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경오
대사간 민정중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신이 비방하며 배척하였고 상께서 엄하게 견책하는 비답을 내리셨으니, 모두 감히 다시 대각에 무릅쓰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르시는 패를 문득 내려 신으로 하여금 반열에 나아오라고 재촉하셨으므로, 신은 분수를 잊고 무릅쓰고 나아가는 것이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진퇴에 근거가 없어서 스스로 염치와 의리를 잃은 것이니, 체직하소서."
하였다. 당시 영돈녕 이경석의 상소 가운데 비방하는 말이 있었고, 장령 곽제화가 일을 말한 이유로 외직에 보임된 데에 대하여 양사가 간쟁하며 누차 아뢰었는데도 논계가 멈추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임지로 나아가도록 재촉하여, 대각이 다시 간쟁하였는데, 상이 준엄한 비답으로 거절했다. 그래서 정중이 상소로 자신을 탄핵하고 또 이처럼 인피한 것이다.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1월 2일 신미
집의 오두인이
"월과(月課)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추고받아야 할 상황에 있다."
라는 내용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사간 김우형이
"언관이 죄를 입었기 때문에 언로가 막힐까 망령되이 염려하고, 후설의 신하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례를 무너뜨린 것이라고 잘못 헤아려, 간관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 청하면서 승지를 파직하라고 논계했던 것으로, 뜻이 진실로 다른 데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세 번이나 엄한 비답을 받아서 번거롭게 하였으니, 부르는 패초가 연이어 내리고 있지만 달려나갈 수 없다."
라는 내용으로 역시 인피하며 체직을 청했고, 지평 송창이
"당초 인피한 뜻이 우형과 이미 차이가 없었으니, 지금 우형의 인피에 대해서 처치할 수 없다."
라는 내용으로 인피하며 체직을 청했는데,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옥당이 대사간 민정중, 지평 송창은 출사시키고, 사간 김우형, 집의 오두인은 체직시키라고 청했는데, 따랐다.
1월 3일 임신
허적(許積)을 형조 판서로, 이연년(李延年)·강유(姜瑜)를 승지로, 안후열(安後說)을 집의로,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4일 계유
대사간 민정중이 또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사적으로는 말이 신임을 얻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으며 공적으로는 망령되이 함부로 말한 죄가 있으니, 다시 대각에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결정난 바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성상의 자만심이 날로 높아져서 상하가 막혀 있어, 언관들이 논의하는 바가 일체 거절당하고 조금만 성상의 뜻을 거스려도 그때마다 기를 꺾으시므로, 평소 가까이하며 믿고 예우하던 신하라 하더라도 모두 그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처럼 앙금이 남아 있어 자취가 위태로운 자가 어떻게 감히 그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인주의 경시하는 마음을 더욱 열어줌으로써 관료들에게 수치를 거듭 끼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신이 감히 무릅쓰고 다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부득이해서입니다. 소명이 있었는데도 달려가지 않았으니 법을 크게 어긴 것입니다. 삭직하소서."
하였다. 간원이 소명에 달려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니, 따랐다.
헌납 이익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지금 단정한 선비들이 나날이 멀리 떠나고 아름다운 말이 들리지 않으며, 모든 일이 무산되고 모든 법도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크게 진작시키고 크게 변혁시키는 조처는 없이 도리어 안락에 빠져 즐기는 기풍이 있어서 무사안일하게 날짜만 보내고 무기력한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날로 곤궁해져 나라의 근본이 점점 병들어 가고 있어서 급급한 형세가 아침 저녁도 보존하지 못할 듯합니다. 이런 때에는 비록 군신 상하가 일심으로 협조하고 지성으로 정치를 도모하더라도 오히려 잘 이루어내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데, 어찌하여 대신이 화합하지 않은 채 논의를 어긋나게 펼친단 말입니까.
비록 사심이 없는 성상의 덕이시지만 위에서 의심을 쌓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충성스러운 간언을 듣기 싫어하시고 신하들을 경시하시며, 선을 따르는 도량이 넓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는 병폐가 이미 고질화하였습니다. 모든 논계에 대해서 으레 거절하시고 조금만 비위를 거슬려도 그때마다 노여움을 보이시며, 바로잡아주는 말을 도리어 임금을 모욕하는 죄로 삼고 법을 준수하려는 논의를 끝내는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돌리십니다. 엎치락뒤치락 격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지나치게 사납기 때문에 대각이 기를 상실하고 원근의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깁니다. 하물며 일이 궁가에 관련되면 번번이 귀찮게 군다는 기색을 보이시고, 말이 묘당에 관련될 적마다 내쫓는 벌을 가하십니다. 이는 온 세상 사람을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태도를 가지게 한 뒤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가령 옛 사람처럼 과감하게 말하는 대관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하여 아무 쓸모도 없는 말을 올려서 스스로 죄에 빠지려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어진 신하들을 가까이하시고 충언을 살펴 받아들이시면, 성덕이 나날이 빛나게 될 것이고 아름다운 계책도 아울러 진달될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을 가다듬는 데 달려 있는 것일 뿐이니,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는데, 받아들이지 않았다.
1월 5일 갑술
조계원(趙啓遠)을 판윤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대사성으로, 이숙을 수찬으로 삼았다.
