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6권, 현종 2년 1661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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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신

진하사(進賀使) 원두표(元斗杓) 등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여 그곳의 형편을 물으니, 두표가 아뢰었다.
"포로로 있는 김여량(金汝亮)에게 들으니 ‘황제는 겨우 8살이어서 네 보정(輔政)이 국사를 담당하여 제반 일들을 처리하고 있으며, 태후(太后)에게 들어가 아뢰면 별로 가부를 말하는 일이 없이 오직 그렇다고 답할 뿐이다. 이 때문에 기강과 호령이 조금도 전과 같지 않아 전에는 조회 때에 전체 관원들이 으레 다 모였는데 지금은 태반이 오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7월 3일 경술

상이 친히 경모전(敬慕殿)에서 담제(禫祭)를 행하였다.

 

홍처윤(洪處尹)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두 대비전(大妃殿)에 존호(尊號)와 책보(冊寶)를 올리는 절목을 신묘년045)  에 마련했던 것과 똑같이 하라고 계하하셨습니다.
신들이 다시 생각해보니, 옥책의 첫머리에 이미 ‘국왕의 신 모(某)는 삼가 옥책을 받들어 상언합니다.’ 하였으니, 인정과 예의로 헤아려 보건대 상께서 친히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에게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례의(五禮儀)》의 상존호(上尊號) 절목에는 원래 이에 대해 언급한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갑자년046)  의 인목 왕후(仁穆王后) 존숭 등록(尊崇謄錄)에도 상이 책보를 친히 전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지금 경술년047) 《정원일기》를 상고해 보니, 인목 왕후에게 책보를 올릴 때에 ‘집사가 책보를 전하에게 바치면 전하는 이를 받아서 사자(使者)에게 준다.’는 등의 내용과 ‘시각을 엄격히 지켜 마련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그때에는 분명히 책보를 친히 전했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갑자년과 신묘년에는 상이 친히 전하지 않았는데 비록 그 이유를 알지는 못하겠으나 상께서 친히 책보를 전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합당하겠다.’ 하였습니다. 금번 두 분 자전에게 존호와 책보를 올릴 때에 친히 전하는 조항을 절목 가운데에 다시 넣을까요?"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직접 참석하여 전해 주는 것이 진실로 정례에 합당하겠다."
하였다. 뒤에 약방이, 상의 건강이 편치 않다는 이유로 권정례(權停例)로 하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5일 임자

인종과 명종 두 실(室)을 영녕전(永寧殿)에 조천(祧遷)하였다. 이보다 하루 전에 지평 최유지(崔攸之)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7세(世)의 사당을 통해 덕을 관찰할 수가 있다는 것은 옛날의 밝은 가르침이고, 세실(世室)에 모셔 높이 받들기를 반드시 공덕(功德)에 따라 한다는 것은 국조(國朝)의 아름다운 법입니다.
우리 인종 대왕께서는 탁월한 자질을 타고 나셔서 부단히 자신을 닦는 공부를 하셨으니, 그 덕은 요임금과 같고 그 효는 순임금과 같습니다. 동궁으로 있은 40여 년 동안 어질다는 소문이 일찍부터 퍼져 그분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은 국사(國史)에 밝게 실려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왕위에 오르신 지 1년도 채 못 되어 승하하시니, 깊은 산이나 궁벽한 시골에 사는 백성들도 울부짖고 허둥지둥하며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고, 지금까지도 남겨준 풍속과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에게 깊이 배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대한 덕을 지니신 분이 세실(世室)에서 향사를 받지 못한다면 어찌 신민들의 높여 받드는 뜻에 부족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공덕(功德)’이란 두 글자에는 또한 경중이 있으니, 공이란 사업을 위주로 한 것이고 덕이란 마음을 위주로 한 것인데 한 시대의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그 효과가 옅고 만 백성의 마음이 열복하도록 하는 것은 그 효과가 깊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공을 앞세우고 덕을 경시하면 안 되는데 하물며 국가가 선조를 받드는 도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당에 세실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있다면 인묘(仁廟)가 아니고 그 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예조에 계하하였다. 이에 예조가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등이 헌의하기를,
"세실에 모시는 문제는 반드시 평소에 미리 결정해야지 조천할 때에 임박해서 비로소 의논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판중추 송시열이 고향으로 돌아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부드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7월 7일 갑인

상이 경모전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고, 신연(神輦)을 모시고 종묘에 나아가 영녕전에서 망묘례(望廟禮)를 행했는데, 이는 송준길(宋浚吉)의 말을 따른 것이다.

 

