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기유
판중추 송시열이 쌀과 반찬을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상이 명하여 다시 보냈지만 송시열이 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경기·황해·평안 3도(道)에 명하여 통정 대부 이하의 사신은 가마 타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비국이 아뢴 것을 인하여 연로(沿路) 우전(郵傳)의 폐단을 없애려고 해서이다.
5월 2일 경술
행 대사간 정지화(鄭知和)가 인피하기를,
"곧장 물의(物議)를 들으니 당형(堂兄)018) 은 친부형(親父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하필이면 억지로 인피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만, 신의 생각은 한 집안은 논의를 달리하기가 어렵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또 조경(趙絅)의 상소는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며 현혹하여 보고 듣는 이가 모두 놀라워하니 그 누군들 죄가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미 교지에 응하여 올린 상소라고 하였으니, 오직 통렬히 분변하여 배척하고 끊어버리는 것이 옳지 벌을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실제로 대신과 다름이 없어 형세로 보아 죄를 주청하는 논의에는 함께 참여하기 어려우니, 파직하소서."
하니, 정언 권격(權格)이, 정지화를 출사시키도록 주청했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다. 헌납 김우석(金禹錫)이 아뢰기를,
"흉인을 돕고 보호하며 화(禍)가 되는 말을 고무시키고 선동하였다면 교지에 응한 상소라고 하더라도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미 통렬히 분변하여 배척하고 끊어버려야 한다고 하고서, 또 죄를 논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으니, 말이 매우 구차스럽고 또 너무나 의의가 없습니다. 더구나 애당초 자기 견해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쓸데없는 말로 소란을 일으켜, 드러나게 일을 회피하려는 자취가 있습니다. 그러나 법에 의거하여 죄를 논하는 것은 실제로 공변된 것이니, 전례에 따라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은 체임할 만한 잘못이 별로 없습니다. 정지화는 체임하고 권격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5월 3일 신해
상이 사관을 보내어 판중추 송시열에게 유시를 전하기를,
"경이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내가 매우 기쁘고 다행으로 여겼다. 상제(祥祭) 뒤에 조용히 만나 보려고 하였는데, 내일쯤 내려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듯하니 이 무슨 말인가. 비록 범염(犯染)으로 말을 하지만 자신이 들어가서 본 일이 없다면 어찌 굳이 이것에 구애될 게 있겠는가. 지난해 도성을 떠날 적에 대면하여 작별을 못했기에 지금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고 잊어본 적도 없다. 모레 만나 보도록 할 터이니 경은 꼭 잠시 머물면서 기다리라."
하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호군 이유태가 올라왔다고 하니 상제(祥祭) 뒤에 접견해야겠다. 모레 와서 기다리도록 미리 분부하라."
하였다.
5월 4일 임자
대상제(大祥祭)를 행하였다. 당시 상이 넓적다리 부분에 종기가 나서 아직도 낫지 않았는데, 기필코 전례(奠禮)를 직접 행하려 하므로 제사 하루 전날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지금 종기가 터진 구멍이 아물지 않았는데 억지로 절하고 꿇어앉는 의식을 행하게 되면 틀림없이 더칠 근심이 있으니 여러 신하들의 마음은 매우 민망하게 여깁니다. 신들이 여러 대신과 되풀이해서 상의하여 별도로 강론하여 정한 일이 있습니다. 예를 행할 때에, 재전(齋殿)에서 판위(版位)로 나아가 단지 부복(俯伏)하는 의식만 행하되, 재전이 조금 멀어 결단코 걸어서 드나들 수 없으니, 그대로 소차(小次)에 들어가 상복(喪服)을 갈아입은 뒤에 도로 판위로 나아간다면 적당할 듯합니다. 이것은 부득이하여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종기가 터진 구멍이 아물지 않아 고름이 아직도 나온다면 전례를 직접 행하심은 더욱 미안합니다. 이것으로 보나 저것으로 보나 모두 변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상께서 만일 옳다고 하신다면 의주(儀注)도 의당 고쳐서 정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앞서의 삭망제(朔望祭) 때에도 질병이 잦아 직접 행할 수 없었던 적이 여러 번이었으니, 이번의 대제(大祭)에도 질병 때문에 직접 행할 수 없다면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종기의 고름이 아직까지 그치지 않는데 전례(奠禮)를 직접 행하는 것이 정말 미안하니, 헌관(獻官) 한 명을 더 차출하고, 소차에서 상복을 갈아입는 등의 일은 이대로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이날 새벽에 상이 서편 막차(幕次)에서 교자(轎子)에서 내려 걸어서 경모전(敬慕殿)의 제소(祭所)에 나아가 판위에 부복하고, 영의정 정태화를 시켜 초헌례를 대행하게 하였다. 승지가 소차로 나아가도록 주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비록 매우 편안하지 않다 하더라도 물러나 있는 것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대로 판위에 부복하여 제사 행사를 마쳤다.
5월 5일 계축
정원이 아뢰기를,
"판중추 송시열, 부호군 이유태에 대해서 일찍이 오늘 인견하겠다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이유태는 숙사(肅謝)한 뒤에 와서 기다립니다만, 송시열은 어제 저녁에 본원에 연락하기를 ‘처음에 자식의 병이 대단하지는 않다고 들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해 나가 있다가 내일 은명(恩命)에 숙사하려고 하였었는데, 지금 병세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부자간의 정으로 차마 들어가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집에서 상환(喪患)을 겪은 뒤인데다 이런 증세는 또한 매우 의심스러울 만한데, 자신이 벌써 범염(犯染)되어 감히 대궐문을 출입하지 못하니 황공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판부사 의 심사(心事)를 내가 매우 비통하게 여긴다. 그 아들의 병에 대해서는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을 보내어 구료하게 하고 판부사를 옮겨서 피하도록 하는 뜻도 전유하게 하라."
하였다.
이유태를 인견하였다.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이 어미의 병 때문에 국상(國祥)에 나오지 못한 것으로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전 좌윤 권시(權諰)는 바로 선조(先朝)에서 예우하던 사람인데, 한 마디의 실수로 인하여 문득 배척하여 물리쳤으며, 전 판부사 조경(趙絅) 또한 세 조정을 섬긴 구신(舊臣)으로 응지(應旨)하여 한번 상소를 올렸는데, 임금의 노여움을 갑자기 진동하게 하여 정원의 도리에 어긋났다는 배척과 대관의 삭출(削黜)하라는 논의가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며 나와 효상(爻象)이 아름답지 못하니 신은 삼가 서글프게 여깁니다. 더구나 지난번 구언(求言)할 적에 이미 ‘말이 취지에 맞지 않더라도 그대들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전교를 하셨습니다. 가령 조경의 상소가 사리에 어긋나고 망령되어 차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용납하는 것이 가하면 버려 두는 것이 가한데, 하필이면 그 상소를 물리치고 그를 처벌하여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서운하게 여기도록 하고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서 듣고 놀라게 하십니까. 신은 아마도 이로부터 언로가 막히고 끊겨 전하께서 듣는 바는 단지 비위를 맞추고 뜻에 순종하는 말뿐일 듯하니, 어찌 크게 한심스러워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충성을 다하는 말을 올리도록 하되 먼저 들은 말을 주장으로 삼지 말고 공도(公道)를 널리 베풀어 자기편이면 무조건 돕는 폐단을 통렬하게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후하게 답을 내리고 그를 올라오도록 하였다.
장령 박증휘(朴增輝)가 피혐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조경(趙絅)의 상소가 음험하고 참혹하여 올바르지 못함을 성상께서 환하게 알고 계신데, 단지 빈말로 물리쳐 끊어버리고 악을 징계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아 시비가 분명하고 사정(邪正)이 구별되도록 하지 않으셨으니, 신은 국가의 일이 마침내는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대사헌 조수익이 국상에 나오지 않았으면 자신에 관한 진달 외에는 다른 말이 없어야 마땅한데, 감히 별도의 의견을 내어 드러나게 분소(分疏)하면서 대각을 멸시하듯 하였으며, 오직 서둘러 구원하고 비호하기를 일삼았으니, 만약 국가에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었다면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응지(應旨)에 대하여 처벌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에 동요되어 즉시 윤허를 쾌하게 내리지 않은 것을 연유하여 이렇게 시끄러운 거사가 있도록 한 것이니, 신이 여기에서 더욱 서글프게 여깁니다. 신이 나쁜 사람을 편드는 한 사람을 논하면서 즉시 주청하여 허락을 받지 않고 도리어 번거롭고 소요스럽게 하는 것을 일삼았으니, 신의 죄가 더욱 커서 감히 마음이 편안할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길주(吉州)에 성무(腥霧)가 사람에게 엄습하였는데 그 냄새가 아주 고약했으며,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몸뚱이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그리고 부령(富寧)·삼수(三水)·갑산(甲山)에는 서리가 내렸고, 고원(高原)·영흥(永興)에는 우박이 내렸다.
5월 6일 갑인
김남중(金南重)을 형조 판서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유명윤(兪命胤)을 정언으로,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김수흥(金壽興)을 응교로 삼았다.
헌납 김우석(金禹錫)이 아뢰었다.
"조수익의 원소(原疏)가 내려오지 않아 내용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공론이 한창 펼쳐지는 때를 당하여 분소(分疏)하는 말이 다시 이 사람에게서 발설되리라고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조경(趙絅)의 상소가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고 어지럽게 현혹시키며 음흉하고 참혹하여 올바르지 못함은 스스로 엄폐할 수 없습니다. 대저 조정에서는 사정(邪正)이 당연히 분변되어야 하며 대각의 논의는 시비가 마땅히 밝혀져야 하니, 어찌 응지(應旨)한 것이라고 핑계대면서 분변하고 밝히는 바가 없어 사론(邪論)이 더욱 성하게 되도록 하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한갓 진정시키려고만 하면서 잘못을 물리치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이미 물리쳐서 끊어버렸다고 하면서 악을 징계하는 법은 시행하지 않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국시(國是)가 저절로 안정이 되고 조정이 깨끗해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신이 이미 조경의 처벌을 주청하는 논의에 참여하였다가 갑자기 조수익의 뜻밖의 배척을 당하였으니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인해서 고치기 어려운 폐해를 진달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요사이 양사(兩司)가 윤선도(尹善道)를 이배(移配)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게 한 주청은 실제로 공정하고 공통된 논의에서 나왔는데도 아직 윤허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아마도 이 사건에 대한 처치를 만약 명백히 하지 않는다면 음양이 서로 다투고 시비가 서로 버티게 되어 사론(士論)이 이것을 인해서 점차로 사라지게 되고, 소인은 이런 틈을 타서 기운을 보태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조경의 상소가 나와서 또 현혹시키니, 이것도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경은 벼슬도 높고 나이도 많은 인물로 당시의 인망이 좀 있었는데도 감히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는 계책을 내어 바르지 못한 말을 멋대로 하였습니다. 그 의도를 살펴보면, 실로 사림을 말살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을 내려 사직하지 말도록 하였다.
