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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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좌의정 원두표가 다시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부드러운 비답을 내리고 어의를 보내 병을 돌보게 하였다.

 

헌납 김익렴(金益廉)이 소를 올려 사직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죄인 윤선도가 심리의 대상에 들어 위리 안치가 풀리게 되었는데, 전하께서는 윤선도에게 무슨 심리해야 될 원통함이 있으며 무슨 신장해야 될 억울함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대각의 신하가 이것은 언급하지 않고 위리를 거둔 일만을 논하니 선후의 순서를 안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공론을 펴야 하는 처지에서 끝내 통쾌하게 시비를 분변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성상께서 잘 듣지 못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오두인(吳斗寅), 장령 송시철(宋時喆), 지평 이단석(李端錫)이 김익렴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을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다. 장령 이지무(李枝茂)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윤선도의 철리(撤籬)를 환수해야 된다는 논의에서 실제로 앞뒤로 의견을 달리한 혐의가 있어 두 차례나 허물을 자인하고 인피하였으나, 규례를 벗어나 출사를 청하였고, 누차 사양하는 단자를 올렸으나 시종 저지를 받았습니다. 한결같이 인혐하고 들어가는 것도 송구스러운 점이 있고 다시 무릅쓰고 출사하는 것도 대각의 체모에 어긋납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김익렴의 배척을 받았으니, 태연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였고, 사간 정계주(鄭繼胄)도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빈청에서 회의할 때 신이 이미 윤선도의 철위(撤圍)를 논한 데에 참여하였는데, 그 일의 불가함을 배척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이 논의에 어찌 감히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헌납 김익렴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윤선도를 북쪽 변방에 안치해야 된다는 국론이 이미 이루어졌고 위리(圍籬)는 애당초 특명에서 나왔으니, 해가 지난 뒤에 성의(聖意)를 분명히 보이고, 철위한들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심리할 때에 그 사람을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부류로 혼동하여 넣은 것은 결단코 불가합니다. 더구나 완전히 석방하여 그 집에 돌아가 죽게 하자는 요청이 철위하라는 명이 내린 뒤에 나왔으니, 틈을 타서 사면을 바란 그 뜻이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그런데 대각의 신하들이 어찌 늙었다는 점을 가지고 용서할 수 있습니까. 신의 본의는 이와 같은 데 불과하며, 무슨 여러 신하를 비난하고 배척할 깊은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 신하들이 잘 살피지 않고 서로 연이어 인피하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처치하겠습니까. 체직시키소서."
하였고, 대사간 김휘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김익렴의 상소 속에서 ‘틈을 타서 사면을 바란 뜻이 매우 가증스럽다.’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는 전 참찬 민응형(閔應亨)을 가리켜 배척한 것이고, 끝에 ‘또한 시비를 분명하게 말한 일이 없다.’라고 한 말은 대관을 비난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애당초 민응형이 윤선도의 석방을 요청한 것은 연로한 사람이 외딴 변방에서 죽어갈 것을 불쌍하게 여긴 데에 불과하고 틈을 타서 사면을 바랐다는 것은 실상 뜻밖입니다. 설사 신에게 그 당시 입시하게 하였더라도 절대로 민응형을 배척할 마음이 없었을 텐데 어찌 김익렴의 여론(餘論)을 주워다가 지금까지 잘못을 따지겠습니까. 신이 이미 말을 하지 않았다는 배척을 받았으니 처치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부제학 조복양 등이 김익렴에게 배척을 당했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솔하고 괴상한 말을 듣고서 어찌 사양하는가. 사양하지 말라."

 

옥당이 양사를 처치하여, 오두인·송시철·이단석·정계주·김익렴을 출사시키고 이지무·김휘를 체직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납 김익렴은 취직한 뒤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옥당에 내린 비답을 보니, 말뜻이 준엄하고 또 ‘경솔하고 괴상하다.’는 말씀으로 신을 내치셨습니다. 신이 남이 하지 않은 말을 하였으니 가볍다고 하면 가볍겠으나, 그 논지는 시비를 밝히고 사설(邪說)을 막자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상께서 어리석은 신을 싫어하여 박대하였고 말씀을 내리면서 착오를 면치 못한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이미 엄지(嚴旨)를 받았으므로 감히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집의 오두인, 장령 송시철 등이 앞서 김익렴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처치할 수 없다고 하였고, 정언 심유는 월과(月課)를 빠뜨린 것으로 아울러 인피하였다. 옥당이 심유는 체차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이숙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호남으로 나갈 때 구제미의 마련이 어려운 점을 미리 걱정하고, 시노비에게 쌀을 바치게 하고 면천시키자는 일을 탑전에 품달하였습니다. 이에 성상께서 때에 따라 계품하라고 분부하였고 신은 도내에서 두루 물어 겨우 약간 명을 찾아, 내수사와 수진궁(壽進宮)을 제외한 시노비 몇 사람에게 이미 오십 곡의 쌀을 받고 면천을 허가하였습니다. 지금 노와 비를 구별해야 된다는 논의가 황정(荒政)이 다 끝난 뒤에 나왔는데, 신이 직책을 잘 수행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성조가 먼 지방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게 하였으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은 이 일이 있고부터 잠시도 편치 못하고 게다가 월과를 짓지 않아 이제 막 추고를 받을 상황에 있으니, 이것으로서나 저것으로서나 결코 구차하게 그대로 있기 어렵습니다."
하니, 옥당이 처치하기를,
"신의를 잃지 않으려 한 것은 사리로 보아 마땅하나 이미 추고에 당하였으니 재직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황해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치계하였다.
"평산부(平山府) 음촌(陰村)의 4방(坊) 수십여 집에서 개간한 땅이 모두 계묘년의 양안(量案)에 들어가 한 척의 땅도 호조에서 세금을 거두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역적가의 종이 궁가에 거짓으로 고하여 거의 1천여 일 갈 정도의 토지가 모두 궁가의 점유가 되었습니다. 부사 윤겸(尹㻩)이 영문에 보고하지 않고 곧장 문서를 만들어 보냈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해당 관리는 이미 잡아다가 엄한 벌을 가하였습니다. 감히 눈으로 본 폐단을 진달하니 해조로 하여금 복계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이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지금은 대소 신하들이 한가함을 꾀할 때가 아니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7월 4일 을해

