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4년 1663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3.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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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을축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이전에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을 잡아다 문초하자고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식이 창기에게 미혹되어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우를 보내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가 패악한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식이 수죄(首罪)이니 잡아다 문초하자고 아뢰는 일이 안 될 것은 없으나, 직접 가서 소란을 피운 자는 식의 아우들인 영은군(靈恩君) 이함(李涵)과 영신군(靈愼君) 이형(李濙)이었습니다. 신들이 일을 논하면서 잘못이 있었으니 어찌 감히 편안히 그대로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영풍군 식이 창기에게 미혹되어 있어 그 두 아우를 보냈다가 패악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식은 당연히 수죄가 되어야 하고, 그 아우 함과 형도 공주의 집에서 소란을 피운 죄를 범했으니, 그들만 죄를 모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모두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갖가지 역(役) 가운데 응사(鷹師)089)  의 역이 가장 고달픈 일입니다. 봄 석 달 및 겨울 석 달 동안에 응역(應役)하는 응사들이 죽을 땅으로 가는 것처럼 고달프게 생각하고 있는데도 사옹원에서는 출궁한 공주·옹주에게까지 매일 꿩을 제공하고 있어 조종조의 구례에 크게 어긋납니다. 선조 때에 어쩌다 혁파하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했던 것인데, 이 또한 선조의 본뜻이 아닙니다. 국법도 지극히 중하고 방한(防限)도 엄격한 것이니 여러 공주·옹주의 집에 응사가 꿩을 제공하는 예를 혁파하고, 응사가 한 해에 두 번씩이나 응역하고 있는 폐단도 해조로 하여금 좋은 쪽을 따라 변통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전례(典例)를 고찰하여 처치하도록 하였는데, 나중에는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11월 2일 병인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서필원(徐必遠)의 장황한 공박을 받은 일로 글을 올려 파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미 나의 생각을 차자에 대한 비답에 모두 유시하였으니 경은 필시 나의 생각을 알았을 터인데, 지금 도리어 이렇게까지 인혐하니 내가 몹시 부끄럽다. 번거롭게 하지 말고 어서 출사하여 도를 논하라."

 

경성 판관(鏡城判官) 곽제화(郭齊華)가 월과(月課)090)  를 세 차례 연거푸 지어내지 않아 국법상 파직에 해당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곽제화를 외직에 보임한 것이 특명에서 나온 것이므로, 의리상 ‘일부러 범법하여 파직되기를 바라는 행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변방 수령으로 나가기를 꺼린 죄목’에 적용하라고 명하여 본읍에 충군하였다.

 

승지 김수흥이 아뢰기를,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게 해수(海水)와 암석(巖石)을 입안(立案)하여 절수한 곳을 조사하여 밝혀내게 한 일이야말로 성상의 훌륭하신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남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도내의 바다와 인접한 고을에 절수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고 치계한 것은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살피지 않은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고, 해조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품처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1월 3일 정묘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는데, 사간 민유중도 청대하여 함께 입시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전후 북경에 왕래하면서 금법을 범한 사례는 모두 역배(譯輩)들의 소행이었는데 이번의 사행에 생긴 일은 자세하게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판부사 정유성(鄭維城)의 말에 의하면,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 이번에도 역배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형장(李馨長)이 주벌을 받은 이후로 역배들이 제법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더니 근래에 와서는 점차 해이해져 결국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수역배(首譯輩)를 법에 따라 중하게 다스리고, 앞으로 금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엄하게 치죄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부터 중벌로 다스리겠다는 뜻을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대사성 민정중이 아뢰기를,
"얼마 전에 대신(臺臣)이, 제언(堤堰)에 고척(古尺)을 표준으로 사용하는 것은 폐단이 된다는 이유로 변통하기를 계청하였는데, 그 일은 매우 곤란합니다. 물을 저장하려면 백성들의 전토가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되며, 고척을 사용하지 않고 강제로 점유한 백성들의 전토를 모두 출급할 경우 어디에다 물을 저장하겠습니까."
하였고, 좌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옛날에 제방을 쌓아 올리면서 어찌 지금의 작은 자를 사용했겠습니까. 대신이 아뢴 말은 따를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민정중이 아뢰기를,
"진정(賑政)을 오는 봄부터 시작해야 하니, 삼남 감사 가운데 그 전에 혹시 임기가 만료된 자가 있으면 그대로 재임시켜 진정을 조치하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봄이 되기 전에 임기가 끝나는 자는 어느 도의 감사인가?"
하니, 민정중이 대답하기를,
"충청·경상 양도의 감사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진정이 완전히 끝날 동안에는 잉임(仍任)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대사간 남용익이 전 부산 첨사 이정옥(李廷沃)을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자고 거듭 아뢰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근일 전형(銓衡)에 청탁이 꽤 오가고 있습니다. 도정(都政)에 임해 주의할 무렵이면 정관(政官)이 ‘아무개는 아무 관직을 바란다.’고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정석에 사사로이 편지가 오가기도 합니다. 빈 관직이 하나라도 있기만 하면 모두들 벌써 점을 찍는 형편입니다. 당초 입사하는 자의 관직도 정밀히 선발하지 않으니 만일 책려하지 않으면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이조의 당상들을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민유중이 아뢰기를,
"천재와 시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오늘날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5, 6년 동안 기근이 연거푸 발생하여 생명체가 다 죽어가고 있으니 위망의 화가 이보다 다급한 것이 없고, 그 밖에 놀라운 변고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이번에 또 동뢰(冬雷)의 변괴가 발생하였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겨울에 천둥이 치면 다음해에 걱정이 생기기 마련이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 어찌 재앙을 당할까 걱정하는 마음이 없으시겠습니까만, 정사를 보시는 동안에 정신을 가다듬어 분발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평상시 평안하던 때와 다름없이 지내고 있으니 신은 삼가 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임금이나 탕임금이 재변을 만났을 때에도 반드시 자기 자신을 반성하였는데, 하물며 덕이 요임금이나 탕임금만 못한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옛 말에 ‘임금은 하늘을 아비처럼 섬기고 백성을 자식처럼 돌본다.’고 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 위로 자전을 받들어 모시고 아래로 원자를 보살피고 계시니 효도하는 마음과 귀여워하는 마음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만, 신은 전하께서 하늘 섬기기를 과연 자전을 섬기듯이 하셨는지와 전하께서 백성 걱정하시기를 과연 원자를 사랑하는 만큼 절실하셨는지는 감히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 점을 스스로 헤아려 보신다면, 하늘의 노여움과 백성의 원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변이 일어난 것은 모두 나의 덕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어찌 감히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구휼함에 있어 성의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하늘에 대응하는 방법은 다른 방법이 없고 오직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에 있습니다. 백성들을 보살피려면 백성들에게 해로움이 되는 것들을 모두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신들이 논한, 여러 궁가에 산과 바다를 떼어 준 폐해야말로 오늘날 백성들의 커다란 고통이니 시원스럽게 혁파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선조 때 내려준 것이라고 핑계하면서 아직까지도 허락하지 않으시니 강제로 점유하는 폐단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어 이익은 사문(私門)에 돌아가고 원망만 국가에 쏠리게 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만약 지금 혁파하지 않으시면 결국엔 틀림없이 나라가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화전(火田)과 해수(海水)는 국가가 당연히 금지해야 할 것이므로 조사해내게 하였다. 시장(柴場)이나 어장(漁場)은 어찌 반드시 모두 혁파해야 되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화전과 해수를 조사해 내게 하셨으니 시장과 어장도 일률적으로 똑같이 혁파해야 되는데, 지금 그 폐단이 작은 것만 제거하고 큰 것은 남겨 두어 허울만 내세울 뿐 알맹이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신들이 혁파하자고 청한 뜻이겠습니까. 하지만 신이 크게 우려하는 것은 이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상의 뜻이 확립되지 않아 심원한 생각이 없고 고식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점이 염려됩니다. 사람은 의지가 있고 난 뒤에 그 일이 따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임금들은 왕도를 실시하고자 하면 왕천하를 하였고 패도를 실시하고자 하면 패제후를 하였으니 사업의 크고 작은 것은 그 의지의 고하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전하께서는 분발하여 큰일을 하려는 기상이 없으시니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또 전하께서는 강건함이 부족하여 크고 작은 아뢴 일에 대해서 그 득실을 제대로 살피지 아니하고 덤덤하게 대처하고 계십니다. 기강이 서지 않고 풍속이 무너진 것은 조정의 하는 일이 볼품없고 진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렇게 된 것일 따름입니다.
또 사치의 해독은 천재보다도 심한 것이니 금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여항간의 의복이나 음식에 전에 없던 제도가 유행하게 되면 반드시 궐내의 제도라고들 말하고 있으니,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절약과 검소함으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하지 못해 그런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말한 얘기들은 모두 못난 나의 잘못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민유중이 또 아뢰기를,
"을미년의 추쇄(推刷)는 당초부터 상세하지 못하여 혹은 허위로 기록된 자도 있고 혹은 의탁할 데가 없는데 보수(保授)091)  된 자도 있었습니다. 그 뒤에 허위로 기록된 자들은 징공(徵貢)할 데가 없고 의탁할 곳이 없는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찾을 수가 없으므로 인족(隣族)에게까지 침해하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아직 거둬들이지 못한 것들을 탕척해주고 내년 가을을 기다려 허실을 바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탕척해주면 허위의 폐단이 틀림없이 많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허위의 폐단이 염려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만, 징공할 수 없다면 탕척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실속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탕척을 특별히 명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조사해 내라."
하였다. 민유중이 또 아뢰기를,
"전패(殿牌)092)  를 분실한 고을에 대해 10년을 기한으로 정해 혁파하였기 때문에, 지금 없어지게 된 고을이 매우 많습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흉년을 구제하는 정책도 전일하지 못하니, 간사한 백성들이 난을 일으킨 것으로, 그들의 속셈은 단지 자기 고을의 수령을 축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요구대로 고을을 없앤다면 그야말로 그들의 술수에 빠지는 셈이니, 대신에게 물어서 변통해야 합니다."
하였다. 대신 및 여러 신하들이 모두 혁파하지 않아야 옳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부터 전패를 분실한 고을에 대해서는 모두 불문에 붙이고, 이미 혁파된 고을은 그 햇수를 기록하여 들여오라."
하였다. 민유중이 또 아뢰기를,
"북로(北路)는 서울과 멀리 떨어져 왕화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도 안에 겨우 약간의 무과 출신만 있는데 그것도 모두 경신년에 실시한 만과(萬科)093)  에 선발된 자들입니다. 대저 북로에도 쓸 만한 인재들이 많이 있으나 몹시 먼 곳에 위치하여 스스로 과거나 사환(仕宦)의 일에 유념하고 서울에 올라와 관광(觀光)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마땅히 별도로 근신을 보내서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선발하므로써 인재를 수습하고 민심을 위로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전례가 있느냐고 물었다. 정태화가 있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년 봄에 해조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유중이 산해(山海)를 절수한 일 및 수진(壽進)·어의(於義) 두 궁(宮)의 장노(庄奴)에 관한 일을 누누이 진달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자 인피하고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언책이 있는 자는 그 말대로 되지 않으면 벼슬에서 떠나야 한다고 하는데, 신은 직분을 잃은 것이 많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고, 남용익과 대사헌 유철(兪㯙)도 이 일로 인피하였으나,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방금 양사가 논계한 것은 모두 나라의 체면을 크게 손상하고 있는 사안인데도, 매번 ‘윤허하지 않는다.’·‘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말로 수응하는 문자를 삼으셨습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성상께서 이제부터는 크게 경동하고 크게 분발하시어 성실의 도리를 한껏 쏟으시어 수성의 근본을 삼고, 자주 신료를 접견하시되 상규(常規)에 구애될 것 없이 한 가정의 부자처럼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모조리 말하도록 인도하시어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사안까지도 철저히 시행될 수 있게 하신다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에 있어 모두 실효가 있게 되고 형식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야말로 재앙을 전환하여 상서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기회입니다.
그리고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수령을 선발할 때 더욱 신중을 기하도록 하되, 비록 시종에 재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외임으로 순서대로 내보내면 열읍을 강력히 다스릴 수 있고 또 백성들의 관심사를 익숙하게 알게 되어 문학(文學)과 전곡(錢穀)이 둘로 동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치적이 눈에 뛰는 자가 있으면 그 만기가 꼭 차지 않더라도 별도로 승진시킴으로써 포상·장려하는 의도를 한(漢)나라 때의 고사처럼 보이신다면, 함께 다스리는 효과를 이룩할 수 있고 백성들의 곤경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입니다.
또 군정에 유념하시어 곤수와 수령들을, 군오가 정예로운지의 여부와 기계(器械)가 튼튼한지의 여부를 가지고 출척(黜陟)을 단행하여 권장하고 징계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위급한 일이 생길 때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청대(請對)하고 나서도 물러나 생각한 일을 아뢰니, 국사를 걱정하고 나를 사랑하는 정성을 볼 수 있다.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긴다. 아뢴 일들은 유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조의 세 당상을 논박하니 체직되었다. 상이 고례를 물어 대신으로 하여금 바로 의망하게 하여 김수항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4일 무진

