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6권, 현종 3년 1662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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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을해

청(淸)나라가 연호를 강희(康熙)로 바꾸었다.

 

밤에 목성(木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1월 2일 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산(嘉山)·수안(遂安) 두 현(縣)을 회복하여 군(郡)으로 만들었다. 과거에 강상(綱常)에 죄를 지은 사람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강등시켜 현으로 삼았다가 이때에 기한이 차서 복호(復號)한 것이다.

 

유계(兪棨)를 이조 참의로,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오준(吳竣)을 판의금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집의로 삼았다.

 

강원 감사가 치계하여 ‘간성 군수(杆城郡守) 권영(權坽)이 진곡(賑穀) 2천여 섬을 별도로 준비했다.’고 하자, 가선(嘉善)으로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연신(筵臣)이 너무 지나치다고 논하니 개정(改正)하였다.

 

1월 3일 정축

황해 감사가 치계하여 본도의 기근이 든 실상을 말하고 서울에 운반할 쌀 5천 5백 섬을 덜어내어 구휼하는 밑천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장계(狀啓)를 비국에 회부하니, 비국은 ‘본도의 원곡(元穀)과 관향곡(管餉穀)을 통틀어 모두 27만여 섬인데 금년에 모두 다 바치지 못하지만 역시 이를 옮겨서 구휼하기에 충분하다. 상납할 1만여 섬의 쌀에서 반이나 유치시키려고까지 하니 몹시 타당하지 못한 일이다.’ 하고 방계(防啓)하자, 허락하지 않았다.

 

