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임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김좌명(金佐明)이 문묘에 분향(焚香)을 하고 돌아와서 대궐에 나아와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유생들이 공관(空館)을 했을 때에, 상께서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들을 불러들이라고 분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즉시 방외 유생(方外儒生)들을 불러모아 재사(齋舍)를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재임(齋任)이 혹은 정거(停擧)를 당하였고 혹은 외방에 있기 때문에 신이 당장(堂長)으로 하여금 재임을 차출하게 했더니, 여러 유생들이 답하기를 ‘비록 상의 분부로 재사에 들어와서 문묘를 지키고 있지만 재임을 차출하는 일은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재임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데, 끝내 차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처벌하신 것을 참작하여 용서해 주시고, 근신(近臣)이나 대신(大臣)을 보내어 정성스럽게 타일러서 진정을 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이 약방에 있으니, 즉시 불러들이라."
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들어와 면대하니, 상이 묻기를,
"어떻게 하면 유생들을 진정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유생은 조사(朝士)와는 다르니, 위엄으로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조종조로부터 학사를 대하는 도리가 조사를 대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제 그 처벌한 것을 풀어주시면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거를 풀어주고 재사로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남양 부사(南陽府使) 이정(李晶)은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하다가 남양에 옮겨져 제수되었는데, 파주 목사로서의 재임 기간을 남양 부사의 임기에 합하여 계산을 하기 때문에 머지않아 체직되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정치를 잘하여 남양의 백성들이 그가 떠나게 된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고 하니, 잉임시키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잉임을 시키려면 연한을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3년을 연한으로 하여 잉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금군(禁軍)들도 말이 있으나 마병(馬兵)들의 말보다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세공(歲貢)으로 들어오는 말을 금군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애당초 제대로 가려서 오지 않기 때문에 말들이 몸집도 작고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좌명이 아뢰기를,
"그 뿐만이 아닙니다. 금군들은 모두가 향곡(鄕曲)에서 오는데, 피폐한 사람들이 마료(馬料)를 생계비로 사용하고 말을 기르는 데에 전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말도 또한 살이 오르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어 여러 신하들이 우리 나라의 군졸들이 정예롭지 못한 폐단에 대해서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합당한 방도로 통솔을 한다면 어찌 우리 나라 군졸이라고 해서 유용하게 부릴 수 없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참으로 옳습니다. 지난날 청나라가 우리에게 군대를 요청했을 때에, 청나라에서는 군대의 위엄으로 우리 군사들을 단속하여 썼기 때문에 모두 정예로운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지평 윤심(尹深)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은, 이규령 등에 대한 일은 참으로 합당함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지방에 보임한 명을 다시 거두라고 하는 논계는 단지 언관을 내쫓은 것을 과중하게 여기는 것으로서 굳이 여러 날을 버티며 논할 것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경솔하게 논계를 정지했던 것입니다. 지금 물의가 ‘양사(兩司)가 함께 발론한 논계를 간원(諫院)에 통보도 하지 않고 정지한 것은 체모를 잃었다.’고 하니, 신은 두렵습니다. 또한 병이 들어 부름에 응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체직하였다.
안성(安城)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와 입이 두 개였고 눈과 귀가 네 개였다.
5월 2일 계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뜸을 떴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추함(推緘)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차자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계문하기를,
"각사(各司)와 제궁(諸宮)의 노비 가운데 임인년 이전의 신공(身貢)을 거두지 못한 자가 1천 5백 87명입니다."
하였는데, 호조가 복계하기를,
"일족(一族)이 도망한 자는 제외하고 지적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자를 뽑아서 특별히 탕척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3일 갑자
함경도의 굶주린 백성이 1만 1천 8백 43명이었다. 전염병이 매우 심하여 사망한 자도 많았다.
