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계미
우박이 내렸다.
정륜(鄭錀)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논계(論啓)에서 빠진 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2일 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뜸을 떴다.
10월 3일 을유
천둥이 쳤다.
상이 혼전(魂殿)에 겨울철 큰 제사를 거행하려다가, 정원 및 대신들이 상의 몸이 편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보류할 것을 거듭 청하자, 대리로 거행케 하였다.
10월 4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5일 정해
황준구(黃儁耉)를 헌납으로, 이익(李翊)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0월 6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정태화가 질병을 이유로 차자를 올려 체직을 비니, 상이 내국 도제조만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무과 일소(一所)의 시관 조필달(趙必達)과 이연년(李延年)을 대계(臺啓)로 인하여 잡아다가 추고하였는데, 금부가 조율(照律)한 결과 탈고신(奪告身)이 내려졌고, 차비관들은 충군(充軍) 또는 정배(定配)되었다.
10월 7일 기축
사시(巳時)에서 신시(申時)까지 온 사방이 캄캄하였다.
집의 심세정(沈世鼎)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오늘 본부에서 개좌(開坐)하였는데, 충주(忠州) 복성면(福城面)에 산다는 사람 80여 명이 소장(訴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수년 전에 옹주 집의 도장(道掌)이라는 자가 본면에 있는 묵밭에다 전장을 개설하더니, 민간의 전지를 날이 갈수록 더 제멋대로 차지할 뿐만 아니라, 온 면의 산천을 모두 옹주 집의 물건이라고 하면서 꼴 베고 나무하는 것, 물 끌어다 쓰는 것을 일체 금지하는데,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마구 매질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강제로 세를 받아내기까지 하였으며 죽어서 장사치르는 자에게도 세를 받고 나서야 허락하는 등, 작폐가 하도 극심하여 산속의 쇠잔한 백성들이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는 형편이다.’고 하였습니다. 해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하여 계문하도록 하고, 그 도장은 해조로 하여금 잡아다 가두고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전남도(全南道) 낙안(樂安)에 사는 김치일(金致鎰)도 소장을 올리기를, ‘지난해 6월 아버지가 명화적(明火賊)에게 피살되었는데, 당시 같이 칼을 맞고도 살아 남은 종이 그 적당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형 김상일(金尙鎰)이 사유를 갖추어 관가에 고소하였다. 군수가 처음에는 적당을 잡아오더니 곧바로 청탁을 받고서 일부러 판결을 지연시켰다. 관찰사에게 소장을 올려 추관(推官)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줄 것을 청하자 군수가 자기를 훼방하였다며 성을 내어 도리어 잡아 가두고 무고하였다는 진술을 강제로 받아내었으며, 또 겸관(兼官)을 사주하여 관찰사에게 허위 보고를 하여 갑자기 판결을 뒤집어 곧바로 적당을 석방하였다. 이어서 또 조정에 계문(啓聞)하였는데 해조의 회이(回移)에도 원고를 형추(刑推)하라는 말이 없었는데도 관찰사가 다섯 차례의 형신(刑訊)을 가하고 끝내는 곤장을 쳐서 창성(昌城)에 유배시켰으니, 원통하기 막심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송사가 이미 살인에 관계된 사건인데다 치일 등이 관가에 소장을 올린 것은 바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자는 것이고, 석방된 세 사람 또한 의문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이 있게 된다면, 모든 송사를 분명하고도 신중하게 처리한다는 성조(聖朝)의 도리가 아닙니다. 해도 관찰사로 하여금 앞뒤의 문안 및 소장 내용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경옥(京獄)으로 올려보내어 분명히 심리하여 처결할 수 있도록 하게 하소서.
전 원주 목사(原州牧使) 김경항(金慶恒)은 나무 장사와 결탁하여 황장목(黃腸木)을 도벌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지난 겨울 경항이 의금부에 출두하여 심리를 받을 적에 본도로 하여금 조사케 하였으나 그때 조사관이 눈이 많이 쌓였다는 핑계로 끝내 직접 가보지 않고 산지기들에게 진술을 대충 받아오므로써, 장오(贓汚)를 범한 관리가 끝까지 형벌을 도피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정상이 드러난 이상 사정을 따르고 공법을 멸시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의 조사관을 나문하여 죄를 다스리고, 조사관의 보고에만 의존하여 흐릿하게 치계한 그때의 관찰사도 먼저 파직을 한 다음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아울러 따랐다.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의 장사에 상이 묘막(墓幕)을 만들어 주라고 명하였다.
숭의전(崇義殿) 및 왕태조(王太祖)의 능묘 근처에 투장(偸葬)이 든 것을 경기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계문토록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관찰사가 계문한 곳이 1백 70곳에나 달하였다. 예조가 거리의 원근에 따라 평지로 만들거나 그대로 두거나 하되 그 중 아주 가까운 곳은 이장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투장의 일은 너무도 놀랍다. 일체 파내도록 하여 국법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나 해조의 뜻도 하나의 방도이기는 하다. 아주 가까운 곳은 파내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평지로 만들게 하되, 이 뒤로 또 법을 어기는 자가 나오면 관리가 중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으로 본도에 신칙하라."
하였다. 전조(前朝)의 능침 중 공덕이 있는 제왕의 능침에는 마땅히 봉식(封植)을 하고, 왕태조의 능에는 능지기를 세워 주어서 수축을 하고 제향을 받들도록 하는 것이 옳으나, 그저께 연신(筵臣)이 진달하면서도 수백년 동안 금지함이 없어 투장이 든 왕씨의 분묘까지 거론하여 대부분 파내게 하였으니 너무 지나친 것 같다.
