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신축
황해 감사 홍처윤이 평산 백성들이 전지(田地)를 궁가(宮家)에 빼앗긴 일에 대해 치계하기를,
"평산 부사(平山府使) 윤겸(尹㻩)은 내사(內司)의 관원과 한통이 되어 제멋대로 측량한 다음, 문안을 만들어 보내었습니다. 윤겸도 함께 사패(司敗)에 내리어 앞날을 경계하소서."
하였다. 처윤이 방백인 신분으로서 수령이 백성의 전지를 빼앗아 궁가에 아첨하는 일을 보고도 법에 따라 치계하여 그 죄를 다스리지 못한 채 심지어는 그도 함께 사패에 내려 줄 것을 청하였으니, 너무나도 연약하여 직임을 수행하지 못했다 하겠다.
8월 3일 계묘
대왕 대비가 병환이 나서 내의원 제조 등이 약방에서 숙직하였다.
8월 4일 갑진
이정(李程)을 집의로, 김좌명(金佐明)을 병조 판서로, 유경창(柳慶昌)을 대사성으로, 박필성(朴弼成)을 금평위(錦平尉)로, 【숙녕 옹주(淑寧翁主)에게 장가들어 직을 제수한 것이다.】 김만균(金萬均)을 정언으로 삼고, 특별히 김수항(金壽恒)을 제수하여 예조 판서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건국 초기에는 해사마다 각기 전지(田地)가 있었으나, 난리를 겪은 뒤 수습하지 못하여 모두 세가(勢家)가 차지하였습니다. 오래됨에 따라 더욱 희미하게 되어 심지어는 그것이 공전(公田)인지조차 모르게 되었습니다. 경조(京兆)와 해당 각사로 하여금 문적(文籍)을 상고해 내어 결수(結數)를 기록하고 아울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조종조의 옛 제도를 회복하게 하는 한편, 그 중 마구 차지하고 세금을 내지 않은 자는 무겁게 과죄(科罪)하소서. 각역의 위전(位田)도 마구 점유한 폐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번 경기에서 전지를 다시 측량할 때에 아울러 찾아내어 결수(缺數)를 채우게 하소서.
그리고 경기에서 전지 측량을 60년이 지난 뒤에 거행하니, 상고할 만한 전적(田籍)이 없습니다. 만일 신중히 수령을 가리고 지나치게 연약한 자를 도태시키지 않으면, 중대한 경계(經界)의 정사를 평등하게 할 수 없습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 윤후익(尹後益)은 경솔하여 체모를 지키지 못하고, 양성 현감(陽城縣監) 김해(金垓)는 미련하여 사리에 어둡고, 영평 현령(永平縣令) 심추(沈樞)는 어리석고 무식하니,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관전과 위전에 대한 일만 허락하고, 세 수령에 대한 것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금년은 조금 풍년이 들었다고 하나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뒤이므로 경작을 못한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만일 급진(給陳)029) 을 허락하지 않으면 반드시 백성의 원성을 불러올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제때에 바로 변통하게 하여 급진토록 하는 한 가지 조항을 사목(事目) 가운데 더 넣게 하소서.
그리고 평산(平山)과 재령(載寧)에서 남의 전지를 몰래 팔아먹은 사람은 이미 본도로 송치하였으니 자연 사실이 판명되겠으나, 신천(信川)은 본디 작은 고을로서 여러 궁가(宮家)에서 설치한 둔전(屯田)이 무려 12군데나 되니 결코 더 이상 궁장(宮庄)을 설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평산의 전지는 본래 임자없는 곳이 없는데 부사 윤겸이 강제로 문안을 만들어버렸으니, 백성의 원성이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평산·신천·재령 세 고을 수령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감사 홍처윤은 군관을 보내 적간까지 하였으면서도 수령들의 죄를 들어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무겁게 추고하소서.