5월 7일 을묘
장령 윤비경이 아뢰었다.
"조경은 교지에 응한다는 핑계로 조정을 넘보고 윤선도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간사한 계교를 멋대로 행하여,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의 말을 끌어다 은연중에 그 틈에서 사사로운 뜻을 위태롭고 음험함에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좌단(左袒)하였다는 설(說)로 한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였으며, 분소(焚疏)한 일을 난조(亂朝) 때에 비교하고 끝에 가서는 《실록(實錄)》에 기록해야 한다고 말하여, 마치 복제(服制)에 관한 한 건이 선왕의 계통이 올바름과 성상께서 숭봉하는 도리에 관계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아, 심합니다. 그 마음을 어찌 알기가 어렵겠습니까. 애당초 복제에 관한 의논은 고례(古禮)에 합당하여 실로 나무랄 것이 없으며, 그 시행한 요점 또한 시왕(時王)의 제도에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미 지나간 뒤에 다시 시끄럽게 떠들 필요는 없는데도 이를 좋은 기회로 삼아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기를 그만두지 않고 이것으로 성상을 놀라고 동요하게 하며 사림에게 화(禍)를 전가시키려고 하니, 그의 심술을 캐어보면 바로 얼굴만 바꾼 윤선도입니다.
간사한 상소가 한번 들어가자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하며 모두들, 성상께서 시비를 크게 밝혀 백성들과 좋아하고 미워함을 함께하려고 기필한 연후에야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화(禍)의 싹을 끊어버릴 수 있다고 여기는데, 양사에서 의율(擬律)을 주청한 것이 너무 가벼워 많은 사람들이 날로 더욱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서둘러 면대를 청하여 처벌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을, 상께서 참소하는 말을 미워하는 때에 진달할 줄을 어떻게 요량하였겠습니까. 시비를 밝게 분변하고 사정(邪正)을 환하게 구별하여 정론이 시행될 수 있도록 하고, 사설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국가를 다스리는 급선무이며 재상이 된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어찌 일찍이 임금을 인도하여 참소하고 간사한 짓을 용납하고 비호하게 하며, 대간의 상소를 거절하고 막기를 지금과 같이 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분변하고 구별하는 영명함과 간(諫)하는 말을 따르는 덕성이 있어 음흉하고 간사하다는 것으로 배척하며 즉시 파직하도록 명하셨으므로 진신(搢紳)들이 서로 경하(慶賀)하고 온 나라가 모두 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그 아름다움을 잘 받들어 따르지 못하여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전하의 마음을 모두 실행할 수 없게 하여, 좌우에서 막고 뒤섞여 분별이 없게 되는 길을 열었으니, 소인이 장차 무엇을 꺼리겠으며 욕망대로 바라는 조짐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오늘날 전하께서 의지하고 믿는 바는 두세 명의 대신에 불과한데 대신들이 보필하고 인도하는 것이 여기에 그치게 되니 신은 매우 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또 삼가 들으니 장관의 【조수익(趙壽益).】 상소 가운데에도 죄를 줄 수 없다는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원소(原疏)가 내려지지 않아 마음씀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공의(公議)가 한창 펼쳐지려는 때를 당하여 감히 방자하게 분소(分疏)하였으니, 대간을 업신여기고 조정의 기강을 멸시한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신이 이러한 즈음에 외람되게 언책(言責)을 욕되게 하면서 고루하고 옹졸한 견해를 끝까지 변경할 수 없었는데 양사의 논의가 이미 저와 같고 장관의 말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 감히 미적거리며 오래도록 대간의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체직하소서."
정언 남천한(南天漢)이 인피하며 아뢰었다.
"양사의 많은 관원이 서로 잇달아 인피하였으므로 신이 처치를 해야 하는데, 질병으로 힘이 빠져 일어나려고 하다가 도로 넘어져 하루 늦게 처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전계(前啓)를 전달하지도 않고 정지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 실수가 있으니, 어찌 감히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지방에서 왔기에 시의(時議)에 귀가 어두워 조경(趙絅)의 응지 진언(應旨進言)에 대하여 기필코 죄를 더하려고 하였으며, 조수익(趙壽益)이 사직하는 상소에 대해서도 마음속에 품은 바를 대략 진달하였는데 많은 관원이 인피하여 하나의 시끄러운 단서를 이루었습니다. 신의 그릇된 견해로는 결단코 남을 따라 변화할 수 없으며,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서 토로하지 않고 한갓 인피하기만 일삼아 용렬하기가 이와 같으니, 한 시각이라도 무릅쓰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체직하소서."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신이 늙어 기력이 쇠약하기가 달마다 해마다 더욱 심하니 이치로 보아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가 어렵겠기에 늘 두려워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실로 이상한 일인데, 어찌 감히 다시 당세(當世)에 대한 생각을 갖겠습니까. 단지 양대 조정의 후한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어 느린 걸음으로 뒤를 돌아다보며 이미 물러났다가 다시 진출하기는 하였지만 끝내 나라에 털끝만큼도 보탬이 없이 더더욱 소란을 일으키고 비방만 불러들였으니, 신의 운명이 기구하고 복(福)이 지나쳐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오직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로 돌아가서 죽는 것으로 스스로 그 뜻을 편안하게 하며 그 뜻을 바치는 계책으로 삼는 것이 또한 은혜로 대우해 주신데 대하여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입장이 되겠습니다. 본직과 성균 좨주(成均祭酒) 등의 임무를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살펴보고 매우 놀랐다. 이 뒤에 의당 면대하여 유시할 터이니 경은 마음을 편히 하고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참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귀향하겠다고 고하니, 상이 답하였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그렇게도 성의가 미덥지 못한가.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그대가 비록 길을 떠나려고 하지만 면대하여 유시할 일이 있으니 내일 아침에 들어와서 나의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밤에 토성(土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5월 8일 병진
지평 최유지(崔攸之)가 양사를 처치하기를,
"음흉하고 참혹한 상소로 갑자기 화를 전가시키려고 꾀하였으니, 죄를 논한 것은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분소하는 글이 관망하던 대각의 신하에게서 갑자기 나와 드러나게 올바른 것을 배척하고 간사한 것을 돕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정(私情)을 두었고 보면 자신에게 무슨 혐의할 게 있겠습니까. 바른 말을 그대로 하였으니, 풍채가 가상합니다. 대각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말해야 할 일을 말하지 않고, 속생각을 토로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니, 대각의 기풍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장령 박증휘, 헌납 김우석, 장령 윤비경은 출사시키고, 정언 남천한은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약방이 입진(入診)하였을 적에 승지에게 이르기를,
"판중추 의 집에 일찍이 의원을 보내도록 명했었는데, 그 의술은 어떠하며, 날마다 가서 대기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보낸 의원은 의술이 정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제 박군(朴頵)을 찾아보았는데 이 사람은 내의(內醫)에 관계되기 때문에 감히 곧바로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군을 시켜 날마다 가서 대기하게 하라. 그리고 의사(醫司)의 의원 또한 매우 정밀하게 선택하고 결정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귀향하겠다고 거듭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내가 비록 병이 있으나 어찌 한번 만나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들어와서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관학 유생 이희택(李喜澤)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좨주인 신 송시열·송준길 등은 산림의 덕망있는 사람들로서 선왕으로부터 세상에 보기드문 성대한 대우를 받았으니, 참으로 천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만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 은혜와 예우가 쇠하지 않아 신료들도 모두가 흠앙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자가 기용되면 소인이 시기하기 마련이며, 처사(處士)가 벼슬하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의 공통된 걱정거리이며,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이 그것을 말미암아 생기게 됩니다. 저 두 사람이 본래 세상에 진출하려는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그들이 남다른 예우에 감격하여 오늘날에 보답하려고 도모한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산릉(山陵)의 역사가 겨우 끝나자 서로 잇달아 물러나 멀리 시골로 돌아가 여러번 부르는 명을 사양하였으며, 지금 와서도 또 사양하는 뜻을 아뢰려고 하니, 아, 이것이 어찌 그동안 은혜 받기를 두 사람의 신하처럼 한 이가 기꺼이 하려는 일이겠습니까. 거기에는 위기에 몰려 어쩔 수 없음이 있으니 전하께서 여기에 대하여 어찌 그렇게 된 까닭을 살펴보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떠나도록 맡겨 둘 수 있겠습니까. 윤선도가 음흉하게 화를 만들려던 계책을 누구인들 모르겠습니까만, 설사 명성(明聖)함이 전하만 못하고 세도(世道)가 오늘날만 못하였다면 그 화는 진실로 이미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성상의 처분을 누가 기뻐하며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몇 년이 지난 뒤에는 공의(公議)가 이미 정하여졌는데도 음흉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틈을 엿보다가 응지(應旨)를 핑계대고 그 사사로움을 행하려 하며 위태로운 말을 올려 속이기를 멋대로 하면서 임금을 현혹시키고 국가의 정책을 문란시키니, 거리낌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한 정상은 성상께서도 이미 환히 아실 터인데 악을 징계함이 엄격하지 않아, 잇달아 붙좇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멋대로 하도록 하였으니, 신들은 탄식스럽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건대, 천하에는 단지 하나의 시(是)와 비(非) 그리고 정(正)과 사(邪)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굽혀지고 펴지고 없어지고 생기는 데에 모두 그 기미가 있으니, 그 단서는 미세하더라도 나중에는 구원할 수 없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것을 유념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인해서 두 신하를 힘써 만류하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머물도록 권하는 정성이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다시 더 정성을 다하겠다."
하였다.
지평 최유지가 상소하여, 구황하는 일에 대해 진달하고 인해서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그대의 상소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다. 진구하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그대는 사임하지 말라."
헌납 김우석이 인피하기를,
"장령 윤비경이 ‘양사가 논의하여 형률을 적용한 것이 너무 가벼운 것은 그르다.’는 것으로 인피하기까지 했는데, 말이 단호하였습니다. 신 또한 조경의 일에 대한 논의는 형률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본직에 들어온 뒤로 미처 동료와 서로 모이지 못했는데, 논사(論事)하는 체모로 보아 충분히 상의해야 하므로 조용히 처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갑자기 비난과 배척을 당하였으니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장령 박증휘도 이런 이유로 인피하였다.
장령 윤비경이 인피하였다.
