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8권, 현종 4년 1663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3.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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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무진

상이 하교하였다.
"비가 올 듯하면서도 내리지 않고 서늘한 바람이 연일 불어 일기가 서늘하니 가뭄의 조짐이 이미 이루어졌다. 애처롭게도 우리 백성의 목숨이 장차 끊어지게 되었으니,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잠깐의 사이도 편치 못하다. 심한 가뭄이 든 뒤에는 아무리 정성스럽게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예관으로 하여금 속히 기우제를 거행하게 하라."

 

사간 김만균 등이 아뢰기를,
"간하는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도리는 오직 그 일이 옳고 그른지를 살피면 됩니다. 표현이 아무리 지나쳤더라도 갑자기 꺾어서 공론을 위축되게 하고 사특한 당류로 하여금 기세를 돋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 동료들의 피혐한 말이 비록 과격하였지만 그들의 본래 마음이야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음과 양 중에 어느 것이 소멸하거나 성장하는 기미이므로 관계된 바가 적지 않고, 옳고 그르며 사악하고 바른 것의 구분을 엄히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한 전지가 거듭 내려 특별히 체직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들의 의견이 동료와 시종 다르지 않았으니, 신들만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정석(鄭晳)이 양사를 처치하면서 생각한 바를 모두 진달하여 양사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였습니다. 당초 옥당이 홍우원의 죄를 논할 적에 정석도 동참하였는데, 그때 처치한 말의 뜻이 준절하여 대각보다 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말을 바꾸었으니 앞뒤로 상반되는 그 마음의 자취를 숨기기 어렵습니다. 한편으로는 배척을 의논하고 한편으로는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는 등, 출몰하며 현란한 계책을 썼습니다. 신들이 이미 그의 배척을 받았으니, 태연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며 체직을 청했다. 집의 정계주와 장령 김익렴 등도 인피하기를,
"옥당이 처치한 차자에 자기가 생각한 것을 모두 진달하면서 감히 우원을 구원하는 계책을 내고 신들을 공격하고 배척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였습니다. 정석이 이미 당초에 옥당의 차자에 참여하여 우원의 죄를 극론했는데, 그 말의 뜻이 엄하고 날카로워 양사의 논의보다 더한 점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우원이 감히 옳고 그름을 현란시켜 흉악한 사람을 아부하고 비호하면서 방자하게 꺼리지 않고 이와 같은 데 이르렀다.’고 말을 만들고, 또 ‘조경(趙絅)이 앞에서 창도하고 우원이 뒤에서 잇달으니 성상께서 만약 한 번 동요되면, 참소하고 사악한 무리들이 반드시 팔을 걷어붙이고 손뼉을 치면서 사방에서 일어날 것이다.’고 말을 만들었으며, 또 ‘음과 양, 사악하고 바른 것이 소멸하고 성장하며 나아가고 물러난다.’는 설로 극구 말하며 탄핵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이 차자의 말을 이어 의논을 제기해 우원의 죄를 다스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말을 바꾸어 ‘식견이 어두워서 옳고 그름이 분명치 못하였다.’고 말을 하였으니, 이는 후재의 말을 그대로 쓴 것으로 당초 차자에서 ‘옳고 그름을 현란시키고 방자하여 꺼리지 않았다.’고 한 말과 어찌 그리도 상반된단 말입니까. 또 감히 ‘음흉하게 모함하여 넘어뜨리려는 마음이 절대로 아니다.’고 하며 우원을 구원해 풀어주려고 하였으니, 당초 차자 가운데 ‘사악하고 바른 것, 음과 양이 나아가고 물러가며 소멸하고 성장한다.’고 한 말과 어찌 그리도 한결같이 상반된단 말입니까. 그가 이랬다저랬다 기교를 부리며 양면으로 말하는 태도는 차마 바로 보지 못하겠습니다. 앞의 차자에서 ‘성상께서 만약 동요되면, 참소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손뼉을 치며 일어날 것이다.’고 한 말은 실로 자기를 두고 한 말이고 또 ‘대각의 의논이 너무 격렬해 표현이 지나치게 무겁다.’고 한 말은 바로 신들과 원만리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억지로 만리를 위하여 구원해 풀어주려는 말을 하여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숨기려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 이미 대각을 위해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으니, 이로써 논의를 세워 양사를 체직하자고 청했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출사하게 해달라고 청하고, 한편으로는 공격하는 등 앞뒤가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 급하게 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미 그의 배척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자리에 앉아 있겠습니까."
하고, 체직을 청하였다. 대사헌 김수항이 아뢰기를,
"논의할 적에는 이랬다저랬다 해서는 안 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할 적에는 두 가지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준절하게 배척했다가 뒤이어 변명하면서 한편으로는 공격하고 한편으로는 출사를 청하였으니, 전후 말을 바꾼 마음의 자취를 숨기기 어렵습니다. 책임이 지워질 곳이 있는데 서로 따질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인피한 말이 비록 과격하다고 하더라도 듣고 받아들이는 도리에 있어서는 본래의 심정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이 뜻밖에 갑자기 나왔으니, 일을 함께 한 신하에게 요행히 면했다는 혐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양사를 모두 출사하라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5월 5일 임신

