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축
윤개(尹塏)를 장령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이조 정랑으로, 이민적(李敏迪)을 헌납으로, 이하(李夏)를 주서로 삼았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온양(溫陽)의 온천에 가서 목욕하기 위하여 휴가를 청하였다. 이에 도제조 심지원(沈之源)으로 하여금 그 직임을 겸하여 살피라고 명하였다.
9월 2일 무인
원자 탄생 때의 제신들에 대한 상을 논하였다. 도제조 원두표에게는 안구마를 하사하며 자제 중 한 사람을 승서(陞敍)하고, 제조 홍명하(洪命夏), 부제조 박세모(朴世模), 권초관(捲草官) 홍중보(洪重普)는 모두 가자하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승서하거나 말을 하사하였다.
9월 3일 기묘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관서의 관향미(管餉米) 3만 석과 해서의 쌀 5천 석을 배로 운반하여 경비에 보탤 것과 군기시(軍器寺)·교서관(校書館)의 공물(貢物)을 줄일 것과 선공감(繕工監)의 긴요하지 않은 공역을 없앨 것을 명하였는데, 이는 심지원과 유계 등의 건의를 따른 것이었다.
당초 경상 감사 민희(閔熙)가 사조(辭朝)할 때, 영저(嶺底)의 가난한 백성들은 쌀로 내기가 어려우니 면포로 대신 징수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수송해 납부하기를 꺼리는 것은 조령(鳥嶺)을 넘느라 비용이 몇 배가 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멀리 수송하는 폐단이 없다면 쌀로 바치는 것이 심히 어려운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니, 본색미(本色米)를 각 고을에 거두어 보관하여 진휼하는 데 보태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삼남의 재해가 매우 극심한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경차관(敬差官)을 삼도에 파견해서 재해의 정도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9월 4일 경진
예조가 아뢰기를,
"증광 별시(增廣別試)의 문과 초시 인원수를 늘려 뽑는 것에 대해 지난번 대신이 아뢴 바에 따라 이미 재결하였습니다. 관시(館試)의 원래 액수는 50인인데 30인을 더하였으므로 다른 곳의 액수도 이 예에 의거하여 매 10인당 6인씩 늘렸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마련하니, 관시는 80인이고, 한성시(漢城試)는 40인에 24인을 보태고, 경기는 20인에 12인을 보태서, 원래 액수와 더한 수가 합해서 1백 76인으로 두 곳으로 나누면 각각 88인씩 뽑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상도는 30인에 18인을 보태고, 충공도(忠公道)와 전남도(全南道)는 25인에 각각 15인을 보태며, 강원도와 평안도는 각각 15인에 9인을 보태고, 황해도와 함경도는 각각 10인에 6인을 보탰습니다. 이 액수로 시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이관징(李觀徵)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들으니, 능에 행행했을 때 어승(御乘)이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승(內乘)으로 하여금 도보로 따르게까지 하였고, 말이 기력이 떨어져 나아가지 못하자 몰아치라는 하교를 하셨으므로 이를 보거나 들은 사람치고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내승을 둔 것은 본래 말을 조련하기 위한 것인데 어승이 길들여지지 않았으니, 죄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조정 인사들로 하여금 호위병과 말발굽 사이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다 넘어지게 하였는데, 뭇 백성들에게 보여야 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신은 삼가 가슴아프게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그날의 지나친 거조를 훗날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렸다.
