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5권, 현종 2년 1661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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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경진

예조가 한재(旱災) 때문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자고 청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충주(忠州)에 사는 이탁(李琢) 등 80여 인이 궁가(宮家)의 도장(道掌) 【차인(差人)의 호칭.】 김원(金元)의 작폐를 가지고 헌부에 소장을 올렸으므로 헌부가 진계하여 해도(該道)로 하여금 조사 보고케 하고, 또 해조로 하여금 수치(囚治)하게 하였습니다. 본도의 사계(査啓)와 해조의 추핵(推覈)이 올린 소장의 말과 조금도 틀린 점이 없는데, 김원은 오히려 자복하지 않고 억울한 일이라고 거짓 일컫기 때문에 해조가 이탁 등 13인을 경옥(京獄)으로 잡아들여서 그와 더불어 대질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온갖 죄범이 모두 허위가 아니었고, 그도 또한 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유(赦宥)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해조가 범연히 몽유(蒙宥)의 서열에 적어 넣었습니다. 그러니 해당 당상과 낭청은 추고하고 김원은 다시 수금하여 엄중히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심지원이 한재로써 면직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 모두 나의 부덕의 소치이지, 어찌 대신의 탓이겠는가."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농사가 매년 풍년이 들지 않았고, 서흥(瑞興)·봉산(鳳山)의 사이에는 황충이 보리를 갉아먹으니, 더욱 염려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농사가 매년 이와 같으니, 국가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하였다. 지원이, 북경의 자문(咨文) 가운데 여러 죄인의 의율(擬律)에 관한 일을 가지고 진달하기를,
"무거운 형률을 따르면 죽는 자가 매우 많고, 가벼운 형률을 따르면 저들이 성을 낼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월강(越江)한 사람은 사형으로 논죄하고, 그 나머지는 그 다음의 형률을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에는 괴수와 추종자가 있는 법이다. 괴수가 이미 죽었는데 추종자를 또 사형으로 논청하는 것은 과중할 것 같다. 자문에서 만일 말을 잘 구사한다면 꼭 죽을 자 이외에는 나머지 사람들이 거의 살아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성이성(成以性)과 한휴(韓休)에게 모두 혁직 정배(革職定配)를 적용하였는데, 이성의 죄는 한휴에 비하면 조금 가벼우니, 정배는 너무 과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문 중에 모두 나수(拿囚)로써 말하였으니, 다같게 벌을 적용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지원이 다시, 한휴는 혁직 정배로 논죄하고, 이성은 혁직 도배(革職徒配)로 논죄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첨사(僉使) 최수간(崔守簡)·임시헌(林時憲)과 권관(權管) 김재형(金再亨)도 도배시키거나 혁직하도록 명하였다. 지원이 또 문신 당상(文臣堂上) 한 사람을 별도로 사신으로 차정하여 회주(回奏)라 칭하고 등극사(登極使)와 더불어 일행이 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뒤에 허적(許積) 등이 그것의 불가함을 진계하자, 별사(別使)를 그만두고 진주자문(陳奏咨文)을 등극 사행(登極使行) 편에 부치도록 명하였다. 강화 유수 유심(柳淰)이 아뢰기를,
"갑곶진(甲串津)의 형세에는 진(鎭)을 설치할 만한 곳이 없고, 제물진(濟物鎭)은 당초 불편한 땅에다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도임한 뒤에 두루 돌아보았더니, 나룻가에 한 자그마한 산이 있는데 산기슭이 빙 둘러 안으로 향해졌으므로 진을 설치하기에 매우 합당하였습니다. 이곳으로 제물진을 옮겨 설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지원이 아뢰기를,
"위에서 별로 실덕한 것이 없는데도 한재가 이와 같으니, 수성(修省)하는 가운데 더욱 삼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선조(先朝)에서는 비를 빌면 비가 오지 않을 때가 없었으니, 그는 필시 일심으로 상제를 대하는 정성이 하늘을 감격시킴이 있었기 때문이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재앙을 소멸할 방책은 본디 수성(修省)에 있으면서 또한 인재를 배양하는 데에도 달려 있습니다. 지금 문재(文才)들이 진실로 옛날과 같지 않고, 무재(武才)에는 더욱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개 사족(士族)은 비록 글을 못하더라도 대부분 음관(蔭官)이 되어 무(武)를 전공하는 자가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곤수(閫帥)에 적당한 사람이 없음을 항상 근심하게 되는데, 친병(親兵)을 맡도록 하여 재열(宰列)에 뽑아 둔 자로 말하면 다만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 두 사람일 뿐입니다. 이 두 사람이 만약 모두 노쇠해진다면 지금 그들을 계승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과거를 설시할 때에 사서(四書) 중에서 한 책을 자원하고 병서(兵書) 중에서 한 책을 제비뽑는 것으로 임시에 가서 품정(稟定)한다면 사족의 자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신(文臣)에게 매월 초하루 사술(射術)을 시험할 때에 나아와 참여하는 자가 겨우 몇 사람에 불과할 뿐더러 두어 순(巡)만을 쏘고서 15순으로 적고 있으니, 이것 또한 임금을 속이는 일이다. 기강이 이렇게까지 무너졌으니, 참으로 탄식할 노릇이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국가의 이목이 대간에게 달려 있는데, 대간이 입을 다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이정영(李正英)이 국휼(國恤)을 당하고 천재(天災)를 만났을 때에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가면서 술에 취하여 사람을 때렸으므로, 그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대간은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세도(世道)를 위하여 깊이 한심스러운 바입니다."
하였고, 우부승지 이익한(李翊漢)이 아뢰기를,
"판중추부사 송시열의 조천소(祧遷疏)에 대하여 지금까지 비답이 안 계십니다. 비답 내리는 것을 기다려서 당연히 거행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영상의 출사를 기다려 의논해서 정할 것이다."
하였다.

 

4월 2일 신사

정언 이동명(李東溟)·정박(鄭樸), 헌납 박증휘(朴增輝), 장령 민여로(閔汝老), 지평 이관징(李觀徵) 등이 대신에게 지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서로 이어서 인피하였다. 응교 심세정(沈世鼎)이 다음날 집의에 옮겨 제수된 다음, 양사(兩司)를 처치하여 아울러 체차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이정영(李正英)을 논죄하여 무겁게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집의 곽지흠(郭之欽) 등이 정태제·이정영의 일을 논계하지 않은 이유로 대신에게 지척을 받고 인피하였다가 체차를 당하였다. 그뒤 대간이 태제만 논죄하고 끝내 정영은 탄핵하지 않았더니, 대신이 또 연중에서 말했기 때문에 양사가 모두 인피하였다가 체차된 것이다.

 

4월 3일 임오

호조 판서 허적(許積), 부제학 유계(兪棨)가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어사는 당연히 세밑에 발송해야 했는데, 지금은 이미 늦었습니다. 만일 진휼(賑恤)로 이름을 한다면 각읍의 축적이 이미 고갈되었는데, 빈 손만 가진 어사가 어떻게 진구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의도는 어사로 하여금 몰래 다니면서 수령이 진정(賑政)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살피게 하려는 것이고, 우참찬의 생각도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지금 출발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듣건대, 제로(諸路)에 충재(虫災)가 또 발생했다고 하니, 또한 매우 염려됩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호남 에는 비가 꽤 흡족하게 내렸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가. 다행하기 그지없다."
하였다. 허적이 어공재감 계본(御供裁減啓本)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하루의 어공(御供)은 도라지가 13냥, 장(醬)이 1승 5홉인데, 오히려 계본 중에서 가장 많은 것입니다. 어공이 이처럼 얼마 안 되어 약소한데, 어떻게 또 재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흉년이 이와 같아 백성이 장차 구렁을 메울 지경인데, 나 혼자 맛있는 음식을 먹은들 어찌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반록(頒祿)할 때에 전미(田米)를 끼워서 지급하기를 또 청하고,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녹을 받지 않은 일을 또 진계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정세규(鄭世規)·민응형(閔應亨)도 늙어 관직생활을 못하는데, 녹을 먹는 것이 미안하다 하여 받지 않는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녹을 받지 않으면 달리 대우하는 방법이 없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치사(致仕)를 하면 봉조청(奉朝請)이라는 규정이 있었는데, 봉조청의 경우에는 일정한 녹이 있었습니다."
하고, 유계는 아뢰기를,
"지금의 사대부에게 청렴한 절조가 땅을 쓴듯이 없어졌으니, 늙은 신하가 늙음을 이유로 사직을 청할 때면 봉조청으로 허락하고 녹을 주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심세정(沈世鼎)을 집의로 삼았다.

