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5권, 현종 2년 1661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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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임오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청국의 새 임금이 등극하여 조서(詔書)를 반포할 두 사신이 나온다.’고 치계(馳啓)하자, 이조 판서 정치화(鄭致和)를 원접사로 삼았다.

 

2월 3일 계미

판윤(判尹) 이완(李浣)이 상소하기를,
"헌관(憲官)이 아이의 시체 건을 조사하려고 한다면 해조(該曹)에 이문(移文)해서 그들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하여 처리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지, 군관(軍官)을 초치하여 검핵하라고 분부하기를 마치 상급 관청이 소속 관청에게 영을 내리는 것처럼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고, 또 군관(軍官)과 경졸(更卒)에게는 죄상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면서, 이어서 파직시켜 주기를 빌었다. 상이 후한 뜻으로 비답하고 청원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헌관이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사피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2월 4일 갑신

간원이 헌관을 처치하여 출사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이완(李浣)이 대각(臺閣)을 능멸한 일을 논하고 그를 엄중하게 추고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출사하는 일만을 윤허하였다.

 

청국의 사신이 돌아갔다.

 

2월 6일 병술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김우석(金禹錫)을 지평으로 삼았다.

 

헌납 김우형(金宇亨)이 수백 마디의 말로 상소하여, 맨 처음 비국(備局)의 공좌(公坐)에서 한 재신(宰臣)이 주찬(酒饌)을 마련한 잘못이 있었던 것을 논하고, 그 다음 영릉(寧陵)의 상석(裳石)이 허물어졌으므로 고쳐 쌓을 일을 진달하였으며, 그 다음 양남(兩南)의 인사들을 거두어 쓸 것을 청하고, 그 다음 경기 백성들의 기곤(飢困) 상황을 진달하였으며, 이어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에 비축되어 있는 쌀을 꺼내다가 무상으로 지급하여 구휼할 것을 청하고, 또 묘당(廟堂)에 신칙하여 도적을 그치게 할 방법을 강구케 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2월 9일 기축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선공 제조 허적(許積), 관상감 제조 이정영(李正英), 예조 참의 이진(李𥘼)이 아뢰기를,
"신들이 영릉(寧陵)에 가서 봉심한 뒤에 현지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들였는데, 전부터 원릉(園陵)의 석물(石物)이 손상된 곳은 으레 유회(油灰)로 발라 보수해 왔으니,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의해 택일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2월 10일 경인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유생 변극휴(卞克休)가 그의 상소 가운데서 곧 증광 복시(增廣覆試)에서 수석을 차지한 박수현(朴守玄)의 대책(對策) 중에 인용된 시구(詩句)에 오늘날을 풍자한 뜻이 있다고 하여, 그 두 시구를 끄집어내서 해석하기를 ‘하나는 영무(靈武)에서 부정하게 즉위한 일007)  을 기롱하고, 다른 하나는 장후(張后)가 이보국(李輔國)과 더불어 조정을 어지럽힌 일008)  을 기롱한 것이다.’ 하여 교묘하게 부회한 말이 매우 흉험하니 신은 송구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 날의 책제(策題)는 시를 가지고 물었던만큼, 수현(守玄)이 두시(杜詩) 한 귀절을 인용한 것은 범연하게 옛시를 논하여 시를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 데 불과했을 뿐입니다. 영무와 보국의 일이 오늘날에 무슨 방불한 바가 있다고 그 은미한 뜻을 빌어 풍자하는 뜻을 붙였겠습니까. 비록 풍속을 병들게 한 자도 그냥 놓아 둘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의 말이 이처럼 위험하니, 신이 회시 참시관(會試參試官)으로서 지금 대각(臺閣)을 더럽히고 있는 것은 편치 못합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2월 11일 신묘

곽지흠(郭之欽)을 집의로, 남천한(南天漢)을 지평으로, 오두인(吳斗寅)을 헌납으로, 민응협(閔應協)을 병조 참판으로, 여이재(呂爾載)를 호조 참판으로, 김우형(金宇亨)을 교리로 삼았다.

