이 삼가 우려하건대 성상께서는 춘추가 바야흐로 한창이시어 혈기가 강강하기 때문에 신하는 직무를 가지고 임금을 돕는다는 것과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는 덕을 닦게 하고 아래로 백성을 위하여는 안정을 시킨다고 한 의리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여겨 소홀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깊은 궁중에서 높이 앉아 팔짱을 끼고는 위엄을 배양하여 보중(保重)할 수 있다고 여기고, 여러 일들을 임박하여 결정하면서 나라를 보전하고 통제하여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한때 천둥 벼락 치듯이 하는 것이 잠시 통쾌하기는 하겠으나 이는 옛사람이 이른바 ‘나는 오직 내 말을 어기는 자가 없음을 즐겁게 여긴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신하들의 혀를 묶게 하고 사방 사람들을 해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하의 이 마음이 이미 나라를 잃을 징조입니다. 만약 통렬히 반성하여 극복하고 힘껏 바로잡아서 의를 강(講)함으로써 점점 배어들게 하고 충직한 말을 끌어들임으로써 바로잡게 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옛날 맹자(孟子)가 제 선왕(齊宣王)을 기롱하기를 ‘왕은 친한 신하도 없습니다. 지난번 맞아온 신하가 오늘 도망갔는데도 그것을 모르십니다.’ 했는데, 신은 지난달 예우를 극진히 하여 불러온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부모가 사랑하던 것은 나도 사랑하고 공경하던 것은 나도 공경한다.’고 했는데, 등극하신 처음에 신하들이 모두 성상의 뜻이 바뀌지 않기를 우러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와도 말을 들어주어 채용하는 효험이 없다가 그들이 갈 적에는 불안스러운 기미가 있었으니, 공경하여도 실상이 없으면 헛되이 잡아둘 수 없는 것입니다. 상황을 살펴보는 조사(朝士)들이 많아짐에 따라 충직한 말이 날로 드물어지면 화태(和泰)의 복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하들이 진달하는 모든 말이 허망(虛望)한 것이 아니면 전하께서도 의당 스스로 도모하시어, 척연히 고쳐 뉘우치는 뜻을 쾌히 보여 조신(朝臣)들에게 하유하시고 또 도와주기를 바라는 하교를 내려 아름다운 말이 나오게 해야 합니다. 군신 상하 사이에 성심(誠心)을 미루어 상대하여 따를 만한 말은 즉시 따르고 채용할 만한 모의는 즉시 행하여 날마다 함께 치도(治道)에 대해 강론함으로써 불선한 것은 버리고 선한 것은 취하소서. 대론(臺論) 가운데도 윤허하지 않았던 것을 즉시 윤허하고 또 일에 따라 진간(進諫)하게 함으로써 그 직분을 극진히 하게 하소서. 근밀한 신하는 여염의 부자(父子)처럼 대우하여 예절을 간략하게 하고 수시로 편좌(便坐)에서 인접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하기도 하고 시정(時政)에 대해 묻기도 하여 한결같이 세종조(世宗朝)와 성종조(成宗朝)의 고사(故事)처럼 하소서. 정원의 신하들도 수시로 출입하면서 계품(啓稟)하게 하여 소회를 진달하게 하고 하루 안에 사대부를 인접하는 때가 한가히 지내시는 시간보다 항상 많게 해야 합니다. 재야의 신하들은 지성을 다하여 돌아오게 하고 그 가운데 아직 벼슬하지 않은 사람은 또한 지성을 다하여 묻고 찾으소서. 그리고 학문을 강론하는 데 더욱 뜻을 두시어 더운 기운이 좀 물러가고 옥후가 모두 회복되면 하루에 세 번 강하는 절차를 폐기하지 말아서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경연을 정지할 때라도 수시로 경사(經史)를 살펴보고 글의 뜻을 생각함으로써 함양하는 데 도움이 있게 하소서. 진실로 이를 잘 행한다면 총명이 날로 넓어지고 지기가 날로 강해질 것이며 아랫사람들의 뜻이 통달되지 않는 것이 없고 성상의 뜻이 미덥게 되지 않음이 없어 천지가 교차되는 태(泰)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7월 17일 경오

집의 이후(李垕) 등이 아뢰기를,
"군신은 부자 사이와 같은 것인데 소세(梳洗)를 못했다는 것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을 폐기한다면 이는 신하를 아들처럼 여긴다는 의리가 아닙니다. 군신 사이는 성신(誠信)이 귀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신하들의 극한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도리어 불신한다는 비난으로 의심하여 약방 제조로 하여금 민망하고 위축되어 몸둘 바를 모르게 했고 간원의 많은 관원들로 하여금 전전하면서 불안하게 했으니, 성의(誠意)가 미덥지 못하여 상하가 서로 막힌 것을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과거 조종조 때에는 비록 미령할 때일지라도 신료들을 와내(臥內)로 불러들여 조용히 병에 대해 논하고 치도(治道)에 대해 자문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본받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름 계절이 막 물러가자 가을 기운이 이미 생겼으니, 조금 차도가 있다고 하여 치료하는 방도를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속히 약방 제조와 의관 등으로 하여금 입시하여 진찰하게 함으로써 보호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소세(梳洗)할 수 없는 것이 다른 병과 다르기 때문에 인접할 수 없었으니, 사세가 그러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의관을 바룬다는 이야기가 무슨 말이겠는가. 며칠 전부터 소세를 했으니, 내일은 진찰하게 하겠다."
하였다.