우의정 홍명하가 세 차례 글을 올려 사직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동지사 조형(趙珩), 부사 권령(權坽), 서장관 정창도(丁昌燾)가 청나라에 갔다.

 

응교 남구만 등이 양사를 모두 출사토록 명하라고 청하고 아뢰기를,
"자식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간언을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결 더 공경하고 효도하며, 어버이의 마음이 기뻐하면 다시 간하고, 세 번 간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울부짖으면서 뒤를 따라 그 어버이의 마음을 감동시킨 후에야 그만두는 것인데 신하가 임금을 대하는 경우에도 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 양사의 여러 신하들은 오직 성의를 다시 쌓아 반드시 윤허하시기를 기다려야지, 바로 사퇴하여 국체를 다시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응교 남구만 등이 상차하기를,
"《역(易)》 진(震)괘의 상(象)에 ‘거듭되는 천둥이 진(震)이니 군자는 이 괘상(卦象)을 보고 공구 수성한다.’고 했는데, 공구는 마음 속으로 하늘의 위엄에 경건하게 대하는 것이고, 수성은 외면적으로 인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임금이 재앙을 만나 공구하는 도리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반드시 수성하는 방법에서 살피곤 했는데, 수성이라는 것도 반드시 그 분야가 있습니다. 어진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사람을 내보낸다거나, 덕을 숭상하고 형벌을 완화시킨다거나, 세금을 경감하고 부역을 줄인다거나, 원통한 죄인을 석방하고 억울한 사정을 설욕시켜 준다거나, 사욕을 막고 일의 결정을 중의에 구하며,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없앤다거나 하는 것을 포함하여 위로는 하늘의 뜻에 응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들이 모두 그 일이었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여러 일들을 내버려두고 거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걱정하는 마음이 초조하여 한시나마 편안하게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구하는 데 단지 스스로 걱정만 끼치게 될 뿐이니, 재앙을 무마시키는 방법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혹은 그 말단에 속하는 일에만 나아가 약간의 처분을 가하는 것을 응문의 도구로 생각하고, 나라의 커다란 해로움이 되거나 백성의 커다란 고통이 되고 있어서 안위가 결판나고 치란이 나뉘어지는 일에 대해서조차 그대로 내버려두고 변통함이 없다면, 하늘의 경계를 대응하는 데에 성의가 없음이 더욱 드러나니 또한 이 어찌 수성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이번에 양사의 제신이 똑같은 목소리로 청대하여 일치된 내용으로 아뢴 일이 실은 절수(折受)와 둔장(屯庄)에 있는데, 성상의 뜻은 오래전에 내려준 것을 이제야 모조리 환수하게 되는 것을 어려운 일로 여기고 계십니다. 신들이 그 일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밝혀보겠습니다.
오늘날 국가가 지키고 있는 법은 《대전(大典)》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대전》에 ‘제도의 염분·어전은 등급을 나눠 장적(帳籍)을 만들어서 본조에 간직하고, 장적을 허위로 기재하여 사사로이 점유하는 자는 장(杖)을 치고 관에서 몰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이나 바다에서 생기는 이익이 사가(私家)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나라의 법제임이 틀림없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시행해야 되는 법규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이 규정을 오래된 옛날의 일이라고 하시더라도, 유독 우리 선왕께서 끼쳐주신 뜻은 기억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선왕께서 기해년 봄에 제도의 감사에게 명령하여 각지의 공사(公私) 염분과 어전들을 모두 조사하도록 하셨으니, 장차 대대적으로 개정을 가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신이 듣기로는, 그뒤에 각지에서 조사한 장적을 누차에 걸쳐 올리는 대로 수없이 고치곤 하다가 마지막에 취한 처치는 과거의 틀로 끝내버려 우리 선왕의 훌륭하신 의도가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절수 등의 일은 비록 조종의 성헌(成憲)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변통하여 누적된 폐단을 제거해야 되는 것이니, 하물며 사사로이 점유하여 죄가 있는 것들이야 어련하겠으며, 비록 우리 선왕이 세우신 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에 와서는 또한 경장하여 백성의 생활을 해결해야 되는데 더구나 말년의 유의(遺意)가 이처럼 정녕하고 간절했던 것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조종의 제도도 준행하지 못하시고 선왕의 유지도 계승하지 못하셨는데 유독 난리를 겪은 후 구차하게 계속되어 온 규정만을 취하여 변통할 줄 모르고 고집하시는 태도가 고치지 못하는 법전을 고수하는 듯한 감이 있어 문제되는 일을 자꾸 확대시키고 되는 대로 내맡기어 나라 세금의 태반을 가만히 앉아 잃으면서도 걱정하신 적이 없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지금 이 일에 대해 시정하지 못하고 만다면, 신들은 오늘날 재앙을 만나 전하께서 공구하시는 모습을 장차 어디서 보겠으며 수성을 장차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시어 용단을 내리심으로써 둘러쌓인 사사로운 생각을 끊고 여러 해 쌓여온 악폐를 씻어내는 뜻에서, 모든 산전(山田)·해택(海澤) 가운데 문서를 만들어 떼어 준 곳들과 둔장(屯庄)의 모민(募民)에게는 잡역을 부과하지 못한다는 조항 따위를 한꺼번에 모두 혁파하시어 전하의 정대하신 덕을 보임으로써 조정의 공명정대한 다스림을 밝히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계속하여 경연을 오랫동안 폐한 잘못을 아뢰었다. 그 이튿날에도 남구만이 입대하여 차자의 뜻을 일일이 아뢰었는데, 상이 조종조 때에 내려준 것은 그대로 놔두고 이제부터 새로 떼어주는 것은 금지하겠다는 뜻으로 타이르면서 끝내 듣지 않았다.
산림과 천택은, 오랜 옛날에는 우형(虞衡)094)  이 관장하였는데, 어염(魚鹽)에서 생기는 이익의 경우는 관중(管仲)이 제(齊)나라를 풍요하게 만든 기반이었으며, 한(漢)나라 때 제도에도 수형 소부(水衡少府)095)  에 귀속시킴으로써 국가의 재용에 보탰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우형의 직임도 활용하지 못했고, 어염에서 산출되는 이익을 모조리 사실(私室)에 돌아가게 함으로써 산림의 경우 불을 질러서 개간한 것까지도 모두 제궁(諸宮)의 둔장을 설치하는 데로 들어가고, 바다에 인접한 어염의 경우는 모두 세력자에게 떼어주는 명목으로 들어갔다. 시폐를 논의하는 자들은 예외없이 이런 문제를 지적하였으니 그야말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커다란 폐단이었다. 양사가 1년이 넘게 쟁집하였지만 상은 견제(牽制)로 끝내면서 용단을 못 내렸다. 간혹 처음에는 혁파하였다가도 끝내는 예전처럼 그대로 두어 누적되는 폐단이 나날이 불어나고 백성의 산업이 갈수록 궁해지게 되어, 양민은 갈수록 줄어들고 공법(公法)은 시행되지 않았으니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

 

11월 5일 기사

홍처대(洪處大)를 형조 참의로, 이태연(李泰淵)을 병조 참의로, 최상익(崔商翼)을 주서로, 이민적(李敏迪)을 집의로,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유계(兪棨)를 이조 참판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이조 참의로, 여이재(呂爾載)를 형조 판서로,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김시진(金始振)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 이조 판서 윤강(尹絳)이 논핵을 받은 뒤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는 누차 불러도 오지 않으니, 시의(時議)가 모두 그가 만절(晩節)을 제대로 보전하는 점을 좋게 보았다.

