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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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갑진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성태구(成台耉)를 사간으로, 윤절(尹晢)을 정언으로, 경최(慶㝡)를 장령으로, 이동명(李東溟)을 지평으로 삼았다.

 

4월 2일 을사

향과 축문을 내려 각처의 전사자들을 제사지냈다.

 

승지 김시진(金始振)이 상소하여, 《주례》의 황정(荒政) 12조 안에 있는 다혼(多昏)020)  의 뜻을 따라 궁녀를 내보내어 울기(鬱氣)를 누그러뜨리고 화기(和氣)를 부르는 방편으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회보하지 않았다.

 

4월 3일 병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옥당도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는 것은 참으로 화기를 부르는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방의 문관으로서 길이 막혀 등용되지 못한 자가 몇 백 명인지 셀 수 없을 정도이며 그중에는 늙어 죽도록 작은 관직 하나도 얻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조에서 그들을 선발하여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참찬 민응형(閔應亨)이 면대를 청하자, 상이 사관에게 불러들이도록 명하였다. 응형은 이때 나이가 85세였다. 상에게 진계하기를,
"근래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재앙과 기근이어서 나랏일이 위급합니다. 신의 마음에 잠시도 그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어 감히 면대를 청하였습니다. 여러 재상들이 모두 아뢴 뒤에 제 생각을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상들은 관례에 따라 입시하게 되어 있으니 경이 먼저 말하라."
하였다. 이에 응형이 아뢰기를,
"신이 늙어서 잘 듣지를 못하니 하교하신 말씀을 사관을 시켜 써서 보여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긴 말은 써서 보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응형이 아뢰기를,
"금년의 큰 기근은 만고에 전례가 없던 것입니다. 후당(後唐)의 대리경(大理卿) 강징(康澄)이 이른바 ‘나라가 망하는 다섯 가지 징조’는 바른 말을 쓰지 않음, 훌륭한 인물이 물러가 숨음, 염치의 도리가 없어짐, 상하가 서로 미적미적함, 사민이 본업을 옮김 등이 이것인데, 신이 오늘날에 비추어보니 이 다섯 가지가 불행히도 가까이 와 있습니다. 한 가지만 있어도 나라를 망치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몇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민응형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하였고, 교리 이민적(李敏迪)도 아뢰기를,
"이 말은 모두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범상하게 보지 마소서."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금일의 형세는 양(梁)나라가 망했던 때와 같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자는 그 죄가 작지만 스스로 멸망을 취하는 자는 그 죄가 크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나가면서 고치지 못한다면 양나라처럼 망하는 불행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양나라의 멸망은 비유하면 고기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과 같은데, 대개 스스로 굳건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부질없이 무익한 성을 쌓다가 그것으로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스스로 멸망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또 《서경》에 ‘무익한 것을 일으켜 유익한 것을 해치지 않는다.’ 하였는데 지금 국가가 무익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천하의 화근은 폐단이 생기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국사가 폐단이 없는 것이 없는데 유사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신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군병(軍兵)은 본래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것인데 국가의 물자가 고갈되고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게 됨이 모두 그것에서 연유됩니다. 훈국(訓局)의 군병을 줄이는 일을 여러 신하들이 누차 아뢰었는데도 끝내 채용하지 않았고 그 뒤로는 다시 아뢰는 자가 없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상하가 서로 미적미적한다는 것입니다. 전날 옥당이 말한 바가 옳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무술년 이후 승호포수(陞戶砲手) 7백 명을 없애고, 포보(砲保)로 거두는 베를 감하고, 양남의 마병(馬兵)을 없애고, 모든 도의 영장(營將)을 없애고, 호남좌도의 전세를 실어가지 말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그의 말이 끝없이 계속되자 좌우에서 성가실 것을 염려하여 중지시키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상은 그의 연로함을 감안하여, 받아들여 시행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말하라."
하니, 응형이 아뢰기를,
"말은 다하였지만 뜻은 끝이 없습니다."
하고, 물러나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 다시 나아가서 아뢰기를,
"윤선도가 죄를 입은 것은 실로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명백히 한 결과임이 틀림없습니다만, 윤선도는 금년에 80세이고 또 선왕의 사부를 역임한 옛 은혜가 있으니, 그를 끝내 귀양지에서 죽게 한다면 성덕의 누가 될까 걱정됩니다."
하였다. 상이 정태화에게 물으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도 그의 말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사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수찬 홍주삼(洪柱三)·임한백(任翰伯)은 응형의 말이 옳다고 하였고, 교리 김우형(金宇亨)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수찬 김만기(金萬基)는 아뢰기를,
"이른바 심리(審理)란 억울하고 왜곡된 것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어찌 윤선도를 억울하다 하여 석방할 수 있겠습니까. 위리 안치를 풀어주었는데도 대간이 따지지를 않으니 신은 실로 한심하게 여깁니다."
하고, 이민적(李敏迪)은 아뢰기를,
"어찌 연로하다 하여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위리 안치를 풀 때에도 공론이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고, 교리 이민서(李敏敍)는 아뢰기를,
"윤선도는 죄악이 매우 중하여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장령 여증제(呂曾齊)가 위리 안치를 풀 때에 따지지 못한 일로 인피하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가흥(可興)·감동(甘同) 두 창고에 속한 각 고을의 신축년 전세(田稅)를 가을이 되어 징수토록 허락하였다. 이전에 조정에서 영남 지방의 기근이 다른 곳보다 더욱 심하였기 때문에 두 창고에 쌓을 신축년 전세를 본읍에 두고 구제미로 쓰도록 허락하였는데, 수령이 징세의 독촉을 꺼린 나머지 환수하지를 못하였다. 어사를 파견하자 그제서야 각읍에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 실어보내기가 어렵다고 말하였고, 결국 환자미를 내보내어 그것을 되돌려 납부하게 하도록 청하기에 이르렀다. 어사 남구만(南九萬)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자 오는 가을까지 기한을 물려 징수하도록 요청하였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곤궁하여 마련하여 납부할 수 없게 되자 부득이 기한을 물려 징수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4월 4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납 민여로(閔汝老)가 병으로 사양하여 부름에 응하지 않고,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조목조목 진술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백년의 고질을 치료하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신에게 한 가지 묘책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 화창한 시절에 정전을 활짝 열고 모든 관료들을 나오게 한 뒤 술을 하사하고 분부를 내리소서. 나라가 장차 망하려는 형편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기면서 차근 차근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시고, 다같이 화목해야 된다는 뜻으로 타이르소서. 또 선묘(宣廟) 어제시(御製詩)021)  인 ‘조정의 신하들, 앞으로 다시 동인 서인을 따지랴.’라는 구절을 외우게 하소서. 그리하여 온 조정이 화기애애하게 되면, 당쟁을 하는 자들도 사람이니 면전에서 직접 하명을 받고 누구인들 가슴이 뭉클하여 전날의 한 일을 뉘우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면 편당의 폐단이 조금 누그러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비답을 내렸다.
민여로는 호서 출신으로서 사람됨이 선량하였으나 성품이 오활하여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하였다. 그가 이 소를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

