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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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필원(徐必遠)을 대사성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승지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여성제(呂聖齊)·박순(朴純)을 정언으로, 윤변(尹抃)을 장령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가 안변 등 아홉 고을에 황충이 크게 발생하여 각종 곡식들이 손상을 입었고 전염병이 크게 번져 한 고을도 깨끗한 곳이 없다고 치계하였다.

 

6월 2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 감사가 치계하기를,
"관향(管餉) 물력이 차츰 다 떨어질 지경에 이르러 칙사와 우리 나라 사신이 왕래할 즈음에 접대할 물품을 장만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도내의 모곡(耗穀)을 가지고 보충하여 쓸 수 있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복계하니 피곡(皮穀) 1천 석, 대소미(大小米) 각 5백 석을 지급하도록 허락하였다.

 

6월 3일 갑진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각 아문과 여러 궁가의 배[船]의 수량을 정하는 일에 대하여 전에 하교한 적이 있습니다. 사옹원의 배의 수량은 《대전》을 가지고 보면 2백 척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보유하고 있는 것은 1백 50척입니다. 이를 두고 논의하는 자들이 원래의 수량이 너무 많아 50척을 줄여 1백 50척으로 정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법전에 실린 것이니 줄일 필요가 없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여러 궁가의 배는 전에 이미 수량을 정하였습니다. 내수사와 명례방(明禮坊)과 용동(龍洞)의 여러 궁가에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수량 외에 일체 늘리지 말도록 분부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지난번 양남 어사가 내려갈 때에, 시노비(寺奴婢)를 면천(免賤)시키고 받는 쌀로 진휼 물자를 보충하도록 청하여 노(奴)는 허락하고 비(婢)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사가 내려간 뒤 시비(寺婢) 중에도 쌀을 바친 자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속신(贖身)을 허가할 경우 그들의 자손들이 영영 양인(良人)이 되는데 이는 매우 부당하고 이미 받아들인 쌀은 환급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사비로서 이미 쌀을 바친 자들을 당사자에 한하여 속신을 허락한다면, 그 자신은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고 그의 자손들은 또 틀림없이 시노비가 될 것이니 일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두 번 다시 시비의 대속을 허가하지 말고, 이를 영원한 법식으로 삼으라."
하였다. 좌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훈국의 군병 가운데 근래에 죽은 자가 1천 1백여 명의 많은 수에 이르러 이 숫자를 보충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미리 요량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충한다 하더라도 1년 안에는 용이하지 않은 형편이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자, 원두표가 아뢰기를,
"지난 선묘조에 계사년·갑오년의 흉년을 만나 군병을 모집하여 훈국을 설치하였으며, 대장 이완(李浣)은 ‘당시의 일에 따라 모집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수천 석의 쌀로 한정(閑丁)을 모집한다면 보충할 수 있을테지만 해조의 경비가 바닥이 났으니 그것이 걱정입니다."
하니, 원두표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굶주리며 떠돌아다니는 자들에게 식량을 주어 모은다면 얻지 못할 걱정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모은다 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계속하여 식량을 줄 수 있겠습니까. 선조(先朝)에서 늘린 7백 명은 다시 감소시키고 다만 원래의 숫자로 정원을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궐원이 된 4백 명을 우선 먼저 보충하고, 진휼청에 남아 있는 쌀 1천 석을 가지고 모집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관(倭館)을 옮기는 일로 온 일본 사신이 1년 동안 관소에 머무르고 있는데, 여태까지 알맞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일이 폐가 있다고는 하나 경솔하게 허락하여 보내서는 안 됩니다. 웅포(熊浦)도 관방(關防)의 중요한 지역이니 관사를 그 곳으로 옮기도록 허락할 경우 앞으로의 폐단이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결코 허락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날 인재를 승급시켜 발탁해야 된다는 요청을 감히 진달하였으나, 김좌명 한 사람 이외에 발탁하여 기용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인재를 얻어 쓰려 하신다면 한 사람만을 발탁하고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에 초승(超陞)할 빈 자리가 없는가?"
하자, 이판 홍명하가 아뢰기를,
"자헌(資憲)은 없으나 가선(嘉善)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착실하게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호조가 고부(古阜)·태인(泰仁)의 민전(民田)을 조사하여 아뢴 일이 온당치 못하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밖의 논의들이 모두 일이 궁가와 관계되었다 하여 석연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그 일의 곡절을 모르는가? 그러한 일은 대간이 말해야 옳다. 해조가 묻지도 않은 일을 장황하게 말하였는데 일의 체모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조복양이 해조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방자하였다고 한 하교가 온당치 못하였기 때문에 아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조복양이 아뢰기를,
"대간이 궁장(宮庄)의 일을 가지고 논계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윤허하여 따르지 않아 아랫사람의 마음이 모두 민망하고 답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각의 논계가 매우 그릇되었는데 내가 어찌 윤허하여 따르겠는가. 관문(關文)의 선후를 분변하지 않고 주장을 고집하기만 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하자, 원두표가 아뢰기를,
"대간이 어찌 일을 잘 알겠습니까. 다만 기개를 한껏 펴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대간의 논계가 사리에 맞지 않으면 전하께서 분명하게 하교하여 시비를 분별하는 것이 옳지, 한결같이 꺾기만 하는 것은 실상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은 잘못되었다. 그들의 피혐한 말이 대다수 불손한데 하교를 하여 욕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자, 조복양이 아뢰기를,
"이 하교는 더욱 온당치 않습니다. 대간이 혹 아룀에 진의를 잘 표현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욕(辱)’이란 한 글자를 말씀하신 것은 이 무슨 분부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대간은 한 글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찌 늘 말이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6월 4일 을사

여성제를 수찬으로, 김휘(金徽)를 대사간으로, 이민징(李敏徵)을 장령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정언으로, 이합(李柙)을 지평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승지로 삼았다.