7월 8일 을묘

효종 대왕을 제10실에 부묘하고, 좌의정 김상헌(金尙憲)과 판중추 김집(金集)을 배향하였다. 김상헌에게 내린 교서에,
"큰 슬픔 속에 삼년상을 마치고 부묘례를 거행하게 되었는데, 선왕께서 큰 덕을 지닌 신하를 두셨기에 배식(配食)하는 반열에 올려야 되었다. 이에 여망에 따라 성대한 예를 치르게 되었다.
경은 바탕이 남달리 고결했으며, 덕은 곧고 방정하면서도 컸다. 천지 사이의 지극히 강한 기운을 오로지 받아 철석같은 심장을 가졌고, 만세에 우뚝 설 만한 금성 옥색(金聲玉色)의 의표를 지녔다. 강직한 성품은 혼조(昏朝) 이전에 이미 드러났고, 송백(松栢) 같은 절조는 난세가 된 뒤에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성조(聖祖)048)  께서 반정을 한 뒤 벼슬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자주 좋은 말을 진달하니 모두들 쟁신(諍臣)의 장으로 추대하였고, 홀로 강직함을 보존하여 성대하게 정론(正論)의 종통이 되었다. 위태로운 성에서 피를 부리니 절개는 삼한(三韓) 땅에 해와 달처럼 밝았고049) 산야에 은둔하니 지극한 정성은 만절(萬折)의 강하(江河)와 같았다.050) 노중련(魯仲連)의 차라리 동쪽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계손(季孫)의 서하(西河) 관사(館舍)에 나아갔다.051)   하늘과 땅이 뒤흔들려도 경의 절개를 빼앗을 수 없었고, 끓는 솥이 쫙 벌여 있어도 그 터럭 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신국공(信國公)052)  처럼 다행스럽게도 죽지 않고 연옥(燕獄)에서 빠져 나왔으니, 백이(伯夷)가 다시 살아왔다는 송(宋)나라 사람들의 말과 참으로 부합되었다. 강물에 지주석(砥柱石)이 우뚝 솟은 것과 같이, 우뚝이 홀로 남은 영광전(靈光殿)처럼 큰 의리와 순수한 충정은 천고에 높이 솟았고 열사(烈士)와 명상(名相)을 한 몸에 갖추었다. 국가에 남긴 사업은 사관(史官)의 기록에 적혀 있고, 성정에서 나온 문장은 청묘(淸廟) 주현(朱絃)의 음악에 담겨져 있다. 삼달존(三達尊)053)  을 겸하여 천하의 대로(大老)가 되었고, 조정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아 모두들 종신(宗臣)으로 의지하였다. 군신간의 정의(情義)가 한창 깊어져 갔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빨리 세상을 뜨게 되었는가. 선왕께서는 한 대로를 남겨주지 않은 것에 대해 탄식해 하며 곡(哭)하지 않아야 할 진일(辰日)에도 매우 애통해 하셨고, 소자는 감내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 때문에 깊은 밤 근심이 매우 간절하였다. 선왕께서 돌아가신 뒤 세월은 꽤 흘렀지만 부모에 대한 슬픈 생각이야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무덤가의 백양나무는 황량한데 이제는 다시 잘 보필할 분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부묘례를 행할 때에 종묘에 배향하게 되었다. 사훈(司勳)054)  이 제사에 대한 예문을 상고해 보건대, 크게 보답하는 것이 이에 있으니, 소공(召公)을 무왕(武王)의 실(室)에 배향한 전례를 따를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제사를 모시니 참으로 군신이 일체가 되었고, 유명(幽明)의 사이가 없으니 마치 풍운(風雲)이 다시 만난 듯하다.055)   배향할 어질고 공이 많은 신하를 찾아 보았지만 경과 같이 큰 공렬과 사업이 있는 분을 찾기 어려웠다. 이에 경을 효종 대왕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게 되었다.
제사와 장례지내는 일 중 참으로 배정(陪庭)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더구나 광악(光岳)의 빼어난 신령이 엄숙하게 곁에서 모시고 있는 듯함에랴. 옛과 이제를 생각함에 감회가 깊어지고, 제사지내는 것을 보니 아무 잘못이 없도다. 이에 전고에 없던 아름다운 풍절을 기쁘게 여기며 길이 종묘에서 배향하게 하니, 하늘에 계시는 우리 선왕께서 오르내리시는 것을 잘 인도하여 자손과 백성들을 잘 보호하도록 하라."
하였고, 김집(金集)에게 내린 교서에,
"참 선비가 한 시대의 명망을 지니고 밝은 덕을 높였으므로 만세토록 청묘(淸廟)에 배향하는 아름다운 의식을 거행하려 한다. 이는 사전(祀典)을 상고해 보아도 그렇고 과거의 제도를 고찰해도 알 수 있다. 강릉(康陵)056)  과 목릉(穆陵)057)  의 실(室)에 문원공(文元公)058)  과 문순공(文純公)059)   같은 현명한 종신(宗臣)들을 선발하여 차례로 종사하였으니, 이로 인해 도학(道學)이 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빛나게 되었다. 이는 전고의 사적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후세에서도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경은 대현(大賢)의 자제로서 천부적으로 지극한 성품을 타고났다. 가까이 가정 안에서 전수받았으므로 문로(門路)가 매우 발랐고, 장구하게 계승된 연원을 이어받았으므로 도통이 높았다. 자품이 본디 청명한데다가 함양하는 공부를 많이 하여 마치 아름다운 옥을 갈고 닦아 더욱 윤기가 나고 질이 좋은 쇠를 단련하여 더욱 정제된 것과 같았다. 내면을 성찰하고 마음을 잡아 보존하는 경(敬) 공부를 위주로 하여 항상 또렷이 깨어 있었고, 학문과 사변을 함에 있어서는 더욱 행실을 극진히 하는 데 힘썼다. 예서(禮書)를 편찬한 것은 황면재(黃勉齋)060)  가 한 것과 같은 성대한 일이었고, 의심스런 글을 분석함에 있어서는 주자(朱子)처럼 정미한 말로 하였다. 내면의 기준이 조금도 어지러짐 없이 확립되어 모든 행동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공부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여 덕과 행실이 고명하게 되니, 사림들이 종주(宗主)로 추대하여 하늘의 북두칠성이나 땅의 태산(泰山)·대산(岱山)처럼 경모하였다. 경이 관직에 처음 나온 것은 성조(聖祖)061)   때였는데, 선조(先朝)062)   때에 와서 높은 직책에 더욱 중용되었다. 사헌부와 이조의 장관이 되어서는 즉위 초기의 교화를 새롭게 하였으며, 왕도(王道)를 진달하고 성학(聖學)을 도와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태평 시대를 거의 회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둥이 꺾어지고 들보가 부러지듯 대로(大老)가 돌아가셨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듯 소자(小子)는 상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삼년간의 상기(喪期)를 끝내고 종묘에서 부묘례를 행하게 되었다. 군신은 일체인데 삶과 죽음 사이에 은수(恩數)가 어찌 다르겠는가. 천년토록 종묘에서 모시는 것이니 배향할 분을 잘 고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에 동덕(同德)의 보좌를 구해 배향하는 반열에 올리게 되었다. 기(夔)나 설(契) 같은 분이 아니면 어떻게 요나 순 같은 분의 짝이 되겠는가. 당대 조정의 뛰어난 재상들을 살펴보건대, 훌륭한 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늘날의 공언(公言)을 널리 모아보니, 모두들 한결같이 추대하였다. 이에 경을 효종 대왕의 묘정에 배향한다.
아, 군신간에 뜻이 합치되어 생전에 잘 화합하였으니, 사후에도 종묘에 모셔 포숭(褒崇)하는 것이 합당하겠다. 궁전 앞 옛 반열을 상상해 보니, 다시 보좌 곁에서 모시는 듯하다. 경은 하늘 나라에서 선왕을 모시고 오르락내리락 하리니, 우리 나라가 그 음덕에 힘입어 깨끗하고 편안해질 것이다. 생각건대, 유명(幽明)은 서로 통하는 것이니 영령은 잘 알았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부묘 대제를 행하였다. 【추향제(秋享祭)를 겸해서 행하였다.】  묘시(卯時)에 환궁하여 크게 사면하는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음식을 먹을 때이거나 앉아 있을 때이거나를 막론하고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종묘에 제사지낸 뒤 곧이어 부묘의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에 온 나라에 크게 고하여 함께 경축하는 뜻을 보이고자 한다.
지난번 소자는 불행하게도 갑자기 하늘이 내린 재앙을 받게 되어, 나의 목숨을 대신 바치기도 전에 슬프게도 친상을 당하였다. 이에 외람되이 국사의 책무를 이어받으니 두렵고 놀라운 마음뿐이다. 애통한 심정 점점 더해가는데 어떻게 편안스레 보위에 올라 예를 행할 수 있었겠는가. 세월은 어느덧 흘러 삼년의 상기를 마치게 되었고, 궤연(几筵)을 옮기고 다시 한 달이 더 지났다. 이에 배향하는 전례를 행하여 모든 것이 질서있게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이에 금년 7월 8일에 삼가 황고(皇考) 효종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대왕(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을 받들어 태묘(太廟)에 부향(祔享)하였다. 훌륭함이 전고에 빛나니 이를 관덕(觀德)이라 하고, 충만하여 위에 있는 듯하니 신령을 편안히 모셨다고 하겠다. 향기로운 서직(黍稷)을 제기에 담아 올리고, 아름다운 종고(鍾鼓) 소리는 울려 퍼졌다. 제사는 정결함으로 인해 원만하게 치러졌고, 슬픈 회포는 탄식어린 흐느낌으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 붕어하신 뒤 세월이 꽤 흘렀지만 원릉(園陵)을 바라봄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고, 곤복에 면류관을 쓰고 법전(法殿)에 처음 임어하니 눈물만 흐른다.
이제, 아름다운 의식을 끝마치게 되었기에 떳떳한 옛 전례에 따라 나의 억눌러 오던 심정을 유시하고 아울러 특별히 모두를 사면하는 은택을 내리니, 이번 달 8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한다. 아, 오늘날 온 나라가 선조(先朝)의 크나큰 은택으로 인해 형벌이 없어지게 되어 거의 태평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세상을 떠나신 지금에도 잊지 않고 눈물 흘리며 우는 백성들이 있는 것이다. 대덕(大德)은 살리기를 좋아한다 하니, 마땅히 은혜를 베푸는 지극한 뜻을 깨닫도록 하라."