호조가 재차 회계할 때에 당상이 이미 엄지(嚴旨)를 받은 뒤인데도 허둥지둥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 한편으로는 ‘갑자기 당해서였다.’라고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범연히 보아넘겼다.’고 하였습니다. 회계하는 공사도 자상하게 살피지 못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겠습니까. 전후 아뢴 것이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아 물정이 매우 괴이하게 여기니, 체차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급진하는 한 가지 조항만 해조로 하여금 다시 품달하게 하였다.
8월 5일 을사
대신과 비국 제신 및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이 청대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경기 지방의 전지 측량을 이제 거행하려고 하는데 인조조(仁祖朝) 갑술년에 호남에서 전지를 측량할 적에 신은 본도를 안찰하였고, 박황(朴潢)과 정기광(鄭基廣)은 좌·우도의 양전사(量田使)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수령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고 감사로 하여금 살피게 하니, 소홀하여 누락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이번에도 좌·우도로 나누어 각기 양전사 한 사람씩을 차출하면 착실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가 이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자, 원두표가 아뢰기를,
"민정중(閔鼎重)은 자상하고 영리하여 모든 일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으며, 김시진(金始振)은 재주와 지혜가 많은데다가 산법(算法)에 익숙하니, 적임자를 얻고자 한다면, 이 두 신하보다 나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전례에 따라 차출하되, 균전사(均田使)로 불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호남의 산간 고을에 대동법을 시행하자면, 미곡으로 포목을 계산하는 일정한 제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이 ‘미곡 13두를 포목 2필로 계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콩과 멥쌀을 방납(防納)하는 데 따른 폐단이 끝이 없는데, 만일 대동미(大同米)에서 가격을 주어 구비해서 바치게 하면 이 폐단도 없을 듯합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의 일을 어찌 이처럼 구차하고 간편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경석에게 이르기를,
"경도 소회가 있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경기에서 앞으로 전지를 측량하고자 한다는데, 도신으로 하여금 수령 가운데 재능있는 자를 가려 차원(差員)으로 삼아 우선 측량을 하게 한 다음, 균전사를 보내어 순시하고 적간하게 하면 소요의 폐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고을의 토지 가운데는 혹 척박하여 경작하지 못할 곳도 있고, 혹 묵혀둔 지 오래되어 수목이 숲을 이룬 곳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토지를 혼동하여 측량한다면, 어찌 백성의 원성이 없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고봉 준령에도 밭을 일구어 경작한다 하는데, 평지의 밭을 어찌 묵혀둘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인민이 많고 적은 것은 열읍(列邑)마다 각기 다른데, 지역이 넓고 사람이 드문 곳은 실로 묵혀버린 토지가 많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외방의 의논들은 ‘경기 지방은 척박하여 높은 등급을 매기면 안 된다.’고 합니다. 만약 높은 등급을 매긴다면, 형세로 보아 백성들이 보존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8월 6일 병오
상이 침을 맞았다.
