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4권, 현종 1년 1660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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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신

오정일(吳挺一)을 도승지로, 이수인(李壽仁)을 사간으로, 송시열(宋時烈)을 병조 판서로,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이원정(李元禎)을 장령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지평으로, 심황(沈榥)을 정언으로, 유철(兪㯙)을 경기 감사로, 홍명하(洪命夏)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 송씨(宋氏)가 졸(卒)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인조조(仁祖朝) 때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이 졸서(卒逝)했을 적에는 권정례(權停禮)로 거애(擧哀)하고 단지 대내(大內)에서 편의에 따라 행례(行禮)하였으며, 효종조(孝宗朝) 때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의 상사(喪事)가 있을 적에도 똑같이 하였습니다. 지금 이 거애 절목(擧哀節目)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미 행한 전례에 따라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禮)에 이르기를 ‘무릇 중상(重喪)을 벗기 전에 경복(輕服)을 당하면 그에 해당되는 복을 입고 곡(哭)을 하되 끝나고 나서는 중복을 다시 입으며, 그후 경복을 벗을 적에도 다시 한 번 경복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예법을 제정한 것은 이러합니다만 제왕(帝王)의 복은 사대부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위에서 바야흐로 최질(衰絰)을 입고 계시므로 지금 이 복제(服制)는 일이 변례(變禮)에 관계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거애(擧哀)하는 절차는 있습니다만 복제에 대해서는 기재하지 않았으니, 그 뜻이 기년(期年)에서 끝나는 것을 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금에 거울삼아야 될 것은 선왕(先王)의 예법이 아니겠습니까. 유사로 하여금 예(禮)를 고증하게 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아뢰기를,
"제왕의 복제는 사서인(士庶人)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문에 이른바 중상(重喪)과 경상(輕喪)은 오늘날에 비의하여 의논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다른 대신들의 의논도 이와 같자, 상이 의논한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복계(覆啓)하기를,
"《오례의》에는 전하가 왕비(王妃)의 부모를 위하여 거애한다고 한 조항 밑에 3일 동안 최복(衰服)을 입고 벗는다고 한 글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전례인 것이니, 지금도 《오례의》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바야흐로 최질(衰絰)을 입고 있는 중이니 경복(輕服)의 제도는 변례(變禮)인 듯하기 때문에 예관이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한 그 의도가 여기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대신의 수의(收議) 내용으로 살펴보건대 마치 《오례의》에는 원래 복제(服制)가 없는 것처럼 했는데, 이는 해조의 계사가 상세하고 극진히 하는 데 흠이 있었던 소치인 것입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또 다시 명백하게 품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에 과연 최복(衰服)을 3일 동안 입고 벗는다는 글이 있는데 인조조에서는 단지 거친 베로 된 띠로 대내(大內)에서 성복(成服)했으며 효종조에서도 또한 그렇게 했습니다만 베로 띠를 만드는 예제(禮制)에 대해서는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문에는 3일 만에 벗는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성복(成服)의 절목에 대해서는 또한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양조(兩朝)의 일이 참작하여 행례한 것 같습니다만 상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대신들의 헌의는 기년에 끝낸다는 뜻을 취한 것 같습니다만 정원의 계사(啓辭)가 이제 또 이러하니, 막중한 예제를 천견(淺見)으로 의논할 수 없습니다.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양조(兩朝)에서 행한 규례가 있으니 참작해서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위에서 바야흐로 최질(衰絰)을 입고 계시니 경상(輕喪)의 제도는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불가불 다시 대신들에게 순문(詢問)하여 미진했다는 뉘우침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영돈녕 이경석이 아뢰기를,
"고례(古禮)에는 기년에 끝낸다고 되어 있는데 《오례의》에는 3일에 벗는다는 글이 있으니, 그 뜻이 있는 데가 있는 것입니다. 왕비 부모의 상(喪)은 외조부모(外祖父母)의 상과 같은 것이어서 지존(至尊)이라고 해서 완전히 끊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니, 중복(重服)이라는 것 때문에 완전히 폐기할 수 없다는 것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양조(兩朝)에서 거친 베로 띠를 만든 제도가 후한 쪽을 따른다는 뜻에 어긋나지 않고 예의(禮意)에도 거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야박한 풍속을 도탑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아뢰기를,
"《오례의》에 기재되어 있는 왕비의 부모를 위하여 3일 동안 최복을 입고 나서 벗는다고 한 것과 전례(前例)에 거친 베로 띠를 한다는 것은 무고(無故)할 때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일에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임금이 상(喪)을 당하였으면 감히 사상(私喪) 때문에 성복(成服)하지는 못한다고 했는데, 이에 의거하여 미루어보면 경솔히 의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은 예(禮)를 아는 사람이 아니니 어떻게 자신의 의견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원두표(元斗杓)와 정유성(鄭維城)의 의견은 모두 태화와 같았다. 예조가 대신들의 의논을 가지고 다시 위에서 재결할 것을 청하니, 상이 태화의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8월 2일 을유

육경(六卿) 가운데 외방에 있는 사람에 대해 올라오라고 하유한 규례가 없었는데도, 상이 병조 판서 송시열(宋時烈)은 다른 신하와 다르고 하여 특별히 하유하라고 명하였다.

 

수어사(守禦使) 홍중보(洪重普)를 파직시키고 나서 그의 숙부인 명하(命夏)를 대임시키자, 재차 차자를 올려 간절히 사양하기를,
"숙질(叔姪) 간에 밀부(密符)를 주고받는 것은 마치 한 집안에서 사사로이 물건을 전하는 것과 같아 더욱 미안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 재능에 따라서 사람을 쓰는 것인데 숙질 사이라고 해서 상피(相避)할 것이 뭐 있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8월 3일 병술

전후 기우제를 지낸 제관(祭官)에게 상을 내렸다.

