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신해
풍안군(豊安君) 조흡(趙潝)이 졸(卒)하였다. 교리 조수익(趙守翼)의 아들로 계해년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참여되고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국조 고실(國朝故實)을 꽤 알았다.
1월 3일 계축
정치화(鄭致和)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치화는 태화(太和)의 아우이다. 태화가 막 수상(首相)이 되었으므로 혐의스러워서 치화를 의망하지 않았었는데 상이 재차 가망(加望)하도록 명하여 그에게 이조 판서를 제수한 것이다. 이익한(李翊漢)을 승지로, 송준길(宋浚吉)을 우참찬으로, 윤강(尹絳)을 형조 판서로, 신유(申濡)를 참판으로 삼았다.
강진 현감(康津縣監) 김징(金澄)이 상소하여 본읍의 재해 입은 상황을 진달하고 ‘대동 수미(大同收米)로 이미 감한 3두(斗) 외에 다시 3, 4두를 더 감하자.’고 청하였더니 선혜청이 복계(覆啓)하여 2두를 감하였다.
1월 4일 갑인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의 인자한 소문이 즉위하신 초기에 자자하였는데도 음양의 화합한 기운이 이르지 않아 수재와 한재가 자주 겹쳐 일어나고 묵은 폐단이 만연되어 민생이 극한 곤궁에 처해 있습니다. 신들이 반복해 생각하건대, 성상의 학문이 비록 밝으나 천리의 공명에 합하지 못하고, 정치에 비록 열중하나 만물을 생성하려는 마음에서 모두가 우러나오지는 못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제 해마다 큰 흉년이 들어서 관가나 민가나 창고가 텅 비어 백만 창생의 생명이 끊어져 가니, 이는 정말로 어진 정사를 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출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런데 견진책(蠲賑策)을 아직도 다 거행하지 아니하여 오히려 덕택이 미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신들은 삼가 민망하게 여깁니다.
옛날 주자(朱子)가 구황책을 진달하면서 포흠(逋欠)을 감면할 것을 첫째로 들었습니다. 소위 ‘포흠’이란 것은 혹 완악한 백성 중에 관청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어 생기게 되기도 하였겠지만 대개는 가난하고 잔약한 백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포흠진 사람은 이미 도망가버려서 징수할 곳이 없는데 한갓 헛장부만이 있어 해마다 헛된 수량만이 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가는 어찌 이 탕감하는 일에 인색하여 한갓 백성들의 원망만을 쌓이게 합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포흠된 지 오래되어서 도저히 징수할 곳이 없는 경우, 속히 어명을 내려서 일체 탕감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것이 민심을 수습하고 화기를 도출하는 하나의 방법인 것입니다.
군사라는 것은 나라의 큰 좀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왕(聖王)이 제도를 마련할 적에 가장 신경을 써서, 지극히 험한 것을 지극히 온순한 속에 감추어 놓고서, 그때 그때 소집해 이용하고 감히 항상 집합시켜 두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환란을 구제하는 일이 비록 군사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으나 환란이 생기는 일도 항시 이 군사들에 의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들을 집합시켜 놓고 먹이니 국가의 재력이 끝내는 감당하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옛말에 ‘군사 10만 명을 일으키면 날마다 천금(千金)을 소비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도성에 배치되어 있는 군사가 1만 명 남짓하니, 10일의 소비량은 곧 10만 명의 1일분의 소비량이요 백 일의 소비량은 곧 백만 명의 1일분 소비량인 것입니다. 구구한 세입을 가지고 백만 명의 비용을 대는 것이 1년에 서너 차례씩이나 되니, 재정이 어찌 고갈되지 않고 민생이 어찌 피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감(都監)에서 집합시켜 놓고 훈련시키는 일은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닐 터이니 신들도 그것을 졸지에 혁파하기는 곤란할 줄로 압니다만, 선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급히 강구하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전에 국가에서는 흉년으로 인하여, 새로 생긴 가호에서 군사를 추가로 뽑는 일을 이미 정지시켰고 결원된 인원도 보충하지 말도록 이미 영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신들의 생각에는 그대로 이 영을 따라 더 뽑지도 말고 보충하지도 말고, 현존하는 군사 중에서 정하게 선택하되 5천 명이 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들에 대한 의식(衣食)의 비용도 모름지기 이유태(李惟泰)의 상소 안에 건의된 군자 별창(軍資別倉)을 활용하자는 1조항을 채택해 쓰고 정당한 부담의 세입을 군사 양성하는 데 돌아가지 않게 한다면 국가예산이 조금은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에서 꼭 군사를 양성하려 하되 그에 따르는 기구가 없는 것을 염려한다면, 금년 봄부터 모든 궁가와 각 아문의 염분·어전·선척 등을 다 혁파하고 관청에서 세를 거두어 그 비용을 충당하소서.
그 법제로 말하면 반드시 너그럽게 조약을 세워서 백성으로 하여금 원성이 없게 하고 도신(道臣)의 구관(句管)과 탁지(度支)의 총령(總領)을 마치 유안(劉晏)의 고사001) 처럼 한다면, 별창(別倉)이 가득 차게 되는 외에도 또한 그 여분을 가지고 궁가에 나누어 주어서 옛날의 이익을 온통 잃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문 둔곡(衙門屯穀)과 노비 신공(奴婢身貢) 같은 것도 아울러 별장(別藏)에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해결은 성상께서 결단하여 한 번 호령을 하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선왕께서는 어린애들로부터 베를 거두는 일을 매우 측은히 여기시고 중앙과 지방에 엄히 영을 내려 조사해서 면제해주도록 하셨는데, 인심이 고무하여 지금까지 감축(感祝)하고 있습니다. 영을 내리는 초두에 연수(年數)를 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도에서는 금방금방 보품(報稟)하는 일이 있어도 묘당(廟堂)에서는 제때에 지휘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만일 ‘비용을 아껴야 한다.’는 주장에 끌려서 신의를 잃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면 사체를 거듭 손상시킬 것입니다. 대략 어린애들의 숫자는 1만여 명에 불과합니다만 해마다 장성하면 불과 10년 안에 저절로 군역(軍役)에 응할 것인데, 국가에서는 어찌 조금 관용을 베풀지 않고서 차마 갓난애들로 하여금 모두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품게 한단 말입니까. 중춘(仲春)의 번(番)들 시기가 이미 임박하였으니, 반드시 일찍 분부가 있어야 도로 징집하는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영군(御營軍)은 농사철에는 번드는 일을 그만두라.’고 이미 명령이 계셨는데, 이제 어영청의 의견을 들으면 4월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말 춘농 기근(春農飢饉)의 시일을 당하여 허다한 군병으로 하여금 그 농사일을 폐지하고 모여서 관의 곡식을 먹게 하는 것은 매우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급히 하교하여 정번(停番)하는 일을 2월부터 시작하도록 하여야 마땅할 줄로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공사간에 모두 편리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호위 군관(扈衛軍官)은 혁파해야 할 것임에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으로서 대신이 누차 간청을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일제히 모이는 날을 기다려 일을 잘 진척시킬 것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지금까지 미루어 아직 결정이 없었습니다. 역시 속히 의논해서 없애야 할 것입니다.
