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경자
조복양(趙復陽)을 대사헌으로, 유계(兪棨)를 대사성으로, 권우(權堣)를 예조 참판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송창(宋昌)을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3일 임인
성균관 생원 유연(柳㝚)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소를 다섯 차례 올리고서 멈추었다.
12월 4일 계묘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모화관에 나아가 칙사를 맞이했다. 숭덕 황후(崇德皇后) 및 청나라 왕의 생모에게 존호를 올렸기 때문에 온 사신이다.
명하여, 진주사 정태화와 부사 허적에게 안구마 1필을, 서장관 이동명에게 숙마 1필을 하사하고, 역관 장현(張炫) 등 3인은 자급을 올려주었다. 조사받던 일이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12월 7일 병오
청나라 사신이 그들의 가정(家丁)을 이끌고 삼전도 비각을 가서 보았다. 저녁 때 숙소로 돌아왔다.
황해 감사 강백년(姜栢年)이, 평산 부사(平山府使) 윤겸(尹㻩)이 공술한 바의 음촌방(陰村坊)에 대한 일을 조사하여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애당초 개펄을 팔 때 민전(民田)을 침범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일찍이 논하여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윤겸이 소홀히 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사(內司)의 관원에 대하여 동조했다고 말한다면 실상이 아닙니다. 떼어 받은 곳의 둘레는 30리가 아니라 70리였고, 개펄을 파헤친 곳도 20리가 아니라 50리였습니다. 따라서 민전을 침범한 것도 자연 적지 않으니, 백성들의 원망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여기에 근거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사대부들의 묘소는 7, 8기뿐이 아니고 24기가 시방 현존한다고 합니다. 조원(曺瑗)이 경작하는 땅은 6일 경(耕)이라고 하니, 80여 일 경을 몰래 경작하였다는 것은 또한 실상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계본을 금부에 내렸다. 금부가 회계하여 아뢰기를,
"조원이 훈국에 소장을 올린 것은 애초에 힘을 빌려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려는 계책이었는데, 지금 와서 허물을 윤겸에서 돌리니 정상이 매우 미워할 만합니다. 문기(文記)를 아직 찾아오지 못한 것도 그 무리들이 본부에 정장하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이니, 또한 윤겸만을 오로지 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윤겸은 그 사이에서 흐리멍덩하게 한 잘못이 또한 있으니, 참작해서 법률을 적용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또 이르기를,
"조원의 말은 구구절절이 흉악하니, 만약 특별히 무겁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간사한 풍조를 징계할 수 없을 것이다. 서울의 옥으로 잡아들여 엄한 형벌로 무겁게 다스리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조원이 비록 이치에 어그러진 말을 한 간악한 정상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만약 이것을 이유로 잡아들여 엄한 형벌을 가한다면, 밖에서 듣는 자들이 반드시 ‘힘없는 백성이 궁가와 토지를 다투더니 끝내 옥에 갇히어 형벌을 받는구나.’ 할 것이므로, 성덕에 크게 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는 공무간 당연히 시행해야 하는 일인데, 지금 도리어 꼬집어 내어 그대들의 이름을 내려는 자료로 삼다니, 내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정원이 재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황해 감사 강백년(姜栢年)이 치계하기를,
"도내에 궁가가 설치한 장원이 도합 92곳입니다. 해서(海西)는 땅이 협소한데 농토의 절반이 사가(私家)에 귀속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계속되어 나간다면 온 도내에 남은 농토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궁가의 절수(折受)를 일체 금지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했다.