 

7월 11일 무오

상이 침을 맞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삼년상을 마치고 부묘한 뒤에는 문묘(文廟)에 알현하고 선비들을 뽑는 것이 전례이니, 날을 가려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국가가 삼년상을 마치는 때가 되었으니, 비록 노상에서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병을 핑계대고 사양하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 마음의 자취를 살펴 보면 본래 딱하게 되었으니, 조정을 욕되게 할 수 없는 데다가 또 잘못된 성품을 바로잡을 수도 없으므로 민망스럽게 줄곧 숨어지냈던 것이지, 신이 감히 거짓말로 꾸며 자신만 편히 지내려 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7월 12일 기미

우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어머니 산소를 개축하는 일 때문에 상소하여 휴가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어사의 서계로 인해 수령으로서 구속된 자가 많은데, 비록 큰 사면령을 내렸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마땅히 지은 죄에 따라 처벌해야지 모두 용서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전 선산 부사(善山府使) 신숭구(申嵩耉)는 지은 죄가 매우 많은데도 잘못 뒤섞여 용서받는 속에 끼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를 용서해 준다면, 이는 어사를 파견하여 탐문하는 의도와 배치되는 것입니다. 신숭구를 다시 담당 관리에게 회부하여 명확히 조사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3일 경신

상이 침을 맞았다.

 

