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기사
동지 정사 여이재(呂爾載), 부사 홍처대(洪處大), 서장관 이단석(李端錫) 등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그쪽 사정을 아뢰었다.
"청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운남(雲南)·귀주(貴州)·남경(南京)·서촉(西蜀)은 이미 모두 평정되었고, 오삼계(吳三桂)는 지금 귀주의 경계에 있다. 정지룡(鄭芝龍)·손완(孫莞)이 해도(海島)로 들어가 웅거하고서 항복을 요청했는데 청나라에서 오고 싶으면 오고, 오고 싶지 않으면 꼭 올 필요는 없다고 답변했다. 귀주의 백문선(白文先)이 이수창(李守昌)과 함께 수적(水賊)이 되어 영력(永曆)004) 에게 귀순했는데, 수창은 안남왕(安南王)이 되었다가 먼저 죽었고, 문선은 귀주왕이 되었는데 영력이 패한 후에 청병과의 전투에서 자주 패하여 버틸 수 없자 마침내 항복했다. 청나라에서 그를 공작에 봉했다.’ 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오는 길에 풍윤(豊潤)에 도착하여 글을 조금 할 줄 아는 한인(漢人)을 만나보았습니다. 그의 말이 ‘영력은 죽지 않았다. 아직도 남방을 보전하고 있다. 청인이 과장하여 말하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하였습니다."
3월 3일 신미
형조 판서 허적(許積)을 중로(中路)로 보내어, 상이 병환이 있어 교영(郊迎)할 수 없다는 뜻을 청나라 사신에게 전하였다.
민점(閔點)을 승지로, 유계(兪棨)를 이조 참판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예조 참의로, 권령(權玲)을 형조 참의로, 정만화(鄭萬和)를 판결사로, 맹주서(孟胄瑞)를 봉교로,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3월 4일 임신
상이 편전에 나아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도승지 권우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참포(黲袍)·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 차림으로 칙서를 받은 뒤에 거애(擧哀)하였고, 종신(從臣) 이하 백관들도 천담복(淺淡服)·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 차림으로 예를 행하였다. 이어 영접 도감의 관원과 역관들에게 명하여 모두 천담복을 입게 하였다. 3일에 청나라 사신이 관(館)에 도착하였는데, 연례(宴禮)를 받지 않았다. 떠날 때도 백관이 천담복 차림으로 전송하였다.
대사간 이진 등이 아뢰기를,
"양전은 지품(地品)을 균등하게 하고 민역(民役)을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이니, 오직 토지의 기름지고 척박함을 살펴서 등급을 공평하게 해야 되고 한갓 엄중하고 각박함을 숭상하여 결부(結負)를 늘리기에만 힘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2, 3등을 견감하여 4등을 제일 높은 등수로 한다는 의논이 있었던 것은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년 균전의 사목을 의논해 정하던 초기에, 성명(成命)에 의거하여 경기 지방에 반포하니 백성이 조정의 덕음(德音)을 흠모하고 앙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받들어 시행하면서 각읍의 수령이 득실이 같지 않아서 토지는 기름진데 결수가 적은 곳도 있고, 토지는 척박한데 등급이 높은 곳도 있습니다. 지금 측량을 다 마치고 나서 열읍의 신결(新結)을 통계해 보니 비록 구안(舊案)보다는 줄었으나 현행 결수의 꼭 배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날 근심은 바로 등수가 고르지 못한 데에 있지, 결수가 많지 않은 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구안보다 줄은 것을 혐의쩍게 여기고 또 등수를 올리자는 논의가 있고 심지어 많은 수령들이 벌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기필코 그 등수를 올려 늘리기에만 힘을 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 강정한 사목과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백성에게 신의를 잃고 나라에 원성이 돌아감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것이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등수를 올리는 일은 일의 성격상 논밭을 일일이 살펴 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토질의 기름지고 척박함을 따지지 않고 단지 이미 봉행하여 이루어 놓은 문서에만 의지하여 차례차례 올릴 따름일 것입니다. 그러하니 반드시 고르고 바르게 될 리가 없거니와 그 사이에 어찌 간사한 관리들이 때를 틈타 간계를 부리는 폐단이 없겠습니까. 지금의 방도는 일을 맡은 신하에게 특명을 내려 등수를 혼동하여 올리지 말고 그 중에 등수가 더욱 심하게 어긋난 곳에 나아가 순시하여 살펴서 바로잡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거의 민역의 경중이 대략 같게 되고 백성의 원망도 조금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살펴 조사할 때 오직 관대하고 공평하기에만 힘쓰고 등급을 올리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여 성상께서 역을 고르게 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바로잡아 고쳐야 할 것은 바로잡아 고치게 하라."
