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5년 1664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3. 13:29
반응형

1월 1일 갑자

헌부가, 명례(明禮) 등 3궁의 둔장(屯庄)에 관한 계문을 중지하였다. 간원은 중지하지 않다가 며칠 뒤에 역시 중지하였다.
근래에 양사가 아울러 발한, 시장(柴場)·어장(漁場)·염분(鹽盆)·어전(漁箭)·해양(海洋)을 절수하는 일 및 3궁의 일과 같은 논의는, 이것이 모두 백성들의 폐해와 국가의 이해에 깊이 관계되는 것이므로 삼사가 힘껏 간쟁하고 백성들도 기대하였다. 그러나 해를 넘기다보니, 해양에 관한 절수는 비록 조사하여 혁파하게 하였으나 금새 혁파했다가 금새 되돌려주어 두어 해가 못 가서 모두 그전 투식대로 되었다. 시장·어장·염분·어전은 재량하여 제정하라는 전교를 겨우 얻었는데, 삼사가 힘에 겨워 중지하고 마니 끝내 감축하여 혁파한 실상이 없었다. 이때에 3궁의 일도 윤허받지 못하고 중지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논의했던 궁가(宮家)에 면세해 준 일과 공주의 집 칸 수에 대한 일 등 궁척(宮戚)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끝내 윤허를 내리지 않았다. 비록 백성들이 곤궁에 허덕인다는 것으로 온 조정이 힘껏 간쟁하였으나 불쌍히 여기지는 않고 봉식(封殖)만 증가시켜 결국은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변통할 줄을 몰랐다. 사사로운 뜻에 폐고되어 국정이 이렇게까지 어지러워졌으니, 법을 세우고 기강을 바로잡아 모든 일을 정돈해서 쇠퇴한 것을 부흥시키고 피폐된 것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1월 2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민유중은 월과(月課)를 지어 올리지 않아 추고를 받게 되었다는 이유로, 장령 이합은 집의와 서로 피해야 할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아울러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언 맹주서가 아뢰기를,
"평산 부사(平山府使) 김상중(金尙重)은, 읍내에 12세 된 양녀(良女)를 겁간한 죄인이 있는데도 사정에 이끌려 옥사를 늦추고 즉시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양녀의 아버지가 통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호소하자, 노여움을 발하여 장형을 가해서 결국 죽게 하였습니다. 일이 발각되자, 기필코 감추고자 하여 한편으로는 장사 비용을 지급하여 시친(屍親)을 달래고, 한편으로는 죄인을 박살하여 다음에 변명할 자료로 삼았으며 또 그의 가족을 위협하여 장문을 올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전파하는 말이 자자하니, 잡아다가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
전 감사 강유(姜瑜)는 도주(道主)의 신분으로 이미 본읍이 이 옥사를 덮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즉시 안문(按問)하지 않았고 심지어 원고(元告)가 원통하게 죽은 후에도 법에 따라 처치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뒤에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우림 장(羽林將) 이익달(李益達)은 전일의 죄로 볼 때 나라에 엄한 법이 없어서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비록 한평생 폐고(廢錮)되더라도 그에게는 역시 다행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수에 적합한 사람이 아무리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런 사람에게 다시 숙위(宿衛)의 임무를 주어서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비국이 불차탁용자(不次擢用者)를 선출하였는데, 이집(李鏶)·이세선(李世選)·조부(趙裒)·양일한(楊逸漢) 등이 참여하고, 장령(將領)에 적합한 자는 유병연(柳炳然)·성진문(成震炆)·홍중형(洪重亨)·신명전(申命全)·한여윤(韓汝尹)·유동발(柳東發)·신한주(申翰周)·강열(姜說)·민섬(閔暹)·한석(韓)·김세기(金世器)·권도경(權道經) 등이 참여하였다.
옛날에 문사(文士)를 선출할 때는 문예(文藝)를 우선으로 하고 무사(武士)를 선출할 때는 무용(武勇)을 우선으로 하였다. 비록 태고의 덕행으로 선비를 뽑고 지략으로 장수를 선출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의거한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문예로 진출한 자는 재주와 덕망이 간혹 그 가운데 있었으며 무용으로 진출한 자는 지혜와 능력이 역시 그 안에 있었다. 오늘날 옛날 제도를 고원한 것으로 여기고 시행하지 않으며 후세의 신언서판(身言書判) 및 만강초승(挽强招乘)의 유를 또 하류의 재목과 말단의 기예라 하여 취하지 않으니 선택하는 데는 뚜렷한 법이 없고 고하를 결정하는 데는 마음내키는 대로 한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므로 단지 그 사람과의 친밀함 여부로 분별하여 선후를 삼고 명목(名目)을 지어서 등급을 뛰어넘어 지위 높은 대관이 되게 한다. 무사의 경우는 뇌물을 바치고 잘 섬기는 무리가 매번 남들보다 앞에 서게 되어 장령(將領)이다 불차자(不次者)이다 하니,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1월 3일 병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새해가 돌아와서 양화(陽和)가 바야흐로 이르렀으니, 임금이 하늘을 본받아 정사를 행하고 덕(德)과 인(仁)을 베풀 바로 그때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화창한 봄날에 계절에 따라 만물을 생육하는 뜻을 생각하시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소서."
하니, 우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영상 의 말이 옳습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황헌(黃瀗)은 사람됨이 비록 보잘것 없으나 그의 공을 폐기해서는 안 됩니다.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그 당시 병조 참의에 특별히 제수한 것을 보면 그 우대했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후 장오에 연좌되어 여러 해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마는, 지금 풀려나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공신으로 하여금 녹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은 옛날의 법도이니 수용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훈봉(勳封)은 돌려주어서 그로 하여금 식록(食祿)을 얻게 한다면 옳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황헌이 통제사로서 장오에 연좌되어 수감 중에 있을 때 선왕께서 특별한 전교를 내려 정배(定配)했었는데 지금 이미 풀려났다. 지금 어떤 죄적(罪籍)에 있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선조(先朝)에서 별도로 판부(判付)한 전교가 있었으니 황헌의 공이 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귀양갔다가 석방하라는 은전을 받았으니 이는 바로 고신(告身)을 빼앗은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친공신(親功臣)은 비록 중죄를 범했더라도 이미 직첩(職牒)을 수여한 후이면 훈부(勳府)로부터 으레 군직에 부쳐서 녹(祿)을 지급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헌의 직첩을 다시 주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여성제(呂聖齊)가 아뢰기를,
"황헌이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공로 때문입니다. 지금 만일 직첩을 돌려주어서 봉록을 받게 한다면 국법으로 비추어 볼 때 어떻다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록을 지급하는 것은 거두어 쓰는 것과 다르다."
하였다. 수어사(守禦使) 김좌명이 아뢰기를,
"지난해 우상 홍명하가 수어사가 되었을 때 철원(鐵原)의 진병(鎭兵)이 적어서 이천(伊川)·춘천(春川)·금화(金化)·평강(平康)의 병사로 철원에 이속시키고자 하였으나 미처 품정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4읍의 병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춘천은 3천, 평강은 1천 8백, 이천은 1천 3백, 금화는 1백 60 정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판윤 허적이 아뢰기를,
"마땅히 본도로 하여금 호적을 조사하여 계문하게 해서 그 병사의 실수(實數)를 보아 철원으로 이송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는 나이가 70이 된 후에 노병(老病)으로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비록 허락하지 않았더라도 이해가 스스로 ‘이미 공사(供仕)할 수 없다면 의리상 감히 녹을 받을 수 없다.’고 하고 봉록(俸祿)을 받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국가에서 공신을 우대하는 도에 있어서 마땅히 별도로 내려 주는 은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원두표는 아뢰기를,
"이해가 비록 자처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나, 정사 공신(靖社功臣) 50여 명 중에 지금 생존해 있는 자는 단지 4명뿐이니, 우대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매년 봄·가을에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니, 호조에서 해마다 쌀 10석, 대두(大豆) 5석을 지급하였다. 교리 여성제가 아뢰기를,
"새해 사대(賜對) 때 양사의 장관이 명소(命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간 이경휘는 탄핵받은 것으로 불안해 하고 있으며, 대사헌 유철은 갑자기 정고(呈告)하고 소명에 따르지 않고 있으니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박세당이 인피하기를,
"신이 지난번 간직(諫職)에 있을 때 김만기가 허적을 논핵하고자 하였는데, 신이 사실 동조했습니다. 지금 만기는 탄핵을 받고 아직도 죄적(罪籍)에 그대로 있는데, 신은 일을 함께 했던 사람으로 붕당이 다른 이를 공격한 죄를 혼자만 면하였으니 어찌 감히 구차하게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대헌(臺憲)의 직책을 거듭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옥당이 아뢰어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지평 홍만용(洪萬容), 정언 맹주서(孟胄瑞), 헌납 이지무(李枝茂) 등이 정조하(正朝賀)의 반열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4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5일 무진

