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9권, 현종 4년 1663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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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을축

우의정 정유성이 여러 날을 두고 정고(呈告)하다가 이때 또 소장을 올려 체직을 강력히 청했는데,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본부가 일찍이 평산(平山) 사람 조원(曺瑗)에 대하여 그를 경옥(京獄)으로 잡아오지 말 것을 논열하였는데, 인대하였을 때 성상의 비답에, 송사가 결말이 나기를 기다려 잡아오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정지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들이 지금 본도가 조사하여 밝힌 계본을 보니, 조원이 공사를 의탁하여 사복을 채운 정상이 모두 탄로가 났는데 참으로 매우 고
약합니다. 다만 국가가 처치해야 할 방법을 생각할 때 비록 다스려야 할 죄가 있더라도 사건을 본도에 맡겨 다스리게 하여야 옳지, 하잘 것 없는 간악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번거롭게 왕명으로 경옥에 잡아오게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원을 경옥으로 잡아오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본도에서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2일 병인

사간 이정(李程)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환관 내시의 교만한 습성은 법으로 보아 엄히 다스려야 마땅합니다. 지난번 양달원(梁達源)의 죄를 논하다가 윤허받지 못한 채 정계(停啓)하여, 잘못되었다는 물의가 이미 일고 있습니다. 달원이 사대부를 꾸짖고 욕설한 사실이 명백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도 지금 듣기에 달원의 범죄에 관한 적용 법률을 정함에 있어 조사를 분명히 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내리셨다니 이는 그의 무고와 가식이 먹혀들어간 것이고, 대간의 논집은 불신을 당한 것이어서 신으로서 사실 개탄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본원이 도총 도사(都摠都事) 방진영(方振英)을 논하면서 그의 문벌이 보잘것없다 하여 태거(汰去)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은 바 있습니다. 그후 총부(摠府)의 선생안(先生案)을 들추어 보았더니 그의 아비 방식(方軾)이 일찍이 경력(經歷)을 지냈다는 것이 과연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남의 문벌을 논하면서 사실과 다르게 논하였으니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경억도 그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사헌부가 출사시킬 것을 계청하자, 따랐다.
대간이 자주 갈리는 폐단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때 삼사(三司)의 논의가 모두 이를 바꿔보려고 하여, 작은 잘못은 생략하고 추함(推緘)이 있으면 으레 탕척을 명하였다. 지금 간원이 남의 문벌을 논하면서 사실을 잘못 알았던 이 문제는 전례로 보아 응당 체직되어야 하는데, 출사시킬 것을 계청하였으니 구례가 아니다.

 

