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5년 1664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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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갑오

정언 정재숭(鄭載嵩)·맹주서(孟胄瑞), 사간 오두인(吳斗寅) 등이 계사(啓辭)의 문자를 자세히 살피지 않아 잘못 알고 엉뚱하게 내린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2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원두표(元斗杓)를 내의 도제조로, 이경억(李慶億)을 부제학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사간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윤형성(尹衡聖)·송창(宋昌)을 정언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홍순민(洪舜民)을 황해 병사로, 이시정(李時挺)을 충청 수사로, 전동흘(全東屹)을 전라 우수사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간으로 삼았는데, 경휘는 세수(歲首)에 천거하는 것을 빠뜨렸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3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5일 무술

함경 감사 서필원이 상소하기를,
"신은 들으니, 우찬성 송시열의 사직소에 전 수찬 김만균(金萬均)을 하옥시켜 처벌받게 한 일을 거론하여 모두 사사로운 뜻으로 상소한 것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니, 신은 여기에 대하여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이 그전 정원에 몸담고 있던 날, 만균이 상소한 것이 불가하다고 힘껏 공척했고 심지어 환급(還給)하도록 계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만약 오늘날로부터 과연 이적에 빠지고 짐승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주도한 죄를 신이 사실 받아야 합니다. 시열은 유림의 영수(領首)로서 의리를 환히 알 것이니 그가 말한 이러저러한 얘기는 필시 근거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신은 들으니 맹자가 말하기를 ‘안으로는 부자와 밖으로는 군신이 사람의 큰 윤리다.’ 하고, 또 들으니 ‘삼강의 항목에 임금과 아비가 나란히 열거되어 있는데 다른 것은 참여하지 못한다.’ 하고, 또 들으니 임금과 어버이는 한몸이라는 설이 고훈(古訓)에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군신·부자·조손·곤제가 어찌 경중과 선후의 구별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복제(服制)로 논해본다면 기년복과 삼년복의 사이에 역시 천리와 인정이 가지런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어찌 유독 원수를 갚는 일에만 똑같이 여겨 아무 구별도 없게 한단 말입니까.
지금 부모의 원수를 둔 자가 그 임금에게 고하기를 ‘나는 어버이 원수가 저기에 있어서 차마 저들의 일을 간여하지 못하겠으며 차마 저들을 맞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인정과 의리상 진실로 맞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말고는 비록 원수와 원한이 있더라도 마땅히 은통함을 마음에두고서 죽음에 이르러도 잊지 않을 뿐입니다. 만일 기필코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따로 그 방법이 있어야지 어찌 원수마다 모두 청하며 낱낱이 다 신구하겠습니까. 지금 신의 주된 뜻은,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경중을 맞추고 선후를 참작해서 도피할 수 없는 대의를 더럽히지 않게 하고자 할 뿐이니,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과연 이적에 빠져들고 짐승이 되어가는 지름길이라 하겠습니까.
신이 그 날 계청할 때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김모의 상소를 만약 그대로 봉입(捧入)하여 전례대로 비답을 내린다면, 대신으로는 홍명하와 중신으로는 허적·이일상 등 여러 사람 및 무릇 그 아래 이런 참상을 만난 자들이 필시 상소문을 가지고 모두 이르러 올 것이니, 이것을 봉입하려 한다면 불가한 일이며 봉입하지 않으려 한다면 균일하게 하지 못한 것이 되니 불가불 김모의 상소문을 내보내도록 계청해야 하겠다.’ 하니, 동료들이 모두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이번에 큰 죄에 빠져들게 되었으니 신이 비록 말을 삼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나랏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인물이 없으니 비록 협심하여 힘을 모아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분주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염려인데 산림에 묻혀 사는 덕망깨나 있는 사람이 문득 이런 논의를 하니, 신은 아무래도 이 말이 만약 실행된다면 의리는 더욱 밝아질지 몰라도 나라에는 더욱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조신이 모두 난리통에 죽은 자의 손자, 증손자라 한다면 보통 일이 없을 때에는 의기 양양하게 관록을 받아먹다가 저 곳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모두 달아나 버리고 그 수응하는 모든 일을 홀로 지존하신 주상으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겠습니까. 신은 이 점에 대해서 결코 불가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신은 성품이 어리석고 광망하여 유현(儒賢)이 엿볼 수 없는 이 의리를 지었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신의 관직을 삭탈하고 신의 죄명을 의논하여 시비를 바로잡고 의리를 밝히소서."
하니, 상이 인혐할 것 없이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전설 별검(典設別檢) 송규광(宋奎光)이 본사에 입직하였다가 궁중에서 경문을 외우고 복을 비는 일로 본사의 하인들이 분주하게 배설(排設)한다는 말을 듣고 이에 상소하기를,
"대체로 경문을 외워 복을 비는 일은 시골 사대부의 집에서 간혹 있는 일이지만 오히려 식자들은 부끄럽게 여깁니다. 더구나 법규가 지극히 엄한 궁중은 실로 사방의 표준이 되고 있는데 어찌 허탄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성학이 고명하시어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대하여 진실로 이미 환히 아실 것이므로 이런 헛된 일에 대하여 굳이 한두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성상께서는 벌써 분명하게 살피셨을 것입니다마는, 이에 궁궐 안에서 이런 거조가 있었다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듣고 어찌 놀라고 의혹을 사지 않겠습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흥기하려면 백성에게 듣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신명에게 듣는다.’ 하였는데, 지금 이 경문을 외우는 일은 이른바 신명에게 듣는 일입니다. 어찌 성명이 위에 계시면서 이런 분부를 하실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본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 배설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도 미처 알지 못했고 중지하도록 간하지도 못했으니, 이는 신에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나라를 져버린 죄가 있습니다. 성명께서는 신이 직책을 완수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고 이 헛된 습속을 혁파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신은 비록 죄를 받고 죽는다 하더라도 영광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충성을 바치는 정성을 나는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집의 이단상(李端相)이 병 때문에 공직(供職)할 수 없다고 상소하여 체직되었다.

 

