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9권, 현종 4년 1663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3. 13:14
반응형

10월 1일 을미

우의정 정유성이 상차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병조 참판 조수익(趙壽益)이 여주(驪州)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수익은 바로 유성룡(柳成龍)의 외손으로서 평소 시망(時望)이 있었고 청현(淸顯)의 직을 역임하였다. 노모(老母)를 여주에 모셔두고 왕래하면서 관직에 종사하였는데, 조경(趙絅)을 구제하기 위하여 소를 올렸다가 대간으로부터 ‘수익이 어미가 병중에 있다는 핑계로 국상(國祥)에도 오지 않아 공론이 바야흐로 일고 있는데도 사교(私交)를 위하여 구원의 손을 펴고 있다.’ 하는 논핵을 받았다. 그뒤로 다시는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자취를 감춘 채 시골에 있었다. 지금 또 굳이 사양하고 오지 않은 것이다.

 

10월 3일 정유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이무(李堥)를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응교로,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오시수(吳始壽)를 부수찬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사인으로 삼았다.

 

집의 김만균(金萬均)이 장인인 대사헌 이일상과 상피(相避)를 이유로 인혐하여 체직되었다.

 

10월 5일 기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일 사신이 왔을 때는 사사(査使)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 뇌자관(賚咨官)이 보고한 것을 보면 사사가 또 꼭 올 것 같습니다. 듣기에 그 나라 남방에 토적(土賊)이 있어서 병마(兵馬)를 조발하여 보냈다고 하고 또 심양(瀋陽)에도 급보가 있다고 들리는데, 만약 왈흡(曰哈)이 【왈흡은 바로 북녘 오랑캐 별종임.】  침범하였으면 틀림없이 우리 군대를 징발하도록 하였을 것이지만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염려할 것 없겠습니다."
하고, 좌상 원두표는 아뢰기를,
"우역(牛疫)이 몹시 번져 부림 소가 다 죽고 가을갈이를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하기 때문에 씨앗을 땅에 뿌려도 제대로 심어지기 어렵다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홍명하는 아뢰기를,
"우역이 그러하여 젖소가 많이 죽었기 때문에 우유도 올려올 수 없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은 아뢰기를,
"우역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다 죽고 심지어는 성 안의 까막까치도 드뭅니다. 이는 바로 보통 재변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의구심에 차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젠가 보니 종묘 후원에 까막까치가 매우 많더니 요즘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금원(禁苑)에만 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 안에도 전혀 없습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새라는 것이 기운을 제일 먼저 타는 것이어서 그것이 오가는 것으로 길흉을 점칩니다. 성상께서 자리에 오르신 지 지금 5년이 되었는데 세운(歲運)이 계속 흉하여 백성들이 걱정과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런대로 무사하다지만 외구(外寇)나 다른 재변이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두표가 또 아뢰기를,
"진휼청(賑恤廳) 당상관이 관서(關西)의 쌀을 옮겨다 쓰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공론은 어떠한가를 물었다. 이에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관서 백성들이 곤욕받을 것을 어려운 문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지금 강론하여 결정해야지만 비로소 진정(賑政)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니, 몇 섬으로 할지를 따라서 먼저 정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섬이나 사용해야 하겠는가?"
하자, 대사성 민정중이 아뢰기를,
"1만 5천 섬은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부득이하여 향곡(餉穀)을 가져다 쓰더라도 1만 섬을 초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비록 향곡을 이용하도록 허락하셨으나 각 아문의 은포(銀布) 및 평안도의 도요포(渡遼布), 병영에 저장된 군포(軍布)도 모두 적당량을 가져다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묻기를,
"영중추부사가 【바로 이경석(李景奭)이다.】  일찍이 홍석범(洪錫範) 삭과(削科)에 대하여 그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 역시 삭과는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후에 들으니 그가 그의 숙부(叔父)가 죽은 지 겨우 13일 만에 부거(赴擧)하여 등과한 것이라 합니다. 지금 만약 복과(復科)시키면 풍교(風敎)를 장려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고, 명하도 복과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니, 상이 그러면 그만두라고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금군(禁軍)에 준 국마(國馬)가 체구가 왜소하여 전마(戰馬)로는 맞지 않습니다. 듣기에 각처 목장에는 전마로 합당한 것들이 많이 있다고 하니, 지금은 목장의 말로 나누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좌명이 또 아뢰기를,
"금군 중에 옷가지가 홑으로 얇은 자들에게는 본조에서 옷감을 주도록 하여 선왕조의 고사(故事)를 따르소서."
하니, 상이 또한 허락하였다. 사간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고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사우(祠宇)로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있는 것에는 일찍이 충렬(忠烈)의 액(額)을 이미 내린 바 있으나, 지금 듣건대 통영(統營) 역시 순신이 창건한 것이기 때문에 장사(將士)들이 이미 사우를 건립하여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노량의 예대로 충렬의 액을 아울러 내리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유중이 또 아뢰기를,
"석실 서원(石室書院)의 【석실은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의 서원이다.】  사액(賜額) 치제(致祭) 때 감사가 집사를 수령으로 차출하여 보내지 않고 그 고을 경내의 전직 관원으로 차출하여 정하게 했다니 이미 터무니없는 일인데, 본관(本官)에서도 전직 관원으로 정하여 보내지 않고 제생(諸生)들을 집사로 충원하였으며 제문(祭文)에 있어서는 그게 바로 왕언(王言)인데도 역시 유생(儒生)을 시켜 낭독하게 하였다니 전례(典禮)로 보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제물(祭物)이나 의물(儀物)도 갖추어지지 않아 더욱 태만함을 나타냈으니, 경기 감사 오정일(吳挺一)을 추고하고 양주 목사 민희(閔熙)는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유계가 아뢰기를,
"선왕조에서 균전(均田)에 관하여 논의할 때 하교하시기를 ‘전지 측량 이후 신결수가 구결수보다 비록 갑절이 많더라도 민역(民役)을 쓰는 일은 꼭 구결수에 의하여 하라.’ 하셨는데, 신이 그 하교를 언젠가 누구를 대하여 말하였더니 경기의 백성들이 듣고는 삶에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12말로 정하였다고 하니 이는 백성에게 크게 신의를 잃을 일입니다. 신결수가 구결수에 비하여 비록 갑절이 되지 않아도 민간이 내놓을 쌀이 5만 섬 가까이 될 것이어서 백성들이 틀림없이, 국가가 곡식을 많이 받아내기 위하여 전지 측량을 하였다고 할 것이니 그 비방을 무슨 수로 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태화와 두표가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맡은 신들이 모두 12말로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했기 때문에 신들도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하고, 좌명은 아뢰기를,
"쌀 12말을 징수하되 모든 잡역(雜役)을 그 속에다 포함시키면 백성들도 편리하다고 생각할 것 같기 때문에 신들이 12말로 정할 것을 청하였던 것인데, 지금 유계는 신의를 잃을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왕조 때 전지 측량을 청했던 이가 신의 아비이고 10말이 편리하다고 주장한 이도 신의 아비였습니다. 지금 신 역시 12말을 주장할 입장이 아니지만 다만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그 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제학 의 말을 놓고 다시 의논해보라."
하였다.

 

10월 7일 신축

밤에 서쪽 하늘가에 크기가 사발만한 유성이 있었는데, 색은 희고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남구만(南九萬)을 집의로 삼았다.

 

사간 민유중(閔維重) 등이 아뢰기를,
"오수 찰방(獒樹察訪) 손단(孫湍)은 대구(大丘) 사람으로서 참하(參下)인 자가 사관(四館)의 관원임을 자칭하고, 자기 고을에서 사사로이 싸웠던 일로 하여 자기가 미워하고 원한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제멋대로 정거(停擧)를 시켰기 때문에 그 고을이 시끌시끌하였으며, 당시의 부사(府使) 이수강(李守綱)이 그의 아비를 가두어두어 금단(禁斷)하였으니,행패를 부리는 일이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그후에야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성내에 병들어 죽은 노약자가 매우 많습니다. 혹은 동쪽 서쪽 길 가에 끌어다 버리기도 하고 혹은 소나무 사이에다 걸쳐놓고 즉시 매장을 하지 않아 보기에 끔찍하기 때문에 경조(京兆)에 분부하여 사부(四部)에서 매장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매장되지 않은 곳이 60여 곳이나 됩니다. 그 해당 낭청들을 파직하여 타인의 징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8일 임인

상이 침을 맞았다.

