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6권, 현종 2년 1661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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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정미

장령 최유지(崔攸之)가 패초(牌招)하였는데 나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헌납 이제형(李齊衡)은 전 정언 원만리(元萬里) 등이 인피한 것에 대해 처치하는 말을 매우 모호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고 있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스로 조처하지 않아 물의가 시끄러우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 판서 정치화가 병을 이유로 굳이 사양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8월 3일 기유

좌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 영상 정태화가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한다고 핑계대고 계속 사직하는 소장을 올려, 군부(君父)에게 차라리 죽고 싶다는 분부를 내리게까지 했으면서 【일찍이 태화의 차자에 대한 답변 중에, 국사를 생각하면 차라리 죽고 싶다는 하교를 하였다.】  전혀 개의치 않고 기어이 체직되고야 말았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태화는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이미 세 조정을 섬겼고 선조(先朝) 때에는 거듭 왕실과 혼인을 맺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의(義)로는 군신이요, 은혜로는 부자이다.’라는 것입니다. 그가 이른바 사람들의 말이라는 것이 정도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요약하자면 대각(臺閣)에서 한때 과격하게 한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벌벌 떨며 체직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그의 본심이 일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그의 전 관직을 다시 내려 주어 출사하도록 재촉하시고, 만약 혹 끝내 명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특별히 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일을 회피하여, 자신만 편하게 하려는 죄를 다스리어 귀양을 보내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분수에 맞게 엄격히 나랏일을 해나갈 수 없으리라고 여깁니다. 옛날 한 무제(漢武帝)가 이르기를 ‘재주가 있는데 다 쓰려 하지 않는다면 재주가 없는 것과 같으니, 죽이지 않고 뭐하겠느냐.’ 하였습니다. 무제의 일이 배울 만한 것은 없지만, 어떻게 일이 없는 때에는 후한 녹을 받고 일이 있는 때에는 한가하게 지내어, 한결같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맡겨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서필원은 자신이 가까운 반열에 있으니, 조정이 어떻게 처치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감히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있는 힘을 다해 대신을 공격하다니, 일의 체모에 있어 매우 무례하다. 마땅히 귀양을 보내어 그 죄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나 또한 심하게 다스려 언로를 막아서도 안 되니, 우선 그를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니, 정원이 재고를 요청하고, 옥당이 차자로 진달하고, 양사가 계속 소장을 올려 그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태화의 체직 요청을 허락한 것은, 단지 그의 뜻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가 훗날을 기다려 다시 등용하려는 계획이었는데, 필원의 소장은 조금도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꾸짖은 것이다. 이해 겨울에 태화는 과연 다시 정승이 되었다. 필원이 우직하고 과감하게 말한 것이 비록 법도에 맞지는 않지만,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4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상이 태화의 체직 요청을 허락한 것은, 단지 그의 뜻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가 훗날을 기다려 다시 등용하려는 계획이었는데, 필원의 소장은 조금도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꾸짖은 것이다. 이해 겨울에 태화는 과연 다시 정승이 되었다. 필원이 우직하고 과감하게 말한 것이 비록 법도에 맞지는 않지만,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8월 4일 경술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헌납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삼았다.

 

지평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전 군수 이선기를 다시 해당 관서에 회부하여 심리하라고 명하셨다가, 곧 이어 참작하여 조율(照律)하라는 하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후의 공사(供辭)를 가지고 보건대, 죄명이 분명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점과 믿을 만한 점이 일정치 않으니, 무엇으로 참작하여 해당되는 율(律)을 적용시킨단 말입니까.
백성들을 위하여 보를 쌓는 것은 진실로 농정(農政)의 급선무이고 수령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금령을 어기고 연호(烟戶)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어사의 탐문에 적발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주 대하고 심리를 받으면서도 숨기고 사실대로 공술하지 않으니, 왕법(王法)에 있어서 스스로 자백한 내용만 가지고 믿어서는 안 되며 또한 실상이 드러나기 전에 범죄 상황을 지레 짐작해서 무거운 법률을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유사로 하여금 역군(役軍)을 제급(題給)한 해당 감사와 조발해 쓴 수령을 모두 다 자세하게 조사하도록 하여, 그들이 범한 것에 따라 법에 비추어 논죄하게 하소서.
허적은 보를 쌓는 일에 대해 처음에는 비록 참여하여 알았지만 끝내 관여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의금부의 회좌에 참여하지만 않으면 될 뿐입니다. 그런데 군정을 빌어 보를 쌓은 것을 자신이 직접 한 것이라고 소장을 올려 나열하면서 ‘선배 명류들도 이러한 일을 하였으므로 신도 본받은 것이다.’는 등의 말까지 하면서 대단한 기세로 변론하고 성내는 말을 많이 했으니, 사체를 그르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위급한 때에 호조 판서의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굳게 사직만 하고 있으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며 국가만을 위해야 하는 의리로 볼 때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엄중하게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이선기의 일은 그대로 따랐다.

