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임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비경(尹飛卿)을 정언으로, 이완(李浣)을 형조 판서로,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참판으로, 조계원(趙啓遠)을 형조 참판으로, 유계(兪棨)를 예조 참의로 삼았다.
집의 박세모(朴世模) 등이 아뢰기를,
"전 원주 목사 김경항(金慶恒)은 황장목을 도벌하였으므로 죄범이 하도 커서 그 죄범을 논해 볼 때 참으로 너무 놀랍습니다. 어찌 상례에 따라 유배만 보내고 말 수 있겠습니까. 해부로 하여금 죄율을 고쳐서 감죄(勘罪)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2일 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3일 갑인
형조 참의 오정위(吳挺緯)가 엄지(嚴旨)를 받았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처음에 어떤 상언자(上言者)가 내수사와 소송을 걸었는데, 재차의 신리에서 한 번 지고 나서 또 신리를 청하였다. 정위가 회계하기를 ‘차라리 약간 명의 공천(公賤)을 잃더라도 사정을 두지 않는다는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를 통절히 꾸짖고 고쳐서 올리도록 하였다. 정원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뜻을 개진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이때 정위가 스스로 불안한 나머지 이런 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근래 기강이 비록 매우 해이되었기로서니 이러한 소를 어찌 받들어 들인단 말인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정위가 엄지를 받들고는 감히 태연히 회계만 할 수 없어서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한 것이기 때문에 상의하여 받들어 올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내수사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엄지를 내리기가 일쑤여서 앞뒤로 이 같은 일이 매우 많았다.
11월 4일 을묘
평안도 순천(順天) 지역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였는데, 발에 양쪽 다 며느리발톱이 돋았다.
서원 현감(西原縣監) 신속(申洬)이 《구황촬요(救荒撮要)》 한 책을 올렸는데, 상이 이를 인쇄하여 모든 도에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11월 5일 병진
이정영(李正英)을 도승지로, 이경휘(李慶徽)를 승지로, 이수인(李壽仁)을 응교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정치화(鄭致和)를 공조 판서로, 조귀석(趙龜錫)을 사간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조계원(趙啓遠)의 장계에, 전 단천 군수(端川郡守) 이지천(李志賤)이 수리 공사에 진력하여 산을 뚫어서 도랑을 내어 개간한 전지에 물을 따대므로 백성들이 많은 혜택을 입은 사실을 진열하였는데, 가선의 품계로 올려주라고 명하였다.
11월 6일 정사
심광수(沈光洙)를 승지로, 유혁연(柳赫然)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이 아뢰기를,
"시관(試官)이 낙점을 받은 뒤에, 상피되는 응시자가 있는데 다른 시소(試所)로 이송할 수 없는 경우 정원이 말을 만들어서 미품(微稟)하는 일이 비록 근일의 예가 있기는 하나, 역시 옛 법규는 아닙니다. 엊그제 증광 복시 때에 시관에 비의(備擬)할 만한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도 해조가 거자와 상피가 된다는 이유로 진계까지 하여, 마치 공적으로 잘못이 있는 자를 계제(計除)하듯이 처리하였으니, 이는 종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한두 명의 응시자가 상피로 인하여 과거를 포기하는 것이 무슨 큰 일이라고 공사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아 비의하는 과정에서 거조를 그처럼 구차스럽게 한단 말입니까. 해당 당상관을 추고하소서.
정원이 대관의 체직을 계청하는 일은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엊그제 헌관(憲官)이 모두 거자와 상피된 일이 있다는 이유로 해조로 하여금 품처토록 할 것을 서둘러 청하였으니, 사체의 중대함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경솔히 행동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시관으로서 패초에 나아오지 않은 자를 법규상 당연히 파면해야 된다는 것은 그 사체를 중시해서입니다. 엊그제 시관 중 패초에 나아오지 않은 사람을 용서할 만한 정상이 없는데도 그만 파면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일이 상규를 어겼으며 또 뒷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홍처량(洪處亮) 등을 파면하지 말라고 한 분부를 환수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상이 승지에게 정원에 계류 중인 공사(公事)들을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므로, 좌승지 남용익(南龍翼)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입대하였다.
옛 제도에는 상이 날마다 시사청(視事廳)에 나가면 각방 승지가 소관하고 있는 공사를 가지고 들어가서 품신하여 결재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출입이 일정한 때가 없고 공사가 체류되지를 않았는데, 중세 이후로 이 법규가 폐지되어 명을 내려서 부르지 않으면 승지가 감히 나아가지 못하므로, 안과 밖이 꽉 막혀서 말의 출납(出納)과 공사의 품재(稟裁)를 중관(中官) 및 액정인(掖庭人)의 입에만 의존하였으니, 이는 언로의 폐쇄를 막고 상하를 친숙히 하는 도리가 아니다.
11월 7일 무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이 아뢰기를,
"형옥(刑獄)이란 국가의 큰 정책이므로 마땅히 신중을 기하여야 됩니다. 그런데 평안도 죄인 김수천(金守天)이 강간을 한 죄로 계복(啓覆)의 내용에 들기까지 하였으나, 본도에서 지난해 반사(頒赦) 때에 경미한 죄로 오인하고 사면의 대상에 넣었는데도 해조는 이를 살피지 못하고 전혀 모른 채 사면을 청하였습니다. 해가 지난 뒤에서야 이제 비로소 발각되었으니, 형정이 해이되어 장차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본도 감사와 해조의 당상관을 함께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도 유수 유심(柳淰)이 전임 형조 당상으로서 파직을 당하게 되었는데, 상이 보장(保障)의 직무를 맡고 있다는 이유로 한 자급을 깎고 유임시켰다.
