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9권, 현종 4년 1663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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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3명의 왜인이 표류 끝에 울진(蔚珍)에 닿았는데, 통역관을 시켜 부산관(釜山館)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등이 홍우원(洪宇遠)의 삭출에 관한 전번 주장을 되풀이하여 아뢰자,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그렇게까지 청하니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괴원(槐院) 분관(分館) 때 본관(本館)의 많은 관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앉아 가부를 논의한 끝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자기 편견을 고집하는 바람에 두 번씩이나 파좌(罷坐)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장무관(掌務官) 이하 14명의 관원이 그 때문에 죄를 입었으니 당초 시끄럽게 만들었던 그 사람 혼자 모면할 수가 있는 일입니까. 적발하여 죄를 과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적발하여 죄를 과하자면 사실 명백하지 않은 데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동료들이 전적 조세휘(趙世彙)에 관하여 논계하자는 일로 발론함에 신이 성상소(城上所)로서 대청(臺廳)에 왔더니 동료들 논의가 들쭉날쭉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결국 전계(前啓)까지 빠뜨리고 말았으니 신의 진퇴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하였다.

 

단천(端川)에 홍수로 인하여 집들이 떠내려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2명이나 되었으며, 길주(吉州)에서 경흥(慶興)까지의 9개 읍은 메뚜기의 피해가 있었다.

 

평안도에도 홍수가 져 연변의 집들이 떠내려가거나 묻히고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많아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7월 2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복시가 황해도·함경도 및 삼남(三南)에 점마(點馬)를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정언 송창(宋昌)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전적 조세휘가 평소 행검(行檢)이 없어 고을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는 사실은 원근에 그 말이 퍼져 자자하며, 심지어 제 아비 신주(神主)를 빈 집에다 반 년이 넘도록 버려두고 돌보는 사람 하나 없다 합니다. 그를 삭판(削版)하자는 뜻으로 신이 석상에서 발론을 하였더니 동료들 논의에 이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였더니 의견이 서로 엇갈려 끝내 이견들을 내세웠습니다. 동료들에게 멸시당하였으니 이 자리에 눌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김수흥(金壽興)도 인피하여 아뢰기를,
"정언 송창이 일찍이 전적 조세휘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가 중대한 비방의 대상이 되어 고을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자기 아비 신주를 반 년이나 넘게 빈 집에다 버려둔 채 보살피는 사람 하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사실을 자세히 살펴보려던 참이었는데 어제 모임에서 송창이 또 그 말을 꺼내어 이르기를, 다시 탐방하여 물어보았더니 사실이 과연 듣던 그대로였다고 하기에, 서로 초안을 작성할 것을 논의하는 한편 사간(司諫) 남구만(南九萬)에게 그 뜻을 간통(簡通)했더니 그의 답은 억울하게 될 염려가 있다는 긴 사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도 의심이 없을 수 없어 두 번씩이나 송창에게 갔었지만 그는 끝내 들으려 하지 않고 멸시를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까지 하고 있으니 신도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사간 남구만도 인피하여 아뢰기를,
"동료들이 조세휘의 패륜(悖倫) 문제에 대하여 신에게 간통을 보내 물어왔기에 신이 세휘 이웃에 사는 사부(士夫)들 말을 들어보았더니, 세휘가 금년 봄 신은(新恩)으로 소분(掃墳)을 하고 한 여자종을 두어 집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가 내려간 후 여역(癘疫)을 앓아 오래도록 올라오지를 못했고 여종 역시 도망가버리고 없어서 그의 일가가 그 신주를 자기 집에다 옮겨다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동료들이 듣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달라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서 처리하려는 것이었는데, 동료들이 서둘러 인피를 하면서 심지어 신이 일을 미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신의 본뜻은 의심스러운 말, 확실치 않은 사실을 가지고 남에게 죄를 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동료들과 소견을 꼭 같이 할 수는 없으니 체직시키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상이 모두 사퇴하지 말라고 하였다. 헌부(憲府)가 모두 출사(出仕)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3일 무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남노성(南老星)을 도승지로, 정만화(鄭萬和)·조한영(曺漢英)을 승지로, 이제형(李齊衡)을 헌납으로, 이원로(李元老)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장령 이지무(李枝茂)가 아뢰기를,
"괴원 분관 문제는 사체가 매우 중대하여 간택의 과정에서 반드시 일치된 논의를 따라야 할 것인데도 지난번 승문원(承文院) 분관 때 부정자(副正字) 이옥(李沃)이 대중 논의가 허락하지 않고 있는 자를 혼자 자기 소견만을 고집하여 꼭 이기려고 했기 때문에 두 번씩이나 파좌하였습니다. 그의 순사 멸공(循私滅公)한 죄를 그냥 둘 수 없으니 그를 잡아들여 문책한 후 죄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종전의 연경 가는 사행(使行) 때는 서장관(書狀官)이 검칙(檢飭)을 전담하여 왔었는데 이번 진하(進賀) 사행에는 서장관이 병으로 뒤쳐져 있었으므로 규례상 부사(副使)가 당연히 주관했어야 했는데도 사행 중에서 금물(禁物)로 인하여 붙잡힌 사건이 있었다니 너무나 놀랄 일입니다. 부사 이만(李曼)을 먼저 파직하시고 뒤에 추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약방 도제조(藥方都提調) 이경석(李景奭) 등이 여러 의원을 거느리고 희정당(熙政堂)에 들어가 병을 살폈고, 영상 정태화(鄭太和)와 비국(備局) 재신들은 빈청(賓廳)에 모여 있었는데, 상이 사관을 시켜 불러들였다. 조금 후 환관이 들어와 아뢰기를,
"부제학 이경휘(李慶徽)가 청대(請對)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들어오도록 명하고, 급히 묻기를,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자, 경휘가 말을 더듬으며 바로 대답을 못하고 한참 있다가 아뢰기를,
"김강(金鋼) 등이 상소하여 너무나 사리에 어긋나고 망령스럽게 두 현신(賢臣)을 헐뜯었으니 그에 대하여 당연히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 좋다 나쁘다를 명확히 했어야 할 것임에도 알았다고만 답하셨습니다. 또 옥당과 유생들의 변무소(辨誣疏)에 대해서도 분명히 가려 호되게 물리치신 하교가 없었으며, 민정중(閔鼎重)의 상소에 대하여는 오래도록 비답하시지 않아 뭇 사람들이 성상의 뜻을 알지 못하여 모두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내가 언제 김강 등의 말을 옳다고 했는가. 김강의 말을 옳다고 하지 않았으니 관학 유생들이 시끄럽게 변무하는 것이 괜한 수고들이 아니겠는가. 또 다사(多士)들의 상소에 대하여는 선왕조에서도 호되게 물리친 일이 없었다. 선왕조에서 종사(從祀)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두 현신의 도덕(道德)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었다. 인조조(仁祖朝)나 선왕조의 규례로 말하자면 관학 상소는 다섯 번을 넘지 않고 그쳤다. 그런데 지금은 열 차례에 이르고 있으니 여러 번 상소하여 허락을 받아내자는 셈인가. 너무나 외람된 일이다. 청대가 있다기에 무슨 다른 말인가 했더니 그 말이라면 가소로운 일이다."
하자, 경휘가 아뢰기를,
"사(邪)와 정(正)을 구별하는 것은 치(治)와 난(亂)에 관계가 되는 일이기에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아니하고 낮은 목소리로 괴롭다고 되뇌이자, 경휘가 무색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금군(禁軍)의 삭시사(朔試射) 때 기추(騎芻)037)  에다 한 차례에 다섯 번 명중시킨 자, 편전(片箭)으로 세 번을 맞힌 자는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의 계청에 따른 것이다.

 

예관(禮官)을 보내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박사(博士) 유팽로(柳彭老)에게 제를 올리고 또 순의단(殉義壇)으로 사액(賜額)하였는데, 단은 금산(錦山)에 있으며 고경명이 전사한 곳이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소를 올리어 사임하니 체직하였다.

 

7월 4일 기사

정언(正言) 이단석(李端錫)이 자기 아버지 이제형(李齊衡)이 헌납(獻納)이 되었다 하여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정언 송창이 또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이번 조세휘의 일은 분명히 드러나 있는 사실로서 백에 하나 의심의 여지가 없으므로 악을 미워하는 공정한 마음에서 끝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완석(完席)에서 발의를 했던 것입니다. 동료들은 그를 해명하는 변명만 치우치게 믿고서 분명하고 정확한 신의 말을 가리켜 도리어 기필코 자기 뜻대로 하려 한다고 하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공평하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까. 장관(長官)도 처음에는 논의에 함께 참여했다가 끝에 가서는 난색을 보이더니 급기야는 상대를 서둘러 공격하려 한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신의 말이 남에게 미덥지 못한 소치입니다. 바라건대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사간 남구만(南九萬), 대사간 김수흥(金壽興)도 모두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하였다. 집의 정계주(鄭繼胄)가 모두 체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면서 이르기를,
"도무지 결정하는 뜻이 없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차하기를,
"가뭄이 너무 심한데 비를 빌어야 소용이 없고 팔로(八路)가 똑같아 많은 백성이 모두 죽을 지경입니다. 지난번에는 가뭄 끝에 비가 내려서 풍년이 들까 바랐는데 도리어 장마로 변하여 산이 묻히고 언덕이 떠내려갈 지경이더니 지금은 또 햇빛이 쨍쨍합니다. 하루이틀 입추(立秋)가 다가오고 있는데 달이 정(井)038)  에 들고 비가 잘 내린다는 진일(辰日)·사일(巳日)이 지났는데도 구름도 끼지 않고 하늘은 맹숭맹숭하기만 합니다. 장마와 가뭄에 충재(蟲災)까지 겹치고 전염병으로 인하여 사망자가 줄을 잇고 있으니, 이 모두가 보통이 아닌 재변입니다. 어떻게 모두 심상하게 보아넘기고 무슨 변통을 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심리(審理)를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또 구언(求言)을 하고서도 채택을 않으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재변을 만났을 때는 역시 폐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구해야 될 민원(民冤)이라든지 늦추어도 될 민역(民役)은 팔도(八道) 감사에게 유시를 내려 절차를 생략하고 계문(啓聞)하여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심리부터 행하도록 명하였다.

 

7월 5일 경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시진(金始振)을 우부승지로, 김익경(金益炅)을 동부승지로,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판서로, 민응협(閔應恊)을 대사헌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대사간으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이혜(李嵆)·소두산(蘇斗山)을 정언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충청도 유생 김호(金灝) 등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고 또 김강(金鋼) 등이 꾸며서 무함한 실상에 대하여 따졌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응교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기를,
"망해가는 것을 숨기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살아남을 것을 꾀하는 자는 반드시 살아남는데 이는 필연의 형세인 것입니다. 국가가 5, 6년 전부터 천재가 거듭 이르고 장마 아니면 가뭄이 들어 이미 나타난 재화와 구제할 수 없는 재변이 그토록 극에 달한데다 오늘에 와서는 큰물이 진 끝에 또 이렇게 가뭄이 심하여 만약 수일 내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시 희망이 없습니다. 만 백성이 슬픈 목소리로 떠들면서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부르고 있어 백성들의 생사와 나라의 존망이 요 며칠 사이에 판가름날 지경이니, 이 어떤 기상인데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어슬렁어슬렁 보통 때나 다름없이 지냅니까. 어제 묘당(廟堂)을 인견하실 때도 가뭄 걱정에 대하여 한 마디 언급이 있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망해가는 것을 숨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요즘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나고 있는 것도 작은 재이가 아닌데 보는 이들은 아무 생각없이 보통 별 보듯 보고 있습니다. 아, 연거푸 흉년 끝에 작년에는 조금 나았다고는 하지만 해묵은 포흠(逋欠)을 한꺼번에 모두 내게 하여 추수가 끝나자마자 모두 거두어가버려 민생의 고달프기가 흉년보다 오히려 더합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걱정과 원한의 기운이 위로 하늘에까지 사무쳤으니, 오늘의 이 재변도 그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다만 임금 신하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여 너그러운 은혜를 대폭 선포하고 잘못된 정책을 깨끗이 씻어버림으로써 미워하고 있는 상제(上帝)께 사죄해야지 구구하게 빌기나 하는 정도로는 이미 성나 있는 하늘의 뜻을 돌리기에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세상 일 쳐놓고 지기(志氣)가 근본이 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지기가 강하냐 약하냐가 바로 성패를 판가름하는 것이기에 옛 호걸스런 임금들은 아무리 넘어지고 쓰러지고 꺾이고 상처 투성이라도 조금도 풀이 죽거나 흔들림 없이 의지를 더욱 가다듬고 기운을 더 분발하여 끝내 무엇인가를 이루었고, 또 영명(英明)한 임금이면 비록 병에 찌들고 있는 속에서도 나라 일을 잊지 않고 의지가 흐트러지지 않으며 기운도 약해지지 않아 끝까지 자기 일신의 병고 때문에 천하의 일을 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안에서 전하의 의지가 날로 나약해진다면 밖에서는 뭇 신하들이 맥이 풀려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가면 갈수록 더해만 간다면 억만 년을 설계하고 있는 종사(宗社)가 결국 어디로 갈 것인지 신들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전하께서 이 위망의 형세를 깊이 살피시어 스스로 마음속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시고 남 모르게 혼자 계신 곳에서라도 항상 상제와 귀신이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이 여기실 것이며 재해가 닥치면 마치 정녕 제 살에 닿은 듯이 하시고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이 작용하지 않도록 하십시요. 정신을 더욱 가다듬고 분발하여 의지를 확고히 하시고 풀이 죽거나 게으름이 없이 기운을 배양하실 것이며 여러 신하들을 자주 와내(臥內)로 불러들여 인견하시면서 아침에 한 가지 일을 채택하고 저녁에 한 마디 말을 받아들이시는 등, 위로 하늘이 합당히 여기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총동원하여 시들하고 위축된 뜻을 바꾸어 떨쳐 일어나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는 기운으로 만드시면 그야말로 오늘에 있어 살아남을 최상의 방법일 것입니다.
또 국가는 대간(臺諫)을 귀와 눈으로 삼고 있는데 공론의 옳고 그름과 민생의 기쁜 일 슬픈 일에 대하여 말을 하도록 해놓고서 그들이 한 말을 따르지는 않아 심지어 1년이 지나도록 그들 소청을 들어주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언로(言路)가 확 트이고 뭇 백성들 뜻이 숨겨짐이 없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경악(經幄)의 장관이 공론을 따라 청대(請對)하는 것은 그것이 예사인데도 내용을 절반도 다 아뢰기 전에 현저히 듣기 싫어하는 빛을 보이시니 그 역시 어찌 성인으로서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미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하를 예우하는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병들어 근심에 잠겨 있다가 이것을 보니 정신이 번쩍 난다. 위망의 갈림길이 되고 있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할 것이며 수성(修省)의 도리를 잊어서 될 일인가. 다만 끝에서 말한 듣기 싫어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사실 몰랐던 일이다."
하였다.