 

4월 4일 계미

윤겸(尹㻩)을 헌납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지평으로, 윤변(尹抃)·남천택(南天澤)을 정언으로, 이광재(李光載)·이휘진(李彙晉)을 장령으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13차 정사(呈辭)하니,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승정원에 머물러 있는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고, 이조 판서 정치화(鄭致和)도 입시하도록 하였다. 상이 치화에게 이르기를,
"경이 갔다 온 서로(西路)에는 농사가 어떠하던가. 경의 치계(馳啓)를 보니, 칙사가 비로 인하여 출발하지 못했다 하니, 그 곳은 비의 혜택이 있었던 것 같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24일에 폭우가 비록 내리기는 하였습니다마는 오히려 흡족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해서(海西)는 가뭄이 더욱 심하고 겸하여 충재(虫災)까지 있습니다. 그 벌레는 빛깔이 검고 크기는 누에와 같은데 전토(田土)에 가득히 있으니, 농사가 매우 염려됩니다."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앞으로 나가서 전적(典籍) 강세정(姜世楨)의 상소를 읽었다. 상소는 모두 여섯 조목이었는데, 북로(北路)의 고질적인 폐단을 많이 말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여 할 말을 다한 그대의 성의가 매우 가상하다. 진술한 일은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겠다."
하고, 이어서 이르기를,
"세정은 궁벽진 먼 곳에 있는 사람으로서 소사(疏辭)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였다.

 

4월 5일 갑신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청대하며, 입시하고서 해마다 흉년이 들고 한재가 또 혹심하여 백성들이 장차 다 없어지게 될 듯한 상황을 진계하고, 제도의 감사로 하여금 백성의 고통을 물어서 사실대로 계문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일렀다.
"팔도 감사에게 별도로 하유하고, 또 형조로 하여금 죄수를 소결(疏決)하게 하라."

 

4월 6일 을유

행 대사간 정지화(鄭知和)가 병으로 소명에 달려가지 못했다 하여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정원이 한재(旱災)를 인하여 진계(陳戒)하여 수성(修省)의 실제를 더욱 다하기를 청하고,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하던 규례를 따라 대신 이하 2품 이상 양사(兩司)의 많은 관원을 불러 보고 각각 소견을 진계하게 하며, 또 탑전에서 원옥(冤獄)을 심리하도록 하니, 상이 답하였다.
"근심 걱정이 극심하던 차에 이 계사(啓辭)를 보니, 깨닫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진술한 일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영의정 정태화가 승지의 돈유가 있은 후에 다시 상소하여 간곡히 사직하니, 답하였다.
"매년 흉년이 들어 백성의 생명이 끊어져간다. 올 봄의 가뭄은 전년에 비해 더욱 심하다. 백성은 어디에 의뢰하고 나라는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깊이 생각하면 마음을 깎아내는 듯하여 차라리 죽어 아무것도 몰랐으면 싶다. 경의 심정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오늘날 같은 때는 경을 제쳐놓고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찌 ‘힘써 부응하겠다.[勉副]’는 두 글자를 아끼고 이렇게까지 강요하겠는가. 경은 나의 민망하고 급박한 마음을 몸받아, 더욱 조섭을 잘하면서 집안에 누워서 도(道)를 논하다가 병세가 조금 쾌차하는 때를 기다려서 조정에 드나들며 일을 의논하라."

 

영중추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청대 입시하여 아뢰기를,
"종전의 심리는 자못 착실하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경미한 죄수만 석방하는 것이 어찌 재앙을 소멸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전가 사변(全家徙邊)된 자 중에도 원한을 품은 사람이 없지 않으니, 화기(和氣)를 손상시킬 만합니다. 비록 중죄수라 할지라도 강상(綱常)에 관계된 자가 아니거든 아울러 모두 석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재앙을 소멸하는 방법은 본디 수성(修省)에 있으나 또한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는 데도 있습니다. 내노비(內奴婢)의 부지하기 어려운 상태는 이미 극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매양 공물을 바칠 때마다 아전배들이 침탈하기를 한없이 하므로 인정(人情)으로 소비된 것이 원공(元貢)보다 배나 됩니다. 그래서 모두 전토를 팔고 유산(流散)한 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먼저 각도에 사문(査問)한 연후에 내사(內司)를 엄중히 경계하여 이전의 습관을 답습하지 못하게 하시고, 여러 궁가의 도장(道掌)도 선조(先朝)의 정령(定令)에 의하여 영원히 차견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該曹)와 내사(內司)에 분부하여 인정 조로 징수한 수를 일일이 조사해 아뢰어 처치할 근거를 삼게 하라."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근자에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는 설이 나도는데, 비록 사실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많이들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어떤 한 행인이 길가의 집에 쉬러 들어갔더니, 그 집 주인이 삶은 고기를 내왔는데, 그 맛이 쇠고기도, 말고기도, 개고기도, 돼지고기도 아니어서 마음속으로 매우 괴상하게 여겼습니다. 나와서 집 뒤를 보니, 사람의 머리와 다리가 있었으므로 그 사람은 비로소 그 고기가 사람고기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 달아났다 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많이들 전하고 있으니, 진실인 것 같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영상 이 오래도록 출사하지 않고 있으니, 위에서 도탑게 권하시어 출사케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비록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으셨으나 수시로 신료들을 접견하고 재앙을 멈추게 할 대책을 자문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또 송준길이 올라왔으나 오래도록 접견하지 않으시니, 현인을 예우하는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서는 안 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이미 늦었다. 내일 인견하려고 하니, 승지가 이 뜻을 미리 통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성이 또 아뢰기를,
"이처럼 재이가 매우 처참한 때에 송시열을 전야에 물러가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역시 성대한 예로써 초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경의 말대로 할 것이다."
하였다.

 

4월 7일 병술

상이 우참찬 송준길을 인견하고 명하여 호조 판서 허적(許積)을 불렀으며, 부제학 유계(兪棨)도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나의 병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하여 매우 답답하였다."
하였다. 준길이 상후(上候)를 묻고, 이어서 아뢰기를,
"재이는 국가가 위태할 때에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 경건함과 나태함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신은 모르겠거니와, 전하께서는 깊숙한 궁중에서 수성(修省)을 어떻게 하시길래 가뭄이 이 지경에 이르러 백성의 생명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심상한 재이로 보아넘겨서는 안 됩니다. 수성의 방법은 요컨대 ‘성(誠)’ 한 글자에 벗어나지 않는데, 전하께서 오늘날 신료를 인접함은 성심으로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형식으로 하시는 것입니까. 만일 성심으로 하신다면 신들이 계달하는 바는 빈말이 되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록 직언과 지론을 날마다 앞에 진계한다 하더라도 역시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결단력이 부족하여 사의(私意)가 제거되지 못하며, 신료를 인접할 때가 드물어 사무가 지체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성덕(聖德)이 미진한 곳입니다."
하고, 준길은 아뢰기를,
"동진(東晋) 때 크게 가물어 흉년이 들었는데, 역사책에서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초기라서 일에 이완(弛緩)한 바가 많았다. 그런 때문에 이상기온이 재이가 되었다.’고 적었으니, 신이 전일에 올린 차자의 대의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입계하는 공사(公事)가 걸핏하면 열흘이나 한 달을 넘겨 결재하시지 못한 것이 많다 합니다. 신은 모르겠거니와, 옥후(玉候)가 편찮아 정신이 혼미하셔서 그러는 것입니까, 안질이 심하여 글 보기를 꺼리셔서 그러는 것입니까, 모든 일을 신중히 하시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하들의 아뢰는 일이 성상의 마음에 들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신은 알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질이 심하여 살필 수가 없다. 문서가 많으면 생각 또한 두루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지체함을 면하지 못하는데, 정신이 맑을 때에는 또한 많이 재결하게 된다."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사의(私意)가 제거되지 못했다.’는 것은 신하들이 모두 하는 말이니, 전하께서는 어찌 하여 이런 말을 신하에게서 들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사의를 따른다.’는 것을 나는 자각하지 못하겠다. 경들이 만일 무슨 일이 사의를 따른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해준다면 나는 마땅히 단호하게 고칠 것이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정목(政目)에서 낙점받은 사람 가운데 혹 몰래 의논드린 자가 있는 듯한데, 일이 궁가에 관계되었으니 역시 사심이 지나친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척속(戚屬) 중에 낙점을 받는 일이 자주 있으므로 우참찬도 역시 그에 대해 말을 하나 그는 우연하게 된 일이지, 의도가 있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이탁(李琢) 등을 사문(査問)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사를 진달하였으나, 오래도록 처분하는 일이 없었고, 이숙(李䎘)을 서둘러서 환임(還任)시킬 일에 대해서도 역시 진달한 적이 있었으나, 지휘하신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바깥 사람들의 의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나라가 이처럼 빈궁한데, 궁가의 면세전(免稅田)이 너무 넘치니, 의당 부세를 내는 자만이 치우치게 괴롭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이런 폐단을 혁파한 연후에야 나라가 나라답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내사(內司)의 전토를 궁가에 떼어준 뒤로 그 자손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면세를 하고 있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변동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궁가, 어떤 아문의 면세전인지 자세히 조사해서 아뢰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옹막(瓮幕) 앞강의 흙 운반하는 배가 정박되는 곳도 역시 궁가의 수세지(收稅地)가 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곧 사핵(査覈)하여 금단하라."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사치풍은 이미 고질적인 습속을 이루고 있어서 앞으로 개혁될 기미가 없으니, 위에서 반드시 충분히 삼가서 몸소 절검(節儉)을 행한 연후에야 백성들이 보고 감동할 소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임금은 백성의 표준이 되니, 위에 만일 미진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유행하여 발현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높은 상투 넓은 소매[高髻大袖]의 노래013)  가 장차 오늘날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으니, 백성은 무지하여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서는 굶어 죽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만일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이후로는 자주 들어와서 미흡한 것을 보완하라."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이때에 송시열(宋時烈)이 만일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익된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속히 초치하여 곁에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로 하여금 글을 지어 하유케 하라."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이유태(李惟泰)와 윤선거(尹宣擧)도 그와 같이 징소(徵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또 암행 어사인 지평 홍주삼(洪柱三), 이조 정랑 이익(李翊), 좌랑 김만기(金萬基), 부사과 여성제(呂聖齊)를 인견하고, 수령의 진정(賑政)에 대한 근태를 염탐하도록 면유(面諭)하였다. 교리 이민적(李敏迪), 부교리 김수흥(金壽興)은 자녀의 전염병으로 인하여 입시하지 못하였다.

