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5년 1664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3. 13:39
반응형

3월 1일 계해

영중추 이경석(李景奭)과 판중추 정유성(鄭維城) 등이 상차하기를,
"신하가 인군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야만 하니, 만일 혹 만분의 일이라도 위태롭게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 지위를 벗어난 짓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품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성상께서는 해를 넘기도록 몸이 편찮으시다가 능에 행차한다는 명을 내리셨으니, 누구인들 ‘우리 인군께서 아무 병이 없으신가 보다.’ 하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매우 두렵게 생각되는 점이 있습니다. 풍기(風氣)가 순조롭지 않고 기온이 절기에 어긋나 두역(痘疫)이 매우 성해 집집마다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먼 곳에 나아가 능소(陵所)에서 하룻밤 묵기까지 한다면, 위태롭고 두려운 것이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길(吉)·흉(凶)·회(悔)·인(吝)은 움직이는 데에서 생기는 것으로 길(吉)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니, 성현이 깊이 경계한 것은 바로 오늘날을 위해 말한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속히 중지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3일 을축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라도 어사 오두인(吳斗寅)은 번고(反庫)할 때에 이미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입암 산성(笠巖山城)의 군기(軍器)에 있어서, 전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하악(李河岳)은 별비(別備)한 물건을 모두 형편없이 하였으며, 파손된 군기도 수리하지 않았고, 산성을 개축함에 있어서 어린아이 장난같이 하였습니다. 또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실결(實結)을 재결(災結)로 삼은 정상을 모두 직접 보았으면서도 서계에 갖추어 진술하지 않았습니다. 간관으로서 사실대로 논계하지 않고 단지 사적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말을 전했으니 일이 매우 형편없습니다. 오두인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참을 마치고 대신(大臣)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는데,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현재 전염병이 매우 성하여 여염 사이가 대부분 정결하지 못한데, 이러한 때에 능에 행행하시는 것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원임 대신(原任大臣)도 차자를 올려 진달했으니, 중지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참찬 허적(許積)도 이러한 뜻으로 진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를 넘기도록 여러 능에 전알(展謁)하지 못해 반드시 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떻게 정결하게 되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만일 중지할 수 없다면 갔다가 하룻밤 묵고 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평시의 제향(祭享)은 으레 4경 초에 했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룻밤 묵고 오는 것으로 정하고 나서 조금 느즈막이 때에 따라 일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4경에 제사를 지내고 다음날 환궁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능에 행행하여 하룻밤 묵는다면 내국(內局)의 제조 1원은 마땅히 입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과 도승지는 형편상 뒤에 남아 있기 곤란한 입장이고 신도 현재 사복시 제조로서 담당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전례에는 유도 대장(留都大將)으로 하여금 겸하여 살피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북로(北路)에는 궁장(弓匠)도 없고 궁각(弓角)도 없어 활을 만들 수 없는데, 매번 서울에서 만들어 보낼 수도 없습니다. 북도(北道)의 무사는 옛적 산서(山西)의 장재(將材)와 같이 뛰어나니, 궁시(弓矢)를 가르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호조에 궁각이 매우 넉넉하게 있다 하니, 궁각과 궁장을 보내 활을 만들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꼭 서울의 궁장을 보낼 필요는 없다. 지방의 장인(匠人)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양남(兩南)의 경우는 길이 매우 머니, 평안 병영(平安兵營)으로 하여금 장인을 들여 보내게 하고 병조 판서에게 그 일을 담당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두표에게 묻기를,
"훈련 도감의 유황(硫黃)을 사온 자에 대해 어떻게 상을 주려고 하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전에 홍희남(洪喜男)이 유황을 사왔을 때에는 그의 아들을 가자하고 희남은 동지(同知)에 제수했습니다. 이번 이응상(李應祥)의 경우는 마땅히 가설첨지(加說僉知)로 상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강화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강도(江都)의 일을 품정(稟定)하려고 입시하였는데, 나아가 아뢰기를,
"강도의 군병은 기예가 형편없습니다. 신이 부임한 뒤 별파진(別破陣)·무학(武學)·속오(束伍) 등에게 포 쏘는 것을 시험보였는데, 간혹 포성이 나오기도 전에 몸을 땅에 엎드린 자도 있었습니다. 이에 신은 포를 쏠 줄 아는 중군(中軍)들로 하여금 화약을 재워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하리(下吏)와 관속(官屬)들을 뽑아 모두 포 쏘는 것을 익히게 하였더니, 부 안의 사람들 중에서도 익히기를 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간에 총을 가진 자가 매우 적은데, 본부에 있는 것은 겨우 5백여 자루여서 두루 나누어 주고 쏘는 것을 익히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각 진보(鎭堡)에 있는 것을 주도록 하라. 그리고 경아문(京衙門)에서 이어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바닷가에 제방을 쌓아 길을 통하게 한 곳 가운데 세 곳을 아직 쌓지 않았는데, 둘레가 거의 이십 리나 되니 또한 급히 쌓아야만 합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소신이 일찍이 병조 판서였을 때 재력(財力)을 모아 보내 거의 다 쌓았습니다. 선왕이 홍중보(洪重普)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지금 복양이 세 곳을 쌓지 못했다고 하니,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쌓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각 진보(鎭堡)의 형세는 어떠한가?"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선왕께서 ‘적이 올 경우 망루가 없을 수 없다.’ 하시면서, 신이 유수(留守)로 있을 때 신으로 하여금 각보(各堡)를 창설해서 적의 상황을 살피는 곳으로 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경군(京軍)을 나누어 보내 파수하게 하였으므로 참으로 믿을 만하였습니다."
하고, 복양이 또 아뢰기를,
"본부에 저장되어 있는 화기(火器) 중에서 이른바 불랑기(佛狼機)는 대포 중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것입니다. 경상 병영(慶尙兵營) 및 통영(統營)으로 하여금 동래(東萊)에 저장해 둔 구리와 쇠를 가져다가 수백 자루를 더 만들어 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포 쏘는 것을 익힐 때에 화약이 부족하니 동래부에 있는 유황을 지금 마땅히 올려와서 호조로 하여금 많은 양을 나누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신이 강도(江都)의 형세를 두루 보니, 둘레가 거의 3백 리에 달합니다. 그런데 각진(各鎭)이 혹 십 리 밖에 있기도 하고 혹 이십 리 간격으로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산으로 서로 막혀 통해 바라볼 수가 없으니, 만약 적이 조강(祖江)으로부터 배를 탄 채 강물을 따라 내려온다면 곳곳에 정박할 수가 있어 방어하기 곤란합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평지에서도 싸울 수 있는데 더구나 적이 배를 타고 와 육지에 내릴 즈음에 어찌 공격할 수 없겠습니까. 만약 전혀 인력을 쓰지 않는다면 아무리 견고한 요새일지라도 적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복양이 이어서 정포진(井浦鎭)의 형세가 하늘이 낸 요새지임을 극력 아뢰었다. 두표가 아뢰기를,
"유혁연(柳赫然)으로 하여금 가서 그 곳의 형세를 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수가 내려간 뒤 유혁연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본부 사람 구원일(具遠一)은 정축년007) 갑진(甲津)이 함락될 때에 육지에 내려 싸우려고 유수에게 군사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수가 군사를 주지 않자, 원일은 성을 내어 크게 꾸짖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본부에서 절사(節死)한 세 사람 중에서 이 사람이 최고이기 때문에 맨 먼저 충렬사(忠烈祠)에 모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두 사람의 경우는 자손의 진소(陳疏)로 인해 증직의 은택을 입었는데, 원일의 경우는 그의 자손이 미약하여 진달하여 청하지 못해 아직까지 증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온 도의 사대부들이 모두 흠전(欠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똑같이 증직하라고 하였다. 중보와 두표가, 양호(兩湖) 유생들이 황산 서원(黃山書院)의 사액(賜額)을 요청한 것에 대해 허락해 주라고 청하니, 상이 묻기를,
"서원은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니, 허적이 답하기를,
"백록동(白鹿洞)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무엇을 하려고 설치하였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서원은 선현이 거쳐갔던 곳에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거처했던 향리에 설치하기도 하여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선비들은 의당 선성(先聖)을 가장 우러러 사모한다고 여겨지는데, 어찌하여 향교에 모여 독서하지 않고 반드시 서원에 들어간 뒤에야 유도(儒道)를 높이 받드는 것이 되겠는가. 내가 이 서원에 사액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겹쳐서 설치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지난번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절수(折受)한 해양(海洋)을 모두 혁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임해군(臨海君)이 절수한 아산(牙山) 영공암(令公巖)의 해양도 혁파하는 가운데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추부(中樞府)에서 세(稅)를 거두고자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혁파하도록 하였다가 곧바로 세를 거두도록 허락하니, 일의 체계에 있어 온당치 못합니다. 추부(樞府)는 바로 대신(大臣)의 아문이므로 신들이 감히 방계(防啓)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계달했기 때문에 윤허했는데 사리에 있어 온당치 않으니,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3월 4일 병인

