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5년 1664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4.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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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사

승지를 전옥서에 파견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이규령(李奎齡)을 지평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응교로, 심재(沈梓)를 부수찬으로, 박세당(朴世堂)을 교리로, 권령(權坽)을 승지로, 원만석(元萬石)을 호조 참의로, 심세정(沈世鼎)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임어하신 지 5년이 지났는데 점점 처음만 못해지고 있습니다. 정사를 듣고 처리하는 것이 점점 게을러지고 있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데에 점점 태만하며, 민생이 점점 곤궁해지고 인재가 점점 부족하며, 조정이 점점 괴리되고 법망이 점점 조밀해지며, 기강이 점차 무너지고 풍속이 점점 투박해져 나라 정세의 위태로움이 점점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가고 있습니다."
하고, 민생이 점점 곤궁해져 가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신은 듣건대, 조그마한 은혜로는 두루 미치게 할 수 없고 적은 신의로는 참으로 믿게 할 수 없으며, 백성들은 무지하여 매우 어리석지만 신묘하게 안다고 합니다. 지금 조정에서 강구하여 계획하는 것들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크게 변통하여 해로운 것을 없앴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구구한 진대(賑貸)나 세금을 감면해 주는 조처로서는 백성들을 화합시키기에 미흡할 것 같습니다. 백성을 부리는 방도는 반드시 공평하고 균일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폐단이 없어야 민심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현재 주현(州縣)에서 감히 차역(差役)하지 못하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내수사의 노비와 장호(庄戶), 여러 궁가의 노비와 장호, 각 아문의 둔전 모민(屯田募民), 급복(給復)한 군졸, 권세가의 장호, 호우(右豪)016)  의 비호를 받는 자들 같은 부류는 모두 달아나 편안하게 지내는 자들로서 명적(名籍)이 관가에 올라가 있지 않아 수령들이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온 고을의 백성들 중 역에 응하는 자들은 십 분의 이삼에 불과하여 그들은 일년 내내 갖은 고생을 하고 죽음을 면하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두세 명이 열 사람 몫의 역을 해야 하니, 이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어떻게 원망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우선 내수사와 궁가로부터 시작하여 사적으로 치우친 정사를 타파하여 고르고 밝은 다스림을 밝히소서. 이어 소관 관사로 하여금 차례차례로 혁파할 것은 혁파하고 행할 것은 행하도록 하여 수고롭고 편한 것을 고르게 함으로써 경중의 차이가 없게 하소서. 그러면 반드시 실제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쳐 기근이 들어도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인재가 점점 부족해져 가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정치에 대하여 잘 말하는 자는 반드시 인재를 성취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는다.’ 하였고, 유원성(劉元城)은 말하기를 ‘인재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인주가 스스로 사직을 위하는 계책이다.’ 하였습니다. 우리 조종(祖宗)이 인재를 성대하게 배양한 것은 전고에 탁월하여 경술(經術)과 문학(文學)뿐만 아니라 궁사(弓士)·마부(馬夫)·의원(醫員)·역관(譯官) 등의 잡기(雜技)에 이르기까지 각 기예에 조금이라도 특이한 자가 있으면 권장하고 성취시켜 모두 알맞은 자리에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감사와 수령이 적임자인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변변찮은 재주와 잡기까지 없거나 부족하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이미 배양하고 권장하는 방도를 잃은데다가 애석하게 여기고 잘 보호해 주려는 뜻마저 없어 재능있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채용하거나 천거하지는 않으며, 악을 징계하기는 잘하고 선을 권장하기는 잘못하여 선비들의 기개가 꺾여 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에 인재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가꾸지 않은 숲에서 재목을 구하며 말을 기르지도 않은 목장에서 준마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얼토당토 않은 말이 아니겠습니까.
근래 본원에서 차자를 올린 일로 인해 파산인(罷散人)을 초계(抄啓)한 일이 있는데, 이는 단지 일시적인 급무에 부응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볼 때, 인재를 배양하는 데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키는 것은 단지 성상께서 조종이 물려준,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를 가져다가 권장하는 조목을 거듭 밝혀 착실하게 거행하는 데 있을 뿐이니, 그렇게 하면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법망이 점점 조밀해져 가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국가가 여러 차례 변고를 겪게 됨으로 인해 임시로 설치된 아문이 점차 많아져 각기 일시적으로 통솔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벼이 법조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점차 번다하게 증가하여 도리어 조종께서 남기신 법보다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녹봉을 빼앗고 매질하는 등 문제되는 것들이 많은데, 무릇 이렇게 먹을 것을 빼앗고 그 몸에 욕을 보이는 것은 노예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당시의 폐단을 구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도리어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습니다. 그 세미한 조목들을 간략히 하고 단지 범한 죄의 경중만을 보아 품급(品級)을 빼앗거나 파직하거나 추감(推勘)함으로써 한결같이 사대부의 벌을 써서 조종의 헌장(憲章)을 따르소서."
하고, 기강이 점점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기강은 독자적으로 설 수 없고 반드시 인주의 마음이 공평 정대하여 사사로이 편당을 짓거나 딴 마음을 품는 일이 없는 뒤에야 기강이 매일 데가 있어 서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마음대로 하는 사사로움을 둔다면 아랫사람들이 사사로이 좇는 것을 금하기 어렵고, 조금이라도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 치우침이 있으면 아랫사람들이 멋대로 하는 것을 금하기 어렵고, 편안하게 즐기는 것을 좋아하면 아랫사람들의 태만함을 꾸짖기 어렵고, 사사로운 재물을 쌓아놓는다면 아랫사람들의 탐오함을 금하기 어렵고, 형벌과 상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뭇 사람들의 마음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을 쓰고 물리치는 것을 공평하게 하지 않는다면 현자가 권면될 바가 없을 것입니다.
또 묘당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혹 다 옳게 하지 않는다면 대성(臺省)과 각도가 반드시 자기들끼리 몰래 의논하여 받들어 행하는 데 게을리할 것이고, 대성과 각도가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주현(州縣)의 관리들은 반드시 서로 헐뜯으면서 공공연하게 일을 폐기해 버릴 것입니다. 이 때문에 현재 각도는 조정에 대항하고 주현은 감사를 속여 속임수와 거짓이 풍조를 이루어 체통이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각에서 간혹 모여 의논할 경우 하찮은 일인 데도 불구하고 곧 원수가 되어 원망하니, 이와 같은데도 기강이 절로 서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풍속이 날로 투박해져 가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국가가 교화하는 정사에 대해 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십수 년 이래로 습속이 무너져 윤상(倫常)의 변이 연이어 발생하고, 혼란하고 거짓된 풍조가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으며, 사치스런 풍조와 멋대로 속이는 폐단이 이미 고질병이 되어 금령이 시행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명분과 절개가 날로 상실되어가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선한 백성과 악한 백성을 구별하여 그들이 사는 마을에 표시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격려시키고 권면하는 도를 어떻게 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치사(致仕)하는 법은 예제에 소상하게 있으니, 만일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어 가벼이 허락할 수 없는 자가 아니면 허락하여 무너진 풍속을 떨쳐 일으켜야 합니다. 어찌 굳이 일체 허락하지 않아 마치 행해서는 안 되는 일처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청렴한 자와 탐오한 자를 분별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이가 우선 힘써야 될 일입니다. 조종조 이래로 청렴 근검한 자들을 가려 총애하고 작질을 올려 주었으며 자손들에게까지 혜택이 미치게 하였으니, 이러한 것과 같은 일도 세교(世敎)를 부지하는 한 가지 방법인 것입니다. 충효절의(忠孝節義)한 자는 마땅히 포상하고 발탁해 써야 하는데, 외방은 관례적으로 거행하고 있으나 멀고 궁박한 지역에서는 정문(旌門)이나 표창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또한 많습니다. 마땅히 각도에 신칙하여 그들의 실제 행적을 조사하여 일일이 보고하게 하고는 즉시 포상해 주어야 합니다."