11월 8일 기미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상이 강도 유수 유심이 올린 정족산 축성 별단(鼎足山築城別單)을 대신에게 내보이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조목조목 열거하여 품정하기를,
"승군(僧軍)으로서 정배(定配)된 자는 이미 부역(赴役)을 한 노고가 있어서 조정에서 그 노고에 대한 특별한 혜택을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고 하니, 그 의도는 아마 유배의 연한을 줄여 달라는 데 있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 연한의 절반을 특별히 견감하여 주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강화부는 역인(役人)들의 식량 및 호궤미(犒饋米)와 소를 모두 회감(會減)해 줄 것을 청하여 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량을 계산하여 회감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강화부에는 이미 모미(耗米)를 지급하도록 허락하였으니 매번 그렇게 원곡(元穀)을 회감할 수도 없거니와, 또 선례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황유(黃塯)·신한주(申翰周) 등은 축성을 감독하는 데 공로가 많았으므로 포상의 은전을 베풀까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황류에게는 특별히 가자를 하려니와 한주에게는 무슨 상을 내리려 하는가?"
하니, 우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승서(陞敍)면 족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또 《실록(實錄)》 이안(移安)하는 일을 계품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당초 공역을 시작할 적에 이미 《실록》을 이안할 것으로 말하였으므로 속히 이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고, 또 별장을 차출하여 지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경사(京司)에서 외방 향소의 색리(色吏)를 붙잡아 오는 폐단을 계진하고, 어영청·훈련 도감·수어청 등의 아문을 신칙하여 반드시 입계(入啓)한 뒤에 붙잡아 오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는 외방에 나가 있고 참판은 유고하므로 참의가 독정(獨政)을 하고 있으니 긴요한 직임 외에는 차출할 수가 없습니다. 각사의 궐원이 매우 많은 터라서 변통수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참판은 어찌하여 출사하지 않는가?"
하니, 태화가 답하기를,
"듣자니 병이 났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면 개차하라."
고 하였다.
11월 9일 경신
김중일(金重鎰)을 승지로,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참판으로, 유계(兪棨)를 부제학으로, 김수흥(金壽興)을 부교리로, 이응시(李應蓍)를 좌윤으로, 임의백(任義伯)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의백은 처음에 신면(申冕)과 사이가 좋았다. 신면이 패망한 뒤로도 요직에 있는 자를 잘 섬겨서 패망하지 않고 내·외직을 역임하며 네 도의 관찰사를 연거푸 지내므로,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퍽 많았다.
형조 판서 이완(李浣)이 질병 때문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이완은 무장 중에서 가장 법을 잘 지키고 국사에 헌신하였기 때문에 역임하는 곳마다 많은 치적을 남겼다. 대신이 군무와 형옥은 겸찰(兼察)할 수 없다고 아뢰고, 또 그의 질병 상태를 말하였기 때문에 상이 체직을 윤허한 것이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여러 의관을 불러다 입진(入診)시키는데, 도제조 심지원(沈之源)도 입시하였다. 또 옥당을 소대하였는데, 시강관 심세정(沈世鼎)이 《통감(通鑑)》 수문제기(隋文帝紀)를 강하였다. 세정이 아뢰기를,
"수 문제가 정사에는 부지런하였다지만, 성품이 본시 시기하는 마음이 있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사사로이 전백(錢帛)을 주고 나서 뒤따라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아마 지나치게 세밀히 살피고 꾀를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도 매우 심한 자였을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강동(江東)에서 나라를 나눈 지 3백 년 만에 수 나라에 이르러서 비로소 통일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만 시기와 까다로움으로 해서 두 대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 방언겸(房彦謙) 부자 및 고효기(高孝基) 등이 그네들끼리 한 말로 볼 때 식자들은 이미 반드시 멸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의 사적이 한두 가지 칭찬할 만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단지 그의 근본 약점이 오로지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은 데 있었기 때문에 흠집이 수없이 많았으니, 이를테면 시기함과 잔인함, 꾀를 잘 씀과 까다로움 따위는 모두가 학문을 모르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상고의 시대에는 문자상의 배움은 아직 있지 않았다 해도, 제왕들이 서로 전수하는 심법(心法)만은 주고받는 과정이 매우 분명하였습니다. 지금 성상의 춘추가 한창 장년기이고 기질이 청명하신만큼, 만약 이러한 시기에 맞추어 학문에 뜻을 더욱더 집중하여 빛나는 공부를 접어두지 않으신다면, 치도(治道)는 저절로 여기에서 기반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고, 심지원이 아뢰기를,
"근래 성상의 옥후(玉候)가 오랫동안 불편하시어 신들이 우려를 하였으나 이제 다행히도 소대를 하셨으니, 매우 기쁜 경사라 하겠습니다. 경연에 임하실 적에도 옛 의식을 다 갖출 필요없이 유신(儒臣)을 와내(臥內)로 인접하여 진독(進讀), 강론케 하고, 주상께서는 편하신 대로 앉거나 눕거나 하며 안석에 기대어 강론을 들으신다면 어찌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랫동안 경연을 폐하여 듣기에도 매우 좋지 않다. 지금 이후로는 정원에서 예에 따라 취품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진사 박이도(朴以燾)가 상소로 당시의 폐단을 진달하고, 또 조종(祖宗)들의 훈계 말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전남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조복양(趙復陽)의 진소(陳疏) 공박으로 해서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호조 판서 허적(許積)과는 선후배가 같지 않아서 서울에 있을 적에도 서로 오가는 교분이 없었고, 남도로 내려온 뒤에도 서로 편지를 왕복한 적이 없는데, 허적이 어떻게 해서 신이 연분(年分)을 직접 복심(覆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 조복양은 또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맹랑한 말을 들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초봄에 광주(光州)에 순시를 나갔는데, 마침 5, 6명의 사람이 나와서 아무 죄도 없이 삭명(削名)을 당하였다고 호소하기에 신이 유안(儒案)을 가져다 보았더니 파버린 이름자가 52명이나 되어서 신이 이를 맨 먼저 제창한 재임(齋任)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들으니 갇힌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고경명(高敬命)의 증손이라고 하므로 관문을 띄워서 모두 석방하기는 하였으나, 이 일로 해서 신이 많은 선비를 모욕하였다는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신을 선비를 모욕한 사람으로 지목하여 비방의 소리가 쌓여 가는가 하면, 공청의 모임이나 대중의 좌중에서 더러는 해괴한 사람으로 공척하고 더러는 간사한 사람으로 손가락질하며 온갖 욕설을 다 퍼부으니, 신이 비록 후안무치하더라도 어찌 감히 태연히 관직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너무 혐의쩍어 할 것 없이 마음을 편하게 먹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시진이 애당초 직접 복심을 하려 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자는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도하에 그 소문이 흘러들어온 데다 그의 구차스럽고 편벽된 행적이 평소 공론에게 밉보이기는 하였으나, 편협한 마음으로 시기를 하여 서슴지 않고 모욕을 주는 조복양의 행위 역시 사대부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시진의 상소 수백 언은 비록 비방을 받게 된 이유를 밝힌 것이기는 하나, 어투가 가라앉고 말이 많아서 모욕을 사기에 알맞다. 그리고 전일 주상의 하교 중에 이른바 ‘해괴하기가 말이 아니고 조정의 체례(體例)를 모르는 자이다.’에 대해서는 일언의 변백도 못한 채, 다소곳이 참으며 오히려 비위를 거스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것 또한 어찌 사대부가 행신을 하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라 하겠는가. 그것 역시 너무 수치스런 노릇이다.