 

4월 8일 정해

동틀 무렵에 서리가 내리니, 상이 하교하여 자신을 꾸짖고, 감선(減膳)·금주(禁酒)하도록 하였으며, 또 정원으로 하여금 대신 글을 지어 직언을 구하게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왕의 말씀으로 직접 팔도에 반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겸양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4월 9일 무자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마치 먼지가 내리는 것처럼 사방이 어둑하였다.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을 영돈녕부사로 삼았다. 우명은 국구(國舅)가 되었으나 상중에 있었으므로 직위를 부여하지 못했다가 이때에 와서 규례에 의하여 제수하게 된 것이다. 이경석(李景奭)을 영중추부사로, 정유성(鄭維城)을 판중추부사로, 조경(趙絅)을 지중추부사로, 조복양(趙復陽)을 대사간으로, 원만석(元萬石)·박세모(朴世模)를 승지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하였다.

 

대사간 조복양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심리(審理)를 행하리라는 성명(成命)이 이미 계셨는데, 삼가 듣건대, 며칠이 지나도록 오히려 거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니, 신은 삼가 슬퍼집니다. 지난 기묘년014)   5월에 한재(旱災)로 인하여 심리하였는데, 인조 대왕이 대신(大臣)과 형관(刑官)으로 하여금 탑전에서 의언(議讞)하게 하셨습니다. 승지가 ‘해가 이미 저물었으니 내일 하자.’고 청하고 대신도 또한 ‘밖에 나가서 의논해 아뢰겠다.’고 청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으시고, 촛불을 밝혀 심리하여서 억울함을 풀어준 바가 많았으며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는데, 그 이튿날 큰 비가 내렸습니다. 성조(聖祖)의 지성으로 하늘을 감동시킴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으니, 어찌 전하께서 오늘날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후하게 비답하였다.

 

4월 10일 기축

상이 친히 원옥(冤獄)을 심리하려고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비로소 나오고, 우참찬 송준길도 입시하였다. 판의금 허적이 나아가 죄인 문안을 읽었다. 윤선도(尹善道)의 일에 이르자, 준길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죄를 입은 것은 실로 신들 때문이니, 신의 마음이 항시 불안합니다. 올라온 뒤에 한 번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황공하여 감히 진달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죄안(罪案)을 들으니, 더욱 송구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의 죄는 매우 무거우나 말감(末減)하여 벌을 베풀었는데, 경에게 무슨 불안할 일이 있는가."
하였다. 모든 대신이 다 아뢰기를,
"선도의 죄는 범죄 관계가 극히 무거우므로 용서할 수 없으나 준길의 말이 매우 좋습니다. 실로 중심에서 나온 말이니, 은밀히 소청을 들어주어서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것도 역시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고,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은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선도의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이제 감히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조복양은 아뢰기를,
"선도는 단지 유신(儒臣)만 공척(攻斥)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말이 선왕(先王)에 관계되어 죄범이 매우 무거우므로 결코 용이하게 관전(寬典)으로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兪棨)는 아뢰기를,
"성상께서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 흉악한 사람을 은밀히 용서하시어, 만일 변방에서 끝내 죽지 않게 하시려 한다면 다른 때에 혹시 의논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만일 심리하는 날에 감등한다면 소인들은 반드시 기가 더 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제학 의 말이 옳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옛날 선묘(宣廟)께서 삼찬(三竄)의 죄를 무겁게 주려고 하니, 선정신 이이(李珥)는 곧 석방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은 비록 감히 옛사람에 비교할 수는 없으나 고사가 이와 같은데, 신의 역량이 부족하므로 일찍이 우러러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찬은 누구인가?"
하니, 도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선묘조의 허봉(許篈)·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 등인데, 이이를 모함하되 그 사악함을 극도로 부리므로 선묘께서 진노하여 손수 교서를 지어 이 세 사람을 귀양보내고 석방하자는 이이의 청을 끝내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선도의 죄를 삼찬에 비하면 더욱 무거우니, 결코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에게 이르기를,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선도의 죄는 가볍게 논할 수 없으나 송준길의 진달한 말이 실로 본심에서 나왔으니, 위에서 참작하여 처리하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의 상소로 보면 그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데도 차마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사형을 감하여 안치(安置)시켰으니, 이제 다시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차마 못하는 마음을 가지시는 것은 그가 다른 신하와 다르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의 죽음을 용서하였으니, 삼수(三水)는 바로 반드시 죽을 땅이며 또 그의 나이가 80세에 임박하였는데, 어찌 그를 여기에서 죽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참찬이 이처럼 진달하니,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심리하는 무리에 섞어서 실시해서는 안 되겠으니, 다른 고을로 옮겨 안치하고, 우참찬이 아뢴 말을 적어 내보내어 중외에 이 뜻을 알리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날 죄수 및 도류(徒流)·안치(安置)된 자로서 혹은 감등되고 혹은 석방된 사람이 모두 2백여 명이나 되었다.

 

조형(趙珩)을 공조 판서로, 김좌명(金佐明)을 참판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참의로, 이홍연(李弘淵)을 예조 참의로, 홍처윤(洪處尹)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4월 11일 경인

오시에서 유시까지 마치 먼지가 내리듯 사방이 어둑하였다.

 

내의원(內醫院)이 아뢰기를,
"날마다 봉해 올리는 한 병의 술은 바로 약용이건만, 전년 감선(減膳)할 때 이미 3분의 1을 감했으니 이제 비록 금주하라는 분부가 계셨지만 다시 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3일마다 또 한 병씩을 감하라."
하였다.

 

4월 12일 신묘

종일 사방이 어둑하여 마치 먼지가 내리듯 하였다.

 

상이 또 심리를 행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을미년 추쇄(推刷)할 때 공천(公賤)으로서 등과(登科)하였다가 도로 공천이 된 자에 대하여는 대노허속령(代奴許贖令)이 있었는데, 부유한 자는 정해진 기한에 속량(贖良)할 수 있으나 빈한한 자는 기한 내에 속량할 수 없으니, 이들이 억울하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년을 기한으로 속량을 허락함이 좋겠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추쇄할 때 노비의 송변(訟辨)으로 죄에 걸린 자가 매우 많은데, 그 중에는 혹시 억울하게 걸린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매양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송사로 인하여 죄에 걸린 자는 반드시 모두들 이치상 진 것은 아니니, 외방에 억울하다는 설이 많이 있으면 기한이 지났다 핑계하여 다시 소송을 심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우참찬 송준길은 아뢰기를,
"향촌의 여론이 과연 이와 같으니, 이 대사면의 날을 당하여 더욱 신중히 생각하여 신원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저께 심리에서, 추쇄할 때 전 가속이 연루된 범죄자로서 감등되지 못한 경우를 다시 조사해서 아뢰도록 했다."
하였다. 대사간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도년(徒年) 이하는 모두가 가벼운 죄이니, 이 대사면의 시기에 당하여 일체 탕척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년 이하는 아울러 용서하고, 형조에 현재 수감된 자로 형장(刑杖)을 집행한 뒤에 놓아보낼 자에게는 아울러 형장을 면제하도록 하고, 법을 심의 적용할 자에게는 아울러 탕척을 허락하고, 유 삼천리(流三千里)·전가 사변(全家徙邊)·불한년(不限年)의 경우에도 역시 형장을 제하고 배소(配所)로 보내라."
하였는데, 이날 도배 이하의 용서받은 자는 1백 50인이었다. 지원이 아뢰기를,
"이처럼 심리하는 날에 대사면의 혜택이 유독 죽은 사람에게만 미치지 않으니, 참으로 흠이 되는 일입니다. 고(故) 판서 심집(沈諿)의 일은 당초에도 역시 더러 억울하다 하였는데, 하물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추후로 죄를 준단 말입니까. 지금 신원되지 못하면 다시 신원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태화와 허적도 모두 추후로 죄주는 그 일이 잘못된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준길이 아뢰기를,
"고 상신 김상헌(金尙憲)은 지론이 가장 준엄하였으나 역시 매국(賣國)으로 논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복작(復爵)함직하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전 정평 부사(定平府使) 이흥록(李興祿)은 상평청(常平廳)의 곡물을 방납(防納)하는 사람에게 내준 일로 이미 정배되었습니다. 열읍(列邑)의 방납 폐단은 감사가 마땅히 엄금해야 할 일인데, 감사가 도리어 수령에게 분부하여 이처럼 놀랄 일을 발생시켰는데, 어찌 혼자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그 당시의 감사 권우(權堣)를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만을 명하였으나 네 번이나 아뢰자 따랐다.