 

예조 참판 윤순지(尹順之), 행 사직(行司直) 이정영(李正英), 우부승지 이경휘(李慶徽), 사인 목겸선(睦兼善)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모두 시취(試取)된 박수현(朴守玄)이 변극휴(卞克休)에게 저척(詆斥)을 당한 것을 가지고 죄를 자청하여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2월 12일 임진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변극휴의 상소 중에 저척한 바가 있다 하여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기를,
"위조한 서간은 당초 양영남(梁穎南)에게서 나왔습니다. 대개 영남은 일찍이 신의 처남들과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처남의 집이 마침 신의 집과 서로 가깝기 때문에 여러번 와서 보았으니, 영남이 필시 이를 인하여 흉교(兇狡)한 꾀를 지어냈을 것입니다. 그 정상을 추구하면 죽여도 애석할 바 없는데, 형조가 그 율문(律文)이 사형에 이르지 않는다 하였기 때문에 다만 형추하여 정배하였을 뿐입니다. 신이 그 율문이 너무 가벼운 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나 이미 조정으로부터 처치한 일이라, 또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극휴(克休)의 상소 속에 있는 말이 극히 낭자한데, 거기에 이른바 ‘쌀과 베를 배에 실었다[米布載船]’는 것은 당초의 위조된 서간 한 건을 가지고 서로 보탠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른바 위조된 서간이 이미 영남의 손에서 나왔으니, 이동현(李東顯)·변응립(邊應立)에게 다시 물어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모두 놓아두고 묻지 않았지만, 영남이 스스로 위조한 일을 떠맡는 논리는 더욱 사리에 가깝지 않습니다. 영남이 비록 매우 우둔하나, 또한 서간을 위조하는 죄가 극히 중대하므로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았다면 어찌 남의 지시를 듣고 달게 형벌을 받으면서 종시 스스로 떠맡을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남의 지시를 듣고 나가서 스스로 떠맡았다면, 당초 어찌 장님에게 몰래 부탁하여 이미 죽은 사람에게 떠넘겨서 어원의 출처를 없앨 계책을 하였겠습니까. 가까운 지역에 도배(徒配)하고 음식물을 넉넉히 주었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영남의 죄범이 이미 이처럼 드러나서 전국이 듣고 울분해 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어찌 차마 극히 미운 사람을 위해 도리어 몰래 보호하는 일을 도모하고 부탁하겠습니까."
하고, 이내 견책 파직을 비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삼가 살피건대, 일상(一相)은 고상(故相) 정귀(廷龜)의 손자이며 판서 명한(明漢)의 아들이다. 우리 조정에서 부자가 문형(文衡)을 한 것은 겨우 성현(成俔)·성세창(成世昌)이 있었을 뿐이다. 명한이 정귀를 이어 대제학이 된 것만도 이미 드문 일인데, 일상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술이나 즐기고 글은 읽지 않아 일찍이 문사(文詞)에 힘쓰지 못하였는데도 세음(世蔭)을 의지하여 또 문형을 주관하였다. 일상이 만년에 곤액을 당하여 개탄스럽게 말하기를,
"내가 글을 할 줄 모르면서 문형을 맡았으니, 이 일이 재난을 불러들였다."
하였다 한다.