 

강원 감사가, 삼척·강릉부에 몇 밤을 계속해서 서리가 내려 콩·삼·채소가 모두 손상을 입었고 원주에 큰비가 내려 봄보리가 썩었다고 치계하였다.

 

병조 판서 허적이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부드러운 비답을 내리고 어의를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6월 6일 정미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승지들에게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6월 7일 무신

유경창(柳慶昌)을 대사헌으로, 김익렴(金益廉)을 헌납으로, 정만화(鄭萬和)·유창(兪瑒)을 승지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정만화는 사람됨이 자질구레하여 각박하고 까다롭게 사찰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았다. 일찍이 승지가 되었을 때, 각 관사를 절박하게 독촉하여 예조의 하리가 낭관에게 작은 통지를 보내 말하기를 ‘예조에 아무런 일이 없는데도 정 승지가 정원에 입직하였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자로서 배를 잡고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사성 서필원이 만화와 젊어서부터 사이좋게 지냈었는데, 만화의 옳지 못한 점을 보고서 늘 간교한 사람이라 말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제를 끊고 한 번도 함께 앉아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7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정만화는 사람됨이 자질구레하여 각박하고 까다롭게 사찰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았다. 일찍이 승지가 되었을 때, 각 관사를 절박하게 독촉하여 예조의 하리가 낭관에게 작은 통지를 보내 말하기를 ‘예조에 아무런 일이 없는데도 정 승지가 정원에 입직하였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자로서 배를 잡고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사성 서필원이 만화와 젊어서부터 사이좋게 지냈었는데, 만화의 옳지 못한 점을 보고서 늘 간교한 사람이라 말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제를 끊고 한 번도 함께 앉아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충청 감사가, 도내에 큰비가 내려 하룻밤 사이에 평지가 온통 개천으로 변하였고 모래가 덮힌 곳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으며 전의(全義)·문의(文義)·청안(淸安) 등지에 산이 무너져 압사한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았다고 치계하였다.

 

6월 9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10일 신해

홍명하를 판의금으로, 안진(安縝)·오시수(吳始壽)를 정언으로, 박장원을 예조 참판으로, 이시매(李時楳)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대사성 서필원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사(私)라는 한 글자는 나라를 망치는 근본인데 근년 이래로 점점 멋대로 행해지고 있는 지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처지에서도 불공평한 일이 버젓이 행해져 항간에서 자자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대각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으니 성상이 어떻게 들을 길이 있겠습니까. 옥당의 관원은 으레 경연을 겸하고 논사(論思)·보도(輔導)의 책임을 전담하고 있으니 그 책임이 얼마나 중대합니까. 그 중대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 선발 또한 중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홍문록(弘文錄)에 대한 규정은, 우선 한 시대에 자질과 신망이 드러난 자를 택한 뒤, 본관의 모든 관료들이 다 모여 권점을 하여 가장 많은 점수를 받은 자를 뽑으며, 이를 본관록(本館錄)이라 합니다. 그리고 삼공과 정부의 동서벽(東西壁)·관각(館閣)·이조 당상이 도당(都堂)에 일제히 모여 본관록 속에서 합당하지 않는 자를 삭제하고 합당하여 남은 자를 뽑아 이를 도당록(都堂錄)이라 합니다. 이렇게 한 뒤에 의망할 자를 다 갖추니 그 선발이 얼마나 중대합니까.
전날 도당에서 권점을 하여 뽑음에 있어서 윤지미(尹趾美)·원만리(元萬里)는 모두 본관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으로서 갑자기 뽑히고 다른 사람은 끼지 못한 것은, 어찌 도당록에 뽑힐 만한 사람이 이 두 사람에 그칠 뿐이어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윤지미는 상신의 생질이고 원만리는 상신의 친자식이며 도당은 정부의 별칭입니다. 삼공이 이 일을 실질적으로 주장하였고, 본관록에서 빠졌던 자식과 조카가 유독 끼였으니 사사로움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신은 믿지 못합니다. 고 상신 이준경(李浚慶)이 도당에서 권점하던 날 그 자식이 도당록에 들게 되자 직접 붓으로 지우고서 말하기를 ‘나의 자식은 이 선발에 합당치 않다.’ 하였으니, 그가 지공 무사하게 마음을 쓴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찌 후인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최유지(崔攸之)·송규렴(宋奎濂)과 같은 이들은 모두 합당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친인척의 힘을 입어 함부로 분수를 넘어 녹선(錄選)에 끼었으니 어떻게 사람들의 입을 막고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은 올바르게 처리하여 기풍과 절도를 가다듬고 장래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박장원과 같이 뒤로 물러나기만 하는 사람은 참으로 질책할 것도 없겠으나 민정중과 같이 강직하고 과단한 사람조차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고 체직을 도모하기에 급급하고 있으니, 지금의 국사야말로 한심스럽다 할 만합니다. 이런 일을 그대로 맡겨둔다면 장래의 우환은 고칠 방도를 찾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나라를 위한 정성에 대하여 가상하게 여긴다.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돌보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이 상소한 뒤에 어떤 자가 묻기를 ‘윤지미 등 네 사람이 반드시 다 홍문록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대는 왜 그토록 심하게 상소하여 배척하였는가?’ 하니, 필원이 말하기를 ‘지미는 본래 범용하고 만리는 위인이 추잡하고 난폭한데 혹은 상신의 생질로서 혹은 상신의 자식으로서 본관록에서 빠졌다가 녹선에 끼였다. 최유지는 용렬할 뿐만 아니라 남한 산성이 포위되었을 때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었고, 송규렴은 일찍이 호남의 지방관으로 나가 관사를 그르쳤고 부마들과 친밀하게 왕래하였는데 한데 뒤섞여 녹선에 끼였으니 지극히 외람스럽다. 내가 이 때문에 상소하여 배척하였다.’ 하였다. 서필원이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는 병통이 있으나 뜻이 높고 정직한 것으로 자부하고 일을 만나면 물러서지 않았으므로 사론이 칭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7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이 상소한 뒤에 어떤 자가 묻기를 ‘윤지미 등 네 사람이 반드시 다 홍문록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대는 왜 그토록 심하게 상소하여 배척하였는가?’ 하니, 필원이 말하기를 ‘지미는 본래 범용하고 만리는 위인이 추잡하고 난폭한데 혹은 상신의 생질로서 혹은 상신의 자식으로서 본관록에서 빠졌다가 녹선에 끼였다. 최유지는 용렬할 뿐만 아니라 남한 산성이 포위되었을 때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었고, 송규렴은 일찍이 호남의 지방관으로 나가 관사를 그르쳤고 부마들과 친밀하게 왕래하였는데 한데 뒤섞여 녹선에 끼였으니 지극히 외람스럽다. 내가 이 때문에 상소하여 배척하였다.’ 하였다. 서필원이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는 병통이 있으나 뜻이 높고 정직한 것으로 자부하고 일을 만나면 물러서지 않았으므로 사론이 칭찬하였다.

