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4권, 현종 1년 1660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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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계축

이수인(李壽仁)을 사간으로, 황준구(黃儁耉)를 장령으로, 맹주서(孟胄瑞)를 대교로, 김수항(金壽恒)을 부제학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조수익(趙壽益)을 대사성으로, 홍주삼(洪柱三)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지평 곽제화(郭齊華)가 아뢰기를,
"송도(松都) 유생(儒生)들의 변은 이미 전부터 밝히기 어려운 옥사(獄事)였는데 유수 남노성(南老星)이 정위(情僞)를 조사하지도 않고 뒤섞어 수계(囚繫)하여 갑자기 형장(刑杖)을 시행한 다음 강제로 편배(編配)시켰으니, 진실로 옥사의 결단을 분명하고 신중하게 한다는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간관(諫官)의 차론(箚論)이 있는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또 유사를 시켜서 상세히 복심(覆審)하게 한다면 옥정(獄情)의 단서는 해조에서 분명히 조사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성이 장황한 말로 치계하여 기필코 사민(士民)의 무함으로 핑계대려 하였으니,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조금도 거리끼는 것이 없는 처사입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윤비경(尹飛卿) 등이 아뢰기를,
"전남우도의 감시(監試) 시장(試場)을 열 때 좌도의 유생(儒生) 40여 명이 모록(冒錄)하여 응시했으므로 우도 유생들이 녹명관(錄名官)에게 말하여 일체 정거(停擧)시켰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시관의 뜻으로 정거를 풀어주고 종장(終場)에 응시하게 했는데 입문(入門)할 때 우도의 유생들이 분노하여 시장에 들어가지 않고 시관에게 욕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녹명관(錄名官)이 다시 정거시킨 연후에야 비로소 들어왔습니다만 다시 도사(都事)에게 추한 비난을 가하면서 ‘금년 봄 식년 감시(式年監試)에서도 사정(私情)을 쓴 것이 환히 드러났다.’ 하였는데, 도사는 한 마디도 스스로 변명하지 못했습니다. 사자(士子)들이 난동을 부린 것에 대해서는 해도 감사가 이미 계문하여 사추(査推)하고 있습니다만 사정을 따르다가 공척을 받은 시관도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남 도사 권대재(權大載)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누차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는데, 이는 산릉의 석물에 대한 일 때문에 당시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죄를 받았는데 혼자서만 면하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상이 추운 겨울에 역사(役事)를 한 소치라고 하면서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송준길이 소장을 올려 독한 학질(瘧疾)을 새로 만나 소명(召命)에 달려 갈 수 없다고 사직하였으나,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병을 조리하고 올라오게 하였다.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소장을 올려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그대가 무용지물이라고 스스로 겸손해 하고 있으나 내가 소망하는 것과는 크게 어긋난다. 번연(幡然)히 마음을 고치고 올라온다면 국가가 의지함을 이루 헤아릴 수 있겠는가. 사퇴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소장을 올려 진달했는데, 그 대략에,
"금년 호남(湖南)의 농사는 바닷가의 흉년이 가장 극심하고 산군(山郡)은 조금 실한 편입니다. 산군에 대동법(大同法)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뭇 의논이 모두들 행할 수 없다고 하는데 신은 삼가 의혹스럽습니다. 신이 정유년081)   호남의 대동법을 강정(講定)할 적에 먼저 바닷가에다 시험해 보자고 말을 한 것은 산군을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세가 옛날과 다르니 한 방법으로 통괄시켜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백성들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이런 흉년에 억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북청(北靑)·갑산(甲山) 사이에 자항(慈航)·황수(黃水) 두 역(驛)을 새로 설치하고 치계하여 아뢰었다.

 

이때 송도(松都) 화곡 서원(花谷書院)의 【곧 선현(先賢) 서경덕(徐敬德)을 향사(享祀)하는 곳임.】  위판(位版)을 훔쳐내다 깨뜨리는 변이 발생하여 큰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송도에는 전부터 향전(鄕戰)이 있어 왔다. 부인(府人) 임부양(林敷陽)의 아들 주상(柱商)이 유적(儒籍)에 이름이 올라 있는데도 상중(喪中)에 장가를 들었으므로 진사(進士) 김영(金泳)이 그의 이름을 유적에서 삭제시켰다. 그뒤 성묘(聖廟)의 대문(大門)에 화재가 있었고 또 12년 뒤에 김영의 집 신주가 밤에 사람에 의하여 깨뜨려졌다. 김영 등이 ‘신주를 깨뜨리고 성묘에 불을 지른 것은 모두 부양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고 하고 토적(討賊)이라고 이름한 다음 서로 모여 정문(呈文)하였다. 유생들 가운데 따르지 않는 조후빈(曺後彬) 등 수십 인도 또한 적도(賊徒)라고 지목하여 유안(儒案)에서 삭거시켰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 싸우다가 아울러 경옥(京獄)으로 귀결되었는데 김영의 당여들이 후빈의 일대(一隊)를 역적 이괄(李适)의 여당(餘黨)이라고 하였다. 조사해 본 결과 실상이 없어 장차 반좌율(反坐律)을 받게 되었으나 대신의 신구(伸救)를 힘입어 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조가 참작하여 조율(照律)해서 진정시킬 계책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서원(書院)에 변이 생긴 것을 인하여 김영의 당여는 ‘이것도 부양의 소위이다.’ 하고, 부양의 당여는 ‘김영 등이 스스로 변을 만들고 우리에게 죄를 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서원에 변이 발생한 날 재사(齎舍)에 들어간 유생 양몽석(梁夢錫)·현우규(玄禹圭)는 모두 김영의 당여였다.
유수(留守)가 몽석 등과 그날 수직(守直)한 원노(院奴)와 조후빈 등 12인 및 혐의진 사람 하의갑(河義甲)·윤충갑(尹忠甲)을 잡아서 가두어 놓고 추문하였다. 원노가 공초(供招)하기를 "양몽석이 재사에 들어오던 날 저물녘에 심부름을 부탁하면서 저를 그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집은 서원과의 거리가 20리나 되었는데 갈 적에 몽석이 사우(祠宇)의 열쇠를 찾았었습니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위판을 담은 칠독(漆櫝)을 계로(谿路)에서 주웠으므로 달려가 유생들에게 고하니, 몽석이 말하기를 ‘이미 큰일이 났으니 부디 열쇠를 찾았었다는 일을 누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니, 유수가 이 말을 듣고 즉시 몽석 등에게 엄형을 가하였고 의갑 등에게도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율(律)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원노(院奴) 등이 처음에는 열쇠에 대한 일을 제기하지 않다가 최후에 가서 말했기 때문에 몽석 등이 말하기를,
"부관(府官)의 뜻을 받들어서 그런 것이다. 옥사도 죄없는 사람을 얽어넣은 것이 많다."
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은 처음부터 극력 김영 등을 신구(伸救)했었는데 유수 남노성(南老星)이 일방적으로 김영의 당여만 다스렸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에 조카 남정영(南正英)이 대사간이 되어 전지(傳旨)에 응하여 차자를 진달할 적에 노성이 옥사를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에 대해 대략 언급하였다. 또한 몽석의 아우도 격쟁(擊錚)하여 원통함을 쟁송(諍訟)하니, 형조가 노성이 옥사를 다스린 것이 정당한 데서 어긋났다고 회계하였다. 이에 노성이 매우 분노하여 소장을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이조가 체직시키라고 회계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대론(臺論)이 있기는 하지만 옥사가 결말도 나기 전에 먼저 그 관원을 죄주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바로 적도(賊徒)들의 계책에 빠지는 것이다. 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워서 다스릴 수 있으니, 그로 하여금 속히 행공(行公)하게 하여 나약함을 보이지 말게 하라."
하고, 끝내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9월 4일 병진

왕흡(王洽) 등 12인이 【고려 왕조의 후예임.】  예조에 정장(呈狀)하기를,
"조종조 때부터 특별히 숭의전(崇義殿)을 설치하여 봄가을로 향사(享祀)하고 이어 전감(殿監)을 두어 향사를 맡아 보살피게 했었습니다. 그리고 수호군(守護軍)을 정하여 경목(耕牧)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으며 왕씨(王氏)의 후예는 군오(軍伍)에 차정(差定)하지 말고 호역(戶役)을 견면시키도록 한 일은 분명한 수교(受敎)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점점 오래 될수록 법령이 해이해져 경내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고 투장(偸葬)하기도 합니다. 또한 향사하는 의절도 점점 전만 못한 것은 물론 수호하는 사람을 편오(編伍)에 차정하고 있으니, 이는 열성(列聖)께서 숭보(崇報)하신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정장의 내용에 따라 농사짓고 투장하는 것을 금단시키고 또 그 자손들의 군역(軍役)을 견면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9월 5일 정사

