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6권, 현종 2년 1661년 윤7월

싸라리리 2025. 12. 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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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7월 1일 무인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면대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상이 병을 이유로 사절하였다. 이때 한재가 더욱 심해져 농삿일이 날로 급박하게 되었으므로 유계 등이 면대하여 아뢰려고 했던 것인데, 마침 상의 몸이 편찮았으므로 나아가 알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 감사 이만웅(李萬雄)이 졸하였다. 만웅의 자(字)는 심보(心甫)로 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의 현손(玄孫)이다. 지조와 기개가 있었으며 밖으로는 온화하고 안으로는 굳세었는데 일을 처리함이 구차스럽지 않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탐오스런 짓을 하지 않았다. 화려하고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치며 명성을 날려 사람들이 크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나이 겨우 마흔 살에 졸하였다.

 

김우형(金宇亨)을 사간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집의로, 이정영(李正英)을 우윤으로 삼고, 강유후(姜裕後)를 발탁하여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김체건(金體乾)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부마 홍득기(洪得箕)·심익현(沈益顯)·정제현(鄭齊賢)·정재륜(鄭載崙)·원몽린(元夢鱗) 등을 광덕 대부(光德大夫)에 가자(加資)하였다. 이때 경사스런 예로 인하여 백관에게 가자하였는데, 상이 특명을 내려 다섯 부마는 직접 자신이 받도록 하였다.

 

윤삼(尹蔘)을 영릉 참봉(英陵參奉)으로 삼았다.
윤삼은 호서 아산(牙山) 사람으로, 병자년의 난리 때에 아들과 조카가 함께 포로로 잡혀갔다. 난리가 평정되자, 속환(贖還)할 비용을 마련하여 심양(瀋陽)에 노비를 들여 보내며 이르기를
"내 자식은 지금 비록 속환할 수 없더라도 내가 죽지 않는다면 후에 마땅히 속환할 것이다. 그렇지만 조카의 경우는 이미 부모가 돌아가셨으니, 지금 속환하지 않으면 돌아올 기약이 없다. 그러니 이번에 둘 다 속환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속환할 값이 만약 부족할 경우에는 마땅히 조카를 먼저 속환하라."
하였는데, 노비가 그의 말대로 조카를 속환하여 데리고 왔다. 그런데 다음해 다시 가보니, 자기 자식은 이미 죽은 뒤였다. 윤삼은 끝내 아들이 없게 되자, 그 조카를 후사로 삼았다. 고을 사람들이 그를 등백도(鄧伯道)에 견주었다. 어사 이민적(李敏迪)이 호서 지역을 두루 염찰하다가, 거두어 쓸 것을 계청하였으므로 관직에 보임한 것이다.

 

대사성 박장원(朴長遠)이 상소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에 앞서 송준길이, 사유(師儒)를 구임(久任)시켜 문풍(文風)을 진작시킬 것을 탑전에서 진달하였다. 상이 이 직임에 적합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장원은 재주와 명망이 실로 이 직임에 적합하니, 설령 다른 직에 옮겨 제수하더라도 의당 그대로 겸하게 하소서."
하였다. 준길의 뜻은 유계(兪棨)에게 있었는데 대신이 장원이 적합하다고 대답했으므로 시종 굳이 사직하여 체직된 것이다.

 

