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무술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최상익(崔商翼)을 주서로, 김휘(金徽)를 호조 참판으로, 이행진(李行進)을 병조 참판으로, 오정위(吳挺緯)를 호조 참의로, 강백년(姜栢年)을 예조 참의로, 정석(鄭晳)을 부수찬으로, 이세익(李世翊)을 지평으로,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이민적(李敏迪)을 응교로, 홍우원(洪宇遠)을 수찬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부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지난번 인대했을 적에, 후사(後嗣)를 세워 계통을 잇게 한 뒤에 자기가 낳은 자식으로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잘못에 대해 말씀드리고 속히 대신(臺臣)의 청을 윤허해 주시라고 감히 청했는데, 상께서는 해조에 특별히 명하여 인조조의 수교(受敎)를 베껴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해조의 전적이 전쟁통에 모두 없어져 끝내 조사해서 아뢰지 못하였으므로 성스런 선왕조의 법령을 징험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신이 고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편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를 살펴보건대, 후사를 세운 뒤에 자기가 낳은 자식은 어떻게 하느냐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답한 내용에, 제갈량(諸葛亮)·하순(賀循)·호안국(胡安國) 등 여러 사람의 일을 인용해 증명하고, 또 국조 가정(嘉靖)계축년008) 의 수교를 인용해 호안국의 의논이 옳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생의 아들이 그 아래에 집주(集註)를 내면서 인조조 때 최명길(崔鳴吉)이 청한 일을 인용하고, 그 끝에 ‘선군께서 세상을 떠난 뒤에 있었던 일이지만 수교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첨부해 둔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한 책이 없어진 전적을 보충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올린 이 책자를 보니, 나는 오늘 인용해 증명한 뜻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대체로 상의 생각에는 인조가 최명길이 청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허락한 것이지 후세에 법을 삼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는데, 대각의 계사에 범연히 수교라고만 칭하여 또한 규식으로 정해 통행하는 일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해조로 하여금 그 수교를 찾아 올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끝내 찾지 못했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니, 좌승지 원만석(元萬石) 등이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였고, 응교 남구만과 지평 원만리(元萬里)도 함께 입시하였다.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정석(鄭晳) 5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자 해조에서 법전에 따라 해마다 그의 아비에게 쌀 다섯 섬을 지급하고, 원식(元植) 6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자 그의 어머니에게 해마다 쌀 석 섬을 지급하였는데, 차등을 두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똑같이 쌀을 주게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간원이 인조조 수교를 가지고 다투어 고집을 하는데 끝내 전적을 찾아내지 못하였으니, 인피를 하여야 할 것이다. 태연히 그 자리에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는데, 그뒤에 간관들이 모두 인피하였다. 헌부에서 모두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자, 따랐다.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기를,
"월국공(越國公) 이통(李侗)은 위로 정자(程子)가 전한 학문을 이어받고, 아래로 주자(朱子)의 학문에 실마리를 열어주었으니, 전해받고 전해준 연원이 실로 매우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묘(文廟)의 양무(兩廡)에 종사되는 대열에 참여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국가와 유림의 막중한 흠전(欠典)입니다. 신이 마침 《명사(明史)》를 살펴보니, 성화(成化)009) 연간에 좌사부(左司副) 주목(周木)이 상주하여 이통에게 봉작(封爵)을 더해주고 공자(孔子)의 사당에다 제사지내기를 청하였습니다. 명나라 중엽에야 비로소 이런 의논이 있었으니 늦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의논은 늦은 중에 더욱 늦었습니다만, 구구하게 이르고 늦은 것을 무어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여러 공경 대부와 예관·유신들에게 물어 문묘에 올려 제사지내는 예를 속히 의논하셔서 도학(道學)의 연원을 밝히소서. 요즘 유생들이 진달한 두 어진 신하를 【이이(李珥)·성혼(成渾).】 종사하자는 청은 실로 사림의 공적이고 공평한 의논이니, 의심을 하여 뭇 사람들의 바람을 막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예조에 내리자 예조가 대신과 유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과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오늘날 유신들의 말은 도에 관계된 것이니,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주목이 청한 것이 과연 시행되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오직 예관이 고찰해서 아뢰어 정하는 데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연평(延坪) 이통의 도학이 아직도 사전(祀典)이 결여되어 있어서, 유신이 이른바 올려 제사지내는 데에 대해 속히 의논해야 한다는 것은 실로 선유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지극한 뜻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고,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아뢰기를,
"월국공의 사전은 사문(斯文)의 중대한 일입니다. 이미 주부자(朱夫子)가 정해 놓은 것으로서 《대전(大全)》 및 《어류(語類)》 등의 책에 실려 있으니 다른 설은 용납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영중추부사와 영의정의 의논을 쓰게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가정(嘉靖)010) 연간에 서자(庶子) 동승서(董承敍)가 또 연평이 종사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의논을 드리었으니, 주목의 말이 인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승서가 의논을 드린 뒤에도 시행되었다는 문구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잠시 그만두게 하였다.
4월 3일 경자
대마도(對馬島)에 화재가 나서 동래 부사로 하여금 본도(本島)에 쌀 3백 석을 하사하게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인견한 것은 영녕전(永寧殿)을 개축하는 일을 의논해 정하고자 해서이다. 도감이 진달한 도형 중에서 첫번째는 영녕전 4칸에 6칸을 연달아 지어 그대로 익실(翼室)을 설치하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 제도를 그대로 따라서 하되 익실의 기둥 사이를 조금 더 길게 하여 앞으로 공사를 할 적에 주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익실의 기둥 사이를 길게 한 뒤에 앞뒤 툇마루를 덧붙여 짓자는 것이다. 이중에서 어느 쪽으로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하니, 영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영녕전은 곧 송나라 영경전(永慶殿)과 같이 좌우에 익실을 두었습니다. 이번 개축할 때에 익실을 덧붙여 지어 천묘(遷廟)할 신주를 봉안하는 것이 옛 제도에 가까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두 묘(廟) 사이에 혐의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당초에 영녕전은 정실(正室) 4칸을 지어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4조를 봉안하였는데, 그뒤에 천묘한 신주를 봉안하기 위해 좌우에 익실을 둔 것입니다. 지금 만약 정실을 덧붙여 지어 통틀어 10칸으로 만든다면 그 제도가 종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두 묘가 서로 엇비슷한 혐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인조조 에 익실이 부족하였는데 옛 제도를 그대로 따라 오늘날까지 이른 것은 선왕의 의도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에 와서 변경한다는 것은 예에 온당치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종묘의 제도는 당초엔 5칸뿐이었는데 지금은 10칸이나 되었다. 지금 영녕전에 정실을 덧붙여 짓는 것도 시세에 따라 마땅하게 조절하면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얕은 소견으로는 익실은 애당초 천묘한 신주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뒤로 세대가 오래 내려오다 보니 정실이 부족하기 때문에 익실에 봉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옛 말에도 시조의 협실(夾室)에다 천묘한 신주를 봉안한다는 말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예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성상께서 뭇 사람의 의논을 널리 물어 마땅하게 조처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영부사 가 정실을 덧붙여 짓는 것이 혐의쩍다고 한 것은 그 뜻이 대체로 익실에다 천묘한 신주를 봉안하면, 시조의 협실에다 천묘한 신주를 봉안한다는 고례의 뜻에 가깝기 때문에 옛 제도를 뜯어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소견으로는 좌우의 익실을 헐어버리고 본전(本殿)의 제도에 따라 동·서에다 각각 3 칸을 덧붙여 지어 통틀어 10실을 만들고 사조(四祖) 이하를 봉안하되 서쪽으로 위를 삼는 것이 좋겠다. 비록 밖에 있는 유신에게 물어보더라도 반드시 고묘(古廟)의 제도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니, 이는 오늘날 쓰기 어려울 듯하다. 물어 보고 쓰지 않는 것보다는 묻지 않는 것이 더 낫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모든 일은 충분히 강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종묘는 사체가 지극히 중요하니 밖에 있는 유신들에게 물어 보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실을 덧붙여 지으면 과연 두 묘 사이에 혐의가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가서 묻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집의 정계주(鄭繼胄)가 전에 여러 궁가(宮家)에 대한 면세의 기한을 정하지 말라고 한 전교를 도로 거두어 달라고 청한 일로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산전(山田)과 해택(海澤)을 근래 세력있는 가문에서 주인이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널리 점유하고 마구 침탈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주인이 있는 백성들의 땅도 태반이나 침탈을 당해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 궁가와 각 아문 사대부들이 묵은 산전·해택이라고 하여 입안한 곳으로 백성에게 해가 미치는 따위는 각도에 자문하여 모두 혁파하고, 지금부터 일체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지금부터 일체 금단하는 것에 대해서만 허락하였다. 응교 남구만이 아뢰기를,