 

판중추 조경(趙絅)이 상소하기를,
"근자에 중국 사신이 와서 백마성(白馬城)의 일015)  을 제기하여 서용(敍用) 여부를 힐문하였다 합니다. 대개 저들의 화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음을 보인 것인데, 만일 아무 신하가 지금 1품의 실직(實職)을 띠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저들의 가책(訶責)은 필시 전보다 배나 될 것이니, 저들의 화를 막을 때는 반드시 헤아리지 못할 재물을 허비할 것입니다. 국가가 어찌 괴롭게 쓸데없는 한 늙은 신하를 위하여 그릇 저들의 화를 돋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의 직을 깎아주기를 빌었는데, 병조에 계하(啓下)하니, 병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저들이 말한 것은 본래 깊은 뜻이 없으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늙고 병든 신하가 시골에 물러가 있어 올라올 기약이 없으니, 중추부의 직임은 청원에 의하여 개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신(大臣)과 근신(近臣)을 나누어 보내서 종사(宗社)와 산천(山川)에 비를 빌었다. 상이 처음에는 몸소 빌려고 하였으나, 상중에 있는 몸이라 변복하기가 어려우므로 대신과 유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모두
"안질이 낫지 않았으니, 먼저 대신을 보내서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상이 따랐다.

 

4월 13일 임진

종일 사방이 어둑하였다. 해가 뜰 때에는 그 빛이 자색이었고, 밤에는 달빛이 적색이었다.

 

오두인(吳斗寅)을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또 심리(審理)를 행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각도의 추안(推案)을 읽었는데 길주(吉州) 죄인 원세흠(元世欽)의 일에 이르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세흠에게는 일찍이 엄형(嚴刑)을 가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전혀 형장의 흔적이 없다 하니, 일이 매우 해괴합니다."
하니, 상이 이내 소문의 출처를 묻고 이르기를,
"나랏일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나라꼴이 되겠는가. 형장을 맞았는지의 여부는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알 길이 없으니, 어떤 사람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한 근간(勤幹)한 선전관으로 하여금 봉수(烽燧)를 적간(摘奸)한다 핑계하고 급히 가서 살펴보게 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부제학 유계(兪棨),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사람을 보내 적간하는 것은 세세한 일입니다. 어찌 세흠 한 사람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허실을 알고자 한다면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 소문을 듣고 그만둘 수는 없다."
하고, 선전관 한 사람을 보내어 급히 갔다 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조복양(趙復陽)이 이어 함경 감사와 해당 추관(推官)을 아울러 무겁게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 청을 따랐다. 또 길주 죄인 홍이룡(洪以龍)의 추안을 읽으니, 우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이룡이 남의 손을 빌어 글을 지어서 상소한 일은 【이룡은 북로(北路) 사람으로서 상소하여 준길을 공척(攻斥)한 자이다.】  그 소행은 괘씸합니다만 상소로 죄를 얻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인 듯하니, 관대한 은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태화와 지원 등도 아뢰기를,
"그 소행은 비록 괘씸하지만 상소로 죄를 얻으면 혹 먼 외지에서 의심을 하게 될 단서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놓아보내고 원적관(元籍官)으로 하여금 임의로 출입할 수 없도록 금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방의 장소(章疏)에 어찌 한두 가지 쓸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위에서 안질이 쾌차하시지 않아 열람하기가 불편하다면 수시로 승지로 하여금 읽어 올리게 하고 들으십시오. 또 주자(朱子)의 저서 중에 있는 긴요한 문자 같은 것도 또한 옥당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대신에게 미리 의논하였다가 입시할 때에 진달케 하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경계와 가르침을 체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남중이 소송자가 3차 만에 일단 처결이 났으면 더이상 청리(聽理)를 받을 수 없다는 법을 거듭 밝히기를 청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3차 뒤에는 으레 격쟁(擊錚)하여 상언(上言)함으로써 다시 송단(訟端)을 일으킵니다. 비록 결재하신 공사(公事)라도 역시 방계(防啓)해야 하니, 소송자와 청리관(聽理官)은 아울러 잘못이 드러나는 대로 죄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가주서 유하익(兪夏益)이 호남에서 왔는데, 상이 묻기를,
"농사가 어떻던가?"
하니, 하익이 대답하기를,
"전주(全州) 이하는 양맥(兩麥)이 말라 손상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는데, 전주 이상과 호서의 길가에는 초목이 다 말랐으니 보이는 광경이 매우 처참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은 어떻게 살아가던가?"
하니, 하익이 아뢰기를,
"관가에서 죽을 쑤어서 풀어 먹이는데, 곤궁한 마을을 두루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풀뿌리와 소나무 껍질로 연명하며 조석을 지낸다 합니다."
하였다. 이날 도년(徒年) 이하 1백 90여 인을 방면하고 19인을 감등하였다.

 

4월 14일 계사

서리가 내렸다.

 

4월 15일 갑오

사관(史官)을 회덕(懷德)에 보내서 판중추부사 송시열을 불렀다.

 

4월 16일 을미

곽지흠(郭之欽)을 집의로, 심세정(沈世鼎)을 부응교로 삼았다.

 

부교리 이민서(李敏敍)가 상소하였으니,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이 한재(旱災)는 실로 수십 년 이래 없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날마다 공경들과 면대하여 죄수를 의논하되 질병도 돌보지 않고 노고도 꺼리지 않으시니 전하의 뜻이 지극하며,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시어 관대한 은택을 크게 베푸시니 전하의 덕이 광대합니다. 그러나 탕 임금이 상림(桑林)에서 여섯 조목을 자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던 효과를 얻지 못하니, 생각건대 하늘이 대단한 작위(作爲)를 명주(明主)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오늘 또 공경을 인접하는 일이 있다 하는데, 송 인종(宋仁宗)의 천장각 고사(天章閣故事)016)  에 의거하여 각각 필찰(筆札)을 주고 폐단을 구제하고 정치를 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들을 자문하시고, 또 선조조(宣祖朝)의 유신(儒臣) 이이(李珥)의 경제사(經濟司)에 대한 설을 모방하여 명목을 설치하여 마치 오늘날의 선혜청(宣惠廳)이나 상평청(常平廳)의 예와 같이 하여 대신으로 이를 거느리게 하고 오로지 폐단을 혁파할 것만을 일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칭찬으로 답하였다.

 

영남(嶺南)의 금산군(金山郡)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몸뚱이 하나에 발이 다섯이었다.

