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신미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후에 내린 성비를 보건대 신자(臣子)의 극죄(極罪) 아닌 것이 없으니, 분의(分義)상 응당 물러가서 견책을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침 진하하는 큰 예를 만났고, 게다가 전교를 받아서 억지로 얼굴을 들고 반열에 끼어 명기(名器)를 더럽혔으니, 신들의 죄가 더욱 큽니다. 이어 생각하여 보니, 남에게 노여움을 나타내는 짓은 동료나 그 아랫사람에게도 감히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신하로서 인군에게 성을 내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청대하던 날, 당초 성상의 병환이 어떠하신지 몰랐고, 인접(引接)을 중지하신 결과 간원의 관원들 전원이 청대하였으므로 사체가 이미 중했으며, 성비에 또 작은 감기라고 말씀하시었으므로 와내(臥內)에서 인대하시는 것도 전대에서부터 행해 오던 아름다운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인데, 구구한 소망은 그저 잠시만이라도 만나주셨으면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대신의 차자에 내린 비답을 보건대, 사지가 몹시 엄하여 심지어는 인심과 세도(世道)를 한탄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전하의 노여움이 아직 걷히지 않고, 전하의 뜻이 아직 석연해지지 않은 것이었는데, 단지 대례가 임박했기 때문에 우선 나와 참여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신들이 지극히 형편없기는 하나 맡고 있는 직임은 일반 관료와 다르니, 성상께서도 예로써 나아가게 하고 물러가게 해야지, 한편으로는 견책하고 한편으로는 잡아맴으로써 방황하고 위축되어 몸둘 곳이 없도록 하여서는 안 됩니다. 신들의 죄가 이와 같으므로 하루도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일 임신
대사간 민정중 등을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고, 또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체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부러 패초를 어기는 죄를 범하여 기어코 체직되려 하니, 이것이 어찌 임금을 섬기는 지성과 공경의 도리이겠는가. 그러나 오늘의 처치는 한갓 옛 관례만을 지킬 수는 없으니, 모두 출사하게 하라."
하였다. 집의 오두인(吳斗寅), 장령 박세견(朴世堅), 지평 박정(朴烶)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간원의 관원들을 체직시키라고 청한 것은 대개 패초를 어기고 나오지 않을 경우 관례상 응당 체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들은 법관의 신분으로서 한갓 상규(常規)만을 지켰으니, 신들이야말로 융통성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간곡하게 거듭 하유하시며 모두 출사하게까지 하셨으니, 참으로 만물을 용납하는 성인의 도량입니다. 돌아보건대, 저 간관들이 말을 가릴 줄 몰라 엄한 위엄을 잘못 건드리긴 하였으나, 위에서 이로써 끝내 미워하는 마음을 갖거나, 아래에서 이로써 조금이라도 지성과 공경의 도를 잃겠습니까. 경책의 말씀을 내리자마자 바로 시원히 여는 뜻을 보여주셨으니, 참으로 이른바 ‘온화하게 하고 엄숙하게 한 것 모두가 가르침이다.’고 한 것입니다. 진실로 이로부터 따스한 얼굴로 묻는 것을 장려하고 충성된 말을 다하게 한다면, 이는 참으로 ‘침범하여도 따지지 않고 노여움을 옮기지 않으며, 허물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성인의 훌륭한 덕인 것입니다. 신들이 옛 관례만을 지키어 경솔하게 체직할 것을 청한 잘못은 면하기 어려운 바가 되었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다. 민정중이 또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 대비의 병환이 회복된 경사에 대해 이미 종묘에 아뢰고 하례도 드렸으니, 당연히 과거를 설치하여 경사를 함께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전례를 상고하건대, 인조조 신미년에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병환이 회복된 경사로 별시(別試)를 설치하여 인재를 뽑았는데 모두 서울로 모이게 한 뒤 세 군데로 나누어 6백 명을 뽑았고, 선조(先朝) 경인년에 대왕 대비의 병환이 회복된 경사로 역시 과거를 설치하였는데 이때에는 과거를 자주 보여 먼곳에서 거자(擧子)들이 서울로 올라오는 폐단이 있다고 비국이 계품해서 정시를 설치하여 거행하였고, 계사년030) 에는 대왕 대비의 병환이 회복된 경사로 별시를 설치하였는데 한결같이 신미년의 예를 따랐습니다. 이번에 설치할 과거도 별시이건 정시이건 간에 반드시 미리 결정한 다음에야 거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있을 춘당대(春塘臺)의 정시(庭試)와 중복되게 행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과거는 중한 일이므로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정할 수 없으니,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중추 이경석(李景奭),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의논드리기를,
"경사로 인하여 과거를 설치하는 것이야말로 경사를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정해진 정시와 합하여 설치하는 것은 너무 일이 구차합니다. 신미년이나 계사년의 예를 따라 거행하소서."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는 의논드리기를,
"춘당대의 정시를 앞으로 거행할 것이니, 이번 경사로 인한 과거는 경인년의 예를 따라 합하여 설치하고 인재를 널리 뽑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경석 등의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9월 3일 계유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경사로 인한 과거는 별시로 결정되었습니다. 초시(初試)의 규식은, 초장에는 논(論)과 표(表)를 한 편씩 짓게 하고, 종장에는 책문(策問) 한 편을 짓게 하되, 세 군데로 나누어 각기 2백 명씩 뽑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강경(講經)에는 사서(四書) 중에 한 책을 뽑아 정하고, 삼경(三經)은 1경을 자기의 뜻대로 가려서 하게 하되, 조(粗) 이상을 뽑아 모두 서울로 모이게 한 뒤 계사년의 예를 따라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9월 4일 갑술
대사간 민정중 등이 직임에 나와, 고양 군수(高陽郡守) 윤후익(尹後益), 양성 현감(陽城縣監) 김해(金垓), 영평 현령(永平縣令) 심추(沈樞)의 체차에 대한 계사를 거듭 올리니, 상이 따랐다.