"지난번 면대를 청하였을 때 궁가의 면세에 관한 일로 진달하니, 상께서는 대신이 모두 모이는 날을 기다려 의논해 결정해야겠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지금 여러 대신들이 모두 입시하였으니 의논해 결정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 가운데 또한 직전(職田)의 설이 있었는데 이는 새로운 말이다. 결코 따르기는 어렵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비록 직전의 수를 쓰지는 않더라도 이 제도를 모방해 참작해서 그 숫자를 정한 다음 국가에서 세금을 거두어 지급해서 궁노(宮奴)들이 폐해를 일으키는 길을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오늘 경솔하게 의논해 정할 수 없다. 어찌 뒷날이 없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후사(後嗣)를 세운 자가 친아들로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일에 대해 대간이 수교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을 수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니,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대체로 수교라는 것은 서경(署經)을 거쳐 양사(兩司)에서 간행한 것을 말합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지난 인조조에 훈신들을 사사로이 만나보시고 그들에게 자녀가 얼마나 되는지 있는지 없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고 상신 최명길(崔鳴吉)이 대답하기를 ‘신이 양자를 두었는데 지금 다행히 아들을 낳았지만 양자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자 한다.’ 하니, 인조께서 허락하셨는데 이 수교는 해조의 문서 가운데 들어 있지 않은 듯합니다."
하였다.
4월 4일 신축
민응형(閔應亨)을 대사헌으로, 이관징(李觀徵)을 지평으로 삼았다.
4월 5일 임인
식년 전시(式年殿試)를 개설하여 문과는 권진한(權震翰) 등 33인을 뽑고, 무과는 박필성(朴弼聖) 등 44인을 뽑았다.
평안도 생원 윤린(尹隣) 등과 경상도 진사 황상중(黃尙中) 등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성묘(聖廟)에 종사하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경기 지방 백성들의 부역이 번다하므로 영릉(寧陵)에 사초(莎草)를 다시 입힐 적에 모화관(慕華館)의 사초를 써야지 또 다시 궁핍한 백성에게 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사람을 모집해 채취하여 역참의 배를 이용해 능으로 실어나르자고 청하였는데, 따랐다.
4월 9일 병오
대사간 이진(李𥘼)이 추함(推緘) 중에 있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차자를 올려, 이유태(李惟泰)가 소로 진달한 일에 대해 여러 신하들과 강론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의논해 처리하겠다고 답하였으나 끝내 강론하는 거조가 없었다.
전 사인 이단상(李端相)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조정에서 영녕전을 개수하면서 정전(正殿) 10실의 제도를 새로 만들어 협실(夾室)에 봉안된 천묘한 뭇 신주의 위판을 일체 정전에 봉안하고 협실에다 신주를 모시는 제도는 폐지하려 한다고 하는데, 신은 그렇게 하는 것이 조종조에서 옛 제도를 조금이나마 보존해 둔 유의(遺意)에 크게 어긋날까 염려스럽습니다. 천묘할 자손의 신주는 시조의 협실에다 봉안하는 것이 바로 옛 제도입니다. 이것이 주자(朱子)가 이른바 ‘옛날에는 오직 천묘할 자손의 신주를 선조의 협실로 올려 봉안하는 법은 있지만 천묘한 조종의 신주를 자손의 협실로 내려다 봉안한다는 문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서 영녕전을 세운 것은 참으로 고례가 아닙니다. 그러나 태묘(太廟)의 제도에 이미 태조(太祖)를 제1실로 삼았으니, 목조·익조·도조·환조 네 분의 신주를 태조의 협실에다 내려 봉안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 이 영녕전을 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영녕전의 협실은 바로 목조의 협실입니다. 공정(恭靖) 이하의 천묘한 신주를 영녕전의 협실에다 올려 봉안하는 것이 비록 고례에 모두 합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묘할 자손의 신주를 시조의 협실에다 올려 봉안한다는 뜻은 있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뜻에서 하지 않았다면 공정의 신주를 천묘하던 날에 어찌 정전을 덧붙여 지어 똑같이 제향해야 옳다는 점을 생각지 않고, 단지 봉안할 곳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예를 무시한 일을 하여 의물(儀物)을 보관해두는 협실에다 임시로 봉안을 했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온당치 않았다면 그 뒤 백여 년 사이에 열성(列聖)들의 추모하고 존숭해 받드는 지극한 뜻과 경에 의거하고 예를 지키는 허다한 유신들이 이미 의견을 모으고 널리 고찰하여 고쳐 지어 함께 제향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 협실이 비좁아진 뒤에야 비로소 정전을 고쳐 지어 똑같이 제향하게 하고서 끝내 변통의 도리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르렀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의 망령된 소견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태묘의 제도에 있어서 만약 목조(穆祖)를 제1묘의 시조로 삼아 동향으로 신위를 정하고, 익조(翼祖) 이하 천묘한 뭇 신주를 목조의 협실에다 봉안한다면 이는 옛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미 태조를 태묘의 제1실로 삼았으니, 사조(四祖)의 묘를 별도로 세우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이 반드시 이 점을 들어 10실을 지어 함께 제향하자는 의논을 제기하면서 당초 영녕전을 지은 것은 사조의 신주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단지 정전 4칸의 제도로만 만든 것이니, 이는 이른바 예전(禮典)에 없는 예라고 한 것입니다. 공정(恭靖)의 신주를 헐어 옮기던 날에 조종조의 깊은 뜻에는, 반드시 영녕전 사조의 묘제를 지금 변경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시고 공정 이하 천묘 신주에 대해서 자손의 천묘한 신주는 시조의 협실로 올려 봉안한다는 옛 제도에 의거하여 영녕전 목조의 협실에 봉안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규식을 정해 여러 조정에서 서로 이어오면서 지금까지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찌 그것이 온당하지 않은 줄을 알면서 협실에다 임시로 봉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이 점에 대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당초 영녕전을 세운 것이 비록 고례는 아니지만 부득이 이렇게 사조의 별묘(別廟)를 만들었고 보면, 이는 바로 사조의 묘이지 천묘한 뭇 신주를 함께 제향하는 묘가 아닙니다. 천묘한 신주를 영녕전 협실에 봉안한 것은 바로 옛날에 천묘한 자손의 신주를 시조의 협실에다 봉안하는 유의이고 보면, 지금 10실의 제도로 고쳐 지어 천묘한 신주를 정전에다 함께 제향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 단지 두 묘 사이의 혐의 때문일 뿐이겠습니까. 지금 만약 공정 이하의 천묘한 신주를 태묘·태조의 협실에다 옮겨 봉안한다면 그래도 근거할 만한 것이 있지만, 영녕전 정전 안에 똑같이 봉안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조종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정전 10실의 제도를 정해 천묘한 뭇 신주를 정전에 함께 제향한다면 이는 고금의 예를 두루 참조해 보아도 모두 근거할 바가 없는 것으로, 단지 애초 천묘한 신주를 영녕전 협실에다 봉안하는 조종조의 깊은 뜻이 도리어 비박하고 구차한 데로 돌아감을 면치 못하게 될 뿐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단지 영녕전 협실의 비좁은 곳을 조금 더 넓혀 그 제도를 확장한다면, 비록 옛 제도를 회복할 수는 없더라도 위로는 고례를 조금이나마 보존한 조종조의 유의를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후세의 비평거리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당시 조정의 의논이 모두 영녕전 협실의 천묘한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 비좁다는 이유로 정전을 더 증축하여 천묘한 뭇 신주를 봉안하자고 하였는데, 남구만 등이 그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다. 그의 말은 대개 영녕전은 본래 천묘한 신주를 봉안하기 위해 설치한 곳이니 공정(恭靖) 이하만 유독 협실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영녕전 4실이 본래 사친(四親)의 묘를 위해 설치한 것인 줄을 모른 것이다. 그러므로 논의가 분분했다. 단상의 상소가 지적하여 진술한 것이 명백했지만 ‘사친은 다른 천묘한 신주와는 의의가 본디 다르므로 응당 별묘(別廟)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표출하여 명확히 말해서 뭇 사람들의 의문점을 풀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뒤 수개 도제조(修改都提調) 이경석 등이 면대를 청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정전 4실을 혹 헐거나 혹 덧붙여 짓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성상의 전교를 받들어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정전 4실은 태종조에 처음 설립하여 영녕전이라고 이름하였으니, 그 제도가 종묘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약 10실을 별도로 짓는다면 끝내 두 묘 사이에 혐의가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종조에 처음으로 영녕전이라는 명칭을 붙였는가?"