하고, 끝에 또 아뢰기를,
"상을 모시는 친위병은 다른 군대에 비해 더욱 중요한데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완(李浣)은 중병에 걸려 지난해 겨울부터 직임을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휴가를 얻어 온천에 목욕하러 갔는데 돌아올 기약 또한 쉽지 않습니다. 근 1만 명에 달하는 군졸들이 반년 동안이나 장수없이 지내 연습을 완전히 폐함은 물론 통솔되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방도이겠습니까. 비록 대신이 총체적으로 살피고 제조(提調)가 대행하고 있지만 이러한 때 이와 같은 직임을 어떻게 시종 대신 살피게 하고 말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 속히 변통하소서."
하니, 상이 후한 비답을 하고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수흥이 시정(時政)을 직접 보고 여덟 가지 점점 나빠져 가는 것에 대해 조목조목 아뢰었는데, 내용이 매우 간절하였습니다.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니, 이미 가납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정사를 보는 것이 점점 게을러지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점점 태만해진다는 것은 오직 성명께 달려 있으니, 더욱 삼가하는 마음을 지니소서. 민생이 점차 곤궁해지는 것은 실로 차역(差役)이 고르지 못한 데에서 연유합니다. 내수사·여러 궁가 및 각 아문의 둔민(屯民)에 대해서는 모두 똑같이 차역할 것을 종전에 계하하여 신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방에서 착실하게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번 삼궁(三宮)에 소속된 장노(庄奴)에게도 고르게 역을 부과할 것을 대간도 논집했었지만 끝내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중외 사람들이 실망하며 분개해 하는 점입니다. 만약 내수사와 궁가로부터 사사로이 치우친 정사를 타파한다면 그 나머지 각 아문과 권세가의 장호 및 호우(右豪)가 비호하는 자들은 명령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파할 것입니다. 원컨대 특별히 성교(聖敎)를 내리시고 별도로 거듭 밝혀 실제 효험이 있게 하소서.
근래 인재가 점점 부족하여 심지어는 의원과 역관 같은 기능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니, 이는 진실로 오늘날 매우 급박한 걱정거리입니다. 문무의 인재와 잡기(雜技) 등 부류의 능력있는 자를 배양하고 성취하는 법은 국전(國典)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각 해사로 하여금 한결같이 법전에 의거하여 하도록 거듭 밝혀 권장하소서. 법망이 점차 조밀해져 가는 것은 쇠퇴한 세상의 일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난리를 겪은 뒤로는 일이 점점 많아져 새로운 법조문이 번거로이 증가되어 폐단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일시에 다 없앨 수는 없지만 해사로 하여금 옛 제도 외에 새로이 만든 조목은 신들에게 와서 의논하도록 한 뒤 그 중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만한 것은 우선 녹계(錄啓)하여 품정하게 하소서.
만약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권면시킬 수 없습니다. 충효절의한 자를 지방에서는 보고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멀고 궁벽한 곳에서는 빠뜨린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다시 더 순방하도록 하여 제반 격려하는 법을 착실히 거행하게 하소서. 소장 끝에 진술한 일은 등대할 때 직접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4월 3일 을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대사간 김수흥이 소장 말미에 아뢴 일은 중대하여 신이 단독으로 아뢰어 정할 수 없으니, 좌상이 출사하기를 기다렸다가 서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날 인견할 때 이조 참의 민정중(閔鼎重)이, 겸직하고 있는 국자감(國子監)의 소임을 간절하게 사직했는데, 신의 생각에는 관(館)에 해야 할 일이 많으므로 가벼이 체직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뭇 사람들의 의견이 ‘겸직이 너무 많으니 체직을 허락해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으므로, 윤허를 받아 체직되었습니다. 지금 밖의 의논을 들으니, 모두 체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고 유생들도 그가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고 하니, 잉임시키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들으니, 전염병이 매우 성하다고 한다. 활인서(活人署)에 있는 병자들에게 해조에 신칙하여 양식과 약을 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관무재(觀武才) 초시에 활쏘기에 응시한 자가 1천여 명에 달합니다. 활쏘기를 마친 뒤에 마땅히 날짜와 장소를 여쭙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소는 춘당대(春塘臺)에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관무재 때에 정시(庭試)의 대거(對擧)를 문신으로 하기도 하고 유생으로 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유생으로 해야 할 차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생 정시로 정해 행하고 관무재는 다음날 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영동(嶺東)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도신의 장계에 따라 거둬야 할 대동미(大同米)를 감면시켜 준 것이 6백여 석에 달합니다. 영남(嶺南)에서 잡역(雜役)을 감면시켜 준 값은 모두 진휼청에서 주었으니, 영동에서 감면시켜준 것도 영남에서와 같이 옮겨다 주어야 합니까?"
하니, 이조 참의 민정중이 아뢰기를,
"일의 성격상 옮겨다 갚아주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고, 좌참찬 허적은 아뢰기를,
"똑같이 나랏일인데 옮겨다 갚아준들 무슨 손상될 일이 있겠습니까. 2백 석을 옮겨다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양호(兩湖) 선혜청의 남은 쌀이 부족하여 비용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번 재생(裁省)할 때 양호 각 고을의 관수미(官需米) 중에서 그 고을에 남겨둘 것을 제외하고는 진구할 비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호서(湖西)의 경우는 현재 진휼할 일이 없으니, 남겨둘 쌀을 제외하고 가져다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당초에 각 고을의 녹봉미로 남겨둘 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두어 기민을 진휼하기로 했으니, 지금 만약 진휼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의당 해당 고을에 돌려주어야지 어떻게 선혜청에 옮겨다 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이 쌀을 옮겨다 쓰지 않는다면 공물(貢物)의 값을 채워 줄 수 없어 공물 주인들이 원망할 것입니다."
하고, 정중이 아뢰기를,
"만일 부득이하다면 전부를 가져다 쓰기는 곤란하지만 반은 혹 가져다 쓸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은 해당 고을에 돌려주고 반은 선혜청으로 하여금 가져다 쓰게 하라."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별해 첨사(別害僉使) 장문규(張文奎)는 초하루 시사(試射)에서 연거푸 1등을 차지해 첨사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의 나이가 모두 80세라고 하니, 멀리 변방에 제수하는 것은 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국가는 효리(孝理)로 다스려야 합니다. 선조조(宣祖朝) 때 집이 원주(原州)인 한 무인이 있었는데, 연거푸 육진(六鎭)의 수령이 되었습니다. 체직되어 돌아온 뒤 다시 변방의 수령에 제수되자, 그 사람이 상소하여 집에 가 노모를 뵙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선조께서 이를 가엾게 여겨 특별히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하여 어미를 봉양하게 하니, 그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었습니다."
하니, 상이 문규를 체직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경기와 강원도에 전염병이 심하게 번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