상이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상이 오랫동안 몸이 편치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조회를 보게 되니, 중외(中外)가 모두 기뻐하였다.

 

대사간 이경휘가 소명을 따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여 치사할 것을 청하기를,
"신이 늙고 병든 몸으로 이 새해를 맞이하여 하찮은 나이만 70이 되었습니다. 예경의 밝은 훈계를 환히 상고할 수 있듯이 신하의 진퇴 문제는 시종 의리대로만 해야 하고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예로써 해야 하는 것으로, 신이 그만둘 시기를 알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하고, 또 자기 한평생에 관하여 역력히 서술하기를,
"신이 요행히도 정사(靖社)하던 초기에 급제하고 수년 사이에 거듭 장원한 탓으로 그릇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별안간 화려한 관직에 올랐습니다. 호당(湖堂)의 사가를 받고 문원(文苑)의 극선에 뽑혀서 당상직까지 그대로 띠고 있는 자는 한 시대를 통틀어 몇 사람이 안 되는데 재주도 없는 신 같은 자가 외람되게 연달아 받았습니다. 또 제학(提學)으로부터 문형(文衡)에 나아가고 이윽고 아전(亞銓)을 거쳐 태재(太宰)에 탁배되더니 드디어 태정(台鼎)이 되어 두세 번에 이르렀고, 이에 수규(首揆)에 올랐습니다. 조정에 들어선 지 42년 동안 대신 생활은 지금까지 20년이나 되었으니 포의(布衣)의 신분으로는 최대의 영광입니다. 다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경석이 세 조정을 내리 섬겼는데, 그의 충성과 효성과 공검(恭儉)으로 당시의 신신(藎臣)이 되었다. 그가 자술한 경력은 대체로 그의 실적이었으니, 근래 대신이면서 최후를 잘 마친 자로 세상에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명망은 넉넉하지만 지략이 미치지 못하여 역임한 관직이 비록 많으나 풍도와 절의가 맞지 않았으니, 완전한 덕을 갖추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 어찌 그렇지 않은가.

 

1월 6일 기사

선혜청이 탑전에서 품정한 일로 아뢰어, 호남 산군에 대하여 작포미(作布米) 1두(斗)를 첨가해서 정식을 삼아 전에 6두 5승(升)이던 것을 통틀어 7두 5승으로 하였다.