 

우참찬 송준길이 고향에서 올라오자, 상이 인견하고 위유(慰諭)하기를 매우 지극히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판중추 는 올라올 뜻이 없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그가 올라올 것을 비록 기필할 수는 없으나, 개탄스럽게 부르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민간의 기곤(飢困) 상태를 물으니, 준길이 오는 길에 바가지를 들고 구걸하는 자가 서로 잇달은 것을 보았다고 대답하고, 또 아뢰기를,
"도신(道臣)이 상청(上請)하는 일은 대부분 중간에서 막히고 있습니다.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니, 도신이 청한 일은 조정에서 일체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중묘조(中廟朝)의 고사를 모방하여 어사를 풀어보내서 진정(賑政)을 잘하고 있는지 살피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두 이원(尼院)을 훼철한 일을 하례하고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승사(僧寺)를 헐어 서당(書堂)을 짓는 일을 일거 양득이라 하였습니다. 이원 한 곳은 바로 북학(北學)의 옛터입니다. 이원을 헐은 재와(材瓦)를 가지고 그대로 북학을 설립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예조가 아뢰기를,
"북학은 신설하는 셈이니, 학관(學官)의 차출 이외 전복 획급(典僕劃給), 유생 공궤(儒生供饋) 등의 일을 미리 적절하게 처리하여야 바야흐로 거행할 수 있습니다. 각 해당 관사로 하여금 품처케 하소서."
하였다. 그 후에 일에 구애된 점이 많았기 때문에 끝내 행해지지 못하였다.

 

2월 14일 갑오

판중추 송시열이 병을 이유로 들어 소명에 달려오지 않았다.

 

2월 15일 을미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袝廟) 후에는 으레 조천(祧遷)의 예가 있으니, 조천에 해당되는 신위(神位)를 거슬러 올라가 논한다면 인종 대왕은 당연히 조천해야 할 것 같거니와, 오묘(五廟)009)  의 예를 가지고 논한다면 명종 대왕도 조천에 해당됩니다. 일이 매우 중대하니,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니, 그 이튿날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의논드리기를,
"사당에는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지금 이 조천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듯합니다만, 유신(儒臣)에게 물어보는 것이 지극히 삼가하는 도리일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 영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의논하기를,
"신들이 일찍이 들으니, 오묘(五廟)·칠묘(七廟)의 제도는 모두 태조(太祖)로부터 계산하는데, 우리 왕조의 인(仁)·명묘(明廟)가 1세(世)가 되니, 지금 이 부묘 때 아울러 조천하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감히 자신하지 못하겠으니, 오직 예를 아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서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판중추 와 우참찬에게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우참찬 송준길은 지금 이미 상경하였고, 판중추 송시열은 지금 회덕(懷德)에 있으니, 본조 낭청을 보내서 수의(收議)해 오게 한 다음, 두 유신에게 수의한 것을 일시에 적어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만석의 쌀을 내어 도성의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매우 큰 혜택이나 인구는 많고 쌀은 적어서 발매하는 일이 복잡하여 베를 안고서도 바꾸지 못하는 자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쌀을 시민에게 전담시켜 주어 보통값으로 매매하게 하는 것이 나으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최선의 방법에 따라 잘 처리하게 하소서. 또 발매할 때에 하인배들이 조종하여 사정을 따르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해당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고, 하인배를 수금(囚禁)하여 치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쌀을 내어 시민에게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나누어 팔게 한다면 분쟁의 시끄러움이 필시 관에서 발매하는 것보다 심할 것이니, 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호적의 원수를 상고하여 각동(各洞)·각방(各坊)의 호구의 다소에 따라 쌀의 수량을 배정하고 표문(標文)을 나누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차례로 돌아가면서 매매케 하고 이중으로 받는 폐단이 없게 하면서 한 달 내에 세 차례씩 발매하도록 하소서. 그 가운데 요록(料錄)을 받아먹는 집이나 평소 부요하다고 일컬어진 사람은 표문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정포(正布)·상포(常布)에도 역시 많고 적음에 고르지 못한 폐단이 있으니, 아울러 참작하여 발매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7일 정유

상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우참찬 송준길에게 쌀과 고기를 계속 보내게 하였다. 이튿날 준길이 상소하여 사양하기를,
"포름(庖廩)이 계속되는 것은 원래 신의 본분에 마땅히 얻을 바 아니거늘, 더구나 지금은 전국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옛날 사람이 이른바 ‘천하의 굶주린 자, 추위에 떠는 자에게 주기를 원한다.’ 한 것은 모두 고절(苦切)한 말입니다. 또 신에는 상록(常錄)이 있는데, 어찌 별도로 하사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고 수령하라고 유시하였다.