권대운(權大運)을 승지로, 윤형성(尹衡聖)을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정언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권령(權坽)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침을 맞았다.

 

3월 5일 정묘

영중추 이경석과 판중추 정유성이 상차하기를,
"전후로 변이(變異)가 계속해서 일어난 것에 대해서는 하나 하나 셀 수도 없습니다. 우선 근일에 일어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나는 것이 해를 넘기도록 계속되며, 봄에 여름철의 장마처럼 비가 계속 내리고, 쓰러졌던 잣나무가 다시 일어나며,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큰 내의 흐름이 끊어졌는데, 이러한 때 영동(嶺東)에서 지붕이 날아가는 강풍이 또 불었으니, 이것은 모두 비상한 재변입니다. 하늘이 우리 전하에게 경고하는 것이 자상하게 명하는 정도일 뿐만이 아니니, 또한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상께서는 마땅히 삼가는 자세로 몸을 닦고 반성하여 이렇게 성상의 건강이 조금 나아진 때에 마음 공부를 나날이 새롭게 하시고 대신과 유신에게 자주 진대(進對)할 것을 명하여 경전(經傳)을 강론하고 치도(治道)를 자문하셔야 할 것이니, 이는 실로 오늘날의 급무로서 늦추지 말고 반드시 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지금은 결코 능침에 행행하여 성묘할 때가 아닙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두역(痘疫)과 전염병이 다시 더욱 창궐하여 여염 사이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더욱이 바람이 아직 쌀쌀하고 길도 먼데 이를 무릅쓰고 행차하여 산과 들에서 온 종일 지내신다면, 이는 참으로 지극히 존귀한 분이 신중하게 처신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신들은 삼가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으며 이르기를,
"경들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침을 맞고 나자, 약방 도제조 원두표가 아뢰기를,
"상께서 현재 침을 맞고 계시니 능에 행차하는 것을 뒤로 물려 행하소서."
하니, 상이 날을 물려 행하라고 하였다. 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광주 부윤(廣州府尹) 유창(兪瑒)이 아비 상을 당했는데, 능에 행차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속히 그의 후임을 차출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김시진(金始振)을 광주 부윤으로 삼았다.

 

사간 홍주삼(洪柱三)이 외방에서 진소하여 체직되었다.

 