1월 4일 무인

영의정 정태화가 상차하기를,
"해마다 흉년과 전염병이 들어 사망자가 잇따르고, 현재 천문(天文)이 경계를 알리며 변고가 사뭇 일어나니, 내일 조참(朝參) 때에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전남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치계하여 본도의 기근이 든 실상을 아뢰고, 재해를 더욱 심하게 입은 고을의 전세(田稅)는 탕감하고 조금 풍년이 든 고을의 전세는 알맞게 바치고 유치하여 본도의 구휼할 밑천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비국에 이 장계를 회부하니, 비국이 아뢰기를,
"조세를 거둔 장부가 미처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먼저 본도의 비용을 청하는 것은 사뭇 부당합니다. 한편으로 장부를 서둘러 올려 보내도록 하고 우선은 모집한 곡식을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5일 기묘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기근이 든데다 또 전염병이 심하여 8도의 민생이 앞으로 살아남는 자가 없을 터인데 요즈음 각읍의 수령들이 염증을 내어 체직을 꾀하는 일이 많이 있으니 엄하게 단속하여 금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전남 감사가 치계하여 ‘수령으로서 관직을 버린 자는 변경의 장수를 회피한 형률을 적용하자.’고 청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염피한 수령은 당연히 무거운 형률을 적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감사가 그 죄의 경중을 헤아려 보고 가볍게 체직하지는 말라."
하였다. 판중추 정유성이 아뢰기를,
" 병조판서 홍명하가 성밖으로 물러간 지 벌써 오래되어서 출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체직을 허락하지 않으면 앞으로 닥쳐오는 도목 정사가 점차 지연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신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 태화는 아뢰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기는 하나 서전(西銓)001)  은 중책이니, 가볍게 체직시킬 수 없습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명하가 이행일(李行逸)의 일에 여러 말을 늘어놓으면서 시비를 다투어 마치 서로 겨루는 듯이 하였으니, 이는 명하도 잘못이 없지 않은데 어찌 갑자기 나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사간 민정중은 아뢰기를,
"이 일의 결말이 나기 전에 서둘러 명하를 체직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고, 교리 이민서는 아뢰기를,
"한때의 뜬 말로 인하여 어떻게 중신(重臣)을 가볍게 체직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간관(諫官)과 유신(儒臣)의 말이 이와 같으니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는가?"
하니, 태화는 아뢰기를,
"신의 뜻도 그러합니다."
하고, 민서는 아뢰기를,
"이행일의 일을 오랫동안 처결하지 못하였는데 현재 대신과 여러 재상이 모두 좌우에 있으니 공론을 살펴 속히 처분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태화는 아뢰기를,
"양 쪽의 말을 상이 이미 다 환히 살피셨으니 만일 조목조목 물으시면 아래에서 의당 진달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사리로써 미루어 보건대 명하는 필시 이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행일의 일은 매우 형편없습니다."
하고, 정중은 아뢰기를,
"이는 겁이 나 실성하여 죽을 처지에서 삶을 구한 일입니다. 전에 선왕이 정선흥(鄭善興)·이송령(李松齡) 등의 일에서 말의 근거를 캐내지 않은 채 곧장 문 밖으로 내쫓았는데, 처리를 당연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은, 병판은 필시 말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행일의 소행을 분명히 가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이렇게 추문하는 일을 거행한 것이다."
하였다. 정중은 아뢰기를,
"근거없는 말을 가지고 어떻게 그 실상을 캐내겠습니까."
하고, 우상 원두표는 아뢰기를,
"명하는 필시 이와 같지 않았을 것이지만 행일을 귀양지로 쫓아내는 것도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행일이 정말 이 말을 했다면 중죄를 입더라도 어찌 애석하겠습니까."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아직 명백히 증거할 만한 것이 없는데 먼저 무거운 법을 가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중은 아뢰기를,
"좌상 의 말이 옳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이일상의 일도 아직 결말을 짓지 못하였는데 또 이 일이 있으니, 이것으로 인하여 조정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고 거리에 전파되는 말도 매우 시끄럽습니다. 국가에 수치가 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민서는 아뢰기를,
"시비와 곡직을 통렬히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이와 같은 떠도는 말은 필시 부리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니 대신들에게 물어서 속히 선처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지원은 아뢰기를,
"신과 명하가 함께 조정에서 벼슬한 지 오래입니다. 그의 평생 마음씀과 행한 일을 추적해보면 신은 그가 반드시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이미 다 진술하였으므로 지금 감히 덧붙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신이 명하도 잘못이 없지 않다고 말한 까닭은, 대체로 행일이 말한 것이 있더라도 명하는 당연히 이것을 남에게 전하지는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명하가 조금은 교묘히 꾸민 일이 있다고 일렀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 윤강(尹絳)은 아뢰기를,
"명하의 사람됨으로 보아 반드시 이와 같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이미 유언이라고 한다면 부리와 원인을 조사해 내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못 속의 물고기를 자세히 아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이 일을 꼭 분명하게 처리하려고 하면 앞으로 면질(面質)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사체에 매우 부당합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정중이 진달한 내용이 자못 의견이 있으니 정선흥 등의 예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에 따라 처리하라."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지방의 부자들이 간혹 버려진 어린아이를 데려다 길러서 노비로 삼으려고 하는데 조정에서 정한 사목(事目)이 없기 때문에 후일의 걱정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히 머물게 하여 길러주지 못한다 합니다. 해청으로 하여금 사목을 만들어서 급히 반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민서가 아뢰기를,
"올해의 기근은 실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달려 있어서 그 위급함이 전쟁보다도 심합니다. 이때에 대단한 조치가 있지 않으면 다시 바랄 만한 희망이 없습니다. 삼남의 공부(貢賦)를 비록 덜게 하였으나 국가의 경비를 절약하지 않으면 동쪽을 깨뜨려서 서쪽을 보완하는 꼴이어서 끝내 구차스럽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용도에서 3분의 2를 덜어내고 또 그 1분에 나아가 경중을 참작하여 조금 변통을 가하며, 각 아문의 오래 저장한 쌀과 베를 비용을 따져 지출하여 써서 다시 지방을 침탈하지 않게 하소서. 그런 다음에 죽을 지경에 있는 백성을 조금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관계됨이 극히 중하니, 대신과 삼사(三司) 및 담당한 신하에게 회의하여 결정해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속히 회의하도록 하였다. 유성은 아뢰기를,
"절감하는 방법은 검소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국혼(國婚)할 때 주선(珠扇) 1장의 값이 1천 금에 이른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나 이 뒤에는 영원히 그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부채 한 자루의 값이 1천 금이나 된다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 값을 해조에 부쳐서 경비에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것이 지금 막 처음으로 실시된 일이라면 바꾸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선조(先朝)의 구례(舊例)에 관계되므로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요즈음 듣건대, 해서(海西)의 유민들은 관서(關西)로 많이 가고 기전(畿甸)의 유민들은 영북(嶺北)002)  으로 많이 간다고 하니, 대체로 영북은 참으로 풍년이 들었고 관서도 기전보다 넉넉한 때문입니다. 고대에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기는 일이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시행할 수는 없으나, 영북·관서에 신칙하여 원곡(元穀)을 얻어먹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 뜻을 양도의 감사에게 하유하도록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지방의 굶주린 백성이 떠돌다가 죽은 자에 대하여 수령이 죄책을 받을까 염려하여 사실대로 갖추어 보고하지 않습니다.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각 고을에 신칙하여 떠돌아다니다가 죽은 모든 사람을 낱낱이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는 잇달아 치계하여 조정이 지방의 형편을 모두 알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하유 가운데 이 내용을 첨가하게 하였다. 수찬 이익이 아뢰기를,
"근래 장법(贓法)이 엄하지 못하여 선조로부터 정배(定配)되면서 유배지에서 죽도록 한 자들도 석방하는 조치를 입었으니, 극히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구를 두고 말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심총(沈棇)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일찍이 선조에 유배지에서 죽도록 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에 이런 전교가 있었다면 심총을 도로 유배지로 보내라."
하였다. 이익이 또 아뢰기를,
"이민구의 일은 상이 벌써 명백하게 가리어 처치하였는데 지난번 지평 이관징(李觀徵)이 장황한 말로 인피하여 시비를 현란하게 하였으면서도 물러나 기다리지 않았으며, 아직껏 자처하는 조처가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판의금 오준(吳竣)이 노병(老病)으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1월 6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회령 개시 차사원(會寧開市差使員) 온성 부사(穩城府使) 유시정(柳時禎)을 잡아다가 문초하였다. 회령에 토관직(土官職)의 엄복기(嚴復起)란 자가 있는데 청(淸)나라 말을 잘하고 또 의기가 있어서 청나라 사람과 교역할 적마다 그들의 요구를 힘껏 막아 그들의 욕심을 멋대로 부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에 시정은 서로 불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꾸짖어 쫓아내니 청나라 사람들이 더욱 함부로 굴었다. 감사가 치계하여 보고하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기를,
"신이 불측한 말을 들었으니 임금을 속인 죄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모두 환히 알고 있는데 많은 말을 왜 하는가. 조정이 벌써 처치하여 경에게는 별로 혐의할 것이 없으니 속히 들어와서 본병(本兵)003)  을 오래 비우는 염려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호서(湖西)의 음성현(陰城縣)을 혁파하니, 전패(殿牌)가 변을 당한 때문이었다.

 

호서의 회인현(懷仁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1월 8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성태구(成台耉)를 집의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수원 부사로, 윤 강(尹絳)을 판의금으로, 민여로(閔汝老)를 정언으로, 정익(鄭榏)을 판결사로 삼았다.

 