 

홍문관 응교 심세정(沈世鼎), 교리 김만기(金萬基), 부교리 김만균(金萬均), 부수찬 홍주삼(洪柱三)·이민적(李敏迪) 등이 차자를 올려 희로(喜怒)를 경계하여 원기(元氣)를 배양하고 사무를 줄여 정섭(靜攝)을 편케 하고 자주 인접하여 답답함을 통창시키게 할 것을 청하고 또 재변(災變)을 구휼하는 여섯 가지 일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1. 청컨대 내사(內司)에서부터 각 아문(衙門)과 감영(監營)·병영(兵營)·통영(統營)에 이르기까지 저축되어 있는 것을 모두 그 반을 덜어내게 하고 경중(京中)의 역사(役使)는 각 아문에서 낸 금포(金布)의 숫자를 헤아려 용립(傭立)시키고, 바닷가의 둔방(屯防)은 제영(諸營)의 재곡(財穀)으로 또한 대고(代雇)하게 하며, 모든 군사들에게 베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일체 감면시키고 사섬시(司贍寺)의 공포(貢布)도 그 반을 감하게 하소서.
1. 위의 어공(御供)과 궁중(宮中)의 용도 가운데 줄일 수 있는 것에 관계된 것은 특별히 감해 주소서. 장사(將士)들 가운데 서울에서 식사하는 사람이 거의 1만여 명이나 되는데 어영청(御營廳)의 상번 군사(上番軍士)도 수천 명이 되니, 우선 이들의 파견을 그만둠으로써 군식(軍食)을 줄이소서. 그리고 상방(尙方)·무고(武庫)의 공역(工役)과 장작감(將作監)의 급하지 않은 영선(營繕)은 또한 모두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이밖에 내외의 제사(諸司) 가운데 재물만 손상시킬 뿐 급하지 않은 일은 일체 없애버릴 것이며 외방의 주전(廚傳)과 도종(導從)에 이르러서도 간략한 쪽을 따르게 함으로써 대소 상하로 하여금 한결같이 백성을 진구(賑救)하는 정치로 귀일되지 않는 것이 없게 하소서.
1. 해도(海島)와 산성(山城)의 조곡(糶穀)은 다 징수하지 않게 하소서.
1. 각 아문에서 무판(貿販)하여 이식(利息)을 취하는 것이 원근의 병폐가 되고 있으니, 거듭 신하들에게 명하여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없게 하소서.
1. 훈국(訓局)·어영(御營)·수어(守禦)·총융(摠戎) 등 군문(軍門)의 둔전(屯田)을 혁파시켜 모두 타부(他部)로 귀속시키고 장사(將士)와 기계(器械)에 드는 것은 공부(公賦)를 분할하여 비용을 넉넉하게 하소서.
1. 관동(關東)의 시장(柴場)을 혁파한 예(例)를 미루어서 유사(有司)에게 분명히 하교하여 수교(手敎)의 유무를 따지지 말고 궁척(宮戚)의 친소(親踈)를 논하지 말고 전에 입안(立案)한 시장(柴場)·염분(鹽盆)을 일체 혁파하게 하고, 민전(民田)을 침탈하여 장원(庄園)을 설치한 곳도 일일이 조사하여 조처하게 하며, 사대부나 토호들이 점유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거듭 명하고 드러나는 대로 치죄하여, 백년 동안 백성을 병들게 한 큰 폐단을 깨끗이 씻어버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계하고 깨우친 말은 그 뜻이 매우 절실한 것이니, 삼가 유념하여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목별로 진달한 일은 의당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8월 4일 정해

중전(中殿)이 성복(成服)하였다.

 

행 대사간 송준길(宋浚吉)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기를,
"신의 몸은 멀리 있으나 아뢴 것을 망설임 없이 번번이 채용해 주셨으니, 어찌 물러나야 하고 나아갈 수 없는 의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묵은 병이 골수에 파고 들어 여름과 가을 이후로 한결같이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풍헌(風憲)의 장관(長官) 직을 오래 비워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조속히 개체(改遞)를 허락해 주시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며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8월 5일 무자

이정영(李正英)을 대사간으로, 김수항(金壽恒)을 대사성으로, 윤지미(尹趾美)를 정언으로, 황준구(黃儁耉)를 장령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사인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병조 참판으로 삼고, 사복 첨정(司僕僉正) 유정(柳頲)을 본시(本寺)의 정(正)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유정이 첨정으로 있을 적에 말들이 모두 살찌고 윤택했는데, 상이 직분을 잘 수행했다 하여 이 명이 있었다. 헌부가 개정(改正)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집의 목겸선(睦兼善)이 전지(傳旨)에 응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전결(田結)에 부세(賦稅)를 더 부과하여 뜯어가는 방법이 많으며 수령이 적격자가 아니어서 박탈을 일삼으며 부마(駙馬)의 집에서 전원을 널리 점유하며 여러 궁가의 노예가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삶을 즐기는 뜻이 없어 모두 난(亂)을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벌겋게 썩은 곡식을 이전하는 것이 도리어 민폐가 되고 있으니, 창고의 것을 다 점검하여 썩은 것을 탕척시키고 다시 되어 석(碩)으로 만듦으로써 민간들이 헛되이 받는 억울함이 없게 하소서. 또 서북(西北)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 고을의 각사 노비 가운데 도고(逃故)가 명백한 경우를 조사하여 아뢰게 하여 해조(該曹)에서 품처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수령이 자주 체직되는 데 따른 폐단과 역당(逆黨)의 족속들 가운데 당초 실정을 모른 자들이 오래도록 유배(流配)되어 원통함을 품고 있는 것 또한 화기를 손상시키고 재변을 부르기에 충분합니다."
하고, 이어 사마광(司馬光)의 인(仁)·명(明)·무(武)에 대한 세 가지 말과 이강(李綱)의 영(英)·철(哲) 두 글자를 가지고 면려할 것을 진달하였다.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8월 6일 기축

