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신축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후사가 된 아들이 승중(承重)하는 일에 대해 대신이 사세상 어렵다고 하였는데, 신들의 생각에는 부자와 형제의 윤기는 문란시킬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인조조의 분부가 일단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큰 교훈이 되었고 보면, 사세상의 논란은 응당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논에 굴복되어야 하는데, 성상께서는 대신의 차자에 내린 비답에서 또 다시 꺾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국가에서 언관을 예우하는 도리로 볼 때 설령 말에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꺾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이 일은 의리가 정당하고 명백하니, 죄줄 만한 것이 뭐가 있다고 준엄한 말씀으로 지척하여 기어코 용납되지 못하게 한 뒤에야 그만두신단 말입니까. 신처럼 형편없는 자야 감히 언책(言責)이나 염치를 지키고 있다고 자처하지 못합니다만, 뻔뻔스럽게 버티면서 나 몰라라 하고 떠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니, 체직하소서."
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궁가(宮家)에 면세한 전지의 폐단이 너무나 크므로 성상께서 특별히 제신들과 상의하여 그 결수를 확정하셨으니, 이는 매우 훌륭한 조처입니다. 다만 법을 약하게 만들면 탐욕의 폐단이 여전할 것이니 맨 처음 법을 세울 적에 자상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정한 것이 직전(職田)의 수치보다 배나 되었으니, 돌아보건대 알맞게 한정한다는 본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박세견이 다시 의논할 것을 계청한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나온 것인데, 성상께서는 따르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예전대로 하고 수치를 한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상께서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리이겠으며 큰 성인의 화평한 기상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른바 임자없이 묵혀진 땅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난리가 지난 지 오래되어 인물이 번성함으로 한 치나 한 자의 땅도 거의 다 개간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혹 묵혀진 곳이 있기만 하면 임자가 없다고 하여 떼어받고는 그대로 백성의 전지를 잠식하는 계략으로 삼고 있으니, 이런데도 개혁하지 않으면 백성을 병들게 하는 고질적인 폐단이 제거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수치를 한정하지 말라는 분부를 도로 거두시고 다시 널리 의논해 알맞게 한정하여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제도를 세운 다음, 해언(海堰)과 산전(山田)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임자가 없이 묵혀진 것이라 하여 떼어받은 것들에 대해서는 각도에 물어 일체 개혁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행 부호군 이유태(李惟泰)가 공주(公州)에서 유지에 응하여 상소하고 또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선대왕께서는 영단(英斷)을 분발하시어 삼대의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한 자를 발탁하며 백성의 고통을 위로하고 군정(軍政)을 닦는 일에 대해 지극히 하지 않은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훌륭한 대업을 절반도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돌아가시어 웅대한 계획이 사라지고 큰 뜻이 묻혀지고 말았으니, 지하에서도 한을 품은 것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전하께서 신성(神聖)한 자질로 선세의 대업을 이으셨으나, 뜻을 세운 것이 선왕만 못하고 정사를 행하는 것도 선왕만 못하시어 4년 사이에 재앙이 거듭 나타나 조금도 편안한 해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유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인후(仁厚)하심은 넉넉하나 강한 점이 부족하여 일을 모두 공의에 따라 하지 못하고, 사람을 쓰되 인재를 모두 얻지 못하였습니다. 궁가의 사치스러운 풍습과 산택(山澤)을 마구 차지하는 폐단이 날이 갈수록 더욱 늘어나고, 백성은 농사에 힘쓰지 않아 노는 자가 아직도 많으며, 집에는 쌓아둔 것이 없어 구걸하는 자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신책(神策)의 군병이 비었는데도 채우지 않아 날로 약해지고, 밖으로는 변방을 방어하는 도구가 이름만 있지 실제는 없어 무너져감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하나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모두 성상의 뜻이 정해지지 않고 나라의 형세가 확립되지 않은 소치인데, 선왕께서 친하게 여기고 믿어 의지했던 신하들은 이미 전하의 곁에 있지 않습니다.
아, 이런데도 근심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일이 앞으로 날마다 잘못될까 염려됩니다. 오늘날에 힘써야 할 것들로서 예컨대 향약(鄕約)·보오(保伍)·사창(社倉)·오위(五衛)·직전(職田)·균역(均役)·양전(量田)·흥학(興學) 같은 것은 모두 병행하여 급히 시행해 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신이 지난해 이미 이 말을 탑전에서 진달하였으므로 구구한 생각에 혹 채용된 점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동안 한 가지도 시행한 것이 없으니, 이는 물론 신의 말이 시의(時宜)에 적합하지 않아 그런 것인 줄로 압니다만, 전하 역시 분발하려는 뜻이 없었던 것이라고도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간곡히 경계시키는 뜻이 말에 넘쳐 흐르고 있으니, 마음에 간직하여 유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지난번 올린 소장에 대해서는 요즘 흉년으로 인하여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 오래도록 의논하여 처리하지 못했다. 나도 마음속으로 깊이 미안하게 여겨 이번에 묘당의 신하들과 상의하여 처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만 마디의 상소가 한번 면대하는 것보다는 못하니, 속히 올라와 나의 뜻을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유태가 소장을 7월에 올렸으나 오래도록 회보하지 않다가 이제야 비로소 비답을 내렸는데, 교리 김만기(金萬基)가 진달했기 때문이었다.