지난해 겨울에 사간 민유중이, 북로에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아 무사가 더욱 실망하고 있다는 것으로 어사를 파견하여 시재(試才)할 것을 청하자, 상이 봄이 되거든 거행하라고 명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묘당에서, 북로에 현재 진정(賑政)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설치하기가 형편상 어렵다고 하고 가을로 물려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6일 기해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허적(許積)을 좌참찬으로, 심세정(沈世鼎)을 병조 참지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승지로, 정만화(鄭萬和)를 병조 참의로,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윤순지(尹順之)를 판윤으로, 정언황(丁彦璜)을 예조 참의로, 정부현(鄭傅賢)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2월 7일 경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는데, 영중추 이경석(李景奭)과 판중추 정유성(鄭維城)도 명을 받고 입시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소신이 늙고 병들어 직무를 살피기가 결코 어려워서 누차 소장을 올려 노직을 청하였습니다마는 정성이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늘 입대하였으니 성명께서는 물러가기를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생각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마는 경의 근력이 아직은 건강하다. 그리고 국가의 원로를 어찌 경솔히 물러나게 하겠는가."
하였다. 경석이 재삼 치사시켜 줄 것을 간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굳이 물러가려 하니 나는 몹시 섭섭하다. 경은 몸에 병이 없으니 조용히 다시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경상도의 속오 급보(束伍給保)는 다른 도에는 없는 것으로, 권우(權堣)가 감사로 있을 때 행하기를 계청했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지내왔습니다. 이번에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또 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도 좌·우병사 중에 의견이 같지 않아 한쪽은 당연히 혁파해야 한다고 하는데 한쪽은 혁파하려 하지 않으니, 지금 만약 혁파한다면 군병의 사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에 다 급보해야 하는가?"
하자,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비록 급보한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보인(保人)은 형제가 아니면 족속입니다. 실행해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혁파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함경 감사 서필원의 장계에, 남도의 병사로서 북병영(北兵營)에 입방(入防)하게 되어 있는 자들에 대해서, 도방(到防)한 후에 부려먹고 침학하는 이유로 금년에는 들여보내지 말았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입방(入防)은 옛 법규이니 들여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침학의 폐단을 본도로 하여금 엄금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호조가 대각의 논계로 인하여 여러 궁가의 해양(海洋)을 절수한 곳을 조사하여 계하하였습니다. 지금 규정을 확정해야 하는데 공주나 옹주의 부처(夫妻)가 모두 죽은 자는 마땅히 다시 혁파해야 합니다마는 명례궁(明禮宮)·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 등 세 궁의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전례에 따라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의정부 소속 및 호조와 영종진(永宗鎭)에서 수세(收稅)한 것은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정부의 소속은 세조조(世祖朝)에 하사한 것이고 호조는 경비를 보충하며 영종진도 변란을 대비하기 위한 비용이므로 모두 혁파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태화가 또 인빈(仁嬪)의 집에 소속되어 있는 광주 시장(廣州柴場)에 대해 품계하니, 상이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남용익이 아뢰기를,
"어장(漁場)과 시장(柴場)에 대해서는 여러 해를 쟁집해 오던 논의입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하루아침에 흔쾌히 윤허하신다면 신민(臣民)인 자 어느 누가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이 일을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자면 궁가의 것부터 마땅히 먼저 혁파해야 하고, 본보기가 되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자면 정부(政府)의 것부터 마땅히 먼저 혁파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정부의 어장은 두 곳이나 남아 있으며 수진궁의 어장도 세 곳에 이르고 있으니, 신은 이것 때문에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정부의 어장은 바로 조종조에서 하사한 것이며 또 세 궁은 다른 궁가와 다르니 어찌 다 혁파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신축년 사기(史記)를, 사관 윤절(尹晢)이 죽어 그 당시 상번 사관 이광직(李光稷)으로 하여금 수정하게 하였는데, 광직이 지금 또 죽었으니, 시임(時任)인 상번 사관에게 나누어 주고 또 대제학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매번 10일마다 그 수정한 것을 과제로 하게 해서 속히 완성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경억이 아뢰기를,
"전번에 상께서 편찮으시어 오랫동안 경연을 열지 못했었습니다마는 근래에 만일 조금 회복이 되셨다면 경연을 개최하는 데 유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형편을 보아서 하려 한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성후가 비록 쾌차하지 않았더라도 옥당의 관원을 불러서 글 뜻을 강론하게 한다면 또한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우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지난날 인심이 쓸쓸했던 것은 모두 성상이 신하들을 인접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식자들의 우려도 성상이 국사를 포기한 것으로 의심하였으니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전번 조참을 실시한 후에 도하(都下)의 인심이 조금 풀렸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더욱더 신하들을 자주 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누가 하는 말이 전하께서 전번에 후원(後苑)에 가셔서 내구마(內廐馬)를 검열하시고 그 때문에 감기가 드셨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면 고치시고 없었다면 더욱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병으로 외출을 못 하는데 어떻게 말을 검열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근래 모든 일이 해이해지지 않은 일이 없고 입계하는 공사도 많이 늦추어지고 있으며 정청에서 낙점(落點)하던 것을 모두 부표(付標)하여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병환 때문에 취해진 일이나 몹시 염려되는 것은 이 일 때문에 그대로 낙점하는 법규가 폐지될까 싶습니다. 대관을 제수하는 경우에는 더욱 낙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모든 제배(除拜)를 다 낙점으로 할 수는 없지만 만약 대관 및 번신(藩臣)을 제배하는 경우와 영장(營將)에게 가자하는 일에는 불가불 낙점하여 뒤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근래에 인재가 적어 이조 참판 및 대사헌에 매번 인원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데도 국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저희들은 성상이 오직 세세한 일에만 힘쓰고 사람 쓰는 일에는 유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부족하다는 탄식은 지금 가장 심합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신하들을 자주 접하셔서 그들의 현명함 여부와 장단점을 안 연후에 채용한다면 채용된 자가 그 직책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외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성상이 즉위한 후로 의관(醫官)과 같은 잡류는 선출되어 가자(加資)를 받은 자가 많은데 정작으로 인재인 경우는 채용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경억이 또 아뢰기를,
"이하악(李河岳)에게 내린 가자(加資)를 대간이 이미 개정하기를 청하였고, 그가 각별히 비축해 놓았다는 것도 사실은 매우 형편이 없으므로 비국이 추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감사가 논보하여 그로 하여금 상을 받게 하였으니, 감사도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경기 감사 이행진(李行進)은 늙어서 정령(政令)과 거조가 전도되는 경우가 많으며 본도에 대동법을 앞으로 실시하려 하는데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르고 있으니 선비들은 손가락질하며 웃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국은 자신들이 담당할 일이 아니라고 하여 버려두고 논핵하지 않고 있으며, 대간도 거론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이 말이 사실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행진이 정령을 전도시켰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마는 근래에 수령을 파출시킨 일이 많이 있으므로 어떤 사람은 풍력(風力)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행진은 나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양호 감사가 진구할 때 허위 사실을 보고한 것에 대하여 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뒤폐단이라고 칭탁하여 논핵하지 않고 유독 행진만을 논핵하였으니, 대개 행진은 연배가 서로 현격하고 나이도 많으므로 이렇게 헐뜯은 것입니다. 양호 감사는 바로 그들과 절친한 사람이어서 안면과 인정에 걸려 감히 논핵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몹시 부당합니다."
하였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과 집의 오두인(吳斗寅)이, 처음에는 경억이 경기 감사를 논핵하지 않았다고 배척한 것으로 인피하였고, 또 대신이 안면과 인정에 걸려서 양호 감사를 논핵하지 않았다고 배척하므로 인피하고 물러갔다.

 

2월 8일 신축

전라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당시에 대간이, 정치를 제대로 못한다고 논핵하기에 앞서 완석(完席)에서 발론하였으므로 사직하여 체직된 것이다.

 

2월 9일 임인

대사간 남용익, 집의 오두인, 지평 정재숭·이경과(李慶果), 사간 송시철(宋時喆) 등이 마땅히 논핵해야 하는데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주강을 열었다. 부제학 이경억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였는데, 천조편(踐阼篇)의 ‘공경이 태만함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태만함이 공경을 이기는 자는 자멸한다.’에 이르러 경억은 아뢰기를,
"이것이 가장 긴요한 말이니, 마땅히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고, 승지 김수흥은 아뢰기를,
"공경과 태만함은 상반되는 것이 주인과 손의 처지와 같은 것입니다."
하고, 경억은 아뢰기를,
"의리는 이치를 위주로 하고 욕심은 사물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길흉(吉凶)과 존망(存亡)의 분수령이기도 합니다. 천하의 모든 일이 공경과 태만의 사이에 있으므로 공자가 《역(易)》에 훈석을 달기를 ‘공경으로 내면을 곧바르게 하고 의로움으로 외면을 방정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경이란 격물(格物)하는 공부이고 의로움이란 치지(致知)하는 공부인가?"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공경에 몸담게 되면 이치를 연구할 수 있게 되고 이치를 연구하게 되면 천하 사물이 당연히 그렇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지만 공경이 아니면 근본부터 혼매하여 이치를 연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경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실시해야 하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격물 치지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공경함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하늘이 명명해준 성품은 요(堯) 순(舜)이나 보통 사람이 일정합니다. 그러나 간혹 물욕에 가리기도 하고 기질에 구애받기도 하므로 성인과 범인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충분한 공부를 해서 남은 하나를 하면 나는 백 가지를 하며 남은 열을 하면 나는 천 가지를 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는 비록 유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지며 비록 혼매하더라도 반드시 현명하게 되어서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도 이러한데 더구나 제왕인 경우야 오죽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자질이 매우 높은 임금이긴 하나, 황노(黃老)의 도를 좋아하여 현묵(玄默)으로 정치를 하고 옛 성왕의 정치를 할 겨를이 없었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 말에 이르기를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다.’ 하였는데, 겨를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무왕이 또 스스로 명(銘)을 지어 자리 가까이에 써놓은 것은 대개 존심공구(存心恐懼)를 부족하게 여겨 항상 눈에 있게 하려 했던 것이다."
하였다. 특진관 홍중보가 아뢰기를,
"오늘 주강을 개최하라는 명이 오래 정지한 끝에서 나왔으니 이 소문을 듣고서 어느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앞으로 만약 중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실로 신민들의 막대한 경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홍중보가, 성상의 병환이 회복되었다는 것으로 진하하여 종묘에 고하기를 청하고, 이경억 및 김수흥도 청하였으나, 상이 질환이 아직 쾌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따르지 않았다. 이경억이 아뢰기를,
"성상의 건강이 회복되어서 지금 비로소 경연을 개최하였으니 초야에 있는 신하들을 이때에 불러와야만 합니다. 송시열·송준길·이유태·윤문거에게는 정원으로 하여금 별도로 하유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각릉의 수호군에게 급복(給復)의 수를 더해주었다. 능의 위전(位田)이 많은 자에게는 30 부(負)를 급복하고, 적은 자에게는 40부를 지급하였으며, 위전이 없는 경우에는 50부를 지급하였으니, 이는 대개 대동법의 사목(事目) 중에 능군(陵軍)에게 지급하는 복호가 심히 적으므로 각릉의 참봉들이 예조에 보고하자, 변통하여 더 지급하게 한 것이다.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암탉이 변하여 수탉이 되었다.