순천(順川) 여인 춘대(春代)가 간통하며 지내던 남자와 함께 모의하여 자기 남편을 찔러 죽였는데, 삼성 추국을 설치하여 죄안을 계복한 뒤 목을 베었다. 순천부를 강등시켜 현(縣)으로 삼고, 부사 이구(李球)를 파직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돈녕 이경석 역시 대면을 청하고 들어왔는데, 나아와 아뢰기를,
"호남의 대동법(大同法)에 대하여 선조(先朝)에서 13두(斗)를 거두어 들이기로 의논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공법(貢法)을 마련했는데 거두어 들이는 쌀이 많이 남고 또 13두는 호서에 비하면 지나치게 많은 것이라 합니다. 지난번에 감사가 숫자를 상고하여 계문했는데 끝내 채택하여 시행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매우 옳지 않습니다.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므로 더욱 돌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을 감해 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호남의 선비들이 상소하여 감면을 청하였고 감사도 역시 감면을 청하였는데, 모두다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각 고을들이 조정의 명을 기다리면서 아직 거두어 들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속히 처분을 내려주셔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두어 쓰고 남을 경우 감면을 청하는 것은 괜찮지만, 감면하라는 명을 기다리면서 오랫동안 거두어 들이지 않는다면 옳지 않다. 그와 같은 식으로 한다면 결코 감면할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곽제화의 일을 양사가 어찌하여 합계까지 하였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양사가 굳게 간쟁한 것은, 참으로 언로를 위한 일이었지 제화를 위한 일이 아니었는데, 성상의 비답이 매우 화평하지 못했습니다.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복양이 먼젓번에는 유우석(劉禹錫)이 연주(連州)로 나간 일을 가지고 말하더니, 나중에는 언로를 가지고 핑계대면서 용의주도하게 인피하였으니, 바르지 못한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인조조 때에는 승지들이 상의 교지를 도로 돌려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근래 오랫동안 이런 규정이 폐지되어 왔습니다. 이번 제화의 일에서 승지가 비록 끝까지 간쟁하지 못했다는 논박을 받았습니다만, 그 애초에 도로 돌려보낸 일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입니다. 또한 우상이 제화가 죄를 입었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 편안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미 벌을 주었는데, 억지로 떠나보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복양은 또한 평소에 충성심이 많았으니, 어찌 거짓으로 꾸밀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에 책임이 있는데, 성상의 건강이 오랫동안 좋지 못하시므로 강을 폐지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봄 날씨가 화창해지면 건강이 저절로 회복될 것이니, 재야에 있는 유신들을 성의껏 부르소서. 그리고 이유태가 일찍이 긴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아직껏 시행하지 않고 계십니다. 먼저 그 가운데 시행할 만한 것을 시행하시고, 다시 명하여 부른다면 어찌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질병을 이유로 어렵게 여겼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금년의 모든 관료들에게 지급하는 녹봉을 이미 예전대로 회복했으니, 임시로 줄였던 각전에 대한 어공 따위도 예전대로 회복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월 7일 병자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오두인(吳斗寅)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정언 이유상(李有相)이 대사간 이은상과 형제 관계여서 상피에 해당한다는 것으로써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교리 이민서(李敏敍)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새해가 되어 봄이 돌아오자 만물이 새로운데, 성명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리신 지 큰 나라인 경우 천하에 호령할 수 있는 준비 기간인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 세월은 위에서 흘러 하늘의 운수가 바뀌었으며, 백성은 아래에서 곤궁하여 사람의 일이 극에 도달하였습니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후회하는 맹세에 ‘내 마음의 근심은 세월이 빨리 흘러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하였고, 후한(後漢) 소열제(昭烈帝)도 또한 항상 의분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며 ‘세월이 물 흐르듯 지나고 있는데 공업을 세우지 못하니, 이 때문에 슬프다.’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영웅답고 호걸스런 임금들은 분발하여 각고의 힘을 기울이며 날이 부족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을 지닌 것이 이와 같이 절박했습니다. 그래서 사업에 발휘할 때는 용기있게 가서 과감하게 결정내었고, 그 동작하는 것은 천지가 회전하듯 우레와 바람이 몰아치듯 힘있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패권을 차지하는 공업을 세우거나 왕업을 창도하여 이름이 후세에 드리워졌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나이가 한창때로 뜻과 기운이 한참 성대하시니 비록 앞의 두 임금에게 비길 바가 아닙니다만, 왕위에 계신 기간이 적은 것이 아닌데 세도가 나쁜 쪽으로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이 벌써 떠나갔으니 대업을 보장할 수 없으며, 국가의 형세가 이미 기울었으니 나이가 한창때인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위로 선왕께서 부여하신 막중한 사업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상황을 살피시며, 계절이 바뀐 데에 느낌이 일고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 슬퍼하시며, 한밤중까지 잠 못 이루며 생각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시겠지만, 어리석은 신들로서는 미처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신들은 탄식과 근심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눈물이 흐릅니다. 신들이 이런 때에 전하를 위하여 한 번 말해서 도움을 바라는 성상의 마음에 보답하지 않는다면, 죽어도 남은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살펴주신다면 사직의 복일 것입니다만, 만약 살펴주시지 않는다면 이는 신들의 성의가 부족했던 것으로서, 전하께서는 반드시 요망하고 상서롭지 못한 말로 보실 것입니다. 신들이 또한 어떻게 감히 관직을 헛되이 차지하여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을 위한 계책은, 위에서 느릿느릿 답답하게 굴지 않고 아래에서 한가하게 세월만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의 존망과 백성의 사생이 여기에서 결판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오늘날의 나라 형세가 치안이 확보되어 무사하므로 앉아서 태평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신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비록 위험한 상황에 이르기는 했지만 안으로는 명령권을 훔칠 권세있는 간신이 없으며, 밖으로는 전쟁을 해야 하는 환란이 없으므로, 그럭저럭 하루하루 유지하며 내 몸이 무사하면 다행이라고 여기십니까? 