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동명을 장령으로, 곽제화(郭齊華)를 지평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정언으로, 임한백(任翰伯)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았다.
5월 3일 을해
병조 판서 허적이 특별한 분부를 받고 난 뒤,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여러 사람의 중상이 뼈를 삭이고 뭇사람들의 입이 쇠를 녹인다는 말을 신이 애당초에는 믿지 않았었는데 지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처신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신을 하인처럼 업신여기지만, 신이 평소 자처한 바는 지금 세상의 군자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남이 업신여긴다고 해서 스스로를 업신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어찌 혼탁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끝내 터무니없이 이익을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몸을 구부려 뒤돌아 보고 슬프게 울면서 기필코 물러나왔던 이유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하유한 말에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으니 지금 무엇 때문에 많은 말을 하겠는가. 경은 선조에서 많은 경력을 가졌다. 지금 저 나라에서 조사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나 국가가 믿는 사람은 오직 경 한 사람 뿐이다. 오랫동안 시골에 있으면서 아득히 돌아올 기약이 없는데, 경이 어떻게 차마 나를 잊겠는가. 부디 나의 간곡한 뜻을 생각하여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김좌명이 상소하여 품계를 올려 발탁한 명을 사양하자, 상이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5월 5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동명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본부에 재직하면서 최문식이 어사를 무함한 일을 들어 탄핵하였습니다. 그런데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니, ‘다투어 서로 칭찬하고 잘 보이려고 공을 바치며 사사로운 뜻이 횡류하여 자기 편을 비호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이에게 아첨하고 있다.’라는 등의 말로 드러내어 배척하고 깊이 공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말은 사람이 차마 받아들여 죄인이 되지 못하고 또한 그것으로 남에게 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최문식이 사적인 분노를 터뜨려 이숙을 무함한 것은 본도의 조사에서 이미 그 실상을 엄폐할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났고, 묘당이 논의하여 아뢴 것도 그 시비를 구별하여 처치하였으니, 그 사이의 상황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국가가 한 세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체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허물려고만 하면 장래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하지 못합니다. 신이 논한 것은 시속이 각박하고 몹쓸 것을 통탄하고 일의 체모가 손상됨을 안타깝게 여긴 것인데, 뜻밖의 배척이 이 정도까지 이를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만약 신이 최문식을 탄핵하지 않음으로 해서 잘 보이려고 공을 바쳤다는 비난을 면하게 되고, 이숙의 죄를 청함으로 해서 자기 편을 비호하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아첨했다는 평을 받지 않게 된다면 그 역시 대신이 모든 관료들을 선도하고 격려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이 만약 부끄러움도 없이 이익을 탐하고 남에게 잘 보일 의도를 가졌더라면 어찌 대신한테 아첨하지 않고 낮은 관료에게 잘 보이려 하였겠습니까. 신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장령 이정(李程)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5월 6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수항을 대사헌으로, 남구만을 헌납으로 삼았다.
5월 7일 기묘
장령 이동명이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고 또 인피하자, 상이 그가 올린 계사를 되돌려 주라고 하고, 정원에 전교하였다.
"그저께 이동명이 인피하면서 한 말은 매우 괴상망칙하고 노기가 충천하였으며, 대신을 업신여기고 조금도 경건하게 대우하는 뜻이 없었다. 일의 체모를 알지 못함이 이렇게 심할 수 없다. 체차하라."
장령 이정이 처치를 온당하게 하지 못하였다는 일로 인피하였다. 대사헌 김수항이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차하여 이동명이 인피하면서 공격 배척한 것을 가지고 체직을 청하자, 상이 답하였다.
"연소배의 무식하고 해괴망칙한 말을 어찌 입에 올리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5월 9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11일 계미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모화관에서 칙서를 맞이하고 인정전으로 되돌아와 반칙례(頒勅禮)를 거행한 뒤 두 사신과 함께 전중(殿中)에 앉았다. 칙서와 자문을 어전에 펼쳐놓자, 상이 가져다가 열람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의주 부윤 이시술(李時術)의 일로써 대통관(大通官)을 통하여 어전에 전달하기를,
"부윤 외에 다른 상관이 있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감사가 한 도의 상관이지만 군읍(郡邑)의 사소한 일은 미리 알지 못하오."
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부윤을 먼저 조사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금부 도사를 보내 의주 부윤 이시술을 잡아오게 하고는 다례(茶禮)를 열고 파하였다.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안진(安縝)을 장령으로, 원만리(元萬里)를 지평으로, 안후열(安後說)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평청이 아뢰기를,
"본청이 2월 열흘 사이에서부터 지금까지 굶주린 사람 2천여 명, 사족(士族)으로서 양식을 받는 자, 서활인서(西活人署)의 환자로서 양식을 받는 자들에게 구제 양식을 주었습니다. 이제 보리가 익는 계절이 되었으니 모두 중지해야 되겠으나, 다만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먹을 것이라곤 없으니, 일시에 중지시키고 보내버리게 할 경우 굶어죽는 사태가 생길 것이 걱정됩니다. 굶주린 백성 중에서 3백 26명을 뽑아 한 달 먹을 양식을 주고, 그 다음으로 6백 43명에게는 20일 먹을 양식을 주며, 이밖에 1천 6백 30명에게는 10일 먹을 양식을 주어 보내야 됩니다. 그리고 활인서의 병자들은 병의 전염이 점점 기승을 부리니 그 숫자대로 전과 같이 양식을 주어야 됩니다."