 

전 금산 군수(金山郡守)        원궤(元簋)에게 장 일백(杖一百)을 치고 영원히 서용(叙用)하지 못하게 하였다.
처음 거창(居昌) 사람 김경신(金景信)이 조업(祖業)이라고 일컬으면서 금산 땅 장암(壯巖)의 민전(民田)을 궁가(宮家)에 몰래 팔아먹었는데 감사가 백성들의 정장(呈狀)을 인하여 원궤에게 조사하여 결단하게 하였다. 원궤가 경신이 거처하는 곳에 이문(移文)하여 와서 변별하게 하였으나 경신이 오지 않았다. 감사가 누차 사보(査報)를 독촉한 뒤에야 비로소 취송(就訟)했는데 감사가 전지에 대한 사보(査報) 문장(文狀)에 의거, 경신을 형추(刑推)하게 하여 모피(謀避)한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런데 원궤가 본디 경신의 소위를 미워하였으므로 형신을 2차 시행하여 죽게 하였다. 경신의 처가 남편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일컬으면서 서울에 올라와서 법사에 정문(呈文)하기도 하고 대간이 왕래하는 길에서 슬피 울부짖기도 하였으므로, 조사하기를 청하는 논계(論啓)가 있어 전후 여섯 번이나 행문(行文)하기에 이르렀다. 또 최후로 대론(臺論)이, 조사하는 일을 제때에 거행하지 않는 것은 모두 원궤가 가로막고 지체시킨 때문이라고 하여 원궤를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원궤가 공초(供招)하기를,
"바야흐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상사(上司)와 추관(推官)을 가로막으려 했다고 한들 그것에 의거하여 거행하지 않을 리가 만무합니다. 지체된 것은 모두 경신의 처가 와서 대변(對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진실로 공초한 것과 같으니 상의 재결을 청합니다."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회계(回啓)가 너무 늦었으니 법을 준수하는 뜻이 없었다고 하교하고, 이어 원궤를 형추하여 실상을 알아내라고 명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사복(査覈)이 지연된 것은 그 책임이 감사에게 있는 것인데 원궤를 형추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감사를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감사의 함답(緘答)도 원궤의 말과 같았으나 원궤는 오히려 형장(刑杖)을 남용했다는 것으로 죄를 받았다. 원궤가 경신을 죽이자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다고 일컬었으나, 일이 궁가(宮家)에 관계되었기 때문에 모두 원궤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다. 그런데 수상(首相)의 구원에 힘입어 심히 죄를 따지는 것을 면하였던 것이다.

 

7월 18일 신미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전합(前閤)을 닫고 단지 의관(醫官)만 입진(入診)하게 하였다. 족부(足部)에 산침(散鍼)을 맞았다. 제조 등은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침을 맞는 일이 끝나자 제조 윤강(尹絳)이 내시를 불러 아뢰게 하기를,
"신들이 오래도록 입시하지 못했으니, 천안(天顔)을 우러르게 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지만 침 맞은 곳에 피가 흘러내린 것을 미처 닦아내지 못했으니, 우선 뒷날을 기다리라."
하였다. 이때 신하들이 천안을 뵙지 못한 지가 이미 한 달이 넘었었는데 비록 헌부의 청을 인하여 제조가 합외(閤外)에 입시할 수는 있었으나 결국은 옥색(玉色)을 우러러 볼 수 없었다.

 

영돈녕 이경석이 집에 질환(疾患)이 있다는 것으로 차자를 올려 내국(內局)과 찬수(纂修)의 직임을 사퇴하니, 해조(該曹)에 계하(啓下)하였다. 해조가 대신의 차자는 본조에서 의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단지 상의 재결만을 청하니, 상이 내국의 직임을 체직시키는 것만 허락하였다.

 

정태화(鄭太和)를 겸 어영 도제조(兼御營都提調)로,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임한백(任翰伯)을 헌납으로, 김만기(金萬基)를 교리로 삼았다.

 

이때 한재(旱災)가 더욱 극심하여 연해(沿海) 지역에는 짠 기운이 두루 생겼고 산군(山郡)의 수원이 있는 곳도 모두 말라 붙었으므로 곡식이 누렇게 시들어 이삭이 패기를 바랄 수 없게 되었다. 장단(長湍)·삭령(朔寧)·마전(麻田)·적성(積城) 등지에는 6월에 폭우가 내려 강가의 전지(田地)가 썩어 손상되는 피해를 혹독하게 받은데다가 황충(蝗虫)이 계속 발생하였다.

 

사간 곽지흠(郭之欽)이 아뢰기를,
"삼가 약방의 계사(啓辭)에 대해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불신한다는 비난[不信之刺]’ 네 글자는 신의 피사(避辭)에서 연유되지 않았다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오래도록 의관들의 입진(入診)을 정지시켰으니 비로소 성상께서 뜻하신 바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신이 죄를 진 것이 이미 많으니 결코 얼굴을 들고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정언 여성제·정박도 패초(牌招)했는데도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아울러 인피하였다. 대사간 정지화가 처치하기를,
"곽지흠은 출사하게 하고 여성제·정박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아울러 출사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3인이 모두 패초해도 달려가지 않고 다시 인피하였으므로 체직되었다.

 

7월 19일 임신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의관에게 입진하게 하였다. 왼편 족부(足部)에 산침(散鍼)을 맞았다. 상이 이르기를,
"앓고 있는 두통이 가을 들어 배로 더하여졌다. 서서히 날씨를 살펴 뜸을 뜨려 하니, 제조에게 미리 날짜를 정하도록 말하라."
하니, 제조가 합문 밖에 엎디어 있다가 의관에게 내리는 하교를 듣고 입시할 것을 청하려 하다가 더듬더듬 감히 말을 못하고 물러갔다.

 

