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경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2월 2일 신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끝난 뒤에 약방 도제조 원두표가 나아가 아뢰기를,
"요즈음 근심스러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영상은 인피하여 들어앉은 지가 이미 여러 날째이고, 이조에는 판서만 있고, 양사에는 출사한 사람이 없는데, 호조 판서 정치화가 또 세 번째 상소를 올리고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태가 올라온 지가 이미 오래인데 그가 상소하여 아뢴 일은 아직도 여쭈어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 군정(軍政)도 정비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도 역시 수긍하였으나 단지 정치화를 패초할 것만 명하였다.
2월 3일 임인
사간 이정(李程)이, 응당 천거해야 하는데 천거하지 않은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5일 갑진
함경도 유생 한진원(韓晋遠)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종사(從祀)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2월 7일 병오
장령 이유가, 승지 안후열(安後說)은 준직(准職)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당상에 오른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여 후열의 체직을 논의하고자 대석(臺席)에서 발언하였다. 지평 심재(沈梓)가 아뢰기를,
"후열이 삼사를 출입하여 평소에 재능과 인망이 드러났으니, 발탁하여 후설에 둔 성상의 뜻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제 와서 굳이 논핵하고자 하는 것을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각자 인피하였다. 대사헌 유계(兪棨)가 아뢰기를,
"후열이 일시에 총애를 입어 발탁되었으니 굳이 쟁집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대각에서 법을 지키려는 논의는 항상 있는 법입니다. 함께 논의하여 논계(論啓)하려고 하였는데, 결국 의견이 일치되지 못했습니다."
하고, 지평 송창(宋昌)이 아뢰기를,
"준직을 거치지 않고 당상에 오른 것을 개정하려는 논의는 단지 법을 지키려는 것일 뿐입니다. 처음에 명이 내렸을 때에 미처 논계하지 않았다고 하여 때를 놓쳤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이 잘못하여 그리된 것입니다."
하고, 정언 이유상(李有相)이 아뢰기를,
"시기가 지나도록 논의하지 않은 책임은 신 역시 면하기 어려우니 처치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이진(李𥘼)이 아뢰기를,
"국조 이래 아장(亞長)이 준직을 거치지 않고 승지에 발탁되어 제수된 경우는 다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만 개정의 논의가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헌부가 기필코 후열을 논하여 개정하려는 것이 실로 옳은 일인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한 신은 하반(賀班)에 참여하지 않은 잘못이 있습니다."
하고, 집의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신 역시 하반에 참여하지 않은 잘못이 있으니 처치할 수 없습니다."
하고, 모두 인피하였다. 옥당이, 양사가 작은 일로 인해 소란스럽게 인피하여 대각의 체모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모두 체직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이익(李翊)을 부교리로, 정석(鄭晳)을 사간으로, 홍우원(洪宇遠)을 장령으로, 송시철(宋時喆)을 헌납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전남도 유생 한양오(韓養吳)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 이유상이 아뢰기를,
"고 상신(相臣) 오윤겸(吳允謙)이 평생 청렴, 근신했던 것은 이 나라 사람이면 다 아는 바인데, 그가 죽은 뒤에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어 자손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던 노비가 갑자기 내수사에 투속되어, 내수사가 관리를 파견하여 그 집에 마구 쳐들어가서 노비를 몰아 가버려, 자손으로 하여금 땔나무와 물도 마련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하였으니, 보고 들음에 놀라고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내수사 관원은 파직하고 노비는 유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내수사 관원을 잡아 가두고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여 밝힌 뒤에 처리하게 하였다.