 

밤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감돌았다.

 

2월 18일 무술

실록청이 아뢰기를,
"실록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한 질은 춘추관에 봉안하고, 적상산(赤裳山) 등 네 곳에 나누어 간직할 것도 춘추관에 임시로 봉안하여 때를 기다려서 모시고 가야 하는 것이니, 본시 전례가 있습니다. 다만 3년 내에 실록을 완성한 일은 전에 없었던 것이라, 일찍이 근거할 만한 규례가 없었습니다. 세초(洗草)하는 일과 같은 것을 갑자기 부묘하기 전에 행하는 것은 정례(情禮)상 타당하지 않으니, 예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영부사 정유성이 의논드리기를,
"실록 편찬은 비록 완료되었으나 세초 등의 일은 부묘하기 전에 거행할 수 없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그때 가서 다시 품의케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9일 기해

예조가, 실록을 모셔갈 때의 의장복색(儀仗服色)을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자, 정태화 등이 의논드리기를,
"실록이 완성되는 일은 매번 삼년상이 끝난 뒤에 있었기 때문에 전도고취(前導鼓吹) 등의 일은 순전히 길례(吉禮)의 의식을 썼습니다. 지금은 삼년 안에 실록 편찬을 이미 마쳤으니, 정례로 헤아려 볼 때 한결같이 전례를 따를 수 없습니다. 전도고취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하들이 그대로 백모(白帽)·백포(白袍)의 시복(時服) 차림으로 춘추관에 봉안하고, 가을 이후 네 곳에 나누어 간직할 때에 바야흐로 상례(常禮)를 갖추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0일 경자

상이 침을 맞았다.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 홍주원(洪柱元)과 황후 진향사(皇后進香使) 심지명(沈之溟) 등이 청국으로 갔다.

 

2월 21일 신축

상평청(常平廳)이 비로소 죽 쑤는 일을 실시하여 경성의 기민을 진휼하였는데, 진휼 대상은 총 1백 63명이었다.

 

2월 22일 임인

상이 침을 맞았다.

 

2월 23일 계묘

영돈녕(領敦寧) 이경석(李景奭)의 차청(箚請)을 인하여, 두 의사(醫司)로 하여금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에 약물을 넉넉히 주어서 환자를 치료하게 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청국 사신이 장차 당도하려 하므로 신하들은 상이 교외에서 맞이하는 것을 가지고 염려를 하였다. 이에 상이 이조 참판 김수항을 청국 사신에게 보내서 ‘상이 편찮고 또 금기에 구애되어 교외에 나가기가 어렵다.’는 뜻을 시험삼아 말해 보도록 명하였으나, 청국 사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충청 감사에게 명하여 판중추 송시열에게 미찬(米饌)을 실어보내어 궁핍을 구제하게 하였는데, 우부승지 이경휘(李慶徽)의 진정을 따른 것이었다.

 

조복양(趙復陽)을 예조 참의로, 이경휘를 이조 참의로, 오정위(吳挺緯)를 병조 참지로 삼았다. 남구만(南九萬)에게는 북학 교수(北學敎授)를 겸직시키고, 남용익(南龍翼)을 좌승지로, 박형(朴洞)을 전남 좌수사(全南左水使)로 삼았다.