 

경상도와 강원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전염되어 앓는 자가 매우 많았다.

 

2월 10일 계묘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윤우정(尹遇丁)을 지평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전라 감사로, 이단상(李端相)을 집의로, 맹주서(孟胄瑞)를 지평으로, 심세정(沈世鼎)을 병조 참의로, 김익경(金益炅)을 병조 참지로 삼았다.

 

2월 11일 갑진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서 조참(朝參)을 실시하였다.

 

사간 이정(李程)이 서장관이면서 현재 집의를 겸하고 있으므로 또 간관의 직책을 겸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지평 맹주서가 아뢰기를,
"호남 지역에 지난해 농사가 비록 흉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실지로는 말을 전한 것처럼 그렇게 매우 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 감사 조귀석(趙龜錫)은 착실하게 살펴보지도 않고 한결같이 각읍이 허위로 보고한 것에 따라서 재해와 풍작을 서로 뒤바뀌게 하여 세입(稅入)의 감축이 많게 하였습니다. 지금 진정(賑政)을 실시하고 있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절대적으로 적은 것을 보면 당초에 일처리를 잘 하지 못한 현상이 이미 놀랍습니다.
그리고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하악(李河岳)은 입암 산성(笠巖山城)에다 그전에 저장해 놓은 군기(軍器)를 전혀 수보하지 않았고, 이른바 새로 마련한 별비(別備)도 정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성첩(城堞)을 보수하여 축조한 것도 아주 완고하지 않아 기록할 만한 공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에 감히 말을 허비해가며 꾸며서 그 행상(倖賞)을 청하였으니, 도내를 안찰하는 체모가 이래서는 부당하며, 이미 체차하였다는 이유로 버려두고 논핵하지 않아서도 안 됩니다.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경기 감사 이행진(李行進)은 나이도 많고 재주도 없어서 기보(畿輔)의 일 많은 곳을 진실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심상한 정령도 잘못하는 일이 없지 않은데 더구나 지금 대동법을 신설한 날에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는 일은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으며 물의가 모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밤에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보이지 않았다.

 

2월 12일 을사

이시매(李時楳)를 경기 감사로, 홍주삼(洪柱三)을 사간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전한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좌랑으로, 이익한(李翊漢)을 판결사로, 박세당(朴世堂)을 부수찬으로, 장선징(張善瀓)을 수찬으로, 남용익(南龍翼)을 형조 참판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삼았다.

 

한강(漢江)에 사는 조묵석(趙墨石)이 그의 어미를 시해하였으므로 삼성 추국을 설치하여 자복을 받고 형벌을 정하였다. 당시에 교화가 크게 무너지고 민속이 파괴되어서 강상(綱常)의 변이 잇따라 일어나자, 식자(識者)들이 우려하였다.

 

2월 13일 병오

지평 맹주서(孟胄瑞)가 전 감사 이행진(李行進)이 논핵을 받은 후에 소장을 올려 자신을 변명하면서 연신(筵臣)이 논의한 것은 오랜 원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탄핵장을 연신이 지척한 후에 발하였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어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이행진의 상소에 이르기를,
"엊그제 부제학 이경억이, 신이 아둔하여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데도 양사가 논핵하지 않았다고 심하게 배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집에 움츠리고 있으면서 공의를 기다렸습니다. 잇따라 들으니, 그 날 경억이 대사간 남용익에게 은밀히 부탁하여 즉시 발론하게 하니, 대간이 말하기를 ‘나는 들은 일이 없는데 어찌 그대 말만 듣고 지레 발론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고, 또 들으니, 주강에서 경억이 신에게 잗달고 괴이한 일이 있다는 말로 성상께 진달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런 후에야 경억의 말이 불량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이 시종 경억에게 배척을 받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닐 것입니다. 신이 계해년에 남대문 밖 유희분(柳希奮) 첩의 아들의 조그만 집을 빌려 기거하고 있었는데, 경억의 아비 이시발(李時發)이 당시의 형조 당상으로 하루는 형조의 하리를 시켜 문에 와서 행패를 부리므로 신의 종대부(從大父)인 장령 이명준(李命俊)이 형리를 불러 꾸짖기를 ‘너의 관직은 청주(淸州)의 품관인데다 법관의 신분으로 어찌 사대부집의 부녀자를 몰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너는 희분이 위세로 그의 가문을 파멸하여서 그 집에 주인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하니, 시발이 이 말을 듣고 중지하게 했었습니다. 지금 그 자손들이 원망하고 있는 것은 진실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마는, 어찌 오늘에야 발론하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경억이 또 상소하여 진변(陳辨)하기를,
"설령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기로서니 이것이 과연 자손들이 잊지 않고서 기어이 갚아야 할 일이겠습니까. 만일 기필코 갚아야 할 원수라면 또한 어찌 명준의 아들과 손자를 놓아두고 하필 명준의 종손인 행진(行進)에 대하여 발론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신에 대해 변명한 말을 어찌 그다지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행진은 젊었을 때 상당히 기개가 있다고 여겼으나 식견이 부족하고 행동이 경솔하여 전도되는 일이 많았다. 이때에 나이가 70이었는데 경기 감사가 되어서 비록 봉양한다는 것이었으나 계어(鷄魚)를 요구한 것 때문에 열읍으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논핵을 받은 후에 분한 김에 말을 막 하였는데 조리없는 말이 많았다. 이것 역시 나이가 많은 때문이었으니, 어찌 심하게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사은 겸 진주사 우상 홍명하(洪命夏), 부사 임의백(任義伯), 서장관 이정(李程)이 청나라에 갔다.

 

정언 윤형성(尹衡聖)이 헌납 이유상(李有相)과 상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14일 정미

지평 맹주서(孟胄瑞)가 아뢰기를,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하악(李河岳)은 전에 장성 부사(長城府使)로 재임 시에 원래 산성을 수선한 일도 없었고 그전부터 비축 해둔 군기(軍器)를 완전히 포기하였으며, 새로 조성한 별비(別備)도 매우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장황하게 허위 보고를 하여 기능을 팔고 상주기를 바랐으니 일이 몹시 터무니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만석(元萬石)·홍처대(洪處大)를 승지로, 정재숭(鄭載崇)을 정언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이단하(李端夏)를 부교리로, 남이성(南二星)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15일 무신

정언황(鄭彦璜)을 승지로, 김시진(金始振)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대마도 태수가 준마(駿馬)를 요구하자, 조정에서 태복시(太僕寺)로 하여금 요구한 대로 주라고 하였다.