12월 10일 기유
이후(李垕)를 집의로, 곽제화(郭齊華)를 장령으로, 남천한(南天漢)을 지평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이조 정랑으로, 김휘(金徽)를 좌윤으로, 이익(李翊)을 부교리로, 유계(兪棨)를 동지춘추로, 김수항(金壽恒)을 지춘추로,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전부터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은 하루를 넘긴 적이 없었으니, 이는 대개 선비를 예우하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태학의 유생들이 상소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비답을 아직까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1백여 명의 유생들이 대궐 아래 모여 있습니다. 이런 혹한에 연일 한데서 거처하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온당하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진달한 바가 사문(斯文)에 관계된 일이니, 선비를 대우하는 예로 헤아려 볼 때 참으로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또한 호서(湖西)의 유생들이 상소를 진달한 뒤 대궐을 지키면서 명을 기다린 지 벌써 20여 일이 넘었는데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않고 계시니, 역시 매우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이때 상이 계속 몸이 좋지 못하여 정무에 수응할 수 없었으므로 옥송 문서와 군국의 사무들도 모두 적체되었는데,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까지 며칠씩 내리지 않자 여러 승지들이 연명으로 아뢰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의 비답이 또 감감했으므로 뭇 아랫사람들이 모두 답답해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평산(平山) 사람 조원(曺瑗)을 잡아들여 엄한 형벌을 가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신들은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원이 토지를 다툰 대상은 궁가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그의 패악한 말과 간악한 정상을 이유로 죄를 다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만, 원근에서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전하의 뜻을 명확히 알아 공사간의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겠습니까. 지금부터는 궁가가 백성들의 토지를 침탈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아무도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할까 참으로 걱정됩니다. 뒤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잡아들여 엄히 형벌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이하(李夏)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진주사 이하의 논상에 관한 비망기를 보건대, 역관들에게 내리는 상전이 사신보다 많았습니다. 경중이 서로 뒤바뀌어 자급이 지나치니, 개정하라는 의논만 하고 말 일이 아닙니다. 신이 이를 내용으로 간통을 띄웠는데, 여러 동료들이 어렵게 여기면서 처음에는 ‘힘만 드는 일이 될 듯하다.’ 하였고, 나중에 가서는 ‘우선 내일을 기다리자.’ 하였습니다. 신의 말이 믿음을 받지 못한 소치이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사간 정석(鄭晳),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윤심(尹深)이 아뢰기를,
"상전(賞典)이 도치되어 비록 온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자급은 참으로 그 경중을 따질 것도 못 되는데 다시 바로잡자고 굳이 고집하는 것은 대각의 사체에 손상이 될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힘만 드는 일이 될 듯하다.’는 등의 말로 간통에 답했던 것이며, 재차 간통이 왔을 때는 ‘우선 내일 일제히 모일 때를 기다리자.’고 답했으니, 이는 확실하게 헤아리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갑자기 인피했으니, 자못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아울러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정석 등은 체직시키고 이하는 출사시키기를 청했는데, 상이 따랐다.
12월 11일 경술
상이 청나라 사신을 편전에서 접견하였다.
12월 13일 임자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간원이 진주사 행차에 따라 갔다온 역관들에게 새로 자급을 더해준 것을 다시 바로잡으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14일 계축