 

4월 5일 정유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민여로(閔汝老)를 헌납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이조 참의 민정중(閔鼎重)을 올려 참판으로, 이정영(李正英)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4월 6일 무술

수찬 송규렴(宋奎濂)이 용담(龍潭)의 임소에서 소명을 받고 올라오다가 중도에서 소장을 올려 극력 사직하였다. 대개 규렴은, 당초 홍문록(弘文錄)에 들었을 때 서필원(徐必遠)이 진소하여 배척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제수하는 명이 있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경상도 영해(寧海)의 속현인 영양현(英陽縣)의 백성 조암(趙顉) 등이, 부치(府治)와의 거리가 매우 멀어 백성들이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옛 현을 복구시켜 줄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여지지(輿地誌)》에 보면, 본현의 땅은 당초 영양(英陽)·청기(靑杞)·수비(首比) 등 셋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중간에 하나로 합치되었습니다. 고려 때부터 아조까지 군이 되기도 했고 현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을이 폐해지게 될 당시에는 9군의 반왜(叛倭)들이 빈번하게 도둑질을 했는데 본부의 축산(丑山)과 오포(烏浦) 등지에서 많이 발생하였으므로 청송(靑松)·진보(眞寶)·영양을 모두 영해에 소속시키고 도호부로 승격시켰습니다.
그후 왜인의 문제거리가 아주 사라지게 되자 진보와 청송은 각각 다시 세워지고 축산과 오포도 진(鎭)을 혁파한 지 오래되었는데, 유독 본현만은 오래도록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현에 호장(戶長)의 동인(銅印) 2매가 있는데, 바로 영락(永樂)경자년017)  에 주조한 것으로 해당 연월을 조사해 보니, 세종 대왕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이 폐해진 지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사(官舍)와 부고(府庫)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고 산성과 성첩도 다 무너져 버리지는 않았으니, 지금 다시 복구한다면 별 힘을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영양이 비록 후미진 고을이라고는 하지만 토지가 비옥하고, 넓이가 사방 2백여 리이며, 토지는 2천여 결, 창고의 곡식은 2천여 석, 인구는 4천여 명, 군정(軍丁)은 2백여 인이니, 자체적으로 한 넉넉한 고을이 되기에 충분한데 무엇에 구애되어 복구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조에 내려보냈다. 이조가 아뢰기를,
"영양이 영해의 속현이 된 것은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만일 관문(官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으로 말한다면 큰 고을의 속현으로서 이와 같은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현의 백성이 진소한다고 해서 경솔하게 다시 설치하는 것을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7일 기해

장령 송창(宋昌)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엊그제 지평 이규령(李奎齡)이 사은 숙배하고 집으로 돌아간 뒤 갑자기 하리(下吏)를 불러 장관과 만날 것을 청하였습니다. 장관이 상소에 대한 비답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사절하니, 규령이 갑자기 스스로 정지하고는 신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대각의 구례가 신 때문에 무너져 버렸으니,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지평 이규령도 인피하며 아뢰기를,
"일의 크고 작음을 논할 것 없이 논해야 할 만한 일이면 즉시 논하는 것이 바로 언관의 직무인 것입니다. 지난번 양사가 피혐하는 글 가운데에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을 논해야 한다는 뜻을 갖추어 진달했는데, 물러나온 뒤에는 그의 잘못을 바로잡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으니, 대각의 사체가 이와 같아서는 옳지 않습니다. 장령 송창은 바로 그때의 대관(臺官)이기 때문에, 신이 사은 숙배한 뒤 장관과 함께 논하여 체직시킬 것을 상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장관은 아직 비답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출사한 뒤에 상회례(相會禮)를 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은 신진(新進)으로 대각의 규례에 대해 비록 잘 알지는 못하나, 마음으로는 논핵하려 하면서 도리어 그 사람에게 상회례를 청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송창이 장황하게 인피하여, 신이 이미 배척받았습니다. 그리고 시끄러움을 일으킨 잘못도 있으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서필원이 전후로 진달한 소장의 말이 잘못되었는데, 양사에서는 이미 배척을 받았다는 것으로 인피한 뒤 즉시 논계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그르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규령이 송창을 논하고자 하여 상회례를 청하지 않았다. 그러자 송창이 뒤미처 이 소식을 듣고 먼저 스스로 인피하였다.
그뒤 대사간 김수흥과 정언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규령이 피혐하는 글에 이미 ‘양사가 이미 필원을 논해야 한다고 진달하고는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었다.’ 하고, 헌관을 체직시킬 것을 논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신들도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아 헌관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였다. 사간 송시철(宋時喆)도 즉시 논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이에 장령 박증휘(朴增輝)가 아뢰기를,
"전일 양사의 여러 관원들이 인피한 것은 단지 시비를 밝히려는 이유에서였을 뿐이니, 즉시 논계하지 않은 것이 어찌 다 필원을 치우치게 보호하려는 것이었겠습니까. 대개 또한 신중히 헤아렸던 것인데 지금 다시 추론하여 지레 소요를 일으켰으니, 경솔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직시키소서. 이규령은 이미 동료의 배척을 받았는데 억지로 반열에 나아가게 할 수 없으니 체직시키소서. 송창도 당초 논하지 않은 것이 의견이 없지는 않으나 배척을 받을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대로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체직시키소서. 김수흥·홍만용과 송시철은 간관의 직에 제수된 때가 양사가 인피한 뒤이니, 범범히 논한 말 때문에 피혐할 필요는 없습니다. 출사시키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
양사가 당초 필원에 대해 논박하는 것을 꺼려하여 시간만 끌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 모두 책임이 없을 수 없다. 규령이 송창을 논하려고 한 것은 매우 대각의 체모에 맞는 일이어서 시비가 분명한데, 증휘의 처치한 말은 참으로 말도 되지 않았다.

 

4월 9일 신축

이경억(李慶億)을 이조 참의로, 윤우정(尹遇丁)을 장령으로, 정중휘(鄭重徽)를 지평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정언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예조 참의로, 조원기(趙遠期)를 정언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간으로, 김수흥(金壽興)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4월 10일 임인

사간 송시철이, 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배척당한 것은 동료들과 다름이 없는데 처치하여 출사할 것을 청하였으니 부당하다고 하여 인피하고, 장령 박증휘도 처치가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인피하였는데, 모두 체직되었다.

 

강원도 삼척(三陟)과 정선(旌善) 등 지역에 눈이 내렸다.

 

4월 11일 계묘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하였다. 병조와 도총부의 당상·운검(雲劍)·보검(寶劍)이 좌우에 입시하고, 승지와 사관도 차례로 입시하였다. 시관(試官) 7인이 모두 자리에 나아가 앞에 있고, 대신(大臣)과 종재(宗宰)들도 입시하였다.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蒭)·편추(鞭蒭) 등의 기예를 시험보였는데, 아직 출신(出身)하지 못한 무인들은 먼저 초시(初試)를 보였고, 훈국과 어영의 군사 및 장관(將官)들은 모두 곧바로 응시하도록 하였다.

 

4월 12일 갑진

상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를 하고 또 마상재(馬上才)와 검법(劍法) 같은 여러 기예를 시험하였다. 또한 문신들에게 사후(射帿)하도록 명했는데, 끝나자 술을 내렸다.

 

4월 13일 을사

상이 계속 관무재를 하고 겸하여 유생을 시험보여 민시중(閔蓍重) 등 8인과 무과 구영망(具英望) 등 28인을 뽑아 당일에 창방(唱榜)하였다.

 

오정위(吳挺緯)를 자급을 올려 개성 유수로,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장령으로 삼았다.

 

장령 맹주서가, 서필원이 전후로 상소한 말은 구구절절이 사리에 맞지 않아 공의가 그르다고 했는데 자신은 일찍이 본부에 있으면서도 즉시 논박하여 바로잡지 못했다 하여 인피하였고, 장령 윤우정(尹遇丁)도 소명에 나아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체직되었다.