하였고, 이튿날 진휼청이 아뢰기를,
"본청의 기민으로서 구제받은 자가 모두 2천 3백여 명이고, 사족(士族) 및 노병(老病)으로 나와서 먹지 못한 자 6백여 명과 동활인서의 병자 1천 90여 명에게도 아울러 양식을 주었으며, 성밖의 제맘대로 막사를 나온 병자 2천 3백 71명도 한 차례 양식을 주었습니다. 상평청에서 어제 이미 구제를 정지하였으니, 본청도 똑같이 정지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리가 익었다고는 하지만 서울과 지방은 사정이 같지 않으며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들에게 갑자기 구제를 정지할 경우 반드시 삶을 이어가지 못할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나타난 기민 1천 5백 26명 내에서 노병으로 빌어먹는 자로서 가장 심한 자 1백 95명에게는 한 달 먹을 양식을 주고, 그 나머지 1천 3백 31명에게는 반 달의 양식을 나누어주어 보내야 됩니다. 활인서의 질병에 걸린 자들은 전염의 기세가 극성이고 막사를 나가는 자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으니 계속해서 구제하지 않을 수 없어 우선적으로 양식을 주어야 되고 사막(私幕)의 병자들도 상황을 보아서 계속해서 양식을 주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금년의 전염병은 온 전국이 똑같습니다. 이제 농사철을 맞아 일을 전폐하고 있으니 국가에서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로서 특별한 구제책이 있어야 할 텐데, 군병(軍兵) 등에게 포(布)를 징수하는 명령이 평소와 다름이 없어 원망이 막심합니다. 각도에 명하여 질병에 걸린 군병을 뽑아내어 당번(當番)의 가포(價布)를 알맞게 경감시켜 덕을 베푸는 뜻을 펴소서. 그리고 호남의 태인(泰仁)·고부(古阜) 두 고을에서는 갑술년 양안(量案) 속에 주인이 없는 토지를 조사하여 기록하였는데 그 뒤로 백성들이 거의 다 경작하면서 더러는 대를 물리고 더러는 전매하여 오랫동안 자신들의 재산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에 새로이 생겨난 공주의 궁노(宮奴)가 호조의 관문(關文)을 가지고 세력을 빙자하여 점유함으로써 원성이 그지없습니다. 갑술년 양안에서는 주인이 없는 토지로 등재하였지만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경작한 처지에 어찌 갑자기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금구(金溝)에는 둑방을 쌓아 만든 저수지가 있으며,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새로이 수축하여 백성들의 토지가 혜택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그 또한 궁가의 점유가 되었습니다. 둑방의 사목을 재삼 밝혀 행회하는 날에 법을 무시하고 원망을 자아냈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그 도의 감사에게 궁노를 가두고 법에 따라 벌을 내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질병에 걸린 군인은 해조로 하여금 포를 경감시키도록 하라. 둑방 안에서 경작한 일과 태인·고부의 땅을 조사하여 아뢴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5월 12일 갑신
서필원(徐必遠)을 승지로 삼았다.
진휼청이, 구제하고 남은 쌀 1만 석을 내어 도성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을이 되어 이자를 면제하고 환수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3일 을유
조윤석(趙胤錫)을 승지로 삼았다.
정언 이단하(李端夏) 등이 아뢰기를,
"경연을 정지하고 있는 것이 상께서 편찮으시기 때문이지만 많은 신하들이 걱정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때때로 와내(臥內)에서 유신(儒臣)들을 불러놓고 경사(經史)를 윤독하고, 육가(陸賈)가 앞에서 시서를 강론했던 것025) 처럼 경사의 문의(文義)를 강론케 한다면, 어찌 성덕에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유신으로 하여금 빨리 아뢰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병세를 보아가며 할 일이지 어찌 별도로 명목을 만들겠는가."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여러 궁가가 소유할 토지의 수량이 법전에 실려 있는데 차츰 혼잡하여져서 한계가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곤궁과 세입의 감소가 오직 거기에서 말미암고 있으니, 해조에게 조사하여 품처(品處)하게 하여 법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점유하는 폐단을 근절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등대(登對)하였을 때에 아뢰어서 대처하게 하였다."
하였다.
병조 판서 허적이 부름을 받고 올라오는 도중 여주(驪州)에 도착하여 병이 심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인심의 선량하지 않음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앞으로 다시 그러한 말이 나온다면 이는 필시 임금을 무시하고 경을 배척하여 조정에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할 경우 자연히 국가의 처치가 있을 테니 경은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 그리고 조사하는 일이 며칠 안에 있을 것이고 국가가 믿는 사람은 오직 경이다. 경이 받은 직책이 또한 매우 긴요한 곳이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병이 조금 차도가 있는 때를 기다려 속히 올라와서 지극한 바람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이어서 어의(御醫)에게 빨리 가서 병을 치료하도록 명하였다.