11월 10일 신유
정언 윤지미(尹趾美)가 동료들에게 간통을 발하고서 회보도 기다리지 않은 채 지레 전계(傳啓)한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소대를 하였다. 시강관 심세정(沈世鼎)이 《통감》 수문제기(隋文帝紀)를 진강하였는데, 왕통(王通)의 사적에 이르러서 세정이 아뢰기를,
"왕통은 곧 당시의 선비였습니다. 헌책(獻策)을 하여도 수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비방을 종식시킬 대책의 물음에 ‘변명을 하지 말라.’ 하고 원망의 소리를 가라앉힐 대책의 질문에 ‘다투지 말라.’고 답한 것만 보아도 그의 신조가 독실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사면이 없는 나라는 형벌이 반드시 공평하고 세금을 아주 많이 거두어 들이는 나라는 재정이 반드시 빈약하다.’라는 말 역시 치도(治道)를 아는 격언이라 하겠습니다."
하고, 시독관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왕통이 하분(河汾)에 교수로 있을 적에 나이 아직 약관도 못 되었으므로 선유들이 비록 그가 고원한 것을 좋아하고 너무 잘난 체한다고 기롱은 하였으나, 그의 조숙한 성취로 볼 때 역시 한 시대의 기재(奇才)였습니다."
하였다. 문제가 시해를 당한 사건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
"양광(楊廣)이 아버지를 죽였는데도 여기서 ‘문제가 죽다.’라고만 쓰고 양광의 찬시(簒弑)를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강목(綱目)》에는 ‘태자 광이 대보전(大寶殿)에서 황제를 죽이다.’ 하는 말을 특별히 썼으나, 《통감》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역(弑逆)의 행위는 극악무도한 행위인데도 바르게 쓰지 않았으니, 악행을 징계하고 교훈을 남기려는 역사의 본뜻이 너무도 없다. 사필(史筆)이 어찌 이같다는 말인가."
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나서 참찬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내일 주강을 개최하라는 명을 하셨는데 또 《통감》을 진강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서사(書史)를 섭렵하고 싶다. 우선 《통감》과 《대학연의》를 곁들여서 진강하라."
하였다. 남용익이 아뢰기를,
"이전부터 경연을 할 때, 전경 문신(專經文臣)에 피선된 자 중 낙점을 받아서 입시하는 규정이 있어 왔으나, 근래에 폐지된 지가 오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도 구례(舊例)대로 써 들이라."
하였다.
연안 부사(延安府使) 이만웅(李萬雄)이 소를 올려 나진 포구(羅津浦口) 돈대 위에 성을 쌓고 창고를 지은 다음 군량을 쌓아 두어서 교동(喬桐)·강화(江華)의 성원(聲援)을 삼고 또 고을을 텅 비워 두고 수양성(首陽城)으로 다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소를 비변사로 내려보내니, 해로의 사세가 불편하고 또 흉년을 만나서 공사를 벌일 수 없다고 하여 시행되지 않았다.
11월 11일 임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주강을 하였다. 시독관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전례에는 주강 때에 주상께서 으레 전수음(前受音)을 한 번 강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주상의 옥후가 아직 쾌복되지 않았으므로 상규(常規)를 다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신수음(新受音)만 강론하라."
하였다. 수흥이 《통감》 수양제기(隋煬帝紀)를 진강하였는데, 낙구(洛口)에 창고를 설치한 사실에 이르러서 수흥이 아뢰기를,
"교(窖)란 바로 창고 안에다 구덩이를 파서 곡물을 저장하는 것으로, 낙구·회락(回洛) 등의 창고는 3천 고에 이르기도 하는데, 한 고의 크기는 3천여 석(石)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하니, 저축된 곡물이 많다는 사실은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시독관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수나라가 망할 무렵에는 떼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이밀(李密)과 왕세충(王世充)은 바로 개하(開河)·낙구 등의 여러 창고 곡물을 털어다가 군량으로 썼으니, 수나라의 비축은 이른바 도둑의 군량을 제공해 준 결과가 되었습니다."