전번에 ‘승려(僧侶)들을 다그쳐 환속(還俗)케 하라.’는 분부는 지극히 정대한 것으로 실로 역대에 드물게 있는 거룩한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세도(世道)가 극히 타락하고 인심이 순하지 못한데, 나라 안의 승려가 걸핏하면 만으로 헤아리게 되고 대부분 패악하여 생사를 하찮게 여기는 무리들이거늘, 이처럼 생민(生民)이 유산(流散)하여 미처 안집(安集)되지 못하고 있는 때에 혹시 선동하여 난을 다행으로 여기고 화란을 즐거워할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식견이 있는 자들은 다 그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그 뜻을 굳게 정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마시되 시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점차적으로 하소서.
먼저 양역(良役)을 너그럽게 하여 백성을 몰아내는 길을 막고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우고 또 입산에 대한 금령을 거듭 밝히며, 친속(親屬)이 있고 전토(田土)가 있는 무리는 군보(軍保)에 충정(充定)하여 공역(公役)에 응하도록 하소서. 이것이 또한 점차로 없애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도성(都城)에 이원(尼院)002) 이 있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니, 마땅히 먼저 혁파하여 이단(異端)을 척절(斥絶)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옛사람이 해로운 것을 제거할 때에는 먼저 그 쉬운 것부터 제거하고, 풍속을 바로잡을 때에는 먼저 그 가까운 것부터 바로잡던 의의입니다.
궁노(宮奴)의 방자한 행동이 오늘날 중외(中外)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으니, 국가로 하여금 앉아서 인심을 잃게 만드는 것은 모두 이들 무리입니다. 근일에 있었던 통진 해량(通津蟹梁)의 일은 잗달기 그지없는 것인데, 궁노들이 장황하게 터무니없는 일을 꾸미어 성상에게 알려서 누차 엄한 분부를 내리시게까지 하였으니, 신들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대저 한두 해량(蟹梁)의 증감(增減)이 별로 대단하게 관계될 것이 없을 것 같으나, 만일 이들로 하여금 해마다 증가하여 제한없게 한다면, 그 폐단 또한 어디엔들 미치지 않겠습니까. 수령으로서 연약한 자들은 으레 감히 이들과 충돌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숙(李䎘)은 말단의 고을 원으로서 과감하게 저지하였습니다. 그 문서의 말 가운데에는 진실로 망발한 실수가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 뜻만은 백성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추관(推官)의 사핵(査覈)과 해조(該曹)의 복계(覆啓)는 소견이 다 옳은데 성명께서 꼭 재차 조사케 하신 것은 궁노를 믿고 사대부를 의심하는 처사를 면치 못하는 일입니다. 끝내 저 궁노는 기를 펴고 이 사대부는 기가 꺾이게 하신다면, 궁노들이 기고만장하여 방자하게 구는 일은 이미 말할 것이 없거니와 사방에서 소식을 들을 경우 어떠하리라 여기십니까. 대신(臺臣)의 쟁집은 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윤허를 꺼리시니, 일은 비록 매우 미세한 것이지만 그 성덕(聖德)에 있어서 사적인 것에 관계되는 누(累)가 없지 않습니다. 이것인즉 관계된 바가 매우 큽니다. 전하께서는 속히 대신의 청을 따라 아랫사람들의 의혹을 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근래에 대관(臺官)이 인혐(引嫌)하여 자주 체직되므로써 관방(官方)이 이리저리 이동하므로 자못 오랜 임기 동안 책임지고 이루는 기대가 없으니 그 폐단을 통렬하게 혁파해야만 하겠습니다. 전번 대관이 헌부(憲府)를 처치할 때 위에서 특명으로 체직하지 말게 하셨으니 성상의 뜻이 매우 거룩하였는데, 간원(諫院)의 관원은 근래의 규례를 답습하여 성상의 아름다운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오늘부터 조한(條限)을 정립하여 대단한 염우(廉隅)에 관계되는 것이나 응당 파직시켜야 할 일이 아닐 것 같으면 체직을 허락하지 마소서. 비록 추궁하여 심문할 일이 있더라도 국초(國初)의 고사처럼 양사가 서로 함답(緘答)을 바치도록 한다면 꼭 행하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이니,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달한 말은 약석(藥石)이 아닌 것이 없으니 깊이 생각하여 채택하고 실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5일 을묘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조귀석(趙龜錫), 헌납 이동로(李東老)가 ‘어제 간원이 헌부를 처치함에 있어 근래의 규례를 답습하여 성상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지 않았다.’고 옥당(玉堂)의 차자에서 지적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판중추 송시열의 구황 수의(救荒收議)에 따라 옥당이 주자(朱子)의 구황장(救荒狀)을 초록하여 올렸는데, 그 조목에는 일곱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곧 죄수를 처결하는 정한(程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근래 사송(詞訟)을 담당한 관원들은 이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시일을 끌어 처결하지 아니하여 옥송(獄訟)이 적체되게 하고 있으니, 중외(中外)에 신칙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둘째는 곧 재상(災傷)을 검핵(檢覈)할 때 속이고 사실대로 하지 않은 관리를 출책(黜責)하는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국초로부터 이런 법을 실시해 왔는데 근래 기강이 해이하여 관리된 자들이 대부분 속이므로 그 사이의 허실(虛實)을 적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우의정 원두표(元斗杓)는 아뢰기를,
"강진(康津) 고을의 경우 현감 김징(金澄)의 상소로 인하여 검핵할 때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을 이미 알아서 특별히 그 부세를 견감하였거니와, 그 밖의 재(災)를 실(實)로 삼은 수령들도 아울러 적발하여 죄를 처단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태화(太和)가 아뢰기를,
"그 세째는 곧 구황곡(救荒穀)을 바친 사람에게 상을 주기를 요구한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순창(淳昌) 사람 양운거(楊雲擧)는 재산이 넉넉하여 미곡을 많이 바치고 있습니다. 매양 흉년 때마다 개인의 저장 곡을 가지고 주린 백성을 구제하므로 그 생명을 보전한 자가 매우 많으니 먼저 상전(賞典)을 베푸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두표(斗杓)는 아뢰기를,
"운거(雲擧)는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가선첩(嘉善帖)을 하사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또 듣건대 그 사람은 또한 거두어 쓸 만하다고 하니,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격려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뒤에 운거에게 사옹 참봉(司饔參奉)을 제수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 넷째는 곧 저수지(貯水池)의 파괴된 곳에 인부를 모집하여 역사를 시키는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방을 쌓아 물을 저장하면 그 이익이 매우 큰데 법령이 해이하여 거의 다 파괴되고 있습니다. 현재 제방이 파괴된 곳에서 부당하게 경작하는 자는 일체 금지시키고 예전대로 수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 다섯째는 곧 곡식을 모집하여 진제(賑濟)하는 일과 다른 지방의 유민에 대해서는 그들이 현재 있는 고을에서 일체로 구활(救活)할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곡식을 모집하는 일은 일찍이 이미 품정하였습니다. 