 

4월 5일 무신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승지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삼았다.

 

4월 7일 경술

고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집에 3년을 기한으로 녹을 주도록 하였다.

 

부교리 이민적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윤선도의 정상은 멋대로 뜻을 행하지 못한 남곤(南袞)·심정(沈貞)이라 하겠는데 성조에서 살려준 것은 매우 지극한 은혜입니다. 유배를 보내어 죽이지 않는 벌로 처분하였으니, 가두어서 큰 고생을 하게 하는 법은 분명 이들을 위하여 만든 것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대신이 ‘80세가 다 된 나이니 불쌍히 여겨야 된다.’라는 말을 하여 위리 안치를 풀어주려 한 것은, 용서하지 못할 죄를 차츰 가볍게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대개 늙음을 가련하게 여기는 뜻을 미루어 넓힌 것입니다. 대의가 이러하기 때문에 신이 회의할 때에 큰 해가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경연의 신하가 이 일을 그르다 하여, 헌부의 신하가 이 일로 하여 체직을 당하였습니다. 신과 헌관(憲官)은 잘못이 똑같은데 어찌 태연스럽게 간쟁하고 논의하는 자리에 앉아 깨끗한 조정을 수치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행 호군 홍명하(洪命夏)가 상의 교지에 응하여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나라가 불행하여 몇 해를 계속 큰 흉년이 들어 팔도에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하여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날마다 백성들을 구제할 계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하늘의 진노는 걷히지 않고 가뭄이 여전히 혹독하여 며칠 안으로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국가의 존망이 여기에서 결단이 날 형편입니다. 하늘과 사람은 동일한 이치를 가지고 있어 서로 유통(流通)을 합니다. 지금에 하늘이 혹독하게 재앙을 내리니 어찌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경건한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실상을 다하지 않는다면 하늘의 진노를 돌이켜 기쁘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한가한 여가에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면서 ‘내가 하늘의 뜻을 거스려 재앙을 부르게 된 일이 무엇일까. 지금 하늘을 감동시켜 재앙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하시고, 먼저 자신의 심신에서부터 언동(言動)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점검하여 가차없이 가다듬어, 어떻게 해서라도 위로 하늘의 마음에 맞고 아래로 백성들의 뜻에 답하는 방법을 구하소서. 그리고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생각에 얽매이지 마소서. 그러면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즈음에 자연히 속일 수 없는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에 상께서 편찮으시어 오랫동안 평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고, 조금만 노동을 하면 금방 악화됩니다. 이는 원기가 다하였기 때문입니다. 원기가 다한 때에는 작은 증세일지라도 방치해서는 안 되고 이미 깊이 손상되었다면 조금 나았다고 하여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때문에 옛사람이 말하기를 ‘온갖 처방의 보양(補養)도 모두 헛된 것이고 마음을 잘 잡고 있는 것만이 긴요한 법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약물과 음식은 병을 치료하는 도구이고, 마음을 맑게 갖고 욕심을 적게 가짐은 병을 치료하는 근본입니다. 먼저 그 근본을 기르고 그 뒤에 말단을 다스리면 마음이 태연하게 되어 온 몸이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되니 어찌 이목이 가리고 맛있는 음식이 빼앗는 바가 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되고 사치하는 풍습이 날이 갈수록 깊어져 다투어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것이 한이 없습니다. 위로는 공경(公卿)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함부로 국가의 금령을 범하는 일이 끝이 없습니다. 복식(服飾)은 비단과 주옥이 아니면 쓰지 않고, 그릇은 금은과 채색으로 꾸민 것이 아니면 쓰지 않고, 상제(喪制)는 온통 아름답게 보는 것으로 일삼고 있습니다. 장례를 죽은 자의 관작에 맞추지 않고 제사에 산 자의 녹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다투어가며 본을 보아 행하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재물이 어떻게 고갈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먼저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여 이 폐단을 구하지 않는다면 금령이 자세하고 형법이 엄하다 하더라도 헛수고에 그치고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은 사방의 근본인데, 화목한 분위기가 고갈되어 논의가 분열되고, 제각기 딴 마음을 가져 호오(好惡)가 공평하지 않고 시비가 정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심과 세도가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이미 구제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걱정으로서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전하께서 모든 관료들을 독려하여 전날의 폐습을 말끔히 개혁하고,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는 도리를 다하기를 힘써, 불을 끄고 물에서 사람을 건지듯이 국세를 만회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고 무슨 공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혹시라도 그들을 접견할 때에 정성스럽게 하교하고 반복하여 타일러 경계하는 뜻을 보였는데도 성상의 뜻을 깊이 새기지 않는다면 쫓아내도 되고 벌을 주어도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선비들의 논의는 국가의 원기이니, 잘 돌보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며, 꺾어버리게 되면 충직한 말은 날이 갈수록 고립되고 혼탁한 말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어지러운 상황을 다시 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공정한 마음으로 위에서 살펴 자신의 시비가 늘 명경지수처럼 투명하게 한다면 사람들의 현사(賢邪)와 시비가 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어서 일에 대처할 즈음에 털끝만치의 잘못도 없게 한다면 모든 아랫사람들이 성상을 속이거나 가리려고 하더라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에 성상께서 편찮으시어 오랫동안 경연을 열지 않아 신하들을 접견하는 일이 뜸하였으니, 함양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중단됨에 대한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이것이 옥당의 신하들이 끊임없이 진계한 이유입니다. 앞으로 조금 편안해지는 날에 때때로 경연의 신하들을 접견하고서 경서의 뜻을 논란하고 치도를 강구한다면 어찌 성덕에 도움되는 바가 없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는 탄식은 예로부터 있었지만 인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지금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는 곧 관(官)이 한창 문란해지고 관직 제도가 혼탁해진 것으로서 조정이 존중받지 못하고 치도가 향상되지 못하는 것이 모두 이 때문입니다. 지난날 선묘조(宣廟朝)에 인재를 배양하는 도리를 극진하게 하여, 한 가지 재능이라도 가진 선비이면 누구나 빠짐없이 기용하여 인재를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예에 뛰어난 자들도 똑같이 배양하여 모두 기용하였기에, 갑자기 임진 왜란을 당하고서도 마침내는 중흥의 업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우리 선조(先朝)께서도 그 일에 느낀 바 있어 대략 조종조의 고사에 따라 문사(文士)는 과제(課製) 이외에 별도로 재능을 시험보여 호당(湖堂)에 선발하여 여가를 주어 후하게 학문을 장려하였고, 유생(儒生)은 혹은 반궁(泮宮)에서 혹은 금정(禁庭)에서 시험을 보였으며, 무신도 모두 자질에 따라 권장하고 선발하였기에 당시에 상당히 일을 이룬 보람이 있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인재를 성취시킴은 나무를 기르는 것과 같아 반드시 잘 길러야만 대들보감이 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기른 일이 없이 어찌 뛰어난 인재가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교지에 답한 차자를 보니,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진심 아닌 것이 없고 모두가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나도 깊이 느끼고 통탄하는 바이다. 차자의 내용은 묘당이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4월 8일 신해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사간으로 삼았다.