하고, 지경연사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신이 연경(燕京)을 내왕하는 길에 통주창(通州倉)에 아직도 곡물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마침내 유적(流賊)의 양식이 되고 말았으니, 인군이 만일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아무리 거두어 들여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고, 민서가 아뢰기를,
"대명(大明)이 마침내 유민(流民)에게 망하였으나, 유민이 도둑질을 하게 된 원인은 실로 굶주림에서 나왔으니, 재산을 모으면 백성이 흩어진다는 이치를 여기에서 한층 더 분명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근래 우리 나라의 산협 고을들이 작목(作木)을 바치고 있는 따위의 일은 마치 명나라 말기 강회(江淮)의 유민과 같아서 반드시 뒷날의 큰 환란이 될 것이므로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하였다. 배구(裵矩)의 일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
"한 사람의 배구가 수나라에 아첨을 하고 다시 당나라에 충성을 하였으니 이는 소인으로서 재주는 있는 자이다. 만약 재주가 없었다면 역시 그렇게 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니, 민서가 답하기를,
"수 양제는 참으로 책할 것도 못 되거니와 대저 인주(人主)의 호오(好惡)는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구는 양제의 좋아하는 바를 적중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은총을 굳힐 수 있었고, 또 양제는 이를 깨달을 줄 몰랐으니, 이는 양제의 좋아하는 바가 아첨이기 때문에 아첨으로써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나서 민서가 아뢰기를,
"여러 도의 병사·수사가 모두 군졸에게 베를 거두어서 용도에 쓰고 있기 때문에 군졸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여러 도의 큰 폐단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병영과 수영의 용도를 처리하도록 하고 나서 베 거두어 들이는 일을 금지할 것 같으면 군졸이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양호(兩湖)의 경우는 대동법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수영과 병영에 영수미(營需米)가 있으나, 다른 도의 경우는 으레 부방(赴防)을 면제해 주고 베를 거두어 들이므로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폐정(弊政)입니다. 그러나 역시 함부로 변통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게 말하여 깊이 강구한 다음 잘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인재란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없는데도, 처음 벼슬에 나온 자가 모두 서울 사람이고 지방의 경우는 쓸 만한 사람이 있다 해도 이조가 전혀 찾아 수용하지 않으니, 너무 불공평합니다. 앞으로 도목 정사도 멀지 않고 하니, 미리 이조를 신칙하여 각별히 채용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팔도로 하여금 5명씩 추천토록 하여 조용(調用)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1월 12일 계해
문무과 증광 전시를 설행하여 문과에는 박세당(朴世堂) 등 34명을 취하고 【한 명은 직부(直赴)임.】 무과에는 최두제(崔斗齊) 등 30명을 취하였다. 【두 명은 직부임.】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06면
【분류】인사-선발(選拔)
초저녁에 상이 입직 승지에게 명하여 승정원에 계류되어 있는 공사들을 가지고 입시하라고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묻기를,
"옥당과 정원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승지 남용익이 아주 가깝다고 대답하자, 상이 주서에게 명하여 나가서 옥당의 입직 관원을 불러오라고 하였다. 옥당의 관원이 들어오고 나서 상이 검토관 김만기(金萬基)에게 명하여 《송감(宋鑑)》을 내어오라고 하였다. 이어 촛불을 밝히고 상이 책을 펴서 강론을 듣는데, 시독관 김수흥(金壽興)이 만기와 번갈아 가며 10여 장씩을 읽어 내려가다가, 만기가 음을 잘못 붙였다고 사양을 하자, 상이 용익으로 하여금 읽으라고 하였다. 용익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경연의 상례가 아니고 별례인데, 어찌 꼭 사양을 하는가."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과 송 태조(宋太祖) 및 한(漢)·당(唐) 몇몇 임금의 고사를 논하면서 이르기를,
"예전 임금 중 송 태조가 가장 훌륭하였는가?"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송나라의 황제들은 대개가 훌륭하였으니 태조 뿐만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나라가 남쪽으로 건너온 뒤로는 나라 구실을 못하였으니 북송(北宋)과 비교하여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남쪽으로 건너온 뒤로 이 같았기 때문에 삼대(三代) 이후 한(漢)·당(唐)이 가장 융성하였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하였다. 송 태조가 그의 조고(祖考)를 추제(追祭)한 일에 이르러서 만기가 아뢰기를,
"조여우(趙汝愚)의 생각에는, 희조(僖祖)가 비록 시조이기는 하나 대수가 다하면 조천(祧遷)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태조를 동향의 위에 모시고자 한 것이고, 주자(朱子)가 이를 나무라면서 희조는 바로 시조이므로 주(周)나라의 후직처럼 영원히 조천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 명종(唐明宗)이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빌어서 성인(聖人)을 낳기를 발원한 일은 그 마음이 지극히 공변되다 하겠다."
하고, 또
"석경당(石敬塘)은 어떠한 군주인가?"
하고 물으니, 수흥이 아뢰기를,
"거란에게 땅을 바치고 견양(犬羊)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태후(杜太后)의 사적에는 어째서 폄한 말이 없는가?"
하였는데, 이는 상이, 두 태후가 태조로 하여금 태종에게 전위하도록 조종한 일을 가리킨 듯하다. 수흥이 대답하기를,
"송나라 사람이 역사를 썼기 때문에 감히 폄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선인제(宣仁帝)의 고 태후(高太后)는 참으로 훌륭한 황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나라의 가법(家法)이 가장 정당했기 때문에 훌륭한 황후가 많았던 것이다."
하였다.
11월 13일 갑자
정중휘(鄭重徽)를 정언으로, 오준(吳竣)을 판의금으로, 정치화(鄭致和)를 형조 판서로, 이단상(李端相)·이수인(李壽仁)을 사인으로, 이민적(李敏迪)을 교리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이은상(李殷相)을 공조 참의로, 윤순지(尹順之)를 예조 참판으로, 강유(姜瑜)를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경주 부윤(慶州府尹) 채충원(蔡忠元)은 강화 유수(江華留守) 유심(柳淰)과 죄상은 똑같으나 강화 유수는 중임이기 때문에 강등만 시켜서 그대로 유임시키고 경주 부윤은 그 대임을 이미 차출하였습니다만, 새 부윤 이원진(李元鎭)이 노병으로 해서 필시 부임하기 어려울 것이거니와, 또 흉년에 영송(迎送)에 따른 폐단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리 수확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임시켰다가 다시 추고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이번 무과 출신 중 부방(赴防)하는 자가 매우 적어서 대가를 바치고 부방을 면제받도록 하고자 해도 사정이 매우 어렵습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금군에게 배속시켜서 양식과 말을 자력으로 마련토록 하되, 열 달을 기준으로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11월 15일 병인
상이 친히 혼전(魂殿)에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청나라가 연례로 요구해 온 길들여진 매 공납을 면제해 주었다.
전남도 광양현(光陽縣)에서 전패(殿牌)를 훔쳐간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조정에서 이는 간특한 백성이 고을 원을 축출할 계획으로 저지른 것으로 보고 고을 이름만 혁파하고 수령은 죄주지 않았다.