이경휘(李慶徽)를 승지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말이 농사에 미치자 모두들 가을 가뭄 때문에 걱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을철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전례가 또한 있는가?"
하니,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기설제(祈雪祭)를 지낸 고례(古例)도 있으니 농시(農時)가 지나긴 했으나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불가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일 이 가뭄 때문에 모맥(牟麥)을 심지 못하게 된다면 내년에 기민(飢民)이 어떻게 도움을 받아 살아날 수 있겠는가. 전례를 가져다 살펴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백관의 월료(月料)에 대한 일은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록(頒祿)에 견주어 보면 감하는 것이 사소하니, 우선 놔두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급료(給料)의 규례를 시행한다면 다소나마 보탬이 되는 것이 어찌 없겠습니까. 이미 어공(御供)을 감했는데 녹봉(祿俸)을 감하지 않는다면 신료들의 마음이 또한 어찌 편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아가서 호판(戶判)과 다시 상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지난번 동래 부사의 사서(私書)에 대마도의 화재가 대단하여 도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쌀 3백 석을 허급(許給)하라는 내용으로 이미 연석(筵席)에서 품정(稟定)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늙은 역관의 말을 들으니 왜인들은 교사스러워 전에도 간혹 준례가 아니라고 칭탁하면서 받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조정에서 명이 있었다고 말하지 말고 단지 동래 부사가 보낸다고 하면서 보내주면 거절당하더라도 조정의 수욕(羞辱)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릉(山陵)의 석물(石物)에 대한 시역(始役)을 10월 12일에 하기로 정하였는데 그때는 날씨가 몹시 추워서 역사(役事)를 완전하게 할 수 없어 뒤에 또 전처럼 꺼지고 터지는 걱정이 있을까 우려된다. 우선 유회(油灰)로 틈을 메워 두었다가 내년 봄 해동할 때를 기다려 시역하게 하고 싶다."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내년은 바로 연극(年克)이라서 구기법(拘忌法)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10월 초순에는 얼어붙을 것이라 기필할 수는 없으니, 조속히 수개(修改)해야 됩니다. 내년을 기다릴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송도(松都)의 옥사는 어찌 된 것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은 본부(本府)의 한 고장의 향전(鄕戰)에서 연유된 것인데 신은 상세한 내용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옥정(獄情)은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만 남노성(南老星)에게 속히 처단한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인의 아우가 격쟁(擊錚)했다고 해서 대간이 그 관원의 체직을 논했는데 일의 꼴이 무언가."
하자, 태화가 일어나 절하면서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장령 황준구(黃儁耉)가 아뢰기를,
"노성(老星)의 사장(辭狀)에 분노한 말이 많았으니 서로 규계(規戒)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은 이미 정론(停論)했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성상께서 노성을 체직시키지 않은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처(自處)하는 도리에 있어 어떻게 탄핵을 견디면서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체직을 허락한다면 대계(臺啓)의 탄핵에 의해 제거한 것과 다름이 없게 되어 바로 축출하려는 그들의 계책에 빠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필코 직임을 수행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조(我朝)에서 숭의전(崇義殿)을 존봉(尊奉)하는 뜻은 범연한 것이 아니니 만일 투장(偸葬)한 자가 있으면 의당 즉시 파내어 옮기게 해야 할 것이요 결코 그대로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해조에서는 어제 ‘지금 이후로는 금단하겠다.’고 말하였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을 어떻게 심상하게 조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왕 태조(王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한 공이 있기 때문에 국조(國朝)에서 숭의전을 세워 받들었으니, 숭보(崇報)하는 은전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급속히 상세하게 조사하여 만일 투장한 자가 있으면 일일이 계문(啓聞)하게 하여 그에 의거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예판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해서(海西)의 삼성묘(三聖廟)를 【단군(檀君)·환인(桓因)·환웅(桓雄).】  개수하는 일은 본도의 계문을 인하여 이미 품정했는데, 본도 감사의 뜻은 예조로 하여금 와서 제사지내게 함으로써 일의 체모를 중하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랑(禮郞)을 보내어 일을 행하게 하라."
하였다. 윤강이 아뢰기를,
"내년에는 영녕전(永寧殿)에 조천(祧遷)하는 일이 있게 되는데 신이 일찍이 봉심(奉審)할 때 살펴보니 전내(殿內)가 매우 협소하여 남은 곳이 겨우 한 칸뿐이어서 결코 다시 더 봉안(奉安)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드시 조속히 영건(營建)해야 하는데 도제조 심지원(沈之源)이 바야흐로 정고(呈告)하고 있는 중이어서 계품(啓稟)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大臣)에게 하문하기를,
"이 무슨 말인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당초에는 사조(四祖)만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뒤 조위(祧位)가 점점 많아져서 익실(翼室)을 더 건조하게 되었고 익실도 또 부족하여 이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익실의 제도는 어떠한 것인가?"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이른바 정전(正殿)에다 날개처럼 덧붙이는 것인데 궐내(闕內)에도 이런 제도가 있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사세상 영건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반드시 하향(夏享)이 있은 뒤에 시역(始役)하여 추향(秋享) 전에 공역을 끝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였다. 부교리 김만균(金萬均)이 아뢰기를,
"신이 새로 호우(湖右)에서 왔는데, 기민(飢民)들이 도토리 열매를 줍느라고 달려가는 것을 보니 측은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런 즈음에 포보(砲保)와 승호(陞戶)082)  를 서울로 올라오게 함은 가장 민폐에 관계되는 것이니 우선 명년을 기다리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호판 허적(許積)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말한 것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흉년에 행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70년 동안 행하여 온 일을 이제 와서 중지하는 것은 사체에 있어 불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관하는 신하가 모두 들어 오지 않았으니 도제조가 출사한 뒤에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납 임한백(任翰伯)이 아뢰기를,
"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영남(嶺南)에 갔을 적에 농사의 상황을 목격했는데 영(嶺) 밑에는 조금 나은 편이었으나 중도(中道)는 재해를 입은 것이 더욱 극심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고 본 일을 일일이 진달하라."
하자, 한백이 아뢰기를,
"신이 달려 가느라고 상세히 물어볼 겨를은 없었습니다만 영 밑에 도착하니 백성이 다투어 말을 막고 호소하기를 ‘금년의 전세(田稅)를 내년에 갖추 납부하게 하여 흉년에 부마(夫馬)의 폐단을 제거하게 해 달라.’고 하였으며, 또 승호(陞戶)의 원망과 시름도 실로 김만균(金萬均)이 진달한 것과 같았습니다. 어영군(御營軍)의 별호(別戶)를 충정(充定)시키는 일도 우선 서서히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영군의 별호에 대한 일은 일찍이 정지하지 않았었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이미 정지했습니다만 도고(逃故)로 탈이 있는 것은 충정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한백이 좌석을 떠나 망설이다가 한참 만에 아뢰기를,
"신이 신병(身病) 때문에 급히 청을 올렸다가 후사(喉司)에 저지당하였는데도 무릅쓰고 입시했으니, 더없이 민망스럽고 위축됩니다. 신이 지난번 영해(寧海)의 시소(試所)를 개장(開場)할 적에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에 대해 말하기가 어렵다.’라는 것을 부제(賦題)로 내었고, ‘관어대부(觀魚臺賦) 뒤에 쓰다.’라는 것을 시제(詩題)로 내었습니다. 하나는 목전의 정경에서 취한 것이고 하나는 좌우(座右)의 병장(屛障)에 이색(李穡)이 지은 관어대부가 있었기 때문에 시제로 낸 것인데, 시장(試場)에 들어온 유생들이 다시 출제하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출제되리라는 말이 봄부터 있었으니 지금 지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조정의 신령(新令)에서 다시 출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유생들이 말하기를 ‘예천(醴泉)의 시소(試所)를 개설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 꿈에 이런 출제가 있었다고 했기 때문에 도내(道內)의 유생들 가운데 지어놓은 사람이 많으니, 이제 다시 출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서 이어 서로 인솔하고 흩어져 나갔기 때문에 신이 부득이 다시 출제했습니다.
일을 끝마치고 나서 돌아오다가 안동(安東)에 도착하여 안기 찰방(安奇察訪) 안홍정(安弘靖)의 말을 들으니, 그의 아들도 봄에 이것이 출제될 것이라고 하여 미리 지어놓았었다고 했으며, 봉화쉬(奉化倅) 정운익(鄭雲翼)도 말하기를 ‘일찍이 6월경에 이 출제에 대해 들었다.’고 했으므로 신은 실로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복명(復命)한 뒤에도 물의가 비등하여 신이 미리 시제(試題)를 내었기 때문에 파장(罷場)에 이를 뻔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영남 유생이 서울에 올라와서 선동한 소치일 것입니다. 신이 변변치 못하기는 하지만 또한 과장(科場)이 지엄한 곳임을 알고 있고 또 영남 좌도(左道)는 신이 평생 가보지도 않은 곳이어서 전혀 친한 사람이 없는데 어찌 친하지도 않고 친구도 아닌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불측한 곳에 빠지려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의 말이 끝이 없어 의심을 야기시킨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태연히 대각(臺閣)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장령 황준구는 아뢰기를,
"한백이 매우 외람스럽습니다. 시제(試題)를 미리 냈다는 이야기가 진신(縉紳)들 사이에 전파된 것이 더없이 자자했으니, 한백은 의당 위축되어 엎드린 채 물의(物議)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에 감히 뻔뻔스레 입시하여 장황하게 지척의 임금 앞에서 스스로 변명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먼저 추고하라. 그 함사(緘辭)를 살펴보고 나서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한백이 즉시 일어나 나가지 않자 승지가 눈짓을 하니, 한백이 이에 일어났다. 윤강이 아뢰기를,
"한백의 장계(狀啓)에 이름이 기재된 유생은 판부(判付)에 의거하여 3차의 형신을 가한 뒤에 정배(定配)시킬 것으로 이미 행회(行會)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밖의 의논을 들으니 모두 한백이 그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계는 실상은 전혀 기재하지 않고 작란(作亂)했다고 범칭(泛稱)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유생들에게 죄를 매기는 것은 너무 중한 것 같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죄가 시관(試官)에게 있으면 시관을 죄주어야 하고 죄가 거자(擧子)에게 있으면 거자를 죄주어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서로 얼버무릴 수 있겠습니까. 다시 조사하여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한 줄기 공도(公道)가 단지 과장(科場)에 달려 있는데 근래 경외(京外)에서 사정(私情)을 따른다는 말이 매우 분분하여 미리 시제(試題)를 내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혼조(昏朝)083)  의 복철(覆轍)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한백에게 실제로 죄를 범한 사실이 있다면 그 죄가 어찌 파직시키고 나서 추고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하고, 윤강은 아뢰기를,
"근래 외방의 과장(科場)이 매우 용잡스러운데 수령으로서 참방(參榜)된 사람도 지금의 과거에서처럼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이 뒤로 수령으로서 과거에 응시하는 자는 경시(京試)에 와서 응시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는 이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김왕의 일은 스스로 해명한 것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거자로 하여금 수구(首句)를 등서(謄書)하여 들여오게까지 했다고 합니다. 전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의당 특별히 무겁게 추구(推究)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윤강은 아뢰기를,
"김왕이 출방(出榜)한 뒤 이런 말이 성행했기 때문에 거자들 가운데 식견이 있는 사람은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윤문거(尹文擧)·선거(宣擧)의 아들은 모두 높은 등급으로 참방(參榜)되었지만 대론(臺論)이 나오기 전에 그들의 아비가 모두 불러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김왕을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김왕은 형신하더라도 반드시 실토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부여현(扶餘縣)의 하리(下吏)로 이성(李姓)을 가진 자가 낙폭(落幅)을 비국에 와 바치면서 스스로 자신이 그 실상을 안다고 하였고, 또 장옥(場屋)의 사환(使喚)인 임성(林姓)의 하인도 참여하여 안다고 했다 하니, 먼저 이들을 신문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왕은 우선 형추하지 말고 이성과 임성을 가진 자를 먼저 잡아다가 신문하여 실상을 알아낸 다음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옥당의 관원에게 이르기를,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내훈(內訓)》을 얼마나 교정했는가?"
하니, 만균이 아뢰기를,
"《연의》는 이미 끝냈고 《내훈》은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자세하고 꼼꼼하게 하도록 힘쓰라. 언해(諺解)의 향음(鄕音)도 일일이 정리하여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9월 6일 무오

정언 윤비경(尹飛卿) 등이 아뢰기를,
"근래 국가의 기강이 더욱 해이해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과(武科)의 일소(一所)에서 사정(私情)을 따라서 공정하게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자자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목전(木箭)으로 시취(試取)할 즈음에 그 보수(步數)를 속여서 지목(指目)된 가운데 들어간 사람이 8, 9인이나 되었습니다. 시관(試官)들이 물의가 일제히 분노한다는 말을 듣고는 출방(出榜)할 때 혹 위격(違格)이라고 일컬어 짐짓 정거(停擧)시키기도 하여 애초 사정을 따른 자취를 숨기기 위해 거리낌없이 멋대로 하였으니, 진실로 매우 통분스럽고 놀랍습니다. 시관과 차비관 등을 잡아다가 국문한 다음 정죄하소서. 헌부의 서리(書吏)도 간사한 짓을 한 일이 많으니 유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정죄하게 하소서.
무과 일소(一所)의 거자인 목존선(睦存善)은 시관 이연년(李延年)과 삼촌 숙질(叔姪) 사이인데 연년이 출계(出繼)했기 때문에 법에는 상피하는 법규가 없습니다. 그러나 혐의를 피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의 비방을 야기시켰으니 이연년을 파직시키소서.
헌납 임한백(任翰伯)은 지난번 영남 좌도 감시(監試)의 시관으로서 시부(詩賦)의 출제를 미리 하여 친한 유생들로 하여금 기일 전에 제술(製述)하게 하였는데 은밀히 서로 전하여 들은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개장(開場)하자 그 출제가 과연 나왔으므로 거자(擧子)들이 대면하여 큰 소리로 말하고 혹 곧바로 나가버리는 자가 있기도 하자 한백이 부득이 다시 출제하였습니다. 한백은 대간과 시종을 출입했던 사람인데 사심(私心)을 따라 법을 무시함이 감히 여기에 이르렀으니, 더욱 통분스럽고 놀랍습니다. 잡아다가 추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무과의 시관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고하고 이연년은 우선 먼저 추고하게 했었으나, 그뒤 누차 아뢰자 모두 따랐다.