좌의정 심지원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평안도가 가뭄이 심하다고 보고하자, 향축(香祝)을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윤7월 2일 기묘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등이, 다섯 부마에게 가자를 친히 받도록 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국조(國朝)의 구례에, 경사로 인해 가자할 경우 통정(通政) 이상은 직접 자신이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때에 대사간 이은상 등이
"전례가 없는 일로 가벼이 줄 수 없으니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정원에 명하여 전례를 상고해 내도록 하였다. 복녕군(福寧君) 이유(李栯)가 선조(先朝) 때에 자신이 가자를 받았는데 대간에서 환수하라고 아뢴 일이 없었다. 이에 상이 매우 노여워하였는데, 다음날 은상이 탑전에서 연계(連啓)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친히 받으면 그것이 훗날의 법례(法例)가 될까 염려하는가? 그리고 계사 가운데의 이른바 ‘성상의 뜻을 두고 계신 것이 진실로 범연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자성(慈聖)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려는 뜻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성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려는 뜻인 줄 알았으면서 어찌하여 이렇게 강력하게 고집하는가?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설령 법례를 넘어 가자하더라도 이는 아래에 있는 자들이 굳이 간쟁할 일은 아니다. 자성께서 오랫동안 병환 중에 계시면서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상기(喪期)를 마치셨는데, 내가 달리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릴 일이 없으므로 특별히 다섯 부마에게 가자를 한 것이다. 그대가 굳이 환수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간은 유독 어미가 없는가?"
하고, 인하여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은상이 황공하여 인피하고 물러나왔다. 그가 합문(閤門)을 나오자 그의 사촌형 이일상(李一相)이 꾸짖기를
"너는 나랏일에 대해서 모두 간여하고자 했으니, 어떻게 오늘과 같은 사태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수에 참여한 제신들에게 정부(政府)에서 술을 하사하고, 4일 뒤에 가서 다시 차일암(遮日巖)에서 【바로 세초(洗草)하는 곳이다.】  술을 하사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국가의 고사에 따라 술을 내리고 잔치를 베풀 것을 명하였는데, 헌부와 정원이
"이렇게 한재가 든 때에 음악을 연주하며 잔치를 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고, 총재관(摠裁官) 이경석(李景奭)도 차자를 올려 그것을 말하였으므로 단지 중사(中使)만 파견하여 두 곳에서 술을 내렸던 것이다. 이조 참판 김수항(金壽恒)과 교리 이민적(李敏迪)도 거기에 참여하였는데, 수항과 민적은 어려서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이는 민적이 수항보다 많았다. 이날 술자리가 파할 즈음에 둘은 가까이 앉아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민적이 웃으며 수항에게 이르기를
"너는 적은 나이로 도리어 나보다 윗자리에 앉았구나."
하니, 수항도 장난으로 답하기를
"너는 연장자로서 자신의 지위가 낮은 것을 탄식하는 뜻이 있는 것인가? 네가 당상에 오르고자 정조(政曹)에서 한 자급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내가 만약 입을 열면 너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대개 민적이 당시 부묘 도감 도청(祔廟都監都廳)이었는데 준직(准職)을 거치지 않았으며 자급도 단지 봉정(奉正)이었으므로 【실록 제명록(實錄題名錄)을 상고해 보니, 바로 봉정이었다.】  비록 상전(賞典)을 받더라도 전례상 당상으로 오를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업무에 밝지 못한 정조의 관리가 《대전(大典)》의 벼슬을 올려주는 예를 근거로 민적을 위해 한 자급을 올리려고 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설령 한 자급을 올렸더라도 통훈 대부(通訓大夫)와는 두 자급의 차이가 있으니, 정조의 관리가 한 것이 민적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수항이 어찌 몰랐겠는가. 술에 취하여 농담을 하다가 점점 서로 침범하기까지 한 것으로, 이는 술자리에서 말을 잘못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시기하는 자가 말하기를
"수항과 민적이 예모(禮貌)를 다투며 서로 꾸짖었는데, 수항이 민적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당상관에 오르려고 정조(政曹)를 통해 한 자급 올릴 것을 도모하다가 나에게 들켰으니, 사대부의 마음씀이 진실로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일이 있는데 내가 만약 입을 열면 그대는 세상에 존립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른바 한 가지 일이란 그의 집안일을 가리킨다."
하였다.
대개 이 두 사람은 모두 명성이 있는 사람들로서 취중에 이런 실언을 한 것인데, 당시 듣는 자들치고 떠들썩하게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른바 한 가지 일이라는 것은 원래 수항이 말한 것이 아닌데, 역사를 편수하는 자가 이런 내용을 기록하면서 그 실상을 없애고 마치 참으로 숨긴 것이 있는데 수항이 성이 난 김에 꾸짖으며 얘기한 것처럼 하였으니, 모두 실상과는 다른 것이다.