평안도 영원(寧遠)·덕천(德川)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5월 5일 병인
정중휘(鄭重徽)를 지평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윤심(尹深)을 부교리로, 이홍연(李弘淵)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대사헌 유철(兪㯙)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전에 간원에 있을 때에, 전관(銓官)이 벌을 받은 것은 참으로 실정을 벗어난 일이나 상께서 이미 파직시키라는 명을 다시 거두어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신임 이조 판서도 이미 차출되었으니 서로 버티기만 하는 것은 일의 체모만 손상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규령 등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평소에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동료들과 서로 의논을 하여 논계를 정지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갑자기 정계한 것을 물의가 비난을 합니다. 또한 신은 지난 겨울 별천(別薦)을 할 때에 사인(士人) 박순(朴錞)을 추천하였습니다. 신이 그 사람을 잘 아는데, 강명(剛明)하고 간민(幹敏)하며 재주와 국량이 쓸 만하였기 때문에 감히 추천하여 진출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삭거해야 한다는 의논이 지금 대각에서 발론되었으니, 그 사람을 천거했던 사람이 어찌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우창적(禹昌績)도 경솔하게 논계를 정지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모두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0일 신미
호군 송준길이 상소하기를,
"신이 며칠 전에 전관(銓官)을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과 대각(臺閣)의 신하를 내쫓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일이 예사롭지 않아서 안타까워하며 놀랍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관학(館學)의 유생을 부황(付黃)하고 정거(停擧)시키라는 분부가 내렸다는 것을 이어서 들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예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당초 김만균(金萬均)의 상소는 그 정상이 참으로 딱한 것이었으니, 조정에서는 마땅히 공론에 붙여 좋은 쪽으로 잘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서필원(徐必遠)이 분한 마음으로 초계하여, 이미 들어간 상소를 굳이 다시 내주도록 청하였고 마침내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서 다스리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합당하고 공평한 거조이겠습니까. 송시열(宋時烈)이 의리를 바탕으로 글을 올린 것은 김만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세도(世道)를 위하여 의리를 밝히고자 한 것일 따름이었으니, 서필원으로서는 오직 그 곡절을 진달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과를 해야 마땅한데도 이에 기세를 올려 엉뚱한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부(士夫)들 사이에 공평하고 화합하여 허물을 들으면 스스로 반성을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마침내는 점점 일이 커져서 온 조정의 큰 사건이 되었고 거기에다 성상의 잘못된 거조까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비록 서필원으로 하여금 그 죄를 스스로 따지게 하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태학(太學)은 공론이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우리 나라 수백 년 이래로 오로지 배양하고 부식(扶植)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이전에도 어찌 나이 젊은 유생들이 함부로 망녕된 일을 한 적이 없었겠습니까만, 우리 열성조들께서는 일찍이 그들을 좌절시킨 적이 없었으며 한결같이 너그럽게 포용하여 권장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습니까. 근래에 관학의 상소가 들어갔는데 오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어, 여러 유생들로 하여금 대궐 아래에서 밤을 지새게까지 하였으니, 이미 조종조에서 선비를 대우하던 도리가 아닙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부황하고 정거하는 일까지 있으니, 아,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요즈음 전조(銓曹)의 여러 관리들은 대부분 나이 젊은 명류들로서, 성상의 은총으로 특별히 발탁되어 모두들 끝까지 명절을 지키는 데 힘쓰고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밝히려고 마음먹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근실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들었어도 제멋대로 일을 처리한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성상께서 그런 분부를 내리신 것은 화가 나서 바르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화난 마음에서 나온 요즈음의 명령들, 이를테면 전관을 파직 추고한 것과 대각의 신하를 외임에 제수한 것과 관학 유생들을 부황하고 정거시킨 일 등에 대해서 모두 밝은 분부를 내려서 모두 도로 거두어들여 후회하고 사과하는 뜻을 흔쾌히 보여주신다면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게 될 것이니, 군덕(君德)의 다행스러움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갔는데, 상이 안에 두고 오래도록 답하지 않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복양(趙復陽)이 강화부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하면서 치료할 약물을 보내달라고 계청하였다. 상이 해조로 하여금 약물을 내려보내게 하였다.