9월 3일 정묘

흉년 때문에 호남의 가을철 조련을 오영(五營)이 나누어 조련하도록 하고 이어 봄철 조련은 그만두게 했으며, 영장이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매월 점호를 취하던 구례를 바꾸어 격월로 하게 하고 병사(兵使)가 순시할 때도 군대는 모이게 하지 말고 군기만을 점검하도록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진향사(進香使) 장계를 보면 사문(査問) 건은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고 사문사(査問使)가 오고 안 오는 것도 일선(一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닌데 그가 공로를 내세워 뇌물을 요구하는 바람에 사신이 백금 4천 냥을 주기로 약속까지 하였다니 그 길이 한 번 열리면 뒤폐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대사헌 김수항은 아뢰기를,
"그 일을 듣고 나서 사신의 죄를 청하려다가 문자(文字)로 나타내고 싶지 않아 논계하지 않았지만 사신을 엄중히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인년078)   일처럼 화가 곧 조정에 미칠 정도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번 일은 따라간 사람이 금령을 범한 것에 불과한데 어찌하여 뇌물 약속까지 했다는 것인가?"
하였다. 형판(刑判) 허적이 아뢰기를,
"이 사건은 대간의 계청을 기다릴 것 없이 묘당이 여쭈어 처리하게 해야 합니다."
하자, 태화와 좌상 원두표 모두가 잡아들일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문제는 사신 간 일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는데 사신이 그렇게 독단을 했으니 상사와 부사·서장관 및 역관 등을 모두 잡아들여 문초하고 죄를 부과하라."
하였다. 두표가 자모 산성(慈母山城)을 현재 다시 쌓고 있는 것을 이유로 자산 군수 유중발(柳重發)을 1년 더 유임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예판 홍명하가 아뢰기를,
"경기의 세미(稅米)를 9월에 받아들여야 하는데 구결수를 적용할 것인지 신결수를 적용할 것인지 대신에게 물으소서."
하니, 두표가 신결수를 적용해야 한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좌도(左道)를 측량한 결과 결수가 얼마나 되던가?"
하니, 균전사(均田使) 민정중이 아뢰기를,
"각종 무세자(無稅者)를 제외한 실지 결수가 3만 3천여 결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좌도 우도를 통틀어 계산하면 얼마인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7만여 결이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받아들인 쌀을 각읍에 나누어주어 여러가지 요역에 수응하게 하고 나면 그 나머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12두(斗)씩을 받으면 남는 것이 8천여 석쯤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결수가 구결수에 비하여 곱이 된다는 것인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호조(戶曹)는 급복(給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수세(收稅)가 구결수에 비하여 곱이 되지만 선혜청(宣惠廳)은 급복을 하기 때문에 구결수의 곱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두 가지 논의가 있는데, 하나는 쌀 12두를 받고 모든 잡역(雜役)을 백성들에게 지우지 않기를 호서(湖西)의 대동법처럼 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쌀 10두를 받고 모든 잡역은 백성들에게 지우던 종전과 같은 제도가 편리하다는 주장입니다. 우선 이 둘을 놓고 어느 것이 더 편리한가를 강정해야지만 제도를 확정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 16두를 받던 것을 6두를 감하고 10두만 받는다면 모든 잡역은 16두를 받던 때와 같이 그 전부를 백성들에게 지울 것인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10두를 받고 잡역은 종전대로 그 모두를 백성들에게 지운다면 백성들이 견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12두를 받고 모든 잡역은 그 받은 쌀에 포함시켜 해결해야만 백성들에게 실지 혜택이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2두를 받고도 모든 잡역이 과연 그 속에 포함되어 해결될 수 있다면 좋지만 이미 그렇게 정한 뒤에 만약 용도가 부족하여 과외(科外)로 또 걷는 일이 있게 되면 틀림없이 민원이 크게 일 것이다."
하고, 상이 신하들로 하여금 각기 편리 여부를 아뢰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12두를 받고 모든 잡역이 그 속에 포함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잡역 속에는 예장 역군(禮葬役軍) 및 쇄마(刷馬)의 값이 더욱 난처한 일들인데 그 문제는 해청에서 잘 마련해야 할 뿐 신이야 무슨 소견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은 아뢰기를,
"북사(北使) 때면 쇄마 1필 값이 쌀 1백 40두에 이르는데 그 값을 만약 기민(畿民)이 전담하게 한다면 어떻게 견뎌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쇄마·역군의 값을 모두 받아들인 쌀에다 포함시켜야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과외의 일들은 그것을 다 거론하기란 어렵고 수령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그러한 문제들을 똑같이 일률적으로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홍명하가 선혜청 당상관으로서 일처리를 잘했다고 신이 일찍이 들은 바 없고, 조복양·민정중 등은 밖에 있을 때는 혹 8두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혹은 10두를 받으면 좋겠다고 하였다가 상의 앞에 와서는 모두 정론(定論)이 없으니 신은 삼가 개탄스럽습니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정하기는 12두로 정해두고 그 중 10두는 선혜청으로 수송하고 나머지 2두는 본관에다 유치했다가 마부와 말의 품삯으로 쓰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12두에다 마부와 말·역군의 값까지 모두 포함시키고 만약 뜻밖의 부족분이 있을 때는 상평청(常平廳)에 남아 있는 쌀을 전용하여도 될 것입니다."
하니, 호판(戶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이들 말은 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여, 신하들의 논의가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법을 만들면서 시초에 자세히 살펴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경들은 물러가서 자세히 생각해보고 또 각읍의 마부와 말의 수도 묻고 나서 후일 다시 들어와 의견을 말하고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4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동지사(冬至使) 조형(趙珩)이 소장을 올려, 대론(臺論)은 비록 정지하였다 하더라도 감히 얼굴을 들고 국경을 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수서(收敍)의 명을 거두어줄 것을 강력히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5일 기사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이민적(李敏迪)을 사인으로, 이광직(李光稷)을 정언으로, 이만(李曼)을 우윤으로, 이익(李翊)을 응교로, 오시수(吳始壽)를 부교리로, 여성제(呂聖齊)를 수찬으로, 이정기를 호조 참의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내수사가, 수진궁(壽進宮)에 소속된 각읍의 노비와 그 장토(庄土)를 경작하는 자 및 어의궁(於義宮)에 소속된 신천(信川) 지방 장토 내의 모민(募民) 등에 대하여는 속오군(束伍軍)이나 다른 잡역에 배정하지 말도록 수본(手本)을 올려 재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요즈음 백성의 요역이 한편만 치우쳐서 고된 폐단이 전에 비하여 더욱 심하니 만민을 동일시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라도 공사(公私) 사이에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내수사 노비라도 군오(軍伍)의 충정(充定)을 허락하시면서 두 궁(宮)에 소속된 역부들이라 하여 그들만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안 될 일입니다. 더구나 궁장(宮庄)에 들어가는 자들이란 거의가 요역을 기피하기 위한 간악한 무리들이어서 그 길을 열어놓는다면 이는 바로 연수(淵藪)를 만들어 두고 백성을 그리로 몰아넣는 격이어서, 아무리 종전 규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국가 체통이나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에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으므로 그대로 받들어 행하지는 못하겠으니 모두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종전 규정이 있다고 이르고서 또 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하니,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하다. 종전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또 사실을 들어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그들과 내수사 노비와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토전(土田)이 있으므로 잡역을 부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아뢴 내용의 진의를 나로서는 이해를 못하겠다."
하고, 즉석에서 분부를 내렸다.
국가가 옛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각전(各殿)마다 모두 사장(私藏)이 있었다. 주상에게는 내수사가 있고 대왕 대비(大王大妃)·왕대비(王大妃)·중전(中殿)은 그들대로 각기 사유의 내탕(內帑)이 하나씩 있었으며, 수진궁·어의궁·명례궁(明禮宮)도 혹은 무후한 왕자의 가재(家財)이거나 혹은 대왕 잠저(潛邸) 때의 가재라 하여 별도로 1개의 궁호(宮號)를 정하고 그것을 각전에 분속시켜 하나의 사재(私財)로서 환관(宦官)이 맡아 관리하게 하였으며 친척들에 베푸는 은택이라든지 기타 법으로 정해진 이외의 수용은 모두 거기에서 나온 것으로 충당하였다. 그후 날이 갈수록 더욱 증가하여 많은 전토를 점유하고 장획(臧獲)을 약탈하며 간악한 백성들을 모아들였으나 주현(州縣)도 물을 수 없었고 법관(法官)도 금할 수 없어 당시의 폐단을 말하는 자이면 모두 그것을 첫째로 꼽았다. 상이 말한, 수진궁·어의궁은 내수사와 차이가 있다고 한 것도 그것들이 두 자전(慈殿)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은 그것이 자전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 하여 마냥 덮어두려고만 하고 담당관이 법에 의거하여 한 청까지도 그것을 일체 거절했기 때문에 그 폐단이 더욱더 불어나게 되어 바로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관(內官) 양달원(梁達源)이 원계(院啓)로 하여 추문을 당했는데 그가 교묘한 함답(緘答)으로 발명을 하여왔기 때문에 상이 사실을 분명히 밝혀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달원이 사부(士夫)에게 욕설을 했던 죄는 자자하게 전파된 사실이며 대계(臺啓)가 매우 명백했는데도 그의 함답을 보면 전혀 그러한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꾸미고 있어 믿을 것이 못 되니 다시 밝혀야 할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대계에 의하여 이미 파직의 벌이 내려졌는데 지금 또 그의 자기 변명을 받아들여 사실을 다시 밝히라고 명하신 것은 사체로 보아 온당치 못한 일이니, 종전에 적용했던 법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회계야말로 매우 터무니없다. 전번의 판부(判付)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달원이 사부에게 욕설을 했던 사실은 간원의 계사에 이미 자세히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소문까지 자자하여 다시 밝혀야 할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헌부의 점목(粘目)이 사체로 보아 매우 타당한데 성상의 하교에서 매우 터무니없다고 물리치시니 그렇게 지나친 처분을 성상이 하시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고, 이어 전지를 봉환(封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환하는 것이 비록 본원의 직책이기는 하다마는 이번 계사에 있어서는 매우 전도되고 터무니없다 하겠다."
하였다. 정원이 다시 아뢰기를,
"달원의 일에 대해 간원이 빠짐없이 죄목을 논하였고, 헌부가 법률에 의거하여 적용할 법을 정하였는데도 그가 교묘하게 꾸며 자신을 변명한 말로 인하여 터무니없다는 지적이 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 다시 내려졌으니 비록 미세한 일이라 하더라도 성상의 덕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본원은 후설(喉舌)의 직을 맡고 있으므로 군부의 지나친 처분을 목격하고 즉시즉시 가부를 판단하여 잘잘못을 아뢰는 것이 신하된 직분입니다. 이번에도 전도되고 터무니없다는 하교를 받았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궁가(宮家)나 내시(內侍)와 관계되는 일이면 언제든지 듣기에 미안한 하교를 내리시곤 하여 아랫사람들로서는 언제나 개탄을 느끼고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쩌면 내 뜻을 그렇게도 모르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김수항, 장령 송시철(宋時喆)·이유(李秞) 등은, 상으로부터 터무니없다고 지척받았다는 것으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대사간 이경억, 사간 이정(李程) 등도 인피하고 아뢰기를,
"일개 환관 사건 때문에 가까이서 모시는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서로 이어 물리침을 당하고 모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듣는 이들이 틀림없이 전하께서 내신(內臣)만을 두둔하기 위하여 그러한 거조를 취하셨다고 할 것이니 그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개 환시 때문에 전하로 하여금 중도에 지나친 과오를 범하게 하였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후 옥당이 모두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자, 따랐다.

 