산릉(山陵)의 석물(石物)이 경함(傾陷)되고 능위에도 여러 군데 틈이 벌어진 것에 대해, 의논하는 사람들이 개배(改排)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그대로 수보(修補)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예랑(禮郞) 이유명(李惟明)을 보내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에게 수의(收議)하였는데, 시열이 의논드리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의당 경함되고 틈이 벌어진 곳의 대소와 경중을 살펴 끝내 다시하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경우에는 뒤에 추가로 절구질하고 쌓는 것이 미안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대로 두고 보즙(補輯)하여 만세토록 장구히 편안하게 할 수 없어 크게 미안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또 생각건대 고례(古禮)에는 천자(天子) 이외에는 모두 막바로 광중(壙中)을 파는 제도를 쓰게 되어 있으므로 문왕(文王)의 장례도 관위에 흙을 쌓는 것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정자(程子)는 선제(先帝)의 능(陵)에 목골(木骨)과 철조(鐵罩)의 제도를 사용하는 것이 사세상 뒷날의 걱정이 있을 것이라 여겼으므로 기필코 후상(后喪)을 부장(附葬)하려 하였고 인하여 철조를 철거하고 다시 석곽(石槨)을 쓰려 했습니다. 대저 철조를 철거하고 석곽을 쓰는 즈음에 반드시 크게 움직이고 크게 진동시켜 놀라게 하는 일이 있었을 터이지만 정자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신자(臣子)가 군부(君父)를 봉안함에 있어 고식적으로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역사(役事)는 단지 지면(地面)에서만 있는 것이니 정자의 말에 견주어 보면 그 경중이 아주 현격한 차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의 의논으로는 의당 상식(上食)을 정지하는 때를 조금 기다려 처음처럼 개작(改作)해서 한결같이 편안하고 공고하게 하여 영구히 가게 하는 계책을 세우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것 같습니다.
신은 이에 대해 또 특별한 소회가 있습니다만 보고 듣는 사람이 크게 놀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감히 군부(君父)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석병(石屛)의 제도는 단지 보기에 아름답게 하기 위한 것으로 높고 위태로워 공고하게 하기가 어려우므로 결국 기울거나 무너지게 되는 것은 필연의 형세인 것입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영릉(英陵)071)  에는 그 제도를 쓰지 않고 단지 흙으로만 봉분을 만들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후성(後聖)이 의당 본받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의견으로는 이번 일을 인하여 징비(懲毖)하여, 앞뒤의 석병(石屛)을 철거하고 여러 가지 의도(儀度)를 한결같이 영릉의 유법(遺法)을 준행하여서 한편으로는 능침(陵寢)이 영원히 공고하게 할 계책을 세우고 한편으로는 선왕(先王)의 인자하고 검소한 덕을 밝힌다면 일에 있어서나 이치에 있어서나 양쪽 다 제대로 되게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인황(仁皇)은 검소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인데도 인산(因山)의 봉안(奉安)에 번거로운 비용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 어찌 인황의 마음이겠는가.’ 하였고, 정자(程子)도 능침을 융숭하게 하는 것은 선왕의 검소한 덕에 어긋나게 되고 사황(嗣皇)의 효도에도 손상이 되는 것이어서 실상 아무런 유익이 없고 뒤에 누만 끼치게 된다고 했는데, 이는 모두 격언이요 지론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삼가 뭇 의논에 크게 어긋나는 것인 듯하니 성상께서 용서하여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정자각(丁字閣)의 일에 이르러서는 우선 내년을 기다리자는 말이 사의에 맞는 것 같습니다."
하고,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은 아뢰기를,
"영원하고 견고하고 완전하게 하기를 힘써 도모하려 하는 것은 진실로 신하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미덥게 해야 한다는 도리에 맞는 것이니, 어떻게 감히 그 사이에 이의(異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3년 안에 하루에 세 번 향사(享祀)할 때 천동(遷動)시키는 큰 역사를 하는 것은 사세를 상상해 보면 여러 가지로 편안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서 진동시키고 놀라게 하는 것만이 걱정스럽고 두려운 것이 아니니, 지금은 우선 석물이 기울거나 무너진 곳에 따라 대략 보수를 하여 기운 것을 바로 세우고 벌어진 틈을 합치게 하시며 뒷날의 형세가 다시 어떠한가를 살펴 서서히 큰 역사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정자각에 이르러서는 바로 이곳이 향사(享祀)하는 장소이니 더욱 역사를 일으키는 데 꺼려집니다. 기와의 빛깔은 변했지만 새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우선 내년 가을을 기다렸다가 수개(修改)하는 것이 또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다시 대신들에게 수의할 것을 청하니,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수개하는 일은 의당 3년이 나기를 기다린 뒤에 해야 하며 이미 배설(排設)된 의물(儀物)에 대해서는 경솔히 의논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수개에 대한 여부는 오는 가을 산릉(山陵)을 배알한 뒤 의정(議定)하게 하겠다고 답하였다.

 

집의 목겸선(睦兼善)이 아뢰기를,
"대소 공기(公基)는 각기 정한(定限)이 있는 것인데 지금 사람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관사에 고하지 않은 채 멋대로 나누어 점유하여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미 지어진 집을 하루아침에 철훼하기는 곤란하지만 그 가운데 법제에 지나친 것은 기한을 넉넉히 주어 철거하게 하고 그 집의 간가(間架)를 계산하여 법에 의거하여 세금을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이밖에 공기(公基)에다 집을 짓는 자는 드러나는 대로 통렬히 다스리게 하소서.
도로(道路)에 이르러서도 대(大)·중(中)·소(小)에 각기 한정이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탓으로 도성(都城) 밖 10리 안에 미나리꽝을 넓히면서 구로(舊路)를 침범하여 끊고 있으니, 한성부로 하여금 척량(尺量)하여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7일 경인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예조가 바야흐로 배릉(拜陵)의 길일(吉日)을 가리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성후(聖候)가 미령한 때를 당하여 덧들릴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 봄에 배릉하려다가 하지 못했으니 금년 가을에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능위에 틈이 벌어진 곳은 직접 살펴보고 싶으니 속히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근래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정자각의 기와가 지난번 폭우를 겪은 뒤로 붉은 색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고 하니, 기와를 덮을 적에 남아 있던 흙이 미처 씻겨 내려가지 않은 소치인 것 같습니다. 장인(匠人)과 해랑(該郞)이 이 때문에 억울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와 공조 판서가 가서 다시 봉심(奉審)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에서, 각 아문과 감영·병영·통영 들에 대해 모두 저축하고 있는 것의 반을 덜어내게 하여 군사들에게 거두는 베의 반을 탕감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과연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백성들이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다만 사세상 쉽사리 조처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어영군(御營軍)의 상번(上番)을 파하는 일은 우선 목전에 급한 일이 없어 이런 의논이 있는 것입니다만 그 번량(番糧)은 사세상 다른 데 쓰기가 어렵습니다. 상방(尙方)과 무고(武庫)의 공역(工役) 및 장작(將作)072)  의 급하지 않은 영선(營繕)을 비롯하여 내외 제사(諸司)의 급하지 않은 데 쓰는 재용(財用)을 일체 쓸어버리고 외방의 주전(廚傳)과 도종(導從)도 아울러 간략한 쪽을 따르라고 한 등등의 일은 일체 차자의 내용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군기시(軍器寺)의 월과(月課)를 진상(進上)하게 하는 것도 아울러 정지시키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각 아문에서 무판(貿販)하여 이식을 늘리는 것과 인족(隣族)에게 나누어 징수하는 폐단은 지금부터 엄히 계칙하여 금단시키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훈국(訓局)의 둔전(屯田)을 혁파시킬 것을 청했는데 둔전을 혁파한 뒤 해조로 하여금 훈국의 수요를 공급하게 한다면 결코 지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근래 신설한 것 가운데 불편한 곳은 마땅히 의논하여 조처해야 하는데 도감(都監)에도 대신(大臣)이 제조(提調)로 있으니, 도감으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설한 곳은 도감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이 뒤로는 절대로 더 설치하는 일이 없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옥당이 차자를 올려 조목별로 진달한 내용이 매우 많은데 사세가 곤란하여 시행하는 것이 많지 않으니 참으로 미안스럽습니다. 여러 궁가(宮家)의 시장(柴場)·염분(鹽盆)·어전(漁箭) 등에 대한 일도 잘 처리될지 모르겠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사여(賜與)한 것이어서 혁파시키기는 곤란합니다만 이 뒤로는 금단시켜야 됩니다."
하고, 교리 김만기(金萬基)는 아뢰기를,
"시장(柴場) 등에 대한 일은 채납하여 시행하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시장이란 것은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입안(立案)하는데 그 가운데 있는 민전(民田)에 대해 대부분 세금을 거두고 거기서 생산되는 물품 가운데 봉밀(蜂蜜)·마포(麻布) 같은 것도 징수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어찌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 가운데 극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큰 바다를 입안한 것은 더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하고, 좌상 원두표(元斗杓)는 아뢰기를,
"시장이라고 일컬으면서 각종 물품을 수봉(收捧)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느 궁가에서 이런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사하여 조처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사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헌부의 차자에 궁노(宮奴)들이 행패를 부린다고 한 일의 경우 이것은 바로 헌부가 금단해야 하는 일이니 의당 일일이 엄히 다스리게 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법사(法司)에서 스스로 해야 될 일을 이렇게 논청(論請)하니 알 수가 없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강도(江都)·남한(南漢)의 곡식을 옮기는 것의 경우 창고의 것을 모두 꺼내어 점검해서 썩고 뜬 것은 탕척시키고 모감(耗減)된 숫자를 다시 헤아리게 할 것을 청했는데, 강도에서는 유수(留守) 유심이 막 이렇게 할 것을 청하여 거행하고 있으니, 남한도 이에 의거하여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각청(各廳)의 군관(軍官)을 파기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호위 군관(扈衛軍官)을 혁파하는 일은 신이 누누이 진달한 적이 있습니다만 지난번 연신(筵臣)의 말이 더욱 요긴했으니, 의당 속히 혁파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大臣)들이 입시했을 때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수령을 미미한 죄로 경솔히 파직시키지 말자고 한 일은 시행할 만합니다."
하고, 태화가 또 아뢰기를,
"역당(逆黨)으로 편배(編配)된 자에 대해 품처하게 하자는 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비록 사정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는 국전(國典)인 것인데 어떻게 폐각시키고 갑자기 탕척시킬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목겸선(睦兼善)이 오늘 입시했다면 신이 면척(面斥)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구언(求言)했으니 끝까지 말한 것이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에서 진달한 바 각사 노비(各司奴婢)의 신공(身貢)을 반감시키자는 일은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분(年分)을 다시 살핀 뒤에 기황(饑荒)이 더욱 극심한 고을은 다시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영남(嶺南)과 호서(湖西)가 가장 흉년이 극심하니 진구책(賑救策)을 신참내기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양도(兩道) 감사의 과만(瓜滿)이 멀지 않았으니 명년의 맥추(麥秋)를 기한으로 잉임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판(吏判)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강도(江都)·자연(紫燕)은 사세상 겸하여 집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명하(命夏)가 지금 수어사(守禦使)의 직임을 맡고 있는데 과연 아울러 직무를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조만간 일이 있게 되면 이완(李浣)을 강도 수장(江都守將)으로 삼아야 하니, 이완으로 하여금 강도와 자연 두 곳을 구관(句管)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이때 인천(仁川)의 자연도(紫燕島)를 강도(江都)의 보거(輔車)로 삼고 조가(朝家)에서 경리(經理)하는 것이 있었으므로 특별히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구관(句管)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90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농업-전제(田制) / 농업-임업(林業) / 수산업(水産業) / 구휼(救恤) / 인사-관리(管理) / 재정-창고(倉庫) / 재정-역(役)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관방(關防) / 신분-천인(賤人) / 사법-치안(治安)


