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6권, 현종 2년 1661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3.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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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병자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상소하여 녹봉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록 흉년이기는 하나 어찌 경에게 녹을 줄 쌀이 없겠는가. 뜻이 범상한 것이 아니니, 경은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받도록 하라."
하였다. 이해가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 관직은 판서에까지 이르렀으나 가난하여 빈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연로하여 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으며 늠록(廩祿)을 받지 않자, 대신 중에 탑전에서 이를 진달한 자가 있었으므로 상이 특별히 명하여 보내주게 하였다. 이해가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였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2일 정축

박세모(朴世模)를 도승지로, 조윤석(趙胤錫)을 좌부승지로, 남노성(南老星)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11월 4일 기묘

예조 판서 조형(趙珩)을 금부에 회부했다. 당초 조형이 이갑남(李甲男)의 일로 진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일찍이 형조에 있었을 적에 이조의 아전 이갑남이 신문을 받아야 할 죄가 있었는데, 나이가 일흔 살이라고 공초하였습니다. 신도 또한 그의 노쇠한 모습을 보고 생각하기를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율(律)을 적용하여 아뢰고 한편으로는 이문(移文)하여 뒷날 상고할 바탕으로 삼자.’ 하였습니다. 그 뒤 며칠이 되지 않아 상소하여 체직을 윤허받고 바로 헌부에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 개좌(開坐)하던 날 지평 이숙(李䎘)이 소문으로 들은 몇 가지 죄를 가지고 갑남을 잡아들이고는 말하기를 ‘이자는 전에 형조에서 나이를 속여 죄를 면했다.’ 하였습니다. 신이 매우 놀라 이문(移文)하여 수년의 장적(帳籍)을 베껴오게 했더니, 한 군데에는 68세였고, 다른 한 군데에는 70세였고, 또 다른 한 군데에는 73세였습니다. 이에 비로소 속여 기록한 정상을 깨닫고는 이것으로 그의 죄목을 더해 특별히 엄형에 처했습니다.
지난번 대신이 이 일을 갑자기 탑전에서 진달했는데, 수개월 전에 있었던 일이라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전후에 이문했던 것으로 잘못 진달했습니다. 물러나와 형조 참의 권대운(權大運)에게 물어보니, 당시에는 끝내 이문하여 베껴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드러나 상을 기만한 것이 되었으므로 의당 즉시 소장을 올려 혼매해서 그르친 죄를 진달했어야 했는데, 《실록》을 봉안하는 행차가 하루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미처 소를 올려 진달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이제 비로소 전후의 죄상을 밝히니, 신을 파면시키고 유사에게 명하여 율에 따라 죄를 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소장을 형조에 내려보냈다. 형조가 의금부에 이송하여 처치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형조 참의 권대운(權大運)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난 가을 본조에서 개좌(開坐)했을 때 갑남이 나이가 72세라고 공술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전례에 따라 이문하여 장적(帳籍)을 살펴보고 처리하자.’고 하였는데, 장관이 ‘갑남의 연로한 것을 누구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여러 증인에 근거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신 역시 그의 노쇠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끝내 주장을 고집하지 못하였는데, 이 점은 바로 신의 죄입니다. 그러나 ‘일흔 살 된 자에게 법을 시행할 수는 없다.’고 한 것은 애초 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율을 적용하여 아뢰는 한편 장적을 살펴보자.’ 한 것은 더욱 실상이 아닙니다. 이미 여러 증인에 근거하여 죄를 정해 입계하였다면 추후 장적을 살펴본들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는 시간이 오래되어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이러한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이미 함께 참여했으니, 이치상 신만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직을 삭탈하시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말한 것이 그대가 한 것이 아니고 잘못한 것도 그대가 한 것이 아닌데, 어째서 피혐하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6일 신사