1월 9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상참례를 받았다. 마치고 나서 간신과 유신이 전에 올라 일을 아뢰었다. 대사간 민정중이 아뢰기를,
"경기 여주(驪州)에 지진이 일어난 변고가 있었는데도 도신(道臣)이 즉시 아뢰지 않았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감사 정지화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이민서가 진달한 ‘바로 지금의 형편은 포위당한 성안과 다름이 없으니 온갖 용도를 일체 절감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제일 급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지탱하여 보전할 수 없습니다."
하니, 교리 이민서가 아뢰기를,
"절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벌써 다 절감하였으나 공물(貢物)은 어공(御供)에 관계되므로 반드시 상께서 적당히 절감하기를 기다린 뒤에 봉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회의하게 한 것은 이런 일이라도 헤아려서 처리하려는 것이다."
하니, 민서가 아뢰기를,
"상의 뜻이 비록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일의 체모로 볼 때 진실로 아래에서 멋대로 절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일을 어찌 평상시의 사체로 거리낄 수 있겠는가."
하니, 교리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어공 중에도 긴요한 것과 덜 긴요한 것이 있으니 긴요한 것은 참으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것은 절감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민서가 아뢰기를,
"서둘러 절감하였다가 한갓 책임만 메꾸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신의 뜻은 상께서 경중을 살펴서 큰 숫자를 작정하여 진실로 절감할 만한 것은 반드시 3분의 2로써 한정을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유중이 아뢰기를,
"평상시로 말하자면 진실로 절감할 만한 것이 없지만 현재의 형편으로는 평상시의 규례를 생각지 않아야 어떻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흉년에 술을 금하는 것은 곧 법전(法典)에서 당연히 시행하는 일입니다. 어공을 이미 파하도록 하였으니 예컨대 태학의 양현고(養賢庫)에서 쓰는 술도 중지하도록 하며, 또 지방에서 사객(使客)을 접대할 적에도 술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일을 신칙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상(供上)하는 술은 이미 중지하게 하였다. 두 자전에 공상하는 술도 금년에 한하여 임시로 중지하고, 중외에 신칙하여 일체 술을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서가 다시 염분(鹽盆)과 어전(漁箭)의 혁파를 거듭 청하며 아뢰기를,
"영원히 폐지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금년에 한하여 세금을 거두지 않으면 역시 조금은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니, 유중이 아뢰기를,
"연한을 정하여 임시로 폐지하는 것이 대단한 도움은 못 된다 하더라도 백성들은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폐지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폐지한다고 하면 영원히 폐지해야지, 어찌 이런 고식적인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충공 감사 오정위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인견하여 위임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말로 타일렀다. 정위가 아뢰기를,
"본도에 있는 내수사와 제궁가와 각 아문의 염분을 금년에 한하여 이급할 것을 허락하면 다른 데 팔아 넘겨 구휼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내수사에 속한 염분으로 봄에 구운 소금은 구휼하는 데 옮겨 쓰고, 그밖의 염분은 비국에 말하여 적당하게 헤아려 처리하라."
하였다. 정위가 또 서산(瑞山)·태안(泰安)의 소금·철·무명을 구휼에 옮겨 쓰기를 청하자, 상이 해조에 말하라고 하였다. 승지 심세정이 아뢰기를,
"듣건대 송시열의 온 집안이 굶주림을 당하여 심지어 서적을 팔아 입에 풀칠을 한다고 합니다. 보통 백성도 구휼하는데 더구나 이 사람에게 어찌 다급함을 구하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제급(題給)하게 하라."
하였다.

 

1월 10일 갑신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이 졸하였다. 제현은 곧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의 손자로, 12세에 의빈(儀賓)에 뽑히어 여러 해 깊은 병을 앓다가 이때에 졸하니 나이가 21세였다. 당시 여러 공주가와 옹주가에서 서로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모든 일을 궁중과 비슷하게 참람히 하였다. 제현이 죽은 뒤에 유성이 안에 들어가 휘장과 기구들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하기를
"사치와 참람스러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나의 손자가 어찌 일찍 죽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간 정계주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이행일의 일에 대하여 지극히 한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애당초 행일이 말하고 말하지 않고는 신이 그 곡절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행일이 대명할 때에 신이 언젠가 지나면서 만나 묻기를 ‘외인들이 혹 말하되 그대가 스스로 홍명하에게 전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는데 그러한가?’ 하니, 행일이 답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오가며 떠도는 말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당상(堂上)과 낭청(郞廳) 사이에 들은 것을 대략 언급하였다. 이는 떠도는 말을 들은 것이지 이지익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인하여 묻기를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단지 실제를 따를 뿐이다.’ 하니, 행일은 쾌히 응락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공사(供辭)를 보니 신에게 말한 것과는 전혀 같지 않으니, 말을 바꾸어 거짓을 꾸몄으나 그 사실이 분명하여 감출 수가 없습니다. 비단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장관을 죄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실상 임금의 귀를 속인 것에 관계되니 귀양의 법을 시행하여 통렬히 끊어버리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어찌 마음 편히 문밖에서 편히 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그의 말을 직접 들었고 또 간관의 지위에 있으나 사세에 어려운 형편이 있고 또 병이 있어서 결코 공무를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실상을 근거로 논계하여 그 죄를 바루지 못하였으니 잘못이 또한 큽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간 민정중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등대했을 적에 이행일의 일을 함부로 진달한 일이 있었는데 성상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서 참작하여 처치하였습니다. 지금 정계주의 인피한 말을 보니, 행일이 상관을 무함하고 임금의 귀를 속인 실상을 갖추어 진술하고 조정에서 시행한 벌이 너무 가볍다 하였으니, 신은 몹시 놀랍습니다. 행일의 앞뒤로 변경한 말에 마음먹은 것이 음험하고 교활함은 신도 알았습니다마는, 단지 고치고 바꾸어 속인 것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정상을 말하자면 귀양을 보내는 것도 가볍지만 대체를 논하자면 끝까지 다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의대(議對)할 즈음에 다시 고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동료가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들어서 이렇게 법을 집행하자는 의논을 하였으니 신이 가벼운 벌을 따르자는 청을 경솔하게 꺼낸 것은 실로 잘못이 있습니다. 어찌 감히 마음 편히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였다.

 

1월 11일 을유

헌부가, 소명하는 패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계주는 체직하고 민정중은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고, 인하여 이행일의 죄를 논하고 먼 곳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다. 또 홍명하(洪命夏)는 대관의 신분으로 입을 삼가하지 않아서 스스로 아랫관리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여 사체를 손상시킨 점을 논하고 무겁게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교리 김만균(金萬均)을 호남에 보내어 여제(厲祭)를 지냈다.