 

처음에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의 계본에 의하여 전세(田稅) 대동미를 실은 배의 파선으로 물에 잠겼다가 건져낸 쌀의 건으로 아뢰기를,
"《대전전속록(大典前續錄)》의 조전(漕轉)에 관한 조항에 의하면 ‘운반선이 깨져 쌀이 물에 잠기면 쌀 1말이 4되 5홉이 더 불어나고 그것을 말리면 3되 9홉이 줄어드는데 만약 평두 1섬이라면 물에 젖었을 때 6말 7되 5홉이 불어나고 말렸을 때는 5말 8되 8홉이 줄어든다. 파선이 된 곳의 관에서는 그것을 즉시 건져내어 그 방법으로 환산하여 나누어 주었다가 마른 후 역시 그 방법으로 환납한다.’ 하였습니다. 해당 도(道) 또는 해당 아문이 그 조항을 원용하여 그들 생각에는 평두 1섬의 쌀이 물에 젖으면 비록 원 수량 외에 6말 이상이 불어나지만 그것을 말리면 도리어 원 수량보다 5말 이상이 줄어드는 것으로 해석하고는 매섬당 9말 1되 2홉만을 바치겠노라고 하고 있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 원수량에다 물에 젖어 불어난 숫자까지 합산하면 총 21말 7되 5홉이 되므로 말려서 축이 간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11말이나 축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즘 들어 뱃사람들이 저희 멋대로 쌀을 훔쳐먹고는 고의적으로 패선이 되게 한 자가 매우 많습니다. 만약 매1섬마다 9말 남짓만 바치라고 한다면 5말 이상의 이익이 모두 그들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둘로는 꼽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국가의 손실이 예상되니, 신으로서는 결코 그렇게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그 아뢴 내용이 체계를 갖추었다하여 해당 아문에 그 사실을 물었다. 이에 호조가 아뢰기를,
"1섬의 쌀을 물에 젖어 불어난 것까지 합하여 계산하면 당연히 21말 7되 5홉이 되지만 만약 그 수량에 의거하여 말려서 축이 간 5말 8되 8홉만을 감해준다면 바쳐야 할 수량이 15말 8되 7홉이 되는데 그렇게 따지면 말려가지고 환납한 수량이 오히려 원 수량보다 더 많아진 것으로서 그러한 이치는 없을 듯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곡식이 물에 젖으면 불어나고 말리면 축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서 《속록》에서 말한 ‘말리면 5말 8되 8홉이 줄어든다.’ 한 것은 당연히 1섬의 원 수량 속에서 그것을 계산한 것이니, 법문(法文)대로 수량을 감하여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은 끝까지 필원의 말을 옳다고 여겼다.

 

7월 6일 신미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비망기로 일렀다.
"아, 천재와 시변이 어느 시대라고 없었으며 홍수와 가뭄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으랴만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와 같은 때는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에 와서는 천재가 너무 참혹하고 가뭄이 너무 심하여 쨍쨍한 불볕 더위에 벼싹이 모두 마르고 논과 밭이 갈라져 호미도 들어가지 않아 백성들은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으니 나라가 무엇을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고요히 깊은 상념에 잠겼노라면 차라리 죽어 없어짐만 못한데도 그것도 안 되는 것이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기초하고 바른말을 널리 구하여 잘못된 점을 메꾸어 나가도록 하라. 내가 생각건대 이 천재를 부른 것이 사실은 과궁(寡躬) 때문이지만 백집사(百執事)에 있어서도 어찌 잘못한 것이 없겠는가. 중외의 대소 신료들도 동료 사이에 서로 경외하고 공근한 마음으로 맡은 바 직책을 더욱 성실히 수행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노여움에 답하도록 하라."

 

풍랑에 표류되었던 김여휘(金麗輝)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여휘 등은 해남(海南) 사람으로 흉년으로 인하여 제주에 들어가 밥을 빌어먹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배 안에서 10여 일을 표류하는 동안 기갈이 심해 4명은 죽고 나머지 28명이 표류 끝에 작년 10월 한 섬에 닿았는데, 그곳 주민 모두가 장발을 하고 있었고 우리 나라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는 미음을 가져다가 구제하고 사흘을 머물게 했다가 관부로 압송하였는데 거기에는 장발자와 삭발한 자가 섞여 살고 있었다. 거기는 유구(琉球)에 소속된 섬으로서 대도(大島)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살마(薩摩)의 왜인들이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별도로 집을 지어 야외에서 살게 하고 식량과 반찬·옷가지 등을 대주었으며 내년 3월 남풍이 불어오면 가게 될 것이라고만 말하고 바깥 출입은 못하게 하였다. 유구 사람들은 의복이 넓고 컸으며 관(冠)은 쓰지 않고 평상시에도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왜인들과 같았다. 계절은 겨울과 여름이 없고 백성들 농사짓는 법은 8, 9월에 씨 부리고 1, 2월에 모를 심으며 6, 7월에 수확을 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올해 3월 바람에 맞추어 배를 출발시켜 살마와 장기(長崎) 두 섬을 거쳐 5월에 대마도에 닿았는데 지나는 곳마다 옷과 먹을 것을 대주었고 특히 대마도에서는 더 우대를 받다가 6월 15일 차왜(差倭)를 따라 부산에 정박하였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원옥(冤獄)을 심리하였는데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금부(禁府)·형조(刑曹)의 당상들이 입시하였다. 상이 판의금(判義禁) 홍명하를 시켜 그 부(府)의 문서를 읽게 하고 많은 죄수를 석방하였다. 대사간 서필원이 아뢰기를,
"신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가뭄을 만났다 하여 꼭 심리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는 죄를 범하고도 법 앞에 승복하는 자가 없고 중한 죄를 짓고서도 요행수로 빠져나가는 자가 많으니,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같이 형식적인 데 지나지 않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영중추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 말이야말로 너무도 생각지 않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형판(刑判) 허적(許積)이 이문현(李文炫)의 추안(推案)을 읽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 사람 정상이 매우 악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상이 어떠한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그 사람 자신이 말하기를 ‘내가 홍처민(洪處敏)의 딸과 간통을 하였다.’ 하였고, 그녀의 혼사가 논의되고 있을 때 문현이 또 형조에다 소장을 올리기를 ‘내가 처민의 딸과 이미 정을 통하였는데 그가 지금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려 한다.’ 하여 그녀가 그 추문을 듣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필원이 홍우원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할 것과 여러 궁가(宮家)에서 산과 바다를 떼어받은 것을 모두 혁파하도록 청하였는데, 이 모두 전번에 아뢰었던 것으로 상이 다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정언 이혜는 자기 종형인 이정(李程)이 사간(司諫)이 되었으므로 법으로 보아 당연히 상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집의 정계주는 어제 처치에 관한 비답에 도무지 결정하는 뜻이 없다는 하교가 있었다는 이유로, 장령 이지무(李枝茂), 지평 윤우정(尹遇丁)은 신 역시 그 처치에 간여되고 있는데 모호한 태도를 취한 실책은 전후가 똑같다 하여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원이 처치에 관하여 아뢰기를,
"상피의 법은 아랫사람이 당연히 체직되어야 하므로 이혜가 체직되어야 하고, 당초 처치 때 송창(宋昌)은 당연히 체직되고 김수흥(金壽興)·남구만(南九萬)은 당연히 출사해야 했는데, 전후 처치에 있어 한꺼번에 출사시키고 한꺼번에 체직하여 다 함께 모호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계주·지무·우정을 모두 체직시키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국가는 대간을 귀와 눈으로 삼고 있어 더욱이 사(私)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대간이 사를 행하면 그 해독이 심할 것은 필연인데 사성(司成) 김만기(金萬基)가 일찍이 헌납으로 있을 때 허적이 예판(禮判)으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논하려고 했었습니다. 허적의 사람됨은 상께서도 아시는 바이지만 근래 예판이 된 자가 반드시 허적보다 나을 것도 없는데 그가 논하려고 했던 것은 오로지 자기와 의견을 달리한 자를 치자는 목적이었습니다. 그후 허적이 사직함으로 하여 상께서 누차에 걸쳐 미안스러운 하교를 내리셨지만 만기는 끝까지 자수(自首)를 하지 않았으니, 염치로 보건대 부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날 임의백(任義伯)을 논의할 때도 이미 나왔던 말을 모두 고치고 그를 추켜세우는 말을 첨가하여 공공연하게 그를 신구(伸救)하였는데, 의백이 추솔하고 비루한 것은 온 조정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이는 오로지 자기와 같은 당이면 돕자는 뜻입니다. 그리고 김좌명(金佐明) 건은 처음 듣고서 논한 것이야 자기 직책상 당연한 것이었지만 급기야 그런 사실이 없음을 알고서도 끝까지 고집하였습니다. 그것은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뉘우침 없이 어물어물 넘기려는 짓이니, 바라건대 그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장령 김익렴(金益廉)이 지난번 본직에 있을 때 김좌명 사건이 있었는데도 그 사건을 사실대로 밝히지 못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체차하고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은 그의 재망(才望)과 이력으로 보면 합당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나이 이제 35세입니다. 기묘 명현(己卯名賢) 김정(金淨)은 그때 나이 36세로 형조 판서가 되었는데 그의 재능과 행검을 온 세상이 다 추존하는 입장이었는데도 당시 논의들이 오히려 너무 빨리 인재를 등용한다고 걱정들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수항은 김정을 따를 수가 없고 또 천관(天官)의 총재인데 어찌 재주와 명망만을 취할 것입니까. 반드시 노성(老成)한 사람을 써야만 한세상을 심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바꾸어 임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응교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서필원이 아뢴 말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나이는 비록 적지만 이미 열경(列卿)의 지위에 있는데다 재주와 명망도 합당하니 새로 총재에 임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국가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다만 그 인품이 어떠한가를 볼 뿐이지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이야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재주와 명망으로서는 합당하다고 하고서 또 나이가 젊다고 하여 체직을 청하였는데 일을 논하는 체모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천관의 장이라면 그 소임이 매우 중한데 물의를 따르지 않고 경솔하게 논핵(論劾)한다는 것은 사체로 보아 더욱 부당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들에게 물으니 대신들 모두가 아뢰기를,
"수항이 나이는 비록 젊지만 평소 재주와 명망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현재 종백(宗伯)에다 문형(文衡)까지 겸하고 있으니 그가 전장(銓長)으로 옮겨간다 하여 잘못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김만기(金萬基)가 허적(許積)을 논핵한 것은 그 당시 자기 의견이 그렇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꼭 자기와 의견을 달리한 자를 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또 임의백(任義伯) 탄핵의 글월을 멋대로 고친 것은 대관으로서의 체통을 잃은 것이기는 하지만 같은 당을 도운 일이라고야 하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일들을 가지고 곧 당동벌이(黨同伐異)라고 한다면 지금 세상의 사대부로서 그 죄를 면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고 어물어물 넘긴다고 한 말은 더욱 합당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니, 필원이 아뢰기를,
"옥당(玉堂)이 트집잡는 것도 그렇다고는 하겠으나 신이 틀린 곳은 다만 ‘당동벌이’라는 말을 썼다는 그것뿐입니다. 만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옥당에서도 말을 해놓고서 오직 공(公)보다는 사교(私交)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많기 때문에 말을 같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인피하고 나가버렸다. 상이 이르기를,
"가물더니 홍수가 나고 홍수 끝에 또 가물고, 세 번을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재앙은 더욱 심해 가니 이야말로 전에 없었던 재변이다."
하니, 유중이 아뢰기를,
"재변을 멎게 할 정책에 있어서 심리(審理)만으로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상께서 여러 대신들에게 직접 물어 방법을 강구하여 그 방법을 쓰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묻자, 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어찌 남이 말하기를 기다려서 아뢰겠습니까. 다만 오늘의 나라 일을 생각할 때 날이 갈수록 점점 갈피를 잃어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를까 싶습니다. 상께서 솔선하여 진작하는 방법을 찾아 힘쓰심으로써 무너진 기강을 바로세워야만 나라 일이 다스려질 것 같습니다."
하고, 원두표는 아뢰기를,
"임금은 인(仁)·명(明)·무(武) 중 하나라도 버려서 안 되는 것인데 성상께서 다소 나약한 점이 없지 않아 그것이 염려입니다. 그리고 어진 사대부들을 대하실 때가 적으시니 나라 일을 누구와 함께 의논하시겠습니까?"
하고, 경석은 아뢰기를,
"외방에는 없애야만 될 백성의 폐단들이 많습니다. 정원으로 하여금 팔도 감사들에게 유시를 내려, 우선 절박한 폐단부터 그들이 직접 찾아 물어 아뢴 후 변통의 길을 취하도록 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허락하니, 승지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비록 대신이 아뢴 말이지만 백성들의 폐단을 캐물으라는 것은 신으로서는 옳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유시를 내려 캐묻게 되면 외방에서는 너무나 큰 희망을 걸 것인데, 끝에 가서 결실이 없을 경우 결과적으로 신의만 잃게 되어 도리어 백성의 원성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하였다.

 

7월 7일 임신

대사헌 민응협(閔應恊)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헌납 이제형(李齊衡)이 패초하였으나 나오지 않았으므로 체직되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형조(刑曹)의 죄수들을 또 심리하였는데, 형판(刑判) 허적이 문안(文案)을 읽었고 상이 친히 결정을 내려 풀려난 자가 매우 많았다.

 

7월 8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홍처윤(洪處尹)을 예조 참의로, 이경억(李慶億)을 판결사(判決事)로, 남용익(南龍翼)을 병조 참판으로, 윤강(尹絳)을 이조 판서로,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집의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지평으로, 이세화(李世華)를 정언으로, 여민제(呂閔齊)를 장령으로 삼았다.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였다.

 

전남(全南)·함경(咸鏡) 등의 도가 크게 가물었다.

 

정언 소두산(蘇斗山)이 대사간 서필원에 대해 처치하기를,
"논리가 맞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아 전도되었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양주(楊州)의 유학(幼學) 이추(李樞) 등이 상소하여 문충공 김상용과 문정공 김상헌의 서원에 사액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사액을 허락하여 포상(褒賞)의 뜻을 보이는 것이 옳겠다고 복계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0일 을해

대사헌 홍중보가 현재 추감(推勘) 중에 있다 하여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7월 11일 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이정(李程) 등이 아뢰기를,
"내시 교관(內侍敎官) 이상익(李商翼)이 생도를 가르치면서 옛것을 인용하여 지금의 일에 빗대어 경계하고 타이르는 말을 하곤 하였습니다. 환관 양달원(梁達源)이라는 자가 그의 말에 분기를 느껴 상익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의관을 벗고 걸터앉아 상대를 멸시하는 빛을 현저히 보였으며, 상익이 학청(學廳)에서 생도들을 대하여 그 사실을 말하자 달원이 그 소식을 듣고는 더욱 화가 나서 그후 상익이 들어올 때 불쑥 그의 앞에 나타나 눈을 부라리고 팔을 휘두르면서 고약하고 버릇없는 말로 사정없이 욕설을 퍼부었다니, 이는 일찍이 없었던 변괴입니다. 그를 만약 중한 법으로 다스리지 아니하면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여 뒤폐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를 잡아들여 추문한 뒤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달원의 오만한 죄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먼저 파직부터 하고 뒤에 추문해야 할 것이나, 그가 가르침을 받는 생도가 아닌 바에야 서로 싸움질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잡아들여 추문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하였다.
처음에 상익이 학청에 와 생도들을 가르치면서 홍공(弘恭)과 석현(石顯)039)  의 일을 인용하여 훈계하기를
"이것이 바로 너희들이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것들이다. 얼마 전의 최대립(崔大立) 사건은 듣기에 매우 놀랄 일로서 내시(內侍)가 어떻게 감히 외조(外朝)와 서로 맞먹으려 할 것인가."
하였는데, 달원은 최대립의 양자(養子)로서 그 말을 듣고 분히 여긴 끝에 상익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무례한 짓을 하고 심지어 고약한 말까지 하면서 말하기를
"홍공과 석현이 어느 시대 사람이기에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불러대며 그들에게 비유를 했는가?"
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욕설을 퍼부어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위를 고약하게 여기던 터였다. 따라서 대간이 잡아들일 것을 청한 것은 공론(公論)이었는데도 상이 끝내 듣지 않고 심지어 서로 싸움질한 것이라는 하교를 하였으니 서글픈 일이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경석 등이 여러 의원을 거느리고 희정당에 들어가 병을 진찰하였다.