5월 14일 병술
진휼청이 아뢰어 청하기를,
"관향(管餉)을 위하여 상납해야 할 곡식으로서 쌀 4천 2백 석과 대두(大豆) 1천여 석을 본도에 그대로 두고 민간에 대여해 줌으로써 국가가 백성을 보살피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5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하는 일이 마음에 걸리니 경들과 함께 상의하고 싶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시술이 들어온 것을 이일선이 이미 알고 있으니 조사하는 일을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오늘 역관에게 일선한테 물어보게 한 뒤 처리해야 됩니다."
하였고,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는 아뢰기를,
"들으니, 일선이 역관 등에게 말하기를 ‘이번에는 본국에서 우리들에게 대우하는 것이 반드시 전과 다를 것이다.’라고 하였다니 그 뜻을 알 만합니다."
하였고, 좌의정 원두표는 아뢰기를,
"특별히 1천 금을 주는 것이 적은 것이 아닌데 일선은 3천 금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 욕심이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정치화가 아뢰기를,
"전날 화약을 사문(査問)할 때에 준 것이 3천 금에 이르렀고 전후의 등록(謄錄)을 살펴보니 이 수량 외에 더 준 때는 없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시술의 일은 본래 대단한 것이 아닌데 일선이 한결같이 엄격히 하여 ‘국경을 넘어갈 때 부윤이 첩문(帖文)을 만들어 주었지 아랫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시술과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을 어떤 죄로 단정해야 되겠는가?"
하니, 원두표가 아뢰기를,
"전에는 이러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단정하지 못하였고 모두 저쪽 나라에 물어서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술이 물금체(勿禁帖)를 만들어 준 것은 참으로 죄가 중하다. 그러나 금하지 말라는 체문을 만들어 준 것이 우리 나라 국경 안에 한정된 것이라면 죽음은 면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하니, 정태화가 그것이 옳겠다고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전조(銓曹)가 대정(大政) 때마다 평상적인 격식만을 따라 혹은 잡기(雜歧)026) 로써 혹은 오래된 것으로써 차례대로 승진시킬 뿐, 가문의 고하(高下)나 인물의 현부(賢否)는 따져보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동반 6품직이 평시에 비하여 많이 감소된데다 잡스런 인물이 거의 반을 차지하여 관료의 반열에 앉아 있으니 관원의 체모가 말이 아닙니다. 이조로 하여금 전날의 예에 의거하여 깨끗하게 걸러서 사로(仕路)를 맑게 하소서. 선전관은 궁궐을 지키는 근시(近侍)의 반열로서, 서반의 참하(叅下) 중에서 최고의 인물이 선발되는 자리인데, 근래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고 선발이 정밀하지 못하여 형편없는 무리가 간혹 끼어 있으니 병조로 하여금 사람됨을 살펴 현부를 구별하여 거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6일 무자
상이 남쪽 별궁 서연청(西宴廳)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과 함께 친히 사문(査問)하는 일을 행하였다. 삼공, 금부·형조 당상관, 6승지, 한림·주서가 입시하였다. 상이 청나라 사신과 함께 다례를 행하고 난 뒤, 영의정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사문할 일을 청나라 사신한테 물어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역관을 시켜 청나라 사신에게 묻게 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이시술을 먼저 사문해야 되겠다."
하였다. 이에 이시술을 계단 아래에 묶어다 놓았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질문하는 조목을 글로 써서 내게 할 수 없고 말로 전하게 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청나라 사신에게 전하기를,
"자문의 내용을 가지고 질문하는 조목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하니, 청나라 사신이 답하기를,
"귀국에서 마음대로 하시오."
하였다. 드디어 상이 판의금 허적, 형조 판서 조계원(趙啓遠)을 통하여 이시술에게 묻기를,
"네가 지방관으로서 인문(印文)을 주어 본부의 사람들에게 국경을 넘어가 나무를 베게 한 것은 무슨 도리인가?"
하니, 이시술이 진술하기를,
"평상시에 금하는 것이 매우 엄합니다. 압록강 가에 8군데 금하는 곳이 있고, 강 가운데 세 섬은 우리 나라 국경 안이고 예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곳이 많이 있는데도 평소에 늘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둔한 백성이 제멋대로 큰 금령(禁令)을 범하였으니 실로 전혀 뜻밖의 일입니다. 알면서 금하지 않는 것도 감히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어떻게 첩문을 만들어 줄 리가 있겠습니까. 애당초 백성들의 소장에 대한 제사(題辭)를 본다면 그 일은 억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일선이 청나라 사신의 말을 가지고 묻기를,
"이른바 여덟 곳 외에 상국(上國)의 지역으로서 금하는 곳이 더 없는가?"
하니, 시술이 답하기를,
"강의 중류 동쪽은 우리 나라 땅이고 그 서쪽은 상국의 땅입니다. 여러 섬은 상국의 국경을 범한 곳이 없습니다."
하니, 일선이 말하기를,
"시술이 중강(中江) 건너편에는 파수(把守)가 없다고 말하였는데, 저희들은 알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지금 삼공·육경이 다 이 곳에 있는데, 모두 압록강을 경계로 여기고 있습니까?"