 

좌의정 원두표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도당의 홍문록은 본래 의논하는 규정이 없고, 전날 권점할 때 삼공, 정부 서벽, 이조 당상, 대제학 7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신의 자식 만리가 6점을 얻어 녹선에 끼였습니다. 신이 보잘것없으나 어찌 자식을 위하여 사사로움을 행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신에게 옛 대신이 지워버린 것과 같이 못한 것으로 질책한다면 참으로 부끄럽지만 사심에 따랐다고 말한다면 너무 의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을 파직시켜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허락하지 않았다.

 

6월 11일 임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도에 황충이 극성하여 곡물을 해쳤다.

 

충청도에 큰비가 내려 진천(鎭川)·보은(報恩) 등의 고을에 인가가 물에 떠내려갔다.

 

6월 12일 계축

영의정 정태화가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신은 대사성 서필원의 상소한 말을 듣고 몸이 오싹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홍문록에 들 사람을 권점하던 날 신의 생질도 피선되었지만 권점의 다소는 신이 모르는 바입니다. 그리고 원만리·최유지·송규렴도 모두 신이 권점한 사람이고 그것은 저 자신 공평한 마음에 나온 것이라 여겼는데, 공평하지 못하였다고 배척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이 정도까지 이른 것은 모두 신이 보잘것없어 불러온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신을 파직시켜 그 사람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필원의 상소가 말은 꾸밈이 없지만 내용이 꼭 다 옳지만은 않다. 그 점은 내가 훤히 알고 있는 바이니, 경은 작은 혐의를 내세우지 말고 대체를 보존하도록 힘써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도승지 김수항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서필원이 상소하여 홍문록의 공평하지 못함을 극언하고 ‘최유지·송규렴이 모두 합당하지 않은 인물로서 친인척의 힘으로 함부로 녹선에 끼였다.’고 하니, 신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송규렴은 신의 매부이고 합당하지 않는지의 여부는 자연히 공론이 있겠으나, 애당초 본관의 선발에서 규렴이 이미 준점(准點)에 끼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의 힘을 입어 얻은 것이겠습니까. 다만 도당에서 초록(抄錄)하던 날 신도 말석에 참석하였으나 권점은 이미 다른 사람 손에서 이루어졌으며 신이 권하거나 중시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이 이런 정도에 이른 것은 필시 신의 힘을 입은 것으로 의심한 것입니다. 신이 비록 형편없지만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윤지미·원만리가 피선된 것을 권점한 여러 신하들이 잘못이라 하였는데, 신도 그 권점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본직과 겸직인 문형(文衡)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옥당을 불러놓고 《대학연의》를 진강하게 하였다. 상은 경사(經史)를 섭렵하여 변설이 명쾌하였는데, 오랫동안 경연을 열지 않다가 갑자기 이러한 일을 행하였으므로 많은 신하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예조 참판 박장원(朴長遠)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서필원의 상소에서 ‘물러나기만 한다.’는 말로 신을 배척하고 신은 질책할 것도 못 된다고 하니 신은 참으로 관직을 욕되게 하고 있는 점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신이 조정에 선 이래로 관직에 제수될 때마다 곧 사양한 것이 어찌 사사로이 저 자신이 편하기를 도모한 것이겠습니까. 자질이 없는 사람이 관직을 맡았다가 일을 그르칠 것이 크게 두려운 점이 첫째로 당연히 물러나야만 되는 것이고, 늘 어머니의 병이 걱정되어 다른 생각까지 할 수 없는 점이 둘째로 당연히 물러나야만 되는 것이고, 몸이 일찍 노쇠하여 정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점이 세째로 당연히 물러나야만 되는 것이고, 지나친 복이 재앙을 낳은 점이 네째로 당연히 물러나야만 할 것입니다. 신이 물러나려고 하는 것은 실상 진실한 마음에서 나왔으나 물러나려고만 한다는 배척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명을 삭제하고 물러가서 한가하게 지내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부드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 우참찬 홍중보(洪重普), 이조 참의 유계(兪棨)가 서로 연이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두 도당록 권점 때문이었다. 상이 다같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아뢰기를,
"도당에 모여 녹선(錄選)하는 데는 원래 완전하게 논의하는 규정이 없고 말석에서부터 차례차례 권점하여 그 권점의 다소에 따라 취사 선택합니다. 신이 형편없지만 어찌 그 사이에 하나라도 사사로운 뜻에 따라서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서필원의 상소는 비록 정도를 지나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뜻이 매우 준엄하니 신이 감히 많은 변론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또한 신은 이미 무거운 배척을 당하였으니 결코 얼굴을 들고 출사하여 거듭 관직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새로이 제수된 판의금의 직책을 사양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 때에 도당에서 권점한 일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송규렴·최유지는 본관록에 들었으나 필원의 상소에서 합당하지 않다고 배척하였으므로 교리 이민적(李敏迪) 등도 불안하게 여기고 제각기 소장을 올렸다.