"조경의 처벌을 청하는 의논은 실제로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법률상 처벌할 수가 없다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흔쾌하지 않습니다. 신이 그저께 인피하면서 감히 이 뜻을 아뢰었는데, 바로 장령 박증휘와 헌납 김우석이 이것을 끌어다 피혐한 것을 보니, 갑자기 비난과 배척을 당하였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감히 마음 편히 처치하지 못하겠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헌부가 아뢰기를,
"형률로는 처벌할 수 없으나 물론은 억제하기 어려우니, 하나하나 따져 충분히 상의하는 것이 옳습니다. 헌납 김우석, 장령 박증휘·윤비경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1일 기미
심세정(沈世鼎)을 집의로, 이동명(李東溟)을 정언으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윤비경에게 배척을 당한 것으로 차자를 올려 파직을 청하였다. 대략에,
"조경의 상소는 뜻밖에 나왔는데 이론을 세워 말을 한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신들도 공격을 당했습니다만, 마침 구언(求言)하는 때를 당하여 응지(應旨)한 것으로 핑계를 대니, 지금 만약 처벌한다면 아마도 성조(聖朝)의 과실이 될 듯합니다. 그러나 천감(天鑑)으로 환하게 아시고 즉시 명백히 분변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시비가 이미 정해져 다시 뒤섞일 근심이 없습니다. 신들이 탑전에서 진달하는 것은 조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한 마디의 말이 적합하지 않으면 시의(時議)가 더욱 준엄해지니, 대각이 인피하는 내용에 이르러서는 신들에게 대항함이 더욱 긴박해졌습니다. 이에 군부(君父)를 인도하여 참소하고 간사한 것을 용납하여 덮어주게 하고, 대간의 상소를 거절하고 막았다는 것으로 단정하여 신들의 죄안을 삼으니, 이것이 어찌 윤비경 한 사람의 말이겠습니까. 당당한 의논임을 더욱 알 만합니다.
신들이 매우 형편없는 자들이기는 하나 대신의 반열에 있으니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일은 감히 못할 일은 아닙니다. 대간이 진실로 죄를 삼는다면 바로 탄핵해도 안 될 것이 없는데, 지금 자기가 인피하는 내용에서 있는 힘을 다해 멋대로 배척을 했으니, 모두가 신들이 하찮은 자들이라서 생긴 일입니다. 일찍 파면하지 않고 그대로 정승의 자리에 둔다면, 조정에는 안정될 기약이 없으며, 신들도 전혀 의견을 내세우지 않은 채 남들의 입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어, 마침내는 틀림없이 대단하게 더욱 어그러져 나라의 체모에 손상을 주게 될 것입니다. 신들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나랏일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체통이 모두 상실되어 작은 것이 큰 것을 업신여기니 작은 일이 아니다. 경들의 말은 실로 다른 속셈이 없으나 아마도 언로에 해로울 듯하다. 어찌 대간의 상소를 막는 뜻이야 있겠는가. 그 경망하고 무식한 말은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 안심하고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윤비경이 인피하였다. 대략은 이렇다.
"삼가 대신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니 성지(聖旨)가 매우 엄중하고, 경망하며 무식하다는 등의 말씀이 있으니, 신은 진실로 두렵고 위축되어 처벌을 기다릴 겨를도 없습니다. 다만 신은, 악을 징계하기를 준엄하게 하지 않으면 소인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고 간사함을 분변하기를 명백히 하지 않으면 공론이 행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경의 상소는 위험하기가 더 심할 수 없으며 물의가 놀라워하고 분하게 여깁니다. 대각의 논계가 한꺼번에 발하던 때에 먼저 앞질러 면대를 청하여 죄를 더하지 말도록 주청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에는 없었던 일로, 용납하여 덮어주고 거절하여 막았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조경이 몰래 흉측한 계책을 품고 틈을 타서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는 상황은 결단코 응지(應旨)를 핑계댄다고 해서 용서하는 바가 있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만약 응지한 것으로 여겨 끝내 엄중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이는 구언(求言)하는 성대한 일이 마침 괴상한 귀신같은 무리가 간사함을 행하는 바탕을 삼기에 충분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대신의 차자는 말이 매우 준엄하였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멋대로 배척을 했다고까지 했습니다. 만일 위 아래로 하여금 부화 뇌동하게 하고 아첨하는 일이 풍습을 이루도록 한다면, 대각을 장차 어디다 쓰겠습니까. 신이 한 마디 망발한 것을 연유하여 대신이 앞에서 비난하고 배척하며, 엄중한 비답이 뒤에서 잇달아 내리니 죄는 만번 죽어도 합당합니다. 파직하소서."
경상 감사가 도내에 굶주리는 백성이 4만 7천 5백여 명이고 전염병에 걸린 자는 1만 8천 90여 명이며 죽은 자는 9백 38 명이라고 치계하였다.
5월 12일 경신
김남중(金南重)을 동지경연으로, 조윤석(趙胤錫)을 특별히 승진시켜 승지로,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권격(權格)을 지평으로 삼았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대략에,
"신이 못난 자질로 두 훌륭한 임금을 만나 털끝만큼의 도움은 없었다 하더라도 평생토록 기약했던 바는 오직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을 함에 있어서는 다 털어놓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설(禮說)의 논의를 함에 이르러 외람되게 대신을 따라 망령되이 논한 바가 있었으며, 어탑(御榻) 앞에 이르게 됨에 미쳐서는 천안(天顔)을 가까이 모시고 옥음(玉音)을 또렷하게 들었으며, 아주 세밀하게 분석하고 되풀이해가며 옳고 그름을 가렸었는데, 신이 그 당시 이미 매우 근면하게 굽혀서 물으신 데 대하여 감격하였고, 또 성학(聖學)이 뛰어나게 진취함을 기쁘게 여겨 오직 배운 것을 다 발휘하여 군주의 마음을 계발하고 돕기를 생각하였으니, 진실로 감히 한 가닥의 털끝만큼이라도 앞뒤를 돌아보며 혐의를 조심스럽게 여기거나 화환(禍患)을 염려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을 인연하여 점차로 끝이 없는 형태를 이루게 되어 새로운 일절(一節)이 종전의 일절보다 심하니 실로 신의 생각으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 하늘의 이치도 이 이치와 같고 사람의 이치도 이 이치와 같으니 피차에서 찾아보면 애당초에 어찌 서로 먼 간격이 있었겠습니까만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려고 하여 이와 같은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는 신의 정성이 부족하고 행동이 경박하여 온 나라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고 백성들의 마음에 맞게 성실할 수 없어 허물을 불러들이고 비난을 맞이한 격이 아님이 없었으니, 혹시라도 태양과 같은 은혜를 특별히 베풀어 주지 않으셨다면 신이 어떻게 자신을 온전히 하고 친족을 보호하여 오늘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초년(初年)의 절개는 보전하기 쉽고 만년(晩年)의 절개는 보전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늘그막의 남은 생애를 가지고 다시 은혜와 총애를 탐하는 계책을 부리며 염치를 잊고 물러날 줄을 모른다면 이는 평생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니, 전하께서도 이와 같이 비루한 사람을 어디에다 쓰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뜻을 지난번 상소의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였는데 무엇을 말하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참의 이유태가 세 번이나 상소하여 사직하므로 체임하였다.
지평 최유지(崔攸之)가 인피하였는데, 대략에,
"천하의 일은 정(正)이 있고 사(邪)가 있으며 경(經)이 있고 권(權)이 있습니다. 정(正)은 밝히기가 쉽고 사(邪)는 분변하기 어려우며, 경(經)은 지키기가 쉽고 권(權)은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윤선도는 마음에 간사함을 감추고 입으로 예(禮)를 핑계대었으며, 조경은 겉으로 응지(應旨)를 핑계대고 안으로는 사사로움을 드러내어 채웠으니, 대각이 법을 들어 죄를 청한 것은 정(正)으로 결단하여 그 경(經)을 지킨 것이며, 재상이 죄를 논하려 하지 않는 것은 조정(調停)을 힘쓰면서 그 권(權)을 행하는 것입니다.
저쪽에서는 옳다 하고 이쪽에서는 그르다고 하며 저쪽에서는 그렇다고 하고 이쪽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니, 가부를 분변하여 득실을 다투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상세하게 캐어 밝히고 충심으로 나라에 이익이 있게 하려는 마음을 넓혀야 할 것 입니다. 그러면 비록 창과 방패처럼 반대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서로 직물(織物)의 날과 씨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랫지위에 있는 자는 곧은 말을 하여 아첨하며 기쁘게 하는 태도가 없고, 윗지위에 있는 자는 덕망으로 포용하는 아량이 있은 연후에야, 그 강유(剛柔)를 제어하여 함께 신하된 직분으로 외경(畏敬)하며 서로 합심하는 데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소금과 매실은 맛이 같지 않지만 대갱(大羹)을 조화시킬 수 있고 인삼(人蔘)과 백출(白朮)은 약성(藥性)이 다르지만 원기를 도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것이 그렇지 않아서 임금이 말을 함에 있어서 대부가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대부가 말을 함에 있어 사·서인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는 일들이 풍습을 이루어 흩어지고 분리되어도 돌이킬 수 없으며 나랏일이 날마다 잘못되어도 장차 약을 쓸 수 없을 터인데, 전하께서는 여기에 대하여 잘 유념하셨으며 묘당에서도 여기에 대하여 경계를 두었습니까?
지금 대신이 차자를 올린 데 대하여 성상의 비답이 엄하여 동료들이 서로 잇달아 인피하고 있습니다. 신이 출사하여 일을 본 지가 얼마되지 않아 당초 아뢸 때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며칠 전에 양사의 많은 관원이 피혐할 때에, 윤비경의 말이 대신에게 관계되었는데, 신이 처치하는 내용에서 윤비경의 말을 옳다고 여겨 출사하도록 주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윤비경이 망령되이 말한 죄가 있다면 윤비경을 옳다고 한 자 또한 망령된 것이니, 윤비경과 함께 망령되이 말한 죄를 받아야 마땅한데 어찌 감히 처치하겠습니까. 체임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윤비경의 말이 괴이하지 않은가? 대신의 말은 실상 조경을 몰래 구원하려던 것이 아니며 다만 의견이 같지 않을 뿐인데 어떻게 침해하고 공격하기를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대신의 차자 내용에 드러나게 노여워하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대신이 이미 실정 밖의 말로 공격을 당했다면 어찌 상차하여 실정을 진달하는 거사가 없는가? 조경의 죄는 만일 응지한 것이 아니었다면 양사에서의 논율(論律) 또한 너무 가벼운 듯하다. 그러나 지금 심하게 처벌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나의 뜻도 대신과 동일하다. 윤비경의 분노한 말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대에게는 잘못한 바가 없으니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5월 13일 신유
호조가 경창(京倉)의 대두(大豆) 1만 5천 석을 경기 고을에다 나누어 주어 파종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고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숫자대로 바치게 하여 경창으로 수납해서 가을 뒤에 잇달아 쓸 수 있는 밑거리로 삼도록 주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우참찬 송준길, 호군 이유태, 영중추 정유성(鄭維城)을 인견하였는데,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도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요즈음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 매우 참혹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온통 우려해야 될 일들이니, 조정이 안정되고 대소 관리들이 공경하고 합심한다 하더라도 재앙이 없어지기를 바라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조정은 모양이 아름답지 못하니 어찌 크게 염려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하들은 오직 성상께서 사(邪)와 정(正)을 환하게 분별하여 힘써 진정시키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최유지의 인피하는 글에 대한 비답은 크게 뭇 신하들의 마음을 고무시켰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윤비경의 뜻을 관찰하건대, 대신이 진달한 것을 가지고 조경을 몰래 비호하였다고 하면서 힘껏 멋대로 공격하고 배척하였지만, 최유지가 인피하는 내용은 그 뜻이 매우 화평하였기 때문에 너그러운 비답으로 답을 하였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윤비경의 뜻 또한 어찌 다른 것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대각의 논계가 한창 펼쳐지는 때에 대신이 처벌하지 못하도록 앞질러 주청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이 안정되지 않음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가. 백헌(白軒)은 【이경석의 호이다. 이경석이 선조(先朝)의 노상(老相)으로 혼자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의 호를 부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인피하고 들어갔고 우참찬 역시 떠나기를 구하니, 모양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대신들의 뜻은 진정시키는 데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시끄러운 단서를 이루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자, 정유성이 아뢰기를,
"조경의 상소가 비록 아주 도리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만일 혹시라도 심하게 다스린다면, 아마도 조정이 더욱더 시끄럽게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삭출(削黜)하는 처벌은 조경에게는 오히려 가볍겠지만 내가 윤허하지 않는 것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윤비경은 내가 굳게 고집하는 것도 대신의 말에서 연유하였다고 여기니, 어찌 망령되지 않은가."