 

지평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재변을 만나 죄인을 심리하는 것은 혹시라도 원통함을 품고 있는 이가 있어 화기를 손상시켰을까를 걱정함이지, 죄의 경중·대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사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윤선도가 음흉하고 사특한 마음을 품고 흉측한 말을 만들어 사림을 해치고 국가를 재앙에 빠뜨리려 한 것은 그 죄상을 논하면 4흉(四凶)보다 더 넘침이 있습니다. 애당초 유배하여 추방한 것에 대하여 여론이 이미 흔쾌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해충처럼 사악함은 그 악을 뉘우치지 않고 더욱 음흉하고 패악한 말을 함부로 하여, 기필코 간사한 계획을 이루려 하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특별히 위리 안치를 명한 것은 실로 그러한 못된 것을 통렬히 끊고 엄하게 막자는 뜻에서 나왔는데, 지금 심리를 통하여 갑자기 위리(圍籬)를 거두라는 명이 내리니, 윤선도와 같은 사람도 원통하게 잘못 받은 죄인으로 함께 논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큰 죄인으로서 팔구십 세의 나이로서 상형(常刑)을 받은 자가 수없이 많았는데 유독 윤선도에 대해서만 용서를 하니 신은 실로 그 뜻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죄를 벌하고 악을 징계하는 법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해서 훗날의 화의 싹을 키워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위리 안치를 철회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 들이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삼가 들으니, 양진(楊津)의 기우소(祈雨所)는 두 칸 부옥(蔀屋)022)  에 위판을 봉안하고 있어 장소가 비좁고 누추한데다 먼지가 쌓였으며 탁상과 여러 가지 기구들은 빠지거나 파손된 것을 채워넣고 수리하여 쓰고 있어 올바른 꼴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의 불경(不敬)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의 감응이 잘못되지 않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이와 같으니 다른 일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도의 감사들에게 일일이 사우(祠宇)을 살펴 가을의 결실을 기다리지 말고 계획을 세운 즉시 개수하여 기우제의 법도를 중히 여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논하기를
"어사의 명을 띠고 외지에 나간 자가 하리(下吏) 한 사람에게 곤장을 쳤는데 수령이 대뜸 화를 내어 비방하고 능멸한 일이 있어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호남 어사 이숙(李䎘)이 공산(公山)에 들렀을 때에 본현의 하리에게 약간의 형장을 가하였는데 현감 최문식(崔文湜)이 대뜸 분노하여 대신을 기망하였고, 그 일이 전하께 알려져 사실을 조사하는 조치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 손상됨이 작지 않습니다. 최문식이 의도적으로 남을 모함한 정상이 이미 본도의 사계(査啓) 속에서 드러났으니 엄하게 다스려 훗날의 폐단을 막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문식을 파직시키고 다시는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가 다시 아뢰자 윤허하였다.