5월 11일 임신
함경 감사 서필원이 상소하여 자신을 한시바삐 내쳐서 공론에 답하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끝내 신을 버리고 싶지 않으시면 일이 지나간 뒤에 거두어 서용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한 마디 망발을 하여 일의 관건을 건드려서 대각의 신하들이 무리를 나누어 서로 비난을 하고 선비들이 옳으니 그르니 서로 싸우게 되었으니,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바로 대궐 아래로 달려가서 머리로 땅을 치며 스스로 죄를 주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신의 직책을 속히 삭직하시고 신에게 무거운 벌을 내려서 물의에 사과하여, 논쟁을 일으켜서 안정을 해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굳이 여러 말 하지 않아도 경은 이미 잘 알 것이다. 경은 마음을 편히 지니도록 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판돈녕부사 윤경(尹絅)이 죽었다. 나이 98세였다.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에 나이 여든을 넘기고도 병 없이 건강하기로는 그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경연의 신하가 윤경이 죽은 뒤에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가 없다고 말하니, 상이 명하여 장례 물품을 넉넉하게 지급하라고 하였다.
남한 산성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쌀 수천 석을 내어 경기 백성들에게 나누어 빌려주었다.
헌납 민여로(閔汝老)가 지방에 있으면서 병으로 사직하고 오지 않고서 상소하기를,
"오늘날 위태로운 화란이 눈앞에 닥쳐왔는데도 진신들 사이에 의논이 서로 모순되고 공격하기를 좋아하여 한결같이 다투는 일에 마음을 쓰니, 신은 이와 같은 상태가 계속되면 점점 과격해져 사림의 참화를 부르게 되고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될까 염려가 됩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깊이 살펴서 과격한 의논을 진정시키기를 힘쓰시어 조정을 안정되게 하고 나라를 평온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충성스럽고 신의있는 자에게 국록을 많이 주는 것은 옛 제도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흉년 때문에 줄인 것이 너무 많아서 살아갈 방도가 없어 많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참하관(參下官) 및 조사(朝士) 중에 시골에서 온 자들은 곤궁하기가 더욱 심합니다. 본래 곤궁함을 잘 참아내는 군자가 아니라면 어찌 옳지 못한 일을 하게 되는 폐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살기 위해서 이익을 다투는 사부가(士夫家)의 풍습이 이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재물을 생산하는 방도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니, 진실로 잘 계획하여 산택(山澤)을 관리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줄여 용도에 쓰면, 창고를 채우고 식량을 풍부하게 하는 일에 어찌 그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관리들을 곤장을 치고 일을 다시 보게 하는데, 진신의 벼슬아치를 시장에서 매를 때리니, 어찌 매우 수치스럽고 욕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천한 노예로 대우하는 것이지 사부(士夫)를 대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이 어찌 염치를 장려하고 예로써 부리는 의리이겠습니까."
하고, 또 영장(營將)의 군기(軍器)를 개수하는 일로 군병(軍兵)들이 고생을 하는 폐단에 대하여 아뢰었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고,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게 하였다.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정언으로,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승지로, 윤우정(尹遇丁)을 장령으로 삼았다.
5월 12일 계유
집의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옳고 그름을 분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흰 것과 검은 것을 섞어놓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번에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이치를 벗어난 별도의 의견을 만들어 내어 이에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는 삼강(三綱)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복제(服制)로써 그 경중을 비교하려고 하였으니, 그 이치에 맞지 않는 잘못이 매우 심합니다. 또 의리가 더욱 분명한데도 나라에 더욱 사람이 없다느니 하는 말을 멋대로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설령 그가 별도로 생각하는 것이 있었더라도 그 곡절을 진달하면 그만인 것이지, 상경(常經)의 의리에 대해서 망령되이 의논하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분한 마음으로 이기기를 힘써서 경전(經傳)을 억지로 끌어다 대고 자신의 허물을 합당한 것처럼 변명하며 방자하게 능멸을 하여, 혹 옳지 않은 의견으로 아첨을 한다고 배척을 하고 혹은 말썽거리를 부추겼다고 배척을 하였으니 앞뒤로 한 말이 구구절절 이치에 맞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거칠고 무식한 행동에 대해서는 굳이 깊이 따질 것도 없겠으나 나중에 사심에서 나온 편벽된 소견으로 정론(定論)을 삼으려고 한 것은 그 폐해가 매우 커서 실로 세교(世敎)에 관계됩니다.