하였다. 정유성이 아뢰기를,
"송준길이 올라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만약 내려가면, 바깥 사람들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하고서 반드시 그가 떠나는 것 또한 대신이 조경을 구원한 것 때문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또 들으니 이유태도 떠나기를 구한다고 합니다. 모름지기 이 두 사람을 만류하여야 조정의 의논을 진정시킬 수 있겠습니다."
하고, 홍명하는 아뢰기를,
"송준길이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기필코 떠나야 할 의리가 있다고 여기는데, 신은 그것이 그런가를 모르겠습니다. 설사 일의 형세가 다소 불편하기는 하나 지금의 시사(時事)를 돌아 보건대 어떻게 뜻을 따라 물러나기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지금 물러나는 기회를 놓쳤다가 앞으로 혹시 대단한 사건이 있게 되면 성상께서 비록 신에 대하여 한탄을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소인이 늘 간사한 말을 떠들어대며 경을 몰아내려고 하는데, 경이 만약 내려간다면 이는 윤선도의 무리로 하여금 그 계책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 이르렀는데 신이 어찌 감히 마음에 품었던 바를 모두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윤선도는 본래 한 세상의 배척을 받았으니 그의 상소가 참으로 깊은 원한에서 나왔겠으나, 조경의 경우는 그 사람을 어찌 윤선도에게 비교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상소한 내용에 또 윤선도가 말하지 않은 내용이 있으니, 진실로 성상께서 분명히 통촉하지 아니하셨다면 신이 어찌 감히 자신을 온전히 하고 친족을 보전하기를 바랄 수 있겠으며 편안하게 물러나기를 일반 사람들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한번 조경의 상소가 나온 뒤로부터 인심이 흉흉하고 두렵게 여겨, 모두들 놀라운 기미가 조석(朝夕)에 달려 있는 것처럼 여기니, 시사(時事)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움이 아직도 다하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경이 세 조정을 두루 섬기면서 자못 명망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일이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자, 정유성이 아뢰기를,
"이유태가 일찍이 선조(先朝)에 있으면서 이미 조경의 간사함을 알았으니,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할 만합니다."
하니, 이유태가 아뢰기를,
"신이 정말로 스스로의 자질을 헤아리지 못하고 일찍이 망발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어찌 미리 내다보았다고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유성이 아뢰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이러한 곳을 분변하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이토록 환하게 분변하셨으니, 어찌 송준길 한 사람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실로 종묘 사직과 백성들의 복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경의 상소가 비록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려고 하였으나 그 간사한 양태에는 스스로 가리기 어려운 바가 있다. 윤선도가 예(禮)를 논한 설(說)은 나의 견해와는 구절마다 어긋나는데, 복제(服制)에 관한 한 건이 어찌 정통성에 관여되겠는가. 판중추 【송시열.】 가 만약 정통으로 선왕을 허여하지 않았다면, 나의 사사로운 인정이 어찌 윤선도만도 못하였겠는가. 그런데 조경이 이렇게 말한단 말인가."
하자, 정유성이 아뢰기를,
"윤선도가 늘 이 말을 가지고 스스로 기화로 여겼었는데 조경이 또 따라서 화답을 하였으니, 성상께서 분변하여 배척하지 않으셨다면 시사(時事)는 거의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의 지나친 염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 혹시 끝까지 이 마음을 지니지 못하시어 결국 화(禍)를 전가하는 일이 일어날까 걱정이 됩니다."
하고, 송준길은 아뢰기를,
"신이 언제나 옛날 사람의 일을 끌어다 스스로 견주는 것은 참으로 감히 할 수 없는 바입니다만, 만약 만난 형세를 가지고 말한다면 어찌 현명하고 어리석은 구별이 있겠습니까. 선조(宣祖) 계미년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이(李珥)가 올라온 지 얼마되지 않아 바로 물러갔습니다. 대체로 인정(人情)이 어찌 평생토록 배운 바를 지닌 채 물러나서 숨기를 기꺼이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 당시의 형세가 틀림없이 크게 불안했던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못난 신은 펴볼만한 학식이 참으로 없고 그 형세를 말한다면 또 계미년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비록 경연에 참여하여 길이 성상을 뫼시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건의 시비는 벌써 지난해에 정해졌다. 조정이 안정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계미년과 같지는 않다. 경에게 무슨 혐의스럽게 여길 바가 있겠는가. 이치에 맞지도 않게 조경처럼 말하는 자가 비록 수천 수만 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의 뜻은 견고하게 결정이 되었으니 어찌 동요되어 바꿀 리가 있겠는가. 내가 만약 경을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필시 이토록 애써 만류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은 어찌하여 이와 같이 말을 하는가?"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성상께서 털끝만큼이라도 신임하지 않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며, 또 저들의 말에 놀라거나 동요가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에게는 오늘처럼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선조(先朝)에서 이미 적합한가 시험하여 성과가 없었는데, 성상께서는 이렇게 못난 신을 어디다 쓰시겠습니까. 신으로 하여금 머물러 있게 하여 국가에 이익이 되고 조정이 진정될 수만 있다면 신이 힘을 다하다가 넘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마는, 신이 이 두 가지 과제에 대하여 한 가지도 성과를 이룰 수 없으니 신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어서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온 나라의 인망이 돌아가는 대상들이니 떠나고 머무는 것이 실제로 국가의 경중(輕重)에 관계되는데 어찌하여 머물러 있어도 보태는 바가 없다고 하는가?"
하자, 정유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이 매우 간절한데 송준길이 어찌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송준길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지금이 어떠한 시기인데 조정의 걱정을 염려하지 않고 갑자기 자신만 벗어나서 돌아가려고 하는가."
하면서, 또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 만약 이 사람을 만류하지 못한다면 조정은 끝내 진정시킬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염치는 사대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신이 비록 구차스럽게 머물려고 하더라도 그 염치에 있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박절한 사정이 있음을 우러러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어미의 산소를 옮기려고 하였습니다만 지금까지 못하여 평생의 큰 한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인정과 도리로 보아 차마하지 못할 바입니다. 번거롭게 소란을 떤 데 대한 처벌은 신이 감히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언제나 이것을 가지고 떠나기를 바랐었는데, 내가 윤허하지 않았던 것은 대체로 경의 진퇴는 물러나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오늘날의 형세로 보아 어찌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가볍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정세(情勢)는 만분 민망하고 두려운데도 성명께서는 오히려 모두 알지 못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어찌 신이 오거나 떠나는 것으로 털끝만큼이라도 국가에 덜리거나 보탬이 있겠습니까. 선조(先朝) 때에는 유학(儒學)하는 인사가 드물었기 때문에 신과 같이 못난 자도 유신(儒臣)의 예로 대우를 받게 되었고 잘못된 은혜가 더욱 융숭하여 뭇 신하들을 버리고 떠나시던 날까지 쇠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이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언제나 선왕에게 보답하고 전하에게 충성하여야겠다는 뜻을 마음속에 스스로 맹세하였으니, 지금 초야로 물러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차마 잠깐인들 성상을 잊겠습니까."
하고, 인해서 제왕(帝王)의 학문하는 방법을 잇달아 길게 수백 마디를 열거하였다. 상이 이유태에게 이르기를,
"올라온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기필코 떠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이유태가 그의 어미의 병이 매우 위중하여 인정과 사리가 민망하고 박절한 상황을 진달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정유성이 후하게 은혜를 베풀어 구휼하도록 주청하니, 상이 해조에 영을 내려 양식과 반찬을 보내게 하였다. 정유성과 홍명하가 또 대신에게 유시를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빨리 출사하게 할 것을 주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4일 임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다시 출사하여 일을 보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등대(登對)하였을 때에 망령되이 마음에 품었던 바를 진달하여 물의(物議)가 모두 그르다고 하게 하였으니 인입(引入)하여 죄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어 여러 날 직무를 비워두었는데 죄가 더욱 쌓였습니다."
하고,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이 대관(臺官)의 인피한 내용을 보니, 신들을 매우 준엄하게 배척하였으며 의율(擬律)만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신이 바야흐로 물러나 사실(私室)에 엎드려 있으면서 황공하고 두려워 몸둘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처벌을 더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근시(近侍)를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하실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더욱 극도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안심하라. 경들은 실수한 것이 없으며 조경을 논한 일은 나의 뜻도 경들과 같으니 대체로 말한 것을 가지고 죄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떠들어대는 말을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윤비경이 인피한 내용은 자못 강직한데, 대각의 신하는 참으로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니 성상께서는 윤비경을 옳다고 하여 말하는 자들을 오게 하고 신들을 그르다고 하여 공론에 답함으로써 여론을 진정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심지원은 아뢰기를,
"조정이 화합을 이룬 뒤에야 나랏일을 제대로 해볼 수가 있는 것인데, 지금 논의가 이와 같이 시끄러우니 마침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들으니, 송준길이 상소를 올려 물러나기를 바라는데 돌아갈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필코 이 사람을 만류시켜야만 조정의 의논을 진정시킬 수 있으니 경솔히 물러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조경의 상소 가운데 효종을 위하여 좌단(左袒)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송준길이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대체로 이 때문입니다. 만약 윤선도로 하여금 좌단을 하였다고 한다면 신과 송준길은 함께 우단(右袒)한 자가 되니 신 또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선도의 허다한 이야기는 대저 내가 대사(大事)에 미진하였다는 것이며 그가 지척(指斥)하는 바도 모두 나 자신에 있는데 경들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자, 정태화도 힘써 송준길을 만류하도록 주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끝까지 만류하여 그치도록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조정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연후에 돌아가도록 허락하겠다."