2월 9일 무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약방 도제조 원두표가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랫동안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았습니다. 이유태 같은 산림의 처사는 여러 다른 신하와는 다른데, 불러온 뒤에 한 번도 면대하지 않으셨고, 상소하여 아뢴 일도 의정(議定)할 기약이 없으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 또한 상이 보위에 오르신 지 벌써 5년입니다만 일을 느슨하게 하여 치도(治道)에 발전이 없습니다. 유생의 상소에 대한 비답은 항상 며칠씩 경과되고 대간의 쟁론은 늘 거절당하여, 상하가 의욕을 잃어 다시 분발하고 진작하는 뜻이 없으니, 이러고서 다스려지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안경(安鏡)의 경우, 궁노를 숨겨주고, 조사하여 보고하기를 사실대로 하지 않은 죄가 있으니, 대간이 잡아들일 것을 청한 것은 참으로 합당합니다. 조원(曺瑗)의 일은 궁가와 관계되어 외방에서 들으면 반드시 석연치 못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두 문제 모두 흔쾌히 따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원은 참으로 죄가 있지만, 안경의 일을 대간이 쟁집하는 것은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원두표가 또 아뢰기를,
"신이 전에 이유태를 만났는데 그의 상소는 송시열·송준길 및 윤선거와 함께 상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거가 지금 일 때문에 근교에 있으니 관직을 제수하여 머무르게 하고 함께 의논에 참여하게 하소서. 사업(司業)을 제수한다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세상 일은 진정 참으면서 조금 기다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오늘날 여러 궁가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마치 종기가 곪아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당장 결단내지 않으면 독기가 더욱 깊어져 더욱 크게 화를 입을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가 되어 어찌 차마 그러한 것을 태연하게 보고 하루라도 빨리 적당한 조처를 내리지 않으십니까? 지금 여러 신하들이 궁가에 대해 애당초 누적된 원망과 깊은 노여움이 있어서 기필코 여러 궁가의 생업을 깎아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성명께서 천천히 따져보고 깊이 생각해 보신다면 끝내 변통하지 않을 수 없음이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참으로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한 번 결단을 내려 인심을 따르고 공론을 따르소서. 공법상 마땅히 금해야 할 것들, 예를 들면 시장 입안(柴場立案), 화전 절수(火田折受), 염분(鹽盆), 어전(漁箭) 따위를 일체 혁파하소서. 궁가의 경비는 다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요량하여 처리해서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경상(經常)의 법을 제정하소서.
또한 성상께서 뭇 신하들의 계발(啓發)을 말미암지도 않고 속론의 구속에도 끌리지 않고 홀로 결정을 내려 재야의 신하를 불러와 변통의 정치를 행하고자 하셨는데, 유태가 상경한 지 오래되었건만 아직 한 번도 접견하지 않으셨습니다. 떨어진 법제를 닦아 거행하고 쌓인 폐단을 정돈하는 일은 실로 등한히 여길 사업이 아니니 느린 걸음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성상은 이에 대해 스스로 노력해 나가지 않아서는 안 되며 대신이 인피하여 출사하지 않는 것도 성지(聖旨)로써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듣지 않았다.
2월 11일 경술
민응협(閔應恊)을 대사헌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윤개(尹塏)를 장령으로, 원만리(元萬里)·윤심(尹深)을 지평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집의로, 이관징(李觀徵)을 정언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윤순지(尹順之)을 판윤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사업으로, 이유상(李有相)을 부교리로 삼았다.
2월 12일 신해
지평 원만리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대사간 남용익은 도승지로 있으면서 주사(奏事)를 잘못한 실수가 있어 사림에 소문이 퍼졌는데도 그냥 있다가 유생의 상소로 배척을 받고나서야 비로소 인피하여 들어앉더니 곧 다시 출사하여, 사대부의 염치를 크게 잃었습니다. 용익을 바로잡아 탄핵하고자 대각에서 발언하였는데 동료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니, 이는 신이 가볍게 보인 소치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대개 용익이 정원에 있을 때,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하는 것은 알맞은 시기가 아니라고 하여 사론(士論)의 배척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집의 남구만, 장령 윤개, 지평 윤심 등이 아뢰기를,
"용익이 당시에 한 말은 애초에 ‘성상께서 다사(多士)를 우대하실 것’을 청하면서, 말하는 사이에 약간의 착오가 있음을 면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은 일시 말의 잘못에 불과합니다. 동료가 소급해서 탄핵하려고 하는데 신들은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습니다."