조정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 일찍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대각의 공론이 여러 차례 발론되었으나 저지되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쟁이 어지럽게 일어나 정해지지 않고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게 되었으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의리를 밝혀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대체로 처치하는 규례는 반드시 공론을 따라야 하는데, 지난번에 이규령(李奎齡)과 조성보(趙聖輔)가 인피하였을 때에, 처치하는 말이 혹은 지나간 일을 논하여 말썽을 일으켰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그들이 한 말을 들추어내기도 하여 공론을 눌러 발론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일이 뒤폐단에 관계되며 그 풍조가 아름답지 못합니다. 처치했던 옥당의 관원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일을 논한 관원을 먼 변방으로 내쫓은 것은 훌륭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 명을 다시 거두라는 논계가 양사(兩司)에서 함께 발론되었으니 공론이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힘껏 논쟁함으로써 기어이 성상의 마음을 돌리게 해서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야 하는데도 몇 번 아뢰어 책임을 때우고는 곧바로 정지하였으니, 대간의 체모가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당시에 논계를 정지한 대관(臺官)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대관은 처신을 구차스럽게 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발론을 하고는 바로 인피하고 들어갔다가 정계(停啓)하기를 기다려 다시 출사하였으니, 진퇴가 기준이 없고 매우 무르게 처신한 것입니다. 지평 심재(沈梓)를 체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서필원의 패려한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고 보면, 이규령과 조성보 등이 대각에 있으면서 규핵하고자 한 것은 바로 그들의 직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방에 제수하라는 명령이 갑자기 나왔습니다. 사기가 이 일 때문에 꺾였고 공론은 이 일로 인해 막혀서 펴지지 못하였으니, 성덕(聖德)에 매우 누가 되는 일입니다. 환수하라고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옛 사람들은 혐의(嫌疑)를 경계로 삼았고 나라에서는 당론(黨論)을 미워한다. 지금 민유중의 계사를 보건대, 급하게 서둘면서도 자신이 그 일을 떠맡았으니,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당초 조성보 등을 지방에 보임한 일이 정관(政官)을 파직 추고하던 때에 있었는데, 그 당시의 정관이 민유중에게 어떻게 되는 사람인가. 이미 정지된 의논을 다시 제기하여 은연중 신구하면서 감히 공론이라고 하는가? 서필원을 논핵하는 일이 만약 공론이라고 한다면 천천히 여러 동료들의 의견을 들어본 뒤에 논핵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지금 앞장서서 사당(私黨)을 두둔하며 임금을 멸시하니, 이 사람을 대각에 그대로 둘 수가 없다. 집의 민유중을 우선 체차하라."
하였다. 상이 이른바 정관(政官)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조 참판 민정중(閔鼎重)이다. 정원이 아뢰기를,
"민유중의 의논이 비록 지나치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진달한 것에 불과합니다. 어찌 임금을 멸시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엄한 전지(傳旨)를 내려 그의 직책을 특별히 체직하기까지 한 것은 참으로 성상의 지나친 거조입니다. 체차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두 번째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지난해 경기 지방의 농사가 흉년이었는데, 막 양전(量田)을 거친 뒤라서 백성들의 곤궁함이 더욱 심합니다. 본청에 남아 있는 것이 아직 1만여 석이 있으니, 절반을 덜어내어 경기 지방에 지급하되, 감사로 하여금 각읍에 참작하여 나눠주어 눈앞에 닥친 곤궁함을 해결하게 하고 가을이 되거든 이자를 제하고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마도가 바람을 만나 표류된 흥양(興陽) 사람 19명을 송환하였다. 흥양현 사람 모신복(毛信福) 등 19명이 배를 타고 영해부(寧海府)로 장사를 하러 가다가 지난해 11월 4일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日本) 은주(隱州)에 당도하였다. 은주에서 장기(長崎)로 보내고 장기에서 대마도로 보냈는데, 대마 도주가 귤성중(橘成重)을 차견하여 동래(東萊)로 인솔하여 보내온 것이다.