김우형(金宇亨)을 사간으로, 민유중(閔維重)을 헌납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호남 순천부(順川府)의 백성 중에 어떤 아내가 자기 남편을 죽였는데, 서울의 옥으로 잡아들여 목을 베고, 그 고을을 강등시켜 현으로 삼았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선비를 기르는 자본은 지극히 풍부하게 해서 전후로 하사한 토지가 매우 많습니다. 이를테면 전남도 부안(扶安)의 위도(蝟島), 나주(羅州)의 도초도(都草島), 영광(靈光)의 각리도(角里島)·작도(鵲島)·자운평(紫雲坪), 영암(靈巖)의 추자도(楸子島) 및 경기의 강화·인천·교동(喬桐) 등지에 모두 수세(收稅)하는 규정이 있은 지 이미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곳의 수세가 모두 폐지되었는데, 도초도·각리도·작도·자운평 등지는 염철소(鹽鐵所)에 이속되었으며, 인천·교동 등지는 강도에 소속되었으며, 부안의 위도는 또 순검영(巡檢營)에 소속되었으므로 본관이 주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비를 이바지하는 제도가 매우 매몰찹니다. 설령 순검영을 혁파하지 않아 군수(軍需)가 많이 필요한 때라고 해도 선비를 기르는 것과 군비를 갖추는 것은 경중이 다릅니다. 하물며 지금은 순검영을 이미 혁파했는데 이 섬은 여전히 호남의 감영에 소속되어 있으니, 일의 체모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조종조의 허다한 하사에서 문(文)을 숭상한 아름다운 뜻을 알 수 있는데, 하나하나 삭감하여 지금은 한 섬[島]도 본관에 오로지 소속된 곳이 없습니다. 사리로 헤아려 보건대 응당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미 다른 곳에 소속된 여러 섬들은 진실로 어쩔 수 없겠지만, 위도 한 곳만은 본관에 도로 지급하신다면 군수(軍需)에는 손상되는 바가 많지 않고 본관에는 도움되는 바가 매우 많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16일 을묘
짙은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제주 목사 박이명(朴而㫥)은 매우 교활하니, 해외의 중요한 직임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파직하소서. 부산 첨사 이저(李竚)는 경망스러워 변방의 큰 진(鎭)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또 이저를 체차하라는 일에 대해서 하교하기를,
"이전부터 변방의 장수와 수령에 대해서 체차하라고 논핵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하자, 대사헌 조복양(趙復陽), 집의 이후(李垕)가 인피하며 체직을 청했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부산이 비록 변방의 진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싫어서 회피하는 지역이 아니고 보면, 합당하지 않다고 논하면서 체차만을 청한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8일 정사
장령 곽제화(郭齊華)가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의 나랏일을 보건대 나날이 쇠미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위태롭고 망하게 될 징조가 한둘이 아닙니다. 상하 관계에 있어서도 성의가 막연해서 서로 믿음이 없으며, 춘추 시대 위나라의 군신들처럼 서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병폐가 있는데도 끝내 그 잘못을 바로잡을 자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매우 한심하게 여길 만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국가의 언로는 사람의 혈맥과 같습니다. 혈맥이 막히면 사람은 병들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4년째인데, 말을 싫어하시는 병폐가 벌써 심합니다. 무릇 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타당성 여부를 논하지도 않고 하찮게 여기는 듯한 안색을 지으면서, 오직 ‘윤허하지 않는다.’·‘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것으로 으레 내리는 비답을 삼고 계십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뭇 아랫사람들이 간쟁하는 바가 한결같이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으로 국가에 이익이 없는 것이란 말씀입니까."
하고, 또
"지난번 서필원(徐必遠)이 한 마디 말을 올렸는데, 대신이 명예를 구하고자 정직을 과시한다는 것으로 배척했습니다. 어떻게 명예를 구하고자 정직을 과시한다는 것으로 죄목을 삼아서 말한 사람을 죄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이 한 번 나온 것으로써 현재의 일을 알 만합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것을 꺼리게 되어 끝내는 반드시 한 마디 말도 없게 되고야 말 것이니, 위태로워지는 기미가 어쩌면 여기에서 말미암을 것입니다. 나라를 망치는 말을 무엇 때문에 한단 말입니까."