 

정언 송창(宋昌)이 아뢰기를,
"전 경기 감사 이행진이 일처리를 전도되게 한 상황은 조정의 신료들이 함께 아는 일이며 연신(筵臣)이 논척한 것은 대체로 관사(官師)가 서로 규찰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데, 대론이 발하자마자 이미 체차하기를 아뢰었으니, 공적인 논의였음을 더욱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일의 체모는 돌아보지 않고 소장을 올려 자신을 변명하고 심지어 연신이 논핵한 것을 오랜 원한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불쾌한 마음으로 공격한 자취를 덮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데도 놓아두면 뒤폐단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각사(各司)에서 공사를 전적으로 조사(曺司)에 책임지우는 것은 폐습 중에서도 큰 것이데, 괴원(槐院)의 경우가 더욱 심합니다. 문서(文書)를 감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조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고 비록 대단히 전복된 일이 있어도 일찍이 서로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기필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전적으로 한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은 단적으로 그런 이치가 없으니 그전 풍습이라고 핑계하고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원으로 하여금 병조의 전례에 따라 돌려가며 서로 돕게 해서 국사를 소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8일 신해

성균관이 아뢰기를,
"근래 제도의 주(州)와 현(縣)에 있는 향교에 봉안하여 제사를 모시는 위판(位版)의 성명과 봉작이 간혹 잘못 쓰여진 곳이 있으므로 고쳐 쓸 것을 계문하였습니다. 올봄에 석전제(釋奠祭)를 드릴 때 문묘(文廟) 동무(東廡)·서무(西廡)에 모신 신위의 내용을 관관(館官)이 여러 유생과 함께 살펴보니 잘못 쓴 곳이 역시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바로잡게 하소서. 그 중에 송현(宋賢)의 위차도 연대가 서로 어긋난 경우가 있고 우리 나라 선현인 안유(安裕)의 그전 이름이 국휘(國諱)006)  를 범하였으므로 국조의 문서(文書)에 모두 유(裕)자를 썼습니다마는, 위판(位版)은 아직도 그전 이름을 쓰고 있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고쳐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9일 임자

우의정 홍명하가, 봉사신으로 떠나기에 앞서 하직 인사를 드릴 때 선온주를 내리고 전송하자, 소장을 올려 사은하고 이어 계회(戒誨)하는 뜻으로 진달하기를,
"천재와 시변이 무더기로 일어나고 세도와 인심이 갈수록 괴리되니 오늘날 국사를 진실로 수습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드시 성상의 의지를 분발하셔서 무언가를 하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하신 다음에야 아마 위험을 전환시켜 안전한 상태로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건강이 점점 회복되어 경연을 일단 개최하고나니 온 나라가 손뼉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철회하지 마시고 정치하는 도리를 강론하되 훌륭한 선비들을 불러들여서 전적으로 보도(輔導)하게 하고 행동 하나 하나까지 꼭 하늘의 뜻에 따라서 때에 따라 조절을 하시면서 더욱 휴식을 취하시고 한갓 약에만 의존하여 효과를 기대하지 마소서.
시비를 밝히고 호오(好惡)를 결정하여 신하들의 폐습을 바로잡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옛 법을 복구하여 조정의 체통을 세우소서. 그리고 백성을 보살피는 정책이 한갓 진구(賑救)하는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폐단 중에서 가장 큰 것을 고치게 되면 백성이 스스로 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양호(兩湖)가 부담하고 있는 지역(紙役)은 백성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데 묘당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신이 비록 감히 다시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끝내 변통해 주지 않고서는 호민(湖民)을 다시 보호할 길이 없습니다.
기전(畿甸)을 측량한 후에 대동(大同)을 실시한 것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자는 뜻에서 출발한 것인데, 관리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봉행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대체로 조정의 법령을 애당초 시행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이미 시행하고 나서 중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되니 서둘러 해청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바로잡아서 잘못된 폐단이 없게 함으로 해서 곤궁한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하소서.
아, 천하의 일은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가며, 백성을 해롭게 하는 폐단은 제거하지 않으면 고질이 됩니다. 따라서 한 번 물러나게 되면 다시는 나아가기가 어렵고 한 번 고질이 되면 구제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 기미가 이러하니 더욱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하고, 이어 해직(解職)하고서 왕래하기를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또 이르기를,
"대동(大同)을 변통하는 일은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승지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수찬 장선징, 지평 송창도 함께 입시하였다. 승지 권대운(權大運)이 남병사 윤천뢰(尹天賚)의 추고 공사를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그 함사(緘辭)는 어떠한가?"
하니, 대운이 아뢰기를,
"이는 신이 추고하기를 청했던 바입니다. 듣건대 ‘정이룡(鄭二龍)은 기해년 국상(國喪)에 삼년 동안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고 하는데, 비록 무슨 일이 변방 장수에 적합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제목(題目)은 말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고, 승지 원만석(元萬石)이 아뢰기를,
"이미 충효(忠孝)가 평소에 드러났다고 하고 또 변방 장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니, 이 말이 괴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글 실력이 짧아서 그런 것이니, 책망할 필요 없다."
하였다. 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함경 감사 서필원이 산 송어(松魚)를 진상하는 일로 수령을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니, 비록 이것이 어공(御供)이기는 하나 수령을 바꾸는 것은 폐단이 있으므로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어공이 아니라 종묘에 천신(薦新)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운이 아뢰기를,
"천신과 어공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래에서 비록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상께서 짐작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전에 진계한 것을 가져오라."
하니, 정언 송창(宋昌)이 전 경기 감사 이행진을 파직할 일로 아뢰자, 상이 따랐다. 정위가 아뢰기를,
"전번에 주강을 개최하라는 명이 오랫동안 폐지한 끝에 나왔으므로 신하들은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뒤 다시 강연을 개최하지 못하니 혹시 상께 병환이 있으신지 염려됩니다. 신이 약방에 몸담고 있으므로 성상의 체후를 알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은 별일이 없어서 강연을 열려고 하였으나 일기가 좋지 않았고 또 눈병이 났다. 수일 동안 조리한 후에 강연을 열려고 한다."
하였다. 정위가 아뢰기를,
"상께서 눈병이 나셔서 글 보기에 방해롭다면 기어이 강연을 열 필요는 없습니다. 간혹 수시로 소대를 열어 자주 인접하시고 간혹 창 밖에서 근신을 소견하시어 그들과 함께 물으신다면 아랫사람들의 실정이 전달되어 모든 일을 너그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위가 또 아뢰기를,
"근래 모든 일이 태만하니 상께서는 의당 진작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선조(先朝)에는 정사를 개최하던 날에 정관(政官)이 늦게 오면 제대로 갖추도록 추궁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일이 없으며 망통(望筒)을 주고받을 때도 지체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상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조에는 간혹 불러보고 물어보았는데, 지금은 이런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승지 원만석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朝) 때 춘방(春坊)에 입직(入直)하고 있었는데, 마침 구언(求言)을 하시므로 감히 소장을 진달했더니, 즉시 불러 접견하시고, 이어 또 정원에 하교하기를 ‘만일 청대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당연히 만나보겠다.’고 하셨었는데, 언로를 열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수찬 장선징이 아뢰기를,
"지금 가장 우려되는 것은 군신 상하가 다 과감하지 못하고 퇴탁하는 것입니다. 상께서 오랫동안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던 중에 대신이 다 몸을 사리고 앞뒤를 살피면서 전철을 고수하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국사를 꾸려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일에 상께서 이행진을 다스리지 않은 것을 하문하자, 대신들은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신이 듣건대, 대신이 집에 있을 때에는 남들과 말을 하면서, 성상 앞에서는 감히 입을 다물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호의 감사도 훌륭한 점이 없다고 말하는데 까닭없이 잉임하시니 더욱 옳지 못합니다."
하고, 정위가 아뢰기를,
"근래 인심이 과감하지 못하고 풍속은 몹시 사나우니 마땅히 촉(蜀)나라가 숭상한 엄한 정치를 쓰셔야 합니다."
하니, 좌승지 홍처대가 아뢰기를,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벌을 주면 기강이 스스로 바로잡힐 것인데 엄한 정치를 숭상하라는 말은 아무래도 지나친 듯합니다."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오정위의 말이 옳습니다. 제갈량이 엄한 정치로 촉을 다스리고 최식(崔寔)이 정사에 은대(恩貸)가 많다고 기롱한 것이 어찌 정치하는 원칙을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인정(仁政)이 비록 좋기는 하나 전적으로 인정에만 힘쓰게 되면 결국에는 고식적인 데로 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선조 때부터 근시(近侍)를 변수(邊守)로 제수했던 것은 비단 자신만 영광일 뿐 아니라 인재를 선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단지 승탁(陞擢)의 계제로 삼고 있어서 승자(陞資)한 후에 곧바로 체직될 궁리를 하고 있으니, 국가의 기강이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가까운 일로 말하더라도 길주 목사(吉州牧使) 임한백(任翰伯)은 참으로 한심합니다. 임한백은 부임한 후로 병을 칭탁하고 관아를 폐기하여 술로 날을 보내더니 결국 체직될 궁리를 하여 그만두었습니다. 비록 지금 잡아다가 문초하라는 명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에게 주었던 가자(加資)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한백의 가자를 환수하라. 이 다음부터는 죄를 지어 파직된 자 외에 인피하여 체직되기를궁리하는 자는 개월 수를 결정하여 그 가자를 환수하되 묘당으로 하여금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원만석이 아뢰기를,
"그전부터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할 때는 옥당의 상하 관원들이 아울러 입시했었습니다. 그러나 전번에는 전우(殿宇)가 좁은 관계로 단지 한 명만 입시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상하번이 모두 입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가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권대운이 또 아뢰기를,
"선조(先朝)에 소대할 때는 대신 양사 및 비국 당상이 각각 한 사람씩 입시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도 그때 가서 아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집의 송시철(宋時喆),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추고 공사에 글자를 빠뜨리고 형식을 어겼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충청도 영동현(永同縣) 용당천(龍塘川)이 한나절 동안 단류(斷流)되었다.

