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6권, 현종 2년 1661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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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병오

예조가 모든 도의 사찰에 모신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을 매안(埋安)하자고 계청하니, 간원의 아룀을 따른 것이다.

 

12월 2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3일 무신

지평 정양(鄭瀁)이 소패(召牌)에 나오지 않은 일로써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정계주(鄭繼胄)가 피혐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이지익(李之翼)이 대각에서 체직되자마자 즉시 감옥에 들어갔으니, 신들이 대각을 대우하는 체면에 손상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성상이 반드시 끝까지 조사하여 밝히려는 것은 실상 어떤 뜻이 있어서이며 또 그 일의 끝마무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듣건대 당연히 논핵해야 할 일을 논하지 않은 것으로써 물의가 탓을 하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니, 정언 이동명(李東溟), 헌납 송시철(宋時喆)도 이것으로써 인피하였다.

 

12월 4일 기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여증제(呂曾齊)가 전관(銓官)의 인척으로 본직에 임명되었는데, 본부가 이조(李稠)의 체직을 논한 뒤에 역시 인피하였다. 이에 대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또 인피하여 아뢰었다.
"신은 전조(銓曹)에 대해 이미 인척의 혐의가 있으므로 처치하여 출사하기를 청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 그대로 본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지난번에 호남 경차관(湖南敬差官)의 명을 받고 급재(給災) 등의 일을 한결같이 사목(事目)에 따랐는데도 도신(道臣)이 도리어 이를 잘못으로 여기고 있으니 신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지금 양사가 당연히 논하여야 할 것을 논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인피하였으니, 신은 이미 스스로 처신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찌 감히 처치하겠습니까. 체직하소서."

 

정언 이유상(李有相)이, 양사가 이지익의 일로 인피하였는데, 지익이 논한 이일상(李一相)은 곧 신의 사촌형이므로 신이 감히 가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체직을 청하였다.

 