평안도 희천(熙川)·영변(寧邊) 등의 읍에 우박이 내렸다.

 

대사헌 김수항 등이 홍우원을 삭출하자는 앞서의 계사 내용으로 거듭 아뢰기를,
"윤선도가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흉악한 계책을 펴보려고 도모했는데, 우원은 심지어 그의 설이 명백하고 정확하여 바꿀 수 없는 의논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선도의 흉악한 말과 어긋난 논설은 위로 선왕에까지 관계되고, 송시열을 모함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니고 그의 죄를 지척해 바로잡는 것도 성명께서 스스로 결단하신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원은 전후 대각의 의논이 전부 시열의 잘못을 덮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선도가 예를 빌어 화를 전가시키려고 한 마음에 대해서는 길 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인데 우원은 ‘어찌 사림에게 화를 얽으려고 할 리가 있었겠는가.’ 하면서 감히 극력 찬양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기개와 절개가 있고 과감히 말하는 사람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선도가 광해군 때 올린 소는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의 뜻을 따라 이이첨(李爾瞻)을 넘어뜨리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절개를 세운 것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우원이 비록 천하 후세의 의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차마 이처럼 심하게 자기 마음을 속이고 위로는 성명을 속일 수 있단 말입니까. 선도의 죄를 왕법에 적용한다면 죽여도 용서할 수 없는데, 죽임을 용서해 북변으로 유배를 보냈으니, 이 또한 곡진히 보전해주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원은 애석히 여기고 상심하면서 감히 ‘선비를 죽인 오명을 남길까 염려스럽다.’는 말로 성상을 위협하고 동요시켜 뒷날에 견제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는 조경이나 권시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경·권시와 우원은 숫놈이 선창하면 암놈이 화답하는 것처럼 맥락이 서로 통하니 변별해 내치는 도리에 있어서 의당 두 가지 길이 없어야 하는데, 성명께서 그들을 조처하신 것이 앞뒤가 다릅니다. 성상의 생각으로는 어지럽게 혼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계십니다만, 어진 것과 사악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분별은 실로 국가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기미에 관계됩니다. 만약 구차하게 용납하시어 의심을 갖고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조정하려고 애를 써도 어지러움은 도리어 심해져서 귀신·물여우·쥐 같은 무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입을 나불대면서 일어날 것입니다. 홍우원을 삭출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정언 원만리가 비록 지리한 말을 했지만 그것은 바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시어 성명께서 처분해 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특별히 체직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그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의관·역관·서리·공사간 노복의 묘소에 감히 성대한 비를 세우고 있는데, 그 길이가 5, 6척이나 되고 앞뒤면에 새긴 직함과 음기(陰記)도 한결같이 공경의 묘표와 같이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호조·형조·공조·한성부·의금부·도총부로 겸직을 갖추어 새겨 넣고 있으니, 그들의 간사하고 거짓되며 참람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성부로 하여금 하나하나 엄하게 사실을 밝혀내 제도를 벗어나 참람하게 위조한 것들은 모두 그 묘표를 철거하게 하소서. 또한 이조에 신칙하여 사대부가 아니면 절대로 추증을 허락하지 마시고, 육조·경조(京兆) 및 금오(金吾)·총부(摠府)의 겸직은 그 전에 추증된 자라도 모두 도로 거두게 하여 참람한 폐단을 막으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그러나 이미 직첩을 준 자에게는 도로 거두지 말게 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을 내의원 도제조로,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판서로, 이행진(李行進)을 예조 참판으로,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서필원(徐必遠)을 호조 참의로, 민진익(閔震益)을 경기 수사로 삼았다.