 

대사간 홍처량(洪處亮)이 적성(積城)에 있으면서 상소문을 올려 체직되었다. 처량이 병을 이유로 하향한 뒤 전후 누차에 걸쳐 관직 제수를 사양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꽤 염퇴(恬退)로 인정을 하였다. 그후 한 번 올라 와서는 나이 들어 점점 쇠약해졌으나 관직은 더 높아지자 오래 있도록 돌아가지 않아 처음 먹었던 마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으므로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여 선혜청·비국의 제조(提調)를 갈아줄 것을 빌고 이어 아뢰기를,
"어제 경연에서 영남 진휼 건에 관하여 의견들을 물으셨을 때 신의 생각에는 ‘전세(田稅) 및 공물가미(貢物價米)를 본도에 유치해두고 그것을 기민(飢民) 진구의 밑천으로 이용한다면 본도의 전세 수가 수만 섬도 넘으니 진휼하고 남은 쌀로도 상환할 수 있을 것이다. 각 관아의 공물가미를 재감한 외에 진휼청에서 주어야 할 것이 7천여 섬에 이르니 비록 그 값을 주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리저리 옮겨가며 쓸 수 있을 것이다.’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그에 대하여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교하시고 대신들은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다른 여러 신들도 모두 괴이하게 여겼으므로 말도 잘 못하고 더듬는 신으로서는 입을 다물고 물러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소견이기에 말을 마저 마칠까 합니다.
금년에는 삼남(三南)이 다 흉년이기는 하지만 경중의 차이는 있는데 묘당에서 재생(裁省)한 것은 똑같이 신축년에 시행했던 전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신축년 흉황은 삼남이 별로 차이가 없었으나 금년은 영남이 가장 심한데, 재생한 수는 호남이 5천 9백 섬, 호서가 5천 4백 섬인데 비해 영남은 재감량이 3천 2백 50여 섬에 불과하니 신으로서는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국가에서 힘을 다해 진구해야 할 곳은 흉황이 가장 심한 영남입니다. 호서에는 비록 약간 흉년이 든 고장이 있기는 하지만 금년 추등(秋等) 징수미를 구결수(舊結數)에 의거하여 징수할 것이기 때문에 본도의 징수미는 재감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재감하였으니 그 징수미의 나머지만으로도 영남에서 감량한 물종(物種)의 값을 감당할 수 있어서 각 관아에서 서로 미루어가며 진상하기에 충분할 것이고 진휼청에서도 그 값을 허비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며, 공물 주인(貢物主人)도 밑천을 잃어버리는 억울함이 없을 것입니다.
영남은 공물 원수는 많지 않으나 기인(其人)의 가포(價布)가 가장 절실한 문제이고 사도시(司䆃寺)의 갱미(粳米)도 어공(御供)이어서 값을 쳐주지 아니할 수 없는데, 기인의 가포는 1만 2천 5백 필에 불과하므로 그 값은 호조가 상환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부족하면 각 아문의 은포(銀布)로 대줄 수 있을 것이며 갱미는 수량이 적어 값을 마련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재이로 하여 견감한 전세 2만여 섬은 해당 아문이 차분하게 길거(拮据)하여 그 수량을 충당하게 하고 각읍 군정(軍丁)의 신역(身役)도 임시로 재감해야 할 것이며 꼭 바쳐야 할 가포는 해당 아문이 저장하고 있는 은포로 상환하고 주사(舟師)와 방군(防軍)의 가포는 본도의 각영(各營)이 현재 가지고 있는 베로 품을 사서 대신 치르게 하여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곡식을 사들여 진구하는 일에 있어서는 오로지 도신(道臣)과 수령들에게 책임을 지워야지만 영남의 극심한 흉황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휼청에서는 각도의 재해가 비록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공물에 있어서는 똑같이 재감해야지만 각사의 주인(主人)들이 편파적으로 괴로움을 당한다는 원성이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공물 주인으로서야 이 흉년을 당하여 그 역가(役價)만 준다면 무슨 원망까지야 하겠습니까. 진휼청이, 양호(兩湖)에서 재감한 가미(價米)를 영남 주인에게로 주려고 하는 것이 크게 잘못인 것입니다. 만약 양호에서 재감한 가미를 영남 기민들에게 직접 준다면 가하지만 그렇지 않고서 곡식을 옮겨온다는 이름만 빌려 그것을 써서는 안 될 곳에다 쓰려고 한다면 구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본의는 대략 그러한 것이었는데 이미 실시를 보지 못했으니, 형세상 그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겸하여 살피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그 상소문을 묘당에 내렸다. 묘당이 아뢰기를,
"삼남이 당한 재해가 비록 경중은 있으나 흉년을 면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진구의 일을 영남에다만 시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양호에서 재감한 쌀은 당연히 그 곳 읍에다 유치해두고 그것을 진구의 밑천으로 삼아야지 영남으로 옮겨다 쓸 수는 없는 일이며, 각 관아가 가지고 있다는 수량도 모두 현재 실지 수량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만약 그것으로 재감한 공물의 수량을 충당하여 주려고 하면 각 관아가 틀림없이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등대(登對) 때 익숙히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도 유생 배기(裵紀) 등이 상소하기를,
"국가가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한 것은 백성들 부역을 균등히 하고 국가 용도를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호남에는 그것을 시행할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고, 감당할 수 없는 다섯이 있습니다. 무어냐 하면 정유년 난리 이후 계묘년에 처음으로 전지 측량을 하였는데 그때는 전쟁에 불탄 나머지 살아남은 백성들이 산간 숲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산읍(山邑)이 먼저 개간되고 연해(沿海) 지대는 황폐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전관(量田官)이 경비(經費)를 돌보는 뜻에서 개간된 땅은 높은 등급을 매기고, 황폐된 것을 민망히 여기는 뜻에서 연해 지대는 헐하게 매겨, 연해 지대는 땅이 커도 복(卜)은 가벼웠고 산읍은 땅이 작아도 복은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갑술년 측량 때도 구안(舊案)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아 결국 높은 것은 더 높아지고 낮은 것은 더 낮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산읍과 해안의 전안(田案)이 그렇게 엉뚱한 차이가 나고 있는데도 지금 와서 결수에 따라 같은 율로 징수를 하면 산읍이 해안보다 몇 갑절이나 더 무거울 것이니 이것이 시행할 수 없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당초 대동미를 베로 환산할 때 쌀 6말 5되를 베 1필로 환산하였고 그 베도 35척을 기준으로 하였던 것인데, 그후 베의 품질이 점점 좋아져 6승, 7승 포가 되었고 길이도 39척까지 되어 공물을 받는 장사꾼들은 그 품질을 꼭 더 높이려고 하고 해당 아문에서는 감히 그들 소원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렇게 신의를 잃었는데 예로부터 백성을 잃고서 나라를 보전한 자는 없었으니 이것이 시행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공(禹貢)의 오복(五服)085)   제도에도 볏단, 벼이삭, 벼, 쌀 등으로 차이를 두어 받아 거리의 원근을 감안하여 노일(勞逸)이 균등하도록 배려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호서(湖西)는 1결(結)에 10말, 호남은 1결에 13말, 이렇게 균등하지 못하게 거리가 가까운 곳은 도리어 가볍고 먼 곳이 도리어 무거우며, 각읍의 잉여미도 경비를 제한 외에 남아 있는 것이 수만으로 계산할 정도인데도 꼭 더 많은 잉여미를 