 

11월 6일 경오

상이 모화관에 나아가 청사(淸使)를 영접하고, 막차(幕次)에서 영상 정태화, 좌상 원두표, 우상 홍명하, 원접사 허적을 인견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묻기를,
"이일선(一善)이 오는 도중에 일을 만나면 화를 낸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처음에는 대우를 칙사(勅使)로 해주지 않은 점에 대해 화를 냈고, 홍제원(弘濟院)에 와서는 의자를 마련하지 않은 일로 무척 화를 냈습니다. 그의 속셈을 들여다보니 뇌물을 주겠다는 약속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우리들은 모른 척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일마다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늘 ‘우상은 직책이 높고 나이가 많으니 직임을 바꿔주면 민망스럽지 않겠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말하는 속셈이 등급을 올려 뇌물을 요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관반(館伴)이 접대에 익숙하지 못하니, 저 사람은 고려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원두표가 아뢰기를,
"허적을 대신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영칙(迎勅)을 마치고 돈의문(敦義門)을 통해 서울에 들어와 인정전(仁政殿)의 막차에 이르니, 승지 오정위(吳挺緯)가 나아가 아뢰기를,
"일선이 가지고 온 자문(咨文)의 내용에, 의자에 앉도록 해 달라는 얘기가 쓰여 있는데, 접견하실 때 의자에 앉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승지가 영상에게 가서 물어보라."
하였다. 오정위가 영상이 한 말로 들어와 아뢰기를,
"의자를 마련해 주는 것이 비록 참람된 일이기는 하지만 일선이 황제의 명이라고 핑계대니, 특별히 의자를 마련토록 해주면 일선이 반드시 기뻐할 것이고 그가 만약 사양한다면 강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두 사신의 왼쪽에 의자를 마련하되 약간 뒷쪽에 두도록 하였다. 상이 이미 환궁하고 나서 청사를 접견하여 서로 읍(揖)하자 일선도 나란히 서서 상과 마주한 채 읍하였고, 청사가 의자로 가서 앉으니 일선은 또 상의 명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곧장 의자에 앉았으며 모든 행동거지를 정사(正使)와 똑같게 하면서 감히 감당치 못하겠노라는 기색이 없으니, 이를 본 여러 신하들은 분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수찬        김만균(金萬均)이 자기 조모가 강도(江都)의 난리통에 죽었으니 청사가 우리 나라에 온 때에 근시로서 출입을 배종(陪從)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를 올리고 들어와 아뢰었다. 승지        서필원이 밖으로부터 원중(院中)에 들어와 아뢰기를,
"김만균의 상소가 이미 봉입(捧入)되긴 하였으나, 정축년096)                  의 난리 때부터 부모가 화를 입은 사람이 아닌 경우는 사면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경우에는 자식된 이의 정분을 차마 강제로 다그칠 수가 없지만 그 외의 경우는 부모에 비해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일 이 사직소를 봉입한다고 하면, 종전에 이러한 정세가 있으나 감히 소를 올리지 못했던 자들이 모두 장차 서로 뒤를 이어 사면을 할 것이니, 만약 그 청을 한번 들어주게 되면 행공(行公)하는 자가 얼마 남지 않을 것입니다.
김만균의 상소를 도로 내주어 그로 하여금 행공하도록 하고, 앞으로는 일이 부모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아니면 사직하는 상소문을 봉입하지 못하게 하여 후일의 전례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서필원은 또 원중에서 김만균의 사직소가 잘못 되었음을 큰 소리로 말하고는 봉입한 승지를 꾸짖으니, 이경억(李慶億)과 김수흥(金壽興)이 동료의 논의가 몹시 준엄하다는 이유로 대죄하였다.

 

사간 민유중이 부름을 받고 나오지 않은 채 인피하기를,
"신이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와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를 탑전에 빠짐없이 아뢰어 스스로 논핵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천도(天道)는 알기가 어렵고 인사(人事)는 쉽게 볼 수 있으므로 하늘을 잘 살피는 자는 반드시 사람에게서 증험을 찾습니다. 오늘날 백성이 생업을 잃은데다 기근까지 겹쳤는데도 산과 바다에서 산출되는 이익은 온통 사문(私門)에 들어가고 있으니 걱정하고 원망하는 분위기가 위로 하늘까지 범하고 있습니다.
산과 바다를 떼어준 일은 조종조(祖宗朝)의 유서깊은 법전(法典)이 아니라, 임진년의 난리 후 토지가 개간되지 않고 세입이 줄어들어 예전의 직전(職田)과 상록(常祿)을 모두 회복할 수 없었던 상황에 기인해서 한때 내려주었던 것으로 부득이해서 나온 계책이었는데, 조정이 여러 차례 거듭되는 동안 그대로 답습하면서 고치지 않고 있다가 성고(聖考)의 말년에 스스로 신충(宸衷)을 결단하여 조사해서 제출하라고 특별히 명함으로써, 바로잡는 일을 대대적으로 행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성취되기도 전에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오늘날 전하께서 계승하여 성취해야 하는 것은 우리 선왕의 유지(遺志)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제멋대로 점유하는 폐단과 깎아 베어내는 해독이 해마다 늘어나는 정도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이제 만약 오로지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왕자와 공주·옹주는 각기 직차(職次)로서 그 직전(職田)만 받도록 하고 그 밖에 산이나 바다를 떼어준 곳과 근거없고 불법적인 일을 모조리 혁파하게 한다면, 한핏줄을 넉넉하게 해주고 싶은 정리(情理)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왕자(王者)는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는 정치 윤리에도 빛남이 있을 것이며, 고질적인 폐단을 제거하고 커다란 고통을 없앰으로써 백성들의 소망에 크게 부응하는 것 또한 얼마나 크겠습니까.
신은 정말 대각(臺閣)에 들어갈 면목도 없는데다 이미 신하로서 임금의 명을 받으면 지체하지 말아야 되는 의리도 범했으니, 신을 삭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했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체직되었다.

 

11월 7일 신미

대사간 김시진(金始振), 정언 이광직(李光稷)·김석주(金錫胄)가 앞서의 수진(壽進)·어의(於義) 두 궁(宮)의 둔장(屯庄) 모민(募民)한 일을 거듭하여 아뢰기를,
"신 시진이 전에 전라 감사에 재임하고 있을 때 헌신(憲臣)의 상소로 인하여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의 둔장(屯莊)에 투속한 백성들을 조사하라는 어명이 있었는데, 신이 생각하기에는, 소속이 없는 백성들을 만약 일일이 밝혀 찾아내려고 하면 한갓 어지러운 소요만 일어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본관으로 하여금 그들의 호구(戶口)를 편성한 예에 따라 한정(閑丁)은 정군(正軍)에 충정하고 속오(束伍)에 편입되지 않은 자는 속오에 충정하고 능로(能櫓)097)  에 어울리는 자는 능로에 정하도록 해 달라는 내용으로 치계하였습니다. 비국이 또 역(役)이 있건 없건 공천(公賤)이거나 사천을 막론하고 모두 범민(凡民)에 의거하여 응당 행해야 되는 역에 차정하고, 외방(外方) 수령이 혹시 형세에 구애되어 준행하지 못하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항상 엄한 신칙을 가해 착실히 거행토록 하자고 복계하여 윤허를 받아 내사(內司) 및 각 아문에다 분부했으니, 이는 곧 전일에 이미 정해진 영갑(令甲)098)  인 셈입니다.
다만 그 당시 비국이 팔로(八路)에 곧장 행문(行文)하지 아니함으로써 제도의 관리들이 조정에 이미 정해진 명이 있음을 모두 알 수는 없게 되었고, 내수사의 경우는 비국의 분부로 인해 계하와 회첩을 제궁에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도리어 황해·경기에 있는 양궁(兩宮)의 둔장을 경작하는 자에게는 속오와 잡역을 부과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다시 상의 결재를 받아 이조에 이문(移文)함으로써 오늘날 끈질기게 쟁론하는 사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유사(有司)된 자가 어찌 감히 결정된 어명을 팽개쳐 둔 채 이미 없앤 폐단을 다시 되풀이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법을 날마다 반포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그것도 쓸데없는 문귀가 되고 말 것이니, 조정의 형편으로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전일 비국의 복계와 똑같이, 수진궁(壽進宮)의 노비 및 전답을 경작하는 자와 어의궁(於義宮)의 둔장(屯莊)에 모속(募屬)된 백성에게 잡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되어 있는 것들을 모두 시행하지 못하게 하고, 다시금 비국이 복계한 뜻으로 제도에 알리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8일 임신

비변사가 영남(嶺南)의 유군포(留軍布)를 가져다가 진휼 자금(賑恤資金)에 보태고자 하였는데, 열읍에 봉납(捧納)할 군포는 없고 단지 허위 장부만 남아 있었으므로 감사는 추고하고 수령은 조사하여 치죄하자고 청하여, 상이 허락하였다.
유군포란, 각보(各堡)에 소속된 정병(正兵)이 매년 열두 달 분방(分防)한 이외에 일번(一番)의 나머지 군정한테서 거두어들인 군포를 그 읍에 유치한 것으로서, 그 수가 한 해에 1만여 필이나 되었고 조정에서 매번 가져다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소요되는 경비로 쓰곤 하였다.

 

대사간 김시진 등이 전에 궁가의 둔장을 환수하고 모속된 백성에게 잡역을 부과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사안에 대해 거듭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명례(明禮)·어의(於義)· 수진(壽進) 세 궁(宮)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에 비국이 복계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하여 정분이나 의리가 분명히 점점 깎여지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난리통에 가족이 사망한 집안에 대해 아들 되는 자가 빈례(儐禮)에 참여하지 않는 것만 허락하고, 손자의 경우에는 사명에 차견한 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조정의 처치는 적절하게 마련되어 공사간에 폐단이 없다고 말할 만한데, 이 어찌 인리(人理)에 없는 것을 신하에게 강요하겠습니까. 얼마 전에 부수찬 김만균이 외람스러움을 생각지 않고서 아뢰기에 부당한 소를 감히 아뢰었는데도 정원은 이를 즉각 물리쳐 보내지 아니하고 당연한 듯이 봉입하였습니다. 사체를 따져 볼 때 모두 근거가 없는 일에 해당되니, 김만균 및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시진이 이 논의를 극력 주장하면서 일찍이 우상 홍명하에게
"조정이 반드시 만균을 북경에다 차정해 보낸 뒤에야 나라의 기강이 제대로 설 것이오."
하니, 홍명하가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가?"
한 적이 있었다. 시진은 서필원과 더불어 서로 긴밀하여 이상하고 과격한 논의가 있을 때면 두 사람이 서로 맞장구를 치므로, 시의가 좋지 않게 여겼다.

