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갑술
동지사(冬至使)로 갔던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 등이 청(淸)나라로부터 돌아왔다.
3월 3일 병자
이동명(李東溟)을 지평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수찬으로, 이상경(李尙敬)을 전남 우수사로 삼았다.
집의 최유지(崔攸之)가 남원(南原)에 있으면서 어머니 병환으로 소를 올리어 면직을 청하였다. 인하여 남중(南中)의 기근이 매우 참혹한데도 유사가 비용을 아끼어 지급을 허락하지 않는 폐단을 진술하고, 재차 심사하기를 청하여 많은 말을 하였다. 상이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답하고, 또 이르기를,
"재해를 거듭 심사하는 것은 재차 거행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영돈녕 김우명(金佑明)을 호위 대장으로 삼았다.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최유지(崔攸之)의 상소를 삼가 보건대 매우 놀랍습니다. 재해를 입은 고을은 벌써 전세(田稅)를 면제해 주었는데, 남원 부사 민광소는 전세를 면제해 준 것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에 경차관 여증제가 어려운 실정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체로 사목(事目)을 따른 것인데 최유지가 진달한 것은 필시 이러한 일들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니, 우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원래 법전에서 재상을 조사하여 살핀 뒤에는 묵은 전지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은 대개 백성들이 농사를 힘쓰지 않아 황폐하여질까봐 염려해서입니다. 지금의 사대부들이 대전(大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민광소(閔光熽)·최유지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이르기를,
"양영남(梁穎南)의 옥사가 벌써 8개월이 되었는데도 아직껏 결말이 나지 않았다. 영남이 이미 위조했다고 승복한 뒤에 여러 차례 엄형을 가하였으나 그 말을 변경하지 않으니, 이것으로 보면 이일상(李一相)이 직접 쓴 편지가 아님이 분명하다. 영남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위조한 죄로써 예전대로 정배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은 북도(北道)로 옮겨 유배하고 사공과 곁꾼 및 이동현은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뱃사람들이 쌀에 농간을 부려 물을 타는 일이 흔히 있는데 금년은 쌀이 귀하여 이 폐단이 필시 심할 것입니다. 지금 이후에 물을 탄 일이 드러난 자는 강가에서 효시하여 다른 사람을 징계하소서."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대사간 서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김좌명의 상소 가운데 ‘팔꿈치와 겨드랑이 사이에 벌이나 전갈 같은 독이 잠복되었을까 염려된다.’는 말이 있어서 무신들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게 여기는 자가 많습니다. 이완이 판윤을 사직하여 체차한 것도 여기에 연유합니다. 민정중이 신과 더불어 사사로이 말하면서도 여염의 이야기가 이와 같은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또 고 상신 김육(金堉)이 선조(先朝)에 대하여 양국(兩局)015) 대장을 바꾸려고 청한 일을 거론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하고, 그대로 대신에게 묻기를,
"경들도 일찍이 이 말을 들었는가?"
하니, 태화와 두표가 아뢰기를,
"신들은 전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필시 여염간에 떠도는 근거없는 말일 것입니다."
하였다.
문무 회시(文武會試)의 시관(試官)인 허적(許積)·김응해(金應海)·남노성(南老星)·신유(申濡)·김수항(金壽恒)·박증휘(朴增輝)·민주면(閔周冕)과 지평 정수(鄭脩)가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에서 중하게 여기는 것이 과장(科場)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시관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은 자가 반이나 되니 극히 놀라운 일이다. 모두 추고하라."
하고, 다시 패초하였으나 허적·김수항·김응해가 또 나오지 않자, 상이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도록 하였다.
3월 4일 정축
호서의 대흥(大興) 등 열 고을에 지진이 일어나 집이 흔들리고 벽의 흙이 무너져 내렸다. 향축(香祝)을 내려보내어 도내의 중앙에서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게 하였다.
3월 5일 무인
병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자, 상이 그 상소를 이조에 회부하였다. 이조가 복계하기를,
"명하의 병세가 오래 낫지 않아서 공무를 집행하기 여려운 형편입니다. 본병(本兵)은 중요한 자리이어서 오랫동안 비울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체직을 허락하였다. 명하가 이행일의 일을 만났을 적부터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전후에 수십 차례 소를 올렸으나,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다가 이때에 비로소 체직시켰다.