벼슬을 파는 일은 비록 명기(名器)에 손상이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지금의 형세는 이미 최악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득불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지방에서 온 유민을 일체로 구활하는 일은 여러 도로 하여금 신중한 마음으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 여섯째는 곧 조세(租稅)를 분납케 하거나 아니면 아예 면세해 주거나 하는 일 외에 전미(錢米)를 많이 풀어서 진제(賑濟)를 준비하고, 여러 해 동안의 잔영미(殘零米)와 본년(本年)에 응당 납입해야 할 쌀을 아울러 본읍(本邑)의 진적(賑糴)에 머물려 두고 본년의 하세(夏稅)를 임시로 정지시키며, 포흠(逋欠)과 사채(私債)는 아울러 독촉을 정지하는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포흠과 사채는 조복양(趙復陽)의 상소 및 옥당의 차자로 인하여 납입을 중지시키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잔영미는 곧 지금의 대동여미(大同餘米) 따위인데, 각읍이 대부분 봉류(捧留)하지 않고 있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불특정 고을을 제비뽑아 핵실하게 한 다음, 봉류하지 않고 있는 고을의 경우는 그 수령을 죄주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일곱째는 곧 주현(州縣)·촌락(村落)의 도적에 대해서는 진실로 단속해야 마땅하나 또한 모름지기 먼저 위덕(威德)을 베풀어야 할 것이니, 강명(剛明)한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왕의 덕을 받들어 선포하도록 해야 할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토포사(討捕使)와 포도장(捕盜將)을 설치하였고, 혹은 막(幕)을 설치하여 밤 도적을 사찰하기도 하니, 단속하는 방법은 지극하다고 할 만한데, 해마다 풍년이 들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없으므로 서로 모여서 도적질을 하게 되니, 그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도적을 그치게 하는 근본 방법은 오직 조정에서 먼저 위덕을 베푸는 데 달려 있을 뿐이며, 별도로 사신을 보내는 것은 한갓 음식과 거마의 제공에 따른 폐단만 끼칠 뿐입니다. 짧은 시일에 두루 돌아다니는 것으로 어떻게 항시 일어나는 도적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신은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울러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지방의 진제는 으레 관문(官門)에 설치한다 하니, 큰 고을의 경우 외촌(外村)은 관문과의 거리가 매우 멀텐데, 기민(飢民)이 일제히 모여와서 먹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니, 두표는 아뢰기를,
"큰 고을의 경우는 외창(外倉)이나 먼 마을에다가 몇 군데 더 설치하여 모여서 먹기에 편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외처에서 죽을 쑤어 기민에게 먹일 경우, 수령도 또한 수시로 두루 다니면서 친히 살핀다면 빠뜨리고 소략한 폐단을 없앨 수 있습니다. 수령을 주의시키는 일은 감사에게 달려 있으니, 백성 중에 굶어 죽은 자가 발생할 때에는 감사가 그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별도로 어사를 보내서 진정(賑政)을 검핵하면 꽤 이익되는 바가 있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어사가 별안간 순시하는 일은 반드시 실효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번거로운 폐단만 더할 것이니, 보내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당이 차자로 진달한 포적(逋糴)의 폐단은 어찌 그토록 극심한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매년 납입하지 못한 건 진실로 수령의 과실입니다마는, 근년에 연달아 흉년을 만났으므로 수령이 비록 납입을 독촉하려고 해도 그 사세가 역시 어렵습니다. 그 중에는 더러 사망하거나 유리한 자가 있어 침징의 일이 족린(族隣)에 미치기까지 하니, 참으로 원통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제도(諸道)에 명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대상을 상세히 조사하여 계문한 뒤에 처치하도록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중에서 호위 군관(扈衛軍官)을 혁파할 일을 진달하였습니다. 반정 초의 위의(危疑)할 때에 그것을 임시로 설치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과 달라 별로 숙위(宿衛)에 관계가 없고 국고가 탕갈한 때에 한갓 관의 곡식만 소비하고 있으니, 신과 좌상은 다 혁파할 만한 것이라 말하는데 우상이 미루고 있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1천 명이 넘는 군관은 대부분 재주와 용맹이 있는데 일시에 혁파해 보내는 것은 참으로 아깝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결코 혁파할 수 없는 것이라 여깁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兪棨)는 그것은 혁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힘써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임 대신에게 수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중에서 훈국 군병(訓局軍兵)을 감원할 것과 군자 별창(軍資別倉)을 설치할 일을 진언하였는데, 창고를 설치하는 일은 반드시 각 아문과 여러 궁가의 어전·염분을 변통한 뒤에야 바야흐로 의정(議定)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유계가 또 군액(軍額)은 감해야만 하고 어전과 염분은 군자(軍資)에 옮겨 보충해야 한다고 힘껏 진언하였다. 두표는 아뢰기를,
"군병은 더 뽑지 않으면 저절로 원액(元額)이 감수되고, 어전과 염분은 원수(元數)가 많지 않으니, 비록 혁파한다 하더라도 크게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유계는 아뢰기를,
"나누어 가지면 비록 적지마는, 합해 모으면 또한 적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병의 경우는 궐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말도록 이미 영을 내렸으니 우선 형세를 보아야 할 것이고, 별창의 경우는 각 아문·여러 궁가 및 각도의 감영·병영·수영의 어전과 염분의 총수가 얼마인가를 아울러 정확히 조사해본 뒤에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중에서 어린애에게 베 거두는 것을 감면할 일을 진언하였는데, 어린애 같은 유는 그 수가 1만여 명이나 되니, 매년 감면한다면 국가 예산이 따라서 고갈될 것이므로 정말 계속 감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자, 유계는 또 그 애긍한 상황을 힘껏 진언하고, 또 아뢰기를,
"비록 이해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어린애의 나이를 올려서 군안(軍案)에 기록하고 나이가 50세가 못 되어서 노제(老除)시키고 있는 것을 지금 만일 그 어린애들이 장성함을 기다려서 베를 거두고 실제 나이가 60세에 이르러서 비로소 제대시킨다면 50세 후에 거두는 수가 족히 어린애 때 감면한 수를 충당할 것이니, 다소를 계산하여 실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국가는 한갓 목전의 수용에만 급급하여 선처의 방법을 생각지 않아, 백성을 학대하여 원성을 취하고 있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우선 금년에 거두는 베를 감면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유계가 아뢰기를,
"조군·수군에서 어린애에 대한 폐단이 더욱 심하니 또한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조군·수군은 대대로 그 역(役)을 전해가니, 군역(軍役)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입니다. 이에 세초(歲抄) 때에 정장(丁壯)을 얻기 어려운 것이 다른 병정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조군의 경우에는 장선(裝船)과 납량(納糧)의 역(役)이 있고, 수군의 경우에는 입번(立番)과 수조(水操)의 역이 있는데, 한 번 역에 응하면 이미 반년의 물자를 허비하니, 장정도 오히려 지탱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어린애야 말할 것 있겠습니까. 풍년에도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흉년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유계의 말이 참으로 옳은데 다만 아울러 감면한다면 경비를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유계가 아뢰기를,