 

상이 하직하는 수령인 금천 군수(金川郡守) 유흡(柳潝), 장련 현감(長連縣監) 김일(金鎰)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겠는가?"
하니, 유흡 등이 간략하게 대답하였다. 승지 유계(兪棨)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주사(籌司)084)  에 있으면서 국정을 참여해 들었고 근래 또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잇따라 외방의 장계를 보고 있는데,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이 가을철을 당하여도 백성들이 오히려 떠돌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곤고스러움과 급박함이 여기에 이르렀는데도 국가의 저축이 탕갈되어 달리 손을 댈 데가 없습니다. 묘당에서 바야흐로 양서(兩西)의 향곡(餉穀)을 운반해다가 국가의 비용을 대고 남방(南方)에서 상납하는 숫자를 줄이도록 의논함은 실로 매우 다행스런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반드시 서둘러 배를 모집하여 물이 얼기 전에 먼저 1차 운반하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해서에서 운반한 것이 도착된 다음에 다시 보장(保障)을 위하여 저축해 둔 곡식을 덜어내면 대략 1년의 경비를 충당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남방에서 상납하는 여러 가지 세금의 미곡은 견면하여 주기도 하고 받아서 유치해 두기도 했다가 내년 봄에 진구하여 살리는 자본으로 삼게 한다면 기민들이 우러러 기대할 데가 있어서 일시에 떠돌아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국가에서 군병을 양성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상년(常年)에도 사세가 지탱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지금은 쓸데없이 먹는 사람이 더욱 많은 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일체 그만두게 하고 돌려 보낸다면 저들이 또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어영청의 입번자(立番者)는 1년을 기한으로 제번(除番)시키고 그 보미(保米)를 덜어내어 경비에 보태게 하는 것이 실로 타당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새로운 승호 포수는 우선 상경(上京)시키지 말 것으로 연신(筵臣)이 진계했습니다만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합니다. 국용(國用)이 모두 고갈된 것은 오로지 양병(養兵)에 연유된 것인데 이같은 극도의 흉황(凶荒)에 다시 승호를 상경하게 하는 거조가 있게 되면 사방 사람들이 듣고 반드시 원망하는 사람이 많게 될 것이니, 속히 정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제조(都提調)가 출사하기를 기다려 상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제조 의 출사를 조만간에는 기필하기 어려울 것인데 초정(抄定)하는 거조는 성화(星火)보다 급하니, 참으로 때가 늦으면 후회 막급이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묘당으로 하여금 도제조에게 의논하여 계품(啓稟)한 다음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9월 9일 신유

밤 2경(更)에 달이 우수(牛宿)의 여섯째 별을 가렸다.

 

이정기(李廷虁)·이경억(李慶億)을 승지로, 김만기(金萬基)를 헌납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전남 도사(全南都事)로 삼았다. 이지익이 이일상(李一相)을 논한 것이 사실과 어긋났는데 강변하기를 마지않았으므로 공의(公議)가 그르게 여겨 오랫동안 폐치(廢置)되었었다. 지익의 편을 드는 자들은 불쾌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막좌(幕佐)에 제수되었다.

 

예조가 삼절일(三節日)의 【정조(正朝)·단오(端午)·동지(冬至)임.】  방물(方物)·물선(物膳)을 임시로 감하게 했던 시한이 이미 지났다는 것으로 금년부터는 전대로 회복시킬 것을 품계하니, 상이 답하였다.
"금년의 흉년은 지난해보다 더 극심하니, 두 자전(慈殿)의 방물 이외에는 바치지 말게 하라."

 

봉교(奉敎)        유명윤(兪命胤)이 말미를 받았다가 호서(湖西)에서 돌아와서 소장을 올려 연로(沿路)에 기근이 든 상황을 진달하기를,
"금년의 가뭄은 지난해의 홍수보다 더 극심하여 호령(湖嶺) 천리에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은 지가 이제 이미 4, 5개월이 되었습니다. 마을의 샘들도 한 말의 물을 구하기가 여전히 어려운 판국인데 더구나 농사일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이 호서(湖西)·호남(湖南)을 경유하면서 여러 고을을 두루 살펴보니 산 밑에 수근(水根)이 있는 데와 방천(防川)이 있어 관개(灌漑)하는 곳에는 화곡(禾穀)이 조금 푸른 빛이 있어 완전히 버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수근이 없는 곳은 나락이 땅에 붙어 있으니, 결코 가을에 수확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바닷가 일대는 더욱 적지(赤地)가 되어 있었는데 구황(救荒)할 만한 나물 뿌리와 나무 열매도 모두 성숙되지 않았으며 온 들에 푸른 빛이라고는 없었으므로 바라보면 쓸쓸하기만 했습니다. 마을에는 흩어져 떠도는 사람이 잇달았고 혹 길을 막고 남의 재물을 빼앗기도 하고 인명을 살상하기도 합니다. 지금 만백성이 주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지금부터 단지 내년 가을까지 상공(常貢)을 견면시켜 주어 두미(斗米)·척포(尺布)도 백성에게서 나가지 않게 하고 편안히 이에 힘입어 살면서 죽음에서 헤어나는 데 전념하게 하는 것입니다. 설령 국가에서 다른 곡식을 옮겨다가 이 급박함을 구제한다고 하더라도 필시 대단히 번거로울 것 같으니, 진구하기 위한 곡식을 상부(常賦)의 숫자에 충당시키는 것이 최대의 혜택이 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혜택이 미치는 것은 전토(田土)가 있는 중민(中民)들뿐이고 전토가 없는 전호(佃戶)들은 혜택을 받는 것이 없어 끝내는 반드시 사망하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견면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급급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고, 진구 또한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당한 것은 실로 고금에 없었던 재변입니다. 크게 경동(警動)하여 크게 변통시키기를 불에 타고 물에 빠진 것을 구하듯이 서두르지 않는다면 때가 늦어 미칠 수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진구하는 방책에 대해서는 신처럼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이 의논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성상께서는 대신(大臣)들에게 묻고 겸하여 유현(儒賢)들에게 문의하소서. 진실로 부비(浮費)를 줄이고 부역(賦役)을 견면시키기 위해서는 세초(歲抄)의 수륙조(水陸操)와 공가(公家)의 흥작(興作) 등 백성들을 분요롭게 하는 모든 것을 일체 정파(停罷)시켜 민생들의 위태로운 목숨을 구제하소서."
하였는데, 소장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재변을 당한 곳의 상세(常稅)와 수미(收米)는 복심(覆審)한 뒤 여러 고을에서 보고하여 오는 재결(災結)을 살펴보아 자연 아울러 감면해야 될 것이며, 조적(糶糴)도 응당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역(身役)이 있는 사람은 신역을 견면시키겠으며 진구(賑救)도 거행하게 하겠습니다. 부비를 줄이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습조(習操)에 대해 강구하게 했더니 수륙조는 이미 정파했다고 했습니다. 이밖에 좋은 방책을 소장의 내용에 의거하여 유현들에게 하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0일 임술

수릉관(守陵官) 평운군(平雲君) 이구(李俅), 시릉관(侍陵官) 오이공(吳以恭)에게 각각 한 자급씩 가자(加資)하게 하고, 참봉 정후준(鄭後俊)·안집(安㙫), 충의위(忠義衛) 정백(鄭栢), 내관 김여건(金汝楗)·양정(楊珽)에게도 각각 한 자급씩 가자하게 하였으며, 자궁(資窮)된 자는 대가(代加)하게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금년의 흉황은 전에 없던 것이어서 반드시 각도 감사가 실상을 상세히 조사해서 구별하여 계문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바야흐로 들은 것을 참작하여 신역을 견면하는 것의 다소(多少)와 진구의 완급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적에 이르러서도 등급을 나누어서 거두어 들이겠습니다만 근래 거짓이 풍조를 이루어 백성들은 으레 큰 흉년이라고 일컬으면서 부역의 면제를 바라고 있으며 수령들은 좋은 평판을 구하는 데 뜻이 있기 때문에 왜곡되이 그들의 말을 따르고 있습니다. 간혹 용렬하고 잔약한 수령은 견책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재상(災傷)이 많은데도 감히 다 보고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금년에는 더욱 전철을 답습하게 해서는 안 되니, 감사로 하여금 추솔(騶率)을 간략히 하고 공억(供億)을 줄여서 여러 고을을 돌며 전야에도 출입하면서 상세히 묻고 분명히 살펴, 3, 4등급으로 나누어 열거하여 기록해서 계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개성 유수 남노성(南老星)이 탄핵을 받았다는 것으로 벼슬을 버리고 도성 밖에 와 있으면서 소장을 진달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소장을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상이 재결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국가에서 사체를 보존하고 무너진 기강을 확립시켜려 하고 있으니, 노성은 응당 자신을 돌보지 않고서 조정의 뜻을 준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먼저 스스로 경동(輕動)하여 체례(體例)를 무너뜨린 채 곧바로 임소(任所)를 이탈했으니,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고 독촉하여 내려보내라."

 

장령 황준구(黃儁耉) 등이 아뢰기를,
"호남 우도의 감시(監試) 시장(試場)을 개설할 때 좌도의 유생 40여 인이 공문(公文)을 만들어내어 공공연히 무릅쓰고 응시했다가 유생들에게 공척을 당하였으므로 사관(四館)이 정거시켰는데 도사(都事) 권대재(權大載)가 사관의 하인에게 중장(重杖)을 치고 나서 이들을 도로 풀어주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종장(終場)에 입문(入門)하는 날 선비들이 일제히 분노하여 즉시 입문하지 않자 이미 풀었던 유벌(儒罰)을 도로 정지시키고 입문하도록 타일렀습니다. 그런 다음 금란관(禁亂官)을 시켜 그 선비들의 의관에 표를 해두었다가 나아갈 적에 결박하게 했으니, 사심을 따라 법을 무시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대재는 잡아다가 추문하고 참시관과 금란관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파추(罷推)할 것만을 허락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원 도사(江原都事) 박세견(朴世堅)은 감시(監試)를 개장하는 날 친한 유생을 불러다가 배주(杯酒)를 먹였고 또 동당(東堂)의 출방(出榜) 때에는 피봉을 뜯어보고 자기가 아는 사람의 이름이 그 가운데 들어 있지 않자 다시 과차(科次)하여 당락을 바꾸었으니, 박세견은 잡아다가 추문하여 정죄(定罪)하고 참시관은 아울러 파직시키고 동당 방목(東堂榜目)은 해조로 하여금 발거(拔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방목에서 발거하는 것만 허락하였다. 또 아뢰기를,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인(李𡐔)은 관리로서는 간략함을 지키고 일에 임하여서는 원망을 떠맡고 있으나 호령이 가혹하고 일을 만드는 것이 번거로워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혹사하여 토목의 역사(役事)를 성대하게 일으켰습니다. 이에 온 경내(境內)가 원망하고 백성들이 명령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번 아뢴 뒤에야 모두 따랐다.