 

호남의 장수(長水), 임실(任實) 등 고을에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고, 관동(關東)의 삼척부(三陟府)에 눈이 내렸으며, 호서(湖西)의 남포현(藍浦縣)에 지진이 있었다.

 

8월 5일 신해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하직 인사를 할 때 진달했던, 뜻을 세우고 학문을 힘쓰며 검소함을 밝히고 선비를 양성할 것 등의 말을 거듭 아뢰니, 상이 너그러운 뜻의 비답을 내려주었다.

 

8월 8일 갑인

장령 이동로(李東老)가 자기와 친한 사람을 위하여 신사 물금체(神祀勿禁帖)을 만들어 주었다가 부리(府吏)에게 고발당했는데, 헌부가 논하여 그것을 없애게 하였다.

 

8월 10일 병진

판중추부사 정태화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번 재상으로 있을 때 정세가 절박하여 번독스러움을 피하지 않고 사직하여, 마침내 은혜롭게도 체직을 윤허받아 조금이나마 물의에 사죄할 수 있었고 위태로운 수명도 연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삼가 듣자니, 신을 죄주자고 청한 상소가 근시(近侍)의 신하에게서 나왔는데, 끌어대어 비유한 것이 매우 준엄하여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몸둘 곳이 없어 교외에 엎드려 석고대죄하고 있은 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직명(職名)이 그대로 있으니 죄가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바라건대, 신을 속히 면직하시어 신의 죄를 바로잡고 국가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매우 극진하게 위로하고 타일렀다. 여러 차례 상소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원자(元子) 탄생의 경사로 인하여 다시 도성에 들어왔다.

 

8월 11일 정사

김남중(金南重)을 예조 판서로, 여이재(呂爾載)를 형조 판서로, 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정인경(鄭麟卿)을 승지로, 남구만(南九萬)을 헌납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8월 13일 기미

관동 강릉부(江陵府)에 독 안개가 바다로부터 몰려왔는데, 그 안개를 쏘인 사람 중 다섯 명이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일이 보고되자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물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전남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만경현(萬頃縣)을 폐지하고 다른 고을에 소속시키자고 청하였는데, 비국이 방계(防啓)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만경현이 재해를 가장 심하게 입어서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으므로 관가가 모양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청했던 것이다.

 

지평 이숙(李䎘)이 호위청(扈衛廳)에 관문을 보낸 것 때문에 대신에게 공격을 받고 인피하니, 대사헌 조형(趙珩)이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8월 15일 신유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이 다시 소장을 올려 면직시켜 달라고 청하니, 상이 단지 판의금만 체직하였다.

 

상이 영릉(寧陵)을 배알하려 하면서 경기의 어영군(御營軍)을 징발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헌부가 이미 번드는 것을 뒤로 물렸으니 자주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는 처음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어영군의 번차(番次)를 10월로 물렸는데, 이때와서 광주(廣州)의 군병을 징발하는 것이 폐단이 있어 다시 어영군을 징발했기 때문이다.

 

좌의정 심지원이 다시 나와 일을 보았다. 지원이 대간에게 공격을 받은 것 때문에 매우 강력하게 사직했지만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 원자가 탄생한 경사로 인하여 출사하였다.

 

8월 17일 계해

예조의 계사로 인하여 원자의 탄생을 경하할 때 각도의 진하 방물(陳賀方物)을 양 자전 외에는 진상하지 못하게 특명을 내렸다.