10월 8일 경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9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심지원(沈之源)을 내의원 도제조로, 이만(李曼)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10월 10일 임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올해는 흉년이 극심하여 백성들이 대부분 끼니를 잇지 못하고 있으므로, 구호의 대책을 미리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서(海西) 근처 각 고을에 쌓아둔 잡곡 3천 석(石)을 겨울이 오기 전에 운반해 오고, 또 삼남(三南) 지방의 명년 봄 구호가 더더욱 급박한만큼, 각처의 산성에 나누어 줄 군량곡을 각 고을에 받아 두어서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먼 곳으로 보내는 폐단을 덜어 주는 한편, 또 명년 봄에 가서 구호곡으로 나누어 줄 대비를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1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면직되었다. 치화가 대간의 비평을 받고 나서 스스로 불안한 나머지 소를 올려 체직된 것이다.
목조 황고(穆祖皇考)의 능이 삼척(三陟) 지역에 있다 하여 조종(祖宗) 때부터 찾았으나 그 곳을 찾아내지 못하였는데, 이침(李郴)이라는 자가 그 곳을 찾아내었다며 소를 올려, 관원을 보내서 봉심(奉審)할 것을 청하므로, 조정에서 강원도 관찰사 이후산(李後山)에게 지시하여 봉심한 다음 계문하라고 하였더니 후산이 치계하기를,
"이침의 상소는 애당초 공상(功賞)을 바라서 올린 것으로, 실로 증거가 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연대가 멀지 않은 지난날 조종 때에도 다방면으로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갑자기 근거없는 뜬소문을 믿고 수백년 뒤인 지금에 와서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일이 너무 황당하므로, 이러한 폐단을 영원히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사안을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여 본도로 하여금 이침에게 죄주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당장 죄를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다. 이 뒤에 또 이런 무리가 있을 경우에는 중죄로 다스리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지(輿地志)》에 목조 황고의 묘가 삼척부(三陟府) 서쪽에 있다는 문구가 보이는데, 그때는 국초와 시대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살펴 알아서 기록해 놓았을 법도 하다. 그런데 또 당시 봉분을 짓고 묘지기를 세운 일이 없어 세대가 점점 멀어지면서 그 장소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되었으니, 괴이한 일이다.
평양(平壤) 진사 윤인(尹隣) 등이 상소하기를,
"병자년 여름에 인조 대왕께서 본도에 특별히 어제(御題)를 보내시어 과장을 열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인 다음, 그 시권(試券)을 수합하여 서울로 가지고 가서 등급을 심사한 결과, 시험에 입격한 생원 양경억(楊景億), 진사 양점형(楊漸亨) 등에게 전시(殿試)에 직부할 자격을 주도록 명하였고, 그때 또 만과(萬科)090) 를 설행하였는데 시험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적병이 밀어닥쳐서 경황없이 과장을 파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난리가 평정된 뒤에 양경억 등이 모두 아직 출방(出榜)하지 못하였던 만과의 응시자와 함께 파방(罷榜)으로 처분되어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 문과는 무과와 대거(對擧)로 설행한 것이 아닙니다. 무과의 방은 시험을 마친 뒤에 본도에서 방방(放榜)하게 되어 있고 문과는 식년 전시(式年殿試)에 응시하게 되어 있는 점을 보더라도 대거로 설행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선왕 때에 정원에 지시하여 그 문서를 찾아내도록 한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기록된 곳이 없어서 복과(復科)를 못하였으나, 그뒤 신들이 민성휘(閔聖徽)가 본도의 관찰사로 있을 적에 계문한 초고 등본을 처음 보았는데 ‘예조가 승전을 받들어서 내려보낸 관문에 「평안도에서 시취(試取)한 유생 생원 양경억·양점형 등은 모두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라.」는 말이 있었다.’ 하였으니, 어찌 오래된 일이라 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복과를 내려주소서."
하니, 상이 예조에 내려보냈다. 예조가 대신에게 상의하기를 청하니, 대신들이 모두 복과는 부당하다고 함으로써 그만둔 채 시행하지 않았다.
10월 12일 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교리 홍주삼(洪柱三), 부수찬 이민적(李敏迪)이 상차하기를,
"삼가 보건대 성명께서 즉위하신 이래 행의(行誼)에는 과실이 없고 덕택이 자꾸 닦여지고 있으니, 무슨 일을 한들 하늘이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달이 개기 월식을 하고 금성이 대낮에 나타나는가 하면 근일에 와서는 또 때아닌 우레가 일어났으니, 이는 기어코 임금과 신하가 경각심을 갖고 대소 신료가 분주히 움직여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쳐서 닥쳐올 환란을 막아야 할 때입니다. 처음에는 귀를 기울이던 것이 날이 갈수록 위아래가 태연해져서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온 나라가 흉년의 재해에 휩싸여서 삼남(三南)의 천리 들녘에 수확할 것이 없으니, 이를 걱정하기로 하면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변보다 또 더 큽니다. 그럼에도 흥청거리던 지난날의 관념이 평소나 다름 없어서 재정을 낼 수 있는데도 궁민을 구호하지 못하고, 민역(民役)을 견감할 수 있는데도 견감해 주지 못하며, 비용을 줄일 수 있는데도 시행을 못하고, 군병을 돌려보낼 수 있는데도 파하지 못하는가 하면, 구마(廐馬)도 전일과 같고, 공부(貢賦)도 전일과 같고, 각처의 둔장(屯庄)도 전일과 같고, 어장·염전·시장(柴場)도 전일과 같으며, 경외(京外)의 대소 신료들까지도 모두가 마음 편안히 구습에 젖어 있어서, 단 한 가지의 혜택이라도 베풀어 민심을 위로해 주었다는 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고도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궁한 백성을 구제하려 든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스스로 크게 분발하시어 대소 신료를 분명히 신칙하고, 모든 계책을 다 모아서 날마다의 할 일을 정하여 두고 구습에 얽매임 없이 일대 쇄신을 하소서. 성명의 의지가 한번 정하여져서 지성으로 견재해 나간다면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그 누가 감히 지난날처럼 이럭저럭 지내보려 들겠습니까.