 

4월 17일 병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가 아뢰기를,
"선조(先朝)의 진강 때에는 모두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이름을 휘(諱)하고 주자(朱子)의 이름도 함께 휘하였는데, 지금도 그를 휘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대로 휘하라."
하고, 상도 휘하고 읽지 않았다. 송준길과 유계 등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설을 가지고 누누이 진달하였다. 또 《중용》의 구경(九經)017)  의 뜻을 해석하니, 상이 경청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그 아우 치화(致和)가 바야흐로 총재(冢宰)가 된 것을 가지고 성만(盛滿)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을 갖추 진달하였다. 이어서 정승의 직위를 사양하면서 아뢰기를,
"형은 수상(首相)이 되고 아우는 전장(銓長)이 된 것은 실로 전고에 없는 일인데 이러고서 앙화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가 그를 맡길 만해서 맡겼는데, 어찌 집안이 너무 번성하게 된다는 것을 가지고 혐의를 삼을 수 있겠는가. 지금 국사가 이와 같은데 경을 빼고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경은 비록 간곡히 사양하더라도 결코 억지로 따를 수가 없다."
하였다. 수찬 김만균(金萬均)이 아뢰기를,
"지금 이 심리(審理)는 비록 대사면의 은전이기는 하지만, 윤선도 같은 자는 단지 유신(儒臣)만을 무함했을 뿐 아니라 말이 선왕을 침범하고 죄가 종사에 관계되었는데, 송준길이 또한 어찌 진정하여 감등시키자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또 홍원(洪原)은 바로 북로(北路)의 가까운 고을인데, 이 고을이 어찌 중죄인을 안치할 곳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태화는 아뢰기를,
"요전에 송준길의 말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신들도 역시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홍원을 가까운 지방이라 한다면 어찌 달리 옮길 만한 고을이 없겠습니까. 만일 갑산(甲山)으로 옮겨 정배한다면 양이(量移)의 뜻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하고, 준길은 아뢰기를,
"신이 그때에 생각한 바가 있어서, 감히 이이(李珥)가 삼찬(三竄)을 석방하기를 청했던 일을 인용하여 증빙한 것이지, 감히 선도(善道)를 위하여 은혜를 베푸는 뜻이 아니었는데, 지금 유신이 진달한 바를 들으니 황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만균은 아뢰기를,
"선도의 죄범은 용서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이 감히 말씀을 드렸는데,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유신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의 본의가 어찌 준길 더러 은혜를 베풀었다고 말한 것이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허적은 아뢰기를,
"만일 홍원을 가깝다고 한다면, 북청(北靑) 등지가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북청으로 옮겨 정배하라."
하였다.

 

고 상신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과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집에 3 년을 한하여 녹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행호군(行護軍) 조경(趙絅)이 노병(老病)을 이유로 옥책(玉冊) 찬하는 일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한재로 인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외롭게 병중에 계시니, 뭇 신하와 백성들이 걱정과 두려움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상천의 마음과 조종의 영혼이 놀라 편치 않으시리니, 역시 상서로움과 화기를 초치할 방도가 아닙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 또한 오늘날 하늘의 뜻에 답하는 하나의 방도라 여깁니다. 의가(醫家)에서 병을 논하는 데는 본시 혈기를 영위하는 것을 주로 하지만 일찍이 한 마음을 보위하는 것을 제일로 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마음을 화평하게 갖고 욕심을 줄여 심지를 깨끗하게 하여서 혈기의 사욕으로 하여금 본원을 흔들지 않게 하고, 자주 신하들을 접하여 정치에 대한 것을 자문함으로써 울적함을 해소하고 지기를 창달시키신다면, 성상의 편찮으심은 반드시 차도가 있을 것이니 또한 어찌 상서로움과 화기를 초치하는 방도에 도움이 없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국가 기강의 해이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모든 직책의 태만함은 쌓여서 고질적인 폐습을 이루었습니다. 만일 크게 진작(振作)하고 경동(警動)하여 아랫사람들을 책려하지 않는다면 형세는 장차 날로 무너져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실로 당면한 큰 걱정거리입니다. 전하께서 마음을 안정하여 모든 정사에 신중을 기하시나, 여러 정무가 지극히 번다하여 지체됨을 면하지 못합니다. 시기에 맞추어 응당 행해야 할 일들이 많이 그 시기를 잃고 있습니다. 관사(官師)는 그로 하여 혹 게으르게 되고, 정령(政令)은 그로 해서 혹 해이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외방이 더욱 심합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강대(剛大)한 뜻을 분발하여 날로 새롭게 하고 시시때때로 경계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세상의 도리가 무너짐은 사사로운 뜻이 폐단이 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저쪽 이쪽 편을 갈라 서로 수군거리며 등돌려 미워하고, 존중하고 협심하는 풍조는 전혀 없어 인심이 점점 패악해집니다. 전하께서는 또한 중용의 도를 세워 상벌과 시비에 있어서 지극히 공평하게 처리하고 사적인 관계는 끊어버려 한 칼로 양단을 내듯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거의 공도가 신장되고 인심이 각성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나라를 축내는 좀은 사치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지금 위로 사대부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치가 제도를 넘어 한없이 만연되고 있습니다. 풍화(風化)가 행해지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위에서 아래로 되어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통렬하게 스스로 성찰하고 엄하게 계칙(戒飭)을 가하여 삼궁(三宮)의 안으로 하여금 풍려(豊麗)한 사치를 도리어 부끄럽게 여기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반드시 바람이 부는 쪽으로 풀이 쏠리듯 교화가 백성에게 미치는 현상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궁가의 둔장(屯庄)의 폐단은 오늘날 백성으로부터 원성을 사는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진실로 나라에 제한된 규제가 없기 때문에 해독을 원근에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제궁을 아끼신다면 속히 조목조목의 제도를 분명하게 세워 그 면세 범위를 제한하고, 각 아문의 둔장도 지부(地部)로 하여금 수세케 하소서. 노전(蘆田)·어전(漁箭)·선척(船隻)의 유는 각 아문과 여러 궁가에 나누어 주되, 대략 등수의 차이를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지부에 소속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선왕께서 산야에 있는 현준(賢俊)을 널리 구하여 우리 전하를 돕게 하셨고, 전하께서 그들을 초치하여 경건하게 예우하신 것도 역시 극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모두 은둔할 생각을 품으니, 진실로 성교(聖敎)에 이른바 ‘당초의 예우하던 성의를 계승하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전일 이유태(李惟泰)의 상소에 참으로 대단한 변통의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진실로 하루아침에 다 행하기는 어려우나 또한 어찌 전혀 쓸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당시 의논한 것이 방치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감히 머물러 있지 못할 것은 이치상 또한 당연합니다. 재앙을 만난 이 시기에 마땅히 야외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선비들을 아울러 불러서 조정에 두고 모든 정책을 자문하시고, 부름에 달려오지 않은 경우에는 실봉(實封)으로 대답하게 하신다면 반드시 쓸 만한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은혜롭게 대답하였다.

 

4월 18일 정유

서리가 내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어둑하였는데, 연 7일째 이와 같았다.

 

헌납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윤선도(尹善道)의 죄는 위로 선왕에 관계되는데도 사형을 감하여 북쪽 지방에 유배시킨 것은 애당초 특별한 은혜에서 나왔는데, 갑자기 좋은 지역으로 옮기니 여론이 놀라고 분해 합니다. 성명을 도로 거두실 것에 대한 청은 당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런 때문에 신이 공회석상에서 발언하였더니 동료들은 모두 찬성을 하였으나, 장관이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혐의가 있어서 이미 정해진 논이 지연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감히 직위에 편안히 있을 수 없으니, 체직하소서."
하였다. 대사간 조복양(趙復陽)은 당초 쟁집(爭執)하지 못했으므로 감히 그대로 수석(首席)에 있을 수 없다 하여 인피(引避)하였고, 정언 윤변(尹抃), 대사헌 김남중(金南重), 장령 이광재(李光載)도 서로 잇달아 인피하였다. 집의 곽지흠(郭之欽)이 처치하여 두인(斗寅)은 출사시키고 양사의 관원은 체차시키기를 청하였다.

 

상이 흥정당에서 주강(晝講)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가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우참찬 송준길이 위 문공(衛文公)의 일을 인용하여 진달하기를,
"문공이 나라를 상실했을 때에는 다시 진작시킬 수 있는 형세가 아니었는데, 권면하고 안보하여 그 나라를 회복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우리 나라가 비록 심히 불안한 상태이지만 위나라 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 근면하고 진작하여 융숭한 정치를 도모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옛날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쇠망한 나라를 일으킨 자 중에서 유독위나라 문공과 월(越)나라 구천(句踐)을 일컫는 것은 문공이 마음을 깊고 충실하게 지니고 구천이 어려운 역경을 견딘 때문이니, 그들의 뜻은 근실하고 견고하였습니다. 느긋하고 해이한 자세로 그 나라를 나라답게 보전한 자는 예로부터 없었습니다."
하였다. 그의 말이 길게 이어졌는데, 상이 경청하였다. 장령 이휘진(李彙晋)이 아뢰기를,
"지금 한재가 매우 처참한 것은 팔도가 마찬가지입니다. 대신과 중신이 서로 이어 기도하였는데도 오히려 영험한 응답이 없으니, 위에서 기력을 참작하여 혹 예를 행하실 수 있다면 한 번 친히 기도함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일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령의 말이 정말 나의 마음과 같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오늘 경연을 연 것은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외간에서는 성후(聖候)가 이처럼 편찮으신 줄은 알지 못하고 ‘능히 경연에는 납시면서 친히 기도하는 일은 행하지 않으신다.’고 할 것이니, 무지한 백성은 필시 전하께서 백성을 걱정하시는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하고, 유계는 아뢰기를,
"위에서 묵묵히 기도하시는 정성은 지극하시겠지만 오히려 친히 제사를 행하여 하늘의 마음을 감격시키기를 바라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질병이 있으나 내 어찌 한 몸을 아껴 만백성의 생명을 돌보지 않겠는가.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친제 절목(親祭節目)을 강정케 하라."
하였다. 【안질 때문에 결국 행하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23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4월 19일 무술

헌릉(獻陵) 안이 산불이 번져서 탔는데 능관(陵官)이 사실을 덮어두고 보고하지 않았다. 경기 감사가 이 사실을 알리자 참봉(叅奉)과 수복(守僕) 등을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주도록 명하고, 즉시 위안제(慰安祭)를 행하였다.