10월 2일 임인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무예를 검열하고, 또 문신을 대상으로 정시(庭試)를 거행하였다. 무사로 하여금 먼저 유엽전(柳葉箭)을 쏘게 하고, 7언(言) 20운(韻) 배율(排律)을 내라고 명하여 문신 당상 이하를 시험하였다. 행 부호군 안헌징(安獻徵) 등 6인이 합격하였다. 무신 중에 동지 송립(宋岦)이란 자가 활쏘는 대열에 끼어 있었는데, 상이 그가 늙었음을 보고 좌우에게 하문하기를,
"송립이 저렇게 연로한데 아직도 활을 쏠 수 있는가? 나이가 몇인가?"
하니,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올해 나이 81세이나, 강한 활을 잘 쏩니다. 그리고 송립은 일찍이 역적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침입해 올 때, 서로(西路)의 읍재(邑宰)로서 이괄에게 끌려 가다가 중도에서 그 휘하를 이끌고 진을 빠져나와 귀순하였으니, 그 공이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병판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정시가 3, 4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외방에서 거자(擧子)들이 운집하여 양소(兩所)에 등록한 수효가 거의 1만 명이나 된다 하니, 미리 규식을 내리면 그 가운데 재주가 적은 자는 스스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밖의 의논들은 모두 강서(講書)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초시(初試)에 강서하는 것은 전례에 없는데, 어찌 새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자, 좌명이 아뢰기를,
"신이 유혁연(柳赫然)에게 들었는데, 혁연이 급제할 때 초시에서 강서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기추(騎蒭)에 있어 쏘는 것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파하고, 상은 대궐로 돌아왔다.
10월 3일 계묘
상이 또 춘당대에 나아갔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이번 정시에 외방의 거자(擧子)가 많이 모였는데, 초시에서 뽑는 수효가 자못 적으므로 모두 낙심한다고 하니, 초시의 수효를 참작하여 더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밖의 의논들은 혹 수효를 한정하지 말고 뽑되 규식을 높여야 한다고 하며, 혹 수백 인을 더 뽑아 기뻐할 여지를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니, 이 두 가지 가운데에서 참작하여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김좌명(金佐明)에게 이르기를,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좌명이 대답하기를,
"수효를 한정하지 말고 규식을 높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대장 이완(李浣)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양소(兩所)에서 각기 1백 명씩 더 뽑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대장 유혁연은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좌명과 같습니다. 수효를 한정하지 않으면 무사들이 필시 기뻐할 것이고, 규식을 높이면 요행으로 참여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이완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수효를 한정하지 않으면 무사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규식을 높이면 무사가 속임을 당했다는 원망이 있을 것이니, 어느 것도 옳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양소에서 각기 1백 명씩을 더 뽑아 6백 명으로 한정하고, 규식을 평범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소에서 각기 2백 명씩을 더 뽑아 8백 명으로 한정하라."
하였다. 상이 문신으로서 시사(試射)에서 뽑힌 사람과 당상 이상으로서 활을 잘 쏘는 자에게 모두 과녁을 쏘도록 명하였는데, 사과(司果) 박신규(朴信圭)가 으뜸을 차지하였다. 날이 저물어 파하고 상이 대궐로 돌아왔다.
장령 박세견(朴世堅)이 패초(牌招)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기를,
"논한 것이 옳았는데 엄지(嚴旨)를 여러 차례 내렸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한 것은 형세로 보아 당연합니다. 패초하였는데도 나오지 않을 경우 체차하고 면직하는 관례가 있기는 합니다만, 언사(言事)를 맡은 신이 엄지가 한 번 있다고 하여 문득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차해 가버린다면, 이는 실로 시비를 쟁집하여 천청(天聽)을 돌이키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난번 간원의 제신들이 불안한 정세가 있어 불러도 나오지 않았으나 특별히 체차하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어 그들로 하여금 앞에 나와 소회를 모두 진달하게 하였는데, 이야말로 따르고 본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에 만든 사소한 규식을 고집스럽게 지킬 수만은 없으니,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이날은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10월 4일 갑진
상이 또 춘당대에 나아가 제술(製述)에서 으뜸을 차지한 안헌징(安獻徵)과 시사(試射)에서 으뜸을 차지한 박신규(朴信圭)에게 각기 숙마(熟馬) 1필을 내리고, 그 다음에게도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무신으로서 무예 시험에 우등한 자 가운데 2품의 실직에 제수된 자가 1인, 가선에 승직된 자가 1인, 절충(折衝)에 승직된 자가 3인, 변장에 제수된 자가 6인이었다. 군병과 한량(閑良)으로서 무예 시험에 우등한 자 가운데 전시(殿試)에 바로 나가게 된 자가 6인이었으며, 그 나머지에게도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쓰게 하면서 이르기를,
"박세견에 대한 처치는 자못 상규(常規)를 잃었다. 특별히 나오게 하는 것은 아래에서 제멋대로 할 성질이 아니다."
하였다. 부수찬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박세견에 대한 처치는 공의가 그러할 뿐만이 아닙니다. 지난번 상께서 대관(臺官)을 특별히 나오게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도 똑같은 규례이기 때문에 감히 출사를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비답을 듣고 들어와 준엄한 사지(辭旨)를 보고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황공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자,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이숙이 비답을 듣고 탑전에 나와 이런 엄지를 받았으나 직임이 대간이 아니므로 피혐할 수 없기 때문에 황공하여 대죄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물러가 대죄하도록 하라. 황공하다고 한 계사는 전례에 없었다."