 

장령 장선징이 아뢰기를,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동성(同姓) 종매(從妹)의 상에 한 번도 찾아가 조곡(吊哭)하지 않았으며 성복(成服)도 하지 않았으니, 예를 멸시함과 행실이 형편없는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밖에도 평소에 교만 패려한 태도가 한 가지뿐만이 아닙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월 7일 경오

정언 윤우정(尹遇丁)이 3궁(宮)의 둔장(屯庄)에 관하여 아뢰었던 것을 중지하였다. 물의가, 거듭 발의한 논의를 홀로 중지하여 대관의 체례를 어겼다고 하므로, 이 때문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8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합천 군수(陜川郡守) 이선기(李善基), 거창 현감(居昌縣監) 최원립(崔元立)이 군기(軍器)를 각별히 구비하였다 하여 특명으로 말을 하사하였다.

 

장령 장선징이 아뢰기를,
"종실(宗室)을 성 밖에 거처할 수 없게 했던 국법이 지극히 엄격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성 밖에 거처하는 종실이 매우 많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일찍이 인조조(仁祖朝)에 유사를 신칙하여 아울러 조정으로 돌아오게 했었는데 그뒤에 구습에 젖어 고향에서 편히 지내면서 태연스럽게 녹을 받고는 거동하거나 문안할 일이 있으면 해당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요행스럽게도 일이 없기를 도모하니 그 법례에 있어서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종부시로 하여금 일일이 찾아서 모두 서울로 돌아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때 녹을 받은 종실이 1백 60여 명이었는데, 외지에 나가 생활하는 자가 40여 인이었다. 그뒤에 종부시가 외지에 나가 생활하는 자에게는 녹봉을 지급하지 말도록 청하니, 따랐다.

 

1월 9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관학 유생에게 인일(人日)001)  에 실시하던 과제(課題)를 연고가 있어서 물려 시행하기로 했었는데, 이날에 이르러 시취(試取)하였다. 생원 민시중(閔蓍重)은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생원 김정태(金鼎台) 이하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도목 대정을 실시하였다.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사간으로, 강호(姜鎬)를 장령으로, 이세장(李世長)을 검열로, 이경과(李慶果)를 지평으로, 조세환(趙世煥)을 정언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부제학으로, 민유중(閔維重)을 부응교로, 유계(兪棨)를 이조 참판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홍주삼(洪柱三)을 헌납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이두진(李斗鎭)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상이 의관 정후계(鄭後啓)를 특별히 제수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삼았다.
수령은 백성을 친애하는 관직이므로 국조(國朝)의 고사(古事)에 의관 잡류에게 맡긴 경우가 전혀 없었다. 인조 때 유후성(柳後聖)이 사족(士族)으로 국의(國醫)가 되어 처음으로 기읍(畿邑)의 수령이 되어 6, 7읍을 역임하였고, 그뒤 정후계·윤후익(尹後益)·이동형(李東馨)·권유(權愉)·최유태(崔惟泰)·최성임(崔聖任)·김만직(金萬直)과 같은 자들이 모두 금중(禁中)에 거처하면서 환시와 서로 결탁하여 무시로 출입하며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궁중의 상가(賞加)가 한계와 절도가 없이 기읍을 두루 거쳐 혹은 3, 4읍에 이르렀으니 혼잡이 극심하다 하겠다. 이조가 아뢰기를,
"남양(南陽)은 기보(畿輔)의 요충지입니다. 또 겸영장(兼營將)을 정후계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후계의 관질은 숭품(崇品)인데 수령에 제배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듣지 않다가 그뒤에 정원이 아룀으로 인하여 파주(坡州)로 바꾸어 차임하였다. 대간도 논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부호군 조경(趙絅)이, 상소하여 윤선도를 구원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받고 파직되어 해를 넘겼는데 이때 이르러 비로소 서용되었다. 이어 상소하기를,
"신축년에 올렸던 죄스러운 말은 대개 충심으로 인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으나 세상의 지적 대상이 된 것은 실로 노망한 발언 때문이었으니 비록 삼위(三危)에 귀양하게 된다 하더라도 신이 어찌 감히 원망하겠습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은덕에 도움을 받아 다 죽어가는 신으로 하여금 기보(畿輔)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게 해서 90세 된 노모를 조석으로 봉양하게 하시니 성은이 하늘과 같아서 신의 몸이 가루가 되어도 보답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서용하라는 명에 있어서는 삼가 국법이 너무 관대하여 유사의 의혹을 받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처음에 선도가 예론(禮論)을 빌려서 사림(士林)을 화로 얽으려 하였는데 조경(趙絅)이 그 논의에 부회하여 흉악한 선도를 신구하여 직언을 하였다고 하면서 심지어 이존오(李存吾)가 고려가 망해가던 무렵에 항언(抗言)하던 것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사람의 편파적인 것이야 진실로 책망할 것이 없지만 상서롭지 못한 그의 말은 더욱 놀랍다. 예론의 득실에 대해서는 비록 시비가 분분하여 분변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선도가 화를 떠넘길 계획을 하였다는 것을 사람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그 누가 그의 속셈을 환히 알지 못하겠는가. 그의 당여가 된 자 중에 약한 자는 몰래 도와 주고 강한 자는 드러내서 구원하였는데 장문을 드러내어 정직하다고 신구한 경우는 조경으로부터 출발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비꼬이고 기탄없음이 너무도 심하다.