 

지평 이익(李翊)이 상소하여 사직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1월 14일 무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5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윤비경(尹飛卿)을 승지로, 이만영(李晩榮)을 사간으로, 이익을 이조 정랑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수찬으로, 이정(李程)을 지평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참찬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집의로, 송시철(宋時喆)을 헌납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교리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용동궁(龍洞宮)이 회양(淮陽) 한 면의 산전(山田)을 절수하였는데 주인있는 백성의 밭이 그 가운데 많이 들어갔습니다. 호조가 복계하여 본주인에게 도로 돌려주기를 청하였는데, 양안(量案)에 따라 시행하라고 판부(判付)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계묘년004)   양전(量田) 후의 가경전(加耕田)이 절수한 가운데 섞여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가경전이라고는 하지만 거주민이 경작한 지 벌써 60년이 지났고 또 세금을 거두고 부역을 바친 토지이니 실상은 원전(元田)과 다름이 없는데도 하루아침에 잃게 되어 거주민이 생업을 잃었으니 결코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또 차인 이경남(李景男)이 규정 외에 징수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괴로워합니다. 이렇게 큰 흉년에 이와 같은 조처가 있어서는 안 되니, 절수한 밭은 혁파하고 경남은 해조에게 구속하여 치죄하게 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경남의 폐단을 일으킨 죄만을 다스리게 하였다.

 

1월 16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경비의 절감에 관한 문서를 가져다 바치면서 아뢰기를,
"절감에 관한 일을 낱낱이 서계하오니 상께서 보시고 미진한 곳이 있거든 조목조목 물으시면 탑전에서 아뢰어 결정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여러 유사들과 익히 강론하여 정한 것이니 필시 미진한 염려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절감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한결같이 남한 산성으로 나가던 처음에 한 것과 같이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른바 잡직을 감봉하는 따위는 어떤 인원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바로 화원(畵員)과 액정서(掖庭署)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사알(司謁) 이상은 체아직(遞兒職)으로 부록(付祿)하였고, 별감 이하는 금년에 한하여 산료(散料)로 분급(分給)하였으며, 화원의 무리도 이에 견주어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밖에 충의위(忠義衛)와 거의위(擧義衛) 【거의는 곧 정사 공신(靖社功臣)을 녹훈(錄勳)할 때 별단(別單)에 들어간 사람이다.】  따위도 그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의 재정이 형편없어서 이렇게 부득이한 조치를 취하지만 조정이 공신을 대우하는데 있어서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인심이 야박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경기의 월령 진상(月令進上)005)  에 긴요하지 않은 물건이 많이 있는데 그 값은 매우 높으니 그것도 당연히 헤아려 절감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명목(名目)이 매우 많아 탑전에서 다 아뢸 수가 없으니 물러나간 뒤에 논의하여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기인(其人)의 【땔나무와 숯을 공급하는 사람을 이른다.】  공물(貢物)에 관한 부역은 가장 괴롭고 무겁습니다. 내간(內間)의 온돌 숫자는 가볍게 의논할 수 없으나 각사의 진배하는 숫자는 참작하여 덜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옛날 조종조에서는 모든 일을 한결같이 절약하였는데, 옛 일에 밝은 노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단지 두서너 곳이고, 나머지는 모두 판자 깐 방이라고 합니다. 지난번 공조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특별히 원자궁(元子宮)의 온돌 수를 줄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원자가 탄생한 처음에 일을 따라 절약하는 것은 비단 비용을 덜 뿐만 아니라 복을 아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고, 온돌을 줄이도록 명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어공을 이미 절감하였으니 태복(太僕)의 말도 당연히 그 숫자를 줄이어 1분(分)의 폐단을 제거해야 됩니다. ‘마굿간에 살진 말이 있고 들에 굶어 죽은 자가 있다.’는 것은 실로 성인이 경계한 바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일찍이 영중추가 아뢴 차자로 인하여 앞에 20필을 줄이고 뒤에 40필을 줄이어 앞뒤로 줄인 것이 벌써 60필이나 됩니다. 지금 또 숫자를 줄이면 부족할 염려가 있을까 걱정됩니다. 신의 뜻은 말의 숫자는 그대로 두고 다만 그 사료를 줄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시(本寺)로부터 헤아려서 사료를 줄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시어소(時御所)의 샘물이 매우 나빠서 오랫동안 있기가 불편하니 이어(移御)할 일을 대신에게 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디 봄에 이어하려 하였으니 2월 중에 날을 가리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오랫동안 궁전을 버려 두었으니 수리를 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때 지방의 백성들이 죽음에서 구원하기에도 넉넉하지 않으니 수리에 소용되는 모든 물품을 외방에 나누어 맡길 수 없습니다. 예컨대 포설(鋪設)과 도배 등 옛것을 그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전에 설비한 것을 깁고 때워서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이는 당연히 내탕고(內帑庫)로부터 내어 줄 것이다."
하였다. 경석이 또 우선 영장(營將)을 파하여 오가는 데 드는 비용의 폐단을 제거하자고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애당초 영장을 설립한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니니 이때에는 더욱이 파할 수 없다."
하였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듣건대 요즈음 공주의 출합(出閤)을 위하여 장차 본궁을 수리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 하니, 이때에 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재해를 구휼하는 도리에 위배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리하지 않으면 장차 민가를 빌려서 들어야 되는데 이 또한 불편한 일이다."
하니, 호판 정치화가 아뢰기를,
"우선 민가를 빌리는 것도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민정중이 아뢰기를,
"이미 어공을 줄였으니 신하들이 예전대로 녹봉을 받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지금부터 삭료(朔料)006)  로 대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관의 녹봉을 줄이고 또 줄였는데 지금 또 줄인다면 어떻게 청렴할 것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호군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양남(兩南)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거의 다 죽어가고 있으므로 본도의 전세를 서울로 모두 실어온다면 그들을 구휼할 방도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대로 본도에 두어서 구휼할 밑천으로 삼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국가의 경비는 오로지 전세에 의지하는데 이제 유치하여 둔다면 경비를 계속 지탱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염려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휼청의 것을 옮겨 보충할 만한 길이 있는가?"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진휼청에 저축한 것도 매우 적은데 어찌 경비를 보충할 형편이 있겠습니까."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호남 산군(山郡)의 전세는 구휼하는 밑천으로 옮기어 쓰지 못하더라도 바닷가의 거둘 것이 아주 없는 지역은 백성들이 현재 굶주림에 지쳐 아침 저녁 사이에 목숨이 다하게 되었는데 전세를 다 바치게 하여 입 안에 든 것까지 빼앗는다면 자못 조정에서 백성을 구휼하는 훌륭한 뜻이 아닙니다."
하고, 경석이 아뢰기를,
"전남우도의 전세를 바치지 못한 자들을 일체 면제해주어 민심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도는 우선 면제하여 주고 좌도는 본도에 머물려 두어 구휼하는 밑천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삼남(三南)의 구휼하는 행정이 한창 급하니 진휼 어사를 조속히 발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여러 읍들에서 바쳐야 할 곡식을 거의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많으니 어사를 내려 보내서 그 허실(虛實)을 조사하면 열읍의 수령들이 필시 소홀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어사를 잘 선출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국내에 둑이 꽤나 많은데 잇달아 흉년을 만나 고쳐 짓지 못하였습니다. 조종조의 옛 법을 따라 제언사(堤堰司)를 다시 설치하고 낭관(郞官)의 관속을 선출하여 각도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치화가 아뢰기를,
"관서(關西) 지방의 전세와 수납하는 쌀을 전에서부터 본도에 유치하여 관향곡(管餉穀)에 회록(會錄)하였었는데 금년은 각도의 세입이 줄어서 앞으로 닥치는 경비를 결코 이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청남(淸南)007)  의 바닷가 3현(縣)과 평양·중화(中和) 등 여러 고을의 작년 전세와 수납한 쌀을 운반해와서 경비에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판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신이 금부에서 일한 지 시일이 얼마 안 되어 모든 일을 진실로 전부 통하여 알지 못합니다마는, 민광소의 원정(元情)이 이지익의 공사(供辭)와 크게 서로 다른데 판부(判付)에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것으로 전교하였습니다. 지익은 이미 정사를 논하는 대관으로서 특별히 석방을 받았으니 다시 수감할 수는 없습니다. 대질하여 시비를 가리지 않으면 의논하여 처리하기도 어려우니 대신과 상의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태화가 대답하려 했는데 미처 언급하기 전에 두표가 큰 소리로 아뢰기를,
"금부가 의논하여 처리할 공사(公事)를 탑전에서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요청하여 상의 뜻을 시험할 의사가 있으니 상당히 외람됩니다. 대신이 지치고 연약하지만 어찌 이런 일에 간여하겠습니까. 이는 연중(筵中)이 엄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전에는 이와 같이 일이 있으면 삼사와 승지가 반드시 추고를 청하는 조치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은 빙그레 웃고, 윤강은 잠자코 물러갔다.