12월 5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판의금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금부 낭청이, 이지익의 실정을 조사한 공사(公事)를 가지고 와서 보였는데, 허다한 공사(供辭)가 오로지 신을 공격하기에 온 힘을 다하였으니, 신은 매우 놀랍습니다. 양영남(梁永南)의 초사(招辭) 가운데 위조에 관한 한 항목은 연전의 형조와 포도청에 납초(納招)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도 끝내 농으로 돌렸습니다. 위조에 관한 한 일을 이미 지만(遲晩)했으면 다시 묻는 일은 없어야 할 듯한데, 농으로 말을 꾸민 그 정상이 가증스러워서 신이 감히 규정 외의 형벌을 청했던 것입니다. 형추(刑推)하라는 명이 내린 뒤에 유달리 무겁게 신문하였고, 엄형으로 실정을 밝히라는 명이 내리게 되자, 그는 사형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여 곧장 지만하였습니다. 죄인이 지만하면 모두 곧바로 조율(照律)을 청하는 것이 곧 규례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미 엄형하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신이 상께서 결재하도록 입계한 것은 역시 사체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찌 주선하여 덮어주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영남을 캐어 물을 때 ‘네가 정말 위조하였느냐’고 했다는 이야기는 더욱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동료가 있는 자리에서 하리(下吏)가 설사 지익의 처지를 위하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어 지익에게 아첨했겠습니까. 또 신이 설사 범연한 빛이 있었더라도 지익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신의 말과 얼굴색을 탐지할 수 있겠습니까. 영남의 위조한 실정은 사람들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것으로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마는, 다만 사찰(私札)을 위조한 데에는 그 죄에 해당하는 벌률이 있기 마련인데 유사된 자로서 어떻게 감히 그 법을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영남이 사형을 받은 뒤에 두 다리의 살이 헤지고 뼈가 드러났으니 이는 동료와 아랫사람들이 함께 목격한 것입니다. 지익이 이른바 곤장을 느슨하게 쳤다는 말은 무엇을 근거하여 이른 것입니까. 또 신이 처음 금오(金吾)076)  에 임명되었을 때도 그 이전에 마침 내국(內局)을 겸직하였기에 소를 올려 사면하였으나, 비단 성상의 비답이 허락하지 않은 것만이 아닙니다. 인조조로부터 당저(當宁)077)  에 이르기까지 두 직임을 아울러 겸직한 자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매번 번거롭게 하지 못하고 힘써 공무를 집행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것으로 신의 죄안을 삼을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사공(沙工)과 곁꾼들은 자연히 죄가 없는 자들이기에 처형할 때마다 하늘을 우러러 원통함을 부르짖었습니다. 먼 시골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다가 형을 받으니 보는 이들이 슬프고 애처로워서 외부의 의논은 모두 형을 중지할 것을 계속 계청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신은 그것이 중대한 일이기에 감히 정지하기를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도리어 엄호하였다고 배척을 받고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속여 못하는 짓이 없으니, 아, 너무도 심합니다. 신이 옥사에 대한 의견을 올린 것은 그 실상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허위 사실을 거짓으로 얽어서 지익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겠습니까.
대저 지익이 지난번 회피한 말 가운데의 이야기는 지난해의 논계한 말과 어긋나는 것이 많고, 지금의 이 공사도 회피한 말과 서로 틀려서 처음과 끝이 맞지 않아 두 사람이 한 말과 같습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배에 실어 보낸 물건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많고, 신도 그 사람을 눈으로 보고 그 말을 들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이 공사에는 그 사람의 성명을 거론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말의 출처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지익이 말이 궁하고 꾀가 바닥나자 필시 승부를 다투려고 하여, 신이 일찍이 일상(一相)을 신구하였고 또 교분이 있다고 하여 이렇게까지 심하게 신을 공격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바로 송사(訟事)를 응하여 바르지 못한 것을 다스리는 자가 미리 승부의 기미를 보고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기려는 계책이니 그 마음이 도리어 애처롭습니다. 신이 금오의 장관이 되어 추잡한 흉을 아주 심하게 입어 맑은 조정에 욕을 끼친 것이 많습니다. 신의 본직과 금오의 겸직을 빨리 체차시켜 인심을 시원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근거없는 괴이한 말에 경은 어찌 이다지도 말이 많은가. 내국의 직숙(直宿)을 오랫동안 비울 수 없으니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6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교리 민유중(閔維重)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근래 예양(禮讓)의 풍습이 크게 무너져 대각의 체모가 점차 이즈러지니 식견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바입니다. 일전에 헌부의 관원이 이조에 대한 추문(推問)을 청했다가 그들이 인피하자 도리어 구하고자 하였는데 앞뒤가 서로 어긋나서 마치 두 사람에게서 나온 듯하니, 이는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또 지평 원만리(元萬里)는 지난번 충공 감사 김휘(金徽)의 장계로 인피하기까지 하였는데, 분노한 말이 많아 드러내놓고 침해를 가하였습니다. 그러자 김휘는 소를 올려 공척에 대해 변명하면서 분한 김에 욕설을 해댔는데 그 말이 형편없었으니 사체로 헤아려볼 때 서로 따질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리는 곧 다시 기운을 내 떠들어 대면서 서로 앙갚음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상대가 거스르면 나도 거스른다는 식으로 똑같이 한 구덩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논하자면 경중이 없지는 않으나 사대부가 서로 공경해야 되는 도리에 손상이 있음은 피차 똑같습니다. 공론에서는 둘을 아울러 탄핵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헌부의 아룀은 김휘만을 편파적으로 책망하였으니, 조정의 시비 문제는 이처럼 몽롱하게 처리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계주(鄭繼胄) 등의 인혐에 있어서는 더욱 의의가 없습니다. 논할 만한 것이 있으면 논하는 것이지 왜 시기에 구애되며, 논하는 것이 옳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지 왜 물의에 관계됩니까. 옳고 그름의 평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의 이야기를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여 구차스럽고 당치않으니 규피(規避)하는 행위에 걸렸습니다. 지평 원만리(元萬里)와 충공 감사(忠公監司) 김휘(金徽)는 파직하고, 집의 정계주,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이동명(李東溟)·이유상(李有相), 장령 여증제(呂曾齊)는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본관이 이지익(李之翼)을 잡아다가 문초할 수 없다는 일로 차자를 올렸는데 금부가 벌써 안문(案問)을 시행하였다 하니 신들은 몹시 놀랍고 의아합니다. 본관이 올린 차자가 대각의 신하들이 주장하는 의논과는 다르지만 비지가 내리기 전에는 유사는 당연히 거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도 의심하거나 어렵게 여기지도 않고 으레 공초를 하여 애써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본뜻이 소용없이 일이 되게 하였으니, 이 길이 한번 열리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금부의 해당 당상을 체차하소서.
또 신들은 삼가 개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차자를 올린 지가 지금 8일이나 되었는데 아무런 비답이 내리지 않으니, 신들은 매우 답답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옥체가 평안하지 못한 중에 또 자전의 체후가 편치 못하시니 걱정으로 받들고 약을 드리느라 혹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잡다한 정사를 결재하는 일은 그래도 완전히 그만두지는 않았는데 유독 근신이 논사(論事)한 차자에만 어찌하여 한 마디의 말로써 지휘하기를 아끼십니다. 말한 바가 궁액(宮掖)간의 일에 관계된 것이 많아서 성상이 짜증나고 괴로워 듣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따르고 어기는 계제에 불편함이 있어서 가볍게 가타부타 하고 싶지 않아서입니까. 과연 그렇다면 이것은 정말 성명에게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내가 비록 어둡고 용렬하여 도무지 식견이라고는 없지만 어찌 그대들이 이것으로 의심할 줄을 생각했겠는가. 그대들은 한 번 생각해보라. 요사이 감기와 목구멍이 아픈 병을 앓아 목이 쉬어 말을 하지 못하며 눈이 충혈되어 글자를 보지 못한다. 옥당의 차자는 다른 소와는 자별하여 몇 구절의 문자로서 책임을 메꾸어 비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일을 기다려 목쉰 것이 조금 나은 뒤에 한 번 면대하여 상하간에 서로 막힌 의심을 풀려는 것이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궁액에 관계되는 말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기운을 버쩍 올려 큰 소리로 떠들면서 화평한 기상이 조금도 없는가. 매번 질병 때문에 나의 생각이 소용없게 되었는데 또 실정이 아닌 말을 받으니 부끄럽고 두려워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다. 또한 금부 당상의 체차에 관한 일은 참으로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겠다. 옥당의 차자와 대각의 계사가 다르니 마치 정계(停啓)를 기다리는 것 같다."
하였다. 애초에 충청 감사 김휘가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을 나와서 기다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주 목사 홍우원(洪宇遠)을 계파(啓罷)하였는데 소장 중에, 우원의 사장(辭狀) 중에 있는 말을 아울러 거론하였다. 그 내용에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공주를 지나다가 접대하는 일로 크게 능멸하였습니다."
는 것이 있었다. 만리는 이를 인하여 인피하였는데, 그 내용에
"우원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뜻이 있었으나 염피한다는 혐의를 염려하였습니다. 김휘는 일가의 친함으로 우원의 처지를 위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지금 기회를 타 계획을 이루려고 장황하게 치계하여 조금도 헤아림이 없었으니 자신을 위하는 데는 잘 되었다고 하겠으나 신하의 처지로 보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 뒤에 김휘가 상소하여
"만리는 사피한 글에서 성을 내고 마구 온갖 가지로 침욕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만리가 그의 세력을 믿고 성질을 부려 남을 능멸하였습니다."
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성을 내어 다투니 물의가 그르게 여겼는데도 양사가 끝내 논박하여 바르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옥당이 차자로 논박한 것이다.