 

1월 10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유철을 병조 참판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응교로, 오시수(吳始壽)를 이조 정랑으로, 임의백(任義伯)을 우윤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병조 참지로 삼았다. 【도목 정사를 끝마치지 못해 이 날 이어서 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6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치계하기를,
"남해(南海)·거제(巨濟)에 정배된 죄인이 이런 흉년을 당하였으니 맞이하는 주인이나 찾아가는 손이 모두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죄명을 찾아내서 참작하여 이배(移配)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장문을 형조에 내렸다. 회계하기를,
"본도에서 올려보낸 가을 석 달 동안 귀양갔던 자들의 죄안을 가져다 살펴보니, 양읍에 정배된 죄인으로 해가 오래 되었거나 달아난 중국 사람을 제외하고 현재 유배된 자를 합하면 모두 60명인데, 살옥(殺獄)에 연류되었거나 관물을 훔쳤거나, 어떤 자는 간사(奸事) 때문에, 어떤 자는 송사 문제로 오르는 등 죄명이 일정하지가 않았습니다. 당초에 절도에 귀양보낸 것은 의도한 바가 있었던 것인데 지금 와서 육지로 이배(移配)시키는 것도 온편하지 않을 듯하고, 만약 다른 도로 이송한다면 소란스러운 폐단이 있을 뿐 아니라 중로에 죽게 되는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참작하여 도내에 조금 풍년이 든 읍에다가 이배시키도록 하되, 그 중에 머물러 살면서 이배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소원에 따라 그대로 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상 감사 이상진이, 양산 군수 안명로(安命老)가 지은 《연기신편(演奇新編)》을 올렸다. 명로는 자신만이 홀로 악기(握奇)의 법을 얻었다고 여기고서 척계광(戚繼光)의 병제(兵制)를 변조하여 스스로 《연기신편》이라는 글을 찬술하였다. 이때에 이상진이 간행하여 한 질을 진어하면서 아뢰기를,
"오늘날 군진에서 실행하는 것은 단지 척계광의 법인데, 도리어 오위(五衛)의 옛날 제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병사를 담당하고 있는 신하에게 물어보고 안명로의 법을 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다. 해조가 경솔하게 변통할 수 없다고 하자, 드디어 그 일을 그만두었다.
안명로는 망령되고 용렬한 사람이다. 효종조 이후에 군사일에 유의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장수다운 책략이 있는 자로 자처하더니, 등급을 뛰어넘어 발탁되어 광주(廣州)·수원(水原)·의주(義州)·평안(平安) 등지의 감사직을 맡게 되자, 내심 기뻐하여 사모한 나머지 망령스레 병서를 지어서 국가의 제도를 바꾸려 하였다. 척계광의 법이 비록 옛 법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전부터 실행해 오면서 누차 시험하여 남방에서 여러번 공이 있었다. 이것이 어찌 안명로 같은 무리가 그 득실을 논의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명로가 그뒤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자, 적당을 축출하려다가 형을 받아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 그 사람이 이렇게 보잘것없는 것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그 사람을 대단히 믿고서 그 글을 드러내고 심지어 간행해서 조정에 올려 이것으로 당시에 시행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이 사람도 역시 알 만하다.

 

1월 11일 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2일 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3일 병자

대사헌 이일상, 장령 장선징이 출사하자마자 바로 들어갔는데, 물의의 비난을 받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15일 무인

월식이 있었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또 소장을 올려 치사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내 뜻을 유시했는데도 경이 이처럼 사양하니 나는 실로 경의 의중을 모르겠다. 뒷날 등대했을 때 면유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월 16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이합(李神)을 장령으로, 조세환(趙世煥)을 지평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정언으로, 오두인(吳斗寅)을 교리로, 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삼았다.

 

정언 정재숭(鄭載嵩)이 아뢰기를,
"나주 목사 이하악(李河岳)에게, 병조의 회계로 인하여 심지어 가자하라는 명까지 있었습니다마는, 도신이 계문한 것이 비국이 추국하기를 청한 후에 나왔으니 물정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각별히 대비한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일로 인하여 이품(二品)의 관질에 오른 자는 없었습니다. 재상의 자리는 통정(通政)의 품계에 비하면 경중의 구별이 있으므로 경솔하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개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다가 뒤에 그대로 따랐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경상도 창령현(昌寧縣)에서 공조에 납부할 칠(漆)과 제용감(濟用監)에 납부할 정포(正布) 40필이 모두 미납으로 본관(本官)의 장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 현감 윤이선(尹以宣)이 재임할 당시에 칠 값으로 오승포(五升布) 2백 55 필과 정포 값으로 쌀 1백 20석을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 이창극(李昌克)에게 지급하여 그로 하여금 방납(防納)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사 주인(京司主人)은 이미 납부했다고 말을 합니다.
주(州)와 현(縣)이 방납하는 것을 국가에서 금기 사항으로 매우 엄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윤이선이 수령의 신분으로 사정을 따라 법금을 어기고 심지어 1백 20석의 쌀을 상정(詳定)한 외에 지나치게 더해 주었으니 더욱 가증스럽습니다. 모두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려서 다른 사람을 징계해야 합니다. 윤이선은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방납한 사람도 유사로 하여금 법에 따라 죄를 부과하게 하되, 받았던 쌀은 일일이 다시 징수하여 진구할 경비에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특명으로 세사식물(歲賜食物)을 내린 것 때문에 상소하기를,
"신이 노병으로 죽어가는 마당에 문안드리고 조하(朝賀)하는 반열에서 떠난 지가 지금 5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성상께서 음식물을 하사하시고 아껴주시니 이는 근세에 전혀 없던 일입니다. 신이 연전에 소장을 올려 휴가를 청하였으나 애처롭게 보아 살펴주심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상록(常祿)을 사양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또 특이한 은수를 받게 되니 잘못 은혜를 받았다는 기롱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마침 은총을 공고히 하는 죄가 되었으니 신은 지금 두렵고 부끄러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범연한 뜻이 아니니 경은 안심하고 받도록 하라."
하였다.