 

강원 감사가, 도내에 열흘이 넘도록 큰비가 내려 포구가 무너지고 모래가 뒤덮이는 우환이 곳곳마다 똑같으며 영동의 몇몇 고을에는 황충이 크게 발생하여 봄에 심은 각종 곡식이 모두 손상을 입었다고 치계하였다.

 

좌의정 원두표가 처음으로 사직하는 글을 올리니, 상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6월 14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중추 이경석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귀머거리 장님처럼 시골 구석에 깊숙이 살다가, 늦게서야 서필원이 상소하여 ‘집의 최유지가 친인척의 힘으로 외람되게 녹선(錄選)에 끼였다.’라고 배척한 말을 들었습니다. 최유지의 형 휘지(徽之)의 처는 신의 누이이므로 신의 생각에 신을 가리켜 친인척이라 한 것이 아닌가 의아하게 여겼고, 어제 이리저리 탐문한 결과 비로소 친인척이라 한 것이 신을 지적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있을 수 없으니 신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 일이 경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렇게까지 혐의쩍게 여기는가.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이조 참판 이상진(李尙眞)이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빨리 올라오게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소대(召對)하였다.

 

6월 15일 병진

전 사간 박증휘(朴增輝)와 전 부사 최일(崔逸)을 기역(畿驛)에 장배(杖配)하였다. 그 이유는 전에 장성 부사(長城府使)로 있을 때에 산성의 군량미를 허위로 기록한 일 때문이었다.

 

6월 16일 정사

영중추 이경석이 전의 일을 거듭 밝히고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송시철(宋時喆)·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지평으로 삼았다.

 

충청 감사가 온양군(溫陽郡)에서 전패(殿牌)를 분실하였다고 치계하였다. 당시에 본도에서는 2년 동안에 네 차례 이러한 변고를 당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전에 이러한 변고가 모두 수령을 쫓아내려는 음모에서 말미암았으며, 수령을 파직시키지 말도록 한 것이 이미 근래의 규례가 되었습니다. 다만 전패를 만들어 봉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 말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6월 17일 무오

호서 천안(天安) 사람 신일생(申一生)이 미쳐 실성하여 손으로 조모를 시해하였다. 도신이 계문하고, 경차관을 보내 사실을 조사하고 예에 따라 삼성(三省)이 추국하여 참수형에 처하였다.

 

6월 18일 기미

황해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치계하기를,
"이정두(李廷枓)란 자가 선조 때의 사패전(賜牌田)이라 칭탁하고 임전(林荃)과 함께 도모하여 평산(平山)의 민전을 궁가에 몰래 팔았습니다. 성종 정덕(正德) 8년의 사패라고 이정두가 말하였으나, 정덕 8년은 성종이 승하한 뒤 21년째의 해이니 위조한 실정이 분명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또한 재령(載寧)·신천(信川)의 전지에 대하여 문기(文記)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는 본토에 사는 백성들이 오래 전부터 경작해 온 땅인데, 하루아침에 빼앗겼습니다. 신의 감영에 소속한 화전도 그 속에 들어 있으며 매년 세금을 징수하여 역참의 비용에 보충하고 있습니다. 지금 빼앗긴다면 그 또한 절박한 걱정이 생기는데 하물며 몇 이랑의 토지에 목숨을 붙이고 사는 백성들이겠습니까. 세 고을의 수령이 백성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궁차(宮差)027)  에게 겁을 먹고 영문에 아뢰지 않은 채 곧장 먼저 책을 만들어 올려보냈으니 더욱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세 고을의 색리는 지금 잡아다가 형신(刑訊)하고 있으니, 신천·재령의 민전을 해조에게 빨리 복계하여 처치하게 하고, 이정두도 해조에게 본도로 잡아보내 전지 주인과 함께 한 곳에서 추핵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 뒤에 이정두와 임전은 모두 잡혀서 심문받은 결과 간사한 실상이 드러나, 임전은 형장을 맞다가 죽었고 이정두도 옥중에서 죽었다.