반찬 가짓수와 음악 연주를 회복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한재 때문에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 연주를 그치게 했는데, 이날이 입추였기 때문에 예조가 전례에 따라 거행했던 것이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별시(別試) 초시를 8월 18일로 정했는데, 현재 공사간의 곡식이 바닥난 데다가 햇곡식이 아직 익지 않았습니다. 지방의 거자(擧子)들이 필시 식량을 마련해 오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날짜를 조금 물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깥 의견이 한결같지 않아 어떤 이는 ‘경외(京外)로 시험을 나누어 보여 거자들이 왕래하는 폐단을 없애야 된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함께 경축하기 위한 과거이니, 서울에 다 모이게 하여 보이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느 설이 옳은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모두 서울에 모이게 하면 거자들이 식량 마련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올라온 뒤에 쌀값이 더욱 치솟아 주객(主客)이 다 어렵게 될 것이니, 경외를 나누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경외를 나누어 시험 보이는 것이 과연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알성(謁聖)을 9월 19일로 정하려 한다 하고, 무과(武科) 초시는 개장(開場)할 날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8월 그믐 전에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향시(鄕試)에 응시하는 거자들은 형세상 알성 초시에 참여하지 못할 것인데, 만약 두 시험에 다 응시하고자 하여 모두 서울로 올라온다면 경외를 나누어 시험 보이는 뜻이 전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니, 이 한 가지 문제는 합당하게 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양쪽 다 합당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알성을 8월 안으로 당겨 정하고 별시를 참작해서 물려 정한다면 구애되는 걱정거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알성은 8월 20일 사이로 당겨 정하여 초시 날짜를 윤7월 안에 잡도록 하고, 별시는 그 날짜를 물려 정하여 경외로 나누어 시험보이는 것이 좋겠다."
하고, 허적에게 이르기를,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이 혼례를 하려 하는데, 전날 군주(郡主)의 【소현의 딸이다.】  혼례 때에도 대내에서 은을 하사하여 경비에 보태 쓰게 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이번에도 호조에서 고려하여 도와주어야 한다."
하니, 허적이 청하기를,
"전일 대내에서 특별히 내린 금은 중에서 덜어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별도로 저축해 둔 금은은 인조조(仁祖朝)에서 목적한 바가 있었던 것이니, 본조에서 전에 지급해 준 수량에 의거하여 따로 보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금년 농사가 또 흉년이 들 판이다. 전에는 전적으로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저축해 둔 쌀을 가지고 진구(賑救)할 밑천을 삼았었다. 그런데 금년 봄에 이미 이것을 다 나누어 주었고 가을 이후에도 거두어들이기 어려울 것 같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하니, 이조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양서(兩西)의 교생(校生) 수가 매우 많고 농사도 꽤 잘되었다고 하니, 만약 면강첩(免講帖)을 주고 곡식을 받는다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태화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복양이 전에 이러한 뜻을 가지고 신에게 와서 의논하였는데, 신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경의 말이 참으로 옳다고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전날 서쪽에서 가져온 쌀의 수효가 1만 석 가까이 되는데, 현재 도성 사람들이 크게 굶주리고 있어 쌀 1석이 4금(金)이니, 지금 만약 발매한다면 목전의 위급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지금은 비록 급하기는 하나 그래도 지탱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가을 추수도 가망이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우선 그대로 쌓아두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발매하는 것은 이른 듯하니, 우선 천천히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양서 지역의 농사가 다른 도에 비해 조금 나으니, 공명첩(空名帖)을 팔아서 곡식을 모은다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전에 이미 시행했으나 보탬이 되지 않았으니, 시행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사의 포계(褒啓) 가운데 들어 있는 수령에 대해서 논상을 장차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해조에 공물(貢物)이 납부되었는지의 여부를 살펴 참작해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납부 여부에 대한 단자를 계달(啓達)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천 군수(舒川郡守) 홍석무(洪錫武), 서산 군수(瑞山郡守) 윤격(尹檄), 금성 현감(錦城縣監) 원두추(元斗樞)는 가자(加資)하고, 태안 군수(泰安郡守) 민진량(閔晉亮) 등 3인에게는 각각 길들인 말을 하사하고, 인동 부사(仁同府使) 유정(兪椗) 등 5인에게는 각각 옷감 1벌을 하사하고,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지온(李之馧)에게는 망아지를 하사하고, 흥덕 현감(興德縣監) 오정언(吳廷彦) 등 5인은 승서(陞敍)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은 이미 가뭄으로 농사를 다 망쳤는데, 호남(湖南)도 산군(山郡) 이외의 다른 읍들도 모두 한재가 혹심하다고 합니다. 지금 이미 늦기는 하였지만 향축(香祝)을 보내 비를 빌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 의 경우는 이미 향축을 보냈지만 호남은 근래 한재가 있다는 장계가 없었기 때문에 거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재가 이와 같다면 거기도 똑같이 향축을 내려 보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이미 가을철이 되었기 때문에 예조가 반찬 가짓수를 회복하라고 아뢴 것에 대해 전례에 따라 비답을 내렸었다. 그런데 양남(兩南)의 한재를 입은 상황이 이렇게까지 극도로 참혹하니, 금년 봄에 감한 어공(御供)을 예전대로 회복하지 말고 우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품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부제학 유계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선왕께서 큰 뜻을 분발하셨는데 공업을 성취하지 못하고 무궁한 사업을 전하에게 남겨주셨으니, 오늘날 전하가 해야 할 방도는 마땅히 선왕이 품었던 뜻을 가지고 선왕이 하려고 했던 것을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 몸이 항상 편찮으시니 비록 예를 갖추어 강(講)을 열 수는 없지만, 한가한 틈에 자주 유신(儒臣)을 접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치도(治道)를 의논하신다면 점차 계발되는 공효가 경연을 여는 것보다 아주 못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뜻과 기운이 자연히 청명해져 여색과 가무를 즐기는 욕망과 태만하고 사악한 기운이 반드시 몸과 마음을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간언 받아들이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셔서 사람들이 서로 기뻐했었는데 요즘 수년 사이에는 대부분의 일들을 옛 규례만 따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후로 올린 이해가 관계된 장주(章奏)에 대해 비록 칭찬하고 장려하셨지만 즉시 시행하거나 그만두지 않은 채 무작정 시일만 끌다가 결국에는 그만두어 정령(政令)이 날로 폐해지고 있으니, 이는 마치 큰 병에 걸려 숨이 끊어지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도(天道)는 사사로움이 없어 만물을 두루 감싸니, 인군이 하늘을 본받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사적인 데에 매여 천도와 어긋나게 된다면 하늘도 반드시 그 유에 따라 재앙을 내릴 것입니다. 근래 비가 오는 것이 고르지 않아 수십 리 혹은 백 리 사이에서도 비가 오고 안 오는 차이가 자못 다르니, 아마 성명께서 크게 공평한 도가 확립되지 못하여 사적인 얽매임이 많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 거리의 소문을 듣건대, 대궐에서 상기(喪期)가 끝나게 되자 사라(紗羅) 따위를 마구 사들여 시장의 물건이 바닥났다고 합니다. 참으로 전하는 말과 같다면 어디에선들 이러한 사치를 본받지 않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군신 상하가 마땅히 크게 경계하고 변통하며 조심하고 절약하여 제 환공(齊桓公)이 거(莒)에 있을 때나 위 문공(衛文公)이 초구(楚丘)에 있을 때나 우리가 지난날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있던 때와 같이 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우리 외롭고 불쌍한 백성들을 거의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 유언 비어와 못된 말들이 마구 일어나 한두 재야의 신하를 급히 달아나게 하고 있습니다. 송준길(宋浚吉)이 휴가를 청하는 소장을 또 올렸습니다. 전하께서 어진이를 좋아하시는 정성이 옛날의 누구보다도 훨씬 뛰어나신데 한 설거주(薛居州)를 포용하지 못하시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대사간 이은상 등이 상차하여, 학문을 강론하여 이치를 밝히고 어진 자를 친히 하며 덕 있는 이를 등용해야 하다는 뜻으로 진계(陳戒)하고, 또 청하기를,
"내수사와 수진궁(壽進宮)에 모아놓은 재물을 올해까지만 호조에 소속시켜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소서."
하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렸다.

