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9권, 현종 4년 1663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3.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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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병신

조필달(趙必達)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판윤(判尹)        박장원(朴長遠)이 상소하여 걸군(乞郡)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타고난 운명이 사나워 일찍 아비를 여의고 다만 홀어머니가 계신데 병자·정축년 난리에 외가(外家)를 따라 강화도로 들어가서 간신히 칼날을 피하여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모자가 서로 의지하여 살아오기 지금으로 30년이 되었습니다. 신의 머리털이 이미 희어졌으니 신의 어미의 늙음이야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어머니 계신 곳에 석양빛이 비치는 것은 옛 사람도 슬퍼했는데 하물며 신의 어미로 말하면 숨결이 겨우 붙어있어 아침 저녁을 보장할 수 없고, 다만 미음으로 시일을 끌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가세가 원래 빈한하여 갖추어 봉양할 수 없는데다, 부인의 마음은 관주(官廚)의 공양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항상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버이 섬길 날과 임금 섬길 날이 길고 짧은 차이가 있으니, 고인의 교훈으로 미루어 생각하더라도 무슨 명분으로 다시 성조(聖朝) 기사(器使)의 말직에나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조종조에서도 어버이를 위하여 걸군한 대소 신료들에 대하여 그 소원을 그대로 따라주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고 재신(宰臣)        노진(盧禛)도 예조 판서로서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나갔고, 인조조의 심집(沈諿)도 형조 판서로서 안변 부사가 되었습니다. 신도 경재(卿宰)의 서열에 있는데 비록 감히 고사(故事)를 원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석류(錫類)069)                  의 어지신 마음을 미루어 급로(及老)070)                  의 은총을 쾌히 베푸심으로써 어버이를 편히 봉양하고 싶어하는 지극한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상소를 해당 아문에 내려 그의 소원대로 시행하도록 특별명을 내렸다.

 

8월 2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개성부(開城府) 유생 이문규(李文奎)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는데, 상이 막중한 전례를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는 뜻으로 답하였다.

 