 

12월 7일 임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좌명(金佐明)을 예조 참판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최유지(崔攸之)·민주면(閔周冕)을 장령으로, 남구만(南九萬)을 헌납으로, 이무(李堥)·이상(李翔)을 지평으로, 이지무(李枝茂)·정창도(丁昌燾)를 정언으로, 김만기(金萬基)를 교리로, 정재해(鄭載海)를 주서로 삼았다.

 

12월 8일 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영릉(寧陵)의 석물(石物)에 벌어진 틈이 있어서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을 보내어 봉심(奉審)하였다. 다음날 돌아와서 아뢰기를,
"인지(寅地)의 죽석(竹石)이 서로 연결된 곳에 틈이 있으니 아마 지대(地臺)의 전석(磚石)이 꺼져서 그리 된 듯하며, 묘지(卯地)의 지대석도 틈이 있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틈이 난 곳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니 해조에게 날을 가리어 수리하도록 하였다.

 

12월 9일 갑인

관상감 제조 윤순지(尹順之)·민응협(閔應恊)을 잡아다가 추문하였다. 영릉을 봉심할 때, 이 두 사람이 모두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다가 재촉한 뒤에야 순지는 비로소 달려왔고, 응협은 끝내 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상이 크게 성내어 옥리(獄吏)에게 회부한 지 여러 날 만에 모두 파직시켰다.