 

유학 권대시(權大時)가 상소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文廟) 종향을 청하면서
"동서(東西)의 논이 나오면서부터 공의(公議)는 없어졌고, 김강(金鋼)이 무함하고 헐뜯은 상소문도 그것이 모두 당론(黨論)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말하면서는
"평소 동인의 말만 익히 들어왔고 서인에 대하여는 어두웠기 때문에 양현(兩賢)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는 마음에 의심이 없을 수 없었는데, 양현이 남긴 문장을 읽어보고 오늘의 훼예(毁譽)로 참작을 해보고나서야 비록 뭇 사람이 제아무리 떠들어대더라도 어느 말이 옳은지를 이제는 깨닫게 되었다."
고 하였다. 이 상소문이 올라간 후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야 정원(政院)에다 비망기를 내리기를,
"대시가 감히 저쪽이다 이쪽이다 하는 말을 조금도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늘어놓았는데 그가 국법을 멸시하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가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잡아들여 국문을 가하고 엄히 다스리라."
하였다.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복역(覆逆)하기를,
"유생의 상소가 존현(尊賢)을 명목으로 삼았으니 그를 잡아들여 국문함으로써 청문을 의혹되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저쪽이니 이쪽이니 하는 말에 대하여 그대 역시 놀라는 뜻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그때 전조(銓曹)가 대사헌 물망을 추천하면서 수항은 추감 중이라 하여 의망하지 않았었는데 상이 대신들에게 물어 가망(加望)을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좌상 원두표는, 지금 품계(品階)에 맞는 사람이 없는데 이경휘(李慶徽) 같은 사람은 바로 경악(經幄)의 장관으로서 규례로 보아 승천(陞遷)에 해당하고 이유태(李惟泰)는 산림(山林)의 중망을 지니고 있으니 성상이 그 중에서 신중히 고르시라고 아뢰었고, 영상 정태화는, 김수항·박장원이 모두 추감으로 하여 망천의 후보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 두 신하를 망천에 추가하고 추감 건은 탕척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상이 태화의 말을 따르고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곽성귀(郭聖龜)를 헌납으로, 홍처대(洪處大)를 승지로 삼았다.

 

7월 12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은률(殷栗)의 사노(私奴)인 검충(檢忠)·유립(劉立) 등이 그들의 상전을 시해하고 죄에 승복하여 사형을 당했는데, 그 사건으로 현감 이집(李鏶)을 파면하고 고을을 혁파하였다.

 

지평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권대시의 소본에 저쪽이다 이쪽이다 한 말을 신이 비록 보지는 못했으나 참으로 놀랄 일입니다. 다만 대시가 유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의 죄가 또한 상소로 인한 것이라면, 상소를 한 유생을 잡아들여 국문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 수 백 년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더구나 재이를 당하여 구언(求言)을 하는 때인데 원근에서 그 소식을 듣는다면 틀림없이 의혹을 할 것이니 권대시를 잡아들여 국문하는 일만은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 이정(李程) 등이 권대시를 잡아들여 국문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청하자, 상이 답하였다.
"대시에 관한 명령을 거두어 들이라는 이 계사를 보고 나는 매우 탄식을 하였다. 아, 그 두 현신들이야 어찌 오늘의 사대부들 같이 이쪽 저쪽만을 따지고 국가는 생각지 않는 그러한 사람들이었겠는가. 그 두 신하들은 저쪽이다 이쪽이다 하는 붕당이 아예 없었는데 지금 대시가 상소문 속에서 그 말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그들을 존경하는 것인가, 아니면 천히 여기는 것인가. 그대들은 그것을 모르고 도리어 그를 일러 존현(尊賢)한다고 하니 매우 터무니가 없는 일이다."

 

7월 13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경억이 상소하여 사직하고는 아뢰기를,
"신이 정원에 있을 때 권대시가 그 상소문을 가지고 와 올리기에 신이 동료들과 논의한 후 경솔하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시가 상소문 내용이 혼잡했다는 이유로 국문까지 받게 되었으니 그 혼잡한 내용을 보고서도 받아들였던 자가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거기에서 말한 저쪽이니 이쪽이니 한 것은 그 맥락을 살펴보면 자기 딴에는 자기가 한 말이 공정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뿐이니 어찌 국법을 멸시하고 임금을 업신여겨 그런 것이겠습니까. 색목(色目)이 있은 이후로 크고 작은 장소(章疏)에 있어 때때로 저쪽이니 이쪽이니를 따지는 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도 모두 죄를 거론한 일이 없다가 지금 대시만 혼자 중한 벌을 당한다면 원근에서 듣고 모두 말하기를 ‘대시가 어진이를 존경하는 뜻에서 변무(辨誣)하다가 그 죄를 얻었다.’ 할 것이며 또 이르기를 ‘전하가 쉬지 않고 들어오는 종사(從祀)에 관한 상소문 때문에 화가 폭발하여 상소한 유생을 국문하는 일을 하였다.’ 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음양(陰陽)이 자리 다툼을 하고 시비(是非)가 서로 싸우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억사부정(抑邪扶正)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태도를 분명히 보여 주셔야 하는데, 지금 하잘 것 없는 일개 대시를 미워하시어 대단한 실책을 범하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하시고 도리어 간사한 무리들은 기가 돋고 사림들은 실망을 하게 만드시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나와서 살피라는 뜻으로 답하였다.

 

부제학 이경휘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뢰기를,
"신이 어제 마침 관중(館中)에 모여 있을 때 신하들을 인견한다는 명령이 있다 하여 한 번 청광(淸光)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서 감히 입대를 청했던 것입니다. 일을 판단하는 머리가 둔하여 묘당의 논의가 현재 한창인 것을 애당초 생각지도 못하였고 말주변마저 어눌하여 분명 통창하게 의견을 개진하지도 못하였으니, 신이 아뢴 말이 성상의 마음에 조금도 관심을 갖으시게 못했을 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상이 말씀하시는 표현 어딘가에서 현저히 싫어하는 빛을 보이셨으니, 신으로서는 참으로 황송하고 부끄러워 아뢰고 싶었던 것이 그 한 가지 일뿐이 아니었지만 금방 그만두고 나와 입을 다문 채 물러왔던 것입니다. 일을 아룀에 있어 조리가 정연하지 못하고 경솔했던 죄는 신 자신이 당연히 알고 있으나, 신이 꼭 거기에 매달리고 싶어했던 것은 사정(邪正)과 시비(是非)를 구별하는 일이 바로 국가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을 판가름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것도 바로 해와 달같은 성상의 밝음이 혹시라도 시비 사정에 어두어 그 무훼(誣毁)의 말까지 함께 받아들이실까 염려해서인 것입니다. 신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경솔하게 했던 말도 무슨 다른 뜻이 있어서였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타내려다가 천위(天威)를 가까이 두고 스스로 낭패를 불렀던 것입니다.
지금 천재와 시변이 거듭 나타나고 민심이나 나라 형세에 하나도 믿을 것이 없어 전하께서 걱정하시고 두려워하시는 마음으로 모든 최선의 방법을 다 쓰고 계신 것은 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돌보시는 뜻이 위아래에 믿음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다 어진 선비들은 날로 멀어지고 바른 말은 들을 수도 없습니다. 대신 소신 모두가 유유히 게으름만 피우고 있으면서 나라 일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방치해두고 있습니다. 아, 이 어찌 위태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옥후(玉候)가 편찮으셔서 비록 뭇 신하들을 자주 대하여 치도(治道)를 강구하시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권위와 기강을 장악하시고 더욱 진작의 뜻을 분발하며 대간들의 아룀을 수용하시어 충간(忠諫)의 길을 넓히셔야 합니다. 때문에 스스로 저상하지 마실 것이며 옛 습관을 지켜 스스로 편하려고만 하지 마소서. 대신들을 격려하고 백료를 경계하여 시들하고 소심한 습관을 뿌리뽑고 각기 두려워하고 힘쓰는 마음을 갖게 하십시오. 하늘의 뜻에 따라 재이를 소멸할 수 있는 방법과 폐정을 개혁하고 백성을 돌보는 모든 정책에 있어서 물불 속에서 구해내듯이 함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는 희망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답을 후하게 하고 허락하지는 않았다.

 

평안도 유생 이창진(李昌震)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성 민정중이 상소하여, 선현을 무함한 김강 등의 죄에 대하여 극구 논박하고 두 현신의 종사는 당연히 허락해야 한다는 뜻을 갖추어 개진하면서, 길게 수백언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일찍이 종사의 청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 그 원인을 따져보았습니다. 그것은 당초 한두 명의 유생이 가볍게 발언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선배 장자(長者)들의 정론이었습니다. 때문에 숭정(崇禎)을해년040)  에 관학(館學)의 유생 송시영(宋時瑩) 등이 처음으로 다섯 차례 상소를 올려 두 현신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때 채진후(蔡振後)도 수십 명을 거느리고 헐뜯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 내용이 대체로 김강의 것과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전후 변명의 상소가 당시 선배인 장유(張維)·조익(趙翼) 등에 의하여 기초되었습니다. 그 일의 시비 사정이 분명한 것은 마치 흑과 백을 금방 구별할 수 있는 것과도 같아서 김강 등이 오늘 무함하는 것은 모두 그때 이미 분명하게 밝혀졌던 사실들입니다. 신으로서는 다시 한두 마디도 덧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인조 대왕의 비답에도 처음에는 이르기를 ‘이이·성혼이 비록 선인(善人)이라고는 하나 도덕이 높지 못하였고 하자가 있어 비방당했으니 막중한 종사의 예를 결코 가벼이 논의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인조께서 두 신하의 본말을 자세히 모르고 하셨던 말씀입니다만, 그래도 선인이라고 인정을 했었습니다. 그후 비답에서 이르기를 ‘오현(五賢)의 종사를 청해왔을 때 선왕조가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던 것은 유학을 가벼이 여기고 도(道)를 천히 여겨서가 아니라 사체가 매우 중했기 때문이었다.’ 하였습니다. 이는 인조께서 두 신하의 도덕의 실상을 자세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다만 사체가 중대하다고 하고 오현의 일을 인용하면서 바로 윤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김강 등은 첫번째 상소문에 대한 비답만을 들어 전하를 속이려 하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영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사실을 밝혔고, 좌의정 오윤겸(吳允謙), 대사헌 조익(趙翼)도 서로 이어 상소로써 논변하니 그 내용이 가장 상세하며, 옥당의 유신(儒臣)들도 차자를 올려 사실을 밝혔으나, 지금 감히 다 거론할 수는 없습니다. 5도(五道)의 유생들도 15, 16차례에 걸쳐 상소하여 논변하였는데 성상께서도 비답하시기를 ‘두 사람이 비록 어질기는 하지만 종사의 예도 매우 중하여 가벼이 논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성상이 마음 두신 바가 이렇게 분명한데도 지금 김강의 무리들이 바로 전하를 속이려고 하니 다른 속임수야 밝히지 않아도 알 만합니다. 아, 김강 등이 두 현신을 헐뜯는 것이 진후보다 못하지 않은데도 오늘날 공경·대간·옥당이 끝내 한 마디 변석의 말이 없으니 전하께서 어떤 길을 통하여 두 현신의 도덕에 관한 내용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오도(吾道)가 날이 갈수록 침체하고 사설(邪說)이 성행하는 것이 괴이한 일도 아닙니다. 효종 대왕 초년에 와서 홍위(洪葳) 등이 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때 성상은 비답에서 반드시 선현(先賢)이라 칭하시고 털끝만큼도 깎아 말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준엄하게 막았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괴물이나 귀신같은 성급하고 망령된 무리들이 두 신하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하면서 두 현인을 공격하면 그것이 바로 저들 당의 유쾌한 일인 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경인년에 유직(柳稷)이 투소(投疏)했다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더욱더 성난 마음을 품고 심지어는 두 현인을 깎아내린 내용의 어비(御批)를 위조하여 도내에 뿌리다가 금방 발각되어 법에 따라 죽음을 당한 사실도 있습니다. 풍토와 인심이 그렇게까지 무너져 있다면 김강 등이 거리낌없이 그런 짓을 한 것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옛날 나라 전체의 많은 선비들이 바야흐로 오현의 종사를 청하였을 때 오직 정인홍(鄭仁弘)이 영남(嶺南) 지방 사람들을 이끌고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헐뜯으면서 공론에 맞섰는데, 지금 김강 등이 수백 명의 사당(私黨)을 불러모아 이이·성혼을 멋대로 무함하면서 그 논법이 인홍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신은 사실 영남을 위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본말을 깊이 따져보시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여 간사한 말들이 행해지지 못하고 선비들의 추세에 일정한 방향이 있도록 하소서. 그러면 사문(斯文)의 다행일 뿐만이 아닐 것이니, 곧 국맥(國脉)을 길이 보존하고 원기(元氣)를 강장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 종사의 청을 따르지 않는 것이 어찌 두 신하의 도덕이 보잘것없다 하여 그런 것인가. 또 김강 등의 상소가 어떻게 그 두 신하의 도덕을 속일 수 있을 것인가. 변무(辨誣)의 말은 나도 사실 그 내용을 잘 모르겠다."
하였다.

 

상이 핵환(核患)으로 대조전(大造殿)에서 뜸을 떴다.

 

7월 14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응교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기를,
"신이 들으니 까마귀와 솔개 알도 건드리지 않아야 봉황새가 온다고 합니다. 지금 권대시가 비록 지극히 미미한 존재이나 이름이 유자이고 그의 말이 비록 순수하지 못하다 하여도 그 명칭은 상소입니다. 국문으로 다스리라는 명령이 뜻밖에 내려졌다는 것은 죄의 경중은 막론하고 결코 성세(盛世)에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조종 수백 년 이래로 포의(布衣)들이 글월을 올리면서 어찌 미치광스럽고 어리석고 망발한 말들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준엄하게 국문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기휘(忌諱)를 몰랐던 자는 용서를 해주고 문망(文網)에 걸린 자는 빠져나가도록 했으며, 질서도 없고 주견도 없이 놀랄 말을 한 자라도 역시 불문에 붙이고 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랫사람들을 너그럽고 인자하게 대함으로써 국맥(國脉)을 수립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풍(士風)을 격려하고 언로(言路)를 열어주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하찮은 대시의 무질서한 언어가 무슨 큰 책망거리가 된다고 수백 년 동안 일찍이 없었던 일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시행하여 조종조의 가법(家法)을 어기는 것도 개의치 않으시는지 신들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 송시철(宋時喆) 등이, 상소한 유생 권대시를 잡아들여 국문하고 엄하게 다스리라는 명령을 철회할 것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미천한 사람이 설사 어리석고 분수에 넘치는 말을 했을지라도 미친 사람, 망령된 사람으로 여겨버린다면 그로서도 달게 받겠지만, 만약 그에게 국법을 멸시했느니 임금을 업신여겼느니 한다면 이는 맞는 말이 아닙니다. 저쪽 이쪽을 구별한 말이 과연 해괴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는 오늘날 조신(朝臣)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병통입니다. 그가 특히 문자로 표기하여 성상의 귀를 번거롭게 했다는 것이 참으로 밉살스런 일이기는 하나 대성인(大聖人)의 하늘같은 도량으로 그 말을 물리쳐버리고 쓰지 않으면 되지 꼭 그 말을 꼬투리잡아 기어코 국문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끝부분에 이른바 ‘오늘날 조신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병통이다.’ 한 말에 나는 참으로 놀랐다. 오늘의 조신 중에서 만약 터놓고 그런 말을 한 자가 있다면 잡아들여 국문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하였다.