하였다.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민적이 여러 궁가에 산해(山海)를 떼어준 폐단을 개혁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민적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어사가 되어 호서(湖西) 내의 포구를 두루 지나본 적이 있었습니다. 당진(唐津)에서 면천(沔川)에 이르기까지 해양 1백 리 사이를 모두 임해군(臨海君)과 금양위(錦陽尉) 두 집에서 떼어 받았는데, 지금까지 침학하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목숨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폐단을 성상께서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시장(柴場)에 있어서는 평산(平山)의 총수산(蔥秀山)은 나라의 명산인데, 역시 궁가에서 떼어 받았습니다. 이곳도 이와 같으니, 다른 곳은 알 만합니다. 더구나 경기는 근본이 되는 지역이므로 사리상 넉넉히 보살펴 주어야 하는데, 만일 마구 차지하게 놓아둔다면, 장안의 백만 가구가 어디에서 나무를 해 오겠습니까.
화전(火田)은 조종조의 금령이 매우 엄한데 도리어 궁가에 떼어주는 물건이 되어버렸으며, 부역을 도피한 간악한 백성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고 있으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산이 모두 발가벗으면 물이 마르지 않을 수 없는데 가뭄의 재앙도 이에 말미암아 일어난 것입니다. 선왕께서 이를 깊이 염려하여 힘을 다하여 금단하시면서도 가난한 백성들이 당장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산 중턱 아래는 잠시 경작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민은 금지령을 어기고 관리는 법을 농락하여 혹 마구 경작하는 폐단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이를 겨를이 없이 통렬히 금지하여야 할 텐데, 어떻게 궁가로 하여금 더욱 이를 본받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좌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화전의 폐단이 날로 더해가면서 부역을 도피하여 모여드는 자가 점차로 많아지고 있는데 장차 필시 난민(亂民)이 되고 말 것이니, 통렬히 금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우의정 정유성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산 중턱까지만 허락하였는데도 백성들이 산 정상까지 마구 경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궁가에서 떼어 받는 것을 허용한다면, 이는 백성에게 화전을 권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를 금지하려면 궁가와 백성들을 똑같이 금지해야지, 어떻게 궁가만 금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민적이 사국(史局)의 그릇된 관례를 변통하는 데 대한 계사의 뜻을 다시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두표가 아뢰기를,
"사관(史官)이 기년상을 당해도 달려가 곡을 못하게 한 것은 물론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는 실로 국조(國朝)의 고사이기 때문에 신이 그대로 따르고 변통하지 말 것을 청하였습니다. 옛 규식을 변통하는 데에 대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 옛 사람도 있었는데, 옛 규식을 갑자기 변통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신이 인조조 때 한림(翰林)의 하번(下番)이 되었는데, 신의 외조가 질병에 걸려 죽게 되어 신과 면결(面訣)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그때 도승지 김상헌에게 청하여 잠시 나갔다가 이어 상을 만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는데, 정원이 추고를 청하며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리상 차마 하지 못하고 성복(成服)한 뒤 3, 4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들어왔는데, 인조께서 추고만 하게 하셨다가 곧바로 기각하셨습니다. 신은 직접 이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대관의 계사가 옳다고 여깁니다만, 옛 규식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려우므로 감히 변통할 것을 강경히 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민적이 또 후사로 세운 아들이 승중(承重)해야 한다는 계사의 뜻을 다시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양조(兩朝)035) 때 모두 분부받은 일이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준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대들의 말이 옳다. 그러나 영중추의 뜻도 좋으니, 지난일은 따지지 말고 앞으로는 인조조의 분부대로 시행할 것이며, 어긴 자는 일체 엄히 밝혀 금단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기로 아직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충청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헛소문을 망령되이 믿고 행궁(行宮)의 재목을 거두어 들이고 어공(御供)의 물품을 분정(分定)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인근 도(道)에까지 관문(關文)을 보내 소요를 일으켰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상을 분명히 알기 어려우니, 우선 추고하라."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요즘 성상께서 뜻에 거슬리는 대간에 대해 사기(辭氣)가 지나치므로 신은 서글픔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박세견이 면세(免稅)의 결수(結數)를 다시 알맞게 정해야 한다고 아뢰었는데, 이를 따르고 안 따르고는 오직 성명께서 진지하게 처분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 전도되었다고 하여 갑자기 예전대로 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는 노여운 김에 그렇게 하신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성인께서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것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견이 영구한 정식(定式)을 그르다고 한 이것이야말로 정론(正論)이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이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세견의 뜻은 5백 결이 과다하다는 것이지, 한정을 정한 일이 그르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대신에게 내린 비답에서 민정중을 망령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매우 미안한 말입니다. 나라에서 이미 대각을 설치하여 언책을 맡겼는데, 한 마디 말을 하자마자 견책이 뒤따르니, 오늘날 대각이 된 자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중의 소장 가운데 심지어는 대신의 헌의(獻議)가 분명치 않다고 하여 마음대로 배척하였기 때문에 내가 ‘지금 망령된 사람의 말투가 너무나 방자하다.’고 비답한 것이지, 계사가 그르다고 한 것은 아니다. 