하니, 상이 허적을 시켜 일선에게 이르기를,
"‘상국의 지역에도 섬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범범하게 도중(島中)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벌목을 쉽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으로 시술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일선이 청나라 사신의 말을 가지고 답하기를,
"국왕이 묻고 싶다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시술이 진술한 말 속에, 상국의 지역에 섬이 있다는 말과 강 중류에 파수가 없고 아랫사람들이 제멋대로 국경을 넘어갔다는 말은 아마도 모두 거짓말인 듯합니다. 따라서 바른대로 말하라는 뜻으로 먼저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허적과 조계원이 일선과 함께 물으니, 시술이 시종 미처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세 번이나 계속하여 그렇게 말하자, 일선이 말하기를,
"시술이 국경을 넘은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 미처 알지 못하였다고 하니 더없는 속임수입니다. 그리고 강 이쪽에는 나무가 없고 저쪽에는 나무가 있는데, 이미 나무를 베도록 허락했으니 어찌 몰랐다고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시술이 말하기를,
"이쪽 강변이 우리 나라 지역이고 저쪽 강변이 상국의 지역인 줄만 알고 범범하게 섬의 나무를 베도록 허락하였고, 저쪽 강변에 섬이 있다는 것과 아랫사람들이 경계를 넘어간 것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일선이 다시 청나라 사신의 뜻을 가지고 말하기를,
"나무를 베도록 허락할 때 감사에게 보고하지 않았는가?"
하니, 시술이 답하기를,
"일이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일선이 이에 청나라 사신의 뜻으로 단정하여 말하기를,
"사정을 알고서 벌목을 허락한 사항은 시종 원통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발각하여 살피지 못한 점은 이미 자백하였다."
하였다. 이윽고 이시술을 내보낸 뒤,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을 불러들여 물으니, 두 사람의 대답이 시술의 말과 같았다. 일선이 말하기를,
"지금 경작하는 곳이 금지하는 곳인데 왜 못하도록 금하지 않았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습적으로 경작하였으니 사실 부당한 일이다."
하니, 일선이 말하기를,
"올린 장계 속에 이말생(李末生)이란 자가 누락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말생은 장계를 올리고 제사(題辭)를 받은 뒤에 병이 나서 함께 올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말생을 문초하니 그의 말대로였다. 일선이 말하기를,
"문초하는 일이 끝났습니다."
하였다. 상이 작은 막차로 나갔다가 조금 뒤에 다시 청나라 사신을 만나 다례를 행하였고, 일선 이하 통관 등에게 차를 내리게 하였다. 일선이 말하기를,
"시술의 죄안을 속히 의논하여 정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좌우를 물러나게 한 뒤, 삼공과 허적·조계원만 남게 하여 의논하여 정하였다. 이 때에는 사신(史臣)도 남아서 듣지 못하였다.
5월 17일 기축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술의 죄가 중대하게 되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일선이 조종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것이 곧 청나라 사신의 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침에 중사를 보내 청나라 사신을 문안하고, 이어서 일선이 어제 주선한 일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하니, 일선이 말하기를 ‘이는 국왕이 나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주선한 공로가 없는데 어찌 감사할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니,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특별히 은을 주는 것이 종전에는 정한 수량이 없었습니다. 지금 어느 정도를 써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2천을 주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압록강 섬 속에 과연 인가가 있는가?"
하니, 병조 판서 허적이 아뢰기를,
"실제로 농막이 있지만 늘 살지는 않고 다만 농사철에 왕래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그 집을 철거하고 왕래하게 하지 말라."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차분히 의논하여 정하여 일체 엄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또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파수를 어떻게 정해야 되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당연히 압록강을 경계로 해야 됩니다. 이 또한 저 나라와 의논한 뒤에 정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압록강을 경계로 할 경우 우리 나라 땅이 저들에게 돌아가게 되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하였다. 우상 정유성이 아뢰기를,
"허적이 직접 사신을 보내 사문(査問)하는 일을 주선하려 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생각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사관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사관이 쓸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어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에게 으레 주는 것 외에 특별히 은기(銀器)와 잡물이 있습니다. 전에 청나라 사신이 간혹 받지 않는 경우에도 당연히 전례에 따라 물품을 적어서 주었습니다. 뇌물로 주는 은을 어느 정도로 정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등록(謄錄)을 살펴보니 3천이 최고였고 1천 5백이 중간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뇌물을 줄 때에는 으레 적은 수량에서부터 시작하여 많은 수량까지 이르렀다. 먼저 1천으로 시험삼아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정태화와 원두표가 아뢰기를,