민정중을 대사성으로, 김수항을 이조 참판으로, 남용익을 도승지로 삼았다.

 

7월 5일 병자

우의정 정유성이 상차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이경석이 삼조의 원로로서 실정 밖의 무거운 배척을 받고 엎어지고 자빠지며 성을 나가니, 좋은 모습이 아니라 신은 개탄하고 있습니다. 이경석의 두터운 덕, 무거운 신망, 깨끗한 행실, 아름다운 절개는 세상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더구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성에서 우러나와 조정의 신하로서 그를 앞설 자가 없습니다. 지난 경인년 봄에 흉적이 화를 조성하여 서린(西隣)이 질책하였고 앞일이 어떻게 일어날지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사에 참여한 여러 재상들은 기개가 꺾이고 위축되어 감히 한 마디 말로도 변론한 자가 없었는데, 경석은 수상으로서 혼자 앞장서 감당하였으며 말과 기개가 늠름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화를 입은 실상은 참석하여 들은 청나라 사람들도 모두 칭찬하고 탄복하였으며, 신도 당시에 직접 목도하였기에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늘 경복(敬服)하고 있습니다. 선조(先朝)의 은총과 대우가 그 일로 말미암아 더욱 융성하였고, 백마성(白馬城)에 위리 안치되고서도 약물과 음식 등 하사물이 풍부하였습니다. 도성 아래에 방환되자 결단코 돌아가리란 뜻을 가졌으나 간곡히 권하고 지성으로 만류하였고, 금령(禁令)에 구애되어 중직에 기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융성한 예우는 끝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경석이 여태까지 머물러서 자신의 처지를 벗어난 혐의를 피하지 않고 일마다 진언한 것은, 참으로 감격하였기 때문이고 선조의 은총과 대우를 성명께 갚으려 한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지금 준엄한 배척을 입히고 억지로 죄명을 씌웠으니 벌써부터 물러갈 계획을 한 신하가 이번 일을 인하여 기필코 돌아가려는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지금 들으니 강 밖에서 영영 전리(田里)로 돌아가려 한다는데, 만약 이때에 예로써 만류하지 않는다면 성명께서 선조의 대우를 계승하는 도리에 손상이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나라가 텅 비었다는 탄식이 없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영부사 가 근거없는 미치광이 말 때문에 마침내 교외까지 나가게 되어 마음속으로 염려하였는데, 결단코 하향할 뜻을 가졌다고 들으니 매우 놀랍다. 더 한층 성의를 가하여 만류하리니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7월 6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박승건(朴承健)을 장령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응교로, 남구만을 부응교로,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윤심(尹深)을 정언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상이 영중추 이경석에게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고 올라오게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여 매우 후하게 위로하고 이르기를,
"대신이 교외에 나가 있는 것은 일의 체모가 온당치 않은데, 우상의 차자를 보니 더군다나 교외에서 그대로 하향하려 한다고 하기에 매우 놀라 직접 하유하려고 오라고 청하였다. 최유지의 일은 실상 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무슨 인혐할 까닭이 있겠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정유성의 차자 속에 신이 결단코 돌아가려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신도 그러한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전하의 윤허를 받지 않고 어찌 급히 그대로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에게는 물러갈 의리가 없다. 속히 입성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이미 명을 받들고 들어왔는데 어찌 다시 물러가겠습니까. 다만 신이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무슨 보탬을 드릴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도당록은 예로부터 상피(相避)하는 규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는 세도가 각박하여져 무서운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서필원의 상소는 그 말이 매우 곧았기 때문에 신도 칭찬하였으나 대신과 중신이 모두 이것 때문에 불안하니 변통하는 처사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필원이 상소하여 배척한 네 사람 중에 윤지미와 원만리에 대하여는 친족의 혐의가 있다고 말하였을 뿐이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이 쓸 만한지의 여부를 대신한테 물어 처리하려 한다."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영·좌상은 필시 가부의 표시를 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우상은 반드시 생각한 바를 진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도 생각을 숨기지 말라."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초야에 있는 인물에게 묻는다면, 송시열·송준길이 반드시 공평한 말을 할 것입니다."
하고, 경석이 또 아뢰기를,
"국가는 인재를 중하게 여깁니다. 영남에는 본래 유현(儒賢)의 교화가 있었고, 호남에도 절의(節義)의 기풍이 많았으며, 서북 양로는 모두 무사의 본고장입니다. 인재에 따라 등용한다면 그것이 곧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사 가운데 뛰어나서 쓸 만한 자를 수소문하여 계문하도록 서북의 감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승지 유창이 아뢰기를,
"홍문록에 천거된 네 사람을 송시열·송준길에게 묻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대신과 상의한 뒤에 묻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7월 7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황해도 내 재령(載寧)·신천(信川)·서흥(瑞興)·신계(新溪) 등의 고을에 연일 폭우가 쏟아져 평지의 물이 한 길 정도의 깊이로 불었다. 그리하여 벼가 물바다가 되어 질펀하고 가옥이 떠내려가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상이 구휼하는 일을 거행토록 명하였다.