하자, 예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태종조에 장생전(長生殿)에다 사조(四朝)를 봉안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그때 온편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별도로 묘전(廟殿)을 건립해 정전 4실을 처음 세우고 영녕전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일이 비록 세종조에 있었지만 태종께서 상왕(上王)으로 계실 때입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이단상의 상소를 신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대체로 정전을 더 늘려 짓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한 듯합니다. 당초 영녕전을 건립할 적에 과연 깊은 뜻이 있었으니, 지금 와서 가벼이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경석이 아뢰기를,
"단상은 자못 고례를 아니, 그의 말은 반드시 근거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임진년 병화가 있은 뒤 선묘(宣廟)께서 종묘를 개축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이 개축하지 말고 옛 제도를 따라 수리만 하자고 청하였으니, 전하께서 그 점을 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천묘한 신주가 점점 많아져 익실(翼室)이 비좁아졌으니 협실을 덧붙여 짓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정전을 더 늘려 짓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후세에 비난하는 의논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예의 제도에 어두우므로 그 잘잘못을 감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여염의 일로 말씀드리면 사우(祠宇)를 고쳐 지을 때는 반드시 길한 해를 가려서 합니다. 일관(日官)의 말에 올해는 아주 길한 해는 아니라고 합니다. 개수하는 일은 중대한 일이니, 지극히 길한 해를 가려서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전이 만약 몇 년만 더 지탱할 수 있다면, 어찌 급급히 고쳐 지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영녕전은 대체로 사조(四祖)를 봉안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공정 대왕의 신주를 천묘할 적에 정전에다 덧붙이지 않고 익실에다 봉안하였으며, 정미년011) 에 종묘를 개조하면서 영녕전은 고치지 않고 옛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니 그 당시 의논해 정한 일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및 《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에서 먼저 조사해 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의논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역사가 정지되었다.
4월 11일 무신
유철(兪㯙)을 좌윤으로, 조복양(趙復陽)을 개성 유수로, 이관징(李觀徵)을 장령으로, 김수흥(金壽興)을 대사간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민서(李敏敍)를 수찬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삼았다.
사간 김만균(金萬均) 등이 상차하기를,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은 실로 우리 나라의 위대한 선비입니다. 그런데 문묘에 종사하는 법전에서 아직까지 빠져 있으니, 어쩌면 전하께서 어진이를 좋아하고 덕을 숭상하는 정성이 오히려 부족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이는 타고난 자품이 매우 높고 세상에 보기 드문 식견과 지략을 지녔으며, 규모가 바르고 크며 조예가 밝고 투철합니다. 성혼은 타고난 성품이 독실하여 덕의 그릇이 일찍 이루어졌으며, 공부가 치밀하여 견해가 명확합니다. 그들이 논설한 것은 모두 후세에 공이 있었으며, 그들의 문하에서 공부한 생도들과 그들의 풍모를 들은 후학들이 또한 대부분 국가에 힘이 되었습니다. 임진 왜란 때 나라의 운명이 위태하고 여러 군(郡)들이 와해되었을 적에 자신을 돌보지 않은 충신과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사람들이 두 신하가 평소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광해군 때 천리(天理)가 막히고 인륜 도덕이 무너졌을 때에 큰 의논을 붙잡고 중흥을 도운 사람들도 모두 이 두 신하를 존경하고 사모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국가의 근본에 도움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께서는 이들을 만나 예로써 공경하였고, 인묘·효묘는 관직을 추증하고 서원을 세워 포상하고 장려하였습니다. 을해년012) 부터 지금까지 많은 선비들의 요청이 몇 십 년 동안 그치지 않고 일제히 종사시켜 달라고 부르짖는 일이 전후 계속되었으니, 온 나라의 의논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흔쾌히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많은 선비들의 요청을 윤허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 13일 경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영녕전을 개수하는 일로 나아가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올해의 운수가 불길하여 한재가 또 이와 같이 들었으니, 잠시 몇 년을 더 두고 보아 개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전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의 뜻도 크게 변통을 할 수 없으면 단지 지세(地勢)의 형편을 따라 해야지 두 묘 사이의 혐의는 거론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고, 사당의 제도에 대해서는 별로 다른 의논이 없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개수하는 것이 편리하지 않다고 말을 하자, 상이 잠시 그 역사를 그치게 하였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남한 산성과 강도(江都)는 모두 나라의 요새지입니다. 강도에서는 특별히 활쏘기를 시험보였는데, 남한 산성에만 이런 거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한 산성의 무사들이 매우 실망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의 예에 따라 어사를 보내어 똑같이 시재(試才)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사족의 자제들을 더 모집하여 시재하고 무예를 권면하기를, 앞서 올린 계사에서 요청한 예와 같이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허락하였다. 대체로 효종조에 무재(武才)를 가진 선비를 장려하고 권면하여 훈련·어영 두 대장으로 하여금 사족으로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두 국(局)에 예속시키고 권무청(勸武廳)이라고 불렀다. 시재에 우등한 자가 많아 곧바로 전시(殿試)에 나아갔는데, 모집에 응모하는 자가 해가 오래될수록 점점 줄기 때문에 혁연이 추가 모집을 청한 것이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여러 궁가의 면세를 다시 의논하여 참작해 정할 것과 여러 궁가와 각 아문 사대부들이 산전·해택에 주인이 없다고 일컬으며 전장(田庄)을 설치해서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는 것들을 조사해 내어 혁파하자고 힘껏 요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응교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궁가의 면세를 다시 참작해 정하는 일에 대해 신도 일찍이 의논에 참석하여 해가 지나도록 다투어 주장한 적이 있는데, 지리하기가 너무도 심했습니다. 만약 공론이 있는 바가 아니고 백성들의 원하는 바가 아니라면 어찌 감히 이처럼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오늘 대신과 여러 재신 및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모두 들어왔으니, 결단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직전(職田)과 다른데 어떤 예에 따라 한계를 정한단 말인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당초 다시 정하자는 의논은 대체로 결수(結數)가 너무 많음으로 해서 나온 것이니, 지금 대신 및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해 개정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애초 면세전이 6백 결이던 것을 줄여 5백 결로 하였는데도 밖의 의논은 오히려 지나치게 많다고 합니다. 지금 참작하여 한계를 정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4백 30결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30결은 그리 심하게 관계되지는 않으니 4백 결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였고, 민적이 아뢰기를,
"왕자와 옹주에게도 한계를 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군과 공주는 4백 결로, 왕자와 옹주는 2백 50결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헌부가 애초에는 궁가의 면세와 전장을 설치하는 두 가지 일을 혁파하자고 몇 달 동안 다투어 고집하다가, 면세를 참작해 정하자는 요청만 겨우 허락을 받고 다행으로 여겨 산전과 해택에 설치한 전장을 혁파하자는 의논까지 모두 정지했다. 헌납 송시철(宋時喆)이 앞서 올린 계사에서 어장(漁場)을 떼어 주는 폐단을 혁파하자는 일에 대해 거듭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단지 화전(火田)만 혁파하도록 하였다.