함경 감사가 치계하기를,
"가뭄과 황충의 피해가 지난해보다 더 심합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본도(本道)의 중앙에다 포제(酺祭)를 설행하여 재앙을 물리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행 대사헌(行大司憲) 송준길(宋浚吉)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 아뢰기를,
"4월 초승에 신이 청대하여 입시했을 적에 여러 궁가의 산해(山海)의 절수(折受), 원당(願堂), 장원(庄園)의 설치 및 충훈부의 면세(免稅)에 대한 폐단을 논하고 조종조(祖宗朝)에서 부마(駙馬)에게 직전(職田)을 주었던 제도를 회복시킬 것을 청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의 진달을 인하여 성상께 다시 아뢰어 신화(新化)에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랐는데 천안(天顔)에 부드러운 빛을 띠고 주고받는 말이 메아리 같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대신들을 모이게 한 다음 신이 진달한 것을 탑전에서 상의하도록 명하였는데 신하들이 모두 같은 말로 다시 아뢰었고 죄다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산해의 여러 가지 폐단은 지금부터 영원히 금하게 하였으며 강원도의 시장(柴場)을 먼저 파기시키게 했으며, 직전제(職田制)는 탁지(度支)로 하여금 물러가서 헤아려 품처하게 했습니다. 신하들이 물러나와서 서로 기뻐하기를 ‘즉위하신 이래 군신이 화기 애애한 가운데 토론한 것이 오늘과 같은 기상이 있은 적이 없었고 인심을 위로하여 기쁘게 만든 것이 또한 오늘과 같은 처치가 있 은 적이 없었다.’ 했으며, 진신(縉紳)들이 공사(公私)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모두 기꺼운 안색으로 서로 경하했습니다. 신이 고향으로 돌아감에 이르러서도 향곡(鄕曲)의 부로(父老)들도 모두들 진진하게 송축하면서 ‘태평 세상을 기대할 수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뒤 여러 달이 지나도 살펴 아뢰는 거조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므로 신은 이미 괴이하게 여겼었습니다. 계속하여 저보(邸報)를 보니, 관동(關東)의 시장(柴場)에 대해서는 단지 강릉(江陵)의 것만을 파기하라고 한 명이 있었으며 대신(臺臣)들이 논집해도 오랫동안 윤허받지 못했습니다. 아, 하늘이 우리 동방을 태평하게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전하의 마음이 불과 몇 달 사이에도 이렇게 순일(純一)하지 못하단 말입니까. 대본(大本)의 소재가 이미 이와 같으니 신공(臣工)들이 나태하고 서사(庶事)가 해이해져 날로 어지럽게 민멸되는 지경으로 나아가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천하의 일은 진실로 거죽을 잡고서 속의 것을 점칠 수 있고 작은 것을 인하여 큰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인데, 신은 여기에서 삼가 마음속으로 통분스럽고 애석하고 안타깝고 슬퍼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난번 중외(中外)에서 서로 전하며 기뻐하던 사람들이 변하여 걱정을 하고 즐거워하던 사람들이 바뀌어 근심을 하게 되었으며 산동(山東)의 부로들도 모두 멍하니 실망에 젖어 있습니다. 전하께서 무슨 이유로 하나의 미세한 일을 인하여 이토록 거듭 사방 백성들의 마음을 잃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오늘날 신민(臣民)들이 전하에게 기대하는 것이 어떠하며 전하께서 스스로 기대하는 것 또한 어떠합니까. 전하께서는 매양 연석(筵席)에서 성실함으로 스스로를 면려하시면서 신하들 가운데 혹 성상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이가 있는 것을 개연스럽게 여기셨으므로 신은 항상 전하의 이 마음이 요순의 도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여겼으며 흠앙하여 탄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만 이제 이에 크게 도모하던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오늘 한 가지 일이 이러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이 또 이러하니, 필경에는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통곡을 해야 될 일입니다.
또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이 일은 반드시 그 사이에 곡절이 있는 것인데 외신(外臣)으로서는 감히 참여하여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삼가 대계(臺啓)를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 이 말이 또한 어찌 전하께서 들을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참으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사(公私)와 의리(義利)의 분변, 대소와 경중의 처지를 깊이 생각하시어 사나운 천둥과 빠른 폭풍처럼 속히 파기시키는 명을 내리소서. 그리고 신하들을 책려하여 당일 이미 의논했으나 완결을 보지 못한 것을 제때에 감품(勘稟)하게 하여 계술(繼述)하는 모책으로 삼음으로써 중외의 기대를 위로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작은 일을 가지고 서로 버티는 것이 불가한 것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초 나의 뜻이 그렇지 않았었던 것 때문에 그런 것이다. 경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내가 무엇 때문에 망설이겠는가. 의당 체념하여 시행하겠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한 말이 상대하여 나누는 한 마디만 못한 것이니, 이제 더위도 가시고 가을 기운이 생겼으니 경이 길을 출발할 때인 것이다. 모쪼록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조속히 고치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다."
하였다.

 

7월 20일 계유

영릉(寧陵)의 능 위 앞면의 난간이 있는 곳의 대석(臺石)과 상석(裳石)이 연결된 부분이 봄의 해동(解凍) 때부터 조금 기울어져 틈이 벌어졌으며 지금 장맛비가 온 뒤 여러 석물과 앞면의 병풍석(屛風石)·가석(駕石) 등을 연결시킨 부분에도 날마다 틈이 벌어졌다. 그리고 정자각(丁字閣)의 기와 위에 바른 석회(石灰)도 많이 깎여나가 떨어졌는데 수릉관(守陵官)이 계문하니 그 일을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대신(大臣)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한 다음 개수(改修)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1일 갑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전합(前閤)을 닫고 의관만 들어와서 진찰하게 했는데 왼쪽 발 발등의 종기가 난 곳에 산침(散鍼)을 맞았다.

 

황해도 시소(試所)에서 실화(失火)했는데 그 곁에 화약고(火藥庫)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시관(試官)이 창황히 달아나 피하였고 거자(擧子)들도 시위(試圍)를 나간 사람이 많았는데 서책과 시험지를 태반이나 분실하였다. 불을 끈 뒤에 도로 모이기는 했으나 시권(試券)을 거둔 숫자가 겨우 4백여 장이었다.

 

7월 22일 을해

이연년(李延年)을 사간으로, 윤지미(尹趾美)·경최(慶㝡)를 정언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병조 참의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정태화(鄭太和)를 내의원 도제조로 삼았다.

 

7월 23일 병자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의관만 들어와서 진찰하게 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 도제조 정태화가 중관(中官)을 시켜 전계(傳啓)하기를,
"위에서 오랫동안 신료들을 인접하지 않았으므로 뭇 사람들이 답답해 하고 있으니, 한번 천안(天顔)을 우러르게 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태화가 들어가 천안을 우러르고 아뢰기를,
"상의 면부(面部)가 아직도 쾌히 회복되지 않았고 항부(項部)에도 붉은 부분이 있으십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증세가 처음보다 상당히 줄었으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한재(旱災)가 이러하여 백성의 일이 참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뭄이 너무 극심한데 예전부터 가을 이후에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었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가뭄이 이미 이러하니 상규(常規)에 구애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해조로 하여금 급히 전례를 살펴 품처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의 농사가 흉년이 들었는데 경상도가 더욱 극심하고 강원도는 조금 낫다고 하니, 사실이 그런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른바 조금 낫다는 것은 영남 등의 더욱 극심한 곳에 견주어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평년 농사에 견준다면 영동(嶺東)의 흉작도 매우 극심하다고 합니다. 국가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었는데 해마다 이처럼 기근이 드니 앞으로 진구(賑救)할래도 방책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매(寡昧)한 나의 죄이다.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 계사년·을미년·기묘년·경인년에는 모두 입추(立秋) 뒤에 기우제를 지낸 일이 있으니, 수일 안에 설행하여 경건히 기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大臣)을 보내어 먼저 종묘 사직에다 행하게 하였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영릉(寧陵)을 봉심하였는데 병 때문에 복명(復命)하지 못하고 차자를 올려 진달하고 대죄하였다. 선공감 제조 오준(吳竣), 예조 참판 이일상(李一相), 관상감 제조 오정일(吳挺一) 등이 대궐에 나아가 서계(書啓)하였다.
"능위에 있는 석물(石物)이 기울어져 틈이 생긴 것이 모두 열일곱 군데이고 또 열 군데는 당초 가는 틈이 생겼었는데 유회(油灰)를 이겨서 발랐기 때문에 아직 구멍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정자각(丁字閣)은 바른 석회가 떨어져 나간 것이 일곱 군데이고 기와는 거의 반이 붉은 색으로 변하고 또 깨진 곳이 있었습니다. 아울러 그림으로 그려서 들입니다."