이조 판서 송시열이 회덕(懷德)에서 소를 올려 윤선도(尹善道)의 상소 내용을 이유로 간곡히 인혐(引嫌)을 하고 이어서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6일 정묘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조강을 하였다. 참찬관 유계(兪棨)가 《통감》 수양 제기를 진강하였다. 또 석강에 《통감》 수양 제기를 그대로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민(世民)이 고조(高祖)를 설득할 적에 ‘대인(大人)이 조칙을 받들고 적을 토벌한다 하여 적을 다 토벌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한 것은 역시 협박의 말이고, 또 세민이 유문정(劉文靖)의 한 마디 말에 웃으며 답한 ‘그대의 말이 나의 생각에 꼭 들어맞소.’에서 본뜻을 찾아볼 수 있다."
하니, 시독관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천하의 호걸들이 이처럼 나름대로 서로 모의하며 밑에서 경영하고 있는데도 그 임금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 두려운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나서 예조 판서 윤강(尹絳)이 왕태조(王太祖)의 능묘 근처에 투장이 든 것을 적간(摘奸)한 것을 상품하니, 상이 이르기를,
"2백 보(步) 내의 것은 모두 파 버리되, 그 수가 많거든 다시 품처할 것이며, 이 뒤로는 3 년마다 한 번씩 예조의 낭관을 보내어 적간할 것을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칠능(七陵) 내의 투장 가운데 햇수가 오래되어 옮기기 어려운 곳은 봉분을 지우고 평지로 만들어 버려라."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송도(松都)의 옥사(獄事)로 불안을 느낀 나머지 강상(江上)에 나가 있으니, 위유(慰諭)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불안해 한다는 내용으로 승지가 나가서 위유의 말을 전하라."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김경항(金慶恒)에 대한 의율(擬律)을 주상께서 하문하셨다면 정원으로서는 의당 율문을 상세히 검토하여 대답하여야 되는데도 장물을 계산한 소주(小註)만 대략 훑어보고 범연히 회계하였습니다. 해당 승지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뒤에 따랐다.
11월 17일 무진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이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관원이 공해(公廨)를 수선하는 것은 곧 직분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거니와, 어찌 또한 그것에 걸맞게 수답할 만한 제도가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의영고(義盈庫) 직장 유계(兪棨)에게 창고 일곱 칸을 지은 공로로 수령을 제수하라는 하명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7품의 관리로서 곧바로 수령을 제배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일입니다. 수령을 제수하라는 하명을 환수하시고 해조로 하여금 걸맞는 상전(賞典)을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상이 승지를 보내어 입성(入城)하도록 타이름으로 해서 의리상 그 명령을 받들기 어렵다며 소를 올려, 조용한 곳에 가서 말년의 절개를 지킬 수 있도록 체직하여 줄 것을 비니, 상이 더욱 안심하고 속히 들어오라고 답하였다.
초저녁에 상이 입직 승지에게 명하여 정원에 계류 중인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하고 이어서 옥당의 상하번(上下番)을 불러서 《송감》 태조기(太祖紀)을 강론하였다. 태원(太原)의 포위가 풀렸던 일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하더니, 송 태조가 이에 가깝도다."
하였다. 처사 왕소소(王昭素)의 일에 이르러서 참찬관 유계(兪棨)가 아뢰기를,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백성을 사랑하는 일만한 것이 없고, 심성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줄이는 일만한 것이 없다.’라는 말은 허다한 의리를 포괄하고 있어서 참으로 간결하고도 중요한 말입니다."
하고, 유온수(劉溫叟)의 일에 이르러서 또 아뢰기를,
"온수는 청간(淸簡)한 선비였고, 또 등용해 쓰는 것도 그의 재주에 걸맞게 썼습니다. 어사 중승(御史中丞)에다 12년을 앉혀 두었으니, 오랫동안 맡겨서 성취를 바람이 그와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벼슬자리를 맡으면 제 직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자, 상이 묻기를,
"후세에 12년 동안 맡긴 자가 누가 있었는가?"
하니, 시독관 이민서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대관이 참으로 옛사람보다는 못합니다. 그러나 비록 감화시키는 힘이 있는 자를 얻는다 할지라도 하도 자주 인혐, 체직되어 두어 달을 벼슬자리에 있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효과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천반 내전직(川班內殿直)의 일에 이르러서 유계가 아뢰기를,
"태조가 말하기를 ‘진실로 나의 법을 어긴다면 칼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군병이란 교만해지면 통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 한 가지만의 일을 가지고 교만스런 군졸 40여 명을 베어 가면서까지 오대(五代)의 타락되고 교만스럽고 또 게으른 폐습들을 청산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고, 민서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훈국 군병이 또 너무 교만하고 사나워서 그 흐름을 엄히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녕 공주(永寧公主)가 옷에 수놓은 것을 보고 태조가 금지하고 경계한 일에 이르러서 유계가 아뢰기를,
"공주가 수놓은 옷을 입는 것은 지나친 사치가 아닌데도 태조는 오히려 그같이 경계를 하였으니, 이는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하고, 민서가 아뢰기를,
"근일 여러 공주의 집이 사치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택이 조종 때보다 점점 더 호화스러워 가고 있으니, 선왕조에 그렇게 지은 것은 비록 제재하기 어렵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늘상 엄히 계칙하여 법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면 다행스럽겠습니다."
하였다. 조보(趙普)가 정승에서 면직된 일에 이르러서 유계가 아뢰기를,
"조보가 비록 훌륭한 정승으로 꼽히기는 하나, 이를테면 오월(吳越)에게 편지를 보낸 일은 남의 신하로서 사사로운 교제를 막아야 하는 의리를 너무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금궤지맹(金簋之盟)을 찬성하여 뒷날의 잇속을 도모하여 놓고 나서 어떻게 재차 그르친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엎치락뒤치락하여 대절(大節)을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태종은 역시 현명한 군주이다. 그의 간사함을 어찌 몰랐겠는가."
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나서 승지 이경휘(李慶徽)가 아뢰기를,
"북로는 해를 거듭한 흉작으로 백성들이 다 흩어지고 있고, 또 북로의 무인 가운데는 쓸 만한 인재가 많이 있는데도 등용할 길이 없으니, 실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하고, 유계가 아뢰기를,
"신 역시 북로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만, 북로의 사람은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삼남(三南) 사람보다 더 낫습니다. 만약 도신으로 하여금 변장(邊將)에 걸맞는 자를 뽑아서 조정에 보고토록 한 다음, 하나하나 거두어 쓴다면 민심을 크게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야반에 자리를 파하여 내보내고 이어서 직려(直廬)로 온주(醞酒)를 내려보냈다.
