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신미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일곱 번째 사직소를 올렸는데,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타일렀다.
11월 2일 임신
홍처후(洪處厚)·조윤석(趙胤錫)을 승지로, 원만리(元萬里)·이세익(李世翊)을 지평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수찬으로, 이익(李翊)을 이조 정랑으로, 유계(兪棨)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헌부가 궁가의 면세에 대한 일을 가지고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직전법(職田法)과 사전법(賜田法)을 행하자고 또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남의 안동(安東)·예안(禮安)·봉화(奉化) 등 세 고을에 지진이 발생했는데,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
11월 3일 계유
대사헌 홍중보(洪重普)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무과의 시취(試取)하는 규정으로 분수(分數)를 계산해서 높낮이를 정하는 방법이 법전에 실려 있으니, 이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시행되어 온 것입니다. 이번 무과 초시는 유엽전(柳葉箭) 두 발의 적중과 편전(片箭) 한 발의 적중을 정해진 법으로 삼았으니, 합격권 안에 든 사람을 취하는 데에는 마땅히 분수를 써서 차례를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비국의 복계는 시수(矢數)만을 한결같이 따르면서, 심지어는 문과의 표(表)·전(箋), 부(賦)·책(策)을 가지고 비교 의논하기까지 했습니다. 표·전이 비록 두 배의 점수라 하나, 표·전 삼하(三下)와 부·책 삼중(三中)이 같은 점수일 경우에는 부·책을 우선으로 하고 표·전을 나중으로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번에 편전은 한 발 적중이 7분 반의 점수인데 유엽전은 두 발 적중이 단지 2분의 점수입니다. 평상시 시사(試射)하는 전례대로 한결같이 시수(矢數)만을 따른다면, 《대전》의 과거 조항에 무엇 때문에 굳이 분수를 정해 놓았겠습니까. 신이 감시관의 직임을 맡았는데, 소견이 같지 않으므로 감히 구차하게 출방(出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은 지난번 노량(露梁)에서 열무(閱武)하던 날 역말을 빌려 탄 죄가 있으니, 결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중보와 시험장에 함께 들어갔었는데,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며 체직을 청했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신이 망언을 하여 뭇 의논에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간원과 옥당이 잇달아 명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를 하였습니다. 옥당이 올린 차자에서는 조목조목 집어내어 엄한 논조로 배척하고, 끝내는 일을 해치고 도리를 해쳤다는 것으로 신의 죄안을 삼았습니다. 신이 대신의 반열에 자리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태연히 그대로 있으면서 일을 해치는 죄를 보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신이 한 마디 말을 망령되이 발언하여 시휘(時諱)를 거듭 건드리자, 뭇 사람들이 떼 지어 일제히 일어나 공격해대며 마치 봉변을 당한 사람들처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도리어 사리를 크게 해쳤다고 죄명을 억지로 뒤집어 씌우며 사람의 입을 이와 같이 급급하게 막고 있으니, 이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신이 그동안 받은 배척은 평범한 말로 욕을 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신이 비록 염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더라도, 남에게 모욕받는 것을 영화롭게 여기면서 구차하게 정승 자리에 무릅쓰고 있는다면, 종과 같은 하천배들도 반드시 손가락질하며 욕을 할 것입니다. 신을 면직하시어 물의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승의 의논과 간원의 논계는 충돌없이 함께 성립할 수 있는 것이나, 옥당이 말을 지리하게 한 것은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경이 인혐하여 굳이 사직해서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내 마음을 이렇게까지 불안하게 만들 필요가 뭐 있겠는가. 대체를 힘써 보존하고, 소장을 올려 보내는 일을 빨리 중단하여,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행 부호군 이유태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빨리 올라와 나랏일을 의논하여 결정하라는 교지를 삼가 받들었는데, 이는 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신이 뜻하는 바도 아닙니다. 신이 이전에 올린 소장의 내용은 모두 옛 사람의 책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명께서 시행할 만하다고 여기신다면 들어서 조처하는 데 달려 있고, 만약 시행할 만하지 못하다고 여기신다면 또 신을 불러도 신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끝내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어찌 굳이 신을 불러내어 맑은 조정을 더럽히려고 하십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굳이 사양하는 것을 내가 참으로 알 수 없다. 상소 가운데 진달한 바가 비록 책에 실려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참작하여 가감하는 일은 그대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 이전의 교지 내용을 따라 빨리 올라오라."