[註 072] 장작(將作) : 선공감(繕工監).

 

8월 8일 신묘

예조 판서 윤강(尹絳), 공조 판서 채유후(蔡𥙿後)가 산릉(山陵)에서 돌아와 서계(書啓)하였다.
"근일 비에 진흙이 씻겨서 기와에 별로 누런 빛이 없었습니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여섯 번째 정사(呈辭)하였으나,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상이 승지를 명하여 정원에 체류된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우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금년의 가뭄과 황충은 전고에 없던 것이어서 앞으로 백성을 진구할 계책을 의당 불에 타거나 물에 빠진 것을 구하듯이 해야 됩니다. 여러 신하들 가운데 진언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민간의 절박한 걱정이나 원망과 수심에 잠긴 정상에 대해서는 수령처럼 상세히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런 내용을 팔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각기 여러 고을의 폐단을 묻게 한 다음 일일이 계문하게 하소서. 이어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게 하여서, 무릇 백성을 편하게 하고 폐해를 제거할 수 있는 일은 변통도 시키고 혁파도 시키게 하소서. 그리하여 원근(遠近)이 모두 혜택을 입게 된다면 구황(救荒)하는 정사에 있어 도움되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여름 3개월 동안 죄인을 가두고 형추한 계본(啓本)을 살펴보건대 형틀을 씌우고 고신(考訊)한 숫자가 이처럼 많으니, 타도(他道)의 일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화기를 손상시키고 재변을 부르기에 충분한 것이니, 또한 제도(諸道)의 감사로 하여금 즉시 소결(疏決)하고 계문하라는 내용을 아울러 하유에 언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울러 따랐다. 용익이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기읍(畿邑)의 소임을 맡았을 적에 사도시(司䆃寺)의 갱미(粳米)를 방납(防納)하는 것이 민간의 큰 폐단이 되고 있는 것을 상세히 알았습니다. 처음에 어공(御供)하는 일이 중대하다는 이유로 배수(倍數)를 받아들였는데 날로 점점 뛰어 올라 많게는 10배에까지 이르렀고 적어도 6, 7배를 밑돌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근이 매우 참혹하여 쌀낱이 금(金)과 같은 때에 결코 잘못된 습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백성들의 곤고를 가중시켜서는 안 됩니다. 각 고을로 하여금 직접 받아 와서 본시(本寺)와 함께 숫자를 조회하여 교납(交納)하게 함으로써 방납의 폐단을 영원히 제거하고 기민(畿民)들에게 일푼이나마 혜택이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세히 분부하여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좌부승지 윤집(尹鏶)이 아뢰기를,
"일이 미세하기는 하지만 민폐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감히 진달하겠습니다. 신의 거처가 광주(廣州)에 있기 때문에, 내농포(內農圃)의 하인들이 강(江) 밖에서 무리를 지어 횡행하면서 공상(供上)한다고 일컬으며 전지(田地)의 채소를 멋대로 탈취하여 가는가 하면 가을이 된 뒤에 저장해 둔 무우까지도 캐내어 가져가는 것을 많이 목도하였습니다. 민간의 백성들이 원망하고 고통스럽게 여길 뿐만이 아니라 사체로 헤아려 보더라도 또한 매우 미안하니, 의당 해내관(該內官)을 추고(推考)하고 농포의 하인은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8월 10일 계사

상이 안질(眼疾) 때문에 뜸을 떴다. 의관들이 들어와 진찰하니, 상이 이르기를,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증세 때문에 근래 매우 고통을 받고 있으니, 우선 이 증세를 치료하고 싶다."
하고, 이어 뜸을 떴다. 도제조 정태화(鄭太和) 등은 들어와 합문(閤門) 밖에서 부복하고 있다가 물러갔다.