 

2월 25일 을사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祔廟)할 때 조천(祧遷)할 일을 판중추부사 송시열과 우참찬 송준길에게 의논하였더니, 시열은 ‘질병으로 정신이 혼미하고 겸하여 사체가 지극히 중한 것이기 때문에 잠깐 동안에 상세하게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병이 조금 나을 때를 기다려서 실봉(實封)으로 알리겠다.’ 하고, 준길은 ‘조묘(祧廟)의 논의는 사체가 매우 중하여 몽매한 신이 쉽게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오늘날의 제도를 고례(古禮) 및 주자(朱子)의 논으로써 비추어보면 실로 의심할 만한 것이 많으니, 더욱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만일 현행 규제대로 하면서 이미 행한 규례를 따른다면 또한 많은 논의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오직 널리 물어서 그 중도를 써야 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판중추의 의계(議啓)를 기다려서 품처하라."
하였다. 시열이 추후에 상소하기를,
"삼가 예관을 보내어 조묘(祧廟)에 대한 물음을 받았습니다. 조묘에 대한 일은 지극히 중하므로 신이 감히 끝내 한 마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사당 제도를 상고하건대, 세수(世數)는 태조(太祖)로부터 4친(親)까지 미쳐 이미 5세(世)가 되니,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의 두 위(位)는 모두 세수 밖에 있습니다. 오늘날 아울러 체천하는 것에 무슨 의심이 있겠습니까. 다만 일설에는, 제왕의 집은 계체(繼體)를 중하게 여기니, 비록 형으로 아우를 잇고 아저씨로 조카를 이었다 하더라도 역시 부자의 의의가 있으므로 각각 소목(昭穆)을 하는 것입니다. 《춘추(春秋)》를 가지고 말한다면, 노(魯)나라 민공(閔公)은 아우이고 희공(僖公)은 형이었는데, 공자는 ‘희공의 위패를 민공의 위패 위에 올려 놓았다.’라고 써서 그 거꾸로 제사지내는 것을 기롱하였습니다. 《좌전(左傳)》에 ‘아들이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를 받아 먹지 못한다.’ 하고, 《공양전(公羊傳)》에 ‘아버지를 먼저 앉히고 할아버지를 뒤에 앉혔다.’ 하고 《곡량전(穀梁傳)》에는 ‘소목(昭穆)이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형제를 부자로 여긴 것입니다.
송(宋)나라의 태묘(太廟)에서는 태조(太祖)·태종(太宗)을 합하여 1세(世)를 만들고, 철종(哲宗)·휘종(徽宗)을 합하여 1세를 만들고, 흠종(欽宗)·고종(高宗)을 합하여 1세를 만드니, 주자(朱子)가 옳지 않다고 하고 형제를 각각 1세로 삼아 한결같이 부자와 같이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 그 의장(議狀)과 도(圖)가 모두 있으니, 상고하여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인종과 명종은 친(親)으로는 비록 형제이지만 의(義)로는 부자인 것입니다. 합하여 1세를 삼은 것은 비록 예전의 일이 있기는 하지만 공자와 주자의 훈계로써 살펴서 알맞게 처리한다면 인조(仁祖)를 부묘(祔廟)할 때 예제상 마땅히 먼 인종을 체천했어야 하고 오늘에 또 명종을 체천하여야 곧 의리의 올바름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지사는 말할 것 없고, 앞으로 영녕전(永寧殿)에 천봉(遷奉)할 때 오히려 그 소목을 분별하여 지나간 일의 온당치 못한 것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인종과 명종 두 성군 때에 못된 신하가 악심(惡心)을 부려서 인종을 연은전(延恩殿)에 받들게 되었으니, 그 일은 선정신 이황(李滉)이 논한 바에 많이 보입니다. 선묘조(宣廟朝)에 이르러 비로소 명종을 올려 부묘하는 기회에 아울러 인종을 태묘(太廟)에 올렸으니, 조금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마음을 위로했으나, 서서히 그 실상을 궁구해보면 인종을 명종에게 내려 합한 것이고, 명종을 인종에게 올려 합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만일 소목을 정리하여 각각 존숭을 누리게 하기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다면, 장차 선조(宣祖)에게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우리 조가(朝家)의 묘제(廟制)는 태조와 사친의 신주가 모두 태묘에 계시고,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 및 뭇 사당의 조천된 신주를 모두 영녕전에 안치하였는데, 태묘는 정묘(正廟)이고 영녕전은 별묘(別廟)인 것입니다. 