 

균전청(均田廳)을 파하였다. 균전을 이미 마치자, 선혜청이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기를 청하여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청을 설치한 것은 전적으로 경기 지방의 민력을 펴고자 한 것인데 25사의 공물과 각항(各項)의 수용가가 모두 거두는 쌀 16두 안에 들어 있고 이외에는 다른 잡역이 없었으므로 경기 백성들이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후로 전결(田結)이 점점 축소되고 잡역이 점점 많아져서 경사에서 분할하여 징수하고 각읍에서 함부로 거두어들여 갖가지로 침어하니 경기 백성이 날이 갈수록 더욱 곤궁해집니다.
지금 균전을 겨우 마쳤는데 새로운 결수가 한 배에 지나지 않으니 관수(官需)를 감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비용을 절약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난해의 양전(量田)의 결수를 모두 계산해 보면 6만 3천 7백 21결인데 여러 가지 복호(復戶) 6천 7백 21결을 제하고 나면 실지의 결수가 5만 6천 6백 45결이 됩니다. 여기에서 매결마다 12두의 쌀을 징수한다면 4만 5천 3백 16석이 되는데, 그 중에서 3만 석은 25사 공물 및 진상할 물선 값으로 정하고, 1만 5천 3백 16석은 본도에 유치해두어 영수(營需)·관수(官需)와 사객(使客)의 지공과 대소 잡역의 비용으로 삼으니, 그전에 쌀 16두를 징수하던 것에 비추어 보면 4두를 이미 감하였고 또 부과한 외에 징렴하는 것을 금지한다면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관수로 지공하는 쌀을 수를 헤아려 분급한 외에 그 읍의 대소에 따라 헤아려서 여미(餘米)를 유치해두어 부마(夫馬)의 역 및 비상시의 사용에 대응토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관수와 영수는 옛날에 비해 3분의 1을 감해서 쌀을 징수하되 봄에는 3월에 하고 가을에는 10월에 하여 가을에는 구결대로 적용하고 봄에는 신결대로 적용하소서.
열읍의 관수(官需)는, 주(州)와 부(府)는 1백 20석, 군(郡)과 현(縣)은 1백 석으로 하되, 사객(使客)에게 지공하는 쌀은 대로(大路)와 소로(小路), 숙참(宿站)과 과참(過站)을 구분하여 차정하되, 대로의 숙참인 경우는 1백 50석을 주고 과참인 경우에는 1백 40석을 주며, 중로의 숙참인 경우에는 1백석을 주고 과참인 경우에는 70석을 주며, 소로의 과참과 숙참인 경우는 50석을 주고 벽읍에 사객이 없는 경우는 논하지 않습니다.
아록전(衙祿田)·공수위전(公須位田) 및 관둔전(官屯田)은 그대로 두고 파하지 말되, 단지 세미(稅米)만은 허락하고 치계(雉鷄)·시목(柴木)·곡초(穀草)·빙정(氷丁)인 경우는 4결에서 수용하도록 하고 진상할 물선의 명목이 각읍에서 응당 납부해야 할 것에 관계된 자는 모두 경청(京廳)에서 경사 주인에게 값을 지급하고 각읍에는 징수하지 말도록 하고 참상의 부마가(夫馬價)는 모두 쌀로 계산하여 지급하고 민결에서는 내지 않게 하소서.
사도시의 갱미(粳米)·황두(黃豆)·대두(大豆)는 호조에서 값을 계산하여 직접 그 관사에 지급하여 공진하도록 하소서. 봉상시(奉常寺)·내자시(內資寺)·사섬시(司贍寺) 등의 제사 공물이 전세조에 관계되는 것도 이와 같이 하소서. 연읍(沿邑)에는 쌀로 거두어 들이고 산군(山郡)에서 혹 전곡(田穀)으로 대납하겠다고 하는 자는 3분의 1로 허락하소서. 여미 1만 2백 40석은 본도에 유치해두어 부과한 외에 부역에 대비하게 하고 연말이 되면 본청에서 회록하게 하소서."

 

1월 17일 경진

집의 송시철(宋時喆)이 부름을 받고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18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합 등이 아뢰기를,
"황헌이 탐장죄를 저지른 것에 대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국법이 지극히 엄하므로 상형(常刑)에 복죄되어야 마땅한데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조정에서 그의 공을 생각해준 데서 나온 것인데, 지금 또 그 직첩을 주어 그의 훈봉(勳封)을 복구시켜 준다면 왕법으로 논해볼 때 결단코 그럴 이치가 없습니다. 황헌에게 직첩을 환급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19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20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완산 부부인(完山府夫人) 최씨(崔氏)를 발인(發靷)하자, 대왕 대비가 대궐 안에다 자리를 베풀어 놓고 망곡례(望哭禮)를 행하고 장사날에도 망곡례를 행하였다.