 

대사헌 유철 등이 아뢰기를,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이 전장(田莊)을 설치해 백성을 모집한 것 등에 대한 일은 이미 품정(稟定)을 거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양궁(兩宮)의 노비와 모속된 백성들에게 잡역을 부과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사안으로 감히 앞서 아뢰고서도 이조에 이문(移文)하기에 이르러서는 그 성명(成命)을 팽개쳐 두고 오히려 전일의 버릇을 되풀이했으니 그야말로 몹시 분통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내수사의 당해 관원을 무거운 법으로 추고하여 치죄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이 날 양궁(兩宮)의 노비에 관한 일이 정계(停啓)되었다.

 

이조가 별도로 인재를 천거하자는 김익렴(金益廉)의 요청에 따라 대신 및 2품 이상의 삼사 관원과 종2품으로서 일찍이 육조의 참판, 좌·우윤(左右尹), 곤수(閫帥) 이상을 지냈던 자와 일찍이 삼사를 거친 유직(有職) 인원으로 하여금 각자 인재를 천거하되 3원(員)을 넘지 말도록 하자고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일찍이 삼사를 거친 자에게는 사람을 천거하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천거에 응하는 인원이 1백 88인이나 됩니다. 사람을 천거하는 일은 정밀함에 주안하는 것이지 많음에 주안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별천(別薦)은 예천(例薦)과 달라서 더욱 엄선해야 하니, 시임(時任) 삼사 관원을 제외한 증경 인원(曾經人員)은 모두 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9일 계유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있는 청사(淸使)의 관소로 나아가 서연청(西宴廳) 문 밖의 장전(帳殿)에 거둥하시고는 관반사 허적과 호조 판서 정치화를 불러 접견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사문(査問)할 때 쟁론을 혁직(革職)으로 할 것인지 강자(降資)로 할 것인지의 여부를 대신을 불러 의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삼공을 불러 의논하게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은 이미 시행한 규정이 있으니, 마땅히 강자로 쟁론해야 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강자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마땅히 혁직으로 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법금(法禁)을 범한 두 사람은 처참하는 것으로 의논해야 되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이 비록 처참하기로 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께서는 의당 처참하기로 쟁론해야 합니다."
하였다. 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조사를 거행할 때 시위하는 신하를 모두 입시하게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부(摠府) 당상관은 당 위에서 모시고 낭청은 계단 아래에 있도록 하라."
하였다.
어첩(御帖)을 드린 뒤에 상이 서연청에 들어가니 영상 정태화, 좌상 원두표, 우상 홍명하, 도승지 남용익, 좌승지 서필원, 우승지 오정위, 좌부승지 정만화, 우부승지 이경억, 동부승지 김수흥 및 한림·주서 각 2인이 입시하였다. 상이 청사와 더불어 서로 읍하고 자리에 앉은 뒤, 상이 청사에게 이르기를,
"사사(査事)를 거행토록 하오."
하고, 판의금 허적과 형조 판서 여이재를 들어오게 하였다. 이어 유황(硫黃)에 관한 법금을 범한 허룡(許龍)·언남(彦男) 등을 끌어내다 추문해서 공초를 받은 뒤 문밖에 데려다 두니, 이일선(一善)이 형조·금부의 당상들과 더불어 함께 나가 고신하여 그 공사를 들어와 알렸다. 또 사신 정유성(鄭維城)·이만(李曼) 및 범금(犯禁)한 사람을 데리고 간 자들인 양효원(梁孝元)·이익신(李翊臣)을 끌어내 계단 위에 앉히고 차례대로 대질시킨 뒤에, 청사가 좌우를 물리치고 감죄(勘罪)하자고 하니, 상이 승지와 사관 한 사람씩만 남고 나머지는 물러가도록 하였다. 일선이 양사(兩使)가 감죄한 말을 상에게 아뢰기를,
"허룡 등은 금지된 물품을 몰래 사들였으니 처참에 해당하고, 익신과 효원은 자기가 데리고 간 사람이 법금을 범했으니 혁직(革職)한 뒤 먼 곳에 충군(充軍)하는 죄목에 해당하고, 정·부사(正副使)는 제대로 검칙하지 못했으니 혁직에 해당합니다."
하고, 상에게 묻기를,
"적용한 형률에 부당한 점이 있습니까?"
하자, 상이 치사하기를,
"칙서에 함께 조사하라고만 했지 같이 의논하여 감죄하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감히 참여하겠소."
하였다. 이어 양사와 더불어 서로 읍하고 파한 뒤 즉시 환궁하였다.

 

전 대사헌 민응협(閔應恊)이 졸(卒)하였다. 응협은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쳐 관직이 아경(亞卿)에 이르렀고, 몸가짐이 무척 단출하고 검약하여 자그마한 부도 축적한 것이 없었으니, 그의 여러 아들이 음탐·방종하고 세력과 잇속을 좋아하여 적신(賊臣)에게 아부하고 세교를 패란시킨 것에 비하면 이만저만 현격하지 않았다.

 

내시를 보내 완산 부부인(完山府夫人)에게 치제(致祭)하였다.

 

11월 10일 갑술

대사간 김시진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그저께 성비(聖批)를 삼가 받들어보니, 명례·어의·수진의 세 궁은 제궁(諸宮)과 동일시할 수 없으니 이 세 군데만 제외하고는 모두 비국의 복계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그 작은 것은 들어주면서 그 큰 것은 허락하지 않고 그 하나를 버리고서도 오히려 그 둘을 쥐고 계시니, 신들은 삼가 안타깝고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이어 한숨을 쉬면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사장(私莊)을 편파적으로 두둔해서는 안 되는 점과 공역(公役)을 혼자만 면제시킬 수 없는 점에 있어서 세 궁이 여러 궁가와 이치상 차이가 없는데도, 지금 전하께서 기어이 구별하여 특별히 감싸주려 하시는 것은 성치(聖治)에 해로움이 있게 되는 흠집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자궁(慈宮)의 소속이라고 하여 오히려 전단(專斷)하지 못하는 점이 있으시다면, 인주(人主)의 효심을 극진히 하고 일국의 봉양을 다함이 어찌 지의(旨意)를 승순(承順)할 수 없는 것이기에 기어이 이 의롭지 못한 의를 하신 다음에 비로소 양지(養志)의 도리가 된다고 여기십니까?
명례·수진·어의 세 궁의 노비 및 전장(田莊)을 경작하는 자도 모두 다른 궁가의 예(例)와 똑같이 시행하라고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유철 등이 아뢰기를,
"당초에 비국이 이미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 모속된 백성들을 일반 백성과 똑같이 역에 응하도록 하는 일로 정탈하여 윤허를 받았지, 수진·어의 등의 궁을 구별한다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의 둔장이 호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각도에 똑같이 알려서 먼 곳에 사는 백성들도 성상께서 똑같이 중시한다는 훌륭한 생각을 모두가 알도록 해야 되는 터인데도, 단지 전례에 따라 본도에만 회이(回移)하고 끝내 제도에는 행문(行文)하지 않았으니, 당시 비국의 당해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간원의 비답에, 수진·명례·어의 세 궁을 제외하고는 비국의 복계대로 시행하라고 하교하셨는데, 당초 비국이 복계한 내용에는 세 궁을 구별한다는 얘기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필시 세 궁이 양전(兩殿)과 간여되어 있는 이유로 곤란하게 여기시는 점이 있으나, 한 나라를 통치하면서 모든 백성을 자식처럼 보신다면, 한 나라의 모든 백성으로 양전을 승봉(承奉)하는 것이 바로 임금으로서 존양(尊養)하는 효도입니다. 만약 사장(私莊)을 편파적으로 두둔하여 일반 백성과 부역을 균일하게 아니한다면, 어찌 왕도 정치의 사욕이 없는 덕에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세 궁의 둔장에 모속된 사람들도 일반 백성과 똑같이 응역(應役)하도록 하는 일을 제궁(諸宮)에도 똑같이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민유중(閔維重)을 집의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윤강(尹絳)을 판윤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승지로, 조복양(趙復陽)을 우윤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병조 참지로, 오시수(吳始壽)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11일 을해

사옹원 도제조 정태화가 아뢰기를,
"왕자와 공주·옹주가 궁궐을 떠난 후에는 매일 꿩을 제공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고례(故例)였습니다. 그런데 인조조 때 특별히 하교하여 15세를 기한으로 공급하였습니다. 이번에 대간의 논계에도 성상의 비답이 이와 같았으나, 이제부터는 없애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도 연한을 정하여 그대로 10년을 기한하여 공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기를,
"어제 정원의 계사에 따라 부수찬 김만균을 잡아다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신들은 삼가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대체로 부자(父子)와 조손(祖孫)은 정리(情理)에 차별이 있는데 만균이 사정(私情)을 이루려고 규정을 넘어 소를 올렸고, 재차 패소(牌召)를 받고도 끝내 나오지 않았으니, 죄가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그 정리를 살펴보면 용서해야 될 만한 면이 있습니다. 망부(亡父)의 말을 감히 갑자기 저버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소를 올려 조정의 명을 기다린 것이고, 재차 궐하에 나아가 상소로 나타내고 면직을 청했으니, 끝까지 명에 나아가지 않은 경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근시(近侍)를 옥에 회부하는 것이야말로 비상한 일이니, 정말로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아니라면 당연히 예로써 진퇴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사가 이러하니 파직시키고 놓아 보내라."
하였다.

 

11월 12일 병자

청사가 사은사가 나오기를 독촉하고 또 회주 문서 보기를 요구하여 역관을 시켜 초본을 가지고 들어가 보여주니, 청사가 회좌(會坐)하여 관반사 허적과 대제학 김수항을 불러 서로 의논하여 감정하였다.