"1천은 너무 적고 2천을 먼저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태인(泰仁) 등지의 민전(民田)을 강탈 점유한 궁노를 잡아 가두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궁노를 잡아 가두고 다스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지난번 계사(啓辭)의 말이 매우 분명하지 못하여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사리로써 말씀드리면, 궁둔전을 함부로 점유함은 모두 혁파해야 됩니다. 그러나 지난번 계사의 말로써 본다면, 궁둔전으로 절수(折受)한 지역 안에 또한 민전이 있는데, 궁노들이 구별하려 들지 않고 뭉뚱그려 점유하였기 때문에 다만 잡아가두고 다스려야 된다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지만 궁노를 잡아 가두어야 된다고 범범하게 말하였으니 어찌 그리 분명치 못한가."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종전에 궁둔전으로 절수한 지역 속에 민전이 있지만 그때마다 궁노들이 세력을 믿고 함부로 침탈하였으니, 지방의 민원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 두 고을의 묵은 땅은 비록 주인이 없다고는 하지만, 토지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고생스럽게 개간하여 오랫동안 자기 소유로 삼았는데, 하루아침에 궁가에 빼앗겼으니 그 원망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사가 이러하니, 해도 감사에게 호조의 관문(關文)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 함부로 폐단을 일으킨 자를 자세하게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교리 이민적이 아뢰기를,
"이번 여제(厲祭) 때에 신도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제문의 글이 한결같이 산천의 신에 비는 형식이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무사위판(無祀位版)을 놓고 제사를 지냈다니 일이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지방에서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고 지내는 제사에서 위판에 ‘여제신(厲祭神)’이라 쓴다는데 그 또한 증거가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하여 사례를 상고한 뒤 법식을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영중추 이경석, 영상 정태화, 좌상 원두표, 우상 정유성이 아뢰기를,
"그저께 특별히 여제를 거행할 때 위판에는 성황신(城隍神)이라 쓰고 제문의 머릿말에는 ‘여제의 신’이라 일컬었기에, 신들도 모두 의아히 여겼습니다. 《오례의》를 찾아보니, 성황에 고하는 글은 ‘앞으로 모월 모일에 북쪽 교외에 제단을 설치하고 온 나라 안의 제사가 없는 귀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려 하오니 신력(神力)으로 이 제단에 오게 하소서.’라는 것이었고, 여제의 교서는 맨 앞에 ‘왕은 말한다.’ 하고, 맨 끝에는 ‘이에 유사를 명하여 성 북쪽에 제단을 만들고 온 나라 안의 제사가 없는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며, 따라서 곳곳의 성황신에게 여러 신령들을 소집하여 이 제사를 주관하게 하노라. 오직 여러 신들은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 음식을 흠향하고 전염병의 재앙을 만들어 화기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보면, 여제를 거행하려 할 때 먼저 성황신에게 고하는 것은 상례입니다. 앞으로 성황신에게 고하거나 여제를 지낼 때의 글에는 특별히 제사를 올리는 뜻을 집어넣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 의견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민적이 아뢰기를,
"어제 남쪽 별궁에 거둥하셨을 때 좌우 시신에게 물러가게 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시위(侍衛)하는 여러 장수들과 근시(近侍)들이 모두 중문 밖에 나와 있었던 것은 일의 체모가 온당치 않습니다. 6승지를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는 승지의 죄가 아니다. 하지만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인심이 선량하지 못하고 윤리와 기강이 혼탁하여져 은의(恩義)를 손상시키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일이 간혹 명망있는 가문에서 나오고 있으니, 어찌 크게 놀라지 않겠습니까. 사직서 참봉 신여식(申汝栻)이 지난번 아비의 상을 당하여 서제(庶弟)와 싸움을 하고서 직접 고발을 하였고, 결국 형벌을 받아 죽게 하고서도 조금도 가련하게 여기는 점이 없었습니다. 그 아우의 패악함도 말로 할 수 없지만 형으로서 어찌 동생을 죽게 한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사대부들이 그 일을 서로 전언하면서 함께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를 사판에서 지워버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여식은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의 손자이고 판서 신준(申埈)의 아들이다.
5월 18일 경인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에 올릴 인물에 대하여 권점을 하였는데, 이숙(李䎘)·여성제(呂聖齊)·이유상(李有相)·송규렴(宋奎濂)·최유지(崔攸之)·오두인(吳斗寅)·정석(鄭晳)·윤절(尹晢)·윤지미(尹趾美)·원만리(元萬里) 등 열 사람이 피선되었다.
5월 19일 신묘
홍우원(洪宇遠)을 사인으로, 이익상(李翊相)을 검열로, 이민서(李敏敍)를 교리로 삼았다.
판의금 허적, 대제학 김수항이 함께 사신이 묵고 있는 곳으로 가서, 사문(査問)한 일을 상주하는 문서 속의 말에 대하여 이일선에게 말하고, 대궐로 가 뵙기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인견하고 아울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불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칙사가 을러대는 말을 했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칙사가 농사짓는 문제 하나를 제기하면서 ‘이 주본(奏本)의 말을 들으니 경계를 넘어 경작한 것은 옛부터 있었던 일이라고 하였는데 어찌 파수를 두고서 도리어 경작할 리가 있겠는가. 이는 본국의 죄이니 어찌 이시술을 사문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문하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 그대로 두고 돌아가서 본국의 죄를 황제께 고하면 사문할 사신이 다시 오거나 아니면 본국의 대신이 들어가서 밝혀야 될 것이다. 본국이 시술 한 사람 때문에 국가에 일을 일으켜서야 되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시술의 공사 가운데 사문할 때 듣지 못한 말이 많이 있는데 이는 무슨 일인가. 시술의 죄가 세 가지이니, 인문(印文)을 만들어 준 것이 첫째이고, 파수장이 있는 곳에 금하지 말라고 분부한 것이 둘째이고, 애당초 섬의 이름을 구별하지 않은 것이 셋째이다. 시술은 이 세 가지 죄를 스스로 감당하여야만 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다. 애당초 사문할 때 내가 너무 애써서 구하였기 때문에 저들이 그것을 인하여 새로이 간사한 계략을 꾸민 것이다."