 

9월 11일 계해

교리 김만균(金萬均), 부수찬 이민적(李敏迪) 등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만균이 아뢰기를,
"기근이 이러한데도 조정에서 강구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구구한 소회를 진달하고 싶습니다."
하고, 민적은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미령하시어 여러 달 동안 신료들을 인접하지 않고 있는데 예수(禮數)를 간략하게 하여 유신(儒臣)을 불러 접견하고서 경사(經史)에 대해 강론하소서. 또 수시로 신하들을 인접하여 정리(政理)에 대해 강구하는 것은 실로 옥체에 손상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병이 자리에 누울 정도는 아니지만 매양 피곤함을 느끼게 될까 걱정스러워 못하고 있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임금이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것이 큽니다. 옛사람의 말에 ‘환관과 궁첩을 가까이할 때가 적고 어진 사대부들을 인접할 때가 많으면 덕성(德性)을 훈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한 말입니다. 황정(荒政)에 이르러서는 신이 어떻게 해야 이런 급박함을 구제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도 구처(區處)하지 않고 있으니 외방의 민정(民情)이 어찌 답답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정에 대하여는 묘당에서 상의해야 하는데도 아직 한 가지 일도 조처하지 않고 있다. 축적된 것이 있으면 흩어주어 진구하면 되겠으나 국가의 저축이 탕갈되었으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만균이 아뢰기를,
"떠돌아 흩어진 백성들이 이미 많으니, 어찌 매우 절박한 걱정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민(飢民)들의 형세가 반드시 떠돌아 흩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옛날 황소(黃巢)나 적미(赤眉)085)  도 모두 적자(赤子)였습니다만 변하여 반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멀리 고사(古事)를 인용할 필요없이 명(明)나라 말기의 유적(流賊)들도 기근에 연유된 것이다."
하였다. 승지 이정기(李廷虁)가 아뢰기를,
"근래 들리는 바에 의하면 도로에 절도(竊盜)가 많다고 합니다."
하고, 민적은 아뢰기를,
"조정에서 아직 미처 설시(設施)하는 것이 없어 지금 삼남(三南)의 백성들이 모두 떠돌아 흩어지게 되었습니다만, 이런 때에 덕의(德意)를 선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장차 부역을 견면하고 기근을 진구하는 거조가 있게 될 것임을 알게 한다면 반드시 경솔히 향토를 떠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애통해 하는 교서를 지어 도신(道臣)에게 하유하여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초안해서 팔도에 하유하라."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양민(良民)에게 신역(身役)이 실로 너무 편중되었는데, 이런 흉년을 당하여는 더욱 판출(辦出)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다 견감시킬 수는 없더라도 피해를 입은 것이 더욱 극심한 곳은 의당 먼저 변통시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 묘당의 신하들을 인접하려 하고 있으니, 그때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적이 또 청하기를,
"어영군의 상번 군사(上番軍士)를 파하여 보내고서 그 보미(保米)를 국용에 보충시키소서."
하니, 상이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새로 초선(秒選)한 포보(砲保)를 상경(上京)하게 하는 것도 백성들을 분요롭게 하는 것 가운데 극심한 것입니다. 묘당에서 좌상(左相)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조처할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기한이 이미 박두했습니다. 의논하여 결정하기를 기다린다면 제때에 미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당의 말이 이러하니 금년에 상경하게 되어 있는 포보는 모두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성균관에서 구일(九日)의 과제(課製)를 추후 설행하여 선비를 뽑았는데 으뜸을 차지한 이서우(李瑞雨)는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그 다음인 한두유(韓斗愈)는 회시(會試)에 직부하게 하였으며 임규(任奎) 등 7인은 각각 분수(分數)를 주었다.
구례(舊例)에 절일(節日)의 과제(課製)는 그날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대로 설행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대제학이 시소(試所)에 들어간 탓으로 9일에 설행하지 못하였다. 과시(科試)가 끝나고 나서 상이 특별히 설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 뒤로는 이것이 정식(定式)이 되어 절일에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달 안의 날짜로 물려서 설행하게 하였다.

 

9월 12일 갑자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임금이 명령을 내리는 것은 반드시 정원을 경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찮은 음식(飮食)·기용(器用)과 말단인 여마(輿馬)·복식(服食)을 각사(各司)에 분부하는 것일지라도 정원을 경유하지 않고 다른 곳을 경유하게 한다면 정대하게 하는 체통을 잃게 되어 간사한 길을 방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따라서 차비문(差備門)에서 직접 분부하는 것은 실로 국가에서 법제를 세운 본의가 아닙니다. 근래 내승(內乘)이 직접 전교를 받아가지고 자주 출입하는데도 정원에는 한번도 경유하지 않고 있으므로 외조(外朝)의 신하들은 듣고서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위에서는 정당한 사리를 어기는 거조가 있고 아래에서는 바라는 것이 있어 아첨하는 신하가 있게 되면 어떻게 광구(匡救)하고 규정(糾正)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잗단 일이지만 반드시 먼저 그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다시 차비문에서 직접 분부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윤비경(尹飛卿)·윤지미(尹趾美)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일전에 신들이 임한백에 대해 논계할 적에 한백이 바야흐로 간직(諫職)에 있었으니, 먼저 체직시킬 것을 청하고 나서 다음으로 잡아다가 추문할 것을 청하는 것이 체례(體例)에 있어 당연한 것인데, 신들이 미처 살펴 깨닫지 못하고 바로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뭇 의논이 그르게 여기는 경향이 많았고 유신(儒臣)이 연석(筵席)에서 진달하였으니, 태연히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하였다. 간원이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지평 이행도(李行道)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종부정(宗簿正) 이연년(李延年)은 일찍이 추쇄 어사(推刷御史)가 되었을 적에 오직 청탁에 의해서만 송사(訟事)를 결단했고 공공연히 송자(訟者)의 형의 집에서 술자리를 갖고 그른 줄 알면서 잘못 판결하여 한 번 대접받은 데 대한 보답을 하였습니다. 그 일이 발각난 뒤에 구차스럽게 송관(訟官)에게 애걸하여 면하려고 했으니 그간의 곡절은 말하기에도 추합니다. 성조(聖朝)에서 수치를 참고 다시 조정의 반열에 서게 했으면 의당 스스로 새롭게 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과거를 설행할 때 자신이 시관(試官)이 되고 외삼촌이 거자(擧子)가 되어 거장(擧場)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논의가 크게 떠들썩했었습니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으면 공론이 장차 폐기될 것입니다. 신이 이런 내용으로 동료들에게 간통(簡通)을 보냈는데 장령 이원정(李元禎)은 의견만 서로 틀렸을 뿐만 아니라 신계(新啓)에 대한 의견이 미처 귀일되기도 전에 곧바로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니, 신이 실로 경시당한 것입니다. 어떻게 무릅쓰고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장령 황준구(黃儁耉)도 경시당한 것이 동료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장령 이원정도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아침에 신이 전의 일을 연계(連啓)하기 위해 대청(臺廳)에 나아갔다가 동료가 보낸 간통(簡通)을 보니 바로 종부정 이연년을 사판에서 삭제시키자는 것을 간원에서 정계(停啓)한 것에 대해 대관(臺官)을 추고하자는 일이었습니다. 간원에서 정계한 것은 실제로 그저께 있었던 것인데 어제 회좌(會坐) 때에는 한 마디도 서로 언급이 없다가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의견을 창출해 냈으니,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이연년의 시장(試場)에 대한 일은 혐의를 멀리한다는 뜻에 어긋났고 간원이 정론(停論)한 것은 또한 너무 갑작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이연년의 파직을 청하고 나서 간원의 체직을 논해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을미년086)  의 추쇄 때 일을 거론하여 지금에 와서 심각하게 논할 여지로 만들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으므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일을 한 번 부당하게 한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평생을 단정한다면 이는 매우 성세(盛世)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더구나 연년은 법사의 심리를 받아 편배(編配)되었었으니 벌이 이미 행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5, 6년 뒤에 와서 기필코 다른 일을 인하여 제기함으로써 다시 성명한 때에 금고(禁錮)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또한 심합니다.
그리고 시장의 일과 추쇄의 일은 판연히 두 가닥이어서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본말에 서로 관련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다. 간통에서 이른바 말단을 다스린다는 이야기는 더욱 무슨 뜻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는 시기를 타고 저격(狙擊)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 공적인 시비에 연유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소견이 이렇기 때문에 재삼 왕복하여도 끝내 의견이 귀일되지 않았습니다. 동료가 마침내 구차스럽게 같이할 수 없다고 답하여 왔으니, 이는 인혐을 결단한 것이어서 다시 상의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대청(臺廳)에 나간 바에야 무단히 도로 나올 수가 없어서 이어 전계(前啓)를 전하고 물러나왔습니다. 이 한 가지 단서를 가지고 경시당했다고 하니, 또한 이상합니다. 이미 배척을 받았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모두 사퇴하지 말라고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간통의 의견이 귀일되기도 전에 서둘러 예전대로 아뢴 것은 그 책임이 그에게 돌아갑니다. 일을 조사하면서 공정하게 하지 않아서 이미 죄를 받았는데도 이제 와서 사판에서 삭제시키는 것은 매우 지나친 듯합니다. 피혐하는 내용에 저격한다는 등의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아울러 체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9월 13일 을축