하였다. 다음날 또 아뢰기를,
"이번에 조사하여 바로잡는 일은 본래 등수를 낮게 매긴 것 때문에 발단된 것이고, 수령들이 이미 관대하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죄를 얻었으니 일을 맡은 자들이 겁을 먹고 잘못을 바로잡되 정도에 지나치는 잘못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백성의 원망이 있더라도 어찌 일일이 조사하고 분변하여 그 바름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백성의 소요는 실상 등수를 혼동하여 올린 데에 있는 것인데, 전날 내리신 비답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다시 좌도와 우도의 균전사로 하여금 단지 등수가 더욱 심하게 어긋난 곳에 나아가 순시하여 바로잡아 고치게 하되 절대로 등수를 혼동하여 올리지 말고 관대하고 공평함을 힘써 따르라는 뜻으로 지시를 분명하게 내려 시기에 미쳐 봉행할 수 있는 터전을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내린 비답에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3월 6일 갑술
강화(江華) 목장(牧場)을 개축하였다. 대개 무술년005) 에 다시 지은 것으로 이때에 이르러 말떼가 번식하였으므로 태복(太僕)이 담을 물려 쌓을 것을 계청한 것이다.
장령 윤개 등이 아뢰기를,
"한산 군수(韓山郡守) 서홍리(徐弘履)가 작년 봄에 진휼에 쓸 것이라는 구실로 교생(校生) 5, 6인에게 면강 체문(免講帖文)을 만들어 지급하고 심지어 면포 5백여 필을 바치게 하여 그것으로 이웃 고을의 구퇴선(舊退船)을 사들였는데, 온데간데가 없어,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이 자자합니다. 그 외에도 불법으로 한 일이 또한 많습니다. 그를 파직하고, 본도로 하여금 분명하게 조사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결어(結語)가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하니, 지평 심재, 장령 윤개·홍우원 등이, 잡아다 추문하여 정죄할 것을 곧바로 청하지 않고 단지 먼저 파직할 것만을 청하여 엄한 비답을 내리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7일 을해
형조 판서 허적과 호조 판서 정치화가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은화(銀貨)가 나지 않고 단지 단천(端川)에서 세공(歲貢)으로 바치는 1천 냥뿐입니다. 나라 안에서 사용하기에도 부족하므로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는데 요즈음 기강이 해이해져 금법을 범하는 자가 많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사신 행차에 일체 엄금하소서."
하니, 따랐다.
3월 9일 정축
청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왜총(倭銃)과 왜검(倭劒)을 각각 네 자루씩 구하여 가지고 갔다.
이유태(李惟泰)를 승지로, 나이준(羅以俊)을 장령으로, 윤심(尹深)을 지평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응교로, 오상(吳尙)을 장령으로, 유창(兪瑒)을 판결사로, 권우(權堣)를 강화 유수로, 원만리(元萬里)를 정언으로, 임의백(任義伯)을 도승지로, 정석(鄭晳)을 집의로 삼았다.
3월 10일 무인
진위정사(陳慰正使) 임의백을 가함(假銜)하여 보내야 하는데, 비변사가 의백이 오랫동안 서로(西路)에 있었으므로 작질(爵秩)과 성명이 관리자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모르는 자가 없다는 이유로 아뢰어, 체직하였다.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청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반열에 나오지 않아 대신이 추고를 청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12일 경진
대사간 이진이 교반(郊班)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김시진(金始振)을 대사간으로, 이익(李翊)을 부교리로, 정석을 부수찬으로, 이진을 병조 참의로, 민종도(閔宗道)를 검열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김만균(金萬均)을 사간으로, 조윤석(趙胤錫)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호남에 대동법을 설행하였다. 1결당 가을에 쌀 7말, 봄에 6말을 봉납하되 올 10월부터 신결(新結)에서 수확한 쌀을 봉납하여 내년 9월까지로 하였다.