신들은 또한 꼭 그렇게 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시험삼아 안을 말해본다면, 공론이 펴지지 아니하여 장려와 징계가 법이 없고, 곧은 말이 진술되지 아니하여 잘잘못을 들을 수 없고, 유능한 사람들이 많이 적체되어 관리가 되는 상도(常道)가 나날이 문란해지고, 염치가 모두 상실되어 이익을 추구하는 길이 크게 열리고, 관직이 폐기되고 무너져 대소 관리들이 공무를 봉행하는 사람은 없고, 기강이 문란하여 나라를 좀먹는 간교한 아전들이 있고, 조정 위에서는 사람들이 각각 멋대로 행동하여 힘껏 사사로움을 이루며 꺼리는 바가 없고, 형벌과 옥사에 기준이 없어 청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법령이 미덥지 못하여 사치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시험삼아 밖을 말해본다면, 백성은 곤궁하고 재산은 고갈되었는데 기근이 해마다 발생하고, 부역은 번다하고 무거워서 이웃들이 보존되지 못하고, 산과 바다를 궁가에만 오로지 떼어주어 백성들이 산업을 잃었고, 정치에 힘쓰는 관리와 아첨에 힘쓰는 관리가 분별되지 아니하여 착취가 금지되지 않고, 곡식은 평소 저축이 없어 수재나 한재에 대한 대비가 없고, 군병은 허울만 있어 급한 때 믿을 수 없고, 장수의 급료로 지급하는 베를 지역의 진(鎭)에 부과하여 군인들이 고혈을 빼앗기는 참혹함이 있고, 궁가의 차인들이 시골 읍에서 멋대로 행동하여 마을이 파산하여 원망하고, 백성들이 울부짖고 있지만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선량한 백성들은 나날이 적어져 달아나는 자들만 나날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흙덩이가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산산이 부서질 상황이 아침이 아니면 저녁입니다. 산과 늪으로 무리를 불러 모아 도적떼가 되면 또 누가 금지하겠습니까. 원망하는 기운이 가득 차서 위로 하늘의 온화함을 범하고, 음양의 질서가 어긋나 온갖 요괴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이와 같으니 억만 년을 유지할 수 있는 계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조종의 끝없는 사업을 이어받아 억조 신민의 여망을 지고 계신데, 위태로움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비록 느릿느릿 걷고 목전의 안락함을 구차하게 바란다 하더라도 될 수 없습니다. 아, 치란의 책임이 전하에게 있으며 전화 위복의 기틀이 전하에게 있으며 전화 위복의 기틀이 이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태연히 움직이지 아니하심이 나날이 더욱 심해지십니다. 이것이, 신들이 대성 통곡하며 전하께서 한 번 깨달아 다시 도모하실 것을 바라는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의 나라 형세가 비록 점차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라 하더라도, 전하에 이르러서 무너지고 찢어짐이 급격히 심해져 십 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천양지차뿐만이 아닙니다. 그러하니 이는 전하께서 스스로 반성할 점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조이(祖伊)의 말에 ‘우선 왕의 마음을 바로잡고 나서 그 일을 바로잡겠다.’ 하였고, 맹자(孟子)도 역시 ‘한 번 임금을 바로잡아 놓으면 나라가 안정된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볼 때마다, 현명한 전하를 원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어찌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여 임금을 바로잡는 의리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전하를 삼가 살펴보건대, 총명하고 인자하심은 뭇 왕들보다 훨씬 뛰어나시어 즉위하신 이래로 큰 잘못이 없었으니, 이는 참으로 대대로 흔히 나올 수 없는 임금입니다. 그러나 뭇 사람의 마음이 아래에서 답답해 하고 모든 일들이 앞에서 폐기되고 실추되는 것은, 참으로 성상의 자질에 게으름이라는 병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도 또한 살펴보십시오. 예전 나라를 일으킨 임금들 가운데 부지런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며, 말세에 나라를 잃어버린 임금들 가운데 정사에 게으르지 않은 자가 있었습니까? 지금 저 천 가구나 사방 백 리쯤 되는 고을의 수령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얼굴도 알지 못하고 일이 지체된 것이 많다면 오히려 잘 다스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만 가지 기무를 처리하는 막중한 임금의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리고 예로부터 안일에 빠지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자들은 모두 술에 빠지거나 계집에 빠지거나 혹은 토목 공사를 일으키길 좋아하거나 사냥을 좋아해서였는데, 지금 전하께는 이러한 일이 없다는 것을 신민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스스로 노력하지 아니하십니까? 인간의 마음이란 쓰는 바가 없으면 반드시 그 기호에 따라 빠지게 되는 법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명(明)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조회를 40년간이나 보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침내 천하의 혼란을 초래하여 멸망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한 근래의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게으름의 폐해가 나라를 망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이미 나타난 폐해를 말해보겠습니다. 신하를 접견하는 일이 매우 드물어 상하로 하여금 막혀서 뜻이 통하지 않게 하고, 경연을 여는 날이 없어 성상의 공부가 나날이 퇴보되고 그에 따라 잘못된 정사가 발생하게 하고, 호령이나 조처가 걸핏하면 시일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소 신하들이 맥이 빠지지 않는 이가 없어서, 일에 나아가 처리하려는 뜻은 없이 고식적으로 시간이나 떼우려는 풍조가 이미 고질이 되었고, 의지와 기운이 시들한 채 상하가 서로 본받아 대세가 쇠미해져서 누구도 수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종 나타나는 위태로운 징조나 멸망할 조짐들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차마 이런 데에서 안주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궁중에 계시면서 좋아하는 일들이 무슨 일이며, 더불어 대화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신하를 멀리하면 부녀자들이 앞에 있게 되는 데 불과하고, 충고하는 바른 말이 들리지 않으면 거처에 장난하는 대화가 있게 되는 데 불과합니다. 이와 같다면 쇠퇴해지거나 흩어지고 넘어지는 것이 어느 곳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맑고 깨끗한 바탕이 나날이 혼미해지고, 굳건하고 커다란 기운이 나날이 사라지며, 안일에 빠지는 해독이 내부에서 조금씩 고질화하고, 산만한 모습이 밖으로 환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선비들이 모두 은거할 생각을 지니게 되고 아첨하는 간신들이 때를 얻었다고 생각하게 되며, 인심은 분개하고 원망하며 희망을 포기하게 되고 선비들은 답답해 하면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한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비록 숭고한 지위에 계시고 대대로 쌓인 기반 위에 계시다 하더라도 반드시 돌아가 쉴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춘추 시대 양(梁)나라가 망한 교훈이 어찌 지극한 경계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매번 질병을 핑계로 삼고 계시는데, 신들은 질병이 일어나는 것도 또한 여기에서 연유한 바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마음은 몸체의 주인이고 의지는 기운의 장수입니다. 마음과 의지가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어 흩어지지 않는다면, 몸체도 견고하며 혈기도 저절로 강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견고하고 저절로 강력해지면 번거로움을 이겨내며 병들지 않는 것입니다. 침범하기 쉬운 감기까지도 비록 이와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깊이 들어앉아 나오지 않으면서 기운을 적절히 조절하여 펴거나 소통시키지 않으면, 안으로 답답하게 막히고 밖으로는 좋지 않은 기운을 초래합니다. 그래서 옛 말에 ‘깊숙한 안방과 집은 오한과 신열의 온실이다.’ 하였습니다. 춘추 시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진(晋)나라 임금의 질병을 논하면서도 역시 ‘군자에게는 사시(四時)가 있습니다. 아침에는 정사를 처리하고, 낮에는 자문을 구하고, 저녁에는 정령을 확정하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기운을 절도있게 발산시켜 그 기운이 막히거나 엉켜 몸을 피로하게 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지극한 말입니다.