 

12월 10일 을묘

대사간 남노성(南老星)이 패초(牌招)에 나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영돈녕 김우명(金佑明)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홍명하가 ‘신이 도총부(都摠府)의 직소(直所)에 있으면서 적간(摘奸)하는 중사(中使)를 불러서 양영남(梁穎南)의 형벌받은 것이 가벼운지 무거운지를 물었다.’ 하니, 신은 몹시 놀랍고 두렵습니다. 이지익(李之翼)이 중풍에 걸려 본성을 잃은 사람이 아니니 필시 중사는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 설령 신이 분수를 알지 못하여 이런 망령된 행동을 하였다 하더라도 지익은 곧 신의 종질입니다. 옥관(獄官)을 대하여 공공연히 말할 리는 분명히 없으니, 명하가 도사에게 들었다고 한 말에 신은 몹시 놀랍습니다. 신이 정말 이 일이 있었고 지익이 정말 도사에게 전해 들었다면 신과 지익은 당연히 그 죄를 받아야 됩니다. 만일 사실이 없는 것을 아첨하는 자료로 만들어 중신(重臣)에게 귀여움을 구하였다면 이 무리는 당연히 깊이 미워하여 아주 끊어버려야 됩니다. 어찌 신에게 손해나 이익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저 깜깜하게 무고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바꾸고 그대로 교외에 물러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세도(世道)가 이처럼 경박하니 매우 한심스럽다. 중사도 왕명을 받은 신하인데 어떻게 멋대로 부를 이치가 있는가. 이런 말을 한 자는 실로 국가를 가볍게 여기고 조정을 멸시하는 것이다. 마땅히 끝까지 조사할 것이니, 어찌 반드시 교외로 나가서 그의 뜻을 시원하게 해야만 하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삼가 부원군 김우명의 소의 말을 들으니 신은 매우 놀랍습니다. 신이 대궐 밖에서 대죄하던 날, 금부 낭청 이행일(李行逸)이 신에게 와서 지익이 추하게 꾸짖은 모습을 언급하고, 또 말하기를 ‘요사이 떠도는 말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하기에 신은 웃으면서 답하기를 ‘이처럼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말은 모쪼록 입에 걸지 말라.’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김좌명이 와서 신을 만났습니다. 신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행일이 전한 말을 대략 언급하였는데, 이는 인심이 맑지 못하여 이런 이야기를 지어낸 것을 개탄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뒤에 신이 행일에게 다시 묻기를 ‘전에 전한 말은 지익에게 들었는가?’ 하니, 행일이 말하기를 ‘이는 곧 요사이 떠도는 말일 뿐, 실상은 지익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대개 낭청이 전한 것은 당상에게 들은 바로서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과 좌명은 한 집안이니 들은 것을 언급하는 것은 보통 일인데 어찌 돌고돌아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했겠습니까. 모두 말을 조심하지 못한 소치이니 신의 본직과 겸대한 금오(金吾)를 파하여 공사(公私)를 편하게 하소서."
하니, 소를 들인 지 여러 날만에 비로소 비답을 내리어 사직하지 말도록 하였다.

 

지중추 송시열이 병으로 사직하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문병하게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소를 올려 사직하고 또 경연을 드물게 여는 것을 경계하자, 상이 후하게 비답하였다.

 

12월 11일 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하여, 삼남(三南)·기전(畿甸)·해서(海西)의 재해를 당한 읍에 재해를 입은 경중의 정도를 논하지 말고 거두어 들이지 못한 모든 환곡을 일체 감면하여 가난한 백성의 가슴에 맺힌 아픔을 조금 위로하고, 또 춘등(春等)에 거두는 쌀의 수량을 감할 것을 의논하게 하여 인심을 수습하고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여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고, 각도에 환곡 거두는 일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12월 12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3일 무오

정태화(鄭太和)를 영의정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충공 감사(忠公監司)로, 이진(李𥘼)을 병조 참의로, 김시진(金始振)을 참지로, 오시수(吳始壽)를 부교리로, 남구만(南九萬)을 이조 정랑으로, 김만기(金萬基)를 헌납으로 삼았다.

 

정언 정창도(丁昌燾)가 아뢰었다.
"이민구(李敏求)가 죄를 받고 폐고된 지 거의 30년입니다. 이 막대한 경사를 만나 성대한 은택을 두루 널리 입었는데 어찌 중죄는 모두 용서하면서 유독 수용하여 서임하는 것을 아낄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침에 정론(停論)하자는 뜻을 회의석상에서 발표하였는데 동료들이 굳이 고집하며 따르지 않으니, 구차스럽게 뜻을 같이하지 못하므로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체직하소서."