 

함경도의 쌀 1만 5천 섬을 영남의 영해(寧海)로 운반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이때 함경도는 조금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곡식을 옮긴 것인데 백성들이 상당히 도움을 받았다.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병들어 눕게 되자,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1월 17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판의금 윤강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민광소과 이지익의 공사(供辭)가 크게 서로 다릅니다. 옥사(獄事)의 사체로 말하면 당연히 면대를 시켜 자세히 시비를 가려야 되지만 지익은 애초에 정사를 논하는 대간으로서 수금되자 곧 석방된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니, 다시 잡아다가 문초하기를 청하는 것은 감히 못하는 바입니다. 만일 광소를 석방하자고 곧바로 청하면 자못 대계(臺啓)의 나문을 청한 의의가 없기 때문에 이같은 일의 형편을 대략 진달하고 대신에게 묻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뜻밖에 대신의 말과 기색이 모두 사나워서 시험한다는 등의 말까지 하면서 마구 죄명을 가하니,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이 보잘것없으나 어떻게 감히 좌지우지 하면서 군부(君父)의 뜻을 더듬어 시험하겠습니까. 사체에 부당하다고 하면 신은 감히 많은 말을 않겠습니다마는, 이런 뜻밖의 배척을 당하였으니 대신의 한 마디 말은 관계됨이 매우 중한 것인데 어떻게 감히 마음 편히 있겠습니까. 본직과 겸대하고 있는 직책을 강등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월 18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종실(宗室) 영양군(嶺陽君) 이환(李儇) 등이 열성조(列聖朝)의 어필(御筆)을 수집하여 모각(摹刻)해 올리자,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각기 한 자급을 올려주게 하였다. 뒤에 대계(臺啓)에 따라 주관한 사람 이외는 모두 말을 하사하였다.

 

1월 19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20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때 전남 감사 이태연이 도내의 여러 절에 있는 불상에 땀이 난 사실을 치계하였다. 대사간 민정중이 상소하기를,
"정도(正道)가 쇠퇴함으로부터 이교(異敎)가 흥행하여 본업(本業)에 게으른 백성이 머리를 깎고 발을 들여놓아 날마다 더욱 성해졌습니다. 또 그걸 위하여 말을 만들어서 헛소문이 퍼지게 하여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사이에 안개와 이슬이 맺혀 쇠와 흙으로 빚은 불상을 젖게 한 것을 땀이 났다고 말하여 백성의 귀를 어지럽히고 백성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니, 마음 쓰는 흔적이 극히 흉하고 혹독합니다. 도신(道臣)이 될 사람으로서는 의당 법을 근거로 정죄하여 사악한 말들이 그치게 해야 되는데도 태연은 중들이 늘어놓는 터무니없는 말을 듣고는 곧 의혹을 일으켜 장문(狀聞)하기까지 하여 마치 참으로 이 일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식견이 아주 없습니다. 유사에게 명확한 지휘를 내리도록 하고 태연은 무겁게 추고하소서. 이른바 땀을 흘렸다는 불상은 낱낱이 깨뜨려버리고 말을 지어낸 중들은 나라의 법으로 다스려서 이단이 제멋대로 거짓을 퍼뜨리는 화근을 영원히 막으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예조에 회부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이 민정중의 상소를 보니, 말뜻은 삼엄하고 논의는 격렬합니다만 생각건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변이에 관계되는 일이면 도신은 치계하는 것을 단연코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니 이태연은 추고할 만한 일이 없는 듯합니다. 중들이 본관(本官)에게 보고한 것에 대하여는 그 뜻이 과연 말을 만들어서 헛소문이 백성들의 귀를 어지럽히는 데에 있었다면 나라의 법으로 다스리더라도 불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허실을 가리지도 않은 채 먼저 무거운 법을 시행하면 이 뒤에 보고해야 될 재변이 있어도 서로 경계하여 덮어 감추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에 불상에서 땀이 난 변고가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는데 일찍이 불상을 부수는 조치가 없었습니다. 재변을 그치고 사물을 안정시키는 도리는 불상의 보존과 깨뜨림에 관계가 없으니, 이는 옛날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버린 일과 불골(佛骨)을 가져 온 것과도 같지 않은 듯합니다. 불상을 부수는 한 일은 실로 그것이 꼭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간신이 논한 것을 신조(臣曹)에서 감히 멋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상께서 헤아려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그 의논을 따랐다.