목조와 같은 지존으로 별묘에 거하시니, 의례(義禮)에 의거해 볼 때 온당한 바가 아닙니다. 주자가 일찍이 ‘세운 별묘는 필시 편위(偏位)에 있고, 그 동우 의제(棟宇儀制)도 반드시 태묘의 훌륭함과 같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바로 명목은 조상을 존숭한다고 하면서 실은 비하한 것이다. 또 협제(袷祭)할 때 여러 사당의 신주를 태묘에 협제하고 네 사당의 신주를 별묘에 협제한 것도 협식(袷食)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이런 경우를 이른 것이니, 이는 바로 주자가 송나라 묘제의 잘못을 논한 것입니다. 대개 태조가 창업한 뒤에 곧 사당을 세워 희조(僖祖)·익조(翼祖)·순조(順祖)·선조(宣祖) 네 분을 받들었는데, 그 후 세대가 멀어지자 희조를 아울러 옮기니, 뭇 사람의 의논이 ‘태조에게 비록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희조의 손자인데 자신은 정전(正殿)에 거하고 별전(別殿)에 희조를 거처시키니, 온당치 못하다.’ 하여 도로 희조를 태묘에 받들었습니다. 그 뒤에 의논하는 자들이 또 희조를 별전에 옮기려 하니, 주자는 그 잘못을 심하게 말하였는데 그 논변한 바가 거의 수천 마디의 말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 태묘를 주자의 설을 가지고 증명한다면, 목조는 바로 송나라의 희조이고, 태조·태종은 송나라의 태조·태종인 것입니다. 목조로서 영녕전에 거하는 것은 이른바 별전으로 그 조고(祖考)를 거처시키는 것이고, 태조로서 정묘에 거처하는 것은 이른바 자손이 정전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목조가 태묘에서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태조가 태묘의 제1실(室)에 거처하는 것은, 이른바 희조에게는 공업(功業)이 없고 천하를 얻음이 자기가 한 것이라 하여 강약(强弱)을 다투어 계교하며 그 손피(遜避)를 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태조가 존봉하던 마음을 헤아리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두 사당이 지척에 있어 위령(威靈)이 매우 가까운데, 태조의 향사는 거의 다섯 차례에 이르고, 목조는 시조의 높은 자격으로서 봄가을의 향사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 빈번하고 드문 차이가 이처럼 현격하다면 또한 태조의 효봉(孝奉)하신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듯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선왕(先王)을 천부(遷祔)할 때에 예관(禮官)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더욱 깊이 강구하여, 목조를 태묘 제1실로 옮겨 받들어 시조로 삼고, 태조·태종 이래 세실(世室)의 예제는 한결같이 주(周)나라의 옛 제도와 같이 하며, 또 태묘에 동서협실(東西夾室)을 만들어 익조 이하 조천된 신주를 봉안한다면, 명분이 바르고 이치가 제대로 얻어지며 의리가 밝고 일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려보냈는데, 뒤에 여러 대신들이 난처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이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서로(西路)에서 돌아와서 상소하기를,
"삼가 간신(諫臣)의 상소 중에 ‘품계가 2품에 이르러 양전을 다 통한다.[秩至二品咸通兩銓]’는 말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비록 거명은 하지 않았지만 그 뜻을 볼 수가 있으니, 신의 관직을 깎아 공론에 답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대개 헌납 김우형(金宇亨)의 상소 끝에 이런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이 답하기를,
"그같은 괴이한 말이 경에게 조금도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 어찌 족히 괘념하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26일 병오