시정(時政)의 잘못에 있어서는 신들이 이루 다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조종 때부터 사대부로서 의금부에 체포된 자에게는 비록 장오(贓汚)에 관련된 죄라 하더라도 엄형을 가한 적이 없었던 것은 깊은 사랑과 두터운 호의가 곁들여져 있었기 때문인데, 요사이의 죄수는 정상이 조금만 긴하여도 엄형에 처하라는 전교가 내려지기가 일쑤입니다. 대체로 중형에 처하여 사형으로 끝내는 것이 어찌 통쾌하지야 않겠습니까마는, 3백 년 이래 사랑과 호의로 신하를 대우하던 기풍이 지금에 와서 사라지고 있으니, 이는 실로 성상께서 신중히 돌아보셔야 될 일입니다.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 남노성(南老星)의 일은 너무도 놀랍습니다. 대신이란 모두가 쳐다보는 자리이고 천금(千金)이란 용서할 수 없는 장오입니다. 감히 일시의 감정으로 한평생 절조를 지켜 온 원로에게 드디어 장오죄를 씌우는데도 조정은 추고만을 가하고 양사(兩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으니, 국가의 기강이 서 있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 역시 성상께서 유의하셔야 될 일입니다.
그리고 전번에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특명으로 제수한 일은 신들이 삼가 온당치 못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조와 병조는 곧 장상(將相)의 자리이므로, 반드시 삼공(三公)으로 하여금 의천(議薦)토록 하여야 됩니다. 이 자리의 제수란 중요하기가 복상(卜相)에 버금가는 일인데도 성명께서 엉뚱한 사람을 발탁하여 바꾸어 앉히시는가 하면 조금도 유의하지 않고 죄적(罪籍)에 올라 있는 사람을 기용하기도 하셨으니, 뭇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사람을 쓰던 우순(虞舜)의 정치는 이러하지 않았을 듯합니다. 이것 또한 성상께서 신중히 하셔야 될 일입니다.
그리고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의 초상에 묘막(墓幕)을 만들어 주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는 진실로 은전(恩典)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금년은 보통의 해와 다르고, 묘막을 짓는 데는 인력이 많이 듭니다. 선혜청으로 하여금 품삯을 주게 한다면 민력(民力)이 조금은 펴일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성상께서 애써 돌보셔야 될 일입니다.
그리고 간원이 차비문에서의 하교를 그만두라고 청한 것은 실로 의리상 정당한 일입니다. 당당한 대조정에서 어느 하나의 호령이라도 난대(鸞臺)·봉각(鳳閣)을 거치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 역시 성명께서 쾌히 시행하셔야 될 일입니다."
하고, 이어서 신하들의 인견이 드물고 경연이 오랫동안 폐지된 폐해를 개진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기를,
"어찌 깊이 생각하여 가슴에 새겨 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을 이조 판서로, 윤집(尹鏶)을 병조 참지로, 이민서(李敏敍)를 부교리로, 이유태(李惟泰)를 승지로, 이광직(李光稷)을 대교로 삼고, 운봉 현감(雲峰縣監)의 의망이 올라오자 상이 특명으로 부수찬 이민적(李敏迪)에게 제수하였다. 이때 민적이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연로하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고을 수령을 빌었기 때문에 이런 특명이 내려진 것이다.
집의 심세정(沈世鼎), 장령 정박(鄭樸)·이동로(李東老), 지평 이민징(李敏徵), 헌납 황준구(黃儁耉), 정언 정륜(鄭錀)이 남노성(南老星)을 논계하지 않았다가 옥당의 차척(箚斥)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13일 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송준길이 소를 올려 사직하여 체면되었다.
행 호군 김응조(金應祖)가 영천(榮川)에서 소를 올려 영릉(寧陵)의 석물이 쓰러진 일을 언급하고, 또 지난날 목릉(穆陵)에 있었던 변고를 원용하여 아뢰기를,
"그때 원릉(園陵)의 변고가 그와 같고 나서 이듬해에 병란이 일어났으니, 이는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상소에 말한 목릉 등의 말은 무슨 뜻인가?"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원중(院中)의 《일기》를 가져다 보니 인조 을해년 3월 14일에 비바람이 크게 일어서 목릉의 사초(莎草)가 네 곳이나 무너졌는데, 당시에 어떤 이는 빗물이 스며들어서 무너진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변고라 하여 의논이 분분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상소의 내용은 필시 그가 먼 지방에서 영릉의 석물이 쓰러졌다는 소문만 듣고 그 곡절을 자세히 모른 채 스스로 놀란 나머지 지난일까지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또 하교하기를,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상소에 써 넣은 것은 매우 괴이쩍은 처사인 듯하다."
하였다.
10월 14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15일 정유
우박이 내렸다.
부교리 이민서(李敏敍)가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지난날 이 관직에 있으면서 마침 예사로이 고사를 들어 말하는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유사가 힘을 다하여 백성을 구제하지 못하는 폐단을 대충 논하기는 하였으나, 신의 생각은 애당초 한 사람만을 공박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체로 볼 때 오늘날 정치의 폐단이 날로 불어나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점점 더 궁핍해지고 성상의 후덕하신 뜻을 베풀지 않아 조례와 명령이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만약 옛사람이 재산을 불리어 나라를 부유하게 하던 도(道)를 가지고 일을 담당하는 신하에게 모두 책한다면, 어찌 한두 마디의 할 말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허적(許積)은 연거푸 글발을 올려 극력 사양하면서 역정을 내기까지 하였고 성명께서는 또 경박한 행위였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은 더 이상 논사(論思)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사피하지 말고 일을 보라고 하였다.