남용익(南龍翼)을 승지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윤변(尹抃)·남천한(南天漢)을 정언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예조 참판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병조 참의로, 이진(李𥘼)을 병조 참지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접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등이 상의 체후(體候)가 미령하시니 망제(望祭)를 직접 행하는 것을 정지하라고 청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으나 신하들이 극력 청하고서야 윤허하였다.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신이 산릉(山陵)의 총호사(摠護使)로서 직무를 수행한 것이 형편없어 석물(石物)에 틈이 벌어진 곳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은 모두 죄벌을 받았는데 신만이 죄를 면하였고 면직을 청해도 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또 출사(出仕)했으니 죄가 더욱 큽니다."
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상이 옥당에서 청대(請對)했을 적에 제도(諸道)에 하유하라고 했던 일에 대해 대신에게 하문하기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삼남(三南)의 백성들이 거듭 기근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떠돌아 흩어지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옥당의 의도는 조정에서 먼저 애통해 하는 교서를 내려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만, 지금 먼저 부역을 견면시킨다는 뜻을 보이게 되면 백성들이 반드시 오는 가을에는 모든 부역을 다 견면시켜줄 줄로 생각할 것인데 그때 가서 소망한 대로 모두 되지 않을 경우에는 도리어 원망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구별하여 견감시키는 것을 또한 그만둘 수 없다."
하니,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여항(閭巷)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에 대해 지레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조정의 거조이겠습니까. 어떻게 먼저 공언(空言)을 보이고 결국 겉치레로 귀결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체에 있어 미안할 뿐만이 아니라 신의를 잃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호판 허적(許積)은 아뢰기를,
"이 일은 해만 있을 뿐 유익함이 없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떠돌아 흩어진 사람이 이런 교서가 있다고 해서 어찌 도로 안집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재감(裁減)하겠다는 것으로 말을 하면 또한 무방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자,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에 의거하여 하유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에서 양역(良役)이 치우치게 고통스러운 폐단에 대해 진달했습니다만 신들도 이에 대해 우려해 왔었습니다. 이렇게 큰 흉년이 든 해에 재상을 입은 것이 더욱 극심한 곳에 대해서는 진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청한 바 각영(各營)의 미곡을 덜어내어 민역(民役)에 보충시키자고 한 등등의 일은 반드시 재실(災實)을 계문(啓聞)하여 추봉(秋捧)을 끝마친 뒤에야 바야흐로 품처(稟處)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태화가 아뢰기를,
"옥당에서 또 군사들 가운데 도고자(逃故者)를 탕감시킬 내용으로 진달했는데 그 의도는 좋습니다만 그 형세는 쉽지 않습니다. 만일 대정(代定)시키지 않고 단지 적안(籍案)을 제거할 것만 허락한다면 군부(軍簿)가 장차 텅 비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 이정기(李廷虁)의 말을 듣건대 일찍이 병조 참지로 있을 적에 도고(逃故)와 노제(老除)될 나이에 찬 사람은 정소(呈訴)할 경우 모두 감제(減除)를 허락했다고 하였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이정기가 어떻게 그 폐단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근래 국사가 해이된 것은 모두 이처럼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원이 임의로 스스로 결단한 탓입니다. 그리고 적안(籍案)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변통하는 일에 관계될 뿐만이 아니라, 병조의 모든 일은 전부 판서에 의해 결단되는 것이요 좌이(佐貳)의 관원은 멋대로 결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지가 당상(堂上)의 말석(末席)으로서 마음대로 감제(減除)시켰으니, 어찌 국체(國體)에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근래 명관(名官)들은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기만 했을 뿐 사무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한 채 오직 견감시키는 것만을 말하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하고, 이판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정기의 일은 매우 경솔한 듯합니다만, 틀림없이 하리에게 속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기가 병조의 일이 모두 입직자(入直者)에게서 결단된다고 했는데 이것도 속아서 한 말인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에는 입직관(入直官)이 개인(開印)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일에 구애되는 점이 있어 끝내 준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정(軍政)의 중대한 일에 이르러서는 어찌 좌이관(佐貳官)이 임의로 처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기를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에서 어영군의 입번(立番)을 제하고 그 보미(保米)를 진구(賑救)하는 데로 옮겨다 쓰자고 청하였는데, 선조(先朝) 때에 과연 입번을 제하고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량(軍糧)은 다른 데에다 쓸 수가 없습니다."
하고, 대장(大將) 유혁연(柳赫然)은 아뢰기를,
"어영군은 24개월에 통틀어 한 번 입번하여 두 달간 연습하고 나서 파합니다. 지금 오는 가을을 기한으로 정번(停番)한다면 또 10개월이 지나야 되니 결국 34개월이 지나서야 이에 후번(後番)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연습이 소홀하게 되니 경솔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버려 두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백관의 급료에 대한 일은 품정(稟定)한 뒤에 마련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창사(倉舍)를 달마다 여닫게 되면 으레 훔쳐가는 걱정이 많게 되니 전처럼 반록(頒祿)하되 6품 이상은 각각 1석(石)씩을 감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이렇게 큰 흉년이 든 때를 당하여 태연히 녹봉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녹봉을 감하여 월료(月料)로 하는 것은 상도(常道)를 바꾼다는 뜻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백관에게 춘하 추동 사등(四等)으로 반록(頒祿)하면 쌀이 4만 7백 20석, 콩이 1만 9천 1백 48석인데 월료(月料)로 계산하면 쌀이 3만 6천석, 콩이 1만 6천 6백 8석으로, 반록에 견주어 보면 감하여지는 것이 쌀 4천 7백 19석, 콩 2천 5백 39석입니다. 그런데 전례에는 가감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어느 것을 따라서 마련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를 모두 써서 들이면 내가 마땅히 상세하게 열람해 보고서 조처하겠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남한 산성의 각년(各年) 포흠(逋欠)이 7천 7백 60여 석이나 됩니다. 성중(城中)의 포흠 가운데 유망(流亡)하였거나 절호(絶戶)되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기축년087)   이상이 8백 90석, 무술년088)   이상이 1천 3백 90여 석인데 빈 장부만 남아 있을 뿐 징수할 길이 없으니 변통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탕척시킨다면 이 뒤로 다시는 이런 폐단이 없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축년 이상의 것은 탕척시키라. 이 뒤로는 과조(科條)를 엄히 세워 이런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무과(武科) 일소(一所)의 시관(試官)을 잡아다가 추문하는 일로 연계(連啓)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과 일소의 시관들이 사정(私情)을 쓴 죄가 있으니 공정하지 못한 방목(榜目)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일소의 방목을 발거(拔去)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차비문(差備門)에서 직접 분부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일로 연계(連啓)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이 일은 대간이 극력 간쟁하고 대신도 열심히 청하고 있습니다만 성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니,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정원에 대죄하고 있을 적에 유정(柳頲)의 계후(繼後) 공사(公事)에 대해 위에서 정리(情理)가 절박하다고 하교하시고 특별히 그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밖의 의논은 혹 유정이 내승(內乘)의 세마(洗馬)로 있을 적에 내관(內官)에게 촉탁하여 상달하게 되었다고도 하니, 이런 등등의 일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혀 일을 살필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면 어찌 무후(無後)한 것이 정리(情理)에 있어 절박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하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이런 흉년을 당하여 긴요하지 않은 부비(浮費)는 의당 견감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호위 군관(扈衛軍官)에 대해서는 조신(朝臣)들이 파기해야 된다는 것을 많이 말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도성을 호위하는 데에도 무익한 것이니, 파기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합당하게 처리하라."
하였다.

 

9월 15일 정묘

밤에 개기 월식이 있었다.

 

영돈녕 이경석이 차자를 올려 황정(荒政)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신이 생각하는 것은 산리(散利)·견역(蠲役)·완형(緩刑)·절용(節用)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이는 모두 경사(經史)에 드러난 것으로 성현의 명훈(明訓)이요, 삼대의 유법(遺法)입니다. 그 방도를 강구하여 힘써 행한다면 여기에서 반드시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올 것입니다.
신이 인조조 때 주제(周制)의 황정 십이조(荒政十二條)와 《설원(說苑)》의 육정 육사(六正六邪), 《한서(漢書)》의 자사(刺史) 육조(六條)를 여조(麗朝)의 고사(故事)에 의거, 경외(京外)의 관사(官司)로 하여금 각각 1통씩 등사(謄寫)하여 청사의 벽에 붙여 놓게 했었는데 지금도 정부(政府)의 벽에는 먼지가 낀 채로 남아 있습니다만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아직껏 행하지 않고 있으니 더구나 그 일을 실행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국가의 기강이 퇴폐되어 법령이 행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부세를 감면시킨다는 내용으로 먼저 포고하는 것에 대해 먼저 명령을 내렸다가 신의를 잃게 될까 우려하여 답험(踏驗)을 기다려 상세히 조사해서 조처하려 하고 있습니다. 각 고을의 재결(災結)·실결(實結)은 진실로 미리 헤아려 차등을 매기기는 어렵습니다만, 더욱 극심한 곳에 대해서는 부세를 감면시키고 그 다음에 해당되는 곳은 반을 감면하고 또 그 다음에 해당되는 곳에는 1, 2분을 감면하게 하는 것은 미리 결정하여 먼저 알릴 수 있습니다. 근본이 되는 왕기(王畿)에 대해서는 사리상 의당 구휼해야 되는데, 세를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감면시키는 것보다는 때에 맞춰 사정을 감안하여 조기에 인택(仁澤)을 시행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백관의 녹봉과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과 수령의 월름(月廩)에 대한 자본은 평상시에 견주어 의당 감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또 각사 부고(府庫)의 미포(米布)를 풀어내어 경용(經用)의 자본으로 삼고 민역(民役)에 대신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화(銀貨)를 내어 시사(市肆)에 통용하게 한다면 흉년이라고 하지만 곡식이 있는 사람은 배나 말로 운송하여 서로 교역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풍성(風聲)이 미치는 곳의 원근 사람들이 서로들 기뻐하여 민심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고 나라의 운수를 계속 이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唐) 우(虞) 시대의 정치는 오직 옥송(獄訟)을 중히 여겼고 한(漢)나라 때의 순리(循吏)는 형벌을 늦추고 옥송을 잘 다스려 인심을 얻기를 힘썼습니다. 근일 모진 가뭄이 매우 참혹하여 원근이 모두 말라붙어 해마다 흉년이 들고 있으니, 하늘의 뜻은 알기가 어렵습니다만, 혹 옥송이 공평하지 않아 원망을 품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도(松都)의 옥사는 너무나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조관(朝官)은 옥의 곁에 있는 집에다 구금시키고 유사(儒士)는 형틀을 씌워 엄한 형신을 받은 경우가 십여 명에 이르렀으니, 이는 국가의 큰 형옥(刑獄)입니다. 형조의 회계(回啓)를 참의(參議)가 혼자서 했는데, 신이 그 장계(狀啓)를 보건대 실제로 포착된 일이 별로 없는데도 단서가 이미 드러났다고 했습니다. 이는 모두 의사(疑似)스러운 데에서 나온 것으로 목도하지 않은 죄목을 얽어만들어 사람을 사지(死地)에 빠뜨리려 모함한 것입니다."
하고, 이어 김영(金泳)·이흡(李潝) 등 죄수들의 억울함을 송변(訟辨)한 것이 누누이 수백 마디나 되었는데,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9월 16일 무진

태백(太白)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정박(鄭樸)·이동로(李東老)를 장령으로, 윤지미(尹趾美)를 지평으로, 홍주삼(洪柱三)을 교리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훈련 도감이 새로 설치한 둔전(屯田)을 혁파시키지 말 것을 청하니, 따랐다. 이에 앞서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훈국의 둔전에 대한 폐단을 진달했는데 영상 정태화가 탑전(榻前)에서 아뢰니, 새로 설치한 둔전은 품처하고 이 뒤로는 절대 더 설치하지 말라고 한 하교가 있었다. 그런데 도감이 아뢰기를,
"영서(嶺西)의 춘천(春川) 등 다섯 고을의 둔전은 설치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으나 도감에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 갑자기 혁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여, 일이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병조 판서 송시열이 병 때문에 영릉(寧陵)을 봉심(奉審)하는 날 달려가지 못했다는 것으로 소장을 진달하여 대죄하고 이어 체면(遞免)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의 병이 조금 차도가 있어 행역(行役)할 수 있다면 즉시 달려 궐하(闕下)로 나아가 태만한 데 대한 죄를 청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려 체직을 허락하고 번연(幡然)히 마음을 고쳐 올라오라고 유시하였다.