하고, 또
"유생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며칠째 내리지 않으신데다가 또 굳게 거절하는 뜻을 보임으로써 중외의 실망을 초래하셨는데, 유도(儒道)를 존숭하는 아름다운 뜻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직임을 사직했는데, 상이 답하지 않으면서 그의 직임을 체직시키라고 명했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교외에 나아가 있으면서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장령 곽제화의 상소 안에 신을 탄핵하는 논의가 있는데, 그 상소의 대본을 보지는 못하고 그 말을 대강 들으니 ‘위태롭고 어지러워지는 기미가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을 것이다. 나라를 망치는 말을 무엇 때문에 한단 말인가.’라는 내용으로 신의 죄목을 삼았다고 합니다. 신이 이런 죄명을 지고 어떻게 정승의 자리에 하루라도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물러나 교외에 엎드려 공손히 형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법을 맡은 신하에게 내려서 신의 죄를 빨리 바로잡으시어, 사류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세도는 경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망령된 말은 개의할 필요가 없다. 경은 경솔하게 행동해서 일의 체모를 거듭 손상시키지 말고, 빨리 성안으로 들어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12월 19일 무오
경기 유생 조근(趙根)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 공조 좌랑 조임도(趙任道)가 상소하여 하사한 쌀을 사양하고, 이어서 청하기를,
"성상의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으며, 궁궐을 엄하게 단속하고 유신(儒臣)을 가까이하며, 경연을 열고 학교를 일으키며, 무비(武備)를 닦고 곤수(閫帥)의 직임자를 잘 가리며, 군졸을 어루만지고 수령을 잘 가리며, 관리의 출척을 분명히 하고 농사 정책을 급선무로 여기며, 풍속을 바로잡고 절개있는 행실을 장려하며, 염치를 기르고 예의를 존숭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칭찬하는 내용으로 비답했다.
임도는 영남 사람인데, 일찍이 인조와 효종 양 조정에서 사부와 좌랑 등의 직책을 제수했으나 모두 나아오지 않았다.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그의 올바른 행실을 천거하는 한편 나이가 이미 연로하다고 말했으므로, 상이 감사에게 명하여 옛날 비단을 하사한 옛 전례에 따라 쌀과 콩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했는데, 임도가 상소해서 사례하고 이어서 경계하는 말을 올렸던 것이다.
12월 20일 기미
이상진(李尙眞)을 경상 감사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간으로, 박승건(朴承健)·홍우원(洪宇遠)을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응교로 삼고, 전 장령 곽제화(郭齊華)를 특별히 명하여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곽제화가 언관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서 시대의 폐단을 상소로 진달하였는데, 말을 구사하는 즈음에 비록 지나친 점이 있기는 했지만, 이는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뢴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갑자기 기를 꺾으면서 머나먼 변방으로 내쫓으신다면 언로가 이로부터 막힐까 염려됩니다.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이 두 번째 상소하며 해직시켜 달라고 했는데, 상이 온유한 내용의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1일 경신
간원이 아뢰기를,
"대간이 일을 논의하면 비록 묘당의 큰 의논이라 하더라도 그 결말을 기다린 뒤 거행하는 법이니, 이는 대각의 체모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본관이 경성 판관 곽제화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는 일로 한창 굳게 간쟁하고 있는데, 정원이 그의 숙배 단자(肅拜單子)를 받들어 들였으니, 일이 매우 온당하지 않습니다. 해당 승지를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록 성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승지를 추고하라고 청하다니, 내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사간 김우형(金宇亨)이 인피했는데, 그 대략에,
"대각의 논계가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한창 청하고 있는데, 정원이 숙배 단자를 받들어 들였습니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없던 것입니다. 추고를 청하는 논계는 관례상 당연한 것이었는데 성상의 비답이 준엄했으니, 결코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고, 정언 이하(李夏)도 역시 인피했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키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부교리 이익(李翊), 부수찬 여성제(呂聖齊) 등이 차자를 올려, 관학 유생들의 종사하라는 청을 따르라고 청하는 한편, 또 경성 판관 곽제화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기 연천현(漣川縣)을 혁파했는데, 전패(殿牌)를 분실했기 때문이다.
우의정 정유성이 세 번째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곽제화의 상소를 보니, 그 안에는 채택할 만한 말이 많았습니다. 만약 신을 공박한 한 가지 사항을 이유로 모두를 폐지하고 채택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견책을 가하신다면, 언로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의 죄를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마음 편하게 여기면서 의기 양양하게 다시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타일렀다.