예조 판서 김수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자전께서 건강이 회복되셨으니,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없습니다. 과거를 설치하여 인재를 뽑는 목적은 이 경사를 함께 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신이 정시(庭試)에 붙여서 하면 미안하다면서 별시(別試)로 거행할 것을 청한 것은, 대개 두 조정에서 행하였던 법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정시이든 별시이든 경사를 함께 하는 것이야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별시는 초시(初試)와 강경(講經)과 전시(殿試)가 있어서 두어 달 안에 연이어 과거장을 설치해야 하므로 형세상 군색할 뿐 아니라 외방에서 문과나 무과에 나올 거자들이 서울에 와서 여러 달을 지내게 될 경우 금년에 제법 풍년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식량을 싸들고 왕래하는 비용과 주객(主客)이 함께 곤란을 치르게 될 폐단이 필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수령도 반드시 적지 않을 텐데, 마침 겨울철을 당하여 관아의 사무가 매우 많을 것이니, 만일 오래도록 자리를 비워둔다면 그 폐단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정시는 외방의 거자가 설사 과거를 보러 온다 하더라도 한 차례만 출입하면 바로 해산해 돌아가게 되니, 그 비용의 절약이 현저하게 차이가 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춘당대의 정시는 설치할 것 없이 관무재(觀武才)만 행하고 별도로 정시를 설행하되 그 기간을 넉넉히 늘려서 외방의 선비로 하여금 모두 나올 수 있게 하는 한편, 시취(試取)하는 수를 평상시보다 약간 더 늘려 경사를 함께 한다는 뜻을 보여 주신다면 다른 과거에 합쳤다는 혐의도 없으려니와 그 폐단도 덜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그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그 의논에 따라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9월 5일 을해
박승건(朴承健)을 장령으로, 안후열(安後說)을 교리로, 이숙(李䎘)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전일 청대(請對)한 간관을 빠짐없이 패초(牌招)해서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과 일시에 나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와 옥당도 청대하니,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각도 조적곡의 포흠량(逋欠量)은 금년 농사를 보고 수치를 정하여 거두어들여야 하겠습니다만, 신의 생각에는 그 절반만 거두어 들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호판 정치화(鄭致和)에게 이르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금년 농사가 조금 풍년이라고 하더라도 해마다 큰 흉년이 든 뒤라서 백성의 재력이 이미 고갈되었는데, 절반만 감해준다면 형세상 마련해 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삼분의 일만 거두어들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에도 절반을 감하여 거두어 들였으면 하였는데, 호판의 말을 듣고 보니 또한 소견이 있다. 여러 신하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사간 이민적(李敏迪), 교리 김만기(金萬基) 등이 모두 절반만 감하자고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그 수치를 알맞게 정하지 않았다가 혹 도신의 치계로 인하여 뒤따라 감량하여 거두는 조처가 있게 된다면 사체를 손상할 것이다. 그런 것보다는 꼭 거두어들일 수 있는 수치를 참작해 정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금년의 조적곡은 전부 거두어들여야 하는 일이니 거론할 것도 없다만, 지난해 나누어 준 수량만큼은 매 호당 절반을 감하여 거두어들여 공평하지 못한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이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호남 에서 2두(斗)씩 거두어들이지 못한 신축조(辛丑條) 대동미는 금년에 거두어들여야 하겠으나, 각종 포흠(逋欠)을 일시에 독촉하여 거두어들인다면, 형세상 힘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특별히 감해주어 덕의를 보이면, 백성들이 반드시 감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치화(致和)가 아뢰기를,
"균전(均田)에 대한 사목은 이미 계하하였습니다. 그런데 균전사는 명을 받고 밖에 있는 관원과는 비할 수 없으니, 반드시 한 청사를 별도로 설치하고 또 각기 낭속(郞屬)들을 차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문서와 계산 등의 일을 관리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장소로는 경덕궁(慶德宮) 밖의 비변사로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민적(敏迪)이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면세(免稅)의 한계를 정하는 일에 대해 진달한 바가 있었으나, 상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영원한 계책은 지속해 나갈 만한 방도를 생각해야 하니, 그 수치를 알맞게 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내가 수치를 정하려 하였는데,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5백 결로 한도를 정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명하는 아뢰기를,
"외방의 의논은 모두 5백 결은 많다고 합니다. 설령 4백 결로 제도를 정하더라도 직전(職田)보다 두 배나 되는 수치입니다."
하고, 민적은 아뢰기를,
"일이란 적당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백 결로 정해주더라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병판 김좌명(金佐明)은 아뢰기를,
"전일 인견하신 뒤 신들이 물러나와 상의하였는데, 모두 5백 결로 하면 그리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민적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다투는 것은 6백 결에 대해서이니, 5백으로 한정하면 그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하는 것보다는 낫겠습니다."
하였다. 정중과 만기(萬基)가 아뢰기를,
"5백의 수치는 뭇 의논이 모두 많다고는 하지만 다투는 바가 그리 대단하지 않으니, 5백의 수치로 정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고, 장령 송시철(宋時喆), 정언 김만균(金萬均)이 아뢰기를,
"신들의 뜻도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사의 뜻이 이러하니, 대군과 공주는 5백 결로 한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3백 50결로 한정하라. 그리고 떼어 준 것 가운데에 진결(陳結)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시기(時起)로 채워 주도록 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나라의 중대한 일은 군정(軍政)에 있는데, 연이어 흉년을 만나 버려둔 지 이미 오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요즘에 와서는 영장(營將)에 대부분 적격자를 얻지 못하여 각 고을 수령들이 호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속오군(束伍軍)의 빈 인원을 즉시 채우지 못해 장차 군병이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각 고을 수령은 인원이 빈 즉시 채운 다음 영장에 알리고, 영장은 다시 병조에 알리게 하여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고과(考課)하는 자료로 삼게 한다면, 일이 착실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어사가 내려갈 때에 채워 넣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하고, 이어 각도의 영장에게 빈 수에 대해 보충한 수를 기록하여 병조에 알리라고 명하였다. 상이 정중 등을 앞으로 가까이 오라고 명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신들이 일을 망령되이 처리하여 여러 차례 엄한 비답을 받았는데, 이제 인접해 주시니 그지없이 황송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몸이 편치 못했다가 이제 다행히 나으셔서 능의 참배와 군사를 검열하는 일을 차례로 거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연만은 오래 폐지하고 인접(引接)도 너무나 드물게 하시므로 신들의 우려가 이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습니다. 임금이 마음을 한 번 게을리 하고 한 번 소홀히 하는 데에 따라 그야말로 패망의 기틀이 달려 있는 것인데, 옛날 성왕들이 반우(盤盂)나 궤장(几杖)에 모두 잠언(箴言)을 새겨 둔 것도 참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전하께서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니 평상시 하는 거동은 바깥 신하가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나, 안일한 생각이 혹시라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싹튼다면 곧 천리(天理)가 막혀 끊어질 것이니, 이 점을 신들이 깊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질(眼疾)에는 글을 보는 것이 가장 해롭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을 중지할 수 밖에 없어 민망하게 여기고 있다. 이제는 조금 나은 듯하니, 앞으로 경연을 열려고 한다. 