두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시행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쌀은 되와 말이 한정되어 있으나 베는 품질과 색상에 기준이 없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사람을 어렵게 만들기가 쉽고 간교한 백성들은 그것을 노려 값을 제멋대로 낮추고 높이며 먼 길의 운반비까지 백성들이 부담하게 되어 1결당 내는 것이 많게는 25, 26말에 이르고 있는데, 그것을 연해 지대의 13말만 바치면 되는 것에 비교하면 괴롭고 수월하기가 크게 다르니, 그것이 첫번째 감당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베로 환산하는 수치가 읍마다 달라 혹 1, 2결에 1필인 경우도 있고, 혹은 4, 5결에 1필이기도 하며 심지어 7, 8결에 1필인 경우도 있어 전지 결수의 다소에 관계없이 들쭉날쭉이니, 그것이 두 번째로 감당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지난 세월에도 부역(賦役)이 비록 번다하고 무겁기는 하였으나 상납하는 물건들을 대부분 토산품으로 그대로 올려바쳤기 때문에 쌀이나 베를 허비하지 않고도 그때그때 구하여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극히 흔해빠진 토산물까지도 모두 서울 시장의 높은 값으로 따져 조금씩 조금씩 거두어들여 수만 냥을 만드는데 그 많은 명목의 쌀과 베를 일시에 모두 징수하고 있어, 비유하자면 마치 길가는 사람이 하루 동안에 비록 열 번 물을 건너더라도 그 물이 옷을 걷고 건널 수 있는 물이라면 고생스럽기는 하더라도 지나갈 수 있지만 그 적은 물들을 한데 모아 큰 강을 만들고는 이마에 넘치는 그 깊은 물을 억지로 맨몸으로 건너라고 하면 빠져죽을 것은 필연적인 이치인 것과 같으니 그것이 세 번째 견딜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남쪽 지대의 산읍들은 1년 부역을 으레 전세(田稅)로 절반을 물고 절반은 잡역으로 물었는데, 지금은 전세로 6말 남짓을 내고 그 외에 대동미 13말을 전세 이외에 더 내야 하며 게다가 또 그 절반은 베로 환산하여 비용이 세 곱이나 더 듭니다. 봄 여름이면 전세와 함께 독촉하고 가을 겨울이면 거두는 적미(翟米)와 함께 징수하는 바람에 수족을 놀릴 수도 없고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우니, 이것이 네 번째 견딜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법이 처음 연해에 시행될 때는 좋은 법이라고들 하더니 날이 갈수록 점점 폐단이 생겨 백성들 전결(田結)에서 나올 수 없는 잡역을 연호(烟戶)에다 책임지우기 때문에 대호(大戶)는 대호대로 귀한 쌀 때문에 탕진하고 소호(小戶)는 소호대로 연역(煙役)086)  에 시달리니, 그것이 다섯 번째 견딜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선왕(先王)이 만든 제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의 정당한 사항을 위하여 조세를 바치게 했을 뿐이니 무슨 폐단이 있겠습니까. 다만 중간에 세상이 어지러워 그 제도들을 모두 무너뜨렸고 그리하여 일어나기 시작한 여러 가지 폐단들이 점점 더하여 하늘을 뒤덮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옛 법을 따르고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면 그뿐이지 왜 꼭 새로운 법, 특이한 정사를 별도로 만들 것이야 뭐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담당 신하에게 명하여 산읍에의 대동법을 정파하여 수십 고을의 생령(生靈)들로 하여금 도탄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상소문을 해당 아문과 묘당에 내렸는데, 묘당에서는 그 편리 여부를 다시 본도에 물어볼 것을 청하였다.
‘그후 도신(道臣) 김시진(金始振)·민유중(閔維重) 등이 이해 득실은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조정 취지만 받들어 편리하다 칭하고는 드디어 산군에까지도 시행하였다. 대동법이 원래는 부득이하여 만들어진 법으로 마치 송(宋)의 고역(雇役)087)  과도 같은 것인데, 각도에 따라 편리한 곳도 있고 불편한 곳도 있는데다 법이 오래 되자 폐단이 생겨 백성들 중에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또 대동 본역(本役) 외에 연역(煙役)까지 있어 사람 머리 수대로 쓸어 모아가고도 모자랐던 것이다. 그리고 공평하지 못한 폐단으로는 대호는 남정이 수십 명인데도 하나로 계산하고 잔호는 홀아비·과부·독신 생활자도 역시 하나로 계산하였다. 그 폐단이 그러한데도 세상에서는 모두 좋은 법이라하면서 변통할 줄을 몰랐으니, 배기 등의 상소가 꽤 상세하게 지적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시행되리라고 어떻게 기대하겠는가.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본도의 폐단으로 10개 조항을 들어 아뢰기를,
"1. 각 관아의 노비에 있어 허위로 기록된 자는 바로잡고 도망자는 사고로 처리하며 재해를 당한 자는 그 경중에 따라 그 해 신공(身貢)을 전액 혹은 반액을 재감해야 할 것입니다.
2. 내노비(內奴婢)는 신공이 시노비(寺奴婢)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는데 그 승수(升數)·척수(尺數)를 감하거나 혹은 필수(匹數)를 감하거나 혹은 갖가지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여 치우치게 고통을 당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 대장에 기록되어 있는 염부(鹽夫)로서 도망간 자와 죽은 자, 배가 썩었는데도 고치지 않은 자는 해당 아문에서 모두 사고로 처리하게 하여 인족(隣族)에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4.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이 둔전(屯田)을 둔 곳에 민전(民田)이 섞여 점유당하고 있는 곳이 매우 많고 또 그 곳으로 들어가 부역을 피하고 있는 자도 많은데, 혁파는 비록 어려울지라도 당연히 재손(裁損)은 있어야 할 것이며 또 그 중에서 장정은 골라 군대 수를 충원하도록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5. 남해(南海)의 금산(錦山)에 목장(牧場)을 새로 설치한 후로 관둔전·민전이 그 속에 뒤섞여 들어갔는데, 당연히 변통을 하여 백성들 폐단을 없애 주어야 할 것입니다.
6. 절도(絶島)로 정배되어온 죄인들 수가 매우 많아 주객(主客) 모두가 피곤하므로 우선 죄가 가벼운 자를 다른 곳으로 배소를 옮기고 지금부터는 다시 정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7. 풍기(豊基)·영천(榮川) 두 고을 전세(田稅)를 단양(丹陽)의 물가로 옮겨 두었다가 곧바로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올려가게 하고 예천(醴泉) 전세 역시 똑같이 수로를 이용하여 편리하게 해야 합니다.
8. 거제현(巨濟縣) 칠천도(漆川島)에 제향에 쓸 소와 사복시의 소가 5백 20여 두가 사육되고 있는데 그곳 토질이 매우 척박하여 풀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해마다 봄·여름이면 꼴풀을 대느라 남부여대하고 섬으로 싣고 들어가고 있어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사복시 소는 다른 곳으로 옮겨 방목하든지 아니면 팔든지 하여 민폐를 덜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9. 속오군(束伍軍)에 보포(保布)를 주는 일은 다른 도에는 없는 일인데 혹 아비가 원군(元軍)이고 자식은 보가 되며 혹은 자식이 원군인데 아비가 보가 되기도 하여 관과 민에 가장 큰 피해를 주고 있으니 당연히 변통하여 다른 도와 똑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10. 각읍과 향교(鄕校)의 노비가 가장 적어 모양을 이룰 수 없으니 각 관아의 노비 약간명을 떼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상의 장계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모두를 시행하되 그 중의 사노비에 관하여는 허실을 분변하기 어려우니 이정(釐正)을 허락하지 말 것이며, 속오군 보포 급부 건은 거기에서 병사(兵使)와 의논하여 다시 아뢰도록 하고, 시노비를 각읍과 향교에 떼어주는 것은 형세를 보아가며 처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9일 계묘

유철(兪㯙)을 대사간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삼고, 증 좌찬성 이안눌(李安訥)에게 시호를 문혜(文惠)로 내렸다.