 

2월 20일 계축

좌의정 원두표가, 수찬 장선징이 등대했을 때 대신이 범범하게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배척하고 또 이행진의 일을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고 배척하였다는 것으로 상차하여 파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도 첫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렸다.

 

대사간 홍처량(洪處亮)이 사직하고 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2월 21일 갑인

남구만(南九萬)을 집의로, 조수익(趙壽益)을 우윤으로, 이태연(李泰淵)을 호조 참의로, 장선징(張善瀓)을 부교리로, 나이준(羅以俊)을 수찬으로, 김익경(金益炅)을 승지로, 김수흥(金壽興)을 대사간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이익한(李翊漢)을 충청 감사로, 홍만용(洪萬容)을 수찬으로, 송규렴(宋奎濂)을 부수찬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박이명(朴而㫥)를 충청 수사로 삼았다.

 

헌납 이유상이 대사간 김수흥과 동서이므로 상피해야 할 대상이라 하여 인혐하여 체직되었다.

 

부교리 장선징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타고난 성품이 소원하여 매번 나라 걱정을 하다보면 걱정이 쌓이곤 합니다. 성상의 위안(威顔)을 지척에 모시다 보니 더욱 북받쳐서 망령스레 이러저러한 말을 했습니다마는 그 대요는 이렇습니다. 오늘날 국사가 지지부진하여 날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은 모두 전하께서 크게 해보려는 뜻을 분발하지 못하시고 보필하는 신하가 국사를 담당하고 원망을 책임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구구한 뜻은 삼가 상하 군신이 서로 경계하고 독려한다면 설령 지나치고 경솔한 말이 있더라도 도리에 무슨 손상이 가겠습니까. 대신의 자리가 한결같이 비어 있고 보좌하고 정치하는 기능이 마비된 것은 어리석은 신이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해롭기까지 하다.’ 하였는데, 신의 일이 불행하게도 이와 같습니다. 신을 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말한 것이 단연코 다른 뜻이 없었다면 어찌 사직하려 하는가. 마음을 편히 하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2월 23일 병진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예조 판서 홍중보, 병조 판서 김좌명, 정언 송창이 선정전에 와서 일을 아뢰었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전 담양 부사 김응조(金應祖)가 금성 산성(錦城山城) 군향(軍餉)의 일로 현재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응조는 세 조정을 섬긴 시종신으로 나이가 80이며 집이 영남에 있습니다. 그리고 두역(痘疫)이 가시지 않았으니 먼 길에 잡아오다가 보면 필시 일이 전복되고야 말 것입니다. 성상의 노인을 우대하고 신하를 보살펴 주는 도에 있어서 마땅히 관대한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잡아오지 말고 본도로 하여금 함문을 발하여 문죄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창이 아뢰기를,
"근래에 장법(贓法)이 엄격하지 못하여 장오로 인하여 좌폐된 자가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탐오(貪汚)하는 무리들을 징집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새로 제수한 충청 수사 박이명은 성격이 본래 거칠고 교활하여 가는 곳마다 각박하게 하니 이는 탐람하기가 특히 심한 자입니다. 일찍이 제주 목사가 되었을 때 이 일로 논핵하여 파직시켰는데, 겨우 1년이 지나자 또 곤수에 제수하니, 물정이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박이명을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목욕(沐浴)가는 일로 내일 외출해야 합니다. 그전부터 대장이 없으면 혹 가대장(假大將)을 차임하거나 간혹 도제조가 겸찰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마땅히 처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제조가 겸찰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그전부터 능행(陵幸)할 때는 임시하여 금군(禁軍)을 조련시키는 규례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조련토록 해야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상참을 파한 후에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상께서 오랫동안 편치 못하셨는데 지금 능행(陵幸)할 날을 가리라는 명을 내리시니 신하들은 진실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역(痘疫) 및 여기(癘氣)가 한창 치성하고 있으니 많은 배종하는 사람들이 어찌 모두가 다 정결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현재 흉년이 들어 갈수록 심하여 굶주린 백성이 제도(除道)에 시달리고 있으니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또 뱃길에 부교(浮橋)를 놓는 것도 매우 폐단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뱃길이 없는 가까운 능을 우선 배알한다면 되겠는가?"
하니, 예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백성들의 폐해는 비록 많지 않으나 여역이 가장 우려됩니다."
하였다. 이조 참의 민정중이 아뢰기를,
"이미 헌릉(獻陵)으로 결정하였는데, 어찌 물 건너는 폐해 때문에 다른 능으로 계획을 바꾼단 말입니까. 나룻배도 많으니 물 건너는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자, 상이 드디어 헌릉으로 행차할 것을 결정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헌릉에 비석(碑石)이 있는데 임진란 때 왜인(倭人)이 불을 질러 태웠으나 비석이 끝내 타지 않자 왜인이 신기하게 여기고 그 비의 글자를 마멸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고, 원두표는 아뢰기를,
"신은 그 비석을 보았습니다. 옛날에는 비록 제왕이라고 하더라도 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기록하였으므로 이 비석을 세웠던 것인데 그 글자가 아직도 마모되지 않았으며 비석 뒤에는 그 당시 제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하였다. 원두표가 또 아뢰기를,
"조정의 사체가 점점 그전만 못합니다. 전한 이단상(李端相)은 비록 오랜 신병이 있다고는 하나 부름을 받고도 나아오지 않은 것이 6, 7번이나 됩니다. 유신을 우대하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분의(分義)로 따져보면 일이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체직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근래에 인재가 상당히 부족합니다. 무반(武班) 중에서도 채용할 만한 자가 적습니다. 박이명이 일찍이 장오죄를 범하였는데 신이 혼모하여 살피지 못하고 비망(備望)하여 낙점을 받았습니다. 전관(銓官)이 장오를 범한 사람을 관직에 제수하였으니 그 죄가 큽니다. 신의 관직을 체차하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근래에 인재가 몹시 부족합니다. 유계(兪棨)·윤문거(尹文擧)는 모두 채용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유계는 질병을 앓은 지가 반 년이나 되어 아무래도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으니 몹시 애석합니다. 유계의 병은 내종(內腫)이므로 당연히 우황(牛黃)을 복용해야 하는데 집이 가난하여 구할 수가 없습니다. 선조(先朝)에는 중신이 병을 앓으면 약물을 하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내국(內局)에게 약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에게 묻기를,
"능행(陵幸)할 때 도성에 남아 있을 군병을 어찌 취품(取稟)하지 않는가?"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흉년이 저러하니 외병(外兵)을 조용(調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어영군(御營軍)으로 하여금 도성에 남아 있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만일 흉년이 들어 능행(陵幸)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한다고 한다면 어찌 도성을 지킬 군병을 징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행행할 때 모든 일을 재감하는 것도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니, 어영 대장 유혁연이 아뢰기를,
"무릇 군병을 단속하여 왕래하는 것도 한 가지 진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단 조발하여 왕래한 연후에 그들이 과연 유용한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훈국 도제조이기는 하나 현재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군문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대장의 임무를 겸찰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김좌명은 군색 제조(軍色提調)이니 대신 거느리게 하소서."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김좌명은 군색 제조일 뿐만이 아니니 대사마가 금병(禁兵)을 거느리는 것은 사체상 당연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유혁연이 아뢰기를,
"사족 자제들에게 무재(武才)와 활쏘기를 시험보이는 것이 이미 정해진 규정이 있어서 봄·가을에 실시하게 합니다마는 일이 착실하지 못합니다. 이후로도 계속하여 시사를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결정해 놓은 규정에 따라 끝까지 권장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성균관 유생의 과시 정식(課試定式)에 대하여 입계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판하(判下)하지 않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성상의 뜻은 다시 헤아려 보고 싶으신 것이 있어서 그러십니까. 본관의 고사를 보면, 관관(館官)이 매일 제좌(齊坐)하여 유생들을 불러 예를 행하게 한 뒤에 상하재에서 각각 한 사람을 불러서 읽었던 글을 강하게 하고 한 해가 끝날 무렵 그동안 강하였던 획수를 통고(通考)하고 식년(式年) 강획에 합하여 계산하였습니다. 그러나 폐지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복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관학제생을 상·하재를 막론하고 사서 삼경을 차례대로 윤강(輪講)하되 매월 4권으로 한정해서 1년을 합계하여 46권을 마치게 하고 1년을 통틀어 강한 획수가 20분(分)이상인 사람만 초계(抄啓)하여 별도로 상전(賞典)을 베푸소서.
제술(製述)인 경우에는 윤차(輪次)를 전제로 하여 달마다 시취(試取)하고서 역시 연말에 분수를 통틀어 10분 이상인 자를 초계하여 상을 준다면 필시 크게 권장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고, 김수항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초시(初試)의 수가 매우 많아서 난잡해질 것입니다. 조종조에는 간혹 전강에 친히 임어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마는 통독(通讀)하여 입격한 자들을 다시 전강(殿講)에서 시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김수항의 말이 옳은 듯합니다. 초계한 후에 승지를 보내서 강을 하기도 하고 제술을 하기도 하여 취재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고, 홍중보가 아뢰기를,
"단지 십수 인을 보고 초시 때마다 승지를 보낸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로 하여금 여러 대신과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심세정(沈世鼎)을 승지로, 이동로(李東老)를 헌납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병조 참지로, 이원정(李元禎)을 판결사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윤심(尹深)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함경도에 여역이 크게 치성하여 역병으로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소와 말도 많이 죽었다.