 

윤7월 3일 경진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금년의 가뭄은 전고에 없던 일이니, 모든 일을 반드시 별도로 변통하여 착실하게 거행한 뒤에야 국가가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하가 서로 마주 대하고 하릴없이 걱정과 탄식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비상한 재난을 만났으니, 반드시 대단한 조치를 시행한 뒤에야 무슨 일을 할 수가 있다. 백성들을 구하는 것과 관계된 모든 일을 마땅히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자를 구하듯 해야지 조금이라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나라가 있은 뒤에야 요새지도 있는 것이니,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있는 쌀을 우선 삼남에 보내어 하루라도 백성들의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이 밖에는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상황에서 보면, 백성들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구원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어찌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이러한 때에 빈청의 좌기(坐起)는 굳이 평상시의 일차(日次)에 따라 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변통할 일이 있으면 경들은 반드시 자주 입대하여 서로 더불어 의논해서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니 백성들이 비록 죽더라도 무엇을 원망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내주방(內酒房)에서 하루에 술 빚는 양이 서너 석에 이르니, 이것 또한 마땅히 일체 줄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일 백성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을 아끼겠는가."
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훈국(訓局)의 군병 중 늙고 병든 자 5백 명을 면직하여 돌려보내서 경비를 줄일 것을 청하고,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금군(禁軍)의 수를 줄일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유지(諭旨)를 내려 삼남의 감사에게 포고하여 구휼 정책을 단단히 타이르고, 또한 기민들을 안집시켜 유리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5일 임오

삼남의 수륙군(水陸軍)에 대한 조련과 세초(歲抄)를 중지시킬 것을 명하였다.

 

윤7월 6일 계미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헌납 오두인(吳斗寅), 정언 여성제(呂聖齊)·이동명(李東冥)이 엄한 하교 때문에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아오지 않고,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번에 전에 없던 한재를 만나 시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옛적의 독려하는 예로 논한다면 물리치는 법을 의당 신에게 먼저 시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를 다시 나오게 하여 잘못을 거듭하게 하였으니, 하늘의 재앙에 답하고 백성들의 바람을 위로하는 방도가 더욱 아닙니다. 삼가 듣건대, 요즈음 연신(筵臣) 중에 신이 말을 잘못한 것에 대해 배척한 자가 있다고 하던데, 이는 참으로 엄정한 의논입니다. 병세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결단코 반열에 나아가기 어려우니, 본직과 겸직하고 있는 제반 직무를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했다. 이에 앞서 조정이, 진휼청을 따로 설치하는 것은 폐단이 있다 하여, 조복양(趙復陽)을 당상으로 삼아 비국의 제조인 홍명하(洪命夏) 및 호조 판서와 함께 그 일을 담당하도록 한 뒤 대신이 총괄하도록 하고 비국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제반 계사(啓辭)와 행이(行移)에는 모두 비변사(備邊司)로 호칭하기로 하였는데, 대신이 사체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다 하여 진휼청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윤7월 7일 갑신

옥당이 차자를 올려, 지난번 인대할 때에 부마들에게 가자하는 문제로 인하여 간관을 꾸짖은 잘못을 진달하고, 또 헌부가 태만하여 좌기하지 않는 폐단을 논하며 장령 정계주(鄭繼胄)·정시성(鄭始成), 지평 박승건(朴承健)을 체직시키라고 청하니, 이를 따랐다.

 

윤7월 8일 을유

박장원(朴長遠)을 대사간으로, 최유지(崔攸之)·이동로(李東老)를 장령으로, 이제형(李齊衡)을 헌납으로, 이숙(李䎘)을 지평으로, 유명윤(兪命胤)·원만리(元萬里)를 정언으로, 정태화(鄭太和)를 내의 도제조(內醫都提調)로, 이중신(李重信)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여러 도감의 상격(賞格)을 논하였다. 【부묘 도감(祔廟都監)·양 대비 존숭 도감(兩大妃尊崇都監)·중전 책례 도감(中殿冊禮都監)이다.】  부묘 도감 도제조 심지원(沈之源)·이경석(李景奭)에게는 숙마를 하사하고, 제조 허적(許積)·여이재(呂爾載)·조계원(趙啓遠)은 가자하고, 홍중보(洪重普)·정치화(鄭致和)와 도청(都廳) 이민적(李敏迪)·곽지흠(郭之欽)·오시수(吳始壽)·목겸선(睦兼善)에게는 숙마를 하사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존숭 책례 도감과 부묘 도감의 당상과 낭청을 겸하였다.】  부묘할 때의 아헌관 정태화에게는 안구마를 하사하고, 종헌관 평운군(平雲君) 이구(李俅), 진폐 찬작관(進幣瓚爵官)  윤강(尹絳)·김수항(金壽恒), 천조관(薦俎官) 허적(許積), 전폐 찬작관(奠幣瓚爵官) 조복양(趙復陽), 예의사(禮儀使) 김남중(金南重), 당상 집례(堂上執禮) 오정위(吳挺緯)에게는 숙마를 하사하고,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예방 승지 이익한(李翊漢), 제10실 대축(大祝) 윤비경(尹飛卿)에게는 가자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자의 대비(慈懿大妃) 존숭 때의 정사인 정태화에게는 안구마를 하사하고, 부사 이일상(李一相)에게는 숙마를 하사하고, 옥책문 제술관 이일상과 서사관 김좌명(金佐明)은 가자하고, 악장 제술관 유계(兪棨), 옥보 전문 서사관 여성제(呂聖齊), 책보 봉진관 원만석·박세모에게는 숙마를 하사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중전 책례 때의 정사인 정태화와 부사 조형(趙珩)에게는 안구마를 하사하고, 전교관(傳敎官) 박세모, 옥책문 제술관 김수항, 서사관 오준, 교명문 제술관(敎命文製述官) 이일상, 서사관 송준길에게는 숙마를 하사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몇 가지 일을 겸했더라도 중첩해서 주지는 않았다.