12월 24일 계해
상이 정원에게 하교하기를,
"경성 판관 곽제화가 아직도 사조(辭朝)하지 않고 있는데, 그가 스스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정원이 단자를 봉입하지 않아서인가?"
하니, 승지 유창 등이 아뢰기를,
"이전부터 외직에 보임된 사람은, 대간이 도로 거두라고 논계할 경우 감히 배사를 못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제화가 아직 사조를 못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그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대간의 논계를 믿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승지가 대간이 추고하라고 청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와 같이 아뢰는 것인가?"
하니, 유창 등이 또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못났지만 어찌 추고를 청하는 논계를 꺼려 행해야 할 일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도로 거두라는 논의가 일단 제기되면 감히 지레 사조하지 못하는 것이 이전부터 전해오는 옛 규정이기 때문에, 전례를 들어 감히 아뢴 것입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했다.
우의정 정유성이 네 번째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온유한 내용의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5일 갑자
간원이 곽제화의 숙배 단자를 봉입한 승지를 추고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승지를 추고하라고 청함으로써 배사(拜辭)를 견제하고 당류를 비호하다니, 어찌 그리 교묘한가. 그대들의 의도를 내가 해괴하게 여긴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곽제화를 제수한 지 여러 날이 지났고 또 벌써 사은 숙배를 해놓고서 자기 당류를 믿고 누워 움직이지 않다니, 매우 밉고 놀랍다. 마땅히 죄를 주어야 되겠지만, 우선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겠다. 오늘 안으로 떠나도록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제화의 말이 대신을 침범했으니 누가 그의 망령됨을 모르겠습니까마는, 대각의 신하들이 명을 중지하라고 청하는 것은, 언로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성상의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사사로이 당류를 비호하여 세력으로 후원하면서 꺼리지 않기를 성상의 분부처럼 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제화의 일 때문에 이런 뜻밖의 온당하지 못한 하교가 있게 되었는데, 어찌 신하들을 일체로 여긴다는 의리에 크게 손상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대각의 논계가 정지되기 전에는 받들어 행할 수 없는 것이 옛 관례입니다. 한편에서는 굳게 간쟁하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받들어 행한다면, 대각을 두어 바로잡는 책임을 맡긴 뜻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제화의 하직 단자가 방금 올라왔습니다만, 감히 봉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추고를 청하는 논의를 심하게 두려워하는구나. 하든 말든 그대들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 김우형(金宇亨), 정언 이하(李夏)가, 견제하고 당류를 비호한다는 등등의 하교를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했다.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부교리 이익(李翊) 등이 대면을 청하니, 상이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며 만나지 않고 생각을 글로 아뢰라고 명했다. 이익 등이 글로 아뢰기를,
"곽제화가 즉시 사조하지 않은 것 때문에 어제 이래로 엄한 교지가 여러번 내렸는데, 말씀이 매우 화평하지 못했습니다. 신들은 매우 유감으로 여깁니다. 일이 크든 작든 논할 것 없이, 대각의 논계가 일단 제기된 뒤에는 정원이 즉시 받들어 시행하지 않는 것이, 국조 수백 년간 전해오는 옛 규례입니다. 방금 제화를 오늘 안으로 떠나게 하라는 분부가 계셨는데, 한편에서는 논계하고 한편에서는 떠나보낸다면 오늘부터는 법이 무너지게 될 뿐만 아니라 성상의 덕에 크게 누가 될 것입니다. 후설의 신하가 처음에는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일에 따라 복역(覆逆)했습니다만, 엄한 비답 아래서 끝내는 단자를 봉입하고 말았으니, 법을 지키면서 굽히지 않는다는 뜻이 매우 못 됩니다.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뒤폐단이 있게 되니, 삼가 바라건대,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살피시어 제화를 떠나보내라는 명을 중지함으로써 대각의 체면을 세워주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궁가의 면세에 대해서 다시 참작하여 결정하라는 일로 연달아 논계하자, 상이 엄한 내용의 비답을 내렸다. 대사헌 조복양, 집의 이후가 인피했는데, 그 대략에,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당초에 결수(結數)를 정한 것은 본부의 요청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보면 지금 오랫동안 끄는 것은 일이 실로 근거가 없다.’고 하교하셨는데, 신들은 지극히 의혹스럽게 여깁니다. 궁가의 면세는 오늘날의 막대한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번 결정한 5백 결은 수효를 정하지 않은 때보다 더 많은 것입니다. 법의 이치로 따져보건대 참으로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이것을 굳게 간쟁하는 것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는 말인데, 성상께서 양해하지 못하시고 결정했던 결수까지 도로 중지하셨습니다.