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가 종묘의 조천(祧遷)하는 예를 가지고 송시열이 논한 바가 고례(古禮)에 매우 합당하다고 칭찬하고 또 인종(仁宗)·명종(明宗) 두 묘(廟)가 소목(昭穆)을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을 극력 주장하니, 호조 판서 허적도 옳게 여겼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송시열이 고례를 고집하는 것이 매우 바르기는 하지만 우리 조종(祖宗) 또한 성인(聖人)입니다. 3백 년 뒤에 그 남긴 제도를 고친다는 것은 아주 매우 어려울 듯합니다. 더구나 형제가 소목을 같이 하는 것은 또 당(唐)·송(宋)의 예인데도 조종이 그것을 고치지 않았는데, 지금 고친다면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들으니 창덕궁(昌德宮)을 수리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자,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자주 이어(移御)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이곳으로 옮긴 것은 대체로 궁중에 재변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곳에 온 뒤에도 그곳과 차이가 없기에 다시 들어가려고 한 것이다."
하자, 병조 판서 홍명하가 아뢰기를,
"창덕궁에는 재이가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원유(苑囿)가 훌륭하므로 식견이 있는 자들은 혹시라도 성상께서 편안히 즐기는 데에 뜻을 둘까 우려합니다."
하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는 몸과 마음을 바로 수양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니, 어찌 원유의 크고 작은 것을 가려서 하겠는가."
하고, 인해서 수리를 우선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헌납 김우석(金禹錫)이 아뢰었다.
"삼가 대신의 차본(箚本)을 보니 만약 조경을 처벌한다면 아마도 성조(聖朝)의 과실이 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조경을 처벌하도록 아뢰는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임금을 인도하여 과실을 저지르도록 하였음을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직하소서."
5월 15일 계해
《실록(實錄》을 찬수한 공로에 대하여 상을 내렸다. 총재관 영중추부사 이경석에게는 안구마 1 필을 내리고, 도청 당상 병조 판서 홍명하·고 지중추부사 채유후(蔡𥙿後)·병조 참판 이일상(李一相)·도청 낭청 응교 김수흥(金壽興)·부응교 심세정(沈世鼎)·수찬 목겸선(睦兼善)·양주 목사(楊州牧使) 조귀석(趙龜錫)에게 아울러 가자하도록 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각기 마필(馬匹)과 마장(馬裝) 그리고 궁자(弓子) 등의 물품을 내려 주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송준길이 강가로 나갔으며 돌아갈 계획이 이미 결정되어 되돌아 들어올 뜻이 없다고 하니, 별도의 추가로 유시하는 거사가 있어야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돌아가기를 결단하려고 함을 듣고 내가 매우 놀라고 한탄하였다. 이미 가토(加土)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으면 어찌 이토록 급하게 서둘러 나로 하여금 양 손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게 하는가. 행색(行色)이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한번 만나보지 않을 수 없으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체득하여 지극히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고, 승지에게 속히 가서 유시를 전하게 하자, 송준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신이 불행하게도 이렇게 천지 사이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비난을 만났으니 즉시 스스로 인퇴하여 자신의 자취를 거두고 잘못을 반성하면서 남들의 말에 사례하여야 하는데도 머뭇거리면서 돌아다보고 아직까지 지체하는 것은 실제로 국상(國祥)을 따라 참여하고서 인정과 사리를 펴며 성상을 대면하여 충정을 드러내려고 하였었는데, 이제 이미 바라던 바를 모두 완수하였으니 다시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어제 성상의 하교를 받으니 매우 간절하여 신하의 분수와 의리로 감히 갑자기 떠나기를 결정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이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신이 무술년019) 봄에 여러 번 돌아가기를 간곡히 바라는 글을 진달하여 선대왕으로부터 은가(恩暇)를 받아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났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목이 메이는 슬픔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지금 신은 바야흐로 어미의 분묘(墳墓)에 가토(加土)를 해야 합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선왕이 이미 행하신 전례를 따라, 휴가받아 쉬고 싶어하는 신의 소원을 허락하시어 조용히 내려갔다가 뒷날 다시 오도록 해 주소서. 그러면 위 아래 모두가 예의가 다 갖추어지고 의리가 보전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나의 뜻은 대면하여 유시했을 적에 다 말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가토하는 일은 지금 장마철을 만났으니 적당한 시기가 아닌 듯하다. 다시 대면하여 유시하겠다."
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 교리 이민서(李敏敍)가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요즈음 시사(時事)는 한없이 서글프며 현상[景色]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송준길은 산림에서 오래도록 덕망을 쌓은 사람으로 애당초 세상 일을 잊은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올라온 지 오래되지 않아 이러한 낭패를 당하여 성상께서 비록 통렬하게 분변하셨어도 그래도 떠나기를 바라면서 그만두지 않으니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판중추 송시열 역시 올라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지금은 기피(忌避)할 바가 없으니 사대(賜對)하는 거조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참찬의 처소에 일찍이 대면하여 유시하겠다는 하교를 하였는데 강가에서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가?"
하자, 도승지 박세모(朴世模)가 아뢰기를,
"아직도 강가에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옛날부터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도리는 반드시 그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으며 또 일로써 얽어맨 연후에야 머물게 할 수 있었습니다. 성상께서 바야흐로 편찮으시니 비록 날마다 경연을 열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만약 한가한 여가에 자주 접견하여 함께 경서(經書)의 뜻을 토론하신다면 그가 충성하려고 하는 바도 일찍이 여기에 달려 있으니 어떻게 마음으로 결단하여 떠나려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민서는 아뢰기를,
"유계의 말이 옳습니다. 성상께서 지성으로 강학(講學)하면서 흉금을 털어 놓고 성의껏 인도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부여하신다면 그가 감히 쉽사리 물러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니, 유계가 아뢰기를,
"신이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의 상소를 가져다 보니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을 낱낱이 진달하였는데, 그 까닭을 미루고 캐내어 권시(權諰)와 조경(趙絅)의 죄를 논한 것으로 돌렸으니 그 마음씀이 매우 편벽됩니다. 그대로 대각의 직임에 있도록 할 수 없으니 체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대간이 진실로 마음을 놓기 어려운 정세(情勢)가 있으면 참으로 사건을 근거로 인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공의(公議)가 이미 정해진 뒤에 다시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켜 한갓 떠들썩하게 하는 것을 일삼는다면 일의 체계에 부당할 뿐만 아니라 역시 일을 회피하려는 자취를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헌납 김우석(金禹錫)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대간이 일을 의논하는 것은 충분히 상의를 해야 하는 것인데, 중론(重論)이 이미 나왔으니 말감(末減)하는 율(律)을 구차스럽게 지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지평 권격(權格)은 의율(擬律)의 경중(經重)을 사소하게 다투다가 인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일이 아주 근거가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민서가 또 아뢰기를,
"무릇 이른바 응지(應旨)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말한 것이 구언(求言)하는 취지에 맞지 않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간사한 사람이 남을 해치거나 참소하며 간사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경우는 심하게 처벌하고 통렬히 배척하여 그로 하여금 마음을 내지 못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인이 징계되는 바가 없어 화를 일으키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요즈음 윤선도와 조경의 사건은 성상께서 참으로 이미 환하게 아시며, 대각의 논계가 거세게 발의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쾌하게 따르지 않으시니, 신은 삼가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깁니다. 옛날부터 간흉(奸兇)이 간사한 말을 떠들어대어 임금을 동요시키고 착한 무리들을 해롭게 하여 마침내 국가를 텅비게 한 것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 처음의 실마리는 아주 미약하지만 필경에는 화를 전가하여 차마 말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이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에 대한 설은 말의 의미가 위태롭고 관계됨이 매우 중대하니 뒷날의 화근을 참으로 깊이 염려하여 막거나 끊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유계는 아뢰기를,
"옛날 송(宋)나라 철종(哲宗)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선인 태후(宣仁太后)가 발을 드리우고 함께 정치하면서 사마광(司馬光)·여공저(呂公著)와 같은 현인들을 모두 불러다 신종(神宗) 희령(熙寧)과 원풍(元豊) 때에 백성을 괴롭히던 정치를 모두 혁파하니, 천하의 인심이 아주 흡족하게 다스려지는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다만, 말하는 자가 희령과 원풍 때의 뭇 소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청하면 선인 태후가 차마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 끝내 모두 제거하지 못했었습니다. 때문에 선인 태후가 돌아가고 난 뒤에 뭇 소인들이 때를 틈타 현인들을 죄에 빠뜨리고 마침내 희령과 원풍 때의 일을 계승해야 하는 것이라고 지목하여 말하면서 원우(元祐)020) 의 정치를 다 뒤집어, 한 때의 제현들이 거의 모두 벼슬이 강등되거나 쫓겨났습니다. 당시의 화(禍)는 지금까지 마음을 놀랍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 경계할 만한 곳입니다."
하니, 이민서가 아뢰기를,
"좌단(左袒)하였다는 설은 그 의도가 매우 참혹하여 희령과 원풍 때의 일을 계승해야 한다고 핑계를 댄 데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만약 통렬히 배척하여 단절하지 않으면 아마도 뒷날 간사한 사람들이 틈을 타서 일어날 듯하니 그 화(禍)는 소성(紹聖)021) 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계는 아뢰기를,
"우리 국가가 불행하여 그전부터 사류(士類)라고 불리워진 자는 여러 차례 참화(慘禍)를 당하였기 때문에 기묘년022) 과 을사년023) 뒤로 사람들이 유자(儒者)라는 이름을 꺼리게 되었으니, 세상의 도의가 변한 것이 참으로 한심스럽게 여길 만합니다."
하니, 이민서가 아뢰기를,
"나라가 위태로운 때이니, 초야의 유현(儒賢)을 널리 불러들이기에 겨를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송준길 같은 이도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 없어 이렇게 물러나려는 뜻이 있으니, 그 보고 듣기에 어떻겠으며 시사(時事)에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간사한 말이 떠들썩하여 이 사람을 불안하게까지 하였으니, 내가 매우 마음이 아프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윤선도의 간악한 죄는 심리(審理)하는 가운데 두어서는 안 되는데, 언관이 쟁론을 하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답답해 하며, 더러는 성상께서 흉인을 용납하여 덮어준다고들 여깁니다."
하고, 이민서는 아뢰기를,
"윤선도의 사건은 참으로 말할 것이 못 되지만 조경이 틈을 타서 잇달아 일어난 것은 정상이 더욱 참혹하여 결단코 그냥두고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의심이 많은 사람은 참소꾼의 참소를 불러온다.’ 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그 정상을 아시면서도 대각의 논계에 대하여 이렇게 머뭇거리며 어렵게 여기시니, 신은 시사(時事)가 오히려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있게 될까 염려됩니다. 옛날에는 조당(朝堂)에다 방(榜)을 써붙여 나라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였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간사한 사람을 징계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후련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성상의 하교를 한 장의 종이에다 써서 그 죄를 분명히 바로잡고 중앙과 지방에 성토하기를 조당에다 방을 써붙이는 것처럼 한다면 뭇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윤비경의 상소가 과격하기는 하였으나 성상께서 너무 심하게 기를 꺾어 심지어 경망하고 무식하다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대신(大臣)을 위안하는 뜻에서 나오기는 하였습니다만 대신(臺臣)이 한번 대신을 배척한 데 대하여 성상의 하교가 매번 이와 같으니 누가 다시 대신의 일을 말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말을 갑자기 발설했던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하자, 유계가 아뢰기를,
"임금의 말은 매우 중대하여 한 마디의 칭찬은 고운 곤룡포보다 더 빛이 나고 한 마디의 위엄은 형구로 쓰이는 도끼보다 더 두려우니, 임금의 말은 털끝만큼이라도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늘 대소 신료가 화합하여 진정시키기를 힘쓰려고 한다. 대체로 대신은 국가에서 소중히 여기는 바이니, 만약 혹시라도 잘못이 있으면 대간이 곧바로 죄를 주청하는 것은 가하겠지만, 어찌 그 인피하는 내용을 인해서 이렇게까지 침해하고 배척할 수 있겠는가."