 

7월 24일 정축

영릉 수개 도감(寧陵修改都監)의 당상(堂上)인 여이재(呂爾載)·이만(李曼) 등이 아뢰기를,
"수개(修改)하는 역사는 하루가 시급하니 의당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날을 가리게 하여 조속히 시역(始役)하게 하소서. 삼가 대신들의 계사를 보건대 틈이 난 곳이 거의 20군데나 되는데 그 가운데 병풍석(屛風石)·가석(駕石)·대석(臺石)은 봉릉(封陵)의 석물(石物)이니, 그대로 두고 수보(修補)할 수 있다면 진실로 다행스럽겠습니다. 그러나 부득이 다시 설치하는 조처가 있게 될 경우에는 일의 체모도 중대하고 공역(功役)도 크니 다시 상세히 간심하여 품지(稟旨)해서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도청(都廳)인 낭청(郞廳) 곽지흠(郭之欽), 예조 정랑 최문활(崔文活)과 함께 석공(石工)을 대동하고 내일 달려가서 간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5일 무인

이에 앞서 아차산(峨嵯山)의 봉화(烽火)가 매양 구름에 가려 남산(南山)과 응하지 못했었는데 이날은 천기(天氣)가 청명하여 남산의 다섯 봉화를 다 들게 되었다. 상이 마침 그것을 직접 보았는데 병조에서 당부(當部) 부장(部將)의 말에 따라 사봉(四烽)으로 입계(入啓)하였다. 아차산의 봉화는 매양 도착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대로 준례가 되어 이렇게 된 것이다. 상이 봉수(烽燧)는 경변(警變)을 알리는 중대한 일인데 해관(該官)이 만홀히 했다고 하여 부장을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명하였다.

 

집의 이후 등이 아뢰기를,
"산릉(山陵)의 역사를 한 지가 겨우 1년이 지났는데 능 위의 석물이 주저앉기도 하고 터지기도 하였으며 정자각의 기와가 태반이 붉은 색이 되어 깨져 있고 석회로 바른 것도 깎여 떨어져나간 것이 많으니, 일이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이는 관계된 바가 중대하니 시종 감독한 사람은 그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잡아다가 추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산릉 제조인 병조 판서 정치화(鄭致和), 경천군(慶川君) 김남중(金南重), 형조 판서 홍중보(洪重普), 낭청(郞廳)인 우부승지 조윤석(趙胤錫), 전 금성 현감(錦城縣監) 이만영(李晩榮) 등 11인을 하옥시켰고 차지 내관(次知內官) 윤완(尹完)도 하옥시켰는데, 그뒤 조율(照律)하여 모두 파직시켰다. 이후 등이 또 아뢰기를,
"지금 감시(監試)의 장옥(場屋)에 난입하다가 체포된 김경진(金慶振) 등 4인과 유생(儒生)을 데리고 들어온 자 및 스스로 조흘(照訖)067)  을 샀다고 일컬은 자인 송지봉(宋之鳳) 등을 아울러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치(囚治)하여 율(律)대로 죄를 정하게 하소서. 조흘이 있는데도 녹명(錄名)하지 않은 유명(柳溟) 등 6인을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죄를 매기게 하소서. 조흘 고강소(照訖考講所)의 서리(書吏)가 공명 조흘(空名照訖)을 훔쳐 내어 몰래 유생들에게 팔았다는 이야기가 자자하게 전파되었으며 지봉도 또한 명백하게 자백했으니, 훔쳐다 판 정상이 여기에 이르러 숨기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관(考官)이 된 자도 간사한 짓의 방어를 잘 하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조흘 양소(照訖兩所)의 시관을 아울러 파직시키고 하리(下吏)는 유사로 하여금 수치(囚治)하여 율(律)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과장(科場)에 난입하는 폐단은 오로지 금란관(禁亂官)에게 달려 있는 것인데 지금 양소의 금란관이 진위를 분변하지 못하고 향곡(鄕曲)의 유생들 가운데 더없이 피폐(疲弊)한 자도 혼동하여 잡아 보냈으니, 양소의 금란관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이연년(李延年) 등이 아뢰기를,
"근래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하여 과장에 난입하는 폐단이 더욱 극심합니다. 사목(事目)을 거듭 밝혀 법부(法府)로 하여금 일체 엄금하게 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는데 이번 감시(監試) 때 따라 들어왔다가 체포된 사람이 2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조로 이송시킨 사람은 5인뿐이었습니다. 헌부가 분간(分揀)하여 석방할 적에 사람들의 말이 많아 물정(物情)이 의혹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집의 이후, 장령 성후설을 아울러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소장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일전에 성상께 중도에 지나친 거조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곧바로 뉘우치시고 정원의 신하들은 끝내 체직을 허락하지 않고 간원의 관원에게는 특별히 너그럽게 용납하시는 뜻을 보이셨으니, 일식과 월식이 회복된 것과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우러렀습니다. 하지만 천둥 같은 위엄 아래 꺾이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입니다. 삼가 오늘날 언로가 이로부터 막힐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리고 전일 대신(大臣)의 차자를 곧바로 해조(該曹)에 내리신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일이니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왕명을 출납하는 신하가 즉시 복계(覆啓)하여 품하지 않았으니 뭇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조짐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사헌 송준길의 소장을 입계한 지가 여러 날이 지나서야 성상의 비답이 비로소 내렸고 우찬성 송시열의 소장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비답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준길이 아뢴 시장(柴場)에 대한 한 가지 일은 따르시는 뜻은 있으나 채용한 실상은 없으며 간원이 논하여 약방 제조를 입시하게 하라고 청한 것에 대해서도 허락은 하였으나 시행은 하지 않고 있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말을 들어주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을 써주는 것이 어렵다고 한 것이 불행하게도 근사합니다.
지금 기강이 잡히지 않아 온갖 일이 모두 해이해져 있는데, 신이 우선 한두 가지만 거론하여 보겠습니다. 호적법(戶籍法)은 백성의 숫자를 계산하기 위한 것이므로 조정에서 신칙함이 전과 매우 다른데 지금 듣건대 수령들이 백성들의 비방을 초래하게 될까 두려워 구투(舊套)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하며, 거자(擧子)들의 조흘(照訖)을 죄다 다시 강(講)하게 한 것은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지금 듣건대 강관(講官)이 된 사람이 심상하게 여긴 탓으로 조흘 공문(照訖公文)을 아랫사람이 훔쳐서 팔게 하는 밑천이 되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장옥(場屋)에 난입하는 것을 엄금시킨 것은 사습(士習)을 바루고 시원(試院)을 엄숙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거자들 가운데 법금을 범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이 몇 가지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조정의 명령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황하는 정사에 이르러서는 묘당에서 알맞게 강구해야 되는데 지금 영릉(寧陵)을 수개(修改)하는 역사가 또한 반드시 호대(浩大)할 것이니 이렇게 기근을 고하여 오는 때를 당하여는 전적으로 기내(畿內)의 곤궁한 백성들에만 책임지울 수 없습니다. 경아문(京衙門)에서 미포(米布)를 덜어내어 역군(役軍)을 모집해서 역사에 나아가게 한다면 백성을 편하게 해주는 방도에 있어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리고 이르기를,
"시장(柴場)에 관한 일은 이미 대사헌의 소장에 대한 비답에서 윤허하였다. 어찌 허락하고 나서 시행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이는 각사(各司)에서 거행하지 않은 것이지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였다.