경연에 대해서는 신들이 다시 진달하고자 해도 말이 벌써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전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매일 아침마다 조회를 보았는데 해가 기울어서야 파했으며, 자주 공경(公卿)과 낭장(郞將)들을 인견하며 다스림에 대해서 강론하였는데,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황태자가, 황제가 너무 지나치게 부지런하자 틈을 타서 간했는데, 황제가 ‘나는 이러한 것을 즐겁게 여기기 때문에 피곤하지가 않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이 교훈을 깊이 본받는다면, 어떻게 오늘날처럼 완전히 뜻이 없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경자년001) 에는 경연을 연 것이 겨우 10여 번이었고, 신축년002) 에는 겨우 대여섯 번이었고, 지난해에는 겨우 한두 번이었습니다. 이렇다면 전하의 뜻이 나날이 게을러진 것이며 해마다 나태해진 것입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이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신들이 감히 여기는 것은, 망령된 바가 아닙니다. 예전의 성스런 왕들도 또한 안일이 즐겁고 부지런함이 힘들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스스로 나태하거나 한가롭게 굴지 않으면서 안일을 무서운 맹독으로 여긴 것은, 진실로 치란과 존망이 여기에서 판가름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요순은 위대한 성군이었지만 군신간에 서로 경계한 내용이 오히려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마소서. 그는 오직 태만히 노는 것만을 좋아합니다.’ 하고, 또 ‘안일과 욕심으로 나라에 본받도록 하지 마시어, 삼가고 두렵게 여기소서. 하루이틀 사이에도 기무가 만 가지나 됩니다.’ 하였으며, 순임금이 우임금의 공을 칭찬하여 ‘나랏일에 매우 부지런하였다.’ 하였으며, 도간(陶侃)도 역시 ‘위대한 우임금은 성인이었지만 촌(寸)의 시간도 아꼈다. 일반인들은 마땅히 분(分) 정도의 시간은 아껴야 한다.’ 하였습니다. 두렵게 여기며 조심하고 새벽에 덕을 크게 밝혀 앉아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린 분은 탕임금이었으며, 아침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식사를 할 겨를도 없이 정사를 살폈던 분은 문왕이었으며,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밤늦게까지 우러러 생각한 분은 주공이었습니다. 주공이 안일하지 말라는 글을 지어 성왕(成王)을 간절하게 깨우쳤는데, 심지어는 나라를 향유하는 기간, 통치 기간의 장단까지도 모두 안일하느냐의 여부에 귀결시켰으니, 그 의도가 매우 심원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이것을 가지고 몸에 반성해 보십시오. 안일에 가깝습니까, 안일하지 않은 데 가깝습니까.
신들이 전하의 비위를 거스르면서 이렇게까지 극도로 말하는 것은, 살아서 요순과 같은 성군을 참으로 만났으니 고명하신 성품으로 하루아침에 깨달으신다면 문지도리가 회전하듯 하시어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현재의 일이 지극히 위태롭다는 것을 살피시고 기업을 유지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유념하시며, 위로는 예전의 흥망이 판가름난 소이를 살피시고 안으로는 성상의 마음의 병통이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시어 불끈 분발하시고 새로운 각오로 다시 도모하소서. 지극히 굳세고 강한 하늘을 본받으시고 바람과 우레 같은 큰 용기를 떨쳐, 몸에 얽혀 있는 모든 편안하고자 하는 습관을 한 칼에 잘라내듯 하시고, 담금질하듯이 마음을 단련시키고 힘쓰시어 행동을 부지런히 하소서. 매일 아침마다 일찌감치 조회하시고 정사를 보는 마루에 나오시어, 정원으로 하여금 번갈아 모시며 일을 아뢰도록 하고, 경연의 신하들로 하여금 틈을 타 강의를 올리도록 하고, 대소 신하들로 하여금 생각이 있으면 들어가 대면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출납되는 공사에 결재를 지체하지 마시고, 이것으로 몸을 조섭하며 기운을 적절히 발산하소서. 인하여 나날이 일을 하시면서 자주 그 성취 여부를 살피시고, 인하여 단정한 선비를 친근히 하여 귀와 눈을 널리 열어 놓으시고, 뭇 계책을 두루 장악하여 가부를 살펴 가리시고, 여러 신하들을 책려하시어 바삐바삐 직무를 보게 하시고, 호령을 내어 사방을 고무 진작시키소서. 이는 참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근본으로 거룩한 거동인 것입니다. 이것을 따라 올라가시면 무한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지만, 이것을 버리고 내려간다면 무한히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어질고 성스런 전하께서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은 채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재앙을 이롭게 여기고는, 번번이 둘러대는 말을 하면서, 억조 대소 신하들의 애절하고도 절박하게 똑같이 원하는 소망을 어찌 굳게 거절해서야 되겠습니까.