 

4월 20일 기해

조수익(趙壽益)을 대사헌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간으로, 윤비경(尹飛卿)·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권격(權格)을 정언으로, 이일상(李一相)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헌납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윤선도(尹善道)의 죄는 종묘 사직에 관계되니, 법에 있어 사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초에 사형을 감하여 북쪽 지방에 정배한 것은 특별한 은전에서 그렇게 한 것이니, 성상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심이 지극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심리(審理)의 일을 인하여 옮겨 정배하라는 명이 계시니, 공론이 모두 분노하고 원근 사람들이 놀라 마지않습니다. 그 죄범을 논한다면 경중이 저절로 드러나고, 그 시일을 말한다면 1년이 채 못 되었는데, 갑자기 좋은 지역으로 옮기는 것은 이 일이 과연 어떠한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하문하실 때에 입시한 신하들은 한갓 고식지계만을 생각하여 논집하지 못하고 단지 유신의 아름다운 뜻만을 성취시키고자 하였으니, 이는 조정에 의리가 밝지 못하고 시비가 구별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법을 씀이 엄하지 못하고 간특한 자를 징계하지 않음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윤선도를 옮겨 정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선도의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으나 이미 그 죽음을 용서하였으니, 지금 유현(儒賢)의 아름다운 뜻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옮겨 안치하는 것이 사리에 큰 해가 없을 것 같다. 어찌 심리를 인하여 이런 거조를 하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집의 곽지흠(郭之欽)도 이것으로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고(故) 필선 윤전(尹烇), 금부 도사 권순장(權順長), 생원 김익겸(金益兼)을 강도(江都)의 충렬사(忠烈祠)에 종사하였다. 【충렬사는 곧 순절한 신하인 김상용(金尙容)·심현(沈誢)·이시직(李時稷)·송시영(宋時榮) 등을 제사하는 곳이다.】 윤전은 고 참의 윤황(尹煌)의 아우이다. 병자년에 궁관(宮官)으로 빈궁(嬪宮)을 강도에 배종하였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 곧 식음을 전폐하였고 적병이 철수해 돌아갈 때에 꼼짝않고 누워 있다가 해를 입었다. 순장은 고 감사 권진기(權盡己)의 아들이고 익겸은 고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인데, 태학(太學)에서 유학할 때 모두 이름을 떨쳤다. 김상용이 남루(南樓)에서 장차 분신 자살하려고 할 때 이 두 사람이 곁에 있었다. 상용이 물러가 피하도록 지휘하였으나 짐짓 가지 않고 있다가 드디어 함께 죽었다. 뒤에 아울러 지평에 추증되었다. 이때에 와서 부제학 유계(兪棨)가 이 세 사람이 순절한 정상을 갖추 진달하자 이런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윤선도의 일에 있어 마음에 편치 못한 바가 있어서 전번에 입시하여 외람되이 구구한 소리를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또 시끄러운 하나의 일이 생길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양사의 많은 관원이 다 체직되어 떠남을 면치 못하였는데, 그 이유를 따져보면 실로 신에게 죄가 있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나의 사려가 밝지 못하고 처치가 온당치 못한 소치이다. 경에게 무슨 불안해 할 일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1일 경자

행 호군 조경(趙絅)이 노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옥책(玉冊) 제술하는 임무를 다시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전야에 물러가 있으며 적지(赤地)의 한재를 목격하고 이어 자신을 죄책하신 전하의 교서를 얻어 읽었습니다. 말뜻의 애절함이 성탕(成湯)의 육책(六責)보다 지나쳤습니다. 무릇 신하와 서민에 있어서는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누군들 감읍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어찌하여 하늘의 뜻은 막연하여 노여움을 푸는 기색이 없단 말입니까. 음무(陰霧)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는 현상이 날마다 심해가니, 신이 매우 염려함은 구름이 끼어 맺혀 있고 한발이 포학함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기체가 바로 틀림없는 요사스러운 기운 같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장차 나라에 재앙되는 것이 단지 생령(生靈)의 아사(餓死) 정도뿐만이 아닐까 신은 두려워합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몸둘 바를 모르며 재이를 경계하는 방법을 극도로 다하지 않음이 없지마는, 그 중에서 원옥(冤獄)을 심리하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일국의 대소 경중의 죄인들 중에 그 누군들 심리 가운데 거론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윤선도만이 심리 가운데 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도는 반드시 죽어야 할 사람으로서 살아서 정배되었으니, 성은이 진실로 큽니다. 그러나 모르겠거니와, 선도의 죄는 과연 무슨 죄입니까. 오직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가지고 효종을 위해 편든 그 죄일 뿐입니다. 선도는 일찍이 예를 잘 안다는 이름이 드러난 적도 없으면서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큰 예를 망령되이 논하였으니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로 선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는 전하께서 추후에 효도하는 도리를 권면하였으니, 그 촌성(寸誠)의 빛남은 자못 가리울 수 없는 것입니다. 선도가 상소를 올렸을 때에 그 누가 전하를 위하여 상소를 불태우라는 계책을 올렸습니까. 신이 소시적에 《고려사》를 보았더니, 공민왕이 이존오(李存吾)의 상소를 불태웠습니다. 또 광해군은 정온(鄭蘊)의 상소를 불태웠으니, 공민왕과 광해군은 난망(亂亡)의 임금이 아닙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들은 자기들이 별볼일없지는 않다고 자부하면서도 요순의 도로 전하를 인도하지 않고 도리어 난망의 전철로 전하를 인도하여 몸소 수레를 타고 따르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후일에 국사(國史)가 기록하고 야사(野史)가 기록하여 ‘어느 때 윤선도가 예를 논한 상소를 불태웠다.’고 할 것이니, 성덕(聖德)의 누가 됨이 그 어떠하겠습니까. 선도의 생사존망에 대해서는 신이 조금도 애석해 할 필요가 없지마는, 밝은 시대의 거조가 이렇게까지 잘못 이루어진 것을 애석히 여길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비록 선도를 내쫓았으나 선도가 올린 종통·적통의 귀추를 분명히 밝혀서 선왕의 실록에 뚜렷이 기재하여 후세에 예를 논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딴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조종(祖宗)의 오르내리는 영혼은 의당 어두운 가운데에서 화평하시며 견책을 거두어 상서로 만들고 가뭄을 바꾸어 큰비로 만들어서 전하로 하여금 우리 자손과 백성을 길이 보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덕이 이런저런 산천의 제사에 분부히 하여 응보를 바라는 것보다 크지 않겠습니까."

 

정원이 아뢰기를,
"이제 행 호군 조경의 상소가 정원에 이르렀기에 그 내용을 보았더니, 오로지 윤선도를 위해 기치를 세워서 당초 예를 의논한다 가탁하던 여론(餘論)을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선도의 죄악은 단지 온 국민이 함께 분노하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실은 성명께서 통촉하신 바입니다. 그런데 조경이 방자하게 옹호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현란시키며 다른 예를 끌어 비유하기를 음참하게 하되 조금도 기탄함이 없습니다. 상소문을 출납하는 도리로 보아 몽매하게 입계(入啓)하는 것은 부당한 일인 듯하지만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은 반드시 밝은 거울 앞에서 도피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봉입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처럼 음참 부정한 상소를 보아서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즉시 도로 내주라."
하고, 이어서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조경은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어찌 아는 바가 없겠는가. 그런데도 소사(疏辭)의 음참함이 어찌 이처럼 극심한가. 이제 대왕 대비의 옥책문(玉冊文)을 이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어내게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부표(付標)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만장률(滿贓律)은 법에 있어서 사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헌(黃瀗)의 전후 죄범은 결코 용서하기 어려운 것인데 선왕께서 특별히 그의 공로를 생각해서 사형을 감하여 귀양보냈던 것이니, 이제 다시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심리하는 이때에 갑자기 감등하는 은전을 베풀었으니, 왕법(王法)의 엄하지 못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번 인견하실 때에 송준길이 윤선도의 일을 진달하는 것을 삼가 들으니, 그의 말이 매우 화열하므로 위에서 그 말을 가납하여 윤선도를 옮겨 정배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성세(聖世)의 너그러운 은전이 되기에 해롭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신도 또한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간의 논계가 준엄하여 의리가 밝지 못하다고까지 지척합니다. 노쇠한 신은 그 죄가 더욱 크니,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상이 후한 비답으로 대죄하지 말도록 하였다.