하자, 유계가 아뢰기를,
"대각(臺閣)의 말은 언제나 완곡하지가 못하여 과격하고 흥분하게 됨을 면하지 못하니, 임금이 단지 포용하여 용서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윤선도를 그대로 삼수(三水)에다 유배시키도록 명하였는데, 대각의 논계를 따른 것이다.
정언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조경은 세 조정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개인이 있는 줄만 알고 국가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여, 구언(求言)하는 전지(傳旨)를 인해서 감히 시험할 계책을 멋대로 부렸으니, 그의 음험하고 교활한 심정과 태도는 부인이나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윤선도의 예(禮)를 논한 상소는 모두가 음흉한 도적의 마음에서 나왔기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경이 나이 많은 중신(重臣)으로 어찌 그 시비를 모르기에 감히 방자한 뜻으로 죄가 없음을 변명하며 구원하기를 돌아다보며 꺼리는 바가 없이 합니까. 그의 죄악을 엄폐시킬 뿐만 아니라 도리어 충성을 다한 것으로 포양(褒揚)하며 끌어다 비유하기를 차례가 없이 하며, 내용이 흉칙하고 참혹하여 위로는 임금의 청문을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한 세대를 두렵게 하고 동요시키려고 하니, 그의 마음 쓰는 자취를 추구하여 보면 죄가 윤선도보다 지나칩니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는다면 장차 악(惡)을 징계할 수 없을 터이니 결단코 응지(應旨)한 것이라고 여겨 용서하는 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전 판중추 조경을 빨리 먼 곳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5월 16일 갑자
강도미(江都米) 2천 석과 대두(大豆) 2천 석을 경기 연해(沿海)의 각 고을에다 나누어 대여해 주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도로 바치도록 하였는데, 교리 이민서의 주청을 따른 것이다. 비국이 이 주청을 인해서 수어사(守禦使)에게 영을 내려 군량미를 남한 산성 소속의 고을에다 나누어 대여하도록 바라니, 상이 따랐다.
지평 최유지가 아뢰기를,
"조경이 응지를 핑계대고 윤선도를 변명하고 구원한 죄를 양사가 논열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민망하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윤선도가 예(禮)를 논의하는 것에 핑계대어 남을 해치려고 하는 마음을 드러내려고 한 것은 무릇 인심(人心)이 있는 자이면 매우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경은 세 조정을 섬긴 나이 많은 신하로서 그 남은 논의를 고무 선동하며 포양하고 부식(扶植)하기를 못하는 짓이 없이 하면서 감히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할 말을 문자(文字)로 나타내어 방자하게 올렸으며,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의 설을 가지고 ‘윤선도의 그 마음이 빛이 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이토록까지 말이 사리에 어긋나고 거만한 것입니까. 만약 윤선도의 논의가 정말 조경이 상소한 내용과 같다면 애당초 예를 논의할 적에 조경이 어찌하여 한 마디 말도 없었으며, 윤선도를 처벌하던 때에도 또 어찌하여 한 마디도 없었다가 지금 해를 넘긴 뒤에 처음으로 이 말을 발설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그 마음이 과연 국가를 위해서 나왔겠습니까, 윤선도를 위해서 나왔겠습니까? 마음씀이 음흉하고 참혹하며 마음의 자취를 엄폐하기 어려우며, 그가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며 현란시키고 간사한 것을 돕고 악한 무리와 편당을 만든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의 명분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삭출(削黜)한 것으로 그의 죄를 논하는 것을 정지할 수 있겠습니까.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우참찬 송준길이 강교(江郊)에 나가 있으면서 상소하여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는 주청을 거듭하니, 상이 답하였다.
"승지가 떠나는 편에 막 나의 뜻을 다 말하였는데 다시 무슨 유시할 것이 많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경이 벌써 이해할 터인데 그래도 한번 만나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경과 나 사이에 어찌 이리도 정의(情義)가 서로 미덥지 못한가. 생각은 많으나 말이 궁하여 마음에 쌓인 바를 다 털어 놓지 못하고 단지 서로 만나보기만을 바라니, 경은 모름지기 들어와서 지극한 소망을 조금이나마 풀게 하라."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의 사비(私婢) 견옥(見玉)이 한 태(胎)에 세 쌍둥이를 낳았다. 일찍이 갑오년024) 에도 세 쌍둥이를 낳아 모두 생존하여 있으니 기이한 일이다.
5월 17일 을축
집의 심세정이 아뢰기를,
"전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은 여러대 조정의 은혜를 받아 관직이 재상의 반열에 있고 경기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살면서 국상(國祥)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어미의 병 때문에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면 의당 그 사정을 진달하고 삼가 처벌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감히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았으니 마음씀이 치우치고 그릅니다. 심지어 요즈음의 재변에 대하여 그 허물을 간사함을 배척하는 의논에다 돌리려고 하기까지 하였으니 말이 사리에 어긋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심지원이 상차하여 송준길을 만류하도록 주청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을 내렸다.
5월 18일 병인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헌납으로, 정박(鄭樸)·민여로(閔汝老)를 장령으로, 박승건(朴承健)을 지평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판서로, 조형(趙珩)을 형조 판서로, 임한백(任翰伯)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대사간 조복양 등이 재변을 인하여 상차하였다. 대략에,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처음에 학문에 전적으로 정진하시어 유신을 높이고 예우하자, 온 나라의 신민들이 귀를 기울이고 눈을 닦으며 태평을 상상하며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신이 조정에서 불안을 느끼고 서로 잇달아 도성을 떠나고, 성상의 기거(起居) 또한 불편하신 지 해를 넘기게 되어 경연에 나아가 학문을 강마하는 일을 마침내 정폐(停廢)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일월(日月)은 쉽게 지나가는데 다스림의 성과는 막연하기만 하니, 뜻이 있는 인사는 강개하며 몰래 탄식합니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천의(天意)도 알 수 있는데, 인애(仁愛)로운 하늘이 이런 재해를 가지고 우리 전하를 경계하고 고무시켜 훌륭한 임금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천하의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질로서 진실로 의리를 환히 살피고 큰 뜻을 세워 옛날의 철왕(哲王)을 기필코 배울 수 있다고 여기고, 언제나 성현(聖賢)의 글을 읽거나 성현의 일을 볼 때를 당해서는 문득 자신을 그 입장에 처하게 하고 자신의 임무로 삼아 진실되게 알고 실천하며, 정일(精一)한 공부를 더하여 결단성 있게 자기 한 몸의 사사로움을 이기고 순수하게 천리(天理)의 공정한 데로 돌아가도록 한다면, 바로 이러한 일념은 문득 위로는 천심을 감동시킬 수 있고, 아래로는 백성의 소망에 답할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조정 안에는 체통이 서지 않아 모든 관원이 공부를 게을리하여 온갖 일들이 무너지고 폐지되었으며, 이서(吏胥)의 무리들은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요긴한 실무를 맡아 백성들의 피땀 흘린 이익의 절반이 그들의 수중으로 들어가지만 누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이 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나라가 형편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법령을 거듭 밝히고 관원을 다잡아 독려해서 육부(六部)의 장관은 낭속(郞屬)과 해당 소속의 관사를 감독하고 통솔하여, 각기 맡은 직무를 집행하게 해서 이서의 무리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용납될 수 없도록 하며, 육부의 득실에 이르러서는 삼공(三公)이 묻고 고찰하여 바른 표준을 세운다면 체통은 세울 수 있고 모든 정사는 시행이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사치의 화는 하늘의 재앙보다 심하므로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반드시 먼저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며 이끌었습니다. 근년에 와서 사치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법령이 시행되지 않고 심지어 여항의 하인배들까지도 복식(服飾)의 참람됨이 제한이 없으니, 금지하는 조항을 엄격히 세워 오부(五部)의 각방(各坊)에다 알리고, 법을 집행하는 관원을 오랫동안 재임하게 하여 금지시키고 제한하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몸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며 영(令)이 행해지는 것은 반드시 몸소 행하는 것을 말미암으니, 구중 궁궐 안에서 오로지 순박하고 진솔한 것을 힘쓰고 궁가를 경계하고 신칙하여 모두 절약하고 검소하는 것을 따르게 하여 백성들의 풍속을 인도하고 통솔하는 방법을 삼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궁가의 장토(庄土)는 모두 일정한 한계가 있으니, 대군과 공주는 2백 25결이고 왕자와 옹주는 1백 80결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궁(諸宮)의 장토를 곳곳에다 개설하여 많은 이는 간혹 1천여 결이 넘기도 하는데, 민전(民田)을 침탈하고 궁노가 폐단을 일으키는 것이 끝이 없어 백성들이 부르짖고 원망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한결같이 법을 따름으로써 새로운 전례를 만드는 경우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인해서 정성과 예의를 더욱 더하여 산림에서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조정에 모여 성덕(聖德)을 인도하며 정치를 돕게 하도록 바라니, 상이 답하기를,
"경계한 말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궁가 전결에 대한 일은 바야흐로 변통하려고 하면서도 못하였다. 조용히 상의하여 조처하겠다. 그대들은 더욱 정성을 다하여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를 보충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복양이 일찍이 대사간이 되었을 적에 헌납 오두인(吳斗寅)과 정언 윤변(尹抃)이 연명(聯名)하여 상차하였었는데, 이날에야 비로소 비답이 내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31면
【분류】과학-천기(天氣) / 왕실-경연(經筵)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정론-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농업-전제(田制) / 인사(人事)
5월 19일 정묘
행 호군 이유태가 어미의 병 때문에 상소하고 돌아가니, 상이 답하기를,
"어미의 병이 만약 위중하다면 떠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고, 인해서 말을 지급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5월 20일 무진
행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지난번 조경의 상소에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며 현혹시킨 것은 참으로 놀랍고 괴이하게 여길 만한데, 성상께서 환히 아시고 즉시 통렬히 배척하는 하교를 내리셨으며, 또 파직하는 벌을 시행하였으니, 그래도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밝혀 시비가 정해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구언(求言)하는 때를 당하여 이미 응지(應旨)하였다고 핑계를 대었다면 멀리 귀양보내는 율을 더하는 것은 아마도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요즈음 논의가 너무나 과격하여 진정될 기약이 없으며, 대간의 논계가 한창 펼쳐지고 있는데 신의 그릇된 견해가 이와 같으니, 형세로 보아 수석(首席)에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체임하소서."