 

박세모(朴世模)를 사간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삼았다.

 

8월 11일 갑오

상이 뜸을 떴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차자를 진달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가, 호남(湖南)의 경시관(京試官) 경최(慶㝡)가 시사(試士)하고 출방(出榜)할 적에 어떤 사람의 피봉(皮封)을 다른 사람이 지은 것에다 잘못 합쳤으니 혼암하여 저지른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참시관(參試官)·당해 차비관(差備官)과 함께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고할 것을 청했는데, 따랐다.

 

평안도 의주(義州)·선천(宣川) 등지에 우박이 내려 곡식을 손상시켰으며 용강(龍岡)에 내린 우박은 모두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형상이 매우 분명하였고 마치 눈이 쌓인 것 같았는데 한참 동안 녹지 않았었다. 이 우박이 지나간 곳은 초목(草木)의 잎이 모두 떨어져 된서리가 내린 것과 같았다.

 

8월 12일 을미

상이 뜸을 떴다.

 

8월 13일 병신

윤비경(尹飛卿)을 정언으로 삼았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여덟 번째 정사(呈辭)하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지원이 다시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 전주(全州)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목화(木花)의 과방(窠房)이 모두 떨어졌고 익어가던 올벼도 손상을 입었다. 도내 50여 고을이 똑같이 큰 피해를 당했는데 우도(右道)의 바닷가가 더욱 극심하였다.

 

8월 15일 무술

헌부가 아뢰기를,
"산릉(山陵)의 공역(工役)을 끝마친 지가 1년도 안 되었는데 봉배(封排)한 석물이 갑자기 기울고 터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이를 감동(監董)했던 신하들이 이를 이유로 죄를 받았으니, 당초의 상자(賞資)도 실은 헛되이 받은 것이 됩니다. 국언(國言)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조론(朝論)도 답답해 하고 있으니, 산릉 도감의 당상과 낭청이 받은 가자(加資)를 아울러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6일 기해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의 상(喪)이 난 지 만 15일인데, 중전(中殿)이 공제(公除)073)  하였다.

 