 

상이 침을 맞았다.

 

행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상소,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일상이 지평 이지익(李之翼)으로부터 전라 우수사 이동현(李東顯)이 뇌물로 준 배를 받았다는 탄핵을 당한 후로 조정에서는 그 증거를 캐물었으나 양영남(梁穎南) 등이 끝까지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는데도 일상은 자기 자신이 불안하여 제수 명령이 있을 때마다 모두 애써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해주(海州)의 유학(幼學) 김유(金瑜)의 처 구씨(具氏)는 밤에 도둑이 들어 집에 불을 지르고 자기 지아비를 찔렀는데 김유가 거의 죽어가는 것을 보고 타오르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 김유를 껴안은 채 함께 타죽었다. 감사 강유(姜瑜)가 장계를 갖추어 그 사실을 알려왔으므로 예조가 계청하여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10월 10일 갑진

청사(淸使) 2명이 나왔다. 허적(許積)을 원접사(遠接使)로, 송창(宋昌)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삼았다.

 

10월 11일 을사

상이 침을 맞았다.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아뢰기를,
"이달 8일 밤에 화주(化主)·거사(居士) 무리들이 교량을 개수한답시고 중들을 불러 모아 종묘 대문 밖 매우 가까운 곳에서 불사(佛事)를 설행하면서 심지어 장막을 치고 꽃을 꽂아두고 경쇠·꽹과리·북을 울리며 법문을 외우기까지 하였다는데, 그날 밤 종묘서(宗廟署)에 입직한 관원이 못하게 단속을 하지 않았으니 그를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2일 병오

상이 침을 맞았다.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이익한(李翊漢)을 형조 참판으로, 이행진(李行進)을 병조 참판으로, 이일상을 좌참찬으로, 이민서(李敏敍)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밤 2경(更)에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대사성 민정중이 상소하기를,
"삼가 예조 판서 홍명하 차자본을 보건대, 그가 의견을 밝힌 것은 오로지 양호(兩湖)의 공물 재감의 부당함을 지적한 것이었고 심지어 영남이 가장 적게 재감된 까닭을 모르겠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각도의 흉황이 경중은 물론 있겠으나 번신(藩臣)들이 장계로 알려온 것을 보면 흉황 아닌 곳이 없고 굶주리지 않은 백성이 없는데, 그는 힘을 다해 구제해야 할 곳이 영남뿐이라고 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자세히 모른단 말입니까. 아마 그의 생각은 양호에는 이미 대동법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흉년이 되어 수확이 줄면 서울 관아에 공급할 물량도 당연히 그에 준하여 그만큼 재감이 될 것인데 게다가 다시 재감할 것이 뭐 있겠느냐 하는 뜻인 모양이지만 그렇게 친다면 영남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영남도 그 도에서 상납해야 할 각종 부세를 모두 이미 본도에다 유치하여 그것을 진구(賑救)에 이용하게 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진휼청이 별도로 그 수량을 마련하여 지부(地部)에 상환만 하면 그 재감된 것이 양호와 같을 게 아니겠습니까.
명하가 현재 양호를 관리하고 있으면서 양호의 재감하고 남은 쌀을 진휼청으로 옮겨 타도에서 쓴 것을 상환하려고 하지 않으니, 그 뜻이 벌써 편파적이고 고르지 못한 것입니다. 더구나 양호를 진구하자면 쌓아둔 곡식이 없으므로 결국은 그 곡식을 양호의 진구용으로 이용해야 할 것인데 그것마저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살펴 생각지 않은 일입니까?
지금의 이른바 재감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른바 재감이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옛날에는 재감이라는 것이 백성들이 상납을 하지 않게 하면 그뿐이었지만 지금은 재감이래야 나라에 저축이 없기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고 다만 각 관아에서 용도를 줄여 그 나머지로 재감된 부세만큼 상환을 하는 것입니다. 기민 진구의 밑천이래야 그 사이 곡절들이 이처럼 매우 구차한 실정이지만 만약 그도 아니면 다시는 손을 쓸 곳이 없어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봄쯤이면 백성들 모두가 굶어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선혜(宣惠)를 맡은 이가 경비 조달을 그렇게 걱정하고 있고 그 밖의 각 아문에서도 모두 그렇다고만 하면서 범연히 보고 있으니, 그것이 어찌 성상께서 맡기신 근본 뜻이겠습니까."
하고, 이어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황해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 죽은 소가 1천여 두나 되었고 관저(官猪)도 죽었다.

 

영남·호남의 가을 조련을 정지하였다.

 

10월 13일 정미

우박이 내리고 눈도 조금 내렸다.

 

상이 침을 맞았다.

 

10월 14일 무신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정만화(鄭萬和)를 형조 참의로, 남구만(南九萬)을 응교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삼았다.

 

우의정 정유성이 잇따라 상차하여 체직을 빌었는데, 이때에 와서 면직되었다.

 

10월 15일 기유

정유성을 판중추로, 유계를 도승지로, 이경억을 승지로, 남노성을 예조 참판으로, 이시매를 우윤으로 삼았다.

 

사간 민유중 등이 아뢰기를,
"도성(都城) 안의 교량을 수리하는 일은 담당자가 따로 있는데 무지한 시사(施舍) 무리들이 저들 스스로 개조하면서 일을 시작할 초기에 비국에다 알렸던 바, 비국에서는 편리하기도 하고 비용도 절감될 것을 유리하게 여겨 허락하고 또 경비까지 도와주어 좌도(左道)088)  의 요리배(徼利背)들에게 구실을 제공하였으니 국가 체면을 크게 손상시킨 것입니다. 비국 당상관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에 교량을 수리한 무리들이 자기들 권연문(勸緣文)을 가지고 비국에 와 인쇄를 청하여 비국이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좌도가 백성 유혹하는 일은 주현(州縣)의 관리로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일인데 하물며 비국이 그 어떠한 아문인데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까. 지난해에도 이미 그러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또 그것을 전례로 원용하고 있다니 듣기에 놀랄 일입니다. 바라건대 전후의 비국 당상을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르지 않다가 이튿날에야 따랐다.

 

10월 16일 경술

상이 침을 맞았다.

 

도둑이 남별전(南別殿)의 제사에 쓰는 은그릇을 훔쳐 갔으므로 해당 관원을 잡아들여 추문하였다.

 

이조 참판 조복양(趙復陽)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요즈음 천재(天災) 물괴(物怪)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할 일들인데, 재변은 무단히 생기는 게 아니고 반드시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소가 모두 죽어 봄농사에 희망이 끊겼으며, 가을가뭄이 너무 심하여 땅이 모두 말라붙었는데 이러한 시기에 객사(客使)까지 또 왔으니 그야말로 군신 상하가 마음을 조이고 생각을 쌓아 한 마음으로 공제(共濟)를 도모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조정 상황을 보면 자못 화평의 기운이 부족하여 무슨 말만 있었다 하면 금방 시끄러움으로 변하고 마니 이러한 기상이라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크게 무언가 할 수 있는 뜻을 분발하여 뭇 신하들도 격려하시고 비록 고요한 조섭 중에 계시더라도 더욱 경성(警省)을 가하시고 만민이 우러러볼 표준을 세워 게을리하지 말며 일신의 사사로움을 없애고 마음을 활짝 열어 공정을 기하소서. 그리고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 아랫사람들이 할 말을 다하게 하시고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시어 허심탄회하게 선치의 길을 강구하심으로써 사람을 아끼는 정책을 펴나가소서. 그러면 백성들 마음도 즐거움을 느낄 것이며 하늘의 뜻도 감동될 것이니 재앙을 멎게 하는 방법이 거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체직은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7일 신해

상이 침을 맞았다.