하였는데, 지평 최유지가, 김남중이 인피한 내용이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감히 처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정언 이동명(李東溟)도 인피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김남중은 체임하도록 하고 최유지와 이동명은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였다. 대략에,
"오래된 죄범은 매우 중하며 준엄한 비난은 번갈아 보태지는데, 이번에 와서 삼가 들으니 중신(重臣)이 상소하여 시끄러운 단서가 다시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실제로 모두가 신을 말미암은 것이기에 신은 더욱 넘어뜨려져 몸둘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빨리 상소하여 스스로 처벌을 받으려고 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상위(喪威)를 만나고 천식(賤息)이 전염병에 걸렸는데, 성상의 하교로 즉시 거처를 옮겼지만 감히 갑자기 군주의 위엄을 번거롭게 하지 못하여 그전대로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은 지 지금 벌써 반달이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보잘것없는 정성을 쏟아 신의 죄를 다스리시어 근거없는 의논이 그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과 나 사이에 어찌 깊이 미덥지 않아 허물을 끌어대기를 여기에 이르도록 하는가. 내가 의당 대면하여 유시할 터이니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인천 부사 민주면(閔周冕)이 상소하였다. 대략에,
"경기 지방이 크게 기근이 든데다 또 청나라 사신이 나오게 됨을 만나 백성들이 분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상평청에 명하여 경기 일로(一路)의 마부와 말의 고가(雇價)는 얼마가 들어가야 적당한가를 통틀어 계산하여 우선 본청에 있는 쌀을 가지고 각 고을의 크고 작음을 따져서 차등 있게 나누어 주게 하소서. 또 충훈부, 태복시와 훈련원·어영청 두 군문(軍門)에 명하여 각기 저축해 둔 은·포를 내어 본청으로 이송하도록 하여 지용(支用)한 숫자를 채우도록 하소서."
하니, 비국이 복계하기를,
"경사(京司)에 저축해 둔 미곡을 대여해 주고 그 대가는 본읍에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도로 갚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1일 기사
김휘(金徽)를 형조 참판으로, 권대운(權大運)을 형조 참의로, 홍중보(洪重普)를 공조 판서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성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의로, 김좌명(金佐明)을 동지성균관사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정유성(鄭維城), 제조 홍명하(洪命夏), 부제조 남용익(南龍翼) 및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입시하여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의식을 의논하고, 인해서 승지 원만석(元萬石)을 파주(坡州)에 보내어 교영(郊迎)하는 의식을 없애도록 청원하였는데, 그것은 상의 종기 환후가 회복되지 않아서이다.
고 판서 채유후(蔡𥙿後)에게 자급을 뛰어넘어 증직(贈職)하도록 명하였다. 채유후는 《실록》을 찬수한 공로로 정헌 대부의 자계에 승진하여야 당연한데, 죽은 사람에게는 일찍이 가자(加資)한 사례가 없었으므로 영의정 정태화가 상에게 품계를 변경시켜 추증하도록 아뢰었기 때문에 자계를 승진시켜 숭정 대부 좌찬성으로 증직하였다.
공조 참판 김좌명이 고향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인해서 호남의 지방관으로 나아가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게 하도록 청원하니,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렸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미 비국 유사(有司)의 직임에 있으니 대동 절목(大同節目) 또한 여기서 헤아려 처리할 수 있으며 자신이 직접 그 지역에 부임한 연후라야 바야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 23일 신미
장령 정박이 인피하기를,
"본부에서 바야흐로 전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을 논하는데, 신은 조수익과 가까운 일가라는 혐의가 있어 감히 그 사이에서 가타부타 할 수 없습니다. 또 조경의 일에 대해서도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미 구언하는 하교를 내리고서 도리어 응지(應旨)한 사람을 논한다면 사람들이 앞으로는 말하기를 경계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파직시킨 뒤에 논의가 너무 격렬하고 의율(擬律)이 점차로 무거워지니 화평하는 현상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신의 그릇된 견해가 이와 같아 이것으로나 저것으로나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지평 박승건(朴承健)이 처치하기를,
"법 밖의 혐의를 둘러대는 것만도 구차스러운데 더구나 구언하는 하교가 있었음을 가지고 비호하는 자료를 삼으니 의견이 어긋나고 글렀습니다. 체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4일 임신
상이 침을 맞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판중추 가 피병소(避病所)로 옮겨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내게 질병이 있어 아직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내일은 객사(客使)가 서울에 들어올 터이니 시끄러운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모레 입대(入對)하라는 뜻을 사관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도록 하라."
5월 25일 계유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편전에서 접견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가 입시하였다.
5월 26일 갑술
조형(趙珩)을 대사헌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장령으로, 남두병(南斗柄)을 총융사(摠戎使)로, 구문치(具文治)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청나라 사신 및 대통관(大通官) 등이 관소(館所)에 있으면서 중문(中門)을 굳게 잠그고 외부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교통할 수 없게 하였는데, 도감(都監)이 그 연유를 탐문하였더니 우리 나라에 기근이 매우 참혹하게 들었음을 듣고 절도당하는 근심이 있을까 염려하여 이런 거조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판중추 송시열을 인견하였다. 상이 울먹이자 송시열도 울먹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에 질병은 없었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의 자식이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자식 사랑하는 정을 견디지 못하여 직접 들어가서 구료하였습니다. 상께서 특별히 천신(賤臣)을 염려하여 나아가 피하도록 하셔서 다행히 전염을 모면하였으며,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신 명령이 신의 자식에게도 미쳤으니, 하늘같은 은혜가 한이 없습니다. 어찌 모두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병은 다른 증세와는 틀리기 때문에 경이 함께 거처하는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세월은 멈추지 않아 3년이 벌써 지났습니다."
하며, 말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니 상도 얼굴을 가리고 울먹였다. 얼마 있다가 이르기를,
"지난 기해년025) 에 경이 매우 급하게 도성을 떠났었는데 불안했던 내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당초에 윤선도가 이미 흉측한 상소를 올렸었고 이제 조경이 또 망측한 말을 발설하여 경과 우참찬이 모두 편안할 수 없었으니 효상(爻象)이 아름답지 못함이 어찌 이와 같은 때가 있겠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그 헌의(獻議)할 때를 당하여 송준길은 매우 간략하게 말을 하였었기 때문에 윤선도에게 얽어매임을 당하지 아니하였고, 신의 경우는 이야기가 길었기 때문에 더욱 혹독하게 무함을 당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禮)를 의논할 때에 경의 말만 전적으로 채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대신들에게 두루 물어서 결단하여 행하였다. 경과 대신은 모두 선조(先朝)에서 의지하고 믿던 이들이니 그 정성이 어찌 윤선도와 조경보다 못하겠는가. 대체로 그 말은 경을 무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나를 지목하여 배척하는 것이다. 만약 예를 논한 것뿐이라면 그 죄가 어찌 이처럼 무겁겠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윤선도와 조경이라 하더라도 어찌 고의로 상에게 반항하는 말을 하였겠습니까. 신의 망발을 인하여 엎치락뒤치락하며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애당초 신이 인용한 단궁(檀弓)이 갓을 벗고026) 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027) 는 등의 말은 단지 그 대의(大意)만을 취한 것인데 이것을 고집하며 말을 합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본 상소 외에 또 혹문(或問)을 마련하고 하나의 예설(禮說)을 지었는데, 신이 그 문자(文字)를 보고 그 뜻을 상세히 추구하면 신은 감히 천지 사이에 용납받지 못할 자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선도가 예(禮)를 의논하는 것으로 핑계대고 오로지 경들은 터무니없는 사실로 모함하여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 없도록 하였다."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까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음은 실제로 성상께서 굽어살펴 주심을 힘입은 것입니다만, 신의 발자취가 이와 같기 때문에 감히 잠시라도 서울에 머물지 못하며 단지 당시에 번거로운 문자를 망령되게 인용하였다가 이렇게까지 시끄러움을 일으킨 것을 한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반적인 논의를 일삼지 않고 반드시 상세하게 진달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고사(古事)를 많이 인용하여 그 뜻을 밝혔으니, 여기에서도 더욱 경의 충성심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그 말을 가지고 혐의를 삼을 수 있겠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올라온 것은 실상 편치 않았습니다만 만약 올라오지 않았다면 신이 품고 있는 원통함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없겠기에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상의 현명함을 힘입어 이 사건이 이미 환하게 풀려 소원을 이루었으니 만약 고향으로 돌아가서 죽도록 허락하신다면 지하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억울하게 악명을 듣는 경우가 예로부터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만 신처럼 참혹했던 자는 없었습니다. 신이 매우 사리에 어둡고 미련했기 때문에 자결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전국 시대의 인사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한다면 틀림없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실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간사한 사람의 무함하는 바를 믿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한 장의 문자(文字)를 가지고 남에게 악명을 억지로 씌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할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송준길이 낭패한 것은 단지 신에게 연좌되었을 뿐이며 실제로는 그에게 과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경우는 망발한 죄가 없지 않으니 만약 죄명을 더하지 않으신다면 천지 사이에서 몸을 용납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이 중용(中庸)의 도리를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한 마디 말의 잘못도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을 하는 사이에 간혹 사소한 망발이 있다 하더라도 무슨 말로 죄를 삼겠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그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영의정 정태화가 신을 불러 사람을 물리치고 조그마한 쪽지 하나를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연양(延陽)이 【이시백(李時白)의 군호(君號).】 보이는 것이오.’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궐 밖에 대왕 대비는 당연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논이 있다.’고 하였기에 신이 즉시 답하기를 ‘《예기》에 이르기를 「천자로부터 대부·사·서인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자가 후사(後嗣)로 서게 되면 차자의 복(服) 또한 삼년이 된다.」 하고, 그 아래 또 「서자(庶子)가 승중(承重)할 경우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아래 위의 말이 서로 반대가 된다. 또한 근거할 만한 선유(先儒)의 논의도 없다. 또 장자를 위하여 최복(衰服)을 입지 않는 경우가 네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서자가 후사가 되어 승중할 경우에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등의 말이 있다. 이른바 체이면서 정이 아니다[體而不正]라고 한 것은, 장자가 아니면서 장자가 되었기 때문에 정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정태화가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고례(古禮)로 논한다면 소현 세자가 정(正)이고 또 체(體)가 된다. 그러나 소현 세자가 만약 후사가 없었다면 나도 의당 예(禮)를 근거로 아뢰었을 터인데 일의 형세가 그렇지 못하니 장차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대체로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생각하기를, 국제(國制)와 명률(明律)에 장자나 차자를 논할 것 없이 단지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이것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 이것을 인해서 헌의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의 이 말은 나도 알고 있다."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하늘이 다하도록 원통하게 여기는 까닭은, 선왕께서 견마(犬馬)같이 미천함을 모르시고 신에게 한없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승하하신 뒤에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낮추거나 누르는 뜻이 있겠습니까. 지금 신에게 대항하는 자가 이것을 고집하며 말을 하니 신은 실로 원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정말로 낮추고 누르는 뜻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감히 경을 이와 같이 대우하였겠는가. 경과 나의 뜻은 이미 서로 다 말하였으니 지금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다."