 

7월 16일 계해

상이 침을 맞았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가게 해달라고 청하니, 상이 가지 말고 기다리게 한 뒤 면대하여 유시하였다.

 

7월 17일 갑자

간성 군수(杆城郡守) 권령(權坽)에게는 진휼을 잘한 공으로 말을 하사하고, 통천 군수(通川郡守) 이극태(李克泰)는 승서(陞敍)하고, 횡성 현감(橫城縣監) 구일(具鎰)은 수리(水利)를 잘한 공으로 4품에 초서(超敍)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우참찬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금은 즉위하신 초기여서 온갖 일들이 새로 시작되므로 중외의 신민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나라가 잘 다스려지느냐 마느냐와 성하느냐 마느냐가 나누어지는 때입니다. 지난번 상중에 계실 때에는 성덕(聖德)에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잡아 지키느냐 놓아 버리느냐에 따라 보존 여부가 무상한 것이, 마치 대야물을 엎지르지 않기 어려운 것이나 사나운 말을 제어하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 원컨대 상께서는 더욱 마음을 잡아 지키는 공부를 하셔서 혹시라도 태만하게 하는 때가 없게 하소서. 그리고 또한 마땅히 어진 사대부들을 자주 접견하심으로써 강론의 자료로 삼으시고 여러 사람들의 바람에 답하소서."
하고, 이어 물러갈 뜻을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마음을 헤아려 지금 경이 귀향하려는 것을 허락하겠다. 경도 나의 마음을 헤아려 서늘한 가을을 기다려 즉시 올라온다면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물러나 돌아간 뒤에 오직 성상께서 건강하시고 국가가 무사하기를 빕니다. 그런데 금년의 한재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앞으로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생각을 한 번 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고 기가 막히는데, 어떻게 처리할 방도가 없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거리에서 전하는 소문을 진실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또한 염려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준길이 아뢰기를,
"고인이 말하기를 ‘사치의 해는 천재(天災)보다 심하다.’ 하였습니다. 근래 거리에서 전하는 소문을 듣건대, 궁중에서 삼년상을 마친 뒤 사치가 전보다 더 심해졌다고 하는데, 과연 이러한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사치하는 것은 진실로 알 수 없지만 국제(國制)가 겨우 끝난 때에 무슨 마음으로 이런 짓을 하겠는가."
하였다.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교리 남구만(南九萬), 부수찬 홍주삼(洪柱三)이 청대(請對)하여 송준길을 붙잡아 머무르게 할 것을 강력하게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만약 억지로 머무르게 한다면 다시 판부사(判府事)의 일과 【전에 송시열(宋時烈)이 면대하여 사직하지도 않고 바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같이 될까 염려스러워 할 수 없이 허락했던 것이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승지를 보내어 머무르도록 해야겠다."
하고, 승지 박세모(朴世模)를 강가로 보냈으나, 준길은 끝내 오지 않았다.

 

7월 18일 을축

김좌명(金佐明)을 대사헌으로, 정지화(鄭知和)를 경기 감사로, 김수항(金壽恒)을 겸 동지경연으로, 조윤석(趙胤錫)을 승지로 삼았다.

 

지평 최유지(崔攸之)가, 주원(廚院)063)  의 제조가 간악한 관리를 느슨하게 다스렸으니 추고해야 한다고 청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예겸제조(例兼提調)로서 신문을 받았는데, 함사(緘辭) 중에 대관(臺官)을 배척하는 말을 하였다. 이에 유지가 인피하면서 잘못 간관을 끌어대어 증거삼았는데, 간원이 피혐하는 말이 사실과 어긋났다는 이유로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7월 19일 병인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여, 송준길을 간곡하게 만류하고 송시열을 소환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즉시 사관(史官)을 파견하여 유지(諭旨)를 전하였으나, 시열은 오지 않았다.

 

7월 20일 정묘

간원이 아뢰기를,
"삼가 종묘령(宗廟令) 박세견(朴世堅)을 형추하여 사실을 알아내라는 하교를 보았습니다. 종묘를 지키는 관원으로서 대례(大禮)가 끝난 뒤에 즉시 문을 닫지 않았으니, 참으로 죄가 있는 것입니다만, 이는 갑작스런 사이에 실수한 일입니다. 여러 차례 대간과 시종을 지낸 신하가 비고의적인 죄로 형신을 입게까지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온당치 못하게 여기고 있으니, 형추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다가 다음날 따랐다.

 

7월 21일 무진

관서(關西)의 선천부(宣川府)에 달걀만한 우박이 내렸다.