본도는 임인년006) 의 시기전(時起田)이 19만 8백 55결인데 복호전(復戶田) 2만 1천 84결을 제하면 실결수는 16만 9천 7백 71결이다. 1결마다 13말을 거두면 14만 7천 1백 34석이 되는데 6만 1천 2백 80석은 상납하고 8만 5천 9백 16석은 본도에 유치(留置)하여 중외의 비용에 충당한다. 28사(司)의 【봉상시·기인(其人)·제용감·장흥고·의영고·풍저창·사포서·사도시·예빈시·공조·사축서·선공감·전설사·내섬시·전생서·내의원·혜민서·사재감·전의감·군기시·교서관·상의원·내자시·분봉상시(分奉常寺)·조지서·장원서·귀후서(歸厚署)·와서(瓦署).】 원공물(元貢物) 및 전세 조공물(田稅條貢物), 예조와 관상감의 각종 종이, 공조의 칠전(漆田) 전칠(全漆)과 기인 작지(其人作紙), 호조의 역가 작지(役價作紙), 각 관아의 경주인방자(京主人房子)의 고가(雇價), 조지서의 저전(楮田) 소출(所出), 장원서의 과원(果園)의 결실(結實), 비변사의 유지의(襦紙衣)와 세폐상차목(歲幣上次木)007) 내궁방의 부레풀[魚膠]과 정근(正筋), 탄일(誕日)과 삼명일(三名日) 【정조(正朝)·단오(端午)·동지(冬至).】 에 진상하는 갑옷·투구·말과 마장(馬裝), 사복시의 분양마(分養馬)와 마장에 대한 작지, 훈련 도감의 진사(眞絲)와 부레풀, 인수궁(仁壽宮)의 물선(物膳), 종묘에 천신(薦新)하는 고사리, 내의원의 우황·웅담(熊膽)·사향(麝香), 영접 도감의 경비(京婢)와 방자(房子)의 대가는 모두 쌀로 마련하는데, 본청에서 지급한다. 1년에 지급하는 수를 통계하면 5만 6천 8백 89석이다.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의 신조(新造)와 개삭(改槊), 본도의 정해진 삭선(朔膳)과 진상 방물, 내의원의 약재와 청대죽(靑大竹), 종묘에 천신하는 물선, 감사가 임지(任地)에 도착하여 진상하는 단오 선자(端午扇子), 내궁방(內弓房)의 유물(油物), 공조에서 진상하는 선자,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의 영수(營需)와 오영장(五營將) 및 군관(軍官)의 요미(料米), 각 관아에서 쓰이는 유청지지(油淸紙地), 사객(使客) 및 감사에게 지공(支供)하는 가교(駕轎)·모물(毛物)·종이, 석전제(釋奠祭)의 폐백과 우포(牛脯), 사직과 사액 서원의 폐백, 봄·가을로 군사 훈련할 때의 호궤(犒饋) 값, 경기전(慶基殿)의 제물(祭物)과 참봉(參奉)의 양찬(糧饌) 값, 월과(月課)·군량(軍糧)·군기(軍器) 값, 해운 판관(海運判官)의 지지가미(紙地價米)를 모두 계산하면 3만 7천 7백 32석인데 본도에 유치한 쌀로 충당한다.
그런 뒤에 8천 1백 84석이 남는데 이 남은 쌀로 1년 동안 드는 각종의 쇄마(刷馬)와 서울에 상납하는 미포(米布)의 운송비인 선가(船價)·마가(馬價)와 기타 별역(別役)에 책응(責應)하는 비용을 삼는다.
연해(沿海)의 읍은 쌀로 상납하고 산군(山郡)은 베로 환산하여 상납하는데 쌀은 먹을 수 있는 쌀로 하고 베는 다섯 새[五升] 35척(尺) 베로 한다. 풍흉을 가리지 않고 쌀 6말 5되에 베 1필로 환산한다. 각사(各司)의 공물가(貢物價)는 해읍과 산군을 가리지 않고 미포로 교급(交給)하여 풍흉에 조절하는 바탕을 삼는다. 아록전(衙祿田)·공수전(公須田)·위전(位田)의 3세(稅)도 본관에 정급(定給)한다. 관아에서 쓰는 마태(馬駄)와 인부(人夫)는 모두 대가를 치르고 사용하게 하여 말 한 마리, 인부 한 사람도 백성에게서 사사로이 차출하지 못하게 한다. 내외의 크고 작은 비용은 모두 선혜청에서 재량을 받고, 연말에 문서를 정리하여 대조 조사해서 남은 쌀이 있으면 회록(會錄)한다. 과외로 민력을 사용할 경우 연호(烟戶)를 반드시 아뢰어 분부를 받고 나서 쓰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는다. 삼공(三公)을 도제조로 삼고, 또 중신(重臣) 2명을 제조로 삼되 호조 판서는 예겸(例兼)한다. 호서의 대동법과 함께 선혜청에 합설(合設)한다.