11월 18일 기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민희(閔熙)를 승지로, 허적(許積)을 판의금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이완(李浣)을 판윤으로, 조수익(趙壽益)을 호조 참판으로, 조계원(趙啓遠)을 공조 참판으로, 이인(李𡐔)을 판결사로, 이척연(李愓然)을 예조 참의로, 김우형(金宇亨)을 교리로, 안후열(安後說)을 부수찬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주강을 하였다. 참찬관 유계(兪棨)가 《통감》 수양제기를 진강하는데, 당 태종이 군사를 일으킨 일에 이르러서 유계가 아뢰기를,
"강도(江都)를 승격시켜서 대왕(代王)을 세우고, 황월(黃鉞)을 빌려서 위세를 부린 것은 바로 조마(曺馬)의 유지(遺智)로서, 후세의 찬역(簒逆) 무리들이 이를 사모하였는데도 그처럼 신무(神武)한 당 태종이 오히려 그러한 유를 면치 못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 점을 아쉬워합니다."
하였고, 고조가 회군한 일에 이르러서 시독관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이른바 앉아서 세월만 허비하고 뭇 사람은 마음이 이반되고 사기가 떨어진다는 말은 싸움을 이겨서 성을 탈취하는 일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사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합니다. 지금 신정(新政) 초기에 사방이 눈을 닦으며 태평성대를 기대하고 있는만큼, 반드시 이러한 때에 큰 일을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저녁에 또 《통감》을 강하였다. 참찬관 유계가 아뢰기를,
"삼남(三南) 지방이 더욱더 기황(飢荒)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양남(兩南)의 경우는 대동미(大同米)를 이미 견감받았으나, 전남 좌도와 경상도는 여태 견감의 조치가 없으니, 이 점이 바로 고르지 못한 황정(荒政)의 단면입니다. 금년의 전세(田稅)를 다 견감하도록 하되, 서울에서 조치를 하여 견감해 주는 숫자를 충당하도록 할 것 같으면, 굶주린 백성의 다급한 궁핍은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백성을 보호하고 나서야 나라가 될 수 있는 만큼, 구황의 정책은 서둘러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지경연사 허적(許積)이 물러나 비변사와 의논하여 아뢰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경모전(敬慕殿)의 동지제(冬至祭)를 친히 거행하려 하자, 모든 신하들이 상의 병세가 갓 좋아졌다는 이유로 대행시킬 것을 극력 청하니, 따랐다.
11월 19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개성 유수 남노성(南老星)이 양몽석(梁夢錫) 등의 옥사에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을 모욕한 말이 들어 있었다는 이유로 추탈 고신(推奪告身)을 당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이경석의 아버지가 개성 도사로 있을 적에 경석이 어린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가서 김영(金泳)의 아버지 정후(靜厚)에게 글을 배웠는데, 정후는 문관이고 김영 역시 선비이자 유가(儒家)의 출신으로서 개성의 망족(望族)이었다. 경석은 정후에게 이미 어릴 때 사사한 오랜 은혜가 있고 김영과는 친분이 두터운데다 개성에서의 이른바 선비라는 자들이 거의가 장사꾼의 자식이기 때문에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 금전이 오간다는 말이 있었고, 남노성은 성품이 본시 경망한데다 또 경석이 한쪽의 말만 듣고 판결을 뒤집은 데 분개한 나머지 뭇 사람들을 대하여 말을 퍼뜨려서 과장된 비방을 사실화시킨 것이므로, 당시의 여론이 남노성을 좋지 않게 보았다. 그러나 경석이 사정에 끌려서 기어코 입증을 시키고자 하여 그 사이에서 조종하다가 비방을 부르고 모욕을 당한 일은 또한 괴이쩍어할 것이 못 된다 하겠다.
11월 20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초저녁에 상이 입직 승지에게 명하여 정원에 계류 중인 공사들을 가지고 입시하여 재가를 받도록 하고 또 윤대관 다섯 사람을 불러 보았다. 또 옥당의 입직 관원을 불러서 《송감(宋鑑)》을 강론하였다. 시독관 이민서(李敏敍)가 태종기(太宗紀)를 진강하는데, 장제현(張齊賢)의 일에 이르러서 상이 묻기를,
"태조가 제현이 쓸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어찌하여 자신이 기용하지 않고 태종으로 하여금 기용토록 하였는가?"
하니, 민서가 대답하기를,
"태조의 뜻을 알 수는 없으나 예전의 군주는 간혹 그 재주를 단련시켜서 쓴 자도 있고, 또 제현의 재간과 기질이 태종과 잘 맞아서 그렇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였다. 덕소(德昭)의 일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
"태종의 말투가 아무리 좋지 않은 듯하였다 해도 덕소가 스스로 목을 찌른 것은 잘 죽은 죽음이 못 된다고 하겠다."
하였다. 전석(田錫)이 봉박(封駁)을 한 일에 이르러서 상이 묻기를,
"‘봉박’이란 무슨 뜻인가?"
하니, 민서가 대답하기를,
"‘봉’이란 문서를 봉하는 것이고, ‘박’이란 제배(除拜)를 논박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급사중(給事中)이란 곧 우리 나라의 승정원인데, 오늘날의 경우는 문서를 받들어 올리기만 할 따름이지 봉박을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고금의 변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다시 감귤을 내려주고 강론을 파하였다.
11월 21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주강을 하였다. 시강관 김우형(金宇亨)이 《통감》 당고조기(唐高祖紀)를 진강하였는데, 우형이 아뢰기를,
"당나라가 창업 초기에 곧바로 국자학(國子學)과 태학(太學)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한 고조(漢高祖)가 노(魯)에 들러서 공자묘에 제사한 것과 같은 성질의 일입니다."
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나서 윤대관 네 사람을 불러 보았는데, 공조 좌랑 송광식(宋光栻)은 바로 준길의 아들로서 역시 입대하였다. 상이 광식에게 묻기를,
"참찬 은 언제쯤 올라온다던가?"