 

7월 22일 기사

예조가 아뢰기를,
"수령이 향시(鄕試)에 응시하는 데에 복잡스러운 말이 많기 때문에 저번 판서 윤강(尹絳)이 일제히 경시(京試)에 응시하게 하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올해와 같이 크게 흉년이 든 해에는 마부와 말 및 식량과 비용을 대는 데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도 감시(監試) 시장(試場)을 개설할 때의 차비관(差備官)도 차임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각자 향시에 응시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진보 현감(眞寶縣監) 채익준(蔡翊俊), 용궁 현감(龍宮縣監) 이형식(李馨植) 등에게 옷감 1 벌을 하사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진휼을 잘하였다고 관찰사가 포계(褒啓)했기 때문이다.

 

7월 23일 경오

예조가 아뢰기를,
"가뭄이 날로 심해져 온갖 곡식이 말라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입추가 지나기는 했지만 근래의 전례대로 날을 가리지 말고 기우제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도에 가뭄이 심하여 향축(香祝)을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7월 25일 임신

평해군(平海郡)에 큰비가 내려 산사태가 일어났는데, 깔려 죽은 자가 있었다.

 

대사헌 김좌명(金佐明)이 상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인혐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26일 계유

이유상(李有相)을 지평으로, 구인기(具仁墍)를 공조 참판으로, 김좌명을 도승지로,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책례 도감(冊禮都監)이 아뢰기를,
"전에는 중궁(中宮)의 책례(冊禮) 때에 악장(樂章)이 없었는데 인목 왕후(仁穆王后) 책례 때에 비로소 악장이 있었습니다. 이는 대개 선조 대왕께서 존호(尊號)를 받으셨기 때문에 왕비에게도 휘호(徽號)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해조(光海朝) 폐비(廢妃) 책례 때에 잘못 이 예를 써서 결국 전고가 되었습니다. 일찍이 신묘년064)  에 고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헌의하기를 ‘선묘조에게 중광악(重光樂)이 있었으므로 인목 왕후에게도 악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등록(謄錄)에는 없으니 혼조(昏朝)의 일을 전례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당시에 이런 의논이 있기는 하였으나 시행되지는 못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예를 그대로 따르며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금번 책례할 때에는 마땅히 악장을 쓰지 말아 옛 잘못된 규례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상좌도에 큰물이 져 1백 20여 호가 침수되고 70여 명이 죽었다.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뀌고 개천의 물길이 달라졌으며 농토가 망가지고 곡식이 물에 잠기는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경주(慶州)가 더욱 심하였는데, 이 사실이 보고되자 본도에 명하여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7월 27일 갑술

자의 대왕 대비(慈懿大王大妃)에게 ‘공신(恭愼)’이란 존호를 더하였다. 대왕 대비의 보좌(寶座)를 정전에 【바로 대비가 현재 거처하는 정전이다.】  설치하였다. 상이 면복(冕服)을 입고 숭정전(崇政殿) 계단 위로 나아오고, 백관은 조복(朝服)을 입고 자리에 나아가니, 잠시 후 대왕 대비가 적의(翟衣)를 입고 보좌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전하가 판위(版位)에 나아가 뜰에 있는 백관들과 함께 4배를 하고 책보(冊寶)를 받들어 사자(使者)에게 주니, 사자가 무릎꿇고 받아서 나갔다. 상이 자리로 돌아오니, 사자가 대왕 대비의 전문(殿門) 밖에 이르러 무릎꿇고 책보를 상전(尙傳)에게 주며 말하기를
"정사(正史) 영의정 신 정태화(鄭太和) 등이 하교를 받들어 삼가 대왕 대비의 존호와 책보를 올립니다."
하였다. 상전이 이것을 여관(女官)에게 전해 주니, 여관이 받아서 책보를 놓을 상에 올려놓았다. 이어 여관이 나아가 무릎을 꿇고 함을 열어 책보를 읽었다. 예를 마치자 대왕 대비가 보좌에서 내려와 대내로 돌아가니, 여관은 책보를 받들고 따라 들어갔다. 사자가 복명하니 상이 다시 숭정전에 나아가 사면령을 내리고 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순한 덕을 지녔다는 소문이 드러나 일찍이 성조(聖祖)의 내치(內治)를 도왔으므로 현호(顯號)로 존숭(尊崇)하여 세상에 드문 훌륭한 예를 거행하게 되었다. 이에 교문(敎文)을 대대적으로 반포하여 온 나라 사람들과 경사를 함께 하려고 한다.
삼가 생각건대, 자의 대왕 대비 전하께서는 도(道)가 중화에 합치되고 덕(德)이 여사(女史)에 밝게 드러났다. 만년에 장락궁(長樂宮)에서 한가하게 지내며 삼전(三殿)의 즐거움을 흡족히 맛보았고, 춘휘전(春暉殿)에서는 만수를 축원하는 술잔을 받았다. 하잘것없는 내가 왕업을 잇게 되어 더욱 의위(儀位)가 높음을 알게 되었다. 선왕을 추모함에 사랑하고 공경하는 효심이 더욱 도타워지므로 이에 옛 법도에 따라 작은 성의로나마 밝게 드러내려는 마음이 간절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자의 휘호로 대비의 밝은 법도를 드러내 펴서 온 나라의 경사임을 보이려는 것이다. 이에 각 지방에 유지를 선포하고 금년 7월 27일에 ‘공신(恭愼)’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삼가 생각건대, 훌륭한 평판과 계책은 그 아름다움이 삼후(三后)와 같으니, 금부(金符)와 옥전(玉篆)은 백 대가 지나도 더욱 빛날 것이다. 이에 이번 달 27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한다.
아, 공경스럽게 종묘에 제사를 지내 이제 담제(禫祭)와 부묘례(祔廟禮)를 끝마쳤는데, 곧이어 이렇게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프다. 이제 크나큰 은혜를 미루어 바로 사면하는 명을 선포하니, 백성들이여, 나의 지극한 심정을 헤아리라."