예전에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즉위한 지 3년 동안 정사를 보지 않자 오거(伍擧)와 소종(蘇從)이 들어가 간언하였는데, 장왕이 왼손으로는 소종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뽑아 매달아 놓은 악기들을 잘라 버리고는 다음날부터 정사를 보아 드디어 제후들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장왕이 음악에 빠져 법도가 없었으니, 비록 전하의 시대와 나란하게 논할 바는 아니지만, 그가 간언을 따라 허물을 고친 용기는 참으로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신들이 직무를 살핌이 형편없어 성상의 은혜를 저버렸으며, 정성을 진달했지만 살핌을 받지 못하고 충성을 원했지만 시행되지 않은 것이, 지금 몇 년째입니다. 진실로 애써 입을 놀릴 면목이 다시 없습니다만, 이렇게 해가 바뀌어 새로운 교화를 펼 날이 되었으므로 주인을 근심하고 아끼는 정성을 견디지 못하여 어리석은 소견을 무릅쓰고 진술한 것입니다. 성명께서 헤아려 분명하게 판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말의 뜻이 간절하고, 정성과 충성이 볼 만하다. 내가 마음에 보존하고 힘쓰겠다. 그대들은 책임을 때웠다 하여 본뜻을 잃지는 말라."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이, 대간의 탄핵을 입었다는 이유로 전후에 걸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시세에 따라 처신하지 못하여 툭하면 시휘(時諱)을 범합니다.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공격해대는 대상으로 신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부드러운 내용의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1월 8일 정축
헌납 이익(李翊)이, 이전에 청했던 여러 궁가들의 화전(火田)·시장(柴場)·어전(漁箭)의 절수를 혁파할 것과, 양자를 들인 뒤 아들을 낳은 경우에 대해서 인조조(仁祖朝)의 수교(受敎) 이후로 영을 어긴 자들은 예관으로 하여금 개정(改定)하게 하라던 논계와, 곽제화(郭齊華)를 외직에 보임하는 명을 도로 거두라던 논계를 거듭하였는데,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장릉(長陵)의 헌관(獻官) 유준창(柳俊昌)이 술에 취하여 예를 어겼으니, 매우 불경한 것입니다. 대감(臺監)이 목격하고 정과(呈課)했는데, 헌부의 관원이 술 취한 탓으로 돌리어 그대로 놓아두고 불문에 부쳤습니다. 유준창 및 헌부의 관원을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0일 기묘
정석(鄭晳)을 사간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정언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이유상(李有相)을 부교리로 삼았다.
헌납 이익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조정의 의논이 나날이 무너지고 나랏일이 나날이 어긋나는 것을 목격하고 감히 상소를 올려 어리석은 소견을 대략 진술했는데, 정승이 이를 이유로 상소하여 퇴직을 청하면서 법문을 각박하게 인용하여 공격해댄다고 신을 지목하였으므로, 신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늘날의 근심은 참으로 조정의 의논이 분리되고 대간의 풍모가 꺾인 데 있는데 성상께서는 의심하는 마음만을 쌓으시어 언로(言路)가 막히게 되었으며, 현상황을 조제시킬 계책을 우리 임금과 정승에게 크게 기대하였는데 지금 공격해댄다고 의심을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유언비어가 사라지지 않고 참소가 서로를 모함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무너져 나라에 화를 끼치게 될 것이니, 어찌 대신이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신의 역량이 조화시키기 어려워 먼저 의심과 배척을 받았으니, 신을 삭직하시어 조정을 맑게 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간원이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1일 경진
황해 감사 강백년(姜栢年)이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1월 12일 신사
대사헌 유계(兪棨) 등이, 면세에 대하여 기한을 정하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는 것과 바다와 못이나 산전(山田)을 아울러 혁파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는 이전의 논계, 조원(曺瑗)을 서울의 옥으로 잡아들여 엄한 형벌을 가하고 무겁게 처리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던 논계, 곽제화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를 다시 아뢰었는데,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새로 순천 현감(順天縣監)에 제수된 조여수(趙汝秀)는 남쪽 변방의 커다란 부(府)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체차하라고 또 아뢰었는데, 상이 역시 허락하지 않다가, 여러 차례 아뢰자 허락하였다.
개성부(開城府)의 생원 김상경(金尙絅)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라고 청했는데, 따르지 않았다.
1월 13일 임오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이 소명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15일 갑신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강유(姜瑜)를 황해 감사로, 임의백(任義伯)을 좌윤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삼았다.
숙녕 옹주(淑寧翁主) 혼례 때의 도감 관원들의 상격(賞格)을 논하였다. 주혼(主婚) 복녕군(福寧君) 이유(李栯)에게는 안구마를, 당상 조복양·이은상·김수항에게는 말을 하사하고, 도청 민점(閔點)은 가자하고, 감역 윤세장(尹世章)·송지렴(宋之濂)·박세량(朴世樑), 사자(使者) 김여남(金汝南) 등은 승서하고, 그 밖의 아랫사람에게는 각기 차등있게 물품을 하사하였다.
온양(溫陽) 백성 생이(生伊)가 그 고을의 전패(殿牌)를 훔쳤는데, 삼성 추국을 설치하여 사안을 다시 심문한 뒤 목을 베었다. 태생지라 하여 안산군(安山郡)을 현(縣)으로 강등하고, 군수 심헌(沈櫶)을 파직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김해(金海) 지역 숙명 공주(淑明公主) 집 농장과 둔전의 백성 등이 본가의 차인 장두길(張斗吉)의 착취에 어려움을 겪자 어사에게 소장을 올렸는데, 본관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사 안경전(安鏡全)이 실상을 감추고 왜곡되게 두둔하여 조종을 속이면서 곤궁한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잡아들여 죄를 정하소서. 두길의 죄는 도신의 조사 보고서 가운데 자취가 낭자하니, 유사로 하여금 법대로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팔도 군역 가운데 가장 괴로운 곳으로 양서(兩西)의 관군(館軍)보다 심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그 역에 들게 되면 그가 죽더라도 부모들이 죽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울지도 않습니다. 평양의 관군 강시익(康時益)의 족속 6, 7인이 일족에 대한 침탈을 모면하기 위하여 시익 및 그의 처자 일곱 식구를 모두 살해하였습니다. 친족간에 이런 일이 발생하였으니 흉악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그러한 변란이 일어난 원인을 궁구해 보면 대체로 관군의 역이 무겁고 일족에 대한 침탈이 괴로운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좋은 방향으로 변통하여 편파적으로 고생한다는 원망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유계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큰 일을 하실 수 있는 자질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 지위에 계시니 스스로 기약하는 것이 어떠하시겠습니까마는, 불행하게도 몸이 좋지 못한 지가 벌써 여러 달이 되었으므로, 깨끗하고 굳건하던 기운이 가라앉고 침체된 가운데 시들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고식적으로 안일하고자 하는 뜻이 가만히 요양하고 조리하는 즈음에 조금씩 자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럭저럭 유지하고 구차하게 지내면서 한결같이 무너지는 대로 맡기고 계십니다.