 

좌의정 원두표가 병 때문에 세 차례나 차자를 올려 사직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의원을 보내 간병하게 하였다.

 

4월 16일 무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전에 종부시(宗簿寺)에서, 종친으로서 법을 무시하고 향리에 내려가 있으면서 녹봉을 그대로 받는 자들을 그동안 적발하여 논죄한 것이 한 번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괘념치 않고 잠깐 왔다가 곧 가버리자, 모든 지방에 있는 자들에 대해 녹봉을 감하거나 없앴다. 그런데 그들이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서울에 올라와 모여 있게 된 뒤에도 녹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종친부에서 녹을 줄 것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종실이 향리로 내려간 것은 참으로 잘못한 것이지만 녹을 감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일의 체모에 손상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한 독촉으로 올라오게 된 뒤에도 변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근래 매해 흉년이 계속되어 살 곳을 잃은 곤궁하고 굶주린 백성들도 의당 가엾게 여겨 구휼해야 하는데, 더구나 극도로 곤궁하고 굶주린 선왕의 후예들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금년 하등(夏等)의 녹봉은 전례에 따라 나누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곽성귀(郭聖龜)·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안후열(安後說)을 판결사로, 조형(趙珩)을 판윤으로 삼았다.

 

정언 조성보(趙聖輔)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서필원은 전후로 올린 사직하는 소장에서 경전을 잘못 인용하여 견강 부회하였으며, 화가 난 김에 멋대로 침범하고 능멸하여 유생의 상소를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한 그릇된 의론이라고 하고, 양사에 대해서는 사건을 더욱 부채질했다고 배척하였습니다. 이렇게 반드시 공론을 위협하고 억눌러 자기에 대해 감히 의논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으니, 그의 거리낌없이 멋대로 한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대석에서 발론했는데 동료가 뒷날 소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여러번 의견이 서로 맞서다가 끝내 귀일시키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이 나약하여 가볍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체직을 명하소서."
하고, 대사간 이경휘(李慶徽)는 인피하기를,
"형제 중에 정축년의 난리에 죽은 자가 있지만, 국경 밖에서 접응(接應)하는 일에 사사로운 감정대로 하지 못했었습니다. 이번 필원이 상소에서는 오로지 공사(公私)의 경중을 가지고 말을 했는데, 죄줄 것을 청하는 의론이 갈수록 더욱 거세게 나오고 있습니다. 신은 이에 대해서 감히 가타부타 못하겠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조원기(趙遠期)도 인피하며 아뢰기를,
"동료들이 함경 감사 서필원의 죄를 논하려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필원이 상소한 것은 조정의 체례(體例)를 높이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서 깊이 헤아리지 않고 단지 구구한 체례를 가지고 다투어 변론하고, 심지어는 《예경(禮經)》을 인용하면서 지나친 말을 하기까지 하여 유생들과 언관들로 하여금 감히 자신의 잘못을 의논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으니, 그 또한 매우 생각에 부족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필원이 감히 이 말을 거리낌없이 한 것은 오직 그의 학술이 엉성하고 식견이 잘못되었으므로 그 말류의 폐단이 마침내 이적(夷狄)과 금수처럼 되는 데 이를 것임을 몰랐던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당초 마음이야 어찌 모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시비가 이미 분명하고 공론이 이미 정해졌지만, 오직 문자와 언어상의 실수를 가지고 공론을 위협하여 억누르고 제멋대로 한다는 죄목을 씌워 번잡하게 추핵하는 것은 신의 뜻이 신이 구차하게 머리를 굽혀 찬동하지 않았지만 또한 어떻게 얼굴을 들고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교리 박세당(朴世堂), 수찬 윤심(尹深) 등이 아뢰기를,
"공론을 위협하여 억누르고 제멋대로 했다는 것은 결코 그의 본뜻이 아닌데, 이것으로 그의 죄목을 삼았으니,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성보를 체직시키소서. 한 장의 인피하는 말 가운데 앞뒤가 서로 어긋났으며 비록 구차스레 찬동하지는 않았지만 끝내 우물쭈물하였으니, 원기를 체직시키소서. 감히 가부를 논하지 않은 것은 사세가 본래 그러했기 때문이었으니, 경휘는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4월 17일 기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4월 18일 경술