약방 도제조 이경석 등이 여러 의관을 인솔하고 희정당(熙政堂)에 들어가 병을 진찰하였다. 경석이 나아가 아뢰기를,
"금년은 각도가 다같이 흉년이지만 양남(兩南) 중에서는 영남이 더욱 심하고 북로(北路) 또한 매우 심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기아 선상에서 아우성입니다. 국가의 저축이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새로 건조한 두 창고가 날아갈 듯 마주 서 있고 노적(露積)된 곡식까지 있는데 백성들은 들에서 굶어죽게 내버려둔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영남은 현재 뿔뿔이 흩어지는 자들이 속출하여 만약 내년 봄에 가서 진정(賑政)을 시작하기로 한다면 틀림없이 때늦은 한탄이 있을 것이고, 호남은 비록 영남같이 심하지는 않을지라도 역시 모두 정신없는 상태여서 대동미(大同米)를 감면해 주지 않으면 안 될 형편입니다. 그리고 북로는 벼곡식 말고도 생마(生麻)까지 잘 되지 않아서 으레 보내주던 무명베와 목화를 반드시 더 보내야 할 것이고 내노(內奴)의 신공(身貢)도 특별히 감면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묘당에 말하라고 하였다. 그후 호남은 대동미 1두씩을 감해 주고 함경 북도에는 베 1천 5백 필과 목화 2천 근을 더 보내주었다.
다음날 경오일에도 또 입진하였다. 도승지 남노성이 아뢰기를,
"어제 본원이 아뢴 내용은 신도 함께 논의한 사항입니다. 요즈음 와서 궁가나 내사(內司)와 관계가 있는 일이면 성상의 비답이 대부분 화평하지 못하시니, 신은 너무나 개탄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대간들 하는 행동은 나도 모르겠다. 지난번 권진한(權震翰)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게 할 때도 사실을 분명히 밝혀 처리하였고 그 밖의 다른 사건도 대부분 사실을 분명히 하여 처리하였다. 그런데 유독 양달원 사건에 있어서는 사실을 분명히 조사하려 하지 않으니 그게 무슨 일인가. 그리고 헌부가 그렇게 분수 넘치게 행동한 것을 정원이 또 따라 아뢰고 있으니, 그건 또 무슨 뜻인가?"
하였다. 노성이 아뢰기를,
"사헌부·정원이 여러날을 두고 번거롭도록 아뢴 것은 다만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곳에 두고 싶어서일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것이 왜 허물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노성이 아뢰기를,
"비단 그 일뿐이 아니라 지난번 이조(吏曹)가 아뢰었던 일도 역시 지나치신 처분으로서 상께서 미안한 비답을 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궁장(宮庄)에 둔(屯)을 설치하여 그것이 각도마다 두루 널려 있고 피역(避役)을 위한 자들이 모두 그리로 몰리고 있는데도 수령들이 감히 손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양민들이 거의 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을 엄중히 수색 검사하여 사역을 균일하게 하지 않으면 그 곳이 바로 간악한 백성들 피역의 온상이 되고 말 것이니 그 역시 오늘에 있어서의 지나친 처분인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8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9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이광직(李光稷)이 아뢰기를,
"양달원이 사부에게 욕설을 한 죄상에 대하여 본원이 사실을 들어 논계하였으니, 분명한 내용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데 사실을 밝혀 처리하라는 명령을 뜻밖에 내리시고, 또 사헌부의 점목(粘目)도 그것이 사실 법을 제대로 집행하기 위한 논계였는데도 준엄한 하교를 또 내리셨습니다. 환시(宦侍)가 조사(朝士)를 업신여기고 욕설을 한 경우가 전에는 없었던 일이며 또 내용이 깜깜하여 알기 어려운 일도 아닌데 거기에 거짓을 꾸미고 자기 변명을 한 것은 더욱 놀랄 일입니다. 그렇게 명백한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처리하라고 한다면 일의 체계로 보아서도 작은 잘못이 아니며 환시 문제를 가지고 위아래가 팽팽히 맞선다면 그 역시 듣는 이의 의혹을 불러일으킬 일이니, 양달원 함사(緘辭)를 다시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명령을 거두소서. 그리고 근래 궁가에서 각읍에 해를 끼치고 있는 일들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둔장(屯庄)이라는 명칭으로 양민을 모아들이면서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감히 무어라 말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수진·어의 두 궁만 하더라도 그 곳 노비와 장민(庄民)이 모두 전하의 백성들 아닙니까. 그리고 민간이 나와서 하는 부역이 모두 국가를 위하여 하는 일인데 거기에 이쪽저쪽의 구별을 둘 것은 또 무엇입니까. 해당 아문이 사실을 들어 아뢴 것은 그것들을 개혁하고 폐지하기 위함인데 전하께서는 미세한 것들을 들추어내어 상대를 꺾으려고만 하시니 아마 전하께서 하나의 ‘사(私)’ 그것을 깨버리지 못하여 그렇게 지나친 처분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 신은 삼가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해당 아문이 아뢴 내용대로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9월 10일 갑술

태백이 동남간에 나타났다.

 