특별히 서용하여 전 승지 김시진(金始振)을 경기좌도 균전사로,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을 우도 균전사로 삼았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8월 8일 무신
대왕 대비의 병환이 오래 회복되지 않자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고 내의원 세 제조가 모두 숙직하였다. 전 참의 이원진(李元鎭)과 창성 도정(昌城都正) 이필(李佖) 등도 의술을 안다고 하여 아울러 부른 뒤 약방에 나아가 함께 참여하여 약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나이가 적다고 하여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옛날 선정신 김정(金淨)이 특별히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을 때의 나이가 겨우 34세였습니다. 그때 김정이 사직소를 올리면서 ‘젖냄새나는 아이로 하여금 육경의 직임을 맡게 하다니, 어찌 조정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대저 유림의 어진 사표로서도 나이가 적은 것을 겸연쩍게 여겼는데, 더구나 아무 것도 모른 채 일개 어리석은 필부에 불과한 신의 경우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선진과 노성한 사람을 앞질러 그 위에 버티고 있을 경우, 신의 마음이 미안할 뿐만 아니라 경멸과 모욕과 조롱과 삿대질이 반드시 이르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재주는 진실로 탁용(擢用)될 만하다. 왜 사양하는가. 속히 직임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8월 9일 기유
장령 송시철(宋時喆)·박승건(朴承健), 지평 이단석(李端錫)·박정(朴烶)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평산(平山)·신천(信川)·재령(載寧) 등 세 고을 수령의 파직에 대해 연일 논열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말이 미덥지 않아 그러는 것이니, 사리상 물리치셔야 합니다. 또 삼가 여론을 듣건대, 평산 부사 윤겸(尹㻩)이 궁가의 차사원(差使員)에게 억눌려 임자 있는 전지를 측량하는 사이에 해괴한 짓을 저질렀는데, 이는 재령·신천 두 관아에서 단지 도신에게 알리지 않고 바로 문안을 만들어 보낸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뿐만이 아닌데 경중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파직을 논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일을 상세히 논하지 못하여 이미 무거운 죄에다 가벼운 법을 적용한 실수를 저질렀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시철 등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지 않고 아뢰기를,
"평산 음촌(陰村)의 전지는 모두 임자가 있는 것이 문권에 분명하고, 일구어 경작하는 자도 수백 사람뿐만이 아니며 또 수많은 마을이 그 사이에 널려 있으니, 전후 좌우가 모두 묵혀버린 곳이 아닌데, 제멋대로 측량한 뒤 혼동해서 문안을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전지를 20여 리나 파헤쳐 물을 끌어오려는 계획을 하였으나, 끝내 물은 끌어오지 못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겨우 일군 밭을 파서 빈 도랑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런 일이 어찌 성세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사부의 무덤도 그 가운데 들어가버렸으니, 생민들의 원성은 이미 말할 겨를도 없거니와 지하의 백골들도 편안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윤겸이 나라에 원성을 끼쳐놓은 짓은 일마다 놀라우니,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13일 계축
박장원(朴長遠)을 이조 참판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윤절(尹晢)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양지당으로 나아가 침을 맞았다. 내의원 도제조 원두표에게 이르기를,
"습창(濕瘡)은 온천에서 목욕을 하면 효험을 본다고 하는데, 서울 가까운 곳에 온천이 있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우리 조정 열성들이 혹 온천에서 목욕하신 때가 있었는데, 이천(伊川)과 온양(溫陽)에 모두 행궁(行宮)의 유지(遺止)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습창이 점점 중해지고 있으니, 부득이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해야 할 것 같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옛적과 지금이 다르니, 동가(動駕)하여 멀리 가시는 것은 무척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의 병환이 이러시다면, 어찌 또한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이완(李浣)이 바로 지난해 온양에 가서 목욕을 했다고 하니, 그 효험을 시험삼아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명초(命招)하여 이완을 들어오도록 하고서 하문하니, 이완이 대답하기를,