동지사(冬至使) 조형(趙珩), 부사 권령(權坽), 서장관 정창도(丁昌燾)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전라·충청 두 도의 유생 송유광(宋有光)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7세(世)의 묘(廟)를 가지고 덕을 살펴볼 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개 친진(親盡)하면 의당 조천(遷祧)해야 하나 덕이 있는 인군의 경우는 옮길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세실(世室)의 제도가 생겨나게 된 이유입니다.
돌아가신 우리 인종 대왕(仁宗大王)은 천부적으로 성인의 바탕과 효성을 타고 나셨습니다. 춘궁(春宮)에서 거의 40년 동안 덕을 기르다가 보위에 오르신 지 1년 만에 어질다는 소문이 멀리 퍼져 팔도가 기뻐하였으니, 그분의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는 은택은 종신토록 부모님을 사모한 대순(大舜)이나 혹시라도 백성들을 손상시킬까 염려한 문왕(文王)이라도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도성 안에서 남녀가 길을 달리해서 다니고 노인들이 짐을 이거나 지지 않는 풍속을 거의 이루어, 중국 사신이 ‘도덕(道德)이 크고 성해서 자그만한 나라에서 수용하기 어렵겠다.’고 칭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밖의 칭송하고 전할 만한 성덕(聖德)은 국사(國史)에 밝게 기재되어 있고 사람들이 환히 알고 있습니다. 하늘이 만약 몇 년만 더 사시도록 하였다면 삼대(三代)의 정치를 동방에서 다시 볼 수 있었을 터인데, 불행하게도 백성들이 복이 없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승하하셨던 때에는 비록 깊은 산속에서 사는 자라 할지라도 모두 어찌할 줄 몰라하며 울부짖어 곡하는 소리가 마을 간에 서로 들릴 정도였습니다. 지금 거의 백여 년이 지난 뒤인데도 추모하는 것이 줄어들지 않으니, 그 깊고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의 살갗에 젖어들고 골수에 사무친 것이 돌아가신 뒤에도 잊지 못하는 정도라고 할 만합니다.008)   성덕이 이와 같아 백성들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세실(世室)에 모시는 것을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지난 신축년009)  에 조천(祧遷)하는 의식을 거행하려 할 때, 당시의 대신(臺臣) 최유지(崔攸之)가 상소하여 조천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짜가 이미 임박했고 일 또한 중대하여 그 의논은 결국 중지되었습니다. 신들은 이것을 삼가 한스럽게 여깁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인종은 재위 기간이 얼마 안 되어 공효가 채 드러나지 않았다.’ 합니다. 그러나 신들은 삼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덕이란 내적인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고 공이란 외적인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인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 공이 없는 자가 있다는 것을 신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은택이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의논할 것도 없으며, 문(文)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한 공은 더욱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언젠가 안석에 기대어 사색을 하시다가 조광조(趙光祖)의 직첩을 도로 주라는 어지를 서둘러 내리시어 이미 꺾여졌던 사기(士氣)가 이로 인해 다시 펴졌으며 무너졌던 풍속이 이를 힘입어 다시 순박해졌습니다. 이에 지금까지 나라가 공고하며 종사가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성대한 공렬이 어디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사람들이 간혹 말하기를 ‘이미 조천한 묘(廟)이므로 도로 모시기가 용이하지 않다.’ 하는데, 신들은 더욱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송(宋)나라 때에는 희조(僖祖)를 이미 조천한 뒤에 선비들의 건의에 따라 몇 대가 지난 뒤에 다시 봉안하였는데 지금까지도 훌륭한 일이라고들 합니다. 전하께서 하신 일을 전하가 직접 고치신다면 전하의 무궁한 효성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니, 어찌 불가한 점이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 한결같고 향사(享事)가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살피시어 심사숙고하신 뒤 아름다운 의식을 속히 거행하도록 하시어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들을 위로하시고 온 나라 신민들의 바람에 답하소서."
하니, 소장을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인종 대왕의 깊은 어짊과 지극한 덕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감히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세실(世室)에 봉안하자고 한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의 공통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묘(廟)에는 일정한 제도가 있고 예에 있어서도 절차가 있습니다. 이렇게 막중한 예를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으니, 다시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판중추부사 정유성(鄭維城)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 등이 상차하기를,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어질고 슬기로운 자질을 갖고서 조종으로부터 어렵고도 큰 임무를 부여받아, 즉위하던 초기에는 여러 정령(政令)과 조치들이 모두 합당하였으므로 신민들이 눈을 씻으며 지극한 다스림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상께서 몸이 편찮으시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제반 일들은 날로 더욱 잘못 되어지고, 기강은 날로 더욱 쇠약해지며, 조정은 날로 더욱 분열되고, 민생은 날로 더욱 곤궁해졌습니다. 이에 뭇 사람들이 답답해 하고 기상이 시들해져서 다시는 큰 일을 할 기대를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근래 성상께서 몸이 점차 안정되어 경연을 열고 정사를 보시는 등 차례차례 거행하셨는데, 단지 이러한 거조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하였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러한 것을 이어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더욱더 떨쳐 힘쓰신다면, 종사와 생민의 경사가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현재 인재가 매우 모자라는 형편입니다. 위로는 대관(大官)으로부터 아래로 서료(庶僚)들에 이르기까지 궐원이 하나라도 생기면 번번이 어떻게 갖추어 의망(擬望)할까 염려하다가 결국 구차하게 충원하고 마니, 어떻게 현부(賢否)를 가려 취사(取捨)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근래 국가에 일은 많은데 법망이 더욱 조밀해져 일찍이 수령을 지낸 이들로서 조그마한 잘못 때문에 거론되지 못하는 자들이 수십 명이 넘습니다.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이들을 뽑아내 아뢰도록 한 뒤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여 혹 죄를 씻어주고 거두어 쓴다면 목전의 인재가 부족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기 지방에 실시하고 있는 대동법은 조정에서 백성들을 지극하게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행한 지 수개월만에 장애되는 일이 있어 행하기 어려우니, 해청으로 하여금 속히 변통책을 강구하게 하소서. 그리고 한두 명의 종신(從臣)을 파견하여 백성들의 실정을 탐문하고 인하여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백성들을 해치는 것도 살피도록 한다면 권면하고 징계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능에 행행하는 것을 중지하여 여러 대신들의 말을 따르라고 청하였다.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조목별로 진달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인재가 부족하다는 걱정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어 해조에서 주의(注擬)할 때에 구차스레 충원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좌폐(坐廢)된 자가 많은 데에서 연유한 것이니, 간신(諫臣)이 차자로 진달한 뜻은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탈고신(奪告身) 이하의 죄를 받은 자 및 해유(解由)와 월봉(越俸)에 구애되는 자들을 뽑아내도록 하여 신들과 상의한 뒤 녹계(錄啓)하여 품재(稟裁)케 하소서.
경기 지방은 양전(量田)을 한 뒤에 비록 1결당 4말의 쌀을 감했지만 각 고을의 폐단이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목(事目) 가운데에 장애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전에 계하하신 대로 해청의 당상으로 하여금 경기 감사와 서로 의논하여 속히 변통하게 하소서.
근신을 파견하여 탐문하는 일은 근년 이래로 오랫동안 중지했었습니다. 기전 어사(畿甸御史)를 우선 파견하여 백성들의 어려움과 잘못된 정사를 상세히 살피도록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6일 무진

영의정 정태화가, 상이 승지를 보내 출사하도록 타이른 것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전날 경연에서 옥당의 관원이, 대신(大臣)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갖추어 논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신이 참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이행진(李行進)의 일에 있어서 ‘대신들도 일찍이 자제들과 함께 말했는데, 상께서 하문하자 사실대로 답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신은 이 말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서 곧장 땅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전날 인견하였을 때 신이 탑전에 입시하여 비로소 행진이 행동을 잘못하여 비웃음을 산 것에 대한 얘기를 들었으나 그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소장을 본 뒤에야 그것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제들을 거론하여 증거로 삼아 실상을 속인 정상은 결단코 유신(儒臣)의 본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필시 일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허황되게 날조하는 말이 귀에 자꾸 들어오자 화가 나서 이러한 데에까지 이른 것일 겁니다. 신이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았다면 지금 인군을 속였다는 의심을 살 리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본직과 겸직을 모두 파직하여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세가 위태롭고 천심이 기뻐하지 않는 이러한 때에 과인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고 생민의 어려움을 구제하며 위태로운 국세를 떨쳐 일으키고 기뻐하지 않는 천심을 되돌릴 일을 경이 아니면 그 누가 하겠는가. 지난번 경연의 신하가 진달한 것은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그들이 들은 말에 대해서는 다 믿을 것 없다. 스스로 돌이켜 보아 옳다면 천만인이 있더라도 떳떳이 나가야 하는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이와 같이 오랫동안 인혐하는가."
하였다.