집의 정석이, 감시(監試) 회시(會試)의 참시관(參試官)이 합격자 한기천(韓紀千)의 이름을 빠뜨리고 쓴 일로 이미 여러 시관이 대죄하고 있어서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13일 신사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영녕전(永寧殿)의 동서 익실(翼室)이 매우 좁아서 일찍이 개건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올봄에 봉심해 보니 서쪽 익실의 서북쪽의 주초(柱礎)와 계석(階石)이 모두 물러앉아 있었으니, 즉시 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좌우 익실도 이 기회에 개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개건하지 않을 수 없으나 위판(位版)을 어느 곳에 옮겨 봉안해야겠는가?"
하자,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비어 있는 전각에 옮겨 봉안하는 것이 마땅할 듯싶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만약 대대적으로 개조하게 되면 감역관만으로는 감독이 불가능한 것이니 삼당상(三堂上)을 차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우상 정유성이 아뢰기를,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영녕전 수개 도감(修改都監)이라고 명칭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오상이 한산 군수 서홍리를 잡아다 추문하여 정죄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진사 한기천의 이름을 방목에 빠뜨린 일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담당 관원과 감시관을 파직하고 그 나머지 시관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동부승지 이유태가 상소하여 체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들어오게 하였으며, 또 정원으로 하여금 전례에 의거하여 패초하게 하였다. 유태가 여전히 극력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3월 14일 임오
영녕전 수개 도감을 설치하고 영부사 이경석을 도제조로, 호조 판서 정치화, 예조 판서 김수항, 공조 판서 이완을 제조로 삼았다.
3월 15일 계미
조복양(趙復陽)을 우윤으로, 여성제(呂聖齊)를 교리로 삼았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상차하기를,
"승지 이유태가 패초에 나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고를 받았으니 아마도 현자를 대우하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처음에 유태가 승지로서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으므로 정원이 전례대로 추고를 청했다가 이윽고 도로 취소하였는데, 명하가 상차하여 논한 것이다.
집의 오두인이, 괴원(槐院)의 포폄하는 자리에 불참하여 하고(下考)에 해당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16일 갑신
지평 박세당이 아뢰기를,
"도승지 임의백은 본래 훌륭한 자질이 없으면서 지나치게 중한 발탁을 입었습니다. 전에 관서 관찰사로 있을 때에도 처리한 일이 사리에 맞지 않았을 뿐더러, 후사(喉司)의 장으로는 인망에 맞지 않으니 의백을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약삭빠른 뒤에 직책에 맞을 수 있다면 노둔하고 질박한 사람은 버리고 쓰지 말란 말인가?"
하였다. 다음날 지평 박세당 등이 또 아뢰기를,
"의백의 사람됨을 온 조정이 다 아는 바입니다. 만약 그를 질박하고 꾸밈이 적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기신다면 아마도 성상께서 잘 살피지 못한 데가 있는 듯싶습니다. 대개 의백은 조급히 진출하면서도 수치심이 없고 날마다 요직을 추구하여 마침내 현사(顯仕)에 이르렀고 오로지 사기와 속임수에만 힘써 하는 일마다 괴이하고 황탄합니다. 후사의 장에 어찌 의백 같은 비부(鄙夫)를 외람되게 처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굳이 체차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7일 을유
윤개를 장령으로, 김만기를 집의로, 이단하(李端夏)를 지평으로, 이진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8일 병술
달무리가 목성을 감쌌다.
식년 문과 무과의 복시(覆試)를 설행하였다.