10월 16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집의로, 윤지미(尹趾美)를 정언으로, 임규(林葵)·황준구(黃儁耉)를 장령으로, 심세정(沈世鼎)을 부응교로, 김만기(金萬基)를 부수찬으로, 이동명(李東溟)을 지평으로, 이제형(李齊衡)을 헌납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10월 17일 기해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유계(兪棨)를 공조 참의로, 권우(權堣)를 함경 감사로 삼았다.
정언 윤지미(尹趾美)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이연년(李延年)이 무과의 시관으로 앉고 그의 외삼촌 목존선(睦存善)이 거자로 응시하여 목전(木箭)의 보수(步數)을 조작하였다는 비방이 있기에, 신이 그때 마침 본원의 관원으로 동료들과 상의를 거쳐 논계를 하였습니다만, 마침 연년의 함사(緘辭)를 보니 이른바 명관(命官)이니 문형(文衡)이니 생질이니 하는 말은 바로 신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와 전시(殿試)는 부자나 형제간에도 서로 피함이 없는 것은 국조 이래 준행하여 온 규례인데, 연년이 감히 이것을 꼬투리잡아 신을 공박할 계획으로 넌즈시 머리는 숨긴 채 이야기를 꺼내어 본의를 조작하여 음험한 책략을 쓰고 있으니, 너무도 이상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함사 속의 한 대목에 ‘고 상신(相臣) 정창연(鄭昌衍)과 김상헌(金尙憲)이 의당 피하여야 될 아문을 피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창연은 바로 신의 외증조부입니다. 서로 피하는 법규를 끝까지 지켰다는 이야기는 신이 일찍이 외가 선배들에게 익히 들었고, 공가(公家)의 전적에도 증빙할 만한 글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연년이 이처럼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고 있으니, 신은 많은 말로 논변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이번에 또 본직을 맡게 되었으니 결코 태연히 무릅쓰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사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옥당이 출사시킬 것을 청하자,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또 상소하여 정창연·김상헌 등의 일을 논변하니, 상이 답하였다.
"연년은 행동이 음험하여 그의 간교한 책략이 다 드러났는데, 경이 어찌 개의하는가."
사간 이수인(李壽仁)이 강진(康津)에서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고 또 시폐(時弊)를 진술하고 희로(喜怒)가 적절치 못한 잘못을 논하기를,
"의관(醫官)에게 수령을 제수하는 것은 사사로운 은혜에서 나온 것인데도, 전조(銓曹)가 당장 봉행하지 않는다 하여 선뜻 전관(銓官)을 갈아치우고 발끈 화를 내시는가 하면, 침을 맞는 날에 제조가 입시하는 것은 곧 질병을 신중히 하는 도이므로 조정 신하들이 한 목소리로 입시를 청하였으나 그만 노기를 띤 말씀으로 물리치므로 이 소문이 원근에 전파되자 듣는 자들이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주자(朱子)의 말에 ‘세간의 일이 그 어느 것이고 희로애락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있으랴.’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심신을 수습하여 존양(存養) 성찰(省察)하여, 털끝만큼의 사의(私意)도 끼어듦이 없이 사물의 응접에 하나같이 순리를 따르소서.
지난해의 수재(水災)는 근고에 없던 재해라지만 금년의 한재(旱災)는 60년 이래 보지 못한 재해입니다. 온 나라 백성들을 장차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주례(周禮)》 황정(荒政) 12조항에 첫째는 ‘산리(散利)’, 둘째는 ‘박정(薄征)’, 셋째는 ‘이력(弛力)’인데, 해석을 보면 ‘산리’는 백성에게 먹을 것을 꾸어 주는 것이고, ‘박정’은 부세를 가볍게 매기는 것이고, ‘이력’은 역역(力役)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어공(御供)의 진상(進上)을 3분의 1을 줄이고, 각사(各司)에 쌓아 둔 쌀과 베를 등급을 나누어서 가져다가 기민을 구휼하며, 전세(田稅)와 대동(大同) 역시 경감하여 주소서. 그러면 은택이 끝까지 미쳐서 백성이 실제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왕도의 정치란 애민(愛民)에 더 앞서는 것이 없고 애민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수령에게만 있는데 오늘날에는 수령 임명에 있어 전혀 가리지를 않습니다. 능력 여부를 묻지도 않고 상례에 따라 차정(差定)하여 보내다 보니, 깨끗한 정치로 백성을 돌보아 주는 자는 전혀 없고 탐욕을 부려 제 몸만 살찌우려는 자가 즐비합니다. 간혹 한두 사람이 청근한 신조를 지키며 백성을 보살펴 주는 정치를 편다 하여도 후원하여 주는 세력이 없으면 단번에 파직되어 다시 수용되지 않고, 탐관 오리라 할지라도 세력만 있으면 감사가 불문에 부쳐두었다가 포폄 때에 가서는 세력 없는 자를 대신 찍어내어 책임만 모면합니다. 이러고서 어떻게 수령을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수령이 강명(剛明)하면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안심하여 온 고을이 태평해지고, 수령이 혼암(昏暗)하면 비록 탐욕을 부리지 않더라도 간휼한 아전들이 횡포를 부려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법인데 더구나 더 보태어 탐욕을 부리는 경우이겠습니까.