서필원을 승지로, 남구만을 집의로, 여성제를 부교리로, 윤강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9월 11일 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남구만, 정언 이광직이 성상소(城上所)로서 대각에 이르러 청대(請對)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그들을 인견하였다. 광직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신은 어의·수진 두 궁 일에 관해서 최근 논계하였는데, 지금 듣기에 여러 궁가가 다 그러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 미처 듣지 못하여 아울러 시행하지 말도록 청하지 못했으니 신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남구만이 내시부(內侍府) 건에 관하여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군기시 부정 안발(安鈸)을 태거(汰去)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발이 일찍이 그 직을 역임해 왔는데 지금 와서 태거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일지 모르겠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그가 불가함을 이미 알았으면 어찌 그 직을 역임해왔다는 이유만으로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구만이 아뢰기를,
"그 일에 관한 비답을 받아야 다른 문제를 아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하루에 두 번 아뢰는 규례가 없는 것이므로 필시 무슨 소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안발을 꼭 태거해야만 하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조원(曺瑗) 건은, 간악한 백성이 다툰 일을 가지고 왕명으로 경옥(京獄)으로 잡아들이라고까지 한다는 것은 국가 체통에 막심한 손상을 끼치는 일입니다.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곡절이 분명한데 경옥으로 잡아들이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는 것인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감사(監司)가 있고 수령도 있는데 왜 꼭 경옥으로 잡아들여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까. 더구나 그 사건은 궁가와 관계가 있어 멀리서 듣는 이들은 틀림없이 성상께서 궁가의 일이라 하여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할 것이니, 성상의 덕화에 얼마나 누가 되는 일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경옥으로 잡아들이더라도 어찌 곧 죽이기야 하겠는가. 대각의 논계가 처음에는 곡직도 잘 모르는 일을 지레 잡아들이기부터 한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간악한 백성이 다툰 일을 가지고 왕명까지 번거롭게 할 것은 없다고 하니 무슨 뜻인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전후 대각의 논계에 있어 조어(措語)가 다소 들쭉날쭉한 것이야 따질 게 없습니다. 조원이 만약 일반 백성과 그렇게 다투었다면 전하께서 과연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다만 궁가와 관계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전하께서 그를 꼭 잡아들여 엄중히 다스리려고 하신 것이니 그것이 어찌 신하들을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사리가 그렇게 분명한데도 전하께서 한결같이 고집만 하시니 신으로서는 성상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언성을 높여 이르기를,
"그대가 내 뜻을 알려는 것이 장차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조원의 죄상이 죽여야 할 죄라면 그 도에서 죽여도 충분할 것이고, 만약 그 도에서 그 죄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한다면 신으로서는 일의 체면이나 이치로 보아 결코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한 번 절하고 또 아뢰면서 쟁집하기를 매우 힘껏 하니, 상이 더욱 화가 나서 이르기를,
"처음에 아뢰고 나서 만약 마음에 생각나는 바가 있었으면 생각나는 바가 있다고 하고서 말했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고 계사(啓辭)와 생각하는 바를 아무런 구별없이 이렇게 떠들어대기만 하고 있으니 듣기에 매우 역겹다. 비록 1백 번을 아뢰더라도 내 어찌 따르겠는가."
하였다. 좌우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구만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아뢰기를,
"신이 오늘 청대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 장의 글로 아뢰었다가 윤허를 받지 못하고 나면 다시 의견을 개진할 길이 없고 전하께서도 뜻을 분명히 밝히시지 않기 때문에 신이 바로 지척 앞에서 남김없이 의견을 개진하여 사리의 당부를 확실히 밝히자는 것이었는데, 성상의 하교가 준엄하여 할 말을 다 할 수 없게 만드시니 이 모두가 군부에게 미쁨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양달원의 추함(推緘)에 대하여 사실을 분명히 밝혀 처리하라신 건도 본부가 그 불가함을 아뢰었는데도 성상께서 따르지 않으시고 또 미안한 하교까지 내리신 것을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내관(內官)이 자기 변명을 한 말로 인하여 도리어 정신(廷臣)의 말을 의심하시니 그것이 일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명을 다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에 대하여 나는 잘 모르겠다. 조사(朝士)는 내관과 원래 상관이 없는 사이인데 욕설까지 당했다면 이상익(李商翼)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대간이 처음 아뢰었을 때 내가 ‘서로 싸운 것이다.’라고 답하였고, 또 달원에게 죄가 있다고 인정되어 그를 파추(罷推)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설사 상익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엄수(閹竪)란 바로 임금의 가노(家奴)인데 어떻게 조사와 같이 취급한다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하실 일은 다만 달원에게 심한 죄를 내리면 그뿐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용서하는 기색을 보이신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뒤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만약 한쪽으로 달원만 옹호하려 했다면 그의 함답(緘答)에 대하여 재가를 내릴 때 곧바로 분간(分揀)을 했지 왜 분명히 가려 처리하라고 했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대체로 말하자면 환시 중에도 어찌 믿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며, 일을 하다보면 어찌 사리에 바른 일도 없겠습니까. 다만 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한 일이면 그냥 믿고 용서를 한다면 뒤폐단을 막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漢)의 정중(鄭衆)079)  은 충렬(忠烈)한 사람이었고, 당(唐)의 고력사(高力士)080)  는 장상(將相) 선택을 잘했던 인물로서 이 무리들을 내시로만 대접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그들을 믿고 일을 맡겼다가 환시가 용사(用事)를 하는 길을 열어놓았으니, 이것이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환시와 조사가 서로 싸웠으니 전하께서는 달원만을 엄중히 다스렸어야 그것이 옳은 조처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치로 미루어보더라도 달원이 어떻게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욕설을 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상익에게도 잘못이 없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상익에게 죄를 내린 일은 없었는데 그래도 그것이 한쪽으로 그만 두둔한 것이란 말인가?"
하였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수진·어의 두 궁 문제로 이조가 방계(防啓)를 하고 정원이 사실을 들어 논변하였으나 성상께서 끝내 듣지 않으시니 신은 삼가 민망합니다. 여러 궁가의 노비와 전토 경작자에 대하여 침범하지 말라고 하신 건을 일체 혁파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가, 이미 전례가 있다고 하고서는 또 그 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하기 때문에 따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대체로 간언을 듣는 방법은 그 말이 의미하는 줄거리만 취하면 되는 것인데 왜 꼭 잘못 놓여진 문자를 꼬집어내어 배척하고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또 전하가 만약 ‘어떻게 하여야 궁장(宮庄)에 이익이 오게 할까.’ 하신다면 사대부들도 ‘어떻게 하여야 우리 집에 이익이 오게 할까.’ 할 것이니 조정에서 장차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금할 것입니까. 전하께서도 옛 기록들을 두루 보셨지만 영특하고 정의로운 임금치고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있었습니까. 전하께서는 당연히 요(堯) 순(舜)을 표본으로 삼으셔야 할 텐데 어찌 용주(庸主)로 자처하려고 하십니까. 전하께서 사사로이 궁장에 이익을 준대야 조(租) 몇 섬을 얻는 정도에 불과할 뿐인데 궁가에 비록 조 몇 섬이 없다고 해서 유지를 못하겠습니까. 조종(祖宗)이 전하께 얼마나 중대한 것을 부여해 주셨는데 왜 거기까지 생각지 않으십니까. 신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슬픔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지 않았다. 구만이 아뢰기를,
"여러 궁가 문제와 내수사 문제를 놓고 대신(臺臣)들이 논집하고 정원이 복역(覆逆)을 하였으나 모두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실로 어긋나고 모순된 신의 말로는 틀림없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할 줄을 알았지만 한 장의 계사(啓辭)만으로 번번이 불윤(不允)이라는 글자 두 자만 받아들고 물러난다는 것이 너무나 불성실하고 또 너무 답답하기 때문에 이렇게 당돌하게 청대하여 감히 아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섯 가지 일 중 네 가지가 궁가와 내수사에 관한 일들이었는데 전하께서 모두 윤허하지 않으시니 이는 신의 말이 졸렬하고 성의가 천박한 때문으로서 오늘은 비록 물러가더라도 내일 다시 논계한다면 역시 그 일일 것입니다. 혈성을 다하여 면전에서 아뢰어도 청한대로 되지 않는데 더구나 문자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윤허가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는 실속없이 직명만을 뛰는 것이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안색을 바꾸며 이르기를,