 

영중추 이경석이 세 번째로 상소하여 파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다른 사람으로서 공박을 받은 자에 대하여는 그 공박이 모두 공론에서 나왔는지 신이 모르지만, 신이 배척받은 것만은 유독 공론이라 여깁니다. 신이 관계한 바가 없는데 다만 관직이 높은 것 때문에 억측하고서 배척하였으니 또한 공론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또,
"서린(西隣)이 꾸짖는 말은 참으로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으나, 우리 나라 사람은 마땅히 서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풍파가 평지에서 일어나고 많은 의심이 지척에서 생기고 있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다 겪고 또 이 지경을 만났으니 위태한 처지와 황혼의 나이에 물러가지 않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사직하니, 상이 부드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황주(黃州)·진주(晉州)는 평소 병든 고을이라 하여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입니다. 진주 목사 이규로(李奎老)는 부임한 지 겨우 일 년이 지났고, 황주 판관 김현문(金炫文)이 부임한 지는 날이 더욱 가깝습니다. 모두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는 소문이 없었는데 갑자기 하고(下考)에 두었으니 체직되기를 도모한 흔적을 훤히 알 수 있습니다. 하고를 말소시키고 다시 부임하여 재임 기간을 채우도록 하며, 양도의 감사는 출척을 공평하게 하지 않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교리 이민적, 수찬 안후열(安後說)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상소하여 군(郡)으로 내보내기를 청하였다. 상이 소를 내리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지금 경악의 신하로서 문학과 재망(才望)이 이민적만한 자는 참으로 얻기 어렵고 안후열은 선조에서 사가 독서를 시켰던 신하입니다. 일시에 외지에 내보내는 것은 정사의 체모가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게 특별히 쌀 10곡(斛)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6월 20일 신유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모든 승지들에게 공사(公事)를 갖고 입시하게 하였다. 옥당도 면대를 청하였다. 도승지 김수항이 아뢰기를,
"근일에 비 내리는 형세가 폭우였는데, 이는 전에 없었던 일로서 곡식의 피해가 참혹했을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았으나 기청제(祈晴祭)를 지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우승지 이은상(李殷相)은 아뢰기를,
"근래 전염병이 더욱 치열해지고 장마 또한 지리하여서, 동활인서에서 병으로 고통받는 자가 거의 2천여 명에 이르니 진휼하는 방도를 세우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천막, 자리, 식량을 더 주도록 명하였다. 부제학 조복양이 아뢰기를,
"그 밖에 사사로이 장막을 나온 사람들도 4천여 명이나 된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모두 양식을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간원이 아뢴 진주 목사 이규로, 황주 판관 김현문 등의 하고(下考)를 말소시키고 현직에 그대로 두자고 한 일은,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적을 따져 출척함은 국가의 막중한 법이며 하등(下等)에 든 것을 없애주는 일은 실상 전례가 없고 또 훗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전부터 수령으로서 피하기를 도모한 사람에게는 응당 적용할 벌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고는 말소하지 말고 피하기를 도모한 데 대한 법을 적용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자주 신하들을 접견하여 언로를 활짝 열어야 된다는 뜻으로 서로 계속하여 진달하자, 상이 혹은 대답을 하고 혹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옛날 송나라 휘종(徽宗) 때에 수재(水災)가 발생하자 이강(李綱)이 상소하여 당시의 일을 극력 진술하였는데, 이강은 마침내 쫓겨났고 휘종은 결국 나라를 망치기에 이르렀으며, 인종(仁宗) 때에도 똑같이 수재를 만났으나 정전을 피해 기거하고 반찬을 줄이고 백성들의 역(役)을 면제하는 등 재앙을 누그러뜨리려는 도리를 다하여 마침내 태평 시대를 누렸습니다. 이 두 임금이 재앙을 만난 것은 똑같았으면서도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였으니,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재앙에 대응하는 방법이 달랐던 것입니다. 신은 오늘날 수성(修省)하는 방법이 평범하게 재앙을 만나 대처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송시열·송준길·윤문거·윤선거·이유태 등이 있는 곳에 특별히 하유하여 올라오게 하고 아울러 재앙을 누그러뜨릴 계책을 묻는다면, 어찌 진달할 말이 없겠으며 또 어찌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지금이 정신을 모아 만회하기에 급급해야 될 때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늘의 마음에 응하고 백성들의 바람을 달랠 수 없습니다."
하였고, 교리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뜻이란 모든 일의 밑둥입니다. 상께서 먼저 지향할 방향을 정하고서 사방이 그것을 보고 들어 상이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한 뒤에야 재야인사들도 초치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찬성과 전 대사헌이 있는 곳에 사관을 보내 그들의 생각을 묻고 또 빨리 올라오라는 뜻을 유지(諭旨) 속에 언급하며, 윤문거·윤선거·이유태가 있는 곳에도 하유하여 올라와서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하게 하라."
하였다. 이어서 부교리 이민적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기강이 진작되지 못하는 폐단에 대하여 어전에서 아뢰었으나 다시 생각한 바가 있으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궁가들의 세금을 면제한 결수(結數)에 대하여 호조가 이미 개정하였고 비국도 의논하여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의 처분이 없으니 신은 이 일이 전하의 친애하는 마음이 지나친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금을 면제하는 일은 등대(登對)하였을 때 대면하고서 정하려 하였고, 염분(鹽盆)·어전(漁箭) 등의 일은 이제 막 다시 조사하게 하였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하였다. 또 조복양이 아뢰기를,
"전부터 노산(魯山)·연산(燕山) 두 묘소에 때로 치제(致祭)하는 전례(典禮)가 있었으니, 지금 재앙을 만난 때에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에 치제한 것은 내가 본래 알고 있지만, 연산묘에도 치제한 적이 있는가? "
하자, 복양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 예관을 따로 보내어 치제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관이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1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도목 대정(都目大政)에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오준(吳竣)을 판중추로, 박세모(朴世模)를 경기 감사로, 정지화(鄭知和)를 우윤으로, 조윤석(趙胤錫)을 예조 참의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정언으로, 정만화(鄭萬和)를 경상 감사로, 홍처량(洪處亮)을 강원 감사로, 권대운(權大運)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교지를 대신 쓰게 하고 송시열·송준길에게 일렀다. 그 대략은 이러하다.
"경이 조정에서 떠나고부터 경을 생각하는 마음 끝이 없었다. 전후로 하유한 뜻은 간절하고 절박할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경은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않으니 나의 성의가 천박함을 한탄한다. 게다가 국가가 불행하여 이러한 온갖 재앙을 만났으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비통함이 타는 듯하다. 또 어떤 재앙의 기틀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잠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경은 재야의 덕망 있는 자로서 선왕의 시대에서 다시 없는 대우를 받았으니 도의상 고락을 같이해야 마땅한데, 이 근심스럽고 급박한 때에 어찌 차마 아무런 걱정없이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오직 경은 뜻을 확 바꾸고 빠른 시일 안으로 올라와 닥친 어려움을 구제하여 패망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게 하라."