근래 옥당이 논계한 바, 이를테면 성상의 뜻이 게을러져 경연을 오랫동안 열지 않았고 신하들을 접견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느니, 호령이나 조처가 걸핏하면 지체되어 아랫사람들이 맥이 빠지고 시간만 때우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느니 하는 등의 말은 모두 절실하고도 지극한 말이니, 성명께서 깊이 유념하시어 빨리 고치셔야 합니다. 여러 궁가들의 토지를 줄이라는 논계를 대간이 한창 굳게 간쟁하며 해를 넘기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허락을 아니하고 계시니, 어찌 매우 개탄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간이 일을 논하는 것은 온 나라 공공의 의논을 취한 것이니만큼, 반드시 헌부가 발의한 것이라고 하여 헌부가 고집하고, 간원이 발의한 것이라 하여 간원이 간쟁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헌부에 내린 비답에서, 본부가 발의한 것도 아닌 논계를 가지고 오랫동안 끈다고 꾸짖으셨는데, 이것은 또한 공가들에 대한 말을 듣기 싫어하시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분부가 마땅함을 잃은 것입니다.
‘부정(不正)’이라는 두 글자는 바로 마음의 죄이지 착오로 잘못한 허물이 아닌 것입니다. 헌부가 인피한 계사 가운데 어떠한 말이 부정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성상의 분부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릇 위가 아래를 부정하다 의심하고 아래가 부정으로 자처하여, 위는 의심하고 아래는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밝힐 수 없다면 말류의 폐해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곽제화는 먼 촌구석 출신으로서 망령된 논의를 발론하였으니, 가령 상신이 웃으면서 사과하고 전하께서 용납하여 놓아두셨다면 애초부터 무슨 야단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성명께서 제화를 너무 갑작스럽게 죄를 주었으므로 대간이 간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 번의 허락을 아직도 아끼고 계시는 것입니다. 간원이 논계한 바 양자를 들이는 문제에 있어서는, 《예경(禮經)》에서 고증하고 자연의 이치를 참고한 것으로 단연코 의심할 만한 점이 없는데 전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니, 신들은 의혹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명께서는 편파적으로 매여 있는 사심을 제거하시고 빨리 대간의 논계를 따르소서.
또 경기는 여러 해 동안 크게 흉년이 든 뒤인데 또다시 양전(量田)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돌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봄에 거두어 들일 대동미(大同米)를 적당히 헤아려 감해 주소서."
하니, 상이 부드러운 내용으로 비답하고, 비변사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이에 거두어 들일 쌀 2두(斗)를 감하였다.
1월 16일 을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승지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는데, 교리 이유상(李有相), 지평 남천한(南天漢), 정언 이혜도 함께 입시하였다. 간원이 이전에 아뢰던 논계를 되풀이하였는데, 장두길(張斗吉)을 법대로 처치하라는 청만을 따랐다. 이혜가 아뢰기를,
"근래 신하들을 접견하는 일이 매우 드물고 경연을 오랫동안 폐지하셨으므로, 성상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지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상의 건강이 좋지 못하여 기거에 방해가 있어서입니다만,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질병이 발생한 것도 반드시 막히어 통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결과라고 여깁니다. 만약 편전에서 때때로 대면하며 경서나 역사서를 토론하고 다스림의 도를 자문하신다면, 덕을 기르고 병을 조리하는 데 양쪽으로 다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날이 따뜻해지고 병이 나으면, 그대가 말한 대로 하겠다."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근래 조정에 기상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대신이 성 밖으로 나가고 언관이 멀리 쫓겨갔으며, 양사가 굳게 간쟁하고 있는데 허락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신들은 답답하게 여깁니다. 곽제화가 즉시 숙배하고 하직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대간의 논계가 멈추지 않고 있으므로 갑자기 하직할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이것이 어찌 거드름을 피우며 교만 방자해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제화가 와서 하직하려고 하는데 정원이 아뢰고 멈추게 했다면, 이는 일의 체모상 진실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감히 태연히 누워 있으면서 끝내 하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대간의 논계가 일단 발의된 뒤에는 떠나 보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세력을 믿고 물러나 누워 있는 것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그런 조처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유상이 아뢰기를,
"제화는 시골 촌구석에서 자랐기 때문에 규례를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지, 실제로 거드름을 피우며 교만 방자해 한 것은 아닙니다. 지나간 일은 말해 봐야 소용이 없으니, 성상께서 앞으로는 신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대간의 계사 때문에 하직하지 않은 것이라면 당초에는 무엇 때문에 사은 숙배하였단 말인가. 그대의 말과 같다면 조금도 죄줄 만한 것이 없지만, 그가 태연히 누워서 떠나가지 않은 측면을 놓고 본다면 나의 말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하였다.
1월 17일 병술
박안제(朴安悌)를 병조 참의로, 민희(閔熙)를 승지로, 정익(鄭榏)을 병조 참지로, 이민적(李敏迪)을 사인으로, 김휘(金徽)를 좌윤으로, 임의백(任義伯)을 우윤으로 삼았다.
어사를 강도(江都)에 보내어 무사들을 사열하고 시험보였으며, 평안도와 함경도의 무사들 가운데 재주가 있지만 적체된 자가 많다는 이유로 도신(道臣) 및 병사로 하여금 재주를 시험보여 서면으로 아뢰게 하여, 그것을 병조에 내려 뽑아 쓰도록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 행 부호군 송준길(宋浚吉) 등이 상소를 올려 경계를 진달하며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지금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다만 시대적 사정이 어려움이 많고 성상의 건강이 좋지 못하여 정치에 힘쓰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외의 관료가 맡은 직무를 게을리하고 크고 작은 관리들이 구차하고 태만히 굴어, 끝내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부응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여망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다스려진 세상을 이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혼란만 초래한 근심이 있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 성상의 처음 마음이겠습니까. 신들은 매번 서로 만날 때마다 혀를 차며 탄식하고는 꼭꼭 눈물을 흘린 뒤에야 그만두었습니다.