 

유철(兪㯙)을 도승지로, 이단상(李端相)을 집의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이일상(李一相)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불행하게도 전란 당시 동기(同氣)002)  가 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지극히 원통하게 여기는 뜻이야 타고난 천성에 뿌리를 두었으니 어찌 잠시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소시에 《예경(禮經)》을 읽어보니 공자가 형제의 원수를 갚는 의리에 대해 논한 것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신이 지난해 조정에 나갔던 날 피차 대소의 일을 간섭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은 신이 마음에 숨겨져 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그래서 감히 《예경》을 의거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하소연하였더니 우리 선왕께서 스스로 사의(私義)를 펴도록 허락하셨으므로 신은 마음놓고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매양 성인이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사물의 이치를 다하는 도리를 흠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들으니 근일에 종신(從臣) 한 사람이 이런 의리를 대략 내세워 전하에게 간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를 정위(廷尉)에게 내리고 끝내는 파직시키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그 사람이 내세운 것이야말로 조손(祖孫)의 큰 윤기(倫紀)로써 주자(朱子)가 이미 ‘복수는 5세(五世)003)  가 다한다.’는 설을 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천경(天經)·지의(地義)로서 민멸할 수 없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리로 미루어 보건대, 저들의 일에 간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인심에 있어서의 당연한 일인 데다가 그 사람이 또 그 아비의 뜻을 받든 것이었으니, 죄가 없어야 할 듯한데 오히려 죄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은 망령되게도 감히 앞에서 내키는 대로 마구 행동해서 시의(時義)를 범하였으니, 어찌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여 편안히 조적(朝籍)의 말석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는 것은 단지 이 인륜이 있기 때문이니 진실로 이 인륜을 버린다면 인류는 금수가 되고 중국은 이적(夷狄)으로 전락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주부자(朱夫子)가 일찍이 기록하였는데, 송(宋)나라 유공(劉珙)004)  이 조부의 원수를 갚으려 했는데, 그가 진강(鎭江)을 지킬 때 오랑캐의 사신이 우호 관계로 와서 큰 기를 배 위에 세우자 유공이 노여워하며 다른 기로 바꾸었습니다. 이에 접반사(接伴使)가 몹시 두려워하며 급히 찾자, 유공이 말하기를 ‘그 기를 나의 고을 경내에 세우겠다고 한다면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고 경내를 벗어나서야 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송나라가 패망한 나머지 고종(高宗)이 오랑캐에게 신(臣)이라고 일컬었으니, 두려워하고 굴복한 그 정상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필부로서 사의(私義)를 펴는 것을 이처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였기 때문에 윗사람도 믿고 의지할 바가 있게 되어 왕업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형세는 송나라 때와는 더욱 다릅니다. 비록 공공연하게 말하고 전파하여 이 의리를 밝히지는 못하더라도 심한 고통과 함께 원망을 품고서 절박한 심정에서 부득이하여 하는 말을 수용함으로써 천하의 대방(大防)을 보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경우 인심이 전적으로 어두워지고 천리가 모두 없어지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간힘을 다 쏟아 그런 말이면 모조리 없애면서 온통 그런 방향으로 몰고가니, 이는 정말 주 부자가 탄식한 바와 같습니다. 신은 식견이 어두워 세상과 서로 맞지 않으니 감히 이 세상에 다시 설 수 없습니다.
다시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아울러 신의 정세를 양찰하시어 속히 요청을 들어주심으로써 성질이 편협하여 너그럽지 못하고 우활한 저의 지조를 온전하게 갖도록 해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선조(先朝) 때 명을 받은 것을 어찌 오늘날 김만균(金萬均)의 일로 비교하여 같이 취급할 수 있겠는가. 경이 인혐하여 불안해 하는 것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하였다.

 

우부승지 김시진(金始振)이 상소하기를,
"신은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합니다마는 익히 보아오건대, 조정에서 지난해 난리통에 죽은 집들에 대해 단지 그 아들만 객사(客使)의 예와 나라 밖의 일에 참여하지 않도록 허락하였을 뿐, 그 형제와 할아버지 손자는 응당 면하게 해주는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사신으로 차견한 자가 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감히 사양한 자가 없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할아버지와 손자, 형과 아우는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 비하여 간격이 없을 수 없고 사정도 차등이 있으며, 공적인 논의는 폐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사사로운 뜻을 펴도록 허락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신이 실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김만균이 관소(館所)에 배종(陪從)할 일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한 것에 대하여 신이 마침 간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 외람하고 주제넘는 행위에 대하여 탄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찬성 송시열이 올린 상소를 보니, 만균을 옥리에게 내린 것이 잘못이라고 극언하였고, 심지어 ‘인륜을 버림으로 해서 짐승이 되어간다.’고 말하였으니, 신은 여기에서 삼가 두렵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른바 천하의 법을 보전하지 못하여서 인심을 어둡게 하고 천리가 인멸되게 한다는 자는 신이 바로 그 죄의 우두머리입니다. 신의 관직을 삭탈하고 신의 죄상을 다스려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소서."
하고, 그뒤 이경억이 승지가 되어 역시 상소하기를,
"신이 앞서 본직에 있을 때, 김만균이 연일 숙직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례를 인용하여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그대로 하옥시키라는 명이 있었으니, 만균이 사사로운 뜻을 펴고자 했던 것을 죄로 삼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찬성 송시열의 상소 내용에 만균이 옥리에게 나아가게 된 것이 마치 전적으로 상소한 것에 연좌된 것처럼 하여 천하의 의리를 보전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니, 어둡고 그릇된 신의 죄를 스스로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아울러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하였다.