하니, 광식이 대답하기를,
"은명이 중첩된 만큼, 의리상 곧장 올라와야 하나, 신병이 퍽 위중하여 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번 상소에 올라올 뜻이 있었다."
하니, 광식이 대답하기를,
"신병만 차도가 있을 것 같으면 감히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1월 22일 계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주강을 열었다. 대신과 비변사의 당상 등이 모두 입시하였는데, 참찬관 유계가 《통감》 당고조기(唐高祖紀)를 진강하였다. 조용조법(租庸調法)에 이르러서 유계가 아뢰기를,
"밭이 있으면 조(租)가 있고, 집이 있으면 조(調)가 있고,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게 되는데, 한 명의 장정에게 받아들이는 것이 2석(石)의 조(租), 2필(匹)의 견(絹), 3냥(兩)의 면(綿)에 불과하므로 조세의 법은 고르고도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덕종(德宗) 때로 내려오면서 이 법이 점차 무너지고 양염(楊炎)이 그만 양세법(兩稅法)을 설치함으로 해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어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법을 고친다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될 일입니다."
하고,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역사의 기록 속에는 본받을 만한 것도 있고 경계할 만한 것도 있는데, 본받을 만한 것은 본받고 경계할 만한 것은 경계한다면, 치도(治道)에 어찌 보탬이 적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당 고조(唐高祖)가 이소립(李素立)을 발탁하여 시어사(侍御史)를 삼은 일은 본받을 만합니다. 선왕 때만 해도 사간 윤집(尹鏶)을 직언(直言)한 공으로 특별히 승지를 제배하였으니, 진언자를 권장한 선왕의 일은 전하께서 마땅히 법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통감》·《송감》은 모두가 역사의 기록들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주강에는 《대학연의》를 진강하고, 석강이나 야대 또는 소대 때에는 역사의 기록들을 진강하였으면 싶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가선으로서 산릉(山陵)의 역사를 마친 후 가의에 오른 일이 있는데다, 그 뒤에 또 자헌으로 올리라는 특명이 내려짐으로 해서, 엊그제 대론(臺論)이 도감(都監)의 상가(賞加)를 개정하였으나, 어떤 이의 말은 자헌은 특별한 은전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제 와서 강등을 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특별한 은전에서 나왔으니 자헌을 그대로 두라."
하였다.
이진(李𥘼)을 승지로, 윤비경(尹飛卿)을 헌납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이조 정랑으로, 오정일(吳挺一)을 개성 유수로, 심세정(沈世鼎)을 응교로 삼았다.
홍문관 부제학 유계 등이 동지를 맞이하여 차자를 올려 권계(勸戒)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양기는 음기에다 뿌리를 두고 동은 정에서 나오니 천지 생물들의 심(心)이 모두 여기에서 비로소 싹이 틉니다. 그 단서는 매우 미세하지만 그 용도는 매우 넓으니, 이것이 바로 《주역》의 이른바 ‘복(復)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는 이치입니다. 이러므로 동지의 뜻이 《주역》에 있어 복괘가 되었거니와, 또 성인이 중대히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이 시대의 뜻을 잘 관찰하여 나의 한 마음에 징험해 보면, 단 한 가지의 생각이 착하여지는 데서 시작하여 마치 처음 타오르는 불과도 같고 처음 솟아나는 샘물과도 같이 점차 확장되어, 나아가서 크게는 천지와도 그 덕이 합치하게 되지만, 그 선악 승부의 고동은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달려 있고, 이를 국가에다 징험해 보면 인주의 일신이 발라지는 데서 시작하여 더 나아가서는 조정이 발라지고 백관이 발라지고 넓게는 사방에 바른 길로 통일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지만, 그 치란 득실의 고동은 근본적으로 군주에게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원을 처음 세우는 해에다 또 음기가 다하고 양기가 되살아나는 절기를 만났으므로, 이것이 신들이 청명한 덕화를 눈을 닦고 바라보며 성상의 덕이 나날이 더욱 새로워지기를 그리는 까닭입니다. 진정으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큰 뜻을 분발하여 성심(聖心)을 견지하소서. 진학에 있어서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데서부터 경계하고 조심하시어 깊고 조용한 곳에서 함양을 하여 사물을 응접하는 즈음을 성찰하되, 선의 단서는 기필코 넓히고 악의 생각은 기필코 막아서 음기와 양기가 사라지고 자라나는 이치로써 나의 마음의 삿되고 정직함을 살피시어 반드시 물욕은 늘 밀려나고 의리는 늘 승리하도록 하소서. 정치에 있어서는 하나의 정령(政令)을 내는 데서부터 널리 미루어 나가서 오늘 하나의 선정을 펴면 내일에는 하나의 폐정을 개혁하고, 좋지 못한 법제가 있을 경우 시세에 미루거나 여론에 구애되지 말고 반드시 시행할 수 있는 정당한 도리를 찾아내어서 힘써 시행하시되, 기필코 정치를 바로잡고 효과를 거두어 국세(國勢)를 공고히 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계하고 교회하는 이 뜻을 어찌 가슴 깊이 새겨 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11월 23일 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주강을 하였다. 참찬관 유계(兪棨)가 《대학연의》를 진강하면서 아뢰기를,
"《대학》 한 책에 보인, 체를 말미암아 용한다는 것은 각기 차례가 있어서 이 차례는 문란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성찰, 유념하셔야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묻기를,
"진덕수(眞德秀) 자신이 말한 바 ‘총총히 도성을 떠나버렸다.’는 말은 무슨 일인가?"
하니, 유계가 답하기를,
"덕수가 이종(理宗) 때 사미원(史彌遠)에게 쫓겨나서 도성을 떠나버린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이종은 어떤 임금인가?"
하니, 유계가 아뢰기를,
"소시적에는 인망이 없지 않았으나 사람을 아무렇게나 써서 훌륭한 사람과 사특한 자가 함께 나아가고 큰 적이 밖에서 버티고 있는데도 안일에 빠져서 덕을 잃으므로, 송나라가 점차 쇠망하게 되었으니, 그 사람을 알 만합니다."
하고, 상이 묻기를,
"입지가 그 같았으면서 어찌하여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지경연사 홍명하(洪命夏)가 답하기를,
"이는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게을러지는 폐해에서 온 결과입니다."