 

유학(幼學) 정서봉(鄭瑞鳳)이 선묘(宣廟)의 어필(御筆)을 바치니, 상이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전후로 선조(先祖)의 어필을 바친 자들은 모두 직에 제수하는 상을 받았다. 그런데 서봉이 스스로 진달하기를
"유생으로 있으면서 감히 상을 바랄 수 없습니다."
하므로 상이 이러한 하사를 한 것이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치계하기를,
"각 고을의 기민의 숫자는 7만 4천 1백 5명인데 별도로 구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민간에 춘궁(春窮)이 매우 심한 상황이니, 이 밖에도 해당 지역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으로서 가난이 더욱 심한 자에게는 한 달에 한두 번 곡식을 꾸어주어야 합니다. 또한 병에 전염되어 몸이 아픈 자는 1천 5백 29명인데, 양식을 주어 친족이나 이웃이 보살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치계한 글을 진휼청에 내리고 이에 의거해서 거행하도록 하였다.

 

전 좌랑 조임도(趙任道)는 영산(靈山) 사람으로 고 참찬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인데 꽤 명망이 있었다. 좌참찬 송시열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탑전에서 아뢰어 곧바로 6품으로 올렸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상이 부음을 듣고 본도로 하여금 상수(喪需)를 주게 하였다.

 

3월 7일 기사

장령 송창(宋昌) 등이 아뢰기를,
"기성(騎省)010)  의 낭관은 청망(淸望)의 계제(階梯)이므로 전부터 반드시 본조의 추천에 의해 순차적으로 비의(備擬)했으니, 이는 그 선발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난리를 겪은 뒤 이것이 폐지되었는데, 지난번 다시 이 법을 밝혔다가 곧바로 도로 시행하지 않아 구차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본조로 하여금 천거하는 법을 거듭 밝히게 하여 이전의 규례를 보존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 등이 아뢰기를,
"새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분차(分差)된 자들에 대해 본관에서 문벌이 낮다고 하여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경우가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문벌이 과연 낮다면 다른 부서로 옮겨 주어야 합당할 것 같고 만약 혹 억울한 단서가 있을 경우에는 의당 조정에서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을 그냥 덮어두고 끝내 조처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이조로 하여금 분명하게 조사하여 조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조정에서 해마다 가뭄이 들 것을 염려하여 다시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여 수리 사업을 일으켰으니,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서울과 지방의 횡포한 무리들이 간혹 백성들의 진정이라고 가탁하고 연명으로 소장을 올려 역군(役軍)을 얻어낼 것을 도모하고 빈 땅을 멋대로 점유하여 그 이익을 독차지하려는 경우가 꽤 많아 고을에서 매우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도리어 백성들의 해가 되고 있으니 엄하게 금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비록 소장을 올리는 자들이 있더라도 본사(本司)로 하여금 먼저 해당 고을에 그것의 사실 여부를 묻게 한 뒤 허락해 주도록 하여 이 폐단을 막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서 침을 맞고 나자, 도제조 원두표(元斗杓), 제조 허적(許積)이, 상의 눈병이 아직 차도가 없으니 능에 행차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상이 가을로 물려 행하라고 명하였다.

 

3월 9일 신미

성균관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왕조 때에 홍문관의 아룀에 따라 전 집의 최유지(崔攸之)에게 명하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게 했는데, 대내에 들인 뒤 다시 누국(漏局)011)  에 넘겨 주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유지가 만든 것에 고쳐야 할 곳이 있다 하니, 누국으로 하여금 성균관에 이송하여 제생들과 상의하여 교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유지가 만든 혼천의는 만든 법이 엉성하였다. 우선 옆에다 누주(漏籌)를 장치하여 물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게 하고 이를 실끈으로 혼천의 허리 부분에 매어 상하 운행의 기틀로 삼았는데, 간단하고 엉성해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후에 상이 송이영(宋以穎)과 이민철(李敏哲)로 하여금 각각 자신의 뜻에 따라 측후기(測候器)를 개조하도록 하고, 올리자 그것을 궁중에 두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침을 맞았다.

 

경상도의 수군(水軍) 정병(正兵)으로서 각진(各鎭)과 포(浦)에 첨방(添防)된 자는 바람이 잔잔한 6개월 간은 부방(赴防)하여 입번(立番)하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6개월 간은 번을 면제해 주고 포를 거두는데, 이를 유군포(留軍布)라고 하였다. 전에는 이를 감영에서 맡아 보관해두었는데, 각 고을에서 이것을 뜻밖의 일이 생길 경우 사용할 비용으로 삼았다. 이때에 조정에서, 각 고을이 단지 형식적으로 장부에만 기재해두고 대부분 바치지 않는다고 하여, 바치지 않은 수효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경중을 나누어 5백 필 이상은 잡아다 국문하고, 5십 필 이상은 곤장을 쳤는데, 전후의 수령들 중 모면한 자가 드물어 죄를 받은 자가 70여 인에 이르렀다.

 

황해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제언사(堤堰司)에서 본사의 낭청을 파견하여 경기·황해·충청 등 도의 방죽을 살피게 하자고 청하였다.

 

3월 10일 임신

밤에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감쌌다.

 

정언 홍만용(洪萬容)이, 전날 본원의 차자 중에 ‘인주의 귀와 눈은 삼사(三司)에 의탁해 있는데 근래에는 순종하고 침묵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는 내용이 있다 하여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또 인피하기를,
"신과 같이 노둔한 자를 간관의 직에 발탁해 주셨기에 은택을 보답할 길이 없어 짤막한 차자를 올렸는데, 범범하게 시폐(時弊)를 논한 것이 도리어 동료가 인피하는 구실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함께 목욕하면서 옷 벗은 옆사람을 기롱한다.’는 것이니, 신이 감히 태연스럽게 처치할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상이 전에 사관(史官)을 보내 우참찬 송시열(宋時烈), 대사헌 송준길(宋浚吉), 호군(護軍) 이유태(李惟泰)에게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렸는데, 이때에 세 사람이 모두 사직하고 오지 않았다.

 

3월 11일 계유

달무리가 화성을 감쌌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침을 맞았다.

 

장령 윤형성(尹衡聖)이, 정언 홍만용(洪萬容)과 똑같이 불안하다 하여 인피하고, 장령 송창(宋昌)도 인피하였는데,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3월 12일 갑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침을 맞았다.

 

이단상(李端相)을 사간으로, 황도창(黃道昌)을 경상 우병사로, 이상경(李尙敬)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정언 정재숭(鄭載嵩)도 본원의 차자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상이 또한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대사간 이하를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라고 청하자, 따랐다.

 

성균관 유생에게 삼월 삼일 절일제(節日製)를 시행하여 1등을 한 생원 이후징(李厚徵)을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3일에 사정이 있어 이날로 물려 행한 것이다.