 

2월 24일 정사

정언 박세당이 여러번 소명(召命)을 어겼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지평 정재숭이 인견했을 때 입대(入對)하여 황헌(黃瀗)의 일로 혐의로워 감히 연계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지평 맹주서가 마땅히 처치해야 하는데 집안에 피해야 할 질병이 있어서 대궐에 나아가 처치할 수 없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정원이 봉입하지 않았다. 그뒤 또 인피하였는데 정원이 계품만 하고 또 봉입하지 않았다. 맹주서는 결국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가 정재숭과 함께 체직되었다.

 

장령 강호(姜鎬)가 사장(辭狀)을 올려 체직되었다.

 

2월 25일 무오

전 이조 참판 유계(兪棨)가 졸하였다. 유계는 어려서부터 놀랄 만큼 총명하더니 조금 성장하여서는 넓게 보고 잘 기억하여 문장력이 풍부하였고 또 전적으로 경의(經義)를 공부하여 발명한 것이 많아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병자년에 설서(說書)가 되어 남한 산성에 따라 들어갔다가 성을 지키기가 힘겹고 조정의 논의가 몹시 다급한 것을 보고 전쟁 수비에 관한 급선무를 조목별로 진달하였다. 당시에 대신들이 왕세자를 겹사돈으로 삼고자 하자, 유계가 나아가 면대하고 그것이 불가함을 강하게 말하여 아뢰기를
"변경성(汴京城) 안에서 만약 일찍이 이방언(李邦彦)과 백시중(白時中)을 처참했더라면 필시 청성(靑城)의 모욕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일찍이 왕법을 정하지 않는다면 대의가 밝지 못하여 사기(士氣)를 진작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미 성에서 내려온 후에 척화(斥和)했다는 이유로 죄를 받았다. 그뒤에 금산(錦山)으로 옮겨가서 날마다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강독하며 지냈다.
그후 인조(仁祖)의 상에 또 시호에 관한 논의 때문에 죄를 얻어 벽지에 편배(編配)되었다. 송시열 등이 효묘(孝廟)의 정권을 잡자 바야흐로 계획을 단단히 세워 복수하려고 하였다. 유계가 그때 호중(湖中)에 있었다. 시열이, 유계가 아니면 더불어 함께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하여 상에게 힘써 말하니, 상이 노여움을 풀고 진용(進用)시켰었다. 얼마 후에 초천(招遷)하여 군국의 임무를 맡기니, 유계도 은혜로운 대우에 감격하고 지혜와 식견을 다하여 시행한 바가 있었으면 해서 매번 진대할 때나 소장을 주달할 때 말과 일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현묘(顯廟) 초에 시사가 그전과는 달랐다. 그래서 유계는 서너 명의 명류들과 더불어 체재를 유지하고 바로잡아 구원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몸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하다가 병이 생겨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당시의 논의가 애석하게 여겼다.
유계는 일찍이 글을 지어 정치하는 요체를 논한 적이 있었으며 조정에 있을 때에는 또 양역(良役)을 변통하고자 하여 공경(公卿) 이하에서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베 1필을 거두어서 오위(五衛)의 제도를 대신하게 함으로써 첨정(簽丁)의 폐단을 구제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 일을 조목별로 갖추어 진달하게 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은 옳다고 여기는 자도 있었으며 부정하는 자도 있었는데, 대신들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에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유계는 세상일에 관심을 두어 폐거(廢居)한 날이 오래 되었으나 경영하고 강구한 일이 많았는데, 논설은 훌륭했으나 시용하기에는 단점이 있었으며 구획(區劃)은 비록 두루 하였지만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 일에 임해서도 기회를 잡아 절의를 내세우지 못하여 매번 소루하고 느러짐으로써 실책을 범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중망은 받았으나 분명치 못하다는 꾸지람이 많았다.

 

윤우정(尹遇丁)을 정언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권대운(權大運)을 병조 참의로, 이원진(李元鎭)을 예조 참의로, 윤심(尹深)·윤형성(尹衡聖)을 지평으로 삼았다.