정언 이세화(李世華)가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구언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성상께서 재이를 당하여 두려움을 느끼시고 죄를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구언을 하시는데, 그것이 만약 하늘을 공경하고 재이를 멎게 하고 싶은 뜻이라면 무엇보다도 군신 상하가 서둘러 각기 자기 직분을 닦음으로써 견고(譴告)에 답해야만 합니다. 신이 하찮은 사람으로 국자(國子)071)  를 더럽히고 있으므로 청컨대 신이 맡고 있는 직책을 들어 전하를 위해 취하실 길을 제시하겠습니다.
학교는 교화(敎化)의 본거지입니다. 훌륭했던 삼대(三代) 시절이야 말할 것도 없지마는 지금 당장 선비를 길러내는 데 있어서 급선무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학(四學)과 향교에서 나누어 가르치다가 그들을 선발하여 태학(太學)으로 올려오는 목적은 장차 국가를 위해 쓰려는 것입니다. 후일 경상(卿相)에 오르기도 하고 아래로 백집사(百執事)가 되기도 하는 이들이 모두 이곳에서 나옵니다. 태학에서 가르치고 길러내는 자들이 어질고 재능이 있는 자들이라면 국가가 융성할 것을 점칠 수 있습니다. 옛날 조종조에서 친히 태학에 나아가 경서 강론과 재예를 시험을 하였으며 혹은 여러 유생을 소대(召對)하여 배운 것을 강문(講問)하고는 우수한 자를 선발하고 재능이 있는 자는 장려하여 한 세상을 권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혹은 권학(勸學) 절목을 내려 그대로 신명하여 거행하도록 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유(師儒)를 명하여 가르치기에 각별히 힘쓰도록 하였고, 혹은 중관(中官)을 보내 유생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묻고 이어 제술을 하게도 하였는데, 이렇게 특이한 대우를 하였던 이유는 바로 다스림의 근본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사(文詞)에 있어서는 작은 기예에 불과한 것으로서 치도(治道)에 크게 관계될 것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까지도 삼순(三旬) 제술의 제도를 두고 우등자를 뽑아 혹 상을 내리거나 획(畵)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게도 하였으니 그를 권장하는 방법 또한 극진했었습니다. 그 제도가 어느 시대에 폐지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상순(上旬) 윤차(輪次)의 규정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는 학교에 대하여 권장하는 일이라고는 거의 다 폐지되었습니다. 옛 사람 말에 의하면 학교 교육은 임금이 몸으로 실천하고 마음으로 체득한 나머지에 근본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전하께서 학교 교육에 관한 성의가 극진하지 못한 바 있어 학교에 관한 시책들이 날이 갈수록 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으로서는 삼가 애석하게 생각됩니다.
위에서 교도하는 방법이 너무 소홀하기 때문에 아래서 보고 느끼는 자들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요즘 들어서는 선비들 관습이 너무 야박하고 사기마저 떨어져 있어 참으로 식자의 한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보고 느끼는 교화에 있어서는 반드시 전하께서 몸소 실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겠지만 그 밖의 절목 같은 것은 신이 본관의 학령(學令)에다 약간의 변통을 가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어 예조에 명하시어 참작하여 확정하도록 하시기를 아울러 바라는 바입니다.
신이 삼가 학령을 살펴보았더니 거기 이르기를 ‘매일 학관(學官)이 나란히 앉고 생도들을 인솔하여 정읍례(庭揖禮)를 행한 후 상하 각재(各齋)에서 각기 1명씩을 뽑아 그동안 읽었던 글을 강하고 통(通)인 자는 세밑에 가서 획(畵)의 수를 통틀어 살펴 식년(式年)의 강획(講畵)에다 합산한다.’ 하였는데 신으로서는 지금 그 규정이 어느 해에 폐지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계산해볼 때 하루에 강을 받는 자가 2명뿐이면 비록 날마다 그 학령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합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1년 동안 강한 획의 수를 식년에 합산한다는 것 역시 오늘의 실정으로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장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바라고 싶은 것은 조정이 학관으로 하여금 매월 4차례씩 상하 두 재의 생도 모두를 통틀어 강하고, 강하는 것은 삼경(三經)·사서(四書)를 돌아가며 익숙히 외우는 것으로 하되 매 차례마다 책을 서로 바꿔가며 외우도록 하고 통(通)·약(略)의 점수 배정에 있어서는 학령을 그대로 따르나 문의(文義)에 막힘없이 통하는 것을 위주로 합니다. 그리고 생도가 많으면 혹 날마다 회강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1년을 강하고 나면 통계 48회가 되어 식년까지 가면 삼경·사서를 거의 3, 4회를 돌려가며 외우는 꼴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매 세밑에 획의 수를 통산하여 20획부터 그 이상인 자는 별도로 성명을 기록하여 아뢰게 하여 그 상격(賞格)에 있어서는 상께서 재량하여 고하를 매기는 것입니다. 제술 규정에 있어서는 특명에 의하여 실시되는 것으로서 아래서 감히 진청(陳請)할 성질의 것이 물론 아니나, 상순의 윤차 같은 것은 그것이 당연히 행해져야 할 일인데도 번번이 정부와 육조·관각(館閣)의 당상관들이 연고가 있다 하여 해마다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당초 그 제도를 둔 목적은 권장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본관의 윤차와 병조(兵曹)의 도시(都試)에 여러 관원을 참석시키고 모이게 하니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문무(文武)를 막론하고 인재 선발인 점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시는 해마다 시행하고 있으면서 윤차는 완전히 폐지해 버렸으니 글을 위축시킨다는 조롱이 어찌 없겠습니까. 《대전(大典)》을 상고하더라도 ‘연고가 있으면 다음날에 한다.’란 문구가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비록 연고가 있더라도 반드시 본관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아뢰게 하며 연고가 없는 날 시행하도록 여쭈어 정하되, 요는 그 달만 넘기지 않는다면 폐지되었다는 한탄이 있겠습니까. 