 

헌부가 농사가 흉년이니 어영군(御營軍)의 상번을 중지시키자고 청하니, 상이 해영(該營)이 품의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먼 도(道)의 군병은 모두 상번하지 말게 하소서. 그러나 조련을 받지 않은 경기의 군병은 10월부터 입번시켜 두 달간 조련시킨 뒤 돌려보내, 군정(軍政)이 완전히 폐지되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8일 을해

왕대비에게 ‘효숙(孝肅)’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는데, 의례는 전과 같다. 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도를 함에 있어 어버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는데 이제 바야흐로 밝게 드러내는 의전(儀典)을 거행하게 되었고, 예는 존호를 올림으로써 갖추어지는 것이므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심을 펴려 한다. 이에 성대한 의례를 행하고 아울러 교문을 반포한다.
삼가 생각건대, 왕대비 전하께서는 어질기는 태사(太姒)보다 뛰어났고, 덕은 원비(元妃)같이 성하셨다. 마음가짐은 깊고 진실하여 명문가의 아름다운 규범을 이으셨고, 몸가짐은 공손하고 검소하여 선왕(先王)의 지극한 다스림을 도우셨다. 대상(大喪)을 당해서는 극진한 슬픔으로 상례를 잘 치렀고, 나라에 어머니로서의 모범으로 임하게 되자 몸을 곧게 하여 백성들을 바로잡는 일에 더욱 힘쓰셨다.
돌이켜 보건대, 하잘것없는 과인은 훌륭한 가르침에 힘입어 왕대비전에 문안하며 큰 잘못 없이 봉양할 수 있었는데, 어느덧 삼년의 상기(喪期)가 흘러갔다. 이에 경건하게 태묘(太廟)에 제사지내고 부묘례도 행하였으니, 왕대비를 존숭(尊崇)하는 예를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이에 역대의 고사에 따라 감히 금년 7월 28일에 ‘효숙(孝肅)’이란 두 자의 존호를 올렸다.
삼가 생각건대, 금과 옥으로 장식된 책보(冊寶)는 천억 년이 지나도 빛날 것이니, 하늘의 해를 그린들 어찌 만 분의 일이나 형용할 수 있겠는가. 이에 속히 교서를 반포하여 조정과 재야가 함께 경축하는 뜻을 보이니, 이 달 28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하도록 하라. 아, 어느 누가 부모가 없겠는가. 복을 내리는 인(仁)을 본받아야 한다. 백성들아, 각자 효에 흥기하도록 힘써야 한다. 부모님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는데, 장락궁(長樂宮)에서 편안히 계시는 것이 기쁘기는 하나, 가을철이 다시 돌아오니 산소를 바라보며 우러나는 슬픔을 감당할 수 없다. 이에 이러한 마음에 따라 예를 행하는 한편 나의 지극한 심정을 유시한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하고자 큰 사면을 내리노라."

 

간원이 아뢰기를,
"대례(大禮)를 겹쳐 행하는 때이니만큼 더욱 궁금(宮禁)을 엄숙하게 해야 하는데 응당 참여해야 할 명부(命婦) 이외에 궁인(宮人)들의 인척들이 연줄을 타고 마구 들어오는 것이 매우 많아, 일이 매우 난잡스럽습니다. 법부(法府)로 하여금 그들의 가장(家長)을 조사하여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마땅히 엄히 타일러 다시는 난잡해지지 않도록 하겠다."
하였다.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관(史官)이 송시열에게 유지(諭旨)를 전한 뒤 계사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하의 죄명이 비록 중하더라도 만일 임금의 용서를 받았을 경우 억지로 명에 따르는 경우는 간혹 있습니다만, 신과 같이 무도한 자라는 지목을 심하게 받은 경우에는 하루 사는 것이 하루의 죄를 더하는 것이니, 어떻게 감히 조정에 무릅쓰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삼남(三南) 지역의 가뭄이 극심하여 놀랍고 두려운데 한 차례 의논이 모두 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신은 밤낮으로 절박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고 애간장이 타 속히 천벌을 받아 신인(神人)에게 사죄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우선 신을 먼 곳에 두어 엎드려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신다면, 세월이 차츰 지나가면 그런 의논이 그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계속해서 부르고 각별하게 총애하시니, 그 형세가 점점 더 강렬해지고 말세의 풍속이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크게 두려워하고 민망스럽게 여기는 점입니다."

 