 

5월 6일 계유

지평 홍만용이 추함(推緘)이 마감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도 강계(江界)·벽동(碧潼),황해도 신계(新溪),강원도 평강(平康), 경상도 안동·영해(寧海)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려 곡식을 손상시켰다.

 

5월 8일 을해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아뢰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여 파종 시기를 놓쳤습니다. 그러하니 비를 비는 거조를 절대로 정해진 법전대로만 지킬 수 없습니다. 차례를 뛰어넘어 진행하는 데에는 또한 그전의 규례가 있으니, 이번 제3차 기우제의 제관은 전례대로 차임하지 말고 중신으로 특별히 차임하여 보내야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을 앓고 난 나머지 타는 듯이 괴로운 마음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아뢴 말이 참으로 옳으니 속히 거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제1차 기우제를 지내고 비가 내렸으므로, 헌관 오정일(吳挺一)·심지명(沈之溟) 등 이하에게 말을 내렸다.

 

5월 11일 무인

지평 이세익(李世翊)이 소를 진달해 체직되었다.

 

5월 12일 기묘

부교리 이유상(李有相) 등이 상차하기를,
"양사에서 오래도록 홍우원에게 죄를 주자고 청했는데 성상께서는 아직까지도 윤허하지 않고 계십니다. 윤선도가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과 조경이 사악한 당에 붙어 바르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는 성명께서도 이미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원이 감히 선도를 과감하게 말한 사람이라고 매우 칭찬하고 조경은 충직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사사롭고 사악한 마음을 펴고 흉악한 사람에게 아부해 비호한 죄는 참으로 조경과 그 죄과를 달리할 수 없으며, 그가 속임수로 현란시켜서 화를 전가시키려고 한 계략을 숨길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 처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실로 바른 것과 사악한 것이 소멸하고 성장하는 기미에 관계되므로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히 보여 간사한 싹을 끊어버리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물리쳐 버리는 법은 가하지 않으시고 조정하는 계책을 베풀고자 하시니, 이것이 바로 뭇 사람의 마음이 매우 의혹스러워하고 있는 바입니다.
소인의 화는 독사나 맹수와 같습니다. 그들이 사류를 해치고 나라에 화를 끼치는 것이 애초 연약한 돼지가 깡창깡창 뛰는 데서 비롯되지 않음이 없습니다.015)   그러므로 예로부터 조정하다가 실패한 것들이 모두 이 때문이었으니, 원우(元祐)016)  와 건중(建中)017)  의 일이 후세의 귀감이 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소인은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더라도 일찍이 틈을 엿본 뒤에야 일어났었으니, 방비를 조금이라도 해이하게 하면 그들의 마음을 열게 됩니다. 사특한 말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인들이 비록 많지마는 자신들의 성패를 보아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치를 엄하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기세를 더하게 됩니다. 세도(世道)가 오염되느냐 융성되느냐 하는 것과 국가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것과 생민의 화와 복이 모두 여기에 매여 있는 것이니, 절대로 용이하게 처치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일개 우원이 참소하는 설이 나라가 다스려지느냐 다스려지지 않느냐에 비록 대단한 영향은 없을 듯하지만, 저들이 조정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망령되게 헤아리고 틈을 엿보아 그들의 속셈을 펴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반드시 우원으로 경중을 삼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법과 의리로써 재량하여 그 단서를 꺾어 버린다면 국시가 저절로 정해지고 인심이 저절로 복종할 것입니다. 소요가 일어날까 꺼려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양사의 요청에 흔쾌히 따라 당파를 지어 나쁜 짓을 한 죄를 분명히 보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부사 이후산(李後山), 서장관 심재(沈梓)가 청나라로 갔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등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경기 수사 민진익(閔震益)은 어리석고 패덕하며 재능도 없는데다 또 탐오죄에 걸려 여러 해 동안 폐치되어 있었으니, 통어(統禦)의 임무를 이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오랜 뒤에야 그 청을 따랐다.

 

5월 13일 경진

간원이 여러 궁가에게 떼어준 곳을 혁파하자는 계사에 대해 오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하자 정지하였다. 이때에 사간 김만균(金萬均),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윤우정(尹遇丁) 등이 경솔하게 계사를 정지하였다고 물론의 비난을 받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5월 14일 신사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성으로,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김만균(金萬均)을 교리로, 남구만(南九萬)을 사간으로 삼았다.

 

대사헌 김수항, 집의 정계주, 장령 김익렴이 조율(照律)의 공사를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어 인피하였는데 체직되었다.