지중추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대각의 신하에게 듣건대, 이일상(李一相)을 비난하여 배척하는 계사 가운데 영곡(營穀)에 관한 사항이 있다고 하는데, 신도 이와 유사한 일을 했었습니다. 신이 미처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는데 경연의 신하가 신을 거론해서 아뢰었다는 얘기를 이어 들었습니다. 신의 죄가 이에 더욱 크게 되었으니, 신의 직명(職名)을 삭탈하시고, 이어서 유사에게 명하여 일상과 함께 법대로 단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영곡에 대한 사항을 경연의 신하가 계달하였지만, 경을 비난하는 데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로 부득이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빈한한 사대부가 생명이 달려 있는데, 의를 해치지 않는 곡식을 빌리지 않고 바로 죽겠는가. 분명히 피혐할 만한 말이 아니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명하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일찍이 들으니, 송시열은 티끌 하나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지만 가난 때문에 스스로 살 수 없을 경우에는 영곡(營穀)을 대출받은 적이 간혹 있었고, 그것을 갚을 때에 혹 이쪽에서 받아다 저쪽에다 갚은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를 ‘일상이 곡식을 교환할 때 쌀 1섬을 받고 조(租) 2섬으로 갚았다고 하니, 쌀을 조로 바꾸어 납부한 것이 비록 다르지만 이쪽에서 받아다 저쪽에다 납부한 것은 시열의 일과 유사한 듯하다.’ 하였으므로, 이를 근거로 하여 보증한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요즈음 시열이 이 일을 가지고 진소하였는데, 신은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신이 이 일에 대해서 조금도 시열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경솔하게 함부로 진달한 것인데, 이로 인해 유현(儒賢)이 인혐하였습니다. 신이 참으로 황공하므로 감히 당초의 본의를 진술합니다. 신이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어찌 경이 뜻이 있어 한 말이었겠는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11월 7일 임오

장령 송시철(宋時喆), 지평 이유상(李有相)이 패초에 나아오지 않은 것 때문에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11월 8일 계미

부응교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여 경연을 드물게 여는 것에 대해 극력 진술하고, 또 아뢰기를,
"공사의 어염을 모두 혁파하여 대농(大農)에게 돌려주어 군국(軍國)의 비용에 보태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선왕의 뜻입니다. 요즘 장적(帳籍)을 조사하여 막 올렸는데, 유사들이 폐지할 것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수사에 속한 것은 내수사에서 쓸 것이라 하여 놔두고, 제궁가의 것은 친애하는 사람의 것이라 해서 놔두고, 각 아문의 것은 군대의 비용이라 해서 놔두고, 공신가(功臣家)의 것은 예전의 은혜를 입었던 사람의 것이라 해서 놔둔다면 폐지할 만한 것은 거의 없어서, 선왕의 사(私)를 막고 공(公)을 강화시킨 아름다운 뜻이 오늘날 끝내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조사한 계제에 모두 대농에게 돌려주어 백 년동안 고질화된 폐단을 한꺼번에 씻어 없애고, 구차하고 인색한 논의에 흔들리지 마소서. 이것은 또한 선왕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한 가지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매우 감탄하였다. 매번 눈병 때문에 오랫동안 경연을 열지 못해 마음이 항상 편치 않았으나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끝 부분의 일은 의당 복계를 살펴보고 참작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에 앞서 우상 원두표가 탑전에서 궁가·훈신·각 아문의 어염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말하였기 때문에 옥당에서 이러한 차자를 올린 것이다.

 

11월 10일 을유

이후산(李後山)을 승지로, 김남중(金南重)을 예조 판서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헌으로, 이정영(李正英)을 대사간으로, 여증제(呂曾齊)를 장령으로, 정양(鄭瀁)을 지평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우윤으로, 윤심(尹深)을 봉교로 삼았다.

 

11월 11일 병술

금부의 복계에 따라 장리(贓吏) 심총(沈棇)을 석방하였다. 전에 심총이 광주 부윤(廣州府尹)이었는데,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그가 재물을 탐한 일을 안핵하여 치계하였다. 여러 해 동안 갇혀 있다가 변경으로 귀양갔는데, 뒤에 중간 지역으로 양이(量移)했다. 이때 원자(元子)가 탄생된 경사로 인해 비로소 석방한 것이다.