 

7월 15일 경진

대사헌 김수항이, 지난번 이판(吏判)에 임명되었을 때 간관(諫官)의 논박을 받고 체직한 사실이 있고 곧 대직(臺職)을 맡았다가 추감(推勘)이 끝나기도 전에 대신의 청에 의하여 의망(擬望)된 것이 모두 국가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라 하여 상소하고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윤강(尹絳)이 연거푸 3차에 걸쳐 상소하고 체직을 빌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평 장선징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붕당(朋黨)의 병은 근원이 깊고 뿌리가 굳게 내려 오늘에 와서는 널리 퍼질 대로 퍼져서 이미 고황(膏肓)이 되었습니다. 위로 조신(朝紳)에서 아래로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는 자 누구이겠습니까. 설사 사사로이 서로간에 붕당을 표방한다 하더라도 외람되이 면류(冕旒)의 아래까지 들리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대시가 감히 저쪽이니 이쪽이니 하는 말로 대궐에다 아뢰었으니 전하께서 대단히 싫어하여 물리치고자 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없는 것을 있다고 하여 성상을 속인 것은 아닙니다. 그의 생각과 행동을 살펴보면 다른 뜻은 없는 듯하고 국가 체면으로 논하더라도 상소한 유생을 국문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너무 지나치신 조처를 보고서 말을 안할 수 없었는데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여 금방 엄한 꾸중이 내려졌으니 그 죄의 발단은 사실 신에게 있습니다. 바라건대 신의 직을 파하소서."
하였다. 장령 송시철(宋時喆)·지평 이단석(李端錫)도 그 일로 인피하니,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도록 하였고, 간원이 출사(出仕)할 것을 계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7월 16일 신사

장령 송시철과 지평 이단석·장선징이 입계할 공사(公事)를 잘못 쓴 불찰 때문에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청나라 사행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사행을 따라갔던 사람이 금령을 범하고 붙잡힌 일로 하여 대간이 부사(副使)의 죄를 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성 밖에 멈추어 상소하기를,
"신이 사신의 엄무를 잘 못하여 간사한 무리들로 하여금 금령을 범하고 일을 저지르게 하여 국가에 피해를 끼쳤으니 단속을 잘못한 책임을 신이 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난번에 죄책을 스스로 느끼고 치계하여 그동안의 사항을 갖추어 아뢰었을 때 굽어 살피시어 은대(恩貸)를 내려주셨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대평(臺評)이 다시 일어나 비록 신의 이름까지는 거론하지 않고 있으나 이는 두 쪽을 다 탄핵하자는 뜻인데 상국(上國)에까지 관련되는 죄를 지은 신이 어찌 감히 홀로 면하겠습니까."
하고, 세 번씩이나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으나 상은 너그러운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고 즉시 들어오라고 하였다.

 

밤에 월식이 있었는데 비가 내려서 관측할 수가 없었다.

 

7월 17일 임오

흉년 때문에 삼남(三南)의 수군 조련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참판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니, 체직하였다.

 

7월 18일 계미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윤우정(尹遇丁)·이후(李煦)를 지평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병조 참의로, 원만석(元萬石)을 판결사로, 이세장(李世長)을 검열로 삼았다.

 

상이 대조전에서 침을 맞았다.

 

7월 19일 갑신

양구(楊口)의 여종인 옥기(玉只)가 자기 지아비를 시해하였는데 삼성(三省)의 복안(覆案)에 승복하여 사형을 당하였다. 이어 현감        김흥지(金興祉)를 파면하고 그 고을을 혁파하였다.

 

장령 여민제(呂閔齊)가 병으로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아뢰기를,
"하늘을 만만히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인데 1개월 내에 기우(祈雨)를 하고 또 기청(祈晴)을 하여 너무 자주 빌고 있으니 성실치 못함이 여실히 드러난 일이요, 백성은 얕잡아보아서는 안 되는데 작년 가뭄에 구언(求言)하고 금년 가뭄에도 구언하여 해마다 구언하고서도 그 말은 채용하지 않으니 이는 아예 구언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지금 구언의 하교가 있은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으나 안으로 조정에서나 밖으로 초야에서 단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진언하는 이가 없습니다. 이는 말하지 않는 자의 죄가 아니라 구언을 성의없이 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황해도 유생 최세익(崔世益)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집의 남구만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 심리 때 전 판서 조형(趙珩)도 사면받을 대상에 들었다가 입시한 대관의 쟁집(爭執)으로 인하여 그만두었습니다. 다음날 그 대관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마침 여러 신하들의 신주(申奏)가 있어 조형의 죄를 풀어 주었습니다. 당초 도년(徒年)으로 처치하였던 것이 과중한 것은 아니지만 하자와 허물을 탕척해버리는 것 또한 왕자(王者)의 인자함이니 지금쯤 석방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다만 대관의 쟁집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가 그 대관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 곧 풀어주었다는 것이 사체로 보아 온당치 않고 뒤따를 폐단도 염려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조정에서 너그러운 용서가 너무 많고 고식적인 면이 점점 늘어가는 반면, 엄숙한 기운이 부족하여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염려스러운 것은 오늘날의 시들한 기상이 이러한 일들로 하여 더욱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조형의 석방 명령을 거두어주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0일 을유

기우 끝에 비가 내렸으므로 헌관(獻官)과 여러 집사(執事)들을 차등을 두어 논상하였다.

 

7월 21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차하기를,
"신은 숨김이 없어야 하는 것만 알고 시의(時議)에 관하여는 모릅니다. 지난번 가뭄을 걱정하여 죄수를 재논의할 때 조형을 방면하도록 명하셨다가 곧 대신(臺臣)의 말로 하여 그 명령을 다시 철회하셨습니다. 그 처분이 심리의 뜻과 다소 배치되는 점이 있는 듯하여 신의 의사를 끝까지 아뢰어 결국 석방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론(臺論)이 비록 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으나 당시 신주(申奏)의 수창자가 사실은 신이었는데 어찌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홍석범(洪錫範) 생원 삭방(生員削榜) 건도 신은 억울하게 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부거(赴擧)가 자기 숙부의 임시 장례가 치루어진 뒤에 있었던 것으로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아뢰었던 것인데, 서필원(徐必遠)은 금령(禁令)이 있기 이전인가 이후인가를 살필 것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대론이 장례 이전이라고 하였으므로, 다만 장례를 치르기 전이었는가 치른 후였는가만 밝힐 것이지 금령 전인가 후인가는 따질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해당 아문이 회계했다는 것을 들으면 장례 이전 이후는 따지지 않고 다만 금령의 전후만을 거론하여 결국 대론을 중히 여겼습니다. 대론을 중히 여기는 까닭은 그 말이 옳아서 그대로 시행하면 나라 일에 보탬을 주기 때문인데, 만약 혹시라도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여 필부 필부(匹夫匹婦)가 억울함을 당하게 된다면 어찌 대론을 존중한다 하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마는 것이 옳겠습니까.
요즘 여러 대신들이 번번이 대각 후진들에게 곤욕을 당하는데 없는 사실까지 들어 대신을 업신여긴다면 국가 체통이 점점 무너지고 조정이 존엄을 잃어, 시비를 가리는 즈음에서도 허실(虛實)에 관계없이 떠들고 일어나 경솔하게 논의할 것이니 일을 당하여 미혹되지 않을 자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고, 이어 자기를 체파하여 물의(物議)에 사죄하도록 간청하였다. 이에 상은 너그러운 비답으로 위로의 유시를 하고 또 해당 아문을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당시 대신들 중에는 노성(老成)한 이들이 많아 매사에 신중하고 개혁이나 경장(更張)을 주장하는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각(臺閣)으로서 말하기 좋아하는 자와 남의 과실 논하기 좋아하는 자들의 말은 일체 듣기 싫어했는데, 서필원은 대신들이 더욱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 또한 사리에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재상 정유성·이경석 등이 전후 누차에 걸쳐 말을 하였다.

 

장령 이유(李秞)가 인피하고 아뢰기를,
"정원이 아뢴 내용에, 이후(李垕)·이규령(李奎齡) 등을 추고하여 법을 적용함에 있어 죄는 같은데 적용한 법이 다르다 하여 환급(還給)할 것을 아뢰어 청하였고, 또 박세모(朴世模)에게 법을 적용하는 공사에 있어 공신을 부표(付標)할 때 조(祖)와 종(宗) 두 글자를 바꾸어 썼다 하여 준엄한 하교가 있었다니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체직하소서."
하였고, 집의 남구만도 그 때문에 인피하니 모두 체직하였다.

 

7월 22일 정해

사행 때 유황(硫黃)으로 금령을 범했던 사람 허룡(許龍)·언남(彦男)이 체포된 채 경옥(京獄)으로 왔는데 의금부와 형조가 합동으로 추문하도록 명하였다.

 

평안도  용천(龍川) 마을에 쌓아둔 보리가 천화(天火)로 소실되고, 사람과 동물들도 여럿 벼락에 맞아 죽었다.

 

7월 23일 무자

강원도 생원 이모(李模)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문간공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지평 이후(李煦)가 인피하고 아뢰기를,
"신은 본부(本府)가 전번에 아뢰었던 홍우원(洪宇遠) 건에 대하여 의견을 같이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우원은 직이 임금과 가까운 곳에 있는 몸으로서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를 당사(黨邪)로 지목하여 꼭 중한 죄로 다스리려고 하니 그것이 옳은 일인지 신으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신의 잘못된 의견이 이러하므로 그대로 자리에 눌러 있을 수 없으니 체직을 바랍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아뢰기를,
"공의가 이미 정해진 일인데 감히 그를 비호하려 드니 그의 마음가짐이 매우 고약합니다. 이후를 체직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종부시 정(宗簿寺正) 박승건(朴承健)이 전번 사행 때 서장관으로서 강을 건넜다가 병 때문에 돌아왔었는데 이제 와서 상소하기를,
"신이 혹심한 병에 걸려 명을 받고 국경을 나갔다가 중도에서 돌아오고 말아 꺼림한 생각이 가슴 속에 맺혀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앞으로 또 동지(冬至)의 사행이 있을 것인데 신이 비록 큰 병을 겪기는 하였으나 이제 거의 다 나았고 배표(拜表) 날짜도 아직 몇 달이 남았으니 서장관을 신으로 바꾸어 임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그 상소문을 해당 아문에 내렸다. 이조(吏曹)가 아뢰기를,
"서장관이 이미 차출되었는데 지금 와서 바꾼다는 것은 사체로 보아 미안한 일이고, 또 후일에 사행이 계속 있을 것이므로 그의 원을 들어줄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4일 기축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뜸을 떴다.

 

김시진(金始振)을 호조 참의로, 유계(兪棨)를 좌윤으로, 이숙(李䎘)을 수찬으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7월 25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본직에 있을 때, 거자(擧子) 홍석범이 자기 숙부가 병으로 죽어 초빈에 있는데 바로 감시(監試) 초시(初試)에 응시했기 때문에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그에게 삭적(削籍)의 벌을 내렸고 또 해삭(解削)이 되기 이전에 체면을 무릅쓰고 복시(覆試)에 응하여 드디어 참방(參榜)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는 사실 종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논계하여 방(榜)에서 빼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신(相臣)이 그의 부거(赴擧)가 장례 이후에 있었다 하여 억울하다고 하고 대계(臺啓)가 사실을 잘못 알고 한 것으로 말하고 있어 신이 그대로 자리에 눌러앉아 있을 수 없으니 체직을 바랍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사간 이정(李程) 등이 출사(出仕)할 것을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6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남이성(南二星)을 지평으로, 이익상(李翊相)을 봉교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좌랑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우참찬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삼았다.

 

일본 오도(五島)의 왜인 3명이 표류 끝에 울진현(蔚珍縣)에 닿았다. 그들 각자에게 식량과 옷가지를 주고 부산관(釜山館)으로 보내 저들의 나라로 들여보내도록 명하였다.

 

