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6권, 현종 2년 1661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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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정미

상이 하교하였다.
"온갖 관사를 규찰하는 일이 헌부의 책임인데 한 달 동안에 겨우 세 번 개좌(開坐)했을 뿐이니, 직무를 매우 태만히 한 것이다. 시임 헌부 관원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여 앞으로를 힘쓰게 하라."

 

알성(謁聖) 때의 시제(試製)에서 우등한 감역 심백(沈栢), 생원 윤빈(尹彬)·윤계(尹堦)·김석주(金錫胄) 등에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할 것을, 그 다음인 한덕후(韓德厚)·조사석(趙師錫)·이면(李𢗔)·이정(李怔)·김귀만(金龜萬) 등에게 회시(會試)에 직부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비록 대신들의 의견을 따라 사람을 뽑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서운하게 여겼다. 이어 춘당대(春塘臺)에서 시사(試射)할 때 상이 대신들에게 묻기를,
"직부를 허락한 무사들 역시 많으니, 내가 이 계제에 방방(放榜)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자, 답하기를,
"애당초 사람을 뽑지 않기로 정하였기 때문에 먼 지방 거자(擧子)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이런 일을 하신다면, 이는 신의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상이 마침내 시사(試士)에 친림한 것은 평상시의 과제(課製)와는 다른 것이라고 하여 특별히 네 사람을 전시에 직부하도록 허락하였다. 물의가 떠들썩하며 신의를 잃은 처사라고들 말하였는데, 그후 심지원(沈之源)이 아룀으로 인해 마침내 세 사람의 직부는 취소시키고, 일등한 심백만 급제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심백은 전 승지 심광수(沈光洙)의 아들로 문장이 부족하였다. 영남 사인(士人) 정여(鄭欐)라는 자가 글을 매우 잘 지었는데, 포부는 컸으나 기회를 만나지 못해 오랫동안 심백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그런데 이때 심백이 장원 급제하자, 사람들이 자못 의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49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역사(歷史) / 군사-병법(兵法)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심백은 전 승지 심광수(沈光洙)의 아들로 문장이 부족하였다. 영남 사인(士人) 정여(鄭欐)라는 자가 글을 매우 잘 지었는데, 포부는 컸으나 기회를 만나지 못해 오랫동안 심백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그런데 이때 심백이 장원 급제하자, 사람들이 자못 의심하였다.

 

10월 2일 무신

정언 이관징(李觀徵), 대사간 유경창(柳慶昌), 지평 정창도(丁昌燾)가 감추(勘推)를 합당하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혹은 거둥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10월 4일 경술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정언으로,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이유상(李有相)·원만리(元萬里)를 지평으로 삼았다.

 

호조에서 경비가 고갈되었으니 백관들의 녹봉을 감하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오랫동안 난처해 하다가 이때에 와서 전미(田米)를 콩으로 대신 주고, 내년 봄부터 5품 이상의 녹봉은 한 섬씩 감하라고 명하였다.

 

호서(湖西)의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 김우석(金禹錫)이 상소하여, 본도 연해의 흉년 든 상황을 진술하며 한전(旱田)에는 급재(給災)하고 이전미(移轉米)를 내년으로 물려 받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이 방계(防啓)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7일 계축

함경도의 대미(大米)·소미(小米) 1만 석, 강원도의 쌀 1천 석과 조 3천 석을 옮겨 영남의 기민들을 진휼하였다.

 

10월 9일 을묘

이연년(李延年)을 집의로 삼았다.

 

10월 11일 정사

이준구(李俊耉)를 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응교로, 정재해(鄭載海)를 검열로 삼았다.

 

10월 14일 경신

조복양(趙復陽)·유계(兪棨) 등이 관직을 팔아 곡식을 모으자고 청하여 상이 이를 따랐는데, 이는 국고가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5일 신유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서(典獄署)에 가서 죄가 가벼운 죄인들을 풀어주게 하였다.

 

10월 16일 임술

홍처대(洪處大)를 승지로, 윤개(尹塏)를 장령으로, 김수항(金壽恒)을 동지 춘추로 삼았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10월 20일 병인

조형(趙珩)을 예조 판서로,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이행진(李行進)을 예조 참판으로, 최치옹(崔致翁)을 검열로,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삼았다.

 

선왕의 후궁인 이씨(李氏)의 작위를 특별히 올려 숙의(淑儀)로 삼았는데, 바로 숙녕 옹주(淑寧翁主)의 어머니이다.

 

간원이 장령 윤개를 탄핵하여 용렬하여 직임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체직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밤에 달이 헌원좌각성(軒轅左角星)을 범하였다.

 

10월 21일 정묘

일본 대마도에서 차왜(差倭) 귤성선(橘成船)·평성교(平成喬) 등을 보내어 부산의 왜관(倭館)을 옮기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조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3일 기사

밤 1경에 객성(客星)이 여수(女宿) 안에 나타났는데, 전성(塡星)보다 작았다.

 

10월 25일 신미

간원이 아뢰기를,
"새로 태어난 공주가 용인(龍仁) 땅에 전장(田莊)을 설치하다가 그곳 사람과 쟁송하게 되었습니다. 현령 박만영(朴萬榮)이 궁차(宮差)의 위협에 겁을 먹고 ‘도서(圖書)가 이와 같으니, 본현에서는 금지하기 곤란할 듯하다.’고 판결하기까지 하였으니, 만영이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그리고 강보에 있는 공주가 벌써 도서를 사용하여 백성들과 토지를 가지고 다투니, 더욱 듣기에 놀랍습니다. 만영은 파직시키고, 공주집의 차인은 무겁게 죄를 적용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밤 1경에 객성이 여수에서 5도쯤되는 지점에 옮겨 있었는데, 북극과의 거리가 1백 2도였다.

 

10월 26일 임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심지원과 우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요즘처럼 흉년이 아주 극심한 때에 하늘이 경계를 보여 객성이 연이어 나타나니, 이는 모두 신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입니다. 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부덕한 소치이니, 어찌 경들만의 탓이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금번 객성이 여수를 범한 것은 궁궐이 엄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말이 비록 억지로 끌어붙인 한(漢)나라 유학자들의 주장과 같지만, 전하께서는 반드시 궁궐을 엄정히 단속하여 하늘에 응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고, 부제학 유계(兪棨)가 아뢰기를,
"여수는 바로 제(齊)나라에 해당되는 별자리이니, 우리 나라에 더욱 염려가 됩니다."
하였다.

 

10월 27일 계유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면직을 요청하였는데, 상이 후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

 

태복시(太僕寺)의 은화(銀貨)를 도적질한 장수창(張壽昌)을 참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수창은 은 1천여 냥을 도적질했다가 발각되어 계복죄인(啓覆罪人)이 되었는데,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무릇 죄인을 계복하는 것은 범한 바에 혹 의심스러운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도적의 경우는 이미 발각되어 장물(贓物)을 도로 찾았는데, 아직까지 처단하지 않으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때를 기다리지 말고 참형에 처하라고 즉시 명하였다.

 

밤 1경에 객성이 여수에서 8도(度) 되는 지점에 옮겨 있었는데, 북극과의 거리는 99도였다. 형체가 점차 작아졌다.

 

10월 29일 을해

윤절(尹晢)을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임하여 동래(東萊)로 내려보냈는데, 이는 차왜(差倭)가 나왔다고 동래 부사가 치계했기 때문이다.

 

밤 1경에 객성이 허수(虛宿)에서 1도 되는 지점에 옮겨 있었는데, 북극과의 거리는 97도였고, 색이 점차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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