 

7월 8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0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2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3일 갑신

박정(朴烶)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양남 진휼 어사의 장계를 내어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에게 읽게 하니, 홍명하가 다 읽고 나서 아뢰기를,
"흥덕 현감(興德縣監) 오정언(吳廷彦)이 관직은 낮지만, 여러 번 계문에서 상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가 직무에 마음을 다한 점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는 향곡의 무부(武夫)입니다. 반드시 잘 다스린 뒤에야 이와 같이 상을 주어야 된다는 계문이 있게 마련입니다. 전하께서 이름을 써서 상을 준다면 격려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좌의정 원두표는 아뢰기를,
"쓸 만한 무사가 부족한 실정이어서 어떤 이는 ‘과(科)를 신설하고 시험하여 취할 때에 무예는 조금 가볍게 하고 강규(講規)를 엄격하게 하면 쓸 만한 인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사는 당연히 힘이 센 것을 우선으로 하는데 어떻게 무예를 가볍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날 인조조에서 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 등을 명하여 무예를 권장케 하여 많은 인물을 얻었습니다."
하니, 상이 공조 판서 이완(李浣)에게 이르기를,
"경은 그 일을 직접 보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그 당시에 무예를 권장한다고 일컫고 사족 가운데 쓸 만한 자를 가려 무예를 익히도록 권장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도 그와 같이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병조 판서 허적이 아뢰기를,
"근래에 인재가 부족한 탓으로, 선전관에 빈 자리가 생겼으나 채워넣을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그 책임을 맡은 자가 배양하여 인재를 모아두어야 마땅한데, 쓸 사람이 다 떨어진 지금에 와서야 사람이 없다고 진달하니, 전후로 병조 판서를 지낸 자가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무사에 대한 대우가 매우 박하여 무사의 자제라도 문과에 급제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심하게 무사를 능멸하니, 무사들이 사기를 잃는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지금 이변이 무수히 일어나는 때에 무비(武備)가 이토록 엉성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훈련 중군(中軍) 이수창(李壽昌)이 외임에 제수되고서, 그를 대신할 자를 오랫동안 보충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수창의 자리를 맡을 합당한 인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현(鄭傅賢)을 후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가 지금 직첩을 빼앗긴 상태여서 계하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부현의 직첩을 돌려주라."
하자, 원두표가 아뢰기를,
"이수창을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계청했어야 마땅한데, 오랫동안 경직(京職)에 있었고 안마(鞍馬)가 형편없이 쇠잔하여 계속 그대로 유임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궁가의 직전(職田)을 면세하는 일에 대하여 옥당이 전에 이미 진달하였습니다. 지금 대신들이 모두 입시하였으니, 분명하게 요량하여 아뢰어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전과 면세는 본래 별개의 일이다. 어찌하여 혼동하여 말하는가."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궁가의 면세는 일정한 수치가 없어 간혹 많을 때에는 1천 4백여 결까지 이르니, 그 결수를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호조의 회계 하나를 꺼내어 놓고 이르기를,
"이 회계는 매우 근거가 없다. 일이 궁가에 관계되면 절수(折受)의 선후나 사리의 곡직을 논하지 않고 오직 내어주기만을 힘쓰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해당 당상·낭관은 모두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니,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가 앞자리에 입시하였다가 황급히 물러나갔다. 이때 정태화가 아뢰기를,
"설령 회계에 착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궁가에 관계되는 일로 파직을 당하기까지 하면 먼 지방에서 듣고 보는 이들이 모두 놀라고 의혹할 것입니다. 성덕에 누를 끼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고, 원두표와 우의정 정유성이 서로 계속하여 진달하였으나 상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삼공이 일시에 일어나 절을 하고 환수하도록 힘껏 청하니, 상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그와 같으니 추고만 하고 파직시키지는 말라."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지부(地部)에 재직하면서 회계의 착오를 일으킨 과실이 있었고 준엄한 하교를 받아 지금까지도 송구스럽습니다. 신이 이 일에 대하여 혐의쩍게 여긴 나머지 감히 회계에 동참하지는 못하였으나 참여하여 듣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서원리와 함께 추고하소서."
하였다. 상이 답변을 하지 않고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서원리가 규례(規例)를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인가?"
하니, 원두표가 아뢰기를,
"서원리가 규례를 모른 것이 아니고, 근래에 연소배들이 모두 궁가의 일에 대하여 곡직을 분별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내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서원리의 말이 이와 같은 점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시술(李時術)의 집에서 뇌물로 쓴 물자가 무수히 많아 집을 팔아도 부족한 지경입니다. 전에 조정의 신하로서 이러한 환란을 당한 자에게 으레 약간의 물자를 지급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규례에 따라 지급하라고 하였고, 정치화가 5백 금을 지급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원두표가 늘 어전에 앉아서 언어가 거만하고 두서가 없어, 여러 신하들을 괴롭힌 일이 없었던 곳이 없었다. 무사를 배양하지 못한 책임을 전후의 병조 판서한테 돌리려 하였고, 서원리의 회계가 연소배들의 뜻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남을 모함하여 자신의 총애를 굳건히 하려는 계책이었다. 심지어 이수창의 안마가 피폐하였다고 한 말은 더욱 비열하고 잘못된 것이니, 장차 이수창으로 하여금 멋대로 탐욕하여 자신을 살찌우게 하려고 한 것인가. 삼사의 신하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서도 그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으니,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79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종친(宗親) / 농업-전제(田制) / 역사-사학(史學)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교통-마정(馬政) / 재정-국용(國用) / 재정-전세(田稅) / 사법-탄핵(彈劾)
사신은 논한다. 원두표가 늘 어전에 앉아서 언어가 거만하고 두서가 없어, 여러 신하들을 괴롭힌 일이 없었던 곳이 없었다. 무사를 배양하지 못한 책임을 전후의 병조 판서한테 돌리려 하였고, 서원리의 회계가 연소배들의 뜻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남을 모함하여 자신의 총애를 굳건히 하려는 계책이었다. 심지어 이수창의 안마가 피폐하였다고 한 말은 더욱 비열하고 잘못된 것이니, 장차 이수창으로 하여금 멋대로 탐욕하여 자신을 살찌우게 하려고 한 것인가. 삼사의 신하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서도 그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으니,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상이 흥덕 현감 오정언(吳挺彦)에게는 준직을 제수하고, 임피 현령(臨陂縣令) 허질(許秩) 등 9인은 올려 제수하고,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성기(李聖基) 등 4인에게는 길들인 말을 하사하고, 안동 부사 성후설(成後卨) 등 6인에게는 옷감 1벌을 하사하고, 김제 군수(金堤郡守) 남천택(南天澤) 등 7인은 파직시키도록 명하였다. 이는 양남 어사가 상벌의 등급을 나누어 서계한 데 따른 것이다.