하였다. 검토관 김만기(金萬基)는 아뢰기를,
"사미원이 세력을 등에 업고 공을 세웠기 때문에 초년에 권병을 잡고 많은 어진이를 내쫓았는데, 그가 죽은 뒤에 비로소 진덕수·위료옹(魏了翁) 같은 이들을 들어 써서 단평(端平) 6년에 이르러서 가까스로 규모를 갖추었다가, 또 가사도(賈似道)의 농간에 놀아나게 되었으니, 비록 선비를 숭상하려는 마음은 있으면서도 그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이종이 제왕의 학문에 효과를 거둔 것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수어사를 극력 사양하니, 상이 그의 재간이 수어사에 걸맞는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 명하의 앞뒤 경력을 보면 문무·병재(兵財)를 막론하고 한때 선용(選用)되기만 하면 우두머리에 앉기가 일쑤였으니, 이를테면 상평청과 진휼청의 경우는 이재에 능하다는 이유로 선용되었고, 수어청과 병조의 경우는 병사를 잘 안다는 이유로 선용되었으며, 그 밖에도 청직과 요직이라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는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다.
금부가 김경항(金慶恒)의 죄를 장 일백 유 삼천 리로 개감(改勘)하였다.
11월 24일 을해
김남중(金南重)을 공조 판서로, 박안제(朴安齊)를 병조 참의로, 이동로(李東老)를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주강을 하였다. 시독관 김우형(金宇亨)이 《대학연의》를 진강하였는데, 강론을 마치고 나서 상이 일렀다.
"지난달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 발인 때에 내전이 망곡(望哭)을 해야 하는 절차가 있는데도 예조가 끝까지 의주(儀註)를 써 올리지 않았다. 이 규례가 비록 《오례의》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일찍이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의 초상 때 시행하였으므로, 증거삼을 만한 규례가 분명히 있는데도 소홀히 하고 거행치 않았으니, 국가가 예관을 설치한 의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예조 당상을 우선 추고하고 낭청은 나문하라."
저녁에 또 《통감》 당고조기(唐高祖紀)를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조가 세민(世民)을 동도(東都)에 살게 하여 천자의 깃발을 세우도록 하려 한 일은 참으로 괴이쩍다 하겠다. 세상에 어찌 두 천자가 동·서 도읍에 따로 살고도 천하가 무사할 수 있겠는가."
하니, 검토관 안후열(安後說)이 아뢰기를,
"태종이 즉위하던 처음에 맨 먼저 매와 개를 없애고 사방의 공헌(貢獻)을 금지하였으니, 이는 인심을 모으려는 의도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아버지가 하던 일을 그처럼 서둘러 고치는 것이 괜찮은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상이 이조 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질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의를 시켜 약물을 가지고 가서 구료하도록 하였다. 지평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산릉 도감 제조를 강자(降資)시키라는 분부가 있었음에도, 익흥군(益興君) 홍중보(洪重普)가 종전의 자급을 그대로 제수받았습니다. 자헌(資憲)이 비록 상가(賞加)는 아니라 하더라도 가의(嘉義)의 자급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구실로 강자를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벌을 내리는 의의가 전혀 없어서 일이 매우 구차스럽게 됩니다. 일체로 강자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의는 강자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뒤에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가 탑전에서 진계를 하자 그제서야 일체로 강자하라고 하였다.
전 참판 이응시(李應蓍)가 죽었다. 응시가 과거에 급제한 지 오랜만에 양사(兩司)를 출입하기는 하였으나, 이렇다 하게 선발됨이 없어서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인조 말년에 와서 조귀인(趙貴人)의 총애를 논박한 죄로 먼 변방에 유배되면서 이때부터 강직하다는 성망이 조정에 떨쳐지게 되어, 효종 초년에 맨 먼저 유배에서 풀려나 높은 관직을 두루 거치고 두어 해가 못 되어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응시의 사람됨이 분명하고 개결하여 관직에 있을 때 청렴하고 근신하기로 이름이 났으니, 그가 죄를 얻을 적의 상소는 역시 남이 하지 못할 말들이었다. 그러나 만년에 와서는 의지가 약해지고 기상이 누그러져서 끝내 뚜렷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인망에 뒷받침하지 못한 점이라 하겠다.
11월 25일 병자
영의정 정태화 등이 상이 계복(啓覆)094) 에 친림하려는 데 대하여 계사를 올려서 그만둘 것을 청하기를,
"지금 피해야 할 전염병이 성안에 만연되어 있는데, 계복 때 입참할 사람은 30여 명이나 됩니다. 비록 재숙(齋宿)을 시키더라도 어떻게 다 청결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때에 추위 속에서 많은 사람을 접한다는 것은 실로 질병을 삼가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내일의 계복을 속히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령을 따르지 않다가 사형에까지 이르렀기에 곧장 처단하지 않고 해가 다 가도록 엄히 가두어 둔 것인데, 죄는 비록 목을 베어 마땅하나 역시 매우 슬픈 일이다. 만약 피해야 될 일로 해서 올해에도 집행하지 않고 내년에도 집행하지 않는다면 저 죄인들은 장차 감옥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니,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끝까지 듣지 않았다.
11월 26일 정축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죄수의 계복을 거행하는데, 사형에 처할 자가 21명이었다. 죄수 김파회(金破回)라는 자는 겁간을 범하여 죽게 된 경우인데, 교리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이 죄수의 죄상이 비록 겁간이기는 하나 그 무리들이 서로 약속을 하고 모여서 통간을 조성시킨 것이므로 자신이 강간을 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이 마침 《대명률》 강간조를 상고한바, 매간(媒奸)이라는 조항이 있는데, 그 주석에 ‘남이 붙여 주어서 통간을 하게 된 자는 본죄에서 2등급을 감한다.’라고 하였으니, 그 율이 이 죄에 가깝습니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어보았는데, 모두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차의 계복 때에 율문을 다시 상고하여 품처하라."
하였는데, 그 뒤에 그대로 사형을 감면받고 유배되었다.
11월 27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어제 마무리짓지 못한 계복을 다시 거행하였다.
11월 29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30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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