 

교지를 초하도록 명하여 8도 감사와 송도·강화 유수에게 하유하였다. 그 대략은 이러하다.
"재앙을 만나 형을 신중히 하는 일을 잠시라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 누차 심리를 거쳤지만 신원하지 못한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서울의 옥에 갇힌 죄수들은 이미 유사에게 너그럽게 처결하도록 명하였다. 경들은 죄인을 신중히 심의하라는 나의 뜻을 깊이 유념하고 도내의 옥에 갇힌 죄수들을 죄의 경중에 따라 즉시 처결한 뒤에 계문하여 옥살이를 지체시켜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

 

대사성 서필원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영부사 이경석의 세 번째 상소를 보니, 실로 깜짝 놀라 몸둘 곳이 없습니다. 이미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할 말을 다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감히 한 번 나아갔다가 한 번 물러나고 잠시 드러냈다가는 금방 숨길 수가 있습니까. 지난번 홍문록을 만들 때에 아무개 상공이 아무개를 위하여 힘을 썼다는 말은 항간에 유전되었던 것이고 신이 경솔하게 믿고서 상달한 것이 그것입니다. 신이 전에 들은 바로는, 최유지가 남한 산성에 들어가 세마(洗馬)에 제수되고 소현(昭顯)이 북쪽으로 행차하던 때 수행원에 뽑혔는데, 노모가 있다는 핑계로 비국에 호소하여 드디어 면하였습니다. 그리고 높은 목소리로 성내던 모습은 눈으로 본 사람은 누구나 통탄스럽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합니다. 최유지가 후일 과거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추천되었으나 결국 그 일로 하여 논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논박도 마침 최유지와 당색(黨色)이 다른 사람한테서 나왔기 때문에 그를 신구한 자가 모두 당론으로 돌렸는데, 최유지와 당색이 같은 사람으로서 그 일을 직접 본 자가 증거하여 통렬히 배척한 뒤에야 그 논의가 종식되었습니다. 신은 일찍이 ‘남한 산성에서 포위되었던 변고는 신하로서 목숨을 바칠 때였는데, 어찌 차마 궁관(宮官)이 되어 시종관으로 뽑힌 뒤에 빠지기를 도모할 수 있을까.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사람들의 말이 잠잠해지고 끌어들인 힘이 커서 양사에 재직하기는 하였지만 옥당에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이 또 들은 바로는, 최유지가 사국(史局)에 천거되었다가 논박을 받았을 때, 이경석이 경연에서 극력 변명하였고 또 같은 당색(黨色)으로서 증거를 댄 자를 힐책하여 말하기를 ‘영공(令公)의 말 때문에 최유지가 장차 버려진 사람이 되겠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라고 했다는 말을 지금까지 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이 이 일에 대하여 귀로 듣고 마음속으로 평한 것이 전부터 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이 앞서의 상소에서 나타낸 것입니다. 끝부분에서 ‘스스로 슬퍼한다.’라고 한 곳의 몇 구절 이야기는, 그 시비와 당부(當否)에 대하여는 분별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신의 지은 죄가 그와 같고 욕을 당한 것이 이와 같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군부를 섬기겠습니까. 저의 직책을 깎아 버리소서."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하였다.

 