 

평안·함경 양도 감사가, 도내에 큰물이 져 곡물을 손상시킨 것이 매우 참혹하다고 치계하였다.

 

7월 14일 을유

사간 정계주 등이 아뢰기를,
"어제 대신이, 경상 우병사에 새로 제수된 이수창(李壽昌)은 직책이 중군(中軍)에 속하여 외지로 내보낼 수 없으나 오랫동안 서울에 있어서 말이 피폐하였으므로 차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탑전에 주달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곤수(閫帥)를 차견하는 뜻이겠습니까. 인재의 가부를 논하지 않고 말이 피폐된 것만을 생각하여 사적인 입장을 위하여 이같이 왜곡한다면, 곤수로 나간 자가 반드시 이것을 구실로 삼을 것이며 또 어찌 다시 꺼리는 바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곤수들이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열어주는 것이 필시 수창의 이번 행차에서 말미암게 될 것입니다. 이수창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간 정계주가 그 당시에 입시하고서 말이 이토록 본지를 잃어버릴 수 있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응교 남구만과 교리 이민서가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들으니, 회계한 일로 호조 당상이 파직되고 추고의 벌을 받게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대신이 진달하면 곧바로 환수하면서도 궁가의 일에 대해서만 늘 심하게 신경써서 정도에 지나친 처사를 내리는 경우가 많으니 심히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대답하기를,
"그대는 호조 당상의 회계가 옳다고 생각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회계를 가져다 보니 별로 잘못된 점이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전이라면 나누어 주는 것이 옳겠지만 궁가에서 먼저 받은 곳을 감영에서 빼앗아서는 안 되는데, 회계가 저와 같으니 어찌 잘못된 바가 없겠는가."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남구만이 감히 호조 당상을 비호한 것이 아니라 성덕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해서 말한 것입니다."
하고, 구만이 아뢰기를,
"한 궁가의 면세가 혹은 1천 4백여 석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는 중읍(中邑)의 결수입니다. 그와 같고서 어찌 백성들의 원망이 없겠습니까. 속히 제도를 정하여 환난이 생길 근원이 없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신이 전에 진휼 어사가 되어 이숙과 함께 탑전에서 배사(拜辭)하면서 곡물을 바치고 면천하는 일을 범범하게 아뢰었고, 애당초 노와 비를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영남에는 곡물을 바치려는 자가 없었고 호남에는 마침 있었으므로 이숙이 사목의 본뜻을 상고하지 않고 면천을 허락하였으니 결과적으로 착오를 범한 과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면천을 허락하고서 단지 면역만을 시킨다면 국가가 믿음을 잃게 됨을 면치 못합니다. 한 명의 비(婢)야 지극히 미세하지만 조정의 명령이 백성들한테서 믿음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니 관계된 바가 적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비자는 그대로 면천시키고, 이숙이 명을 어긴 일을 묘당이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옛사람 중에 임금의 명이라 칭탁하고 창고를 열어 진휼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숙이 비록 명을 어긴 일이 있었지만 죄를 논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하였다. 이에 구만이 아뢰기를,
"홍문록에 피선된 사람들이 서필원의 상소로 인하여 모두 불안한 형편입니다. 속히 처분하여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중추가 재야의 유신(儒臣)에게 묻도록 요청하였는데 그 의견이 어떤가?"
하자, 구만이 아뢰기를,
"예(禮)를 의논하는 일이라면 묻는 것이 좋겠지만 이 일을 어찌 꼭 물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대신이 출사하거든 물어서 처치하라."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변괴는 매우 두려워할 만합니다. 성상께서 편찮으시어 경연을 열 수는 없지만 만약 편전에서 때때로 상의하신다면 어찌 환시와 함께 있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영남에 갔을 때에 골짜기에 나자빠진 기민을 직접 보고 마침 궁가의 조(租) 수백 석이 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상평청의 관문(關文)에 ‘궁가도 굶어죽을 판이니 곡물을 나누어 주지 말라.’ 하였으니, 일이 매우 마땅치 않습니다. 그리고 김해에 있는 숙명 공주(淑明公主) 농장이 재앙을 입은 것이 특히 심하여 세금을 거둘 수가 없는데 궁가에서 차견된 장두길(張斗吉)이 둔민(屯民)의 우마와 솥을 빼앗고 사람을 잡아다 포학함이 끝이 없어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엄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유사에게 가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금년의 기근으로 상하가 모두 걱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조금은 결실이 될 가망이 있으나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태봉(胎封)에 석물을 가설하는 일은 그다지 급하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게 다시 아뢰도록 하였다. 이때에 당저(當宁) 태봉의 석물을 가을을 기다려 단장할 일이 있었다.