 

행 판중추 정유성(鄭維城)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호남 어사 이숙(李䎘)이 공산에 들러 음식 대접에 관계되는 작은 허물을 가지고 서너 명에 이르는 하리를 가두어 형벌을 가하였다기에 신은 매우 놀랐습니다. 마침 어전에 나와보니, 전하의 하교에서 양남의 구제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뜻이 있기에 신이 이미 들은 바를 바르게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호서의 사계와 해조의 복계를 보니, 최문식이 말을 뒤집어 진실을 왜곡한 죄로 엄중한 추고를 받았다 합니다. 말을 전한 자가 죄가 있다면, 그 말을 곧이듣고서 함부로 아뢴 자도 어찌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사계 속에 ‘저녁밥이 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공형(三公兄)을 잡아 가두어 형추를 가하였고 대신 찻자리를 베풀고 죽 한 그릇 꿩다리 하나를 올리기에 이르렀답니다. 이와 같이 두서없는 말이 이미 배리(陪吏)의 입에서 나왔으니, 반찬의 수가 과다한 것으로 말하여 문초하고 그 죄목을 밝힌 것은 참으로 간편한 쪽으로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논의는 별성(別星)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고, 진실을 잃은 죄는 말을 전한 자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허망한 일을 상달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신을 파직시켜 망령되게 말한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들은 대로 다 아뢰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경이 이와 같이 사양하는 것은 참으로 온당치 않다. 최문식·이숙 등의 일은 묘당이 처치하도록 하겠다."
하고, 그가 올린 소를 비국에 내리니, 비국이 복계하기를,
"수령으로서, 하리가 죄를 받은 것에 분노하여 사실이 아닌 말을 전파하여 국사의 체모를 손상시켰습니다. 공산 현감 최문식을 파직시키소서. 호서에서 사문(査問)했다는 일은 하리의 공초에서 나왔기에 그대로 믿기 어려우며, 이숙을 추고하면 한 번 문답하는 사이에 절대로 그 실상을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이숙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최문식을 파직시켰으니 둘 다 죄를 주는 것은 당치 않을 듯하다. 이숙은 추고하지 말고 앞으로의 업적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에서 소가 꼬리 둘이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4월 9일 임자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여 기우제에 대한 공으로 말을 하사토록 한 명을 사양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윤선도의 위리 안치를 거두게 한 일은 신이 실상 맨 먼저 제안하였고, 전하께서 계신 앞에서 좌우 시신들에게 물어서 의견을 모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오직 가이없는 은혜를 미루어 곤궁에 빠진 다급한 사람을 구한다는 생각을 하였으니, 이는 마치 봄날의 비가 초목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적셔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예경(禮經)》을 인용한 것은 그가 매우 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옥당과 헌부의 논의가 매우 준엄한데 우매한 신은 이런 지경까지 이를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신의 직책을 삭탈하여 준엄한 논의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으니 다행스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내가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 경은 안심하라. 그리고 위리 안치를 풀어주라고 한 명을 환수하라는 논의는 내가 실상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 일이 경한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4월 10일 계축

영의정 정태화가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심리하던 날 윤선도의 위리 안치를 거두도록 청하였고, 또 우참찬 민응형이 어전에 나아가 진언함에 있어서도 신은 맨 먼저 전하의 물으심에 응하여 저의 견해로써 그대로 진술하였습니다. 그날 경연에서 물의가 준엄하였고, 이어서 대간이 올린 계사의 내용도 매우 준엄하였으니, 신이 어리석어 망발한 죄는 피할 수 없는 것인데, 처신할 바를 찾지 못하고 며칠을 보내는 사이에 스스로를 탄핵하는 데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삼가 듣건대 영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여 사단을 일으킨 것으로 잘못을 자인하였다 합니다. 신의 과실은 이경석에 비하여 더욱 무거우니, 신의 직책을 삭탈하여 한창 거세지고 있는 논의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뜻으로 비답을 내렸다.

 

병조 판서 허적(許積)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은 무지하여 처세하는 방법에 대하여 온통 아는 것이 없어, 언행을 하기만 하면 곧장 탈이 생겨 뭇사람들의 비방이 쏟아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공박의 대상이 되었으나 신이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오직 시골에 묻혀 집안에서 잘못을 반성함으로써 만절(晩節)을 보존함이 마땅합니다. 어찌 염치없이 뻔뻔스런 얼굴로 다시 나아가 맑은 조정에 수치와 욕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삭직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4월 11일 갑인

홍명하(洪命夏)를 좌참찬으로, 이연년(李延年)을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집의로 삼았다.

 

평안 감사가 치보하여 청나라 사신이 나왔다고 알리자, 판윤 여이재(呂爾載)를 원접사로 임명하여 보냈다.