 

대사간 김시진 등이 아뢰기를,
"동래 부사 이성징(李星徵)은 왜인이 난을 일으킨 일을 장문(狀聞)하면서 이정옥(李廷沃)이 도망하여 피한 사실을 고스란히 숨겼습니다. 이런 일을 그냥 놔둔다면 앞으로는 비록 대단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반드시 장차 숨기는 데에다 마음을 쓰게 되는 폐단이 생길 것이니, 그 조짐을 엄하게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동래 부사 이성징을 파직하소서."
하니, 추고만 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김익렴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얼마 전 사옹원이 법외로 꿩을 공급하고 있는 폐단에 대해 논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10년을 기한하여 그대로 공급하도록 하교하셨다 합니다. 조종조의 왕자와 공주로서 궁궐을 떠난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만, 백성들이 공진하는 물건을 그대로 사가(私家)에 준 적은 없었습니다. 공실(公室)과 사문(私門)의 한계는 지극히 엄격해서 법을 넘어 사정을 따른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 비록 하루라도 결코 그대로 공급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10년이라는 오랜 기간이겠습니까. 궁궐을 떠난 공주·옹주의 집에 응사(鷹師)가 꿩을 공급하는 관례를 속히 없애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궁금(宮禁) 안팎의 한계와 상하 명분의 엄격함은 신하로서 넘거나 위반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얼마 전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이 감히 평상복 차림으로 금중(禁中)을 출입하였으니, 그 참람하고 외람된 죄를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변방 수령의 막관(幕官)을 꺼려 피하는 일이 이미 근래의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함경 감사 김휘(金徽)가 길주 목사 임한백(任翰伯)과 도사 안후창(安後昌)을 파출할 때에 제읍이 재결(災結)을 실결(實結)로 한 폐단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분명하게 조사하여 처치하지 아니하고 지레 파출부터 하였으니, 사정을 따르고 공정함을 무시한 자취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김휘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추고만 하였다.

 

11월 13일 정축

사간 이정이 추고를 받은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1월 14일 무인

밤에 달이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총융청 2번(二番) 장초군(壯抄軍) 3백 38명이 와서 점호를 받고 전례에 따라 광지영(廣智營)에 입직하였으며, 전번군(前番軍)은 해산하여 돌려보냈다.
국조의 병제(兵制)는 오위(五衛)에서 총괄하였는데 병조가 본병(本兵)이 되고 도총부가 통솔하였다. 상번(上番)이 바뀌어 쉬면 숙위(宿衛)하는 군졸이 되고, 일이 생겨 동원하면 싸움터에서 전투하는 군졸이 되며, 그 가운데 나머지 군졸로는 의관을 갖추고 배위(陪衛)하는 자가 있었고 납포(納布)하여 정군(正軍)에게 자급(資給)하는 자가 있었고 이 밖에 다른 병력은 없었다. 임진년에 병란을 겪은 뒤로는 오위가 볼품없이 쇠잔하여 모두 전투를 감당해내지 못했고, 인조 때 북쪽 오랑캐와 실랑이가 벌어지니 변경에 계엄이 내려진 상태로 병자년에 이르러 병화(兵禍)가 유난히 참혹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국사를 모의하는 자들이 병력이 없던 상황을 뉘우치고 모집한 병사를 널리 유치해서 서울에 모으고는, 각기 아문을 세워 저마다 기고(旗鼓)를 전담하게 하니, 50, 60년 동안에 군문의 명목 수가 나날이 늘어나고 병액(兵額)도 갈수록 많아져서 내적으로는 나라의 늠록을 축내고 외적으로는 백성의 노동력을 바닥냈으며, 곡물을 빌려주어 이자를 불려서 조도(調度)에 공급하는 비용이 한없이 많았다. 국력은 헤아리지 않고 군사를 늘리는 데에만 힘썼으므로 서울에 가만히 앉아 먹어대는 군졸이 1만여 인이나 되었다. 폐해가 여러가지로 발생하여 화액의 근원이 점점 열렸으니, 이야말로 나라의 커다란 폐단이자 훗날의 안위와 흥망이 비롯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에 그 연혁과 설치의 본말을 모두 기록해 둠으로써 후일의 참고가 되게 한다.
훈련 도감(訓鍊都監)
선조 계사년에 상신 유성룡(柳成龍)이 명나라 군대가 철수하여 돌아가면서 남겨 둔 절병(浙兵)의 기예가 몹시 뛰어나다고 건의하여, 서울에 유졸(游卒) 수백 인을 모아서 그들의 기예를 받어 익히게 한 다음, 이들을 묶어서 대오를 편성하여 포(砲)·살(殺)·사(射) 및 척계광(戚繼光)의 진법(陣法)099)                  을 가르쳤다. 삼수(三手)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뒤 각도로 하여금 식년(式年)마다 호수(戶首) 2백 인의 정예 장정을 가려 뽑아 속오 포수(束伍砲手)라 이름하여 군장을 꾸려서 올려 보내도록 함으로써 각초(各哨)의 모자란 인원에 충당하고, 지부(地部)로 하여금 각도 전결의 원세(元稅) 외에 삼수량(三手糧)을 추가 출급하도록 함으로써 늠자(廩資)를 삼았는데, 인조조 이후로 날이 갈수록 점차 증가하여 원액이 3천에 이르렀고 나중에는 4천에 이르렀다.
또 마병(馬兵)에 좌우영(左右領)을 설치하니 그 숫자가 2백여 명이었는데, 신경진(申景禛)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마병 3백여 명을 늘려 5초(哨)로 나누어 편성하고 또 보군(步軍) 1사(司) 5초(哨)를 늘리어 합해서 35초로 만드니 마군·보군을 모두 합한 수가 5천여 명이었다.
효종조(孝宗朝)에 이완(李浣)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다시 마병 1초를 늘렸고 무술년에 또 보군 10초를 늘려 전부(前部)라 불렀으며, 그뒤 신해년100)                  에 유혁연(柳赫然)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별대(別隊)의 제도를 신설하고 전부(前部) 10초를 없애 표하군(標下軍)에 배치하였는데, 명목상으로는 비록 인원을 줄였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마병은 호(戶)마다 4보(保)이고 보군은 호마다 3보인데, 보인(保人)101)                  은 각자 3필을 납포하여 호수에 자급하였다. 그뒤 보군에게 다시 보를 늘리어, 지금 현재 군졸에게 한 달에 지급되는 군량은 쌀 4천 77석, 콩 5백 6석이다. 양향청(糧餉廳)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폭넓게 마련해서 물자를 축적·판매함으로써 군중의 용도에 보태는데, 기계(器械)·기고(旗鼓) 등을 갖추는 데 드는 자금이 모두 그 속에서 나온다.
‘별대(別隊)’는 기유년102)                   초부터 설치되어 각도의 한정(閑丁)으로서 타역(他役)에 투속(投屬)한 자들로 충원하였는데, 처음에는 7천 명이었는데 나중에 늘려 1만 3천 7백 명에 이르렀으며, 4부(部)로 나누어 편성되어 있고 여름과 가을에는 번(番)을 면제하고 겨울과 봄에 번을 선다. 호마다 3보이고 보인은 각자 쌀 12두를 내어 번졸(番卒)에게 준다. 한 차례마다 10초(哨)씩 상번(上番)하는데 그 숫자는 1천 3백 70여 명으로 어영군(御營軍)의 제도와 같다. 원군(元軍) 6천 명에게는 각자 4보씩 지급하여 보인의 합계가 2만 4천 명이고, 별대(別隊) 1만 3천 7백 명에게는 각자 3보씩 지급하여 보인의 합계가 4만 1천 1백여 인이다.
어영청(御營廳)
인조 갑자년 초에 설치하였고,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어영사(御營使)가 되어 서울 안에 포술(砲術)을 업으로 삼는 자 수백 명을 소집해서 교습하였다. 어가(御駕)가 공산(公山)으로 피난했을 때 다시 산군(山郡)의 산척(山尺)103)                   중에 포술에 정예한 자를 모집하였는데, 대읍(大邑)은 7명, 중읍(中邑)은 4명, 소읍(小邑)은 2명씩 해서 합해 6백여 인이 되었다. 환도한 뒤에는 다시 총융사(摠戎使)에 배속시켜 서너 해 단속하여 이루어 놓은 효과가 있었다. 완풍군(完豊君) 이서(李曙)를 제조(提調)로,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를 대장으로 삼아, 통솔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그뒤 상이 3천 명까지 늘려 모집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경외(京外)의 정장을 양민·천민을 막론하고 이리저리 불러 모아 군액(軍額)이 점차 증가하였다. 사·포수(射砲手) 2만 8천 인을 5부(部)의 별삼사(別三司)로 편성해 14번(番)으로 나누었는데, 번당 10초(哨)로 그 숫자는 1천 4백 10여 인이었다.
효종 무술년에 별마대(別馬隊)를 추가 설치하였는데, 해서(海西)의 군보(軍保) 및 양정(良丁)으로서 무예가 있는 자를 가려 뽑아서 14번으로 나눠, 돌아가면서 상번(上番)토록 하였다. 또 별파진(別破陣) 5백 11인을 두고 15번으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입번(立番)시켰는데, ‘별파진’이란 대포(大砲)를 전문적으로 익힌 자들이다. 경안(京案)의 잡색군(雜色軍) 4백 70 인과 아병(牙兵) 1백 14인은 모두가 공장(工匠)으로서 개성부(開城府)에 입속되었고, 각차비군(各差備軍) 1백 60인은 별좌사(別左司)에 배속되어 입번(立番)하고, 개성부 및 황주(黃州)의 마태재졸(馬駄載卒) 2백 23인은 정군(正軍)이 아니어도 보인을 지급했다.
임진년에 이완(李浣)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원군(元軍)에게 비로소 3보를 지급하였는데, 1보는 호수(戶首)의 자장(資裝)을 해결해 주고 2보(保)는 베나 쌀을 거두었다. 산군(山郡)의 경우에는 베로, 연해(沿海)의 경우는 쌀로 거두어 합계하면 베 2만여 필, 쌀 1만 70여 석이 되는데, 쌀은 상번(上番)의 초름(稍廩)으로 지급되고 베는 군중의 용도를 삼았다. 군졸과 보인을 합하면 8만여 인이었다.
총융청(摠戎廳)
인조 갑자년에 처음으로 설치했다. 경기 병사를 대신해 기병(畿兵)을 거느렸고, 그뒤 광주(廣州)·죽산(竹山)·양주(楊州)의 3영(營)이 수어청에 이속되어 본청 소속은 수원(水原)·남양(南陽)·통진(通津)·파주(坡州)·장단(長湍) 등 5영이었으며, 군병의 합계는 1만 4천 8백 91인이었다. 장초군(壯抄軍)이 또 10초인데, 겨울 석 달 동안 돌아가면서 담장 밖에서 번을 서고, 송도의 속오(束伍) 1천 인이 각자 1석씩 쌀을 바쳐 번졸에게 지급했다. 아병(牙兵) 15초는 나중에 6초만 남았고 그 나머지는 강등시켜 보인을 만들어 쌀을 거두었다.
수어청(守禦廳)
인조(仁祖) 때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오랑캐와의 실랑이가 나날이 심화되고 도성만 지키기가 어렵다 하고, 또 강도(江都)는 응원(應援)이 없으나 광주(廣州) 가까운 곳에 있는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바로 온조(溫祚)104)                  가 옛날에 축조한 것으로서 형세가 매우 험준하므로 들어가 보전할 만하다는 이유에서 진(鎭)을 설치하자고 헌의하였다. 그리하여 성 안으로 부치(府治)를 옮기고 성첩(城堞)을 대대적으로 기공한 뒤 창사(倉舍)와 궁궐을 설치하고 병오(兵伍)를 단속하고 재물과 곡식을 쌓아 모음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병자년에 상이 이 성에 들어가 포위당했고, 전란이 끝난 후에 더욱 수선하고 축적하였으며, 수어사는 모두 훈척이나 중신으로 임명하였다.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부사가 되고 광주(廣州)·양주(楊州)·죽산(竹山)·원주(原州) 등 4영(營)이 그에 소속되어 있었다. 철원(鐵原)과 충주(忠州) 양진(鎭)이 예전에는 본청에 속해 있었는데, 이완이 수어사로 있으면서 충주는 새재[鳥嶺]를 방어하기에 적절하고 철원은 북로를 방어하기에 적절하다는 이유로 산성에 소속시키지 아니하고 단지 4영에 소속된 속오군 1만 1천 9인만 존속시켰다. 아병(牙兵)이 1천 8백 87인이고 수어군이 4천 4백 40인이었다. 그뒤 김석주(金錫胄)가 수어사로 있으면서 청을 올리기를,
"산성의 주위가 광활하므로 2만 인이 아니고서는 수어할 수가 없는데, 본성에 속한 기좌(畿左) 3영(營)과 영서(嶺西) 1영의 병력수는 1만여 명에 불과합니다. 이에 좌도(左道)의 각 고을에 있는 아병(牙兵)을 좌부(左部)에 소속시키고 호서(湖西)에 가까운 고을에 있는 아병을 우부(右部)에 소속시킴으로써 철원과 충주 두 진을 대신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영서(嶺西)의 제읍은 포술을 익힌 자를 새로 모집해서 이미 7, 8백 인을 얻었으니, 홍천(洪川)·횡성(橫城)·지평(砥平)에 옛 아병 3백여 인을 두어 사방에 주둔토록 하고, 또 1사(司)를 만들어서 중부에 소속시키소서."
하니, 조정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때에 수성하는 군졸이 합하여 2만여 명이 되었고, 또 산성에다 승장을 두어 승군을 총섭하게 하면서 성을 분담하여 성 위의 담을 지키도록 하였다. 아무런 일이 없는 때에도 승도(僧徒)로 하여금 번(番)을 나누어 들어와 지키게 하였으므로 그 숫자가 무척 많았다. 기계(器械)와 화포(火砲)를 포함한 전쟁 장비는 여러 해에 걸쳐 쌓아 모아서 서울 안의 여러 군부와 비교할 때 가장 많았고, 군향 미곡(軍餉米穀)은 8만 8천 3백 53석이었다.
정초군(精抄軍)은 옛날에는 기병 가운데서 가려 뽑아 돌아가면서 궐내에 입직(入直)하는데 1백여 사람 밖에 되지 않았다. 김좌명(金佐明)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인원을 늘려 수백 명이 되었고, 그뒤 경술년에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의 건의로, 옛 제도를 따라 기병의 호수(戶首)·보인(保人) 가운데 건장한 자를 널리 뽑아서 그 인원을 늘리니 4천 4백 80인이나 되었다. 한 사람마다 자장보(資裝保) 1인을 지급하였는데 그뒤 자장보를 호수(戶首)로 승격시켜 부대의 편성이 또 증가함으로써 8천 9백 60인에 이르렀다. 8번(番)으로 나누어 매번 5초(哨)씩 돌아가면서 상번(上番)하고 그 보인으로 하여금 쌀을 바치게 하여 번량(番糧)을 지급하였다.
처음에는 도제조를 두었으나 얼마 안 가서 없앴고, 정초청(精抄廳)으로 불리워졌으며, 병조 판서로 대장을 삼아 금군(禁軍)과 더불어 좌우대(左右隊)로 나누어 매월 습조(習操)했으니 양국(兩局)105)                  의 제도와 똑같았다. 그뒤 정사년에 대신의 의논에 따라 정초정이라는 호칭을 없애고 그 병력을 도로 병조에 소속시켰고, 병액(兵額) 및 기타 규제는 예전대로 따랐다.

