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경술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양서(兩西)010) 에서 미곡을 옮겨오는 일은 만부득이해서입니다. 양서의 농사가 삼남(三南)에 비하여 조금 낫다고는 하겠지만, 봄에 와서 백성의 굶주림이 역시 심하고, 외국 사신이 또 연속해서 오므로 백성은 실로 견딜 힘이 없습니다. 해서(海西)011) 에서 수운될 대·소미(大小米)와 피잡곡(皮雜穀) 2만 5천 석 중에서 5천 석을 남겨 두고, 관서(關西)에서 수운될 쌀 2만 석 중에서 4천 석과 피잡곡 4천 석을 남겨 두어 황해도와 평안도를 진구(賑救)하는 용도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3일 임자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이어서 청국 사신을 접견할 일에 대해 의논하였다. 상이 청국 사신을 편전에서 접견하였다.
3월 4일 계축
상이 침을 맞았다.
제도(諸道)를 구료(救療)할 의관이 출발하려고 하자, 상이 정원에 명하여 다음과 같이 계칙하게 하였다.
"병자 천만인을 구활(救活)할 책임을 그대들에게 전부 부여하노니, 잘 구료하여라. 한 사람도 운명함이 없으면 응당 격려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응당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줄 것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수일 전 종루(鐘樓) 근처에서 명화적(明火賊)이 인가에 돌입하여 재산을 약탈해 간 일이 있었습니다. 왕도(王都)에서 이처럼 전에 없는 변이 있었으니, 평상시 기포(譏捕)를 열심히 하지 않아 이와 같은 일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당해 포도 대장은 무겁게 추고하고 종사관(從事官)은 파면하고, 부장(部將)은 가두고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또 각사(各司)에서 면신(免新) 턱으로 주찬(酒饌)을 책징(責徵)하는 폐단을 논하여 아뢰기를,
"일체 금단하고 만일 전의 습관을 답습하는 자가 있으면 각각 그 관장을 무겁게 죄를 주소서. 이서배(吏胥背) 한 사람이 면신하는 데에 걸핏하면 백금(百金)을 낭비하고 있으니, 역시 법부(法府)로 하여금 통렬히 금단을 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익(李翊)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3월 5일 갑인
상이 침을 맞았다.
3월 7일 병진
청국 사신이 돌아갔다.
우의정 원두표가 차자를 올려서 출국 기일이 임박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답하였다.
3월 8일 정사
영의정 정태화가 병을 이유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3월 9일 무오
우의정 원두표가 재차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단지 내국 제조(內局提調)만을 체직하여 정유성(鄭維城)으로 대신하고, 이만웅(李萬雄)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3월 11일 경신
상이 침을 맞았다.
헌부가, 종실(宗室)인 영신군(靈愼君) 이형(李瀅)이 도리도 모르고 행실이 나빠 적모(嫡母)를 잘 섬기지 못하고 그 시비(侍婢) 모녀 두 사람을 때려 죽인 일을 논하여 잡아다 국문하고 죄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또 개성 경력(開城經歷) 조사기(趙嗣基)가 국가의 금법을 무시하고 추노(推奴)하는 일로 인하여 여인을 9개월이나 가두어서 끝내는 목매어 자살하게 만든 일을 논하고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또 형조 월령 낭청(月令郞廳)의 조보(朝報)와 추(騶)의 값을 옥졸(獄卒)에게 징수하고 옥졸은 죄수에게서 징수하는 것을 논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변통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사도(師道)가 행해지지 않고 동몽의 배양이 단정치 못하여 동몽의 무리들이 책을 배우는 여가에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고 길가는 사람을 욕보이는 일을 논하여, 교관(敎官)을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따랐다.
3월 12일 신유
사방이 마치 먼지가 내리는 것처럼 어두웠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3일이나 하였다.
3월 13일 임술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를 올려 직명을 깎아주기를 빌었는데, 대개 청국 사신의 통관배들이 자신의 일을 제기한 때문에 스스로 편치 않아서였다. 상이,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밤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감돌았다.