지난번 그대들이 청대할 때만 해도 한창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인견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소회를 서계로 알리게 한 것이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예를 갖추어 경연을 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유신(儒臣)을 인접하여 경사(經史)를 읽게 하고 들으신다면 어찌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상께서 때로 후원에 나아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거리에 떠도는 말을 모두 믿기는 어렵겠습니다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혹 내가 여기에 뜻이 있다 하더라도 기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삼대 이상은 우선 차치하더라도 그 아래로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의 임금 가운데 조금이라도 다스려 보려고 한 자는 경연을 폐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척발위(拓跋魏)야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만, 또한 ‘글을 보니 도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깊이 염려하는 것은 사실 오랫동안 경연을 폐지한 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인견할 때에 삼사도 입시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니, 신은 안타깝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조종조 이래로 하루 세 차례씩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게다가 조참(朝叅)과 상참(常叅)의 예가 있어 여러 신하들이 나아가 인접하지 않은 때가 하루도 없었으니, 이것이 치도(治道)가 융성했던 이유입니다. 성상께서는 어찌 이를 생각해 보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사를 입시하지 못하게 한 것은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승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앞으로는 일을 볼 때, 삼사를 관례에 따라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정중과 민적이 해서(海西) 궁장(宮庄)의 폐단과 윤겸(尹㻩)에게 죄를 주어야 할 것에 대해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도신(道臣)의 장계를 어떻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도신의 말이 혹 타당하지 않더라도 백성의 원망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진휼청을 설치할 때 전남 감사 이태연(李泰淵)은 제대로 조정의 명을 이행하지 못하여 진휼청의 무곡(貿穀)을 제때에 거두어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또 양남(兩南)031) 의 굶주린 백성들이 진휼청을 설치하기 전에 굶주려 죽은 자가 많았는데도 도신이 자세히 살펴 조정에 알리지 못했습니다. 태연과 경상 감사 민희(閔熙)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청인(淸人)의 공갈로 인해 사적으로 주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고 하여 평안 감사 임의백(任義伯)과 김체건(金體乾)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명하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거듭 노하신 끝에 이렇게 진지하게 대면해 주시니 입시한 신하들로서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간관이 아뢴 것은 긴요하지 않은 말이 많았고 말해야 할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신이 진달하겠습니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는 당초 회계한 일 때문에 특별히 파직하였다가 곧바로 그 명을 거두었는데, 다시 아뢴 다음에는 격식에 벗어난 가유(加由)의 명이 있었으므로 【원리가 탄핵받은 뒤 세 번 정사(呈辭)하니, 상이 격외로 가유해 고치도록 하였다.】 밖의 의논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원리를 파직한 것은 회계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신이 천거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좌상 원두표가 천거했다.】 가유를 내린 것이지, 나의 뜻을 맞추었다고 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정중과 민적 등이 인피하기를,
"원리가 전후로 올린 회계는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은데, 전에는 특별히 파직하고 뒤에는 가유를 주셨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상이 비위를 거스르면 미워하고 뜻을 맞추어주면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들이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아 이렇게 중신의 배척을 받았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승지에게 이르기를,
"물의가 이러하니, 호조 참판 서원리를 체차하라."
하였다.
9월 7일 정축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와 예조 참판 조복양(趙復陽) 등이 상차하기를,
"간원이 서로(西路)의 감사와 병사의 파직을 청한 일은 체모를 얻었다고 하겠습니다만, 이 말이 혹 퍼지면 뒷날 말썽거리가 될 듯싶으니, 이 점이 가장 염려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한 것을 준 수량이 전해진 정도까지는 되지 않으며, 감사 임의백은 요리하여 처리한 일도 많았습니다. 가벼이 체차하여 서툰 사람에게 맡겨서 안 됩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들였으나,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9월 9일 기묘
인시(寅時)에 상이 거둥하여 진시(辰時)에 영릉(寧陵)에 이르러 배알하고 능의 주위를 두루 살폈다. 걸어서 홍살문을 나와 작은 가마를 타고 현릉(顯陵)에 나아가 참배한 다음, 차례로 목릉(穆陵)과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 헌작(獻酌)하였다. 예를 마치고 나서 바로 비석 아래로 나아가 비문을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능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여기만 비를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늙은이들이 전하는 말로는 ‘건원릉과 헌릉(獻陵)에만 비석이 있었고, 다른 능에는 없었는데, 이는 아마도 헌릉에 대해 뒷날 어떤 논의가 있어 비석을 세워 찬양하는 것은 미안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중지하고 세우지 않은 것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미시(未時)에 상이 떠나 주정소(晝停所)에 머물렀다. 좌상 원두표, 우상 정유성, 이판 홍명하, 병판 김좌명이 청대하여 입시한 뒤 같은 내용으로 아뢰기를,
"지난번 인견하실 때 간원이 평안 감사와 병사를 논핵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다만 감사를 바꾸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는 것을 신이 당초 진달하려고 하다가 머뭇거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의정의 장계를 보건대, 또 칙사가 온다는 기별이 있으니, 이때엔 더욱더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에도 당초부터 파직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겨지기에 거행할 조건들을 아직까지도 내리지 않고 있는데, 이는 대개 생각해 볼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의 생각도 이러하니, 거행할 조건 가운데 고쳐서 분부해야 하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그 비용도 너무 지나치게 들지는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부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금은 거동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방울을 울리며 연주하고 길을 치운 뒤에 가는 것이 어찌 위의를 갖추고 보기에 아름답게만 하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뜻밖의 일에 대비해 경계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신들이 수레의 뒤를 수행하면서 삼가 보건대, 수많은 말들이 함께 달려 마치 비바람처럼 빨랐으므로 뒤따라 걸어가는 예속들은 헐떡거려 숨을 가라앉히지 못하였으며, 재를 넘고 모퉁이를 돌아갈 즈음에 이르러서는 사람과 말이 뒤섞이면서 형세가 더욱 빨라져 따르는 관원도 차서를 잃고 병사도 대열을 벗어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좋은 행차에 예를 갖추는 뜻이라고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태복시의 어마(御馬)가 잘 길들여졌다 하더라도 혹시 사납게 날뛰다 멍에를 벗어나는 우환이 없지 않을 것이니, 마른 나무나 썩은 말뚝도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실 때에는 반드시 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가면서 삼군(三軍)과 백관이 각기 반열의 차서를 따르게 하여 급히 서둘다가 뜻밖에 일어나는 환란이 없도록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에 이렇게까지 말하였으니, 유의하겠다."
하였다. 송계(松溪)의 길을 지나면서 금군(禁軍)의 장수에게 명하여 먼저 사하리(沙河里)의 들판에 가서 진(陣)을 치고 기다리게 하였다. 상이 진 앞에 이르러 진을 풀게 한 다음 동서로 말을 달리면서 살펴 보았다. 신시(申時)에 환궁하였다.
9월 11일 신사
헌부가 윤선도(尹善道)의 위리 안치를 철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한 계사를 중지하였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능침에 참배할 적에 아련히 조고(祖考)가 내려와 임하신 듯하였는데, 옛적에 창업하고 지키던 어려움과 오늘날 계승하기 어려운 점을 생각하시면서, 반드시 앞으로 근신하고 두려워하여 날마다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잠깐 사이라도 끊임이 없게 하시면, 어디서든지 조고를 뵙게 되어 성상의 효도가 날로 빛날 것이니, 나라를 보호하고 왕실을 흥성하게 하는 것이 또한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미약한 마음을 향해 뭇 사욕이 공격해 오는만큼, 분명하게 뜻을 스스로 세워 줄기차게 나가지 않는다면, 성색(聲色)·화리(貨利)·기기(奇技)·음교(淫巧) 따위가 뒤섞여 번갈아 들어오므로 침식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리의 학문을 강구해 나가야만이 이 마음을 밝힐 수 있으며, 어진 사대부를 가까이 해야만이 이 마음을 기를 수 있으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즐겨 들어야만이 이 마음을 유지해 갈 수 있습니다.