 

1월 21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양(鄭瀁)·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수찬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이준한(李俊漢)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1월 22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교리 민유중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하늘이 이변을 보이고 사물이 상도(常度)를 거스르는 것이 곤충과 초목 같은 미물이더라도 어찌 임금이 경계하고 두려워할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이도(異道)에 의탁하여 영이(靈異)함을 터무니없이 속여 여러 사람들의 귀를 어지럽히고 민심을 동요시켰으니 그 단서는 미약하지만 그 화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호남의 부처에서 땀이 났다는 말은 그것이 진실인지 허망한 것인지는 우선 논할 필요가 없으나 며칠 사이에 여러 불상들이 땀을 내니 그 무리들이 경이롭게 여기고 과장되게 전파하여 마치 참으로 영이함이 나타난 것같이 하였습니다. 이와 같으면 쇠세(衰世)의 속이고 홀리는 조짐을 벌써 크게 우려할 만합니다. 조정이 이를 처리하는 잘잘못은 빨리 해조에게 불상을 허물어 물이나 불 속에 던져서 근본을 철저하게 다스리는 의지를 보이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터무니없이 매우 괴상하지만 전에 이미 깨뜨리지 않았는데 이제 어떻게 꼭 깨뜨리겠는가. 만일 물이나 불 속에 던진다면 이 역시 요설(妖說)에 동요되는 일단인 것이다."
하였다.

 