"신의 두드러기에는 효험을 보지 못하였으나, 습진 등의 증세에는 상당히 효험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온양은 서울에서 3일 거리이니, 가셨다가 돌아오시자면 반드시 반달이 걸릴 것입니다. 어찌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조조 이후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 이제 가벼이 논의할 수 없습니다. 진지하게 다시금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아직 누설하지 말고, 다시 뒷날을 기다렸다가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8월 14일 갑인
안후열(安後說)을 장령으로 삼고, 특별히 조복양(趙復陽)을 예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산림과 천택(川澤)은 나라의 보배로써 우형(虞衡)의 관원이 맡는 바입니다. 예로부터 은택을 내림에 있어 산해(山海)의 이익을 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우리 조정에서 궁척(宮戚)에게 내려줄 때에도 산해의 토지를 싸잡아 주어 영업전(永業田)이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산림과 천택을 궁가에 떼어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전장(典章)이 한번 무너지면 분봉(分封)의 제도가 넘치기 쉬우니, 앞으로는 나라 꼴이 되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본디 좁고 작은데, 만일 한정된 토지를 궁가에 잘라주어 영업전이 되게 할 경우, 사문(私門)의 용도는 더욱 넉넉해지겠으나 공가(公家)의 토지는 날로 줄어들 것입니다. 더구나 만세에 전해 갈 나라의 터전에 자손은 점차로 번지는데, 이 관례가 널리 열려 서로들 다투어 답습한다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궁가들이 화전(火田)이니, 시전(柴田)이니 하여 산록(山麓)과 연해의 어장을 널리 차지하고 어판의 이익을 마구 거둬들이고 있는데, 해조와 각읍으로 하여금 그런 곳들을 일일이 찾아내게 하여 모조리 혁파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전남도에 7월 보름 뒤부터 큰비가 연이어 내렸는데, 한 달이 되도록 끊이지 않아 벼곡식이 크게 손상되고 목화가 모두 썩어버렸다. 경상도 함양(咸陽)에 큰물이 져서 17인이 익사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금림군(錦林君)의 딸의 초상에 해조로 하여금 상사에 쓸 물품을 넉넉히 주도록 하였다.
대개 효종조에 청국(淸國)의 구왕(九王)이 우리 나라와 혼인하려고 하여 사신을 보내 공주를 요구하였다. 효종이 그 요청을 어기기 어려워 종실인 금림군 이개윤(李愷胤)의 딸을 의순 공주(義順公主)라 하여 구왕에게 보내었다. 구왕이 죽자 대신 다른 친왕(親王)에게 보내졌는데, 친왕이 또 죽어버렸다. 개윤이 마침 봉명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정문(呈文)하여 돌려줄 것을 청하니, 청인이 허락하여 보내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사하니, 상이 불쌍히 여겨 이런 명이 있었다.
8월 17일 정사
대왕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니, 명하여 시약청(侍藥廳)을 파하였다.
8월 18일 무오
안후열(安後說)을 부수찬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박승건(朴承健)을 장령으로, 이광직(李光稷)을 정언으로, 서필원(徐必遠)을 예조 참의로, 정익(鄭榏)·조윤석(趙胤錫)을 승지로 삼았다.
8월 19일 기미
예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다시 상소하여 사면하였는데, 그 대략에,
"벼슬을 받고 애써 사양하는 것은 사부의 떳떳한 예인데, 성상께서는 낭패스러운 형세를 살피지 못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각은 격탁 양청(激濁揚淸)하는 자리이므로 규제하려는 것은 사리상 당연한 것인데, 물의가 들끓고 있으니 여론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개 간원이, 특지(特旨)에서 이루어진 승탁(陞擢)은 뒤폐단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개정하라고 논하려다가 중지하고 발론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항이 애써 이처럼 사양한 것이다.
행 대사간 이상진(李尙眞)이 전주에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첫머리에는 궁가에서 설치한 전장(田庄)의 지나침과 대계(臺啓)를 강하게 거절한 잘못을 말하고, 다음에는 과거장에서 사정(私情)을 쓰는 폐단을 말하였는데, 누누이 수백 언에 이르렀다. 상이 너그럽게 답하면서 본직의 체차를 허락하고, 조리하여 올라올 것을 하유하였다.
8월 20일 경신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간으로, 이민서(李敏敍)를 교리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본월 27일에 노량(露梁)에서 군병을 검열하겠으니, 병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침 맞는 일이 겨우 끝났으나 능에 가셔야 할 날이 또 임박하였는데, 강 머리에서 찬 기운과 접촉하면 더 많이 손상되기가 쉽습니다. 군병을 검열하는 일은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질병을 내가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가 계품하기를,
"군병을 친히 검열하는 일에 대해 이미 훈국(訓局)에 분부하였습니다만, 새로 교대할 어영군이 올라오는 시기가 25일입니다. 따라서 점호하고 단속하다 보면 27일에나 합조(合操)하게 될 것입니다. 형세상 군색하고 급박하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병(兵)이란 뜻밖의 일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어찌 날짜를 정하겠는가."