곤수(閫帥)가 군인을 놓아보내고 그 대가로 베를 받아들임에 있어 베의 품질을 점점 높여서 자기를 잘 살찌우는 데만 힘쓰고 있습니다. 한 영(營)의 수포군(收布軍)이 많게는 4천, 5천에 이르는데 4천, 5천 명으로부터 받아들인 베를 무부(武夫)의 제 몸 살찌우는 데 다 털어 넣는 것은 또 어찌된 일입니까. 국가가 당초에는 돌려가며 번을 세워 무예를 익히도록 하였으나 연고가 있어서 번포(番布)를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갈수록 넘쳐서 이 지경에 온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장정(壯丁)을 선발하여 돌려가며 번을 세워 무예를 익히도록 하되, 농사철에는 농지로 돌려보내서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고, 노잔(老殘)한 자에게나 번포를 징수하여 군수(軍需)에 쓴다면 군사들이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큰 흉년을 당하여 가을 농사가 무엇보다도 급한만큼 수군과 육군의 조련을 정지하도록 한다면 이것도 《주례》에 보인 ‘이력’의 정치입니다.
대동(大同)은 곧 역(役)을 고르게 부과하자는 것인데, 과외의 때 아닌 물품들을 흔히 수령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므로, 수령이 어쩔 수 없이 연호(烟戶)에게 강제로 징수를 하니, 연호가 그 고통을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만약 대동의 남은 쌀을 변통하여 준다면 오래 시행하여도 폐단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두(斗)의 쌀은 너무 무거우므로, 일체 호서(湖西)의 예에 따라 10두로 줄여 준다면 백성들이 편리하다고 할 것입니다.
각사 노비와 내노비(內奴婢)의 신공(身貢)은 너무도 번잡하고 과중합니다. 원공(元貢)은 10 두에 불과하나 해당 아전이 선가(船價)니 인정(人情)이니 하면서 한 사람에게 35두씩을 받아내어 상납을 하고 있으니, 그 고통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부(富)란 온 나라를 소유한 것이어서 부고(府庫)와 창름(倉廩) 그 어느 것도 임금의 재산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찌 꼭 따로 감추어서 청명한 성덕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심(聖心)에 결단을 내리시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일체로 보고, 내노비의 신공을 호조가 수납하여 궁중의 수용에 쓰도록 한다면, 아마 지나치게 징수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사피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전 감사 홍위(洪葳)가 죽었다. 홍위는 문장에는 뛰어났으나 관리의 재간은 모자랐는데 조정에서 그 장점을 취해 쓰지 못하였다. 병으로 경상 감사에서 체임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죽으니 사람들이 다 안타까워하였다.
10월 18일 경자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민발(李敏發), 순천 부사(順天府使) 정세보(鄭世輔), 정산 현감(定山縣監) 권이량(權以亮),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김여주(金汝柱)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민발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지금 부임해서 먼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하니, 민발이 대답하기를,
"당장의 급선무로는 황정(荒政)만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흥에는 무슨 폐단이 있는가?"
하니, 민발이 대답하기를,
"남쪽 지방은 토호(土豪)가 매우 많아서 그에 따른 폐단이 크다고 합니다. 민간의 부역(賦役)의 경우 대동(大同) 이후로 잡역(雜役)은 없어졌다고 합니다만, 백성들이 겪는 고통거리야 어찌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세보 이하의 전임 경력을 일일이 물어보며 직무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10월 19일 신축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京畿)·호서(湖西)의 대동(大同)은 2두(斗)를 견감하고 연해 고을들은 3두를 견감하여 주기로 이미 결정하였습니다. 호남의 산협 고을 및 영남도 일체로 견감해야 하는데 이곳은 대동을 시행하고 있는 곳과는 달라서 반드시 온 도의 공통된 중역(重役)을 전부 견감해 주어야만 실제의 혜택을 골고루 입을 수 있습니다. 기인(其人)의 【땔나무와 숯을 공급하는 사람이다.】 역(役)은 곧 도내의 공부(貢賦) 중 가장 무거운 역입니다. 경상도 및 호남의 산협 고을에 부과한 신축년조의 기인 가포(價布)를 모두 견감하고 각 아문의 은이나 베로 그 값을 대신 치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또 수원(水原)은 재해가 가장 극심한데, 양역(良役)과 공천(公賤) 출신의 속오군에게는 다같이 역포(役布)를 견감해 주었으나, 유독 사천(私賤) 출신의 속오군은 신역(身役)을 견감할 수 없어서 그들만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아뢰어 그들의 수미(收米)를 감면하여 주게 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가서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갓 출사하였기 때문에 상이 특별히 인견하고 태화에게 이르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모두 말하라."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전일 송시열·송준길의 헌의 중에 언급된 조항 및 이수인(李壽仁)의 상소 중에 개진된 시폐(時弊)들은 모두 품정하여야 마땅합니다. 시열의 헌의 중, 《주자대전》에 보인다는 구황(救荒) 제도를 옥당으로 하여금 일일이 뽑아서 아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준길의 헌의 중에 이른바 군량으로 비축하여 놓은 곡물을 가져다가 경상 비용에 보태어 쓰는 일과 재해를 입은 곳의 부세를 감면하는 일은 주관하는 신하가 헤아려 품처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전지가 없는 영세민에게 특별한 구휼을 시행하는 일 및 진정(賑政)을 잘 펴고 못 폄에 따라 수령에게 상벌을 내린다는 내용을 미리 선유(宣諭)하는 일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원으로 하여금 하유하여 착실히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그의 헌의 중 영장(營將)을 불러오고 교양관(敎養官)을 일시 혁파하자는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일일이 물어보았는데, 다들 영장을 불러오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장을 혁파한다면 영원히 혁파해야 할 것이다. 경관(京官)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불러올 수가 없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교양관은 실효가 없으므로 일시 혁파하여도 됩니다."