 

호남 어사 이숙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못난 신이 분수에 넘친 중임을 맡고 명을 받은 이후로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음을 근엄하게 갖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여 국가가 맡긴 뜻을 저버림이 없는 것으로써 작은 보답이라도 할 계획을 하였습니다. 전하께 숙배하고 떠나던 애당초부터 수행원들이 고을에 폐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공문을 보내 먼저 신신당부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군현(郡縣)에서 전날의 폐습에 젖어 분부한 대로 따르지 못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신의 생각에 ‘접대물을 성대하게 갖춘 뒤에는 물리친다 하더라도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없게 될 것이다.’ 하고, 거쳐 갈 고을마다 먼저 재삼 경계하였습니다. 공산현에 도착하여 반찬을 두 그릇을 넘지 못하게 하도록 타이르고 또 차를 마시는 일은 베풀지 말도록 하였는데, 반찬을 차린 것을 보니 그릇 수가 갑절이나 넘었습니다. 이에 음식을 맡은 하리를 잡아오게 하였는데 하리나 사령으로서 한 명도 나타난 자가 없었습니다. 그 무지막지한 관습이 놀라워 음식을 맡은 하리를 잡아다가 그 연유를 따지고는, 이튿날 아침 간단하게 형벌을 가하여 다른 고을의 경계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들으니, 대신이 최문식의 말을 가지고 탑전에 진달하여 결국 사실을 조사케 하는 조치가 내렸다고 합니다. 신이 우매하지만 너무 성대한 접대를 염려하여 미리 고을에 경계를 하고서 소략한 접대에 노하여 하리를 벌한다는 것은 참으로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명을 받고 일을 처리해야 되겠기에 곧장 형조로 달려가지 못하니, 묘당에 명하여 다른 사람을 뽑아 빨리 보내 교체시키게 하고, 아울러 신의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처치하였으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2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에 옥을 설치하는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에 이르러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 사람을 잡아가두어 고문을 가하고 법률을 적용하여 죄의 등급을 결단하는 것이 형조와 다름없으니 이는 성조에 있어서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지난번 대신의 진달을 인하여 전하께서 앞으로는 내수사에서 죄인을 처결할 경우 형조의 도류안(徒流案)에 기재하도록 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있으면 내수사에서 논죄하여 결단한 뒤에 다만 문안(文案)을 형조로 이송할 뿐이니 사체가 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전과 다름없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내수사의 옥과 내수사 관원의 인신(印信)을 일체 혁파하여 왕된 자는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 13일 병진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옥당의 차자를 가지고 성상 앞에서 의논드리기를,
"전날 옥당이 아뢴 차자 가운데 ‘형관(刑官)을 가려 임명하면 그 자리에 오래 있게 해야 되고 낭관도 신중히 선발해야 된다. 모두 2년을 한도로 해야 된다.’라고 한 것은 그 말이 매우 옳습니다. 차자의 내용대로 모두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차자에서 언급한 바 시장(柴場)을 혁파하는 일을 의논해서 정해야 됩니다."
하였고, 교리 이민적도 아뢰기를,
"내수사와 여러 궁가에서 함부로 점유하는 폐단이 끝이 없고 사대부로서 세력을 가진 자들도 나누어 점유하여 민간에서 땔나무를 할 길이 거의 끊어졌습니다. 신이 전에 전랑으로 재직한 적이 있어 내수사의 문서가 매우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거두어서 모두 혁파한다면 어찌 성조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시장에서 입계한 문서를 내수사로 하여금 거두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차자 속에서 이른바 ‘일백 명의 홍양(弘羊)’이란 말은 반드시 가리킨 바가 있습니다."
하니, 이민적이 아뢰기를,
"근래에 각 아문에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늘리는 일이 극히 혼란하며 온갖 수단으로 침탈하고 있으니, 이것이 홍양이 한 일023)  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재삼 경계하여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차자에서 논한바 ‘문희연(聞喜宴)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놀이판을 벌인 일’을 정태화가 다시 거론하자, 상이 말하기를,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대내까지 들렸다. 대간이 말하지 않았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말한 뒤에 어찌 이처럼 봐줄 수 있겠는가."
하니,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이미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는데 대간이 말하지 않은 것은 잘못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군역(軍役) 가운데 가장 힘드는 것이 포보(砲保)입니다. 대장 이완(李浣)이 늘 말하기를 ‘포보 셋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를 보태주고 넷을 가진 자에게는 둘을 보태주어 매 사람당 두 필을 거두면, 포보의 역이 조금 가벼워져서 사람들이 기피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포보가 고역이 되는 이유는, 매 사람당 포 세 필을 완납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등록된 숫자가 1만 9천 6백 90여 명인데, 9천여 명을 추가하게 되면 매 사람당 두 필을 거둘 수 있어서 역이 조금 가볍게 됩니다. 그러나 본관에게 그 수를 책임지울 경우, 거의 1만에 가까운 인원을 보충하기란 어려운 형편입니다.
역에 나가는 자와 포보를 맡은 자 두 사람에게 함께 노력하여 한정(閑丁) 한 명을 찾아오게 하면, 전부터 포보를 맡은 자는 바칠 포가 줄어드는 것을 기뻐하여 반드시 힘을 다하여 찾아나설 것이고, 새로이 포보를 맡은 사람은 그 역이 가벼워진 것을 듣고 반드시 기꺼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1, 2년 안에 그 수를 채우지 못할지라도 5, 6년 정도로 잡으면 그 수를 채울 수 있게 되고, 앞서 포보를 맡은 자가 한정을 찾아오는 자에게는 신포(身布)를 감해주고 찾아오지 못한 자에게는 전과 같이 베를 거두어 들이면 그들도 반드시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그 말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4월 14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16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수찬으로, 홍주삼(洪柱三)을 교리로, 정석(鄭晳)을 집의로, 이정(李程)을 장령으로 삼았다.