3월 14일 계해
상이 침을 맞았다.
밤에 달무리가 목성을 감돌았다.
영돈녕 이경석이 재차 차자로 사직하니, 부묘 도감 도제조만을 체직시켰다.
3월 15일 갑자
집의 곽지흠(郭之欽),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정중휘(鄭重徽)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진향 부사(進香副使) 이정영(李正英)은 술에 취해서 사람을 때렸고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태제(鄭泰齊)는 식구를 곁에 있는 고을로 이주시켰는데도 대신(臺臣)이 논박하지 않은 것을 잘못으로 여겼다 합니다. 그러나 정영은 왕명을 받들고 출국하였으니 난편한 일이 있음을 생각해서 그의 환국을 기다려 우선 놓아두고 논계하지 않고 있으며, 태제의 일은 전연 듣지 못하여 미처 논계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말하지 않은 책임은 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오두인(吳斗寅)과 정언 여성제(呂聖齊)·정륜(鄭錀)도 이 일로 서로 잇달아 인피하였다. 부교리 오시수(吳始壽) 등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자, 상이 그대로 따랐으나 지흠 등은 정고(呈告)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3월 17일 병인
상이 침을 맞았다.
3월 18일 정묘
조계원(趙啓遠)을 도승지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간으로, 구인기(具仁墍)를 형조 참판으로, 안후열(安後說)을 교리로, 이관징(李觀徵)을 지평으로, 정만화(鄭萬和)를 동부승지로, 정태화(鄭太和)를 부묘 도감 도제조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여 본직 및 도감 도제조를 해임시켜 주기를 빌었으나, 상은 후한 비답을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재차 사직하니, 도제조를 체직시켰다.
오시수(吳始壽) 등이, 처치가 온당치 못하여서 물의를 빚었다 하여 상소하여 체직을 빌었고, 곽지흠(郭之欽) 등은 모두 인피하였다.
3월 19일 무진
장령 송시철(宋時喆)이 고향에서 돌아와서 이정영(李正英)·정태제(鄭泰齊)의 일을 논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출사한 뒤에 곧 공론에 의해 규탄하지 않고 어수선하게 정고(呈告)만 하니 하는 짓이 일을 피하는 듯하고 또 태제가 식구를 밀양으로 이주시킨 일은 시철이 밀양에 벼슬살이 할 때에 있었으니 의당 알지 못할 리가 없는데 대각(臺閣)에 있는 신분으로 이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체직을 청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0일 기사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민여로(閔汝老)·김우석(金禹錫)을 장령으로, 박증휘(朴增輝)를 헌납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지평으로, 정박(鄭樸)·이동명(李東溟)을 정언으로, 조계원(趙啓遠)을 좌윤으로 삼았으며, 좌승지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올리고, 조가석(趙嘉錫)을 주서로, 심지원(沈之源)을 부묘 도감 도제조로 삼았다.
3월 22일 신미
간원이 아뢰기를,
"동래 부사 정태제가 식구를 데려다 밀양 땅에 두고 마음대로 임소(任所)를 떠나서 자주 왕래하였습니다. 방자하게 법을 멸시한 태도는 매우 해괴하니,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의금부가 월경률(越境律)을 적용하니, 상이 변방 수령의 범법은 그 죄가 더욱 무겁다 하여, 특명으로 원지 충군(遠地充軍)케 하였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미찬(米饌)의 하사를 사양하니, 상이 안심하고 수령하라는 내용으로 타일렀다.
3월 25일 갑술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이원정(李元禎)을 발탁하여 동래 부사로 삼았다.
3월 27일 병자
진하 겸 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 우의정 원두표(元斗杓), 부사 홍전(洪瑑), 서장관 김우형(金宇亨) 등이 청국으로 갔다.