하고, 또 영의정 정태화에게 이르기를,
"저들이 경계(境界)를 가지고 주장하여 반드시 주문(奏文) 가운데서 ‘경작하였다.’라고 한 부분을 삭제하려 할 텐데 장차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경작하였다고 한 부분이 시술에게는 힘을 얻을 수 있을 듯하나 만약 이 일로 하여 국가에 일을 일으킨다면 시술에게도 해가 있게 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경작했다는 말은 시술이 힘을 얻는 말인데 지금 삭제한다면 참으로 불쌍한 노릇입니다."
하고, 김수항이 아뢰기를,
"허적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잘 말하여 분변해야 되겠으나, 그들이 수긍하도록 못하고 저들의 노여움만을 더하게 되면 그 해가 도리어 클 것이다."
하니, 좌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지금 저들의 정황을 알지 못하고 말로 따지려 하면 시술한테 이로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가에 화를 끼치게 됩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자고 청하니, 모두 삭제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삭제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사신으로 갈 정사와 부사를 아직 완전하게 정하지 못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허적이 먼저 물품과 자문을 가지고 가서 오로지 시술을 구하려는 뜻을 보이고, 신은 전례에 따라 부사를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떨까 여깁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시술이 죄없이 죽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부사를 충원하려 하였는데, 지금 별도로 먼저 간다면 일의 체모가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원두표가 아뢰기를,
"주본에 이미 밝히는 말이 없는데다 허적마저 가지 않는다면 시술은 반드시 살 길이 없게 됩니다. 허적의 품계가 높지만 부사로 충원하여 보낸다면 저들도 혐의쩍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적을 부사로 보내라."
하였다. 허적이 김좌명과 함께 주문을 짓겠다고 청하자 상이 따랐다.
호남 진휼 어사 이숙이 치계하였다. 그 대략에,
"도내에 전부터 황폐한 상태로 있던 방죽을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신칙하여 수축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전주의 옥야(沃野)와 익산(益山)의 춘포(春浦)는 모두 높고 메마른 지역인데, 지금 삼례(參禮)의 큰 냇물을 끌어들여 견고하게 제방을 쌓고 그 물을 농토에 댐으로써 지난 날의 황무지가 금새 옥토로 변하여 소득이 1천 3백여 결(結)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점차 힘을 들여 물길을 트면, 임피(臨陂)와 옥구(沃溝) 50, 60리 사이에 앞으로 혜택을 입을 곳이 시종 1만여 석의 농지에 이르게 되어, 두 고을에 사는 백성들은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고 세입도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5월 20일 임진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부제학 조복양이 주문(奏文)에서 ‘경작하였다’는 말을 삭제하지 말도록 청하였고, 또 그 말을 계속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국가에서 알고 있었다고 화를 내고 돌아가서 황제한테 고한다면 반드시 화를 만드는 단서가 될텐데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예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그 한 부분을 삭제한다 하더라도 이시술과는 그다지 이해관계가 없다고 여기나 외부의 논의는 모두 그렇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도감을 시켜 이일선한테 한번 물어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칙사의 뜻이다. 새삼스럽게 일선에게 물어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설사 시술에게 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국가에 해를 끼치니 결코 삭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조복양이 아뢰기를,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가서 물어보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이런 식으로 해서는 논의가 정해질 때가 없습니다. 우의정 정유성의 뜻도 애당초에는 신들과 달랐다가 자세한 사실을 듣자 곧 깨달았습니다. 일이 다른 나라와 관계되어 있으니 쉽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관소에 가서 보니, 일선이 조종하려는 기색이 많았습니다. 뇌물을 더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호조 판서 정치화에게 묻기를,
"이 말이 어떤가?"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2천 금 외에 1천 냥을 더 주었으면 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1천 냥으로는 그의 욕심을 채우기 어렵습니다."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일선이 현저하게 주선한 공로가 없는데 지금 많이 줄 경우 훗날의 폐단이 염려됩니다. 허적과 상의해서 알맞게 헤아려 주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또 정치화가 아뢰기를,
"대통관(大通官) 김대헌(金大獻)의 말을 들으니, 칙사가 ‘경작’이라는 말에 대하여 화를 냈으니 지금 고치지 않을 경우 반드시 국가에 일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는 상당히 믿을 만하므로 그 말이 거짓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미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경작이란 부분은 고치지 않을 수 없겠다."
하였다.