정언 안진(安縝)이, 이규로 등의 하고를 말소하자고 한 것이 물의의 비난을 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예조가 조복양이 진달한 노산·연산의 묘소에 치제하는 일을 대신들에게 문의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계속해서 노산의 묘에 치제한 일이 있었으나 천재를 당하여 치제했다는 것은 신이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연산의 묘는 중묘(中廟) 이후로 두 차례 제사를 내린 적이 있었을 뿐이니 노산에 비교할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똑같이 제사를 내린다면 안 될 것도 없겠으나, 천재를 당하여 거행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정유성이 아뢰기를,
"천재를 당하였을 때에 똑같이 제사를 지낸다 해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재를 당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일이 매우 온당치 않다. 영의정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6월 22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3일 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중추 이경석이 교외에 나가 있으면서 네 번째로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대사성 서필원의 두 번째 상소를 보니, 홍문록을 만들 때에 유전했던 말을 다시 거론하고 또 정해년에 연소배들이 매우 정도에 넘치게 한 말을 가져다가 모함할 바탕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홍문록을 만들 때에 신이 참여하여 알고 있는 것이 없지만 힘을 썼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면 반드시 듣고 본 자가 있었다는 셈인데, 신이 어느 때에 어떤 사람에게 말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을 전한 자가 어떤 사람한테서 들었는지 신은 알지 못합니다. 신이 미망하지만 말한 것이 있으면 전부 잊어버리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데, 어찌 감히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위로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정해년의 일에 있어서는 그것이 이미 과거의 일이어서 성명이 통촉하지 못할까를 염려하였기 때문에 감히 대략 그 개요을 진술하였던 것입니다. 대개 신은 병자 호란에 남한 산성에 호종하고 들어가 그때의 일을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그 뒤 12년이 지나 최유지가 등과하여 한림의 천거에서 밀려나고 다시 괴원(槐院)을 아울러서 개정하였기 때문에 신이 그 당시 상소하여 ‘최유지가 그 아비 최연(崔葕)을 따라 노모를 데리고 남한 산성에 들어가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는데, 당시에 근거없는 말이 들끓어 「대가(大駕)가 성을 나가면 몽고군들이 곧바로 들어온다.」고 하였으므로 자식의 정리로서 차마 노모를 버리고 먼저 떠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세자를 익위(翊衛)할 관원을 무신으로 바꾸려 할 때 탈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시강원에서 최유지를 불러서 물었으니, 최유지가 들어가 정황을 설명한 것은 불러서 물었기 때문이었고, 곧장 비국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본래 실상이 아닙니다. 시종하고 있던 여러 신하들과 대소 관원이 둘러앉아서 들었는데 이른바 이치를 거슬렀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모든 사람들이 살아 있으니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하고 비방하는 말이 여기에서 기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진달한 바는 최유지가 괴원(槐院)에 속하였던 것을 뒤이어 깎아버린 일이 너무 심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후의 본말이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한데, 서필원이 그토록 신을 잡아 누르니 신이 어찌 감히 조정의 반열에 끼여 침욕을 감수하겠습니까. 신의 본직과 겸직을 모두 파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서필원이 본말을 모르고 한 말을 가지고 어찌 지나치게 인혐하여 경솔하게 대처함으로써 체면을 손상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깊이 유념하고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그리고 속히 들어오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 끝에 내린 비가 도리어 수재가 되었으니 심히 불행하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양남과 북관이 더욱 참혹하게 수재를 입었다 합니다."
하였고, 행 대사간 김휘(金徽)가 아뢰기를,
"여러해 동안 잇따라 결실이 안 되던 끝에 또다시 수재가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은 두려워할 만합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돌이켜 조용히 성찰한다면 어찌 이런 상황을 불러온 이유가 없겠습니까. 근래에 대각의 논계가 여러 궁가의 일에 대하여 조금만 언급하면 윤허하지 않으시니 이는 성세(聖世)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 당 대종(唐代宗)이 승평 공주(昇平公主)의 물레방아를 없애게 하였습니다. 승평은 대종의 딸로서 없애지 말도록 울면서 하소연하였지만 대종은 꼭 없애야 된다는 뜻을 일러주고 마침내 없앴습니다. 대종은 평범한 군주로서 이러한 일을 하였는데 어찌 성명으로서 도리어 그에 미치지 못하십니까. 성명께서는 반성하고 두려워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이 아뢰기를,
"아름다운 말을 잘 살펴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재앙을 만나 수성(修省)하는 도리입니다. 김휘의 말이 매우 옳은데도 끝내 답변이 없으니 언로를 막는 것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호남 어사가 아뢴 사찰의 비(婢)를 면천(免賤)시키는 일에 대하여 등대(登對)했을 때 아뢰어 정하라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여쭙니다."
하였다. 부제학 조복양이 아뢰기를,
"근래 이 일 때문에 바깥 의논이 신의없는 일이라고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자(婢子)를 면천시키는 일은 애당초 거론치 않았으니, 지금 별로 신의를 잃은 일은 없다. 비자에게 이미 면천을 허락치 않았으니, 받아들인 쌀을 계산해서 환급하라."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면역(免役)은 전과 같이 아뢰어서 정하여 시행하고, 면천의 대가로 받은 것을 덜어 내어 환급하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하였다. 정태화와 호조 판서 정치화가 일제히 그것은 매우 당치 않다고 하니, 조복양이 아뢰기를,
"애당초 면천시켜준다고 약속하고서 지금에 면역만을 허락한다면 이미 신의를 잃어버리는 것이 되고, 면천의 대가로 낸 곡식마저 환급하지 않는다면 더욱 당치 않습니다. 쌀은 잃어버려도 되지만 신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면천의 대가가 면역의 대가보다 많기 때문에 조복양이 덜어내어 환급하려 한 것이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도신에게 그 뜻과 소원을 물어보게 하여 면역을 시켜주던가 그 쌀을 돌려주던가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즉위한 후 태봉(胎封)028)  의 석물(石物)을 즉시 가설해야 되는데 신들이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여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했으니 실로 이는 전례(典禮)에 흠이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묻기를,
"태봉에 석물을 가설하는 것이 옛부터 있었던 관례인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명묘조에 관원을 보내 수리하게 한 일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을에 결실이 되는 때를 기다려 시행하라."
하였다. 공조 판서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북로의 봉수(烽燧)가 늘 단절되는 걱정이 있는데, 그것은 대개 마천령(磨天嶺)등의 고개가 그 사이에 막혀 산은 높고 구름은 검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회양(淮陽)·금성(金城) 두 고을 사이에 첩첩 산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고 구름이 늘 끼여 있다고 합니다. 봉화의 단절이 사실 그러한 것에 말미암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수가 그와 같으니 작은 걱정이 아니다. 양도에 분부하여 상세히 살펴 알맞게 대처하게 하라."
하였다.