 

3월 14일 병자

유학 조해(趙楷) 등이 상소하기를,
"근래 서필원(徐必遠)의 일 때문에 횡의(橫議)가 날로 일어나 정론(正論)이 막히고, 인욕이 멋대로 행해져 천리가 없어졌습니다. 필원은 편벽된 견해로 유현(儒賢)을 욕되게 공격하였으니, 그의 말이 만약 행해진다면 사람은 사람꼴이 되지 않고 나라는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오랑캐와 금수의 세계로 빠지는 지름길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인 승지를 꾸짖으며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승지 홍처대(洪處大)·원만석(元萬石)이 아뢰기를,
"조해 등의 상소에는 사실 과격한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필원이 상소한 말도 잘못되었으니, 그가 말한 ‘할아버지와 손자는 삼강(三綱)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등의 말은 크게 《예경(禮經)》의 본뜻을 잃은 것이니, 유생들이 소를 올려 변명한 것은 근거없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 선비들이 연명으로 올린 소장을 도로 내주는 것은 일의 체계에 있어 온당치 않겠기에 감히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교리 장선징(張善瀓), 수찬 남이성(南二星)이 면대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니, 선징이 아뢰기를,
"조해가 올린 소장 내용의 시비 여부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여러 선비들이 연명으로 올린 소를 도로 돌려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일의 체모에 있어 온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뒤폐단과도 관계가 됩니다. 그 소장을 도로 들이고 비답을 내려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소에 비록 과격한 말이 있지만 내 어찌 과격한 것 때문에 유생의 소를 물리치겠는가. 격에 맞지 않는 곳이 많고 또한 선조(先祖) 때 있었던 경연의 일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내가 온당치 않게 여겨 도로 돌려준 것이다."
하였다. 그뒤 상이 그 소장을 도로 들이라고 명하였다. 선징이 아뢰기를,
"필원에게 장점이 있기는 하나 병통 또한 많습니다. 그의 소장 가운데 인용한 것은 《예경(禮經)》의 본의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복수(復讎)의 의리에 대해 순차적으로 부자와 형제부터 열거하여 종부(從父)와 곤제(昆弟)까지 말하였는데, 어찌 유독 조손(祖孫)만 빠뜨렸을 리가 있겠습니까. 필원의 견식이 미치지 못하여 이렇게 망령된 의논을 한 것입니다. 그의 세밀치 못하고 무식한 잘못은 진실로 마땅히 논척해야 하지만 중임을 막 받은 처지이고 진정(賑政) 또한 급박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을 문자로 번거롭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면대해서 시비를 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유생들의 상소를 내준 것은 실로 뜻밖의 일입니다."
하고, 이성(二星)이 아뢰기를,
"필원이 말한 ‘조손(祖孫)은 삼강(三綱)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감히 이런 말을 성상께 진달했으니 매우 그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필원의 말을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른바 ‘재여(宰予)에게는 꾸짖을 필요도 없다.012)  ’고 한 경우이다. 그리고 그의 사람됨이 원만하지 않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일은 비록 여염의 미세한 일일지라도 다 저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군신 상하가 수치스런 일을 당해 좋지 않은 일은 숨기고 지내는데 이러한 얘기가 만약 저들에게 전해진다면 두 찬선(贊善)에게도 어찌 좋겠는가."
하였다. 선징이 또 아뢰기를,
"신이 휴가를 받아 지방에 있을 때 들으니, 백면지(白綿紙)에 관한 일이 백성들에게 큰 폐단이라고 합니다. 열읍에서 비록 한결같이 해조의 지양(紙樣)에 의거하여 갖추어 보내지만 서울에 도착하면 퇴짜를 맞게 되고 서울에서 곱절의 가격으로 갖추어 바치느라 백성들의 폐단이 더욱 심하니, 마땅히 변통하여야 합니다. 대동법을 시행하여 남은 쌀의 수효가 매우 많은데 서울에는 온갖 물건이 집결되므로 값만 있으면 마련하기가 쉽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백면지의 값을 상정하는 것 외에 적당히 헤아려 보태 주어 서울에서 사서 쓴다면 백성들의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 고을에 나누어 정한 데에는 당초 의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지금은 우선 전례에 따라 지방에 나누어 정하라. 그리고 퇴짜맞은 종이는 본 고을에 내려보내지 말고 해청의 쌀로 값을 지불해 주고 사서 해조에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백면지의 값을 상정하는 것 외에 적당히 헤아려 값을 보태 주는 것과 서울에서 사서 쓰는 것 두 가지의 편리 여부를 해청에 내려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의 민가에서 눈이 셋이고 코가 둘인 암송아지를 낳았는데, 4일만에 죽었다.

 

3월 15일 정축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유생 조해(趙楷) 등이 소장을 올려 서필원(徐必遠)이 인륜을 어그러뜨리고 현인을 모독한 죄를 바로잡자고 청하고 ‘사적으로 친한 당류여서 감히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등의 말로 삼사(三司)를 공척한 것 때문에 인피하였다. 장령 윤형성(尹衡聖)·송창(宋昌), 정언 정재숭(鄭載嵩)도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헌납 안진(安縝)은 서원(西原)의 임소(任所)에서 부름을 받고 올라왔다가 본원의 차자 중에 ‘정사(政事)를 할 때에는 반드시 지방에 나가 있는 자도 함께 의망하도록 청하는데 막상 낙점될 때에는 간혹 사람들의 기대에 벗어나기도 한다.’ 하였으므로 스스로 불안하게 여겨 인피하였는데,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옥당이 차자를 올려
"대사간 이하를 모두 출사시키소서. 그러나 장령 윤형성은 서필원에 대해, 과격하게 성을 내었다고 하고 나서 또 경솔하게 멋대로 하였다고 하고 나중에 가서는 그것이 논박할 만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일을 논하는 체모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리고 정재숭의 반줄 짜리 피혐한 글에는 전연 의견이 없습니다.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고 청하니, 따랐다.

 

3월 16일 무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경상도 곤양(昆陽)·남해(南海)·하동(河東)·진해(鎭海)·웅천(熊川)·거제(巨濟) 등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조 참판 윤문거(尹文擧)가 소장을 올려 사직하니, 체직되었다.

 

3월 17일 기묘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날 소대(召對)하였을 때에 검토관 홍만용(洪萬容)이, 양주(楊州)의 양전(量田)이 고르게 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진달한 바 있습니다. 양주의 양전은 더욱 심하게 뒤섞이고 어지러워 결부(結負)가 누락되고 등수(等數)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전안(田案)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해서 변통하지 않는다면 부역이 고르지 않아 백성들이 그 폐단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가을 이후에 본주(本州)로 하여금 이전 전안에 의거하여 다시 측량하게 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전적(田籍) 작성을 담당하게 하며, 그간의 절목(節目)은 해조와 의논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3월 18일 경진