 

11월 12일 정해

밤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11월 13일 무자

간원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쌓여왔던 폐단에 관계된 것들은 모두 차례차례 혁파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뜻이었습니다. 말년에는 어전(漁箭)과 염분(鹽盆)을 절수(折受)한 폐단을 모두 없애고자 하여 각 아문·제 궁가·각도의 감·병영(監兵營)에 소속된 것들을 모두 조사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대대적으로 변통하여 군국(軍國)의 쓰임에 보탬을 주고자 한 것이었는데 미처 마무리짓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여러 도의 조사 보고가 막 올라왔는데 누락된 곳이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그대로 둔다면 여러 해 동안 쌓인 큰 폐단을 혁파할 만한 때가 끝내 없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여러 도의 감사를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부교리 이민서(李敏敍)가 상소하여, 관서(關西) 영유현(永柔縣)에 있는 제갈양(諸葛亮)의 사당을 중수하여 사전(祀典)을 높이고, 사액(賜額)하고 비(碑)를 세우며, 제전(祭典)과 수복(守僕)을 주어 어진이를 본받는 뜻을 보이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제갈양의 사당은 만력계묘년073)  에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명에 의해 설치되었다. 그 상소의 대략에,
"선조 대왕께서 임진란 때에 용만(龍灣)까지 파천하였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 이 고을에 와서 머무셨는데, 매우 각별한 뜻을 두셨습니다. 그 후 이곳에 무후의 사당을 세우도록 허락하고, 본 고을의 무사를 소속시켰으며, 또한 무후의 상(像)을 보내 안치하게 하였으니, 성조의 이 일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습니까.
7년 간의 난리를 통해 몸소 어려움을 겪었는데, 당시 교령을 받들던 신하들 가운데에는 적을 토벌하고 국가를 부흥시킬 임무를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에 위 문후(魏文侯)는 나라가 어지럽자 어진 재상을 생각하였고, 한 문제(漢文帝)는 흉노를 걱정하면서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얻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했듯이 성조께서 호걸을 아득히 생각하면서 ‘어찌하여 나의 신하 가운데는 없는가.’ 한 뜻을 또한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의 서쪽에 와룡산(臥龍山)이라는 명칭이 있음을 인연해서 사당을 세웠는데, 이는 사실 주자(朱子)가 여산(廬山)에 와룡암(臥龍庵)를 향사(享祀)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16일 신묘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대사성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승지로 삼았다.

 

제주의 곡식 4천 석을 옮겨 호남(湖南) 연해의 기근이 든 고을에 나누어 주어 진휼하게 하였는데, 이는 감사 이태연(李泰淵)의 청을 따른 것이다.

 

대사간 이정영(李正英), 사간 이준구(李俊耉), 헌납 김우석(金禹錫), 정언 유명윤(兪命胤) 등이 아뢰기를,
"전 판서 조형(趙珩)이 죄인을 조사하여 다스릴 때에 그의 장적(帳籍)을 상고하지 않고 죄를 결정하였으니, 법을 집행하는 체통을 크게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탑전에서 답변을 잘못하였으니, 그 죄를 참으로 모면할 수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그의 죄를 청하는 소에 대해 이미 파직할 것을 윤허하시고 이어 감옥에 가두도록 하셨습니다. 육경(六卿)의 신하는 일반 관료와는 다른 것이니, 그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 이와 같이 해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근래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여기기를 ‘성명께서 군신간의 의리에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여,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 실로 지금부터 비롯될 것이니, 속히 석방할 것을 명하시고 율을 적용하라는 조처도 중지시키소서.
그리고 이갑남(李甲男)을 논죄할 때에 장적을 상고하지 않고 죄를 정하였으니, 일을 잘 살피지 않고 처리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판서 조형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그렇다면 함께 참석한 좌이(佐貳)도 홀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형조 참의 권대운(權大運)을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대각의 신하는 의당 임금을 속인 자를 미워해야 될텐데 도리어 그를 비호하니, 어째서인가? 인심과 세도가 참으로 한탄스럽다. 파직시킨 뒤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금부가, 조형(趙珩)이 공초(供招)하여 자복하였으므로 조율(照律)하자고 청하니, 상이 형추(刑推)하여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조형이 흐릿해서 일을 잘못했으니, 실로 해괴한 일입니다. 율을 상고하여 죄를 정하더라도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지만 성인은 법을 씀에 있어 실정을 파악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조형이 비록 보잘것없는 자이나 어찌 일개 서리를 위하여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지겠습니까. 그의 본래 생각을 헤아려 보건대, 절대로 이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심지어는 임금을 속인 못된 자라고 하고, 또 형추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중신(重臣)을 형추하는 일은 조종조에 없던 일이니, 조치가 지나쳐서 사람들이 필시 놀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우레와 같은 위엄을 조금 푸시어 형법이 중도에 맞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계사를 보니, 참으로 가소롭다. 중신을 형추하는 일은 조종에 없던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중신이 임금을 속인 일은 조종조에 있었던가. 일이 해괴하다. 너희들이 억지로 사(私)를 비호하려고 하다니,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7일 임진