대개 학문에 뜻을 돈독히 가지면 성경(聖敬)은 날로 발전하여 계승해서 번창해 가는 공이 있을 것이며,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는 때가 많으면 총명이 날로 넓혀져 서로 수양되는 이익이 있을 것이며, 언로를 활짝 연다면 자신의 허물을 날로 듣게 되어 거절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 가지의 일에 힘을 쏟는다면 전하의 마음이 맑아져 사특한 것들이 물러가게 되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도 이를 따라 모두 극치에 이를 것입니다. 옛날 태조 대왕께서 건국 초기에 대사성 유경(劉敬)과 내사사인 유관(柳觀)에게 명하여 교대로 날마다 숙직하게 하면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게 하셨는데, 성인께서 창업하여 대통을 물려주면서 자손들이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 뒤로 성신(聖神)이 서로 이어 3백 년을 지내오면서 학문에 종사하는 그 돈독함은 전이나 뒤나 똑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조(聖朝)의 가법이니, 오늘날 계승하여 해나가야 할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해서(海西) 궁장(宮庄)의 일에 대해 헌신(憲臣)이 논집한 지 오래되었고 신들도 면전에서 진달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아직까지 미루고만 계십니다. 만일 친애한다 하여 사사로이 비호하는 점이 있다면, 이는 뭇 신하들이 성명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조금 삼갈 줄 아는 사대부라도 백성과 전지로 송사를 벌여 스스로 제 몸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인데, 더구나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가난한 백성과 몇 치의 토지를 다투어 스스로 그 중함을 손상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옛날 태조조에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자들에게 전지를 더 줄 것을 청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본과(本科) 1백 결만 가지고도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을텐데, 만일 더 준다면 사람들이 필시 나보고 자기 아들만 생각한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전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줄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비록 화목과 우애의 도리를 돈독히 하신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은택을 마구 주어 조종조에 정한 가르침을 뛰어넘는다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고, 또 공사 간에 시장(柴場)과 어장(漁場)을 마음대로 차지하는 폐단을 금지할 것에 대해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9월 12일 임오
이른 아침에 상이 말을 타고 노량(露梁)에 행차하여 군대를 검열하였다. 이때 모인 군졸은 훈국(訓局)의 7천 명, 어영군 2천 명, 금군의 10초(哨)였는데, 두 편으로 나누어 좌진과 우진을 만들었다. 상이 단상에 나아가자 훈국과 어영 두 대장이 입시하여 승지의 아래에 앉았다. 훈국의 중군(中軍)은 상의 앞에서 명을 듣고 외치며, 대장은 앞에서 지휘하였다. 진을 이루자 두 진을 한곳으로 합하여 에워싸게 하고, 또 금군으로 하여금 진과 맞붙게 하여 서로 싸우는 모양을 만들게 하는 한편 여러 영의 병사를 대오로 나누어 번갈아 나오게 하였다. 상이 보는 중에 해가 기울었는데, 또 진을 변화시켜 방영(方營)을 만든 뒤 대면하고 조련하게 하였다. 한참 만에 끝나자 공과 죄를 상의 앞에서 조사하였다. 훈국 중군 정부현(鄭傅賢)은 군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금군 별장 정한기(鄭漢驥)는 진퇴할 적에 차서를 잃었다는 것으로 모두 결곤(決棍)하였으며, 훈련 대장 이완(李浣)과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 및 어영 중군에게는 모두 말을 하사하였다. 날이 저물자 진(陣)을 파하고 해산시켰다. 상이 환궁하였다.
9월 13일 계미
대사간 민정중 등이 아뢰기를,
"입양(入養)되면 아들이 되는 것이야말로 상경(常經)이며 통의(通義)로서, 이미 친부모를 백부모 숙부모로 삼고 나면 친자(親子)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상정(常情)은 친자만을 중히 여긴 나머지 혹 입양한 뒤에 아들을 낳을 경우, 친자로 제사를 받들게 하고 입양한 아들은 중서(衆庶)로 삼아버리고 마는데, 이는 부자의 의리를 거짓으로 합한 꼴이 되고 따라서 윤기(倫紀)가 문란해집니다. 일찍이 인조조에 예관이 호안국(胡安國)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입양한 아들이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을 청하여 이미 성헌(成憲)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고 상신 최명길(崔鳴吉) 등도 모두 이 법을 따랐었는데, 그뒤 사대부들이 이따금 예율(禮律)을 돌아보지 않고 다시금 친자로 적자를 삼고 있으니, 윤리에 크게 손상됩니다. 예관에게 거듭 밝힐 것을 명하여 인조조에 분부를 받든 이후로 어긴 자가 있으면 일일이 개정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한원(翰苑)의 옛 풍습에, 하번(下番)인 자는 상(喪)을 당해도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사사(史事)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복(服)에는 가벼운 복과 중한 복이 있으며, 공법(公法)이나 사정(私情)상으로도 참작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가령 조부모 이하의 기년복을 만난 자는 나가서 곡(哭)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초상에 염습(斂襲)과 초빈(初殯)하기 전에 조삼(朝衫)과 공복(公服)으로써 호종하기 위해 근밀한 처소에 총총히 오가게 한다면 사사(史事)가 아무리 중하더라도 예교(禮敎)에 손상이 됩니다. 정원에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여 모두 성복(成服)한 뒤 출사할 것을 허용하게 하소서."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답하였다.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이 의논드리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우리 나라에서는 가정(嘉靖)계축년032) 에 명을 받아 후사를 세운 뒤에라도 친자를 낳으면 친자로 봉사하게 하고 후사로 세웠던 아들은 중자로 삼되 파계(罷繼)하지는 못하게 하였는데, 인조조에는 또 고 상신 최명길이 후사를 들인 뒤 아들을 낳았으나 호안국의 고사에 따라 후사로 들인 아들을 장자로 삼을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전후의 법령이 이러하긴 하나, 천륜이란 일단 정해지면 차서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고인의 예를 찾아 본다면, 제갈양(諸葛亮)은 아들이 없어 그의 형 제갈 근(諸葛瑾)의 아들 제갈교(諸葛喬)를 아들로 삼았는데, 그뒤 친자 제갈첨(諸葛瞻)을 낳았으나 교로 적자를 삼았으며, 호안국은 그 형의 아들 호인(胡寅)을 입양한 뒤 호영(胡寧)과 호굉(胡宏) 두 아들을 낳았으나 인으로 후사를 삼았으니, 이야말로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이제 만일 대계(臺啓)에 의하여 인조조에 수교(受敎)한 뒤로부터 어긴 자를 일체 개정하도록 한다면,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오래된 것과 요즘의 것이 일치하지 않아 들쭉날쭉 서로 다르게 됨을 면치 못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제부터 거듭 밝혀 인조조의 수교를 영원한 규식으로 삼는다면, 위로는 가정 때의 수교가 폐지되지 않고 아래로는 인조조의 성헌을 어기지 않게 되어 간편하고 순조롭게 될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대간의 계사대로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가정 계축년의 수교로 규식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경석이 또 한원(翰苑)의 복제(服制)에 대해 의논드리기를,
"신은 젊어서부터 노인들의 말을 익히 들었는데, 이 법을 마련한 것은 사국을 중히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고, 상번과 하번의 직분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서 기강을 유지하고 미루어 올라가 조정의 체면도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조(國朝) 이래로 예를 아는 노숙한 선비가 적지 않았지만 이 법을 고치려고 한 자는 없었습니다. 신은 감히 딴 의논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두표와 유성은 의논드리기를,
"하번의 사관이 상을 당해도 나갈 수 없고 심지어 조부모·형제·처의 상에도 달려가 곡을 할 수 없게 한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로서 도리어 예교(禮敎)에 손상이 될 것이라는 점이 대론이 일어난 까닭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 일은 오로지 사국(史局)을 중히 하기 위한 뜻이니, 갑자기 변통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호남 고창현(高敞縣)에서 어느 백성의 아내가 한꺼번에 세 사내아이를 낳았다.