4월 14일 신해
서리가 내렸다.
4월 16일 계축
정만화(鄭萬和)를 승지로, 이세장(李世長)을 검열로, 원두추(元斗樞)를 광주 부윤으로 삼았다.
4월 18일 을묘
대사헌 박장원 등이 상차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성묘(聖廟)에 종사하자고 청하면서 아뢰기를,
"이 두 신하의 도덕과 공렬이 어찌 이미 배향된 선현들보다 못하겠습니까. 학설을 세워 후세에 끼친 것이 앞의 성인들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드러낸 점이 있습니다. 전하의 고명하신 학문으로 그들의 책을 읽어보시면 그들의 사람됨을 상상하실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결단을 내려 종사하는 법전을 속히 거행치 않으십니까."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황해도 금천(金川)·곡산(谷山) 등의 읍과 경상도 대구·울산 등의 읍에 우박이 내렸다.
4월 19일 병진
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공경 대신들은 임금의 팔과 다리이고 대각의 시종하는 신하들은 임금의 귀와 눈입니다. 사람의 일신이 힘입어 편안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팔·다리·귀·눈의 쓰임에 달려 있으니, 그것을 멀리할 수 없음이 또한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환관·궁첩들과는 날마다 함께 거처하시면서 공경·시종들과는 한 달 안에 접견하시는 횟수가 몇 번 안 되니, 신은 이 점을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아,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서 신하를 접하시는 날이 드물어서 시들시들 떨치지 못하는 기상만 있고 분발하여 자강하는 의지가 없습니다. 전하의 의지와 기상이 이와 같으니 조정의 기강이 날로 어지러워지고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이 반드시 이런 데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가의(賈誼)의 말에 ‘천하의 운명은 태자에게 달려 있는데, 태자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일찍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과 곁에서 보도하는 신하를 뽑는 데에 달려 있어서, 곁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바르면 태자가 바르게 되고 천하가 안정될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지금 원자가 탄생한 지 벌써 몇 해가 지났으므로 보양(保養)하는 거조를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되는데 전하께서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궁궐에서 태어나 아녀자와 내시의 손에 맡겨져서 눈은 사치하고 화려한 물건에 익숙해지고 손은 진기한 장난감에 익숙해지는데, 놀기만 해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기뻐하거나 노여워해도 억제하지 않으면서, 이는 어려서 그런 것이지 조금 크고 나면 저절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가르치고 행동할 나이가 되면 도와서 예를 행하도록 하는 옛날의 뜻이겠습니까. 신의 소견으로는 원자가 비록 어리지만 일찍 국본(國本)의 자리를 정해 속히 책봉하는 예를 치루어 춘궁(春宮)으로 부르게 한 다음, 시중드는 아녀자와 환관은 반드시 근신하고 충후한 자를 가려 채워서 간사하고 편벽한 일을 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학문이 깊고 덕이 있는 사람과 단정하고 정직한 선비를 뽑아 사부를 삼고 도와주는 이를 삼아 효도와 공경으로 인도하고 옳은 방향으로 효유하며, 의복·음식·기물에 대해서는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을 보여주며, 일상 생활에서 순하고 착하게 되기를 힘써 지도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습관과 지혜가 성장해 중용의 도에 들어맞아 본성과 같이 되면 어릴 적에 바르게 길러주는 것이 성인을 만드는 공이라는 말처럼 제대로 될 것이니, 참으로 우리 나라의 억만년토록 영원한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의 덕은 아랫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아랫사람의 말을 듣는 방법은 자신의 치우치고 사사로운 생각을 제거하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만약 치우치고 사사로운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 나를 의식하는 데 얽매이게 되면 비록 훌륭한 말이 있더라도 받아들일 길이 없게 됩니다. 신이 삼가 요즈음 양사에서 다투는 바를 살펴보건대, 모두 궁가에 관계된 일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논쟁해 마지않는데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완강히 거절하시고 계시어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는 것이 마치 승리를 다투는 듯합니다. 이 어찌 성스러운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대각의 신하가 논열한 것이 전후 상세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전하께서 그 말이 옳은 줄을 아시면서도 끝내 더욱 못 들은 체하시니, 어쩌면 차라리 백성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궁가에 정을 끊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의 아픔을 구휼하지 않고 대각에서 아뢰는 말을 돌아보지 않으신 채, 단지 궁가의 사사로운 정만 따름으로써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게 되었으니, 신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일찍이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예를 잘못 논했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시열을 공격해 배척하자 조정의 의논이 크게 일어났는데, 선도가 이로 인하여 먼 변경으로 위리안치되었습니다. 그뒤 죄인의 심리로 인하여 북청(北靑)으로 양이(量移)되었는데, 대각의 탄핵 소장이 또 제기되어 다시 전의 유배지로 되돌아갔습니다. 신이 일찍이 선도의 상소를 보았는데 그 뜻과 말이 대부분 격분한 데서 나와 공평함을 잃었으나, 그의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은 명백하고 정확하여 바꿀 수 없는 의논이었습니다. 시열이 비록 산림의 학자로서 한 시대에 중망을 받고 있는 사람이지만, 예를 잘못 논한 것은 역시 참으로 숨길 수 없습니다. 지금 시열을 비호하는 자들은 오로지 그의 잘못을 덮어버리기 위하여 심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의논하지 못 하게 하고 선도를 배척하지 않는 자는 곧바로 흉적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선도가 어찌 화를 얽을 의사가 있었겠습니까. 대체로 사람마다 각각 소견이 있으므로 구차히 찬동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서로의 의견이 같지 않기 때문에 옳고 그르고 잘하고 잘못한 것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공론이 있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의견이 나와 같지 않은 것을 미워해 억지로 같게 하고자 합니다. 사대부 사이에 조금 다른 의논을 제기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떼 지어 일어나 그를 공격합니다. 허목(許穆)이 예를 논하는 소를 다시 올리자 배척해 먼 군(郡)으로 내쫓고, 파직되어 돌아간 뒤에는 다시 거두어 쓰지 않았습니다. 권시(權諰)는 이의를 내세우자마자 곧바로 무거운 탄핵을 받았고, 조경(趙絅)은 선도를 구원하는 말을 한마디하자 지척받아 간사한 사람이라고 했으며 그의 아들도 아울러 잡혀들어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대체로 조경은 여러 조정에서 관직을 한 원로 대신으로 일평생 충직한 절개만은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는데, 지금 갑자기 변해 간사한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도는 본디 기개와 절개가 있어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바른 말을 하여 광해군 때에는 절개를 세웠고 선왕조에는 또한 사부의 옛 은혜가 있었는데도, 지금 찬바람이 몰아치는 지역에 오래도록 유배되어 있습니다. 머리가 허옇고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참으로 하루아침에 갑자기 숨을 거두어 성상의 조정에 선비를 죽였다는 오명을 끼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는 속히 석방해주시어 그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 주소서. 이 또한 성스런 군주의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입니다."