 

윤7월 9일 병술

대사헌 유철(兪㯙)이 패초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참의 조복양이 태복시(太僕寺)의 마필을 줄일 것을 청하였고, 병조 판서 홍명하는 각 고을에 매월 부과하는 군량과 군기를 중지시키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윤7월 10일 정해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승지로 삼았다. 또한 허적(許積)을 숭록 대부로 가자하고, 조계원(趙啓遠)·여이재(呂爾載)·윤순지(尹順之)를 자헌 대부로 가자하고, 오준(吳竣)을 보국 대부로 가자하고, 김좌명(金佐明)을 가의 대부로 가자하고, 이일상(李一相)을 정헌 대부로 가자하고, 윤비경(尹飛卿)을 통정 대부로 가자하고, 남용익(南龍翼)·이익한(李翊漢)을 가선 대부로 가자하였다.

 

홍주목(洪州牧)을 강등하여 홍양현(洪陽縣)을 삼고, 충홍도(忠洪道)를 충공도(忠公道)로 삼았는데, 이는 전패(殿牌)가 변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윤7월 11일 무자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원두표가 삼남의 재해가 더욱 극심한 고을에 대해서는 수륙 군포(水陸軍布)를 견감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도승지 김좌명이 아뢰기를,
"삼남의 민생들이 현재 하루도 보전할 수 없는 처지에 있으니, 새로 제수된 수령들에 대하여 명년 가을까지 가솔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서로(西路)에서 내수사에 바치는 명주 공물을 쌀로 대신 납부하게 하여 진휼할 밑천을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내수사의 공물 또한 진휼하는 데로 돌리시니, 듣는 자로서 어느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의원의 명주 공물 수효도 많으니, 본원 제조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윤7월 13일 경인

서원리(徐元履)를 호조 참판으로, 유철을 예조 참판으로, 유혁연(柳赫然)을 좌윤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평안·황해·강원·충공(忠公) 등 도의 입작민(入作民) 【골짜기 가운데에 사는 유민(流民)을 입작이라고 한다.】 에게서 산전세(山田稅)를 거두었는데, 이는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1결에 다섯 말 거두는 것으로 기준을 삼았는데, 평안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너무 많다고 하여 세 말로 줄여 정하였다. 두표가 또 도첩(度牒)을 받은 승려에게서 쌀을 거두고 쌀을 바친 교생에게는 강(講)을 면제시켜 주고자 하였는데,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하니,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금년 농사가 매우 위급하여 위로 제향(祭享)으로부터 어공(御供)까지 모두 절약하여 줄이려 하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상의원에 일하고 있는 공장(工匠)들이 대부분 전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짜고 있으며 대궐안에서 남빛을 물들이는 데 있어서도 매우 번잡스럽게 하므로 항간의 소문이 매우 분분하다고 합니다. 담당 관청을 신칙하여 모든 형식적이고 쓸데없는 비용은 일체 중지하거나 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농사가 흉년이므로 영장(營將)을 파하여 수요에 맞춰 공급하는 폐단을 줄이자고 청하였는데, 우의정 원두표가 그들의 월름(月廩)만 줄이고 파하여 없애지는 말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전 관상감 직장 송형구(宋亨久)가 상소하여, 시헌력(時憲曆)을 폐지하고 다시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하자고 청하였는데, 본감 영사가 아뢰기를,
"역수(曆數)가 얼마나 차이나는지를 일식과 월식에서 시험하였는데, 구법(舊法)으로 시험해 보니 차이가 많이 났고 신력(新曆)으로 시험해 보니 상당히 비슷했으므로 당초 이것을 정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신력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선조(先朝)의 명을 받았으니, 지금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윤7월 14일 신묘

상이 자정당(資政堂)에 임어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당시에 상이 오랫동안 경연을 열지 않아 사람들이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겼는데, 이때 와서 강을 시작하자 뭇 신하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데 며칠이 되지 않아 다시 눈병이 나 중지하였다.