 

간원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원자가 탄생된 것은 실로 종사의 더할 수 없는 경사이니, 모든 행해야 될 의식을 참으로 인정과 법문을 두루 갖춰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삼가 해조의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간략하게 거행하라는 하교를 하셨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 ‘지금 이렇게 큰 재해를 당하였으니 의식에 쓰는 물품을 바치는 때에 절약해서 줄이고 싶다.’고 생각하셔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난리를 겪은 뒤로 문서가 유실되어 전연 상고할 만한 것이 없으니, 속히 열성(列聖)의 《실록(實錄)》을 상고하도록 하여 준행할 기준을 삼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지평 이숙은 사체를 알지 못한 대신이 공격한 것 때문에 인피하여 체직을 당하였습니다. 금법(禁法)을 범한 한 군관을 볼기친 것 때문에 간관을 체직시키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간사한 백성들이 몰래 비웃을 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헌부가 처치한 것은 매우 체모를 잃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운 뜻으로 답하였다. 대사헌 조형이 아뢰기를,
"신이 이숙을 처치할 때 ‘호위청에 낭청(郞廳)이 없는 것을 이숙이 모르지 않으면서도 백문(白文)으로 관문을 보내면서 낭청이라고 썼으니 체례(體禮)에 비춰볼 때 자못 살피지 않은 것이다.’고 생각했으므로 이 때문에 체직시킬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간원의 차자를 보건대, 신이 처치를 잘못한 실수가 드러났습니다."
하고, 인피했다. 장령 박증휘(朴增輝)가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8월 19일 을축

원자가 태어난 것을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 및 사직(社稷)에 고했다. 다음날 교문(敎文)을 반포하여 사면하고, 백관들이 전문(箋文)을 바치며 진하하였다. 【전례에는 원자가 탄생하여 7일이 지난 뒤에야 백관들이 전문을 바치며 진하하였다. 그러나 마침 국기일(國忌日)과 겹치게 되었고 또한 구애되는 점이 있어 길한 25일로 물려 행하려고 하다가 대신들이 날짜가 너무 늦다고 하자, 이 날로 당겨 시행한 것이다.】  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세자에 의뢰해야 하므로 후사를 세울 생각이 항상 간절하였는데, 하늘이 복되게도 맏아들을 내려 주어 백성들의 기대와 부합하게 되었다. 이에 옛 법도에 따라 크게 고하노라.
삼가 생각건대, 국가의 운이 장구하게 되는 것은 진실로 자손들이 번창하게 되는 것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시경(詩經)》에서 주 문왕(周文王)을 칭송한 것은 백세토록 자손들이 융성하게 됨을 노래한 것이고, 《주역(周易)》에 진괘(震卦)를 배열한 순서는 장남이 보위를 원만하게 계승하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부족한 몸으로 외람되이 이 큰 통서를 이어받았다. 후손을 두는 것보다 더 큰 효도가 없으므로 오직 자손이 영원토록 계승되기를 바랐고, 예는 선조를 잘 받드는 것이 중요하므로 항상 선조의 사업을 혹 잘못되게 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묵묵히 도와주심을 힘입어 대를 이을 적자(嫡子)가 태어남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무궁한 복이 내림은 조종께서 여러 대에 걸쳐 덕을 쌓은 덕분이고, 종묘의 제사를 맡길 수 있게 되어 신민들의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게 되었다. 숙성하고 재지가 뛰어나 양궁(兩宮)께서 기뻐하시고, 품성 또한 매우 빛나고 고와서 진실로 온 나라가 노래하며 칭송한다. 이는 어찌 다만 부자간의 정일 뿐이겠는가. 실로 사직의 경사라 할 것이다. 밝음이 계속 이어져 비추니 이미 비상한 조짐과 합치되었고, 은택이 사방으로 흘러 넘치니 사면하는 은전을 어찌 아낄 것인가.
이번 달 20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한다. 아, 슬기롭고 착하게 되느냐의 여부는 반드시 처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두 더불어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

 

민응협(閔應恊)을 대사헌으로, 유명윤(兪命胤)·정창도(丁昌燾)를 지평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참찬으로, 홍명하(洪命夏)를 겸 판의금(兼判義禁)으로, 이민서(李敏敍)를 부교리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8월 20일 병인

《효종대왕실록》을 강도(江都) 및 오대산(五臺山), 적상산(赤裳山), 태백산(太白山) 등의 곳에 봉안하였다.