8월 17일 경자

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조귀석(趙龜錫)을 사인으로, 이광직(李光稷)을 검열로, 박장원(朴長遠)을 형조 참판으로, 이일상(李一相)을 병조 참판으로, 이진(李𥘼)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대사간 이정영(李正英)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저축 중에 흩어준 조곡(糶穀)이 많기는 하지만 아직도 여유가 있어 언젠가 긴급한 일이 있을 적에 쓸 수가 있으니, 금방 굶어 죽을 상황에 처해 있는 백성을 구휼하지 않는다면 경중과 본말에 있어 사의에 맞는 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두 곳의 군국(軍國)의 수요 때문에 적곡(糴穀)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모곡(耗穀)을 제하고 징수하여 받아들여도 또한 혜택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저축해 둔 곡식도 흩어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데 이미 대여해 준 것을 상환하라고 독촉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묘당에 하문하시어 조속히 품처하게 함으로써 절박한 지경에 처해 있는 목숨을 구원하게 하소서.
각 아문에서 은(銀)을 사는 것이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쌓여 시장의 백금(白金)이 모두 공가(公家)로 들어가기 때문에 백성들이 수은(囚銀)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각사(各司)의 공물가(貢物價)와 군병(軍兵)·서례(胥隷) 들의 요포(料布)를 이것으로 반반씩 이급(移給)하게 한다면 경비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고 또한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진다는 걱정을 없앨 수 있습니다.
평안도에는 전부터 요군(遼軍)이 있었습니다. 천조(天朝)의 사행(使行)을 호송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일이 없이 이름만 아직 남아 있어서 그대로 세포(細布) 3필씩을 거두고 있으니, 무거운 신역(身役)치고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있지 않습니다. 지금 갑자기 파하기가 어렵다면 보병(步兵)과 똑같이 1필씩을 감하여 준다면 그 혜택이 또한 작지 않을 것입니다.
정축년074)   난리가 있은 뒤로 우역(牛疫)이 매우 치성하여 농우(農牛)가 다 죽었으므로 조가(朝家)에서는 청국(淸國)을 통하여 몽고(蒙古) 땅에서 소를 사다가 기민(畿民)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습니다. 백성을 위한 걱정이 당초 매우 절실했습니다만, 그뒤 소가 많이 번식되고 나서는 도리어 민간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번식시키는 것은 일정한 숫자가 있는 것이어서 숫자를 맞추기가 어려운데다가 더구나 지금은 죽음에서 구제되기에도 겨를이 없는 백성들이 소를 사육하여 살찌게 한다는 것은 그 사세가 더욱 어렵습니다. 속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좋은 방안을 따라 선처하게 함으로써 일푼이나마 폐단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고, 또 임금의 덕과 재변을 당하여 수성(修省)하는 도리에 대해 진달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깊은 궁중에 계시므로 동정(動靜)과 운위(云爲)에 대해 밖의 사람은 모르리라고 여기시지만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필부(匹夫)가 집안에서 한 일도 또한 그 은미한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인데 더구나 임금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여항(閭巷)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난번 환관(宦官) 두어 명이 잇따라 성상의 뜻을 거슬렸다는 것으로 내쫓겼다고 하는데, 말한 것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감히 천위(天威)를 범하였으니, 어찌 취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에 공인(工人)은 자기가 하는 일을 가지고 간한다고 했으니, 어찌 간할 수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옛날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수의(繡衣)075)  를 파견하기 위해 팔도(八道)를 추생(抽栍)076)  하게 할 적에 근척(近戚)인 수령이 마침 뽑혀진 데 들어 있었으므로 도로 통(筒)에 꽂으니, 어떤 환관이 땅에 엎디어 간하기를 ‘전하의 사정(私情)이 이러하니 어떻게 조신(朝臣)을 책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선묘(宣廟)께서는 미소지으며 도로 뽑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수령은 끝내 죄를 받게 되었는데 지금껏 훌륭하게 처리하신 일로 일컬어 오고 있으니, 어찌 전하께서 본받아야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의 결점은 대부분 희로(喜怒)가 중도를 잃는 데에 있습니다. 우레 같은 위엄 아래 어찌 꺾이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노하지 않을 데 노하면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마음으로 열복하지는 않는 것이니, 손해되는 것이 도리어 크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 탐풍(貪風)이 크게 치성하고 있는데 조정과 사방의 부정(不正)이 일체 군상(君上)의 한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내사(內司)에서 외람되고 잡스럽게 간위(奸僞)를 저지르는 일을 일체 엄금시키소서.
그리고 여러 궁가(宮家)의 염분(鹽盆)·어전(漁箭)과 해양(海洋)을 절수(折受)받아 그곳을 지나는 상선(商船)에게 세금을 거두는 것, 주인이 있는 민전(民田)의 묵은 곳을 주인이 없다고 하면서 함부로 점유하여 침탈하는 것을 또한 모두 혁파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과 고통이 없게 한다면 조정에서부터 사방에 이르기까지 누가 감히 부정한 일을 하여 우리 성상의 정치를 병들게 하겠습니까.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은 것이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습니다. 액정(掖庭)과 여러 궁가(宮家)의 하인들이 왕래하고 출입하면서 내외의 말을 서로 전하여 알리고 있습니다. 어공(御供)하는 물품에 대해 누군들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내인(內人)·환관과 액정의 하인들이 서로 안팎이 되어 임의로 조종하여 진퇴시키는 사이에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으니, 이것이 또 어찌 전하께서 궁가를 바루는 정사이겠습니까. 또한 시녀(侍女)의 선발을 액정의 하인이 직접 수득(搜得)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만일 부관(部官)으로 하여금 법에 의거하여 뽑아들이게 한다면 민간의 소민(小民)들이 소요하는 폐단은 반드시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들의 진언이 모두 지론(至論)이다. 구언(求言)한 지가 이미 오랜데도 전연 전지(傳旨)에 응하는 말이 없으니 이는 나를 두고 일을 할 수 없는 임금으로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닌가. 지금 경들의 차자를 보니 꿈에서 처음 깬 것 같고 목 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 같아 내 마음의 희열을 뭐라 비유할 수가 없다. 띠에 써두고 유념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 두어 조항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 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환관이 직언(直言)을 하였다가 뜻을 거슬려 죄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또한 임금의 지나친 거조이니, 간신(諫臣)의 헌규(獻規)가 불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唐) 우(虞) 시대에도 공인(工人)이 자신의 일을 가지고 간한 일은 있어도 임금 곁에 있는 시인(寺人)이 진언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주(周)나라의 법제에도 단지 환시(宦寺)에게는 문을 지키고 명령을 전하게만 했을 뿐이지 호분(虎賁)·설어(暬御)가 잠규(箴規)를 올리는 반열에 참여하게 하지는 않았다. 후세에는 환시들이 임금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권병(權柄)을 훔쳐 국가를 뒤집기까지 했으니, 그 화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들을 대우하는 것을 한결같이 주나라의 법제처럼 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방금(防禁)은 또한 엄하였다. 그런데 지금 누구라도 간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으로 이들에게 책임을 지워서 혹 일로 인하여 정령(政令)에 간여하게 되고 번번이 시비와 득실에 대해 말하게 된다면 그 폐단이 의당 어떠하겠는가. 이것을 또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8월 20일 계묘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열한 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8월 22일 을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배릉(拜陵)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조속히 택일하게 하라."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좌승지 이은상(李殷相)이 각도의 황정(荒政)과 생역(省役)에 대한 장계(狀啓)를 가지고 나아가 아뢰니, 상이 하문하기를,
"어느 고을에 기민(飢民)이 제일 많은가?"
하였다. 은상이 숫자를 계산하여 대답하니, 상이 측연(惻然)한 안색으로 내관에게 명하여 대내(大內)로 가지고 들어가게 하였다. 상이 인평위(寅平尉)·영양군(嶺陽君)의 가노(家奴)들이 소나무 베는 것을 금하는 법을 범한 공사(公事)에 대해 각별히 엄형을 가할 것으로 판하(判下)하니, 은상 등이 아뢰기를,
"일이 여러 궁가(宮家)에 관계된 것인데 성상께서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 주인의 직책을 파한 다음 또 그 노예를 통렬히 다스리시니, 이는 실로 성덕(聖德)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죄인들이 이미 누차 엄형을 받았는데 지금 또 형신을 가하면 운명(殞命)할 것이 우려됩니다. 초목(草木) 때문에 살인(殺人)을 하는 것은 아마도 법제를 만든 본의가 아닐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미 판하했으니 가형(加刑)하라."
하였다. 우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처음에 권관(權管)의 병부(兵符)를 만들어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가, 곧이어 권관은 본디 병부가 없는 것인데 잘못 만들어 보내달라고 했다면서 치계(馳啓)하고 대죄(待罪)하였습니다. 그런데 병부를 저장해 놓는 피낭(皮囊)을 조사하여 보니 권관의 병부 왼쪽 것이 모두 피낭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본디 병부가 없다면 어찌하여 왼쪽 것이 있겠습니까. 평안도에는 권관이 제일 많으니 구례(舊例)에 병부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하문하여 본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뒤 본디 병부가 없었다는 것으로 관서(關西)에서 치계하니 구례에 의거하여 만들지 말게 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능행(陵幸)의 기일이 박두해 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기근이 매우 참담하고 가을걷이가 아직 끝나지 않은 때에 민폐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십분 줄이지 않을 수 없다. 도로는 대충 닦고 절대로 민전(民田)을 침범하지 말게 하라. 능 아래에 마련하는 장막 등의 물건은 또한 서울의 각사(各司)로 하여금 진배(進排)하게 하여 일푼이나마 기민(畿民)의 폐단을 제하게 하라."
하였다.

 

충홍 감사(忠洪監司) 오정원(吳挺垣)이 치계하여 훈국(訓局)·훈부(勳府) 및 내사(內司)의 노비들의 신공(身貢), 어영청(御營廳)의 보미(保米) 및 기타 각사(各司) 노비들의 신공을 아울러 작미(作米)하여 도내(道內)에 유치해 두고 내년 봄 진구하는 밑천으로 삼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노직(老職)의 첩문(帖文)을 더 얻어서 곡식 얻는 길을 넓혀 줄 것을 청하였다. 비국이 회계(回啓)하였으나 태반이 시행되지 않았다.