 

2월 26일 기미

상이 사관을 보내어 좌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시골로 물러간 지가 어느덧 5년이 되었다. 내가 날마다 경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지만 성의가 미덥지 못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게 할 수가 없으니 염려하는 마음을 어찌 자나깨나 잊을 수 있겠는가. 경은 선조의 숙덕(宿德)으로 의리상 좋은 일 궂은 일을 함께 해야 하고 평소에 나라 경영하는 방법을 강구하였으니 세상을 바로잡을 재량이 넉넉할 것이다. 오늘날 국가의 형세를 주목해 보면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널리 구제할 대책을 경을 기다려서 세우고, 조정이 분열되어 동지들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시세에 변동이 없게 하는 책임을 경에게 맡겨야 하겠다. 나의 실책을 경이 아니면 누가 바로 잡아줄 수 있겠으며 모든 일이 타락하고 있으니 경이 아니면 누가 떨쳐 일으킬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는 오랜 질병으로 학문을 오랫동안 폐기했다가 이제 겨우 조금 나아서 처음으로 경연을 열었다마는 경연에서 성취의 공을 볼 수가 없고 접견할 즈음에도 성의껏 인도해 주는 가르침을 듣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 경을 생각하는 마음은 시절이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더하다. 경이 만일 여기에 생각이 미친다면 또한 어찌 뒤돌아 보아주는 생각이 없겠으며 유독 선왕께서 알아 주시고 대우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봄철이 이미 늦어서 일기가 따뜻하니 경은 선뜻 계획을 바꾸고 속히 올라와서 우두커니 서서 바라고 있는 나의 마음에 부응하라."
하고, 행 부호군 이유태에게 유시하기를,
"그대가 지난해에 조정으로 나왔을 때 마침 내가 질병이 심하였다. 그래서 하루도 조용히 접견하지 못하여 예우하는 처음 마음에 부족함이 있었으니 잊지 못하는 이 마음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국사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지 알 수가 없다. 만약 제현들이 보필해 주지 않으면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여서 전복되는 데까지 이르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질병이 조금 나아서 처음 강연을 열었다. 경문의 대지를 토론하여 그 깊은 뜻을 개진해서 나의 학문하는 방법을 도와줄 자가 그대를 놓아두고 누구이겠는가. 속히 올라와서 갈망하는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대사헌 송준길, 장령 윤원거가 사직하고 나아오지 않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조금 전에 내수사의 첩문(牒文)을 보니, 숙명 공주(淑明公主) 집에서 사들인 금산(金山) 땅의 농토에서 경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본도로 하여금 우선 엄하게 다스린 후에 공명정대하게 처결하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수사 관원을 불러 물어보고 전후의 문서를 가져다 살펴보니, 지난해에 어사(御史)가 올린 서계에 따라 호조로부터 복계하여 본도에다 알려서 차사원을 별도로 차정한 다음 양안(量案) 및 문권(文券)을 조사해서 이미 백성들에게 결급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조사한 후에 궁가(宮家)의 수본(手本)으로 인하여 또 처결하도록 하고 심지어 경작하던 사람을 잡아다가 무겁게 다스리라는 분부를 하시니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 손상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따라서 이 공사를 감히 봉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떼어받은 것과 비교할 일이 아니다. 사들인 물건에 대해 본도로 하여금 강명한 관리를 본도로 차정하여 다시 조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우승지 원만석(元萬石)이 아뢰기를,
"초기(草記)를 보건대, 이미 결급한 후이니 경작자는 죄줄 일이 없을 듯합니다. 설사 왜곡되게 다스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다시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조사가 다 끝나기를 기다려서 죄상이 현저하게 드러난 뒤에 조용히 처치하는 것이 사체상 당연합니다. 해조가 계청한 대로 경작자를 아직 죄주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장차 헌릉(獻陵)으로 행행하기 위하여 삼전도(三田渡)를 경유하여 강을 건널 계획이었으므로 공조로 하여금 배를 정돈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공조가 본조의 안건에 부탁한 배 1백 70척을 그때까지 절반의 숫자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으로 경기의 수영과 절반씩 나누어 배를 장식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네 번째 정사하고, 호조 판서 정치화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아울러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정태화의 형제는 인조조로부터 성상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태화가 정승의 직책에 머문 지 전후 30여 년이었으며 형제와 종족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어서 당시에 어느 누구도 미칠 수가 없었다. 정지화가 평안 감사가 되었을 때 청나라 사신이 마침 왔는데 역관에게 묻기를
"영상은 누구입니까?"
하자, 대답하기를
"정태화입니다."
하고,
"호판은 누구입니까?"
하자, 대답하기를
"정치화입니다."
하고,
"도승지는 누구입니까?"
하자, 대답하기를
"정만화입니다."
하니, 청나라 사신이 이에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 나라는 정가(鄭哥)로 나라를 다스립니까?"
하였다. 태화와 치화가 그 말을 듣고 싫어하여 그가 서울에 들어오자 명분없는 뇌물을 은밀히 주어서 그의 입을 막았다.
태화는 성품이 부드럽고 외모가 아름다워 시론에 거스림을 받지 않았으며 또 주상에게 잘 보였다. 그리하여 상이 친기(親己)라고 여겼다. 세 조정을 내리 섬기면서 일찍이 남에게 좋지 않은 얼굴빛을 짓지 않아 도량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또 그는 국조의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는데 이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관직에 머무르면서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였으며 정승이 되어서도 경장(更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성문화된 법규만을 삼가 지켜 나라에 비록 큰 이해가 얽혀 있어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으며 가산이 심히 풍부하였으므로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이 상당히 있었다. 전후로 성상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고 매우 전적으로 위임받기도 하였으나 큰 계획을 내놓지 못했다. 물론이 이것 때문에 하찮게 여겼다.
그뒤에 치화와 지화가 서로 이어 정승이 되어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이후로 공상(公相)이 끊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한(漢)나라 때 원소(袁紹)의 조상과 양진(楊震)에 비유하였다.

 

2월 27일 경신

안진(安縝)을 헌납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송창(宋昌)을 장령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삼았다.

 