하고, 역시 인피하였다. 간원이 구만 등은 출사시키고 만리는 체직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2월 13일 임자
소현 세자(昭顯世子) 묘의 전사청(典祀廳)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북변 백성 강태립(姜太立)이 전에 국경을 넘어 삼을 캔 죄로 형벌을 받아 유배되었는데 그 후에 또 경원(慶源)에서 재차 국경을 넘다가 붙잡혔다. 도신이 계문하니, 국경에서 효시하게 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하였다. 우상 정유성이 아뢰기를,
"신은 연행(燕行)이 임박하였기에 부득이 무릅쓰고 나왔습니다. 곽제화(郭齊華)가 말 한 마디를 잘못하여 먼 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양사가 그 문제를 몇 달씩 쟁집하고 있으니 진실로 공론을 따라 흔쾌히 한 번 용서를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우상을 위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의 형편도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역량도 가늠해 보지 않은 채, 서필원(徐必遠)은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파는 형상이라고 함부로 말을 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니, 모두 신의 죄입니다."
하니, 교리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대신으로서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판다는 말을 하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온당하지 못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말하면 으레 과격하게 들추어내는 데에 가깝습니다. 일단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판다는 것으로 지목하면 그 누가 이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서필원의 일은 어느 누가 옳다고 하겠습니까마는, 만약 원로 대신을 기롱하고 배척했다는 죄목으로 분명하게 죄를 청한다면 참으로 옳은 일이지만,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판다는 등의 말을 함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사람을 빠뜨리는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들이 간쟁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상께서 오랫동안 편찮으시어, 신하를 접견하는 일이 드물고 온갖 일이 엉망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침에 참으로 통곡할 지경입니다. 이유태(李惟泰)가 서울에 올라온 지 오래되었건만 한 번도 인견하지 않으셨으니, 그가 상소하여 아뢴 일을 언제 의논해 정하겠습니까?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진작할 기약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이조 판서 홍명하가 아뢰기를,
"그 상소에는 크게 일리가 있으니, 시행할 수 있는지 헤아려 본 뒤에 차례차례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기 지방의 양전을 개정한 후에 신결(新結)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한 배는 못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등수가 너무 낮기 때문에 늘어난 수가 많지 않습니다."
하였다.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신은 이미 이럴 줄 알았습니다. 수령들은 모두 명예 구하기만을 일삼고 백성은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러한 기강으로 큰 일을 완성하고자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호남의 대동미를 줄일 것인지 줄이지 않을 것인지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혹은 줄여야 된다고 하고 혹은 줄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영상 역시 줄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은, 호남에서 13두를 거두는 것이 오히려 16두를 거두는 경기보다 가볍다는 것이다."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해마다 흉년으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여유가 있을 것을 안다면 어찌 급하지 않은 쌀을 재촉해 거두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생활도 꾸리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두표와 명하가 줄이는 것이 불편하다고 끝까지 주장하니, 상이 동조하였다.
살피건대, 대동법은 본래 조세를 균등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경기 12두, 호서 10두, 호남 13두는 균등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또한 대동법은 문성공 이이가 처음 제안한 것으로 당시에는 1결당 4두로 말했었고, 다음에는 고 상신 김육(金堉)이 호영(湖營)에 있으면서 계청(啓請)한 것으로 그때에는 1결당 쌀 2두, 목면 1필을 청했으며, 효종 초년에는 간원이 대동법의 시행을 청하면서 역시 3두를 청했으니, 백성들의 역량을 헤아리고 나라의 비용을 계산하여 반드시 짐작하고 헤아린 바가 있었다. 그런데 호서에 처음으로 설행하면서 갑자기 10두에 이른 것은, 대개 내포(內浦)가 임진난 때 병화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도의 조세까지 이 6, 7읍에 떠맡겨졌기 때문이니 공물(貢物)의 번중(煩重)함이 팔도의 으뜸이었다. 그런데 일을 담당한 신하가 천천히 따져보고 잘 처리해서 이것과 저것을 덜고 보태어 고통과 편안함을 균등하게 하지 못하고 단지 내포가 현재 부담하고 있는 조세에만 근거하여 세미(稅米)를 매겨 해당시키니 결코 대균(大均)의 뜻이 아니다. 심지어 경기 지방은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한데도 오히려 부세(賦稅)를 올리고, 호남은 공물이 적고 쌀이 많은데도 조절할 줄을 몰랐으니, 뒤바뀌고 어그러져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법제(法制)가 실추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만약 대대적으로 변통하여 균등하게 조절한다면 조세를 줄이고도 넉넉히 쓸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3두를 줄이고 안 줄이고를 어찌 의논할 것이 있겠는가.