5월 13일 갑술
지평 정중휘(鄭重徽)가 인피하기를,
"서필원의 일은 옳고 그름이 이미 분명하여 다시 논핵할 것이 없고 기타 논한 것도 모두가 타당하지 않습니다. 신은 연계(連啓)할 수도 없고 홀로 정계(停啓)할 수도 없어서 인피합니다."
하였는데, 체직하였다.
5월 14일 을해
박순(朴純)을 지평으로, 홍만용(洪萬容)을 교리로, 이후(李垕)를 집의로, 맹주서(孟胄瑞)를 정언으로 삼았다.
부교리 장선징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요즈음의 일이 점점 서로 과격해져서 위아래가 마음이 막히고 일의 모양이 어수선하여 며칠 전에 등대(登對)하였을 때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성상께서야 늘 조정(調停)하고자 생각하시지만 요즘 논의가 분분한 채 지금껏 정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애당초 김만균(金萬均)의 상소는 원통한 마음에서 나왔는데, 그 당시에 처분을 합당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치로 보아 사람들이 불평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한 시대의 유종(儒宗)으로서 지난번에 봉사(封事)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는 신이 감히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세도(世道)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을 구구절절 볼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러나 때의 형세가 다르고 일도 시기에 따라 참작하여 처리를 해야 하니, 중도를 취하는 의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필원은 평소 병통이 많고 지나치게 자신의 견해를 믿으며 정미한 뜻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말이 거친 편이니, 말을 잘못하는 병통을 그가 어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민유중은 어수선한 현상을 눈으로 보고 걱정되는 마음에서 이렇게 아뢰게 된 것인데, 말이 비록 지나치기는 하나 논의를 잘 분석하면 또한 볼 만한 곳이 있습니다.
그 밖에 논한 몇 가지 일은, 혹 대각이 체례를 잃은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잘못을 바로잡자는 의도일 뿐인데, 어찌 이토록 심하게 꺾어버리시는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의 죄안(罪案)을 삼으셨는데 신은 여기에 전하께서 말씀을 잘못하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혐의를 끌어다 대면서 의심을 품거나 일이 닥쳤을 때에 몸을 피하는 것은 실로 쇠퇴한 시대에나 있는 일입니다. 신하로서 자기의 몸을 위하는 경우라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이 말이 임금에게서 나온 것은 전혀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부호군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기를,
"죄명이 매우 무거워서 감히 대궐문에 다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여러 직함을 삭탈하시고 이어 조적(朝籍)에서 지워버리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5월 15일 병자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요즈음 도리에 어긋나는 서필원의 상소로 인하여 대각은 술렁이면서 잇달아 쫓겨나고 선비들은 흩어져서 여러 날을 공관(空館)하고 전관(銓官)은 낭패를 당하여 몸둘 바를 모르며 서울을 떠나, 선비들은 기상이 없어지고 상황이 참담하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깊은 궁궐 안에 계시니, 어떻게 다 아실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만약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죽는다면 선왕(先王)의 은혜를 생각하고 전하께 보답을 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혼란이 일어나게 된 단서는 애당초 높고 비범하여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예경(禮經)》에 분명하게 실려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게 되면 아들은 아들이 되지 못하며 신하는 신하가 되지 못하고 나라는 참다운 나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에는 고금(古今)이 있고 의리에는 경권(經權)이 있는 것이니, 한쪽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할 수는 없으며 또한 한 가지 예로써 남들에게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서필원이 이른바 의리는 갈수록 밝아지는데 나라에는 갈수록 사람이 없다고 하니 신은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만, 혹 자신의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거나 혹 자기 아비의 유언을 받았기 때문에 구구한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이라면 어찌 그것을 가지고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처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얕은 생각으로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었으니 당초에 가벼운 벌을 주어 그 말도 안 되는 이론을 타파하였더라면 단지 한 어리석은 사람이 저지른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니, 누가 다시 그와 더불어 변론을 하겠습니까. 애석하게도 조정의 처치가 합당하지 못하여 점점 격렬해져서 그 폐단이 장차 《예경(禮經)》의 큰 뜻을 천하 후세에 다시 밝힐 수 없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하니 신이 어찌 죽어가면서 한 마디 바른 말을 하여 충성하는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유중을 특별히 체직한 일은 성상에게 있어서 더욱 딱하디 딱한 일입니다. 이규령, 조성보, 민유중 등은 대각의 신하로서 바른 말을 하는 것이 그들의 직분인데, 한 번 성상의 뜻에 거슬리자 바로 견책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스러운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시고 너그럽게 살피시어 내리신 명을 다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조용히 잘 조섭하라고만 하였다.