장령 여증제(呂曾齊) 등이 아뢰기를,
"삼남(三南)의 흉년은 전고에 없던 일입니다. 조정에서 백성들의 일을 곡진하게 염려해서 등급을 나누어 급재(給災)할 것을 허락하였으니, 농토에 대한 부세(賦稅)를 순차적으로 감해야 합니다. 공물(貢物)의 가격을 아직까지 처리하지 않고 있는데 같은 민역(民役)이므로 마찬가지로 변통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선처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판서 조형이 전후로 한 짓은 모두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이미 파직시키고 며칠 동안 가두었으니, 죄를 징계시키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뜻밖에 형추하라는 명을 또 내리셨는데, 이미 자복했으니 무슨 실정을 알아낼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조형은 세 조정을 계속해서 섬겼고 지위가 경(卿)의 반열에 이르렀으니, 갑자기 형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형추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공물에 대해 품의해 처리하는 일은 따랐다.

 

부응교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형이 형조 판서의 직위에 있으면서 죄수를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는 법에 의거하여 장적을 제대로 상고하지 않아 간악한 서리가 나이를 속이도록 한 데다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성상의 면전에서 잘못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장을 올려 진달할 때에 갖가지 사리에 닿지 않는 말로 핑계를 대었습니다. 처사가 이와 같으니, 죄를 어떻게 감히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어제 간원의 관원들이 먼저 석방할 것을 청하고 또 율을 적용하라는 명을 중지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시비가 근거 없고 경중이 합당하지 못합니다. 일을 논하는 체모가 이와 같아서는 옳지 않습니다. 아뢰는 데 참여한 간원의 관원을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조형이 참으로 죄가 있지만 이미 경(卿)의 반열에 있으니, 조정이 그를 대우함에 있어서 미천한 자들과 같이 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형신을 가하는 것은 청렴과 절조로 신하를 기르는 도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임금을 속인 못된 자’라는 등의 말은 어투가 너무 지나쳤고 진상을 완전히 통촉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속히 형추하라는 명을 중지시키소서."
하였다. 좌의정 심지원과 우의정 원두표도 상차하여 형추하는 것이 지나치다는 의견을 누누이 아뢰었으나,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간원의 관원을 체차하는 것만 허락하였다.

 

11월 18일 계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대각은 공정한 논의가 있는 곳이고 국가가 믿는 바인데, 사사로움을 비호하는 일이 풍조를 이루고 논의함에 있어 조리가 없다면 장차 어떻게 군상에게 간쟁하고 모든 관리를 규찰해서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 간원이 조형의 일에 대해 한편으로는 속히 석방시킬 것을 명하라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율을 적용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조형이 임금을 속이고 교묘하게 둘러대어 답변한 정상은 이미 남김없이 폭로되었는데 반드시 그를 비호하려고 하였으니, 대사간 이정영(李正英) 등을 체직만 시키고 말 수 없다. 그들을 삭직하여 변방으로 보내도록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간원이 아뢴 글이 조리에 닿지 않아 신들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래 생각을 헤아려 보건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 어찌 감히 사사로움을 비호할 계책을 내어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진 것이겠습니까. 지금 만약 갑자기 삭직과 귀양의 벌을 내리신다면 대성인의 포용하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깊이 생각하시어 잠시 우레와 같은 노여움을 푸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들의 말을 보건대, 참으로 사사로움을 비호하고 악한 자들과 편당지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언관이 된 몸으로 마음씀이 이와 같으니, 만일 삭직 귀양의 율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백관들을 책려하여 방자한 사의(私意)를 막겠는가. 그대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11월 19일 갑오