 

7월 15일 병술

사간 정계주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그저께 입시하였을 때에, 대신이 ‘이수창이 오랫동안 서울에 있어서 말이 피폐하였다.’는 말로 탑전에 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제 나름대로 타당하지 않은 말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대신의 말에 관계되므로 감히 경솔히 논하지 못하고 어제 상회례(相會禮)에서 그 말을 꺼냈는데, 동료들이 모두 ‘대신을 감히 논할 수는 없지만 수창을 그대로 부임시킬 수 없다.’라고 말하여서 서로 의논하여 논계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전하의 ‘크게 본지를 잃었다.’는 하교를 받았으니 어찌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언 박세당(朴世堂)·윤심(尹深)도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제 상회례 때에 사간 정계주가 대신이 탑전에서 한 말을 듣고서 깜짝 놀라 탄식하였습니다. 대개 곤수의 직책을 제수함은, 그 사람이 말을 살찌우고 윤택하게 할 입지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탑전에서 공공연히 한 말이 감히 상스럽고 잗단 사적인 일에까지 미쳐 추잡하고 교활한 무리들에게 핑계를 댈 여지를 갖게 할 수 있습니까. 조정에서 곤수를 가려서 제수함에 있어서 늘 적임자를 얻지 못하는 걱정이 있고, 비록 청렴하도록 당부해도 여전히 탐욕스런 자가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만약 대신이 말한 바와 같이 자신에게 이롭고 편한지의 여부로써 취사 선택의 기준을 삼는다면, 곤수된 자가 장차 ‘대신이 이미 고하였고 성상이 이미 알고 있다.’라고 하고서 끝내 뒤돌아 보거나 기탄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탐욕을 가르치는 결과를 낳고 말지 않겠습니까. 동료들의 회의에서 이미 이론이 없이 이수창의 체직을 논한 것은 뜻이 실로 그 곳에 있었습니다.
대개 인군·재상과 서로 시비를 따지는 것은 대각의 직분이어서 하나의 가부에 대하여도 일에 따라 논변해야 되니 또한 무엇을 꺼리겠습니까. 그런데 삼가 정계주가 인피한 말을 보니, 탑전에서 논변하지 못한 이유를 나름대로 진술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동료들이 모두 「대신을 감히 논할 수 없지만……」이라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니, 이 한 마디 말만도 사람을 크게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국가가 대각을 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어제의 계문은 대신의 과실을 규찰한 것이 아닙니까. 회의석상에서 뭐라 말한 것이 없는데 계주의 말이 그와 같으니, 유독 크게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아닙니까. 아, 대신의 한 마디 말이 무장(武將)이 기탄없이 행할 단서를 열어주었고, 계주의 한 마디 말이 대각의 규찰하는 체모를 떨어뜨렸으니, 오늘의 조정이야말로 얼마나 위태합니까. 신들이 이미 크게 본지를 잃었다는 전하의 하교를 받았고, 게다가 대각에 수치를 끼치는 혐의를 받았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차하소서."
하니, 장령 송시철(宋時喆) 등이 처치하기를,
"정계주는 체차하고, 박세당과 윤심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6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가 아뢰기를,
"상주(尙州)에 사는 유학(幼學) 김건(金鍵)은 재주와 행실로 향천(鄕薦)에 들어 재랑(齋郞)에 의배(擬拜)되었다가 대각이 윤기(倫紀)의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삭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함부로 천거하여 계문한 것은 일이 매우 해괴합니다. 천거한 자는 본도로 하여금 죄를 적용시키게 하소서. 본 고을의 목사 및 감사도 살피지 못한 과실을 면키 어려우니, 추고하여 뒷날을 징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향천에서 천거를 보증하는 법은 전부터 그 규정을 한결같게 하지 않았는데 인심이 점점 교묘해지니 난잡해질 것이 염려됩니다. 삼남에서는 3인으로, 오도에서는 2인으로 각각 제한하여 식년마다 도신(道臣)이 자세히 써서 계문하고, 혹 명실이 일치하지 않거나 나이를 함부로 기록했다가 발각될 경우에는 보증을 한 자는 무겁게 죄를 적용하고 수령과 감사는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간원이 이수창을 파직시켜야 된다고 논하였으나, 오랫동안 따르지 않아서 정지하였다.