해풍군(海豊君) 정효준(鄭孝俊)에게, 아들 다섯 명이 등과하였고 또 이때 나이가 86세인 것으로 초자(招資)를 명하고, 판돈녕부사 윤경(尹絅)에게, 나이 97세인 것으로 음식과 비단을 계속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경연 신하의 청을 따른 것이다.
2월 14일 계축
집의 남구만 등이 아뢰기를,
"신부가 시부모에게 드리는 음식물의 그릇 수는 본래 정해진 제도가 있고 요사이에 거듭 엄격하게 밝혔는데, 돈녕 도정 이정한(李挺漢)은 딸의 향례(饗禮)를 위하여 여복(女僕) 수십 명에게 음식을 들려 보내어 큰 길에 즐비하게 하였습니다. 정한은 귀근(貴近)의 집안으로 앞장서서 금법을 어겼으니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집의 남구만이 아뢰기를,
"예조가 유생의 합격자 명단이 잘못 기재된 문제로 지난해의 감시의 시관을 추고할 것을 계문하였는데, 신 역시 그 당시 시관의 한 사람입니다."
하며 인피하고, 사간 정석(鄭晳)도 이 일로 인피하니, 모두 체직하였다.
전남도 생원 안국재(安國宰) 등이 상소하기를,
"본도 함평현(咸平縣)의 성묘(聖廟)가 지난번 뜻밖의 변고를 만나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위판(位版)이 소실되었습니다. 도신이 치계하였는데, 해조가 회계하기를 ‘현에는 본래 무(廡)가 없으므로 본현의 향교에 동국 유현(東國儒賢)을 봉안(奉安)하는 것은 예가 아니니 위판은 다시 만들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해 보니, 주·부·군의 경우는 성전(聖殿) 안에 십철(十哲)을 종향(從享)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동국 유현을 봉안하며, 현의 경우는 무가 없기 때문에 성전 안에 송조 사현(宋朝四賢)과 동국 구현(東國九賢)을 봉안하는 것이 나라의 제도로 이미 정해져 있어 팔도가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도신의 계문 가운데 동벽(東壁)의 ‘벽’자를 ‘무(廡)’자로 썼기 때문에 해조가 본현의 향교에 무가 있는가 의심하여 이러한 방계(防啓)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팔방 열읍의 예에 의거하여 소실된 위판을 다시 만들어 내려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회계하기를,
"《대전속록(大典續錄)》의 예전(禮典)을 상고해 보니 제례조(祭禮條)에 ‘개성부와 여러 도의 계수관(界首官) 외에 주·부·군의 학교는 양무(兩廡) 제위(諸位)의 제사를 면제하고, 현의 학교는 전상(殿上) 십위(十位)의 제사를 면제한다. 오직 송조의 염계(濂溪) 주선생(周先生) , 명도(明道)·이천(伊川) 정선생(程先生), 회암(晦菴) 주선생(朱先生)과 신라의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는 주·부·군·현이 모두 다 제사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고려의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아조(我朝)의 5현신(賢臣)도 마땅히 한결같이 종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전속록》의 편찬은 성종조에 있었고, 6현신을 종사하는 일은 그후에 있어서 비록 《대전속록》에 함께 기재된 것은 아니나 현의 학교에서 우리 동국의 9현을 아울러 제사하는 것은 팔도가 모두 그러하니, 이는 반드시 조정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임의로 봉안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 일을 인하여 대신, 유신들과 의논하여 명백하게 결정을 내리소서."