아, 우리 선왕께서 한참 큰 뜻을 가다듬어 모든 일을 확대시키다가 미처 실마리를 마련하지도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가시어, 이 어렵고 커다란 사업을 우리 전하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전하의 학문이 미처 대성하지 못하였으며 의지와 기운이 그다지 완성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넓고 넓은 하늘이 전하에게 인애롭지 못한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면 어떻게 몰래 통곡하고 깊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이 전하께 바라는 바는 다만, 전하께서 더욱 스스로 마음에 경계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 갑자기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더욱이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게으르거나 쾌락에 빠져 기업을 실추시키겠는가.’ 하시어, 혈기가 안정되지 못하면 더욱 여색에 대한 경계를 생각하시고, 사의(私意)가 제거되지 못하면 더욱 지극히 공평한 도리를 생각하시고, 편안하고 싶은 마음이 혹시라도 생기면 맹독보다 두렵다는 것을 더욱 생각하시고,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혹시라도 싹트면 호화로운 집은 귀신이 내려다본다는 근심을 더욱 생각하소서. 그리하여 항상 모든 일에 능하지 못하며 미치지 못한다고 여김으로써 아직도 잘하지 못한다는 자세를 지닌다면, 학업은 저절로 더욱 밝아지고 뜻과 기운은 저절로 더욱 굳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전하를 완전한 인물이 되게 하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다고 어떻게 단정하겠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신들이 밤낮으로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근래 들리는 소리는 바라던 바와 차이가 납니까. 경연에 나아가시는 날이 없고 아랫사람을 접견하는 일이 매우 드물며, 대각의 신하들이 말하는 바가 간혹 친척에 관계되면 한결같이 으레 거절하시며 비록 원망을 초래하고 윤기를 어지럽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돌아보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답답한 것인데, 사시(四時) 가운데 어떤 한 곳에 정신을 한결같이 쓰고 계시는 것에 있어서는, 질병을 삼가고 수명을 보존하는 방법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사시 가운데 어떤 한 곳에 한결같이 정신을 쓴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전 춘추 시대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질병이 있었는데, 자산(子産)이 말하기를 ‘군자에게는 사시(四時)가 있습니다. 아침에는 정사를 처리하고, 낮에는 자문을 구하고, 저녁에는 정령을 확정하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기운을 절도있게 발산시켜, 그 기운이 막히거나 엉켜 몸을 피로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불쾌하게 해서 온갖 절도를 혼란케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사시 가운데 어떤 한 곳에 정신을 한결같이 써서 병이 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원토록 임금이나 신하나 모두 유념해야 할 바입니다.
신들은 성상께서 항상 위의 말을 지극한 경계로 삼고 계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만, 바깥의 전해지는 소문에는 매우 근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한가로이 계시는 중에 보시는 책은 어떤 책이며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돌아보건대 여기에 혹 그다지 경계를 하지 않아 중외의 의심을 초래한 것은 아닙니까. 전하께서 비록 스스로를 가볍게 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유독 선왕과 양전(兩殿)께서 전하의 질병을 걱정하던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옛 말에 이르기를 ‘자식을 길러본 뒤에야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된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원자(元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왕과 양전의 마음을 우러러 생각하시는 한편, 또 자산(子産)의 말로 아침 저녁으로 스스로를 경계한다면, 반드시 깜짝 놀라 돌아봄에 깊은 연못이나 얇은 얼음이 밑에 있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닐 것이어서, 이목을 즐겁게 하는 하찮은 모든 것들이 다시는 성상의 마음에 들어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맑은 기운이 몸에 있고 뜻도 신령스러워져서 어느 곳을 가든지 합당하게 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신다면 다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신들은 또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상의 덕은 하늘이 부여한 바로 갖추지 못한 것이 없는데, 그 가운데도 정성스런 효성이 가장 독실하고 지극하니, 이는 충분히 인심을 굳게 결합시킬 수 있는 근본입니다. 그래서 비록 근심스러운 일이 눈에 가득하다 하더라도 식자들이 믿으며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듣자니 근래 영릉(寧陵)에 천향(薦享)할 때 향축 단자(香祝單子)를 제때에 내리지 아니하여 일의 형세가 몹시 궁색하고 예의가 구차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제사를 지내도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에 사무치는 슬픔을 어느 곳에서 다시 펴시겠습니까. 가령 이것이 성상의 건강이 좋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일에는 경중이 있으며 예에는 대소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시들해지고 게으른 생각이 있다면, 온갖 사물들이 다시는 의지하고 달라붙어 근본으로 삼을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어떤 일에 억지로 노력하여 세상에 흔치 않은 공로를 이룩하였다 하더라도 오히려 실질이 없는 말단적인 결과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이치는 결단코 없는데이겠습니까. 아, 전하의 정성스런 효도에 어찌 그런 것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필시 길거리에 잘못 전해진 바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들은 놀라움과 탄식을 견딜 수 없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당시에 우연히 부득이한 일이 있었던 것인데 외부의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한 것입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금 헤아려 살피시어, 이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덕을 새롭게 하소서. 그리하여 지금부터는 반드시 맹렬하고 용기있게 개과천선하며, 다시는 게으른 습관을 말미암으면서 질병에다 미루지 말고 또한 간언을 거절하면서 자전(慈殿)의 뜻이라고 핑계하지 마소서. 반드시 유도(儒道)를 존숭하여 습속을 교화시키고, 공경하고 미덥게 하며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소서. 그리하여 온 나라의 신민들로 하여금 눈을 씻고 목을 빼고 새로운 교화를 즐겁게 볼 수 있도록 하시어 중흥의 기업을 마련하소서. 그러면 그보다 더 다행스러움이 없겠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호남(湖南)에서 대동으로 거두어 들이는 수량이 호서(湖西)보다 많은데, 남쪽의 백성들이 크게 기근이 든 뒤여서 또한 매우 원망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예전 선왕께서 이 일을 언급한 것이 기억나는데, 성교에 이르기를 ‘우선 이와 같이 잠정적으로 결정하게 하고 지출이 넉넉하면 또한 헤아려 견감하라.’ 하였습니다. 어제 전 감사 이태연(李泰淵)의 말을 들으니, 그 수량을 총계하면 수만 석이 남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빨리 선왕의 유지를 따름으로써 한 지역의 하늘이 내린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신들이 당시에 직접 선왕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기 때문에 감히 다시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모두 사직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경들이 상소한 내용을 한 번 보건대, 정성스런 뜻이 가득하고 진실한 가르침이 간절하여 일반적인 상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띠에 써 지니고 다니면서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봄날씨가 점점 온화해지고 있으며 나의 질병도 조금 차도가 있으니, 경연을 여는 한 가지 조항은 자연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옛 성인의 가르침을 개진함에 있어서는, 경들이 아니면 그 책임을 맡기기가 어렵다. 경들은 이 목마른 듯한 나의 정성을 유념하여, 마음을 선뜻 바꾸어 지금 즉시 올라옴으로써 기대에 부응하라. 그리고 호남의 대동으로 거두어 들이는 쌀을 헤아려 견감하는 한 가지 조항은 묘당에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경들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빨리 올라와 목마른 듯한 바람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그뒤 호남의 대동미(大同米)는 13두(斗)로 여전히 존속되었다.