 

장령 김익렴 등이 아뢰기를,
"요즘 사대부들이 법을 무시하고 기생을 첩으로 두는 일이 이미 고질적 폐습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관서(關西)와 북로(北路)에 있어서는 나라에서 더욱 엄히 금지하고 있는 터인데도 전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인(李𡐔)은 일찍이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있을 때 남모르게 읍기(邑妓)를 간통하여 남의 웃음을 많이 사더니 의주로 제수를 받고는 그를 데려다 관아에 두었고 체임하고 돌아올 때는 그를 데리고 함께 와 나라의 법을 안중에 두지 않고 조금도 꺼려한 바 없었으니 이인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그 밖의 사대부들 중에도 만약 관기(官妓)를 첩으로 두고 있는 자가 있다면 모두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엄밀히 조사하여 밝혀내어 전부 쇄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훈국(訓局) 군졸이 모여 술을 마시다가 형조의 금리(禁吏)에게 붙잡혔는데 같은 부대의 군졸들이 그 금리를 결박하여 뭇매를 가하고는 금령을 범하여 잡혀가던 군졸을 탈취하여 갔다. 중군(中軍)의 대장(大將)이, 결박당한 자가 금리인 것을 구타한 일이 있었으므로 형조에서 금리·사령(使令)을 시켜 그때 앞장섰던 자를 잡아오게 하였는데, 이들은 또 그 사령까지 구타하여 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에 형조가 아뢰기를,
"교만하고 포악한 병졸은 법에 의하여 죄를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해괴한 일이다. 앞장섰던 사람을 훈국으로 하여금 죄를 주게 하라."
하였다. 그후 승지 이경억이 아뢰기를,
"훈국 군사가 건방지고 방자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조정 선비에게 맞대들고 대장 명령을 거역했다고는 일찍이 들은 바 없습니다. 만약 대장이 평상시에 항상 단속을 하고 죄를 범할 때마다 엄중히 다스렸던들 어찌 그러한 이변이 있었겠습니까. 이대로 계속 쌓여가다가는 후일에 가서 이보다 더한 환란이 있을 것이니, 군대를 다스리는 법도가 없고 군대를 풀어놓아 폐단을 일으킨 그 죄를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바라건대 훈국 대장 이완(李浣)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고 중군(中軍)과 장관(將官)은 대장으로 하여금 무거운 쪽으로 처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원 감사 이진(李𥘼)이, 한정(閑丁) 세초(歲抄)의 일, 북민(北民) 쇄환(刷還)의 일을 정지하여 굶주린 백성들이 시달림을 받는 폐단을 없애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10월 18일 임자

유성이 흐린 남쪽 하늘에서 나타나 흐린 동쪽으로 사라졌는데 길이가 1, 2척이었고 빛은 창적색(蒼赤色)이었다.

 

사간 민유중 등이 아뢰기를,
"새로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제수된 이시만(李時萬)은 몸을 더럽히고 폐인이 되어 조반(朝班)에 끼이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갑자기 큰 고을에 제수 되어 세상이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이시만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19일 계축

승지 이태연(李泰淵)이 상소하기를,
"지금 우리 전하께서 춘추가 한창이시고 의욕도 왕성하시니, 그야말로 뭇 신하들이 너무 용감하시고 지나친 독려를 하실까 싶어 걱정하고 경계하기에 분주히 서둘러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나 이완되고 여유스러움이 마치 오랜 왕좌에서 권태를 느끼신 듯하여 5년 동안의 치적마저도 점점 쇠퇴하고 한갓 고식적인 것만 일삼아 조금도 분발의 뜻이 없으십니다. 아래에서 아뢴 일들이 어찌 모두 옳기를 바라겠습니까마는, ‘의계(依啓)’·‘의윤(依允)’ 등 글자 몇 자만으로 응대하는 도구를 삼아 마치 깊은 생각은 하려 들지 않고 묻는 대로 대답이나 하는 듯한 인상이고 장주(章奏)에 대해 안에 놓아두고 내리지 않으시며 모든 문부(文簿)도 전부 정체 상태입니다. 이는 성상의 체후가 편찮으셔서 일을 살피시는 데 방해를 주고 있는 소치이겠으나 멀리서 듣는 이들이야 어떻게 그 곡절을 다 알아 답답해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일로만 말하더라도 대간(臺諫)이 논한 것은 사실 궁중(宮中)·부중(府中)이 똑같다는 뜻인데 달을 넘겨가며 논집(論執)하여도 성상께서는 더욱 멀리하시니 이러한데도 진작(振作)을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논쟁하는 것도 공공 장소에서 일개 가부(可否)를 밝히는 일에 불과한데 서로 소장(疏章)을 올려가며 피차 헐뜯기만 힘쓰고 있으니, 그렇고서 함께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 역시 이치 밖의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과, 충성을 다하려는 뜻에 대하여 내 매우 감탄하는 바이다."
하였다.

 

상이 침을 맞은 후에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호남의 민간 사정이 말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부역을 견감해 주기 위하여 감히 아뢴 바 있었는데, 그것은 은택이 상으로부터 나왔으면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비국의 복계(覆啓)를 보면 우선 경비부터 따졌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덕음(德音)을 널리 반포하시어 그 수를 특별 견감하도록 영을 내리시고 또 하교하시기를 ‘경비가 만약 부족하면 내부(內府)의 저장까지 모두 덜어내어 용도를 도울 것이다.’ 하신다면 천리 밖 죽어가는 백성들이 조정 덕의(德意)에 그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남 군읍(郡邑)의 재해를 당한 자에게 중한 자는 2말, 경한 자는 1말을 각각 견감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영남도 국가의 뿌리에 해당한 곳으로서 넉넉히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도신(道臣)이 조목별로 아뢰어 온 것이 도신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이지만 그 밖에 도신이 감히 청하지 못한 것, 또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을 대신들과 강구하여 돌보고 살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상께서 항상 회보(懷保)의 방법을 생각하시고 백성의 사생(死生)으로 국가 존망의 척도를 삼으신다면 자애로운 하늘인들 어찌 감동하여 마음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함경도의 전세미(田稅米) 및 시노비(寺奴婢)·내노비(內奴婢)·사천(私賤)의 신공(身貢) 등을 견감하고 상평청(常平廳)의 모곡(耗穀)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무상 공급하였으며 또 창고에 저장된 곡식 절반을 꺼내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였다.

 

10월 20일 갑인

약방 도제조 이경석 등이 의원들을 거느리고 희정당(熙政堂)에 들어가 병을 살폈다.

 

이민서(李敏敍)를 헌납으로, 임의백(任義伯)을 좌윤으로 삼았다.

 

호남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처음에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장계를 올려 신결수를 적용하여 추수미(秋收米)를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묘당이 복계하여 그것을 막았다. 귀석이 또 치계하기를,
"금년에도 구결수를 그대로 적용하여 적지(赤地)에서 쌀을 징수한다면 이는 백성을 가엾게 보시는 성상의 치화(治化)에 어그러지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선혜청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선혜청이 회계하기를,
"재해를 당했거나 당하지 않았거나 따지지 말고 모두 신결수를 적용하여 받도록 허락하여 먼 곳의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 덕의(德意)를 알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고 또 하교하기를,
"본도의 일이 참으로 딱하다. 비록 대동미 1말씩을 이미 견감하였으나 너무 심한 읍은 2말, 좀 덜한 읍은 1말씩 더 견감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정이 진휼하고 있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10월 21일 을묘

대사헌 김수항이 부름을 받고도 나오지 않은 관계로 체직되었다.