대각이 일을 논의하는 것은 그 일의 옳고 그름에 따라 논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본부에서 나온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간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들이 힘껏 간쟁하면서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엄한 비답을 받았으니,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는 한편, 곽제화를 억지로 배사하게 한 잘못을 진술하고 또 정원이 관례를 무너뜨린 잘못을 공격하고는, 이어서 잘못된 행동을 목격하고도 바로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했다.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또 이르기를,
"이 인피한 글을 살피건대, 면세에 관한 일은 두 사람에게서 나온 말 같아서 의도가 바르지 못하다. 내가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하였다. 지평 송창(宋昌)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는데, 복양과 이후는 직임에 나오지 않았다.
12월 26일 을축
헌부가 곽제화를 외직에 보임하여 떠나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행하여, 이단상(李端相)을 사인으로, 이홍연(李弘淵)을 충청 감사로, 이민서(李敏敍)를 교리로, 안후열(安後說)을 수찬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평안 감사로, 민희(閔熙)를 승지로, 이지형(李枝馨)을 경상 좌병사로, 이견(李汧)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정언 이단하(李端夏)가 신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는 한편, 또 아뢰기를,
"지금의 대신은 사류(士類)를 미워하는 것이 너무나 심해서, 조화를 힘쓰지 않고 혐의와 노여움만 품기 때문에 성상의 마음에도 점점 사류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서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우선 마음을 바로잡아 반드시 떨쳐 일어나겠다는 의지를 가지시고, 다음으로 대신을 달래어 기어이 사류와 협심하게 한다면, 세도(世道) 또한 부흥되는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답하지 않고 그를 체직시켰다.
이조 참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온유한 내용의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빨리 올라오도록 하였다.
12월 27일 병인
연이어 도목 정사를 하여 오정일(吳挺一)을 병조 참판으로, 정석(鄭晳)을 교리로, 이혜(李嵆)를 정언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정랑으로, 이시매(李時楳)를 형조 참판으로, 안헌징(安獻徵)을 승지로, 이익(李翊)을 헌납으로 삼았다.