하였는데, 승지 서필원(徐必遠) 등이 그 소를 올리면서 또 아뢰기를,
"선도의 상소가 예만 논하고 말았다면 또한 사람마다 의견이 달라서 구차하게 같게 할 수 없음의 소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종통·적통의 설을 만들어 내어 위로는 성상의 귀를 의혹케 하고 아래로는 뭇 사람의 심정을 흔들어서 송시열의 죄목으로 단정지으려 한 것이니, 그의 의도적인 음험함이 과연 어떻습니까. 선도가 이 설을 주장한 것은 본래 성상으로 하여금 갑자기 듣고 노하여 사림을 일망타진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우원은 그의 말이 명백하고 정확하여 바꿀 수 없는 의논이라고 하고, 또 어찌 사림에게 화를 얽을 의사가 있었겠느냐고 하였으니, 사람의 혼몽함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기년복으로 제도를 정한 것은 나라의 법전에 근거가 있지만, 삼년복으로 단정하는 것은 예경(禮經)에 증거가 없습니다. 시열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곤란하게 여긴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복제와 종통·적통은 본래 서로 상관이 없는 것인데, 선도는 ‘가벼운 복제를 따르자고 의논한 것은 종통·적통을 어지럽히는 것이다.’고 돌려버림으로써 인심을 쉽게 의혹시켰으니 관계된 바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후 대각의 신하들이 입이 쓰도록 힘껏 논쟁하였던 것은 대체로 공론을 따라 국시를 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원은 시열을 위해 그의 잘못을 덮어버리려고 한다 하니, 아, 사람이 못된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선도의 이 말은 본래 시열을 무함하기 위해 한 것이었으나 그 귀추를 고찰해 보면 실로 종사에 관계가 됩니다. 죽이지 않고 변경에 유배한 것도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었는데 우원은 그것을 과감하게 말을 하였기에 죄를 얻은 것이라고 하니, 아, 참으로 이상합니다. 도신(道臣)이 현도(縣道)를 통해 올린 상소이므로 감히 물리치지 못하고 한편 받들어 올리면서 아울러 생각한 바를 진달합니다."
하였다. 우원의 상소가 들어갔지만, 상이 답하지 않았다.
4월 20일 정사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일찍이 대간의 계사로 인해 추고를 받았는데, 그 답함(答緘)에,
"경사의 잔치 자리에서 수작하는 사이에 예조 판서와 함께 한 구(句)의 장난하는 말을 지어 같이 웃다가 파했습니다. 그런데 대간의 계사가 갑자기 나와서 극도로 비방하였는데 과연 이처럼 어긋난 행실이 있다면 비록 숨기려 해도 안 되겠지만, 만약 그런 사실이 없다면 남을 무함하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며, 세 번이나 항거를 하였다. 상이 이는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겨 헌부로 하여금 논핵하게 하였는데, 헌부가 아뢰기를,
"좌명의 함사 중에 ‘장난하는 말을 지었다.’고 하였으니, 대간의 계사에서 능멸했다는 설이 반드시 이를 가리킨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분간하게 하니, 좌명이 또 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공손히 추감(推勘)을 기다리며 분명한 벌을 받으려고 하였는데, 헌부의 논핵이 오로지 모호하게만 하여 마치 신의 허물을 비호하여 죄에서 신을 빠져나오게 하는 듯한 면이 있었고 성명께서 또 분간하라는 명을 내리시었으니, 신이 죄책을 면한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만, 신을 논하는 자들이 더욱 다시 답답하게 여기는 것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신이 육경의 반열에 있으면서 조정의 신하들이 일제히 모인 자리에서 무례한 짓을 했으니, 어떻게 관직자리를 탐하고 지위에 연연해 버젓이 반열에 나아가 깨끗한 조정에 수치를 거듭 끼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말이 매우 분개한 투였다.
4월 21일 무오
대사헌 박장원이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기를,
"김좌명의 소 가운데 헌부가 논핵한 계사가 오로지 모호하게 하였다는 지척이 있었습니다. 술자리에서 장난삼아 말한 작은 실수를 대각이 탄핵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나 지나쳤으나, 좌명은 경재(卿宰)가 된 몸으로 함답에서 항거하기를 세 번이나 하였으니, 신은 삼가 이 두 가지 일에 대해 모두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장령 김익렴(金益廉)도 이 일로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한 뒤에, 장원은 패초하였으나 나오지 않았으므로 체직되었다. 지평 이세익(李世翊)이 장원의 계사에 대해 처치하였는데 말을 모호하게 하였다고 한 전교가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였다. 간원이 아뢰어 출사하게 할 것을 청했는데, 뒤에 세익도 패초했지만 나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4월 22일 기미
김휘(金徽)를 도승지로, 유창(兪瑒)·안후열(安後說)을 승지로, 윤우정(尹遇丁)을 정언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호조 참판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병조 참판으로, 이익(李翊)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4월 23일 경신
사간 김만균(金萬均),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홍우원의 상소에 대해 아직까지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삼가 그 대략을 듣건대, 뜻이 음험하고 세운 논지가 사특하여 찬성 송시열을 공격하고 배척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면서 도리어 윤선도의 흉악한 상소를 명백하고 정확하다고 하였으며, 그의 평생을 찬양하되 혹은 기개와 절개가 있어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바른 말을 하여 광해군 때에 절개를 세우기도 했다고 하며 혹은 그의 말에 공정성이 있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명의 조정에 선비를 죽였다는 오명을 끼치게 될까 염려스럽다는 말로 끝을 맺어 조정을 동요시켰으니, 아, 사람의 마음이 좋지 못하고 말이 진실되지 못한 것이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당초 선도의 상소는 겉으로는 예를 논하는 형식을 빌렸지만 속으로는 화를 일으키려는 속셈을 펴보려는 것으로서 은밀히 송시열과 송준길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리려는 것이었으니, 그 계책의 흉악함이 남곤(南袞)·심정(沈貞)보다도 심합니다. 그러나 일월처럼 밝은 성상께서 살피시고 흔쾌히 변석해 주신 데 힘입어 흉악한 사람이 법의 처벌을 받음으로써 국시가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몇 년 동안 간사한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흉악한 무리들이 자취를 감추어 조정이 안정되는 기미가 조금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뜻하지 않게 우원이 분수에 지나친 욕심을 몰래 품고 공공연하게 치우치고 방탕한 말을 마구 하며 다시금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아, 우원도 사람인데 착한 사람들을 해치고 흉악한 사람에게 스스로 빌붙는 짓을 어찌 사람의 심정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그가 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진실로 이런 것을 말하지 않았다면 임금과 신하의 합치되는 융성한 마음을 어떻게 이간할 수 있겠으며, 명철한 임금을 어떻게 의혹시킬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라도 공공의 의논에 용납되지 못하면 또한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간사한 마음으로 임금을 가리는 계책을 이루려고 하였으니, 선도와 똑같은 길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왕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삭출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가 언관을 대함을 이와 같이 할 수 없다. 말이 비록 중도에 지나쳤다 하더라도 중한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 대체로서 말하더라도 매번 어지럽게 떼 지어 일어나 하나의 시끄러운 단서를 만들어서 조정을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응교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기를,
"윤선도가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겉으로 예를 논하는 데에 의탁하여 속이고 변화를 부려 위로 성상의 총명을 현혹하려고 하였고, 마음에 두고 생각해 온 것이 오직 사류를 해쳐 사사로운 자신의 분을 유쾌하게 풀어보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통·적통의 설이 복제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 본디 상관이 없는데도 선도는 굳이 이를 빌어 논설을 만들어서 여러 신하들의 죄안으로 삼아 한 시대의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모두 몹쓸 역적으로 몰아넣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지척하여 의논한 것이 비록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또한 돌아보지도 않았고, 그 일이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심술은 바로 남곤·심정의 남은 방식이었습니다. 그가 밤낮으로 엿보다 틈을 타서 덫을 설치하되 흉악하고도 교묘하게 하였으니 다시금 남은 힘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다행히 해가 중천에 뜬 것처럼 전하께서 밝게 살펴주신 데 힘입어 참소한 사람이 정배됨으로써 옳고 그름이 명백히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전하의 성덕입니다.