 

비변사가, 각 관아의 은(銀)과 베를 신축년의 예에 의거하여 그 절반을 진휼청에서 가져다 쓸 것을 계청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상의원(尙衣院)이 주장하기를,
"본원은 사정과 체면이 다른 관아와는 다를 뿐만 아니라 창고의 저축도 이미 동이 났습니다."
하고, 허락하지 말도록 방계(防啓)하자, 비국이 다시 아뢰기를,
"상의원은 어용(御用)에 필요한 물건 사들이는 값을 해조에서 가져다 쓰고 있고 또 노비의 공포(貢布), 장인(匠人)의 가포(價布) 등 남아 있는 저축이 꽤 넉넉한 편인데, 지금 만약 본원이 아뢴 내용에 따라 끝내 가져다 쓰지 못하게 되면 다른 관아들도 서로 시새워 그를 본받을 것이니, 사리로 보거나 체면으로 보거나 부당한 일입니다. 종전에 재가하셨던 대로 그 수를 가져다가 영남 공물(貢物) 값을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흉년으로 인하여 각처의 영선(營繕)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차자를 올려 면직을 빌었는데,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2일 병진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침범하였다.

 

10월 23일 정사

통역관 이일선(李一善)이 제독(提督) 자격으로 청국 사신을 따라 봉성(鳳城)에 와서는 칙사(勅使)로 자처하면서 접대 등의 일을 한거원(韓巨源)이 칙사로 왔을 때의 예에 준하도록 하고 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내보였는데, 그 자문에도 거원을 접하던 예로 접대하라고 되어 있었다. 원접사 허적(許積)이 일선에게 말하기를,
"자문에 칙사로 올려 대접하라는 말도 없거니와 제독이 칙사로 자처한다는 것은 사리에 당찮은 일이다. 지난번 거원이 비록 칙사라고는 하였지만 결코 명을 받고 온 것이 아니었고 또 그때의 접대는 우리가 속임을 당한 것이었으니, 지금 그 잘못된 전례를 답습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으나, 일선은 또 칙사의 말을 빙자하여 억지를 부렸으므로 허적이 강력히 다투다가 그 사실을 장계로 알리고 또 그 자문을 올려왔었다. 승지 김수흥이 아뢰기를,
"자문 내에 칙사로 올려서 보냈다는 말이 따로 없으므로 빈신(儐臣)이 다투고 고집한 것은 참으로 빈신다운 일을 한 것입니다. 전에 보냈던 어첩(御帖)을 올리지 말라고 하고 접대 의식은 도감으로 하여금 다시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한거원이 나왔을 때도 패문(牌文)이 있었는가?"
하니, 예조 판서 홍명하가 아뢰기를,
"그때에 자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패문에다 열서(列書)를 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모르고 칙사로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좌상 원두표는 아뢰기를,
"칙서 내용에 사신에 관한 일을 제기하고 있으니, 앞으로 틀림없이 대질심문이 있을 것입니다. 심양(瀋陽) 시절에는 간혹 대신이 사문(査問)하는 일은 있었으나 일찍이 대질 심문의 모욕은 없었는데 지금 만약 뜰 가운데서 사문을 당하게 된다면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전일 유황(硫黃) 건으로 붙잡혀 사문을 당할 때 대군(大君)은 의막(依幕)에 있었고 김남중(金南重) 이하는 서연청(西宴廳) 월대(越臺)에 앉아서 물었습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지금 각도가 흉년이어서 진구 정책을 서둘러야 할 때이지만 그래도 각도의 경중 상황에 따라 완급(緩急)을 두어야 할 것인데 듣기로는 영남이 호남보다 더하고 호남은 호서보다 더하기는 하나 모두 신축년 같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당연히 먼저 구제해야 할 곳이 영남인데 호남 대동미를 특지(特旨)로 너무 많이 덜 받게 하셨으니 그 나머지 두 곳도 똑같이 그렇게 재감하고 나면 진구의 밑천이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재감하지 않으면 도리어 균등을 잃게 되어 그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사성 민정중은 아뢰기를,
"영남도 재해를 심하게 당하였으니 균등히 재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두표는 아뢰기를,
"상평청에 쌓여 있는 백금(白金)이 무려 3만 냥이나 됩니다. 금년에 영남에서 바쳐야 할 기인(其人)의 【기인은 땔나무와 숯을 바치는 사람이다.】  가포(價布)와 포보(砲保)의 가포를 감량하는 대신 상평청의 은(銀)을 호조로 이송하여 호조에 비축된 목면(木綿)과 바꾸어서 그 값을 충당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정중은 아뢰기를,
"영남 진정(賑政)은 신축년 예와 똑같이 하고 공물(貢物)은 그 물종(物種) 절반을 견감한 후 진휼청에서 요리하여 방납(防納)하게 하소서. 그리고 상평청 은화(銀貨)를 옮겨다 쓰는 일은 이미 대신과도 논의하였습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진휼청에서는 5천 냥을 쓰려고 하는데, 홍명하가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우선 3천 냥을 보내려고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조 참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경상·강원 두 도의 군대 세초(歲抄)를 흉년으로 인하여 모두 정지하였으니 양호(兩湖)의 재해당한 읍도 그에 준하여 정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재해를 당한 읍의 상번군(上番軍)도 그들 소원에 따라 베를 바치게 하여 굶주린 백성들이 올라오는 폐단을 없애소서."
하자,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병조로서는 유리하지만 만약 뜻밖의 변란이라도 있으면 어느 군대를 쓰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해가 너무 심한 읍은 베를 바치게 한다 해도 정수(定數)는 채워놓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응교 남구만이 아뢰기를,
"지금 천시(天時)고 인사(人事)고 믿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이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몸으로 어찌 하고 싶은 말이 없겠습니까마는 신들이 전일에 아뢰었던 말을 모두 들어주지 않으시고 양사(兩司)가 청한 것도 따르지 않으시니 한갓 말뿐 시행된 것이라곤 없어 도리어 입 다물고 있는 것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양사가 아뢴 것을 상께서는 보통 연거푸 아뢰는 일로만 생각하시는 모양이지만 당장 수성(修省)하시는 길은 양사가 아뢴 대로 따르시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아뢴 내용에는 답하지 않고 다만 이르기를,
"재변이 거듭 닥치는 것이 모두 나의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몹시 부끄럽고 두려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상이 승지 김수흥(金壽興)에게 이르기를,
"그저께 무지개가 나타난 이변이 있었는데도 관상감(觀象監)이 아뢰지 않고 있다. 정원은 왜 그것을 세밀히 살피지 않았는가?"
하자, 수흥이 측후관을 추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두표가 아뢰기를,
"훈련 도감의 군사가 의금부 관리를 구타한 일에 대하여 형조와 훈련 도감이 아뢴 내용이 상반되고 있어 만약 이완(李浣)만을 단독으로 조사하게 한다면 이익한(李翊漢)이 뒷말을 하겠기에 그러한 아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원이 편파적으로 형조 관리를 두둔하여 심지어 신의 그 아룀이 편파적이라고 하면서 믿지를 않으니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그 일은 곡절이 있습니다. 대장이 훈련 도감 단독으로 조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두세 번 말을 전해왔기 때문에 신들이 법부(法府)로 이송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정원이 당초에 중군(中軍) 이하에게도 죄를 내릴 것을 청했던 일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훈련 도감은 체면이 높은 데이고 중군 역시 다른 장관에 비할 바가 아닌데 지금 만약 그 일로 인하여 곤장을 친다면 군대들이 틀림없이 좋찮은 감정을 가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은 추고하지 말고 중군·장관도 죄로 다스리지 말라."
하였다.