"수군의 경우에는 이름은 비록 입번이라 하나 변장(邊將)이 그 번포(番布)를 받아 대개 사사로이 사용하여 한갓 군민(軍民)의 원망만 취하고 방비는 허술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와 같은 흉년에는 우선 입번을 파하는 것도 혹 하나의 방편이 됩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가령 위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병이 없는 배를 장차 어떻게 쓰겠습니까. 변장이 군병을 놓아주고 베를 거두는 일은 비록 얄미운 일이나, 산골에 사는 자는 배 부리는 일을 익히지 않았으니, 비록 입번케 하더라도 바로 쓸모없는 군병입니다. 그런데도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머물게 하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진(鎭) 근처에 있는 군병을 대신 입번시켰습니다. 이로써 한편으로는 먼 데서 와서 오래 머무는 폐단을 제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병(土兵)의 의식(衣食)의 물자를 삼으니, 그 사이에 비록 변장이 난잡하게 구는 일이 없지 않으나, 만일 번군(番軍)을 혁파한다면 원근의 사람이 모두 병들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중에서 어영군의 입번을 제거할 일을 진언하였습니다. 고 상신 이시백(李時白)이 처음 이런 논의를 하였으니, 지금 그렇게 행하더라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고, 유계가 잇달아 진언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전번에 승려를 환속시키라는 분부가 계셨으니 이는 매우 거룩한 처사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시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데 옥당의 차자에서도 역시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다시 생각해보니 도태시키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나 소란스러울 염려가 없지 않으니, 지방에서는 일단 서서히 하고 도성 안에 있는 두 이원(尼院)을 우선 혁파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바로 역대 제왕에게 없었던 거룩한 일이니, 성상께서 만일 과단성있게 행하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연로하여 의탁할 데 없는 후궁이 으레 이원에 거한다 하는데, 지금 만일 이런 것을 갑자기 혁파하면 그들이 돌아갈 데가 없을까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묘조(宣廟朝)에서 은혜를 받은 상궁 박씨(朴氏)가 늙어 의지할 데 없어 삭발하고 여승이 되어 자수원(慈壽院)에 나가 거주하였었는데 지금은 이미 서거하였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이원을 헐어버리라는 분부는 실로 이단을 물리치려는 성상의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구나 선조(先朝)의 후궁은 이원에 나가서 거주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데 어찌 이것으로 구애할 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성 안의 두 이원은 모두 혁파하고 여승의 나이 40세 이하인 자는 모두 환속시켜 시집가는 것을 허락하고, 늙어서 돌아갈 데 없는 자는 모두 도성 밖의 이원으로 내치되, 나이가 비록 40세가 넘었더라도 환속하려고 하는 자는 들어줄 것이며, 또 자수원에 봉안된 열성 위판(列聖位版)은 지난해 봉은사(奉恩寺)의 예에 의하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매안하게 할 것을 속히 거행하라. 그리고 두 이원의 여승으로서 환속할 자가 몇 명이며 도성 밖으로 방출될 자가 몇 명인가도 아울러 일일이 아뢰어 알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통진 해량(通津蟹梁)의 일은 대관이 아뢴 지 이미 오래이고 옥당의 차자도 또 이와 같으니, 다시 조사하는 것을 그만두고 속히 궁노(宮奴)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유계가 아뢰기를,
"시시한 궁노가 성상의 이목을 속여 가리우고 기탄없이 방자하게 구는 태도에 대하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분노합니다. 전하께서는 대간의 아룀과 신들의 차자를 가지고 이숙(李䎘)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전하께서는 어찌 한 궁노를 아끼고 공론을 따르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저런 쥐 같은 무리를 다스리지 않으신다면 장차 어떻게 간사한 자를 징계하고 체통을 세우겠습니까."
하고, 좌상 심지원(沈之源)은 아뢰기를,
"일이 매우 세세한 것인데, 위에서 오래도록 윤음을 아끼시니, 아랫사람들의 심정이 더욱 의혹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기에는 곤란한 일이 있으므로 이미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으니, 그 조사하여 아뢰는 것을 보아서 처치하여도 늦지 않다."
하자, 태화가 또 아뢰기를,
"대간이 자주 체직되는 폐단을 옥당이 차자로 말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변통해야 할 일이나, 그 사이에는 또한 쉽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폐단은 이미 오래된 것인데 어떻게 해야 제거할 수 있겠는가?"
하니, 유계는 아뢰기를,
"염치에 관계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일체 체직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폐단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대관(臺官)의 체면은 보통의 관료들과는 다르니 추고를 당하고 있으면서 행공하는 것도 역시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명하(命夏)는 아뢰기를,
"대간의 직책이 싫어서 피하는 자 가운데는 혹 월과(月課)를 짓지 않거나 삭서(朔書)를 쓰지 않거나 혹은 길에서 재상을 만났을 때 일부러 범하여 피하지 않고서는 허물을 끌어다 체직을 도모하는 경우가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신(朝臣)이 임금에게 경계를 진언하면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하라고 말하는데, 자신의 행동은 이와 같으니, 이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사대부가 옛글을 읽고 조정에 올라 임금을 섬기면서 이처럼 임금을 속이고 있으니 자못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유계가 아뢰기를,
"염치에 관계가 있어서 인입(引入)하는 경우라면 용서할 만하지만 싫어서 피하고 일부러 범하는 유는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하였다. 집의 목겸선(睦兼善)이 아뢰기를,
"해량(蟹梁)의 일은 날마다 논계하였는데 오늘 입시한 대신과 유신이 주달한 바가 본부의 계사보다 더욱 간절하니, 사람들이 더욱 답답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윤음을 내리소서."
하고, 또 선척의 수를 정할 것을 아뢰고 내사(內司)의 관원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내 승지 이경휘(李慶徽)에게 이르기를,
"명례궁(明禮宮)·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 등과 내수사(內需司) 선척외의 그 나머지 제 궁가 선척을 외방(外方)은 2척, 경강(京江)은 4척으로 수를 정하고, 그 나머지는 아울러 세를 거두도록 하며, 각 아문의 선척은 해조로 하여금 수를 정하여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여성제(呂聖齊)가 아뢰기를,
"대간이 혐의를 끌어 자주 체직되는 것은 참으로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전번 헌관(憲官)을 처치할 때 특명으로 체직하지 말게 하셨으니, 실로 이는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성상의 거룩한 뜻이었으나, 대신(臺臣)의 거취는 서관(庶官)과 다르므로 규정을 정함이 있기 전에는 단연코 체직되고 나서 도로 그냥 있는 이치가 없기 때문에 신이 또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옥당의 차자 가운데 ‘근래의 규례를 답습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지 못한다.’고 지척하였다 합니다. 재차 그르친 잘못을 신이 실로 져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판윤(判尹)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포보(砲保)의 충정(充定)에 대한 폐단을 진언하고 따라서 부당하게 소속된 모든 무리들을 조사하여 여정(餘丁)으로 정해 가지고 포보 대신으로 옮겨 충정하기를 청하였더니, ‘다 조사한 뒤에 다시 품의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제 이미 조사하여 파악해 보니, 그 수가 2천 3백여 명에 이르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천 5백 명은 도감(都監)으로 옮겨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월 6일 병진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간관 이경억(李慶億)·조귀석(趙龜錫)·이동로(李東老)·여성제(呂聖齊) 등을 처치하여 아뢰기를,
"대관이 자주 바뀌는 것은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므로, 세세한 일로는 사피하지 말도록 하신 것은 성상의 의중에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였으나, 율명(律名)을 빠뜨리고 쓴 것은 불찰의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곧 처치하여 체직을 청했던 것은 당초 착오된 혐의가 없었고, 이미 체직하고 도로 그냥 있게 한 것은 단연코 이런 이치가 없으니, 전대로 체직을 청한 것이 무슨 잘못된 바가 있겠습니까. 아울러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밤 5경에 객성(客星)이 허(虛)·위(危)의 사이에 나타났다.