사간 김우형(金宇亨)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그저께 곽제화가 사조할 때, 한편에서는 굳게 간쟁하고 있는데 또 한편에서는 떠나보냈으니, 이는 실로 아직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정원이 단자를 봉입한 것은 진실로 잘못이 있습니다. 신이 대각에 있으면서 즉시 아뢰지 못했으니, 또한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헌부가 논계하고 옥당이 배척했는데, 어찌 허물을 전적으로 정원에만 돌리면서 자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아간다면 또한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태연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했다. 우형이 이어서 아뢰기를,
"곽제화를 외직에 보임하여 떠나보내라는 명이 대각의 논계가 한창 전개되고 있는 때에 나왔으니, 후설의 직임에 있는 관원은 한결같이 굳게 의논드리면서 상의 마음을 기어이 돌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서, 한 번 진달하여 아뢰고는 바로 배사 단자(拜辭單子)를 봉입했습니다. 임금을 허물이 없는 데로 인도한다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이겠습니까.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그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해당 승지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는 한편, 또 이르기를,
"대간을 외직에 보임한 것이 오늘날에만 있는 일이 아닌데 일찍이 이렇게까지 야단을 떨지는 않았다. 내가 어려서 전례를 알지 못한다고 여겨 그러는 것인가, 정령의 권한을 온통 아래에 귀속시켜 놓고 임금은 간여하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그러는 것인가. 지금 대각에 있는 자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볼 만한 풍채가 있는 의논을 냈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한갓 당파를 비호하는 것만 일삼아서 날이면 날마다 귀찮게만 하고 있다. 그대들도 양심이 있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정원이 비답한 교지를 되돌려 보내며 대략 온당하지 못하다는 뜻을 진달했는데,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했고, 다시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우형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지금 신이 간쟁한 바는 참으로 언로가 막힐까를 염려한 것인데, 말이 졸렬하고 성의가 얕아서 성상의 뜻을 돌리지 못하고 도리어 준엄한 내용의 비답을 받았습니다. 신하로서 이런 죄명을 지고 어떻게 천지 사이에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삭직하시고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황해도 유생 오복연(吳復延)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민정중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형편없는 신이 과분하게도 발탁되는 은택을 입어 새로운 교화를 시작하는 처음에 누차 간원의 장이 되었습니다. 사직하고자 해도 허락을 받지 못하고 보답하고자 해도 방법이 없으므로, 감히 한두 가지 어리석은 견해를 등대하던 날 개진하고 글로 아뢰는 사이에 논계했으니, 이는 대개 시비를 명백하게 가리어 성상의 귀를 깨우쳐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망령되이 말했기 때문에 상께서 번거롭게 문책하도록 만들었으니, 허물을 제 스스로 만든 것으로 죄를 참으로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은혜로운 제수에서 다시 옛 직책을 제수하셨는데, 이는 참으로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이 이전에 망령되이 논한 것 중에는 아직도 대각의 논계 가운데 한두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오랫동안 버티면서 안 따르지는 아니할 것이며, 신의 말을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신도 또한 어떻게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혜만을 탐한 채 갑자기 처음의 견해를 변화시켜 전하의 교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혹시라도 전하께서 제 말의 시비를 따지지 않고 고식적으로 신을 그 자리에 채우고자 하시는 것일 뿐이라면, 신이 비록 형편없지만 평상시 저 자신을 대한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새로 제수하신 명을 거두시어, 농토에 관한 일에 전념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그 당시 균전사(均田使)이었다.】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이 다섯 번째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부드러운 내용의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빨리 들어오도록 하였다.
12월 28일 정묘
우의정 정유성이 여섯 번째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일을 말하던 대관이 갑자기 쫓겨나게 된 것은 그 재앙이 신에게서 연유한 바이니, 곧장 땅을 뚫고 들어가 숨고 싶습니다. 지금 듣자니, 간원의 신하 상소 가운데 ‘대신들이 사류를 미워하는 것이 너무 심하여, 오직 혐의와 노여움만 품고 있다.’는 등의 말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또한 신을 지적한 것입니다. 조그마한 신의 이 한 몸이 뭇 사람의 노여움이 집중되는 표적이 되었으니, 너무나도 불행한 것입니다. 신이 이런 죄명을 얻게 된 연유를 삼가 생각해 보건대, 처음에 이숙의 조그만 잘못을 망령되이 논했기 때문에 일이 생기는 단서가 되었던 것이며, 이어서 서필원(徐必遠)의 일로써 시대적 금기 사항을 크게 건드렸는데, 엎치락뒤치락 점점 격렬해져서 뭇 사람의 노여움이 일제히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신은 참으로 송구스러우니, 삭직하여 조정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타일렀다.