1월 19일 무자
지평 남천한(南天漢)이 아뢰기를,
"신이 본부 차자 가운데의 말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난번 탑전에서 하문하셨을 때 한 마디 말도 우러러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전계(傳啓)할 즈음에는 계문의 초고에 글씨를 잘못 기록했으면서도 살피지 못하였고, 주서가 간통으로 물어왔는데도 역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흐리멍덩함이 매우 심하니, 체직하소서."
하고, 지평 송창(宋昌)이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본부의 계문 초고 가운데 ‘상신(相臣)’의 ‘신(臣)’자가 ‘국(國)’자로 쓰여 있었는데, 이것은 그래도 뜻이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가(宮家)’의 ‘가(家)’자를 ‘첩(妾)’자로 쓴 것은 매우 생각이 주도면밀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이 그 날 자리에 있어 함께 보았으면서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집의 안후열(安後說), 대사헌 유계(兪棨)도 역시 틀린 글자를 살피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송창·안후열·유계는 출사시키고 남천한은 체직시키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랐다.
천한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으로 세칭 ‘토괴(土塊)’였다. 영남에 살았는데 조정의 이목이 자세하지 못하여 대각을 차지하기까지 하였다. 사람을 등용할 때 살피지 않는 것이 이와 같으니, 지극히 한심하다. 연명한 차자에 대해서 뜻도 알지 못하였고, 손수 쓴 계문에 대해서 간통으로 물었는데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비록 매우 가소롭지만 또한 무엇을 탓하겠는가.
1월 21일 경인
정익(鄭榏)을 승지로, 이유상(李有相)을 정언으로, 심재(沈梓)를 지평으로, 원만석(元萬石)을 형조 참의로, 남구만(南九萬)을 응교로, 박승건(朴承健)을 장령으로, 권우(權堣)를 도승지로 삼았다. 집의 안후열(安後說)을 승서하여 승지로 삼았다. 후열은 아직 준직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애초에는 의망하지 않았는데, 의망에 첨가하라고 특명하여 제수한 것이다.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삼았다.
이조 참의 이유태가 소명을 받들어 올라와 도성 문 밖에 이르러서는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고는 빨리 들어오도록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사직소를 올렸다. 이유태의 이전 상소에 법제와 병부(兵賦)의 폐단을 극도로 논의하면서 변통하여 시행하라고 청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상이 상의하여 결정하자고 유태를 불렀다. 유태가 일단 이르자, 속류의 무리로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개혁을 평소 좋아하지 않았던 태화가 신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으면서 유태가 저절로 돌아가게 되기를 기다린 것이다.
1월 22일 신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눈병 때문에 침을 맞았다.
충청도 유생 유항(柳沆)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3일 임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밤 5경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빙 둘렀다.
1월 24일 계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치료가 끝나자 약방 도제조 원두표(元斗杓)가 나아가 아뢰기를,
"이유태가 이전에 진달한 상소에 3강 16조가 있었습니다. 일단 불렀으니 헤아려 채용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에서 일찍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상의하여 시행할 것으로 회계했었다. 이미 도성에 들어왔으니, 이제는 의논하여 시행해야 한다."
하고, 이어서 해조에 명하여 유태에게 쌀과 찬거리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전 대사헌 조복양(趙復陽)이 유준창(柳俊昌)을 탄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에 연좌되어 파직당했는데, 두표가 서용하라고 청함으로 인하여 제언사(堤堰司)를 맡게 되었다.
1월 25일 갑오
사간 정석(鄭晳)이 이전에 부평 수령(富平守令)으로 있을 적에 나라의 말[馬]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27일 병신
이행진(李行進)을 예조 참판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병조 참지로, 윤강(尹絳)을 판윤으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민유중(閔維重)을 교리로, 정석(鄭晳)을 수찬으로, 유계(兪棨)를 겸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이조가, 대사성의 임무가 막중하므로 아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며, 인조 때의 고사와 같이 명망이 높은 자를 엄선하여 겸임시키고 오랫동안 맡게 하여 성취를 책임지우자고 청했다. 그래서 이때 와서 유계를 임명한 것이다.
정언 이혜가 사간 이정(李程)과 종형제이므로 상피 관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인혐하여, 체직되었다.
1월 28일 정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1월 29일 무술
이유를 장령으로, 오상(吳尙)을 정언으로, 유창을 예조 참의로, 김우형(金宇亨)을 부수찬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고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에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판서 정경세(鄭經世)에게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참판 송인수(宋麟壽)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관(醫官) 윤후익(尹後益)을 특별히 첨지로 삼았다. 이에 앞서 홍처윤(洪處尹)이 해서(海西)를 안찰하면서 궁장(宮庄)을 조사하여 법대로 보고하자 상이 기분이 좋지 않아 신하들에게 온당하지 않은 교지를 내리기도 하였으며, 전조가 주의해도 누차에 걸쳐 제수하는 명을 내리지 않았다. 이때 처윤이 바야흐로 첨지에 있었는데, 특별히 궐석으로 만들어 후익에게 제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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