상이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원두표와 제조 홍명하가 입시하였는데, 두표가 아뢰기를,
"조형이 아뢰는 말을 잘못하여 사실대로 답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죄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형추라는 것은 숨긴 실정을 캐묻는 방법입니다. 그가 이미 자복했는데 형추한다면 어찌 법을 합당하게 쓰는 방도이겠습니까. 상께서는 마땅히 생각하여 참작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부가 실정을 조사한 뒤 으레 형추할 것을 청했는데, 이번에는 곧바로 조율(照律)할 것을 청하였으니, 사체에 합당하지 않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이번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일컫는 ‘지만(遲晩)’이 아니어서 곧바로 조율할 것을 청한 것으로, 체례(體例)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형추하지 말라."
하였다. 두표가 또 아뢰기를,
"어제 간원이 아뢴 것이 비록 매우 사리에 닿지 않지만 변방으로 내쫓기까지 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방도가 아닙니다."
하고, 명하도 함께 같은 뜻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조형이 죄가 없는데 내가 그를 가두었는가. 간원이 아뢰면서 곧바로 석방시킬 것을 청하다니, 이 무슨 거조인가."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죄가 벌에 합당하다면 비록 삭직 추방보다 더 무겁더라도 괜찮지만, 벌이 죄에 합당하지 않다면 가볍거나 무겁거나 간에 모두 중도를 잃는 것이 됩니다. 지금 이 간관들이 비록 죄가 있기는 하나 벌이 어찌 삭직 추방에까지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이니 시비와 곡직이 모두 대간에 있다. 그런데 대간이 한갓 사적인 것을 비호할 줄만 알아 이와 같이 논계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하였다. 명하가 누누이 진달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부응교 이민적(李敏迪), 교리 민유중(閔維重)·임한백(任翰伯), 부교리 이민서(李敏敍), 수찬 오시수(吳始壽)·홍주삼(洪柱三) 등도 면대할 것을 요청하여 아뢰기를,
"근일 상의 처사가 중도에 어긋난 일이 많기에 신들이 어제 차자를 올려 진달했습니다. 그러나 글로 아뢰는 것은 면대해서 진달하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감히 와서 면대를 청한 것입니다. 조형을 형추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을 바로 들었는데, 이는 잘못한 지 오래되지 않아 원상을 회복한 것이니, 신들이 기쁘고 다행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대관(臺官)이 아뢴 것도 참으로 매우 부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관이 이미 체직시킬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다만 이 네 사람이, 시비가 분명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사적인 것을 비호하려는 계책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속히 변방에 귀양보내라는 명을 중지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형에게 죄가 없는데 가두었다면 참으로 대관이 논집해야 할 것이다. 조형의 세 가지 행동이 모두 매우 무례한 것이었는데 간관이 감히 석방시킬 것을 청하니, 이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민적 등이 아뢰기를,
"간관에게 죄가 없지는 않으나, 무릇 처벌하는 데 있어서는 각기 합당한 것이 있는 법입니다. 태형(笞刑)이나 장형(杖刑)과 같이 가벼운 벌에 있어서도 지은 죄에 맞게 처벌해야 하는데,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삭직 추방같이 무거운 율을 바로 가한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형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는데 바로 석방시킬 것을 청하고, 권대운(權大運)의 잘못은 단지 장적(帳籍)을 상고하지 않은 것인데 파직시키고 추고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시비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대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참작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민적 등이 배사하고 또 경연에 자주 나아갈 것을 청하니,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후로 긴요하지 않은 공사는 정원에 두고 아뢰어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판중추 정태화가 상차하여, 조형을 형추하고 이정영 등을 삭직하여 멀리 추방하라고 한 명을 중지시킬 것을 청하고, 영중추 이경석(李景奭)과 판중추 정유성(鄭維城)도 조형을 형추하라고 한 것이 옳지 않다는 뜻으로 상차하였다. 차자가 들어간 지 며칠이 지났는데 이때에서야 상이
"대신들의 말에 따라 이미 참작하여 처리하였다."
고 답하였다.

 

남노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사간으로, 송시철(宋時喆)을 헌납으로, 이유상(李有相)·이동명(李東溟)을 정언으로, 원만석(元萬石)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이정영 등을 사판에서 삭제만 시키라고 명하였다.