 

이조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전지(傳旨)에 응하여 소장을 올려 수천언(數千言)을 진달했는데, 구황하는 일에 대해 논하면서 청하기를,
"병조에 오래 저축되어 있는 면포(綿布)와 사복시(司僕寺)에 저축된 은화(銀貨)를 내어다가 갖가지 군포(軍布)와 노비의 신공(身貢)에 대신하게 하며,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에 저축된 쌀을 내어다가 양호(兩湖)의 대동미(大同米)에 대신하게 한 다음 본미(本米)는 감하여 받아들여서 각 고을에 유치시켜 놓았다가 오는 봄에 진구할 자본으로 쓰게 하소서."
하고, 또 상의 희로(喜怒)가 중도에 지나친 일을 논하면서 아뢰기를,
"이경휘(李慶徽)가 승지에 제배(除拜)되자 사람들이 모두들 기쁜 빛을 띠고 서로 고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경휘를 위하여 사사로이 기뻐하는 것이겠습니까. 박세성(朴世城)·이시매(李時楳)가 죄를 얻었을 적에 당시 사람들이 모두 지나친 거조라고 했었는데 오래도록 수용(收用)을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아랫사람들의 마음에 있어 불안한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송시열·송준길은 물러간 지 이미 오래인데도 성상께서 더욱 높여 소명(召命)이 잇따랐고 조야(朝野)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준길은 올라올 뜻이 있다고 들었으나 시열은 아직도 조정으로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다시 성유(聖諭)를 내려 반드시 번득 마음을 고치게 하소서. 그러면 세도(世道)를 위하여 어찌 크게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유태(李惟泰)도 사직하고 돌아간 지가 이미 오랩니다. 또 윤선거(尹宣擧)·윤원거(尹元擧)·신석번(申碩蕃) 등을 일체로 불러 수용하여 천직(天職)을 함께 하게 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이어 자기의 아버지 조익(趙翼)이 저술한 《심학도설(心學圖說)》을 진상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소장은 비국에 내렸다.

 

9월 17일 기사

홍명하(洪命夏)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명하가 바야흐로 이판으로 있었기 때문에 전례에는 병판에 이배(移拜)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대신(大臣)이 ‘명하가 일찍이 병판으로 있을 적에 장사(將士)들의 마음을 얻었었다.’고 말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상이 특별히 더 의망(擬望)하게 하여 제배하였다. 이민징(李敏徵)을 지평으로, 송시열(宋時烈)을 판중추부사로, 전 판서 정치화(鄭致和)를 특별히 서용(敍用)하여 이판에 제수하였다. 치화는 산릉(山陵)의 제조(提調)로서 석역(石役)을 감독했었는데 석물에 변이 있은 뒤 여러 제조들과 함께 죄를 얻어 파직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제배되었다.

 

9월 18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호조가 아뢰기를,
"이런 큰 흉년을 당해서 추수하는 계절에 이미 떠돌아 흩어진 백성이 많으니 대대적인 견역(蠲役)과 진구(賑救)의 거조가 없으면 팔도의 백성들이 모두 죽어 구렁에 나뒹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공사(公私) 모두가 탕갈되어 널리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의당 각도의 재결(災結)·실결(實結)을 구별하여 차등을 매겨 계문한 뒤에야 바야흐로 견역에 대해 논할 수 있습니다. 적곡(糴穀)의 수봉(收捧)에 이르러서는 바로 지금 변통시켜 행회(行會)하지 않으면 민간에서는 반드시 조정의 본의를 모르고 걱정하고 원망하는 탄식이 있게 될 것입니다. 제도(諸道)로 하여금 각 고을의 재변을 당한 경중을 분별하여 혹 삼분의 일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삼분의 이를 받아들이기도 하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가감하게 함으로써 굶주린 백성들을 보존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안질 때문에 침을 맞았다.

 

9월 19일 신미

상이, 굶주린 백성들이 앞으로 견면이나 진구가 있을 것임을 모르고서 먼저 떠돌아 흩어지고 있다는 것으로 팔도 감사에게 하유하였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외람되이 큰 서업(緖業)을 지키게 되었으므로 짐을 잘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 걱정하고 조심하는 것을 항상 얇은 얼음을 밟는 듯 깊은 연못에 임한 듯이 했다. 더구나 지금은 하늘이 돌보아 주지 않는 탓으로 이런 큰 흉년을 당하게 되었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불쌍한 나의 적자(赤子)들이 구렁에 죽어 나뒹굴게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아, 곡식은 백성들의 하늘이기 때문에 곡식이 없으면 백성이 없게 되는 것이고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기 때문에 근본이 동요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내 마음이 타는 것 같아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고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비록 병을 앓는 중이지만 또한 감히 스스로 한가히 있을 수 없어 자주 신료들을 인접하여 여러 사람들의 말을 널리 받아들이고 구휼하는 방책을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지금껏 한 가지 일이나마 조처하여 실제의 혜택을 널리 베풀지 못했으니, 먹여주기를 바라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이 장차 ‘우리를 버리고 돌보아주지 않은 채 까맣게 잊고 있다.’고 여겨 조정에서 주야로 걱정하면서 마치 자신의 몸이 아픈 것처럼 하는 뜻을 반드시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해마다 기근이 들어 국가의 저축이 탕갈되었으므로 가을에 부족함을 살펴 도와주는 것을 두루하지 못한 탓으로 재결(災結)과 실결(實結)을 상세히 파악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바야흐로 헤아려서 심처(審處)하는 일이 있을 것이나 미처 거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연분(年分)을 다시 살펴 재결과 실결의 다소(多少)를 상세히 안 연후에 재해를 입은 것이 더욱 극심한 곳은 세(稅)·공(貢) 등의 역(役)과 초군(抄軍)·군포(軍布) 등의 일을 당연히 견감하도록 할 것이며 그 나머지 흉황이 든 곳에도 의당 그 경중에 따라 부역을 양감(量減)하도록 하겠다. 구휼하는 정사에 이르러서는 장차 곡식을 옮겨 변통시키는 거조가 있게 될 것은 물론, 안으로 각사(各司)와 밖으로 각영(各營)에 저축되어 있는 곡식과 면포도 장차 그 실수(實數)를 조사하여 가져다 쓸 것이다.
이는 모두 오늘날 강구하고 있는 것들인데, 조정에서 불쌍히 여겨 구휼할 뜻을 멀리 있는 백성들이 모른 채 눈앞의 급박함을 견디지 못하여 유망(流亡)하게 된다면 비록 선정(善政)이 있다고 해도 이미 흩어진 뒤에 어디에다 베풀 수 있겠는가. 아, 고향을 편안히 여기고 옮기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인정(人情)에 있어 다 같으니 고향을 떠나는 것이 어찌 하고 싶은 것이겠는가. 지금 이 큰 가뭄은 팔로가 모두 그러하니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또한 살아갈 방법이 없는데도 오히려 그렇게 떠나는 것은 필시 요역(徭役)을 스스로 판출한 형편이 못 되어 침징(侵徵)을 면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반드시 먼저 조정의 본의를 선포하려고 하는 이유이다. 이들을 돌보아 감싸주는 책임은 실로 번신(蕃臣)들에게 있는 것이니, 경들은 모쪼록 이런 내용을 두루 도내(道內)에 유시하여 깊은 산골 외진 곳에도 알리지 않는 데가 없게 하라. 경들도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여러 고을의 수령들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위무(慰撫)함으로써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갑자기 고향을 떠나 도로(道路)에서 의지가지없이 떠도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라."

 

9월 20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충홍우도(忠洪右道)의 감시(監試)를 도사(都事) 김왕(金迬)의 시취(試取)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미 발방(拔榜)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당(東堂)의 방목(榜目)도 다같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국언(國言)이 자자합니다. 저것은 발거하고 이것은 그대로 둔다는 것은 어찌 그럴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동당의 방목도 똑같이 발거하소서. 김왕은 이미 잡아다 국문하였으니 참시관들만 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파직하소서.
또 듣건대 우도의 유생들이 시험을 치를 때 불공평함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서로 모여 떼를 지어 팔을 휘두르면서 계단으로 올라와 시관(試官)을 강제로 핍박하여 이미 고열한 글을 가져다가 서로들 묵필(墨筆)로 지우고 뭉개면서 멋대로 꾸짖어 욕을 가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기에 이르렀다 합니다. 사습(士習)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해도(該道)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통렬히 다스리게 함으로써 징계되어 그치게 하는 여지로 삼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뒤 유생들을 조사하여 다스리는 일에 대해서는 아뢴 대로 따랐다.

 

부수찬 이민적(李敏迪)이 소장을 올려 전에 청대(請對)했을 때의 의견에 대해 거듭 아뢰기를,
"신이 생각건대 제사(諸司)의 저축에 아직도 남은 재화가 여유가 있는데도 백성들이 구렁에 죽어 나뒹굴게 되었습니다. 이에 양역(良役)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먼저 재상(災傷)을 당한 지방의 군포(軍布)를 감해 주기를 청한 것입니다. 재상을 구휼함에 있어서는 비용을 줄이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고, 비용을 줄이는 데는 군식(軍食)이 가장 큰 것이기 때문에 우선 어영군의 금년 상번(上番)을 정지시킬 것을 청한 것입니다. 근본이 되는 지역은 더욱 먼저 구휼해야 되기 때문에 강도(江都)·남한(南漢)의 환상(還上)을 반감(半減)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민사(民事)는 이미 백척간두에 이르러 수백만의 생령(生靈)들이 아침에 어떻게 될지 저녁에 어떻게 될지 몰라 울부짖고 있으니, 부세는 견면하지 않을 수 없고 요역은 쉬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병무(兵務)를 주관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군병의 일을 확대하려고 힘쓰고 재화(財貨)를 맡고 있는 사람은 단지 경비만 생각할 줄 알 뿐이어서 대소 이해(利害)에 대한 진언을 일체 받아들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특별히 기이한 계모(計謀)가 있어서 묵묵히 기미에 앞서 운행하여 절로 나라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안무(按撫)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엿보아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규모(規模)와 조획(措劃)에 대해서 진실로 먼저 정하여 놓지 않고 그럭저럭 시일만 보내면서 목전만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때늦게 물을 적셔 주어도 말라 죽은 물고기에게는 소용이 없게 되는 그런 경우가 될까 신은 우려스럽습니다."
하고,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고 하였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전남도 담양(潭陽) 사람 이정일(李廷一)이란 사람은 굶주림을 참을 수 없어 목을 매어 죽었는데, 감사가 장문(狀聞)하였다.