 

전 지평 윤징지(尹澄之)가 죽었다. 징지의 자는 거원(巨源)인데, 고 정승 윤두수(尹斗壽)의 손자이며 평안 감사 윤훤(尹喧)의 아들이다. 일찍 관리가 되었고 문채가 있었으며 또한 기량이 있었으므로, 선배들이 원대한 앞날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정묘년 오랑캐의 변란에 이르러 윤훤이 평양성을 버리고 지키지 않아 조정에서 군율로 사형을 내렸고 그뒤에 징지의 장인 유효립(柳孝立)이 연이어 반역으로 주벌됨으로써 징지는 전 주서(注書)로서 오랫동안 폐치되었다. 조정에서 그를 애석하게 생각하였는데 당시의 의논도 역적의 사위는 본래 영원히 금고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였으므로 선발해 시강원 설서에 제수하였다. 윤훤은 애초 평양성을 굳게 지키려고 하였는데, 종사관 홍명구(洪命耉) 및 여러 장교들이 모두 지킬 수 없다고 말하였고, 징지도 나아가 피했다가 뒤에 도모하자는 계책을 진달했는데 윤훤이 이 때문에 죽었다. 그뒤 징지는 죄인으로 자처하여 누차 제수하는 명이 있었지만 끝내 관직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승급해 전적에 제수하자 비로소 한 번 와서 사은하고 그날로 고향으로 되돌아 갔다. 병조 정랑에 제수된 뒤 지평에 발탁되고 금산 군수(錦山郡守)에 보임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물러나 여강(驪江)에서 30여 년 동안 은거하다가 죽었다.

 

5월 15일 임오

생원 이적(李積)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18일 을유

지평 홍만용이 아뢰기를,
"전적 권진한(權振翰)은 바른 사람을 추악하게 여기는 의논에 빌붙어 선현을 이루 말할 수 없이 모욕하였습니다. 치우치고 방탕한 말을 제멋대로 하며 패덕하고 망령된 짓이 비할 데 없는 정상에 대해 사람들이 너나없이 매우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도깨비 무리들은 의관의 반열에 참여시킬 수 없으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추고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종부시 정(宗簿寺正) 박승건(朴承健)은 서장관으로 압록강을 건너간 뒤에 질병이 매우 위중해 사신이 치계하여 비록 그를 뒤처지게 하였으나 승건으로서는 마땅히 그곳에 머물러서 조정의 명을 기다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먼저 되돌아와 사행에 결원이 생기게 했습니다. 국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그냥 놔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추고하게 하였다.

 

5월 19일 병술

민점(閔點)을 승지로,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이무(李堥)를 정언으로, 오정일(吳挺一)을 경기 감사로, 김만기(金萬基)를 집의로 삼았다.

 

지평 홍만용이 아뢰기를,
"근래 약간의 사자(士子)들이 중학(中學)으로 돌진해 들어가 여러 날 동안 모여 있으면서 중학의 유생들을 쫓아내고 숙직하는 방을 탈취해 웅거하며, 학관(學官)을 몰아내고 전복(典僕)에게 매질을 하는 바람에 학당이 텅 비었는데, 이는 일찍이 없었던 변고입니다. 학관이 금지시키지 못하였으니, 추고하소서. 그리고 앞장서서 선동한 유생을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적발케 하여 벌을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5월 20일 정해

호군 박장원(朴長遠)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이른바 내적간(內摘奸)의 거조는 제사지내는 곳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각기 파견할 만한 곳이 있으면 일의 경중과 대소에 따라 경계하고 신칙하면서 죄에 따라 처결하여 균일하지 않은 것을 가지런히 해야 하는데 이는 여러 조정에서 이미 행한 법규로서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요령이 있으니 진실로 번거롭게 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해야만 적당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만 있으면 파견하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되어서 폐단을 낱낱이 거론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인정이 익숙해져서 두려워하는 바가 적게 되었습니다. 이 어찌 적간하는 본래 의도이겠습니까. 신의 소견으로는 지금부터 성상의 뜻으로 간혹 한두 군데 파견하여 엄히 경고하고 살펴서 그 나머지를 책려하면 조종하는 것이 간략하면서도 효과는 넓을 것으로 여깁니다. 신은 적간하는 것이 이렇게 하는 데 있고 지금과 같이 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책을 수행하라고 하였다.