5월 22일 갑오
판의금 허적과 대제학 김수항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고서 묻기를,
"주문(奏文)의 결어(結語)를 어떻게 온당하게 정할 수 있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실정을 알고 있었다[知情]’는 두 글자를 삭제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칙사의 얼굴이 상당히 부드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시술의 아들이 칠성검(七星劒)을 구하여 은밀히 준 결과일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주문의 초고를 꺼내어 읽었고, 상도 한 본(本)을 가지고 문자를 따져서 확정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상국의 사람들도 다같이 아는 바였다[上國之人亦所共知]’라는 여덟 글자에 대하여 저들이 부당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기필코 이시술을 여러 죄인들의 앞에 기재하려 하였습니다. 신들이 따졌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시술은 교수형(絞首刑)의 죄이고 국경을 넘은 자들은 참수형(斬首刑)의 죄라면, 경은 어찌하여 참수가 교수보다 무거우니 죄명으로 차례를 정해야 된다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일 그런 뜻으로 말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꼭 ‘실정을 알고 있었다.’는 말로 결어(結語)를 삼고자 하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수형의 죄로 논하는 것이 근거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이 ‘시술의 공사에 실정을 알았다는 말이 없다.’라고 따지니, 저들이 도리어 성을 내며 말하기를 ‘힐문(詰問)하기 전에는 승복할 리가 만무하다.’ 하기에, 신들은 새로운 탈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다시 따지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교리 이민적, 수찬 임한백(任翰伯)이 대면을 청하여 아뢰기를,
"저 나라에서 죄를 적용함에 있어서 《대명률》을 쓰고 있는데, 사실을 알고 있었던 죄는 《대명률》에 참수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결어를 할 경우 시술은 살아날 길이 전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은 병판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우리가 따져서 형추(刑推)를 하는 상황에 이르면 어떻겠는가."
하니, 이민적이 아뢰기를,
"어거지로 공갈하는 것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대신을 보내 다시 말한다면 혹시 들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강력히 따졌으나 이루지 못하고, 영상을 찾아가 뵈니 영상과 좌우상 및 여러 당상관들이 비국에 모여 있었는데, 삼공은 ‘저들이 이미 굳게 고집하고 있으니 따져봐야 무익하다.’ 하였고, 김좌명은 ‘저들이 그를 살려주려 한다면 주본의 말이 비록 무겁게 되었다 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겠지만 기필코 죽이려 한다면 조어가 비록 가볍게 되었다 하더라도 힘을 얻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주서(注書)를 명하여 삼공을 불러오게 하고 이르기를,
"결어 가운데 ‘사실을 알고 있었다[知情]’ 두 글자에 대해 옥당의 의견은 반드시 대신을 보내 강력히 따져야 된다 하였다. 나의 뜻은 대신이 갈 경우 그것은 곧 조정의 뜻이 되니 저들이 조정의 뜻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안다면 일이 중대함에 관계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들어줄 리도 없으리라 여긴다. 우선 문인을 뽑아 보내어 따지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민적이 아뢰기를,
"대신이 가서 따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을 바꾸어 보내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판이 다시 가서 이일선에게 ‘실정을 알고 있었다고 한 두 글자만 네가 주선하여 뺀다면 후한 보답을 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민적이 아뢰기를,
"시술이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한다면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이 슬픈 일이 있겠습니까. 또한 ‘실정을 알고 있었다.’라는 두 글자는 시술의 공사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저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죄명을 덮어씌웠으니 시술의 일이 가련할 뿐만이 아니라 훗날의 폐단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힘을 다하여 따지고 분변해야 될 부분입니다. 지금 허적을 보내 요청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다시 대신을 보내 끝까지 극력 따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일선이 곤란하게 여긴다면 비록 대신을 보낸다 하더라도 어찌 칙사한테 통할 리가 있겠는가."
하니, 좌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먼저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지 않을 수 없으니, 호조가 좋은 칼 하나를 일선에게 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5월 23일 을미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어제 관소(館所)에 가서 어떻게 의논하여 정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일선이 잠을 자고 있어 만날 수 없기에, 역관을 시켜 일선이 깨는 것을 살펴 찾아온 뜻을 전하게 하고, 김대헌(金大獻)을 불러놓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은 말이 매우 중대하여 이시술의 아들이 기필코 삭제하려고 쉬지 않고 애걸하였다. 네가 주선하기만 한다면 후한 보답을 주겠다.’ 하니, 김대헌이 말하기를 ‘시험삼아 도모해보겠으니 2백 영(令)의 담비 가죽을 구해 오면 좋겠다.’ 하였습니다. 이윽고 일선이 신들한테 말을 전하기를 ‘주문을 매듭지을 때에 칙사가 반드시 성낼 테고 나도 거짓으로 성낼 테니 공들은 염려하지 말고 입이 닳도록 강력히 따져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들어가 칙사를 만나보니 그가 말하기를 ‘시술의 공사 속에 「옛부터 강 중류에 파수가 없었다.」 했는데 그 말은 빨리 삭제해야 된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것은 그의 공사인데 어찌 삭제할 수 있겠는가.’ 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이미 「옛부터 파수가 없었다.」고 했는데 이는 조정에서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술이 사칭한 것인가?’ 하였습니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많은 변론을 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이는 병판이 혼자서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왕한테 알린 뒤에 회보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기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문의 말에 대하여 몇 군데나 고쳤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어제 김대현에게 백 금을 주겠다고 하여 비로소 주선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출입을 금지한 지역임을 알면서 넘겨 보냈다.’라는 말을 ‘금지한 지역임을 알고 있었지만 넘어가는 일이 일어나게 하였다.’라고 고쳐 뜻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는 김대헌의 공로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칙사가 신에게 문서를 완료하였는지의 여부를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모두 말한 대로 고쳤다. 다만 시술은 교수형의 죄이고 경계를 넘어간 사람은 참수형의 죄인데 지금 도리어 시술의 이름을 경계를 넘어간 사람 위에 기록하였다. 우리들의 뜻은 당연히 죄명의 경중에 따라 그 차례를 정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참수와 교수가 어찌 다르겠는가. 고칠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급히 돌아오느라 굳이 따지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강 중류의 파수에 대하여 저들이 이미 조정에 가서 아뢰라 하였으니 모르겠다고 답할 수도 없고 조정의 체면으로도 변경의 신하에게 잘못을 돌리는 것도 당치 않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애당초 사문(査問)할 때, 조정에서도 예로부터 그러하였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중간에 말을 바꾸겠습니까. 저들이 끝내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기필코 전날의 말을 고수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허적과 김수항이 먼저 하직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가 관소(館所)로 가려 하니,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경이 관소에 가거든 일선에게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부분은 어떻게 해서라도 삭제하고 싶다. 네가 주선한다면 칙사도 들어주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있는 힘을 다하여 도모하겠습니다."