그런데 수찬 홍우원(洪宇遠)의 상소는, 선도의 종통·적통의 설을 명백하고 정확하다고 하였으며 또 ‘어찌 사림을 무함할 뜻이 있었겠는가.’ 하고, 또 ‘시열을 위해 그의 잘못을 덮어버린다.’ 하고, 또 ‘선도는 과감히 말하다가 죄를 얻었다.’ 하였습니다. 우원은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로서 여러 조정을 두루 섬긴 사람인데, 이에 감히 옳고 그름을 현란시키며 흉악한 사람을 아첨하고 좋아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통렬히 분변하고 깊이 배척하여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한다는 뜻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으신다면, 또한 어떻게 못된 무리들을 막고 국시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 점에 대해서도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간사하고 흉악한 사람의 심정을 성명께서 통촉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두서너 신하의 어진 점을 성명께서 깊이 믿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유언비어가 갖가지로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조경(趙絅)이 이미 앞에서 창도하였고 우원이 또 뒤에서 뒤따르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말이 많은 데에 의심쩍어 잠시 조정하는 계책을 쓰신다면, 바른 것을 미워하는 논의와 참소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반드시 팔을 걷어붙이고 손뼉을 치면서 사방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옛날 송나라 때 희령(熙寧)·원풍(元豊) 연간의 소인들이 단지 ‘소술(紹述)’ 두 글자를 가지고 틈을 타 현란케 하여서 원우(元祐) 연간에 여러 어진이들을 모두 내쫓았고, 그로 인해 점차로 정강(靖康)의 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하물며 지금 선도가 주장한 종통·적통의 설은 그 의도가 ‘소술’ 두 글자보다 혹심하니, 뒷날에 장돈(章惇)·채확(蔡確)·채경(蔡京)·채변(蔡卞)과 같은 무리들이 또한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구차하게 조정하여 부드럽게 하려는 사사로운 정으로 이리저리 얽히지 마시고, 결단을 분명히 내리시어 양쪽 다 극단에 이르게 하여 군자는 믿는 바가 있게 하고 소인은 용납되는 바가 없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나의 뜻을 이미 간원이 효유하였다."
하였다.
4월 24일 신유
이조 참판 유계(兪棨)가 상소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하면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문헌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유자(儒者)의 학문은 본조에 이르러 비로소 열렸습니다.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우뚝하게 이 도를 자기 임무로 여겨 옛날 성현의 통서를 곧바로 이었고, 이 두 선현을 이어서 일어난 사람으로 두 신하가 있었으니, 바로 염락(濂洛)과 관건(關建) 사이와013) 같습니다. 이 두 신하의 순수하고 바른 도학과 크게 드러난 공렬은 앞의 선현에 못하지 않고 뒤의 어진이보다 빛났으니, 신처럼 범속하고 비루한 자는 참으로 그 깊숙한 경지를 엿보아 얕고 깊은 것을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형과 사우(師友)에게 들은 것은 있습니다. 이이는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여 조예가 정미롭고 깊어서 자기를 완성하고 남을 이루어주는 도가 체용(體用)을 겸비했으며, 임금을 요·순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요·순 시대의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태양처럼 상하에 드러나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성혼이 이른바 ‘산하의 기운을 타고난 하·은·주 시대의 인물이다.’고 한 말은 참으로 정확한 논의입니다. 그리고 성혼의 학문은 가정에서 전수받았으므로 연원이 매우 바른데다 장중하고 순수하여 안팎이 일치하고 모든 행동거지가 성현을 본받아 덕의 그릇이 성취되어 우뚝하게 사림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이이가 이른바 ‘품행이 돈독하고 확실한 것은 내가 미칠 수 없는 바이다.’고 한 말이 과장한 말이 아닙니다.
오직 이 두 신하는 도의(道義)로 서로 추중하여 바로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처럼 당세에 모범이 되었으니, 뭇 사람들이 우러러 보아 아무런 이의가 없었습니다. 이이는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는 것을 매우 근심하여 매양 ‘동서(東西) 두 글자가 필시 나라를 망하게 하는 화의 씨앗이 될 것이다.’고 하면서 속히 동서를 타파하고자 진심을 다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일단의 무리들에게 깊은 원망과 노여움을 사서 떼 지어 일어나 비난하여 반드시 쫓아내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성혼이 마침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 있었는데 개연히 상소를 하여 뭇 소인들이 떼 지어 참소하는 것이 사실과 다른 데 대한 정상을 낱낱이 진술하자, 모래를 내뿜던 입이 독까지 마구 내뿜듯이 하였는데, 이들이 두 신하를 무함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습니다. 처음에 정여립(鄭汝立)·정인홍(鄭仁弘)·이홍로(李弘老) 등이 그 설을 주장하였는데 광해군 때 이르러서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두 신하의 유풍과 여운이 모두 없어지지 않은 데에 의지하여 나랏일이 위태롭고 인륜이 희미해진 때에 의분을 품고 일어나 목숨을 바쳐 나라의 명맥을 도운 자가 많았습니다. 이 두 신하의 유풍을 듣고 흥기한 자들의 사적이 현저히 드러났으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계해년의 반정으로 하늘의 태양이 다시 밝아져 원한을 씻어주고 시호를 추증하는 일이 차례차례 거행되었으며, 또 서원에 편액을 하사하여 그들의 도를 존숭했습니다. 성상의 할아버지와 성상의 아버지께서 이 두 신하를 숭상하고 장려한 뜻은 거의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만, 성묘에 종사하는 이 문제만은 아마도 정중하게 하고자 하여 겨를이 없었던가 봅니다. 도학의 국가에 대한 관계는 마치 사람에게 원기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원기가 떨어졌는데도 신체가 건강한 경우와 도학이 존숭되지 않으면서도 국가가 잘 다스려진 경우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세상의 도가 더욱 떨어지고 인심이 착하지 못한 이런 시대에는 더욱 유현(儒賢)을 장려하고 좋아하고 상을 주어 미워하는 것을 명확히 보여 통기(統紀)를 하나로 하고 추향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원도 진사 한용명(韓用明) 등이 상소하기를,
"고려조의 진사 원천석(元天錫)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으며 도덕이 순수합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때를 만나 치악산(雉岳山)에서 은거하면서 화평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지 않을 뜻을 견고히 가졌는데, 고려의 국운이 다하여 진주(眞主)가 혁명을 일으키자, 끝내 깊숙이 묻혀 있으면서 지조를 지키며 영원히 옛 왕조를 잊지 않기로 맹서하였으니, 천석과 같은 사람은 참으로 이른바 만고의 강상이 되고 백세의 사표가 되는 사람입니다. 실로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와 똑같이 아름답고 꽃다운 인물이니, 은(殷)나라에 세 어진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태종 대왕께서 그에게 배운 옛 은혜를 생각해 거듭 총애의 보살핌을 내리셨고 산야의 초막에까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의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 군수로 임명하여 부모를 영화롭게 봉양하는 바탕을 삼게 하면서도 끝내 그에게는 관직을 주지 않아 그의 본뜻을 이룩하게 하여서, 천석의 고상한 풍도가 이에 더욱 드러났습니다. 지난 갑자년에 본주의 많은 선비들이 주의 북쪽 칠봉(七峰)의 아래에다 서원을 세우고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을 보였는데, 아직까지 편액이 하사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성스런 조정에 흠전(欠典)이며 많은 선비들이 실망하는 바입니다. 편액을 하사하여 향사(享祀)를 영광되게 하소서."