정태화(鄭太和)를 내의원 도제조로, 이원정(李元禎)을 형조 참의로,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참판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정언으로 삼았다.
이때에 전조(銓曹)에서 이규령(李奎齡)을 정언에, 조성보(趙聖輔)를 지평에, 조원기(趙遠期)를 통진 현감(通津縣監)에 의망하였는데, 상이 그 의망을 쓰지 않고, 전 지평 이규령을 북청 판관(北靑判官)에, 전 정언 조성보를 이성 현감(利城縣監)에 특별히 제수하고는 당일 출발시켜 보내도록 하였다. 또한 조원기(趙遠期)를 지평으로, 윤형성(尹衡聖)을 정언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근래 정사하는 모습을 보건대, 전관들이 사사로운 것을 따르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는데, 윤형성과 조성보의 일에서 더욱 사적인 당파만 비호하는 작태를 볼 수 있다. 전관들이 거리낌없이 행동하고 멋대로 권세를 쓰는 것이 요즈음보다 더 심한 때가 없어, 말하자니 한심스럽다. 당해 이조 당상과 낭청을 모두 우선 파직한 뒤 추고하라."
하였다. 이때에 판서 김수항(金壽恒), 참판 민정중(閔鼎重), 좌랑 이민서(李敏敍)가 정청(政廳)에서 엄한 분부를 받고 물러나갔다. 정원에서, 정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조에 당상이 없다고 아뢰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판서를 차출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좌승지 홍처대(洪處大), 우승지 권령(權坽)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러 희정당에 나아갔다. 그런데 권령이 병비 정청(兵批政廳)에서 와야 했으므로, 이들이 들어가 면대하는 것이 조금 늦어지고 있었다. 이에 상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인견한다는 명이 내렸는데도 즉시 들어오지 않으니, 무슨 아직 상의하지 못한 일이 있는가?"
하니, 용익이 대답하기를,
"우승지 권령이 정청(政廳)에 있다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입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사람을 시켜 꾸짖기를,
"면대를 청하면서 먼 데 있는 동료까지 함께 청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용익이 또 대답하기를,
"우부승지 김익경(金益炅)과 동부승지 김수흥(金壽興)은 모두 혐의 때문에 입시할 수 없습니다. 권령은 또한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청이 이제 막 파하여 현재 궐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들어가니, 상이 급히 묻기를,
"오늘 면대를 청한 것은 무슨 신기하고 비밀스런 계책이 있어서인가?"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신들이 성상의 온당치 못한 거조를 직접 보고 감히 면대를 청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인가?"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서필원의 일이 처음에는 잗단 것이었는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점점 커져서 이와 같은 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초 필원이 계사를 올렸을 때에 신도 이 직에 있었습니다."
하면서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상이 성을 내며 이르기를,
"일이 점차 커진 것에 대해서 진달할 필요는 없고, 이른바 온당치 못하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라."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조성보와 이규령 등은 젊고 의기가 날카로운 자들로 비록 의논을 과격하게 하기는 하였지만, 이 때문에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참으로 온당치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원기와 윤형성을 대간에 특별히 제수한 것도 심히 온당치 못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성보와 규령을 다시 대간에 의망한 것이 어떤 일이며, 조원기를 외직에 보임한 것 또한 어떤 일이었는가. 정관(政官)도 오히려 지평과 정언을 제수하는데 정관이 하는 것을 나는 할 수가 없는가. 나는 정관이 한 것과 상반되게 하고 싶어서 이러한 특별 제수를 한 것인데, 무엇이 온당치 못하단 말인가."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정조(政曹)에서 사람을 쓰는 법은 으레 언론이 날카로운 사람을 썼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보와 규령을 대각의 직책에 의망했던 것인데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하셨으니, 실로 뒤폐단에 관계됩니다. 그리고 특명으로 대간을 제수한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진달하려고 하였다면 계사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어찌 면대를 청하기까지 하였겠는가. 필시 다른 뜻도 아울러 가지고 있어서 온 것일 것이다."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보잘것없기는 하나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하신 이 일이 실로 지나치기 때문에 친히 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관(政官)들도 어찌 권위를 멋대로 부린 자들이겠습니까. 파직하고 추고하는 벌도 너무 심해서 보고 들은 이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공평한 마음으로 헤아리시어 제수한 관직을 모두 환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건대, 이번에 면대를 청한 것은 정관을 위해서 온 것이다."
하니, 용익과 처대가 함께 대답하기를,
"신들이 어찌 정관을 위해서 면대를 청하였겠습니까. 대간을 특명으로 제수하기도 하고 외직에 보임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이미 매우 온당치 못하고 하루 안에 엄한 분부가 여러번 내렸으니, 원근에 전파되면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성보 등이 속으로 감춘 뜻이 밉살스럽다. 모든 일에는 시비와 선악이 있는 법이다. 정관의 일도 옳지 않다면 어찌 사람들이 들을까 염려해서 벌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교리 박세당(朴世堂)과 수찬 윤심(尹深)이 면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사관에게 불러들이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생각이 있어서 왔는가?"
하니, 세당이 아뢰기를,
"신들은 성상의 지나친 처사를 직접 보고 생각하는 것을 아뢰려고 감히 면대를 청한 것입니다. 서필원의 상소 내용이 사실 경망스럽고 거칠기는 하였지만 조성보가 ‘공의(公議)를 위협하여 억눌렀다.’고 그의 죄안(罪案)을 삼은 것은 본뜻이 아닌 것 같았으므로 신들이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변방 고을에 제수하기까지 하였으니, 실로 지나친 처사입니다. 그리고 정관이 어찌 권위를 멋대로 부리는 자들이겠습니까."
하고, 윤심이 아뢰기를,
"조원기의 피혐하는 글 중에 ‘이적(夷狄)과 금수처럼 되어버릴 것을 몰랐던 것이다.’고 말을 하고는 또 그를 구원하려 변호하였으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관들이 권세를 멋대로 부린 자취가 있는데, 그들이 죄가 아니라고 하니,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니, 세당이 아뢰기를,
"만일 권세를 멋대로 부린 죄가 있다면 어찌 파직 추고하고 말 뿐이겠습니까. 상의 뜻은 비록 진정시키려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진정시키는 방도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권위를 멋대로 부린 형적이 드러났는데 두려워하여 그만두게 할 방법이 없다."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신들과 옥당이 모두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모두 전하를 속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에는 별로 신기한 점이 없다. 나는 고칠 수 없다. 고치려고 한다면 경들이 고칠 것이니, 내가 알 바 아니다."
하니, 세당이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된 자는 의당 일정한 의논이 있어야 하는데, 조원기의 피혐한 글은 앞뒤의 내용이 각기 달랐으니, 정관이 외직에 보임한 것이 또한 어찌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원기의 일은 나도 알고 있는데, 특명으로 제수할 때에 잊어버려서 뒤섞어 제수한 것이다."
하고, 드디어 망단자(望單子)를 다시 들이라고 명하였다. 용익이 전지(傳旨) 중에 있는 ‘권위를 멋대로 부렸다.[擅用威權]’는 네 자를 빼버릴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호군(護軍) 이유(李秞)가 양주 목사(楊州牧使)로서 대직(臺職)에 옮겨 제수되어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왔다가 체직되었다. 그가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국가에서 경기 지역 백성들의 일을 특별히 염려하여 대동법을 신설한 뒤 이미 장애되는 것을 변통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양주 한 고을의 전결에 있어서도 가을에 다시 양전하도록 명하여 모든 민생들이 매우 기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양주 고을은 서울과 가장 가까운 동북 지역의 요충이고, 또한 7능과 4묘의 봄·가을 봉심(奉審)과 사신들의 왕래가 있어 각종 잡역이 다른 고을보다 배나 많습니다. 원컨대, 성명께서 묘당에 물으시어 세(稅)나 역(役)을 견감해 주신다면 백성들의 힘을 조금 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본읍이 양전하기 전에는 전결이 8백 92결로 되어 있었는데 양전한 뒤에는 3천 3백 40여 결로 늘어나 거두어들일 쌀의 수가 1천 5백 16석에 이르니, 양전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네 배가 넘는 수입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에 양안(量案)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 전세 1천 2백 24석까지 아울러 일시에 징수하고 있는데, 백성들의 힘이 이미 고갈되어 전혀 다 납부할 수 없는 형세입니다. 금년 봄에 거둘 쌀의 원래 수효 가운데 반만 납부하게 하고 반은 가을을 기다려 징수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또 보건대, 1년 중 두 달 동안 서울에 상번하는 군사를 간혹 속오군(束伍軍)으로 충원하여 윗돌 빼어 밑돌 괴는 방식으로 우선 액수가 부족하다는 책망만 모면하고 있으니, 군정(軍丁)의 장부가 허위이고 두 가지 역을 한다고 원망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원호(元戶)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각종 신역(身役) 외에 군정의 액수를 뽑아 정하여 1년에 두 달 상번하는 군인들에게 속오의 역을 감해 주면 군인들은 두 가지 역을 한다는 원망을 하지 않고 장부를 허위로 하는 염려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한두 명의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여염 사이를 출입하며 민간의 고통과 괴로움을 탐문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소장을 비국에 내렸는데, 회계하기를,
"양주 고을은 서울과 가장 가까워 평상시 역이 다른 곳에 비해 더욱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선혜청이 설치된 뒤로는 책응(策應)에 관련된 것에 대해서 모두 가미(價米)를 주므로 지금은 변통할 일이 없습니다. 다만 새로 양전한 전결이 전의 수보다 몇 배가 되는데, 지난 가을에 거두었어야 할 쌀과 금년 봄에 거둘 쌀을 한꺼번에 아울러 징수한다면 백성들의 힘이 과연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금년 봄에 납부해야 할 원수(元數) 중에 반은 제때에 상납하고, 반은 추등미(秋等米)와 같이 상납하게 하소서.
지방 속오군 중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이 역을 겸하는 것은 모든 도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규례이며, 상번할 때 자기 보인(保人)으로 채워 보내는 것도 삼남(三南)에서는 이미 정식(定式)이 되어 있으니, 이것은 당장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민간의 고통과 괴로움을 탐문하는 일은 아래에서 감히 바로 청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때 이조에 당상이 없어 정사(政事)를 열 수가 없었다.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추천하도록 명하여, 박장원(朴長遠)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4월 19일 신해