 

정언 원만리(元萬里) 등이 아뢰기를,
"근래 이선기(李善基)가 공사(供辭)를 속인 것 때문에 물의가 자자하니, 신들은 가슴 아프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보를 쌓을 때 일을 한 자 백여 명은 그래도 품삯을 지급했다고 핑계댈 수 있지만, 어사의 서계에서 이미 5, 6백 명이라고 했으니, 품삯을 지급한 이외의 4,5백 명에 대해서는 선기가 온통 빼놓고 거론하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호조 판서 허적이 상소한 내용으로 보더라도 보를 쌓은 자가 다 그 지역 주민이 아님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선기는 ‘바로 신평(新坪)에 사는 사람들이 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감사에게 보고하여 수백 명의 군정(軍丁)을 받아 냈다.’ 하였으니, 연군(烟軍)을 당초에 제급(題給)한 사실은 분명하여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기는 갖가지 방법으로 교묘하게 꾸며대며 원래 이런 일이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임금을 속인 그의 죄를 엄히 조사하여 무겁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의금부의 관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엄폐하여 반드시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려 하였으니, 그들이 아뢴 것은 법률 적용을 아뢰는 체모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이선기를 다시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밝히도록 하고, 당해 당상은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처음에 호서의 암행 어사 이민적(李敏迪)이 서계하기를
"면천 군수(沔川郡守) 이선기가 지난해 봄에 서울에 사는 사대부를 위하여 보를 쌓고 전장(田莊)을 지었는데, 연군(烟軍) 5백 명을 멋대로 사용하여 많은 민원을 사고 있다."
하였는데, 상이 선기를 잡아다 문죄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허적(許績)이 판의금으로 있었는데, 상소하기를
"내포(內浦)에서 처가살이하는 신의 서제(庶弟)가 보를 쌓는 데에 포함되어 있으니 금번 선기를 죄주는 문제에 대해서는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허적이 실제 보를 쌓은 주동자로 선기가 붙잡힌 뒤에 서제가 한 것이라고 핑계대고 진소하여 면직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속임수를 쓴다고 말하였는데, 의금부의 관원들은 허적이 현재 수석(首席)에 있기 때문에 법에 의거하여 죄를 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대관이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허적이 또 상소하기를,
"신이 이선기의 일에 실로 관련이 있는 혐의가 있으며 대대적인 사면이 계속 내려 모든 죄인들이 다 사면되는 때에 석방하였다가 곧바로 다시 붙잡아 가둔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는 것이니, 신이 어떻게 감히 편안스레 죄 없는 사람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선배 장로(長老)와 현재의 명망 있는 이들을 보건대, 보를 쌓아 생계의 밑천을 삼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신도 또한 처음에 이것이 사대부에게 수치스런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감히 무턱대고 흉내낼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당초 파손된 보가 개축되었다가 다시 무너진 것은 무술년067)  이었는데, 다음 해 3월 신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와, 보를 쌓는 사람들이 이름을 나란히 적어 도신(道臣)에게 소장을 올려서 군인 수백 명을 얻어 개축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신은 바로 놀라 서제(庶弟)로 하여금 그 문서를 물리치게 하여 각 고을에 이르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설령 선기가 그때 면천 군수로 있었다 하더라도 군정을 요청하는 공문이 가지 않았을 것이니, 선기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선기가 면천 군수로 부임한 것은 그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선기에게 속였다고 한다면 신이 소에서 아뢴 뜻과 어찌 그리 차이가 납니까. 보를 막는 데 군인을 주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이며 요청한 자가 연줄이 있지도 않고 주는 자도 평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도 신이 극력 중지시킨 것은, 실로 시론(時論)이 날로 더욱 맑고 높아지므로 외로운 처지에 있는 신에게 쉬이 탈이 생기게 될까 염려해서였습니다."