2월 28일 신유

양호의 사이에 황산(黃山)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 황산은 곧 김장생이 왕래하던 곳이라 하여 원우(院宇)를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김장생의 사승(師承)으로 삼고 또 이이와 성혼의 연원이 출발한 곳을 미루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아울러 제사를 모시게 했다. 이때에 이르러전라도 여산(礪山)에 사는 유생 송유광(宋有光)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을 청하기를,
"조광조와 이황은 조정에서 이미 성무(聖廡)에다 차례대로 제사를 모십니다마는, 이이와 성혼도 지금 온 나라의 학사와 대부가 모두 한목소리로 말을 하고, 또 이로써 청합니다. 그들의 도덕과 학문의 아름다운 점에 대해서는 아마 이미 성상의 마음 속에 복안이 있으실 것입니다.
대개 광조는 청순한 자질로 체용의 학문을 몸소 익혀 성인을 자기 자신에게 기약하고 왕도를 임금에게 기대하였습니다. 비록 간특한 무리가 일어나 도가 비색해져서 그 쓰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나 남아있는 풍도는 지금까지 힘입고 있으며 후인이 왕도(王道)를 귀하게 여기고 패도(霸道)를 천하게 여기며 도학(道學)을 높일 줄을 아는 것은 모두 광조의 역할이었습니다.
이황은 성품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학문은 문리가 세밀하였는데 일생 동안 성리(性理)에 침잠하여 주자를 독신하였습니다.
이이는 고명한데다 마음에 조금도 티가 없고 대원칙을 환히 알아서 이기(理氣)의 변론에 있어서는 전현(前賢)들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크게 나타냈으며 경제에 관한 대책은 선왕이 남기신 뜻을 깊이 터득하였으니 논의하는 자가 참선비의 학문이요 왕을 도울 재목감이라고 하였습니다.
성혼은 굳세고 엄하여 탁월하게 덕을 이루었으며 진퇴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언제나 선현들과 일치하였습니다.
오직 이 네 현인이 1백 년 사이에 서로 이어 흥기하여서 이 도학이 1천여 년을 면면히 이어온 대통을 이었으니, 아, 성대한 일입니다. 이로써 우리 동방 전체에서 진실로 이 도학 안에 있는 자는 강송하여 사모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일찍이 유거(遊居)했는지의 여부는 논하지 않았으며 타령(妥靈)을 엄하게 받들어 제사를 지내도록 한 명에 대하여 이견을 내세우는 자도 없었습니다.
김장생의 경우 숭고하고 굳세며 혼후하고 장중하여 자질이 노둔한 데서부터 항상 남보다 많은 공을 쌓아 싫어하거나 게으름피우는 일이 없이 늙어서도 더욱 독실히 하였으므로 그 성취한 것이 고명순각한 곳까지 도달하였으니 이는 아마 네 현인의 통서(統緖)를 잇고 후학의 무궁함을 열어준 자로서 같은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은 백 세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서원을 건설한 지가 이미 40년이 되었기에 그전 제도가 빠지고 생략된 것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비로소 중수하는 일로 인하여 장생이 남긴 제도를 미루어 기술해서 멀게는 의례(儀禮)의 제도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문공(文公)의 학설을 참고하여 당숙(黨塾)의 당진(唐陳)과 이요(䆠窔)를 모두 법의 규정에 따라 옛 법을 회복할 차례로 삼는다면 뒤에 태어나 새로 배우는 자들이 아득하여 증거할 데가 없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모두 삼대의 제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소가 올려지자, 상이 해조로 내려보냈다. 마침내 원우를 거듭 세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에 있는 사인암(舍人巖) 앞 큰 냇물이 하룻밤 동안 단류되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대를 열었다. 시독관 오시수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검토관 홍만용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경기 도사가 되어 교생(校生) 고강(考講) 문제로 순시차 양주(楊州)에 이르러 들어 보건대, 본주(本州) 양전 등수(量田等數)의 높낮이가 고르지 않아 백성들이 대부분 떠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경기는 근본이 되는 땅이므로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신 및 선혜청 당상이 입시하였으니 하문하셔서 처리하소서."
하고, 좌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당초에 수령이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이런 폐단이 발생하였는데, 양역(量役)을 이미 마친 상태에서 일이 몹시 난처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이 출사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뒤에 의논하라."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부제학 유계가 죽은 후에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루지 못합니다. 선조(先朝)에서는 유신 조석윤(趙錫胤)의 초상에 장례 비용을 제급한 일이 있었으므로 지금 역시 그 일을 예로 삼아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장례 비용을 제급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김좌명에게 이르기를,
"선조에 헌릉(獻陵)에 행행했을 때는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왔으니 이번에도 조금 늦게 출궁하였다가 다음날 도성으로 돌아온다면 어떻겠는가?"
하니, 제신들이 모두 마땅하다고 하자,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대사간 김수흥이 아뢰기를,
"배릉(拜陵)할 날을 지금 이미 받아 놓았습니다. 그전에는 환궁할 즈음에 간혹 열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능행에 비록 군사가 따라가는 의식이 있기는 하나 재계를 파한 지 오래지 않은 상황에서 열무(閱武)·시재(試才)하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성상께서는 조용히 수레를 돌리셔서 일찍이 환궁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말이 좋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지금은 인재가 매우 부족하여 대간을 차출할 즈음에 미봉책으로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미처 해유를 받지 못했거나 월등(越等)된 자가 1백여 명에 이르고, 이 밖에도 파산된 자가 이미 많아 심지어 추감(推勘)까지도 많이 적체되어 있습니다.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물어서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원두표가 아뢰기를,
"해유(解由)는 조종(祖宗)의 법령이므로 갑작스레 변통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오늘날 인재가 부족하다는 것은 진실로 김수흥의 말과 같습니다. 아장(亞將)의 경우도 송시철(宋時喆)과 같은 자로 삼고 있으니, 정말 한심합니다. 그리고 패초에 나아오지 않는데 대한 법규가 전에는 파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무술년에 대신이 의견을 수합하여 파직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6, 7차례 나아오지 않는 자가 있으니 몹시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파직을 시키게 되면 비록 파직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맞추어 준다고 할지라도 여러번 패초하는데도 나아오지 않아서 사체를 손상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근래에는 태만스런 일이 많습니다. 비국이 좌기(坐起)하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불참하는 자가 항상 많습니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는 대신이 책려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신같이 무능한 자가 어떻게 책려를 한단 말입니까. 지금 대신이 비록 대신이란 이름은 갖고 있습니다만 대체로 정사에 관한 일을 참여하여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강이 무너지는 것을 대신에게 책임지우려 하는 것은 실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도 옳습니다. 대체로 규례에 따라 추고를 청하다 보면 모두가 원망하고 노여워하니 대신이 원망을 도맡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하직하고 떠나는 수령을 인견하는 일은 선조 때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상께서는 현재 조섭중에 계시므로 비록 일일이 인견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선조의 고사에 따라 간간이 인견하시고 감사와 병사도 수시로 인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번에 대신이 외국으로 나가던 날도 소견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당시 성상의 건강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신하들은 모두 섭섭하게 여겼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즘 경연을 열라는 분부를 잇따라 내리시니 조정내의 분위기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상께서는 철회하지 마소서. 그리고 윤대(輪對)의 폐단이 지금 이미 오래되어 각사의 관리가 그 직책을 아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수시로 윤대하게 한다면 해당 관원들도 필시 자기 임무에 유의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2월 29일 임술

조수익(趙壽益)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병조 판서 김좌명, 한성 우윤 유혁연이 헌능에 행행할 도로를 가서 살펴보고 돌아왔다. 상이 희정당에서 사대를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노량(露梁)은 도로가 순편하며 서빙고(西氷庫)를 들러서 가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양재(良才) 이후부터는 백성들의 밭 가운데로 길을 삼아 10여 리를 가야 하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삼전도(三田渡)를 경유하여 가자니 물살이 거세어 건너기가 불편합니다."
하고,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아뢰기를,
"지금 농사철에 10여 리나 되는 백성들의 밭을 상하게 하는 것은 매우 염려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다른 길이 없는가?"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동쪽 교외로부터 길을 잡으면, 광진(廣津)의 물가는 도로가 너무 좁고 화양정(華陽亭)의 앞길은 진흙길이어서 역시 불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전도로 길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김좌명에게 이르기를,
"도감에 유황(硫黃)을 무역해 온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서울 에 사는 부상(富商) 이응상(李應祥)의 종 무선(武善)인데 그는 응상의 지휘를 받고 외방에서 모리(牟利)를 일삼는 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감에서 일찍이 분부한 일이 있는가?"
하니, 유혁연이 아뢰기를,
"좌상 이 일찍이 김근행(金謹行)이 대마도에 들어갈 때 왜인(倭人)과 서로 약속하게 했었으므로 왜인이 이것을 잠매(潛賣)하려고 먼저 2만 근을 보내오고 뒤따라 보내온 것이 또 2만 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장삿꾼이 도와주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미리 알려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필시 곧바로 왜관으로 도착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니, 유혁연이 아뢰기를,
"전일 잠매할 때 가덕(加德)으로 왔었으니, 이번에도 필시 가덕으로 올 것입니다."
하고, 김좌명이 아뢰기를,
"대체로 듣건대 유황 값이 왜국(倭國)에서는 매우 싸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비싼 값으로 무역하기 때문에 저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와서 팔려고 한다 합니다."
하였다. 유혁연이 아뢰기를,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므로 그 유입로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나라에는 없는 물건이 없습니다. 단천(端川) 지역의 유황토(硫黃土)를 제련하여 수은(水銀)을 채취하고 청주(淸州) 지역의 유황을 제련하면 함석(含錫)을 채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채취하여 사용하지를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사물에 해박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김좌명이 또 아뢰기를,
"장검(長劍)은 매우 필요한 물건인데 왜관에서 무역하여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좌상이 김근행(金謹行)으로 하여금 구해오게 하였는데, 지금 듣자니 2백 자루를 가져 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어 군병이 조련할 때 진법(陣法)에 관하여 묻자, 유혁연이 방진(方陣)·원진(圓陣)·첩진(疊陣)과 같은 방법을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열무(閱武)할 때 그 진법을 보니 행행할 때의 진법과 같지 않은 점이 있었다."
하였다.

 

강원도 강릉에 심한 바람이 불어 지붕 위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큰 나무들이 모두 뽑혔으며 깔려 죽은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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