 

7월 17일 무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민적을 사간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좌참찬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부교리로 삼았다.

 

7월 19일 경인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여러 승지에게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부호군 윤문거가 상소하여 부름을 사양하였다. 그 대략에,
"신은 본래 집이 서울에 있고 대중을 따라 벼슬하면서 평생의 행위를 남들과 다르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단지 죽음에 임하여 고향 언덕으로 머리를 두고 선산에 뼈를 묻기 위한 계책일 뿐이지, 감히 저만의 편리함을 생각해서 스스로 멀리 군부의 곁을 떠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변통할 줄을 모른 것은 아닙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본래 시무(時務)를 아는 무리들과 더불어 의논할 수 있는 학술도 없고, 죽는 날 바칠 만한 착한 말도 없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은덕을 저버리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고서 자세히 알았다. 경은 어찌하여 이토록 나의 뜻을 저버리려 드는가. 경은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거는 고 대간(大諫) 윤황(尹煌)의 아들이고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외손이다. 젊어서 급제하여 대성(臺省)을 역임하였고 사람됨이 강개하고 지조가 있었다. 정축년 이후로 이산(尼山)의 선영 아래로 물러가 벼슬길의 뜻을 끊었다. 간혹 주군(州郡)에 나가 고을살이를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사직하고 돌아왔고 아우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조정에서도 두터운 예로 대우하고 도헌(都憲)과 이조 참판에 차례로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으니, 사론(士論)이 깨끗이 물러난 그의 절개를 훌륭하게 여겼다.

 

7월 20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우참찬 민응형(閔應亨)이 졸하였다. 응형은 자가 가백(嘉伯)이다. 평소에 강개함으로 자부하였는데,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할 때에 상의 노여움이 진동하자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면서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였으나, 응형은 지방관에서 부제학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올라와 앞장서서 면대를 청하여 극력 간하는 것을 담당하려고 꾀하였다. 결국 상이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않아 일을 이룬 것은 없었으나 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심히 연로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나라를 위한 마음을 잊지 않고 생각한 것이 있으면 곧 궐내로 들어가 고하였으며 때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말년에 윤선도의 석방을 청하였다가 김익렴(金益廉)의 비난을 받았지만 사류(士類)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에 졸하니 나이 85세이다.

 

좌의정 원두표가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지난번 입시했던 날 훈국의 중군에 차임할 인물이 없어 말이 이수창에까지 미쳤고, 이어서 무장이 서울에 있을 때의 어려운 실상을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이 피폐하였다는 말은 말머리에 널리 쓰는 말입니다. 정계주가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면 경연에서 정직하게 배척하는 것이 간관의 풍채인데,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다가 물러난 뒤에 뒷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더구나 박세당이 애당초 전해들은 자로서 준절한 말이 저와 같고 크게 본지를 잃었다고 한 전하의 비답을 받게 된 뒤에 억지로 계주가 하지 않은 말을 해서 신을 능멸하면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정계주가 논의를 늦추었다고 배척하였으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신이 박세당의 아비 박정(朴炡)과는 약관의 친구로서 함께 의리의 맹세를 맺었으니 세당은 곧 친구의 자식입니다. 따라서 그가 신을 대함에 또한 어찌 아무런 관계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근래에 일종의 과장된 논의가 관직이 높은 사람을 옭아서 꼼짝 못하게 하기를 좋아하면서 그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근거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풍채를 휘날림으로써 화려한 명예를 손에 넣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박세당이 그것을 흠모하여 큰소리치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도의가 이런 지경이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탄핵을 견디고 공사를 집행하는 것을 소신도 감히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신은 이미 대신의 반열에 있으니 결단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사를 집행하기 어렵습니다. 빨리 파직하여 사람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계주의 추잡하고 사나운 논의와 세당의 경솔하고 해괴한 말이 한결같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오늘날 세상의 도의는 참으로 한심스럽다. 경은 혐의를 내세우지 말고 안심하고 공사를 집행하라."
하였다.

 