 

8월 23일 병오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이런 흉년을 당하여 어공(御供)도 이미 견감시키고 있는데 백료(百僚)들의 녹봉을 어떻게 예전대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정축년077)   난리 이후 월료(月料) 를 지급한 일이 있었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공을 감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감하지 않은 물건이 많은데 백관의 녹봉을 어떻게 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계속해서 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를 써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교리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신이 호조의 답험 사목(踏驗事目)을 보건대 신결(新結)이 구결(舊結)보다 부족함이 없게 하도록 책임지우고 있습니다. 이미 급재(給災)078)  해 놓고 나서 또 결부(結負)에 부족함이 없게 할 것을 책임지우고 있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수령들이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상사(上司)에 거짓 보고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엄히 계칙한 것입니다."
하였다. 만기가 아뢰기를,
"재실(災實)을 속인다면 죄를 줌이 가합니다만, 결부(結負)를 부족함이 없게 하라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사목 가운데 이 한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금년의 흉년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내년의 진구(賑救)에 대해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서(兩西)에는 조곡(糶穀)을 나누어준 것 이외에도 저축하여 둔 곡식이 양호(兩湖)에 견주어 매우 넉넉하니, 상격(常格)을 타파하고 그것을 서울로 가져다가 선혜청에 급여하여 양호의 금년 수미(收米)의 숫자를 충당하게 하소서. 그리고 양호로 하여금 그 쌀을 유치하여 내년 진구의 자본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이어 청하기를,
"관서(關西)의 대미(大米)·소미(小米) 2만 석과 피곡(皮穀) 1만 석, 해서(海西)의 대미·소미 2만 석과 피곡 5천 석을 서울로 선운(船運)해 오면 내년 신축 년에 도성의 백성들이 살 수 있고 양호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8월 24일 정미

충홍 감사 오정원(吳挺垣)이, 도사(都事) 김왕(金迬)이 본도의 감시(監試) 동당(東堂)에서 시장(試場)을 맡아 엄히 하지 못하였고 또 체통을 잃어 웃음을 산 일이 많다는 것으로 치계(馳啓)했으므로 파출시켰다.

 

병조 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시골에 있으면서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옛날 인신(人臣)으로서 벼슬을 사퇴하고 해직된 자는 아침에 임금 곁을 떠나면 저녁에 이미 조정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인신이 임금을 떠나는 것을 어렵게 여겼고 임금도 가는 것을 애석히 여겨 기필코 작록(爵祿)으로 얽어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물러가 전야(田野)에 있다고 하지만 굶주리면 전하께서 음식을 하사하시고 병들면 약을 지급하여 주시니, 이것은 예(禮)에 이른바 작록을 받고 조정의 반열에 서 있는 것과 같다는 그것입니다. 신 또한 일념(一念)이 신엄(宸嚴)079)  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에 회포가 있으면 반드시 다 아뢰고 하문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여 올리고 있으니, 이는 신이 몸을 바치는 의리가 옛날과 간격이 없는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절룩거리는 몸을 부축하고 귀먹고 눈먼 모습으로 억지로 힘을 써 거듭 맑은 조정에 누를 끼친 연후에야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5일 무신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 이 능행(陵幸)이 바로 가을걷이를 안 한 계절에 당하였으니 호가(護駕)하는 여러 신하와 위졸(衛卒)은 경유하는 곳에서 만일 곡식을 손상시키는 일이 있으면 영(令)을 범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내용을 엄히 밝혀 분부하라."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잇따라 차자를 올려 사직(辭職)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7일 경술