 

판중추 정유성이 다시 이숙의 일로써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숙은 나이가 젊고 기세가 날카로운 사람으로 별성(別星)의 풍채만 알았지, 어사의 체모와 법도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공사가 아니면 형장(刑杖)을 쓰지 말아야 됨은 엄연히 국법이 있는데도 작은 죄과에 형추(刑推)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일의 체모를 알지 못하여 일으킨 일이어서 사실 질책할 것도 못 됩니다. 그러나 지금 성상께서 백성들을 걱정하는 때에, 접대하는 과정에서의 작은 실수를 가지고 형추를 한 사람이 대여섯 명에 이르렀고, 음식 접대를 간편하게 하라고 한 것은 그 뜻이 가상하지만 형장을 남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고 있으니 간편하게 하여 혜택을 베푼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그를 구하려는 자들은 사사로운 뜻이 발동하여 자기편을 비호하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아첨할 줄만을 알아, 어떤 이는 풍채가 가상하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큰 관리도 두려워하고 꺼렸다라고 하여 다투어 서로 칭찬하고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를 않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격하여 오로지 신을 질책하고 있는데, 이숙의 기세가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잘못을 말하지 못하고 앞장서서 구하며 잘 보이려고 공을 바치게 함이 이 정도에 이를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은 말을 신중히 하지 않아 한 번의 망발로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스스로 만든 재앙이니 동정할 것이 못 됩니다. 다만 오늘날의 일로 보면, 이 무리들의 한 일이 이것보다 큰 것이 있더라도 혹시라도 성명이 알아차려 살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꺼린 나머지 다투어 서로 기만, 엄폐하여 국사가 장차 날로 잘못되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진달한 것은 애당초 임금을 섬기면서 숨김이 없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왔다. 어찌 그와 같이 혐의쩍게 여기는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내수사의 면포 7동을 호조에 내려 경기도 역참의 비용에 보태쓰게 하도록 명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맨 먼저 이웃과 친족을 침탈하는 폐단을 아뢰고, 다음에 대간이 자주 바뀌는 폐단을 아뢰고, 마지막으로,
"오랜 가뭄 끝에 조금 내린 비로는 농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에 부족하니 항상 경외하는 마음으로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으시어 가정(嘉情) 시대의 중흥과 같은 공을 이루기를 도모하소서."
하니, 상이 우대하여 답하였다.

 

우부승지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여 사직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고 속히 올라오도록 하였다.

 

행 대사헌 송준길이 어머니의 분묘를 옮기는 일 때문에 면직시켜주도록 진정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부모의 분묘를 옮기려고 이미 날짜를 잡았다고 하니, 내가 어찌 경의 지극한 뜻을 절박하게 하겠는가. 상소한 내용을 보니 날짜가 멀지 않았다. 완전히 일을 마친 뒤에 속히 올라와 나의 갈망에 부응토록 하라."

 

4월 17일 경신

이익(李翊)을 부교리로 삼고, 김수항(金壽恒)을 특별히 양관(兩館) 대제학으로 임명하였다. 김수항의 이때 나이가 34세였다.

 

4월 19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문희연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된다는 일로써 대간이 논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이조 판서 윤강(尹絳), 봉산군 이형신(李烱信), 장악 첨정 이성연(李聖淵), 호조 좌랑 강욱(姜頊) 등은 모두 술자리를 베풀고 놀이판을 구경하였으며 음악 연주를 성대하게 펼쳤으니, 조금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금령을 어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홍주원 등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 영흥(永興) 등 여섯 고을에 우박이 내려 논농사를 해쳤다.

 

경상도 성주(星州) 등 몇몇 고을에 지진이 일어 괴변을 풀어주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4월 20일 계해

홍명하(洪命夏)를 이조 판서로, 허적(許積)을 판의금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간으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이익을 헌납으로 삼았다.

 

전남 감사가 도내에 전염병에 걸린 자가 1만 6천 5백 명 정도, 죽은 자가 4백 67명, 도로에서 넘어져 죽은 자가 45명이라고 치계하였다.

 

충청 감사가 청풍(淸風)·제천(堤川) 등지에 서리가 내려 목화와 서속이 반이 넘게 말라 비틀어졌다고 치계하였다.

 