중순(中旬)과 종순(終旬) 두 차례의 윤차를 지금 다시 실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본관이 매월 두 차례씩 설장(設場)을 하도록 허락하고, 출제는 학령에 정해진 규정대로 매 장마다 의(義)·의(疑)·부(賦)·표(表)·송(頌)·명(銘)·잠(箴)·기(記) 중에서 두 문제씩 내도록 하고 책문(策問)은 한 문제를 내되 반드시 그날로 차등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1년 간의 제술을 통산하면 24회가 되는데 세밑에 가서 획의 수를 통틀어 계산하여 10획 이상이면 별도로 성명을 기록하여 아뢰게 하며 상격의 고하는 상의 재량에 맡기기로 한다면 이 두 일만으로서도 격려와 권장의 방법에 있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강경(講經)과 제술은 각기 다른 일이어서 만약 때에 맞게 곧바로 전시에 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다만 획의 수만을 준다면 강경을 하는 유생에 있어서는 우대가 되고 다행한 일이 되겠으나, 제술을 하는 유생에 있어서는 따로 강업(講業)이 없으므로 틀림없이 취미가 붙지 않고 삭막하여 흥기할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필시 곧바로 응시하게 하는 제도는 가벼이 실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겠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설사 해마다 곧바로 응시하게 하는 명령을 하시더라도 대비(大比) 이전까지 기회가 주어지는 자는 3명에 불과합니다. 조종조 시절에는 자주 제술을 명하시어 곧바로 응시할 기회를 특별히 주신 경우도 1년 내에 혹 2명까지 있기도 하였는데, 지금 1년에 1명에게 그 기회를 주는 것이 무슨 남발의 염려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청하고 있는 것은 시사(時賜)가 아닙니까.
또한 신이 듣기로는 학교에 서적을 하사하는 것은 전대에 으레 있었던 은사라 합니다. 지금 현재 본관에 소장된 장서가 2백, 3백 권 미만이어서 스승이나 생도나 열람할 것이 있으면 곧 시골 마을에서 빌려와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조정이 학교를 존숭하지 않고 있다는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예관에게 특별 명령을 내리시어 팔도(八道)에서 간행한 모든 본(本)을 다시 인출하게 하여 그것을 하사하심으로써 강독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것을 해당 아문에 내려 여쭈어 처리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왕조 시절에는 진작의 방법을 더욱 넓히기 위하여 윤강(輪講)을 정파하고 과제(課製)를 별도로 실시하여 혹은 반궁(泮宮)에서 시험을 보이기도 하고 혹은 금정(禁庭)에서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또 좨주(祭酒)라는 직임을 두어 제생들을 통독(通讀)시킴으로써 용동(聳動)되도록 하여 인재 작성의 효과가 나타날 희망이 있었습니다. 근년 들어서는 마침 국가에 변고가 있었고 으레 실시하던 과제마저 실시하지 못하여 다사(多士)들이 너무도 허탈감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본관의 학령은 바로 조종조에서 이미 시행하던 절목이며 《법전(法典)》 속에도 기록되어 있는 제도인데, 학관 수를 임시로 감원한 후 유생을 매일매일 고강하던 법마저 따라 폐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갑자기 옛날 그대로 돌아가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상소 내용 중의, 고강과 제술 등에 관한 절목을 옛것을 모방하면서 약간의 변통을 가하자고 한 제의는 참으로 의견이 있으니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일이란 꼭 성공을 기해야 하고 법은 간편해야 시행이 가능한데 매월 4회씩 고강을 하고 2회씩 과제를 한다는 것이 뜻은 좋지만, 1개월 동안에 그 많은 관원들이 자주자주 모이면서 1년내내 그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형세로 보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끝내 유명무실이 되고 마는 것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사세를 참작하고 규정을 절충하여 꼭 시행될 수 있도록 손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령 매월 대사성(大司成)이 본관의 관원과 상하 두 재의 제생들을 모두 이끌고 2회에 걸쳐 고강을 하고 집에 있는 제생이라도 고강을 원하면 역시 들어줍니다. 고강할 서책은 사서·삼경을 돌려가며 고강하되 문의(文義)에 막힘없이 통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통(通)과 약(略)의 분수(分數)는 학령에 정해진 그대로 매기며 《주역(周易)》·《춘추(春秋)》에 있어서도 획을 갑절로 쳐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1년 동안 고강한 것을 통산하면 24회가 되는데 매 연말에 그 획의 수를 통틀어 계산하여 20분(分) 이상이면 그를 뽑아, 본 아문에 보고하여 서계(書啓)의 자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순·종순의 윤차에 있어서는 정폐한 지 이미 오래되어 다시 실시하기는 어렵겠으니 지금 이후로는 대사성 이하가 매월 1회씩 제술 시험을 치르되 장옥(場屋)과 똑같이 엄격한 규정을 두어 절대 외인과 상통하지 못하게 하고 출제에 있어서는 부(賦)·표(表)·논(論)·책(策) 중에서 매 시험 때마다 한 문제만을 내되 반드시 그날로 차등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1년치 제술을 통산하면 모두 12회가 되는데 매 연말에 그 획의 수를 통틀어 계산하여 10분 이상이면 그를 뽑아 본 아문에 보고하여 서계의 자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강과 제술에 있어서의 상격은 그 고하를 분과 획의 다소에 따라 상께서 재량하여 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생들의 모든 고강이나 제술에 있어 특명으로 치루어진 것이 아니면 상격에 있어서도 곧바로 회시(會試)에 응하게 하는 것, 그 다음으로는 분(分)을 주는 것, 또 그 다음으로 종이나 붓·먹 등을 내리는 것이 예로부터 있어 왔던 예이지만 곧바로 전시에 응하게 하는 그것만은 결코 가벼이 논의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상순의 윤차라는 것은 바로 1월 7일과 7월 7일을 말한 것으로 정부·관각의 당상관들이 나와 시취(試取)에 참여하는 날이고 이른바 춘추 과시라는 것은 바로 3월 3일과 9월 9일을 말한 것으로 정부·육조와 관각·본관의 당상관이 일제히 나와 참여하는 날로서 이는 병조의 도시(都試) 규정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문무를 막론하고 똑같이 인재를 선발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날 연고가 있으면 그 다음날 하는 것으로 법전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행사 당일 만약 연고가 있으면 본관이 그 사실을 아뢰고 연고 없는 날 시행할 것을 여쭈어 정하되 그 달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본관에서 착실하게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8월 3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8월 4일 기해