하였다. 대신 정태화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대전속록》에 주·부·군·현이 모두 설총·최치원·안유를 제사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 나라의 유현을 존봉(尊奉)하는 것은 의의가 매우 큰 것입니다. 그후에 6현의 종사에 대해 비록 조정의 명령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마땅히 아울러 제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유신 송준길도 모두 제사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당초에 6현을 이미 종사한 뒤에 현의 학교도 모두 제사하도록 허락했는데 지금 여러 도의 현의 학교는 제사하는 곳도 있고 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군의 학교는 응당 전상 십위를 제사해야 하는데 그 역시 하는 곳도 있고 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계수관이 되는 주의 학교도 제사지내는 대상이 태학과 다른 곳이 있습니다. 막중한 사전(祀典)에 일정한 규칙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여러 도로 하여금 주·부·군·현에서 제사지내는 대상을 상세히 기록하여 모두 아뢰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상세하게 고쳐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대사헌 민응협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체직하였다.
2월 15일 갑인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번 사신 행차에 세폐(歲幣)가 좋지 못한 데다가 초피(貂皮)에 관한 금법을 어겨 사신이 아문(衙門)으로 불려가 반복하여 조사를 받았으니, 나라를 크게 욕보였습니다. 또 강상(江上)에서 검색할 때 애초에 엄중하게 금하지 않아서 금하는 물건을 몰래 가지고 가 팔다가 발각되기에 이르렀으니 매우 놀랄 만한 일입니다. 해조 당상을 추고하고, 그 낭청은 파직한 후에 추고하소서. 사신 여이재(呂爾載)·홍처대(洪處大)와 서장관 이단석(李端錫) 등도 파직한 후에 추고하고, 금법을 어긴 사람은 잠상법(潛商法)에 의거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따랐다.
월식이 있었다.
2월 18일 정사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사간으로, 남구만을 부응교로, 심재를 지평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집의로, 오시수(吳始壽)·이숙(李䎘)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헌납 송시철 등이 아뢰기를,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향곡의 사나운 백성이 관가에서 난동을 일으키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전 영덕 현령(盈德縣令) 심지엄(沈之淹)이 체직되어 돌아올 때 품관(品官) 몇 명이 무뢰배들과 한패가 되어 길을 막고서 욕설을 퍼부으며 욕을 보이고는 심지어 대낮에 칼을 빼들고 말 앞으로 뛰어들기까지 하였는데, 다행히 하인들에게 구조되어 겨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난동을 부린 이유는 비록 알 수 없으나 흉악한 습속은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도로 하여금 명백하게 조사하여 법에 따라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19일 무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 및 경기의 좌도 균전사와 우도 균전사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균전사는 문서를 가지고 왔는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문서가 없습니다."
하였고, 김시진이 아뢰기를,
"신이 맡은 우도는 평시에 전결이 7만 3천 결이었으나 병자난 후에 국가에서 세를 거두는 전결이 1만 8천 결이고 지금 측량하여 얻은 전결이 3만여 결쯤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4등전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시진이 아뢰기를,
"열읍의 토질이 같지 않기 때문에 3분(分)인 곳도 있고 4분인 곳도 있으며 1분인 곳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도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맡은 17읍은 한창 측량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으나 안성(安城)이 먼저 끝났는데 가장 정밀합니다."
하였다.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정축년003) 에 양안(量案)이 소실된 후에 전주(田主)로 하여금 직접 단자(單子)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원수(元數)가 전과 크게 다른 것입니다. 대개 이번 균전은 중대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각읍의 수령이 조정의 영을 따르지 않아서 초겨울에 시작했던 일을 아직도 마무리짓지 못했으니 이같이 하고서 큰 일을 완결지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균전사를 불러 보는 것은 수령의 부지런함과 나태함을 알아서 상과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
하였다. 시진이 아뢰기를,
"신들도 그 즉시 죄를 청하는 것이 당연함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수령들이 공공연히 말하기를 ‘백성에게 원망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파직되어 돌아가는 편이 더 낫다.’고 하니, 만약 파출시키면 바로 그들의 의도대로 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선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계문하여 죄를 청하려고 했습니다."