사간 이후(李垕)가 아뢰기를,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시고 ‘방자하게 권위를 멋대로 부렸다.’는 하교를 하기까지 하셨으니, 신은 놀랍고 의혹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하가 사당(私黨)을 비호한다는 것은 엄청난 죄목인데 갑자기 실정을 벗어난 하교를 내리시고, 정원과 옥당의 면대 요청을 일체 거부하시니, 이 어찌 아랫사람들이 성명께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위엄을 좀 거두시어 이조 당상과 낭청을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규령과 조성보 등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에 대해 신은 삼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함경 감사 서필원이 전후로 소장을 올려 《예경(禮經)》에 대해 강변하였으니, 소란을 피운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뜻을 헤아려 보건대, 그의 소견이 고루하고 막힌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위협하여 억제하고 방자하게 했다.’는 등의 말로 반드시 추론하고자 한 자들도 합당하게 행동한 것은 아니나, 대관(臺官)을 먼 곳으로 물리쳐 보내는 것은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북청 판관 이규령과 이성 현감 조성보를 특명으로 제수한 것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임금이 되어 자그마한 벌도 시행할 수 없다면, 이는 너희들이 임금을 일개 조정 신하만도 못하게 보는 것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였다. 이후가 비답한 글이 너무 엄하다 하여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아뢰어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4월 20일 임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다 맞고 나자, 약방 도제조 정태화가 입대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요즘 조정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아 많은 신하들이 견책을 받았습니다. 이에 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차자로 진달하려고 하다가 감히 하지 못했는데, 이제 비로소 면대하여 진달하게 되었습니다. 대관을 배척하여 먼 지방에 보임하는 것은 근래에 없던 일입니다. 게다가 전석(銓席)이 텅 비어 정사를 열 수 없게까지 되었으므로, 바깥 사람들이 모두 벌을 너무 과하게 썼다고 합니다.
인조조에도 이조 낭관에게 벌을 준 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권위를 멋대로 부렸다.’는 것으로 그들의 죄안을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권위를 멋대로 부리는 것은 신하의 대죄이니, 만약 과연 이러한 죄가 있다면 어찌 이 정도로만 벌주고 말 수 있겠습니까.
조원기는 피혐한 글이 말도 되지 않아 이조에서 외직에 보임한 것을 뭇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이 이규령의 말을 전해 들었는데, 그의 뜻은 추고를 청하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 어찌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대사헌은 작년부터 공무를 집행한 자가 없고, 집의 남구만(南九萬)은 어사로 남한(南漢)에 있으며, 장령 2명과 지평 1명은 모두 지방에 있어 정관(政官)과 대관(臺官) 중 어느 한 곳도 관원을 갖추고 있지 못하니, 장차 어떻게 국사를 해 나가겠습니까. 성상께서 연거푸 진노하시니, 필시 신의 말이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에게는 드러난 잘못이 없습니다. 이규령에게도 어찌 먼 변방으로 물리쳐 보낼 만한 죄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조 당상과 낭청에 대해서는 체직 추고만 하고 파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교리 이유상·박세당 등이 상차하기를,
"어제 등대했을 때 간절한 작은 정성을 품고 있었습니다만 끝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으니, 신들의 죄는 참으로 도망할 곳이 없습니다. 금번 서필원이 상소한 말은 참으로 경솔한 점이 많았고 이에 대해 논한 자들도 너무 심하게 공격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그들이 너무 심하게 공격한 것을 잘못했다고 하면서 도리어 다시 너무 엄하게 다스리셨으니, 이번 거조는 상하가 서로 잘못한 것입니다. 언관이 멀리 내쫓기고 전석(銓席)이 텅 비어 보고 듣는 이들이 놀라고 중외에서 눈을 휘둥그레 하고 있으니, 이 어떤 모습입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차분하게 살피시어 이미 내리신 명을 빨리 거두어 뭇 사람들의 의심을 풀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월 21일 계축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정언 맹주서(孟胄瑞)가 아뢰기를,
"대신(臺臣)을 외직에 보임하고 정관(政官)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은 결코 희로(喜怒)가 절도에 맞는 성인의 거조가 아닙니다. 대각이 쟁집한 것에 대해 너무 심하게 꺾어버려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은 삼가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대신(大臣)이 진달한 것으로 인해 전관(銓官)에 대한 처벌을 줄이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전일 비망기의 말씀이 너무 지나쳐 성덕에 크게 누가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전하께서 이미 여러 신하들의 본뜻을 차분하게 살피시어 심하게 죄주고자 하지 않으셨으니, 그렇다면 비록 가벼운 벌이라도 왜 굳이 시행하여 사방에 의혹을 끼친단 말입니까. 이조 당상과 낭청을 체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서필원이 전후로 상소한 것에 대해 공론이 모두 그르게 여기고 있고 성명께서도 이미 통촉하고 계시니, 죄주자고 청할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시비가 저절로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규령이 경솔하게 행동한 것이나 조성보의 피혐하는 말이 너무 심했던 것은 합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특명으로 변읍에 제수하여 국시(國是)를 단정하는 경우처럼 하였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쓰고 버림을 합당하지 않게 하여 기쁨과 슬픔이 현격하게 다르게 되었으니, 공평한 마음으로 만물을 이끌어 나가는 도에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북청 판관 이규령과 이성 현감 조성보를 특명으로 제수한 것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건대, 장황하게 한 말이 줄거리가 닿지 않고 오로지 당류(黨類)를 비호하고 군상을 업신여기는 것만 힘쓰면서 일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 본색을 감추기가 어렵다. 내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주서가 비답이 엄하다 하여 인피하였는데, 그후 사간 이후와 맹주서가 모두 소명을 받고 나아오지 않은 것 때문에 체직되었다.

 

평안도  강계(江界)에 눈이 내렸고, 삭주(朔州)와 귀성(龜城)에 서리가 내렸다.

 

부수찬 남이성(南二星)이 상소하기를,
"전일 윤형성(尹衡聖)이 인피하여 처치할 때, 신이 실로 체직시킬 것을 청하는 의논을 주도했습니다. 이번에 성상께서 형성을 간관(諫官)에 특명으로 제수하셨으니, 이는 형성에게 체직시킬 만한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체직시킬 만한 잘못이 없는데 멋대로 체직시킬 것을 논했으니, 그 죄가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이점이 바로 신이 전전긍긍하며 감히 다른 사람들을 따라 면대를 청하지도 못하고 이름을 차자 끝에 써넣지도 못하면서 집에서 석고대죄하며 삼가 처벌을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바라건대 신을 삭직시켜 신의 죄를 바로잡아 주소서."
하고, 이어 극력 말하기를,
"대관(臺官)이 도성을 떠나고 전석(銓席)이 텅 비어 온 조정이 근심하고 있으니, 이는 성상의 미루어 용서하는 인(仁)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만일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고르게 한 뒤 천천히 시비를 분간해 보시면 반드시 확연히 깨달아 이해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함경 감사 서필원이 또 상소하여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기를,
"유생들은 신에 대해 ‘윤리를 어그러뜨렀다.’고 배척하였고, 대각에서는 ‘의리에 대해 전연 어둡고 말을 사리에 맞지 않게 하였다.’고 배척하였으며, 전하께서는 조해(趙楷) 등의 상소에 답하면서 ‘광소(狂疏)’라고 하교하셨으니, 이는 신이 아래로는 유생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고 곁으로는 대각에서 신임을 받지 못하고 위로는 군부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진실로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 곤궁하다는 사람입니다. 신을 삭직시킨 뒤 신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이 타이르고 허락하지 않았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휴가를 받아 온양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상소하여 해임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상소하여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그후 상이 대신(大臣)에게 물었는데, 대신이 마땅한 후임자가 없으니 체직시키지 말고 그대로 두자고 하니, 상이 조리하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4월 22일 갑인