시사(試射) 때에 편전(片箭)을 세 개 맞힌 겸사복        박중립(朴中立)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장선징(張善瀓)을 장령으로, 윤우정(尹遇丁)을 정언으로, 윤순지(尹順之)를 우참찬으로, 윤심(尹深)을 수찬으로, 이홍연(李弘淵)을 형조 참의로 삼고, 오정위(吳挺緯)는 자급을 올려 평안 감사로 삼았다.
평안 감영에는 천류고(泉流庫)의 부유함이 있고, 호조는 재부(財賦)를 총괄하는 관사이어서 세력이 있고 재물을 탐하는 사대부들은 있는 힘을 다해 도모하여 자신과 집안을 일으킬 발판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정위의 형제와 숙질들이 서로 계속해서 이러한 관직을 차지하여, 그의 집안이 모두 부유하였다. 대개 그 방법은 장사치들과 이익을 나누는 것인데, 다른 사람은 그들이 운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강화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본부의 번고 어사(反庫御史)인 민유중(閔維重)의 장계를 보았는데, 전에 본부에서 군미(軍米)를 남용했다는 정상에 대해 극력 말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두려운 심정을 견딜 수 없어 대략 사정을 진달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각도의 열읍은 모두 고을에 필요한 경비를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 있는데, 본부(本府)의 경우는 원래 한 물건도 의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에 고을에서 필요한 제반 경비는 회록(會錄)한 이외의 모곡(耗穀)에서 가져다 썼으므로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계미년013)  에 인조 대왕께서 보장(保障)의 중요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군사들에게 제번미(除番米)를 주라고 명하였습니다. 계사년014)  에 이르러 효종 대왕께서 또 상납하는 제색군포(諸色軍布)를 전부 옮겨 주어 쌀로 바꾸어 쓰도록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매년 관청에서 받아들이는 군포가 1천 3백여 석인데, 매년 의례적으로 주는 본부 삼관(三官)과 장사(將士)의 삭료(朔料) 및 이졸(吏卒)의 늠식(廩食)이 항상 1천 석에 가깝고, 이 밖에 제반 물품을 사는 것과 잡다한 비용 및 건물을 짓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연말에 호조에서 회계해 보니, 회록한 이외의 각종 곡식의 경우, 원수는 1만 7천여 석인데 현재 남아 있는 쌀은 2천 3백여 석이고 잡곡까지 합치면 7천 7백여 석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1만여 석은 오랫동안 누적된 포흠(逋欠)으로 인해 단지 장부에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계 가운데에서는 ‘본부의 일상적인 비용을 오로지 모곡에서 가져다 썼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군미(軍米) 1천 수백 석을 사사로운 재물로 여겨 멋대로 사용하였다.’ 하여, 마치 회록한 외에 2만여 석이 실제로 있었는데 전부 가져다 쓰고 군미 1천 수백 석을 사사로이 쓴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일을 조사함에 있어 사실과 다르게 하고서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인 듯합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는다고 핑계대고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여 사대부의 수치를 남길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명을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9일 신사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사간 이단상(李端相)은 전후의 추감(推勘)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헌납 안진(安縝)은 소명(召命)에 나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3월 20일 임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침을 맞았다.

 

3월 21일 계미

전라 감사 정만화(鄭萬和)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본도가 재해를 입은 뒤 재해를 입은 정도에 대한 보고가 정밀하고 상세하지 못한 듯하니, 의당 분명하게 조사하도록 하라. 그리고 본도는 인물이 가장 많은 곳이니, 기근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자들을 안집시킬 방책을 경은 마땅히 마음을 다해 마련하도록 하라."
하니, 만화가 대답하기를,
"신의 재주가 비록 미치지는 못하지만 감히 성의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해를 입은 정도에 있어 자세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경은 인수 인계에 구애받지 말고 사실대로 보고하도록 하라. 그리고 진휼하는 일도 마땅히 마음을 써서 하도록 하라."
하니, 만화가 대답하기를,
"전 감사가 재실(災實) 여부를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혹자가 말하는 기민이 전연 없다는 것도 실상보다 지나친 것 같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인수 인계에 구애되어 사실대로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대략 듣건대, 기민이 2만여 명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건량(乾糧)을 준 자가 몇 명이고 죽을 먹은 자가 몇 명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연해의 각 고을이 반드시 다 흉년든 것은 아니니 그 중 기근이 더욱 심한 곳에는 죽을 마련하여 기민을 진휼해야 할 것이나 이사람 저사람 다 받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진휼청에서 이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을 쑤어 기민을 진휼하는 곡식을 만약 진휼청이 회감(會減)하지 않고 가을에 거두어들인다면 나라의 체면으로 볼 때 참으로 매우 온당치 못할 것입니다."
하니, 승지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어떻게 죽을 쑤어 백성들을 진휼하고서 도리어 그 곡식을 거두어들일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만화가 아뢰기를,
"본도는 매년 흉황(凶荒)이 너무 심하여 국가에서 자주 민역(民役)을 면제해 주고 있는데, 간혹 의당 감해야 하는데 감하지 않는 경우와 감해서는 안 되는데 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흉년을 당하게 된다면 백성들의 바람이 절도가 없을 것이니, 이것 또한 폐해가 많은 풍조입니다."
하고, 만화가 또 아뢰기를,
"호남에는 근래 신법(新法)을 행하고 있어 도신(道臣)이 받들어 행하기 더욱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남 인물의 성대함이 영남과 비교해볼 때 어떠한가?"
하니, 만화가 대답하기를,
"토지의 광대함은 영남에 미치지 못하나 인물에 있어서는 더욱 성대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병(軍兵)은 어떠한가?"
하니, 만화가 아뢰기를,
"호남의 병사들은 모두 정병(精兵)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교묘하게 속이기를 잘하기 때문에 병자년 싸움에서 패한 뒤, 영남의 경우는 다시 그 군사들을 모았지만 호남은 다시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동법을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치계하기를,
"각 고을의 기민들의 숫자가 도합 11만 3천 38명인데, 죽을 먹여온 지 이미 50일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봄농사가 한창 급할 때이니, 돌아가 농사짓기를 자원하는 자에게는 신축년의 예와 같이 양곡을 주어 농사지으러 가게 하고, 그대로 죽먹기를 원하는 자는 그대로 있게 하여 먹여주며, 녹을 잃은 전직 관원과 행실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으로서 매우 심하게 곤궁한 자에게도 별도로 진휼하게 하고, 전염병에 걸린 2백 84인에 대해서는 건량을 헤아려 주어 그의 친족이나 이웃으로 하여금 구호하게 하며 그의 전토도 도와 농사짓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진휼청에 내려보냈다.

 

3월 22일 갑신

윤강(尹絳)을 판윤으로, 조계원(趙啓遠)을 개성 유수로, 조수익(趙壽益)을 형조 참판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소두산(蘇斗山)을 지평으로, 최상익(崔商翼)을 주서로, 장선징(張善瀓)을 헌납으로 삼았다.