대신은 인군이 존경하는 인물인데, 설령 조그마한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토록 능멸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군신(君臣)이 서로 믿고 상하가 서로 도와 혹은 언책을 맡기고 혹은 경륜을 맡기되, 모두 성(誠)과 신(信)으로 서로 맺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예컨대 한 고조(漢高祖)와 소하(蕭何)·주창(周昌)의 관계나 당 태종(唐太宗)과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왕길(王吉)·위징(魏徵)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말을 들어주고 계략을 따라주어 믿고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일이 거행되어 치도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태종도 위징을 미워하여 ‘이 촌 늙은이를 죽여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위징과 태종의 결합된 것이 그렇게도 친밀하였건만, 태종이 어기고 거슬리는 것을 미워하여 이런 말을 하기까지 하였고 보면, 인신이 인군을 간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어찌 이를 두려워하여 말을 안 해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전하의 요즘 일을 보건대 매양 양사의 논의에 대해 과격하게 들추어내지나 않나 의심하기만 하고 들어주고 받아주는 일이 전혀 없으니,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여야 하는 성상의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촌 늙은이라고 한 이야기까지 인용하는 그대의 의도를 모르겠으나, 나는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간관이 지금 관례를 따라 말한 것도 오히려 성상의 마음을 유도하지 못하는데, 만일 위징이 태종에게 간쟁했던 것으로 전하께 간쟁한다면, 모르긴 하지만 전하께서 용인하시겠습니까. 옛적에 죽은 말의 뼈를 사서 천리마를 가지고 오게 한 자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들추어내어 말하는 신하를 용인한다면 참된 간관도 나올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틀 뒤면 태묘(太廟)의 대제(大祭)를 거행해야 하니, 이런 때 무예를 시험하기는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섭행(攝行)할 때는 하루만 치재(致齋)하면 되고, 게다가 무예를 시험하는 것은 형살(刑殺)과는 다르니,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무예를 검열하는 것과 형옥(刑獄)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형옥의 문서는 오늘부터 들이지 않으면서 저녁이 되도록 무예를 보신다면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이미 전하께서 앉아 계시기 때문에 미처 계달하지 못하였으나, 다만 시험이 끝나면 곧 환궁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무예 시험이 끝날 적에 말 위에서 부린 묘술은 희극과 같으니, 정지토록 명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고, 승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무예의 시험을 마치고 난 뒤에는 으레 입시한 신하들에게 선온하는 일이 있었는데, 간관의 말이 이러하니, 선온을 정지하라."
하였다.
서필원(徐必遠)을 이조 참의로, 이제형(李齊衡)을 장령으로, 이하(李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최유지(崔攸之)가 도당록(都堂錄)에 참여했을 때 이경석(李景奭)이 조금도 간여하지 않았는데, 서필원이 욕과 무함을 극도로 낭자하게 하였습니다. 대신이 죄가 있을 경우 논계해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이는 황당하게 꾸며대고 흥분해서 추잡하게 욕한 것이므로 공의가 모두 그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조는 무턱대고 엄선해야 할 직임에 의망하므로써 무함한 말을 마치 곧은 절개가 있는 것처럼 여기었으니,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모두 추고하고, 서필원도 체차토록 하라."
하였다.
유시(酉時)에 상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10월 5일 을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동지 송립(宋岦)은 80이 지난 나이에 달리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늙은 사람같지 않았다. 비록 맞추지는 못하였으나 왕성한 기운은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10월 6일 병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등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대신이 아뢴 바에 따라 이조 당상과 낭청은 추고하고 참의 서필원은 체차하라고 명하셨다 하는데, 신들은 의혹스럽습니다. 필원이 대신을 비난한 것이 잘못한 것 같긴 하나, 어찌 의도를 가지고 무함하여 대신이 아뢴 바처럼 일부러 욕을 하였겠습니까. 필원 스스로 감언(敢言)하는 자라고 자부합니다만 평소 고지식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감언하는 선비는 으레 자상한 점은 적고 경솔한 데가 대개 많았으니, 조정에서 그들을 대우할 적에도 장점만 취하고 적은 대목은 책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한 번 과오가 있다고 하여 갑자기 무함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씌운다면 결코 밝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못 될 것인데, 언로가 막히는 것이 필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해조가 비의(備擬)한 것은 별로 잘못이 없으니,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는 일과 서필원을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후사를 세운 뒤에 설령 친자를 낳았다 하더라도 후사된 아들을 승중(承重)시키도록 지금부터 제도를 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인조조에 이미 분부를 받았는데도 묻혀버리고 시행되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국법이 엄하지 않아 기강이 해이되었고, 사대부의 집에서 또 조정이 영을 내려도 변경하지 않고 굳게 붙잡지 못하여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각기 마음대로 하여 중대한 윤기가 바르게 되려다가 다시 문란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만일 인조 때 제도를 정한 이후부터 일체 개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욱 기탄없이 하여 끝내는 거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관에게 명하여 인조 때 분부받은 이후로 어긴 것들에 대해 일일이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7일 정미
조한영(曺漢英)을 승지로, 유계(兪棨)를 예조 참의로 삼았다.
진도군(珍島郡)을 현으로 강등했는데, 전패(殿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간원이 사국(史局)의 그릇된 관례를 변통할 것에 대한 계사를 정지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유후성(柳後聖)의 가자(加資)를 취품(取稟)한 일에 대해 분부하시기를 ‘만일 법전에 허용하지 않는다는 문안만 없다면, 의관(醫官) 중에 공이 있는 사람은 이 사람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시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전(大典)》을 놓고 상고해 보건대 의관에게 자급을 한정하여 막는 문안이 별도로 나타나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보국 숭록 대부 는 정1품이므로 삼공과 등급이 같습니다. 옛적 선묘조(宣廟朝) 때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을 책훈(策勳)하여 봉군(封君)하면서도 자급은 숭록 대부에 그치게 하였습니다.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일들은 우연한 뜻이 아니니, 보국 숭록 대부를 주는 예를 만드는 것은 실로 미안합니다.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한정하는 문안이 없는데,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고, 후성에게 보국 숭록 대부를 가자하였다.