4월 22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장리(贓吏) 황헌을 애당초에 정배한 것도 형벌을 잘못 적용한 것이라 하겠는데, 심리하여 방면을 받은 것은 더욱 뜻밖의 일입니다. 환수해야 된다는 논의가 갑자기 그치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있으니, 황헌은 다시 배소로 보내고 논의를 정지시킨 대관 이연년(李延年)은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여 사면을 청하였는데, 상이 관대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원두표가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인재가 궁핍하다는 탄식이 오늘만큼 심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전형 의망이 품계마다 다 고갈되어, 하나의 관직을 차임하는 데 정관(政官)이 진종일 사적(仕籍)을 들추고서도 끝내 의망할 사람을 찾지 못하니, 어느 겨를에 취사 선택하여 물의에 따르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한 4년 동안 한 사람도 발탁한 적이 없었고 사람을 쓰는 데는 오직 품계를 따를 뿐이었으니 어떻게 인재를 얻어 좋은 정치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에 김좌명을 천거에 따라 품계를 올려 제수한 것은 실상 미흡함이 없었는데 갑자기 대각의 논계에 따라 이미 내린 명을 곧장 환수하니 신은 마음속으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김좌명은 선조(先朝)로부터 자질과 인망이 드러나 특별히 아경(亞卿)에 제수하여 비국에서 일하게 하였으니, 전하께서 어찌 혐의하는 마음을 가져 금방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대신(臺臣)의 말은 대개 훗날의 폐단을 염려하여 한 것입니다. 지금에 다시 앞서의 명을 내려 인재를 아끼는 뜻을 보이고 말한 자를 너그럽게 용납하여 간쟁을 받아들이는 정성을 보인다면 어찌 지공무사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김수항의 고상하고 우아한 점, 이행진(李行進)의 높고 깨끗한 점, 박장원(朴長遠)의 순수하고 신중한 점, 이만(李曼)의 능력과 도량 등은 모두 초서(招敍)할 만합니다. 지금 종2품도 인물이 매우 모자라는데, 조복양(趙復陽)·유계(兪棨)는 모두 진휼청의 일을 관장하여 많은 실적을 올렸고 또한 문학도 발탁하여 쓰는 데에 합당합니다. 그리고 재야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이유태(李惟泰), 절대로 꺾이지 않을 지조를 가진 서필원(徐必遠)은 모두 기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좀 더 살펴 정관(政官)에게 빈 자리가 생기는 대로 의망하게 하소서. 또 전하께서도 스스로 재량하여 결단을 내리고 혹은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여 오직 인재를 얻는 일에 힘쓰고 품계에 구애되어 훌륭한 인물을 발탁하는 길을 막지 마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올린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 감탄하였다. 해조에게 차자의 내용대로 거행하게 하라. 나도 유념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차자를 이조에 내리니, 이조가 복계하기를,
"대신의 차자는 실상 인재를 얻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의 급선무로서 무엇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성상의 전교에 따라 거행해야 되겠지만, 다만 초탁(招擢)하는 일은 상례가 아니니 정관이 어찌 곧바로 의망할 수 있겠습니까. 정사에서 주의할 때에 반드시 상의 하교가 내린 뒤에 그 뜻에 따라 거행할 수 있고, 또 천거된 인물 중에 선후의 차례에 대한 구별이 없지 않으니, 다시 대신에게 물어 모두 공의에 따라야 실속없이 제수하였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별도의 단자에 성명을 써서 들여보내 전하께서 선발하는 방법으로 삼아야 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4월 23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4일 정묘

원두표를 좌의정으로, 정유성을 우의정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삼았다.

 

경성 북교(北郊)에서 여제(厲祭)를 거행하였다. 당시에 서울과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신 이민적(李敏迪)이 전에 탑전에서 ‘요즈음의 일은 노인이 먼 곳은 잘 보면서 가까운 곳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험삼아 한 가지 실례를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조정에서 양남의 여역에 대하여 근시(近侍)의 신하를 보내 여제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지금 도성 안에도 전염병이 크게 번져 마을마다 열 집에 다섯은 전염이 되었고, 더러 깨끗한 집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가 온전한 동네는 하나도 없어 노인들은 근세에 없었던 일이라 하고 있습니다. 만일 비는 일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면 왜 양남에서 행하였으며, 사리에 맞는다면 왜 서울에서는 행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또한 먼 곳은 보면서 가까운 곳은 보지 못한다는 것의 실증입니다. 빨리 유사한테 명하여 날짜를 특별히 잡지 말고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차자를 예조에 내렸고, 예조가 복계하여 거행하였다.

 

4월 25일 무진

헌부가 아뢰기를,
"전 정언 정창도(丁昌燾)가 지난번 등석(燈夕)에 선비 몇 명과 함께 술에 취하여 기생을 좇다가 밤이 이슥하여 무사들이 여악(女樂)을 두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뛰어들어가 함께 싸움을 하였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사대부의 치욕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으니 그를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무사들도 해부(該部)에게 과실을 적발하여 죄를 주게 하고 선비들은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벌을 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병조 판서 허적(許積)이 연소배들한테 무자비한 배척을 당하여 마침내 하향하기에 이르렀고, 여러 차례 불렀지만 오지 않고 있다. 허적이 선조의 특별한 은총과 대우를 받았는데 어찌 시골에 물러가 있기를 달게 여기려 하겠는가. 반드시 그의 뜻과 행적의 모난 점으로 볼 때 부득이하여서일 것이다. 더구나 객사(客使)가 이르러 본병(本兵)의 장관이 없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겠는가. 승지가 말을 만들어 하유하여 빨리 올라 오게 하라."

 

4월 26일 기사

우의정 정유성이 상소하여 사직하자 상이 관대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뜻을 전하였다.

 