성균관 생원 윤헌(尹攇) 등이 상소하기를,
"서필원은 《예경(禮經)》에 크게 어긋났는데도 이를 근심하지 않고, 윤리를 거스리고 어지럽혔으면서도 이를 근심하지 않으며, 지친의 은애를 끊어 버렸으면서도 이를 근심하지 않고, 선왕의 바른 법을 허물어뜨렸으면서도 이를 근심하지 않은 채, 이것을 남을 공격하는 시초이자, 세상을 인도하는 표적으로 삼아, 현인을 업신여기고 정도를 해치면서 거리낌없이 사리에 닿지도 않는 말을 마구 하니, 그의 말이 만약 행해진다면 어는 곳엔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인군을 버리고 어버이를 뒷전으로 여기는 의논이 필시 이것에서 말미암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적과 금수가 될 것이라는 것은 실로 세상을 염려하는 말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국가의 시비는 오로지 조정에 달려 있으니, 어찌 모든 사람마다 자임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지금 윤헌 등이 상소한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추구해 보건대, 조정을 멋대로 제어하려는 것이니, 그 태도가 가증스럽다. 지난번 조해(趙楷)가 상소한 것은 실로 매우 괴이하고 망령스러워, 조정에서 요량하여 처리한 것은 범연한 뜻에서 한 것이 아니다. 윤헌 등은 조금도 돌아보거나 거리낌이 없이 너무 방자하게 구니, 매우 가슴 아프고 놀랍다. 수창자와 소두(疏頭) 등을 모두 부황(付黃)하여 앞으로를 징계하도록 하라."
하니, 승지 권대운(權大運)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비망기를 보니 수창자와 소두를 부황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신들은 매우 온당치 못하게 여깁니다. 관학(館學)의 선비들이 비록 지나친 행동을 했더라도 조정에서 그들을 대접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히 너그러이 포용해야지 그들을 꺾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번 부황하라는 명이 뜻 밖에 나왔으니, 성상께서 선비들을 대우하는 방도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어지럽게 얘기하나 끝내 유익한 것은 없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황주(黃州)의 성 안에서 불이 나 64채의 집을 태웠으며, 군기고(軍器庫)도 불에 탔다.

 

4월 23일 을묘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정태화가 나아가 상의 안부를 묻고 또 아뢰기를,
"날씨가 좋지 않고 비 올 조짐이 전혀 없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들으니, 전라도는 비가 제법 흡족하게 내려 보리가 조금 괜찮지만 평안도는 경기도와 마찬가지로 가뭄이 있다고 합니다. 해조에서 품달하여 기우제를 지내야 할 것이나 이번 달까지 살펴보다가 청하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기우제를 지내더라도 비 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석(銓席)과 대각(臺閣)이 모두 텅 비어 사람이 없으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조 참의 이경억(李慶億)은 지방에 있을 뿐만이 아니고 판서와 상피(相避)되어 체직시켜야 될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체직시키고 그의 후임을 뽑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소장을 올린 태학(太學)의 유생에 대해 부황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부황은 바로 유생에게 가장 심한 벌이니,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고,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부황의 벌이 처음에는 매우 가벼웠었는데, 지금은 반드시 윤리와 기강에 죄를 얻어 사림에 버림받은 자에게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상소한 유생에게 쓰는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생들의 소장 가운데 ‘이정기(李廷夔)는 선세(先世)의 일 때문에 일본에 사신가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정기의 조부인 이경류(李慶流)가 임진 왜란 때 죽었기 때문에 통신사(通信使)를 차송(差送)할 때 정기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신하로서 청나라를 섬기니, 왜국에 사신가는 것과는 자연 다른 것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이 일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본래 미안할 것이 없는 일인데, 어째서 미안하다고 여기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이 청나라와 관련되어 당초에 시열이 그 소장을 보류해두라고 청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생의 일은 매우 통탄스럽다. 대신(臺臣)들이 죄를 받은 뒤에 그자들이 어찌 감히 방자하게 상소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유생이 어찌하여 조정의 시비에 관여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시열은 바로 유생들이 추앙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시열이 필원에게 배척을 당하자 반드시 변론해 밝히려고 이렇게 진소한 것이지 대신들이 죄를 받은 뒤에 발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른바 부황이란 바로 유생들이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벌이지 조정에서 써야 할 것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부황하지 말고 정거(停擧)시키도록 하라."
하고, 비국 당상을 인견하겠다고 하였는데, 우참찬 허적(許積) 등이 뒤쫓아 들어왔다. 상이 웃으며 태화에게 이르기를,
"들으니, 우참찬도 물러 가고자 한다 하니, 경은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허적에게 물어 보았는가."
하니, 태화가 상이 하교한 것을 허적에게 말해 주었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부모 무덤에 석역(石役)을 하고 있기 때문에 휴가를 청하려고 한 것입니다. 신이 만약 근래의 일 때문에 불안하게 여겨 가려 하는 것이라면 전에 일찍 체직시켜 달라고 간청했지 어찌 굳이 오늘날에 이르러 떠나고자 하겠습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신사년018)   신이 평안 감사로 있었을 때, 금주위(錦州衛)로 양곡을 운반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형편은 오늘날과 달라 만일 제때에 양곡을 운반하지 못한다면 국가가 병화를 입게 될지도 모르는 판이었습니다. 그때 허적이 도사(都事)로 있었는데, 국사가 어렵고 위태로운 것을 보고는 스스로 양곡을 운반하고자 자원하였고 신도 보낼 것을 권하였습니다. 이에 허적은 양곡을 사기도 하고 모으기도 하여 끝내 무사하게 일을 끝마쳤습니다.
지금 들으니, 의논하는 자들이 허적이 저쪽에 대하여 형제의 원수가 있다 하여 이것을 가지고 허적의 죄로 삼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신이 예로써 사람을 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므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몸 둘 곳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형편은 오늘날과 자연 다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이 혹 번잡하게 저들에게 누설된다면 형언하기 어려운 근심거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현재에 잘 처리하는 방도는 오직 속히 진정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만일 상소한 유생을 처벌한다면 일이 점차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자들이 임금을 경시했으니, 이미 시행한 벌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대신과 중신들이 진달한 것이 이와 같으니 벌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을 어찌 구차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약방 제조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이것은 구차한 것이 아니고 실로 진정시키는 방도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남도(全南道) 기민의 수가 전에 비해서는 적지만 지금도 1만 5천 명이나 됩니다. 진휼할 것이 부족하니 관수(官需)로 제급(除給)해 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용익이 이조 참의를 차출해야 하니 패초(牌招)하여 정사를 열자고 아뢰니, 상이 허락하였다. 대신의 추천에 따라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의로,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유철(兪㯙)을 대사간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집의로, 남구만(南九萬)을 사간으로, 윤심(尹深)·심재(沈梓)를 지평으로 삼았다.