상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줄곧 질병이 있었는데, 후성이 보호한 공로가 많았다. 그래서 즉위한 이래로 은총이 매우 높더니, 이에 이르러 이런 명이 있었다. 그러나 의관인 잡류(雜流)가 보국 숭록 대부에 오른 것은 국조 이래로 있지 않았던 일이라서 물정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10월 8일 무신
간원이 아뢰기를,
"유후성에게 아무리 약을 의논한 공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상으로 주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보국 숭록 대부는 품계가 제일 높아 예수(禮數)가 견줄 수 없으니, 결코 잡기(雜歧)인 의관으로서는 차지할 바가 아닙니다. 이 길이 한번 트이면 환관이나 역관 같은 천품(賤品)들도 마음을 내게 되어 수백 년 된 대방(大防)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게 될 것이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후성에게 특별히 보국을 가자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조 참의를 차출할 때 멀리 있어 나오기 어려운 사람과 전지(田地) 측량 때 옮기지 않았던 수령을 첫번째와 끝에 비의(備擬)하고 서필원만을 부망(副望)으로 하여 마치 단망(單望)처럼 하였는데, 이는 대개 필원이 대신에게 모욕을 가한 것을 곧은 절개라고 생각한 나머지 이렇게 추켜주어 엄선해야 할 자리에 의망한 것입니다. 신이 시비가 뒤바뀐 것을 탄식하던 차에 마침 등대(登對)하였으므로 전관(銓官)을 추고해야 한다고 청하였던 것인데, 간원의 계사를 보니, 신의 말을 끄집어내어 장황하게 논열하였으니, 신이 이에 죄를 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감언(敢言)이란 것은 남은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홀로 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번 최유지의 일에 대해서는 이경석이 조금도 간여하지 않았는데 필원이 억측으로 거짓을 꾸며 죄명을 억지로 뒤집어 씌웠으니, 이를 감언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필원이 맨 처음 소장을 바칠 적에 경석의 직함과 성씨를 빼버리고 이름만 써넣은 채 추잡한 욕과 방자한 꾸짖음을 마구 하였으므로 정원이 돌려보내어 그로 하여금 고쳐서 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이 모욕을 가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각의 체제와 관례로 말하더라도 실상을 잃어 체직을 당하면 곧바로 대관의 직임에 의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시시비비를 보여주기 위한 뜻인데, 이 때문에 언로가 막히게 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필원이 곧다는 것을 팔아 명예를 구하는 짓을 또한 어떻게 일을 논하면서 실상만을 잃은 자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체통이 점차로 무너지는 것을 슬퍼한 나머지 감히 곧은 절개와 중한 명망을 가진 신하를 배척하였는데, 시휘(時諱)에 중히 저촉될 줄 본래 알았습니다만, 본래의 심정은 시비를 밝히고 나라의 체모를 높이고자 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관이 신의 말이 언로에 방해가 된다고 배척하여 말 뜻이 엄중하니, 신이 감히 재상의 반열에 태연히 있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깎아버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어찌 언로를 방해하고 뒤폐단을 만들려고 말을 하였겠는가. 따질 필요도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9일 기유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서필원이 노성한 대신을 비난한 것에 대해서는 대신이 그르다고 할 뿐만 아니라 신들도 그르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은 무함이라 하고 신들은 망령된 짓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단지 고의였느냐 아니었느냐의 차이에 있습니다. 요즘 풍습이 날로 야박해지고 사기(士氣)가 날로 무너져가고 있는데, 필원처럼 감언한다고 자부하는 자가 비굴하게 엉거주춤하는 자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일을 한 번 잘못 논하였다고 하여 죄주어 물리친다면, 신들이 이른바 언로에 방해된다고 한 것도 지나친 염려는 아닙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일을 논하는 사람은 으레 잘못을 들추어내고 범한 일을 비꼬는 법인데, 이것을 곧음을 팔아 명예를 구하는 짓이라고 하여 무턱대고 배척한다면, 설령 참으로 곧은 말로 끝까지 간쟁한 자가 있더라도 이러한 지목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말세의 통상적인 근심거리로서 성세의 일이 아닙니다. 대신이 이 점에서는 실언하였기에 신들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재상이 옳다고 해도 간관이 그르다고 하는 것은 본디 통의이므로 신들이 인혐할 필요는 없으나, 이로 인하여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대신이 소장에까지 드러내어 면직을 바라면서 이처럼 엄하게 배척하였으니, 신들이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안후열(安後說)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0일 경술
호서(湖西) 면천군(沔川郡)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10월 11일 신해
권령(權坽)을 승지로,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이익(李翊)을 교리로, 정석(鄭晳)을 수찬으로, 윤개(尹塏)를 정언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과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충청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일을 뒤바꿔 처리하여 까닭없이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였으므로 바로잡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본원이 연계(連啓)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헌납 안후열(安後說)이 사은 숙배한 지 4, 5일이 되었는데도 병을 핑계하여 일부러 상회(相會)를 하지 않고 어제 처치에 대해 독단으로 계사를 정지하였는가 하면, 동료들이 인피하고 들어갈 때를 틈타 의논이 통합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유없이 논계를 정지하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이와 같이 서둘러서야 되겠습니까. 신들이 가볍게 보여서 일어난 일이니, 체차하소서."