9월 14일 갑신
유경창(柳慶昌)을 대사헌으로, 곽제화(郭齊華)를 장령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참찬으로 삼았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지난번 평안 감사와 병사의 파직을 청하는 논의로 탑전에서 진달하여 바로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듣건대 경재(卿宰)가 상차하여 그대로 둘 것을 청하였는가 하면 뒤이어 또 대신의 청대로 인해 끝내는 이미 윤허한 명을 중지하였다고 하니 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임의백(任義伯) 등이 사세가 절박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요구한 대로 주고 제재하지 못한 채 관례로 주는 것 외에 수천 금의 재물을 가벼이 쓰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또 관례로 굳어진다면, 장차 어떻게 뒤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훗날 올 무궁한 염려를 위하여 감히 죄줄 것을 청하였고, 성상께서도 이미 그 청을 허락하셨는데, 며칠 사이에 또 다시 그대로 두기로 명하였으니, 사체에 있어서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들이 일에 어두워 함부로 말하였다가 시의(時議)에 가벼이 보여 공법을 시행하지 못하고 대각의 체례를 무너지게 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언책의 자리에 버티고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중 등이 물러가 기다리지 않고, 평양 감사 임의백과 병사 김체건(金體乾)의 파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5일 을유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강변(江邊)의 청인(淸人)들이 전에도 넘어온 적이 있었으나 오늘처럼 많지는 않았었습니다. 이는 대개 우리 측에서 공문을 보내 문책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거리낌없이 하는 것입니다. 뭇 의논은 봉황성(鳳凰城)의 장수에게 말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령 봉황성에 말한다고 하더라도 강변의 호인(胡人)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봉황성의 장수는 강변의 여러 부락을 관리하고 있으니, 본래 금지시킬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즘 입계한 공사를 제때에 판하(判下)하지 않으므로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방의 일도 많이 밀리고 늦어지고 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하고,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신이 인조조에 정원에서 보건대, 크고 작은 공사가 아무리 밤중이 넘은 뒤에 들어오더라도 지체시키지 않고 곧 계하하였기 때문에 입직 승지들이 삼경(三更)까지 앉아 있었습니다. 선왕께서는 이처럼 정사에 부지런히 하셨는데, 이는 전하께서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병판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요즘 도적을 잡은 사람에게 상을 내리는 길이 매우 넓어졌기 때문에 도둑을 다스리는 수법이 점차로 잔혹해진 결과 고통과 아픔을 이기지 못해 거짓으로 자복한 자가 있기도 합니다. 옥사를 다스리는 도리가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도둑을 잡은 공에는 가리켜 주거나 체포에 조력하는 등 수공(首功)과 종공(從功)이 있기 마련인데, 요즘에 와서는 수공 종공 할 것 없이 두서너 명만 잡으면 일률적으로 상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한 산성의 중군과 포도 군관 가운데 상을 받지 않은 자가 거의 없으니, 이 폐단을 일체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호판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외방에서는 도둑을 다스릴 때 더욱 혹독한 형벌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대체로 죄 가운데에는 역적보다 더한 죄가 없는 것인데, 더러는 역적을 다스릴 때에도 없는 형벌을 쓰기도 하니, 이는 더욱더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광한 대당(獷悍大儻)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관군의 체포에 항거하는 자들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무리를 지어 마구 날뛰는 자를 잡은 자를 제외하고는 논상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이것도 구애되는 바가 있으니 일률적으로 논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호조의 선세(船稅) 징수 장부는 태반이 거짓인데, 지금은 배가 있는지 알아보지도 않은 채 강제로 선세를 거두고 있으므로 연해(沿海)의 크나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해도 감사로 하여금 허실을 조사하여 알리게 한 다음 각처 소속의 배는 참작하여 수효를 정하고 그 나머지는 모조리 본조에 소속시켜 세금을 거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유경창(柳慶昌)이, 평산 부사 윤겸을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할 것에 대한 계사를 다시 올리니, 상이 따랐다.
9월 16일 병술
대왕 대비가 병환이 났을 때 약 시중을 든 공로로 약방 도제조 원두표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을, 제조 김좌명과 부제조 남용익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을 내리고, 기사관 원식(元植)과 주서 조원기(趙遠期)는 모두 6품으로 올렸으며, 어의 유후성(柳後聖) 등 3인은 가자(加資)하였고, 그 나머지는 차등을 두어 논상하였다.
9월 17일 정해
간원이 아뢰기를,
"사국(史局)의 그릇된 관례를 대신에게 의논하여 변통할 것에 대해 아뢰어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의논드린 것을 보건대, 자못 참작한 뜻은 없고 억지로 그릇된 관례를 끌어다가 인정상으로나 도리상으로 차마 할 수 없는 일로 사람을 짓누르니, 이것이 과연 예의로써 아랫사람을 인도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정원에게 명하여 다시금 대신에게 의논해 변통할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의논을 거두었는데, 다시 의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8일 무자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상참(常參)을 받았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전(殿) 위로 올라가 아뢰기를,
"입양한 아들이 승중(承重)하는 일에 대해 대신의 의논과 본원의 계사가 서로 일치되었는데, 계축년의 분부를 그대로 따르라고 분부하셨으니, 신은 의혹이 됩니다. 일단 후사로 세워 부자간이 되었으면, 설령 친자라고 하더라도 어찌 취하고 버리어 인륜의 질서를 문란케 할 수 있겠습니까. 명종조에 받은 분부가 그랬더라도 인조조에 받은 분부 또한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대신들의 의논대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종조의 분부는 그 일로 직접 분부하신 것인 반면, 인조조의 분부는 다른 일로 말미암아 분부하신 것이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교리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이미 세대가 멀어져 그때 분부하신 본의는 모르겠으나, 아들을 낳은 뒤에 파계(罷繼)한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분부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자간은 인륜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인데, 한번 정한 뒤에 어떻게 자기 소생만을 후사로 삼고는 친자이니 양자이니 구분해서야 되겠습니까. 영중추 이경석이 의논드린 제갈양과 호안국의 일을 상법(常法)으로 삼을 만하니, 인조조의 분부에 의거하여 대간의 계사를 따르시는 게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만기가 또 아뢰기를,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실상이 있어야 선비가 나올 것이며, 말을 듣는 도리에 실상이 있어야 간언을 할 것입니다. 지난번 이유태의 상소에 시행할 일이 많이 있었는데 아직도 채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송준길이 상소하면서 또한 이 점을 말하였습니다. 이유태가 올라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합니다. 대신을 인접하는 날에 조목별로 물어 채용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에 내려야 하겠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후사가 된 아들이 제사를 맡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경(禮經)의 바꿀 수 없는 법인데, 인조조에 분부를 받은 일까지도 있었다. 그래서 대신과 대간이 예에 입각하여 논변했던 것인데, 이때 고 상신 심지원(沈之源)의 집에서 후사로 세운 아들을 버리고 친자로 후사를 삼았기 때문에 상이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던 것이다.