 

광주(廣州) 저자도(楮子島)에 사는 사노(私奴) 선(先)이 한 마을에 사는 세현(世玄)과 다투다가 노여움을 견디지 못하여 세현을 찔러 죽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결박해 놓았는데, 세현의 처 임생(任生)이 남편이 비명에 간 것을 원통하게 여겨 즉시 손수 칼로 선을 찔러서 복수를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아내가 남편의 원수를 갚는 경우에 적용할 만한 율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려를 내려야 할 그의 열(烈)이 사형을 받을 죄를 충분히 덮을 수가 있습니다. 율문에 조부모나 부모가 남에게 살해되었는데 그 자손이 멋대로 흉악범을 죽였을 경우 장형(杖刑) 60을 가하되, 그 즉시 죽였을 경우는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바로 삼강의 한 분야이므로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를 위하여 복수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장형 60으로 정하여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그 당시에 죽였다면 장형 60의 율도 알맞은 율에 해당하지 않는 듯하다.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이합, 지평 조세환이
"호위청의 군관이 밤을 틈타 무리를 지어 민가를 침입하여 소란을 피우기에 그 군관을 잡아다가 족치고 본청에다 이첩을 올렸는데, 본청에서는 첩문에 인장이 없다는 것과 날짜를 잘못 표기했다는 이유로 몹시 배척하고 색리(色吏)를 추문하여 다스렸다."
는 이유로 인피하니, 헌부가 출사시킬 것을 계청하였다. 그뒤에 세환은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았고, 이합도 홍우재(洪禹載)가 사형을 받아야 하는데 장형을 받게 하였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체직되었다.

 

1월 24일 정해

이조 좌랑 이민서(李敏敍)가,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니, 해조에 내렸다. 조정에 인재가 없으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상이 그의 소원대로 시행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1월 25일 무자

이경억(李慶億)·임유후(任有後)를 승지로, 장선징(張善瀓)을 장령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사람이 수항정(受降亭)에 봉안해 놓은 전패(殿牌)를 훔쳐 파손시켰는데, 단지 본진의 병방(兵房)의 군관 및 색리만 죄를 다스리고 그 곳 첨사는 문초하지 말게 하였다.

 

1월 26일 기축

집의 이단상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은 허약하고 박잡한 기운을 받은데다 성품도 못났습니다. 학업을 제대로 닦지 못하여 방법도 막연한데다 의지할 곳 없는 혈혈단신으로 약관(弱冠)의 나이가 넘어서야 요행히 과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마는, 꿈을 꾸는 듯 술에 취한 듯 터덕거리며 10년을 지나왔습니다. 맑은 조정의 덕화를 받고 부형의 세력에 힘입어서 청현직을 두루 거쳤습니다마는 조금도 보답한 일이 없었고 오로지 술 마시며 말장난하는 것을 조정에서의 사업으로 삼았습니다. 건강 관리도 부주의하여 장년이 되자 이 난치병을 얻게 되었으니 반평생을 회상해 볼 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직 한가로이 물러가서 한 사람의 병든 사람이 되겠습니다. 몇 년 동안 수양하여 정신을 수습하고 몸과 마음을 점검한 다음 신령스런 하늘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사람이 된 후에 혹시라도 조정에서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제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은전을 받는다면 궂은 일 좋은 일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국은(國恩)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겠습니다. 자나깨나 이 마음이 가슴 속에 오갑니다.
그전에 성조에서 각별히 염려하시어 협소한 읍에다 특별히 제수하신 지 1년이 못 되어 갑자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에 비로소 서울로 돌아왔습니다만 파리하고 야윈 모습이 사실 남의 이목을 놀라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평소에 문을 닫고 앉아서 감히 보통 사람처럼 지낼 수가 없어서 이미 이 세상과는 기대를 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해온 신하이지만 평범한 신분이었으므로 한평생 소원은 단지 녹사(祿仕)였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왕위에 오르신 후에 신만은 병이 들어 조정의 반열에서 멀리 떠난 후로 아직 한 번도 성상을 가까이 모시지 못했습니다. 병이 이렇게 심하지만 않았더라도 신에게 한 가닥 지식이 있는데 유독 무슨 마음으로 기꺼이 굶주림을 참아가며 쓸쓸한 해변에서 고의로 웅크리고 앉아 시일을 끌며 마치 감정을 억누르고 이름이나 파는 자처럼 하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신의 관직을 체차하여 수년 동안 몸조리를 하게 하여 성인의 세상에 영원히 버림받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하였다.

 

승지 임유후(任有後)가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일찍이 환란을 당하여 모친을 모시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춥고 배고픔에 떨며 영해(嶺海)에 자리를 잡고 세상을 등지고 생활을 한 지가 20여 년이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으로 터덕거리는 가운데 특별히 조정에서 기억하여 제수하는 사목을 누차 내려주심을 입었는데도 잠깐 와서 뵙고 오랫동안 떠나가게 되어 걱정하며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모자(母子)가 서로 의지하니 시골에 묻혀 있지만 거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모친의 상을 당하여 머나먼 고향으로 돌아가니 무열(茂烈)의 석조(夕照)의 정으로 걱정과 허전함뿐이었으며 고어(皋魚)가 길가에서 곡한 것을 세상에서 가련하게 여기기도 하였습니다.005) 상신(相臣)이 상차하자, 선왕(先王)이 그 말을 지나치게 들으시고 신을 하찮은 곳에서 발탁하시어 훌륭한 곳에다 두시더니 한 해 동안에 여러번 옮겼고 재차 대부(大府)를 맡겼습니다. 이윽고 또 간직을 바꾸어 변성(邊城)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3년 동안 임기를 마치고 나니 선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셨습니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른 초기에 호읍(湖邑)을 맡고 있었는데 마음은 고달프고 정견은 졸렬하여 파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스스로의 분수는 산골에서 한평생을 지내면서 성조(聖朝)의 버림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이 은명이 월등한 등수에서 나와 진흙길에 버려진 사람을 일으켜 문득 청현직에 나아가게 하니 보고 듣는 사람에 따라 조정과 초야가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신이 유독 무슨 마음으로 선뜻 나아가서 높은 벼슬에 이름을 실어 얼굴 부끄럽게 청조(淸朝)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그뒤에 애써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임유후는 지행(志行)이 남다르고 문장(文章)이 특이하였는데 어려서 가변을 만나게 되자 모친을 모시고 멀리 떠나가 바닷가에서 살면서 수십 년 동안 세상과 절교를 하고 지냈다. 상신(相臣) 중에 그를 아는 자가 효우(孝友)와 문예(文藝)로 자주 조정에 천거하여 전후로 관직을 역임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청현직에 올랐다. 대체로 그 사람은 기사(奇士)였는데, 그의 지극한 행실과 굳은 절개는 남들이 미치지 못했다. 그뒤에 누차 국자(國子)와 미원(薇垣)의 천망에 비의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63면
【분류】인사(人事) / 인물(人物)