 

상이 관소에서 상마연(上馬宴)을 몸소 거행하려고 하였으나, 청사가 전갈을 보내 그만두었다.

 

11월 15일 기묘

무지개가 동북향에 나타났다.

 

대왕 대비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내의원 제조가 약방에 입직하였다.

 

청사가 갔다. 상이 교외에서 전송해야 되는데 청사가 극력 만류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구례(舊例)로 볼 때 마땅히 관소에서 상이 몸소 행하여야 될 것들을 모두 재신(宰臣)으로 교체하여 행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상이, 태상시의 관리를 추고함은 제향(祭享)에 관계된 일인데 헌부가 공죄(公罪)로 감율(勘律)했다 하여 정원이 봉입(捧入)한 것을 꾸짖으니, 대사헌 유철(兪㯙), 장령 김익렴(金益廉), 지평 이숙달(李叔達)이 모두 잘못 감정한 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1월 16일 경진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대사헌 김시진 등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주서(注書)는 곧 옛날의 기거주(起居注)입니다. 참하(參下)의 위치와 명망이 한원(翰苑)에 버금가는데, 새로 추천된 송최(宋最)는 유난히 재주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갑자기 청선에 끼인 것은 실로 사정을 따른 데서 비롯되었으니 삭천(削薦)하고 당해 천주(薦主)는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더니 그 이튿날 그대로 따랐다.

 

장령 이무(李堥)가 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11월 18일 임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이지무(李枝茂)·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이합(李柙)·장선징(張善瀓)을 지평으로, 이유상(李有相)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19일 계미

집의 민유중이 대사헌 송준길과 더불어 상피되므로 체직되었다.

 

11월 20일 갑신

지평 이합(李柙) 등이 아뢰기를,
"근래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使行)에, 역서배(譯胥輩)·솔인(率人) 등이 이익을 탐해 법금(法禁)을 범함으로써 국가에 걱정을 끼치는 일이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어서 금번에 행한 조사에서 받은 모욕을 이루 다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조정이 만약 대대적으로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앞으로 발생하는 폐해를 방지할 도리가 없을 것이니, 법금을 범한 사람을 데리고 갔던 양효원과 이익신 및 수역(首譯)을 모두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더니, 이튿날에 수역은 파직, 추고하도록 하였다.

 

승지 김수흥이 아뢰기를,
"병조가 함경 중군(咸鏡中軍) 최명후(崔鳴後)를 논상하는 계본에 대해 회계하면서 ‘수로(酬勞)의 은전을 베풀기에 합당하다.’고 하였는데, 감사 김휘(金徽)의 계본 중에 이른바 ‘대오를 다시 편성하여 조련했다.’는 것은 바로 중군으로서 당연히 해야 되는 직분이니 거론할 필요가 없고, 군기(軍器)를 개선하여 갖춘 일은 그의 노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군의 제방을 수축하는 일에 대오를 다시 편성하여 6천여 인을 부역시킨 점에 대해서는 신은 삼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병을 조련·시재한 이외에 조정에 명을 여쭈지 아니한 채 타역(他役)에다 제멋대로 이용(移用)하여 여러 날을 부역(赴役)시킨 일만큼은 군병의 커다란 폐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김휘가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명후에게 공을 돌림으로써 상을 노린 것은 매우 터무니 없으며, 해조는 그것을 분별하지 않고서 이런 회계를 하였으므로 신은 감히 생각한 바를 아룁니다."
하니, 상이 도로 출급하기를 명하고, 병조로 하여금 다시 아뢰어 처리하게 하였다. 병조가 단목(單目)을 붙여 도로 들어와 아뢰기를,
"상을 주고 안 주고와 죄를 주고 안 주고는 상의 결재를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그뒤에 상이 말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경상도 유생 이파(李坡) 등이 상소하여, 김강(金鋼) 등이 선정신 이이와 성혼을 비방한 죄를 아뢰니, 상이 답하였다.
"꼭 어지럽고 시끄럽게 한 뒤에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1월 24일 무자

상이 전옥(典獄)에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도록 하였다.