 

4월 22일 신축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병을 핑계하고 소명에 달려오지 않았다.

 

4월 23일 임인

시임·원임 대신 및 정부 동서벽(政府東西壁)·관각(館閣)의 당상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자의 대 왕대비전(慈懿大王大妃殿)의 존호를 ‘공신(恭愼)’으로, 왕대비전의 존호는 ‘효숙(孝肅)’으로 의논해서 올렸다.

 

집의 곽지흠(郭之欽) 등이 아뢰기를,
"전 판부사 조경(趙絅)이 성지에 응한다고 가탁하여 선도(善道)를 깊이 구원하였습니다. 선도의 죄는 성명께서 이미 통촉하신 바인데, 조경이 감히 여론(餘論)을 부추켜 드러내주고 옹호하면서 심지어 ‘효종을 위해 편들고 전하가 추후에 효도하는 것을 권면하였다.’는 등의 말까지 하여 선도를 위해 기치를 세웠고, 또 선도의 상소를 불태운 것을 비유하지 못할 데에 비유하였습니다. 그의 이른바 ‘편들었다[左祖]’는 두 글자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존오(李存吾)와 정온(鄭蘊)의 상소는 논한 바가 어떠한 일인데, 선도의 음흉한 상소를 그것에 비유한단 말입니까. 선도가 예론을 가탁하여 화심(禍心)을 풀려고 한 것은 삼척동자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조경은 다만 죄가 없다고 할 뿐만 아니라 ‘촌성(寸誠)이 빛난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렇게까지 말씨가 방자하단 말입니까. 그가 이른바 종통·적통에 관한 설이 과연 그 말한 바와 같다면, 당초 예를 논할 때 조경은 어찌 한 마디 말도 안 하고 선도를 죄주던 날 또 어찌 한 마디 말도 안 한 것입니까. 그러다가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이 말을 발설하니, 그 마음이 과연 국가를 위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까, 선도를 위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까. 조경은 세 조정을 섬긴 구신(舊臣)으로서 일찍이 한때의 인망을 받은 자였으니, 이런 음참한 말을 하여 성상을 미혹시킬 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현란시키며 기탄없이 한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관작을 삭탈하여 성문 밖으로 쫓아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단지 파직만을 명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경의 상소를 보니, 오로지 윤선도를 구호하고 상소를 불태운 잘못을 적극 논하였으며, 심지어 국가를 공민왕과 광해군 때에 비유하기까지 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써늘해 진정할 수 없게 합니다. 신이 지난해 본직에 있을 때 선도가 흉악한 상소를 올려 화단(禍端)을 얽어만드는 것을 보고 맨 처음 그를 귀양 보낼 것을 발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상소를 불태우자고 청하기까지 한 것은 대개 조정에서 매우 미워하고 엄격히 배척한다는 뜻을 드러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경은 이것을 가지고 죄를 조정에 돌리고, 심지어 ‘몸소 수레를 타고 어지러운 전철을 따른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아, 이존오가 요승(妖僧)을 공척한 것이나 정온이 의륜(義倫)을 높여 부지한 것은 실로 이 천지간의 정기(正氣)인지라 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툴 만한 것이거늘, 지금 조경은 음험하게 화단을 구성한 선도의 상소를 거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조경은 선조(先朝)의 옛 늙은이로서 한때의 인망이 약간 있었는데 시비를 어그러뜨림을 이렇게까지 하니, 세도와 인심이 참으로 해괴스럽습니다. 신의 못남으로 인하여 조정이 욕을 먹게 만들었으니, 결코 하루도 관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본직 및 겸임하고 있는 비국(備局)·괴원(槐院)의 모든 임무를 사직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세상일이 어찌 이 지경인가. 조경이 세 조정을 내린 섬긴 노신(老臣)으로서 이런 추악한 상소를 할 줄을 어찌 헤아렸겠는가. 상소를 불태운 일은 그대와 관계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진정을 하고 또 상제(祥祭)를 지낸 뒤에 시골로 물러가서 죽을 것을 비니, 상이 후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4일 계묘

대신(大臣) 및 의정부 동서벽(東西壁)과 육경, 삼사 장관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효종의 묘정에 배향할 신하를 권점(圈點)하여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과 판부사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뽑아 아뢰었다.

 

김포(金浦) 유학(幼學) 이익현(李益賢) 등이 기아(饑餓)의 상황을 상소하여 진술하고 죽음을 구제할 것을 간청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이들의 상소는 진실로 죽음을 구제하기에 급급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나라에 체통이 없으니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다. 수령은 민정을 모아 도신(道臣)에게 보고하고 도신은 이를 치계(馳啓)하여 알리는 것이 상례이다. 지금 이처럼 체계를 뛰어넘어 호소하였으니 일이 극히 부당하며, 정원이 이를 들인 것도 또한 매우 타당하지 못하다. 이 상소를 도로 내주라."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청대(請對)하여 민간의 기곤(饑困)한 상황을 갖추 진달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전번 조경의 상소는 말씨가 매우 괴이하였으니, 이는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조경은 본디 망령스런 자가 아니라서 꽤 명망이 있어 사람들에게 중망을 받았는데, 지금 갑자기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자못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도 그 상소를 보았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신도 그 상소를 보았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 재이를 만나 바른 말을 구하는 시기에 조경이 왕명에 의해 상소한 것이니, 그의 말씨가 비록 매우 괴이하나 죄벌을 가하기까지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연전에 홍이룡(洪以龍)의 상소도 왕명에 의해 한 것이라 해서 죄를 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도 또한 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조경의 상소는 비록 해괴하나 명색이 왕명에 의한 것이니, 죄를 가하는 것은 부당할 듯싶습니다."
하고, 태화는 또 아뢰기를,
"조경이 비록 죄를 입지 않았으나 사정(邪正)이 저절로 구별되는데, 어찌 시비가 뒤섞일 염려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경에 대해서는 나도 죄를 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나, 선도의 일을 내가 당초에 잘 처리하지 않아서 이와 같은 일을 만들게 하였다. 또 우참찬도 이것으로 불안해 하여 꼭 물러가려고 하니, 불행이 심하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전번 입시할 때 준길이 진달한 바도 그 뜻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런 때문에 신도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대신(臺臣)이 이른바 ‘조정에 의리가 밝지 못하다.’고 한 것은 대개 신들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런 것이겠는가. 이는 내가 선처하지 못한 소치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배향할 여러 신하를 의정(議定)할 때에 몇 사람을 적어내서 권점(圈點)을 하였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선조(先朝)의 상신(相臣) 여러 사람을 적어내서 권점을 하였는데, 그 중 김집(金集)은 비록 상신이 아니나 유자(儒者)로서 높은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권점하는 데 넣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만 배향하는 것은 너무 적지 않은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중흥하고 창업한 임금의 묘정에는 배향되는 자가 많고, 세대를 이은 임금의 묘정에는 배향되는 자가 적었습니다. 중종의 묘정에는 네 사람을 배향하고, 인종과 명종의 묘정에는 각각 두 사람씩이고, 예종의 묘정에는 단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많고 적음에 본래 정해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지금 두 사람을 선택한 것은 실로 십분 참작해서 한 것입니다."
하였다. 파할 무렵에 태화가 일어나서 절하고 그 아우 치화(致和)를 체직시켜 주기를 요구하면서 아뢰기를,
"신의 직명이 체직되지 못하였고, 치화의 사직 요청도 또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신은 삼가 고민하는 바입니다. 치화의 병이 직무에 이바지하기에 결단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수상과 총재가 일시에 한 집안에서 함께 나온 일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더욱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비록 이와 같지만, 어찌 이로써 중임을 가벼이 바꿀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영상 의 의도는 그 성만(盛滿)을 두려워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침에 이익현(李益賢) 등의 상소 사연을 보았더니, 민생의 기곤(飢困)이 이미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 내 마음이 타는 듯하여 잠시도 편치 못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참작해서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날 정태화가 청대할 때에, 익현의 상소는 비록 매우 참월하지만 끝내 구활하는 일이 없으면 성상의 체득한 인정(仁政)에 흠결이 있을까 두려우니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구제케 함으로써 백성의 바람에 위로해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상이 이런 하교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수원(水原)·금천(衿川)·김포(金浦) 등의 기민(飢民)들이 비국(備局)에 와서 호소하여, 강도(江都)·남한(南漢)에서 옮겨온 곡식을 받기를 원하였다. 비국이 강도·남한 두 곳의 쌀 5천 석을 내어 경기 감사로 하여금 각읍에 나누어 진휼케 하기를 청하였다. 익현 등이 올라온 것은 미처 나누어 진휼하기 전이기 때문에 호조가 내려가 받아 먹게 하도록 청하였고, 상소한 80여 명에게 아울러 돌아갈 식량 1두씩을 지급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민여로(閔汝老)가 왕명에 의해 올린 상소에서는 교외에서 칙사 영접한 것을 정신(廷臣)의 죄로 삼았다 하니, 그 죄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고 오로지 신의 몸에 있는 것입니다. 이 한 말을 미루어 뭇 사람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윤선도의 일로 인하여 간원이 논계하여, 입시한 여러 신하를 아울러 공박하였는데, 이른바 ‘여러 신하’란 바로 대신을 가리킨 것이며 대신 중에서는 신이 수범(首犯)이 되니, 매우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송준길이 탑전에서 진달한 말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에 ‘선도(善道)는 다른 신하와 다르다.’ 【선도는 바로 효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대군 사부(大君師傅)였다.】  하였으니, 신의 우매한 소견으로도 이 말에 감동이 되어 그 아름다운 뜻을 칭찬하고 우러러 성상의 하문에 대답하되, 스스로 의리가 밝지 못함에 빠지는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신의 우매한 행동은 대부분 이와 같았습니다. 죄를 청하는 소장을 올리지 못했는데 비 내리기를 빌라는 명을 먼저 받고 이내 소패(召牌)에 달려와 공무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여론이 그릇되게 여기는 대상으로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것이 반드시 배가 될 것입니다. 일마다 죄를 자초하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파면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5일 갑진