 

11월 20일 을미

헌부가 상차하여, 이정영 등을 사판에서 삭제시키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22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이정영 등을 사판에서 삭제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김좌명(金佐明) 등이 아뢰기를,
"정사에 임해서 주의(注擬)할 사람이 없지 않은데, 며칠 전 정사에서 전 군수 이조(李稠)를 두 자리에 겹쳐 의망해서 마침내 낙점을 받고야 말았으므로 물정이 자못 타당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직령(社稷令) 이조를 체차하고, 정조 당상(政曹堂上)을 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는 바로 이조 참의 조복양(趙復陽)의 처사촌으로 출계(出繼)한 자인데, 좌명이 이 의논을 내면서 지적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뜻이 깊다 하겠다.

 

홍문관 교리 민유중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나아가신 지 오래되자 편안에 익숙해졌으며 뜻을 세우는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학문을 추구하는 마음이 독실하지 못해, 진계하고 강을 권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면서 게으른 데다가 늘 거만한 표정을 지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놀라고 의혹되어 어찌할 줄 모를 뿐만이 아닙니다. 사방에 전파되면 신민들의 기대하는 마음을 꺾어버리기에 충분한 것이니,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여깁니다.
지난 병신년074)   봄에 선왕께서 우연히 몸이 편찮아 오랫동안 경연을 폐했는데, 당시 경연의 신하가 차자를 올려 진계하자, 선왕께서 ‘재이(災異)가 매우 심해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으니, 이 어찌 내가 한가하게 누워 병을 조리할 때이겠는가. 다만 감기 때문에 신하들을 만나지 못해 매우 답답하게 여겼다. 지금 차자를 보니, 내 마음이 시원하다. 지금 즉시 아뢸 생각이 있는 모든 대소 신하들로 하여금 개강(開講)하는 날 들어와 아뢰게 하라.’고 답하셨으니, 아, 성인의 말이 참으로 위대합니다. 질병의 괴로움도 잊고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혀 마음에 경책하고 말로 표현한 것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니, 오늘날 의당 본받아야 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이어 제왕이 학문하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는 한편 또 관작을 파는 행위가 너무 많아 국가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점이 있다고 누누이 말하였는데, 상이 후한 비답을 내렸다.

 