하였다.
5월 25일 정유
김수항을 도승지로, 박장원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수찬 민유중이 비밀히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시술이 죄없이 죽음을 당하는 것은 상하가 모두 슬퍼하고 가련히 여기는 일입니다. 성상의 지극한 정성과 인자함은 사람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고 여러 신하들도 왕래하면서 따지고 설명하였으므로 거의 들어주리라 하였는데, 곡절이 마구 일어나고 별별 공갈을 다하였으므로 형세에 짓눌려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교외에서 친히 전송할 때 이 일에 대하여 은근하게 언급한다면 그 나라에 돌아가 보고할 때 반드시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파수하는 곳으로부터 그 밖은 우리 국경에 해당되고 의주의 백성들이 초목을 채취함에 있어 오직 섬을 의지하고 있으니 금령을 새로이 밝힌다 하더라도 예방하여 완전히 금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반드시 이번 기회를 인하여 강 중류로 파수를 옮겨 피차의 경계가 분명하고 간사한 백성들이 넘나들지 못하게 하면 훗날 저들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특별히 하나의 문건을 만들어 사신들에게 주어 곡절을 자세히 진술하여 자리를 변경하여 설치할 것을 요청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경작하였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옛 사실을 상고하여도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굳이 기휘할 필요가 없고, 기휘한다 하더라도 저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지금 실상을 바르게 진술하여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소장이 들어간 지 오래되어도 내리지 않다가 어느날 탑전에서 대신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대신들이 비밀스럽게 여겨주도록 청하였으므로 궁중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5월 26일 무술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호남 어사 이숙이 백성들의 고통 아홉 가지를 조목조목 열거하여 올리자, 상이 그 계사를 비국에 내렸다. 그러나 시행된 것은 많지 않았고, 단지 궁장(宮庄)의 세금에 대하여만 반감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5월 27일 기해
우의정 정유성이 사직하는 글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5월 28일 경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입암(笠巖)에 저장한 곡식은 본래 군량으로 쓰기 위한 것인데, 지금 어사 이숙의 치계를 보니 전 부사 이원정(李元楨) 때에 축낸 수량이 7백여 석에 이릅니다. 그를 나문하여 사실을 조사한 뒤 처치하소서. 전 감사 김시진(金始振)도 공무에 성의를 다하지 않고 각 고을로 옮겼다가 수량에 맞게 받아내지 못하였고, 그 일로 논보(論報)가 매우 많았는데도 감춰두고 조사하지 않았으니, 직무를 다하지 못한 점이 심합니다. 그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상진(李尙眞)을 이조 참판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조한영(曹漢英)을 예조 참의로, 남구만·이익(李翊)을 이조 정랑으로, 이숙을 수찬으로 삼았다.
호조가 아뢰기를,
"태인(泰仁)·고부(古阜) 등지에서 궁가가 함부로 점유한 땅이 갑술년 양안(量案)에 주인이 없는 것으로 등록되었으나, 그 뒤로 백성들이 거의 경작하여 혹은 부자간에 서로 전하고 혹은 타인에게 전매하기도 하였는데, 궁노(宮奴)가 관문(關文)을 가지고 가 일조에 빼앗았습니다. 금구(金溝) 지역에 큰 둑방을 쌓고 물을 저장한 곳이 있어 백성들의 전지가 많은 이로움을 받고 있는데, 궁노가 지도와 문서를 가지고 가서 둑방 안에 개간을 하려 하였으며 둑방의 사목을 새로이 밝히던 날 궁노가 법을 무시하고 원성을 자아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하명하기 전이었는데 ‘새로이 밝히던 날’이라고 한 것은 실상이 아닌 듯하고, 수본(手本)이 이미 호조를 거쳐갔는데 ‘여러 궁가에서 절수(折受)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선후가 뒤바뀌고 말한 내용이 근거가 없다. 태인·고부에 대하여 애당초 조사하여 아뢰라는 명이 없었는데 운운한 것은 모두 방자한 소치이니 매우 어이없는 일이다."
하였다.
5월 29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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