1월 9일 기미
목겸선(睦兼善)을 사인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집의로, 남두병(南斗柄)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호위 군관(扈衛軍官)을 혁파할 일로 원임 대신에게 수의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당연히 혁파해야 할 것이나 경성에 있으면서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은 반드시 낙담할 것이니 혁파하는 가운데 또한 변통의 방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정유성(鄭維城)은 혁파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후일 인대(引對)할 때에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재상(災傷)을 검핵(檢覈)할 때 속이어 사실대로 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각도로 하여금 적발해서 계문하게 하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강진(康津)의 전임 현감 송정렴(宋挺濂)이 재결(災結)을 실결(實結)로 했던 상황이 이미 현임 현감 김징(金澄)의 상소 중에 드러났으니, 추고하소서. 그리고 실결을 재결로 한 자는 제도(諸道)로 하여금 일체 적발하여 과죄(科罪)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객성(客星)이 여러 날 밤 구름이 끼어서 살펴볼 수 없었다가, 이날 5경에 우수(牛宿) 안 하고(河鼓)·패과(敗瓜)의 사이에 나타났다. 성체(星體)는 하고의 소성(小星)만하고, 꼬리의 길이는 두 자 남짓하였으며 건방(乾方)을 향해 있고 빛깔은 희었다.
1월 10일 경신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병으로 정고(呈告)하였다.
행 부호군(行副護軍) 조경(趙絅)이 포천(抱川)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월봉(月俸)을 사양하며 아뢰기를,
"현재 지난해의 비할 데 없는 흉작으로 굶어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창고는 씻은 듯이 바닥이 났으므로 백관들의 일정한 녹봉도 감봉하는데 신은 실로 어떤 사람이기에 들에서 농사를 지어먹고 또 겸하여 녹봉을 먹는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고가 비록 고갈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한 경재(卿宰)를 대접할 만한 녹봉이 없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수령하라."
하였다.
부교리 김수흥(金壽興)이 상소하여 경계를 진언하였다. 곧 강성학(講聖學)·입성지(立聖志)·외천계(畏天戒)·휼민은(恤民隱)·엄궁금(嚴宮禁)·정조정(正朝廷)·임대신(任大臣)·개언로(開言路)·통하정(通下情)·용현재(用賢才)·양염치(養廉恥)·숭절검(崇節儉)·입기강(立紀綱)·명교화(明敎化)·신종시(愼終始) 등 15조로서 거의 1만여 언에 이르렀는데,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정원이 성변(星變)으로 인하여 실속있는 일을 힘쓰기 위한 도리를 진계하니, 상이 답하였다.
"천재 시변이 매달 생기고 요성(妖星)이 또 이 즈음에 나타나니, 극도로 걱정되고 두려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이 계사를 보고 두렵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밤 5경에 객성이 모습을 나타냈는데, 어제의 것에 비해 차이가 없으며 약간 하고(河鼓)에 가까워졌고 꼬리 부분이 혜성과 같았다.
헌부가 해량(蟹梁)을 혁파할 일과 궁노(宮奴)를 추치(推治)할 일에 대해 거듭 청하니, 상이 해량 혁파할 일은 따르고 궁노 추치할 일은 따르지 않았다.
1월 11일 신유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원임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재 시변이 근래 거듭 발생하는데 이제 이 성변(星變)이 더욱 참혹하니, 나의 마음이 걱정스럽고 두렵다. 성변을 소멸시킬 계책을 듣고 싶다. 경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는 아뢰기를,
"지난 무오년에 객성(客星)이 자주 나타나더니 그때 심하(深河)의 전쟁에서 전군이 몰살한 참화가 있었습니다. 이제 또 객성이 출현하였으니, 매우 놀랍고 염려됩니다. 전부터 성변이 있으면 문신(文臣) 중에서 천문(天文)을 잘 아는 자를 택하여 관상감(觀象監)의 관원과 함께 기상을 관측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문신 중에 적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 군수 이광보(李光輔)는 이 방면의 술법으로 일컬음을 받고 광흥 주부(廣興主簿) 송이영(宋以潁)도 천문학 교수를 겸하였으니, 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상을 관측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은 아뢰기를,
"문신을 택해서 정하는 것은 관상감 관원들의 태만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니, 비록 감석(甘石)003) 의 술법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두세 명의 관원을 골라서 윤번으로 숙직하며 기상을 살펴보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영중추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기상을 살피는 일은 말단의 일인지라, 재앙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여기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兪棨)는 아뢰기를,
"재앙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덕을 닦는 일만한 것이 없습니다. 덕을 닦는 것은 바로 하늘을 응하는 근본이고, 그 가운데 또 절목이 있습니다. 형벌을 가볍게 쓰고, 조세를 적게 거두고, 몸소 검소한 생활을 하는 이 세 가지의 일이 가장 긴급한 책무가 됩니다."
하고서, 검소한 생활을 하는 방법에 대해 거듭 말하고는 궁금(宮禁)으로부터 사방의 표본이 되게 하기를 청하였다.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근래 사대부 집의 사치는 궁중보다 심하고, 서인은 또 사대부 집보다 심합니다. 주취(珠翠)와 금의(錦衣)의 차림이 극도로 화려하며, 혼상(婚喪)의 소비에 이르러서도 절제가 없습니다. 국법을 무시하고 이처럼 방종하니, 어떻게 나라꼴이 되겠습니까. 일체 금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경석이 잇달아 음사(淫祀)의 소비가 더욱 심함을 말하고, 법사(法司)로 하여금 각별히 금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하늘과 사람은 한 기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은 우리 백성들을 통하여 보고 듣습니다. 만일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실혜(實惠)를 힘써 행한다면 거의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내부(內府)의 물자는 도성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하기에 족하고,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저장 양곡도 운반해다가 진제(賑濟)하는 밑천으로 삼음직합니다."
하고, 유계가 잇달아서 아뢰기를,
"먼저 선혜청의 미곡 수천 석을 대출해다가 저자에 발매하여 도성 백성을 구제하고, 얼음이 풀리기를 기다려 강도의 향미(餉米)를 운반해다가 상환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태화가 재이(災異)로써 면직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상에게 일호의 잘못도 없는 연후에야 대신을 꾸짖을 수 있는 것이다. 부덕한 나는 항시 스스로 부끄럽고 두려운데, 재이를 이르게 한 허물을 어찌 오로지 경들에게만 책할 수 있겠는가. 군신 상하가 다만 각각 힘써서 앞으로의 효과가 있기를 바라야 할 뿐이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호위 군관에 대하여 신이 매양 혁파해야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혁파하지 않고 있습니다. 군관을 만일 혁파하지 않는다면 신의 장임(將任)을 체직함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군관을 혁파해야 될지의 여부를 다시 의논하니, 경석(景奭)이 무신(武臣)에게 물어보기를 청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유신(儒臣)이 모두 ‘비록 변란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은 족히 믿을 수 없는데 이런 흉년에 한갓 나라의 곡식만 허비하고 있으니, 파해 보내는 것이 낫다.’ 하는데, 신이 어찌 감히 의논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은 아뢰기를,
"이들은 오로지 급료만 받아먹는 것이 아니고 무재(武才)를 익히기도 하고 혹은 수록(收錄)되기를 바라기도 하여 각각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만일 일시에 파해 보낸다면 반드시 낙담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급료를 받는 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한 청(廳)의 정액(定額)이 50명인데 재주를 시험하여 요미(料米)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와서 갑자기 혁파할 수 없으니, 혁파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근래 지방에 군정(軍政)이 거행되지 않고 해상의 방비가 더욱 허술하니, 신칙을 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기고 이내 이완·유혁연 등을 불러서 이르기를,
"성변(星變)은 주로 병혁(兵革)에 관련이 있는 것이니, 경들은 더욱 조심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밤 5경에 혜성(彗星)이 우수(牛宿) 안 하고성(河鼓星) 아래에 나타났는데, 극(極)에서 84도(度) 떨어진 지점이었다.