4월 27일 경오

김좌명을 예조 판서로, 민정중을 대사간으로, 이인(李𡐔)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대신들을 인견하였다. 이 당시는 청나라 사신이 반조(頒詔)와 행사(行査)의 일 때문에 우리 나라로 나오는 중이었다. 상이 두 차례의 자문(咨文)의 등본을 내보이며 이르기를,
"의주 부윤 이 뜻밖의 일을 일으켜 죄를 면치 못할 판이다. 내가 조사하는 일에 동참하려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는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편찮으신 몸으로 교외에 나가 맞이하는 것도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쾌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모르긴 해도 반조의 내용은 운남(雲南)에서의 승전(勝戰)을 고한 일일 것이다. 영력(永曆)이라고 한 것은 누구인가?"
하니, 승지 심세정(沈世鼎)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서장관으로서 연경에 간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 이미 영력에 대한 설이 있었습니다. 이는 필시 허구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의주에서 일을 일으킨 것은 강을 건너가서 땔나무를 한 것이니, 어찌 그다지 큰일이겠는가."
하니, 우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그다지 큰일에 이른 것은 아닌데, 통관(通官) 이일선(李一善) 무리가 이 일로써 뇌물을 받을 단서로 빙자하였으니 후하게 주지 않을 경우 반드시 날조하여 야단을 일으킬 것입니다. 심히 통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에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아뢴 일로서 아직 의논하여 정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지금 다시 계품해야 되겠습니다. 이웃과 친족을 침탈하지 말도록 하는 것은 양역(良役)을 균등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양역을 균등하게 하지 못하면 이웃과 친족을 침탈하는 폐단을 변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원두표가 아뢰기를,
"양역을 균등하게 하지 않고 인족의 폐단을 제거하려 하는 것은 이른바 그 근본을 헤아리지 않고 그 끝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른바 ‘도고(逃故)024)  ’는 허실이 서로 속여져 간혹 집을 바꾸어 살면서 도망갔다고 사칭하는 자가 심히 많습니다. 이러한 부류들이 모두 포(布)를 감면받는다면 장차 군사가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대처하기 어려운 것이 실로 그러한 것 때문이다. 도망갔거나 죽은 것이 확실한 자라면 당연히 감면시켜 주어야 될 것이지만, 함부로 일컫는 자들에 대하여는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는가."
하니, 원두표가 말하기를,
"풍년이 드는 것을 조금 기다려 먼저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여 나라에 유민(遊民)이 없게 한 뒤에 변통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경기 지방의 전정(田政)에 대하여 선조로부터 누차 바루어야 된다고 의논하였으나 연이어 흉년을 만나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지를 측량하는 일을 호족(豪族)들은 싫어하겠지만 서민들은 좋아할 것이다. 풍년이 드는 때를 기다려 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였다. 정태화가 다시 대간을 구임(久任)시켜야 된다는 일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추고를 받더라도 체직시키지 말아야 될 듯하다."
하니, 원두표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대간을 구임시킨다 해도 꼭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이 한 직책에 오래 있으면 반드시 나태하게 되며, 또한 나이가 적고 실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각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실정에 맞지 않는 말을 하여 일을 그르치게 되면 도리어 자주 체직시키는 것보다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미한 일에 구애하지 말고 추고를 받더라도 체직시키지 말도록 하는 일을 차자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장령 경최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은 오랫동안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에 본부(本府)의 논계에 대하여 모두 미리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입시하였으니 앞서의 계사를 전해야 될 것입니다. 신이 윤선도의 위리 안치를 거두는 일에 대하여 ‘지난번 심리할 때 원로 대신들이 모두 옳다고 한 것은 필시 참작한 뜻에서 나왔을 것이다.’라고 여겼는데, 결정된 명이 내리고 난 뒤에 다시 환수하도록 청하였으니, 신은 그것이 온당한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논쟁이 오래 계속되어 논의를 정지시킬 만함에 이르러서도 신은 동료들과 미처 상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체례(體例)에 구애되어 혼자서 정지시킬 수 없습니다. 신의 견해가 이와 같으니 또한 연계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나이 적고 실무를 잘 알지 못한다.’는 대신의 배척이 있었으니, 비록 전적으로 신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태연히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조 참판 윤문거(尹文擧)가 시골에 있으면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병 때문에 직무를 보기 어렵다는 실상을 자세히 진술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4월 28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29일 임신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참찬으로, 이광직(李光稷)을 지평으로, 김우형(金宇亨)을 부교리로, 조복양(趙復陽)을 부제학으로, 남구만(南九萬)을 부수찬으로, 송시열을 우찬성으로 삼았다.

 

장령 이정(李程)과 지평 여성제(呂聖齊)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삼가 경최가 인피한 말을 보니, 윤선도의 위리 안치를 푸는 데에 대한 명을 환수해야 된다고 한 논의를 정지할 만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공의를 아랑곳하지 않음이 이 정도까지 이를 수 있습니까. 윤선도는 못된 마음을 품고 흉측한 말을 조작하였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할 죄를 지었는데도 경최의 말이 그와 같으니 신들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상신(相臣)이 ‘나이가 적고 실무를 잘 알지 못한다.’는 말로 대각을 공격, 배척하였으니 신들은 태연히 있지를 못하겠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지평 이광직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흉측한 사람의 죄가 차츰 줄어들고 대각의 논의가 한창 일어나는데도 기필코 스스로 공론과 달리하고 할 필요가 없는 일로 억지로 인혐하는 구실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다른 이를 끌어들여 그 무게를 빌리고 마침내 결정된 명이 이미 내렸다는 것으로 말을 만들었는데 기력을 숱하게 허비하고 행동거지가 근거가 없습니다. 국가가 대각을 둔 것은 임금의 이목을 그들에게 의탁한 것으로서, 꼭 사람마다 다 훌륭하지는 않고 말마다 다 옳지는 않지만 예로부터 임금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곧은 기개를 길러주고 꺾지 않으려 했습니다. 지금 애매모호하고 범범하게 말하고, 심지어 ‘나이 적고 실무를 잘 알지 못한다.’라는 등의 말로 드러내어 경멸하여, 많은 관료들에게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주에게 대각을 경멸하는 마음을 열어줄까 걱정되니, 그렇게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범범하게 말했으니 대관(臺官)으로서 어찌 인피해야 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가 공론을 저지하려 했으니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령 경최를 체차하고, 장령 이정과 지평 여성제는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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