하고, 정중이 아뢰기를,
"당초에 수령의 근무 태도를 살펴보니 참으로 계문하여 논죄해야 할 자들이 있었으나 큰 일이 완결되기 전이라서 그들을 체직하고 초보자에게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태만한 자를 뽑아내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시진이 아뢰기를,
"일을 마치기 전이라서 사람마다 죄를 청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상의 분부가 이러하시니, 뽑아내어 죄를 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도와 우도에서 아주 심한 곳을 먼저 초계하라."
하였다.
2월 20일 기미
대사간 남용익이, 소명에 나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21일 경신
비변사가 아뢰기를,
"입암 산성(笠巖山城)의 군량미는 3만 3천 7백 석인데 작년에 봉납된 것이 겨우 반을 넘었습니다. 김제(金堤)·함열(咸悅)·만경(萬頃)·임피(臨陂) 4읍은 하나도 봉납하지 않았습니다. 작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 4읍에 재임한 수령을 영문(營門)으로 잡아들여 곤장을 치고 향소(鄕所)의 색리는 엄한 형벌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엄중하게 곤장을 친 뒤에 본성에 충군시키고 즉시 후임자를 뽑아 속히 내려보내어 가을까지 기한을 정하여 봉납하게 하였다.
2월 22일 신유
유창(兪瑒)을 승지로,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정석을 수찬으로 삼았다.
좌도 균전사 민정중이 전정(田政)이 더욱 심하게 어지러운 곳으로 양근(楊根)·과천(果川), 등수가 너무 완만한 곳으로 금천(衿川)·광주(廣州)·용인(龍仁)을 초계하였고, 우도 균전사 김시진은 양전을 전혀 두서없이 한 곳으로 양주(楊州), 분수(分數)가 명령한 것보다 못한 곳으로 장단(長湍)·풍덕(豊德)·교하(交河)·포천(抱川)을 초계하였다. 상이 이와 같이 일렀다.
"양근·과천·양주 3읍의 수령은 잡아다 추문하고, 장단·풍덕·교하·포천·금천·광주·용인 등의 수령은 모두 곤장을 쳐라."
정언 이관징(李觀徵)이, 대사간 이진이 숙부여서 상피에 해당된다는 이유로 인혐하여 체직되었다.
2월 23일 임술
송창(宋昌)을 정언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예조 참의로 삼았다.
사간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균전의 시행은 왕정(王政)의 중대한 일입니다. 균전이 잘 되면 백성이 그 은택을 받고 잘 되지 못하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습니다. 조정이 이미 등수가 적다는 이유로 수령을 벌하고 이어 등수를 개정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엄명이 내려짐에 주현(州縣)에서는 오직 명을 받들기에 급급하여 기한을 촉박하게 다그치고 자세히 조사할 겨를도 없이 반드시 많이 얻기에만 힘쓸 것이니, 성조(聖朝)의 균전하는 본래 의도를 크게 잃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토지의 기름지고 척박함과 넓고 좁음이 각기 다른데, 지금 전야(田野)에는 나가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장부만 살펴 정하려고 하니, 그렇게 되면 고하(高下)가 모두 그 차례를 잃고 감색(監色)이 간계한 꾀를 쓸 수 있게 되어 다만 백성의 원망을 부를 뿐입니다. 만약 들판에 직접 나가게 하여 타량(打量)할 때와 똑같이 하도록 하신다면, 이러한 춘궁기에는 수많은 비용을 백성이 반드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급히 명지(明旨)를 내려, 농번기에는 우선 정지하고, 가을에 추수를 마친 뒤에 수령으로 하여금 각기 감색을 거느리고 전야에 직접 나가 조사하여 공론을 채택하여 등수를 정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고하가 반드시 크게 어지러운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고 농민들 역시 편안히 농상에 힘쓸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과 균전청으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게 하시어 속히 결정을 내리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우승지 유창이 전에 정원에 있을 때 옛 법도를 굳게 지키지 못하고 한갓 명을 받드는 것만을 공경으로 여기고 심히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를 탄핵한 글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우승지로 제수된 것은 해조가 공론을 무시하고 감히 의망했기 때문이니 정사의 체모를 매우 잃었습니다. 유창을 체직하고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전에 유창이 승지로 있으면서 곽제화의 배사(拜辭) 단자를 봉입하니 대간이 왕명 출납의 의리를 잃었다 하여 탄핵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우승지의 제수가 있었으므로 간원이 탄핵한 것이다.