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성상의 뜻은 이와 같더라도 뭇 신하들의 의논은 다 그렇다고 할 수 없으므로 신이 이 때문에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종의 부정한 무리들은 이와 같다 하더라도 어찌 사람마다 모두 그렇겠는가."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어렵고 큰 왕업을 전하께 물려주셨는데 요즈음에 편찮으셔서 오래도록 경연을 폐하시니 신은 이것을 민망스럽게 여깁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의식을 갖출 필요없이 예절을 간략히 하여 유신(儒臣)을 자주 접견하시어 그들과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토론하신다면 보탬이 반드시 클 것이라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제나 눈 병으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참으로 한스럽다."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송나라 철종 초년에 선유(先儒)가 선인 태후(宣仁太后)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구속당하는 것을 괴롭게 여겨 경연에 나가지 않습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대저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아서 한가하고 사사로이 계시는 때에라도 자주 인접하셔야 가합니다. 지난번에 내국(內局)의 제조를 입시하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상복으로 대신을 보는 것이 불안해서일 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이 고향에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말할 만한 일은 없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내외나 대소간에 공변된 것이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함이 지금의 큰 병통입니다. 백성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강한 자는 일년 내내 역사(役事)가 없고 약한 자는 치우치게 그 괴로움을 당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기강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강이 서지 않은 것은 실제로 성지(聖志)가 가려진 것이 있음에 연유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자주 경연에 나아가 천리(天理)를 밝히고 사욕(私欲)을 제거하신다면 기강은 저절로 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훈계한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자, 송시열이 인해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간사한 말이 떠들썩한 때를 당하여 경이 만약 물러간다면 국가의 체모에 손상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매우 한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선조(宣祖) 때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가혹하게 거듭되는 탄핵을 받고 물러나서 돌아갈 것을 간곡히 청원하자, 선조가 그의 본뜻을 아시고 마침내 그의 청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이 감히 스스로를 고인(古人)에게 비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발자취는 다름이 없으니 끝내 감히 머물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올라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찌 갑자기 떠날 결단을 할 수 있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만약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서울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한 시각이라도 어렵습니다. 아무리 간사한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더라도 망발한 것은 없지 않으니 이것으로 처벌을 더하신다면 거의 남들의 말에 사죄하고 미천한 분수를 편안히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경의 뜻을 굽어 따르려고 하지만 남들이 여기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어찌 내가 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5월 27일 을해
상이 침을 맞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경기 총융사는 임무가 가장 중요하니 진실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새로 총융사에 임명된 남두병(南斗柄)은 성품이 본래 오활하고 허술한데다 기력까지 쇠약하여, 일찍이 어영 대장의 직임에 임명되어 벌써 걸맞지 않다는 비난이 나타났었습니다. 이번의 임명 또한 뜻밖에 나왔으니 이것이 어떤 부류의 중대한 임무인데 구차스럽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개차(改差)하시되 문무관을 따지지 말고 각별히 선택하여 임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여러번 아뢰자, 따랐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판중추 송시열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기필코 돌아가기를 결행하려고 한다 하니, 내가 경의 뜻을 모르겠다."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의 마음을 성상께서 이미 환하게 알고 계시다 하더라도 이토록 비방을 당했으니, 끝내 감히 잠시라도 조정에 머물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비(是非)가 이미 정해졌으면 시자(是者)는 옳은 것이 되고 비자(非者)는 그른 것이 되는데 경에게 어찌 떠나야 할 의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의 나랏일은 어려움이 많아 오직 경들을 의지하고 있다. 밤중에 일어나 앉아 가만히 생각하니 경이 잠시 머무는 것도 오히려 다행스러운데 오래도록 조정에 있으면서 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보필한다면 그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조정에 있다 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송준길 같은 경우는 늘 대궐을 잊지 못하고 사모하는 충성이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송준길에게 일어나도록 권하기를 ‘만일 은혜를 갚으려고 한다면 오직 이런 때라야 가하다.’고 하였었기 때문에 송준길이 즉시 조정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만약 물러난다면 이는 중신(重臣)의 진퇴가 일단의 간사한 말에 결정되는 것이니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 어떠하겠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이것이 다른 일일 것 같으면 어찌 감히 잇달아 떠나기를 바라겠습니까. 지금 차마 듣지 못할 말로 하나의 죄안(罪案)을 만들었으니 신이 어떻게 떠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漢)나라 소제(昭帝)는 어린 나이로도 상관(上官)의 참소를 알 수 있었으니,028) 진실로 곽광(霍光)의 충성은 천하가 아는 바이기 때문이었다."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곽광의 충성은 태양을 가릴 만하기 때문에 소제(昭帝)가 그 무함을 분변할 수 있었지만 신과 같은 자가 어찌 감히 고인(古人)과 같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또 신이 고향에 있을 적에 들으니, 어떤 사람이 신이 선왕(先王)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앞장서서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과 서로 안팎이 되며 이는 쓸데없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야기일 뿐만이 아닙니다. 영의정 정태화가 그것을 듣고서 깜짝 놀라 신의 아들의 친구를 불러 말을 했다고 하니, 신이 여기에서 마음은 물론 뼈속까지 섬뜩하여 죽을 데를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그동안 예(禮)를 논의한 가운데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누가 지어냈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이것이 윤선도와 조경에게서 발설되었다고 기필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예를 논의한 뒤에 근거없는 소문이 서로 선동한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눈병이 요즈음 조금 차도가 있어 바야흐로 경과 참찬을 맞이하여다가 《중용》을 강론하려고 하였는데 지금 경이 떠나려고 하니 어찌 섭섭하지 않겠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의 심사는 유독 성상께서만 아시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신이 어찌 감히 하루라도 그대로 머물겠습니까. 기해년029) 에 청나라 사신이 왔을 적에 대통관(大通官)이 신을 향하여 좋지 않은 말을 했었는데, 원접사 홍명하가 임시 변통으로 둘러대어 일이 마침내 정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신이 조정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는 자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자, 승지 원만석(元萬石)이 아뢰기를,
"그 당시 저들이 정말 그렇게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요즈음에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송준길이 저들이 올 적이면 번번이 이 일을 끌어대며 도성 밖으로 나가기를 청했었는데, 이것은 지나친 우려에서였습니다. 지금은 전혀 우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반 사람으로 나랏일을 염려하지 않고 남들과 영합하는 자는 반드시 비난을 만날 리가 없는데, 경들은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몸바치느라 세상 사람들과 영합함이 적었기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이 많아 기필코 조정에서 불안하게 여기도록 하려고 하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조천(祧遷)하는 일은 청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에 장차 경들과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경이 지금 내려간다면 누구와 서로 의논하겠는가. 경의 심사는 푸른 하늘의 밝을 태양과 같은데, 경이 어찌 이처럼 돌아보지 않으려고만 하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선조(宣祖) 때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잗단 일 때문에 마음이 맞지 않아 시론(時論)이 마침내 서로 엉클어져 공격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이 두 사람이 모두 악인(惡人)은 아니라 하더라도 만약 조정의 의논을 진정시키려고 한다면 아울러 지방의 군(郡)에다 전보시키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자 선조가 그대로 따르셨는데, 이것은 바로 적합한 처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알고 있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악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이가 진정시키려는 계책을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비가 얼음과 숯같은데 어찌 지난일에다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떠나기를 청원하기 때문에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 이르렀는데, 신이 목석(木石)이 아니고서야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운명이 불운함은 옛날에도 비교할 이가 없습니다. 입시한 지 벌써 오래되어 번거롭게 한 것도 많습니다만, 다 말씀드리지 못한 회포는 뒷날 상소하여 진달(陳達)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끝내 머물려고 아니한다면 또한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내려간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내 마음을 이해하여 지난날처럼 바쁘게 서둘지 말고 다시 들어 오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9일 정축
동래(東萊) 사람 박선동(朴善同)이 뇌물을 받고 여인을 꾀어 왜관(倭館)에 들어가게 하여 몰래 간음하도록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박선동 및 그 여인은 왜관 문 밖에서 효시하고 그 나머지 여인으로 왜인(倭人)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신 자 및 상인[常漢]으로 왜인과 교통하여 왕래한 자 역시 먼 곳으로 귀양 보내었다.
상평청이 2월 21일부터 죽(粥)을 쑤어 굶주린 이들을 진구하였는데, 나와서 먹은 자는 3천여 명이었으며, 서울의 사족 부녀 및 동서 10리 안의 양반 6백 명에게는 모두 양미(粮米)를 지급하였으며, 동·서활인서의 전염병에 걸린 4백 70여 명에게도 구량(口粮)을 지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진구를 정지하였다. 그리고 지방에서 흘러온 기민(飢民)에게는 모두 10 일 동안의 양식을 지급하여 돌아가게 하고 그 가운데 의지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2백 60명에게는 한 달을 기한하여 10일마다 식량을 주도록 하였다.
영녕전(永寧殿) 동·서 협실(夾室) 내면의 화재막이[火防]를 모두 철거하고 모래를 발라 벽(壁)을 만들었다. 돌을 쌓아 화재막이를 만들자 내면이 매우 두꺼워 지세(地勢)가 좁아지게 되어 향사(享祀) 때 집사(執事)의 출입에 방애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거사가 있게 되었다.
판중추 송시열이 상소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아뢰자, 상이 답하였다.
"경의 진퇴(進退)는 실제로 국가가 보존되느냐 멸망하느냐와 사정(邪正)이 없어지느냐 조장되느냐에 관계가 되는데, 염려가 여기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다가 가만히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는데 실상 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경이 만약 머물지 않는다면 간사한 부류들이 반드시 계획대로 되었다고 여길 터이니, 길이 탄식하며 마음 아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바로 선조(先朝)에서 부탁한 인물이니 경의 사정이 아무리 절박하다 하더라도 나랏일에 있어서 어떻게 하겠는가. 경이 물러날 뜻을 결단하지 말고 나의 소망에 부응하는 것이 실로 백성들의 복이다."
부제학 유계(兪棨), 교리 이민적(李敏迪)이 상차하여 송시열을 머물게 하도록 청원하였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고 궁중에 보류해 두도록 하였다.
홍문관 전한 이수인(李壽仁)이 집에서 졸하였다.
이수인의 자(字)는 유안(幼安)이니 고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증손이다. 사람됨이 담담하고 조용하여 벼슬길에 나서려는 뜻이 없었다. 기축년030) 에 지평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강진(康津)의 옛 집으로 돌아가 수·죽(水竹) 사이에다 움막을 짓고 서사(書史)를 벗삼아 지냈다. 삼사(三司)에서부터 사인·전한에까지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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