하였는데,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서북로(西北路) 및 제주(濟州)는 모두 혁파하여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의 둔전에 대한 면세를 일체 혁파하고, 염분(鹽盆)·어전(漁箭)·선박(船舶)에 대한 세를 일체 공가(公家)에 귀속시키는 일도 헌의 중에 들어 있었습니다. 주상께서 더더욱 유념하셔야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용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이수인의 상소 중에 ‘백성을 안정시키는 근본은 수령에게 있는만큼, 수령 중 치적이 특출한 자를 선출하여 써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헐뜯거나 칭찬하는 말은 다 믿을 수가 없다. 이를테면 제(齊)나라 사람이 청탁을 받고 아 대부(阿大夫)를 예찬하듯이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제 위왕(齊威王)이 날마다 올라오는 비방이나 칭찬에 현혹되지 않고 아 대부를 삶아 죽이고 즉묵 대부(卽墨大夫)를 특진시키자 그때부터 사람들이 감히 거짓말을 꾸미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군이 사람을 부리는 데 있어서 오직 분명하게 살펴야만 합니다."
하였다. 태화가 또 수인의 상소 중에 보인 수군·육군의 조련 정지에 관한 일을 품지(稟旨)하니, 상이 답하기를,
"올해는 흉년이 들었으므로 정지할 수 있으나 매년 이렇게 하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그의 상소 중에 말한, 연호(烟戶)가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일은 반드시 본도에 사문(査問)한 뒤에야 의처할 수 있습니다."
하고, 덧붙여서 아뢰기를,
"그의 상소 중에 호남의 대동미만을 13두로 매긴 것은 공평하지 못하므로 호서의 10두 예를 따랐으면 싶다고 하고, 또 내노비의 신공이 너무 과중하다고 말하면서 호조에서 받아들이도록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갑자기 고치기는 참으로 어려우나, 재해를 입은 곳에 대해 견감하여 주는 것은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수찬 이민적(李敏迪)이 전번에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함으로 해서 특별히 운봉 현감(雲峰縣監)을 제수하였습니다만, 민적은 나이 젊고 재망(才望)있는 사람이므로 외직에 전보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리가 절박하기 때문에 특별히 소원을 들어 준 것이다."
하였는데, 지원이 또 아뢰기를,
"인조 때에는 근신(近臣)이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할 경우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쌀을 내려준 선례가 있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사정이 비록 간절하다 하더라도 정치의 체통 또한 중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민적을 개차(改差)하고 쌀을 내려 주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북병사 권우(權堣)를 함경 감사로 이배(移拜)하였습니다. 감사는 본시 사조(辭朝)를 면제하고 부임하는 규정이 없으나, 이처럼 흉년을 만나서 사정이 상규(常規)와 다른만큼, 곧바로 부임시켜 오가는 데 따른 폐단을 덜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조 참의 유계(兪棨)가 아뢰기를,
"재생(裁省)091) 에 관한 일은 아직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현재 공사를 막론하고 재정이 궁핍하여 진구(賑救)할 밑천이 부족합니다. 이전부터 공명첩(空名帖)으로 곡물을 모아서 진휼에 보태어 쓰면서 실직(實職)을 제수한 때도 있었으니 이번에도 이 선례를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이전부터 시행한 전례가 있습니다. 그러니 납곡(納穀)의 다과를 계산하고 또 사람의 현부(賢否)를 살펴서 걸맞는 관직을 제수하는 것도 변통하는 방도의 하나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일을 오래 시행해서는 안 되지만 지금의 형편으로 볼 때 구급의 정책을 쓰지 않을 수도 없다."
하였다. 명하(命夏)가 아뢰기를,
"이 일을 지방에는 시행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경중(京中)에는 결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리고 나면 경중의 재산 많은 시정배들까지도 필시 마음을 먹게 될 것인데, 이렇게 된다면 어찌 깨끗한 정치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안 될 일이라고 쟁집(爭執)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명하가 아뢰기를,
"사족(士族)으로서 무예를 공부한 자가 내금위(內禁衛)로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선왕 때에 반드시 우선 내금위에 예속시키고 나서 내삼청(內三廳)의 관직을 제수하였던 것인데, 근래에 와서는 금군에 빈 자리가 있어도 보충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사족으로서 그 속에 예속되는 자가 아주 적어서 선전관 차출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시행된 규정을 함부로 고칠 수는 없으니 금군의 결원 중 30명에 한하여 선전관에 걸맞는 자로 차출하여 보충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예조 판서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선원록(璿源錄)》 속에다 효종 대왕의 시호를 써 넣어야 될는지의 여부를 종부시의 관원이 신에게 물어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축년 예에 따라서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기축년에는 지석(誌石)·축사 따위에는 다 같이 쓰지 않고 《선원록》 속에만 두 글자를 썼으므로 실로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에 와서 소급하여 고친다면 듣기에 번잡할 듯하다. 이번에는 쓰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과거란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김왕(金迬)을 나문한 것은 애당초 감시(監試)에서 사정을 둔 일 때문이었으나, 동당시(東堂試)에까지도 사람들의 말이 매우 많습니다. 참시관(參試官)들은 이미 파직시켰으나, 방을 파버리자는 논의가 금방 중지된 것은 일이 너무도 구차합니다. 대신 및 예조 판서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대각(臺閣)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렇다면 호우(湖右)의 동당시는 방을 파버리라."
하였다.