 

4월 24일 병진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지평 심재가, 소두(疏頭)와 수창(首倡) 유생을 정거(停擧)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들이, 소두 윤헌(尹攇) 등이 정거를 당한 것 때문에 관(館)을 비우니, 동지관사 김좌명(金佐明)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정원에서 구례에 따라 먼저 예관(禮官)을 보내고 다음에 승지를 파견하여 유지를 고하여 들어오도록 권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예조 판서 홍중보가 태학(太學)에 달려가서 전교를 가지고서 유생들을 불러 들이고 다시 들어오라고 타일렀지만, 유생들은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하며 거부하고 나갔다. 상이 관관(館官)에게 명하여 상소하는 데 참여하지 않은 유생들을 불러 모아 재(齋)를 지키게 하라고 명하니, 동지관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성상의 분부를 듣고 즉시 흩어져 갔으며, 상소하는 데 참여하지 않은 유생을 불러와 재를 지키게 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고 또한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신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설령 외방의 유생들이 들어오려고 하더라도 형세상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은 일단 여기에 머무르며 묵을 것이니, 예관으로 하여금 좋은 방향으로 품의해 처리하도록 하여 합당하게 해결되도록 힘쓰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4월 25일 정사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교리 이유상(李有相) 등이 상차하기를,
"지난번 유생들이 올린 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광소(狂疏)’라고 하며 서필원을 배척했으니, 이는 조정에서 이미 시비를 결정한 것입니다. 시비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여전히 분명한 지휘를 해주지 않으시니, 실로 성상께서 어떤 생각을 지니고 계신지 밖의 사람으로서 감히 알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뜻만 크고 행동은 거친 무리들이 나이는 젊고 기운은 날카로워 시세와 사체를 살피지 않고 소장을 올려 대궐을 시끄럽게 하면서도 꺼리는 바가 없으니, 성상께서 반드시 징계하여 다스리려고 하시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제왕이 선비를 대우하는 도는 반드시 여유있게 포용해 주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어 설령 망령되고 과격한 말을 하더라도 죄를 주지 않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사기(士氣)의 성쇠가 세도(世道)의 흥망과 관계되므로 길러야지 막아서는 안 되고 북돋아 주어야지 꺾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미 배양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게다가 꺾어버렸으며 심지어 소두를 정거(停擧)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어찌 세도를 위해서는 염려를 하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또 ‘시비는 조정에 있는 것이지 모든 사람이 자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교하셨는데, 신들은 전하께서 이점에 대해 치밀하게 생각하지 못했고 극진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 아닌가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이는 단지 말만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으니, 귀천 때문에 다르지도 않고 상하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꼴꾼과 나무꾼이 제대로 선택하면 이는 바로 시비가 필부에게 있는 것이고,019)   비방이 나무에 써 있으면 이는 바로 시비가 길 가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공장(工匠)이 자기가 하는 일을 가지고 간한다면 이는 바로 시비가 공장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현사(賢士)가 관계하고 공론이 있는 곳인데 유독 시비의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은 오직 그 시비가 어떠한지를 살펴서 따를 만하면 따르고 따를만 하지 않으면 버려두면 될 뿐입니다.
만약 조금 시비를 논했다고 바로 ‘조정을 멋대로 제재했다.’고 할 경우, 설령 대궐에서 지키고 있으면서 울부짖는 자나 관을 들고 와서 등문고(登聞鼓)를 두드리는 자020)  가 있으면 장차 어떤 죄명을 줄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우리 인종 대왕(仁宗大王)께서 태학 유생들이 상소한 것에 대한 비답에 이르시기를 ‘태학은 공론이 있는 곳이니, 시비를 논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시비를 정하는 것은 유생들이 할 일이 아니다.’ 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의 말입니다. 시비를 정하는 것은 진실로 조정의 일이지만 시비를 논하는 것은 실로 태학의 책임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유생들을 ‘멋대로 제재했다.’고 배척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감히 시비를 두지 못하게 하시니, 전하의 이 거조는 또한 인종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원컨대, 우레와 같은 위엄을 거두시고 소두 유생을 정거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6일 무오

안후열(安後說)을 승지로, 우창적(禹昌績)을 정언으로, 홍주국(洪柱國)을 주서로, 장선징을 부교리로 삼았다.

 

4월 27일 기미

행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소명을 받고 나아오지 않은 것 때문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유생들이 관(館)을 비웠으니, 실로 이것은 더할 수 없이 큰 변고입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방도는 진실로 너그러이 포용해야지 위엄으로 제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전부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경우에는 반드시 특별히 온화한 유지를 내리고 별도로 타일렀지 지방의 유생을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재(齋)를 지키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일찍이 선왕조 때에도 관을 비운 변고가 있었는데, 정원에 하교하기를 ‘성묘가 텅 비었으니, 일각이 시급하다. 만약 오늘이 지나도록 들어와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내 어찌 감히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나도 후회한다.’는 하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즉시 예관을 파견하고, 다시 근시를 파견하고, 대신을 파견하기까지 하면서 다시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금번 상소한 유생들이 관을 비운 것은 당초부터 과격하기는 했지만 이미 엄한 분부를 받고 또 특명으로 내린 벌을 받았으니, 감히 다시 들어올 수 없는 것은 그 형세가 또한 그렇습니다. 지방의 유생으로 교체하여 지키게 하려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뒤폐단과도 관계가 됩니다. 상께서 다시 근시를 파견하고 별도로 온화한 유지를 내리는 것밖에는 잘 처리할 방도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똑같은 성묘(聖廟)이고 똑같은 유생인데 그때와 지금이 어찌하여 서로 다른 것인가. 이미 들어오도록 타이르라고 시켰는데도 끝내 들어와 지키지 않고 성묘가 텅 빈 지도 이미 여러 날이 지났으니, 일의 체모를 볼 때 참으로 매우 온당치 못하다. 비록 지방의 유생이 아니더라도 어찌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서 참여하지 않은 자가 없겠는가. 본관(本館)은 즉시 불러들이지 않고 장황하게 아뢰기만 하니 참으로 매우 타당치 않다. 즉시 본관으로 하여금 유생을 불러들여 재를 지키게 하여 성묘가 여러 날 동안 텅 비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정원에서도, 마음을 공평하게 하고 천천히 살펴 선비를 대우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라고 아뢰었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지관사 김좌명은 상소하는 데 참여하지 않은 유생을 불러모아 재에 들여보낸 뒤에 파하고 나왔다.

 

4월 28일 경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4월 29일 신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왜인들이 공무목(公貿木)의 일을 속히 결정지어 달라고 청하는데, 이것은 지난해 김근행(金謹行)이 대마도에 갔을 때, 왜인이 말했던 것입니다. 경상 감사의 보장(報狀)을 받아 보니, 각 고을에서 혹은 면포를 원하기도 하고 혹은 쌀로 하기를 원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인들이 원하는 것은 본래 쌀이어서 면포가 비록 좋더라도 필시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쌀의 수효가 너무 많으니 줄여 주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당초에 면포 1필의 값을 쌀 12말로 했었는데,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었습니다. 지금 쌀의 수효를 줄인다면 저들이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저들에게 ‘쌀의 수효를 줄여 영구하게 정식(定式)으로 삼겠다.’고 말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기뻐서 따를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것은 그렇습니다."
하였다. 제조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성산(星山)에 부임하여 있었을 때에는 가포(價布) 1필을 조(租) 60말과 바꾸어 작미(作米)했으니, 어찌 12말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대개 영남은 곡식 값이 싸서 그런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곡식 값이 비록 싸더라도 농가에서 농사짓는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일년 내내 갖은 고생을 하더라도 수확하는 것은 겨우 가포 몇 필 가격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상업을 하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니, 대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베를 짜는 괴로움도 매우 애처롭습니다. 한 아낙이 짠 것은 부역을 바치고 나면 겨우 자기 남편의 옷을 해 입힐 정도만 남아서 자신은 추워도 몸을 가릴 옷이 없으니, 상께서 어떻게 이러한 괴로움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농가가 가장 고생을 하는데 소득은 가장 적으니, 애처로울 뿐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봄 여름 농사철에는 백성들이 모두 귀신 몰골을 하고 있다가 가을이 되어야 비로서 생기가 나니, 참으로 불쌍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농사짓는 시기는 한창 무더울 때이니, 비록 넓은 대청에서 베옷을 입고 있더라도 그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농부는 더위를 무릅쓰고 농사를 지으니, 그 노고를 알 만하다."
하였다.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권령(權坽)을 판결사로, 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성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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