9월 5일 신사
상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서 백관의 조회를 받았다. 도승지 김좌명(金佐明)이 나아가 아뢰기를,
"원자가 탄생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경사이니, 의당 사면령을 크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면이라는 것은 모두 용서해 준다는 뜻이니, 어찌 형량을 감하기만 할 뿐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년(徒年) 이하는 모두 사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명이 또 아뢰기를,
"원자궁(元子宮)에 공상(供上)하는 것을 비록 많이 줄였지만 해사에서 진배(進排)할 때의 비용이 적지 않으니, 다시 더 줄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인조(仁祖) 을해년에 대증광시를 시행했지만, 그때의 문서가 난리를 겪으며 산실되어 복시(覆試) 때의 문서만 남아 있는데, 무과는 35인을 뽑았습니다. 이는 대개 만력경인년070) 증광시 때에 뽑은 인원수를 따른 것으로, 원수 28인에 7인을 더 뽑은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해야겠습니까? 부묘(祔廟)·존숭(尊崇)·책례(冊禮)의 네 경사를 합한 별시(別試)를 판하(判下)할 때에 무과에 대해서 이미 많이 뽑기로 정하였습니다. 원자가 탄생된 것은 백여 년 이래로 없었던 국가의 큰 경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증광시를 별도로 베풀어 사방이 함께 경축하는 뜻을 보일 것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물력이 피폐되어 할 수 없이 합하여 대증광시를 시행하게 되었는데, 만약 전례에만 따른다면 중외의 무사들이 반드시 낙심하여 탄식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특별히 56인을 뽑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과 회시(會試)를 특별히 56인을 뽑으라고 한 것은 실로 참작하여 변통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초시의 원수(元數) 1백 90인은 회시에서 뽑는 수인 56인과 비교해 볼 때 한 배를 더하여 3백 80인으로 수를 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과의 뽑는 인원수를 살펴볼 것 같으면, 회시의 수는 40인이고 초시의 수는 3백 84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비교해 볼 때, 무과 초시의 수는 마땅히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자, 원수 외에 3백 14인을 더하여 정하였다.
9월 6일 임오
집의 이준구(李俊耉)와 지평 유명윤(兪命胤)이 감죄(勘罪)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9월 7일 계미
병조 판서 홍명하가 아뢰기를,
"충공 감사(忠公監司) 이만(李曼)은 자기 부모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서 큰 부락의 인가를 헐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많으니, 조사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도승지 김좌명이 아뢰기를,
"금년에는 삼남이 모두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었습니다. 근래 감사 중에 임기가 만료되는 자가 간혹 잉임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는데, 충공 감사 이만에 대해서는 이장한 것 때문에 해조에서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만은 평소에 재량이 있었으므로 체직시키기 아까우니, 묘당에 내려 의견을 물어 처리하소서."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아뢰기를,
"이만은 평소에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졌었으니 이러한 때에 체직시키는 것이 참으로 애석합니다만, 방백(方伯)이 된 자로서 무덤을 마련하기 위해 촌가를 철거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살 곳을 잃게 만들었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그가 범한 바를 논하건대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우선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9일 을유
김휘(金徽)를 충공 감사로, 유경창(柳慶昌)을 대사간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승지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김우석(金禹錫)을 헌납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이조 정랑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지평으로 삼고, 홍명하(洪命夏)에게는 숭록(崇祿)을 가자하고, 홍중보(洪重普)에게는 정헌(正憲)을 가자하고, 박세모(朴世模)에게는 가선(嘉善)을 가자하였다.
판부사 정태화가 상소하여, 본직 및 태복시 제조, 호위 대장 등의 직임에서 체직시켜 달라고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4일 경인
지평 이지익(李之翼)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근래 조정에는 사사로운 욕심이 멋대로 일어나고 붕당을 지어 서로를 비호해주며 성상의 귀와 눈을 가림으로써 기강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익만 탐내는 풍조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어떻게 신과 같이 용렬한 자로 하여금 대각에 있으면서 구제하는 임무를 하도록 책임지울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전라 우수사 이동현(李東顯)이 미선(米船)을 보냈다는 설이 봄여름 사이에 처음 나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매우 자자했으므로, 신이 삼가 가슴아프게 여기며 항상 혀를 차곤 했습니다. 그때 마침 신이 간관의 직에 있게 되었으므로 그 일을 조사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뒤 입시한 신하들이 그를 구원하기에 급급하여 계사 가운데 있는 ‘강가에 오래 두었다[久置江上]’는 말을 ‘현재 강가에 두고 있다[方置江上]’고 바꾸어 말하기까지 하고는 수개월 뒤에 적간하여 그것을 증거 자료로 삼았으니, 하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가슴아프게 여깁니다.
대개 이 일이 이미 발론되었으니, 동현을 잡아다가 문죄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내린 명을 중지시킬 것을 청하였고, 헌부가 처치한 데에 이르러서는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밀고 나갔으며 거짓으로 날조했다.’는 등의 말로 있는 힘을 다해 신을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반드시 그 일을 엄폐하려고 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대각에 있으며 맑은 조정에 욕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정언 이관징(李觀徵)이 아뢰기를,
"당초의 논계는 대개 풍문으로 인해서 나온 것이었는데 허위로 날조했다는 배척이 뜻밖에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대각에 둔 것은 공론에서 이미 허락된 것이니,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굳이 피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강원 도사(江原都事) 송창(宋昌)이 상소하기를,
"서울 에 사는 사대부집 자제들이 삼향(三鄕)071) 이라고 핑계대고 연줄을 타고 과거에 응시하려는데, 제목을 고치고 소란을 피우는 폐단이 대부분 이들에게서 연유합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자 외에는 응시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복계(覆啓)하니, 다른 도도 일체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였다.