7월 21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박세당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보관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도둑을 이끌고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닌데도 도둑질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신의 이른바 ‘말이 피폐하였으니 내직과 외직은 번갈아 제수해야 된다.’라고 한 것이 유독 탐욕을 가르친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 오늘날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에게 누구인들 부형의 친구로서 자리에 있는 자가 없겠습니까. 만약 어떤 경상(卿相)이 과실이 있어 논해야 되는데도 대각이 사적인 관계를 돌아보고 감히 탄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국가의 이로움이겠습니까. 신은 사적인 관계는 사적인 관계이고 공적인 의리는 공적인 의리대로 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차자의 내용이 그런 정도까지 이르렀으니 신은 의혹합니다. 옛날의 대신은 ‘빠뜨리거나 잘못된 점을 부지런히 공박하라.’는 말을 하였는데, 지금의 대신은 서로 규찰하는 말을 한 마디 하자 금방 성낸 기색을 나타내었고, 전하께서도 대단하게 꺾어 대신을 위무하는 방편으로 삼았으니, 이른바 ‘한 마디 말을 하여도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는 자가 없었다.’라고 한 상황이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신이 이미 날카로운 배척을 받았고 게다가 엄한 비답을 받들었으니 결단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렵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사간 이민적이 처치하기를,
"지금의 이 이수창의 일은, 성상의 비답이 이미 ‘크게 본지를 잃었다.’ 하였고, 대신들도 ‘말머리에 널리 쓰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다만 돈과 곡식, 무기에 대한 것은 옛사람들도 오히려 ‘재상이 알 바가 아니다.’라고 여겼으니, 무관의 말이 피폐하였다는 것은 탑전에서 아뢸 말이 아닙니다. 간신(諫臣)이 후일의 폐단을 염려하고 일에 따라 규찰하는 것은 본래 그 직분인데 뜻밖의 배척에서 말이 매우 준엄하였습니다. 대개 대신에게는 온갖 책임이 부여되고 나라와 몸을 같이 하는데 유독 언로(言路)의 입지에 대하여는 생각을 않을 수 있습니까. 더구나 성조에서 대신을 높게 예우하고 대간을 넉넉하게 용납하기를 마치 팔다리와 이목이 서로 의지하여 어느 한 쪽도 없앨 수 없는 것과 같이 하였는데, 경솔하고 해괴하였다는 하교는 더욱이 간쟁하는 신하에게 내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언 박세당을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송준길이 병으로 부름에 응하지 않고 상소하였다. 먼저 경연을 여는 것이 뜸하여 학문이 끊어질 것에 대한 걱정을 진술하고 이어서 이시술의 일에 대하여 진술하기를,
"조정에서 잘 주선하지 않아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변방의 관직을 맡은 자로서 누가 기꺼이 지성으로 나라에 몸바칠 마음을 갖겠습니까."
하고, 또 궁가들을 지나치게 옹호한 점과 북학(北學)을 짓지 않고 지연시킨 잘못을 진술하였으며, 또 이유태(李惟泰)의 상소 속에서 진술한 일을 시행토록 청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조리하여 올라오라고 하유하였다.

 

7월 22일 계사

박세견(朴世堅)을 헌납으로 삼았다.

 

7월 24일 을미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호남의 산이 많은 고을에 금년 가을에 대동법을 시행할 계획인데, 영상이 지금 국경을 나갈 참이니, 속히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한 도 안에서 어떤 곳에서는 행하고 어떤 곳에서는 행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공평하지 못합니다. 가을을 기다려서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의정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까지 미루었다. 금년에는 정하여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경기의 토지 측량을 가을의 결실이 된 뒤에 마땅히 거행해야 되나, 경관(京官)을 파견하는 것은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그 지역의 수령들이 차분하게 측량하게 하고 감사가 검사와 감독을 주관하게 한다면 일이 매우 온당하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허적이 아뢰기를,
"수령으로서 그 일을 잘 수행할 자를 쉽게 얻기 어려우니, 호조가 주관하게 하고 때때로 경관을 보내 간사한 일을 적발해야만 누락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원두표, 우의정 정유성이 아뢰기를,
"경기 고을의 토지에 대한 행정이 바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측량하는 일을 금년에는 결단코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도록 청하니, 이조 판서 홍명하가 아뢰기를,
"토지를 측량하는 일은 이미 확정한 논의였는데 매년 흉년이 들어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금년에 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경기 고을의 토지 결수가 옛날에는 13만 결이었는데 지금에는 3만 결이 되었습니다. 토지가 개간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결수가 이와 같이 감축되었으니 다스려서 바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공조 판서 이완이 아뢰기를,
"토지를 측량하는 일이 꼭 행해야 될 일이지만 금년에는 백성들의 역(役)이 많아 단호히 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김좌명과 이조 참판 김수항, 이조 참의 유계, 부제학 조복양 등은 모두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병조 참판 유혁연이 아뢰기를,
"토지를 측량하는 일의 논의는 전에 이미 강구하여 정하였습니다. 경기 고을의 서원(書員) 등이 호조에 와서 산법(算法)을 배우고 있었는데, 단지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 이리저리 핑계만 대어 왔습니다. 금년은 조금 결실이 되었으니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금년 토지 측량은 참으로 행하지 않을 수 없으며 새로운 결을 얻은 뒤에 세금을 감하여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정유성이 아뢰기를,
"먼저 측량한 뒤에 세금을 면제시킨다는 뜻을 민간에 알리고 난 뒤에야 소요의 폐단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국가는 백성들을 참으로 마땅히 아끼고 돌봐야 되지만 먼저 감면하는 뜻을 보이게까지 된다면 크게 일의 체모를 잃게 됩니다."
하니, 사간 이민적이 아뢰기를,
"토지를 측량하는 데는 마땅히 경계를 바르게 하는 것으로 핵심을 삼아야 되고, 백성들의 결수를 많이 얻을 것을 힘써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상평창의 설치에 대한 법이 《대전》에 실려 있고, 곡물이 귀하면 값을 감하여 팔고 곡식이 흔하면 값을 올려 사들였으니 이는 경수창이 물려준 법입니다. 지방에는 사고팔 곡식이 있지만 경성에는 진휼할 바탕이 없습니다. 《대전》에 의거하여 진휼하고 남은 쌀로 상평창을 설치하여 도성의 백성을 구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에 물자가 고갈되었으니, 더군다나 상평창을 설치하는 것은 힘이 부족하다. 진휼하고 남은 곡식을 호조에 소속시켜 별도로 보관하였다가 백성을 구하는 방편으로 삼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태봉에 난간석(欄干石)을 설치하는 일을 이미 진달하였으나 여태까지 계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이 중대하여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민폐를 끼칠까 염려된다. 내 뜻은 그만두고 싶다."
하였다. 또 상이 이르기를,
"옥당에서 새로이 홍문록을 만든 일에 대하여 영부사가 재야의 유신에게 묻고 싶다고 하였는데, 남구만은 가당치 않다고 하였다. 경들과 상의하고 싶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맨 윗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누이의 아들이 홍문록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어찌 감히 의논하겠습니까."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지금 그대로 둘 것 같으면 그들만 불안한 것이 아니라 전조(銓曹)에서도 의망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네 사람을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고, 정유성이 아뢰기를,
"도당록은 본래 상피(相避)하는 법이 없는데 어찌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경솔히 삭제하겠습니까."
하고, 이민적이 아뢰기를,
"도당록이 공평하지 않다면 여러 재상들을 벌주는 것이 옳지, 네 사람을 어찌 다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조복양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삭제한다면 후일의 폐단이 염려됩니다. 그리고 최유지의 가장 우수한 경학(經學)이 더욱이 아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삭제하는 것은 안 된다. 전조가 공의를 따라 수용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궁가의 면세를 지금 6백 결로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조복양이 아뢰기를,
"6백 결은 중읍의 결수이니 너무 많은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는 1천 4백 결이었는데 지금 6백 결로 정한다면 무엇이 지나치겠는가."
하니, 이민적이 아뢰기를,
"6백 결은 너무 많습니다.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제도를 정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목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대로 전과 같이 하고 제도를 정하지 말라."
하니, 조복양이 아뢰기를,
"전하의 분부가 온당치 않습니다. 그 수량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은 6백 결에 있다. 그것이 안 되면 고치지 않을 뿐이니, 그대들은 이 둘에서 선택하라."
하니, 조복양이 아뢰기를,
"6백 결도 많지만 그래도 고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니, 이민적이 아뢰기를,
"6백 결은 너무 많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하니, 정유성이 아뢰기를,
"이민적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민적이 또 아뢰기를,
"근래 주현(州縣)의 피폐함은 사실 노비가 감소한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대전》에 보면,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노비가 각각 일정한 숫자가 있습니다. 지금 《대전》에 의거하여 보아 각 고을에서 정해진 숫자에 차지 않은 상태에서 노비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대전》에 정해진 본래의 숫자와 현재 각읍 노비의 실제 숫자를 해원(該院)이 서계하여 아뢰어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7월 26일 정유