상이 영릉(寧陵)에 행행하였다. 5경(更)에 동가(動駕)하였는데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이르러서는 연(輦)에서 내려 양마교(兩馬轎)를 탔으며 송계(松溪)의 동쪽에서 주정(晝停)하였다. 진시(辰時)에 능소(陵所)의 막차(幕次)에 이르렀는데 조금 있다가 상이 최복(衰服)을 갖추고 소교(小轎)를 타고서 막차를 나아와서 홍문(紅門) 밖으로 나아갔으며 문안에서 배릉례(拜陵禮)를 행하였다. 곡(哭)을 하면서 행보하여 능위로 나아가 돌난간 밑에 이르러서는 손으로 돌난간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석주(石柱)에 조아리고 통곡하니, 좌우가 감동하여 슬퍼하였다. 도승지 오정일(吳挺一)이 앞으로 나아가 내키는 대로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곡을 그치지 않았다. 우부승지 유계(兪棨)가 나아가 아뢰기를,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을 불러 속히 봉심(奉審)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가주서(假注書) 이숙달(李叔達)이 나아가 대신과 예관을 부르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예조 판서 윤강(尹絳), 참판 김수항(金壽恒), 참의 강백년(姜栢年)이 나아왔다. 상이 능위를 빙둘러 살펴보고 나서 진방(辰方)의 상석(裳石)에 틈이 난 곳을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이른바 틈이 벌어졌다고 하는 곳인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이곳이 그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어진 곳에 틈이 있고 또 똑바르지도 않은 것 같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른바 짧은 것을 보충했다는 죽석(竹石)은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묘지(卯地)의 죽석에 틈이 난 것이 가장 큰데 과연 돌 조각으로 짧은 것을 보충했고 또 유회(油灰)를 발랐습니다. 상석의 틈은 진실로 미안스럽습니다만, 바로 퇴광처(退壙處)에 있으니 아마도 해동(解凍)이 되면서 땅이 꺼져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겨울에 흙을 쌓는 역사(役事)는 이렇게 될 걱정이 없지 않다. 돌의 색깔이 고르지 않은 것 같은 것은 대단한 흠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죽석은 고치기가 어렵지 않고 가석(駕石)과 병풍석(屛風石)은 틈이 있기는 하지만 넓게 벌어지는 데 이르지는 않았으니, 메워서 보수해도 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상석은 이전 것을 그대로 수보(修補)해도 되겠는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이는 바로 하현궁(下玄宮)한 뒤에 배치한 돌이기 때문에 그대로 수보해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소견으로는 능(陵)을 개봉(改封)하는 것은 사체가 중대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이를 인하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지금 이 봉심(奉審)은 사체가 지극히 중대한데 우의정 원두표(元斗杓), 유도(留都) 원임(原任) 이경석(李景奭)·정유성(鄭維城)은 다른 능(陵)의 제관(祭官)에 차임되었으니, 육경(六卿)과 삼사(三司)를 명소(命召)하여 널리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주서 박신규(朴信圭)가 나아가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 형조 판서 조형(趙珩), 대사간 이정영(李正英), 지평 곽제화(郭齊華), 교리 이민서(李敏叙) 등을 불러 나아오게 하였다. 상이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신이 봄에 제관(祭官)으로 여기에 왔을 적에 목도하고서 연석(筵席)에서 진달했었습니다만, 지금 또 봉심하니 과연 미안스럽습니다. 신이 일찍이 예관(禮官)으로서 장릉(長陵)을 봉심한 적이 있었는데 또한 사소한 틈이 생긴 곳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기유년080)  에 목릉(穆陵)의 병풍석(屛風石)이 기울어 주저앉았기 때문에 개축한 규례가 있습니다. 지금 상석과 죽석은 병풍석과는 차이가 있으니, 개봉(改封)할 필요가 없다는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하고, 조형은 아뢰기를,
"지금 이렇게 보니 과연 미안스럽습니다. 신이 경기 감사로 있을 적에 여러 능을 봉심했었는데 역시 석물(石物)에 틈이 벌어진 곳이 있기도 했으니, 이 때문에 개봉(改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윤강·이정영도 개봉하는 것은 중난(重難)하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능을 개봉하는 것은 진실로 중난한 일입니다만 오지(午地)의 죽석은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곽제화는 아뢰기를,
"석회로 틈을 바른 곳을 살펴보니 당초에 틈이 있었던 것으로 지금 와서 틈이 벌어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정태화는 아뢰기를,
"능을 개봉하지 않는 것은 이제 이미 상의 앞에서 품정(稟定)했습니다만, 진지(辰地)의 상석과 묘지(卯地)의 죽석을 수개하는 이외에 고쳐야 할 다른 데에 대해서는 도감에서 스스로 계품하여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을 개봉하지 않는 것은 이미 정당(停當)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 윤강에게 하문하기를,
"이른바 통망처(通望處)와 보토처(補土處)라고 한 것은 어느 방향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산세(山勢)가 앞이 탁 트였기 때문에 통망이라고 한 것이지만 건너편 산맥(山脈)이 보이는 데에는 이르지 않습니다. 또 동쪽의 지세가 조금 야윈 상태이므로 대략 보토를 한 것입니다."
하였다. 사시(巳時)에 상이 능 위에서 내려와 정자각 동쪽에 이르러 기와가 비에 씻긴 곳을 하문하니, 비에 씻긴 뒤에는 누런 빛이 없어졌다는 것을 오정일이 상세히 진달하자 상이 그러냐고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빗물이 진 뒤에는 사초(莎草)가 으레 손상을 당하는 걱정이 있게 마련이니 예판(禮判)은 도승지와 함께 뒤에 남아서 상세히 봉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어 소차(小次)로 들어갔고 좀 있다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예를 끝내고 소차로 돌아왔는데 조금 있다가 또 홍문(紅門) 안으로 나아가 사릉례(辭陵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나서 소교(小轎)를 타고 막차로 돌아와서 경기 감사 유철(兪㯙)에게 표피(豹皮) 한 벌을, 양주 목사(楊州牧使) 권대운(權大運)에게는 궁전(弓箭) 한 벌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오시(午時)에 동가(動駕)하여 돌아오다가 주정소(晝停所)에 머물렀으며 미시(未時)에 관왕묘(關王廟)에 이르러서는 연(輦)을 타고 신시(申時)에 환궁하였다. 이어 수개 도감(修改都監)을 설치하고 윤강(尹絳)·여이재(呂爾載)·이만(李曼)을 당상으로 삼았다.
삼가 살피건대 영릉(寧陵) 석물에 틈이 벌어진 것은 사람이 일을 극진하게 하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니, 당초 일을 맡았던 신하들은 진실로 죄가 없을 수 없다. 이번에 여러 신하가 누차 봉심한 뒤에 보수할 것인가 개축할 것인가에 대한 뭇 의론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직접 봉심하여 신하들과 상의한 다음 드디어 보수할 것으로 의논을 결정하였다. 끝내 개축하는 것은 미안스럽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뒤 틈이 벌어지고 낮게 꺼진 곳은 해마다 수보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영림령(靈林令) 익수(翼秀)가 몰래 가서 그림으로 그려다가 소장을 올려 아뢰어 결국은 천릉(遷陵)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추가(追加)로 봉축(封築)함이 미안스럽기는 하지만 그대로 보즙(補葺)하여 오래도록 편안하지 못한 것이 더욱 미안스러운 것이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다.’는 송시열의 당초 헌의(獻議)를 채용했더라면 또 어찌 천릉(遷陵)하는 거조가 있었겠는가. 익수의 무리는 이것을 가지고 조신(朝臣)을 경함(傾陷)시킬 계책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광중(壙中)에 아무 탈이 없는 상태에서 경솔하게 15년 동안 평안히 모셨던 곳을 헐어버리자 채 1 년도 못 되어 대상(大喪)이 잇따라 났다. 이에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천릉(遷陵)에 대한 의심이 없을 수 없게 되었으니, 통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8월 28일 신해

간원이 아뢰기를,
"충홍우도(忠洪右道)의 감시(監試)의 장옥(場屋)을 설치했을 적에 본도의 도사(都事) 김왕(金迬)이 시관(試官)이 되어 시장(試場)을 열기도 전에 차비관(差備官)에게 거자(擧子)들 가운데 문명(文名)이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으며 시장을 열고 과차(科次)를 매길 즈음에 차비관으로 하여금 수구(首句)를 등서(謄書)하여 들여오게 하여 취사(取捨)하기까지 하였으니, 국법을 무시하고 거리낌없이 멋대로 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왕과 차비관을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定罪)하고 동참한 시관(試官)도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이어 해도(該道)의 방목(榜目)을 발거(拔去)하여 버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기읍(畿邑)에서 일용하는 잡물(雜物)은 달리 염출할 데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사로이 민결(民結)을 제하여 주고서는 신역(身役)을 제하여 주었다고 칭하고 그 대신 유청(油淸)·지지(紙地)·포진(鋪陳)·기명(器皿) 등 물품을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役事)가 상당히 가볍기 때문에 백성들 가운데 조금 형세가 있는 사람은 다투어 여기에 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나머지 신역에 응하는 백성들은 그 고통을 일방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이는 법밖의 일로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해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혁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곽제화(郭齊華)가, 송도 유수(松都留守) 남노성(南老星)이 처사가 전도되었는데도 도리어 많은 말을 허비하면서 치계함으로써 공의(公議)를 멸시한 죄를 논하려고 했으나 동료들이 곤란하게 여기면서 버틴다고 하여 인피하였다. 정언 윤지미(尹趾美)는 상피(相避)가 되기 때문에 감히 가타부타할 수 없다고 인혐하였다. 정언 윤비경(尹飛卿)은 일찍이 사핵(査覈)한 뒤 논핵하겠다는 뜻으로 차자에 언급하고 즉시 논핵하지 못했다고 하여 인피하였다. 장령 정박(鄭樸), 지평 홍주삼(洪柱三)은 아뢰기를,
"간원에서 이미 차자를 올려 송도의 일에 대해 진달했으면 노성(老星)은 자처(自處)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들은 것이 마침 같지 않았던 탓으로 어렵게 여기는 뜻을 간략히 보였을 뿐인데 동료가 갑자기 경시당하였다고 일컬으면서 마침내 시끄러움을 야기시키기에 이르렀으니, 신들도 태연히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인피하였다. 사간 박세모(朴世模)도 인피하였는데 그 내용이 정박과 같았다. 옥당이, 정박·홍주삼·박세모는 체직시키고 곽제화·윤지미·윤비경은 출사케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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