상이 또 침을 맞았다.

 

8월 5일 경자

상이 또 침을 맞았다.

 

이경휘(李慶徽)를 승지로 삼았다.

 

전 부사 허목이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지금 국가가 큰 일을 빼먹고 거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어 신으로서는 의혹스럽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 총사(冡嗣)가 없었으나 하늘이 성상을 도우셔서 원자(元子)를 낳으셨으니 이는 하늘이 성자(聖子)를 주신 것입니다. 예(禮)에 태자(太子)가 탄생하면 성인(成人)의 예를 거행하고, 태어난 지 3개월이 되면 사(士)로 하여금 업게 하고 유사(有司)가 단면(端冕)072)   차림으로 남교(南郊)에 나아가 뵈며, 제후(諸侯)의 세자(世子)는 천자(天子)에게 맹세를 하고 그 이름을 오사(五祀)073)  와 산천(山川)에 두루 고하는데, 그 이유는 계통을 엄히 하고 후계자를 중히 여겨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게 하는 것으로서 까닭이 있어서 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성상의 사자가 탄생한 지 이미 3년이 되었으나 성인의 예를 거행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저위(儲位)를 그렇게 오래 비워두고 계시니 어리석은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의 춘추가 젊으셔서 저위를 세우기가 너무 이르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직 나이가 어려서 몇 해 더 늦추려는 것입니까? 저위를 세우는 큰 일은 예를 상고해 보더라도 엄하기가 이와 같고 하늘이 주신 것이므로 사람들 마음이 매여 있으니 나이 어린 것 때문에 구애될 일은 아닙니다. 보부편(保傅篇)에도 이르기를 ‘성왕(成王)이 태자였을 때 어려 강보에 싸여 있었지만 소공(召公)을 태보(太保), 주공(周公)을 태부(太傅), 태공(太公)을 태사(太師)로 하여 효(孝)·인(仁)·예(禮)·의(義)를 밝혀서 교도하였기 때문에 성왕은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이 이미 행해졌다.’ 하였습니다. 태자의 예는 그러한 것으로 옛날 했던 것에 비하면 이미 늦었다고 하겠습니다. 모름지기 어린 시절 지각이 생길 때부터 사부(師傅)에게 교도(敎導)와 보양(保養)을 위임하여 거처와 출입 그리고 말하는 것 동작하는 것, 모두를 가르치고 경계하여 귀와 눈에 익숙해지고 마음에도 편안하게 느껴지도록 하여 교화의 목적이 달성되고 덕이 성취되어야만 국가가 오래오래 치안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의(賈誼)도 이르기를 ‘한 나라 운명은 태자에게 매여 있고 태자의 선(善)은 일찍부터 가르치고 좌우(左右)를 잘 선발해 주는 데에 달려 있다.’ 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물며 저사(儲嗣)는 나라의 뿌리로서 나라의 뿌리가 정해지지 않으면 이것이 곧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길이니 삼가 전하께서는 일찍 저사를 정하시어 하늘의 마음을 따르시고 사부를 두어 교양의 일을 맡기어, 사방 백성들의 바람을 따르소서. 그러면 종묘 사직이 이보다 더 다행일 수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원자가 탄생하신 것은 참으로 종묘 사직에 있어 만세를 두고 끝이 없을 경사입니다. 처음 탄생했을 때 간원(諫院)이 차자를 올려 고례(古禮)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실록(實錄)》을 상고해본 결과 조종조에서 일찍이 고례를 그대로 행한 사실은 없었고 다만 원자가 탄생하여 6세가 되면 책봉(冊封)하는 일만 있습니다. 이에 3개월이 되었을 때 산천에다 두루 고하는 예는 비록 거행을 못하였으나, 사람들 마음이 매여 있는 바여서 나라의 뿌리는 저절로 내려졌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미처 거행을 못한 일이 책봉 의식일 뿐인데 허목의 상소 내용에, 성상의 사자가 탄생한 지 이미 3년이 되었으나 성인의 예를 거행했다고 들은 바 없다고 한 그 말은 그것이 옛 예를 행하고 싶은 뜻에서 한 말이겠으나 ‘저위가 오래 비어 있어 나라 뿌리가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한 그 말에 있어서는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태자가 어린 시절 지각이 생길 때부터 삼공(三公)·삼소(三少)074)  가 효·인·예·의를 밝혀 교도하고 익히게 했던 것은 바로 성주(成周)의 예입니다. 지금 원자가 비록 나이 어리지만 서둘러 책봉의 전례를 거행하고 보양을 제때 하는 것이 교육을 일찍부터 해야 하는 원리에 꼭 맞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예도이니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신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원두표가 주장하기를,
"원자가 탄생한 그 날이 바로 나라의 뿌리가 저절로 내려진 날로서 종묘에 고하였고 모든 관료가 하례를 올렸으며 팔로(八路)가 다같이 경사로 여기고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는 등 나라 전체가 똑같은 마음으로 기뻐 추대하였으니, 허목이 상소에서 ‘나라 뿌리가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한 그 말은 사실 알 수 없는 말입니다. 그가 인용한 ‘성왕은 적자 시절부터 교육이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 한 그 말은 참으로 더할 수 없이 훌륭한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책봉의 예를 어린 시절에 거행한 일이 명조(明朝)에서는 비록 그렇게 했던 전례가 있지만 아조(我朝)에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성조(聖祖)가 행했던 것을 법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책봉례는 우선 천천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당시 윤선도 등이 의례(議禮)를 틀리게 했다는 것을 공박하면서 모두 종통(宗統)과 적자(嫡子)를 언질로 삼았는데 그들 뜻은 은연중 마치 대통(大統)이 다른 곳으로 귀속이라도 될 염려가 있는 것처럼 하여 공동(恐動)을 하고 모함을 했으며, 나라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허목의 이 말도 그 뒤를 이어 나온 말이었다. 이보다 앞서 유언비어가 이미 나돌고 있었는데, 송시열을 헐뜯는 자들이, 시열이 원자 탄생 소식을 듣고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밖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릴 때도 하례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만들어내어 중외에 퍼뜨림으로써 헐뜯고 이간질을 하였고, 허목의 상소 내용 또한 이러하여 머리와 꼬리가 서로 호응하여 후일 화가 자리잡을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흉악한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와 생각하는 것들이야말로 참으로 참혹하다 하겠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고 난 후 제조 김좌명(金佐明)이 앞으로 나아와 아뢰기를,
"요즘 대간들이 날마다 논계하는데 하나도 따르지 않으시니 신은 삼가 민망합니다. 조징규(趙徵奎)가 술이 취한 채 입시한 일만 하더라도 진실로 그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어찌 그렇게까지 난색을 보이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술 마시고 입시하는 것은 나도 싫어한다. 그를 죄주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겠는가. 다만 그가 취한 채 입시했다는 말이 어찌하여 밖에까지 전파되었단 말인가. 내 그래서 따르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좌명이 또 아뢰기를,
"권대시(權大時)가 상소문 속에서 이쪽저쪽을 들먹인 말이 매우 나쁘기는 하지만 진신(搢紳) 사이에도 당론(黨論)을 하는 이들이 역시 많은데 대시만 유독 그 때문에 죄를 받는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최대립(崔大立)은 바로 선왕조의 늙은 환관으로서 조정의 체통과 법례를 모르는 것도 아닐 터인데 지금 그 모양이고, 이상진(李尙眞)은 그가 원래 풍력(風力)이 있어 그러한 치계를 하였던 것이며, 양달원(梁達源)은 내관(內官) 중에서도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 교관(敎官)이 그를 경계하고 주의를 준 일이 비록 꼭맞는 일은 아니었을지라도 조사(朝士)를 꾸짖고 욕설을 했다면 죄가 없는 것이 아닌데, 역시 윤허를 받지 못하고 성조(聖朝)에 누를 끼치고 있어, 신이 감히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도승지 남노성(南老星)이 아뢰기를,
"좌명이 말이 옳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8월 6일 신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와 좌상 원두표가 옥당이 차자로 공척한 일로 하여 같은 내용으로 면직을 빌었는데, 상이 위로하여 타이르기만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태화가 아뢰기를,