 

5월 21일 무자

진사 남중유(南重維)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하자는 요청이 을해년018)  에 처음으로 있었고 기축년019)  에 다시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성들께서 반드시 엄히 물리치시고 공론이 끝내 허락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이 두 신하의 학문이 거칠고 얕으며 감추기 어려운 흠이 있어서 절대로 성인을 제사하는 반열에 외람되게 올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로 좋아하는 이에게 아첨하는 일종의 의논이 있었으므로 신들이 한마디 말을 하여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만, 성명께서 정해진 교훈을 준수하시어 그들을 매우 미워하고 통렬히 끊어버리셨기 때문에 신들이 급급하게 논변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황상중(黃尙中)·유계(兪棨) 등이 기회를 타고 사사로운 생각을 펴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혹은 한 곳으로 모아졌다고 하는가 하면 혹은 허물을 뉘우쳤다고 하면서 애초 성명(成命)이 없었는데도 곧바로 회의를 요청해 군상을 위협하고 한세상을 겸제할 의사가 현저하게 있었습니다. 신들이 분함을 견디지 못해 많은 유생들과 일제히 중학(中學)에 모여 오늘 소장을 봉해 대궐에 나아가 하소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제 지평 홍만용(洪萬容)이 저지해 막으려는 음모를 슬그머니 품고 감히 저격하려는 수단을 써서 방자하게 독단적으로 아뢰어 선비들은 죄주자고 청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은 신들을 몰아 위협해 학궁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 불과합니다."
하고, 이어 만용을 헐뜯었다. 승지 이은상(李殷相) 등이 아뢰기를,
"두 신하의 학문과 도덕을 성상께서 존숭하고 계시고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성상께서 모르지 않으시면서도 요즈음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자못 너그럽게 장려하는 뜻이 부족했습니다. 지금 바른 사람을 추악하게 여기는 상소에서 두 신하를 무함하고 헐뜯기를 말할 수 없이 하였으며 심지어 ‘그들의 학문이 거칠고 얕으며 가리기 어려운 흠이 있으니 절대로 성인을 제사하는 반열에 외람되게 올릴 수 없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어찌 성명의 세상에 이런 치우치고 사악한 무리들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 두 신하를 종사하자는 요청이 몇 십 년을 지나 세 조정을 거치는 동안 팔로(八路)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삼사(三司)가 일제히 호소하고 있으니, 온 세상의 공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그만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억지로 도당을 모아 학궁에서 마구 소란을 일으키고 사악한 말로 선동하고 있습니다. 학관에게 죄를 주고 앞장서서 주창한 유생에게 벌을 시행하자는 대신의 의논이 있자 성상의 비답이 막 내려 미처 적발해 조처하기도 전에 그들이 감히 스스로 먼저 소를 올려 대관을 모욕하며 못 하는 말이 없었으니 거리낌없이 방자한 그들의 태도를 여기서 더욱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통렬히 배척하고 억제하여서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면 환퇴(桓魋)와 장창(臧倉) 같은 무리들이 반드시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이니, 어찌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바른 사람을 추악하다고 하는 상소는 이치상 물리쳐야 합니다만, 유생의 상소라고 이미 일컬어졌기 때문에 부득이 받들어 올립니다. 일찍이 신해년020)  에 적신(賊臣) 정인홍(鄭仁弘)이 차자를 올려 선정신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헐뜯자 그 당시 정원이 또한 계사를 진달해 논변하여 배척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전례를 인용해 이 뜻을 아울러 진달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중유 등이 한때 대각의 제기된 의논에 분개하여 이렇게까지 망령된 짓을 하였으니, 매우 가증스러운 짓이다. 소를 올리는 데 우두머리가 된 유생은 1년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에 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지평 홍만용이 남중유 등에게 비방과 모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는 부름을 받고도 나오지 않자 체직되었다.

 