대사헌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의 크고 작은 공사를 반드시 이조(吏曹)를 거치도록 한 것은 조종조의 정한 제도로서 진실로 아무 뜻 없이 한 일이 아닙니다. 삼가 듣건대 내사의 간정대출(間定代出) 공사를 해당 아문에 알리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몇 백 년 동안 전래한 규례가 오늘에 와서 금방 무너졌다면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관계된 바가 매우 큽니다. 바라건대 전례대로 해당 아문에 알리고 나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쇠할 대로 쇠한 운세를 직접 당하여 분개하고 슬픈 마음으로 진작(振作)과 수거(修擧)에 있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시고 이 간대(艱大)의 업을 전하께 넘기셨습니다. 전하께서 자리에 올라 대통을 이어받으시고 밤낮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선왕이 남기신 법도와 공렬에 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왕께서 널리 구해놓으신 철인(哲人)은 당연히 국사를 돕는 책임을 맡아야 할 것인데도 간사한 말이 선동하는 바람에 한 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선왕께서는 밤낮없이 나랏일에 힘쓰시어 청단(聽斷)을 멈추지 않으시고 출납(出納)에 막힘이 없게 하셨는데, 지금 와서는 대수롭지 않은 장독(章牘)까지도 시간이 지연되고 막히는 일들이 많으니 그로 말미암아 위아래의 뜻이 서로 소통되지 않고 있는 점이 많습니다. 선왕께는 중문(中門)을 활짝 열어놓은 큰 도량이 있으셨고 내마음을 미루어 상대방을 이해하는 지극한 사랑도 있어 신하들을 대하는 것이 마치 여느 가정의 부자(父子) 사이와도 같았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하찮은 것도 살피시고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도량이 애초부터 넓지 않았던 것도 아니며 재보(宰輔)와 시종(侍從)의 신하가 충성을 원치 않는 자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진현(進見)도 자주 않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폭도 넓지 못하고 절실한 격려마저도 없는 것입니다.
선왕은 문무를 병용하고 국운을 장구히 할 방법에 마음을 쓰시어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기에 바쁘셨는데, 오늘에 와서는 선열(選閱)의 방법과 권과(勸課)의 길이 다만 이름만 있을 뿐 실질적이 되지 못하여 유교(儒敎)가 부진하고 무략(武略)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군대란 정예하여야지 수만 많을 필요는 없는 것이므로 하는 일 없이 먹는 자가 있으면 그 비용은 당연히 삭감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선비란 국가의 원기(元氣)로서 국가가 선비를 배양하는 것은 바로 그 원기를 배양하여 현관(賢關)에다 두어 앞으로 재목으로 쓰려고 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들을 고무하고 흥기시켜 비록 과격한 행위를 하거나 미치광이같은 말을 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장려해야지 꺾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요즘 와서 중외 장보(章甫)들의 상소가 실로 시끄러운 편이고 사문(斯文)의 중대한 의전을 가벼이 허락하고 싶지 않으시더라도 수답(酬答)을 미루지 마시고 너그럽게 유도하셔야지 소홀히 보아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로 하여금 준엄하게 거절하는 비답으로 의지가 저상되고 국문으로 다스리는 위엄 앞에 기가 꺾이게 한다면 그 어찌 성세(盛世)의 누가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왕께서는 재이를 구제하고 백성을 돌보는 일에 있어 미처 못 미칠세라 곳집을 풀고 곡식을 옮겨보내기를 반드시 제때에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수재 한재를 당하여도 백성들 중에 병들어 죽거나 수척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 해 전의 큰 흉년은 그 참혹함이 원근이 똑같았는데 그때 일을 맡았던 자들이 구황 정책에 있어 미리 연구해 두지도 못하였고 실시마저 뒤늦게 하여 양남(兩南) 백성들 가운데 굶어죽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았는데 말하기에도 너무 참혹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그나마 남은 잔민들이 또 혹독한 가뭄과 장마에 시달리고 있으니 물불에서 구해 조금도 그 구원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만약 서둘러 헤아리고 모든 조건을 완전히 갖추어 제때 거행하도록 대비하지 않는다면 늦추다가 시기를 놓치게 되어 죽어가는 자를 구제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왕의 마음처럼 마음을 가지시어 우물쭈물하는 폐습을 뿌리뽑고 무엇인가 해낼 수 있는 뜻을 가다듬어 본말(本末)이 한꺼번에 성취되고 종시(終始)가 간격이 없이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묘당(廟堂)에서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응교 이민적(李敏迪)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 위로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시고 아래로 백성들 일을 염려하시어 비가 내리지 않음을 걱정하신 나머지 간절한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죄를 자신에게로 돌리고 반성의 뜻이 담긴 덕음(德音)을 사방에 선포하시니 모든 중외의 신공(臣工)들이 누군들 그 지극하신 뜻을 받들어 하나라도 도움이 되도록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랫동안 귀기울이기 이미 열흘 보름이 넘었지만 대신이나 소신이나 간에 고요하기만 하고 단 1명도 응지(應旨)한 자가 없는데 성명께서도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 까닭을 강구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성명께서 자리에 오르신 지 5년 동안에 혹독한 재이를 거듭 겪으셨고 재이를 당하여 구언(求言)하신 적도 이미 한두 번이 아니며 신하들 역시 일에 따라 올린 말들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일찍이 한 마디 말 한 가지 일에 있어서도 쾌히 시행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 어찌 날로 아뢰어진 상소 중에 하나도 취할 만한 것이 없어서였겠습니까. 처음에는 매우 부지런히 구언했다가 끝에 가서는 잊은 듯이 버려두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난색을 보이지 않으면 또 반드시 오래된 폐단을 갑자기 바꿀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보겠다고 하신 것도 결국은 더 생각해보신 것 같지 않고 논의하여 처리하라고 하시고도 끝내는 폐기됨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가상히 여기시고 장려하는 뜻이 담긴 하교가 있어도 필경에는 파기의 결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안과 밖이 해체되고 예정(銳精)이 사라져버려 대소 신료들이 구언을 모두 의례히 쓰는 실속없는 도구로만 생각하여 진언(進言)을 한대야 아무 보탬이 없는 공담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만약 전하께서 참으로 뜻을 분발하시고 귀를 활짝 열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시는 아량을 보여 사방의 말이 이르도록 하시려면, 우선 지난날 삼사(三司)가 올린 장차(章箚) 중에서 실행이 가능한 것부터 먼저 거두어 채택하여 차례로 거행하시기 바랍니다.
신들이 본관(本館)에서 있었던 전후 차론(箚論)과 근일에 양사(兩司)가 아뢰었던 것들을 한데 모아 우선 좌우(左右)에다 올리겠습니다. 여기에는 성상의 궐유(闕遺), 국가의 이병(利病), 민생의 휴척(休戚)에 관한 내용들이 대략 담겨져 있어 작은 도움이나마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성상의 궐유에 관하여 논하기를 ‘접견이 너무 드물어 위아래가 뜻이 통하지 않고 꽉 막혀 있으며 경연을 여는 날이 없어 성상의 학문이 날로 퇴보하고 잘못된 정치가 따라 발생하는 것입니다. 호령과 시행, 또는 조치에 있어 으레 많은 세월이 걸리기 때문에 대소의 신료들이 모두 맥이 풀려 의기가 소침한 상태이고 위아래 할 것 없이 서로 본받아 대세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맥이 빠져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시사(時事)가 지극히 위태롭고 기업(基業)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생각하시어 위로는 옛날 흥망(興亡)이 판가름났던 일들을 살펴보시고 안으로도 성상의 마음의 병근(病根)이 어디 있는가를 반성하시어 힘찬 용기와 다시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이른 아침에 집무하시는 곳에 나가소서.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번갈아 모시면서 일들을 아뢰게 하시고 연신(筵臣)도 틈틈히 강론에 임하게 할 것이며 대소 신료들도 생각이 있으면 입대하게 하여 모든 공사가 지체됨이 없이 제때에 결재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정원의 문독(文牘)을 보면 거의 모두가 담당자가 처리할 자질구레한 일들입니다. 그에 있어 그 줄거리만을 추려보아야지 어떻게 일일이 다 신경을 쓸 것입니까. 지난날 여러 승지(承旨)가 번갈아 아뢰던 것이 바로 선왕조 유법(遺法)의 뜻이었습니다. 만약 각방(各房)이 각기 맡은 분야대로 직접 아뢰어 재가를 받고 그리하여 즉시즉시 결재가 되면 아래에는 정체된 일이 없을 것이고 위에서도 신경 쓸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 방문(訪問)을 내리고 모두 복역(覆逆)하게 하면 아래의 뜻이 쉽게 전달되고 위의 뜻도 잘 통할 것이니 온종일 쉴 틈이 없이 혼자 문부(文簿) 사이에 매달려 있는 것에 비하여 그 차이가 비교나 될 것입니까.’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이른 봄에 전하께서 연신(筵臣)에게 이르시기를 「비록 눈병이 있지마는 수시로 강관(講官)에게 읽히고 누워서 듣더라도 무방하지 않겠느냐.」 하셨다니 그것이 바로 학문에 계속 관심을 두어 조금도 간단이 없게 하자는 훌륭한 마음이셨는데 어찌하여 그 명령을 내렸다가 다시 철회하였습니까?’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삼가 보면 옛 제왕(帝王)들은 왕(王)이건 패(覇)이건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뜻의 대소에 따라 모두 거기에 상응하는 효과가 있었는데 그것은 뜻이 이미 확고한 후 오로지 그 한쪽으로 매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성명께서는 정사에 임하여 지치를 시도하시기 이미 3년이 지났으나 성상께서 가지고 계시는 뜻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망령되이 생각하기로는 성상의 뜻이 확고하지 못하여 비록 인심(仁心)은 있으나 그 드러난 것을 따라 더 확충하지 못하고 비록 선정(善政)이 있지만 그를 유추하여 막힘없이 통하게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정신이 폭넓게 작용되지 못하고 굳건한 체계가 확립되지 않아 성상의 마음이 지속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뭇 사람의 뜻도 들쭉날쭉이어서 제각기 제 마음대로 큰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작은 것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안일을 좋아하는 자는 쉬려고만 하고 선을 저해하는 자도 꺼리는 바가 없으므로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피곤하고 나라 역시 날을 거듭할수록 위태롭기만 합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지금 갈팡질팡 방향을 잃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계시니 이것이 신들이 바로 성주(聖主)를 위하여 애석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이병에 관해서는 논하기를 ‘나라를 좀먹는 것이 사치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사치가 극에 이르면 하늘이 반드시 병황(兵荒)의 재앙을 내려 크게 씻어버리는 것으로 이는 너무나 무서운 일입니다. 지금 위로는 사대부에서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치가 한계를 넘어 끝도 없으니 위망의 조짐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국토를 가진 자는 반드시 그 땅에서 나는 생산물을 가지고서 그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자급자족하게 하는 것이니, 꼭 먼 곳 물건을 가져다 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과조(科條)를 엄히 세워 우선 궁중에서부터 법복(法服) 이외에는 비단을 쓰지 말고서 귀척·공경·사서인에 이르기까지 역외(域外)의 물건을 이용하는 것을 일체 금지할 것이며 범한 자는 금물(禁物)을 사통(私通)하는 죄와 같은 율(律)을 적용하면 민생의 큰 좀을 영원히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지금 도성 안의 군대가 1만 명을 웃도니 그들 열흘 경비면 10만 명의 하루 경비에 해당합니다. 그러고서야 국가 용도가 어떻게 동이 나지 않을 수 있으며 민생이 어떻게 피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처의 방법을 서둘러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전번에 흉년으로 인하여 신호(新戶)를 더 뽑는 일을 정지한 바 있으니 지금 그대로 그 영(令)을 지켜 더 뽑지도 더 보충하지도 말고 현재 있는 군대 중에서 가려 뽑아 수가 반만(半萬)이 넘지 않도록 하면서, 군자창(軍資倉)의 별창(別倉) 제도를 정비하여 정공(正供)이 양병(養兵)하는 데 쓰이지 않게 한다면 나라 형편이 조금은 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대각(臺閣)이 인피로 인하여 자주 갈리기 때문에 관방(官方)도 따라서 안정을 잃어 임기를 길게 하여 책임을 다하게 할 희망이 이미 없어졌습니다. 바라건대 오늘부터라도 조한(條限)을 정하여 크게 염우(廉隅)에 관계된 일 또는 당연히 파직시켜야 할 사항이 아니면 모두 체직시키지 말고, 비록 추궁하고 심문할 일이 있더라도 양사(兩司)가 따로 추함(推緘)을 내게 하여 국초(國初)에 했던 것처럼 한다면 틀림없이 실현시킬 이치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민생의 휴척에 관하여 논하기를 ‘공사간 둔장(屯庄) 등에 대하여 국가에서 바로잡으라는 명령을 번번이 내리고 있지만 아직도 실효가 없어 백성들이 나라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빨리 혁파하여 국가가 지성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양민(良民)들이 부역을 하는 데 있어 그 고되고 수월하기가 사람에 따라 갑절에서 다섯 곱까지 차이가 있어 한 명이 피해 도망가면 그 화가 1백 호에 미칩니다. 똑같은 왕민(王民)으로서 혹자는 마을에서 편안히 지내고 혹자는 가산을 탕진하고 그 피해가 일가붙이 가까운 이웃에까지 미칩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일찍이 그 일을 논하면서 매우 통절하게 말하였고 짜놓은 계획과 방법이 모두 조리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묘당이 중지를 모아 그를 거행함으로써 폐정을 완전히 바꾸도록 하소서.’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훈국(訓局)·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 모두에 군부(軍府)가 있으므로 당연히 재정도 있어야 할 것이나 봉강(封疆)을 각기 점거하여 산과 바다의 조세를 멋대로 받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조정이 공부(公賦)를 분할하여 재용에 모자람이 없도록 하고 둔전(屯田)은 모두 지부(地部)에 귀속시키며 민호(民戶)는 모두 본읍(本邑)에 귀속시키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주자(朱子)가 구황책(救荒策)을 올리면서 맨 먼저 거론한 것이 포흠(逋欠) 면제였습니다. 이른바 포흠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죽고 없어 받을래야 받을 곳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가 그에 대하여 무엇을 아까워하여 생령들의 원성과 괴로움만 쌓이게 할 것입니까. 서둘러 분명한 성지를 내리시어 모두 완전히 탕척하소서.’ 하였습니다.
대체로 10여 조항에 달하는 문제들을 삼가 이상과 같이 개진하였습니다만 큰 요지는 성명께서 정사에 부지런하시고 학문을 강론하며 뜻을 세워 근본을 수립하시고 마음을 맑게 하여 기운을 배양하며 한마음을 경외(敬畏)하시기 바라는 것뿐입니다. 또 성명께서 사치를 금하시고 금병(禁兵)을 제어하시며 지성으로 현자를 초빙하고 인재를 수습하며 염분(鹽盆)·어전(漁箭)을 혁파하여 군자창에 귀속시키고 간관(諫官)·대직(臺職)을 오래 재임하게 하여 기강을 세우실 것을 바라는 것뿐입니다. 또 성명께서 백성을 병들게 하는 둔장(屯庄)을 없애고 받을 곳 없는 포흠을 면제하며 양민의 부역을 균등히 하고 이웃과 일가붙이에까지 파급되는 일을 없애며 각 아문이 전봉(專封)하는 폐단을 혁파하실 것을 바라는 것뿐입니다.
이상 모두가 임금을 바로 모시는 일이며 백성에게 여유를 주는 정책으로서 성명께서 만약 차분한 마음으로 살펴보시고 부류별로 미루어 실천에 옮기신다면 그 어찌 국가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치(治)를 논함에 있어 모두 궁금(宮禁)을 엄히 하고 사경(私逕)을 막는 것을 첫째 조건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임금으로서 정대한 체통인 것이며 성인(聖人)의 원대한 배려로 된 제도입니다. 왜냐하면 궁금이 엄하지 않으면 사경이 반드시 열리고 사경이 열려 있으면 나라 다스리는 법이 점점 어지러워지는 것은 필연의 형세입니다. 그러나 이른 바 궁금이 엄하지 않다는 것은, 반드시 혼조(昏朝) 때처럼 회뢰(賄賂)가 유통하고 청알(請謁)이 공공연히 행해져 바야흐로 정사를 해칠 만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방한(防閑)의 방법이 조금만 해이해지면 사닐(私昵)의 길이 점점 넓어져서 혹은 안의 말이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바깥 말이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여 이 모두가 정사를 어지럽히는 조짐이 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가(朝家)의 가법이 매우 엄정하여 안과 밖이 매우 절연합니다. 신들이 듣기로는 조종조에서 궁중의 여시(女侍)가 감히 사사로이 밖에 나가 오래 있지도 못하였고 궁척(宮戚)들 문안도 감히 때없이 자주하지 못했으며 사가집 친부모도 모두 제재하는 법도가 있어 감히 불법적인 청을 넣어 법도에 넘치는 은총을 바라지 못했다는데, 이 어찌 열성조를 이은 임금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법도가 아니겠습니까.
오늘에 와서는 궁금이 엄하지 않다는 말들이 항간에 자자하여 여러 궁가의 알현에 관하여도 혹 그 말을 전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내사(內司)가 여러 궁가와 한데 어우러져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서로 거치지 않는 것이 없고 잠깐 사이에도 걸핏하면 서로 빙자한다 하니 이 모두 조종조에 일찍이 없었던 일들입니다. 그렇게 미루어 볼 때 슬픈 사연과 달콤한 말의 부탁이 반드시 없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으며 정사를 해치고 공(公)을 어지럽히는 조짐 또한 오늘에 와서 시작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선왕의 제도에는 비록 가까운 신하로서 아침 저녁으로 모시는 자라도 그 출입이 모두 일정한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의관(醫官) 등도 궁금의 사인(私人)으로 화하여 약방(藥房)·정원(政院)에 알리지도 않고 조석으로 입시하여 성내(省內)에서 묵고 있거나 환시(宦侍)들과 서로 어울리고 혹은 적(籍)이 없는데도 입숙(入宿)하는 자까지 있어 궁성(宮省)의 바른 법도를 어지럽히고 사닐의 부정한 길을 열고 있습니다. 이훈(李訓)·정주(鄭注)의 사건은 고금의 지극한 경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로부터 환관을 말할 때는 반드시 충직과 근신자를 취하였고 재주있고 구변좋은 자는 두려워했습니다. 임금은 비록 그가 종이요 훈부(熏腐)의 나머지인데 저가 무엇을 하겠느냐 하여 다시금 단속하지 않지만 그들은 성사(城社)041)  를 의지하고 걸핏하면 왕명을 빙자하여 점점 제어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와서 환시들이 점점 중요한 일을 맡고 이름도 점점 높아져서 심지어 일백 관아를 분부하면서 정원을 거치지 않는 자까지 있으니 위세가 궐내에서 당당하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재신(宰臣)을 업신여기고 조사(朝士)에게 욕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모든 일은 미미하게 시작되다가 현저해지고 작은 것이 커지게 마련이니, 북사(北司)042)  와 남아(南牙)043)  가 갈라진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입니다.
상선(尙膳)의 직이 비록 2품(品)이라고 하지마는 《대전(大典)》에 그것을 종2품 아문에다 기록하지 않고 여러 아문 아래, 잡직(雜職) 맨 앞에다 기록하였으니 조종조의 은미한 뜻을 거기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모든 것을 미연에 막고 충근(忠謹)으로 가르쳐 면밀한 경계와 함께 엄한 단속을 하시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삼가 듣건대 심리(審理)하던 날에 대신들이 재이를 멎게 하는 방법으로 뭇 신하들을 책려(策勵)하라 하였다는데 그야말로 지론입니다. 소관(小官)들을 책려한대야 기껏 자기 직책 수행에 분주하고 밤낮으로 봉사하는 것뿐입니다만, 대신들을 책려한다면 옳은 것은 올리고 잘못된 것은 폐하며 허물을 바로잡고 잘못된 점을 규찰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할 직분입니다. 순(舜)이 직(稷)과 설(契)에게 명하기를 ‘나의 어긋난 점을 너희가 도우라.’ 하였고,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하기를 ‘아침 저녁으로 교훈의 말을 올리라.’ 하였으며,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은 간쟁으로 자임하였고, 장구령(張九齡)·한휴(韓休)의 무리들도 모두 알고서 말하지 않은 것이 없어 정관(貞觀)·개원(開元)의 치적을 남겼습니다. 옛 대신들은 그 책임이 이러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면 요즘 대신들의 규모가 모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제일의 계책으로 알고 가부(可否)가 없는 것을 체통을 지키는 것으로 알아 국론(國論)의 옳고 그름과 민생의 병들고 괴로움, 조정의 잘못 등을 손을 놓고 바라만 보기를 마치 진(秦)나라와 월(越)나라 사람이 서로 상관하지 않듯이 하면서 다만 비국(備局)의 문서로 일과를 삼고 견문에 익숙한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재이와 흉년으로 나라 형세가 위태로운데도 오히려 일없이 날만 보내면서 그것으로 당장에 구차히 지낼 계책을 삼으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대신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가 조금 높아 경재(卿宰)의 서열에 있는 이들도 나약에 빠져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단 한 사람도 의견을 내어 이해 문제를 논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이는 참으로 오늘의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그러나 대신들이 자발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 역시 임금이 책려하는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재상이 자기 임무를 다하기만 하면 중직(衆職)을 모두 잘 거느려 백관이 자기 직책을 태만히 할 수 없게 할 수 있으니, 이는 재상이 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계회(誡誨)를 조목조목 아뢴 것은 심상하지 않으며 은근하고 간절한 충정이 언사에 넘치고 있다. 나를 계회한 내용은 깊이 새겨두고 조심스레 생각할 것이며 조목별로 올린 일들은 묘당에서 논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그후 대신 인견 때 영상 정태화 등이 그 차자를 가지고 상 앞에서 여쭈어 논의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차자에서 아뢴 바 학문에 정진하고 뜻을 세우고 마음을 맑게 하고 기운을 배양하고 경외하는 등등의 일은 성명께서 얼마만큼 애써 실천에 옮기느냐의 여하에 달려 있고, 사치를 금해야 한다는 조항에 있어서는 지금 사치의 폐단이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하여 금지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성상께서 몸소 절검(節儉)을 행하시어 앞장서서 인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답이 없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현재 훈국(訓局)에 있는 군대를 5천 명이 넘지 말게 하자는 차자의 말은 아마도 5천 명을 한정하여 궐원이 있어도 보충하지 말자는 뜻인 듯합니다. 신축년에도 흉년으로 인하여 궐원이 있어도 보충하지 않기로 했다가 작년부터 다시 충원을 하였으나 궐원의 수는 아직도 많은 실정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내년 가을 추수까지는 그냥 보충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지성으로 현자를 초빙해야 한다는 문제는 성상께서 직접 하셔야 할 일이지만 인재 수습에 관한 일은 당연히 두 전조(銓曹)에 책임지워야 할 것입니다."
하니,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현자를 초빙하여 임용하려고 하신다면 어찌 어진 선비가 없겠습니까. 가령 송시열 등만 하더라도 선왕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 책임지고 성취하도록 하여 매우 융숭한 예우를 받던 사람인데 지금 모두 조정에 돌아올 뜻이 없습니다. 그들을 예를 갖추어 초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시열이 마음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은 당초 의례(議禮) 문제로 하여 윤선도(尹善道)의 무함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문제라면 신도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국휼을 막 당하고 신이 갑자기 예에 관한 문제들을 의정해야 했는데 예문에 관하여는 전혀 어두워 대왕 대비의 복제(服制)를 국전(國典)의 기년제(朞年制)에 의거해 그대로 준행할 것을 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두 신하044)  와 함께 논의하여 한 일인데 만약 시열에게 죄가 된다면 신도 죄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이른바 양민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호패(號牌)·오가통(五家統) 등의 법부터 시행되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해택(海澤)에 관한 입안(立案)은 가장 심한 폐단입니다. 심지어 바다 가운데의 바위돌까지도 모두 떼어받아 세(稅)를 거두고 있으니 그를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4, 5년 동안에는 궁가에서 떼어받은 사실이 없었는데 아마 선묘(宣廟) 시절에 있었던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예판(禮判)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조종조 때 각사에서 선반(宣飯)045)  하였던 시기에 바다에 어장(漁場)의 세가 있었는데, 선반 제도가 없어지면서 그것을 여러 궁가가 각기 떼어받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십여 조항에 관하여도 신하들이 서로 논란이 있었으나 모두 실제로 채용되지는 않았다.