 

10월 24일 무오

우부승지 이태연(李泰淵)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뢰기를,
"요즘 훈련 도감과 형조가 말싸움을 하고 있는 건에 대하여 이미 사출(査出)의 명령이 있었고 공론도 모두 법부로 이송하여 조사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 때문에 경솔하게 여쭈었던 것인데, 인견의 명령이 있으신 후 신이 입시하기 위하여 합문(閤門) 밖에 이르렀을 때 대신이 신을 앞으로 불러 체모를 잃었다고 꾸짖고는 물러가라고 했기 때문에 멈칫거리다가 되돌아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사세가 뒤바뀐 상황은 여러 신하가 눈으로 본 바입니다. 더구나 들은 바에 의하면 탑전에서 아뢴 내용 또한 심각하였다고 하니 신으로서는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훈련 도감의 군졸들은 가만히 앉아서 후한 국록을 먹는 자들이다. 모두가 시정의 무뢰배들로 충원된 항오이고 전후 대장들 역시 훈재(勳宰)나 중신(重臣)으로 기세 있는 자들이 했기 때문에 군대 기율은 엄해야 한다는 것, 교만한 병졸은 써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모르고 다만 자기가 영솔하는 자라 하여 편파적으로 두둔할 줄만 알아 교만하고 사나운 습성을 길러냈다. 그리하여 도시를 거침없이 활보하고 조정 선비를 업신여기는 등 간사하고 교활한 짓을 자행하여도 다스릴 자가 없었으니 모든 사람들이 우려하였다. 지금 형조 관리와 싸우고 있는 이 사건만 하더라도 극히 하찮은 사건으로서 조사하여 법대로 다스리자면 하나의 법관(法官)의 일에 불과한 것인데, 대장이 아뢰고 도제조가 면대하고 사리와 체면은 아랑곳없이 주상 앞에서 시끄럽게 굴면서 꼭 교만한 군졸을 두둔하고 형조 관리에다 죄를 씌우기 위하여 결국은 근신(近臣)을 꾸짖고 물리치기까지 하여 국가 체면을 무너뜨렸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10월 25일 기미

햇무리가 지고 좌이(左珥)가 있었으며, 무리 위에 배광(背光)이 있어 안은 적색이었고 바깥은 청색이었다.

 

완산 부부인(完山府夫人) 최씨(崔氏)가 죽었다. 대왕 대비는 춘휘전(春暉殿)에서 거애(擧哀)하였고, 상은 장생전(長生殿)의 관재(棺材)를 특별히 하사했으며, 중사(中使)를 보내 호상(護喪)하게 하였다. 대왕 대비가 온종일 울다가 밤에 갑자기 기절하여 상하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하였고, 주상은 뜰 가운데 나앉아서 친히 약물을 올렸으며 이어 양지당(養志堂) 병문안은 하지 않았다. 상이 동저(東邸)에 있을 때부터 대왕 대비를 자전(慈殿)처럼 섬겨 효성이 지극했고 즉위한 후에는 완산 부부인을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과 다름없이 대우하여 안팎이 감격하고 기뻐하였다.

 

10월 26일 경신

성균관(成均館)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영암(靈巖)의 추자도(楸子島)를 본관에 내려주었는데, 지금 듣건대 감영(監營)에서 영둔전(營屯田)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일의 체모로 볼 때 부당합니다.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본도에 분부하여 특별히 금단(禁斷)하게 하고 종전대로 본관이 조세를 징수하여 선비 양성의 일에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7일 신유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아뢰기를,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창기를 뒤쫓아 밤에 인평위(寅平尉) 집에 들어갔다가 그녀가 도망치자 화가 나서 대문을 두드리며 떠드는 바람에 궁노(宮奴)들과 싸움이 벌어졌다니, 이를 듣고 놀라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를 잡아다가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파추하라고 명하였다가 이튿날 따랐다.

 

좌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뢰기를,
"요즘 공론이, 모두 대장을 추고하도록 청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고 심지어 해방(該房)의 승지가 합문 밖 공좌(公坐) 석상에서 물리침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에 없던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 신의 망발 때문이니, 신이 비록 탁발(擢髮)을 한들 어떻게 신의 죄를 속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 해방을 물리쳐 나가게 한 일은 신이 그 대신을 위하여 애석히 여기는 바입니다. 설사 해방에게 잘못이 있었다 치더라도 함께 탑전에 가서 낱낱이 들어 죄를 논하여도 안 될 것이 없는 일인데 어떻게 공좌 석상에서 꾸짖고 물리쳐 마치 노예 다루듯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신이 한 번 입을 열자 흔단이 뒤따른 것이니, 신의 직을 삭탈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8일 임술

도승지        유계(兪棨), 우승지        오정위(吳挺緯), 좌부승지        이경억(李慶億), 동부승지        김수흥(金壽興) 등이 이태연(李泰淵)과 일을 함께 했다 하여 소를 올려 사직하고 아뢰기를,
"본원이 훈련 도감의 대장을 추고하도록 청한 것은 사실에 따라 그를 경책(警責)하자는 뜻에 불과하고 법부(法府)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자는 것 역시 피차간의 사세가 난처해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로부터 군대가 한데 모이면 반드시 횡포하고 난리의 발판 구실을 하는 걱정이 있기 때문에, 비록 옛 지사(智士)·양장(良將)이라도 언제나 규율을 엄하고 분명히 하여 지나칠 정도로 용의 주도한 방비를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혹 그렇게 하지 못한 자는 항상 끝에 가서 제압하기 어려운 상황을 초래하였으니 역대 귀감(龜鑑)이 매우 분명합니다.
지금 교만한 군졸들이 금부 관리를 구박하고 장군의 명령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비록 하찮은 일이지만 그것을 키워가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대장이라는 자가 책임을 느끼고 자신을 탓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방자하게 의견을 아뢰고 형조와 곡직(曲直)을 겨루면서 군졸을 위해 그들 입장을 해명하여, 대신이 탑전에서 의견을 아뢰어 추감(推勘) 명령을 도로 거두어들이게 만들었으니 신들은 삼가 애석히 여기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대신의 가책(呵責)도 그 정도에까지 이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본원이 후설(喉舌)의 위치에 있으면서 비록 임금 명령이라도 그대로 따를 수 없는 경우이면 쟁집(爭執)·복역(覆逆)하는 것이 바로 맡은 바 직책인데, 만약 대신이 한 일이라 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면 그 어찌 후일 끝없는 폐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하였다.

 