"양남(兩南)의 농사가 비록 신축년보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진정(賑政)을 미리 꼭 강구해두어야 할 것이므로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가 책임을 맡을 만한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조복양(趙復陽)·유계(兪棨)가 맨 먼저 진정을 맡았으므로 이 두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복양은 현재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으니 내직(內職)으로 옮겨 임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민정중(閔鼎重)이 현재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있는데 진정을 함께 관리하도록 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세 사람으로 하여금 일체 주관하게 하고 조복양은 경직(京職)으로 옮겨 임명하도록 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현재 진정을 강구 중인데, 호판(戶判) 정치화가 사행(使行)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탁지(度支)의 임무가 막중하므로 서투른 자에게 맡겨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치화의 동지사(冬至使) 임무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 임명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권대시가 이쪽저쪽이라고 한 말이 비록 가증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명색이 유자(儒者)이고 그의 상소 역시 주의는 존현(尊賢)에 있을 뿐인데 추국까지 해야 할 만큼 숨겨진 사정이야 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시를 놓아보내고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정거(停擧)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예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옥당(玉堂) 차자 내용에 사치의 폐단에 관하여 남김없이 개진하였는데 그 말이 옳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러한 흉년에 너무 심하게 소비를 하고 있으니 그 폐습을 뿌리뽑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 본 아문에 있으면서 혼례와 상례의 절차에 관하여 일정한 격식을 정하여 반포하였으나 금방 그것을 폐지해버리고 이행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그 제도를 거듭 밝혀 착실하게 거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명하가 또 아뢰기를,
"고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의 서원에 아직도 사액(賜額)하지 않으셨는데, 전일 서원의 유생들이 사액을 청하여 왔을 때 본 아문에서는 근래의 전교에 관하여는 자세히 아는 바 없었으므로 회계를 분명하게 못하여 성상의 하교가 있게 만들었고 따라서 윤허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서원이 비록 폐단이 있을지라도 그 두 신하의 절의(節義)만은 누구에게 비하여도 현저할 뿐만 아니라 중첩하여 설립된 것도 아니니 사액을 허락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중첩하여 설립된 것이 아니라면 사액을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대사헌 김수항에게 이르기를,
"내수사의 간정(間定) 건을 두고 사헌부가 오래 쟁집(爭執)을 하고 있는데 경들은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쟁집하는지 알고 있는가?"
하자, 수항이 아뢰기를,
"각사의 노비(奴婢)를 여러 왕자(王子)와 부마(駙馬) 집에 그 개인에 한하여 정급(定給)하는 일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는 그렇지 않다. 내수사 노비를 정급하는 일은 궁가(宮家)의 일인데 그게 무슨 이조를 꼭 거쳐야 할 사항인가."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신들은 알지도 못하고 논집(論執)해 왔는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보니 일에 대한 논의를 자세히 하지 못한 실수였습니다.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고, 수항이 또 조징규를 잡아들여 국문하자는 전번의 청을 되풀이하자, 따랐다. 호판 정치화가 아뢰기를,
"재생(裁省) 문제는 대신들이 이미 결정하였으니, 9월부터 신축년에 했던 예대로 재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0월부터 시작하고 어공(御供)도 똑같이 재감하라."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권우(權堣)가 아뢰기를,
"창고 곡식의 출납은 그 책임을 전적으로 경력(經歷)에게 맡기고 오래도록 재임케 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력을 당하 수령(堂下守令)에 대한 규례와 같이 6년으로 한정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자,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강화(江華)는 바로 보장(保障)의 중요 지대로서 경력이 모든 것을 전관하게 하면 틀림없이 유수(留守)가 마음을 등한히 할 것입니다."
하니, 태화도 경억의 말을 옳게 여겼다. 경억이 아뢰기를,
"성상의 체후가 오랜 기간 편찮으셔서 인접의 기회가 매우 드문 것이지만 위로는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뜻으로 무서운 재이가 일어나고 있고 아래로는 강상(綱常)의 변이 거듭 일어나서 인심과 풍속이 매우 무너졌습니다. 조정에서도 시비가 시끄럽게 일어나고 사정이 뒤범벅이 되고 있는데 성상께서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정신을 가다듬고 새출발을 시도하려는 뜻이 없고 대소 신료들도 태연한 자세로 느슨하고 맥이 풀리고 게을러져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변란을 갑자기 당한 자들은 위아래가 깜짝 놀라 분주히 서둘고 서로 힘을 합하기 때문에 수습을 쉽게 하는데 반해, 쇠망의 징후가 두고두고 쌓여온 나라는 위망의 조짐이 여러 세대를 두고 빚어져왔기 때문에 비록 갑절의 노력을 하여도 떨치고 일어나기가 어려웠습니다. 전하께서도 반드시 크게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서서 신하들을 격려하셔야지만 쇠망을 딛고 일어나고 어지러운 것들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대신이라면 당연히 나라 일을 책임져야 할 것이니 지금 나라 일이 이 모양이 된 것이 어찌 대신들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래로 정령(政令)을 시조(施措)하는데 있어 무슨 큰 잘못이야 있었습니까. 다만 그저 우물쭈물 옛것을 답습하면서 떨치고 일어나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재이를 당하여 수성(修省)한다는 것 역시 잠잠한 마음으로 팔짱끼고서 벽만 바라본 채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깜짝 놀라 움직이는 마음으로 정령과 기타 모든 일에 그 마음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상과 벌, 그것은 임금에 있어 큰 권한인 것입니다. 국면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는 효과가 전적으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인데 성상께서는 일찍이 이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으셨기 때문에 모든 아랫사람들이 솟구쳐 움직이거나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라가 유지되는 원동력은 기강(紀綱)인데 기강이 그렇고서야 무슨 일을 할 것입니까.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기강은 그 자체가 떨치고 일어나지는 못하는 것이다. 반드시 현자가 윗자리에 있고 불초(不肖)한 자는 아래에 있으며, 공로가 있는 자는 반드시 상을 내리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리며, 재보(宰輔)는 그것을 잘 지켜 잘못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대간(臺諫)은 잘 보필하고 살펴서 사사로이 쓰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이며, 임금은 또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굽어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깊이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8월 7일 임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대전(大典)》의 이전(吏典)편에 각 아문의 서열을 정하고 그 아문의 품등(品等)을 구별하여 놓았는데, 내시부(內侍府)는 그 서열을 각 아문의 맨 아래이자 잡직(雜職)의 맨 처음에 정하고 무슨 품(品)의 아문이라고는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종조에서 제도를 정할 때의 뜻을 상상할 만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2품 아문으로 칭하면서 육조(六曹)와 각도의 감사(監司)에게 관문(關文)을 직접 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된 규례인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잘못이 그대로 인습되어 이렇게까지 된 것입니다. 내시관 품계는 종2품이 최고이고 상선(尙膳) 이하는 원래 정직(正職)이 아니므로 언제나 부록(付祿)할 때마다 번갈아가며 올리고 내리기 때문에 일정한 높낮이가 없으니 마치 군직(軍職)의 체아직(遞兒職)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정식 2품 아문으로 정하지 않은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내시부는 이조(吏曹)의 부속 관아인데 어떻게 감히 육조와 관문을 통하며, 감사는 육조와 품질(品秩)이 서로 대등한데 육조의 부속 관아로서 감사에게 관문을 통한다는 것은 그러할 이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잘못되어도 이만저만 잘못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내시부가 공문을 발송할 일이 있으면 내수사 규례에 의하여 해당 아문에 보고하여 공문 발송을 하게 함으로써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시부에 틀림없이 인신(印信)이 있을 것이니 무슨 품계인가를 상고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기 도내의 산기슭과 바닷가 그리고 오래 묵어 있는 황무지로서 경작하지 못할 땅들을 이번 양안(量案) 때 그 고을의 호족들이 저들 이름으로 등록을 하고는 저들 멋대로 사람 출입을 금하여 꼴 베고 나무하는 자도 발을 붙일 수 없고 고기 잡고 나물 캐는 이도 손대지 못하게 하여 산림(山林) 천택(川澤)의 혜택을 그들 사실(私室)들이 모두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 근교의 무덤들이 다닥다닥한 곳까지도 모두 저들 소유라고 하면서 그 값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악 하고도 외람된 행동들이 너무나 해괴 망측하니 좌·우 균전청(均田廳)으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하여 엄히 금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8일 계묘