3월 6일 기묘
영돈녕 김우명이 상소하여 호위 대장을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훈련 대장 이완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대사간 서필원은 신이 ‘병을 핑계대고 떠난 것은 김좌명의 상소에서 얼마간의 이야기를 진달한데에 연유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보잘것없는 신이 의원에게 치료하러 나아간 계획이 도리어 혐의를 끌어오는 바탕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예기치 않았던 일입니다. 신의 병든 상태는 벌써 의관(醫官)의 서계에 다 말하였으니 성상께서 필시 환히 살피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신이 병을 무릅쓰고 반열(班列)에 나아가서 뭇사람들의 의심을 풀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방금 추문을 당하는 가운데에 있기에 감히 마음 편하게 출사하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지체하다가 이제 비로소 스스로 아뢰는 것이오니 빨리 신의 벼슬을 파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첨지 민정중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수일 전에 서필원과 상대하여 시사(時事)를 언급하다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우연히 이완의 사직을 말하면서 ‘만일 여염에 전하는 말과 같으면 장신(將臣)이 불안해할 것이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필원이 그렇게 여기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여염의 말이기는 하지만 탑전에 진달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 의심을 풀고 잘 처리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은 ‘공의 국가를 위하는 진정한 정성은 사람을 경복하게 한다. 다만 거리에 떠도는 말이 처음에 비하여 조금 그쳤다고 하는데, 만일 다시 제기하면 시끄럽게 될까 걱정스러우니 가볍게 상달해서는 안 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며칠 밤이 지나지 않아 필원이 정말로 앞자리에서 진달하며 신의 이름까지 들었습니다. 신과 필원이 함께 반열에 있으니 걱정하고 사랑하는 작은 정성은 지나친 염려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필원이 사석에서 한 말을 곧 탑전에 진달하였으니 경솔하게 발설하였다고는 하지만 진실로 불가함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름이 간관의 입에 나와서 곧 근거없는 말의 증거를 이루었으니 신의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부호군 김좌명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의 상소에서 간소함을 따르는 일을 진술하고 인하여 두서너 조목을 상소의 끝부분에서 언급한 것은 대개 걱정하고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임금의 거처에 벌과 전갈이 잠복해 있다는 것은 곧 문천상(文天祥)이 대책(對策) 중에서 양요(楊幺)와 이(李)·주(朱)016) 를 가리킨 말입니다. 이는 깊고 후미져서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일전에 외간에서 들리는 소리가 자못 상소 가운데의 말을 지적하여 ‘아무 구절의 이야기는 아무 일을 가르킨 것이고 아무 구절의 이야기는 무엇을 이르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신은 마음에 괴이하게 여겨집니다. 어찌 장령(將領)의 신에게 미루어 가할 줄 요량하였겠습니까. 서필원이 이미 들은 것이 있어서 혹시라도 이리저리 옮겨지며 굳어져서 앞으로 불안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상의 앞에서 쾌히 풀어버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 뜻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필원이 선신(先臣)017) 이 양국의 대장을 바꾸자고 청했다는 말을 들어 상의 귀에 잇달아 진달하였으니, 이 어찌 그 말에 지극한 본말이 있어서 마치 부회하여 어쩌고저쩌고 한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까. 신이 벌써 아주 뜻밖의 일을 만나 변변치 못하게 진달하여 밝혔으나 진실로 위로는 상의 귀를 넓게 하고 아래로는 뭇사람들의 의심을 풀어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을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을 올렸으니 신의 죄를 다스리어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심이 맑지 못하여 터무니없이 말을 지어내고 문자를 들추어내어 아무개를 가리켜 발언한 것이라고 하니, 이는 곧 간사한 무리의 보통 모습인데 어찌하여 마음에 두고 생각하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3월 7일 경진
허적(許積)을 특별히 서임하여 병조 판서로 삼고,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여이재(呂爾載)를 판윤으로, 김좌명(金佐明)을 이조 참판으로, 이은상(李殷相)·민정중(閔鼎重)을 승지로 삼았다. 허적이 일찍이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탄핵하려 하자,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힘껏 만류하였다. 허적이 이 말을 듣고는 패초(牌招)에 나가지 않아 파직되었는데, 이때에 특별히 서임되어 이 벼슬에 특별히 임명된 것이다.