10월 20일 임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박세모(朴世模)가 아뢰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 남노성(南老星)이 이경석(李景奭)을 천금(千金)의 뇌물을 받았다는 말로 무고하여 그 말이 파다하게 퍼짐으로 해서 원로 대신이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의 유언비어가 필시 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결코 그냥 두고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남노성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21일 계묘
이조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소를 올려 면직을 빌기를,
"전남 감사 김시진(金始振)의 사장(辭狀)에서 신의 전일 상소 내용을 들어 모욕을 하였습니다만, 신이 엊그제 시진이 호조 판서 허적(許積)에게 편지를 보내어 장차 몸소 연분(年分)092) 을 복심(覆審)할 생각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서 조보(朝報)를 보니 허적이 이 일을 진달하여 제도의 감사로 하여금 일체 시행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이 마음속으로 매우 의아해 한 나머지, 이처럼 백성들이 극도로 곤궁한 때에 어찌 종전에 없던 일을 실시하여 이중으로 열읍(列邑)에 폐해를 끼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으로 안 된다는 이유를 약간 언급하여 중지할 것을 청한 것이지, 애당초 관찰사의 출순(出巡)이 나쁘다고 한 것도 아니고, 또 시진을 공박한 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진은 출순 자체를 비난한 말로 해석하여 상소하여 공박을 하고 모욕스런 말을 함부로 가하였습니다. 이른바 ‘인지위언(人之爲言)’ 네 글자는 《시경》 당풍(唐風) 채령(采苓)에 보인 말로, 바로 참인(讒人)을 가리켜 한 말인데, 시진이 이 네 글자로 은연중 보이지 않는 공박을 하는가 하면, 또 ‘청의(淸議)’ 두 글자로 버젓이 조롱하는 뜻을 내보이니 끔찍합니다. 신이 우직한 말을 한 번 개진하였다가 이런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태연할 수만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피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이 앞뒤로 연거푸 다섯 번이나 글발을 올려 면직을 빌기를,
"삼가 이민서(李敏叙)의 상소를 보니 은연중 신을 공박하였습니다. 신이 연소배와 서로 따지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는, 처음에는 신에게 씻기 어려운 모욕을 씌우더니 이제는 신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책망합니다. 만일 신이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대로 따르는 것만을 공손으로 여긴다면 신을 어떤 꼴로 지목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이 타이르며 속히 출사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이처럼 누차에 걸쳐 장황한 말을 늘어놓은 것은 그 의도가 어찌 일시의 고사를 들어 범연히 논하자는 발상뿐이었겠는가. 이는 그의 간사한 죄가 공론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미리 불안하고 괴롭다는 말로 상에게 부탁하여 안으로는 상의 총애를 굳히고 밖으로는 공론을 막으려는 터전으로 삼았으니 그 흉계가 교활하다 하겠다.
10월 22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 예조 참판 정지화(鄭知和)가 소를 올려 파직을 청하였는데, 그 소를 비국으로 내려보내니, 비국이 체직할 것을 계청하였다.
과거에 득기 등이 사명을 받들고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 사절 중에 금마법(禁馬法)을 위반한 자가 있어서 청나라가 자문을 띄워 문책하였고 주사(籌司)의 회계(回啓) 중에 사신도 논죄하자는 말이 들어 있었다. 이 때문에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한 것이다.
대비가 편안치 못한 증세가 보여서 내의 제조(內醫提調)가 내국(內局)에 입직하였다.
장령 황준구(黃儁耉)가 간원에 있을 당시 호우(湖右)의 동당시(東堂試) 방을 파버리자는 논의를 지레 중지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23일 을사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정부현(鄭傅賢)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도승지 오정일(吳挺一) 등이 겨울철의 우레를 이유로 아뢰기를,
"천재지변의 혹독함이 오늘날에 와서 극에 달하였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후 밤낮으로 불안과 걱정에 쌓여서 편안히 처할 겨를이 없이, 백성을 걱정하는 생각이 말끝에 넘치고 구황의 정책을 끝까지 다 써 보았는가 하면 모든 정령과 시책에 인심을 크게 거스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의 고통은 오히려 더 심하고 하늘의 견책은 이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현미(顯微)에 따라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마음을 언제나 간직하고 더 한층 수양과 성찰을 가하시어 남이 보지 않는 그윽한 곳에서도 공경하는 정성을 늦추지 마소서. 또 외방에 있는 유현(儒賢)을 초치하여 아침 저녁으로 가르침을 받고, 옥후(玉候)가 조금 편안한 때에는 예수(禮數)를 익히기도 하며,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을 와내(臥內)에서 인접하여 고금사를 헤아려 보고 정치를 논란하소서.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에 반드시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좋게 받아들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우의정 원두표(元斗杓) 등이 우레의 변고를 이유로 차자를 올려, 자신들을 내쫓아서 하늘의 견책에 응답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천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내가 덕이 없는 탓이니, 오직 상하가 서로 공경하고 백관이 서로 협조하여 하늘의 견책에 조금이나마 응답해야 할 것이다. 사피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덕을 닦는 데 더욱 힘쓰라."
10월 24일 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동지사 조형(趙珩), 부사 강백년(姜栢年), 서장관 권격(權格) 등이 청나라로 갔다.
전 충청 도사 김왕(金迬)이 과장(科場)에서 사정을 둔 죄로 체포되어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군인에 편입되었다.
10월 25일 정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였다.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의 상여가 지나갈 적에 각 도로 하여금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의 예에 따라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라."
10월 26일 무신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이 아뢰기를,
"관직 제도는 국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현재 큰 흉년을 만나서 백성들이 다 굶어 죽게 되었으니 구호의 방법을 참으로 있는 대로 다 써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직(實職)으로 곡물을 모집하기까지 하는 것은 과거에 없던 일로서, 이 길이 한 번 열리고 나면 관직 제도가 크게 무너집니다. 당(唐) 육지(陸贄)는, 주체(朱泚)의 반란으로 해서 덕종(德宗)이 봉천현(奉天縣)으로 파천을 가 있는 위급한 때에도 오히려 관직 제도를 아끼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권도(權道)를 몰라서 짐짓 큰소리를 친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많은 모집을 하다 보면 반드시 정도에 넘치는 폐단이 올 것이고 적게 모으다 보면 구호에 쓸 물자가 부족할 것이니, 득실과 이해 또한 매우 분명합니다. 어찌 함부로 시도하여 사방의 비난을 사서야 되겠습니까. 실직으로 곡물을 모집하라는 하명을 다시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에는 시의(時宜)가 있고 법에는 권변(權變)이 있는 법이다. 올해에만 시행할 것이다."