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군병 검열하는 일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도성의 군병이 날이 갈수록 허약해져 노약자가 절반이 되는데, 만일 직접 검열하는 조처가 없이 한결같이 버려둘 경우 어떻게 뜻밖의 일에 대비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월 21일 신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우의정 정유성(鄭維城),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청대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노량(露梁)의 사장(沙場)이 너무 넓으니, 수효가 적은 군병으로는 모양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게다가 상께서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군병을 검열하는 것인만큼 사체가 중대하니, 초라하게 배진(排陣)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잠시 어영군이 교대하도록 기다려 능에 다녀온 뒤로 연기해 거행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달은 날씨가 점차로 추워질 것이니, 이것이 염려스럽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9월의 가을 날씨는 심히 춥지 않을 것이니, 지나치게 염려할 게 있겠습니까."
하고,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9월 4, 5일 사이로 연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요즘 경연을 오래 폐지한 것은 대개 안질(眼疾)이 오래 낫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차례나 거동하시면서 경연만 열지 않는다면, 외간에서 쑥덕거릴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두표가 아뢰기를,
"능에 다녀온 뒤에는 관례적으로 춘당대(春塘臺)에서 무예를 검열하였습니다. 이날에 외방의 거자(擧子)들이 모두 모이는데, 정시(庭試)를 설치하여 인재를 뽑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예를 보는 일도 9월 안으로 정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3일 계해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접위관(接慰官) 윤절(尹晢)이 봉명 사신으로서 객지에서 죽었으니, 매우 불쌍하다. 지나게 될 각 고을로 하여금 호상(護喪)하도록 하라."
8월 26일 병인
이상(李翔)을 지평으로, 안후열(安後說)·박세견(朴世堅)을 장령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송시철(宋時喆)을 헌납으로, 김휘(金徽)를 형조 참판으로, 김남중(金南重)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심황(沉榥)을 승진시켜 종성 부사(鐘城府使)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고려조의 능침(陵寢)에 나무와 풀 베는 것을 금지하는 일에 대해 전일 성교(聖敎)를 받았기에, 낭관을 보내 적간하여 이미 바로잡았습니다. 고려 태조는 통일한 공이 크기 때문에 금표(禁標)를 2백 보로 한정하였고 현종(顯宗)·문종(文宗)·충경왕(忠敬王)도 칭할 만한 공이 있기 때문에 1백 50보로 정하였습니다. 기타 7개 능과 이번에 추가로 찾아낸 35개 능에 있어서는 1백 보로 한정하고, 일일이 기록하여 뒷날 상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변통해야 할 것은 신들이 감히 멋대로 단정할 수 없으니,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뒷날 등대(登對)할 때 품처하라."
하였다.
8월 29일 기사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사간 이민적(李敏迪),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김만균(金萬均) 등이 청대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조금 감기가 들어 아직도 땀이 그치지 않고 있다. 혹 더 아플까 염려되니, 소회를 서계하라."
하였다. 정중 등이 연명(聯名)하여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경연은 오래 정지되고 언로는 점차 막히므로 걱정하고 아끼는 구구한 심정에서 우러러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초라한 문자로는 시원히 속마음을 말씀드릴 수 없을 듯하기에 한 번 전하를 뵈어야 하겠다고 생각되어 감히 입대(入對)를 청한 것인데, 성상께서는 조금 감기가 들어 인견할 수 없다고 분부하셨습니다. 병환의 경중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으니 설령 와내(臥內)로 맞아들인다 해도 안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들이 비록 미천하긴 하나 명색이 간관으로서 진달하려는 것은 국사인데, 가까운 곳에서 전하를 끝내 나아가 뵙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성상께서 신들이야 가벼이 보신다 하더라도, 대각을 중히 하고 언로를 연다는 것만은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그대로 있을 면목이 없으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였다.