3월 8일 신사
이연년(李延年)·임한백(任翰伯)·홍주삼(洪柱三)·김우형(金宇亨)·민점(閔點)·오시수(吳始壽) 등을 특별히 서임하였는데, 옥당에 관원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상참례를 받았다. 마치고 나서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과장(科場)의 사체는 엄중하여 혼조(昏朝) 때에도 시관(試官)이 해가 떠오른 뒤에 시험장으로 나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들으니 사자(士子)들이 시험장 문밖에 모여 시관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국가에 반드시 어떤 일이 있다고 생각하여 장차 흩어져 가려는 때에 시관이 비로소 도착하였다 합니다. 기강이 이와 같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승지가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다면 반드시 재촉해야 될 것이고 내시가 사체를 안다면 역시 꼭 진달해야 될 터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당일 입직(入直)한 승지와 승전색 내관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대사간 서필원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들은 소문을 탑전에서 진달할 적에 스스로 낭패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변변찮은 지극한 정성에 절로 그만두지 못하였습니다. 두 신하가 소를 올리자 각기 따뜻한 비답을 주어 환히 풀리었으니 신이 원한 것은 단지 이와 같게 되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다만 김좌명의 상소 가운데 ‘부회 운운한 이야기’라는 따위의 말이 있는데 신의 진달은 본디 소문이 운운한 말을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이니 부회하여 증거를 이루었다는 것은 이치상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의 말이 있는데 감히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으니, 체직하소서."
하니,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3월 9일 임오
권대운(權大運)·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송규렴(宋奎濂)을 지평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이완(李浣)을 공조 판서로, 홍주삼(洪桂三)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3월 10일 계미
동틀 무렵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이 날 조참을 행하려 하였는데, 약방(藥房)이 짙은 안개는 독이 있다고 중지하기를 청하여 두 번에 이르자 중지하였다.
해서(海西) 황주(黃州)의 남문 밖 민가에 불이 나서 1백 13호를 연소하였다고, 도신이 아뢰었다.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의 사직하는 상소를 보니 마치 좌우의 두 손을 잃은 것 같다. 경이 서울을 떠나간 뒤로부터 한 해가 되어가니 사모하는 마음이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또 지금 큰 흉년이 든 나머지 굶어죽은 사람이 길에 가득하건만 공사간에 저축한 것이 없어서 구휼할 계책이 없으니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잠시도 편안하지 못하다. 이런 때에 믿는 것은 오직 경인데 경은 어찌하여 생각하지를 않고 한갓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억지로 인혐을 가하여 나를 불안하게 하는가. 이 화창한 때에 맞추어 갑자기 생각을 고쳐 올라오면 비단 나의 목마른 마음을 위로할 뿐 아니라 경도 선왕의 은총을 갚는 도리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경은 생각에 두라."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두 번째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진휼 어사가 치계한 것을 보니 영남 백성들의 봄 굶주림이 한창 급하여 세금 들일 것을 마련하기 어려워서 환곡을 지급하여 마련하기를 원하였으나 진휼청은 일시적인 미봉만을 펴면서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체로써 말하면 옳지만 죽음을 구하기도 넉넉하지 않은 때에 세금을 독촉하는 것이 적절한 시기라고 말하겠습니까? 또 들으니 양남(兩南)의 백성들이 20여 섬의 곡물을 바치고 공천(公賤) 면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데도 유사에게 저지를 당한다고 하니 이는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하는 데에 마음을 쏟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참된 충성을 훌륭하게 여긴다. 앞의 차자를 당연히 등대할 때 의논하여 정하여야 되었는데 요사이 내가 병으로 인하여 인견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매우 부끄럽다. 앞뒤에 올린 차자는 의당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때에 상이 계속 몸이 불편하여 중외의 공사가 거의 다 지체되었다. 간혹 긴급한 일은 승지가 넌지시 아뢰고는 비로소 내려보냈으며, 심지어 대신의 장소도 여러 날씩 머물려두니 뭇 신하들이 걱정하였다.