"일이란 시비가 있는 법인데 그대가 그렇게 다그친다 하여 따를 수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자,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겠다고 하고 나갔다. 사신(史臣)이 그 사실을 기록하자, 상이 눈 주어 그를 보내고는 주서(注書)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처음 아뢴 내용만 기록하고 두 번째 아뢴 것부터는 기록하지 말라."
하였다. 그것은 상이 구만에 대하여 몹시 화가 났고 또 그의 말에 옳아 그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이 싫어서였던 것이다. 승지 김익경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옷자락을 끌어잡고 극간한 신하가 있었지만 지금 남구만이 할 말을 다한 것은 사실 진실한 충성과 사랑에서 우러나온 일인데 성상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기색이 너무도 없으시니 대신(臺臣)을 대하는 도리가 그러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성상의 덕화에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이른바 옷자락을 끌어잡았다는 것이 어찌 이런 일을 두고 한 말이겠는가."
하였다. 구만의 누누이 많은 말은 임금의 뜻을 돌려놓고자 한 것으로서 매우 적절하고 절실한 말들이었다. 그리하여 누차 상의 노기를 촉발하기도 하였으나 조금도 꺾이는 기색이 없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극간(極諫)의 선비라 하겠다. 그런데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광직(光稷)이 아뢰기를,
"양호(兩湖)의 백면지(白綿紙)를 대동법에 의하여 쳐주는 값은 매우 적은데 종이 품질은 점점 올려 정하여, 다시 만들어 오도록 여러 번씩 퇴각시키면서도 실어오는 짐바리 값은 한 차례만 주고 있습니다. 종이 값은 종전보다 갑절이나 더하고 짐바리 값은 나올 곳도 없으니 이것이 지금 각읍의 큰 폐단입니다. 변통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청에 물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광직이 또 전번에 건의했던, 여러 궁가의 시장(柴場)·어장(漁場)을 혁파할 것, 수진궁·어의궁의 노비들과 전답 경작자들도 똑같이 정역(定役)할 것, 또 양달원 함사에 대하여 다시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명령을 거두어 줄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흥덕 현감(興德縣監) 이우(李𦸲)가 춘분(春分) 뒤에 부임했기 때문에 신영(新迎)에 동원되었던 인원과 말 가운데 다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상을 당하여 돌아가게 되자 신영에 참가했다가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쇄마(刷馬)를 이용하여 돌아오면서 그 전의 말값을 징수하여 자기가 싣고 왔는데 그 수가 무려 무명베 8백여 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명확히 조사하여 그 사실을 아뢰고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광직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남구만이 인피한 데 대하여 신이 마땅히 처치해야 할 것이나 구만이 아뢴 일들이 모두 본원(本院)이 이미 발론했던 일들로서 비록 선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쟁집(爭執) 내용에 있어서는 구만과 다를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처치를 하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후 헌부가 남구만·이광직 둘 다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문자로써 책임이나 때워 넘기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면대하여 성상의 뜻을 돌려보려는 정성이 있었기에 천위(天威)를 지척에 모시고 숨김없이 할 말을 다하였으니 대각으로서 풍채가 늠름하여 존중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단 한 번의 승락도 아끼신 채 도리어 준엄한 하교만 내리셨으니, 이번의 인피는 사실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어 한 일이지 조금도 인피해야 할 혐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김익경이 아뢰기를,
"원자(元子)의 이름자를 차비문(差備門)에서 곧바로 써서 종친부(宗親府)에 내리는 것은 일의 체계로 보아 불가한 일입니다. 당연히 정원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전례가 있다고 하였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내시부(內侍府) 공문을 보았더니 그 서두에 ‘종을 차출하여 내려보냄’이라고 되어 있고, 끝에는 ‘문서를 작성하여 올려보낼 것’이라고 되어 있으며 초서(草書)에다 크게 서명까지 하여 마치 상사가 분부를 내리는 식이었습니다. 신은 놀랍고 분개하기도 하여 법전(法典)을 상고해보았더니 내시부는 인신(印信)을 사용하는 아문 축에 들어 있지도 않았고 또 쇄안(刷案)에 등록된 노비도 없었습니다. 경솔하게 치계하였다가 환관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으니 사실 조정 진신(搢紳)의 수치스러운 일이고 또 성상께서 헌부에 답하신 비답을 보면 일을 조심성없이 처리한 신의 잘못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현재 진정(賑政)이 급하다는 이유로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아뢰기를,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을 끝까지 캐서 죄를 만들기로 들면 무장(無將)의 죄도 부도(不道)의 죄도 오히려 가벼울 것인데 남의 신하로서 그러한 죄명을 지고서야 어떻게 하루인들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경이 서울을 떠난 지 3년이나 되어 내 자못 끊임없이 경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올라온다는 기약은 들을 수가 없고 사직 상소만 또 올라왔으니 내 마음 허전하여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인심과 세도가 날이 갈수록 아름답지 못하여 흉측한 말들이 극성을 부리는 것은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 일로서 개의할 것도 없는데 경은 왜 그리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너무나 개탄스러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의 일은 경에게는 결단코 혐의로울 것이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사직하지 말고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올라와서 과인을 보필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여 밤낮으로 기대하고 있는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흉년으로 하여 어공(御供)을 감하고 또 백관들 녹봉도 각기 1섬씩 감할 것을 명하였다. 당시 삼남(三南)에 큰 기근이 들어 진휼청(賑恤廳)을 개설하고 조복양·유계·민정중을 당상으로 삼았으며 또 호조 판서 정치화로 하여금 함께 관장하게 하였는데, 어공을 감하는 것과 녹봉을 받는 백관들 또는 반료(頒料)에 의하여 요(料)를 받는 자들에 대한 감량은 모두 신축년 예에 준하였고, 호남·영남은 더욱 심하다 하여 대동미 징수의 수를 감했으며, 신역(身役) 대신 베를 바치는 자들도 그가 당한 재이의 경중에 따라 혹은 전감(全減) 혹은 감봉(減捧)을 하였다. 그리고 관작을 팔고 직첩을 주어 곡식과 바꾸게 하였는데, 노직(老職)으로 통정(通政)이 되는 경우 60세 이상은 쌀 4섬, 70세 이상은 3섬, 80세 이상은 2섬을 각각 바치도록 하였으며, 통정에서 가선(嘉善)으로 오를 때는 2섬을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실직(實職) 종류를 더 두어 찰방(察訪)·별좌(別坐)·주부(主簿)는 쌀 10섬을 바치고 판관(判官)은 11섬, 첨정(僉正)은 13섬, 부정(副正)은 14섬, 통례(通禮)와 정(正)은 15섬, 첨지(僉知)는 30섬, 동지(同知)는 40섬이었으며 사은(謝恩)이나 봉증(封贈)에 있어서도 정관(正官)과 똑같이 취급하였는데 다만 사족(士族)에 한하여 허락하였다.
추증(追贈)에 있어서는 직장(直長)·참군(參軍)·도사(都事)·별좌(別坐)는 쌀 2섬을 바치고 정랑(正郞)·좌랑(佐郞)·감찰(監察)은 쌀 3섬, 통례·첨정 이상은 4섬, 판결사(判決事)는 5섬, 참의(叅議)·동지(同知)는 6섬, 좌·우윤(左右尹)과 참판(參判)은 7섬이었으며, 참하(參下)에서 5품·6 품으로 오르거나 5품·6품에서 3품으로 오를 경우는 모두 1섬, 3품·4품에서 질(秩)이 오르는 자는 2섬이었고 서얼(庶孽)로서 허통(許通)되는 경우 양첩(良妾) 자식은 4섬, 천첩(賤妾) 자식은 6섬이었다. 이미 상직(賞職)을 받고서 가설된 동지(同知)를 올려 받으려면 25섬을 바쳐야 하고 승(僧)으로서 통정을 받으려면 8섬, 교생(校生)은 10년 면강(免講)의 경우 4섬, 종신 면강의 경우는 8섬을 바쳐야 하며 보충대(補充隊)는 남자는 베 4필, 여자는 2필이었다.
각 관아의 공물(貢物) 값을 재감하여 진휼청에서 옮겨다 쓴 것으로는 전생서(典牲署)의 것이 5백 60섬 10말, 풍저창(豊儲倉)의 것이 8백 45섬 5말, 장흥고(長興庫)가 2천 5백 84섬, 상의원(尙衣院)에서는 베 1천 98필, 교서관(校書館)이 7백 98섬 9말, 관상감(觀象監)이 1백 47섬, 예빈시(禮賓寺)가 97섬, 제용감(濟用監)이 1천 9백 16섬 10말, 공조(工曹)가 3백 59섬 5말, 선공감(繕工監)이 6백 53섬 4말, 조지서(造紙署)가 43섬 5말, 사도시(司䆃寺)가 1백 93섬 10말, 상의원이 1백 51섬 1말, 의영고(義盈庫)가 86섬 10말, 내섬시(內贍寺)가 1백 46섬 7말, 사재감(司宰監)이 1천 9백 13섬, 전의감(典醫監)이 7백 7섬 6말, 혜민서(惠民署)가 1천 3백 98섬 11말, 와서(瓦署)가 4백 61섬 14말, 귀후서(歸厚署)가 53섬 10말, 군기시(軍器寺)가 4천 82섬 7말로 이상 쌀의 통계가 1만 7천 2백 섬이었다.
그리고 또 기인(其人)의 가포(價布)도 8백 40필을 감했고, 전남도에서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 및 각읍의 관수미(官需米) 7천 8백 58섬을, 충청도에서 6천 2백 91섬을 감했으며 각 아문과 각영에서 가져다 쓴 은포(銀布)로는 충익부(忠翊府)에서 베 1천 2백 50필, 사복시(司僕寺)에서 백금(白金) 1천 5백 냥·베 1천 2백 50필, 상의원에서 베 1천 2백 50필·백금 2백 냥, 공조에서 베 3백 50필, 사옹원(司饔院)에서 베 2백 68필, 상평청(常平廳)에서 백금 5천 냥, 병조(兵曹)에서 여정포(餘丁布) 5천 필, 전남도 감영에서 군포(軍布) 2천 5백 필, 병영에서 1천 2백 50필, 좌수영·우수영에서 각각 5백 필이고, 경상도 감영에서 2천 5백 필, 통영(統營)에서 2천 5백 필, 좌병영·우병영에서 각각 1천 필, 평안도 병영에서 1천 5백 필, 비변사가 관리하는 베 5천 필, 황해도 감영에서 1천 5백 필, 병영에서 1천 필, 충청도 감영에서 신선포(新選布) 5백 필, 병영에서 7백 50필, 수영에서 5백 필이었다.
그리고 각 고을의 저치미(儲置米)로서 감량된 것과 첩가(帖價)의 쌀도 그 도에다 쌓아두고 굶주린 백성을 나누어 먹이도록 했으며 각 아문 각도에서 온 쌀과 베로는 재해를 당한 각도의 공물 값과 각종 수요에 필요한 비용을 대신 대주었다. 이상이 진휼한 규모의 대략이다.