 

장령 여민제(呂閔齊)가 병으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7월 27일 임진

함경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2백 70여 명이나 되었다.

 

사은사(謝恩使) 우의정 정유성과 부사(副使) 완원군(完原君) 이만(李曼)이 복명하고 입대하여 아뢰기를,
"청인(淸人)들이 남방의 포로로서 본토로 도망갔던 자들을 쇄환하여 건주(建州)와 심양(瀋陽)에다 분리하여 살게 하고 있는데 관내(關內)에서 관외(關外)에 이르기까지 목놓아 우는 자들을 수레에다 싣고 가는 것을 하루에 5, 6수레씩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근년에는 풍년이 잦아 먹고 살기가 그만하기 때문에 저들 스스로 천하가 안정된 것으로 생각하여 무비(武備)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성지(城池)도 수축하지 않으며 관우(館宇)도 수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냥으로 고된 단련도 하지 않습니다. 전쟁에 쓸 만한 말들은 모두 짐이나 싣고 다니고 정작 군대가 탄 말들은 절반 이상이 수척한 것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청인들은 한인(漢人)을 업신여기고 한인은 또 한인들대로 난폭하게 굴어 평민들로서는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또 무령현(撫寧縣)에 갔더니 그 관아의 역관 등이 전하는 말이, 그 곳 지현(知縣)이 관직을 얻기 위하여 아내를 팔아 관직을 얻은 후에 그 세력을 이용하여 후처(後妻)를 사들였다고 하니, 정령(政令)이 문란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제묘(夷齊廟)에 시가 쓰여져 있기를 ‘충절로 가신 길을 뒤 따르긴 어렵지만 인을 찾아 하신 그 일 제 마음도 같소이다.[苦節跡難踐 求仁心可同]’ 하였는데, 이는 계주(薊州) 사람 이공소(李孔昭)가 지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공소는 숭정(崇禎) 연간의 진사(進士)로서 난을 피하여 산 속에 숨어 살면서 교수(敎授)로 업을 삼고 청나라에서 관직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이 사직서를 올렸는데,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유성은 사행에 따라갔던 사람이 금령을 범했던 관계로 부사가 논핵을 받고 교외(郊外)에 있었으므로, 그 책임을 지고 누차 글월을 올려 죄를 청하였고 이때 다시 입성하여 복명한 후 이어 정고(呈告)하였던 것이다.

 

7월 28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29일 갑오

대사헌 김수항 등이 구언에 응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의 대소 신료들이 놀기 좋아하고 다잡아 하는 일이 없는 것은 이미 고질적 습성이 되었으니, 나라 일이 날이 갈수록 잘못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만약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임금 사랑하기를 자기 몸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자기 집안 일같이 여기게 한다면, 비록 상께서 책려하지 않으시더라도 일에 종사하고 공적을 나타내기 위하여 반드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일들이 있을 것이니 어찌 오늘날 하듯이 하겠습니까. 이는 죽음으로도 속죄하기에 부족한 뭇 신하들의 죄입니다. 그러나 고굉(股肱)이 게으름을 피워 모든 일이 와해되고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원수(元首)의 총좌(叢脞)046)  가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전하께서 뜻을 가다듬고 기운을 진작하시는 방법에 있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지 않으신 것은 아닌지 삼가 염려됩니다. 왜냐하면 전하의 지기(志氣)가 이미 발양(發揚)이 부족하여 전하의 정령이 시간을 끌거나 정체된 것이 많아서 백료가 해체되고 만사가 와해되어 점점 수습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느니 모두가 어렵고 걱정되는 일들이고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상태가 코앞에 닥쳐 상하가 함께 길을 닦고 대소 모두가 힘을 합하여도 헤어나지 못할 염려가 있는데, 더구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이미 기울어진 형세를 만회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왕자(王者)의 정책이라면 경계(經界)를 바로하고 부역(賦役)을 균등히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그 요체는 손상익하(損上益下)뿐입니다. 경기 지방의 균전(均田)만 하더라도 참으로 꼭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데 관리들이 봉행하는 즈음에 과불급(過不及)의 오차가 없을 수 없어 혹 전(田)은 하(下)인데 부(賦)는 상(上)으로 매겨진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야(田野) 사이에는 소동이 일고 원성이 높아 심지어 국가의 근본 목적이 부세를 올리는 데 있지 균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부세를 조정할 때 만약 별도로 변통의 길을 두어 그 신상에 여유를 주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지 않는다면 나라의 근본이 안집(安集)을 잃을 염려가 있고 국가로서도 백성들의 의혹과 원망에 대하여 해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담당관을 거듭 당부하시고 좋은 대책을 미리 강구하여 반드시 손상 익하를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대하여 내용이 실정에 맞고 말의 뜻도 은근하고 간곡하다고 하시며 양전(量田)의 일이 끝난 후 부세를 조정하도록 묘당이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였으나 결국 시행되지 않고 말았다.

 