대사헌 송준길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후하게 비답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4일 정해
간원이 장죄(贓罪)에 걸리어 편배(編配)된 황헌(黃瀗)이 사면으로 인하여 용서받은 것이 부당함을 논하여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15일 무자
증광 전시(增廣殿試)를 열어 문과(文科)에서 김석주(金錫胄) 등 41명을 【한 사람은 직부(直赴)하였다.】 무과(武科)에서 조충선(趙忠善) 등 56명을 뽑았다.
대사간 서필원 등이 아뢰기를,
"성조(聖朝)에 빠뜨린 것이 없기는 하지만 어찌 한 가지 일도 말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헌부의 관원들은 고요히 한 번 아룀도 없는 지가 벌써 십여 일이나 되어 물의가 그르게 여깁니다. 외지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체직시키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경기도 전결(田結)의 숫자가 병자년018) 이전에 비하여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각 고을의 수령들이 칙사의 행차를 대접한다는 핑계로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태반을 신역 면제에서 받는 것으로 씁니다. 그러므로 보통 쓰는 전결이 차츰 줄어들게 되어 신역에 응하는 자들이 지나치게 그 괴로움을 당하니, 도신에게 엄히 조사하여 혁파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3월 17일 경인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깜깜하여 마치 티끌이 내리는 듯하였다.
3월 18일 신묘
태양이 마치 피처럼 붉고, 흙비가 내렸다.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이휴징(李休徵)을 지평으로, 김우형(金宇亨)을 부교리로, 유경창(柳慶昌)을 예조 참판으로, 이무(李堥)를 정언으로, 임한백(任翰伯)을 부수찬으로, 여증제(呂曾齊)·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이세화(李世華)·이혜(李嵆)를 주서로 삼았다.
이조 참의 유계(兪棨)와 예조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한재(旱災)를 인하여 소를 올리고 친히 기도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여러 차례 사면한 것이 소인에게 다행스러움이기는 하나 이 비상한 변괴를 당하여 격식 밖의 크나큰 은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10년 전의 도망하여 포탈한 조세는 모두 탕감하여 민심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후하게 비답하고 그 상소를 비국에 회부하니, 비국이 모두 시행하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양남(兩南)의 임기가 찬 수령을 모두 가을에 곡식이 익을 때까지를 기한으로 잉임(仍任)하게 하니, 어사 남구만(南九萬)의 요청을 따른 것이었다.
3월 20일 계사
유심(柳淰)을 도승지로 삼았다.
향축(香祝)을 각도에 내려 보내어 모두 기우(祈雨)하도록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동지사(冬至使)가 돌아오면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렀을 적에 서장관(書狀官) 오두인(吳斗寅)이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지 않아 청(淸)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히어 도로 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선하여 탈환하는 때에 조정의 명령을 욕되게 하였는데도 사신이 아뢰어 알리지 않았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오두인은 파직하고 사신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1일 갑오
대제학 이일상(李一相)이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일상이 교외에서 대죄(待罪)한 지 일곱 달을 지냈는데 이때에 양영남(梁穎南)의 옥사가 비로소 끝나자,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상소를 두 번째 올리자 이조에 회부하였는데, 이조가 체직을 허락하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2일 을미
우의정 원두표가 병으로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였다.
3월 23일 병신
대신과 육경(六卿)·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재변을 그치게 할 계책을 물었다. 판중추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여러 해 전의 이산 적당(尼山賊黨)019) 은 거의 다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들로서 남에게 속이는 꾀임에 빠졌는데 연좌된 곁붙이들이 아직껏 정배 중에 있으니 이 역시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크나큰 은혜를 내리는 때에 석방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듯 합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혹은 석방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혹은 불가하다고도 하였다. 승지 민정중이 아뢰기를,
"역옥(逆獄)에 관계되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엄하니 상의 특명이 있지 않으면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곁붙이들이 사면한다면 정범(正犯)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장차 모두 신설(伸雪)할 것인가?"