공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이 성밖으로 나가 상소하여, 직명(職名)을 삭탈한 뒤 법을 맡은 관리에게 회부하여 자신의 죄를 바로잡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9월 15일 신묘
홍중보(洪重普)를 좌참찬으로, 이혜(李嵆)를 봉교로 삼았다.
병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이지익이 피혐한 글을 보니, 한 곳에서는 ‘붕당을 지어 서로 비호하면서 상의 귀와 눈을 가로막았다.’ 하였고, 한 곳에서는 ‘입시한 제신들이 그를 구원하는 데 급급했다.’ 하였습니다. 신도 입시했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니, 어떻게 감히 태연스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초의 곡절을 부득불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하겠습니다.
대개 이 일은 당초 양영남(梁穎南)이 이일상(李一相)의 편지를 위조해서 이동현(李東顯)에게 보내며 오래 되어 물린 배를 사게 해달라고 요청한 데서 연유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동현이 ‘전관(前官)이 이미 팔았으므로 요청에 부응할 수 없다.’고 답했는데, 겉봉에 이조 참판이라고 써서 일상에게 전했습니다. 일상이 이것을 본 즉시 깜짝 놀라며 ‘이응시(李應蓍)가 현재 이 직을 대신 맡고 있으니, 혹 잘못 전해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즉시 그 편지를 응시에게 보냈는데, 응시도 배를 사려고 요청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비국의 회좌 때에 서로 만나 어찌할 줄을 모르며 경악해 하였습니다. 이어 편지를 전한 자를 가두고 동현에게 물어보니, 동현이 위조한 편지를 한 통 보내왔는데, 문장과 필적이 말이 아니었으며, 끝 부분에 일상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비국의 여러 신하들이 직접 보고 몹시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미선(米船)에 대한 소문이 어디서 지어낸 것인지 모른 채 여염 사이에 전파되었으니, 이것은 인심이 경박해서 지어낸 일종의 허황된 얘기입니다. 신들은 그 시종의 곡절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지익이 논계한 뒤 마침 입시했으므로, 감히 위서의 시말을 진달했던 것입니다. 대개 미선을 보낸 일이 당초 없었다면 동현에게는 실로 죄를 심문할 만한 단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신 이하가 모두 같은 뜻으로 진달했는데, 성명께서도 빠뜨림없이 통촉하시고 ‘만약 이 일이 있었다면 일상이 반드시 그 편지를 응시에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하교를 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간의 사실이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익은 피혐하는 글에서 ‘귀와 눈을 가로막았다.’고 하며 막된 소리로 비난하였으니, 무슨 이유에서 하는 것입니까. 지익은 대각의 지위에 있으니, 풍문이 있는 것에 대해 당초 논계한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허실이 이미 판별되었고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는데, 지금 해가 지난 뒤에 아직까지 헛된 말만을 계속하여 일상을 모함하려 할 뿐만 아니라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임금을 속이고 사적으로 편당만 짓는 자들로 매도하였으니, 그 또한 괴이한 일입니다. 신은 이미 중한 배척을 입었으니, 형세상 공무를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삭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판명된 일에 대해 이와 같이 다시 소요스럽게 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경이 무슨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매년 큰 흉년이 들고 있다. 현재 삼남의 재해가 매우 심한데 이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양전(兩殿)의 【대전(大殿)과 중전(中殿)이다.】 물선(物膳)을 정파한 지 비록 오래되었지만 삭선(朔膳)은 아직도 시행하고 있다. 영남의 삭선은 내년 가을까지 정지하고 양호(兩湖)의 삭선도 점차적으로 줄일 일을 해조에 말하도록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이 간절하시니 백성들의 일을 깊이 염려하시는 뜻이 참으로 지극합니다. 양전에 물선 올리는 것을 정지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단지 매달 초하루에 약간의 새로운 산물만을 봉진하고 있는데, 지금 만약 아울러 정지하거나 줄인다면 진한하는 도리에 있어서 너무나 매몰찬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영남의 삭선은 성상의 분부대로 봉진하는 것을 정지시키고, 양호의 경우는 재해가 영남과 같이 심하지 않으니 전과 같이 봉진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은 평상의 법규로 처리할 수 없다. 묘당에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묘당이 아뢰기를,
"양전의 물선은 정축년072) 난리를 겪고난 뒤 특명으로 정파하여 내간(內間)에는 상께 바치는 물건이 전연 없으며 번신(藩臣)들도 진헌하는 예를 폐하였으니,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실로 매우 온당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인하여 비로소 매달 초하루마다 새로운 산물을 진헌하는 규례를 두었는데, 그 수는 물선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지금 또 정지하거나 감하라고 명하셨으니, 이를 들은 사람치고 누가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봉진하는 물품의 종류는 모두 해당 도의 토산품이어서 먼 지방에서 사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민력에는 크게 관계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잘 헤아려 감하도록 하되 본래의 수효 중에서 폐지해서는 안 될 물품은 그대로 남겨두게 하여, 성상께서 재해를 만나 절감하시는 뜻을 보이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였다.