양사(兩司)가 홍우원(洪宇遠) 삭출(削黜)에 관한 논의를 정지하였다. 효종이 승하했을 때 예관이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 복제를 논의하자 전 지평        윤휴(尹鑴)가 단독으로, 당연히 참최(斬衰) 3년을 입어야 한다는 설을 주장하고 나왔다. 이에 예조가 아뢰기를,
"자의 왕대비께서 대행 대왕(大行大王) 상사에 입어야 할 복제가 있을 것인데 혹자는 당연히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당연히 기년(朞年)이어야 한다고 하여 의거할 만한 예문이 없습니다. 이것을 대신들과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그것을 받아들여 그 일체를 두 찬선(贊善)에게 문의하도록 특명을 내렸는데 그 둘은 바로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영돈녕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연양 부원군        이시백,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 완남 부원군        이후원 등이 헌의(獻議)하기를,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하면 당연히 기년 복제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그때 시열과 준길 역시 헌의하기를,
"예율(禮律)은 옛날과 지금이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 것이니 제왕(帝王)의 예제에 있어서는 더욱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대신들이 이미 시왕의 예제로 논의를 올렸는데 신 등이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논의된 대로 시행할 것을 명하고 드디어 기년제로 정하였으니 예를 안다는 이들의 논의에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런데 윤휴가 전자의 논의를 계속 고집하니 사림들은 그것을 걱정하여 심지어 홍수(洪水) 맹수(猛獸)의 폐해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그후 경자년 3월에 장령        허목(許穆)이 재차 상소하여 기년제가 잘못되었음을 논했는데 그때 두표만은 전번의 논의를 바꾸어 허목의 설을 따랐었다. 이에 윤휴가 허목에게 서신을 내기를,
"지금 장자(長者)의 논의가 조리도 있고 근거도 있어 오늘의 논의를 깨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주소(註疏)047)                   중의 ‘적전(嫡傳)은 장자(長子)로 세운다.’ 한 그 말은 매우 분명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부부(夫婦)가 함께 낳고 조종(祖宗)의 전중(傳重)을 받은 이를 일러 정통(正統)이 아니라고 한다면 의의가 없는 말이요, 그를 첩(妾)의 자식과 같이 본다면 매우 잘못된 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가소(賈疏)》048)                  에서 논한 것은 다만 사대부 집의 예를 논했을 따름이며 또한 왕후(王候) 집안이라도 전중을 받지 않으면 사대부 집안과 같다는 것이므로 그 논리를 천자(天子) 제후(諸侯)에까지 올려 적용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옛 말에 ‘제후(諸侯)는 탈종(奪宗)을 하고 성서(聖庶)는 탈적(奪嫡)을 한다.’ 하였 듯이 이미 차례를 이어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었으면 ‘종(宗)’이 바로 거기 있고 ‘장(長)’이 바로 거기 있어 계체(繼體)의 복을 입고 지존(至尊)의 복을 입는 것이지 또 무슨 장소(長少)와 적서(嫡庶)를 따질 것입니까. 무왕(武王)이 이미 천자(天子)가 되었으면 백읍고(伯邑考)049)                  가 비록 상속자가 있어도 그가 태왕(太王)050)                  ·왕계(王季)051)                  의 적손(嫡孫)이 될 수 없는 것이며 한의 고조(漢高祖)가 이미 왕이 되고 황제가 되었으면 유중(劉仲)이 비록 맏이지만 풍패(豊沛)의 종방(宗祊) 제사를 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왕이 죽었을 때 태사(太姒)052)                  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계체의 복을 입었지 전중을 백읍고에게로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며, 한 고조가 죽었을 때 태공(太公)053)                  이 건재했거나 광무제(光武帝)가 죽었을 때 번후(樊后)054)                  가 건재했더라면 당연히 온 세상과 함께 지존의 복을 입었지 유중 또는 백승(伯升)055)                  을 적자로 삼고 고조 또는 광무제의 복을 강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래도 적처 소생을 들어 한 말이지만 한의 문제(文帝)·무제(武帝)는 모두 측실(側室) 자식으로서 제위에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서자(庶子)라고 하여 그 아버지 그 어머니가 계체의 복, 지존의 복을 입지 않을 것입니까? 계체·지존의 복이 참최(斬衰)인 것은 상경(常經)이요 대의(大義)인 것입니다. 서민의 가정에서도 맏아들을 위하여 참최를 입는 것은 아버지·할아버지의 차례를 계승한다 하여 그러는 것인데 하물며 막중한 종묘 사직을 이어받고 천하 사해(四海)의 주인이 된 경우이겠습니까. 장으로서는 가장 큰 장이요 종으로서도 가장 높은 종인 것이니, 그가 장이 아니면 누가 장이 되며 그가 종이 아니라면 종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또 전대에 이미 행했던 전례에도 참고할 것들이 있습니다. 《통전(通典)》을 보면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를 이태후(李太后)가 사군(嗣君)이라 하여 중복(重服)을 입었는데 효무제는 바로 간문제(簡文帝)와 정비(鄭妃) 사이의 자식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명묘(明廟) 상사 때 기명언(奇明彦)056)                  이, 공의전(恭懿殿)이 당연히 계체의 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여 퇴도(退陶)057)                  도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따랐는데, 그를 일러 ‘탈종’·‘탈적’이라는 것으로 일이 보통의 인간 질서와는 판이하며 그것이 바로 왕조(王朝)의 예가 사대부와 같지 않은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전중을 두고 한 말인데 이미 전중을 받아 천지 종방의 주인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복을 강등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는 종을 둘로 보는 셈이고 주인을 낮게 여기는 것인데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예문에서 맏아들을 위해 참최를 입어 그 비중을 아버지와 같이 보는 것은 조종의 전중을 받았기 때문이고, 후계자가 아니면 서자와 같이 보는 것은 맏아들이라도 전중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며, 서자라도 복을 가중하는 것은 그가 대부(大夫)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서자인데도 복을 가중하는 것은 그가 전중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가 지존이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지금 준용할 만한 의의가 있는 문제인데 오늘의 논자들은 심지어 제2의 서열을 좇아 복을 강등하여 서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를 잘못 알면 그렇게 어둡고 명분을 잘못 세우면 허물이 되는 것이니 아마도 작은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또 《예문(禮文)》에 의하면, 제후(諸侯)와 오속(五屬)의 친척인 자는 모두 참최를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천자·제후의 상은 모두 참최를 입지 기년은 없습니다. 진(晉)의 말기까지도 모후(母后)가 사군을 위하여 참최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미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면 천하의 아버지이므로 황태후가 비록 천하의 어머니라 할지라도 당연히 지존의 복을 입고 선군(先君)과 같은 비중으로 높여야지, 사서(士庶)들과 똑같이 복을 강등하여 그대로 자최를 입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문》에서 말한 ‘감히 친복(親服)으로 지존의 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 한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이 또한 어떻습니까?
성인(聖人)이 예를 만들면서 자최·참최 등 오복(五服)의 차등을 둔 것은 인륜(人倫)을 밝히기 위함이니, 오늘의 이 논의는 국가 윤강(倫綱)에 관계된 바가 큽니다. 다행히도 선생께서 말을 꺼내시고 끝까지 논란하여 후세에 상고할 바가 있게 하였으니 도움된 바 적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하신 논의가 오늘날 기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구구한 말을 한 것은 바로 그 문제를 더욱 강구하여 밝혀보자는 뜻입니다."
하고, 또 이유태(李惟泰)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이르기를,
"한인(漢人)의 말에 ‘제후는 탈종을 하고 성서는 탈적을 한다.’ 하였는데, 이는 천자·제후는 나라를 건립하면 종(宗)이 바뀌어 사대부와는 예가 같지 않음을 말한 것입니다. 정자(程子)도 일컫기를 ‘종법(宗法)은 자연적인 이치를 따른 것으로 마치 나무의 줄기와 같은 것이지만 또 곁가지가 뻗어 줄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천자는 건국을 하고 제후는 탈종을 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를 해설하는 자의 말인즉 제후는 한 나라의 주인이므로 비록 종자(宗子)가 아니더라도 그 종을 가지에게로 옮겨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자(朱子)도 되풀이하여 이르기를 ‘제후는 종이 둘이 없고 대부는 사당이 둘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종묘의 예와 제사의 의의와 상복의 제도가 모두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예도 그 범주에서 만들어지고 의의도 그것을 근간으로 하여 정립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실로 고금을 통하여 국가의 대경(大經)이요 대륜(大倫)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논의들은 효종 대왕이 제2의 적자라 하여 당연히 서자로 보아야 하고 대왕 대비도 당연히 복을 기년으로 강등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이상의 정의에 맞는 것인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허정(許正)이 거론한 소가(疏家)058)                  의 말인 ‘적자는 장자(長子)로서 세우는데, 제2자로서 적자가 되었으면 그도 장자인 것이다.’ 한 그 해설도 사리가 분명한 말입니다. 대개 적처 소생으로서 종서(宗緖)를 이어받았으면 그가 정(正)이 아니라 하여 서얼(庶孽)과 같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니, 그 말이 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기에 그러한 것들은 사서인 집안의 예를 논할 때 적용할 문제들입니다. 만약 천자요 제후라면 이미 막중한 종묘와 사직을 이어받고 조부와 아버지 뒤를 이어 지존의 지위에 올라 나라를 집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더이상 높을 수가 없고 적용되는 예도 서민의 그것과는 월등하니 그것이 바로 적(嫡)이요, 거기에서 종(宗)도 바뀌어져 적서(嫡庶)조차 따질 수가 없을 것인데 더구나 장소(長少)이겠습니까. 종이 있는 곳이면 당연히 복이 높아져야 하고 복이 강등된다면 그는 곧 종이 갈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자니 서자니 하는 설에 집착하여 대통(大統)의 중함도 모르고 위항(委巷)의 예로 왕조(王朝)의 전례를 논하려고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천자는 천하의 주인이요, 제후는 한 나라의 종주인 것으로 그보다 더 높을 수 없고 그보다 더 존귀할 수 없어 일가붙이도 그를 일가붙이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서자니까 복을 강등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는 종을 둘로 가르고 존귀함을 뭉개버리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이는 진실로 경(經)을 거역하고 옛 법을 반대하여 천하의 대의(大義)를 어기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걱정되는 일은 다만 오늘날 명의(名義)가 바르지 못하고 인심이 불복하는 것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 오복(五服)의 의수(儀數)를 둔 것은 천질(天秩)059)                  을 바로하고 천서(天敍)060)                  를 밝히기 위함인데 명분이 틀리고 예가 잘못되어 천륜을 어지럽힌다면 내세에 무슨 말을 남길 것입니까."
하니, 유태가 답하기를,
"우리들이 숙손(叔孫)061)                  같이 잘못 죽을 염려가 있는데, 어느 겨를에 기운을 내어 좌우(左右)와 그 문제를 상세히 논변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복제도설(服制圖說)을 써 그 내용을 밝혔는데, 그 설에,
"《의례(儀禮)》의 상복 참최장(喪服斬衰章) 부위장자(父爲長子)조의 주소에 ‘적자로서 장자를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 소생이면 모두 적자라고 명명하나 다만 제1자가 죽었을 경우 적처 소생인 제2장자를 취하여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적처 소생이면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것은 적처의 자식임을 이른 것이지, 전중(傳重)의 정적(正嫡)을 이른 것이 아니다. ‘제1자가 죽으면’ 한 것은 아래의 주소에서 이른 바와 같이 적자가 폐질(廢疾) 또는 다른 연고가 있거나 만약 죽고 자식이 없어 전중을 받지 못하여 3년복의 대상자가 되지 못한 경우를 이른 것이다. 적처 소생의 제2장자를 취하여 세우고 역시 장자로 명명한다고 한 것은 제1자가 전중을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당연히 제2장자를 취하여 후사를 삼지만 오직 적처 소생이라야 3년복을 입고 만약 첩의 소생이면 비록 후사를 삼았더라도 3년복은 입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적자로서 폐질 또는 다른 연고가 있거나 죽었는데 자식이 없어 전중을 받지 못한 자들을 일러 ‘정체(正體)로서 전중을 얻지 못했다.’ 하는데 전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3년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았을 경우 서자는 장자로서의 3년복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주소에 ‘서자는 첩의 자식을 칭함인데 적처 소생이라도 제2자부터는 모두 그를 서자라고 이르는 것은 정적과 구별하여 혐의를 멀리하기 위함이다.’ 하였는바 이를 당연히 같은 예를 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정적은 하나뿐인 것이다. 적자로서 폐질 또는 다른 연고가 있거나 죽었는데 자식이 없어 전중을 받지 못하여 3년복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경우에만 그 뒤를 이어 후사가 된 자가 비로소 정적으로서 3년복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적자가 죽었는데 그가 이미 정적으로서 그를 위해 3년복을 입었다면 그뒤를 이어 올라와 적자가 된 자는 비록 적처 소생이라도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은 것이니 당연히 다시 3년복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은 둘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허헌(許憲)의 말대로라면 가령 대부나 사의 적처 소생이 몇 십 명인데 제1자가 죽어 그를 위해 3년을 입고 제2자가 죽어 그를 위해 또 3년을 입고 불행히도 제3자가 죽고 제4자가 죽고 제5·제6자가 죽었을 때 모두 3년복을 입을 것인가? 그러한 이치는 없을 것 같다.
주소에서 이르기를 ‘서자란 첩의 자식을 호칭한 것이다. 적처 소생인 제2자는 중자(衆子)이나 지금 똑같이 서자라고 함은 장자와 완전히 구별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첩의 자식과 똑같이 호칭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것을 보면 적자가 죽어 이미 그를 위해 3년복을 입었으면 그후 제2의 장자가 올라와 적자가 되었을 때 그가 비록 적처 소생이라도 서자로서 후사가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주소에서 말한 ‘적처 소생은 모두 적자로 명명한다. 제1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2의 장자를 취하여 후사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한다.’라고 한 그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로 제1자가 죽었다고 한 것은 아래 주소에서 이른바 적자가 폐질 또는 다른 연고가 있거나 죽었는데 자식이 없어 전중을 받지 못한 자로서 3년복 대상이 되지 못했던 자를 말한 것이다. 적처 소생인 제2의 장자를 취하여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것은 제1자가 전중을 받지 못하고 죽으면 당연히 제2의 장자를 세워 후사를 삼되 오직 적처 소생이라야만 3년복을 입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니, 첩의 소생이면 비록 후사로 세웠더라도 3년복을 입을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망령되이 얕은 견문으로 여기에 도식을 그려보았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맏아들이 장차 자기 대신 승중복을 입을 것을 두고 논한 것이다. 만약 제왕의 집이라면 대통(大統)이 중하니 비록 지자(支子)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었더라도 태상황(太上皇)이 있을 경우 사군(嗣君)의 상에 당연히 3년복을 입을 것이다. 그 말이 과연 옳다면 아우로서 형의 뒤를 이었거나 숙부로서 조카의 뒤를 이었더라도 정체(正體)이고 아니고를 따질 것 없이 모두 3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경문(經文)에 나타나 있지 않은 말이고 제후의 예를 배운 바 없어 예문에 없는 예에 대하여는 감히 망령되이 말할 수 없다. 다만 인성 왕후(仁聖王后)가 명종 대왕을 위해 입을 복제에 대해 기고봉(奇高峯)은 당연히 3년복이어야 한다고 하였고 퇴계(退溪)는 ‘기년으로 그치더라도 안 될 이치야 무엇이 있겠느냐?’ 하였었다."
하였다.
그후 4월에 윤선도가 장황한 상소로 두 송씨(宋氏)062)                  가 논의한 예제가 잘못되었음을 논박하자 삼사(三司)가 함께 일어나 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선도를 변방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이에 선도가 안치(安置) 속에 있으면서 예설(禮說)을 썼는데, 그 설에,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의례(儀禮)》의 상복 참최장(喪服斬衰章)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맏아들을 위하여」라고 하고, 전(傳)에서는 이르기를 「어찌하여 3년을 입는가? 상(上)에 대하여 정체(正體)이고 또 바로 전중(傳重)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한 정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정은 곧다·바르다의 뜻이고, 체란 줄기와 같은 것이며 이른바 상은 바로 조상을 말한다. 이를 나무에다 비유하면 조상은 나무의 뿌리와 같고 자손은 나무의 줄기와 같은데 다른 여러 자식들은 모두 나무로 말해 가지이고 오직 맏아들만이 그 나무의 줄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에서 「상에 대하여 정체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의 예제는 오직 연장자를 맏이로 치지만 천자나 제후에 있어서는 나이의 장유(長幼)나 지반의 귀천(貴賤)은 따지지 않고 다만 뒤를 이은 자를 맏이로 친다. 맏이 된다면 상에 대하여 정체가 되는 것은 일반이다. 왜냐하면 천하는 온 천하가 공유하는 천하이고, 국가 역시 전 국가가 공유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임금이라면 당연히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위주로 해야지 한 개인의 감정이나 한 가정의 사사로움으로 그것들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뒷시대에서 천하를 후손에게 양위한 후에도 오히려 후계자를 정하는 데 있어서 현자를 골라 저사(儲嗣)를 정한 때가 혹 있었다. 고공(古公)은 문왕(文王)이 성스럽다 하여 그의 아비 계력(季歷)을 세웠고, 문왕도 맏아들인 백읍고(伯邑考)를 제쳐두고 무왕(武王)을 세웠으며, 미자(微子)도 맏손자인 돌(腯)을 두고 중자(衆子)인 연(衍)을 세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미 태자(太子)가 되고 세자(世子)가 되었으면 그가 비록 가장 막내 중자이거나 가장 미천한 첩의 자식일지라도 사리로 보아 당연히 적자가 되고 장자가 되어 상에 대하여 정체가 되므로 장소(長少)나 적서(嫡庶)는 따질 것이 없다. 한인(漢人)이 말한 「곁가지가 커서 줄기가 될 수도 있다.」 한 것이 그것이고, 《의례》 주소에서 말한 「둘째 장자를 세우고도 3년복을 입는다.」 한 것이 그것이며, 소석(疏釋)에서 말한 「적처 소생인 제2의 장자를 세워도 장자로 명명한다.」 한 것이 그것이고, 주자(朱子)가 말한 「제후는 종(宗)이 둘이 없다.」 한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혹자가 이르기를 ‘그러면 이른바 「체(體)이면서 정(正)은 아니다.」 한 말은 무슨 뜻인가?’ 하여, 내가 이르기를 ‘이름하여 태자다 세자다 했다면 이른바 태자·세자라는 명명 자체가 바로 그를 유별나게 나타낸 것이며, 또 적이요, 장으로서 여러 아들 중 누구도 그와는 짝할 수 없다는 칭호인 것이다. 그렇다면 태자가 되고 세자가 되었으면 그는 분명히 장자이기도 한 것인데 어찌 체이면서 정은 아닐 이치가 있겠는가. 해석자의 잘못임이 틀림없으니, 다시 변명할 것도 없는 문제이다. 생각건대 주소에서 말한 「서자로서 승중(承重)을 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한 데서 그 않는다는 뜻의 불(不)자도 아마 역(亦)자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다. 《대학(大學)》 책장을 펴면 맨 첫마디의 신민(新民)이라는 신(新)자가 친(親)자로 잘못 표기되었다. 《의례》의 그 많은 주소 중에서 그도 3년을 입는다는 뜻으로 쓰여진 그도의 역(亦)자가 불(不)자로 잘못 표기된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친(新)과 신(親)은 음이 비슷하여 잘못 전해진 것이고, 역(亦)과 불(不)은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 잘못 등재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 불(不)자가 잘못된 글자가 아니고 주소의 뜻이 꼭 그렇다면 이는 석언(釋言)의 「체이면서 정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둘 다 잘못되었음이 분명하다.