 

전남도 전주 등 7, 8읍에 큰물이 져서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통진 현감(通津縣監) 이익(李翊)은 경연에 출입한 신하로서 외직에 전보해서는 안 됩니다. 체차하고 정관(政官)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4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정전으로 되돌아와 평소의 반찬과 북을 치는 일을 회복하였다. 이 날이 입추(立秋)였다.

 

헌부가 장리(贓吏) 황헌(黃瀗)을 유배에서 풀려나게 하라는 계(啓)를 정지하였다.

 

6월 25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남도를 구제할 때 쌀을 바친 시비(寺婢)에 대하여 어사가 면천을 허가하고 나서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면역만을 허가함은 신의 생각으로는 부당하게 여깁니다. 애당초 면천하는 일에서 비자(婢子)는 거론하지 않았으나 또한 명백하게 방지한 일도 없었으니 어사가 쌀을 바치도록 허가한 것은 형편상 그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할 때에 취하여 쓰고 나서 조금 숨을 돌린 뒤에 이런 처사를 한다면 원근에서 듣는 이들이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허다한 노비를 잃는다 하더라도 신의를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한 명의 여종 때문에 이러한 이해를 따지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왕자(王者)의 정치가 결코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쌀을 바친 여종을 어사의 장계대로 면천시키도록 허락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남 진휼 어사 남구만이 들어와 면대를 청하자,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고서 진휼하는 일의 전말을 묻고 또 죽은 자들이 얼마쯤이냐고 물으니, 남구만이 2천여 명이라고 답하였다. 상이 측은히 여기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기민(飢民)들이 먹을 곡물로서 추가로 들여보낸 것은 형편상 되돌려 받기 어려우며 아예 감면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이미 반감하게 하였으나, 다 감하지 않은 것이 아직 미(米) 3천 석 정도, 조(租) 5천 석 정도입니다. 감사 민희(閔熙)가 신에게 이르기를 ‘반을 탕감하는 것은 흔쾌히 전체를 탕감하는 것만 못하다. 상평청에 진휼하고 남은 곡식이 아직 6천 석이 있으니, 3, 4천 석을 덜어내면 그 나머지는 본영의 별회곡(別會穀)으로 보충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기민들이 받은 것을 모두 탕감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묘당이 계품하여 처리하게 하였고, 대신들은 그의 말대로 탕감시켜 주도록 청하였다.

 

큰비가 그치지 않아, 도성 안에서 집이 무너져 압사(壓死)한 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호조에게 명하여 각각 면포(綿布) 두 필, 쌀 다섯 말을 하사토록 하였다.

 

좌의정 원두표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대개 도당록(都堂錄)과 홍문록(弘文錄)에 들 사람을 선발할 때에는 논의를 완결하는 규례가 없습니다. 과거의 일로 말한다면, 윤두수(尹斗壽)가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 그 아들 윤훤(尹暄)이 기해년의 녹에 들었고, 윤방(尹昉)이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 그 손자 윤지(尹墀)와 조카 윤순지(尹順之)가 갑자년의 녹에 들었고, 오윤겸(吳允謙)이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에 그 사위 구봉서(具鳳瑞)가 정묘년의 녹에 들었고, 정태화가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에 그 아우 정만화(鄭萬和)가 정유년의 녹에 들었고, 신이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 사위 이민서(李敏敍)가 또한 녹에 들었으니, 이는 고금에 통행된 규례입니다. 신의 아들 원만리(元萬里)가 녹에 들었을 때 신은 스스로 송구스럽게 여겼을 뿐인데, 사심에 따랐다는 배척이 전혀 뜻밖에 나오니 이것이 어찌 신의 본정을 알고서 한 말이겠습니까. 신을 삭직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서필원의 근거없는 말을 가지고 경은 어찌 지나치게 인혐하여 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가. 지금 가뭄과 홍수가 서로 이어져 변고가 숱하게 발생하고 있다. 경이 큰 덕을 가진 원로로서 어찌 작은 혐의로써 사양해야 된다고 여길 수 있는가. 빨리 소장을 올리는 일을 중단하고 조야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면, 원만리는 훈귀(勳貴)의 자식으로서 평소 유가(儒家)의 바른 의리가 있다는 평판이 없었다. 비록 대각(臺閣)을 거쳤으나 사람들의 신망이 매우 가벼웠으며 본관에서 애당초에 뽑지 않았던 것도 대개 그때문이었다. 도당록에 피선되자 서필원이 진소(陳疏)하여 배척하였고 공론도 옳게 여겼다. 원두표는 대신의 신분으로서 이준경(李浚慶)이 그 자식을 지워버린 사례처럼 하지 않고 선조의 명상들을 널리 인용하여 스스로 해명하는 방법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영부사 이경석이 다시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고 하유하였다.

 

6월 26일 정묘

경기 감사가 도내에 큰물이 져서 물가의 인가가 떠내려가고 벼가 침수되는 등 손상을 이루 다 계산할 수 없다고 치계하였다.

 

6월 27일 무진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비의 형세가 사납고도 급한데 이처럼 그치지 않아 어느새 높은 곳까지 잠기는 재앙이 되었다. 비가 개이기를 비는 일을 해조가 여태까지 거행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문(四門)의 영제(禜祭)를 곧바로 거행하라."

 

6월 28일 기사

태백성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6월 29일 경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심유(沈攸)·이숙(李䎘)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30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우찬성 송시열이 사양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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