 

임유후(任有後)를 승지로, 서필원(徐必遠)을 병조 참의로, 이정(李程)을 집의로, 허적(許積)을 판윤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이원정(李元禎)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11월 25일 기축

집의 이정(李程)이 추고를 받아 아직 감죄되지 않은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간원이 여러 궁가에 산해(山海)를 떼어 준 일에 대한 상계(上啓)를 정지하니,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차자를 올려 그 잘못을 논하여 말하기를,
"위로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 나라의 근본을 손상함으로써 조정은 조정다운 조정이 되지 못하고 백성은 백성다운 백성이 되지 못하고 주현(州縣)은 주현다운 주현이 되지 못하고 관리는 관리다운 관리가 되지 못한 채 국가로 하여금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끝내는 멸망에 이르고야 말게 하는 것은 여러 궁가에 산과 바다를 떼어 준 폐단이 바로 그것으로서, 한 가지 일의 실책이나 한 때의 폐단에 비길 만한 성격이 아닙니다. 2년이나 계속된 대계(臺啓)가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니 아무리 천지가 크다고 하더라도 유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역시 대신(臺臣)이 성심과 진실한 뜻으로 성상의 마음을 제대로 감동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간원이 느닷없이 정계(停啓)함으로써 해를 넘기면서 쟁집한 논의로 하여금 끝내는 한바탕 부질없는 일이 되게 하였으니, 특히 논사하는 체통과 광구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간원의 정계한 관원을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고집스런 의견을 끝까지 바꾸지 않으면 따지는 의논이 비록 수년을 거친다고 하더라도 결단코 보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자의 내용이 이와 같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정언 김석주(金錫胄)가 병 때문에 휴가 중에 있으면서, 간원이 체차되자 인피하여 아뢰기를,
"동료의 간통(簡通)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으나, 사서(私書)로 문답한 내용은 신도 당초에 다른 말이 없었으니 혼자서만 면책할 수 없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고, 정언 이광직(李光稷)도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병 때문에 휴가를 청해 놓고 있는 중이니 함께 참석했던 계사를 만일 정지하려고 한다면, 사서(私書)로 통문(通問)하는 것이 어엿한 대규(臺規)인데, 그저께 두 건의 일을 정계하면서도 서로 의견을 물은 일이라곤 없었으니 신은 삼가 의아스럽습니다. 김석주의 인피하는 글에 사서로 서로 물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누구에게는 묻고 누구에게는 묻지 않은 것은 신이 업신여김을 당한 결과이니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다.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헌부가 광직은 출사시키고 석주는 체차하자고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헌납 이민서(李敏敍)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여름 동안에 외람스럽게 이 직책에 재임하면서 동료와 더불어 기전(畿甸)을 양전(量田)한 뒤 부세를 고르게 하자는 뜻을 망령되이 아뢰니, 성상의 비답이 역(役)을 마친 뒤에 다시 의논하도록 허락하였으므로 일단 논의를 그치고서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해청에서 재가를 올린 것이 당초 아뢴 뜻과는 엄청나게 다른 점이 있으므로 대소 군정(群情)이 놀라고 의혹스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번 일을 돌아보건대, 관련되는 바가 지대하여 백성의 목숨이 죽느냐 사느냐가 이 일의 향배에 달려 있고 앞으로의 이해도 자칫하면 백년까지 연관되는 만큼, 상세하고 조심스럽게 폭넓은 의견을 물어서 타당하게 처리해야만 합니다. 더구나 오늘날 성명께서 왕위에 앉으시어 밤낮으로 치도를 강구하셔서 온갖 일을 정리하고 쌓인 폐단을 고쳐 나라를 공고히 다지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의 근본으로 삼는 것을 신료와 백성이면 예외없이 목을 빼고 귀를 귀울이어 성상이 어떻게 하실지 듣고 있는데, 단지 이 한 가지 일이 도리어 이처럼 믿음을 잃고 원망을 불러들였으니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신은 오랫동안 언관으로 재임하면서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죄를 이제 와서는 피할 수 없으나, 의논하여 처리한 뒤에 본원이 그대로 정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신은 진실로 어떤 생각으로 그랬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일을 말함이 믿음을 취하기에 부족했던 때문이니, 구차스럽게 대각(臺閣)에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함경 감사 김휘가 길주 목사와 도사를 파직시키라고 아뢴 일은 매우 부당하니, 대론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비록 정계되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그 직임을 그대로 수행도록 해서는 안 되고 또 황정(荒政)도 급한 상황이니 김휘를 체차하소서.
감사가 방면(方面)을 수임(受任)할 때 이미 출척에 대한 권한까지 주었으니, 관하(管下)를 파출시켰는데 조정이 그 의견을 쓰지 않는 것은, 애당초 법례도 아닐 뿐더러 후일의 폐단도 있습니다. 길주 목사 임한백(任翰伯)과 도사 안후창(安後昌)은 모두 본도의 장계에 따라 파출시키되 새 감사가 도임한 뒤에 그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6일 경인

우의정 홍명하(洪命夏)가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신이 들으니, 양만리(楊萬里)가 송제(宋帝)에게 아뢰기를 ‘큰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은 그 의지가 참신한데 이는 온 천하 사람들이 몹시 좋아하는 바이고, 큰 일을 할 수 없는 임금은 그 마음이 완만한데 이는 온 천하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보다 나은 정사를 이루어 보겠다는 의지가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불행하게도 이상정치를 추구하는 그 마음이 질병의 저해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성덕(聖德) 그 자체는 비록 하자가 없지만 겉으로 나타난 현상은 완만한 경향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큰일을 할 수 없는 임금의 그것과 노선이 같으니, 뭇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기는 바는 이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처럼 성의가 얕은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성상의 마음이 뭔가를 해보려는 쪽에 예리해질 수 있도록 감격시킬 수 있겠습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정신을 한 군데로 모으면, 하늘과 간격이 없다.’ 하였는데, 이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경하는 아름다움을 말한 것입니다. 비록 정치가 평안하여 아무 일이 없는 때라고 하더라도 서로 공경하지 않는다면 온갖 일들을 수행할 도리가 없는데 하물며 국가가 위급하여 존속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때이겠습니까.
근일에 조정은 논의가 둘로 갈라져 대소 신하들이 저마다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면서 일에 따라 간섭하고 제지하므로 온갖 일이 무너져 갈라지고 있는데, 신처럼 역량이 없는 사람이 경박한 풍속을 진정시키고 선비들의 마음을 화합하여 함께 어려움을 해결해 낼 수 있겠습니까. 호인(胡寅)의 7책(策) 가운데 그 첫째에, 기강을 보존하여 국체를 확립하는 일을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체통이 무너지고 정령이 해이되어 허위가 판을 치고 상하가 침범하면서 서로 이어받지 않고 있는데, 신처럼 힘없고 연약한 사람이 무너진 기강을 떨쳐 일으키고 모든 정사를 닦아 밝힐 수 있겠습니까. 국가는 어진이를 선발하는 일을 임무로 여겨야 되는데도 오늘날에는 인재를 찾아보기가 힘들고, 간언을 따르는 자는 흥성하고 간언을 거부하는 자는 멸망하는 법인데도 대신이 간쟁하여 마지않는 일에 일 년이 되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이 서너 가지는 모두가 급한 일이고 절박한 걱정입니다. 전하처럼 밝고 거룩하신 분이, 어찌 신이 이런 때 재보(宰輔)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체면(遞免)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부드럽게 타이르고 허락하지 않았다.

 

광주 부윤 유창(兪瑒)이 상소하여 산성에 거주하는 백성을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을 아뢰면서, 성 동쪽 10리 안에 있는 사옹원의 시장(柴場)을 예전대로 본부에 떼어 주어 성 안에 거주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경작하여 먹도록 하되, 그 세를 면제해 달라고 청하였다. 또 해마다 각 고을에 변고를 대비해 쌓아 놓은 풀 1만 5천 다발을 예전처럼 감봉(減捧)하지 않음으로써 거주하는 백성의 방납(防納)에 보태도록 하되 그 이(利)는 취할 것과, 모집한 백성들을 복호(復戶)하는 가격을 비록 모두 회복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전일 1백 두(斗)의 조(租)는 그 수를 적절히 늘려 그들로 하여금 촌민에게서 거두어 가지도록 하자고 청하였다. 비국 및 수어청에 내려 복계한 결과, 10리 안에 있는 시장을 주도록 허락하고, 쌓아 놓은 풀 4다발의 가격을 쌀 1되로 늘렸다.

 