 

정언 이지무(李枝茂)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정언 정창도가 이민구의 일에 대하여 정계(停啓)하자는 뜻으로 회의석상에서 발언하므로 신과 헌납 남구만이 모두 말하기를 ‘양사가 함께 일으킨 의논을 한 사람의 소견으로 고칠 수 없다.’고 하자, 창도가 곧장 일어나 나가서 인피하였습니다. ‘임명장을 주어 서용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느니, 성대한 은택을 두루 널리 입어 중죄도 모두 용서하였다.’는 등의 말로 구원하는 바탕으로 삼고,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이미 임명장을 주었으니 의당 차례대로 서용해야 된다.’고 말한 것은 말의 뜻이 근거가 없어서 신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창도가 이미 이것을 이유로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마음 편하게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장령 민주면(閔周冕)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국가가 대관을 대우하는 사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 말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가볍게 죄벌을 가하지 않는 것은 언로를 열기 위해서입니다. 신이 이지익의 나문에 대하여 성상께서 반드시 통렬히 밝히어 처치하려는 것인 줄을 진실로 압니다. 다만 지익의 말을 생각해보니 곧 대간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잘잘못이나 내막은 우선 버려두어 논하지 않고 일을 말한 대간을 잡아다가 문초하여 은밀한 사정을 캐내었으니, 이는 진실로 여태까지 없던 일입니다. 애당초 잡아다가 문초한 것도 지극히 온당치 못한데 더구나 지금 공초를 바친 뒤에 더욱이 구속할 만한 일이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신이 오늘 석방하기를 청하자 하였으나 동료들은 원정(元情)을 이미 바쳤으니 상으로부터 의당 처치가 있을 것인즉 논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대각에 잘못 머물면서 말이 미더움을 받지 못하니 어떻게 구차스럽게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12월 14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이무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장령 민주면이 이지익의 석방을 청하자고 회의석상에서 발언하였으나, 신은 생각하기에 지익의 일은 범연한 풍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이미 공초를 받아 입계하여 미처 판하(判下)되지 않았는데 앞질러 석방을 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고 말하자, 주면이 곧장 일어나서 나가버렸습니다. 인피한 말을 보니, 그 가운데 ‘상으로부터 의당 처치함이 있을 것이다.’는 한 조항은 원래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도 실없는 말을 더하여 드러나게 배척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12월 15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홍문관이 대간의 일을 처치하면서, 교리 민유중(閔維重)과 수찬 이익(李翊)은 정창도를 당연히 체직시켜야 된다고 하고, 부교리 오시수(吳始壽)와 수찬 홍주삼(洪柱三)은 체직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각자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경은 원로 대신으로서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왜 염려하지 않는가. 어려운 걱정이 눈에 넘쳐나고 변괴가 갖가지로 일어나서 마치 큰 내를 건널 적에 나루가 없는 것 같은데 경이 만일 나오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 누굴 의지하란 말인가. 지난번 경이 사직할 적에는 내가 가볍게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끝내 억지로 부응했던 것은 경의 뜻을 편안하게 하려 했던 때문이었다. 지금 옛 직임을 도로 준 것에서 경은 나의 뜻을 보았을 터인데 어찌 이를 생각하지 않고서 도리어 조리없이 함부로 지어낸 말을 이끌어 오늘의 혐의로 삼는단 말인가. 빨리 올린 소장을 찢어버리고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는데, 태화가 서필원의 무거운 배척을 받자마자 출사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이와 같이 타이른 것이다.

 

영돈녕 김우명이 교외에 나가 있으면서 상소하여 다시 앞의 일을 거듭 말하고 사직을 청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그전 비답에서 나의 뜻은 벌써 말하였으니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들어와서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명하도 상소하여 스스로를 변명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행일의 말이 이와 같은데 경은 왜 인혐하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16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심지원이 아뢰기를,
"요사이 지방에는 곳곳마다 전염병이 대단히 성하고, 또 양남(兩南)의 장계를 보니, 기근이 몹시 참혹하여 구제할 계책이 전혀 없습니다. 영남의 흉년이 특히 심하여 영동(嶺東) 곡식 1만여 섬을 운송하여 진휼한다 하더라도 두루 미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다시 영동의 산화전(山火田)에서 거둔 세곡을 더 운송하여 구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원이 또 아뢰기를,
"기전(畿甸) 백성들도 굶주리는 사람이 많으니 지금도 이러한데 더구나 내년 봄은 오죽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선혜청에서 내는 태복(太僕)078)  의 말먹이는 곡식이 8천여 섬에 이를 만큼 많다고 합니다. 수천 섬을 떼내어 굶주림을 구휼하는 자본으로 삼고 소와 말은 서북도(西北道)의 각고을에 나누어 기르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복으로 하여금 그 숫자를 따져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정관(政官)이 상피(相避)하는 법에는 사촌으로 한정을 삼았으나, 만일 출계(出繼)하면 사촌이라도 간혹 임명된 자가 있었으니, 명백히 규식을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법전(法典)에 만일 ‘출계하면 상피가 없다.’고 했으면 진실로 임명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찌 상피하는 혐의가 없겠는가. 출계를 물론하고 일체 상피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사헌 홍중보와 대사간 이은상이 함께 이민구의 서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중보는 민주면을 체직하고 이무는 출사시키기를 청하고, 은상은 정창도를 체직하고 이지무는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모두 따랐다.