11월 23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4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전 참판 이민구(李敏求)를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장령 여증제(呂曾齊),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 일제히 모였을 때 이민구에 대한 서용을 환수할 일에 대해 서로 의논하여 계사의 초고를 지어놓고 장관에게 간통(簡通)하여 물어보았더니, 처음에는 ‘문재(文才)가 아깝고 시간이 이미 오래 지났는데 매양 논계하며 고집하니, 너무 지나치다.’고 답하였고, 다음에는 ‘일찍이 이 정승이 거두어 서용하자는 의논을 할 때 그르다고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처음의 의견을 변경시키기는 곤란하다.’고 답하였습니다.
대저 민구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특별한 용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선조 때에 거두어 서용하자는 의논이 있었지만 대각의 논계가 거듭 일어나 마침내 명을 중지시켰으니, 왕법을 변경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장관이 또한 민구에게 죄가 없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단지 그의 문재(文才)가 매우 뛰어난 것을 아깝게 여기고 죄를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강력하게 고집하니, 이는 실로 신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들이 주장했던 의견은 공론인데 끝내 서로 어긋나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태연스럽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헌 김좌명이 인피하기를,
"근래에 관원의 인사 행정이 공정치 못하다는 사람들의 말이 매우 많기에 일에 따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며칠 전 이조(李稠)의 일을 논계했는데, 이조는 바로 참의 조복양의 처사촌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곧바로 지적해서 아뢰지 않았다고 비난하니, 이것이 신의 첫번째 잘못입니다. 법부(法府)가 회좌하지 않는 것은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므로 신이 일찍이 탑전에서 그 그름을 계달했습니다. 어제 동료들이 일제히 모일 때에 신이 사적으로 슬픈 일이 있어 홀로 관아에 나아가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잘못입니다.
그리고 동료들이 또 이민구의 서용을 환수하는 일로 간통을 보내왔기에, 신이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정승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특별히 거두어 서용할 것을 청한 일이 있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월이 이미 오래 흘렀는데 매양 논집하니, 너무 지나친 듯하다.’고 답하였습니다. 동료들이 또 ‘이미 의논을 제기했으므로 중지시키기는 곤란하다.’ 하기에, 신이 ‘정승이 거두어 서용하자는 의논을 내놓았을 때 일찍이 그르다고 하지 않았다. 지금 만약 처음의 견해를 바꾼다면 전후의 시비가 달라지게 될 수 밖에 없으니, 이것이 걱정스런 점이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의 좁은 소견으로 끝내 공의를 꺾을 수는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동료들이 피혐한 말을 보건대, 신의 말을 뒤집고 깎아서 아뢰었는데, 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난 경인년075)   즈음에 대신과 경연의 신하가 탑전에서 계속 용서할 만하다는 것을 진달하였고, 최후에는 고 정승 이경여(李敬輿)가 거두어 서용할 것을 특별히 청하였는데, 신이 그 뒤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출입하면서 그르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경인년으로부터 또 12년이 지났는데, 현재 민구가 받고 있는 벌은 파직된 것에 불과합니다. 전고에 없던 큰 은택이 베풀어지는 이때 서용하라는 명령을 하나 내린 것이, 반드시 다투어야 할 단서가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소견이 이와 같으므로 동료들의 의견에 따라서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신의 세 번째 잘못입니다.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장령 박증휘(朴增輝)는, 이조에 대해 아뢰는 데 동참했기 때문에 감히 동료를 처치할 수 없다고 하며 인피하였다. 정언 이동명(李東溟)이 처치하여, 좌명은 체직시키고 계주 이하는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전날 피혐한 내용은 바로 장관의 답간(答簡)에 의거했던 것으로 터럭끝만큼도 어긋나게 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뒤집고 깎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배척을 받았으므로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라는 내용으로, 집의 정계주(鄭繼胄)가
"이조를 체직시키자고 아뢸 때 신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이조는 이미 출계(出繼)하여 강등되었으니,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조복양의 죄안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라는 내용으로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했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도록 하였다.

 

11월 27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8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민응협(閔應恊)을 대사헌으로, 오정원(吳挺垣)을 판결사(判決事)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여러 곳의 사찰에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을 봉안해 둔 것에 대해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의논하여 묻도록 하였는데, 지금 묻지 않는 곳도 있고 혹은 한 방에 별도로 봉안하여 초하루 보름으로 상식(上食)하기도 한다 하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한결같이 당초 의논하여 정한 대로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민구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는 종사에 관계되는 것인데도 목숨을 보존하였으니, 이미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평범한 죄를 지은 자처럼 사판(仕版)에 다시 끼워넣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도 서용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대각의 신하들이 강력하게 간쟁하여 마침내 일을 이루고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거두어 서용하라는 것은 실로 뜻밖에 나온 것으로 보고 들은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도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고 나서야 따랐다.

 

전 지평 이지익(李之翼)을 하옥하였다. 이때에 이동현(李東顯)과 양영남(梁穎南)을 나문(拿問)하여 이일상(李一相)이 뇌물을 받았는지의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동현은 그런 일이 없다 하고 영남은 위조한 것에 대해 자복했으므로, 상이 지익을 가두고 동현 등으로 하여금 대질해서 밝히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해 의논하는 사람들은
"대간이 일을 말한 것 때문에 갇혔으니, 부당하다."
하였고, 옥당도 차자를 올려 중지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11월 29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요사이 시녀를 고르기 위해서 액정(掖庭)의 하인들이 여염을 두루 돌아다니며 끝까지 뒤져 찾아내거나 뇌물을 받고 멋대로 봐주는 등의 폐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한 여자를 고르는 데 여러 집이 침탈을 받고 있는데, 성명께서 어떻게 그 폐단을 다 통촉하실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인군 중에는 재해를 당해 궁녀를 내보낸 자도 있었습니다. 지금 시녀를 골라들이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지만, 풍년이 들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가 유사에게 맡겨, 침탈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을 없애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저(李竚)가 장지(葬地)를 다투어, 최복을 입은 채 직접 몽둥이를 들고 사람을 때렸으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내기까지 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나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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