 

9월 21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진휼 재생 구관 당상(賑恤裁省句管堂上)을 설치했는데 허적(許積)·홍명하(洪命夏)·조복양(趙復陽)을 이에 임명했다. 그뒤 또 유계(兪棨)도 임명하였다.

 

비변사가 청하기를,
"수원(水原)의 솔오(率伍) 가운데 양역(良役)이 있어 응당 납입해야 하는 면포를 모두 견감시켜 주소서. 조금 실한 곳이어서 응당 납입해야 되는 사람은 본 고을에서 수봉(收捧)하여 강도(江都)로 보내어 유치시켰다가 내년 가을 쌀을 사들일 때를 기다리게 하고 강도의 쌀 1천 석을 내어다가 군민(軍民)을 진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는 부사(府使) 임의백(任義伯)의 청을 따른 것이다.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산릉(山陵)에 관계된 일은 사체가 자별(自別)한 것입니다. 도감 당상들이 벌을 받은 지 두어 달도 되지 않았고 산릉을 수개(修改)하는 역사도 아직 완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같이 죄를 받은 사람은 바야흐로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데 전 판서 정치화(鄭致和)는 먼저 수용(收用)되었으므로 뭇 의논이 모두 너무 급작스러웠다고 하고 있으니, 수용하게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산릉관(山陵官)이 동역(董役)을 삼가지 못한 죄에는 의당 차이가 있을 수 없는데 전후 도감 관원의 죄를 논한 경중이 현격하게 달라서 혹 좌죄되어 파직당했다가도 곧이어 서용된 사람도 있고 혹 일죄(一罪)에 의율(擬律)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한 사람도 있었다. 치화 같은 경우는 또 특별히 서용되어 총재(冢宰)에 제배되었으니, 법이 미덥지 못하여 정해진 기준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따라서 죄에 승복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9월 22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또 침을 맞았다.

 

9월 23일 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4일 병자

심세정(沈世鼎)을 집의로, 윤원거(尹元擧)를 지평으로 삼았다.

 

삼척 부사(三陟府使) 허목(許穆)이 연한이 이미 지났다는 것으로 이조에 정장(呈狀)하였다. 이조에서 허목은 보통 관원들과 다른 점이 있고 또 근력도 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계품하여 부임하게 하였다.
허목이 처음 의례소(議禮疏)를 올렸을 적에 사람들은 그가 다른 뜻을 품은 것이 없다고 했었는데, 그뒤 본정(本情)이 점점 노출되어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조정을 공동(恐動)시키기에 이르러서는 선도(善道)의 종통(宗統)·적통(嫡統)에 대한 이야기와 서로 합치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비로소 그가 간특하다는 것을 알았다.

 

전남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진도(珍島)의 기황(飢荒)이 육지의 고을보다 극심한데 정배(定配)된 죄인은 매우 많아서 사세가 장차 머리를 나란히 하고 굶어죽게 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고을로 이배시키거나 다른 도(道)로 양이(量移)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은
"역옥(逆獄)에 연좌된 사람은 이배할 수 없다."
고 했으므로 오직 형조의 죄인만 다른 도로 이배하였다.

 

북병사(北兵使) 권우(權堣)가 치계하기를,
"북로(北路)에 큰 흉년이 들어 새로 출신(出身)하여 부방(赴防)하는 사람들이 자생(資生)할 곡식이 없어 주객(主客)이 함께 곤고에 허덕이고 있으니, 관서(關西)로 옮겨서 부방하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혹 개시(開市)할 때에 쇄마(刷馬)를 세우게 하여 삭수(朔數)를 감해 주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다. 묘당이 복계하니 따랐다. 그러나 옮겨서 부방하게 하는 것은 폐단이 있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이정영(李正英)이 말미를 받아 영남(嶺南)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소장을 올려 연로(沿路)의 민원(民願)을 진달하였다. 첫째는 영(嶺) 밑에 있는 열한 고을의 두 해 전세(田稅)를 함께 징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충주(忠州)의 조작미(租作米)를 서울로 납입하지 말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치에 대한 폐단을 극력 진달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소장을 비국에 내렸다.
이에 앞서 영 밑의 여러 고을에 흉황이 더욱 극심하였기 때문에 응당 받아들여야 할 전세(田稅)를 물려서 가을에 봉납하게 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또 기근이 들었으므로 지난해의 세금을 받고 나서 내년 봄에 또 금년의 세금을 받는다면 민력(民力)이 결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충주의 전 목사(牧使) 원두추(元斗樞)가 별도로 조(租) 1천 석을 준비해 놓았었는데 선혜청에서 이를 작미(作米)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그러나 충주 백성들이 기근을 구제받는 데 절실했으므로 올려 보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비국이 모두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다.

 

9월 25일 정축

비변사가 아뢰기를,
"금년의 농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랫백성을 돕는 정사에 대해 의당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수용(需用) 또한 장차 지탱할 수 없는 실정이니 완전히 감면시킬 수는 없습니다. 경기와 호서는 수미(收米)를 2두(斗) 감하고 호남은 3두를 감한 다음, 그 대신 서곡(西穀)이나 강도(江都)·남한(南漢)의 쌀을 가져다 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9월 26일 무인

상이 뜸을 떴다.

 

집의 심세정(沈世鼎) 등이 아뢰기를,
"이번 증광 감시(增廣監試)와 동당 초시(東堂初試)에서 사심을 따라 공평하게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자자하게 전파되어 있습니다. 충홍좌도의 감시(監試), 강원도의 동당(東堂), 서울의 무과(武科) 일소(一所)의 방목(榜目)은 모두 발거(拔去)하였으며, 충홍우도의 동당은 간원이 지금 발거하기를 계청(啓請)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의 말이 많아 고시관(考試官)들이 옥에 갇혀 꽉찼으니 예로부터 어찌 이런 과거(科擧)가 있었습니까. 지금 만약 이 방목을 그대로 둔다면 이는 너무도 구차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위로는 조신(朝紳)에서부터 아래로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같은 목소리로 모두들 파기시켜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감시가 이미 복시(覆試)를 거쳐 방방(放榜)했다고 하여 버려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증광 감시와 동당을 모두 파방(罷榜)시킬 것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근거가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옥당에서 고사(故事)를 써서 진달하면서 빗대어 지척(指斥)하는 말이 있었다 하여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옥당의 유신(儒臣)이, 백성을 잘 살게 하지 못한 죄가 유사(攸司)의 잘못에 있다는 것으로 성대하게 지척하는 내용을 고사(故事)를 써 올리는 중에 첨입하였다 합니다. 신의 성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유사는 곧 신이니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이른바 백성의 구휼을 위하여 의논했다는 것은 어떤 의논을 가리키는 것인지 신이 모르겠으며, 이른바 방계(防啓)했다고 하는 것은 또 어떤 계사(啓辭)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고 아둔하고 창황하여 말밖의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 백성의 산업이 날로 궁핍되어 가고 유망(流亡)하는 사람이 날로 많아지는 것은 유사(攸司)에게 연유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 백성들로 하여금 항산(恒産)이 없게 만들어 편안히 살 수 없게 한 것이 첫째도 신의 죄이고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아, 지난해와 금년은 홍수가 지거나 가뭄이 들어 팔도의 생령들이 모두 구렁에 죽어서 나뒹굴게 되어 있으니, 유신(儒臣)의 말이 백성을 돌보는 슬프고도 통렬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 줄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신이 손을 묶어 놓은 듯이 가만히 앉아 아무런 계책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만일 국가와 백성을 구활(救活)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굽혀 남을 따르는 것을 신은 진실로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할 때와 일을 할 때는 사세가 같지 않은 것이니 자리를 바꾸어서 처해 있었다면 신은 그가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신(良臣)이니 민적(民賊)이니 하는 말은 《맹자(孟子)》의 글을 범연히 인용한 것 같지만 실제 의도는 신을 극력 공격한 것입니다. 아, 그 예봉(銳鋒)이 두렵습니다. 신에게 특이한 재능이 있어 백성에게서 취하지 않고도 경비로 쓸 것이 저절로 부족하지 않기에 이르게 하고 가을에 적곡(糴穀)을 받지 않고도 진구(賑救)할 수 있는 밑천이 봄에 이르러서도 넉넉할 수 있다면 또한 속미(粟米)와 마면(麻綿)에 대한 명령을 모두 쓸어 없애고 오직 백성들이 바라는 대로 따르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라의 사세가 이렇지 않고 신의 재지(才智) 또한 이를 판출할 길이 없기 때문에 취하여 가득 차게 하지는 않더라도 취하지 앓을 수는 없고 다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적곡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각 고을의 분등(分等)과 재상(災傷)에 대한 반령(頒令)은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널리 의논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대신(大臣)에게 품정(稟定)했는데도 백성에게 가렴(苛斂)한다는 비방이 갑자기 일어나 신에게 가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만일 이 말이 한결같이 공적인 시비에서 나온 것이라면 신이 스스로 해명하더라도 치욕만 가중될 뿐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조정에서는 비록 신을 정직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집에서는 신에 대해 송변(訟辨)해 주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위유(慰諭)하기를,
"사람들이 장차 다 죽게 되고 국사가 여기에 이르렀으므로 한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고 믿을 사람이라고는 오직 경뿐인데 경은 어찌하여 경박한 연소배들의 말을 이유로 이런 소장을 진달한단 말인가. 이는 내가 평일 경에게 기대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경이 국사를 생각한다면 이런 횡역(橫逆)스런 말을 입에 올릴 것이 뭐 있겠는가. 속히 출사(出仕)하여 행공(行公)함으로써 목마른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옥당 김만기(金萬基)·이민서(李敏叙)가 진서산(眞西山)이 진달했던 고사(故事) 가운데 유안(劉晏)의 일을 인하여 계속해서 논하기를,
"지금 유사(有司)가 된 사람들은 평소에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재화(財貨)를 다스리는 방법에 이르러서도 모두 구차스러워 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백성의 것을 거두어 관(官)에 납입함에 있어 기회(期會)를 어기지 않게 하는 것만 알 뿐, 백성의 산업이 날로 곤궁해지고 유망(流亡)이 날로 많아지고 굶어 죽은 시체가 날로 쌓이는 데 이르러서도 오히려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극력 강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만약 백성을 구휼하는 의논을 내리면 또 방계(防啓)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고 있으니, 시기에 앞서 진휼(賑恤)하는 경우와 견주어 보면 과연 어떠합니까. 결국에는 백성들이 곤궁하여 도적으로 변하고 국가의 재정이 날로 위축되는 데 이르게 된다면 민생이 생업을 편안히 하여 세입(歲入)의 숫자가 배로 느는 것에 견주어 득실(得失)이 또한 어떠합니까.
《맹자(孟子)》에서 이른바 지금의 양신(良臣)은 옛날의 민적(民賊)이라 한 것과 주자(朱子)의 이른바 기민(飢民)의 입속에 든 것까지 호리(毫釐)를 계산한다는 것이니 통분스럽고 슬픈 일입니다. 성상께 바라는 것은 덕재(德財)의 경중에 대한 분별에 유념하여 먼저 취사(取捨)를 결정하소서. 그리하여 유안의 일 가운데 취할 만한 것을 가지고 지금 재용(財用)을 맡은 자들을 칙려(飭勵)함으로써 백성이 죽는 것을 멀거니 서서 보기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허적이 이 때문에 사직(辭職)하였다.