회양(淮陽) 땅의 산전(山田)을 용동궁(龍洞宮)에 떼어주라고 명하였다. 이조가 복계하여, 본도로 하여금 민전(民田)인지의 여부를 조사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후에 대간이, 궁가가 절수(折受)한 토지를 혁파할 것을 아뢰면서 한 달이 넘도록 논열하니, 상이 그제서야 복계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9월 17일 계사
지평 이지익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이일상(李一相)의 미선(米船) 사건에 있어서 어찌 모함하여 해칠 뜻을 두었겠습니까. 그때에 마침 언관으로 있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들은 얘기를 가지고 우러러 성상께 아뢴 것으로, 이동현을 조사하자고 청한 것은 단지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해서 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이 노기를 품고 좌우에서 차단하면서 멋대로 저격하여 다시는 말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장리(贓吏)가 어떻게 징계되어 사라질 것이며 국가의 기강이 어떻게 엄숙해질 수 있겠습니까. 뜻밖에 다시 언관으로 있게 되어 대략 신의 민망하고 궁박한 형세를 진달했던 것인데, 말하는 사이에 다시 망발을 하여 제신들이 상소하는 사태를 야기시켰습니다. 신이 만약 형세를 두려워하여 가슴속의 생각을 다 털어놓지 않는다면, 이는 신이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므로, 다 진달하게 해 주소서.
당초 뱃사람인 변응립(邊應立)이 신에게 찾아와서 망가진 배를 파는 것을 허락하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하였습니다만, 신이 동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헤아려 써주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변응립은 점장이 하효달(河孝達)을 통해서 일상이 직접 쓴 편지를 얻어 아랫사람들에게 자랑하였는데, 막상 수영(水營)에 가보니 오래된 배를 이미 팔아버린 뒤였습니다. 이에 동현은 일상에게 그 곡절을 편지로 알리면서 쌀 50석과 군목(軍木) 3동을 배로 실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리가 동현에게 사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을 일으키려는 속셈으로 그 편지를 이응시(李應蓍)에게 전했는데, 그 편지에는 ‘이조 참판댁’과 ‘관동(館洞)’이란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응시는 그 편지를 다시 주며 일상에게 전하도록 하였는데, 일상은 그 편지의 봉한 데가 마르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색리(色吏)에게 캐어 묻고는 깜짝 놀라 도로 주며 자신의 집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답니다. 이에 색리가 다시 응시네 집으로 가니, 응시는 호통을 치며 물리쳤습니다. 이 얘기가 응시네 집에서 나와 일시에 전파되자, 일상이 빈청의 회좌에서 응시와 함께 글을 지어 동현에게 묻고는 몰래 자기 종을 수영(水營)에 보내어 자신이 보낸 편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동현은 단지 답서만 보내고 찾으려는 본래의 편지는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상이 옷소매에서 꺼내 재신(宰臣)에게 보여 주며 위조한 글이라고 한 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의도가 음험하고 교묘하여 훗날 발명하려는 계책이었음을 따라서 알 수가 있습니다.