 

정윤(鄭錀)을 장령으로, 김만균(金萬均)을 교리로, 이동명(李東溟)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납 김만기가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삼가 보건대 요사이 서무(庶務)의 결재와 장주(章奏)의 응답은 대부분 지연되고 대각의 주장과 유신의 진달은 들어주는 일이 적습니다. 그리하여 엄한 전교는 실정 밖에서 나오고 사판에서 삭제하는 벌이 언관에게 미치므로 대각이 쟁집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끝내 윤허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유형은 지금 낱낱이 진술할 수가 없으니, 예컨대 이민구의 서명을 도로 거두라는 청을 아직껏 허락하지 않으시니 신은 더욱 안타깝습니다. 국가가 민구를 수용하여 서임하는 것은 강도(江都)의 일079)  을 잊는 것입니다.
아, 국사가 오늘 같은 지경에 이른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적은 그 살점을 다 먹을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를 중간 지역에 양이(量移)한 것은 조정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청(淸)나라 사람과 교통하여 우리 나라를 위협한 모습은 차마 말하지 못할 점이 있어서 선왕도 일찍이 수용하여 서명하였다가 곧 다시 중지한 것은 어찌 이 때문이 아닙니까. 양사의 아룀에는 그 죄를 조금 말하고 이 의리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성상을 위하여 진달하는 것입니다. 아, 모든 혈기있는 자는 누가 즐겨 민구와 더불어 함께 맑은 조정에 있기를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대각의 위치에 있으면서 자기의 견해를 지나치게 고집하여 공론을 막고 정당하지 않은 말을 펼쳐서 성상의 귀를 어지럽힌 것은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전하도 이 때문에 온 나라의 공론을 머물려두고 어렵게 여긴 것이 아닙니까. 산릉(山陵)의 봉심(奉審)에 즉시 나오지 않은 관상감 제조는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대문관(對問官)을 두어 죄를 따지어 다스리는 것은 규례가 있기 마련인데, 정원으로 하여금 힐문하게 하고 문계(問啓)가 들어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내시를 보내어 그 말을 들은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한 것입니다. 혹시 정원의 공초(供招)를 받는 신문은 내시가 참여하여 듣는 것이 필수적이어서 그런 것입니까? 혹시 정원의 서계가 내시가 전달하는 것과 같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까? 이를 들은 모든 이들이 의아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일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므로 감히 이렇게 진달하니, 성명께서는 살피어 받아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 끝에 한 말은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조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상소하니,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지극히 못나고 용렬하여 관직을 더럽힌 지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전조(銓曹)의 보좌역을 더럽힌 것도 지금 또 세 번에 이르렀으니, 패배를 당하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이조(李稠)의 일은 신이 간여할 바가 아니지만 신이 이미 인사 행정에 참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힘껏 중지시키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그 죄를 사양하겠습니까. 옥당의 차자는, 대관의 인피로써 신을 구하려 한다 하여 탄핵하였으니, 신이 죄인으로 배척을 받아야 함은 더욱 당연합니다. 직명을 삭탈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2월 17일 임술