 

9월 27일 기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삼가 호조 판서 허적이 올린 소장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신은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이 지난번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을 적에 마침 고사(故事)를 진달하는 것을 담당하게 되었기에 감히 유안의 이재(理財)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고 또 송유(宋儒)들이 임금에게 고한 말들을 철습한 다음 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동료들과 상의하여 써서 진달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사가 졸렬하여 성총을 개발하지 못한 채 결국 엄지(嚴旨)가 내리게 만들었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신은 성실한 일심으로 단지 유사가 성상의 뜻을 잘 받들지 못하여 정령(政令)이 민심을 크게 위안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여 감히 오늘날의 일반적인 폐단을 논한 것이요 실로 한 사람을 침공(侵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경박하고 횡역스럽다는 것으로 하교하셨으니, 실정과 다른 것치고 너무도 극심한 것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망언(妄言)을 한 죄가 있으니, 어떻게 그대로 무릅쓰고 언지(言地)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고사를 써서 진달한 것은 백성에 대한 걱정이 간절해서이고 자신의 의견을 첨부한 것은 유사(有司)의 이재(理財)가 혹시라도 《대학(大學)》의 도(道)에 어긋남이 있을까 우려해서였습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폐단에 대해 논급한 것은 당초 침공하려는 데 뜻을 둔 것이 아니었으니 엄준한 비답은 실로 실정과 동떨어졌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이 때문에 경솔하게 대관(臺官)을 체직시킬 수 있겠습니까. 출사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9월 28일 경진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뜸을 떴다. 상이 약방 도제조 정태화(鄭太和)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이르기를,
"백관에게 반록(頒祿)할 기일이 이미 박두했는데 병 때문에 인견하지 못한 탓으로 재생(裁省)하는 일을 아직 사리에 맞게 하지 못하였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월료(月料)를 지급하여 상도(常道)를 변경한 뜻을 보이고 싶습니다만 우상이 매양 녹봉을 감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고 원임(原任) 대신(大臣)도 차자를 올리면서 이에 대해 언급하였으니, 위에서 헤아려 결단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6품 이상에게 1석(石)을 감하고 월료(月料)로 지급하는 일에 한하여 사세를 살펴 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공상(供上)을 하는 물품은 의당 먼저 감해야 하니, 사도시(司䆃寺)의 갱미(粳米)·중미(中米)와 내주방(內酒房)의 향온미(香醞米)는 각각 절반씩 감하도록 하라."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갱미·중미는 그 숫자가 각기 20석이어서 수량을 감할 수 있습니다만 내주방의 쌀은 전부터 감하고 또 감하였으므로 지금은 하루에 공상(供上)되는 것이 1병(甁)뿐입니다. 사체로 말한다면 어떻게 다시 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양색미(兩色米)는 반을 감하고 향온미는 삼분의 일을 감하라."
하였다. 상이 송도(松都) 죄인의 원정(原情) 공사(公事)를 태화에게 내어 보이면서 이르기를,
"경은 이 문안(文案)을 보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도승지 오정일(吳挺一)에게 명하여 펴서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양몽석(梁夢錫) 등에게 의심스런 단서가 많다."
하고, 이어 엄형을 가하여 철저히 신문할 것을 명하였다.

 

9월 29일 신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사관(史官) 이광직(李光稷)이 명을 받들고 송시열·송준길에게 구황책을 문의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시열은 말하기를 ‘《주자대전(朱子大全)》에 황정(荒政)에 대한 이야기를 진달한 것이 있는데 매우 상세하고도 절실한 것이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오늘날에 적합한 것을 초출(秒出)하게 하여 거행하시면 많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주자가 재상(宰相)에게 준 편지도 조정에서 삼가 유념해야 될 부분입니다. 또 기억하건대 연전에 사인(舍人) 신 이단상(李端相)이 호남(湖南)에서 돌아와 탑전(榻前)에서 복명하면서 굶주린 백성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극진하게 진달하자 선왕(先王)께서 비통해 하며 하교하시기를 「이런 등등의 말을 들으니 무엇을 다시 아끼겠는가.」 하셨으니, 이것이 오늘날 성상께서 의당 알아야 될 일입니다.’ 했습니다.
준길은 말하기를 ‘봉교(奉敎) 유명윤(兪命胤)의 소장에서 이른바 온갖 역사(役事)를 정폐(停廢)하고 상공(常貢)을 견면할 것이며 또 땅이 없는 소민(小民)을 진구하는 것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 진실로 간절하고도 지극한 의논입니다. 전고의 진구(賑救)에 대한 정사를 두루 살펴보건대 그 방법이 한결같지 않았습니다만 그 요점은 모두 군신 상하가 지성으로 두려워하면서 백성을 아들처럼 여기고 기필코 집집마다 구제하여 사람을 살림으로써 하늘에게 국명(國命)이 영원하기를 비는 것의 근본으로 삼는 데 있었습니다. 전대의 제왕은 진실로 백성에게 조세(租稅)를 완전히 감해준 경우도 있었고 혹 반을 감해준 경우도 있었습니다. 국가의 저축에 여유가 있다면 이 일이 어찌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국가 재정이 탕갈된 것을 신도 알고 있습니다만 삼가 듣건대 서로(西路)의 향곡(餉穀)이 거의 10여 만 곡(斛)이 넘고 두 곳의 보장지(保障地)에도 저축된 것이 있으며 각 아문의 은포(銀布) 또한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이를 융통시켜 덜어내어 1년 경비에 충당시키고서 재상을 입은 것의 경중을 막론하고 상세(常稅)와 수미(收米)를 아울러 반을 감할 것이며 재상을 입은 것이 극심한 곳은 완전히 감면하소서. 소민을 진구할 책임을 모름지기 번신(藩臣)으로 하여금 요리하여 시설하게 하고 나서 계청한 것이 대단히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면 일체 아울러 윤허함으로써 실효를 책임지우소서. 그리고 나서 실효가 없는 경우에는 무거운 견책을 가함으로써 태만함을 경계시키소서. 전지가 없는 소민들 가운데 이미 떠돌면서 걸식하는 사람은 내년 봄이 되기 전에 사세가 반드시 다 죽게 될 것이니, 제도(諸道)의 감사에게 신칙하여 경내에 굶어 죽은 사체가 많을 경우에는 그 수령을 죄주게 하고 구제하여 살린 사람이 많을 경우에는 후한 상을 시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런 사의(事意)를 급급히 우선 먼저 선유(宣諭)하소서. 또 해조(該曹)의 사목(事目) 중 분수재(分數災)를 허락하지 않고 또 내진(內陳)도 허락하지 않고 또 새로 기전(起田)한 것은 재결(災結)에 해당되더라도 전의 숫자를 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고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니, 다시 깊이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적(糶糴)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년 봄 진구(賑救)를 위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목금의 사세가 결코 완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편이니, 또한 지난해의 전례에 의거하여 혹 반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삼분의 일을 받아들이기도 하도록 명백하게 효유하여 각도로 하여금 봉행함에 있어 현혹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도(諸道) 영장(營將)의 1년 공궤(供饋)에 드는 비용이 매우 많은데 지금은 흉황이 들었다고 하여 순력(巡歷)하면서 합쳐 조련하는 것을 정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장은 단지 일개 용관(冗官)일 뿐이니 서울로 불러들였다가 내년 봄에 다시 보내게 하소서. 교양관(敎養官)은 임무가 매우 한만하니 또한 의당 정파(停罷)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드는 비용을 기민을 진구하는 데로 옮겨다 쓰는 것도 또한 임시로 쓸 만한 방도입니다. 신이 매양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면세되는 전지(田地)가 너무 많아 국용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오로지 여기에 연유되고 있으니, 진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각 고을의 관둔전(官屯田)과 충훈부 이하 각 아문 및 내수사와 여러 궁가에 소속된 토지의 면세를 일체 아울러 정파시키소서. 그리고 그 세입을 거두어 공가(公家)에 부송시키는 것을 영구히 법문으로 만드소서. 그리하여 모든 지역에 전혀 면세된 전지가 없게 하며 여러 학궁(學宮)에 소속된 전지라도 면세를 허락하지 말면 국용에 보탬이 되는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그 세금을 공가에서 거두더라도 본전(本田)에서 전례대로 따로 수확하는 것 또한 적지 않으니 구애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밖에 염분(鹽盆)·어전(漁箭)·선세(船稅) 같은 것도 일체 공가에서 세금을 거두게 하는 것이 실로 지극히 절실하고 급박한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낭묘(廊廟)에서 의논하시어 의심없이 단연코 행하시기 바랍니다. 신이 매양 진달하고 싶었으나 미처 하지 못했는데 지금 하문하심을 인하여 감히 은미한 마음을 다 진달합니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계(議啓)하게 하였다.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재변을 걱정하고 백성의 일을 급하게 여겼으며 또 형옥(刑獄)의 외람됨을 우려하여 소회를 진달하고자 했을 뿐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그 사람에 대해 애증(愛憎)의 마음을 두었겠습니까. 그런데 개성 유수 남노성(南老星)이 이를 인하여 분노가 그리도 극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그곳에 있을 적에도 이미 신이 5백 금(金)을 받았다고 의심하는 말을 하였는데 도성 밖에 도착함에 이르러서는 또 그 숫자를 증가시켜 9백 금이라고 했으며 수일이 되지 않아서 또 그의 말을 듣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1천 금을 받은 것을 내가 이미 상세히 알고 있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를 변백(辨白)하기 위해 말하려 하니 입이 더러워질 것 같습니다. 이는 신의 한몸에 오욕이 될 뿐만이 아니라 삼조(三朝) 성명(聖明)의 세상을 욕되게 하는 것은 물론 한때 진신(搢紳)들의 수욕(羞辱)인 것입니다. 도하(都下)의 시정(市井)·이인(吏人)·무사(武士)의 부류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전하고 있으니 신이 일소(一笑)에 부치려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시호(市虎)와 의이(薏苡)089)  는 예로부터 비방을 이루는 것이었는데 더구나 인정과 세태가 투박한 것이 물이 더욱 깊어지는 것과 같은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유언비어가 풍문을 따라가지 않는 곳이 없으니 신이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근세(近世)에는 인심이 선하지 못하여 경상(景象)이 아름답지 않지만 어찌 형편없는 말이 재열(宰列)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와 대신에게 가해질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비록 만금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뜬 말을 믿지 않을 것인데 심각한 글을 지어 혐의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남노성의 소위는 매우 형편없는 것이니 우선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라."
하였다.

 

9월 30일 임오

상이 뜸을 떴다.

 

전남도(全南道)에 9월 초2일 서리가 내려 늦곡식에 손상이 많았는데, 감사가 급재(給災)해 줄 것을 계청하였다. 그러나 호조에서 9월에 내린 서리는 재상(災傷)이 되지 않는 것이고 또 이미 답험(踏驗)이 지났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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