하였다.
11월 4일 갑술
정언 이하(李夏)가 인피했는데, 그 대략에,
"이소 감시관(二所監試官)이 인피한 내용을 보건대, 분수(分數)를 따지지 않고 시수(矢數)만을 한결같이 따르면 《대전(大典)》 시취(試取)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고, 심지어는 법례를 무너뜨렸다는 것으로써 배척하였습니다. 신이 감시관의 반열에 있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히 처치하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일찍이 서필원(徐必遠)의 체직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에 참여했는데, 상신의 상소가 내용이 준엄했습니다. 잠깐이라도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체직하소서."
하였다. 집의 오두인(吳斗寅)은
"신이 시험장에서 점수를 계산하는 규정을 따르지 않았으니, 구례(舊例)를 어지럽혔다는 배척을 신도 역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라는 이유로, 대사간 이홍연(李弘淵)과 정언 윤심(尹深)은
"서필원에 대한 논계에 참여하여 대신에게 배척을 받은 것은 이하(李夏)와 차이가 없습니다."
라는 이유로, 지평 원만리(元萬里)는
"간원이 피혐한 것은 필원과 관련된 일이니, 감히 처치할 수 없습니다."
라는 내용으로 아울러 인피하여 체직을 청했다. 옥당이 처치하여, 이하·홍연·윤심·만리는 출사시키고 홍중보·이민적·두인은 체직시킬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랐다.
11월 5일 을해
부교리 김만기(金萬基)가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대신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내용이 매우 준엄하였으므로, 신은 매우 황송했습니다. 서필원의 일에 대해서 신이 이미 차자로 진달했으니 지금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만약 ‘명예를 얻으려고 정직을 과시했다[要名沽直].’는 것으로 죄안을 삼는다면 앞으로는 이 넉 자가 일을 말하는 자들을 빠뜨리는 함정이 될 것이니, 비록 곧은 의논을 개진하고 직언하는 인사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차자 안에 함부로 한 말 가운데 위로 성상에게 미친 것이 많았지만 성상께서 편안한 기색으로 잘 받아들이셨는데, 대신을 언급하자 도리어 기를 꺾으며 거절하고 있습니다. 구양수(歐陽修)가 이른바 ‘임금을 간하기는 쉬워도 대신을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망령되이 논계한 것으로 인하여 말하는 것을 꺼리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커진 것입니다. 신의 죄를 바로잡아서 대신(大臣)의 뜻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했다.
11월 7일 정축
옥당이 차자를 올려, 수성(修省)하는 방법을 극진히 하여 지진이 발생한 재변에 대응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명예를 얻고자 정직을 과시했다는 것은 서필원의 본마음이 아닌데다가 언로가 열리느냐 막히느냐 하는 문제가 관련되어 있으니, 경연의 신하들이 구제하여 바로잡은 것은 직분이었을 뿐입니다. 대신이 이미 용납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하께서 또 이어서 꾸짖었으니, 다스려진 세상의 정경이 아닌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시취(試取)가 이미 끝났는데도 출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과에 있어서 시수(矢數)와 분수(分數)의 일로 감시관들이 아울러 인피하여, 시취한 뒤 즉시 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로부터 듣지 못한 바입니다. 정원이 양사(兩司)의 관원을 불러서 처치하라고 청한 것은 급박한 형세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령 윤개(尹塏), 지평 이세익(李世翊)이 부름을 받고 대궐에까지 와서는 일을 핑계대고 사은하지 아니하여, 처치가 여러 날째 지연되게 했습니다. 뜻이 책임을 회피하는 데에 있어 진퇴에 기준이 없으니, 아울러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은근하고도 간절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 본관의 차자에 있어서는, 나는 그것이 장려할 만한 것인지 모르겠다. 윤개 등은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
11월 9일 기묘
상이 호조에 명하여, 얇은 옷을 입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지어 주도록 했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소하여 사직하는 한편 또 역말을 빌려 탄 잘못을 진술했는데, 상이 부드러운 내용으로 비답했다.