하니, 이에 여러 대신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여 끝내 의논이 중지되었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 등에게 여러 신들과 빈청(賓廳)에서 회의하여 다만 도류(徒流) 중에서만 뽑아 죄목을 써서 등대를 기다려 너그럽게 처결하도록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화기를 부르는 방도를 여러 가지로 두루 물으니, 교리 오시수가 아뢰기를,
"신이 합문(閤門)에 이르러 말을 구하는 전교를 보고 자리 앞에 올라 직접 옥음(玉音)을 들으니 간절하고 측은한 뜻이 말 속에 넘칩니다. 진실로 이 마음을 게을리하지 않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한다면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지 못할까를 왜 걱정하겠습니까. 외간의 말에 궁중에는 동산과 누대(樓臺) 등의 좋은 경관이 있어서 잡다한 정사를 살피는 여가에 편안히 즐기는 조짐이 있을까를 걱정하니 이는 당연히 경계하여 두렵게 여길 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교리의 말이 옳다."
하였다. 또 친히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것을 요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친히 빌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리의 병이 매우 중하여 마음대로 걸음을 걷지 못한다. 지난번 유계의 상소 가운데에도 이 뜻을 언급하였으나 행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진휼 어사 이숙이 공주(公州)에 도착하여 음식과 거마의 제공이 박하다는 이유로 하리를 형벌하기까지 하였으니 조정에서 책임을 맡긴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상이 크게 놀라면서 이르기를,
"이 일은 극히 한심스러우니 속히 본도에게 조사하여 묻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한재(旱災)는 더욱 심해지는데도 상은 잇달아 편찮으셨기 때문에 군신들이 오랫동안 나아가 뵙지 못하였다. 교리 이민적(李敏迪) 등이 차자를 올려, 오늘 대신과 육경(六卿)·삼사(三司)의 제신들을 급히 불러 특별히 면대하고 재변을 그치게 하는 방도를 강구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므로 차자를 들이자, 상이 곧장 제신들을 부르게 하고, 인하여 스스로를 책망하는 하교를 하였는데
"차라리 눈을 감고 죽고 싶다."
는 말까지 있으니, 듣는 이들이 감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대로 즉각 정전을 피하고 음식 수를 줄이며 술을 금하였다. 또 승지에게 교서(敎書)를 초하여 좋은 말을 구하게 하였다.
여러 도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호남 백성의 죽은 자가 1천 3백여 명이나 되자, 상이 불쌍히 여기고 관원을 파견하여 여제(厲祭)를 지내게 하였다.
3월 26일 기해
윤변(尹抃)을 지평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우윤으로, 홍전(洪瑑)을 좌윤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승지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삼았다.
공주목(公州牧)을 강등하여 공산현(公山縣)으로 삼았는데, 전패(殿牌)를 잃은 까닭이었다.
충공도(忠公道)를 회복하여 충청도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통영(統營)이 정유 재란(丁酉再亂) 후에 군대를 모집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이름을 둔전군(屯田軍)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은 왜란과의 시간적 거리가 벌써 멀어져서 둔전이 모두 본 주인에게로 돌아갔는데도 그 군대는 그대로 남아 백성들에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끝이 없으니 매우 의미없는 일입니다. 일체 혁파하여 정군(正軍)으로 옮기어 편입하소서."
하니, 상이 본도에게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병조가 영남 좌도의 군안(軍案)을 고치자고 청하니, 오랫동안 정리하여 바로잡지 않아 난잡하기가 더욱 심한 까닭이었다.