제신들이 입시해서는 아뢰기를 ‘미선(米船)이 현재 강가에 있으니 관원을 보내 적발하라.’ 하였는데, 해조의 계사 가운데에는 ‘수영(水營)의 배가 금년에는 원래 와서 정박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수영에서 온 공사선(公私船)으로 왕래하는 배들이 참으로 한두 척이 아니며 수영에서 죽은 동현의 일가 사람의 관을 오는 배에 싣고와 서강(西江)에서 내리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았고 아울러 쌀과 베를 이 배에 싣고 왔다고 하니, 이른바 원래 없었다는 말은 어찌 임금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당시의 색리를 추고하여 다스리는 척하였지만 바로 놓아 주었으므로 그대로 도망쳤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곳에 보낸 물품 중 전해지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신이 그 사람을 직접 만나 그 말을 들었습니다.
이른바 양영남(梁穎南)이란 자는 전에 일상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였으며 지방을 왕래하며 이익만을 추구하던 자였습니다. 당초 추문할 때에 하효달로 하여금 이미 죽은 박세매(朴世枚)에게 떠넘기게 하였으며 또한 자신과 친한 사이인 양영남을 끌어다가 자복했다고 핑계대었으니, 그간의 비밀스런 자취를 비록 덮어 가리고자 하였으나 누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지금 만약 동현과 편지를 전한 색리를 붙잡아다가 묻고 또한 변응립과 끌어댄 여러 신하들에게 묻는다면 뇌물을 준 허실과 위조한 진위 여부를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신하들은 단지 말로만 맹랑하다고 크게 떠들어대며 도리어 신을 욕하니,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욕심 많고 비루한 정상은 이 일뿐만이 아닙니다. 일찍이 호서(湖西)에 있을 때 방백(方伯)에게 간청하여 아산현(牙山縣)에서 영미(營米)를 받아내어 배로 자기집에 옮기고 그것을 전의현(全義縣)에 이록(移錄)한 뒤 묵은 조(租)로 대신 납부하였으며, 이를 다시 민간에 나누어 주고 쌀로 받아들였다는 소문이 선비들 사이에 전파되어 욕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리낌없이 소장을 올려 일상을 본디 허물이 없는 자인 것처럼 말하였으니, 일상의 세력이 한결같이 이와 같은 데에까지 이를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의 부족한 한 마디 말로 인하여 저 재물을 탐내는 부정한 무리들이 더욱 꺼리는 바가 없고 기강이 날로 더욱 시들해지고 국가의 형세도 날로 더욱 위태롭게 되었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야 합니다.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가 대단히 어려우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장령 윤개(尹塏)가 처치하기를,
"미선에 대한 얘기는 이미 전에 나왔던 것으로 그 당시 조사하였으나 끝내 그런 사실이 없었습니다. 1년이 지난 뒤 다시 전의 의논을 일으켜 여러 가지 얘기를 하며 하나의 새로운 사건을 만들었는데, 말이 모두 신기하여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허실을 논할 것 없이 사실을 완전히 밝힐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으니, 출사할 것을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9월 18일 갑오
영중추 이경석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난번 신이 사국(史局)에 있지 않았다면 이일상의 일에 대해 신이 무엇 때문에 감히 진달하였겠습니까. 《실록》을 편찬하는 일은 중대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일상이 이를 주관하는 관원으로서 공격을 받고 물러가 있어서 날짜가 자꾸 지체되었으므로, 허실간에 신이 속히 처리되기를 바랐던 것은 실로 사국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워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상께서 특별히 적발할 것을 명하여 해조의 낭관이 즉시 강으로 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곳곳을 두루 물어보았지만 모두 보지 못했다고 하였고, 그때에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영(水營)의 배가 추위가 풀린 뒤로 원래 와서 정박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지익이 배를 가지고 말을 했는데 배가 이미 오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오래 있었느니 현재 있느니 하는 말은 다시 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을 가지고 말을 했는데 이동현이 답한 편지와 위조한 글을 비국의 여러 신하들이 공회(公會)에서 함께 보고 성상께 이미 진달했으니, 그렇다면 이것이 명백한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익이 ‘구(久)’자와 ‘방(方)’ 자의 차이를 가지고 끝까지 다투려 하니, 지익이 너무나도 생각지 않는 것이 애석하다 하겠습니다.