 

9월 13일 정축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민유중을 사간으로, 김익렴(金益廉)·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병조 참의로, 오정원(吳挺垣)을 판결사(判決事)로, 조수익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 홍명하에게 이르기를,
"전일 인견 때 논의했던 객사(客使) 때의 부마(夫馬) 값에 대하여 얼마를 책정할 것인지 그 실지 수요의 다소를 사정해 보았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한 차례 순행하는 비용이 거의 2천 7백여 섬이 소요되며 두 번을 순행할 경우 5천 4백 섬이 필요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12말을 받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영상 정태화,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이는 바로 양전(量田) 이후 새 역사로서 나라의 대정(大政)인 것입니다. 처음 양전을 한 후로 백성들은 모두 큰 변통이 있을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신들은 10말만 받았으면 했던 것인데, 홍명하·김좌명 등이 그 일을 주관했던 사람들로서 12말을 받고 각종 민역(民役)은 모두 그 속에다 포함시켰으면 했으므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사실 편리하고 좋은 일이다 싶어 신들도 종전 의견을 고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지금 이 새로 정한 결수에 있어 10말만을 받고 크고 작은 요역(요役)을 전부 민간에 부담을 지운다면 경기의 백성들이 틀림없이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12말을 받고 그리고 객사 때의 인부(人夫)와 쇄마(刷馬) 또는 관용(官用)으로 쓰는 쇄마·예장군(禮葬軍)·경주인(京主人)·영주인(營主人)의 첨가(添價)와 일로(一路)에 꼴을 쌓아두는 일 등 각종 잡역(雜役)을 모두 그 12말 중에 포함시키도록 마련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12말로 정하여 잘 요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는 원임 대신과 논의할 것을 청하였고, 명하는 또 허적·조복양·민정중 등과 함께 논의하여 마련할 것을 청하자,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태화가 또 흉년이라 하여 태복시 구마(廐馬)의 수를 감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우상 정유성(鄭維城)이 소명을 받고 궐문 밖에 와 기다리고 있는데 어제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려가지 않아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로 하여금 비답을 쓰게 하고 사관으로 하여금 가서 유시하게 하고 이어 불러들일 것을 명하였다. 유성이 입대하여 사신으로서 나라를 욕되게 하였고 부사(副使)가 죄를 입어 감히 자기 자신의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없다는 뜻을 갖추어 아뢰니, 상이 그를 위로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구일 과제(九日課製)081)  를 시행하는 것으로 이미 결정하였기에 올라온 사자(士子)들이 매우 많으니 정시(庭試)를 열어 그들을 격려하고 고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태화에게 물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른바 정시로써 인재를 고르는 일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을 때 열었습니다. 조종조에서는 혹 정시를 열어 수석 합격자를 고른 다음 추후에 창방(唱榜)하는 일은 있었으나 까닭없이 정시를 열어 인재를 고른다는 것은 신으로서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호판 정치화가 아뢰기를,
"사도시에 올려오는 황두(黃豆)에 대하여 본조(本曹)가 그 값을 본시(本寺)의 공물 주인(主人)에게 주고 그로 하여금 구하여 올리게 하였는데, 지금 들어보면 주인배들 모두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전에는 황두를 어떠한 방법으로 구하여 바치게 했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양호(兩湖)에서 바쳐야 할 황두를 대신 쌀로 그 값을 받고 그 쌀만큼 경기의 전세(田稅)를 감해주고서 양호에서 바쳐야 할 분량의 황두를 경기의 각읍에다 배정하였습니다. 공상(供上)하는 콩은 그 품질이 보통 콩과는 달라서 가령 5되를 바쳐야 할 경우 주인이 5말을 받고 1되를 바치려면 1말을 받기 때문에 주인이 그 일 하기를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호조가 값을 주고 주인은 콩만 구하여 바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이익을 남겨먹을 길이 없어 모두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상하는 콩은 그 품질이나 색상이 특별하여야 하니, 지금부터는 당연히 구별을 하여 진상하도록 규정을 분명히 정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응교 민유중이 아뢰기를,
"신이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비록 도움을 드린 일은 없습니다만 구구한 성의는 다만 성상께서 지나친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어제 집의 남구만 등이 청대하고 입시하여 많은 말을 면전에서 아뢴 것은 사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성심에서 한 일인데, 성상께서는 조금도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들지 않으시고 대각 신료를 너무 박절하게 대하셨으니 신으로서는 성덕(聖德)에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계사(啓辭)가 뒤섞여서 구별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이러저러한 말을 했던 것이다."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비록 뒤섞인 말이라도 듣는 성상의 도리로서는 다만 그 말이 옳은가 그른가를 보실 뿐이지 계사인지 감회를 말하는 것인지를 구별하여 기를 꺾을 필요야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누차 내리셨지만 삼사(三司) 이외에는 단 1명도 성지에 응한 자가 없어 말 길이 끊기려고 하니 이 어찌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닙니까. 대간은 말하는 것이 그들 직책이므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때마다 꺾어버리시면 누가 전하를 위하여 할 말을 다하려 하겠습니까. 양달원의 일만 하더라도 조사하여 밝힐 것이 원래 없는데 전하께서는 꼭 조사를 분명히 하여 처리하려고 하시니 이는 대간을 불신함에 따른 것으로서 너무나 미안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권진한(權震翰)에 대하여는 대간이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논했는데, 그를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한 뒤에 다시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도록 명하자, 사헌부가 규례에 의하여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였다. 그런데 지금 달원을 추고하는 데 있어 사실을 다시 조사하여 처리하라고 한 데 대하여는 간원을 불신하는 일이라 하여 조사하지 않고 있으니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환시(宦寺)는 바로 종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꼭 사실을 밝혀 처리하려 하시므로 대간이 그에 맞서 불가함을 고집하였는데 전하께서 오래도록 따르지 않으시니 신하들이 어떻게 전하께서 내수(內竪)를 편파적으로 두둔한다고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말을 듣는 도리는 그 말이 비록 황잡하더라도 반드시 용인하고 받아들여야지만 말길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바깥 사람들이 말하기를 ‘양사가 청대했다가 결국 준엄한 꾸중만 당하고 물러나왔다.’ 한다면 그 어찌 성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옛날 조종조에서 선정신 조광조(趙光祖)가 소격서(昭格署)를 없앨 것을 청하면서 하루 동안에 여러 번을 아뢰다가 닭이 울 때 가서야 승락을 얻고 물러나왔으니 옛 사람들의 나라 위한 정성은 그러하였습니다. 신이 듣건대 세종조에서도 옥당 관원들이 준엄한 전지에 불안을 느끼고 무리지어 물러나버리자, 세종께서는 재상 황희(黃喜)를 불러 처리 방법을 물었는데, 이때 황희는, 정원에 하교하여 다시 들어오도록 너그러운 유지를 내리게 할 것을 청하였고 세종께서는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삼가건대 성상께서도 세종을 본받으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유중이 아뢰기를,
"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는 바로 선조조의 재신이었고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역시 당대 명신이었는데, 그의 자손들이 영세하고 보잘것이 없어 오래도록 청시(請諡)하지 못했다가 이제야 비로소 청시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시호를 내리면 그날은 으레 영시(迎諡)의 예가 있는 것이지만 그들은 집이 가난하여 빈객을 청할 수 없다니 일이 매우 멋적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악원(掌樂院)에서 악(樂)을 내리고 해당 아문에서는 쌀과 베를 대주게 하라."
하였다.