수찬 이민서(李敏敍)가 중학(中學)의 겸교수(兼敎授)로서 남중유 등이 학궁에서 난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소를 진달하여 아뢰기를,
"유생들이 상소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관학(館學)에 문서를 보내 모임을 갖는다고 밝히는 것이 본래의 규례입니다. 어찌 사사로이 당류를 결합해 학궁에서 난을 일으키기를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숙직하는 방은 본래 유생들이 모여 숙박하는 곳이 아닌데 여러 날 진을 치고 웅거하였으며, 학관(學官)은 또한 유생을 맡은 관리인데 공공연히 마음대로 욕하고 내쫓았으며 식당은 학궁의 막중한 일인데 망령되게 스스로 없애 버렸습니다. 이들이 난동을 부린 것은 모두 무뢰한들의 악습이지 결코 선비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속이고 무함하고 숨기면서 대관(臺官)을 헐뜯어 그 흉악하고 패덕함을 극도로 하여 공론을 위협하고 대각을 동요시키고 성상의 귀을 현혹케 하여 음험하고 사악한 계책을 부리려고 하였으니, 그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학궁에는 각각 재임(齋任)이 있고 재실에 거처하는 유생들도 모두 학관에게 보고해 알려 문적이 있은 뒤에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함부로 들어가 사사로이 밥을 먹은 것은 재실을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들은 도리어 학궁을 비우지 않았다고 하고, 재실에 거처하던 유생들이 쫓겨나 이틀이 지난 뒤에 도로 들어왔으니 그렇다면 스스로 문적을 없애고 식당을 막아버린 것인데 그들은 도리어 유숙을 허락했다고 하며, 숙직하던 관리가 그들에게 몰려 쫓겨나 첫날은 숙직을 못하고 둘째 날은 밖에서 숙직했는데 그들은 도리어 그가 와서 숙직하도록 놔두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나무랄 가치도 없지만 조정이 존숭되지 못하고 세상의 도가 한심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이어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치 않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종기가 난 곳에 뜸을 떴다. 마친 뒤에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진사 남중유의 상소를 이미 입계하였으니, 옳고 그르고 사악하고 바른 것이 반드시 성상의 식감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두 어진 신하의 학문과 도덕에 대해서는 상께서 분명히 알고 계실 것이므로 지금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남중유 등은 심지어 ‘학문이 거칠고 얕으며 가리기 어려운 흠이 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들이 어떻게 학문의 깊고 얕은 것을 알아서 공공연히 방자하게 무함하고 모욕하기를 이와 같이 한단 말입니까. 소에 참여한 사람들은 생원·진사는 단지 두 사람뿐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아이들처럼 무식한 자들이니 반드시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히 보여야만 선비들의 습관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상소에 대관을 능멸하여 못하는 말이 없었으며 심지어 아비를 배반했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하고, 제조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두 신하를 문묘에 종사하는 거조는 일의 체모가 참으로 중대한데, 이같이 방자하게 헐뜯었으니, 선비들의 습속이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하고, 도제조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그들은 보잘것없는 후생들인데 어찌 감히 두 신하의 학문에 대해 경솔하게 논한단 말입니까. 심지어 논계한 대관을 꾸짖고 모욕하는가 하면 그들의 부형까지 비방하였습니다. 이는 일찍이 없었던 변고로서 조정이 존엄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5월 22일 기축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뜸을 떴다. 도제조 이경석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종기 이외에 습진이 또한 심합니다. 의관의 말을 듣건대 습진을 다스리는 데에는 온천물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하니 그 물을 가져다 씻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 곳에서 길어 오려면 반드시 민폐를 끼칠 것이다. 또한 길어오는 기간이 오래 걸리게 되면 성질이 변할 것이니, 아마도 효험을 보기 어려울 듯하다."
하자,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성명께서 민폐를 염려하고 계십니다만, 역말을 바꿔가며 수송하면 어찌 민폐를 끼치겠습니까. 신들이 물러나 서로 의논하여 다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일찍이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사대부들이 여염집을 빼앗아 들이는 것에 대해 이미 금지하는 영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받들어 이행하지 않고 어지러이 빼앗아 들임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이 매우 많으니 거듭 밝혀서 금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주인이 빌려주지 않았는데 주인을 내쫓고 빼앗아 들인 자들에 대해 법사(法司)와 한성부로 하여금 엄히 밝혀 금지하게 하라."
하였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송사의 적체가 지금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청탁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는데 외방이 더욱 심합니다. 백성들이 나아가 호소할 데가 없어 원망하고 탄식하는 자가 많습니다. 각도에 유시를 내려 이런 습관을 제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원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위임해 준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각도에 유시를 내려라. 그리고 그 뜻을 형조에도 신칙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5월 23일 경인