신은 실로 당초에 입시했던 자이니, 구원하려 했다는 비난을 신도 또한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고, 이조 참판 김수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작년에 정원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날이 마침 입진(入診)하는 날이었습니다. 영부사 이경석이 ‘사국 당상(史局堂上) 이일상과 이응시(李應蓍)가 모두 이름이 대간의 계사에 올랐기 때문에 감히 공무를 집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근거없는 것임을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만약 동현을 나문하여 판결할 때까지 기다릴 경우 사국의 일이 점차 지연될 것입니다.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소서.’라고 청하였는데, 신도 말석에 입시하여 그 일의 전말을 하나 하나 들어가며 진달하였습니다. 이에 성상께서도 ‘일상에게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마땅히 숨기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이고 반드시 그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다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위조한 편지가 있을 것 같으면 판별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교하셨습니다. 그 뒤에 해조에서 적간하라는 명을 받고 미선(米船)에 대해서 샅샅이 물어보았는데, 봄여름 이래로 수영(水營)의 배를 보지 못했다고들 하였습니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미선에 대한 얘기가 이미 근거없는 말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동현에게 물을 만한 단서가 없다.’ 하기에, 나문하라는 명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때의 곡절은 이와 같았을 뿐이었습니다.
대개 위조한 일에 대해서는 소문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파되었지만, 미선에 대한 소문은 당초 듣지 못했었는데 갑자기 하나의 근거없는 말이 중간에서 튀어 나와 점점 더 불어나 시끄럽게 전파되었습니다. 지익이 일단 이에 대해 들었으니 논계하여 사실을 밝힐 것을 청한 것은 그래도 혹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명백하게 분석하여 근거없는 일로 판단한 상황에 이르서서는, 풍문이 잘못된 것으로 돌리더라도 체면이 손상될 것이 없는데 굳이 없는 것을 있다 하고 허황된 얘기를 사실인 것처럼 하여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헌부가 ‘잘못을 꾸미고 계속 밀고 나간다.’고 배척한 것은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가 인피한 글이 갈수록 내용이 과격해져서, ‘붕당을 지어 비호하고 총명을 가로막았다.’는 등의 말까지 하며 있는 힘을 다해 여러 신하들을 공격하기를, 마치 권세있는 간신이 국사를 담당하자 온 조정이 바람에 휩쓸리듯 하지만 자신만은 강직하고 기개 있어 남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과감하게 말하는 자인 것처럼 하였으니, 남들이 자신의 속을 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과 바른 선비의 마음씀은 결단코 이와 같지 않습니다. 만약 일상이 과연 뇌물을 받은 분명한 자취가 있다면, 대신 이하가 어찌 모두 다 형편없어서 숨기고 보호해 주려는 계책을 감히 내어 스스로 아랫사람에게 붙어 윗사람을 속이는 죄에 빠지겠습니까.
신이 이미 심한 비난을 받았으니 감히 조정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지익을 지평에 의망할 적에 신이 ‘지익은 외직에 있다가 바로 돌아왔는데 곧바로 청선(淸選)에 의망하면 점진적으로 하는 인사 행정의 체모가 없는 것이다.’ 하였는데, 낭관이 이를 수긍하지 않고 끝내 굳이 주의(注擬)하고 말았습니다. 신이 강력하게 배척하지 못해 저와 같이 국가를 위태롭게 할 자를 다시 대각에 들어오도록 하였으니, 신이 직무를 태만히 수행한 죄가 여기에서 더욱 커졌습니다. 신을 삭직하소서."
하고, 부제학 유계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이지익이 피혐한 글을 보았는데, 그 의도는 단지 일상을 거듭 함정에 빠뜨리려는 데 있을 뿐만이 아니고 아울러 여러 신하들에게까지도 인군을 속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초 입시하던 날 신도 여러 신하들과 함께 참여했으니, 잘못한 자를 구원하려 도모하고 인군을 속이고 가린 죄를 신만 홀로 면할 수 없습니다. 삼가 인심(人心)과 세도(世道)에 대해 개탄스럽게 여겨지는 점이 있어 감히 대략 진달하겠습니다.