 

사간 이연년(李延年)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호남(湖南)·영남(嶺南)·관동(關東)의 한재(旱災)가 매우 참혹한데 양서(兩西)에는 충재(虫災)가 또한 극심하니, 내년에 진구(賑救)할 방책을 미리 강구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각사 노비의 공역(貢役)이 치우치게 무거워 울부짖으면서 원망하고 있으니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의당 진휼하여 변통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대신과 담당 신하를 불러 조용히 자문한 다음, 수성(修省)하는 방도는 성궁(聖躬)에게 책임지우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는 신하들에게 책임지우소서."
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우찬성 송시열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의관 양제신(梁濟臣)에게 수령을 제수하라는 명을 내렸는데도 전관(銓官)이 즉시 봉행하지 않았으므로 성상의 노여움이 진동하여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정청(政廳)에서 밤을 지새우게 한 것이 마치 구금시킨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인하여 그 노여움을 정원에 옮기고 또 약방의 대신에게도 옮겨 전후의 윤음이 매우 중정의 도리를 어겼으니, 이는 나라를 흥기시키는 거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선유들이 말하기를 ‘성인은 노여움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맹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한 번 노하였고 무왕(武王)이 한 번 노하였다.’고 했으니, 성인인들 어찌 노여움이 없었겠습니까. 단지 노할 일을 당하면 노하되 그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 것이니, 바로 밝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 사물에 따라 그 형체를 반사하여 아름다움과 추함이 저 사물에 달려 있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거나 사람을 죽이더라도 노여움이 개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인은 노여움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리를 밝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아 마음의 함양이 순일하지 않게 되면 노여움이 발하는 것이 천둥 같고 치솟는 것이 산과 같아서 그런 줄을 알아도 또한 스스로 그만둘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발하기는 쉽고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은 오직 노여움이 제일 심하다.’ 했습니다만, 노할 때 갑자기 그 노여움을 잊고 사리의 시비를 살필 수 있다면 도(道)에 대해 깨닫는 것이 많게 될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공력을 쓰는 것이 어떠하기에 밖으로 발로되는 것이 이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제신(濟臣)에게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여겨 이런 명을 내리신 것입니까, 아니면 시약(侍藥)한 지가 오래여서 공로가 없지 않았다고 하여 그러신 것입니까. 앞의 말과 같다면 정관(政官)이 스스로 공의(公議)에 의거하여 주의(注擬)할 것이요 뒤의 말과 같다면 사은(私恩)을 잘못 내리는 것은 예로부터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친다고 일컬어왔습니다. 전하께서는 아마도 우연히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신 것일 것입니다. 만일 제신의 공로를 보상하지 않을 수 없어서라고 한다면 정신(廷臣)들에게 하문하여 상사(賞賜)를 후하게 주고 자격(資格)을 올려주는 것도 안 될 것이 없는데 하필이면 억지로 공의(公議)를 거슬려 가면서 수령에 제수한 연후에야 그의 공로에 보상이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 기필코 이렇게 하려 하니 이는 하나의 사(私)자에 가리워져서 그렇게 되었음을 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잘 살피지 못한 탓으로 가리워졌었다고 하더라도 대각(臺閣)이 쟁집(爭執)하고 정관(政官)이 지난(持難)했으면 전하께서는 바로 겸허하고 평온한 심기로 사리의 시비를 살펴 문득 마음을 고쳤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일인데도 어찌하여 성상께서는 이렇게 하지 못하시고서 대간의 간언을 거절하고 또 정관(政官)에게 노여워하며 옮기고 또 옮겨서 평소 예모를 갖추던 대신에게까지 옮기셨습니까. 전하께서 노여움을 잊지 못한 것이 또한 너무 심하셨습니다.
부자(夫子)께서 《주역(周易)》의 전(傳)을 내면서 ‘산 밑에 못이 있는 것이 손괘(損卦)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분을 이기고 욕심을 막는다.’ 하였고, 안자(顔子)가 학문을 좋아함을 논하면서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같은 허물을 두 번 범하지 않는다.’ 했고, 의혹을 분변하는 데 대한 번지(樊遲)의 물음에 답하기를 ‘하루아침의 분노 때문에 자신을 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의관(醫官)을 내어보내고 진찰하여 치료하게 하지 않는 것이 아마도 여기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사물을 부리고 소인은 사물에게 부림을 당한다. 지금 노여워할 만한 일을 보고서 내가 일푼이나마 거기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 있게 되면 이 또한 수고로운 것이다.’ 했고,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희로(喜怒)는 대공(大公)스러운 것으로 순리를 따르는 것이므로 천리(天理)의 극치인 것이고, 중인(衆人)의 희로는 자신을 위한 사사로움으로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인욕(人慾)에 가득찬 것이다.’ 했는데, 이는 모두 격언이요 지론인 것입니다. 우리 선왕(先王)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경연(經筵)에 임어하셨을 적에 천신(賤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불가한 일에 대해서는 우선 놔두었다가 한밤중이 되어 노한 마음이 종식된 뒤에 서서히 살펴서 조처했기 때문에 허물이 적을 수 있었다.’고 했으니, 이것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용의(用意)에서 긴요했던 데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여기에 대해 척연(惕然)히 마음을 움직이고 출연(怵然)히 사모하여 멀리는 유종(儒宗)을 본받고 가까이는 선왕(先王)을 본받기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온 나라의 신민들이 다시 전하에게 기대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은 또 삼가 생각하건대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일이 뜻과 같지 않은 데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은데 뜻이 싹트는 것은 으레 사심을 인하여 발하기 마련입니다. 진실로 여기에 대해 통렬히 살펴 용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이를 인하여 뜻이 생기고 뜻을 인하여 기필하는 마음이 생기고 기필하여 얻지 못하면 노여움이 그 때문에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나자마자 다른 일이 또 닥쳐 와서 돌고 돌아 끝이 없으니 점차 치성한 데 이르게 되며 정사의 득실과 국가의 흥망이 이에서 결판나게 되는 것이니, 어찌 깊이 두려워해야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송 영종(宋寧宗)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주자(朱子)가 부름을 받고 달려가려 하다가 길에서 어필(御筆)의 지휘(指揮)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걱정했었습니다. 