1월 12일 임술
교리 이민적(李敏迪), 이조 정랑 남구만(南九萬), 수찬 김만기(金萬基)를 측후관(測候官)으로 삼아 윤번으로 관상감에 숙직하면서 성관(星官)을 단속하게 하였다.
밤 5경에 혜성이 우수 안 하고성 아래에 나타났는데, 극(極)에서 83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1월 13일 계해
밤 5경에 혜성이 우수 안에서 나타나 점점 하고성으로 가까이 갔는데, 극에서 82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1월 15일 을축
부교리 김수흥(金壽興)이 상소하여 성변(星變)에 대해 논하고 청하기를,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서울과 지방의 죄수 및 도류(徒流) 이하로서 정상적인 사면에서는 참작이 되지 않은 자를 직접 탑전(榻前)에서 품의케 해서 크게 사면을 베풀고, 또 낭묘(廊廟)에 의논하여 단지 두려워 간략히 함만 일삼지 말고 변경에 대한 주의를 기울여서 미리 방비책을 강구하여 스스로 강해지는 방법을 마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신하들에게 도움을 구하시되, 여러 재신(宰臣)을 접견하고 빠뜨림없이 강구하시자마자 단지 한번 수문 수답하는 자리를 마련하여 형식만 차리고 마시니, 이것이 과연 하늘에 대응하는 실상이 되겠습니까. 원컨대 대신(大臣) 및 육조 당상, 삼사의 신하들에게 거듭 명하여 일제히 조당(朝堂)에 모여서 수신 반성(修身反省)하는 도리를 각각 진달하게 하시어, 여러 사람의 말을 모아 절충하시면 반드시 쓸 만한 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교리 이민적(李敏迪)도 상소하기를,
"관동(關東) 의 시장(柴場)이 이미 혁파되었으니, 기전(畿甸)과 해서(海西)에 줄줄이 있는 것은 더욱 혁파하지 않을 수 없고, 선액(船額)이 이미 수효가 정해졌으니, 어염(魚鹽)·설둔(設屯) 중에 미처 정리되지 못한 것도 아울러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 수령에 대해서는 이동시키지 말라는 명령이 이미 계셨고, 대신(臺臣)에 대해서는 또 직임을 오래 맡기리라는 분부가 계셨으니, 탐욕과 청렴을 더욱 살피지 않을 수 없고, 조식(條式)을 더욱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영(御營)에는 이미 상번병(上番兵)이 제거되고, 포보(砲保)에는 이미 보포(保布)가 감면되었는데, 이는 일시적인 임시방편이지 영구적인 경상 방법은 아닙니다. 고금의 병제(兵制)는 번상(番上)보다 좋은 것이 없고 장정(長征)보다 좋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필(李泌)은 부병(府兵)에 대해 말하고 두목(杜牧)은 16위(衛)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그들의 논설이 가장 자세하고, 당(唐)의 신책군(神策軍)과 위(魏)의 아병(牙兵)도 실로 거울삼을 만한 것입니다. 단지 도감(都監)의 병사를 설치할 당시의 옛날 인원만 존속시킨다면 국력이 조금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기·정병(騎正兵)을 단속하는 제도를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훈련하고 숙위하기를 한결같이 어영(御營)의 규정과 같게 하도록 한다면, 가만히 앉아서 정졸(精卒) 수만 명을 갖출 수 있을 것인데 공리(功利)가 어찌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조종(祖宗)의 부탁을 받아 억조 창생의 주인이 되셨는데, 이미 사인(私人)을 두고 또 사재(私財)를 두셨습니다. 성상의 마음씀은 천리대로 하지 않으시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일체가 되지 않아 안과 밖이 판이하게 두 갈래 길이 되었습니다. 정사가 궁액(宮掖)에 관련되면 사사로이 법을 굽힘이 있고, 일이 친애하는 자에 관계되면 사사로이 비호함이 있으며, 연척이 서로 얽혀 금위(禁衛)가 엄정하지 못하고, 궁노(宮奴)가 사방으로 방종하여 빈민들이 원성을 외치며, 복어(僕御)와 의기(醫技)는 서로 샛길을 인연하고 중신(中臣)과 내례(內隷)가 더러 이목의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젖어들고 갉아먹어 전하의 덕업이 날로 떨어져 때에 따라 곳에 따라 해가 되지 않음이 없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모두 성상의 실정(失政)입니다."
하니, 상이 아울러 후하게 답하였다.
1월 16일 병인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주역》 이괘(頣卦)의 정전(程傳)에 ‘형체를 기르고 덕을 기른다.[養形養德]’는 말을 이끌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몸받아 행하신다면, 본말이 겸해 이르러서 명령과 정교가 모두 올바른 데서 나올 뿐만 아니라 성궁(聖躬)을 보양함에 있어서 반드시 크게 이익됨이 있을 것이고, 미루어나가 백성을 기르는 데 이르러 각각 그 알맞음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응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아마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궁금(宮禁)을 바로잡아 내외를 엄격히 하고 언로를 넓혀 충간(忠諫)을 오게 하고, 인심을 결합하여 나라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고 유현(儒賢)을 불러 성상의 덕을 돕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탑전에서부터 사치를 금하고 해방(海防)을 신칙하소서."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이 상차하기를,
"수성(修省)의 실질을 가지고 미루어 정사를 행하소서. 전부(田賦)를 균등히 하고 민호(民戶)를 등기(登記)하며 공안(貢案)을 고치고 병제(兵制)를 개혁해야 할 것들은 실로 나라의 급선무입니다. 큰 흉년을 만나서 형세상 그 일을 할 겨를이 없으나 그 절목의 자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유태(李惟泰)의 이전날 상소 속에 이미 갖추어 말하였습니다. 이제 그 사람을 초치하여 그와 더불어 익히 강구해서 때를 기다려 꼭 행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두 유현(儒賢)이 도성에서 떠난 지 이미 반 년이나 되었으니, 더욱 성의를 다하여 그들이 반드시 오게 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금령(禁令)이 시행되지 못하고 주의(注擬)가 정결하지 못하고 형옥(刑獄)이 엄정하지 못하고 기강이 무너지고 풍속이 투박한 것은 그 어느 하나도 ‘사(私)’라는 한 글자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근원적인 것에 신경을 쓰시어 먼저 사사로움을 제거하고 뭇 신하들을 책려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치의 습속은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으니, 상복(喪服)을 벗을 때에 의장(儀章)과 복용(服用)을 일체 소박한 쪽으로 따라 번거로움을 버리고 간략함을 취하여 정치의 밑바탕과 백성의 표준이 되게 하소서."
하고, 정언 여성제(呂聖齊)와 장령 송시철(宋時喆)도 상소하여 폐단에 대해 진술하였는데, 상이 모두 너그럽게 답하였다.