집의 김만기(金萬基)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 본직에 있으면서 중신을 함부로 논했다가 호된 비방을 받았으니 결코 뻔뻔스럽게 출사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관직아치들 사이에 혹 술을 너무 좋아해 위의를 잃어버리는 자가 있는데 그것이 익숙해져서 예삿일처럼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규제하고 경계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병조 판서 김좌명의 지난날 일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들은 것으로 대각이 규제한 것은 본디 전례를 따라서 한 것입니다. 추고하여 가볍게 벌한 것 또한 매우 미세했는데 신이 의도적으로 모함한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대체로 논핵을 받은 사람들마다 대간이 논한 것은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실로 근래의 폐습입니다. 좌명의 전후 상소 가운데에 신을 꾸짖고 헐뜯는 데 있는 힘을 다하였으니, 이 뒤로 재상에게 비록 커다란 과실이 있더라도 대관들이 신을 경계삼아 감히 입을 열지 않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고, 이어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김좌명도 상차하여 사직하기를,
"요즘 사람들 중에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아는 자는 드물고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잘못을 옳다고 우기는 자는 많습니다. 신 또한 지금 세상의 사람인지라 허물을 숨기고자 하였으나 되지 않았고 지금에 와서 또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다만 신이 스스로 믿는 것은 임금을 속이지 않으려고 한 마음이 벗을 공경하는 마음보다 지나쳤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신의 죄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이와 같은 말을 개의할 것이 뭐가 있는가."
하였다.

 