집의 김만기가 아뢰기를,
"신은(新恩)의 문희연(聞喜宴)은 조신(朝紳)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병조 판서 김좌명이 술에 취하여 좌중에 욕을 하고, 경재(卿宰)를 능멸하여 크게 예법을 잃었으니 좌명을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그때에 이조 판서 홍명하의 아들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연회를 베풀자 좌명이 예조 판서 김수항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좌명이 수항의 나이가 어린 것을 가지고 농담을 하였기 때문이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영릉(英陵)의 사초를 개사(改莎)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문제로 상차하기를,
"신이 듣건대, 본조의 여러 능침(陵寢) 가운데 유독 건원릉(健元陵)과 영릉(英陵)에 사용한 사초가 보통과 달랐는데 그 때문에 처음 봉분하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개사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신이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영릉을 봉심하였는데 능위의 사초가 이삭이 나오고 꽃이 활짝 피어 보통 사초와 같지 않았으며 큰 것은 3척 가까이 되었으니 속칭 속사초(束莎草)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조 때에 개사하려고 했었는데, 백년토록 개사하지 않은 사초를 일시적인 소견으로 갑자기 개사하는 것이 중대하고도 어려운 문제라고 여겨 그대로 놔두고 개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개사를 하려 하니 신의 마음에 석연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는 명을 내리고 다시 봉심하게 하였다. 그후에 마침내 개사하였다.
대사간 김시진이 균전사로서 열읍에 나가 순시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서필원(徐必遠)을 대사간으로, 정익(鄭榏)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3월 20일 무자
대사간 서필원이 추고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이조 참판 유계가 병으로 사직하고 아뢰기를,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지금 4년이 되었습니다만 위로는 천심(天心)이 즐겁지 않아 홍수와 가뭄이 잇따라 계속되고, 아래로는 세도(世道)가 더욱 쇠퇴하여 와언(訛言)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청명하고 강대한 기상은 날로 사라지고 안일하고 고식적인 습관은 점점 자라나니 이것이 충심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개탄하고 안타까워하는 까닭입니다.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선왕이 이미 이루어 놓은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단지 하는 일 없이 팔짱끼고 세월만 보내도 되는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세상 일이란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정돈하지 않으면 어지러워지는 법입니다. 신은 앞으로 염려스럽고 근심스러운 단서가 날로 증가하고 달로 보태져 단지 오늘의 정도에 그칠 뿐이 아닐까 근심스럽습니다.
송시열 등은 선조(先朝)의 세상에 드문 대우를 받았습니다. 비록 세로(世路)가 궁박하고 막히어 감히 조정에 몸을 편안히 하지는 못했으나 전날 연명하여 올린 상소는 임금을 보좌하는 지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은 단지 온유(溫諭)만 내리시고 끝내 한 가지 일도 윤허함이 없으셨으니 아마도 막힘없이 간언을 받아들이는 성의(盛意)가 아닌 듯합니다.
이유태가 올린 상소의 내용은 모두 옛 현인이 강론한 것이요 국전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비록 예와 지금이 마땅함을 달리하나 간혹 손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성상께서 부르신 것도 이 때문이요 유태가 감히 나아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곧 한 번 모여서 가부를 의논하여 시행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정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는데 아직도 지시를 내리지 않으시니 많고 많은 말들이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장차 의견을 올린 자들이 의견낸 것을 후회하고 부름에 달려온 자들이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니, 이것을 어찌 원근에 알려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단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고만 하였다.
진하 겸 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 정유성과 부사 이만(李曼), 서장관 박승건(朴承健)이 청나라로 갔다.
지평 박세당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시소(試所)에 있으면서 임의백을 논핵한 소장을 보니 본래의 내용은 모두 삭제하고 별도로 상당의 말을 지어 넣었으며 그 반절은 또한 의백을 칭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은 경악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신이 논한 것은 모두 의백의 실상이거니와 만약 과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대각(臺閣)의 직분에 있는 자가 마땅히 그 시비를 분변하여 비록 신을 탄핵하여도 괜찮을 것이요, 혹 의견이 맞지 않아서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으면 역시 인피하여 물의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못하여 그만두고 싶으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반은 칭찬하고 반은 칭찬하지 않으며 구차한 말을 만들어 내어 힘써 따르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 의백의 처지를 위한 배려는 자상하다고 하겠으나 결국 자신이 옳지 못한 입장에 떨어진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의백이 명관을 곡진하게 섬겨 이에 이를 수 있었으니 동료의 이번 일은 참으로 괴이할 것이 없거니와 신은 몹시 경시를 당하였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지평 이단하가 아뢰기를,
"임의백이 비록 도량이 크고 민첩하다는 칭송은 있으나 본래 청렴하고 검소함이 부족하여 평소의 명망이 물정에 흡족하지 못합니다."