1월 23일 정유

예조 참판 김좌명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듣건대 두 대궐을 수리할 때, 깐 자리와 벽을 바른 능지(菱紙) 등의 물건을 예전에 배설한 대로 둘 만한 것도 벌써 새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애당초 하교한 뜻과는 크게 서로 틀리니 이는 일을 담당한 내시가 성상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여 비용에 마음을 쓰지 않고 평상시와 같이 보아서 그의 마련하는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가 하는 대로 맡겨두어서 전하께서 재변을 두려워하고 비용을 걱정하는 훌륭한 뜻을 도리어 헛되이 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빨리 밝은 전교를 내리어 깔자리 등속과 도배하는 물품을 옛것을 그대로 둘 만한 것은 제신들과 입회하여 선택하게 하고 전부를 고치지 못하게 하여 비용을 삼가하는 뜻을 두어서 전일에 내린 전교가 사실이 되게 하소서. 이어(移御)한 뒤에 만일 새롭게 꾸민 것이 너무 지나친 점이 있거든 담당한 제신과 일을 주관한 내시를 모두 법을 어긴 벌로써 논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조종(祖宗)의 수천 리 강토와 억수로 많은 백성이 모두 전하의 한 몸에 매어 있는데 전하의 스스로의 처신을 겨우 한때의 편안함을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요사이 벼슬을 팔고, 배로 곡식을 옮기고, 조세를 면제하고, 공물을 더는 것으로써 보면 백성의 위급을 염려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사치와 편안함과 명령의 지연과 고식으로써 말하면 일을 꾀하는 실상을 보지 못하겠으니, 상하가 서로 수성(修省)하는 도리가 이에 그치고 말 뿐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해마다 큰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는 아우성은 원근이 똑같고, 더욱이 천문(天文)이 경계를 알리고 지도(地道)가 편안하지 못하며, 그 밖의 변고는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으니 패란(敗亂)의 징조이고 위망(危亡)의 징후가 아닌 게 없습니다. 전하는 깊은 구중 궁궐에 거처하시므로 모든 것을 환히 알지 못하지만 어리석은 백성들도 환란이 머지않아 닥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백이 날카로운 젊은이는 한갓 강개한 의기만을 품어서 말이 핵심에 꼭 들어맞지 않고 보필하는 노련한 신하는 간혹 그런 줄을 알면서도 어떻게 하지를 못합니다. 국문(國門) 밖에 견고한 울타리를 보지 못하겠고 팔꿈치 사이에 독한 벌쐐기가 엎드렸으니 나라가 태평한 때에도 거침없이 난(亂)에 이르기에 충분합니다. 더욱이 극도의 쇠미한 상황을 만났는데 어떻게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면 절로 눈물이 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힘껏 덕을 닦아 허위를 용납하지 말고 진실로써 하늘을 섬기며 성실로써 백성을 사랑하소서.
인재 구하기를 마치 목마른 듯이 하되 현사(賢邪)의 분별을 엄히 하고 간언(諫言) 따르기를 마치 물이 흐르듯이 하되 공사(公私)의 나뉨을 살피소서. 엄격함으로써 너그러움을 도와서 아랫사람에게 위복(威福)을 옮겨주지 말고 공경으로써 게으름을 이기어 언제나 마음속에 조심하고 삼가함을 보존하면 재앙이 달마다 생기더라도 혹 완전히 편안한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하지 않으면 신은 앞으로 국가가 어디에서 휴식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그대로 본직과 겸대한 직책을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술한 말은 벌써 신칙하여 절약하기를 힘써서 함부로 비용을 낭비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고, 이어서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참의 유계와 호군 조복양이 진언하기를,
"호남 한 도는 흉년이 매우 혹독하여 굶어 죽는 자가 잇따르니 본도의 전세(田稅)를 유치(留置)하지 않으면 그 곳의 백성들을 구휼할 수 없습니다."
하니,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절약하는 일이 많기는 하지만 현재 경비가 고갈되었으니 전세를 운송하여 오지 않으면 결코 비용을 지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우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유계·조복양은 구휼에 관한 행정을 관장하기 때문에 전세를 유치하여 구휼하자고 청하고, 정치화는 경비를 염려하기 때문에 경창(京倉)에 운반하기를 청하였으니, 세 신하가 다투는 것은 각자 그의 직분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구휼하는 행정이 급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경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재해를 더욱 심하게 입은 고을을 제외한 이외는 모두 경창으로 운납(運納)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유계가 아뢰기를,
"일찍이 도신(道臣)의 계문(啓聞)에 따라 호서(湖西) 연해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 대한 경자년008)  의 전세(田稅)를 다음해 가을로 물리어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축년의 흉년은 경자년보다 더욱 심하여 물리어 징수하게 했던 세금을 수납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막 바치기를 재촉하여 신축년 전세까지 일시에 납부하기를 독촉한다면 빈사 상태의 백성들이 결코 마련하여 바칠 형편이 못 되니 변통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복양이 아뢰기를,
"햇곡식이 익은 뒤에는 바치기 어려운 걱정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치화가 아뢰기를,
"추수는 으레 초겨울에 끝나니 얼음이 얼기 전에는 형편상 상납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반은 올 봄에 상납하고 반은 가을로 물리어 바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경기와 호서의 대동세(大同稅)는 재해를 입은 고을이나 조금 수확을 거둔 고을을 막론하고 모두 두 말씩을 감하였는데, 호남의 대동세는 아직 면제하는 명령이 없으니, 다시 적당히 감하여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 말을 특별히 감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에서부터 수령이 된 자들이 대부분 백성에게 명예를 구하여 떠난 뒤에는 곧 비석을 세워 공덕을 기리게 하기 때문에 일찍이 선조(先朝) 때 분명한 금령(禁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즈음 조정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고 비석을 세우는 폐단이 도리어 전보다 심합니다. 예컨대, 이태연이 광주(廣州)에서 체직되어 온 뒤에 부민(府民)들이 세운 비석이 여섯 곳이나 될 정도로 많다고 하니, 거듭 타일러 엄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에 또 비석을 세우는 사람이 있는데도 금지하지 않으면 교대한 수령이 조사해 내어서 죄를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교리 민유중이 아뢰기를,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은 곧 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곳입니다. 예전에 있던 사우(祠宇)가 좁고 퇴락하였는데 정익(鄭榏)이 통제사가 되어 개수하여 새롭게 하였습니다. 특별히 사당의 편액을 내리어 절의(節義)를 표창하고 후인을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마땅할 듯한데 아직껏 조정의 은명이 있지 않기에 남방 인사들의 희망이 매우 간절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의 절의는 본시 표창함이 당연하니 편액을 내리는 등의 일을 해조에게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땀이 난 불상을 깨뜨리자는 일로 차자를 올렸는데 비답에서 깨뜨릴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전교하였으니,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처에 땀이 났다는 이야기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진실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마는, 과장되게 전파하여 경이롭게 하고 터무니없는 것을 속이어 가탁하는 조짐은 앞으로 크게 우려할 만합니다. 기필코 엄중히 배척하여야 인심을 진정시키고 뒷날의 폐단을 막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은 꼭 깨뜨리려 하면 역시 동요하는 것이 되니 버려둔 채 묻지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신이 영중추 이경석과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역시 포용하여 진정시키는 방법을 당연히 이와 같이 하여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땀이 났다는 이야기는 괴이하고 터무니 없다고는 하지만 더욱 자신을 반성할 뿐입니다. 어찌 그 불상을 깨뜨리기까지 하겠습니까. 선조의 기해009)   연간에도 부처가 땀 난 일을 계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송시열 등은 방백(方伯)이 계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으니 역시 깨뜨릴 뜻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유중이 또 아뢰기를,
"천재가 잇달아 일어나고 기근이 거듭 닥치니 수성하는 도를 잠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어찌 수성을 소홀히 하겠는가. 그대들은 자주 이런 이야기를 앞에서 개진하는 것이 매우 좋을 것이다."
하였다.

 

1월 25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민여로(閔汝老)를 헌납으로, 이무(李堥)를 정언으로 삼았다.

 