부수찬 남이성(南二星)이 차자를 올리기를,
"민유중은 지난날의 정관(政官)과 과연 친형제 사이이니, 성상께서 이른바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고 하신 분부는 참으로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민유중이 어찌 혐의가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의 일은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큰 사건이 된 것인데 시비가 정해지지 않고 논의가 구차하니, 식자들이 염려하는 것은 너댓 명의 신하들이 견책을 당한 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민유중이 비록 혐의를 멀리하라는 옛 사람의 경계를 범하기는 했으나 그의 본 마음을 따져보면 어찌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사심이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단지 이규령 등의 일만을 논하였지 전관의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규령 등에 대해서 지난날의 전관(銓官)이 거두어 등용한 자라고 하여 조금이라도 형적을 두었다면 어찌 치세의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설령 민유중이 과연 은연중에 신구할 마음을 품었더라도 이것은 바로 민유중이 형편없는 인간이라서 전하를 저버린 것일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포용하여 내버려두시어 세도가 심원하게 되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찌하여 굳이 죄명을 더한 뒤에야 흔쾌히 여기시겠습니까. 지난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하늘이 밝게 내려다 보고 있는데, 오늘날의 처치는 소망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 일은 일을 논하는 신하가 성상의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과격하게만 생각하여 점점 이 지경이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외물을 포용하는 성인(聖人)의 도리에 있어서 어찌 한두 신하의 망령된 의논 때문에 마음 속에 사소한 장애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16일 정축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제조 홍중보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익한(李翊漢)의 계문을 인하여 제주(濟州)의 시재(試才)할 일에 대해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지금 농사가 한창 바쁜 시기이니, 시재할 때에 농사를 망칠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시재 어사(試才御史)를 가을이 되거든 들여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홍중보가 또 아뢰기를,
"당초 공관(空館)을 했을 때에 성상께서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을 성균관에 들여보내 재궁을 지키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지금 듣건대, 약간명의 방외 유생들이 식당(食堂)에 출입하기는 하나 재임(齋任)을 차출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것은 공관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정거(停擧)를 풀었는데 무엇 때문에 들어오지 않는가?"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상께서 특명으로 정거를 해제한 뒤에 유식한 선비들이 즉시 들어와 재궁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반궁(泮宮)의 규례에 있어서 반드시 따뜻한 유지를 기다리고 난 뒤에 다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감히 들어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균관으로 하여금 상소에 참여하였던 유생들을 타일러서 다시 들어오게 하도록 하라."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지금 만약 본관에 분부하면 본관의 하인이 알려서 들어오게 할 것입니다. 유생들이 어찌 들어오려고 하겠습니까. 유생들이 한 짓이 처음에 비록 망령된 일이었으나 일이 이미 이 지경이 되었으니 또한 매우 낭패입니다. 상께서 승지를 특별히 보내거나 혹 예조 당상으로 하여금 다시 들어오도록 잘 타이르게 하신다면 여러 유생들도 필시 명을 따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와 예관(禮官)을 보내는 것이 끝내 옳은 일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동지관사로 하여금 가서 타이르게 하는 것도 혹 타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동지관사(同知館事) 김좌명(金佐明)이 본관에 가서 여러 유생들을 모아놓고 면대하여 유시하니, 당장(堂長) 이하가 모두 말하기를 ‘마음대로 조정을 제어하였다는 것은 신하에게 이보다 더 큰 죄악이 없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 감히 재궁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좌명이 그 일을 상께 아뢰었다. 다음날 좌명이 또 아뢰기를,