진하사(進賀使) 정사 정태화, 부사 허적, 서장관 이동명(李東溟)이 청나라에 가게 되어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멀리 떠나게 되어 국사가 마음에 걸려 감히 아룁니다. 경기 고을의 토지 측량과 호남의 대동법 실시는 이미 아뢰어 정하였으니, 반드시 적임자를 얻어 위임하여야만 폐단이 없이 완료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시방(李時昉)이 호남의 일을 주관하다가 불행하게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지금에는 어떤 사람이 잘 마칠 수 있겠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담당할 수 있는 자는 김좌명 한 사람뿐입니다. 고 영상 김육(金堉)이 뭇 논의를 배격하고 대동법을 정하여 시행하였고, 김좌명이 일찍이 호남의 관찰사로 나가 산군(山郡)의 대동법을 시행할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 위임한다면 반드시 그 아비의 뜻을 잘 계승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이번 행차는 반드시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들의 행차는 오로지 이시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힘을 다하여 주선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성사의 여부는 미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시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상 국가의 훗날의 폐단과 관계가 있으니 마음을 다하여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지금 국경을 나가는데 돌아올 날이 매우 멉니다. 오직 조정이 제각기 체통을 지켜 어그러짐이 없이 국사를 잘 이룩하기를 원하며 그렇게 되면 무척 다행하겠습니다."
하고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1백 일이 지나지 않아 돌아올텐데 어찌 체직을 허락하겠는가."
하고, 호랑이 가죽과 약물을 내리고 위로하고 타일러서 보냈다.

 

7월 27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윤절(尹晢)을 정언으로, 홍중보(洪重普)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병조 판서는 사신으로 나간 허적을 대신한 것이다.

 

7월 28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전남도 무안현(務安縣)의 백성 남여 18명이 섬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갑자기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이르렀다. 그 곳 사람들은 혹은 삭발을 하고 혹은 장발을 하였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북 하나를 갖고 앞에 나와 손으로 북치고 춤추는 시늉을 하기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 차리고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며 춤을 추니, 비로소 고려인이라 일컬었다. 그리하여 집을 만들어 거처하고 쌀을 주어 밥을 짓게 하는 등 상당히 관대한 뜻을 보였다. 오랜 뒤에 왜국 살마주(薩摩州)로 이송시켰고 다시 대마도로 옮겨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7월 29일 경자

사간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정권이 한 집안에 몰려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경계한 바였습니다. 지금 홍중보와 그의 숙부 홍명하가 양전을 관장하고 있어 뭇사람들이 온당치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후일의 폐단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병조 판서 홍중보를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평산(平山) 등지에 궁가에서 장원(庄園)을 설치한 일로 다시 회계하여, 감영의 안(案)에 소속된 화전(火田)을 궁가에 이속시키도록 청하였다. 이는 참판 서원리(徐元履)의 독계였다. 그러나 원리가 엄한 하교를 받은 뒤에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끝내 법에 의거하여 쟁집하지를 못하였다. 전후의 두 계사가 마치 두 사람 손에서 나온 듯하였으므로 물의가 해괴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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