교리 민유중(閔維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전일의 차자 가운데 이지익을 잡아다가 문초한 것은 국가의 체면에 손상이 있다는 것으로써 말하였었는데 지금 헌부가 갑자기 의논을 주장하는 대관을 체직하였습니다. 일의 곡직과 허실을 물론하고 정사를 말하는 대관을 형리에게 내리어 신문하는 것이 어찌 성조(聖朝)의 잘못된 거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각의 체면에서는 당연히 힘껏 간쟁하여 불가함을 논하여야 되는데, 구차한 그릇된 의논이 그 사이에 행하여져서 알맞지 않은 처치를 하게 하여 물의를 크게 거스렸으니 신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였고, 수찬 이익도 상소하여 홍중보가 민주면을 체직하라고 청한 잘못을 진술하니, 중보가 인피하였다. 부교리 이민서가 상차하니, 그 대략에 아뢰기를,
"이지익을 형리에게 내린 거조는 물정을 매우 편안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체로 지익은 정사를 말하는 대관이니 조정의 처치는 그 말에 나아가 허실을 조사하여 그러한 사실이 없으면 그냥 둘 뿐입니다. 어찌 가두어 놓고 힐문할 수 있습니까. 치대(置對)080)  의 말은 일의 체모를 돌아보지도 않고 분한 말로 널리 증거를 끌어대어 반드시 이기기를 구하여 스스로 변송(辨訟)하였으니 조정의 수치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 가두어 놓고 신문한 것이 벌써 잘못된 거조이니 하루를 갇혀 있는 것으로도 손상됨이 점차 커지는 것입니다. 전 장령 민주면의 석방을 청한 뜻은 실상 공공의 의논인데, 대사헌 홍중보는 국가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체차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어긋난 처치가 이 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또 옥당의 처치가 밤을 지낸 것은 본디 고의로 지연시킨 데에 비교할 것이 아닌데도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은 별도로 의견을 내어 까닭없이 추문하기를 청하 하면서 시비를 분별하지 않고 싸잡아 서로를 배척하였으니 이 역시 일을 논하는 체면이 아닙니다.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지익을 석방하고 양영남(梁穎南)과 사공과 곁꾼 등을 다시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지익을 형리에게 회부한 것은, 상이 영남을 여러 차례 엄히 신문하였으나 이일상(李一相)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발명하였기 때문에 꼭 그 일을 끝까지 조사하여 밝히려고 지익을 잡아다가 문초하도록 명한 것이다. 지익의 공사(供辭)에, 먼저 일상이 영남을 꾀어 거짓으로 자복하면서 조목조목 공격하고 배척하기를 마치 눈으로 본 것과 같이 하였음을 말하고, 다음에 홍명하가 일상과 친하게 사귀었기 때문에 옥사(獄事)를 다스릴 적에 고의로 말을 많이 하고 또 최일(崔逸)·민광소(閔光熽)·이상고(李尙固) 등을 끌어들여 증거를 삼으면서 끝내 실상을 밝혀내지 못한 것을 말하였다. 공사가 이미 들어가자 여러 날 궁중에 머물려 두고 회부하지 않다가, 이때에 하교하기를,
"이지익은 놓아보내고, 지익의 공사를 가지고 영남 등과 색리·사공·곁꾼들을 엄한 형벌을 내리고 문초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8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이무가 패초에 나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종실(宗室)에게 강서(講書) 시험을 보였다.

 

의금부 도사 이행일을 잡아다가 문초하였다. 행일이 공초에서 일컫기를
"홍명하가 스스로 그 일을 말하였고 저는 들었을 뿐이며, 명하가 김좌명에게 전한 것은 곧 함부로 지껄인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하여 명하를 헐뜯었으나 참고하고 증거할 것이 없어서 밝힐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뒤에 행일은 끝내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12월 19일 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가 【소현 세자의 사위.】  죽었는데, 그 집이 몹시 가난하여 초상 치를 방도가 없다고 하니, 듣기에 참담하다. 선조(先朝)의 보살핀 은혜가 여러 부마에게도 줄지 않았는데 이것을 뒤돌아 생각하니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해조에게 돌보아 줄 것을 참작하여 선왕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던 뜻을 본받게 하라."

 

헌납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부교리 오시수, 수찬 홍주삼이 지난번 옥당이 간원을 처치할 때에 야단을 일으키며 소를 올리어 이민구를 보호하고자 하였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지익의 공사(供辭) 가운데 인용한 말의 근거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 이때까지 구문하는 거조가 없으니, 옥사를 다스리는 체면에 자못 자세하지 못합니다. 유학 이상고와 부사 민광소와 전 부사 최일 등을 아울러 잡아다가 문초하소서."
하니, 모두 옥리에 회부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따뜻한 말로 타이르고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홍명하가 잇달아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자, 사직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명하가 교외로 나갔다.

 

12월 20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1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옷이 얇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2일 정묘

상이 침을 맞았다.

 

정만화(鄭萬和)를 승지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간으로, 곽제화(郭齊華)를 정언으로, 이관징(李觀徵)을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24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동래 부사 이원정(李元禎)이 치계하였다.
"대마도에 불이 나서 타버린 여염집과 사찰이 2천여 호이고 불길이 3일 낮밤을 끊이지 않았다고 왜인이 특별 차사를 보내어 통보하면서 인하여 물품의 기증을 요구하기에, 우리 나라에 흉년이 들어 남을 구휼할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습니다."