9월 19일 기축
이합(李柙)을 지평으로, 남노성(南老星)을 호조 참판으로, 조귀석(趙龜錫)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9월 20일 경인
상이 명하여 어영 별마대(御營別馬隊) 이득선(李得先)·김상광(金尙光)·김덕호(金德浩) 등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는데, 활쏘는 솜씨를 시험할 때 높은 등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령 박세견(朴世堅)이 청대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대한 일은 무슨 일 때문인가?"
하니, 세견이 아뢰기를,
"지난번 능에서 돌아오시는 길에 군병을 사열하지 않고 조용히 날짜를 가리어 교장(敎場)에서 사열하신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다만 대장이 진을 변화시킬 줄 모른 나머지 상께서 직접 지휘하셨는데 엄하고 급한 일이 많았습니다. 진에 임해 합변(合變)하는 것은 본디 수신(帥臣)이 하는 일인데, 상께서 직접 지휘해서야 되겠습니까.
옛날 선유 정호(程顥)가 젊었을 적에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날 주돈이(周敦頤)에게 말하기를 ‘요즘에는 전혀 이런 마음이 없다.’고 하자, 돈이가 말하기를 ‘찌꺼기까지 완전히 씻어버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어하기 어려운 때가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뒤 과연 정호가 저물녁에 돌아오다가 사냥하는 광경을 보고는 갑자기 좋아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도 필시 평상시에 이러한 생각이 많기 때문에 창졸간에 그런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하의 한 생각은 오직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학문을 닦는 데에만 힘써야 할 것이며, 군사의 일에 정신을 써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직접 나아가 군병을 사열하는 것은 잘하는지의 여부를 살피기 위한 것이다. 진을 배열할 적에 뒤죽박죽 차서를 잃고 있는데, 끝내 그대로 둔 채 묻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위급한 변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이같은 말은 자못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세견이 아뢰기를,
"경연을 오래도록 폐지하니 신하들이 민망히 여깁니다. 지금 교외에 거둥까지 하시면서 경연만은 열지 않으니, 성상이 계속 병환 중에 계셨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는 안질(眼疾)이 매우 심하여 글자를 보는 데에 방해가 되었고, 지금은 천식(喘息)의 증세가 있어 대화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경연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세견이 아뢰기를,
"궁가(宮家)의 면세에 대해 전일 품정(稟定)했다고 하는데, 5백 결은 너무 지나칩니다. 일찍이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양조 때 궁가 면세의 수치가 비록 많고 적은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간략하게 하였는데, 더러는 직전(職田)의 수치에 채 차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다시 헤아려 알맞게 정해야 합니다. 이 일은 계사를 올려 쟁집(爭執)하여야 하나, 등대(登對)하여 조용히 말씀드리는 것이 낫겠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성난 빛으로 말하기를,
"논하려면 논할 것이지 왜 이렇게 운운하는가. 기어코 다시금 말하겠다면 예전대로 설치하겠다."
하자, 세견이 아뢰기를,
"신이 어리석고 망령된 소견으로 감히 면전에서 하늘같은 위엄을 범하였으며, 뜻을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하여 엄한 분부를 내리게 하였으니,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대사헌 유경창(柳慶昌)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1일 신묘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일 궁가에 면세해 줄 결수(結數)를 품정할 때, 신이 끝까지 힘껏 간쟁하지 못하여 성스러운 조정의 허물이 되게 하고 말았으니, 신의 죄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호조의 회계를 보건대, 시장(柴場)에 대해서는 관동(關東)만 파하고 해서(海西)는 논하지 않았으며, 화전(火田)에 대해서는 산 중턱 이상만 금지하고 금령을 거듭 밝힌 것이 없으며, 경기에 있어서는 산림과 천택을 떼어준 곳에 대해 모두 혁파하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은 당초 해서의 시장이 결정된 내용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른 채 해서를 혼동해서 논하였으니, 사실과 어긋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화전의 경우는 계사년033) 에 현우석(玄禹錫)의 상소로 인하여 마침내 금령을 내렸으며, 무술년034) 비국의 제신을 인견할 때 선왕께서 분부하시기를 ‘서로(西路) 산전(山田)의 폐단이 끝이 없어 심지어는 나라의 명산인 총수산(蔥秀山)까지도 이런 폐단이 미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부역을 도피한 유민들이 저지른 행위로서, 매우 놀라운 일이니, 금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그뒤 강원도에는 평지가 너무 적어 전지가 없는 백성들이 흩어질 형세에 놓였으므로 산 중턱 이하는 경작을 허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선왕께서 처음부터 화전을 엄하게 금지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며, 산 중턱 이하만 허용한 것은 산업이 없는 백성에게 잠시 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말한다면, 호조의 회계는 참으로 살펴보지 않았던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경기의 천택은 혁파할 대상에 들어 있지 않다고 한 것도 호조에서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경기 백성의 부역은 다른 도에 비하여 훨씬 고된데, 시장과 어장을 마구 가로채게 놓아둔다면, 깊은 산골이나 외딴 바닷가의 백성들 모두가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태조조에 왕자의 본과(本科)가 1백여 결뿐이었다가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된 뒤에 이르러 직전이 2백여 결이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금을 면제받는 결수가 많은 것은 1천 4백 결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비록 조금 줄여 5백 결로 정하였으나, 건국 초기에 비하면 그래도 몇 배나 되고, 중세기에 비하면 한 배수가 됩니다. 더구나 시장과 강해(江海)를 떼어주는 일은 조종조에서는 있지 않았던 것이고, 화전을 떼어주는 것은 근일에야 시작된 것입니다. 이익은 사가(私家)에서 가져가고 원망은 나라에서 받으니, 어찌 매우 가증스럽고 크게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직임을 잘 받들어 이행하지 못하였으므로 물러가야 합니다만 구구한 소회는 다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신이 이미 뜻을 맞추어 순종만 한 죄를 졌으니, 체직하소서."