평안 감사가 치계하여 청나라 사신이 나온다고 보고했는데, 예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을 원접사(遠接使)로 차출하였다.
11월 12일 임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허적(許積)을 판윤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집의로, 송시철(宋時喆)·박승건(朴承健)을 장령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지평으로, 정석(鄭晳)을 사간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참찬으로, 이만(李曼)을 호조 참판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병조 참판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형조 참판으로, 권우(權堣)를 우윤으로, 김우형(金宇亨)을 교리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간원이 유후성(柳後聖)에게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거듭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고는 해조로 하여금 다른 상을 다시 품정하게 하였다.
강원도 생원 이모(李模)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3일 계미
집의 이민적(李敏迪)이, 시험장에서 시수(矢數)와 분수(分數)로 등급을 정하는 문제를 이유로 또 인피했는데,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4일 갑신
사학 유생 홍원보(洪遠普)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리고서 멈추었다.
11월 16일 병술
이후(李垕)를 집의로, 곽제화(郭齊華)를 장령으로, 정재숭(鄭載嵩)·송규렴(宋奎濂)을 지평으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유필(柳苾)을 횡성 현감(橫城縣監)으로 삼았다. 유필은 유후성의 아들인데, 후성의 가자를 도로 거둔 뒤 상이 해조로 하여금 다른 상을 다시 품정하게 했었다. 병조가
"예전에 가자를 도로 거둔 뒤 면대하여 내구마(內廐馬)를 지급한 전례가 있습니다만, 이 밖의 일에 있어서는 아래에서 감히 멋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라고 복계하니, 상이
"후성의 아들이 사로(仕路)에 통해 있다면 즉시 수령을 제수함으로써 아비의 상을 대신 주라."
했기 때문에 유필이 이 직임에 제수된 것이다. 다음날 간원이 목민관의 직임은 상으로 줄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이유로 체직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9일 기축
이홍연(李弘淵)을 승지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김응조(金應祖)를 대사간으로, 김만균(金萬均)을 교리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여러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에 따른 폐단에 대해서 양사가 여러 달째 굳게 간쟁하고 있는데, 이조는 관례적으로 배관(背關)하고 호조는 낱낱이 행이(行移)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간쟁하고 한편에서는 받들어 시행하니,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매우 해괴합니다. 이조와 호조의 당상들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는 근래의 통상적인 규례이다. 너무 깊이 생각하여 심각하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20일 경인
진주정사(陳奏正使) 정태화(鄭太和), 부사 허적(許積), 서장관 이동명(李東溟) 등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명나라 영력(永曆) 황제가 청나라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으며, 소운남(小雲南)에 달아나 생활하던 주씨(朱氏) 후손들이 모두 살해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명나라 말기부터 내려오는 소문을 살피건대, 영력은 바로 신종(神宗)의 손자이고 계왕(桂王)의 아들로 이름은 유랑(由榔)이다.037) 처음 형양왕(衡陽王)에 봉해졌는데, 난리를 피하여 오주(梧州)에 옮겨 살았다. 융무(隆武)038) 가 【태조의 후예이다.】 사로잡히자, 광서 총독(廣西摠督) 정괴초(丁魁楚)와 광서 순무(廣西巡撫) 구식사(瞿式耜)가 맞이해 옹립하여 운남(雲南)에서 보위했는데, 그때가 무자년 여름이었다. 경인년 겨울에 청나라 군대가 운남에 들어오자 영력이 몇몇 신하들을 데리고 도망해 숨어 거처를 몰랐는데, 이때 와서 사로잡힌 것이다.