5월 25일 임진

홍만용(洪萬容)을 정언으로, 이광직(李光稷)을 지평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판서로, 박세모(朴世模)를 호조 참판으로, 서필원(徐必遠)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 등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날마다 취하여 쓰는 것으로는 산이나 바다의 이로움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 서민들과 그 이로움을 함께 하여 천택(川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지 않은 것은 모두 백성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궁가에게 산과 바다를 떼어 주는 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이른바 떼어준다는 것은 산에 있어서는 시장(柴場)이라고 일컬어 속미(粟米)와 봉포(蜂布)를 마구 거두고, 바다에 있어서는 어장(漁場)이라고 일컬어 도서의 암석까지도 점유하는 등 농락하여 침탈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산간에 사는 백성들과 바닷가의 민호(民戶)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모두 끊어져 그 폐단이 끝내 사람과 재물이 다 없어져 나라가 나라꼴이 안 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한때의 쇠잔한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잃어버리는 근심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혁파하자고 요청한 지가 벌써 해가 지났는데도 감히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백성의 기쁨과 슬픔, 국가의 이익과 병폐가 모두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화전(火田)의 조항에 대해 먼저 윤허를 내리셨는데 전하께서 백성들을 구휼하시는 덕을 누군들 흠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른바 화전이란 대부분 시장(柴場)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시장을 혁파하지 않고 단지 화전만 혁파한다면 비록 그것을 혁파했다는 이름은 있겠지만 끝내 그것을 혁파한 실상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 궁가에게 떼어준 시장·어장들에 대해 해조와 각도로 하여금 조사해서 혁파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김만균(金萬均) 등이 해가 넘도록 의논해 오던 일을 경솔하게 정계(停啓)했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기 때문에 이때에 다시 의논이 일어난 것인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관학(館學)의 유생 이적(李積) 등이 또 상소하여 남중유(南重維) 등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헐뜯은 정상에 대해 변론을 하고 이어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하기를,
"남중유 등 몇 명이 서로 거느리고 떼를 지어 방자하게 소를 올렸으니, 행동거지가 사리에 어긋나고 망령스럽습니다. 선비들의 의논을 비난하고 배척하며 대각을 꾸짖고 모욕했으니 무함하는 추악한 말은 참으로 입에 올려 그들과 다투어 변론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나 위로 선현을 모욕하여 감히 ‘도학이 거칠고 얕으며 가리기 어려운 흠이 있다.’고 말한 데 대해서는 또한 대략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성리학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에 이르러서야 훌륭한 논저가 나왔으니, 그의 공이 매우 성대합니다. 이황을 뒤이어 일어나 우뚝하게 도학으로 자임하면서 이 도를 세상에 더욱 밝힌 데 있어서는 이 두 신하에 이르러 공렬이 있었으니, 이는 이제까지의 모든 선생과 어른들이 이미 결정한 의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리들이 감히 그들의 도학이 거칠고 얕다고 말한 것은 과연 어디에서 근거한 것이겠습니까. 예로부터 성현들은 뭇 소인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누군들 한때 흠이 있다는 비방을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이 두 신하는 불행히도 당론이 일어나던 세상에 태어나 사악한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정인홍(鄭仁弘)·정여립(鄭汝立) 등 여러 흉적들의 무함이 어찌 끝이 있었습니까. 흉적들이 주벌된 뒤에 채진후(蔡振後)·유직(柳稷) 등이 앞에서 창도하였고, 지금 중유 등이 또 뒤따라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들은 간사하고 치우친 데 깊이 빠져 있으니,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이는 타고난 자품이 매우 높아 어릴 적부터 이미 도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선학(禪學)을 보고 기뻐하여 종사했지만 일 년도 못 되어서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고서 곧바로 이황을 방문하여 친히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이(理)를 궁구하고 경(敬)에 거하는 학문에 마음과 뜻을 기울였으므로 이황에게 크게 추중과 장려를 받았고 그 글들이 모두 남아 있으므로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황이 매우 미워하여 통렬히 배척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 저들도 사람인데 어찌 감히 허망한 말을 만들어 내어 한결같이 이런 데까지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황이 일찍이 인심도심(人心道心)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하였는데,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이와 성혼이 왕복해 변론하여 이황의 논설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이기(理氣)의 설이 여기에 이르러 남김없이 다 파헤쳐졌습니다. 가령 이황이 그때까지 살아 있어 같이 강론했더라면 반드시 흔연히 서로 일치되었으리란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것을 가지고 이이가 이황을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아, 주자(朱子)가 정자(程子)를 존숭했지만 경전을 해석하는 데는 다른 점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자가 정자를 비방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동서(東西)의 당론이 국가에 화를 끼치게 되자 이이만 홀로 단연코 망국의 화를 불러오는 근원이라고 여겨 진심을 다하여 구제하면서 원망과 비방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계미년021)  에 다시 임금을 만나게 되었을 적에 반드시 개혁을 실시하여 좋은 정치로 돌리고자 하였는데, 질투하는 무리들이 사방에서 떼 지어 일어나 헐뜯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감히 정권을 제멋대로 휘둘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말로 뒤집어 씌었습니다. 아, 사람의 말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망극하다고 하겠습니다.
성혼은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 매우 빨리 도를 들었으며 초야에서 뜻을 기르며 관직에 뜻을 끊었습니다. 높은 풍도와 준절한 절개는 온 세상의 종사(宗師)였으며 선비들의 의논이 존중히 여겨 아무런 이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혼이 계미년에 한 번 소를 올려 이이에 대해 거듭 아뢰어 사특한 당류들의 비위를 거슬리자 바른 사람을 추악하게 여기는 의논이 고슴도치 털처럼 들고 일어났는데 무너뜨리고 모함하는 것이 이이에게 한 것보다 더 심했습니다. 정여립 등이 모반한 기축년022)   변란 때 성상의 전교가 끊임없이 재촉하였기에 잠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인홍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나왔다고 공공연히 배척하였습니다. 임진 왜란 때 성혼은 초야에 있는 신하로 당파를 짓는다는 지목을 받고 있었으므로 부르는 명이 내리지 않으면 감히 스스로 나가지 않았는데 뒤에 분조(分朝)의 부름으로 인해 의주까지 나아갔으니, 그의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에는 대개 따로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로의 무리들이 하수인들을 선동하여 참소하는 말을 하는 것이 마침내는 증삼(曾參)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세 번 이르자 그의 어머니가 의혹했던 것처럼 성상의 의혹을 불러오고 말았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예로부터 현인 군자로서 한때에 무함을 받아 죽은 뒤에까지 비방거리를 남긴 경우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처럼 붕당의 설을 끼고서 날이 갈수록 더욱더 심해지는 경우는 아직 없었습니다. 이처럼 인심이 착하지 못하고 사악한 설이 비등한 날을 당해서는 굳건한 결단을 내려 속히 사문(斯文)의 성대한 법전을 거행해서 근본적인 법규를 바르게 하고 나아갈 바를 정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6일 계사

상이 희정당에서 뜸을 떴다.

 

5월 28일 을미

집의 김만기(金萬基)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 정언 원만리(元萬里)를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은 실로 대각을 너그러이 용납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계사를 진달할 적에 복역(覆逆)하는 것은 바로 승정원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전 승지 안후열(安後說) 혼자만 계사를 올릴 적에 참석하지 않고 또 뒤이어 그 때문에 변명을 하였으니, 그의 마음가짐이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중학에서 난을 일으킨 유생에게 벌을 내리라고 전교하였는데 사관(四館)에서 참석치 않은 자가 많으니 그 정상이 가증스럽습니다. 밖의 분관에서 다른 관서로 차임되어 아직 숙배하지 아니한 자를 제외하고는 참석치 않은 사관의 관원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경상도 상주(尙州)에 지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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