 

9월 15일 기묘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아뢰기를,
"금년에 우역(牛疫)이 대단하여 살아남은 소가 얼마 안 되는데 도살은 종전과 똑같이 하고 있어 장차 종자가 끊길 염려가 있습니다. 지난 정축년 우역 끝에는 소를 도살한 자는 살인을 한 죄와 같이 취급하도록 법령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절대 금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전 감역(監役) 유방(兪枋) 등이 상소하기를,
"신의 외조부 고 문숙공(文肅公) 정엽(鄭曄)은 일찍이 선조(宣祖)를 섬겨 명신(名臣)이 되었는데, 인조(仁祖) 반정 초기에 와서는 보통에 비하여 월등하게 임금으로부터 신임과 사랑을 받았으며 덕망과 경술(經術)이 사림(士林)의 모범이었습니다. 이에 그가 세상을 마치자 인조 대왕께서 애도의 하교를 내리시고 특별히 의정(議政)을 추증하여 평상시에 명하려고 했던 뜻을 보이셨으니, 군신 사이의 지우(知遇)라던지 사생 간의 애영(哀榮)의 은전이 훌륭했다고 하겠습니다. 불행히도 자손들이 보잘것없어 아들 정원석(鄭元奭)과 손자 정원(鄭援)이 서로 이어 세상을 떠나고 다만 원석의 아내인 심씨(沈氏)가 80 노령으로 열 살 난 원의 아들을 길러왔었는데 지금 또 그마저 요절하여 제사를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동종(同宗) 아우인 정변(鄭抃)의 아들을 원의 아들로 삼아 제사를 이어가려고 하고 있으나 심씨가 연로하여 진정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의 정원(情願)을 들어주어 이미 끊긴 어진 신하의 후사를 이어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정엽은 명신으로 후사가 끊겨서는 안 될 일이니 정원(情願)대로 들어주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9월 16일 경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유태를 이조 참의로, 이경휘를 대사간으로, 곽성귀(郭聖龜)를 헌납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정언으로 삼았다.

 

집의 남구만이 패초에도 나오지 않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사간 민유중이 양달원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와 아뢰기를,
"이상익(李商翼)이 생도를 가르친 말이 도리어 달원이 그에게 욕설을 하게 된 발단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상황이 불행했던 것으로 상익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환시가 교만 방자하여 기탄한 바 없었음은 더욱더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달원이 자기 죄를 면하기 위하여 교묘한 말로 꾸며대어 감히 그 허물을 상익에게로 돌렸는데, 전하께서는 또 의혹이 없을 수 없어 꼭 사실을 확실히 밝혀 처리하고야 말려 하시니, 달원의 함사(緘辭)는 믿을 수 있어도 대신들 논주(論奏)는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환시를 믿고 대신을 믿지 않는다면 사리에 어그러지고 온당치 못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 당 태종 때 내시 사환(使還)이 망령된 아룀이 있어 태종이 몹시 화를 내자, 위징(魏徵)이 진언하기를 ‘내시가 비록 미미한 존재이나 임금 좌우에 가까이 있어 때로 무슨 말을 하면 부담없이 믿기가 쉬우므로 시간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참소하여 큰 환란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 원천을 막아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자, 태종이 웃으며 이르기를 ‘경이 아니면 짐(朕)이 어떻게 그러한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헌종(憲宗) 시절에는 동대 어사(東臺御史) 원진(元稹)을 부수역(敷水驛)으로 불러들였는데 어떤 내시가 역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원진의 얼굴을 때려 상처를 입혔으나 헌종은 다시 원진의 지난날의 잘못까지 이끌어다 지나치게 폄하하였습니다. 이에 이강(李絳)·최군(崔群)은 원진이 죄가 없음을 말하였고, 백거이(白居易)는 말하기를 ‘중사(中使)가 조사(朝士)를 업신여기고 욕을 보였는데 그 중사는 묻지도 않고 원진이 먼저 폄하를 당했으니 이제부터는 중사가 밖에 나가 더욱 횡포를 부리더라도 감히 말할 사람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였으나 헌종이 듣지 않아 전사(前史)에서 그 사실을 기롱하고 있는데, 오늘 달원 사건이 꽤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태종을 본받으시고 헌종을 경계로 삼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8일 임오

성균관 유생으로서 구일 과제(九日課製)에 수석을 한 진사(進士) 이하진(李夏鎭)을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고, 그 이하도 차이를 두어 시상하였다.

 

사간 민유중이 아뢰기를,
"수원(水原)에서 사노(私奴)가 사족(士族)인 배귀현(裵貴賢)의 누이 동생을 겁탈한 일이 있었는데, 귀현이 본부에다 소장을 올리자 부사(府使) 홍처후(洪處厚)가 핑계를 대면서 남양(南陽)에다 미루고 즉시 청리(聽理)를 하지 않아 정범(正犯)이 도망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홍처후를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궁가의 면세(免稅)에 있어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에 대한 결수(結數)를 이미 정하였는데, 인평 대군(麟坪大君) 집만은 종전대로 결수에 한정을 두지 말도록 특별히 명을 하였다.

 

9월 19일 계미

달이 필(畢)의 대성(大星)082)  을 가렸다.

 

김수흥을 승지로, 김만균을 집의로, 남구만을 부응교로, 이은상을 병조 참의로, 유계를 부제학으로, 오시수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호조가, 백관들 녹봉을 신축년083)  과 똑같이 재감하되 10월부터 시작하여 녹봉으로 주는 것을 그만두고 산료(散料)084)  로 주는데, 산료로 15말 이상을 받는 자는 1말, 20말 이상인 자는 2말을 감할 것을 청하자, 따랐다.

 

9월 20일 갑신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와 부사 이후산(李後山), 서장관 심재(沈梓)가 청국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세 사신을 의금부에 내려, 사사로이 통역관에게 백금 4천 냥을 뇌물로 줄 것을 약속한 죄를 다스렸다. 상사 낭선군 우는, 그것이 부사가 한 것이라고 하므로 상이 낭선군 우는 풀어주라고 하고 부사 이후산, 서장관 심재는 고신(告身)을 빼앗았으며 역관 등도 차등을 두어 죄를 부과하였다.

 

강원·충청 두 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졌다.

 

함경도 덕원(德源)·경흥(慶興) 등지에 홍수가 져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으므로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9월 21일 을유

우의정 정유성이 잇따라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뢰기를,
"예부의 제본(題本) 등초한 것을 묘당이 이미 입계(入啓)하여 성상께서도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거기에 언급한 말들을 보면 저를 향한 떠들썩한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모두가 신이 봉사(奉使)를 형편없이 하여 아랫것들을 단속하지 못한 소치로서 지금 와서 만약 신의 죄를 논한다면 비록 일만 번 죽어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중한 죄를 지고서 그대로 정석(鼎席)을 차지하고 있는다는 것은 결코 그러한 이치는 없는 것이며, 하물며 사사(査使)가 나올 시기가 이미 임박하였는데 응당 논죄(論罪)할 대상인 자가 아직도 중한 임무를 띠고 있고 아무런 처분도 받은 바 없다면 상하의 공론이 모두 그것을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체면(遞免)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9월 22일 병술

정언 이광직(李光稷)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번 신이 남구만과 함께 당돌하게 청대하였을 때 다행히도 인접을 허락하셨는데, 구만이 탑전에서 아뢴 것들이 모두가 궁가에 관한 말, 환시와 관계된 일들이었지만 할 말을 다하면서 누누이 끝이 없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절차상의 사소한 일을 이유로 들어 거침없이 꾸지람을 하시고 심지어 듣기 매우 괴롭다는 하교까지 하셨습니다. 만약 구만이 아뢴 말들이 전하의 귀에 거슬리지 않은 말들이었더라면 틀림없이 그렇게까지 꺾어버리지는 않으셨을 것이지만 그가 기탄없는 바른 말로 듣기 싫어하시는 성상의 마음을 격동시켰기 때문에 불평의 기색이 말과 표정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남의 신하가 되어 자신의 이해는 따지지도 않고 감히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하는 작은 정성을 바쳤는데, ‘내가 듣기에 매우 괴롭다.’ 하셨으니 그야말로 거의 말 한 마디로 나라를 망치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다그친다고까지 하신 말씀은 더더욱 대성인의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닌 것입니다. 옛 사람 중에는 혹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간한 자도 있었고 혹은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청한 자도 있었는데, 그 뜻이 다만 하늘의 뜻을 돌려보려는 것이지 어찌 고의적으로 다그치는 것이었겠습니까.
전하께서 한쪽으로 치우쳐진 마음을 한 칼로 단호히 끊어버리듯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 말에 대해 마치 물에다 돌을 던지듯이 언제나 아뢰는 글월이 올라오기만 하면 반드시 싫고 괴로워하는 뜻을 보이십니다. 그리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과 뜻이 통하지 않고 위아래가 서로 의심을 하면서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있으니 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그대가 진계한 말에 대하여 내가 깊이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9월 24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5일 기축