전 판서 조형(趙珩)을 특별 서용하고 이어 그를 동지정사(冬至正使)에 임명하였다.

 

재이와 흉년으로 인하여 각도의 점마(點馬)를 정지하였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지원(李枝遠)이 치계하기를,
"도내에 유황(硫黃)이 생산되는 곳을 이미 세 군데나 발견하였는데 옥천(沃川)과 서원(西原)에 또 유황 비슷한 이상한 돌이 있습니다. 가져다가 제련을 하여 군수(軍需)에 쓰게 하기 바랍니다."
하자, 묘당이 본도로 하여금 장계대로 채취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김수항 등이 내시부 건으로 다시 아뢰기를,
"본부에 비록 인신(印信)이 있을지라도 품질(品秩)의 높낮음에 관하여는 원래 새겨 넣는 규정이 없으니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상고할 단서가 되겠습니까."
하자,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상고할 단서가 되겠습니까.’라는 그 한 마디는 너무 살피지 않고 한 말이다."
하니, 수항 등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인신(印信)의 규격은 비록 2품의 인신과 비슷하지만 외조(外朝)의 2품과 비교하여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문을 직접 통할 수 있고 없고가 인신 모양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니, 신들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성상의 의도가 무엇인지 끝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살피지 않았다는 하교를 이미 받았으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고, 간원이 아뢰어 출사시킬 것을 청하자, 따랐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전 판서 조형을 사신으로 차견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신들은 삼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조형이 범한 죄의 경중은 지금 따질 것이 없다 치더라도 심리 과정에서 용서받은 그 자체가 우선 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신을 갈아 임명한다 하여 죄적(罪籍) 속에 있는 그를 수용한다는 것은 마치 그 일로 인하여 속죄가 되게 하려는 듯한 인상에 있으니 그 얼마나 구차한 일입니까. 환수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0일 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예조가, 상의 체후가 편찮다 하여 각릉(各陵)의 춘행(春幸) 거둥을 정지할 것을 아뢰었다. 처음에 효종(孝宗) 때 각능에 전알(展謁)하는 일을 언제나 봄가을에 거행하기로 규정을 정하고 이어 그것이 전례가 되어왔기 때문에 예조가 해마다 능 참배를 여쭙게 되었는데, 사실은 추모(追慕)의 뜻에서 한 일이었다. 그러나 효종이 봄가을이면 반드시 그 거둥을 했던 것은 출입하면서 강무(講武)하는 데에 중점을 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뭇 논의들이 모두 온당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정언 송창(宋昌)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본직에 있을 때, 한 패륜무상(悖倫無狀)한 사람을 논했다가 결국 시비가 전도되게 만들었고 신은 또 까닭없이 헐뜯음을 당했습니다. 그때 처치한 내용 중에는 ‘과연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하는 등의 말로 신을 멋대로 공박하기도 하였습니다. 대관은 소문만 듣고도 그것을 논할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 있는데, 설혹 좀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함부로 사사로운 뜻을 내세워 공박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와서 어떻게 감히 구차하게 눌러앉아 대각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지평 윤우정(尹遇丁)도 그때 송창을 처치했던 일로 인하여 또 인피하고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은 역시 사직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헌부가 우정은 체직시키고 송창은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충청도 유생 이상경(李尙絅) 등과 전남도 유생 유무(柳楙) 등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11일 병오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박장원을 개성 유수로, 조복양을 이조 참판으로, 오두인을 부수찬으로, 여이재(呂爾載)를 판윤으로 삼았다.

 

8월 13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나아와 아뢰기를,
"금년 들어 우역(牛疫)이 크게 번졌습니다. 경기(京畿)와 양서(兩西)는 더욱 심하였는데, 관서(關西) 지방은 1천 두 가까이 죽었다니 이야말로 큰 이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축년에는 우역으로 죽은 소가 얼마나 되었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병자년부터 정축년까지 죽은 소가 수도 없어 거의 남아있는 종자가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성익(成釴)을 시켜 몽고 땅에서 사왔습니다. 지금 있는 소들은 모두 그 종자입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날 지아비를 시해한 계집의 형을 집행하였는데 그후 그 시신에다 음행을 한 자가 있어 형신 끝에 자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죽여야 한다고 하나 법전에는 여기에 적용할 법률 조항이 없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상에 어찌 이처럼 흉악 망측한 자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태화와 삼사(三司) 모두가 효시(梟示)할 것을 청하니, 상은 그를 효시한 후 이어 수교(受敎) 안에다 기록하여 정률(定律)을 삼도록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판교(判校) 이선(李䆄)은 원래 이력(履歷)이 없어 전관(銓官)으로는 맞지 않는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안 사람을 수망(首望)으로 추천하는 것은 자못 관직을 위해 인재를 택하는 뜻이 아니니, 이선을 체직시키고 이조의 당상관과 낭청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응교 이민적이 아뢰기를,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에 쌓아둔 창곡은 유사시에 대비해 놓은 것이고 또 재이나 흉년에 쓰려는 것들인데 지금 듣기에 문서로는 비록 그대로 있지만 사실은 허술하고도 소홀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경관(京官)을 보내 그 허실 여부를 조사하여 밝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리하여 남구만(南九萬)을 남한으로, 민유중(閔維重)을 강도로 가게 하였다.

 

전적(典籍) 권진한(權震翰)이 대각의 계청에 의하여 추고를 받게 되었는데, 3차에 걸쳐 이를 항거하였으므로 사헌부가 본도(本道)로 하여금 형추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추함(推緘)을 거역했다 하여 조정 관리를 외지에서 형추했던 전례가 있는가?"
하니, 사헌부가 아뢰기를,
"조정 관리로서 3차에 걸쳐 추함을 항거하면 서울에 있을 경우 직첩(職牒)을 환수하고 나와 추고를 받게 하며 형추를 아뢰어 청하고 나서 의금부로 이송하며, 외지에 있을 경우는 곧바로 형추할 것을 계문(啓聞)으로 청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법전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그전부터 줄곧 써오던 법규입니다."
하였는데, 상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인견 때 대사헌 김수항이 구례가 그러하다고 아뢰었고, 영상 정태화도 아뢰기를,
"신이 인조조(仁祖朝)에서 통진 현감(通津縣監)으로 있었을 때 신의 신상과는 관계가 없는 추함이 있어 3차에 걸쳐 항거하였더니 헌부가 곧바로 본도로 하여금 형추를 하도록 청하였고 상은 특명으로 조율(照律)을 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제서야 그런 것으로 여겼다.