하였다. 그뒤 누차 아뢰자 따랐다.
부응교 심세정(沈世鼎) 등이 재변을 이유로 상차하기를,
"《주역》 진(震)괘에 ‘뇌(雷)를 거듭한 것이 진이니, 군자가 이를 보고서 두려워하며 덕을 닦고 반성한다.’ 하였는데, 두려워하라고 말하고 나서 또 기어코 덕을 닦고 반성을 하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두려워하고 나서도 또 반드시 덕을 닦고 반성을 하여야만 바야흐로 하늘을 두려워하는 진실을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덕은 마치 막 떠오르는 해와 같아서 바깥으로 내보이는 과실은 없습니다. 그러나 행여 단 한 번의 진실되지 않은 생각, 단 한 가지의 공경스럽지 못한 일이 있어도 이는 곧 사의(私意)가 자라나는 시발이자 인욕(人欲)이 방종하게 되는 단서입니다. 인군이 참으로 한가로이 보낼 적이나 혼자 있을 때에 이것으로써 심신을 점검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남들은 몰라도 나만은 아는 경지가 있게 될 것입니다. 어찌 깊이 궁구하고 모질게 반성하여 이것으로 하늘의 마음에 응답하여 하늘의 꾸중을 그치게 하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시행할 조치 가운데는 구황의 정책보다 더 급한 것이 없으므로, 신들은 다시 어제 올렸던 주자(朱子)의 주장(奏狀) 중 오늘날 시행하기에 가장 절실한 부분을 거듭 아뢰겠습니다. 이 주장에 ‘순희(淳熙)093) 3년 이전에 빚진 관물(官物)에 대해서는 어떤 명목을 불문하고 일체 견감하여 주소서. 지금 주현(州縣)들에는 여러 해를 두고 아직 상환하지 못한 곡물이 매우 많아서 끝내 다 받아들일 기약 없이 그저 끝없는 폐해만 끼치게 될 것이니, 차라리 그 중에서 햇수가 아주 오래고 생활이 더욱 어려운 자를 조사하여 특별히 탕감해 주어서 민심을 위로하여 주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라는 말이 있고, 또 ‘내고(內庫)의 돈을 다 내놓아서 대례(大禮)의 비용으로 쓰소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른바 내고란 바로 오늘날의 내수사입니다. 성명께서도 내수사의 포물(布物)을 내놓아서 민역에 보태어 준 적이 있기는 하나, 지금 만약 내수사에 남겨둔 약간의 물자를 모두 호조로 내려보내서 더러는 경비에도 보태어 쓰고 더러는 진휼에도 보태어 쓸 것 같으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백성을 아끼고 재물을 아끼지 않는 성상의 거룩하신 마음을 다 같이 알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민을 구호하는 방책에 있어서도 주장 중에 더욱 상세히 보이고 있는데, 그 중 초차호구(抄箚戶口)·차등장약(差等壯弱)·치료병곤(治療病困)·수양소아(收養小兒) 따위는 이미 모두 뽑아서 아뢰었으므로, 만약 성명께서 읽어 보시고 손익을 참작하여 사목(事目)을 만들어서 모든 도에 반포하신다면, 굶주린 백성들이 반드시 그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성명께서 구황 정책을 가지고 유현(儒賢)들에게 자문을 구하신 것은 매우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영장(營將)을 소환하자는 소청이라던가 상세(常稅)를 절반으로 견감하자는 소청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시행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교양관을 혁파하는 일뿐이었습니다. 만약 이러고 마신다면 애당초 무엇하러 자문을 구하셨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10월 27일 기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제학 이일상(李一相)이 증광 복시(增廣覆試)의 응시자 중 상피(相避) 대상자가 많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시관(試官)에서 빼어줄 것을 청하였는데, 해조가 복계하기를,
"대제학 의 관직으로서는 당연히 시관을 맡아야 하나, 상피하는 법도 역시 국법이고, 또 아무리 현재 대제학을 맡고 있다 하여도 상피할 사람이 있다면 시관을 맡지 않는다는 전례가 있습니다. 시관의 의망에 넣지 마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28일 경술
지평 윤원거(尹元擧)가 연산(連山)에서, 자신이 학문을 닦은 실상도 없이 허명(虛名)으로 징사(徵士)의 예우를 받는 것이 참람하다며 소를 올려 해면을 비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원거는 윤전(尹烇)의 아들이다. 윤전이 궁관(宮官)으로서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원거가 정축년 이후로 과거에도 응하지 않고 벼슬도 하지 않았는데, 비록 정밀한 학문은 없어도 사람됨이 강개하고 기절이 있어서 사류(士類)의 인정을 받았다. 효종 말년에 비로소 대간의 선발 물망에 올라 앞뒤로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다 부임하지 않았다.
행 예조 판서 윤강(尹絳)이, 자신이 판의금부사로서 김경항(金慶恒)을 조감(照勘)한 것이 언관에게 지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해면을 빌었다.
처음에 경항이 원주 목사(原州牧使)가 되어 목재상에게 황장목(黃腸木) 도벌을 사사로이 허락해 준 것이 그 숫자가 매우 많아서 죄상이 퍽 커지자 조정에서 그 사실을 조사하여 경항을 감옥에 가두고 조율(照律)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의논이 당연히 장물을 계산하여 죄율을 적용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의금부가 능원(陵圓)의 나무를 도벌시킨 죄만을 적용하여 도삼년에 처하고 말므로, 옥당이 차자를 올려 죄율이 잘못 적용되었음을 논하고, 이조 참판 이응시(李應蓍) 역시 동의금부사로서 그 조율에 불참하였는데 소를 올려 죄율을 적용한 과정이 잘못되었다고 개진하니, 윤강이 스스로 불안하여 이런 소를 올린 것이다. 상이 사피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하였다.
10월 29일 신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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