이때 시절은 크게 흉년이 든 데다가 혜성(彗星)까지 나타나자, 위아래가 모두 근심에 잠기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였으나 모두 채택해 쓰는 실상이 없었으니, 식자들이 한심해 하였다.
1월 17일 정묘
정중휘(鄭重徽)를 지평으로 삼았다.
1월 18일 무진
헌부가 아뢰기를,
"어제 회좌(會座)할 때 어떤 여자가 와서 울며 하소연하기를 ‘집에 15세 된 아이가 있었는데 땔나무를 하러 새벽에 나가서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에 동네 사람이 「얼어죽은 시체 하나가 있더라.」고 전언하기에 급히 가서 보았더니, 바로 내 집 아이였다. 이는 필시 야금(夜禁)에 잡혀서 밤새도록 구류되어 차가운 비를 맞은 소치일 것이니, 동네 사람과 경졸(更卒)을 추문(推問)해야 한다.’ 하기에, 신이 즉시 우변 포도 군관(右邊捕盜軍官)을 불러서 ‘끝까지 추구하여 사실을 알아내라.’는 뜻을 판윤(判尹)에게 전하도록 하였으나 이완은 태연하여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끝내 조사하고 추문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완은 직책이 한성 판윤에다 또 포도 대장까지 겸하고 있는 사람인데 직무 수행을 못하는 것이 너무도 심합니다. 이완을 무겁게 추고하고, 해당 포도 군관을 수금(囚禁)하여 치죄하소서."
하고, 또 갑주(甲胄) 제작을 감독한 군기 첨정(軍器僉正) 이우주(李宇柱)와 군기(軍器)를 별도로 갖춘 창녕 현감(昌寧縣監) 김상중(金尙重)에게 상을 너무 지나치게 준 일에 대해 논하였으나, 상은 모두 따르지 않고 다만 군관과 경졸을 가두어 치죄하도록 명하였을 뿐이었다.
1월 19일 기사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감돌았다.
1월 20일 경오
호조에서 통진 해량(通津蟹梁)에 대해 조사한 일을 가지고 복계하였더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무소(誣訴)한 궁노(宮奴)를 추치(推治)하게 하고, 또 통진 현감(通津縣監) 이숙(李䎘)을 파출하도록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숙에게는 비록 경솔하게 일을 처리하고 조심성없이 말을 구사한 잘못은 있지만, 그 본정을 추구하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전후의 사핵(査覈)에서 조금도 잘못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파출시키라는 명이 뜻밖에 나오니, 처치하는 일을 중도에 맞게 하는 방도에 부족함이 있는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리상 당연한 바에 무슨 부족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고을 경계에는 민가의 해량이 많이 있었는데 이숙이 그것은 금하지 않고, 또 궁노를 꾸짖기를,
"너희들이 문란을 일으키는 것이 혼조(昏朝)와 다름이 없다……."
하였기 때문에 그런 분부를 하였던 것이다.
1월 21일 신미
궁궐 안에 저장한 면포(綿布) 20동(同)을 비국(備局)에 내려서 진자(賑資)를 돕도록 명하였다.
비국이, 경기에서 봄에 징수하는 쌀 8두(斗) 가운데 2두를 감하여 경기 백성을 좀 여유롭게 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3일 계유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경성의 백성들은 바야흐로 식량에 대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조가(朝家)에서 미곡을 발매하여 진활(賑活)할 자본을 삼으니, 이는 매우 아름다운 정사입니다. 다만 쌀값이 헐하기 때문에 서로 사려고 다투는 자들이 분분하고, 시골 백성으로서 미곡을 팔 자들은 지금 발매하는 일이 있다 하여 다시 도성에 들어오지 않으니, 도성 백성은 도리어 그 이익을 잃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논들은 모두 우선 발매를 정지하고 다시 심사숙고하여 알맞게 처리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하니,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서울 저자에는 개인적으로 미곡을 파는 자가 하나도 없는데, 지금 만일 발매를 정지한다면, 편리한 대로 변통하는 동안에 입에 풀칠할 거리를 백성들은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발매할 쌀을 대출하여 쌀시장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서로 화매(和賣)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영청의 쌀 2백 석을 서울 저자에 대출하여 사사로이 서로 사고 팔게 하라."
하였다. 이때 유계(兪棨)와 조복양(趙復陽) 등이 발매하는 일을 담당하여 쌀값을 정하되 선혜청의 공물 미가(貢物米價)보다 약간 웃돌게 하였더니, 홍명하(洪命夏)가 그것은 모리(牟利)에 가깝다고 차자로 지척하였다. 그러자 유계 등이 상소하여 체직을 빌고 또 아뢰기를,
"지금 시중의 쌀값이 뛰어서 한 섬의 쌀값이 은(銀) 2냥 남짓한다 합니다. 선혜청에서 은을 감하여 값을 지급하는 것이 비록 값을 낮춘 것이라 하나 이익은 공가(公家)에 돌아가고, 진휼청에서 은을 더하여 쌀을 파는 것이 비록 값을 더한 것이라 하나 이익이 백성에게 돌아가는데,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어찌 모리가 됩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이날 명하와 유계 등이 함께 입시하여 명하가 스스로 차자의 말을 진술하였는데, 당초에 두 사람을 지척하는 뜻이 없었다. 상이 유계 등에게 이르기를,
"그것으로 개의하지 말고 협심하여 일을 의논하라."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신에게 소회가 있으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진 해량은 이미 혁파하도록 명하고 또 궁노를 추궁 치죄하도록 명하셨는데, 현감 이숙까지 특별히 파출하라는 분부가 계시니, 과중한 것 같습니다. 또 궁노에 견주어 대응하는 조처를 한 것 같으니 더욱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숙은 파출하지 말고 무겁게 추고만 하라."
하였다.
1월 24일 갑술
혜성이 없어졌다.
1월 25일 을해
비로소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실시하였으니, 전관(銓官)이 유고하였기 때문이다. 김우형(金宇亨)을 헌납으로, 이만웅(李萬雄)을 황해 감사로, 신상(申恦)을 발탁하여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유명윤(兪命胤)을 봉교로, 김수흥(金壽興)을 응교로, 김만기(金萬基)를 이조 좌랑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성으로, 김수항(金壽恒)을 동지성균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사인으로, 조경(趙絅)을 판중추로, 김경(金鏡)을 경상 좌병사로, 신유(申瀏)를 경상 우수사로, 이경석(李景奭)을 부묘 도감(祔廟都監) 도제조로, 허적(許積)·조계원(趙啓遠)·홍중보(洪重普)·여이재(呂爾載)를 제조로, 이단상·이민적(李敏迪) 등 8인을 낭청으로 삼았다.
청나라 임금이 죽어서 전부사(傳訃使)가 나왔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술(李時術)이 치계로 알려오자, 공조 판서 김남중(金南重)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계미년004) 숭덕(崇德)005) 의 상(喪)에는 백관이 백단령·오사모·흑각대 차림으로 성문 밖에 나아가 맞이하여 예를 행하였으니, 그때는 칙사를 맞는 시기가 성복(成服) 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국휼(國恤) 중에 있으니 백모(白帽)·백포대(白布帶) 차림으로 칙사를 맞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케 하소서."