2월 24일 계해
비변사가 아뢰기를,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에 들어갈 때, 금하는 물품을 매매하여 잠상(潛商)의 사고를 일으켰으니, 그 당시에 만상(灣上)에서 검색했던 관원은 스스로 사신과 함께 죄를 청했어야 합니다. 의주 부윤 이인(李𡐔)을 서장관 이단석의 예에 따라 파직하고, 수행했던 수역(首譯)과 상통사(上通事)는 모두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대사간 이진 등이 아뢰기를,
"균전 한 가지 일로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 수령을 모두 결장(決杖)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광주 부윤 김수흥(金壽興)은 관직이 2품으로 일찍이 ‘경’이라 일컬으며 예우하던 사람인데, 지금 만약 유사에게 매질을 받는다면 자못 염폐(簾陛)를 삼가는 의리가 아닙니다. 결장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다시 마땅한 처벌을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차하기를,
"균전의 시행은 왕정에 있어서 그만둘 수 없는 일이나, 지금 이번의 양전은 처음에는 관대하였다가 끝에 와서는 가혹하고 각박해졌습니다. 명목은 균전이나 실상은 등수를 더하는 일이니 신의를 잃음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으며, 백성의 원망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들으니, 경기 지방의 크고 작은 읍의 수령이 죄를 얻은 자가 많은데, 또한 파직은 시키지 말고 결장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니,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곤장을 치고 다시 부임시키는 것에는 세 가지 크게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혹 나라를 잘 받들고 백성을 사랑하여 차마 등수를 더하지 못하였다가 이로 인해 죄를 얻은 자가 있다면 백성이 조정을 원망함이 더욱 심할 것이니 이것이 첫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엄명이 이와 같으면 다시 부임한 뒤에는 형세가 장차 전품(田品)을 논하지 않고 차례로 등수를 올릴 것입니다. 이는 차라리 옛날 그대로 1, 2, 3등으로 놔두는 것만 못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혹 지위가 낮지 않고 병민(兵民)을 겸하여 책임지고 있는 자를 군령(軍令)도 아닌 토지 문제로 결장한다면 대부 이상에게는 형벌하지 않는다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이러하니 결장하는 일은 우선 양전이 끝나는 것을 보고 나서 처리하라."
하였다.
2월 25일 갑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순창(脣瘡) 때문에 침을 맞았다.
식년의 감시(監試)에서 생원 이적(李積)과 진사 홍석보(洪碩普) 등 각 1백 명씩 뽑았다.
2월 26일 을축
부호군 이유태가 상소하기를,
"신이 보건대, 시세(時勢)가 쇠약해져서 점점 구제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간혹 개혁의 논의가 있다가도 일을 거행한 지 반도 안 되어 상황이 뒤바뀌고 처리를 잘못합니다. 비록 기보(畿輔)의 균전 한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애당초 조정의 논의는 반드시 휼민(恤民)에 역점을 두었고 사목(事目)의 강정(講定)도 등수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급기야 측량한 후에는 다시 결수가 많지 않음으로 혐의쩍게 여겨 도리어 엄한 책망을 내리고, 수령이 너그럽게 측량했다는 이유로 죄를 입기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그리도 당초에 강정한 본뜻과 크게 반대되어 마치 장사치들이 이익을 꾀하고 탐욕을 부리는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까. 심지어 등수를 올리라고 명하였으니 단지 백성에게 신의를 잃을 뿐만이 아닙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아마도 백성의 신의를 잃고 그로써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이 반드시 이로 말미암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균전 문제는 바로 신의 상소 가운데 한 조목으로, 무익할 뿐만 아니라 왕자(王者)의 애민 정치에도 해가 됩니다.