이때는 국세가 쇠약하여 융로(戎虜)가 세력을 믿고 침범할 시절이니, 크게 걱정스러운 단서가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주자의 걱정이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그 근본이 병들면 가지와 줄기가 아무리 무성해도 믿을 게 못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일에 대해 신중히 조처하기를 힘씁니다만 삼가 살피건대 마음속에 보존된 사의(私意)의 뿌리를 가차없이 끊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면 성상의 친척이 으레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지난번 대신(臺臣)의 소장에서 실로 이 병통을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병통이 점점 널리 퍼져 말기(末技)의 천신(賤臣)에게 특별한 은혜를 가하기에 이르렀고 그 때문에 지나친 노여움이 발하였어도 전혀 살피지를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변별할 것을 일찍이 변별하지 못한 데 연유된 것입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좌우 시역(厮役)에게도 부당한 관상(官賞)이 가해지고 궁부(宮府)의 요속(僚屬)들에게 으레 포천(褒遷)이 가해지니, 이 점은 바루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또 매양 제갈량의 말을 일컫기를 ‘궁중(宮中)·부중(府中)은 모두 일체(一體)인 것이니 잘하는 사람을 올려주고 잘못하는 사람을 벌줌에 있어 달리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또 인주(人主)를 병들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알맞은 것만 구하고 자신을 바루기는 구하지 않으며 사랑스러운 것은 취하면서도 두려워해야 할 줄은 모르는 데 있다고 했는데, 이는 모두 간절하고 지극한 말인 것입니다.
신은 또 삼가 크게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대저 분노가 발하게 되면 마음을 해칠 뿐만이 아니라 병(病)에 해가 되는 것이 더욱 크기 때문에 의가(醫家)의 부류들은 이를 매우 경계하고 있습니다. 기억하건대 우리 선왕(先王)께서 무술년068)   계하(季夏)부터 미령하시다가 기해년069)   맹하(孟夏)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사이 10여 개월 동안 내외(內外)의 관품(關稟) 가운데 어찌 성상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선왕께서는 진노하고 불평하는 기색을 말하는 사이에 드러낸 적이 없이 덕용(德容)이 늘 화락하여 온화하게 봄볕이 만물을 따뜻이 비추는 것과 같았습니다. 중간에 대장(大將) 이완(李浣)이 공주(公主) 집의 일 때문에 조금 성상의 뜻을 어겼는데 소신(小臣)이 삼가 후부인(候夫人)이 두 분 정자(程子)를 가르친 일을 외어 아뢰니, 선왕께서 즉시 옥음(玉音)으로 선유(宣諭)하기를 ‘가언(嘉言)을 듣게 되니 매우 기쁘게 여긴다.’ 했습니다. 선왕의 성덕(盛德)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정사가 모두 화락하여 신하들이 분발할 것을 생각하였으며 하세(下世)한 뒤에도 만백성들이 추송(追頌)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아, 지금 거울로 삼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선왕의 성덕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심으로 학문에 뜻을 두시어 이치와 욕심의 근원을 정밀하게 살피심으로써 심체(心體)의 현명함을 극진히 하고 정일(精一)한 가운데 존양(存養)하여 파동(波動)하는 단서를 절실히 경계한다면 일에 임하여 현혹되지 않고 느끼는 데 따라 발하여지는 것이 반드시 이치에 따라 절도에 맞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신은 참으로 기축(祈祝)하여 마지않고 있습니다.
신은 또 삼가 아뢸 말이 있습니다. 지난해 초여름 어사(御史)를 보내려고 할 때 선왕께서 직접 소신(小臣)에게 염문(廉問)에 관한 절목(節目)을 주시면서 신으로 하여금 나아가서 대신들과 상의 결정하여 진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직접 증손하여 나누어 주고 파견하셨는데 그 가운데는 전례에 따른 사건이 많았습니다만 여러 궁가(宮家)에서 폐단을 부리는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겉으로 드러내어 특별히 봉서(封書)에 쓰셨으니, 성의(聖意)의 소재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명을 받은 사람이 8인이었는데 그들이 받은 봉서는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으니, 일체(一體)로 염문하게 한 실상을 또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지난번 성상께서 의심하시기를, 선조(先朝)에서 염문하게 한 것은 단지 영남(嶺南) 한 도(道)이고 다른 도는 끼지 않았다고 하셨다 합니다. 그런데 그후 연신(筵臣)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분별하여 진달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당연히 덕음(德音)을 속히 내시어 선왕께서 마치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지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럭저럭 시일을 끌면서 핑계대어 미룸으로써 중외 사람들의 기대를 어겼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의 봉서가 생각건대 지금도 함께 남아 있을 것이어서 진실로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사리에 의거하여 미루어 보더라도 제도(諸道)의 백성 가운데 궁가에게 피해를 받는 자들은 모두 구휼하여 주어야 하는 것이니, 어찌 어느 하나만 택하여 저기에는 인정(仁政)을 베풀고 여기에는 잔인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한 것인데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망설이시는 것입니까. 이는 폐단을 바루어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치에 크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선왕의 지사(志事)를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또한 유감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신은 또 삼가 성상을 위하여 개연(慨然)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조속히 반성하시고 선왕의 유명을 잘 준수하기 바랍니다. 따라서 당시의 사목(事目)에 들어 있는 것 이외에도 아울러 유추하여 빨리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사방의 백성들을 크게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체직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량(淸凉)한 계절에 번연(幡然)히 마음을 고쳐 올라오게 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소장을 올리기를,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이미 잡아다가 추문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신은 당시 총호사(摠護使)로서 어떻게 요행히 면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사패(司敗)에 내려 신의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평안도에 황충(蝗虫)이 더욱 치성했는데 극심한 곳에는 곡식이 빈 대궁만 남아 있을 뿐이었으며 산군(山郡)이 더욱 극심한 재해를 입었다. 안주(安州)·태천(泰川) 등지에는 큰 홍수가 져서 백성들이 표몰(漂沒)되고 곡식이 많이 손상되었다.