3월 27일 경자
진휼청이 강도(江都)로 이전할 쌀 6천 섬을 떼내어 경기도 백성들에게 꾸어주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장령 여증제(呂曾齊)와 지평 이유상(李有相)이 명에 응하여 상소를 올리니, 그 대략에 아뢰기를,
"전하가 즉위한 3년 동안에 좋은 말을 구하는 전교가 벌써 세 번이나 내렸습니다. 첫해에 아무 말을 쓰고 아무 폐단을 고쳤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2년에도 그러하였기 때문에 올해에 애틋한 전교를 내렸으나 보는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는 마음을 품어 좋은 말을 즐거이 고하려 않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말을 구하는 것이 곧 언로를 막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한번 전후에 제신들이 이미 올린 상소를 취하여 모든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을 뒤따라 채집하여 시행하면 충분히 천리 밖의 간언(諫言)을 오게 하여 전하의 들음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가다듬는 것은 잘하시면서도 사리에 밝은 면은 부족하시어 잘못이 있더라도 부드러운 데에 있지 강한 데에 있지 않으니, 그 잘못을 따라 부족한 것을 힘쓰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명에 응하여 올린 상소를 모두 묘당(廟堂)에 회부하고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는데 거의 다 폐지하여 물리치고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제 등의 말이 이와 같았다.
3월 28일 신축
남천한(南天漢)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영중추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판중추 정유성(鄭維城) 및 금부·형조의 당상 등과 함께 원옥(冤獄)을 심리하여 3일 만에 끝마쳤다. 삼수(三水)에 있는 죄인 윤선도(尹善道)의 위리(圍籬)를 철거하고 장물죄(贓物罪)를 지은 심총을 석방하였는데 경석 등의 건의를 따른 것이다. 승지 민정중과 정언 이무가 간쟁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배를 난파시킨 사공과 곁꾼 등, 감옥에 있는 자들을 사면하고 그들이 포탈한 공금(公金)을 면제하였다. 애초에 삼남의 세선(稅船)에 조세를 싣고 발송한 뒤에 사공과 곁꾼 등이 중간에서 훔쳐먹고는 배가 난파되었다고 핑계대는 자가 잇따랐다. 호조가 곧 그들의 처자와 족속을 감옥에 가두고 훔쳐먹은 쌀을 도로 징수하였으나 다 갚지 못한 것이 많으므로 갇힌 자들이 항상 감옥에 가득 찼다. 간혹 실제로 배가 난파되어 섞여들어간 경우도 있었으나 하나같이 징계하여 다스리니 백성들이 매우 원통하게 여겼다. 이때에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상환하기 어려운 형편을 진달하고 모두 탕감하기를 청하여, 유배 중에 있는 15명과 현재 수감되어 있는 1백 64명이 모두 용서를 받았다. 응당 징수해야 될 쌀과 콩 5천 7백 60섬도 모두 감면을 허락하였다.
사간 정계주(鄭繼胄)가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29일 임인
옥당이 명에 응하여 차자를 올리니, 첫째는 형옥(刑獄)의 문란함이고, 둘째는 양역(良役)의 괴로움이고, 셋째는 공사(公私)의 이익을 독점함이고, 넷째는 기강의 해이함이었다. 또 말하기를,
"현재 성상의 잘못이 네 가지가 있으니, 힘껏 학문을 향하지 않는 것이 첫째이고, 돈독하게 뜻을 세우지 않은 것이 둘째이고, 실제로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정성으로 인재를 구하지 않는 것이 넷째입니다."
하고 한 원제(漢元帝)가 글의 뜻에 구애되어 우유부단했던 잘못까지 거론하여 경계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올린 차자를 살펴보니 은근한 경계가 말 밖에 넘쳐난다.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대로 대신에게 뒷날 등대할 때 구절마다 논란하여 여쭈라고 하였다.
3월 30일 계묘
각사(各司)의 사무보는 기한을 거듭 분명히 하달하였다. 효종조에 일찍이 각 관사(官司)가 태만하여 사무를 폐지하자, 사무보는 날수를 정하여 월말에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였는데, 상이 기록하여 아뢴 것을 보니 향을 받고 재계하는 등의 일로 사무를 보지 않은 날이 반이 넘었다. 상이 이것을 추고하도록 하고, 일을 보는 날 외에는 모두 사무를 보도록 하고, 향을 받고 향사(享祀)하는 바로 그 날과 재계를 파한 날은 초하루와 그믐날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형벌을 시행하지는 않았다.
예조의 낭관을 파견하여 고려의 여러 승들을 두루 봉심하여 나무하고 짐승 먹이는 것을 금지시켰다.
호남 용담현(龍潭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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