하고, 이어 의백의 체차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각의 논의는 비록 준절함을 귀하게 여기나 그 표현이 정도에 지나쳐 노여움을 옮겨 공격하여 꾸짖고 욕하였으니, 또한 심히 중정 화평(中正和平)한 도리에 어긋난 점이 있습니다. 세당을 체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집의 김만기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그 날 동료들이 모두 시소에 들어가 신이 성상소(城上所)를 대행하면서 임의백의 체직을 청한 전계(前啓)를 가져와 내용을 보니 허물과 악행을 낱낱이 지적하여 비부라고 지목하기까지 했습니다. 과연 이 말과 같다면 마땅히 그 정상(情狀)을 지척하여 그로 하여금 조정의 항열에 서지 못하게 해야 옳을 것입니다. 만약 체직시킬 뿐이라면 어찌 이러한 죄명을 씌울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힘써 참혹하게 실상에 지나치는 논박을 했으니, 신이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어찌 동료의 뜻을 비판없이 따라 전계의 내용을 그대로 쓰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은대(銀臺)의 장은 그 지위와 명망이 청렴, 준절한 것이므로 알맞은 그릇이 아닌 사람을 쓰면 물정에 흡족하지 못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로 고쳐서 아뢴 것이니, 이는 사람을 논함에 중도를 얻고자 하는 뜻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어찌 일찍이 의백의 처지를 위함이 있었겠습니까. 동료가 신과 서로 만나 다시 의논해보지도 않고 장황하게 인피하면서 신을 꾸짖고 욕하여 신이 그러한 욕설을 들었으니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고, 장령 오상이 내용을 삭제하고 고치는 일에 집의와 함께 동참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체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도록 하였는데, 장령 윤개가 처치하여 모두 체직할 것을 계청하니, 따랐다.
3월 22일 경인
이은상을 대사간으로, 이민서(李敏敍)를 지평으로, 홍처후(洪處厚)를 병조 참지로 삼았다.
부호군 이유태가 오랫동안 경저(京邸)에 머물러 있었는데, 음식을 계속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정언 원만리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어제 헌부의 처치로 박세당이 체직된 것은 진실로 개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대각이 일을 논함은 차라리 격렬할지언정 무르게 해서는 안 되는데, 속으로는 가리고 비호하면서 겉으로는 화평을 빌리는 것이 오늘날의 폐습입니다. 더구나 이미 그 의견을 쓰고 도리어 발론한 사람을 체직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오늘 헌부의 처치한 관원의 체직 문제를 발론하였으나 동료의 의견이 같지 않아 끝내 일치되지 못하였습니다. 동료에게 가볍게 보였으니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고, 정언 송창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임의백이 갑자기 후설의 장관이 된 것은 과연 중망(衆望)에 맞지 않으니 박세당의 논핵은 옳습니다. 다만 세당이 인피하면서 한 말은 화평함을 크게 잃었고 심지어 ‘의백이 평소에 명관을 곡진하게 섬겼으므로 동료의 이번 일은 참으로 괴이할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김만기가 서로 의논해보지도 않고 내용을 삭제해 버린 것은 비록 옳지는 않으나 체례상 착오를 빚은 실수에 불과합니다. 어찌 꾸짖고 욕하기를 이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각이 일을 논함이 비록 준절함을 귀하게 여기나 동료에게 노여움을 옮겨 지나치게 공격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한 가지 일에 나아가서도 역시 시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체직되었으나 그 의견이 취할 만하다면 이어서 연계하는 것이 또한 절충하는 논의에 무방하거늘 어찌 이 때문에 탄핵까지 해야 하겠습니까.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헌납 송시철이 아뢰기를,
"이단하가 그 의견을 쓰면서 그 사람의 체직을 청한 것은 자못 일을 논하는 체모가 아니니, 바로잡고자 하는 것은 마땅함을 얻었다고 할 수 있거니와 여러 차례 의견을 주고받아도 끝내 일치되지 못한 것은 그 책임이 돌아갈 데가 있습니다. 만리는 출사하게 하고 송창은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3일 신묘
서필원(徐必遠)을 예조 참의로, 윤심(尹深)을 정언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이민적을 집의로, 박정(朴烶)을 장령으로 삼았다.