하였다. 정언 원만리·유명윤 등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호조 판서 허적이 상소한 내용을 보니, 늘어놓은 많은 말들이 모두 선기를 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도신에게 소장을 올려 군정(軍丁)을 받아낸 것은 선기가 부임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라는 것은, 은연중에 대간의 계사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돌리려는 것입니다.
지금 허적이 전후로 상소한 것을 의거해 보건대, 부서진 보를 처음 쌓은 것은 정유년068)  이었지만 또 다시 무너져 다시 쌓은 것은 작년이었는데 군정을 받아낸 것이 다시 쌓을 때였으니, 그렇다면 과연 선기가 부임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까. 이번 소장에 또 말하기를 ‘군정을 요청하는 공문을 서제(庶弟)를 시켜 각 고을에 이르지 않게 하였으니, 선기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과연 이 말과 같이 단지 감사에게만 소장을 올려서 군정을 얻었고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면, 수령인 자가 참으로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만, 지금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 먼 곳에 사는 촌 백성들이 이 사실을 알고 한 해가 지난 뒤에 어사의 귀에 흘러 들어갔으니, 그 문서를 각 고을에 보내지 않은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앞의 소장에 또 말하기를 ‘서제가 양반과 상민들이 보를 쌓기로 약속하는 가운데 참여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허적의 서제는 보를 쌓는 일에 참여한 일개 서얼일 뿐입니다. 감사에게 소장을 올리는 것은 바로 양반들이 하는 일이니, 그렇다면 연군(烟軍)을 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어찌 일개 서얼이 주장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더구나 허적은 이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재상일 뿐인데 무슨 이유로 멀리 서울에서 양반들이 하는 일을 제어한단 말입니까. 자기 아우를 단속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일에 관여치 말게 하는 것은 참으로 부형의 도리이겠습니다만, 미루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는 것은 또한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까. 보를 쌓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물의(物議)가 그르게 여기고 있는 것은 단지 연군(烟軍)을 뽑아 쓴 것 때문이고 신들이 논한 것은 선기가 속인 것을 깊이 미워한 것입니다. 그런데 허적이 일개 인군을 속인 자를 위해 나서서, 석방되었다가 다시 갇히게 된 것을 가지고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뭇사람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하였으니, 어찌하여 스스로를 이와 같이 의심한단 말입니까.
신이 일개 수령을 논하다가 도리어 중신에게 배척을 받아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헌납 이제형(李齊衡)이, 피혐한 글 가운데 말을 잘못한 부분이 있으니 만리 등을 체직시키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민적이 상소하기를,
"삼가 허적이 상소한 계본을 보니 선배 장로(長老)들도 보를 쌓은 자가 많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어 듣건대 그것은 신의 아비를 가리킨 것이라고 합니다. 신의 아비는 두 조정의 은혜를 받아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니, 입신(立身)한 본말은 자연 숨길 수 없습니다. 집이 평소 청빈하여 일찍이 조금의 방죽도 가지지 않았음은 온 조정이 알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신명(神明)에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전토(田土)는 옷 소매 속에 감출 수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땅이 소재한 곳이 있을 것이고 보를 쌓은 때가 있을 것이어서 남들의 이목을 자연 가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허적은 선기가 처음 심리받던 때에는 자신의 행적을 감추고자 하여 서제(庶弟)를 핑계대고 인혐하다가, 물의가 비등해져 감히 끝내 숨길 수 없게 되자 선조 때의 어진 재상을 무고하게 끌어들여 민적에게 보복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 마음이 음흉하고 교활함을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다.