 

8월 20일 병인

예조가 아뢰기를,
"원자가 태어난 것은 더할 수 없는 경사이니, 의당 증광과(增廣科)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의당 네 경사를 【바로 부묘(祔廟)와 양전 존숭(兩殿尊崇) 및 중궁 책례(中宮冊禮)이다.】  합해서 대증광과(大增廣科)를 시행해야 한다.’ 하는데, 감히 저희들의 억견으로 결정할 수 없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아뢰기를,
"마땅히 합하여 대증광시를 행해야 할 것입니다. 초시는 금년으로 정하고 복시는 내년으로 정하며, 원점(圓點)은 유익한 점은 없고 폐단만 있으니 우선 폐지하고 관시(館試)를 시행하지 말고 두 곳에서 모아 뽑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네 경사를 합해 치르는 과거를 흉년으로 인해 명년으로 물려 정했는데, 원자가 탄생된 뒤에 여러 대신들이 막중한 경과(慶科)를 해를 넘길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당겨 정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46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인사-선발(選拔)

 

8월 21일 정묘

예조가 아뢰기를,
"원자가 탄생되었으니 의당 공상(供上)을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의거할 만한 전례는 없지만 세자에 비해서는 조금 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진배(進排)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3일 기사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대신 및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이렇게 농사가 흉년든 때에는 모든 것들을 감하여 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상지(供上紙)의 품질이 매우 두꺼운데, 초주지(草注紙)로 대용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폐로 말한다면 완전히 감해도 될 것이니, 다른 종이로 대용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양 자전 이외의 다른 전(殿)에는 초주지로 대신 들이더라도 괜찮다."
하였다. 좌상 심지원이 아뢰기를,
"역(役)을 줄여주는 등의 일은 반드시 호조 판서와 의논하여 결정해야 되는데, 허적이 병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 달 이내에 쉽게 낫지 않으면 장애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적은 상당히 재능이 있고 또한 본 직임에 오래 있었으므로 제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반드시 그를 쓰고자 한 것인데 병이 과연 이와 같다면 호조 판서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울 수 없다. 즉시 그를 체직시키고 후임자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아는 것이 없는 데다가 재량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노병이 더욱 깊어 재상의 자리에 결코 오랫동안 있을 수 없습니다."
하며, 매우 간절하게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이 이미 체직되었는데 경 또한 동시에 사직한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만약 경을 체직시킨다면 연소한 자들 중에서 경과 같은 이를 택하려 하더라도 어떻게 쉽게 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지금 다섯 경사를 합하여 대증광시(大增廣試)를 행하려 하는데, 문과는 의당 40인을 뽑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무과만은 뽑는 인원을 더 늘리지 않으니, 전하의 은전에 흠이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과도 문과의 수만큼 시험보여 뽑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인조을해년069)  에도 대증광시를 시행한 적이 있으니, 그때의 예를 살펴보고 한다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정치화(鄭致和)를 호조 판서로, 이은상(李殷相)을 병조 참지로, 민유중(閔維重)을 교리로, 김만기(金萬基)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8월 25일 신미

대사헌 민응협(閔應恊)이 패초(牌招)하였는데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8월 26일 임신

호남의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에 눈이 내렸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삼았다.

 