 

7월 26일 기묘

산릉 수개 도감(山陵修改都監)의 당상인 여이재(呂爾載) 등이 능소(陵所)에서 들어와서 아뢰기를,
"신들이 여러 석물을 봉심하여 보니 대신이 서계(書啓)한 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이를 수개하는 역사가 하루가 시급한데 개배(改排)하고 개축(改築)할 곳이 있기도 하여 능내(陵內)를 동요시킬 걱정이 없지 않아서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그리고 병풍석(屛風石)·가석(駕石)·대석(臺石)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모두 봉릉(封陵)의 석물이라서 개배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능위의 토석(土石)을 다 철거하여야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에 배설한 대로 두고 보수한다면 메꾸어 지탱시키는 데 불과할 것이니, 신들의 얕은 생각으로는 선처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자각(丁字閣)의 기와를 다시 덮는 것은 이렇게 삼시(三時)로 향사(享祀)하는 때를 당하여는 사세상 곤란한 점이 있으니, 대신과 의논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돈녕(領敦寧) 이경석(李景奭)이 의논드리기를,
"도감의 본뜻은 한때 고식적으로 하는 것에 있지 않고 실로 구원(久遠)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인데 단지 미안스러움을 염려하여 이런 아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식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은 그 득실이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고, 미안스러운 점을 들어 말해도 또한 크고 작은 것이 크게 다릅니다. 개배하는 것이 미안스럽기는 하지만 고식적으로 하는 것이 더욱 미안한 것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크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의논드리기를,
"개축하고 개배할 즈음에 능내(陵內)를 동요시키게 된다면 차라리 우선 기울어지고 함몰되어 틈이 벌어진 곳만을 메꾸고 지탱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지엄한 자리의 더없이 중대한 일이어서 억측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니 봉심한 신하들에게 상세히 물어 개배하거나 예전대로 보수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 원두표(元斗杓)는 의논드리기를,
"병풍석 등의 석물에 틈이 벌어진 곳을 지금 철훼하고 개배한다면 능내가 진동하게 되어 진실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만, 메꾸기만 하려고 한다면 만년 동안 의관(衣冠)을 저장하는 곳이어서 또한 일호라도 구차하고 간략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시역(始役)한 뒤에는 대소 사전(祀典)에 방해가 되는 점이 많을 것이니 우선 3년을 기다렸다가 고치는 것이 사의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고, 영중추 정유성(鄭維城)은 의논드리기를,
"개배할 즈음 진실로 능침(陵寢)을 경동(驚動)시키는 것이 미안스러운 줄은 알고 있지만 전대로 두고 메꾸어 보수할 뿐이라면 오래지 않아 반드시 전처럼 기울고 함몰되는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더없이 중대한 일을 한때 고식적인 것으로 계책을 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의 천견(淺見)으로는 견고하게 개수하고 개배하는 것이 실로 영원한 계책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은 바야흐로 대죄(待罪) 중이어서 감히 헌의(獻議)하지 못했는데, 상이 다시 예관(禮官)을 보내어 우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에게 가서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고 명하였다.

 