하였다. 안후열도 인피하였다. 옥당이 홍연과 민적은 출사하게 하고 후열은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행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식별하는 안목이 어두워 일마다 엉뚱하게 되니, 상신이 청한 추고도 가볍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본조의 참의는 당상 중에서도 엄선해야 할 자리인데, 비망(備望)한 사람은 모두가 선조(先朝) 때 의망되었던 자들로서 신이 그 차서를 따라 의망하였으니, 이는 또한 본조의 옛 예이기도 합니다. 성상께서 어떤 사람을 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이 어찌 감히 억측이나 하였겠습니까. 산림에 있는 선비에 대해 그가 멀리 있어서 나오게 하기 어렵다고 핑계대고 의망하지 않는다면 어진 선비를 부를 날이 없을 것입니다. 또 전지(田地) 측량하는 수령을 옮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도 해보았으나 워낙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지난번 부사(府使)의 자리가 비었을 때에도 끌어다 올렸는데, 정관(政官)의 직임이 수령보다 유독 중하지 않단 말입니까.
필원이 일마다 감언(敢言)한 것이 오늘에만 그런 것이 아닌데, 어찌 신이 청선(淸選)에 들추어 준 뒤에야 그의 곧은 기개가 드러나겠습니까. 지난번 한 차례 상소하여 재상의 과실을 강력하게 말하였는데, 신도 배척을 당한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본의를 살펴보면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원로를 비난한 실수는 일시적인 망발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으로 무함의 죄라고 단정하여 조정에 발을 못 붙이게 한다는 것은 실로 미련한 신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신은 소견이 어두워 사람을 적당하게 쓰지 못하였으니, 직명을 깎아 관리의 기강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3일 계축
이조 판서 홍명하가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4일 갑인
부응교 남구만(南九萬)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옛날 임금은 이미 의승(疑丞)과 보필의 직책을 두고 잠언을 외우며 풍간(諷諫)하게 하였으니, 스스로 닦을 수 있는 여건이 구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이런 일이 모두 폐지되어버려 임금의 덕을 이루는 곳은 오직 경연 하나뿐인데, 강론할 즈음에 하나라도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역시 끝내는 형식적으로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께서는 그 형식적인 것마저 모두 폐지해 버리시니, 성실 여부에 대해서는 감히 논의할 것도 없습니다. 근자에는 성상의 몸이 불편하였으므로 전(殿)으로 나와 강연을 여는 것은 정말 억지로 하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산릉(山陵)을 참배하고 교외에서 무예를 검열하신 외에도 심지어 금원(禁苑)과 장전(帳殿)에 3일씩이나 나가셨는데, 이는 모두가 전하의 몸을 수고롭게 하고 차가운 바람을 쏘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께서는 힘을 내어 거행하셨는데, 유독 따뜻한 방에서 편안히 앉아 강론을 들으시는 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기에 끝내 하시지 않습니까.
신들은 삼가 경연을 폐지한 것도 오로지 몸이 불편해서 그러신 것만은 아니라고 여기는데, 만일 경연을 정지한 것이 전적으로 몸이 불편해서였다면 성상의 병환이 나을 날이 있으므로 그래도 앞으로 기대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단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니, 이 때문에 신들의 걱정이 지난날보다 더 절실해집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료와의 접촉을 드물게 하시는 관계로 위와 아래가 막혀버렸습니다. 대각의 신하는 명색이 이목(耳目)이라고 하는데도 전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아예 친밀하고 깊이 믿으시는 뜻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체로 논주(論奏)하고 쟁집한 것도 지상(紙上)의 문자에 불과하게 되고 마니, 말을 들어주고 따라주는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궁가에 떼어준 것을 혁파하는 것, 면세의 수치를 줄이는 것, 후사된 아들을 승중(承重)시키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 이조 참의 서필원을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는 것들은, 모두 시비가 뚜렷하여 사람들이 알기 쉬운 일들입니다.
그 가운데 떼어 준 일과 면세에 대한 폐단은 신하들이 이미 빠짐없이 진달하였으므로 지금 조목별로 들 필요가 없습니다만, 전하께서 몇몇 궁가를 위해 스스로 법을 무너뜨리고 계시니, 만일 조정의 신하가 이를 본받아 이익을 위해 사사로운 짓을 거리낌없이 할 경우, 전하께서는 장차 무슨 법으로 금지하시겠습니까. 당(唐)나라 중종(中宗)은 몹시 무도한 임금이었습니다만 안락 공주(安樂公主)가 곤명지(昆明池)를 요구하자, 중종은 백성들이 부들과 물고기를 얻는 곳이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느다란 도랑, 커다란 강해(江海), 넓다란 교야(郊野), 높다란 산악을 모두 쪼개서 봉해주었으니, 전하께서 조종의 강토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백성들이 이익을 잃고 살아갈 수 없게 되면, 흙더미가 무너지는 것처럼 환란이 빠르게 닥칠 것입니다. 전하께서 몇몇 궁가를 위하다가 필시 나라의 땅이 없어진 뒤에야 말 것인데, 나라의 땅이 없어진다면 궁가만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박세견(朴世堅)이 수치를 줄이자고 청한 것은 참으로 없어서는 안 될 논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심정을 건드리는 점이 있자 그만 예전대로 하고 고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면세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세견에게 무슨 이해 관계가 있다고 이처럼 꺾어버리십니까. 