약방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상께서 감기 증세가 조금 있으시다 하니, 우려됨을 금하지 못하여 감히 와서 문안을 드립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병은 간언을 거절하려고 나온 것이다. 그러니 설혹 더 아프더라도 신료들이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들은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번에 피혐한 대간들은 전일 패초(牌招)할 때 아프다고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아닌가? 정원은 알아보고 아뢰도록 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대간들이 설혹 패초에 나오지 않았던 때가 있더라도 창졸간에는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지없이 황송합니다."
하자,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인피한 것은 걱정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대각의 옛 규례를 존속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교가 화평함을 잃었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화평함이 부족하게 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말인가. 계사의 의도를 내가 실로 모르겠다."
하고, 민정중 등에게 답하기를,
"내가 처음 한 말은 진실한 뜻으로 한 것인데 그대들이 병을 핑계한다고 의심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대들은 울근불근하지 말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봉환(封還)할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비답을 전하여 대청(臺廳)에 보였다. 정중 등이 다시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 정중이 일찍이 옥당에 있었는데, 당시 선왕께서 조금 건강이 좋지 않으시어 오래도록 인접(引接)을 중지하셨습니다. 이에 본관이 상차하여 진계하니, 즉일로 사대(賜對)하셨습니다. 우러러 선왕의 얼굴을 바라보니, 아직도 땀이 마르지 않았으며 음성도 명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픔을 이기고 전(殿)에 나오시어 한참동안 자문하셨으니, 선왕의 훌륭한 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임금이 아플 때에 뵙기를 청한 옛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인군의 병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여 죄를 주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령 신들에게 죄가 있다면 바로 견책하시는 것이 옳은데, 또 문안한 데에 대해 내린 비답에 노여움을 옮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약을 의논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기뻐하고 노여워함을 사물에 따라 하는 성인의 도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신들이 인군을 잘 받들지 못하여 별안간 엄지(嚴旨)를 받으니, 신들의 직임을 깎아버리고 이어 신들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선조(先朝) 때에 준행하던 규례는 생각하지 않고 감히 대관(臺官)에게 아첨하려는 계략을 꾸미어 한 가지의 일로 두 차례나 피혐한 계사(啓辭)를 버젓이 봉입(捧入)하였으니, 그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모양이 너무나 해괴하다. 승지 이은상(李殷相)과 조윤석(趙胤錫)을 먼저 무겁게 추고하라."
8월 30일 경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다시 인피하였다. 정원·옥당·헌부가 함께 상차하여, 간관을 불러 소회를 진달하게 하고 승지들을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상차하여, 우레같은 위엄을 거두고 쾌히 화평한 뜻을 보이시어 중외로 하여금 모두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짐을 보는 것처럼 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어제 몸이 아파서 부를 수 없었는데, 시급한 일이면 서계로 해도 좋겠기에 이처럼 대답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난 나머지 그 뜻을 간과해 버리고 사람을 이처럼 의심하니, 세도와 인심이 참말로 한탄스럽다. 그러나 경들의 차사(箚辭)가 이러하니 내가 유념하겠다."
대사간 민정중 등에게 답하였다.
"이번에 피혐한 내용을 보고서, 나 혼자 웃었다. 소회를 진달하려다가 갑자기 망령되이 성을 내다니, 충성심에 격동되었다고 과연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시급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나의 병이 낫기를 기다린다면 어찌 면대할 때가 없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진하(陳賀)할 때에 간원의 많은 관원들이 한창 인피 중에 있어 나아가 참여할 인원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하하는 예는 빠뜨릴 수 없다. 간원의 여러 관원은 이미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나와 참여하게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의 병환이 회복된 경사를 인해 교서를 반포하여 크게 사면하고, 백관들은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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