비국이 추쇄(推刷)한 노비 중 사대부의 자손에 대해 대신 속량할 사목(事目)을 품정(稟定)하였다.

 

집의 곽지흠(郭之欽), 장령 박증휘(朴增輝)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대신이 조경(趙絅)을 논죄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하니, 신들은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왕명에 의해 직언을 한 사람은 죄를 줄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중도에 지나쳐도 다른 의도가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조경의 경우처럼 조의(造意)가 음험하고 입언(立言)이 패만하여 시비 사정에 관계된 것을 어찌 왕명에 의한 것이라 핑계하고 논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경의 말에 ‘선도(善道)의 상소는 위로 선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 전하의 추모와 효도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선도의 경우 충성을 다했다 하고 전하의 경우 능히 추모하고 효도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한 것입니다. 임금에게 진실로 실덕이 있다면 신하는 당연히 극언을 하여 바로잡아야 옳습니다. 조경의 마음에 과연 전하께서 능히 추모와 효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면, 선도가 죄를 입을 때에 조경은 세 조정을 섬긴 노신(老臣)으로서 어찌 우리 성상을 바로잡는 일언 반구도 없다가 이제 와서 왕명에 의한 것이라 가탁하고 이처럼 패만한 말을 하여 한 번 시험해 보는 계획을 하는 것입니까. 또 그의 말에 ‘공민왕은 이존오(李存吾)의 상소를 불태우고 광해군은 정온(鄭蘊)의 상소를 불태웠다.’ 하였는데, 공민왕과 광해군은 난망의 군주가 아닙니까. 공민왕의 일은 우선 그만두고라도 정온이 혼조(昏朝)에 항소(抗疏)하여 인륜을 밝혔던 큰 절의는 참으로 이른바 백세토록 마멸되지 못한 것인데, 조경은 감히 선도를 정온에 비유하고 비유해서는 아니될 데에 은연중 전하를 비유했으니, 그 말씨의 패만함을 정말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선도는 종통과 적통에 관한 설을 가지고 효종을 위해 편들었다.’ 하였으니,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이 선도 이외에는 모두 효종에게 반대하는 사람입니까. 그의 터무니없는 말로 사람을 현란시킨 상황을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대신의 말대로라면 이후에 비록 이보다 죄가 중한 자가 있더라도 오직 그 하는 대로 일임하여 시비 사정을 뒤섞어 구별이 없게 해야겠습니까. 대신의 진달은 실로 의외에 나온 것입니다. 신들이 감히 편치 못하니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기를,
"대각이 법을 고집한 논란은 실로 공론이며 대신의 일시적인 말을 어찌 꼭 혐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6일 을사

이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병으로 면직되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치화는 영상 태화(太和)의 아우이다. 사람됨이 주도면밀하고 관리의 재간이 있으며, 또 영갑(令甲)을 조심스레 지키고 염약(廉約)으로 자신을 지켰다.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꽤 성적을 드러냈으나 풍절(風節)이 적고 학술(學術)이 없었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속리(俗吏)로 일컬었다. 문벌 때문에 화려한 벼슬을 두루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자 여론이 크게 불만스러워하고 대간의 상소에서 그 뜻을 슬며시 보이니, 치화가 병을 이끌어 누차 사직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체직되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치화가 궁관(宮官)으로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에 들어갔을 때 세자의 비위를 잘 맞춘 일이 있고 또 김자점(金自點)에게 빌붙었다."
하는데, 이 일은 사실과 틀린 쪽에 가깝다.

 

정언 권격(權格)이 아뢰기를,
"윤선도(尹善道)는 예론(禮論)을 가탁하여 품고 있는 생각을 마구 털어놓고 터무니없는 말로 현혹하여 화기(禍機)를 부채질하며, 차마 못할 말과 차마 못 들을 말을 가지고 위로 선왕을 침범하였으나 죽음을 용서하여 북쪽으로 귀양보냈으니, 또한 가장 가벼운 죄벌에 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경은 세 조정을 섬긴 구신(舊臣)으로 자못 명예가 있는 자인데도 편사(偏私)에 치우쳐 감히 선도를 구제할 꾀를 내어 왕명에 의한 것이라 칭하고 장황하게 상소를 하였는데, 한 마디 한 글자마다 선도를 위하여 추켜 세워주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말의 패류(悖謬)에는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거니와 ‘효종을 위해 편들었다.’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은연중 선도와 의견이 다른 자들을 불측한 데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기타 당세를 지척한 대목은 말을 구사한 것이 참독하고 뜻을 쓴 것이 흉험하니, 단지 이끌어 비유한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악함을 붙들고 편든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 판중추부사 조경의 관작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쫓아보내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7일 병오

윤강(尹絳)을 이조 판서로, 정치화(鄭致和)를 예조 판서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간으로, 김우석(金禹錫)을 헌납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시골에서 올라오니 【일찍이 소명(召命)을 사양하다가 국상(國祥) 때문에 올라왔다.】  상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반찬을 계속 지급하게 하였다.

 

이조 참판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조경의 상소는 오로지 윤선도를 위해 기치를 세우고 상소를 불태운 잘못을 극론하되 그 어의(語意)가 매우 처참하다 하니, 신은 실로 놀랍습니다. 신이 지난해에 마침 정원에 있었는데, 선도가 상소한 때에 탑전에 입시하였습니다. 부제학 유계(兪棨)가 맨 처음 그 상소를 불태우자는 논의를 하였고, 신도 또한 같은 말로 진달하였지만, 품지(稟旨)로 불에 던진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실로 시종 담당하였습니다. 지금 조경이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터무니없는 말로 추악하게 헐뜯으며, 심지어 공민왕과 광해군의 일을 이끌어 ‘군부를 난망의 전철로 인도한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씀을 따져보면 오직 흉악한 사람을 신구(伸救)하기에 급하였고 국가를 모욕하는 데는 방자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습니다. 미세한 신하가 지척을 입은 것은 진실로 말할 것이 못 되지만, 맑은 조정에 욕이 미쳤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속히 신의 직위를 파면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이미 통촉하였으니, 무슨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은 속히 직무를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행 대사간 정지화(鄭知和)가 피혐하며 아뢰기를,
"양사가 조경(趙絅)을 죄주기를 청한 것은 공론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대신이 등대(登對)할 때에 ‘왕명에 의하여 진언한 바에야 놓아두고 죄주지 않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법이다.’라고 진달할 바가 있다고 합니다. 영상 정태화는 바로 신의 당형(堂兄)이라서, 신은 감히 그 사이에 시비를 논할 수 없으므로 형편상 본원의 아룀에 동참하기 어려우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정언 권격(權格)이 처치하기를,
"바야흐로 펼쳐지고 있는 논이 이미 공론이라면, 감히 시비를 논할 수 없는 것이 원래 혐의될 바 아니니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8일 정미

이 때에 청국 사신이 나온다는 기별이 있었다. 평안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치계(馳啓)하여
"본도에 기근이 들어 인력이 이미 고갈되었으므로 지금 이 칙사 행렬에는 결단코 공급하기 어렵다."
는 상황을 갖추 진술하고, 향곡(餉穀) 1천여석과 병영(兵營)의 목면(木棉) 1백 동(同)을 구청(求請)과 고세(雇貰)의 자본에 보충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그 치계를 비국에 내리자, 비국이 복계(復啓)하여 쌀 1천석을 내 주도록 허락하고 비국이 관리하는 면포(綿布) 50동과 감영과 병영의 면포 합 50동으로 그 1백동의 수를 맞추어서 각참(各站)에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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