 

전에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유생들의 고강(考講)·시제(試製)의 법규를 참정(參定)하여 올렸는데, 상이 예관에게 명하여 대신들의 의견을 묻도록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의논드리기를,
"민정중이 건의할 유생들 중에서 고강 20분(分), 제술 10분 이상을 얻은 자에 대해서는 초계(抄啓)하자고 한 것은 비록 유생들을 격려하여 성취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만일 정중이 탑전에서 아뢴 것과 같이 별도로 전강(殿講)을 베풀거나 혹은 승지나 대제학을 파견하여 고강과 시제를 시행하여 별도로 상격(賞格)을 줄 경우, 유생들이 바라는 것은 필시 초시(初試)의 분수를 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어서 마침내 폐단의 근원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차라리 유학(幼學)을 고강하고 시제하여 감시(監試) 초시에 응시하도록 인정해주는 규례에 따라, 고강과 제술의 우등자 각 5인씩을 성균관에서 그들의 획수(劃數)를 갖추어 기록한 뒤 예조로 보내 계하받아 동당(東堂) 초시에 응시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 의견을 따랐다.

 

3월 24일 병술

헌납 장선징이 추감(推勘)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에 우박이 내렸다.

 

3월 25일 정해

김중일(金重鎰)을 승지로, 오시수(吳始壽)를 헌납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심세정(沈世鼎)을 판결사로, 장선징을 부교리로 삼았다.

 

고 참판 유계(兪棨)의 상을 임천(林川)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비국이 유계가 국사에 부지런히 힘썼다고 아뢰니, 담군(擔軍)을 주도록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전에 우상의 상소에 대해 영상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품정(稟定)하라는 하교를 하셨기 때문에 감히 품달합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경기의 대동은 12두(斗)의 쌀을 거둘 것으로 일찍이 품정했었는데 홍명하(洪命夏)가 장애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이러한 진소를 했던 것입니다. 이 법을 의논하여 정할 때 참으로 이러한 염려가 있었지만 그때 미처 상의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지금 다시 의논하여 잘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호서(湖西)의 대동 중에서 백면지(白綿紙)에 관한 일에 대해 신은 처음부터 각 고을에 나누어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에도 별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폐단이 있다고 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전의 견해만 굳게 고집하여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처럼 하겠습니까. 지금 비록 변통하려고 하더라도 반드시 잘 변통해야 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하교하신 대로 해조에서 퇴짜받은 것을 경청(京廳)에서 사서 쓴다면 각 고을의 수령들이 당초부터 반드시 마음을 다해 갖추어 보내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굳이 먼저 각 고을에 나누어 정할 필요 없이 해청에서 값을 주어 사서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좌참찬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우상 의 상소 중에서 논한 경기의 대동미를 거두는 일은 이미 12두로 정식을 정했는데 쌀의 숫자가 부족하여 과연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객사(客使)가 올 때 마부와 말의 값은 상평청의 모곡(耗穀)으로 계산해 주고 평시에 쓰는 비용은 거둔 쌀로 준다면 계속해서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12두로 의논하여 정할 때에 이미 제반 잡역(雜役)을 모두 그 가운데에 포함시켰으니, 지금 더 받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2두 외에 더 받을 수는 없다. 마부와 말의 값은 상평청에서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비록 상평청에서 값을 주더라도 말 대는 것을 전적으로 연호(烟戶)에게 책임지운다면 말이 있는 자들이 필시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전결(田結)에 따라 돌려가며 내도록 정하고 일일이 값을 준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연호가 역에 차출되는 것이 참으로 고르지 않지만 만약 전결을 가지고 한다면 이는 당초 법을 세운 뜻이 아닙니다. 잠시 우상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의논하여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참의 민정중이 아뢰기를,
"대간은 인주의 눈과 귀이니, 인피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즉시 처치하는 것이 고례입니다. 그런데 지금 처치할 것이 혹 몇 일이 경과하였는데도 헌부가 이미 오랫동안 폐좌(廢坐)하여 추감(推勘)할 일이 적체되어 있습니다. 이조의 경우 참의 혼자 정사한 지가 한 달이 넘었고, 형조와 예조의 경우엔 판서 외에 다른 관원이 없습니다. 국사가 이와 같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지나치게 관대하고 인자하셔서 아랫사람들의 잘못을 오로지 덮어주기만 하시니, 신들이 비록 들어가 고하더라도 아무 효험이 없습니다."
하고,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근래 대간이, 추고를 받아 인피하는 자들 때문에 매우 소란스럽습니다. 전에는 추고당한 대간이 인피하여 체직될 경우 추고했던 것은 자연히 소멸되었었는데, 지금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피혐하는 것이 그칠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간을 차출할 때면 이조에서 반드시 수령으로써 아뢰어 청하는데, 제수된 뒤 곧이어 추고를 당하면 체직되므로 현재 대각에 남아 있는 관원이 없는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추고받는 것도 경중이 있으니, 가벼운 자는 탕척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찍이 선조(先祖) 때에 대사헌으로 있던 채유후(蔡𥙿後)가 추고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선왕께서 추고하지 말라는 명을 먼저 내리시고 나중에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유후가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고 출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대간이 피혐할 경우엔 피혐하는 글 가운데에 어떤 일 때문에 추고를 받고 있다고 명백하게 스스로 열거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서천 군수(舒川郡守) 소두산(蘇斗山)은 새로 대관(臺官)에 제수되었는데, 들으니, 현재 추고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올라와서 인피할 경우 필시 체직되어 수령을 보내고 맞이하는 폐단만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두산은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인재가 부족하다는 얘기는 늘 하는 말이지만 요즘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신과 같이 병이 많고 재주가 부족한 자가 겸직이 지나치게 많아 근력이나 정신이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으니, 신의 본직과 겸직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겸직은 허락해 주는 것이 합당하겠다고 하니, 상이 겸직인 대사성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를 가까이 나아오도록 불러 하교하기를,
"외가의 종손(宗孫)인 장선연(張善淵)의 아내가 병자호란 때에 절개를 잃어 그의 아들이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그의 아우인 장선함(張善涵)으로써 종사를 대신 받들게 했으니, 본조는 마땅히 이러한 뜻을 알고 있으라."
하였다.

 