 

8월 14일 기유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이숙(李䎘)을 부교리로 삼았다.

 

상이 경연에서, 해수(海水) 떼어받은 곳을 일제히 조사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간원에서는 어장(漁場)의 세 받는 일까지 그 하교 속에 포함된 것으로 여기고 어장을 혁파하자고 아뢰려던 것을 정지했었다. 그후 그 조사 대상이 해수 떼어받은 곳뿐이고 어장은 그 대상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어, 대사간 이경억이 잘못 알고 정지해버렸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체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대개 상이 전번에는 화전(火田)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때도 시장(柴場)은 혁파하지 않았었고 뒤에는 또 해수 절수받은 곳을 조사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어장은 불문에 붙였던 것이다. 안으로는 여러 궁가의 견제를 받고 밖으로는 공의(公議)에 몰려서 하나는 따르고 하나는 따르지 않고 하여 결국 실효가 없었으므로 논의하는 이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8월 15일 경술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요즘 조정의 명령이 항상 유시무종이 되어 걱정입니다. 각도의 제언(堤堰)만 하더라도 사실 민사(民事)에 있어서는 근본 문제여서 작년에 제언사(堤堰司)를 별도로 두고 그로 하여금 모경(冒耕)을 금하고 해묵은 축대를 수리하게 하였으며 도사(都事)로 하여금 그를 철저히 살펴 적(籍)을 만들어 올려보내도록 했습니다. 이는 곧 보통으로 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각도에서는 대부분 받들어 시행하지 않고 모경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기근이 거급 닥치고 있는 것이 항상 가뭄 때문이어서 수리(水利)에 힘을 다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사(御史)를 내보내 순회하면서 샅샅이 살펴 법을 봉행하지 않은 관리들에게 죄를 부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에 물어 처리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관아의 노비들이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으로 꾸며 입안(立案)까지 만들어 내니 그 폐단의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선왕조에서 그것을 일단 바로잡았으나 10년이 채 못 가 간사한 속임수가 여전하고 중외의 관리들 역시 하나같이 봉행하지 않고 있어 비록 시장(屍帳)의 격식은 있지마는 끝내 검시(檢屍)하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공천(公賤)으로서 죽은 자는 안으로는 정부(政府)·삼사(三司)에서부터 외방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직접 검시를 하게 하되 그래도 종전 습관을 답습하는 자가 있으면 중죄로 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6일 신해

서필원(徐必遠)을 승지로, 이유상(李有相)·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이지무(李枝茂)를 헌납으로 삼았다.

 

제주의 세공마(歲貢馬) 2백 필이 도착하였다.

 

8월 17일 임자

평안도 태천(泰川)·운산(雲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제언사 낭청(堤堰司郞廳)을 보내 각도의 제언을 돌아보며 점검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안국재(安國宰) 등이 올린 상소문에 의하여 각도로 하여금 각읍의 향교(鄕校)에서 제사 모시고 있는 위패 수를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각도의 계문(啓聞)을 보건대 계수관(界首官)의 향교는 그 규모가 태학(太學)과 다를 바 없고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있어서는 혹 당연히 모실 제사를 모시지 않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모시지 않을 제사를 모신 곳도 있으며, 혹은 위차(位次) 배열 순서가 잘못된 곳과 위판(位版)을 잃어버리고도 다시 만들지 않은 곳도 있고, 혹은 군이면서 거느림채[廡]가 없는가 하면 혹은 현이면서도 거느림채가 있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각도로 하여금 한결같이 정해진 체제대로 때맞추어 바로잡도록 해야겠습니다. 그 중 군이면서 거느림채가 없는 곳은 혹 물력(物力)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현이면서도 거느림채가 있는 곳은 정묘(正廟)가 협착하기 때문인 경우도 있어 그것을 일시에 고치기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니 조금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소서.
그리고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명(後名)075)  이 문종 대왕(文宗大王) 어휘(御諱)와 같은 글자인데 각도의 위판에 혹 그후명(後名)을 쓰고 있는 곳도 있다니 모두 고쳐 쓰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8일 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승지를 보내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을 돈유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병 때문에 소를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자,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완이 여러 조정을 거친 숙장(宿將)으로서 은례(恩例)가 다른 신하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명이 있었다.

 

8월 20일 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태연(李泰淵)·오정위(吳挺緯)를 승지로, 이민서(李敏敍)·이숙(李䎘)을 이조 좌랑으로, 민점(閔點)을 병조 참의로, 홍중보(洪重普)를 좌참찬으로, 유철(兪㯙)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헌납 이지무는, 지난번 헌부에 있을 때 피사(避辭)의 어휘를 잘못 놓은 실수가 있어 동료가 그 때문에 인피하고 이미 체직이 되었는데도 스스로 논열하지 않고 마치 기다리는 듯한 태도여서 자못 대각의 체통을 잃고 있습니다. 체차하여 그를 경차관으로 임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금성 현감(錦城縣監) 윤부(尹𣞒)는 서산 군수(瑞山郡守)로 있을 때부터 비록 잘 다스린다는 말은 있었으나 실효는 전혀 없었는데 급기야 본임(本任)으로 와서는 인품과 자리가 서로 걸맞지 않아 정령(政令)이 이미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또 늙고 병들어 격심한 직무를 감당할 수도 없으니 체차하소서. 홍양(洪陽)은 원래 일이 많기로 알려진 읍인데다 근래에는 또 피폐함이 이미 극에 달했는데, 현감 윤변(尹抃)이 도임한 이후로 술만 마시고 사무는 전폐하여 첩소(牒訴)가 정체되고 있고 백성들의 원성이 많습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21일 병진

함경도 유생 한희익(韓希益) 등이 상소하여 이이·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가 강호(江戶) 집정(執政)의 요청에 따라 《사서(四書)》·《오경(五經)》·《사기평림(史記評林)》·《주자어류(朱子語類)》를 무역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고 《어류》·《평림》만은 무역을 허락하였다.