청나라 예부가 회자(回咨)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인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시술(李時術)은 죽음을 용서하고 직책만 혁파했으며, 의주(義州)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용서하고 유배보내기도 하고 차등있게 장형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11월 23일 계사
송시철(宋時喆)을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거둥하여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원두표, 우의정 정유성, 호조 판서 정치화를 인견하였다. 상이 태화를 위로하며 이르기를,
"먼 길을 다녀오면서 질병없이 돌아온데다가 또 조사받던 일을 잘 마무리하였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하고, 이어서 묻기를,
"사신 행차가 들어갈 때 후하게 접대하는 것이 예전과는 달랐다고 하는데, 정말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숙소의 긴 행랑과 담장들이 모두 널찍하여, 수행원과 말들도 노숙하는 불편이 없었습니다. 이는 모두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받는 일에 이일선(李一善)이 힘써 주선했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역관배들의 말을 들으니, 일선만 마음을 다한 것이 아니고 칙사도 힘을 썼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의 형세는 어떠한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의 일을 상세히 알 길은 없습니다만, 보정 대신(輔政大臣)이 국정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있는데 하나도 어린 황제에게 아뢰지 않고 있습니다. 심양에서 들어간 청나라 사람들은 부귀에 빠져 사치가 나날이 더욱 심해지고 있으며, 갑신년039) 이후에 태어난 자들은 모두 나약하여 힘이 없어서 진달(眞㺚)과는 다릅니다. 이는 바로 쇠약해지려는 조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심은 어떠하던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진달들이 한인(漢人)을 침탈하는 것이 끝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 사람들도 역시 오랫동안 유지하려는 계획은 없이 공장(工匠), 여자, 보물, 무기들을 심양과 영고탑(寧固塔) 등처로 옮기느라 줄을 잇고 있는데,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북쪽으로 달아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이 삼전도 비각(三田渡碑閣)을 【바로 정축년에 성에서 나온 뒤 청한(淸汗)이 비각을 세운 곳이다.】 보려 한다고 하는데, 남한 산성의 일이 참으로 우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의 칙사도 가서 보았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기묘년 마호(馬胡)040) 가 나왔을 때, 비각을 보고 이어서 남한 산성에 갔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굳이 가서 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굳이 가서 보려고 한다면 어찌할 수 없습니다만, 어찌 미봉책이 없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응답할 말을 미리 정해놓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이 치화에게 이르기를,
"숙녕 옹주(淑寧翁主)의 혼례 때 쓸 진주를 이미 마련해 놓았는가? 그 값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천금(千金)이 넘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천금으로 값을 정하되 삼분의 일은 진주로 갖추어 주고 나머지는 목면으로 대신 주어라. 이를 국혼(國婚) 때의 영원한 법식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신이 노둔한 재질로 대신의 반열에 앉아 있기 때문에 근래 옥당 및 양사의 논계가 번갈아 공격해대며 못하는 말이 없으니, 신은 죽고 싶지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경석(李景奭)은 세 조정을 섬긴 원로인데 억울하게 서필원(徐必遠)의 무함을 입었기 때문에 신이 어쩔 수 없이 상소로 진달하여 분별한 것이니, 이는 대개 조정의 체통을 위해서였습니다. 예전 인조조(仁祖朝) 때 정시성(鄭始成)은 김종일(金宗一)을 무함한 일 때문에 지금까지 폐기되어 있습니다. 지금 조정에 만약 기강이 있다면 필원을 어떻게 극선(極選)에 갑자기 의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대략 진술한 것은 다만 그 곡절을 밝히고자 한 것이었는데, 젊은 무리들이 기어이 입을 다물고 달게 받아들이게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신이 지금 무릅쓰고 나온 뒤 다시 어떤 재앙의 기미가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연 공론이 있는 법인데, 경의 인혐이 어째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는가. 옥당이 조목조목 열거하며 논한 것에 대해서는 나도 역시 알 수가 없다."
하였다.
11월 27일 정유
유계(兪棨)를 발탁해서 예문관 제학으로 삼고 가선(嘉善)의 품계를 더해 주었다. 유계는 문학을 잘하였는데,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탑전에서 진달하여 당상으로서 의망되어 자급을 뛰어넘어 제수된 것이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8권, 현종 4년 1663년 1월 (0) | 2025.12.03 |
|---|---|
| 현종개수실록8권, 현종 3년 1662년 12월 (0) | 2025.12.03 |
|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10월 (0) | 2025.12.03 |
|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9월 (0) | 2025.12.03 |
| 현종개수실록7권, 현종 3년 1662년 8월 (0) | 2025.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