 

12월 25일 경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이관징이 인피하였다.
"신은 타고난 천성이 어리석고 견문이 좁아서 눈앞의 논의도 시비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데 더구나 까마득한 일이겠습니까. 이민구가 죄를 입어 폐고된 지가 지금 25년이 되었습니다. 신은 아득한 후생으로서 강도에 관한 일의 전말은 알지 못합니다마는, 지금 당장의 서명(敍命)을 도로 거두라는 의논은 비단 강도의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하들이 지은 범죄가 정말 이와 같으면 신이 어리석지만 어찌 보는 바가 서로 틀릴 이치가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민구에 관한 일은 모두 인조조에 있던 것이어서 경중을 자세히 따지는 것이 성조(聖祖)만은 못합니다. 그런데 양이한 뒤에 다시 은명을 내리어 석방을 시키고 직첩을 차례로 주었습니다. 양사가 부당함을 논하여 고집하는데도 끝내 윤허하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 영원히 버리지 않으려는 것으로서 필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신 한흥일(韓興一)이 강도의 일을 목격하여 곡절을 자세히 아는데도 헌장(憲長)의 신분으로 정론(停論)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뒤에 연신도 서명을 도로 거두라는 뜻으로 잇달아 진달하였으니, 그때 논의가 참작에서 나왔다는 것을 역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은 결코 자신의 소견을 굽혀가면서 구차스럽게 영합할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부호군 여증제(呂曾齊)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시고 뜻과 기개가 예리하시니 기운이 떨어진 환후는 염려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즉위하신 이래로 정사에 관계된 모든 것이 일체 지연되어 소장의 비답도 여러 날 동안 내리지 않으시고 아뢴 일은 혹 달을 넘기기도 하니 시일이 변하면 일의 정세도 잘못되게 마련입니다. 위복(威福)의 행함이 오로지 상에게 있지 않으며 덮어버리는 습관이 또 아래에서 고질화되었습니다. 심지어 조정의 논의는 확실하지 않고 사사로운 욕심을 서로 겨냥하여 간관이 논한 것을 헌관이 그르다 하면 전하는 그르다는 것을 윤허하고, 헌관이 그르다는 것을 옥당이 옳다고 하면 전하는 또 그 옳다는 것을 윤허합니다. 성상의 가슴에는 어찌 일정한 표준이 없이 옳다고 말하면 옳다 하고 그르다고 말하면 그르다 하여 반드시 아랫사람들의 견해를 시험하려 합니까. 그러다가 끝에 가서 일을 끝낼 적에는 갈라서 분석하는 단서가 적으니, 옳고 그름이 이와 같은데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후하게 답하였다.

 

대사간 민정중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요즈음 이민구의 일로 시비가 분분하여 조정이 몹시 편안하지 못합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민구의 일은 상께서 오랫동안 대각의 논계를 따르지 않은 까닭에 날마다 야단이 일어납니다. 의당 윤허하여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소서."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대사헌 김좌명이 고 상 이경여가 민구의 수용 서임을 청한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대개 경여가 애당초 역사를 편수하는 일로써 민구의 석방을 청하였으나 그 뒤 공론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국사를 편수하게 할 수는 없다 하였기 때문에 경여가 다시 차자를 올려 끝내 도로 거두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강도의 일은 우선 접어두어 논하지 않더라도 민구가 유배지에 있으면서 정명수(鄭命壽)의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사로잡혀 가서 요직에 앉은 자이다.】  처제를 첩으로 거느리고는 그의 세력을 빌리어 조정을 협박하면서 양이를 꾀하였습니다. 인조 대왕이 그 실정을 미워하여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명수가 서로(西路) 죄인의 석방을 청한 것은 민구에게 뜻이 있는 것인데 경들은 아는가?’ 하였으니, 이 일은 더욱 온 나라가 함께 분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하였다. 정언 이지무(李枝茂)가 이어서 거듭 논하고 서임의 명을 거두라고 청하자,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요사이 제신의 장주(章奏)에 대한 비답을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또 상께서 수응(酬應)하는 즈음에 일찍이 분명한 시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미 갑에게 윤허하고 또 을에게 윤허하니, 꼭 일에 따라 통렬히 분변하여 그릇된 것을 배척한 뒤에라야 국사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증제가 상소 가운데에서 말한, 헌부가 옳게 여기는 것을 전하도 옳게 여기고 옥당이 옳게 여기는 것을 전하도 옳게 여긴다고 말한 것은 홍중보를 처치한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원소(原疏)를 보지는 못했으나 필시 이를 위하여 꺼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나도 불가함을 알았기 때문에, 지난날 인대했을 때 내가 말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민유중이 인혐한 일이 있어서 수답(酬答)하는 즈음에 우연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였다.

 

12월 26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 3경에 유성이 자미서원(紫微西垣)에서 나왔다.

 

조형(趙珩)을 평산(平山) 금암역(金巖驛)에 유배하였다.

 

12월 27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삼남(三南)이 세폐(歲幣)로 바치던 면포를 면제하였다.

 

12월 29일 갑술

호남의 담양부(潭陽府)에 지진이 일어났고, 전주부는 대낮이 깜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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