3월 24일 임진
집의 이민적이 교반에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한 추감(推勘)이 결말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25일 계사
정언 원만리가 아뢰기를,
"박세당이 논한 것은 실로 공론을 따른 것이었는데, 그 내용의 지나친 부분만 따내어 저지 억제하는 바탕으로 삼았으며 마침내 그 의견은 쓰면서 그 사람은 배척하기에 이르렀으니, 시비가 전도된 것입니다. 지평 이단하를 체차하소서. 장령 윤개가 오상을 처치하면서 쓴 말은 지극히 구차합니다. ‘시비야 어떻든 간에 같이 일한 사람이 이미 체직되었다.’라는 말을 하였으니, 다시는 시비를 중대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윤개를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부호군 이유태를 인견하였다. 상이 유태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에 건의한 것이 많았는데,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달라 갑자기 변통하기가 어려워 그대와 함께 상의하고자 하여 불렀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의 병환이 계속되고 대신도 역시 병이 많았기 때문에 미루고 미루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대가 이제 모친의 병으로 사직하고 떠나려 하니 형편상 억지로 붙잡기는 어려우나, 한 번 만나보고 이별하려고 하였다."
하니, 유태가 아뢰기를,
"신은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니 아뢴 것이 어찌 시의(時宜)에 합당하겠습니까마는 모두 옛 현인의 말씀이요 신의 억견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 감히 반드시 시행될 것을 바라겠습니까. 오직 성명과 묘당이 채택하여 시행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늘날 국사는 이미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쌓인 폐단이 모두 문제를 발생하고 백성의 원망이 떼를 지어 일어나니, 만약 지금 당장 고치지 않는다면 끝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죽기를 무릅쓰고 상소한 까닭이니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하께서 비록 백성의 일을 근심하시더라도 궁벽한 마을과 오막살이 집 아래의 고통과 원망의 실상을 어찌 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병폐의 큰 것으로는 여러 궁가에서 장원을 설치하는 것이 제일 크건만, 대간이 혁파할 것을 청한 지가 지금 이미 수개월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각 아문의 둔전(屯田)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엄중하게 금해야 합니다. 만약 일체 혁파하여 여러 궁가는 직전(職田)의 예에 의하고, 각 아문은 서울의 대동법에 의하여 모두 면세의 규례를 제거한다면 폐단을 없애고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궁가의 폐단이 비록 이와 같으나 내가 처치한 것은 본래 무심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많은 신하들이 나보고 치우치고 사사롭다고 말을 하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의심을 하는가?"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각이 굽히지 않고 힘써 간쟁하는 것은 나라에 마음을 다하려는 것입니다. 어찌 자기 몸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논의해야 할 일이 많은데도 한 가지도 거론하지 않고 매양 궁가의 일만 말을 하니, 이것이 내가 불쾌한 까닭이다. 또 조원(曺瑗)에 관한 일을 두고 조정 신하들은 내가 그 사이에 뜻을 두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비록 이와 같으나 전하께서 대체로 형옥에 관여함에 있어 힘써 관대하고 용서하는 쪽을 따르시다가 일이 궁가에 관계되면 기필코 중법으로 다스리려고 하시니 이것이 인심이 불평하고 의혹하는 까닭입니다. 또 천하의 모든 일은 모두 임금의 마음 하나에 근본하는 것이니 학문하는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거늘, 보위에 오르신 이후로 오랫동안 경연을 폐하셨습니다. 비록 옥후가 편치 않아 전례대로 경연을 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으나 와내(臥內)에서 인접하시어 치도(治道)를 강론하신다면 어찌 도움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질 때문에 경연을 열 수가 없었다."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인접하지 않으면 어떻게 신하들의 현부(賢否)를 알겠으며, 강론하지 않으면 어떻게 고금의 치란(治亂)을 알겠습니까. 전하께서 제왕의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고 먼저 세속의 글을 익히시니 대본달도(大本達道)에 오히려 허전한 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전하는 인후(仁厚)한 성품은 넉넉하지만 강대함과 결단성은 부족하니 반드시 분발하여 떨쳐 힘쓴 연후에야 일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경기 지방에 대한 양전으로 백성의 원망을 크게 초래하였으니 거두는 쌀을 반드시 호서의 10두와 같게 한 뒤에야 백성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처음에는 등수를 감하였다가 나중에 가서는 등수를 올렸으니 이 때문에 백성의 원망이 더욱 심한 것입니다. 6등으로 올린 것은 모두 출급(出給)하여 덕의(德意)를 보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균전사도 소환하였다가 가을에 추수가 끝난 뒤에 다시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농사가 한창인 시기에 균전사가 논밭 사이를 드나들면 백성이 농사짓는 시기를 잃을까 염려되니, 소환하는 일에 대해 묘당에 의논하라."