국가가 대각에 풍문을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사체에 있어 매우 중대한 것입니다. 대각의 관원이 된 자는 진실로 용서해 주는 점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매하게 사람을 논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억울한 정상이 다 밝혀지고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진 뒤에도 한결같이 헐뜯기를 마지않으니, 진실로 사적인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조정에서 풍문을 말할 수 있도록 위임하여 맡긴 본의가 어찌 진실로 이렇게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지익이 재차 피혐을 하자 대관(臺官)은 ‘잘못을 꾸미고 계속 밀고 나간다.’고 하며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지금 간원이 처치하면서 도리어 전날 대간의 의논을 공격하고, 나와서는 안 될 사람을 출사시키자고 청하여, 재차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켰습니다. 조정의 시비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성명께서 이미 지익을 출사시키라고 청한 아룀에 대해 윤허를 하시고서 다시 논란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라.’고 하시니, 신은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고, 또한 성의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방도에 손상되는 점이 있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신은 이미 진계하는 데 따라 참여했으니, 지금 태연스레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본직과 겸직을 체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이들 모두에 대해서 답하기를,
"경들은 혐의할 것이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용천(龍川) 백성 귀인(貴人) 등 3인이 몰래 강을 건너가 삼을 캐다가 청나라 사람들에게 체포당했는데, 이들을 의주(義州)에 압송해 넘기고 예부에서 이자(移咨)하여 우리 나라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였다. 3인을 국경에서 효시하도록 명하고, 부사 박시한(朴始漢), 미곶 첨사(彌串僉使) 백광조(白光祖) 등은 면직시키고 차등을 두어 도배(徒配)시켰다.
9월 20일 병신
윤심(尹深)을 대교로 삼았다.
지평 이지익이 피혐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망령되이 위태로운 문제를 건드리자 벌떼처럼 일어나 이것저것 주워모아, 정석(政席)의 주의에 대해서 전관(銓官)이 저지하고 처치하여 출사를 청한 것에 대해서 유신(儒臣)이 비난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조정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신은 정세가 민망하고 궁박한데다 옆구리의 통증이 심하여 부름에 나아가지 못했으니, 책임을 회피하고 태만한 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지평 정창도(丁昌燾)가 처치하기를,
"공격을 받은 여러 상소에 대해서는 우선 차치하고 논하지 않더라도 패초(牌招)하였는데 나아오지 않았으니, 전례상 응당 체직시켜야 합니다. 체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를 따랐다.
행 사직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동교(東郊)의 갑사장(甲士場)을 말을 가진 금군(禁軍)에게 옮겨 주자고 청하였다.
대개 갑사장은 조종조에서 오위(五衛)를 설치했을 때에 갑사들이 말을 기르던 곳이었다. 임진란 뒤 군인의 수가 크게 줄어 오위제가 마침내 폐지되고 말았다. 이에 고 상신 이항복(李恒福)이, 이 목장을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주어 선비를 양성하는 밑천을 삼게 하자고 청하였다. 필원은 생각하기를
"국가의 재용이 결딴난 때인데 금군에게 주는 말꼴의 값을 모두 병조가 내고 있으니, 본 목장을 금군에게 옮겨 줄 경우 병조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에게 가서 말하였다. 명하가 그 말을 매우 옳게 여겨 그 목장을 환수하려고 하였는데, 이어 이항복이 서원에 주자고 청했다는 말을 듣고는 머뭇거리다가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기 때문에 필원이 소장을 올려 아뢰었던 것이다. 상이 그 소장을 병조에 내리니, 병조가 복계하여 아뢰기를,
"본 목장을 갑사가 정파된 뒤 서원에 떼어주었었으니, 그렇다면 무단히 폐기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서원에서 세(稅)를 거두어 선비들을 양성한 지 이미 60여 년이 지났는데 졸지에 잃어버리게 된다면 학궁(學宮)의 일 또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호조로 하여금 서원에는 다른 토지를 떼어주게 하고, 본 목장은 도로 본조에 소속시키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9월 21일 정유
전 동래 부사 정태제(鄭泰齊)가 관에 있을 때 서울의 상인과 서로 약속하고 공무목(公貿木)을 대납(代納)하게 한 뒤 그 값을 각 고을에서 쌀로 과다하게 거두어들이다 발각되었는데, 상이 노하여 잡아다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9월 23일 기해
지중추 송시열이 향리에서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난번 영상과 좌상이 동시에 인피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들으니 그 일이 사실상 신에게서 연유한 것이라 하므로, 신은 놀랍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이어 다시 듣건대 영상이 마침내 자리를 떠났다 하니, 신은 죄가 너무 많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형법으로 처단하여 나라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난날의 일은 지금 이미 정해졌다. 대신들이 말한 것도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대신이 이미 출사하였음에랴. 지금 시점에서 보건대, 경이 피혐할 것은 없는 듯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추워지기 전에 마음을 고쳐 먹고 올라와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정태화가 사직하는 차자에서, 송시열의 소장 중에 있는 ‘대신과 대간이 서로 배척한다.’는 말을 거론했기 때문에, 시열이 이 소장을 올린 것이다.