하였는데,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원천석은 고려 말기의 쇠퇴하고 어지러운 때에 기미를 보고 자기의 뜻을 고상하게 하며 향리에 은거하였고, 세상이 바뀐 뒤에도 자신을 지키기를 더욱 견고히 하였으니, 그의 고상한 풍도와 변함없이 한결같은 지조는 나약한 사람은 뜻을 확립하게 하고 탐욕스런 사람은 청렴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가 도덕을 확립하고 절의를 온전히 한 데 있어서는 정몽주·길재와 똑같이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그 고장 사람들의 존숭하고 사모하는 정성이 오래될수록 더욱더 돈독해져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편액이 하사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흠전이 됩니다. 그러나 서원에 내린 편액이 너무 많으므로 모두 다 시행하지는 말라는 명이 있었으니, 지금 그 의논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그만두고 시행하지 않았다.
천석은 관직하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이색(李穡) 등 여러 사람과 평소 친했다. 태종이 일찍이 그에게 배웠는데 즉위하고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아, 태종이 친히 그가 사는 초막으로 찾아 갔으나 천석은 도망하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태종이 옛날 밥짓던 비녀를 불러 그를 위해 상으로 주고 또 그의 아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천석이 지은 사고(史稿) 6권이 있는데 고려 말 및 혁명한 시대의 일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책을 풀로 붙여 놓아서 자손들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감히 뜯어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 책이 남아 있는데 자못 유실되었다고 한다.
4월 25일 임술
집의 정계주(鄭繼胄) 등이 아뢰기를,
"홍우원(洪宇遠)이 방자하게 상소하여 흉악한 사람을 구원해 풀어 주려고 처음에는 예를 빌어 화를 전가시키려는 설을 가리켜 명백하며 정확하다고 하였고, 끝에 가서는 선비를 죽인 오명을 남기게 될까 염려스럽다는 말로써 성상의 마음을 동요시키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사악한 사람에게 빌붙은 짓을 달갑게 여겨 속이는 말로 꾸미기를 끝없이 하여 은연중 사류를 넘어뜨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찌 전후 흉악한 무리들이 내쫓긴 것이 모두 성명께서 스스로 결단한 것인 줄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차례로 변론하면서 조정으로 화살을 돌려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만약 우원을 언론의 인사로 인정하신다면, 이는 전하의 뜻이 그전에는 정해졌다가 뒤에 가서 흔들리는 것이며 전하의 견해가 처음에는 밝았지만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어진이와 사악한 이를 분별하여 국시를 정하는 도리는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삭출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대사헌 박장원(朴長遠)과 지평 이세익(李世翊)은 이렇게 중대한 의논이 일어난 때에 패초했는데도 나오지 않았으니, 의도적으로 체직을 도모한 것입니다. 일을 회피한 자취가 현저하니 박장원은 추고하고 이세익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패초했는데도 나오지 않아 인피하기를 도모하는 의도가 현저히 드러난 사람이 이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기강을 진작시키는 일이 어찌 그리도 더디단 말인가."
하였다.
4월 26일 계해
함경 감사 서원리(徐元履)가 죽었다. 원리가 관직길에 나가게 된 것은 과거를 거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부였다는 옛 은혜로 대각을 두루 거치고 한 지방의 책임까지 받았으니, 근래 드물었던 일이다. 그러나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적에 대부분 정상적인 격식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비웃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서원리는 선왕께서 잠저에 계실 때의 사부였으므로 나도 그를 후히 대우해 왔는데, 지금 먼 지방에서 객사하니 매우 슬프다. 각도에 영을 내려 호상(護喪)하게 하라."
4월 27일 갑자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조복양(趙復陽)을 개성 유수로, 김시진(金始振)을 판결사로, 김휘(金徽)를 함경 감사로,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삼았다.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기를,
"신은 본부의 계사에 대해 의견이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윤선도의 상소는 예를 논한 것 이외에 다른 설을 삽입하여 은밀히 감추려는 저의가 현저하니 이 점은 신 또한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우원에 있어서는 상소 가운데의 표현이 비록 잘못된 점이 있으나 단지 소견이 분명치 못해서 그런 것으로서 그의 본정을 따져 본다면 절대로 어진이를 해치거나 나라를 병들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를 심정(沈貞)·남곤(南袞)으로 지목하는가 하면 심지어 전일 조경(趙絅)을 거론하면서 그를 간사한 마음과 사악한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구차하게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 할 수 없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장령 김익렴(金益廉), 사간 김만균(金萬均),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원만리(元萬里)·윤우정(尹遇丁) 등이 신후재가 인피하며 다른 의견을 내세웠기 때문에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모두 인피하였다. 홍문관 응교 이민적(李敏迪) 등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대체로 천하의 의논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사악한 것과 정직한 것일 뿐입니다.한나라 원재(元宰) 때 소망지(蕭望之)·유갱생(劉更生)이 홍공(弘恭)·석현(石顯)과 적이 되었을 적에 홍공·석현에게 아첨한 자들은 사악한 무리들이고, 후한(後漢) 때 진번(陳蕃)·두무(竇武)와 조충(趙忠)·장양(張讓)이 서로 다툴 적에 조충·장양에게 붙은 자는 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남곤·심정의 악이 하늘에까지 닿았지만 그 죄는 또한 사림에게 화를 전가시켰다고 하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도가 은밀히 덫을 설치하여 충성스럽고 어진이를 모함하려고 하였는데 그의 의논을 조술하여 기꺼이 스스로 그에게 아부하려고 마음먹은 자를 어찌 남곤·심정의 남은 의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사악한 사람에게 아부하여 바른 사람을 추악하다고 하였으니, 비록 간사한 마음과 사악한 태도라고 지척을 하더라도 어떻게 천고의 공론을 스스로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원의 심정을 성명께서도 깊이 통촉하고 계시면서도 ‘분분하게 떼 지어 일어나 하나의 시끄러운 단서를 만든다.’고 한 번 전교를 내리시자, 그를 구원하는 의논이 이미 대각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이는 바로 음과 양 중에서 어떤 것이 이기고 지느냐와 사악한 것과 바른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소멸하고 성장하느냐가 판가름이 나는 분기점입니다. 옳고 그르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엄정한 판단에 대하여 성명께서는 그 책임을 지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하고, 이어 신후재는 체직시키고 정계주·김익렴·김만균·송시철·원만리·윤우정은 출사시키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그리고 이르기를,
"지난번 조경의 상소가 올라왔을 적에 그 당시 의논하는 의견이 오늘날처럼 어긋났었다. 오늘 그대들은 현저하게 불평스런 의사가 있고 은연중 남을 침범하고 기롱하는 계책을 써서 감히 나보고 그 책임을 지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나 역시 처치하는 사이에 들어 있다. 대체로 처치하는 법은 그 옳고 그름을 밝혀 그 의논을 세우느냐 세우지 않느냐 하는 것을 정할 따름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한 말로 결론을 지었으니, 나는 그 의도를 모르겠다."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옥당의 여러 신하들의 뜻은 성상을 책망한 데 불과한 것으로, 말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비답의 전교가 우대하는 예로 평온하게 말하는 뜻이 전혀 아니니, 온당치 못한 전교는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29일 병인
응교 이민적(李敏迪) 등이 소장을 진달해 스스로 탄핵하기를,
"몇 줄의 엄한 전교를 보니 모두가 신하의 큰 죄였으므로 감히 망령되게 스스로 변명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만, 구구한 실정을 또한 천지 부모의 앞에 모두 드러내고자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간흉의 정상에 대해서는 이미 통촉하시고 결단을 분명히 내리셔서 양쪽 모두 그 극단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소요가 일어나지나 않을까 염려하시어 진정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소인의 화는 마치 독약이나 맹수와 같아 만약 매우 미워하고 통렬히 끊어버리지 않으면 양쪽을 조정한 나중의 결과는 매양 나라를 패망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상께서 힘껏 주장하여 미워하고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조경이 상소를 올렸을 때 성명께서 처분하신 것은 참으로 엄격했습니다. 그런데도 사악한 의논이 오히려 마구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의논이 분분한 것을 염려하시어 조금이라고 진정시키려는 뜻을 보이시면 그것을 빙자해 구원하는 의논이 반드시 연이어 일어날 것입니다. 신들의 우려는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하께서 과연 신들에게 이런 죄명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속히 형벌을 내리시어 나라의 형법을 엄수하게 하시고, 만일 말은 비록 분명하지는 못하지만 실정은 별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또한 성명께서 서서히 궁구하고 너그럽게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책을 수행하라고 답하였다.