주소에서 심의(深衣)의 속임구변(續袵鉤邊)에 관한 해석이나 상례(喪禮)의 담제(禫祭)에 있어 간일월(間一月)이라는 말에 관한 해석이 수천 년을 두고 잘못에 잘못을 거듭하여 해석되어 오다가 주자 말년에 와서야 비로소 해석이 바르게 되었는데 주소의 말들을 어떻게 다 믿을 것인가? 맹자(孟子)가 말한 「《서경(書經)》을 다 믿기로 들면 서경이 없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라 함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주소에서 말한 「둘째 장자를 세우고도 역시 3년복을 입는다.」 한 말은 자연의 사리에도 맞고 주공(周公)과 자하(子夏)가 경(經)을 쓰고 전(傳)을 쓴 뜻을 분명히 알고 한 말이므로 그 예문을 그대로 믿고 쓰지 아니할 수 없다. 이른바 「승중을 하여도 3년복을 입지 않는다.」 한 기록은 자연의 사리에도 맞지 않고 주공·자하가 쓴 경과 전의 뜻에도 크게 위배되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다 믿고 쓸 것인가.’ 하였다.
혹자가 이르기를 ‘예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조정 논의는 그 예문이 그대로 행해지거나 행해지지 않거나 간에 국가 안위에 있어 조금도 손익이 될 것이 없다고들 하는데, 어찌하여 그대만이 그 일이 바로 대통(大統)을 밝히고 백성들 뜻을 안정시키고 종묘 사직을 튼튼히 하는 예라 하여 그렇게 깊이 우려하고 그렇게도 자세히 설명하고 그렇게도 설명을 자세히 하고 있는가?’ 하여, 내가 이르기를 ‘아, 그게 무슨 말인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가 만들어져야 만물(萬物)이 안정된다.」 하였다. 예가 아니면 작은 일, 미미한 물건도 모두 안정을 잃는 것인데 하물며 크고 중대한 천하와 국가이겠는가. 하잘 것 없는 절문(節文)이라도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아버지와 아들의 윤리 질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등위를 흐트러지게 내버려두어도 안정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 그 때문에 《예기》에서도 이르기를 「예란 친소(親疎)를 규정하고 혐의(嫌疑)를 결정지어주며 동이(同異)를 구별하고 시비(是非)를 밝혀준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도 예가 아니면 바로되지 못한다.」 하였다. 지금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세자가 되고 하늘의 명으로 종묘 사직을 이어받고 지존(至尊)에 올라 나라를 집 삼고 신민(臣民)을 다스리기 10 년에 이른 효종 대왕을, 적자가 아니고 장자가 아니라 하여 끝내 꼭 서자의 예로 대우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상(短喪)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를 논함에 있어서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친소가 규정되고 혐의가 결정, 동이가 구별되고 시비가 밝혀질 수 있겠으며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의 사이가 바로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서도 대통이 분명하고 신민의 뜻이 안정되었다고 할 것인가. 대통이 분명하지 못하고 백성들 뜻이 안정을 잃는다면 종묘와 사직이 튼튼할 수 있는 것인가.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리를 잃고 말이 순리를 잃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자리잡지 못하고, 예악이 자리잡지 못하면 형벌(刑罰)이 맞게 적용되지 못하고 형벌이 맞게 적용되지 못하면 백성이 손과 발을 놀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君子)는 명분을 정하면 반드시 말할 수 있는 명분을 정하고 말을 하면 반드시 실행할 수 있는 말을 한다.」 하였다. 지금 예를 논하는 자들은 「차장(次長)도 모두 장자라는 이름으로 참최를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존엄하지 못하다.」 하고 있다. 아, 대통으로 종묘를 이어받고 임금으로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데도 그를 적이라고 하지 않고, 장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가 장이 될 수 없다면 장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그가 적이 될 수 없으면 적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장이 다른 곳에 있고 적이 다른 곳에 있으면 종(宗) 역시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종이 둘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존자를 뭉개버리고 임금을 낮게 본 것이 분명하다. 군부(君父)를 폄출(貶黜)한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이것이 이른바 임금이 임금이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니며, 나라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니, 명분이 바르지 못하기가 이보다 더할 데가 어디 있겠는가. 이러고서도 말을 할 수 있고 실행을 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명분이 바르지 못한 그 결과가 틀림없이 백성들이 손발을 놀릴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백성들 뜻이 안정을 잃을 것은 분명하고, 백성들 뜻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면 종묘 사직이 튼튼하지 못할 것도 분명하다. 따라서 내가 주장하는, 대통을 밝히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고 종묘 사직을 공고히 하는 기틀이 바로 여기 있다함이 지나친 주장이 아니다. 동시에 내가 깊이 우려하고 자세히 설명하는 일을 어떻게 그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혹자가 이르기를 ‘그대의 항장(抗章)에 대하여 혹자는 남을 헐뜯고 시기하는 일이라 하고, 혹자는 어떠한 화기(禍機)를 만들고 있다고 하며, 또 혹자는 겉으로 예론을 핑계삼고 속으로 남을 모함하고 있다고도 하는데, 과연 대송(大宋)063)                  이 미워서 그를 모함하려는 것인가? 어찌하여 남의 말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엄청난 화환도 아랑곳 않은 채 위언(危言)을 이렇게 하고 있는가.’ 하여, 내가 이르기를 ‘내가 대송에 대하여 미워할 것이 무엇이 있어 그를 모함하려 할 것인가. 나의 본의는 다만 성상께서 그것을 깨달아 대례(大禮)가 바르게 되도록 하였으면 하는 것이지 송공을 모함할 뜻이 있다면 어찌 내 상소문 속에다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의 설에 관하여 거론하지 않았겠는가? 당초 수의(收議) 때 대송의 내용 중에는 「가소(賈疏)에서 다만 제1자가 죽은 것을 말했고, 제1자가 죽고 나서 후사가 없는 경우까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아마 그것은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죽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중요한 부분이다.
지금 허목(許穆)의 설은 아마 그 글월을 쓴 동기의 근본 뜻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별다른 뜻 없이 논설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단궁의 문이나 자유의 최에 관하여는 모두 그냥 넘겨버려도 된다는 말인가? 단궁의 문과 자유의 최는 그것이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있는 것들로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적손(嫡孫)을 세워야 한다는 말들이다. 소현 세자가 이미 죽고 인조 대왕이 건저(建儲)에 관하여 논의할 때 그가 만약 천리(天理)의 대의(大義)와 성인(聖人)의 대권(大權)은 모르고 상경(常經)만을 내세워 그 말을 올렸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나 효종 대왕이 10년을 군림한 이후에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가. 만약 송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그의 그 말을 꼬집어내어 단궁편의 두 장(章) 안의 기록을 모두 그대로 서술하고, 송의 죄를 논했다면 송으로서도 틀림없이 자신을 해명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송을 위하여 그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설에 관하여는 대강대강 들추기만 하였고, 나의 상소문 속에서도 이르기를 「시열은 망령된 자가 아니면 어리석은 자이다.」 하였고, 또 「불인(不仁)이 아니면 부지(不智)이다.」 하여 나는 되도록 그가 그것을 잘못 보고 망발을 한 것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남들은 틀림없이 내가 송을 구무(構誣)한다고 할 것이나 나는 사실 송을 옹호하기 위하여 한 말이었다. 아, 우양(雨暘)이 정상을 잃고 기근이 거듭 닥치며 백곡(百穀)이 결실을 못하여 백성들이 아우성 속에서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랐으며 만물도 자라지 않는 것이 이때 같은 적이 없는데, 아마도 하늘에 계신 효종 대왕의 영령이 오르고 내림에 편안하지 못하므로 하늘과 조종(祖宗)이 위엄을 내려 깨우쳐서 편안케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혹자가 이르기를 ‘대송의 수의에 「차적(次嫡)부터 그 이하는 비록 임금의 모제(母第)064)                  라도 그를 서자(庶子)라고 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라고 하여 나쁠 것이 없다. 서(庶)는 비천함을 나타내는 호칭이 아니라 바로 중(衆)자의 뜻이니, 《예경(禮經)》을 보면 그러한 종류가 매우 많다.」 하였는데 그 말은 어떠한가?’ 하여, 내가 이르기를 ‘《예경》에서 중자를 서자라고 한다는 그 말은 물론 옳다. 다만 원래는 비록 중자였을지라도 그가 이미 태자·세자의 뒤를 이어 후속자가 되었으면, 그 호칭이 당연히 적자이고 장자이어야지 그대로 서자로 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 전중할 자에 있어서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이미 전중이 되어 대통을 이어받고 한 나라 임금이 된 뒤에도 그대로 서자라는 이름을 붙여 서자의 예로 대우해서야 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주소에 「차장(次長)을 세워도 3년복을 입는다.」 하고, 그 아래서는 또 이르기를 「서자는 승중을 하여도 3년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옛 기록에는 중자를 서자라고 한 경우도 많지만 첩의 자식을 서자라고 한 곳도 많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서자가 과연 중자라는 뜻이라면 그는 바로 차장인데 그 말의 위아래가 어찌하여 이렇게 틀리는가? 책을 보는 이들이 어귀 때문에 글을 잘못 보지 말 것이며, 글 때문에 원의를 잘못 보지 말 것이다. 작자가 의도했던 본뜻을 추구해보면, 여기서 말한 서자는 첩의 자식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고 「여기서 말한 서자는 차장을 말하는데 아마 위아래 말이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송공의 주장은 틀렸다.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여기서 말한 「3년을 입지 않는다.」에서, 않는다는 뜻의 불(不)자도 아마 역(亦)자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다면 주소의 이 말은 사리에도 어긋나고 경(經)과도 어긋나 믿고 쓸 수가 없다.’ 하였다.
혹자가 이르기를 ‘대송이 상소문에서 「한문제(漢文帝)가 남월왕(南越王)에게 보낸 서한에서 『짐(朕)은 고황제(高皇帝)의 측실(側室) 자식이다.』 하였으나, 당시 그 때문에 문제를 과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후로 국가에 변고는 비록 많았지만 계통을 이어받은 이들이 모두 문제의 자손이었으니 비록 측실 자식이라고 했더라도 정통을 전수받는 데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우리 선대왕이야 차적(次嫡)이 아닙니까.」 하였는데 그 말은 어떠한가?’ 하여, 내가 이르기를 ‘고황제의 측실 자식이라고 한 것은 문제 자신의 겸사이지 그 당시 신하로서도 고황제의 측실 자식이라고 말한 자가 있었던가.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말하자면 비록 고황제의 측실 자식이었지만 그가 이미 왕위에 올랐을 때는 바로 고황제의 적자요 장자인 것이다. 그 당시 신하들이 그를 그렇게 알고 그렇게 추대했기 때문에 문제가 편안히 그 자리를 지키고 종묘에 제사를 올리며 자손을 길이 보존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신하들이 만약 그가 적자가 아니며 장자가 아니라 하여 혹 적통이 존엄하지 못하다는 설이 있었거나, 단궁의 문과 자유의 최도 모두 상관할 것이 없다는 말이냐는 식의 논의가 있었는데도, 조정에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이상히 여기지 않고 일찍이 그 한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더라면 천하의 군중들 뜻이 안정을 잃었을 것이니, 문제가 끝까지 편안하게 그 자리를 지키면서 종묘에 제사를 올리고 자손을 길이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인가.
당초 항장(抗章)을 했던 것은 구신(舊臣)으로서 차마 선왕을 저버릴 수 없어서 우리의 자손 우리의 백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말을 감히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저 삼사(三司)가 양송(兩宋)의 비위를 받들어 망극한 무함을 꾸미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나라를 위해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옛날 쾌산(快山)의 농부가 밭을 갈다가 피곤하여 쟁기를 놓고 언덕 위에서 졸고 있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그 농부를 잡아먹으려 하므로 그 농부의 소가 그것을 보고는 힘껏 싸워 호랑이를 쫓아버렸다. 호랑이는 가고 없고 밭은 짓이겨졌는데 이때 잠을 깬 농부는 소가 호랑이를 쫓느라 밭이 짓이겨진 것도 모르고 화를 내어 그 소를 죽여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그를 일러 「쾌산의 억울한 소」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먼 변방으로 귀양살이 간 구신이야말로 어찌 그 억울한 소에다 비할 바 아니겠는가. 시비(是非) 사정(邪正)이 모두 전도되어 국가 장래사가 좋아지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너무도 한심한 일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옛 말에, 큰 집 한쪽에 불이 붙어 불길이 치솟고 있는데 제비는 제 집 속에서 새끼와 조잘대며 그 불길이 저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른다는 격이니, 그저 슬플 뿐이다.’"
하였다.
복제에 관한 논의가 처음에는 허목(許穆)에게서 나왔고, 두 번째로 윤휴(尹鑴)에게서 나왔었는데 경자년에 와서 윤선도의 상소문이 나오자 그 음흉하고 상대를 무함하는 속셈이 여지없이 다 드러났던 것이다. 그후로 조경(趙絅)·홍우원(洪宇遠) 등이 서로 이어 선도를 구제하면서 얽히고 설키고 선동을 하여 10년을 두고 부글부글 끓다가 그 화가 결국 하늘을 태우는 요원의 불길이 되어 나라가 거의 복멸의 지경에 이르렀는데 소인들이 남에게 화를 뒤집어 씌우려던 계책이 이때 와서 마침내 제값을 발휘했던 것이다.
대개 맨 처음부터 세 종류의 논설이 있었는데 《의례(儀禮)》 상복도(喪服圖) 주소의 ‘제1자가 죽으면, 제2자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한다.’ 한 설을 주장하여 소현 세자가 당연히 제1자이나 효종이 제2의 장자가 되므로 응당 장자로 쳐서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허목의 논설이다. 《의례》 군신복도(君臣服圖)의 ‘천자·제후의 상에는 오복(五服)의 대상자가 모두 참최를 입는다.’의 기록을 주장하여 어머니라도 사군(嗣君)에 대하여는 당연히 신하가 되기 때문에 임금의 상에 입는 복으로 참최를 입어야 마땅하다고 한 것이 윤휴의 논설이다. 앞으로 전중(傳重)할 사람에 있어서도 3년을 입는데 이미 전중이 되어 종묘 사직을 맡은 이를 내려서 기년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심지어 주소의 ‘서자는 3년을 입지 않는다.’의 불(不)자도 역(亦)자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 윤선도의 논설이다. 이 3종의 논설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윤휴는 어머니도 신하의 도리가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문모(文母)065)                  의 사실을 인용하여 증거를 대고, 끝내는 또 원위(元魏)066)                  의 풍태후(馮太后) 사실까지 인용하였다. 그가 천륜을 어지럽히고 천리를 배반한 행위는 다만 그 한때의 죄인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또 허목의 상소가 올라왔을 때 송시열의 수의(收議) 내용 중에는 ‘제1자가 죽었다는 것이 어느 때 죽었다는 것인가? 이미 성인(成人)이 되어 죽어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해 참최 3년을 입었는데 그후 차적자를 세웠다가 그 차적자가 죽으면 또 그를 위해 참최 3년을 입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어린 나이에 죽어 함(含)067)                  도 않고 봉(賵)068)                  도 않고, 신주도 만들지 않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해 복도 입지 않고서, 적자도 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차적자를 세워 후사를 삼고는 비로소 그를 일러 차장자가 죽으면 3년을 입는다고 한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의심나는 곳을 변석하기를 그렇게 분명히 할 수가 없었다.
주소에서 제일자(第一子)라고 말하고 장자(長子)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 죽은 자가 어렸을 때 죽어 그를 미처 봉하여 세자(世子) 또는 태자(太子)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래 또 이르기를 ‘제2의 장자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한다.’ 하였는데 장자(長者)라는 말은 나이가 위라는 뜻이고 장자(長子)라는 말은 적자로서 후계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소현 세자와 효종과의 관계를 비의하여 같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예문의 본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서자를 세워 후계자를 삼으면 3년복을 입을 수 없다.’ 한 그 구절에 있어서는 허목이 제멋대로 첩자고(妾子故)의 세 글자를 더 써넣었는데, 서자가 중자(衆子)의 통칭임을 허목이 모를 바 아니면서 굳이 첩의 자식으로 단정하고 억지로 갖다 붙여 말을 만들면서 꼭 자기의 사견을 관철하려 하였으니, 그 더욱 심한 패류(悖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똑같은 주소인데도 허목은 서자를 첩의 자식으로 규정짓기 위하여 자기 멋대로 첩자고의 세 글자를 첨입하여 경(經)의 원의에 위패되는 것도 무릅썼으며 선도는 굳이 윤휴의 말을 완전무결하게 뒷받침하기 위하여 역시 자기 멋대로 ‘3년을 입지 않는다.’의 불(不)자를 고쳐 경의 문장과는 반대되는 것도 돌보지 않았다. 그들의 뜻이 어찌 경의 원의를 해석하고 예의 뜻을 연구하고 밝혀내어 예제가 올바로 되도록 하는데 있었겠는가. 다만 ‘앞으로 전중할 자와 이미 전중이 된 자’의 설에 있어서는 논의자들이 한때 혹 의혹을 사고 변석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송준길이 ‘제후(諸侯)의 예제는 내가 배우지 못했습니다. 예문에 없는 예제를 신으로서는 감히 가벼이 논의할 수 없습니다.’ 했던 말과, 송시열이 ‘주소의 뜻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없으므로 부득이 대명(大明)의 예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망령된 생각으로는 크게 위패된 일은 아닐 듯합니다.’ 했던 말은 당초 예를 논의했던 이 두 신하의 근본 취지였다. 그렇다면 또한 무슨 죄가 될 만한 실책이었는가. 하물며 윤휴가 말한 ‘제후는 탈종을 하고 성서(聖庶)는 탈적을 하므로 종(宗)이 거기에 있고 장(長)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한 말은 옳지만, 종과 적이 복제의 경중에 따라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탈종 탈적의 죄로 삼는다는 것이 사리에 어긋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체로 예제를 논의하게 된 본말과 그에 관한 득실은 애초에 이러한 것에 불과했는데 그것이 결국 간적(奸賊)의 좋은 구실이 되었던 원인은 소현(昭顯)의 손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밖의 다른 것을 따져 무엇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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