대사헌 송준길이 병을 이유로 면직시켜 줄 것을 요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의 병이 아직까지도 낫지 않으니, 내 마음이 매우 아프다. 가을에 올라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금 또 어기다니, 상당히 서운하다. 그러나 지금 날씨가 아직 춥지 않으니 병이 좀 낫거든 즉시 일어나 오기를 내가 날마다 바란다. 사직한 것에 대해서는 경의 뜻을 깊이 헤아려 체직하도록 힘쓰겠다. 경은 안심하고 나의 뜻을 알라."
9월 24일 경자
상이 성균관에 행행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했다.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서 명관(命官) 이경석(李景奭) 및 제학·부제학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출제하게 하고, 【이때 대제학 이일상이 인피하였기 때문이다.】 승지 한 사람을 남겨두어 여러 시관(試官)과 함께 시사(試士)하게 하였다. 집춘문(集春門)을 거쳐 춘당대(春塘臺)에 이르러 장전(帳殿)에 임어하여 기추(騎蒭)를 시험하고 날이 저물어서 환궁하였다.
9월 26일 임인
상이 다시 춘당대에 행행하여 열무(閱武)하였는데, 양 대장 이하의 여러 무사들을 모두 입시하게 하였다. 내금장(內禁將) 김한문(金漢文)이 탄 말이 피로해 하자, 상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소홀하게 키웠다.’ 하고는, 승지에게 곤장을 치라고 명하였다.
기추를 하여 다섯 발 맞힌 이상립(李尙立), 네 발 맞힌 김준익(金俊釴), 두 발 맞힌 어영 대장(御營大將) 유혁연(柳赫然)에게는 모두 가자하고, 네 발 맞힌 내금위 기송일(奇松一) 등 3 인은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토록 하고, 세 발 맞힌 서경일(徐敬一)등 14인은 회시(會試)에 직부하도록 하고, 두 발 이하 맞힌 자들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가자한 자에게는 당일 개정(開政)하여 비지(批旨)를 내렸는데, 유혁연은 가의(嘉義)에, 이상립(李尙立)은 가선(嘉善)에, 김준익은 절충(折衝)에 가자하였다.
상이 당초에는 유혁연을 자헌(資憲)에 건너뛰어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들이 모두 너무 지나치다고 하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섯 발 맞힌 이상립과 같은 자에게는 어떻게 상을 주시렵니까."
하여, 한 자급만 더해 주라고 명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활을 쏘았으나 맞추지 못했는데, 상이 그래도 말타기를 잘했으니 숙마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이완이 굳게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이를 받았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이상(李翔)을 지평으로 삼았다.
9월 28일 갑진
송준길(宋浚吉)을 좌참찬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참찬으로, 유명윤(兪命胤)을 정언으로 삼았다.
9월 30일 병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신도 이일상(李一相)의 일에 대해 진달할 바가 있습니다. 지익이 말한 ‘붕당을 지어 서로를 비호한다.’는 것에 있어 신도 또한 혐의가 있습니다만, 당시 자세하게 물어본 결과 끝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이동현에게 다시 물어볼 것이 없게 되었으므로 잡아들이라는 명을 중지시킬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지익이 지금 다시 장황하게 인피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분명하게 다시 조사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일상이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명백하게 죄를 주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지익 또한 죄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동현·변응립(邊應立)·양영남(梁穎南)을 잡아다 심문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지익이, 호서(湖西)의 영미(營米)를 빌려간 것으로 일상의 죄목을 삼았는데, 이는 사대부들 사이에 평상적으로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영곡(營穀)은 감사가 사용하는 바로 혹 떠돌아다니다가 객지에서 우거하는 사대부들을 진휼하기 위해 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돌려 쓴들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하고,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이와 같은 일은 사대부들이 통상적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관곡을 받아내어 잘 처리한 뒤 납부한다면 어찌 죄가 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송시열과 같은 이도 궁핍하던 때에 본읍의 조곡(糶穀)을 받아내 제때에 갚았는데, 이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영동(嶺東)의 곡식 1만 석을 영남으로 옮겨 진휼하였다.
집의 윤선거(尹宣擧)와 지평 이상(李翔)을 체직하였다. 이는 선거의 형 윤문거(尹文擧)가 대사헌이 되고 이상의 아우 이숙(李䎘)이 지평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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