[註 005] 고어(皋魚)가 길가에서 곡한 것을 세상에서 가련하게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 공자가 길을 가다가 울고 있는 고어를 만났다. 공자가 묻기를 "그대는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슬피 우는가?" 하니, 고어가 답하기를 "나는 세 가지를 잃어서 울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 배우기를 좋아하여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그만 어버이를 잃었으며, 높은 이상을 갖고 용렬한 임금을 섬기지 않다가 이룬 것도 없이 세월만 보냈으며, 어려서 사람과 사귀지 않아 친구가 적은 것입니다." 하였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상신(相臣)이 상차하자, 선왕(先王)이 그 말을 지나치게 들으시고 신을 하찮은 곳에서 발탁하시어 훌륭한 곳에다 두시더니 한 해 동안에 여러번 옮겼고 재차 대부(大府)를 맡겼습니다. 이윽고 또 간직을 바꾸어 변성(邊城)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3년 동안 임기를 마치고 나니 선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셨습니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른 초기에 호읍(湖邑)을 맡고 있었는데 마음은 고달프고 정견은 졸렬하여 파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스스로의 분수는 산골에서 한평생을 지내면서 성조(聖朝)의 버림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이 은명이 월등한 등수에서 나와 진흙길에 버려진 사람을 일으켜 문득 청현직에 나아가게 하니 보고 듣는 사람에 따라 조정과 초야가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신이 유독 무슨 마음으로 선뜻 나아가서 높은 벼슬에 이름을 실어 얼굴 부끄럽게 청조(淸朝)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그뒤에 애써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임유후는 지행(志行)이 남다르고 문장(文章)이 특이하였는데 어려서 가변을 만나게 되자 모친을 모시고 멀리 떠나가 바닷가에서 살면서 수십 년 동안 세상과 절교를 하고 지냈다. 상신(相臣) 중에 그를 아는 자가 효우(孝友)와 문예(文藝)로 자주 조정에 천거하여 전후로 관직을 역임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청현직에 올랐다. 대체로 그 사람은 기사(奇士)였는데, 그의 지극한 행실과 굳은 절개는 남들이 미치지 못했다. 그뒤에 누차 국자(國子)와 미원(薇垣)의 천망에 비의되었다.

 

1월 27일 경인

달이 태백성을 범하였다.

 

1월 29일 임진

지평 박세당(朴世堂)이 부름을 받고 나아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이태연(李泰淵)을 승지로, 유정(兪椗)을 전라 병사로, 이도빈(李道彬)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사간 오두인 등이 아뢰기를,
"임천 군수(林川郡守) 이욱(李旭)은, 호표피(虎豹皮)로 목면을 바꾸는 일을 전적으로 연호(烟戶)에 책임지우고 민결(民結)을 침해하지 말게 한 것은 바로 대동 사목(大同事目)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50여 석의 쌀을 공공연하게 민결에서 거두어 들였으니, 사목을 어기고 마음대로 민결을 사용한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읍내에 강상(綱常)에 관한 옥사가 있었는데 법에 따라 엄하게 다스리지 않고 의례적으로 형벌을 청하여 마치 심상한 살옥(殺獄)인 듯이 하였으니, 그 살옥의 실정을 감추고 구차하게 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꼴이 더욱 놀랍습니다. 우선 파직시키고 본도로 하여금 분명하게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민결을 남용한 일은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사목에 따라 품처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조에 별도로 천거한 자의 명단을 가져다 살펴보니, 동지 유여량(柳汝𣛀)이 천거한 유학(幼學) 심지영(沈之瀛)은 곧 사직(司直) 심지명(沈之溟)의 아우이며, 심지명이 천거한 유학 유여재(柳汝梓)는 곧 유여량의 아우입니다. 지금 이 별천은 범연한 뜻이 아니었는데 서로 자기 아우를 손을 바꾸어서 각각 천거하였으니 사정을 따르고 법을 멸시한 행위가 진실로 매우 놀랍습니다. 아울러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함경 감사 서필원이 치계하여, 목면(木綿) 씨앗을 얻어 백성들에게 재배하는 것을 가르치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평안 감사로 하여금 수십 석을 거두어 모아서 양덕현(陽德縣)의 접경 지역에 두게 하고 함경도로 하여금 가져가게 하였다. 대개 함경도에는 일찍 서리가 내리고 추우며 남도(南道)에서 더러 목면을 심기는 하지만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서필원이 이와 같이 청한 것이다.

 

1월 30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장선징이 사적으로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대사간 홍처량(洪處亮)이 상소하여 체직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