민응협(閔應協)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우참찬 송준길이 차자를 올렸으니, 그 대략에 아뢰기를,
"어사 다섯 명은 행장을 꾸리라는 분부가 계셨음을 삼가 들었습니다. 지금 비록 이미 늦기는 하였습니다마는, 그만두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습니다. 보낼 때에 무릇 진휼(賑恤)의 일에 도움이 있는 것은 모두 편리하게 행하도록 허락하고, 또한 도신(道臣)과 더불어 상의해서 함께 구제함으로써 방해하거나 모순되게 할 염려가 없게 해야 합니다. 수령이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모두 조정에 돌아온 뒤에 적어서 아뢰게 하고 혹시라도 가벼이 파출(罷黜)하여 도리어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관(醫官)이 약을 싸가지고 가서 구료(救療)하는 일은 형편상 두루 미치게 하기 어려우니, 오직 방백과 수령이 협동으로 구활(救活)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명령한 것을 지방에서 조심스럽게 봉행하지 않으니, 그것도 또한 어사로 하여금 특별히 규찰하여 실효가 있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국사는 잡다하다고 하겠습니다. 밖으로는 이웃 나라의 사변이 많아 실로 말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고, 안으로는 팔도(八道)가 굶주려 죽어서 백성이 장차 구렁을 메울 지경입니다. 조정의 효상(爻象)을 놓고 말한다면 뒤섞이고 해이해져 날로 쇠퇴하는 데로 나아가고, 세도(世道)와 민풍(民風)을 놓고 말한다면 분리되고 어그러져 날로 난망(亂亡)하는 쪽으로 달려갑니다. 마치 해가 서산에서 져가는 것 같고 물이 구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과도 같아서, 지난해가 그 전년만 못하고, 올해가 지난해만 못합니다. 아, 하늘이 그런가. 사람이 그런가. 시운이 그런가. 운명이 그런가. 통곡하여 눈물을 흘릴 노릇입니다. 믿을 것은 오직 본원이 수백(粹白)하여 하자가 없고 인성(仁聲)과 인문(仁聞)이 중외(中外)에 퍼져 혹 천심에 부합하여 안녕을 누릴 수 있을 듯하다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성상께서 오랜 시일 동안 편찮으셔서 강연(講筵)이 오래도록 폐지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비록 조신 상하가 날마다 세 번씩 접촉하여 흐느껴 울면서 서로 격려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쓰러져가는 것을 붙잡을 길이 없을까 두려운데, 도리어 음양이 막혀 구차히 느슨함이 태평무사한 날보다 심하니, 위망(危亡)의 상태가 눈에 환하거늘 어찌 매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병을 조섭하는 큰 요령은 오직 기거를 삼가고 음식을 조절하며 항시 마음을 화평하고 즐겁게 가지는 데에 달려 있거니와, 마음을 간직하고 수습하는 공부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애당초 편안함과 방종함으로써는 수양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로는 조석이 상쾌할 무렵이나 날씨가 화창할 때에 혹 신하들을 입궐시켜 국사를 상의하기도 하고, 혹은 승지들을 불러들여 서무를 재결하기도 함은 실로 긴요하여 마지못할 일입니다. 지난해에는 대단한 병환 중에서도 승지를 인접하는 일을 오히려 폐하지 않으셨는데, 이제는 아울러 이 일까지 다시 정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자주 승지를 침실 안으로 불러서 소장(疏章)과 주계(奏啓)를 모두 그들로 하여금 앞에 나와서 읽게 하고 전하께서는 안석에 기대어 들으시며, 이어서 그들과 더불어 강순(講詢)하고 곧 비결(批決)을 하신다면, 단지 아랫사람들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철따라 몸조섭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필시 도움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뵙건대, 전하께서는 치밀하고 정중하신 뜻은 넉넉하지만 분발하고 진려하는 기운은 조금 부족한 것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병을 살펴 약을 가한다는 것과 가죽을 차거나 활시위를 차고 다녔다는012) 말을 가지고 우러러 진계하였는데, 또한 성명께서는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경계하고 깨우쳐주는 말과 나라와 임금을 생각하는 성의는 실로 진심에서 나온 것이니, 다른 사람의 소차(疏箚)에 비할 수 있겠는가. 내 비록 불민하나 큰 띠에 적어서 깊이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비록 대충만 말하나 마땅히 면대하여 말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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