7월 29일 병자

왕비 김씨를 책봉하였다. 상이 흥정전에 나아가서 교서를 선포하니, 승지가 책보(冊寶)·교명문(敎命文)·명복(命服)을 받들어 정사(正使) 영의정 정태화에게 주었다. 태화가 이것을 받들어 중궁전에 올렸다. 친림례(親臨禮)를 임시로 정지하였으며 사면령을 내렸고, 백관들이 진하하였다.
이에 앞서, 책례(冊禮)의 길일을 예조에서 윤7월 17일로 가려 올렸다. 이때 중궁의 사가(私家)는 상중이었는데, 소상(小祥)이 8월 중이었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비록 사가의 상이라고는 하나 소상도 되지 않아 경사스런 예를 치르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고,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이경석(李景奭)·정태화(鄭太和)·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막중한 책례를 사가의 상(喪) 때문에 물려 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기(祥期)가 멀지 않으니 소상이 지난 뒤 행하는 것도 실정과 예문에 합당합니다."
하였고, 심지원(沈之源)은 물려 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상이 세 대신의 의견에 따라 물려 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간원과 옥당이 차자를 올려 물려 행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행한 것이다. 왕비의 책례 뒤에는 으레 백관들이 축수하는 글을 올렸었는데, 상이 권정례(權停例)로 할 것을 명하였다. 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음공(陰功)을 내치(內治)에 드러내 밝히니 풍속과 교화가 비로소 시작되었고, 궁중에서 책봉례를 행하니 예의(禮儀)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에 백관들과 온 나라에 고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왕이 왕비를 세우는 법은 곧 인륜이 시작되는 기초인 것이며 종묘를 잇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참으로 부족함을 보충하는 도에 힘입어야 되니, 후궁들과 궁액(宮掖)들을 바로잡는 데 반드시 근엄하게 모범을 보일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덕이 부족한 내가 조종(祖宗)의 왕업을 계승했는데 이렇게 훌륭한 보좌를 얻게 되었으니, 군자의 좋은 짝이라고 할 만하다. 왕비 김씨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아름다운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깊고 고요하며 맑고 밝은 덕은 세자궁에 있을 때 이미 드러났고,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경계하는 마음은 왕비가 된 뒤에 더욱 견고해졌다. 유순한 용모와 부드러운 안색으로 양궁(兩宮)을 기쁘게 해드렸으며, 추모하고 슬피 곡하면서 삼년상을 극진히 하였다. 부묘하는 기쁜 일을 끝내고 곤위(坤闈)에서 아름다운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에 금년 7월 29일 왕비로 책봉하니, 안팎에서 잘 닦아 십란(十亂)의 효험065)  을 이룩하고 음양이 서로 도와 일체의 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비록 지극한 슬픔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이렇게 성대한 행사는 다 함께 경축해야 한다. 두 번씩이나 사면한 지가 얼마 안 지났으니 사면이 너무 많다는 혐의가 없지는 않지만, 모두 함께 살고자 하는 심정에서 크게 사면하는 명을 내린다.
이에 이번 달 29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한다.
아, 책봉례가 바르게 되어졌으니 크나큰 복이 더욱 길이 이어질 것이다. 온 집안을 바로잡아 이남(二南)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않게 할 것이니066)  , 온 나라의 백성들과 함께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헌부가 아뢰기를,
"금년은 작년보다 더 심하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거자들을 다 모아 치러야 할 과거를 특별히 경외(京外)로 나눈 것은 거자들이 식량을 마련하는 문제와 주객(主客)이 모두 곤궁하게 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온 나라가 흉년이 들어 공사를 막론하고 양곡이 고갈되었으니, 문무과(文武科)의 과장(科場)을 열 경우 꼴이 말이 아닐 것입니다. 경사에 대한 조처는 해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 옛 규례이기는 하나 우선 내년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가서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묘(文廟)에 참배하는 예는 그만둘 수 없지만 이때에도 사람을 뽑지 말고 명년까지 기다렸다가 별도로 정시(庭試)를 행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중추(領中樞) 이경석(李景奭), 우상 원두표(元斗杓), 판중추(判中樞) 정유성(鄭維城)은 모두, 대간에서 아뢴 말이 옳으니 경사에 따른 과거를 물려 행하고 알성(謁聖)할 때에도 사람을 뽑지 말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원접사(遠接使) 정치화(鄭致和)가 서로(西路)에 갔었을 때 안주(安州)의 무사인 전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석지암(石之巖)이란 자가 그와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치화를 알현했습니다. 그런데 평안 병사 허동립(許東岦)이 혹 자신의 과실을 말했을까 염려하여 그를 불러다가 꾸짖고, 다시 다른 일을 핑계대고 매질을 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지암은 정과(正科) 출신으로 이미 서반직(西班職)을 지냈으니, 설령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의당 보고한 뒤 조처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법례(法例)를 무시하고 멋대로 매질을 해서 죽게 만들었으니, 그의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군 행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를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를 하옥하려 하는데, 우상 원두표가 탑전에서 동립이 억울하다고 많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대간의 계사가 근거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의 첩 소생 아들이 동립의 사위이기 때문에 그 곡절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은 다 늙은 대신이니, 어찌 감히 피혐하여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문죄하지 말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동립이 지암을 매질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동립이 지암에게 섬에 가서 사나운 호랑이를 잡으라고 시켰는데, 지암이 겁을 먹고 즉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서 매질해 죽인 것이다."
하였다. 만일 그가 억울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두표는 자신이 대신으로 있으니 친척이라는 혐의 때문에 사실을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미 잡아다 다스리라는 명이 내린 뒤 한 차례도 조사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지레 억울하다고 하여 끝내 그 실상을 밝힐 수 없게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놀랍게 여겼다.

 

영의정 정태화가 병을 이유로 사직장을 올리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앞서 태화가 조경(趙絅)의 일 때문에 대관에게 배척을 당했는데, 큰 예가 있었기 때문에 즉시 사직을 청하지 못했다가 이때에 인퇴했던 것이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원도 조경의 일로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사직한 것이었다.

 

7월 30일 정축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삼남(三南)이 이미 황폐했는데 각도에서도 연이어 위급함을 고해 오니, 이번 한재의 참혹함은 예전에도 없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삼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번 경사스런 예를 행할 때 인척의 부녀자들로서 연줄을 타고 마구 들어온 자가 매우 많았으며, 대내에서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의식에 쓸 물건들이 매우 많고 사치스럽다고 하니, 이는 아버지가 뜰에서 노여워하고 있는데 자식은 방 안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통렬하게 마음에 새겨 대내의 잔치를 중지시키고, 경례(慶禮)를 마친 뒤 의당 매일 보신(輔臣)과 삼사(三司)를 불러 재해를 그치게 하고 백성들을 살리는 방책을 강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놀랍고 두렵다. 내간의 경례(慶禮)에 반드시 친속들을 청하는 것은 옛 규례이나 잔치를 베풀기까지 하는 것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다. 지금이 어떠한 때인데 이러한 일을 한단 말인가. 이는 모두 내가 신임을 받지 못해 생긴 일이니, 내가 실로 부끄러워 자책하고 있다."
하였다. 이때 외간의 소문이 분분했는데, 상의 하교가 이와 같았으므로, 제신들이 감히 다시 아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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