11월 27일 신묘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홍명하가 사직하여 아뢰기를,
"신은 위로는 임금의 군덕을 보익하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안정시키기에 부족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의 기강이 이미 문란해져 있으니 신처럼 무능하여 남보다 아주 못한 자는 만분의 일이나마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재주가 남만 못할 게 어디 있는가."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히도 연거푸 흉년을 만나 백성의 생활은 먹을 것이 부족해서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는 형편인데, 변괴까지 자꾸 일어나 중외가 걱정하기에 바쁩니다. 화란의 발생이 조만간 닥쳐 올 만큼 긴박한 상황인데도 성상께서는 궁궐에 깊숙이 계시므로 필시 시세가 이러함을 상세히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농사의 흉년이 이 모양에다 천변까지 참혹하여 인심은 나날이 멀어지고 국세는 갈수록 위급해지는데도 상하가 모두 고식적인 생각만 하면서 진작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습니다. 성상께서 혹시 큰 뜻을 일으켜 분발하신다면 그래도 어떻게 해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임금의 덕을 보필하는 것이 곧 대신의 책임인데 신들은 용렬하고 우매하여 보익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께서 만일 분발하여 책려하려는 뜻을 가지신다면 비록 신처럼 재주가 없다고 하더라도 한껏 힘을 쓰겠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경계하고 성찰하는 데에 유념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또 아뢰기를,
"근래에 인재가 부족한 현상이 유난히 심합니다. 조종조에는 사람을 등용하는 규정에 상(賞)으로써 가자하는 예가 없고 단지 그의 인재 여부만 관찰하여 발탁하였는데, 지금은 단지 자격에 따라 등용하고 있으니 사람이 부족한 것이 당연합니다."
하였다. 이어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신이 단지 사람을 써서 임금을 섬기려고 하여 매번 사람을 천거하는 얘기를 꺼내곤 하다가 서필원(徐必遠)의 배척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지금 또 망령되이 말씀드립니다. 성상께서 뭇 신하들 가운데 쓸 만한 자를 살피어 순서에 따라 발탁하여 쓰시기 바랍니다."
하였고, 헌납 이민서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은 덕망이 있는 자와 재능이 있는 자를 반드시 착실하게 들어 올려 씀으로써 실효를 책임지웠는데, 지금은 고적(考績)이 분명하지 못하고 출척이 공정하지 않아서 관직길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연줄을 타거나 요행수로 관직을 차지한 사람들이니 어떻게 인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대신이 비록 이 같은 건의를 아뢰었다고 하더라도 평소에는 언제나 잠잠한 채 생각조차 않고 있다가 임정(臨政)해서는 전례에 따라 천의(薦擬)하곤 하니, 누가 재주와 덕망이 있으나 눈에 뛰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을 성심껏 찾아서 등용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바깥 사람들이 모두들 ‘조정이 백성의 고통을 보살피지 않기 때문에 산해를 절수한 것을 없애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조정의 덕택이 자기들에게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조정이 자기들을 잊었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무고한 사람을 하나라도 죽이거나 불의한 일을 하나라도 해서 천하를 얻는다고 해도, 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만약 이런 마음을 갖는다고 하면 백성들이 어찌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 양(陽)이 회복되는 달을 맞아 1양(陽)이 막 움직이면서 만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생하고 있는데, 옛 사람이 이른바 ‘머지않아 회복된다.’고 한 말은 그 뜻이 큽니다. 오늘부터 천심(天心)을 분발하시고 대신들을 경책(警責)하여 강구하는 일을 거행함으로써 혜택을 베풀면 어찌 사직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홍명하가 아뢰기를,
"백성의 원망이 일어난 것은 수령이 적임자가 아닌 데서 연유되었으니 어사를 보내 염문해야 합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이민서가 아뢰기를,
"어사의 치장(治裝)을 명하면 수령의 친지들이 예외없이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고 모두 사람을 보내어 어사의 뒤를 쫓아가니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신이 들으니, 성종조에는 입직한 관원이나 관유(館儒)를 예고없이 내보냈다고 하는데 이처럼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묻기를,
"우상 의 생각은 팔도를 염문하려는가?"
하였다. 이에 홍명하가 아뢰기를,
"우선 기전(畿甸)과 양서(兩西)106)  를 염문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혹은 진정(賑政)을 마친 다음에 내보내야 한다고 하고 혹은 무익하다고 하니, 상이 일단은 그냥 두도록 하였다. 이어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영동의 재해가 난 고을 가운데 강릉과 양양이 유난히 심합니다. 두 고을의 기병(騎兵)이 지금 모두 상번(上番)하였는데 의복과 군장이 단출하고 형편없어 얼어 죽을까 염려되니, 번(番)을 1삭(朔) 감해주고 그 대신 군포로써 고용(雇用)해 세워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성 민정중이 아뢰기를,
"얼마 전 몹시 추운 날에 어떤 어린애 하나가 거적때기에 싸여 길 옆에 버려져 있기에, 지금 구완하여 살려냈는데, 이러한 일들이 매우 많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거두어 양육하는 자가 있을 경우 노비로 삼도록 허락해 준다면, 버려진 어린애 가운데 살아나게 되는 자가 많을 것이니, 경조로 하여금 공문을 만들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민정중이 또 아뢰기를,
"들으니, 전라도 산성에 회부한 쌀이 명목은 비록 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벼를 섞었다고 합니다. 경관(京官)을 내보내 적간해서 중벌로 다스리소서."
하니, 원두표가 그 말이 맞다고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정중이 들은 바가 있으니, 그에게 어느 곳인지를 가리켜 말하도록 하소서."
하니, 민정중이 입암(笠巖)이라고 아뢰었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경관을 내보내 적간하라."
하였다. 민정중이 또 아뢰기를,
"얼음을 저장하는 일은 가장 규모가 큰 역사로서, 전일에 각사가 으레 3천 석의 쌀을 비용으로 썼습니다. 진휼청에서 그 일을 하게 되면 비용이 크게 줄어 7백여 석밖에 들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각사로 하여금 그 가격을 헤아려 내어 주장하는 제사(諸司)에 주어 스스로 얼음을 저장토록 한다면, 쓸데없는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지평 이합(李柙)이 전일에 명례궁을 포함한 세 궁의 장민(庄民)에 대한 응역(應役)을 제궁(諸宮)과 똑같이 시행하자고 거듭 아뢰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궁궐을 나간 공주와 옹주에게 꿩을 공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으며, 또 수역(首譯) 및 양효원·이익신을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납 이민서가, 앞서 제궁가에 시장(柴場)·어장(漁場)을 떼어 준 곳을 조사해서 없애자고 한 것을 거듭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제궁가의 시장(柴場)은 조사해서 밝히도록 하라."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제궁가의 어전(漁箭)을 없앨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조사해 내어 숫자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민서가 아뢰기를,
"본원은 어장을 없애기를 청했는데 정중은 느닷없이 숫자를 정하자고 하니, 일의 체모가 부당합니다.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명례(明禮) 등 세 궁의 일을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기(京畿)를 양전(量田)할 때 당초 조정의 논의는 세금을 늘리려는 것이 아니라 역(役)을 균등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거두는 쌀을 1결에 12두로 정했습니다만, 오늘날의 신결(新結)은 구결(舊結)의 배가 되어 옛적의 1결은 24두를 내야 되고 또 전세(田稅) 8두가 있으니, 이것에 근거해보면 백성이 내게 되는 쌀의 수량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기 지방은 도성과 매우 가까이 위치하여 온갖 역사가 모두 몰리며 토지는 척박하고 백성은 빈궁하므로 더욱 보살펴야 하는데도, 거두는 쌀의 수량이 호서에 비해 또 2두를 더 부과하니, 이는 대체 어떤 법제입니까? 또 호서는 대동미 10두 이외에 과외(科外)의 역(役)만 점차 생겨나는 상황에서 넉넉하지 못한 백성의 원망하는 소리가 형언하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더구나 경기 지방은 잡역이 훨씬 많아서 앞으로 생길 폐단이 또 전일의 선혜청과 같아질 것이고 보면, 원정(元定)만 해도 이미 많은 것이니 결코 지탱해내기가 어렵습니다.
또 이번 객사(客使) 때의 인부와 말에 관해 말씀드리겠는데, 비록 값을 지급하라고 하기는 했지만, 주현(州縣)이 모두 연가(烟家) 가운데 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등록된 사람들을 때가 되자 강제로 보냈으니, 민정이 원하지 않았던 것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선처하는 길은, 8두로 감봉하고, 객사 때 인부와 말은 예전대로 균등하게 정하고, 이전에 16 두 이외로 적용시킨 자들은 별도의 방법으로 구분해서 처리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묘당으로 하여금 신속히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길주 목사 임한백은 도임한 뒤로 오직 체임되어 돌아가려는 꾀만 부리느라고 술을 마시면서 공무를 내팽개치고 재상(災傷)을 실지로 답사하는 일에 대해서도 성의껏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파직하고 추고하는 데 그친다면 그의 소원에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셈이 되니, 임한백을 잡아다 문초해서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의주 부윤 이원정(李元禎)은 전에 장성 부사(長城府使)로 있을 적에 관곡을 남용한 죄가 있고, 동래 부사가 되어서는 처사에 타당성을 잃어 죄를 받고 파직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시험해 보았으나 기대를 무너뜨린 사람을 기용해서 다시 변방의 중임에 제수해서는 안 되니, 이원정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부교리 여성제(呂聖齊)가 아뢰기를,
"얼마 전 헌부의 계청으로 인해 소를 도살한 자는 살인한 자와 똑같이 죄를 적용시키기로 하였는데, 이는 절대 행해서는 안 될 일이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가축은 천하게 보는 의리로 따지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마땅히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시고 본율(本律)을 거듭 밝힘으로써 통절히 금지하는 바탕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명령을 내리자마자 철회하는 것을 곤란하게 여겼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제신의 말이 이러하니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여성제가 또 아뢰기를,
"들으니 입번(入番)하는 금군(禁軍)들이 내관(內官)에게 점열(點閱)을 당했다고 하는데,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처음 시작된 일이 아니고 선조(先朝) 때부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였는데, 정태화가 아뢰기를,
"선조 때 새로 입번하는 금군들을 차비문 밖에 모이도록 명하여 내관으로 하여금 군장(軍裝)을 조사하게 하면서 술을 대접하였는데, 이는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일이었지 애당초 점열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대로 점열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조계원(趙啓遠)을 형조 판서로, 민유중(閔維重)을 사간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정언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서필원(徐必遠)을 함경 감사로,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이은상(李殷相)을 병조 참의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의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강유후(姜裕後)를 의주 부윤으로, 김좌명(金佐明)을 수어사로 삼았다.

 

11월 28일 임진

정언 이광직(李光稷)이 인피하기를,
"신이 삼가 헌납 이민서의 인피한 내용을 보니,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번에 경기 지방의 양안(量案)을 개정한 일은 부세를 균등히 하여 덕을 펴는 기회임이 틀림없습니다. 동료의 이른바 ‘양전한 뒤에 거두는 쌀을 호서를 표준으로 삼아 그 두수(斗數)를 감하자.’는 것도 좋은 의논입니다. 대체로 동료의 의견은 호서의 10두(斗)의 세제보다 감하되, 참상(站上)의 인부와 말 및 줄곧 연호(烟戶)의 역(役)에만 응하는 사람은 그 속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뜻이고, 일을 주관하는 신하 역시 갖가지 잡역을 거두는 쌀 가운데에 모조리 포함시켜 12두의 세제로 하려는 생각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경기 지방의 형세는 호서와 달라서 출역(出役)하는 빈도와 객사의 왕래를 모두 미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 해청이 해마다 객행(客行)을 지대(支待)하는 명목으로 많은 비용을 마련해 두고 있는데, 객행은 일 년 내내 한 번도 오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에게서는 획일적으로 취하되 국가가 스스로 그 잉여를 챙기게 되므로 본래부터 백성들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 명지(明旨)를 시원스럽게 내리시어 그 절반을 감하고, 갖가지 잡역은 우선 예전 관례대로 따르되 각읍에 엄히 신칙하여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잡역의 적용이 전과 다름이 없고 내는 쌀은 태반이 줄어드는 셈으로, 이와 같다면 그 일이 간편하면서 그 혜택은 넓어지게 됩니다.
신이 앞서의 계청을 정지하고 따로 논집하려고 하였으나 기다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지연하여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동료가 이미 이 일로 인피한 이상 신은 그냥 있을 수 없고, 또 소패(召牌)를 받고도 나아가지 않은 죄가 있으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사간 민유중도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은 경기 지방의 백성에게 부과하는 세제에 대하여 많이 취해서는 안 된다고 언제나 생각하여 구구한 우견을 누차 어전에서 아뢰었는데, 그 요지를 말하자면 오늘 이민서가 진계한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이 처음에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기다리는 바가 있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동료가 정계(停啓)한 일로 신을 나무라니, 그대로 대석(臺席)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민서도 혐의가 있어 처치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이광직은 체차하고 이민서와 민유중은 출사토록 하자고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지평 이합(李柙)이 탑전에서 계청된 일이 동료에게 간통(簡通)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1월 29일 계사

이숙(李䎘)을 부수찬으로,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이정기(李廷機)를 강계 부사로, 유철(兪㯙)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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