그러나 신들의 생각에는 그렇게 해도 염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않은데, 참으로 풀의 줄기만 베고 뿌리는 제거하지 않은 채 한정을 정하라고만 명하실 경우, 아무리 4백을 줄여 1백으로 하더라도 면세해 주는 이름이 여전히 남아 있어 필시 다시금 널리 번지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여성제(呂聖齊)의 상소 가운데 ‘《대전(大典)》의 제전조(諸田條)에 의거하여 직전(職田)과 사전(賜田)의 세금을 모조리 경창(京倉)으로 납부하게 한 뒤 궁가에 나누어 주라.’고 청한 것이야말로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는 논의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두 가지 일에 대해 마음에 거역스럽게 여기지 마시고 속히 윤허를 내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후사된 아들을 승중시키는 일에 대해 옛날 어진 이들이 행했던 일을 상고하고 성조(聖朝)의 제도로 논해보건대, 실로 의심스러워 정하기 어려운 일도 아닌데, 전하께서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망령되게 억측하는 자들이 척련(戚聯)에 관계된 일이라서 그렇다고들 의심하니, 참으로 전하께서 쾌히 따라주어 뭇 사람의 의심을 풀어주지 않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리고 가정 계축년036) 에 내린 분부는 본래 당시 후사를 취소한 자 때문에 나온 것이었는데, 인조조에 이르러 비로소 제도를 정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열성(列聖)들의 법으로서 소략한 데서 세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인조 때 정한 규식을 따르지 않은 자를 죄주지 않고 도리어 저들이 사사로운 생각으로 한 일을 따라 이랬다저랬다 한다면, 이제부터 금단한다는 분부도 뒷날에 가서는 또 반드시 ‘이제부터 시작한다.’고 하는 논의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을 만든다면, 어떻게 뒷날의 교훈이 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서필원의 일은 또 근래에 없었던 일입니다. 대체로 사람이 장점이 있으면 편협한 점도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평하는 도리는 반드시 장점만 취하고 편협한 점은 버리며 아예 허물이 없기를 요구하지는 않는 법이니, 이것이 공자(孔子)가 광견(狂狷)을 취하고 향원(鄕愿)을 미워한 것입니다. 지금 거짓으로 합하고 구차하게 용납되어 높은 벼슬을 취한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만, 대신이 배척하여 물리쳤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필원에게만 이처럼 꺾고 짓밟아버리니, 왜 이다지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자는 다행하고 일을 말한 자는 불행하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제대로 쓰시는데도 대신이 도리어 저지하여 심지어는 명예를 구하고 곧음을 파는 짓이라고 죄안(罪案)을 만들었으니, 고금 천하에 명예를 구하고 곧음을 팔았다고 사람에게 죄주면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린 자를 보셨습니까. 그리고 대신이 필원에 대해 무함하고 욕하였다 하며 또 명예를 구하고 곧음을 팔았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명예를 구하고 곧음을 파는 자는 그 마음은 설령 그르다 하더라도 그 일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무함했다 하였는데 대체 무슨 명예를 구했으며, 이미 욕을 했다 하였는데 무슨 곧음을 팔았습니까. 또 대신의 차자에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체통이 점차로 파괴된다고 슬퍼하였는데, 이것이 필원이 소신으로서 대신을 침범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위(衛)나라의 경대부 같이 해야만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지 않고, 당개(唐介)가 조정에서 문언박(文彦博)을 꾸짖었던 것은 체통을 파괴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대신의 말이 비단 필원 하나만 공평치 못하게 논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사리를 해치는 것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고 깊이 감탄하였다. 간곡한 말들을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경연을 정지했던 일은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뒷날 직접 말하겠다."
하였다.
10월 15일 을묘
이익(李翊)을 헌납으로, 오시수(吳始壽)·안후열(安後說)을 수찬으로, 유계(兪棨)를 승지로 삼았다.
정원이 내일 경연을 여는 것에 대해 취품(取稟)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그전부터 무사할 때는 취품하고, 일이 있는 날에는 탈계(頉啓)하는 것이 관례였다. 약방이 연일 문안하는 때에 어찌 이처럼 취품하는가."
하였다. 정원이 회계하기를,
"취품하고 난 뒤 비로소 다시 감기 증세가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이어 회복될 때까지 탈품(頉稟)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제 분부를 내린 뒤에야 탈품을 청한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경연을 여는 것에 대해 품계하는 것은 정원의 직분이다. 상의 입장에서는 무사하면 시행하고 일이 있으면 정지할 따름으로서, 이는 미워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상이 문답할 적에 사기(辭氣)가 평안치 못해 성난 뜻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아랫사람들이 실망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93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경연을 여는 것에 대해 품계하는 것은 정원의 직분이다. 상의 입장에서는 무사하면 시행하고 일이 있으면 정지할 따름으로서, 이는 미워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상이 문답할 적에 사기(辭氣)가 평안치 못해 성난 뜻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아랫사람들이 실망하였다.
호서(湖西) 열읍(列邑)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므로 해괴제(解怪祭)를 행했다.
10월 17일 정사
해서의 산중 고을 곳곳에 꽃이 피었는데, 봄과 다름이 없었다.