하였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3일 계사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경연을 여는 것이며, 첫째가는 병폐는 궁장(宮庄)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신이 등대(登對)하던 날 맨 먼저 이 두 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기다린 지 10일이 되었어도 경연을 아직 열지 않고 궁장도 여전히 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고서야 감히 사욕을 버리고 공의를 따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뒤폐단을 막기 위하여 도신(道臣) 하나를 논핵하였는데, 재신이 다투어 일어나 저지하였으니, 과연 대각을 중히 하고 조정을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예법은 인정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국(史局) 하번(下番)의 경우, 조부와 형제 및 아내의 상을 당하여 그 슬픈 정을 다할 수 없으니, 이렇게 되면 잔인하고 행실이 야박한 가운데에서 충신을 구하는 꼴이 되어 효제(孝悌)의 도리가 쓸 데가 없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간은 천륜입니다. 이 천륜이 한번 문란해지면 임금이 어떻게 임금이 되겠으며, 신하가 어떻게 신하가 되겠습니까. 명종조에 파계(罷繼)하는 것을 금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권의(權宜)의 제도를 정하였더라도, 인조조의 분부야말로 옛 예에 의거하여 만세에 전할 경상(經常)의 법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한 대신이 드린 의논이 분명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사리에 어긋난 세속의 사정을 따르라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선유가 이미 행한 사실을 인증하고 선정이 이미 정한 의논에 따라 감히 인조조의 분부를 거듭 밝히기를 청하였던 것이 끝내 저지되어 행해지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온 세상 부자간의 천륜을 문란하게 하여 전하로 하여금 천하 후세에 예를 잃어버렸다는 이름을 얻게 한 것이니, 모두가 신의 죄입니다. 신이 비록 만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여성제(呂聖齊)가 상소하여, 각 아문의 둔전을 파하여 모조리 지부(地部)로 돌려보내고, 여러 궁가에 면세해주는 것도 모조리 경창(京倉)으로 실어온 다음 직전(職田)의 예처럼 궁가에 나누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여러 도의 포목 징수의 영을 늦추어 곤궁한 백성을 위로하고, 윤절(尹晢)을 귀장(歸葬)할 때에 특별한 은전을 넉넉히 주어 은의(恩義)를 다해야 한다고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호서(湖西)의 회덕현(懷德縣)을 혁파하였는데, 전패(殿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만기(金萬基)의 진달에 따라 이유태의 상소를 품처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소장이 무려 수천 마디나 되는데 숱한 절목 가운데에 필시 선후와 완급이 있을 것입니다. 유태가 여러 해 동안 생각하고 마련한 것이어서 깊이 얻은 바가 있을 것인데, 문자에만 의거하여 범연하게 조처하면 반드시 어긋나고 그르칠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더욱 근실히 예로 불러 기어이 그 사람을 나오게 한 다음, 그와 상의하여 차근차근 거행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해서(海西) 풍천부(豊川府)에 큰비바람이 불어 벼가 손상되었다.
9월 24일 갑오
대사간 민정중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입양한 아들로 후사를 삼도록 하는 한 조항이야말로 윤기(倫紀)에 크게 관계됩니다. 윤기를 한번 그르쳐버리면, 부자는 친함을 잃고 형제간은 차서를 잃게 될 것이니, 그 해가 어찌 한때에 명령을 그르치고 정사를 잘못한 것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가령 신이 당초에 말한 바가 없었다면 전하께서도 필시 이런 명이 없었을 것인데, 신의 망발로 인해 전하로 하여금 이런 막대한 잘못을 저지르게 하고 만세 경상(經常)의 법을 무너뜨리게 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전하에게만 죄를 얻은 것이 아니고 또한 앞으로 예경(禮經)에 큰 죄를 얻게 된 것이니, 무슨 낯으로 다시 맑은 조정에 서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였다. 정언 이단석이 처치하여 출사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박세견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요즘 양사가 논한 여러 궁가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전하께서 살펴 주셔서 재품(裁稟)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만, 조사 과정에서 분분해져 마침내 끝이 나지 않으니, 나라의 기강이 해이된 것이 전적으로 여기에 연유한다 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낭묘의 시종 및 중외의 유사와 진지하게 상의하여 아름다운 뜻이 귀착되게 하고 고질화된 폐단을 혁파하게 한다면, 그야말로 기강을 정돈하고 쇠퇴한 풍조를 진작시킬 수 있는 일대 계기가 될 것입니다.
면세의 한계점을 5백 결로 정한 것은, 참으로 손익을 잘 헤아려 은혜와 의리가 모두 온전하게 한 것입니다. 다만 선조와 인조 때 하사하였던 예와 비교한다면 오늘날 받은 것이 전보다 많으니, 대의는 좋으나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이 감히 어리석고 망령된 소견으로 선조(先朝)를 본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대략 진달하였는데, 언사가 서툴러 제대로 뜻을 전달하지 못하였으니, 신에게도 당연히 죄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도 참으로 사정에 가린 것을 과감히 버리고 단연코 시행해 나가실 수 있어야 합니다. 전조를 빛내고 후세에 법이 되게 함이 이 한 거조에 있으니, 어찌 구차하게만 하고 말아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재야의 유현(儒賢)에게 일마다 자문하시면서 오히려 이 의논에는 참여하여 들을 수 없게 하십니까. 중대한 일은 익히 강론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더욱 국맥을 이어가는 하나의 큰 기틀입니다. 신의 망령된 뜻에는 면대하여 간곡히 진달하는 것이 글로 아뢰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등대했을 때에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분부가 화평함이 부족하여 황급히 인혐하다 보니 쌓인 충정을 다 진달하지 못하였는데, 이 또한 신의 죄입니다. 물리쳐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밤에 유성이 구진성(句陳星) 아래에서 나오고, 또 천원성(天苑星)·삼기성(參旗星)·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도 나왔는데, 모두 빛이 붉고, 길이는 한 길 남짓 되었다.