유계(兪棨)를 승지로, 조귀석(趙龜錫)을 집의로, 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재(旱災)가 이렇게 참혹한 것은 하늘이 나를 경계시키는 것인데 내가 부덕한 탓으로 죄없는 백성들이 모두 구렁에 나뒹굴게 되었으니, 진실로 딱한 노릇이다."
하니,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위에서 스스로를 자책하시는 하교가 계셨으니 충분히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의 재앙은 꼭 무슨 일에 대한 응보라고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만 근래 전하의 노여움이 누차 발하여 그 사기(辭氣)가 중도를 벗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신하들이 규간(規諫)을 많이 진달했고 성상께서도 이미 뉘우치시었는데, 본심을 잡아 간직하는 공력이 전일만 못해서 그런 것인가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유심(柳淰)이 아뢰기를,
"본도(本島)의 연해변에 있는 일곱 개의 진보(鎭堡)는 당초 설치할 때 뜻이 있어서 한 것이었는데 소속된 군병(軍兵)이 없어서 급한 일이 발생했을 적에 힘을 얻을 수가 없으니, 본부(本府)의 속오(束伍)를 덜어내어 매 보(堡)에 각각 1초(哨)씩 주고 부근의 사람들로 대오(隊伍)를 만들어 평상시에는 본부에서 연습하게 하고 급한 일이 생기면 각보에 옮겨다 쓰게 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대간을 자주 체직시켜 한 사람도 그 직임에 오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실효를 거두기를 책임지울 수 있겠는가. 그리고 헌부는 제사(諸司)를 규검(糾檢)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고 있으니 진실로 자주자주 개좌(開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한 달 안에 개좌한 것이 두어 번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렇게 하고도 실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진실로 지당하십니다. 고례(古例)에 대관(臺官)이 추고를 받으면서 행공(行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는 우물쭈물하여 구차스럽게 용납되는 것은 그 자취가 험사(憸邪)와 같다고 한 등등의 말 때문에 추고를 받았었습니다만 이 때문에 체직시키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대관들은 조금만 미편한 일이 있으면 번번이 인혐하여 기필코 체직된 뒤에야 그만두고 있습니다. 이 뒤로는 변통시키는 거조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민서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관들이 어찌 추고받으면서 근무하려 하겠습니까. 이는 경솔히 의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위에다 책난(責難)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신(誠信)을 가지고 말들을 하는데 스스로 하는 일을 살펴보면 반드시 말한 것과 같지는 않다. 정병(呈病)하는 내용으로 살펴보더라도 그 증세가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이 쓰고 있지만 그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이것이 어찌 성신으로 대하는 도리이겠는가. 이른바 명사(名士)라고 우쭐거리면서 스스로 고아(高雅)한 체하는 자들도 처사는 반드시 그렇지가 못하여 갱참(坑塹)에 떨어져 있는 자와 다를 것이 없다."
하니, 민서가 아뢰기를,
"위에서 한재를 걱정하며 허물을 자처한 하교에 대해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입시한 신료들은 직접 성상의 분부를 들었습니다만 먼 외방의 백성들은 성상의 근심과 수고로움이 이러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인심을 크게 위로하는 거조가 없었습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발단된 곳이 있는 것이니 의당 이를 인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할 것은 물론 구언(求言)하는 전교를 내려 여러 가지 계책을 모으고 크게 진작시켜 천재(天災)에 응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의당 비망기(備忘記)를 내릴 것이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의 초안을 작성하라."
하였다. 민서가 또 국가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었다고 하여 호위 군관(扈衛軍官)을 파할 것을 청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의견도 민서와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의논한 지 오래다. 일찍이 연양(延陽)070)  의 차자 내용을 인하여 혁파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다. 민서가 구규(舊規)에 의거하여 경연을 정지하는 날에는 고사(故事)를 서진(書進)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른바 고사(故事)라고 한 것은 옥당의 관원이 서책(書冊)을 고열(考閱)하여 고사 가운데 군덕(君德)과 치도(治道)에 절실한 것을 취하여 정강(停講)하는 날 써서 진달하게 한 것을 말하는데 간혹 이를 인하여 부론(附論)하여 풍유(諷諭)하는 것이 있었다. 뒤에 오시수(吳始壽)의 진달에 의거하여 정폐(停廢)되었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88면
【분류】과학-천기(天氣)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중앙군(中央軍)


[註 070] 연양(延陽) : 이시백(李時白)의 봉호(封號).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과매(寡昧)하고 부덕한 내가 외람되이 나라의 계통을 받들었는데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없는 때가 없었다. 근년에는 한재·황충과 기근이 거듭 닥쳤으므로 주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조처할 바를 모르고 있다. 지금 이삭이 패는 계절인데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지가 이미 20일에 이르고 있는데 조용히 그 허물을 반성하여 보면 그 죄가 실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말이 여기에 이르니 내 몸이 아픈 것 같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대소 신민(臣民)이 모두 숨김 없이 나의 잘못을 진달하게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십행(十行) 윤음(綸音)의 사지(辭旨)가 간절하여 천지와 인심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신들이 더이상 감히 윤색할 수가 없으니 이 하교를 곧바로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한 마디 말이 어찌 남김없이 다 드러내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간곡하고 정녕한 하교를 대신 초안을 작성하여 조속히 포고하라."
하였다.

 

7월 28일 신사

이때 한재가 자심하여 대신(大臣)을 보내어 사직·종묘에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오지 않았다. 또 근시(近侍)를 보내어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 등처에 빌게 했는데, 향(香)을 받는 날 비로소 비가 내려 연일 그치지 않았으므로 조야(朝野)가 기뻐하였다.

 

북도(北道)의 경흥부(慶興府)에 우역(牛疫)이 크게 치성하였다.

 

7월 29일 임오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정사(呈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행 사직(行司直) 여증제(呂曾齊)가 전지(傳旨)에 응하여 소장을 올렸다. 그 대의(大意)는 울컥 노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는데, 전일 민광소(閔光熽)·박세성(朴世城)·양제신(梁濟臣) 등의 일을 두루 열거하여 아뢰기를,
"전하의 노여움이 모두 세 번 발했는데 장차의 경우에는 어찌 기왕의 세 번 노한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즉위하신 지 겨우 1년이 되었는데도 경악스럽기 그지없는 변이 춘추(春秋) 시대의 배도 더 되니, 어떻게 혹 그럴 수 있다고 핑계대면서 수성(修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전후 세 번 노했는데 그것이 엎치락뒤치락하여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대로 상하의 사이가 비색하여 격리된 형상을 이루었습니다. 가뭄이 너무도 극심하여 가을 이삭이 모두 말라죽었고 충재(虫災)가 또 치성하여 남은 대궁도 거의 다 갉어먹었으니, 불쌍한 우리 민생들은 대명(大命)이 끊기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두어 줄 자신을 탓하는 말을 가지고 상천(上天)의 노여움을 풀려고 하고 단비가 내리는 은택을 바라고 있으니, 전하께서 재변을 만나 공경하는 것이 정성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이어 호피(虎皮) 1령(領)을 내렸다.

 

7월 30일 계미

처음 의관 양제신(梁濟臣)을 특별히 금천 현감(衿川縣監)에 제수하고 나서 이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많았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의 소장에서도 논한 바가 있었으나 상이 채택하여 시행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여증제(呂曾齊)의 소장에서 시열(時烈)의 거취(去就)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말을 했다. 상이 이에 정원에 하교하여, 당초 시열의 소장에 대한 비답에서 그 내용이 조리에 맞게 분명하지 못했으니 명백한 하교가 없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제신(濟臣)의 상격(賞格)에 대한 전지(傳旨)를 가져다가 3품의 녹직(祿職)에 붙이라고 고쳐서 내렸다.

 

정언 윤지미(尹趾美)가, 이후(李垕)에게 비난을 받았고 또 여증제(呂曾齊)가 소장을 올려 양제신(梁濟臣)을 논하지 않은 것을 지척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여 인피하였으며, 장령 정박(鄭樸), 지평 여성제(呂聖齊), 집의 조귀석(趙龜錫)도 제신의 잘못을 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홍문관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 감사 김여옥(金汝鈺)이, 본도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증광(增廣)과 동당(東堂) 초시(初試)에 있어 두 곳에다 장옥(場屋)을 설치하는 것은 폐단이 있다고 하면서 본도의 중앙에 도회소(都會所)를 정하여 청남(淸南)·청북(淸北)의 응시하는 유생(儒生)들을 합쳐서 한 곳에서 시험보이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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