호군 조복양, 이조 참의 유계 등이 상소하기를,
"신이 엊그제 인대하여, 호남의 전세(田稅)를 본도에 유치시켜 그곳의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일을 반복하여 진달하였으나 시행을 얻지 못하고, 단지 재해를 입은 고을의 전세의 유치만을 허락하는 명을 받았습니다. 신들은 마음이 매우 번민하고 답답하였으나 아주 가까운 상감 앞에서 감히 그에 관한 말을 다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재해를 입은 고을의 전세를 계산해 보니 겨우 4천여 섬이었으니 전혀 수확하지 못한 참담함을 여기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수납하려 하여도 필시 될 수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른바 4천여 섬이라는 것도 역시 빈 장부일 것이니 수많은 굶주린 백성을 앞으로 어떻게 구휼하여 살리겠습니까.
상신과 호조의 뜻을 보건대 역시 경비를 깊이 우려한 데서 나온 만부득이한 계책이기는 하지만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크게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굶어죽은 호남 백성이 벌써 많은데 앞으로 골짜기를 메울 시체가 얼마나 많을지 모릅니다. 이런 때에 유치하여 구휼할 자본이 이와 같이 약소한데 3만 2천 섬의 전세를 일시에 상납하도록 하면 빈사 지경의 백성들이 장차 ‘이를 어찌할까’ 할 것입니다. 단지 이 한 조치에 백성의 마음을 크게 잃어 곧 호남은 없어질 것이니, 경비가 이것 때문에 크게 모자라더라도 이는 결코 차마 할 수 없습니다. 성명(聖明)께서는 다시 묘당에게 물어서 호남의 전세를 유치시켜 구휼하자는 청을 빨리 허락하여 남쪽 백성들의 목숨을 이어주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비국에 회부하였으나, 비국은 경비를 잇기 어려운 염려를 극진히 진술하고 방계(防啓)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6일 경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민정중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휴가를 받는 은혜를 입고 대궐을 떠나 한강을 건너서 저녁에 광주부(廣州府)에 도착하였는데, 원리(院吏)가 신이 올린 소본(疏本)과 예조의 회계를 신에게 추후하여 보여주기에, 신이 두세 번 펴서 읽고는 지극히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이단의 도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말속(末俗)이 괴이함을 좋아하는 것이 매우 견고하여 깨우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나 예관(禮官) 역시 이와 같은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재변이라는 것은 곧 상도(常道)를 잃고 이치에 어긋남을 이르는 것입니다. 하늘이 상도를 잃으면 천재(天災)라 하고 땅이 상도를 잃으면 지변(地變)이라 하고 사람이 상도를 잃으면 인요(人妖)라고 합니다. 심지어 올바른 이치에서 벗어난 초목 금수까지도 모두 그러하여 이전의 역사에서 삼가 쓰고 당시의 임금이 깊이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어찌 부처의 괴이함으로써만 말하였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때 옹주(邕州)에 있는 한 불상이 움직이면 반드시 변방에 전쟁이 있다고 전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전사맹(錢師孟)이 지주(知州)가 되어서 또 부처가 움직인다고 말하자 사맹이 그 불상을 강 속에 던져버리니 백성들의 요언(妖言)이 그쳤고 끝내 아무 영험도 없었다 합니다. 신의 뜻에는 오늘날 불상에 땀 난 것이 정말 이태연의 장계와 같다면 역시 사맹이 했던 일을 증거로 끌어서 그 불상을 깨뜨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들의 말에 현혹된 자는 심지어 ‘모쪼록 부처를 부처로 보지 말고 당연히 토목(土木)의 재앙으로 논하여야 한다.’ 하고, 또 ‘재변을 만나 경계하는 것은 곧 임금이 수성(修省)하는 도리인데 어찌 이런 깨뜨리자는 말을 지어내어 우리 임금의 재이를 소홀히 하는 마음을 열 수 있겠는가.’ 합니다. 아, 괴이하기도 합니다.
현재 천재 지변과 초목 금수의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고 기근과 전염병이 한창 급하여 백성들의 시체가 길에 널렸으니 심히 경계할 만한 것이 이보다 앞설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불상에게 재이를 빌려서 백성들의 귀를 어지럽힌다는 말입니까. 설령 부처가 참으로 영이(靈異)함이 있어서 경계할 만하더라도, 모든 사물의 괴이한 것은 사람이 반드시 상서롭지 못하게 여기어 일체 버리는 것이 진실로 인사(人事)에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부처가 괴이한 일을 일으켰으니 그 불상을 허물어서 다시 보존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 또한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괴이함을 지어낸 중을 죄주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힘을 다하여 진달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옥당에 내린 비답에서 말하였다."
하였다.

 

1월 27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진휼 어사로 하여금 원옥(冤獄)을 넓게 소통시켜 판결하고 인재를 찾아 구하도록 하라고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8일 임인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졸(卒)하였다. 지원의 자(字)는 원지(源之)인데 젊어서 과거에 올랐으나 혼조에는 벼슬하기를 즐거워하지 않고 강가 교외에 물러가 살았다. 그러다 인조가 반정하자 한원(翰苑)을 거쳐 홍문관 저작(著作)에 임명되고 청환(淸宦)을 두루 지내었다. 병자년 난리에 인조가 남한 산성으로 들어가자, 지원에게는 노모가 있었는데 친구에게 가서 맡기고 곧장 남한 산성으로 달려갔다. 길이 막히어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조익(趙翼)·윤계(尹棨)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할 계획을 꾸몄는데 윤계가 살해당하여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상이 환도하여 강도의 성이 함락되던 날 앞질러서 먼저 나가버린 일로써 대간이 탄핵하여 죄를 받고 폐고되었다. 그 뒤에 그의 억울함을 아뢰는 자가 있어서 상이 특별히 서임하여 다시 청환의 길이 열리었다. 그 아들 심익현(沈益顯)이 공주에게 장가들게 되자 효종이 매우 총애하였고 끝내 정승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졸하니 나이가 72세였다. 지원은 모습이 듬직하여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고 자신을 단속함이 자못 맑고 근엄하였다. 그러나 정승이 되어서는 잠자코 따르기만 한다는 비난이 꽤 있어서 사론(士論)이 보잘것없이 여겼다.

 

병조 판서 홍명하가 네 차례 소를 올려 사정을 진술하고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이미 판정한 일을 어찌 염치를 말하면서 끝내 나오지 않는가. 더구나 병조 판서의 직무는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한데 어떻게 수십 일 동안이나 비워둔 채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말인가. 도목 정사가 기한을 넘기고 또 초봄이 다 지났는데 경은 어찌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번 염우로써 혐의를 삼는가. 이 지극한 뜻을 체득하고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들어오라."
하니, 명하가 이에 나왔다.

 

1월 30일 갑진

장령 정양(鄭瀁)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은 현기증이 있어서 오로지 술을 마셔서 기력을 차리므로 늘상 얼굴이 붉어 보기에 해이함이 있습니다. 한창 술을 엄금하는 때로 향온(香醞)도 폐지한 시기에 벌써 금령을 범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대관의 지위에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직명을 삭탈하소서."
하니,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등이 처치하기를,
"전에는 조금 마셨으나 지금 현재는 경계할 수 있으니,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는데, 끝내 패초에 나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정양은 고 상 정철(鄭澈)의 손자로서 언론이 강개하고 벼슬을 살면서 맑고 꼿꼿하니 사류(士類)들이 그의 기개를 훌륭히 여겼다. 음관(蔭官)으로 대관(臺官)에 탁용되었으나 사람됨이 술 마시기를 즐기어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았다. 이때 금주령이 있었는데도 술에 취해 사헌부에 나와서 이렇게 인피하고, 처치한 말이 또 이와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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