 

윤7월 15일 임진

정치화(鄭致和)를 예조 판서로,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삼았다.

 

윤7월 17일 갑오

상이 눈병이 나 약방(藥房)이 들어가 진찰하였다. 상이 도제조 원두표에게 묻기를,
"세속의 처방에 습창(濕瘡)은 온천에 가서 씻으면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대답하기를,
"의서(醫書)에 이런 처방이 없지만 목욕을 하고 효험을 본 자를 신도 보았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초정(椒井)에 씻는 것은 어떻겠는가? 선왕도 일찍이 효험을 보았다."
하였다. 대개 초정은 인경궁(仁慶宮)의 옛 터에 있는데 산수의 경치가 뛰어났다. 세 부마의 저택이 그 가운데에 늘어서 있는데 극도로 사치스러웠다. 일찍이 효종 대왕이 초정에 목욕하러 갔다가 그 저택에 거둥했었는데, 상이 가보고 싶어 칭탁해서 물은 것이다. 홍명하(洪命夏)가 상의 뜻이 초정에서 목욕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고 간쟁했지만, 되지 않았다. 상이 드디어 일관(日官)에게 명하여 날짜를 잡아 가기로 결정하였다.

 

윤7월 19일 병신

김남중(金南重)을 형조 판서로, 홍처후(洪處厚)를 호조 참의로, 박장원(朴長遠)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윤7월 21일 무술

이관징(李觀徵)과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삼았다.

 

윤7월 22일 기해

상이 인경궁에 거둥하여 초정에서 목욕하였다. 【이날부터 계묘일까지 5일 동안 4차례 임어하여 목욕했는데 매번 목욕한 뒤 환궁하였다.】  헌부와 옥당이 어가 앞의 음악을 중지시켜 재해를 만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보이라고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계사가 실로 나의 뜻과 합치된다. 어가 앞뒤의 음악을 모두 진열만 하고 연주하지는 말게 하라."

 

윤7월 23일 경자

화성(火星)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원두표가 청하기를,
"삼남의 재해를 입은 고을이 서울에 내야 할 제색 군포(諸色軍布)를 감하여 주고, 병조 및 영남에 남아 있는 군포와 양호(兩湖)의 농사가 조금 괜찮은 고을의 어영군(御營軍) 보목(保木)을 옮겨다 보충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7월 27일 갑진

예조가 아뢰기를,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의 소상일(小祥日)에 중궁전께서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례를 찾아 고찰해 보니,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의 소상일에 중전께서 소복(素服)을 입고 별전(別殿)에서 망곡(望哭)한 뒤 소복을 벗고 길복(吉服)으로 갈아 입고, 곡림(哭臨)을 마치고 나서 다시 대내에 들어가 길복을 소복으로 갈아입고 그 날을 보냈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조형(趙珩)을 대사헌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주서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사직서를 올렸는데, 이때까지 15차례나 되었다. 상이 그의 뜻을 편안하게 해주고자 하여 허락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태화는 성품이 겉으로는 너그럽고 안으로는 민첩하였으며 다른 사람들과 거스르는 일이 없었는데, 중외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인조 말년에 정승이 되어 두루 세 조정을 거치면서 총애와 대우가 매우 융숭하여 다른 신하들이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를 따지며 혐의를 잘 피하여 국사를 담당하려는 뜻이 없었다. 상의 앞에서 일을 의논할 때마다 뭇 의견에 대해서 우유부단하여 자기 주장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니, 식자들이 그르게 여겼다. 집에 있을 때는 사람들을 공손하고 신중하게 대접했으며 빈료들을 불러 볼 때는 문에서 객을 멈추게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시론(時論)이 뒤집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지위와 명망을 그대로 유지하니, 세상에서 벼슬살이 잘하는 자를 얘기할 때에는 반드시 태화를 으뜸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4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태화는 성품이 겉으로는 너그럽고 안으로는 민첩하였으며 다른 사람들과 거스르는 일이 없었는데, 중외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인조 말년에 정승이 되어 두루 세 조정을 거치면서 총애와 대우가 매우 융숭하여 다른 신하들이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를 따지며 혐의를 잘 피하여 국사를 담당하려는 뜻이 없었다. 상의 앞에서 일을 의논할 때마다 뭇 의견에 대해서 우유부단하여 자기 주장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니, 식자들이 그르게 여겼다. 집에 있을 때는 사람들을 공손하고 신중하게 대접했으며 빈료들을 불러 볼 때는 문에서 객을 멈추게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시론(時論)이 뒤집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지위와 명망을 그대로 유지하니, 세상에서 벼슬살이 잘하는 자를 얘기할 때에는 반드시 태화를 으뜸으로 삼았다.

 

윤7월 28일 을사

서필원(徐必遠)을 승지로, 정태화를 판중추로 삼았다.

 

해서(海西)의 기근이 심하자, 관서(關西)의 모맥(牟麥) 8백 석을 배로 운반하여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윤7월 29일 병오

호조 판서 허적이 세 번째 상소하여 면직을 요청하니, 상이 관대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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