 

8월 22일 정사

대사간 이경억 등이, 홍양(洪陽)·금성(錦城) 두 군수의 체직을 논하는 계사에서 잘 파악하지 못하여 파직을 청하지 않고, 잘못 체차를 청하여 대각의 규율을 실추시켰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고, 대사헌 김수항 등도 고부 군수(古阜郡守) 최천인(崔千仞)을 논하면서 체차시키기만을 청하여 대각의 체통을 실추시킨 것이 간원과 다를 바 없다 하여 역시 인피하고 체직을 청하였는데, 옥당이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그후 윤부·윤변에 대해 다시 파직을 청하자, 따랐다.

 

8월 23일 무오

민여로(閔汝老)를 헌납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의로, 서필원(徐必遠)을 병조 참지로 삼았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기성(騎省)076)  과 남궁(南宮)077)  의 낭관(郞官)은 청망(淸望)의 디딤돌이므로 아무나 충원해서는 안 되는 곳인데, 병조 좌랑 강시경(姜時儆), 예조 정랑 어상준(魚尙儁), 좌랑 정동엽(鄭東燁)은 모두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울러 도태시키소서."
하니, 따르지 않다가 뒤에야 따랐다.

 

대사헌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진주 목사(晋州牧使) 정승명(鄭承明)은 사람이 느긋한데다 이미 매우 노쇠하기까지 하여 결코 번거롭고 격심한 직무를 잘 처리해 나갈 수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4일 기미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듣기에 음죽(陰竹) 땅 윤여징(尹汝徵)의 전답이 절수(折受)되는 곳으로 뒤섞여 들어갔는데 그 문권(文券)이 명백히 현존하고 있다 합니다. 궁가(宮家)가 떼어받는 곳은 또한 면세지이니 원수(元數) 이외의 것에 관하여는 송관(訟官)의 판결이나 해조의 복계(覆啓) 내용이 사리로 보아 모두 맞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특별히 궁가에다 그대로 주라고 하셔서 도리어 강약(强弱)이 상대가 되지 않아 40년 동안이나 추심을 못하여 왜곡의 사단이 되었으니, 사건은 비록 미세한 것이지만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칠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조세 감면의 수와 원수 이외에 더 내놓는 수를 보면 뒤섞여 들어간 것이 그 한 사람뿐이 아닌 듯합니다.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종전에 복계했던 대로 시행하게 하고 이 일을 전후하여 더 내놓은 수량은 그 결(結)의 수에 맞추어 낱낱이 본주인에게 되돌려 주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충청도 아산(牙山) 땅에 간교한 무리들이, 인평위(寅平尉) 집에서 재가를 받아 떼어받은 것이라고 칭하고 도신(道臣)에게 소장을 올리고는 둑을 쌓고 논을 만들어 벼가 들에 가득하고 대대적으로 포구를 굴착하여 백성들 전답이 그리로 잘려 들어가기 때문에 생업을 잃은 자가 매우 많고 원성과 욕설이 길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인평위 집에서는 원래 떼어받은 사실이 없고 다른 궁가에서도 역시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합니다. 궁가에서 떼어받는 그 피해가 오늘날 백성을 병들게 만드는 큰 폐단이 되고 있는데다 간교한 무뢰배들까지 덩달아서 궁가를 핑계하고 백성들의 전답을 침탈하여 국가로 하여금 거듭 백성들의 원성을 부르게 하고 있으니 그들 정상을 볼 때 참으로 가슴 아프고 놀랄 일입니다.
도신이, 재가한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지 않고서 경솔하게 소청을 들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마음놓고 간계를 부리게 하였으니 잘못된 책임을 면키 어렵습니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을 추고하고, 이어 수창자를 엄히 조사해서 적발하여 아뢰어 적당한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6일 신유

평안도 함종(咸從)·영유(永柔)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윤우정(尹遇丁)을 지평으로 삼았다.

 

8월 28일 계해

흉년으로 호서 지방의 내년 춘계 조련을 정지하도록 하고, 영장(營將)이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예로 순력(巡歷)하던 것을 한 달 걸러 하게 하고, 병사(兵使)는 1회에 한하여 순력하되 다만 군기(軍器) 점검만 하고 군병은 모이지 말도록 하였다. 호남 연해 지역의 피해가 더욱 심한 읍과 영남 일대는 조련을 일체 정지하고 병사 순력 때도 군병은 모이게 하지 말고 군기만 점검하도록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당번 기병(騎兵) 중에서 나이 젊고 건강한 자 52명을 뽑아내어 옛 정초군(精抄軍)과 통합하여 2백 명을 확보한 후 1백 명은 진선문(進善門) 북쪽 월랑(月廊)에 입직하게 하고 1백 명은 건양문(建陽門) 밖의 구영(舊營)에 입직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입직한 정초군이 옛날에는 1백 48명이던 것을 지금 52명을 더 늘린 것이다. 그후 홍중보(洪重普)가 판서가 되면서 기병과 호수(戶首)로서 정장인 자를 일제 검열하고 정초군 수를 늘려 병판(兵判)을 대장으로 하였는데 그 발단은 사실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금년 수재·한재는 영남이 더욱 심하여 영남 백성으로서 호서로 이사한 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호서 백성들이 주객(主客) 모두가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도를 맡고 있는 신하가 전혀 아뢰지 않아 관내 백성들의 딱한 사정을 위에서 성상이 들을 수 없게 하였으니 경책(警責)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청컨대,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과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을 추고하소서. 변장(邊將)이 인(印)을 주고받으며 면대하여 교체하던 법은 폐기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만 요즘 와서 변장들이 혹 체직되거나 파직을 당하면 반드시 지레 돌아가버리고 감사나 수사·병사가 자기 편비(褊裨)를 대장(代將)으로 내세우기 때문에 대장이 된 자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긁어모아 사복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졸들은 원한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수비는 허술하여 더욱 한심합니다. 소강 첨사(所江僉使) 남숙(南淑)도 지레 돌아왔던 일로 이미 죄를 받았으니 그렇다면 그가 멋대로 떠나가게 내버려둔 책임은 도신에게 있습니다. 황해 감사 강유(姜瑜)도 추고하소서. 그리고 지금부터는 변장으로서 체직·파직이 된 자도 변방 수령의 예와 똑같이 면대(面代)를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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