또 양사가 쟁집하고 있는 궁가의 면세를 혁파하는 문제는 상하가 끌고 당기며 시일을 끌어 해를 넘겼으니 성상의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 역시 신의 상소 가운데 한 조목이니 신이 이에 더욱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부르심은 애초에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려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왔고, 어리석은 신이 무릅쓰고 나아온 것도 역시 전하께 바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선 위의 몇 가지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신이 전에 조목지어 아뢴 일이 끝내 채택되어 시행될 실상이 없어 나라에서 하는 일이 형식적인 것이 될 듯하니, 신의 진퇴가 근거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또 모친의 병을 이유로 돌아갈 것을 극력 구했는데, 상이 위로하고 허락하지 않고, 남아서 면유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유태가 재차 상소하여 물러갈 것을 구했다.
2월 27일 병인
비변사가, 간원이 논쟁한 균전을 가을에 거행하자는 문제를 회의하고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의 의논은 모두 ‘지금 균전의 거행이, 측량하는 일은 이미 끝났고 등수를 미처 바로잡지 못한 곳은 약간 읍뿐이다. 균전사가 나가 순시하는 일이 비록 농번기에 방해되는 점이 있다고는 하나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시기에 도리어 멈추는 것은 일이 전도되는 것이다. 가을에 다시 거행하더라도 역시 자세하고 곡진함을 기필하기 어렵다. 그대로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는 의견입니다. 균전사 민정중·김시진도 ‘지금 당장 속히 마무리 짓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입니다.
신 두표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각읍의 수령이 조정의 본래 의도를 잘 알지 못하여 토품(土品)의 기름지고 척박함을 따르지 않고 5, 6등짜리를 4등으로 하기도 하고 4등짜리를 5, 6등으로 하기도 하여 백성의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 중외(中外)가 시끌시끌하니 그 균등하지 못함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균전사가 바야흐로 나가 순시하여 직접 보고 살피는데 그 기간이 늦을 것인지 빠를 것인지는 미리 알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여름 전에 일을 끝내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지금 춘분이 이미 지나 농사가 한창이니 대신(臺臣)이 농사철을 빼앗을까 염려 하는 것은 진실로 타당성이 있습니다. 천천히 농사가 뜸해지는 때를 기다려 자연스럽게 조사하여 하나하나 고쳐 바로잡는다면 아마도 마땅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다른 대신들에게 의논을 명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경기의 읍이 측량하는 일은 완전히 끝났는데 다만 등수를 모두 낮게 매겼기 때문에, 등수를 올려 매길 때에 다시 조사하느라 폐단을 끼치는 일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수령이 애당초 착실하게 직무를 거행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참작하여 논죄함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미 측량한 것을 모두 버리고 가을에 다시 거행하는 문제는 합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등수의 높낮이가 비록 균등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는 하나, 대체로는 고등인 것을 하등으로 한 것이지, 하등인 것을 고등으로 한 것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총괄하여 말씀드리면, 4, 5등도 역시 얼마 되지 않으니 너무 완만한 것이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가을을 기다린다 해도 결국 상세하고 곡진하게 잘 마무리 짓기를 기필할 수는 없으니 그때의 소요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측량을 마친 문서로 한결같이 현재의 형편을 따라 속히 개정하여 우선 시행하였다가 천천히 일의 형세를 살펴 자연스레 고쳐 측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영중추부사 이경석과 우상 정유성도 모두 가을까지 기다리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8일 정묘
청사(淸使) 두 사람이 황태후의 부고를 전하여 왔다. 이조 참판 박장원(朴長遠)을 승자(陞資)하여 원접사로 삼아 보냈다.
2월 29일 무진
김만기(金萬基)를 집의로, 김우형(金宇亨)을 의주 부윤으로, 원만석(元萬石)·조윤석(趙胤錫)·오정위(吳挺緯)를 승지로 삼았다.
어영청이 아뢰었다.
"본청의 신번군(新番軍)인 전부(前部) 소속의 경상 좌도병, 중부(中部) 우사(右司)의 십초병(十哨兵), 서울에 있는 각종의 군적에 들어 있는 자 총 1천 5백 48명과 황해도의 별마대(別馬隊) 45명을 구번(舊番)의 제군(諸軍)과 합하여 훈련한 뒤에 원래의 소속으로 돌려 보내게 하소서."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여러 의원으로 하여금 들어와 진료하게 하였다. 약방 도제조 원두표 등이 입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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