지평 송창(宋昌), 정언 이하(李夏)가 간원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하고, 대사헌 조복양, 집의 이후도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는 한편, 또 패초에 나아가지 않은 잘못을 끌어댔다. 장령 박승건(朴承健)이, 일찍이 전결(田結)의 논의에 참여했으므로 복양 등의 인피에 대해서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했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정원의 신하가 하늘 같은 성상의 위엄에 겁을 먹고 옛 규례를 굳게 지키지 못함으로써 성상의 조정으로 하여금 이전에 없던 잘못된 거조가 있게 하였으니 파직을 청하는 논계가 참으로 공공의 의논이었는데, 뜻밖에 엄한 비답으로 거절하셨습니다. 이를 이유로 과감하게 말하는 간원의 신하를 가볍게 체직시켜서는 안 됩니다. 속생각을 다 진달하고 살피시기를 바랐는데 내용이 바르지 못하다는 교지를 내린 것은, 참으로 신하들을 몸받고 언관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진실로 위로하여 근심을 풀어주고 직임을 도로 주어서 말을 다하도록 책임을 지워야 합니다만, 패초에 나아가지 아니한 것은 요즈음의 규례상 체직에 해당합니다. 피혐에 해당하지도 않는 것으로 억지로 인혐한 것은 매우 근거없는 거조입니다. 사간 김우형, 정언 이하, 지평 송창은 출사시키고, 대사헌 조복양, 집의 이후, 장령 박승건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9일 무진
교리 이민서(李敏敍) 등이 차자를 올려, 간관의 기를 꺾은 잘못을 갖추 진달하는 한편, 또 아뢰기를,
"임금이 하는 일은 모두 후세의 본보기가 됩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이 가르침을 드리우고 법을 만들어 후세로 하여금 지키면서 감히 어기지 못하도록 한 것은, 그 의도가 지극히 심원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위로 조종의 고사를 돌아보시고 아래로 후세에 발생할 폐단을 우려하신다면, 이런 거조는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간원에 내린 온당하지 못한 비답을 도로 거두시어 너그럽게 용납하여 용서하시겠다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30일 기사
원만석(元萬石)·이연년(李延年)을 승지로, 유계(兪棨)를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나이준(羅以俊)을 장령으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일의 대소와 시비를 막론하고 대간이 굳게 논계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 논계를 중지하기 이전까지는 거행할 수 없는 것이 국조의 전해오는 오래된 규례입니다. 이번 곽제화의 일은 대간이 한창 도로 거두라고 청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갑자기 준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떠나보내도록 재촉하심으로써 이전에 없던 잘못된 거조를 하셨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관대하게 살피시어 우선 내리신 명을 거두시고, 대간의 논의가 어떻게 결말되는가를 기다려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곽제화는 중도에서 우선 기다리게 하고, 결말이 나기를 기다려 떠나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조 참의 이유태가 재차 상소하여 소명에 나아오지 않는 한편, 또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조목조목 진달한 일을, 전하께서 일찍이 비국의 신하들로 하여금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셨는데, 신도 또한 명을 받들고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진달한 것이 모두 여러 신하들의 뜻에 들지 않았으니, 신은 스스로 시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기꺼운 마음으로 은퇴하여 다시는 세상을 생각지 않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만약 올라와서 다시 의논한다면, 어찌 끝까지 그 말을 쓰지 아니하며 어긋나 부합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빨리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민정중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본직에 있으면서 망령되이 한두 가지 일을 논계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또한 윤리와 관계되는 것도 있었지만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니, 신이 직임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잘못이 큽니다. 그리고 양사의 많은 관원들이 일을 말한 신하를 관대하게 용서하여 간언이 들어오는 길을 넓히라고 청했는데, 성상께서 갑자기 노여움을 문득 떨치시어 말투가 너무 사나웠으며, ‘부정하다.’ 또 ‘임금을 모욕한다.’고 배척하였습니다. 신처럼 소원하고 천한 자가 또 다시 망령되이 발언한다면 의심을 당하는 것이 또한 어찌 이와 같은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새로 제수하신 명을 거두시어 신으로 하여금 본분을 지키며 농토에 관한 일에 힘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이 일곱 번째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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