8월 28일 갑술

상이 영릉(寧陵)을 배알하였는데, 능을 세 바퀴나 돌며 봉심(奉審)하고 섬돌 아래에 이르러 땅에 엎드려 울며 눈물을 흘렸다. 경기 감사 정지화(鄭知和)와 양주 목사(楊州牧使) 조귀석(趙龜錫)에게 호랑이 가죽과 활, 화살을 하사하고, 이어 건원릉(健元陵)·현릉(顯陵)·목릉(穆陵)을 배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석관(石串)에 【동교(東郊)의 지명이다.】  이르러 금군(禁軍)의 활솜씨를 시험하였다.
상이 말을 타고 길가의 가파른 언덕을 달려 올라가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뒤 금군으로 하여금 1리쯤 앞으로 달려가 진을 치고 있게 하였다. 이어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를 불러, 도로 곁 좌우에 걸음 수를 참작하여 각각 두 개의 짚으로 묶은 허수아비를 세운 뒤 대포를 쏘는 것을 신호로 금군으로 하여금 말을 달리며 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일이 뜻밖에 벌어졌기 때문에 시종하는 신하들과 호위하는 군사들이 전후로 우왕좌왕하여 질서가 없었고 나뭇잎을 깔고 앉기까지 하였으므로, 놀랍게 여기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에 대사간 박장원(朴長遠)과 집의 이준구(李俊耉)가 아뢰기를,
"군대를 사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삼년상을 겨우 마친 뒤 슬픈 심정으로 원릉(園陵)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이러한 일을 하니 불가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연이은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으니 바로 조심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신은 이번 일이 즐기는 것에 가깝지 않나 염려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신과 옥당이 다시 아뢰었으나 응하지 않고 드디어 발사할 것을 명하였다. 얼마 있다가 빗나간 화살이 우상 원두표의 옷소매를 꿰뚫고 팔뚝에 상처를 입히니 뭇 신하들이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다. 상이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다친 곳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이때에도 금군은 계속 활을 쏘고 있었는데, 유계(兪棨)가 중지시킬 것을 청하자, 상은 바로 활쏘기를 멈추라고 명하였다.
두 개를 맞춘 문민선(文敏善) 등 7인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고, 하나를 맞춘 89인에게는 각각 면포를 하사하였다. 그러자 미처 활을 쏘지 못한 자들이 상을 받는 것을 보고 땅에 엎드려 자신들도 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후에 마땅히 별도로 시사하겠다."
고 타이르니, 결국 물러갔다. 환궁하려 할 때 우상은 뒤에 남아 천천히 따라 오라고 명하였는데, 홍명하가
"사람들이 듣고 놀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우상이 어가를 따랐다. 해가 저물자 상이 빨리 달려 환궁하였다.

 

8월 30일 병자

부안(扶安)과 진도(珍島)에 있는 죄인을 본도와 영남의 농사가 좀 괜찮은 곳으로 이배(移配)하였다. 이는 전남 감사(全南監司) 이태연(李泰淵)이 두 고을이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었다고 치계하였기 때문이다.

 

밤에 우레와 번개가 쳤다.

 

도승지 김좌명이 상소하여, 뜻을 굳게 가지며 고식적인 것을 통렬히 경계하라고 청하고, 또 비용을 줄이며 폐단을 없애라는 뜻으로 진달하였는데, 말이 매우 격렬하였다. 상이 그대로 머물려 두고 계하하지 않았다.

 

헌납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가를 멈추고 무예를 관람하는 것이 본래 크게 불가한 일은 아닙니다만, 거동을 경솔하게 하는 것은 절대로 백성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뜻밖에도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중에 옆으로 튀어 나온 화살이 상신(相臣)에게 맞아, 모든 관원들의 안색이 변했고 이 사실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매우 놀랐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도 필시 이에 대해 놀라고 걱정하셨을 것입니다.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끝내 성상의 덕에 누가 되니, 바라건대 앞서의 일을 마음에 새겨 뒷날의 경계를 삼으소서."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관서 지역에 우박이 내려 곡식의 피해가 많다고 도신(道臣)이 보고하니, 재해를 더욱 심하게 입은 곳은 역(役)을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고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였다.
덕령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의분에 북받치는 마음과 큰 절조를 지녔으며 용기와 힘이 매우 뛰어났다. 임진 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쳐부수니, 왜구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선조는 그를 가상하게 여겨 바로 형조 좌랑에 제수하고 충용 장군(忠勇將軍)이란 명호를 하사하였으며, 광해(光海)는 세자 분조(世子分朝)로써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란 명호를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위엄의 명성이 크게 떨쳐지니, 그를 시기하는 자가 이몽학(李夢鶴) 무리라는 유언 비어를 조작하여 퍼뜨린 뒤 조정에 보고하여 함께 모함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하옥되었다가 매를 맞고 죽으니, 호남 사람들이 원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한재 때문에 도신(道臣)들에게 명하여 원통하게 죽은 자 중 아직 신원되지 않은 자를 찾도록 하였다. 이에 도신이 덕령에 대해 보고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여, 그 원통함을 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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