집의 김만균(金萬均)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전남 감사 조귀석(趙龜錫)의 계본을 보건대, 금년 가을에 징수할 쌀을 새로 정한 결수에 의하여 산정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해조에서는 본도가 경자·신축 두 해와 같이 심한 정도의 흉년은 아니고 또 복심(覆審)을 끝내기 전에는 재실(災實)을 알기도 어려우므로 사목(事目)에 의하여 구결수를 그대로 적용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금년 가뭄은 마침 여름 가을이 교차되는 시기여서 재해를 많이 당하기로는 양남(兩南)이 더욱 심한데 만약 이미 정해진 사목이라는 이유만으로 조금 풍년이었던 작년의 결수를 그대로 적용하고 보면 산군(山郡)은 그런대로 견뎌낸다고 하더라도 전혀 버려진 해택(海澤) 지대의 백성들은 틀림없이 거듭 곤궁을 당할 것이어서 서둘러 변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청컨대 전남도의 가을 징수미는 복심 이후의 결수에 따라 마련하여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청에게 하여금 다시 품처하도록 하였다.

 

9월 26일 경인

이조가 아뢰기를,
"대간이 현재 산과 바다의 절수처를 모두 혁파해야 한다고 쟁집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내수사의 수세 차인(收稅差人)을 정주(定州) 울매도(鬱每島)로 내려보내야 할 것임에도 그에 관한 공문서를 작성하여 주지 못하고 있어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혁파할 때는 하더라도 거기는 거론할 곳이 못 되니 종전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9월 27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적선(賊船) 두 척이 해서(海西) 연변에 출몰하면서 우리의 상선(商船)과 어선(漁船)을 상대로 겁탈과 노략질을 하였는데 그 적들은 모두 머리를 깎고 호건(胡巾)을 착용했으며 언어도 호인(胡人)들과 비슷하였는데, 해랑적(海浪賊)이라고들 하였다.

 

선혜청이 아뢰기를,
"대동미 징수에 있어 추등(秋等)은 구결수를 적용하고 춘등(春等)은 신결수를 적용하는 것이 바로 정해진 규정이고, 지난 경자·신축 두 해는 흉황이 극심하여 신결수에 의하여 받아들였으니 그것은 부득이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호남 지방의 금년 농사가 비록 여물지 못하다 해도 경자·신축 두 해같이 심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본도의 감사 조귀석이 신결수를 적용할 것을 청했을 때 본청이 허락하지 않은 것은 바로 각읍의 재와 실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아서 재해를 입은 곳이면 당연히 경중(輕重)을 나누어 그때 가서 변통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헌부가 본청의 결과적 조치를 기다려보지도 않고 지레 논계하였으니, 이는 아마 본청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일 같습니다. 바라건대 전결(田結) 전체 수가 올라온 후 별도로 변통을 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9월 28일 임진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 등이 의관을 거느리고 희정당(熙政堂)에 가서 병을 살폈는데, 핵환(核患) 때문이었다.

 

9월 29일 계사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의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수원 부사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원만석(元萬石)을 호조 참의로 삼고, 증 우의정 이경직(李景稷)에게는 시호 효민(孝敏)을, 증 좌의정 남이흥(南以興)에게는 충장(忠壯), 귀천군(龜川君) 이수(李晬)에게는 충숙(忠肅), 호조 판서 유강(兪絳)에게는 숙민(肅敏)의 시호를 내렸다. 남이흥은 정묘년 난리에 안주(安州)에서 죽어 조정에서 이미 포증(褒贈)을 하였고, 귀천군 수는 광해군이 인간 윤리를 무너뜨리고 있을 때 종반(宗班) 수십 명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간신 이이첨(李爾瞻)을 베도록 청했기 때문에 이 시호를 얻은 것이다.

 

9월 30일 갑오

행 부호군(行副護軍)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기를,
"당초 상복(喪服) 논의 때 신과 송시열이 과연 묘의(廟議)에 참여하여 함께 듣고 국제(國制)로 청했던 것인데, 그후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고례(古禮)를 인용하면서 논하기를 매우 강력히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설사 고례의 뜻이 과연 허목이 상소문에서 논한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대로 전례(典禮)가 있어 그를 따라 변경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고례의 뜻이 꼭 그렇다는 보장도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명을 받고는 짧은 차자로 대략 의논드린 바 있으나, 그후 계신 자리에 입시하였을 때 성상께서 허목의 상소문을 책상 위에다 두시고는 승지 김수항(金壽恒)을 시켜 그것을 읽게 하고 신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논변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예학(禮學)에 관하여 널리 상고하여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두 가지 나름대로의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척의 거리에 계시면서 은근하고 주밀하게 물으실 때에 만약 두려운 생각에 두리번거리면서 소신을 다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기에 신이 비록 재주도 구변도 없지마는 차마 그러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어 모든 보고 들었던 것, 아는 것, 생각나는 것들을 남겨놓지 않고 모두 다 아뢰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 말의 시비와 득실은 지금 또는 후세 사람들이 공정한 마음으로 평론하는 자가 있을 것이므로 신으로서야 어떻게 감히 자신의 주장이 꼭 옳다고야 하겠습니까.
주고받고 묻고 논변하시는 옥음(玉音)을 들었을 때 《예경(禮經)》의 원리를 훤히 내다보고 계시는 것이 보통 상식을 훨씬 초월하고 계셨으므로 신은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생각하기를 ‘대성인의 식견이 저렇게도 통달하고 고매하시니 허튼 소리가 비록 백거(白車)가 되더라도 먹혀들 이치는 필연코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세상은 사리에 어그러진 것을 좋아하고 인심은 험한 자가 많아, 한때 예를 논했던 말들이 도리어 사람을 몰아넣는 재화로 변하여 놀랍고 위태로운 일들이 층으로 겹으로 나타나고 새로 생기는 세력들이 가면 갈수록 기괴하기만 하니, 너무 심한 일입니다. 며칠 전 홍우원(洪宇遠)의 상소에, 시열에 대하여는 매우 호되게 다루면서 신의 이름만을 거론하지 않았는데, 아마 시열은 수의(收議) 속에다 의사 표시를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보았고 신은 탑전에서 더 많이 아뢰었기 때문에 기주(記註)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미처 듣고 알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신과 시열은 훼예영욕(毁譽榮辱)에 있어 의리상 누가 혼자 달리 당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 시열이 이미 자신을 탄핵한 글월을 올렸는데 신이라고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먼저 신의 죄부터 다스려 법을 엄숙히 하시고 사람들 말에도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세도와 인심이 착하지 못하다는 것을 경도 이미 알고 있을텐데 흉측한 말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개의할 필요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경이 서울을 떠난 지 이제 3년이 넘어 서운한 내 마음 무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경이 만약 나의 지극한 소망을 생각한다면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인데 경의 사직소가 또 이르니 내 깊이 한탄스럽다. 경은 나의 이 목마르듯이 기다리는 뜻을 받들어 빨리 마음을 돌려서 이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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