3월 26일 무자

충청 감사        이익한(李翊漢)이 사조하니,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서(湖西)는 바로 경기의 문호가 되는 지역인데, 근래 몇 년 동안 계속 흉년이 들고 있다. 이에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어 반드시 안정시키고 무마해야 하니, 경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하니, 익한이 아뢰기를,
"신이 감히 몸과 마음을 다해 성상의 분부를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본도의 고질적인 폐단을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임지에 도착하여 만일 변통할 만한 것이 있으면 마땅히 보고드리겠습니다."
하고, 익한이 또 아뢰기를,
"본도의 농사는 다른 도에 비해 조금 괜찮기 때문에 현재 진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릿고개가 한참 절박하고 연해의 각 고을은 재해를 가장 혹독하게 당했으니,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수와 한재가 계속 연이어 매년 이와 같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근래 번신(藩臣)의 보고 중에 간혹 사실과 다르게 아뢰는 폐단이 있으니, 경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하니, 익한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허위로 알리겠습니까."
하였다. 익한이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제주 목사로 있었을 때 본주의 고질적인 폐단을 보고한 것이 있는데,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본주는 외진 바다 건너에 있어 왕화(王化)를 충분히 받지 못하므로 민심을 수습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일찍이 인조조 때에 특별히 어사를 파견하여 문과와 무과를 시취(試取)하였는데, 당시 본주 사람인 오섬(吳暹)이 선발되었습니다. 이에 상께서 특명으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하자, 온 섬의 사람들이 매우 기뻐했었습니다. 이번에도 마땅히 선조의 고사에 따라 별도로 어사를 파견하여 시재(試才)함으로써 격려하고 권면하게 하소서.
그리고 본도의 사자(士子)들은 글을 배우려고 해도 배울 사람이 없으니, 목사와 판관을 문무관으로 섞어 차임하여 문관 한 사람이 항상 있도록 함으로써 학업을 권면하는 책임을 맡게 하소서.
그리고 전선(戰船)은 본도에 아무 쓸모가 없는데 민폐는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대개 본도는 파도가 사나워서 전선을 운용할 수가 없습니다. 적을 상대할 때 사용할 수 없고 한갓 백성들의 힘만 손상시키니, 변통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3월 27일 기축

용안 현감(龍安縣監) 이단하(李端夏)가 부교리로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와 상소하기를,
"신이 작년 7월에 비로소 임소에 나아갔는데, 그 당시 한재가 매우 극심하여 들판이 다 타버렸습니다. 7월 중순에 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가뭄으로 인한 피해는 극에 달해 가을에 수확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서리가 꽤 늦게 내려 남은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지만 흉년이 되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다행하게도 성상께서 백성들이 주리는 것을 특별히 마음 아파하는 것을 힘입어 제반 부역을 견감해 주는 조처가 매우 지극했기 때문에 곤궁한 백성들이 조금 살아갈 방도를 가지게 되었고, 수확한 곡식을 가지고 새해 이전까지 버티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봄에 이르러서는 다시 진대(賑貸)의 조처를 시행하여 이로 인해 죽지 않고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국가에서 합당하게 구제했기 때문입니다.
아, 국가의 운이 불행하여 4, 5년 이래 큰 흉년이 잇따라 든 데다가 작년에는 한재가 다시 또 참혹하였으니, 백성을 다스리고 일을 담당한 관원들의 깊고도 많은 근심이 어디엔들 이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비와 서리가 내린 뒤에 감사가 재이의 실상을 참고하여 조사한 뒤 신축년보다 낫다고 아뢰었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일을 잘못 처리한 실수가 있었겠습니까. 진정(賑政)을 거행하게 되었을 때 기민이 매우 적었던 것은, 감사가 굶주리지 않는 자들이 모록(冒錄)할까 염려하여 당초 기민을 뽑아낼 때 ‘나누어준 곡식을 다시 갚도록 할 것이다.’ 말했기 때문에 받기를 원한 자가 과연 적었던 것입니다. 그뒤 죽을 쑤어 무상으로 준다는 명을 듣고서야 받기를 원하는 자가 비로소 많아졌는데, 이것도 진휼할 쌀이 넉넉하지 못한 관계로 그 중에 더 심한 자들만을 가려 죽을 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단지 조곡(糶穀)만을 가지고 구제했을 뿐입니다.
이번에 조정에서 먼 지방의 민사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서둘러 재해를 보고한 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도신을 죄주기까지 하였으니, 앞으로는 설령 올해보다 더 심한 흉년이 발생하더라도 재해를 숨기고 다시는 보고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신은 이미 수령으로서 허위 보고한 자들 중에 함께 포함되어 있으니, 많이 늘어놓은 이 말은 결국 스스로를 해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위아래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이 소장을 보니, 단지 스스로를 해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주(道主)까지 옹호하였으니, 그 태도가 불미스럽다. 단하를 체차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단하의 소장은 백성들의 일을 대체적으로 진술한 것이니, 그 말을 반드시 쓸 필요는 없지만 갑작스럽게 꺾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뒤에 간원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매우 성하여, 이로 인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제주의 종자마(種子馬) 암수 모두 50필을 가져다가 강화의 진강(鎭江) 목장(牧場)에 방목하였다. 또 진강의 잡종마를 가려 장봉도(長峰島)로 옮겨 방목하였다.

 

평안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어머니의 나이가 70세여서 모시고 가기도 곤란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도 곤란하다는 이유로 진소하여 체직시켜 달라고 하니, 상이 이를 비국에 내려보냈다. 비국이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3월 28일 경인

함경 감사 서필원이 상소하기를,
"신이 유학(幼學) 조해(趙楷) 등의 소장과 양사의 피혐한 글을 보았는데, 조해 등의 어린애 같은 견해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만 조정의 신하들도 이러한 의논을 한단 말입니까. 신이 얼마 전 진소한 뒤에 다른 사람을 통해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을 들었는데, 이 일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논하였습니다. 만약 한가한 틈에 한 번 살펴보셔서 그 ‘벼슬하는 경우’와 ‘벼슬하지 않는 경우’ 등의 구절015)  을 자세히 음미하신다면, 신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상께서 환히 아실 것입니다. 《주례(周禮)》에서 논한 것은 참으로 언제나 변함없는 원칙적인 도(道)이고, 《예기》에서 말한 것은 상황에 따라 합당하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공과 공자는 똑같이 성인이니, 당세의 규범이자 후세에 남겨준 책에 대하여 어떻게 취하고 버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벼슬하기 전에는 사은(私恩)이 위주로 되고 공의(公義)는 논할 겨를이 없지만 이미 벼슬한 뒤에는 공의가 중하여 사은을 꺾어버리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지금 벼슬하기 전이나 하고 나서나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사은만을 중하게 여긴다면 공사의 사이에 경중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걱정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니, 신이 전일 상소한 것은 대개 이러한 것을 걱정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조해 등이 이러한 것을 살피지 않고 신을 교묘하게 흉이나 보며 유현(儒賢)을 극력 배척하는 자인 것처럼 하였으니, 음험한 속셈이 참으로 심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그래도 이유를 댈 만한 것이 있으니, 연소한 무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여 그릇된 주장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양사의 피혐하는 말 가운데에서는 신에 대해 ‘의리에 전연 어둡고 말을 얼토당토 않게 하였다.’는 등의 말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전일 소장에서 한 말이 비록 거칠고 차근차근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그 근원을 추구해 본다면 바로 《예기》에서 나온 것이니, 의리에 대해 어찌 전연 어둡기까기 하겠으며 상소에 적은 말이 어찌 얼토당토 않기까지 하겠습니까. 다만 일이 유현에 관계되기 때문에 도리어 이렇게 사건을 더욱 부채질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품행이 바른 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어찌 감히 일각인들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삭직시키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편안한 마음으로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명하였다.

 

지평 맹주서(孟胄瑞)가 소명을 받고도 나아오지 않은 것 때문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