하고, 비국이 아뢰기를,
"황제의 상에는 응당 행할 복색이 나름대로 있으니, 성복 전에는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된 오사모·흑각대·백단령을 착용해야 하겠거니와, 저들과 서로 접견하는 시기가 성복 후에 있다면 그 성복의 복장으로 예를 행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날 밤에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숭덕(崇德)의 상(喪) 때에는 칙사 역시 갑자기 이르렀는데, 그 때에 정명수(鄭命壽)가 그 임금의 은미한 뜻을 받들어 크고 작은 일들을 비밀리에 살피고 갔었습니다. 지금은 칙사의 행차가 이처럼 급박하고 또 북경의 사정을 알 수가 없으니,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積)은 아뢰기를,
"칙사의 행차가 이처럼 급박하니, 서로(西路)의 백성에 대한 일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하고, 부교리 이민서(李敏敍)는 아뢰기를,
"올해 같은 흉년에는 일로(一路)의 기민(飢民)이 비록 편안히 앉아 있게 된다 하더라도 죽음을 구제할 겨를이 없을 것인데, 하물며 칙사의 행차를 만났으니, 지탱하여 보존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참역(站役)에 소용되는 물자는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로 마련하여 각읍에 나누어 주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성 시장에 곡식파는 일을 지금 다시 하니 전에 비해서 어떠한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분잡한 폐단은 꽤 감소되었으나 인구는 많고 곡식은 적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근래 경성 시장에 약간의 쌀을 사사로이 와서 파는 자가 있다고 하니, 이는 유익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파하고 나가자, 상이 명하여 합문(閤門) 밖에 머물러 있게 한 다음, 먼저 감귤을 하사하고 또 술을 하사하였다.
1월 26일 병자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술(李時術)이 치계(馳啓)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이미 23일에 압록강을 건너왔는데 황제의 상을 분명하게 말하지도 않고 또 복장을 변경한 일도 없으며, 6일 만에 경성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합니다."
연달아 대정(大政)을 실시하여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삼고, 침의(鍼醫) 윤후익(尹後益)을 특별히 제수하여 삭녕 현감(朔寧縣監)으로 삼았다. 상이 지난해 종환(腫患)이 갑자기 극심했을 때 후익이 침을 놓아 효과가 있었으므로 특별히 당상(堂上)으로 올리고 지금 또 이 명이 있게 되었다.
비국이 황해 감사 정만화(鄭萬和)·연안 부사(延安府使) 이만웅(李萬雄) 등의 직임을 그대로 두자고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나오기 때문이다.
1월 27일 정축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의 입경(入京) 기일이 머지 않았습니다. 상께서 성문 밖에 나가 그들을 맞는 일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의 여정 일수를 헤아려보니, 내일 벽제(碧蹄)에 당도하겠습니다. 신이 마땅히 달려가서 증후(症候) 및 구기(拘忌) 때문에 상이 성문 밖에 나와서 맞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때 전염병이 치성하였다.】 저들에게 힘껏 말해야 하겠으나, 혹자는 벼슬이 가장 높은 이가 먼저 청하게 되면 그 뒤에는 청하는 일을 계속하기가 어려울 염려가 있다 하니, 우선 허적(許積)으로 하여금 나가게 하고 허적이 만일 소청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신이 마땅히 계속해서 나갈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부교리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혜성이 나타나면 그 징후가 일찍이 때를 넘기지 않았는데, 저 청나라 사신이 부고를 가지고 이르렀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이미 저들에게서 응험(應驗)되었다고 말고 더욱 조심하소서."
하였다. 상이 승지 이익한(李翊漢)에게 이르기를,
"날씨가 따뜻해지니 판중추와 우참찬이 【이때 송시열(宋時烈)이 판중추, 송준길(宋浚吉)이 우참찬이었는데, 상이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은 것이다.】 길을 나서서 올라올 만하다. 하유하는 글을 잘 지어 들이라."
하니, 교리 이민서가 아뢰기를,
"이들은 선조(先朝)에서 예우하던 사람으로서 전리(田里)로 물러가서 누차 징소(徵召)가 있었으나 오랫동안 올라오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성상의 성의가 부족한 소치입니다. 진실로 지성으로 부른다면 비록 초야에 은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마음을 바꾸어 조정에 나올 것인데, 하물며 이 두 사람은 어찌 세상을 잊는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하고, 또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기를 청하며 아뢰기를,
"군신은 부자와 같으니, 비록 환우 중이라 안에 누워서 인견한다 하더라도 실로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옛날 번쾌(樊噲)는 한 고조(漢高祖)에게 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간 일이 있었으니,006) 군신의 사이에는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바야흐로 서로간에 믿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오랫동안 정고(呈告) 중에 있다가 이날 입대(入對)하여 연로하고 정력이 이미 소모되었음을 힘껏 진달하고 해직을 간청하니, 상이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홍명하(洪命夏)도 수어장(守禦將)의 직임을 사양하면서 대신에게 물어보기를 청하였는데, 대신이 가벼이 체직할 수 없다고 하자, 상이 다시는 굳이 사직하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1월 28일 무인
간원이 의논드리기를,
"창주 첨사(昌洲僉使) 이익달(李益達)이 일찍이 전남 수사(全南水使)로 있었을 적에 수군 훈련 시에 망령된 일을 하여 전군을 물에 빠져 죽게 하였는데도 요행히 현륙(顯戮)을 면하였습니다. 다시 장령(將領)의 임무를 제수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29일 기묘
청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니, 영상 및 승지 두 명과 한림(翰林)·주서(注書) 각각 한 명과 어전 통사(御前通事)가 입시하였다. 청국 사신이 들어오자, 상은 흑포(黑袍) 차림으로 어상(御床) 앞에 서서 내시(內侍)의 부축을 받아 배례(拜禮)를 행하였다. 배례를 마치자, 청국 사신이 칙서를 받들어 상에게 전하니, 상은 다 훑어보고 나서 거애(擧哀)하고 막차(幕次)로 들어가 소복(素服)으로 바꾸어 입고는 이내 접견례(接見禮)를 행하였고, 다례(茶禮)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청국 사신이 고사하였다. 다시 칙서를 받들고 숭정전(崇政殿)에 들어가 칙서를 선포하니, 백관들이 모두 거애하고 예를 행하였다. 소위 칙서라는 것은 대개 유조(遺詔)를 모방하여 열한 가지의 죄를 자책한 내용이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짐(朕)의 아들 현엽(玄燁)은 동비(佟妃) 소생으로서 8세의 나이에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종조(宗祧)를 이어받들 만하므로 이에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세웠다. 곧 전제(典制)에 따라 상복(喪服)을 입다가 27일 만에 상복을 벗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즉시 내대신(內大臣)인 색니(索尼)·소극살(蘇克薩)·알필융(遏必隆)·오배(鰲拜)를 보정 대신(輔政大臣)으로 삼으니, 이들은 모두 훈구 중신이다. 짐이 복심(腹心)으로 기탁하니 이들은 충성을 다하여 어린 임금을 돕고 정무를 보살필 것을 맹세하였다. 이를 중외(中外)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노라."
1월 30일 경진
이때 청국에는 앞서 후상(后喪)이 있어서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호조 참판 이정영(李正英)을 진향사(進香使)로 삼았기에, 이때에 와서 청주상 진향사(淸主喪進香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곧 비국의 계사로 인하여 좌윤 심지명(沈之溟), 예조 참의 이진(李𥘼)을 후상 진향사로 차정하였으며, 서장관 이동로(李東老)는 두 사행(使行)을 겸하여 살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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