양사가 청대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대사간 유철(兪㯙)이 아뢰기를,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며 마음을 바로하고 덕(德)을 닦는다는 것이 비록 진부한 말이지만 성상께서 그 일을 실현하기에 힘쓰신다면 어찌 하늘의 성냄인들 돌릴 수가 없겠습니까."
하였고, 장령 김익렴(金益廉)은 아뢰기를,
"하늘의 재변도 사실은 사람이 하기에 따라 나타나는 것인데, 나랏일이 갈수록 더욱 시들해지고 있고 위아래의 뜻이 서로 미쁨을 보이지 못하여 양사(兩司)가 그렇게 오랜 기간을 쟁집하고 있는데도 성상께서는 멀리하기만 하시니 신으로서는 삼가 민망합니다."
하였다. 유철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번번이 ‘윤허하지 않는다.’·‘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는 하교만 하시는데, 존망(存亡)의 동기에 상관이 없다고 여기셔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백성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몰라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신들로서는 사실 성상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을 전일 등대 때 이미 다 말하였는데도 신하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조종조에서 일찍이 내려주셨던 것들이 내 몸에 이르러 모두 혁파되어 내 마음이 불안하다. 바다를 떼어받은 일에 있어서는 이미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도록 하였으나, 어찌 산과 바다의 떼어받은 것들을 모조리 혁파해야지만 마음에 후련하겠는가."
하였다. 정언 이광직이 아뢰기를,
"국가 일이란 폐단이 발생하면 비록 조종 법제라도 그것만 굳게 지키고 경장(更張)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여러 궁가의 소소한 득실이겠습니까."
하니, 장령 이무가 아뢰기를,
"여러 궁가의 장노(庄奴)들에게 잡역을 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도 물론 폐단이기는 하지만 모입(募入)을 핑계로 부역을 도피하기 위한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은 그 피해가 더욱 큽니다."
하였다. 익렴이 아뢰기를,
"동일시해야 하는 성상의 인자하신 마음이 어찌 피차가 있겠습니까마는, 언제나 궁가라면 마치 사인(私人)처럼 보시고 지나치게 비호하고 편파적으로 두둔하기를 그렇게까지 하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민망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私)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잡역을 시키지 말라.’ 한 것은 유래가 오래된 일이다."
하였다. 양사가 뒤이어 여러 궁가의 폐단에 관하여 극구 아뢰었으나 상이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익렴이 아뢰기를,
"옛 사람들 중에 재해로 인하여 경계의 말을 올렸던 이들은 모두 다 인재를 거두어들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난 계사년에도 암탉이 수컷으로 변한 이변이 있었는데 그때 여러 신하의 아룀에 따라 대신 및 2품 이상으로 하여금 각기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도 선왕조에서 이미 행했던 전례대로 2품 이상 삼사 관원으로 하여금 각기 인재를 추천하여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재이가 아니더라도 인재 수용은 가장 급선무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재가 옛날만 못하다."
하였다. 익렴이 아뢰기를,
"하늘이 한 시대의 인재를 내어 한 시대의 일을 충분히 마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상 혼자서 어떻게 만기(萬機)를 다 움직이시겠습니까. 반드시 인재를 얻어야지만 함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니 인재 수용이 어찌 오늘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 말이 옳다. 각기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익렴이 또 아뢰기를,
"요즘 대신들은 전혀 나랏일을 담당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 한 가지 일로만 말하더라도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선왕조 시절에는 특별히 골라서 보냈었는데 근래에는 대부분 인재를 고르지도 않아 군정(軍政)이 태만해지고 군대도 쓸모가 없다고 하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지난번 남한 산성 군대는 어사(御史)를 보내 점열(點閱)한 바 있었으니 수원도 어사로 하여금 한 차례 점열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객사(客使)가 지나간 뒤에 내보내서 점열하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광직이 아뢰기를,
"하늘은 임금을 사랑하시니 재이를 내리는 것이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보다 훌륭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닐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옛 사람이 이르기를 ‘혈기가 왕성할 때는 여색을 경계하라.’ 하였는데 그야말로 지당한 말입니다. 소신은 어리석고 망령스러워 성상을 위하여 그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감히 함부로 아룁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그대가 매우 좋은 말을 하였다."
하였다. 광직이 또 아뢰기를,
"신이 마음에 있는 것이 있어 부득불 다 아뢰어야겠습니다. 삼가 듣건대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하여 종실(宗室)·부마(駙馬) 등이 절제없이 출입하고, 또 듣건대 지난날 부마와 왕자(王子)·왕손(王孫)을 금중(禁中)에 불러 모이게 하고 여러 궁가의 기악(妓樂)이 뒤따라 들어갔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이는 재이를 당하여 수성하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주와 부마는 가끔 들어오고 있고 혹시 구사(丘史) 무리들이 공주를 따라 출입하는 일은 있으나 기악을 베푼 일은 없다."
하였다. 광직이 아뢰기를,
"신이 잘못 듣고 망령되이 아뢰어 너무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은 말이 있어 그대로 아뢴 것인데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하였다. 광직이 또 아뢰기를,
"부마가 궁중에서 유숙(留宿)하는 때가 많다고 하는데 혹 그렇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조 시절에는 부마 출입이 잦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자주 드나들지 않는다."
하였다. 익렴 등이 아뢰기를,
"경상 감사 장계를 보건대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정옥(李廷沃)이 관왜(館倭)들이 소란을 피울 때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고 모욕적인 행동을 하여 나라를 매우 욕되게 했다니 파출로 그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를 잡아들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계로 보아서는 잡아들여 국문해야 할 죄는 별로 없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즘 각 아문들이 국가 체통은 생각지 않고 각기 자기 관하(管下)에게만 사정을 두어 서로 관계된 일이 있으면 우선 상대를 이기려고만 노력하여 끝내는 천청(天聽)까지 번거롭게 만들면서 마치 송사라도 하듯 하는데, 이 역시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기강이 서 있지 않은 소치입니다. 이완(李浣)은 대장의 몸으로서 군졸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그렇게 해괴한 일이 있게 하고서도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고 도리어 해명만 하고 있으니, 그렇게 교만하고 방자한 습성을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바라건대 그를 파추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잘못이 대장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중군(中軍)이 자기 부하를 단속하지 못한 죄도 대장과 다를 바 없으니, 정부현(鄭傅賢)도 파직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형조 참판 이익한(李翊漢)도 서로 말다툼을 하여 마치 송사라도 하듯 하였으니 일의 체면으로 보아 부당한 처사였습니다. 그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도록 하였으니 추고할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군 명령도 아랑곳않고 더욱 방자하게 소란을 피운다면 그는 곧 난졸(亂卒)로서 군법(軍法)으로 비추어 볼 때 그에 해당한 법이 있을 것이므로 아무렇게나 추치하여서는 안 됩니다. 앞장섰던 군사 최경필(崔景弼)은 법에 의하여 처단하고, 그 나머지 무리를 지어 난을 일으킨 사람들과 형조의 서리(書吏)·사령(使令) 등 훈련 도감의 하인을 난타한 자들은 모두 담당관에게 붙여 법대로 죄를 내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최경필은 지금 이미 수감되었고 그 밖의 난을 일으킨 군졸 및 형조의 하인 등은 아뢴 대로 죄를 부과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돌다리를 개수한 후 화주(化主) 무리들이 하마비(下馬碑)를 새겨 세웠다고 하는데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그를 철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윤우정(尹遇丁)이 아뢰기를,
"중외의 죄수들을 담당 아문과 각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너그럽게 처결하게 하여 특별히 사면의 은전을 베푸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겨우 심리를 거쳤으니 현재 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 한하여 즉시 너그럽게 처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이숙달(李叔達)이 아뢰기를,
"교양관(敎養官)을 두고 있으나 각도마다 모두 실제 효과가 없고 함경 남도는 더욱 심합니다. 교양관이라는 자들이 문지(門地)와 인망(人望)이 원래 가볍고 권과(勸課)도 전폐하고 있으니, 지금 만약 거산(居山)·수성(輸城) 등지의 예에 따라 고산 찰방(高山察訪)을 교양관으로 겸직시켜 순회하면서 권과하게 하면 실효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당 아문에 분부하라."
하였다.

 

10월 29일 계해

상이 영상·좌상을 명초하여 복상(卜相)하도록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빈청(賓廳)에 이르러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고 와보니 좌상 원두표가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는데 틀림없이 훈련 도감 문제로 불안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신 혼자서는 감히 복상을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퉁 저러쿵 하는 말을 혐의롭게 생각할 것은 없다."
하고, 다시 사관을 보내 유지를 전하고 또 명초하였다.

 

좌상 원두표가 차자를 올려 자책하고 이어 훈련 도감 문제를 진달하며 직명(職名)을 삭제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렇게 답하였다.
"금방 사관이 가는 길에 내 뜻을 전하였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김석주(金錫胄)를 정언으로, 허적(許積)을 겸 판의금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승지로,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김수항(金壽恒)을 형조 판서로, 노정(盧錠)을 부산 첨사로, 홍명하(洪命夏)를 우의정으로 삼았다.
명하는 젊은 시절부터 명망이 있었고 늦게야 과거에 급제하여 급속히 청요(淸要)를 역임하고 결국 공재(公宰)에까지 올랐는데, 청백하고 근신한 그 한 기개와 절조가 늙도록 변함이 없었으며 착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선비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여는 있는 정성을 다해 조신(朝臣)들 중에 그와 겨룰 만한 자가 드물었기 때문에 양조(兩朝)에 걸쳐 사랑과 예우가 남달리 융숭하였고 여론도 촉망이 대단한 편이었다. 그러나 재능과 식견은 부족하면서 세무(世務)를 담당하기 좋아한 것이 그의 병폐였는데, 이때 와서 대배(大拜)를 한 것이다.

 

장령 김익렴이 수성(修省)의 뜻이 담긴 잠(箴)을 올렸는데,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면서 가상히 여기고 호피(虎皮) 한 장을 특별히 하사하여 그를 포상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