10월 18일 무오
원만석(元萬石)을 병조 참의로, 이연년(李延年)을 참지로, 이은상(李殷相)을 예조 참의로, 여성제(呂聖齊)를 교리로, 윤심(尹深)을 정언으로 삼았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차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망언 때문에 대각이 바야흐로 성명(成命)을 도로 중지할 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며, 옥당이 차자로 여력을 남기지 않고 신을 배척하면서 ‘그런 말은 사체에 침해되고 도리에 침해된다.’는 것으로 죄안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면 신의 죄는 조정에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들과 따져 밝히자면 마치 송사하는 마당에서 곡직을 다투는 것과 같으므로 서로 따지기가 수치스럽고, 신이 만약 오래도록 무릅쓰고 있다면 사체에 침해되고 도리에 침해되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니, 직명을 깎아버려 어진 덕을 가진 이로 고쳐 정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서로 따지지 않으려고 하는 뜻이 또한 사체에 맞는다. 무슨 인혐할 일이 있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20일 경신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세 번째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이 병을 이유로 정고(呈告)하였으나, 세 차례나 잇따라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10월 23일 계해
민여로(閔汝老)를 헌납으로 삼았다.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우의정 정유성이 진달한 일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조정의 사체를 위하다가 점차로 여기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비록 신이 참견할 일은 아니나 그 처음을 따져 본다면 실로 신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니, 신이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면직시켜 종적을 감추고 여생을 마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이시술(李時術)의 일로 염려하던 차에 사신의 장계를 보니, 시술에 대한 벌이 직임만 고치게 한 데 그쳤을 뿐 아니라 여러 범인들도 죽음을 면해 주었으므로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일을 조사할 때 반드시 처음에는 엄하게 하고 나중에는 늦추어주는데, 이는 당기고 늦추고 하여 은혜를 보이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맞습니다."
하였다. 강화 유수 유철(兪㯙)이 아뢰기를,
"본부에 있는 속오군(束伍軍) 3천여 명을 일찍이 중군(中軍)을 두어 통솔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도사(都事)가 대신 거느리게 하고 중군은 없앴습니다. 만일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유철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다시 중군을 두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이조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는 것과 서필원을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에 대한 계사를 거듭 밝혔으나, 상이 추고와 환수에 대해 따르지 않았다. 교리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즉위한 초기에는 자주 경연을 열고 유신(儒臣)을 인접하셨으므로 중외에서 목을 빼고 좋은 시대를 만났다고 기뻐하였는데 몇 해 전부터 이유없이 강독을 폐지하셨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심상한 인대(引對)도 드물게 해 주시니, 이러고서도 성상의 학문이 이루어지고 나라의 일들이 잘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 경연을 정지한 지 오래되었는데, 나의 마음이 또한 어찌 편안하겠는가. 다만 안질이 심하여 글자를 보기가 어려웠고, 게다가 감기가 들어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아 경연을 열지 못하였다. 병세가 조금 낫기만 한다면, 인접하고 강론을 듣는 것이 뭐가 괴롭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요즘의 시사(時事)를 유식자라면 모두 민망히 여기는데, 성상께서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천하의 모든 일은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법인데, 오늘날의 나라 일이 진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분발하여 진작할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라 일이 날로 쇠약해져 가는데, 게다가 대관들이 논한 것에 대해서도 시비와 곡직을 헤아려 보지 않은 채 궁가와 내간에 관계되기만 하면 한결같이 강하게 거절하여 매양 윤허하지 않는다고 분부하시므로 위 아래가 서로 고집하여 정의(情義)가 통하지 않으니, 옛적에 이른바 ‘오만한 기색이 천리 밖에서부터 사람을 거절한다.’는 말과 불행히도 같게 되었습니다. 요즘 양사(兩司)가 올린 계사를 모두 따르지 않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대신과 재상 및 삼사가 입시한 이때에 왜 성상의 유시를 후련하게 내려 따르지 않는 까닭을 보여주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에 대한 곡직은 이미 말하였는데, 날마다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민서가 또 아뢰기를,
"옥당의 관원들이 경연을 폐지한 관계로 입대할 때가 없으니, 이 뒤로는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시할 때 모두 들어와 참여하게 하도록 영원한 규식으로 정하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4일 갑자
정시(庭試)를 거행하여, 문과에서는 홍만용(洪萬容) 등 13인을, 무과에서는 남홍벽(南弘璧) 등 43인을 뽑았다.
간원이 오정위(吳挺緯)의 파직에 대한 계사를 중지하였다.
10월 25일 을축
윤개(尹塏)를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삼았다.
10월 28일 무진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네 번째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9일 기사
지평 여성제(呂聖齊)가 인피하기를,
"궁가 면세의 지나친 폐단에 대해 말한 자가 많았습니다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번 변통하는 날을 당하여 반드시 《대전(大典)》에 있는 직전(職田)과 사전(賜田)의 예를 따라 모조리 경창(京倉)으로 거두어 들인 뒤 군자창의 미두(米豆)와 바꾸어주게 하여야만 영구히 폐단이 없겠기에 앞에서 상소할 때 이런 뜻으로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예전의 의견을 바꾸어 수치만을 줄이자고 청하는 본부의 계사에 참여할 수 없고, 여러 날 논계한 일에 또 자신의 의견을 더 넣을 수도 없으니, 체차하소서."
하였다. 대사간 이홍연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으로 나아가 옥당을 소대(召對)하였다. 교리 김만기(金萬基)가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와 홍범(洪範)의 끝편을 강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가 기침 때문에 읽지 못하겠으니, 그대들이 글 뜻을 진달하라."
하였다. 만기가 누누이 논란하니, 상이 자못 귀담아 들었다. 만기가 이어 아뢰기를,
"신이 글 뜻은 대략 강론하였으나, 상수(象數)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릅니다. 송시열과 송준길 모두가 이 뜻을 정밀히 통하였으며, 조정에 있는 신하로 유계(兪棨)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전 대사헌 유경창(柳慶昌)이 죽었다. 경창이 문학의 재능은 없었으나 사람됨이 평소 욕심이 없었으며, 벼슬살이 하면서도 청렴 결백하여 한 가지도 구차히 취하지 않았으므로 사론(士論)이 아름답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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