하였다. 그후에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균전사가 이미 열읍을 순시하여 지난 곳 중에는 또한 조사하고 분변하여 원망을 풀어준 곳도 없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중간에 그만두고 소환한다면 일의 시행이 어긋날 뿐만 아니라 고르지 못함에 대한 근심이 아마도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지금 꼭 읍마다 순시하여 살필 필요는 없으니 단지 그 가운데 가장 의심스러운 곳에 나아가서 대략 조사하여 바로잡되 추생(抽栍)하여 적간(摘奸)하듯이 하여 속히 완결짓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3월 26일 갑오
부응교 남구만, 부교리 이유상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옛날의 어진 임금이 일을 계획하여 일으킬 때는 반드시 분발하여 떨쳐 힘써야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모든 일들이 흐지부지합니다. 이유태의 경우 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며 그가 올린 의견도 마땅한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를 불러놓고 끝내 예우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의견도 쓰지 않았으니, 신은 재야에 있는 선비들이 모두 해이해질까 염려스럽습니다. 그의 의견을 비록 일일이 다 따를 수는 없더라도 대신에게 자문하여 그 쉽고 어려운 것을 의논하여 실행 가능한 것을 시행한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비록 시골로 내려갔지만 그의 의견이 쓸 만하다면 어찌 끝내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근래에 삼사가 쟁집하고 있는 일을 오늘에 이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신은 성상의 의중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날 양사의 상소에 내린 비답에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고 그 외에 다른 뜻은 없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궁가는 비록 전결의 세를 면제하지 않고, 산과 바다를 절수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빈궁함에는 이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곳곳에 장원을 설치하고 산과 못을 빙 둘러 차지하여 횡점하고 침탈하기를 끝없이 하여 마침내 백성으로 하여금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하였습니다. 민심이 이미 흩어져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다면 저 궁가가 또한 어찌 홀로 부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여러 대신들과 함께 논의하여 5백 결로 정한 것이거늘 그후에 또 논의가 소란하니, 내가 어찌 정해진 수를 기필하여 스스로 사람들의 비난을 취하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혹시 자전의 뜻이 가로막아 전하께서 임의로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신하가 말씀을 잘 드려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해서입니까? 그러해서가 아니라면 필시 이는 전하께서 치우치게 사사로움에 얽매인 점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뜻이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에 잘 마무리되었는데 박세견의 논의가 온당하지 못하고 격렬하여 다시 결수가 너무 많다고 말하니 내가 어찌 정해진 수를 기필하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대각의 신하가 간쟁하는 바 후사를 잇는 문제는 비록 사소한 일 같지만 관계된 바는 매우 중대합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허락하지 않으시니, 밖에서는 간혹 전하께서 청평위(靑平尉) 때문에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청평위로 하여금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더라도 결단코 이 때문에 사사로움에 이끌려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그 형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헌부가 궁가의 면세를 혁파할 것을 청한 계문에서 그 말단에 해택(海澤)·산전(山田) 중에 주인이 없는 것이라고 칭탁하고 민전(民田)을 빼앗아 차지한 것을 혁파하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난달 20일 후에 연계하는 대관이 버젓이 빠뜨렸으니, 태만하여 제대로 살피지 않고 주사(奏事)를 불성실하게 한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삭제한 대관을 가려내어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도승지 임의백은 형세상 재직이 어려우니 체차하라."
하였다.
오정일(吳挺一)을 도승지로, 서필원·이은상·조윤석을 승지로, 정석을 집의로, 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남용익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7일 을미
지평 홍만용, 집의 정석, 대사간 남용익이 모두 추함(推緘)을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장계하기를,
"내수사는 백사(百司)에 들어 있지 않으므로 공문(公文)을 직접 시달할 수 없고 반드시 관문(關文)이 이조를 거쳐야 하는 것은 실로 조종조의 법입니다. 근래에 내수사가 각읍에 직접 관문을 보내고 지금 또 감사에게 직접 신칙하기까지 했는데, 일의 체모에 관계된 일이라 옛 법을 바꾸어 새로운 예(例)를 멋대로 만들도록 맡겨둘 수 없습니다. 지금 내수사의 공문서를 이조로 싸보내고 사유를 갖추어 이문(移文)하였으니, 이 기회에 옛 전례를 밝혀, 직접 관문을 보내거나 직접 신칙하는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장계를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아뢰기를,
"상진이 제대로 안 것이니, 해당 관원을 추고하고 해당 관리를 잡아 가두며, 직접 보낸 관문은 시행하지 말라는 뜻을 각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9일 정유
서리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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