장령 이관징(李觀徵)이 아뢰기를,
"홍우원과 오촌 숙모부(叔母夫)014) 가 되는 혐의가 있습니다. 비록 서로 피혐할 관계는 아니지만 이미 일가붙이가 되었습니다. 가령 신의 소견이 동료와 같더라도 그에게 죄를 청하는 의논에 참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의견이 같지 않은데이겠습니까. 그리고 조경과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간사하다고 지목하고 흉도라고 배척하였으니, 아, 조경이 어찌 이런 일을 하였겠습니까. 신은 결코 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의논이 한창 펼쳐지는 때에 어찌 대각의 자리에 끼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였다. 정언 원만리가 인피하기를,
"옥당이 처치한 차자의 주의(主意)는 단지 사악한 것과 바른 것을 통렬히 분변하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을 명쾌히 결단하고자 한 것으로서, 성상께서 바른 것과 사악한 것 중에 어느 것이 소멸하고 성장하느냐의 때에 그것을 바꾸는 책임을 지시기를 더욱 정성껏 청한 것이니, 그들의 마음에 절대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한 나라의 치란과 시비는 모두 임금에게 달려 있으니, 보필해 인도하는 신하로서 어찌 이런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후재는 한결같이 인피하고 들어가서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관망하기만 하다가 ‘분분하게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킨다.’는 전교를 본 뒤에야 비로소 그 의논에서 이탈해 이의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스스로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옥당이 처치한 것은 것은 단지 실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어찌 다시 격분하여 마음에 불평을 가졌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처음에 분명히 변별하지 못하시어 점차로 후재의 이론을 불러일으켰고, 지금 또 바른 말을 하는 선비를 꺾어버림으로써 이 무리들이 틈을 엿보고 달려들려는 마음을 더욱 고무시켰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후로 다시 후재 같은 사람이 얼마나 더 나타나 성상의 뜻이 얕고 깊은지를 엿볼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옳고 그르며 사악하고 바른 것은 흑백처럼 분명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사악한 짓을 하면서 승리한 자는 항상 많았고 바르게 하면서 승리한 자는 항상 적은 것은 대체로 당시의 군주가 통렬히 배척하고 엄하게 분별하지 못하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변별하실 적에 남김없이 살피고 계시면서도 이런 중도에서 벗어난 전교로 인하여 양을 일으키고 음을 억제하는 성대한 뜻이 끝내 처음을 이어 지속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신은 삼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러한 엄한 전교는 사실상 신들을 처치한 것으로 인해 나온 것이니,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고 하교하기를,
"만리가 인피한 말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면서 노한 기색이 심하고, 표현에 침해하고 업신여기는 뜻이 드러났으며 또한 정대(正大)한 태도가 아니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원만리를 우선 먼저 체차하여 뒤폐단을 막으라."
하였다. 승지 정만화(鄭萬和) 등이 그 명을 도로 거두자고 청하기를,
"원만리가 인피한 내용에 비록 과격한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본래 심정을 따져 보면 단지 옳고 그름을 밝히고자 한 것뿐입니다. 지금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실로 대각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말을 한 본래의 뜻이 어찌 옳고 그름을 밝히려는 데에만 있었겠는가. 나에게 몹시 노하여 능멸한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다시 아뢰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사간 김만균(金萬均),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윤우정(尹遇丁) 등도 옥당이 올린 차자에 대해 내린 비답이 엄준하다는 것으로 인피하기를,
"사람의 소견이 비록 같지 않은 점은 있지만 사악하고 바르며 옳고 그른 것으로 분명히 나라에 큰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서는 결단코 소견이 같지 않다는 것으로만 돌려버리고 분명히 변별하여 통절하게 배척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선도의 흉악한 상소에 대해 신후재도 이미 그 의도가 음험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미워하였는데, 유독 홍우원의 상소에 대해서만 현저하게 구원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들이 통렬히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며, 옥당이 극력 말하고 자세히 의논한 것입니다. 또한 장령 이관징의 인피한 말도 후재와 다름이 없으니 신들이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집의 정계주, 장령 김익렴 등도 신들이 극력 말하여 자세히 의논한 것은 전하께서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히 보여 국시를 통쾌히 정하시기를 바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곁에서 일어나 능멸하고 배척하였고 옥당이 처치한 것도 타당치 않으니, 그대로 대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수찬 정석(鄭晳)이 이관징은 체차하고 사간 김만균 이하는 출사시키라고 청하고, 또 아뢰기를,
"수찬 홍우원의 상소는 참으로 그릇되고 망령된 것이어서 파헤쳐 흑백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당초 본원이 올린 차자에서 대략 진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래 심정을 따져 보건대, 식견이 어두워서 옳고 그름이 분명치 못한 것뿐이지 결코 윤선도의 상소에서 한 말처럼 음흉하게 모함하여 넘어뜨리려는 뜻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차자의 말에 공평하고 공정하게 하기를 힘써 실정에 벗어나게 잘못을 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대각의 의논이 너무 격렬하고 표현이 중도에서 벗어나 극악의 죄명을 덮어씌워 마치 우원이 매우 간사하고 사특한 사람인 양 여기고 있으니, 대각을 위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고, 이어 전일 차자에 대한 비답이 타당하지 못했던 점과 간관을 특별히 체직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것을 진달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고 처치한 일만 따랐다.
애초에 정석이 공의를 두려워하여 옥당이 우원에게 죄줄 것을 청하는 차자에 참여하였는데, 그의 무리들이 그를 공격하여 시론(時論)에 붙는다고 하자, 정석이 부득이 또 우원을 구제하는 말을 하여 처치하는 차자에 붙여 들여서 그의 무리들에게 자신을 해명하였다. 남의 눈치를 살피며 이랬다저랬다 한 그의 태도는 참으로 책망할 것도 없지만, 만약 상의 전교가 누차 공론을 억누르고 박대하는 뜻을 보이지 않았다면 정석과 같은 자는 참으로 감히 뒷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어찌 후재와 관징 등이 감히 스스로 다른 의견을 내놓는 일이 있었겠는가. 임금이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이같이 사령(辭令)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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