9월 26일 병신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패소(牌召)에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안후열(安後說)을 헌납으로, 이광직(李光稷)을 지평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성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윤강(尹絳)을 형조 판서로, 서원리(徐元履)를 함경 감사로 삼았다.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보건대 민정중의 소장에 숨겨진 내용과 드러난 말 모두가 신을 죄주기 위한 것들이라서 신이 참으로 놀랐습니다. 예에 대한 논란을 송사에 비유한 것은 옛날부터 그랬던 것인데, 자기의 주장은 반드시 옳다 하여 용서하고 남은 구차히 영합한 것이라고 하여 책망하기를 이처럼 모질게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대체로 하번이 기년상을 만났을 때 나가지 못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는 신처럼 어두운 자도 듣고서는 또한 놀라고 한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번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과 상번이 감히 경솔하게 허락하지 않도록 한 것은, 필시 의도가 있어 당초 그렇게 법으로 강정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명현과 예법을 아는 선비로서 자신이 직접 지내본 자가 얼마나 많았으며, 대각도 어찌 모두 예제(禮制)에 어두웠겠습니까마는, 이에 대해 논박을 한 적이 없었고 보면, 이는 사원(史苑)의 직임이 극히 중하고 공조(公朝)의 의논이 매우 엄하여 눌려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어미의 상에 복을 낮추어 입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지만 아버지를 높여야 하기 때문에 복을 낮추어 입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깊고 엄한 자리에 있으며 사관의 붓대를 잡은 자가 사사로운 정을 전부 펼 수 없는 것 또한 공조를 위한 예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명을 받들고 이웃 나라에 간 사신이 미처 왕명을 전하지 못하였더라도 임금의 부음을 들으면 곧바로 돌아오도록 한 것은 주공(周公)이 만든 예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국상 초기에 어사가 급히 돌아오자 대론(臺論)이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기년복의 상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도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국상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민정중처럼 예를 아는 자이면 가볍고 중한 것을 분명하게 알 것 같은데, 이를 생각지 않은 채 기년상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만을 고집스럽게 쟁집하고 있으니, 마치 삼년상의 중복은 살피지 않고 시마(緦麻)나 소공(小功)만 살핀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해 신이 시험삼아 생각해 보았습니다. 상사가 지난 지 얼마 안 된 자는 순서를 따르기도 쉽고 제주(題主)를 고치기도 쉽겠으나, 오래된 자는 혹 양가의 어버이들이 모두 죽어버린 자도 있고 혹 후계자나 친자 가운데 살거나 죽거나 한 자도 있어 사세가 불편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일체로 정리한다면 가지런히 되지 못하고 들쭉날쭉할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신은 어리석게도 이런 점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지나간 일은 그대로 두어도 명종조의 수교(垂敎)를 따른다는 점에서 안 될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부터 신명(申明)하는 것은 인조조의 성헌으로 영원한 규식을 삼는 것이 결과적으로 온당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관이 그르다 하니, 신이 여러 말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늙어서 죽게 되었는데, 이토록 미움을 받으니, 파면하여 사람들의 말에 보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망령된 사람이 사기(辭氣)를 지나치게 사용하는데, 따질 것이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그리하여 기강이 있게 하고 체면을 손상시키지 말아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7일 정유
정언 이단석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사국(史局)의 일과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해 여러 날 논열한 것은, 다만 예교(禮敎)를 높이고 윤기(倫紀)를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차자로 누누이 따지자 준엄한 성지를 이어서 내리셨으니, 신이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정언 여성제가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9일 기해
상이 희정당(熙政堂)으로 나아가 여러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박세견(朴世堅),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모두 전계(前啓)를 들고 대궐로 나가고 승지가 계품하기 위해 뒤따라 들어갔다. 상이 세견 등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은 무슨 소회가 있는가?"
하니, 세견이 아뢰기를,
"궁가에 지나치게 떼어준 폐단에 대해 양사의 제신이 각자 소견을 진달하자 성명께서 요량하여 한정할 것을 쾌히 허락하셨으므로 해묵은 고질적 폐단을 이제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임자없는 진황전(陳荒田)이라는 것은 모두 가난한 백성들이 의탁하여 생활하던 것인데 궁가에 떼어준 뒤로 점점 잠식되어 미약한 백성들로 하여금 생활을 꾸려나가지 못하게 하였는데도 분명하게 따져 통렬히 말한 자가 없으므로 신은 개탄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면세의 수치는 5백 결로 한정하여 만세의 상헌(常憲)으로 삼고자 하는데, 이는 직전(職田)의 옛 제도보다 많은 것이니, 재집(宰執)·시종 및 재야 유신으로 하여금 알맞게 헤아려 규식을 정하게 해야 합니다. 해언(海堰)과 산전(山田) 가운데 임자없이 버려진 것이라 하여 떼어준 것에 대해서도 각도(各道)로 하여금 낱낱이 철저하게 조사하여 모조리 혁파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주인이 있는 전지도 잠식하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국법이 있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하겠는가. 그대가 규식을 정한 뒤에도 이런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염려한다면, 결수를 예전대로 하고 고치지 말아야 하겠다."
하니,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결수는 이미 널리 의논하여 정한 것인데, 어떻게 이제 또 고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세견이 아뢰기를,
"5백 결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감히 진달한 것인데, 말이 전도되어 정해놓은 제도를 도로 파하라고까지 하시니, 신이 참으로 부끄러워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단석이 아뢰기를,
"세견이 뜻을 제대로 표현해 진달하지 못하여 엄한 분부를 받게 되었으나, 정해놓은 제도를 파하라고까지 하신 것은 너무나 미안한 일입니다."
하고, 이어 쾌하게 윤허를 속히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미안하다고 한다면 물러가 논계하라. 여러 달을 쟁집해도 좋다만, 어찌 이와 같이 핍박할 수 있는가."
하였다.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군신간은 부자와 같습니다. 아비에게 허물이 있으면 아들이 간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아비된 자 또한 어찌 아들을 노엽게 여겨 끝내 용서를 안 해서야 되겠습니까. 성상의 분부는 너무나 화평함이 부족하니, 성스런 덕에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말한 것을 따라 답한 것인데, 어째서 화평함이 부족하다 하는가."
하였다. 세견이 아뢰기를,
"어리석은 신의 망령된 생각에 후세의 무궁한 폐단이 될까 여겨져 진달하였던 것인데, 한 마디 말씀을 드리자 엄한 분부를 갑자기 내리시니, 어찌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로 거북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피혐만을 일삼는가."
하였다. 용익과 은상 등이 제도를 만들지 말라는 분부를 환수할 것을 누누이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의 말이 아무리 이렇더라도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고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30일 경자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본원에서 한창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해 논계하고 있는데 자신과 혼인한 집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당초 지척(指斥)한 일이 없으니, 혐의할 것이 못 됩니다.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장령 박세견(朴世堅)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어제 거행한 조건 가운데, 신의 계사(啓辭)에 대해, 원래 계달하지 않은 것도 집어넣어 쓴 것이 반을 넘는다고 분부하시기까지 하였는데, 주서가 이 때문에 추고를 당하였습니다. 인견을 마치고 나온 뒤에는 대관이 관례상 진달했던 계사를 기록하여 보내는데, 이때 입으로 한 말과 문자로 쓰는 데 조금 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형세입니다. 그런데 엄한 분부를 내려 원래의 초본을 삭제하였으니, 신처럼 직임을 수행하지 못한 자는 폐척(廢斥)되어야 합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다.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8권, 현종 3년 1662년 11월 (0) | 2025.12.03 |
|---|---|
|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10월 (0) | 2025.12.03 |
|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8월 (0) | 2025.12.03 |
|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7월 (1) | 2025.12.03 |
|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6월 (1) | 2025.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