우참찬 송준길이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준길이 맨 처음 진달하기를,
"기근 중에 전염병이 크게 성하니, 근시(近侍)를 보내서 특별히 여제(厲祭)를 베풀고, 혹은 향촉(香燭)을 내려보내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경건히 제사를 지내게 하며 또 의관으로 하여금 약을 싸가지고 내려가서 병자를 구활(救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남(三南)과 북관(北關)에 아울러 모두 제사를 베풀되, 근시가 왕래하면 폐단이 있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의관 중에서 의술에 밝은 자를 택하여 약을 싸서 내려 보내라."
하였다. 준길은 또 급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살피도록 청하고, 또 아뢰기를,
"상께서 정치에 마음을 쓰심이 점점 전보다 못합니다. 스스로 반성하여 모름지기 기질의 어떠한 곳에 병이 드는가를 살펴서 바로잡아 다스리는 일에 힘써야 그 요령을 얻을 것입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전하께서 인자하고 후덕함은 넉넉하시나 밝게 익히고 정성을 기울이는 일은 선조(先朝)만 못하신 듯합니다. 진실로 능히 성찰하여 더욱 힘쓰지 않으신다면 모든 일이 반드시 해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옥후(玉候)가 편찮으시어 경연(經筵)을 정지하였지만 만일 평소 옷차림으로 유신(儒臣)을 인접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經)과 사(史)를 섞어 뽑아서 펼쳐 읽게 하신다면 마음이 넓게 확 트여 병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니, 마음을 수양하고 병을 요양하는 것은 한 줄기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마음에 분노한 바가 있으면 마음이 바름을 얻지 못하여 말하는 사이에 해가 있을 것입니다. 이숙(李䎘)의 일은 비록 잘못된 바가 없지는 않으나, 그 사람됨이 후일에 크게 쓰일 만합니다. ‘사류에서 이름을 얻었다[得名士類]’는 전교는 극히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그와 같으니, 그 네 글자는 고쳐 부표(付標)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2월 27일 정미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도승지 정지화(鄭知和)가 홍제원(弘濟院)에서 돌아와 청대(請對)하고, 대사헌 이일상(李一相)과 대사간 이경억(李慶億)도 입시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칙사에게 어첩(御帖)을 올리고 이어 그들의 기색을 살폈더니, 매우 못마땅해 하였고, 끝내 교영(郊迎)을 정지할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좌상과 우상이 신에게 서신을 보내와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청하려고 하였는데, 신은 혹 뜻밖에 화단을 야기시킬까 두려워서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는 어린 임금이 새로 섰기 때문에 우리의 태도를 살피게 한 것이 자못 전과 다르니, 그들의 뜻을 거스르며 굳이 청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밤새도록 간청한다면 혹 들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성의 지극함은 금석(金石)도 뚫을 수 있는 것이니, 저들이 비록 못마땅해 한다 하더라도 어찌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정신(廷臣)의 정성에 부족한 바가 있어서 그럴 뿐입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이 일에 대해 끝내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였으니 성의가 부족한 죄를 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국사에 대단히 난처한 일이 있으니 또한 감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간장(諫長)이 범연히 말한 정신은 대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하고, 이내 나가서 맞이할 것을 결심하였다.

 

2월 28일 무신

청국 사신이 경성에 들어왔다.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를 맞이하고, 숭정전(崇政殿)에 돌아와서 선칙례(宣勅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청국 사신을 정전(正殿)에서 접견하고 다례(茶禮)를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청국 사신은 사양하고 다례를 받지 않았다.

 

2월 29일 기유

호조 판서 허적(許積)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도 입시하였다. 이때 대통관(大通官) 김거곤(金巨昆) 등이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을 수용한 일에 대해 언급하여 장차 사문(査問)할 것처럼 하였다. 인견은 대개 이 일의 응답을 위해서였는데, 통관배들이 다시 제기하지 않았으므로 일이 그대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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