"오늘 아침 식당[朝食堂]을 열려고 하니 동서 상하재(東西上下齋)의 유생들이 한 사람도 들어와 앉지를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묻게 하였더니, 유생들이 ‘처음에 상의 명을 듣고 들어와서 성묘를 지켰는데, 이제 재궁을 허술하게 지켰다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염치와 관계가 있는 일이라서 식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신이 수복(守僕)을 시켜서 거듭 권하여 타이르고 또 앞으로 불러서 반복하여 타일렀으나 유생들은 끝내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유생들이 공관을 하고 또 권당(捲堂)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더할 수 없는 변고입니다. 지금의 형세는 단지 염려만 하고 말 일이 아닙니다. 조정의 처치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상소에 참여를 하였거나 참여하지 않았거나 간에 권당한 유생들을 일체로 부드럽게 유시하시어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러면 선비들을 진정시킬 수가 있고 번잡하고 요란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뒤에 예조 판서 홍중보가 면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이전부터 공관이 된 때에는 관관(館官)이 으레 모두 반궁(泮宮)을 지켰으니 신도 마땅히 가야겠습니다만, 만약 명을 받들고 가지 못하면 어떻게 개유(開諭)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권당한 뒤에 그대로 또 공관을 했는가?"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단지 재궁만 지키고 식당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조의 초기를 인하여 이미 돈유하고자 했었다. 즉시 예관을 보내어 권유하게 하라."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예조 당상인데다가 또 성균관의 직임을 겸하고 있으니, 신이 명을 받들고 가서 타이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였다. 홍중보가 성균관에 가서 상의 뜻으로 여러 유생들을 타일렀다. 유생들이 말하기를,
"처음에 엄한 분부를 받들어 재임(齋任)이 벌을 받았으니 상소에 참여한 유생들은 이치상 같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기에 감히 명륜당에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뒤에 비록 깨우쳐주시는 명이 있었으나 마음을 다 드러내 밝히지 않으셨기 때문에 처신하기가 곤란하여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고 벌을 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신들이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하시고 예관을 특별히 파견하여 또 이렇게 돈독하게 타일러주시니 황공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명을 받들어 다시 들어갑니다."
하였다. 그날에는 권당했던 유생들도 저녁 식당[夕食堂]에 참여하였다.
전라도에 전염병이 심하게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5월 17일 무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5월 18일 기묘
장악원 제조 김우명(金佑明)과 이일상(李一相) 등이 상소하기를,
"나라의 큰 일은 사전(祀典)이 우선이기 때문에 본원에 악공(樂工)과 악생(樂生)을 둔 것은 오로지 향사(享祀)를 위해서입니다. 악공은 외방의 관노(官奴)로 정원을 채우고 악생은 경외의 양인(良人)으로 정원을 채우되 각각 4보(四保)를 지급하여 현재의 악공과 악생들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악공은 도망가거나 죽더라도 다른 사람으로 채우기가 어렵지 않으나 악생은 정원이 76명인데 보인(保人)을 얻은 자가 겨우 25명뿐이고 보인을 얻지 못한 자가 51명이나 되며 의상이 초라하여 위의를 갖출 수가 없습니다. 듣건대, 병조의 여정(餘丁)이 그 숫자가 매우 많고, 관상감·양의사(兩醫司)의 생도(生徒), 군기시의 별파진(別破陣), 의정부·중추부의 녹사(錄事), 교서관의 창준(唱准), 이조의 유조 서리(留曹署吏) 등 가벼운 역에 투속된 자가 또한 많다고 합니다. 각각에서 약간명씩을 뽑아다가 악생의 보인에 충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묘당에 내렸다. 묘당이 청하기를,
"여정 51명을 보인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1보씩 먼저 지급하고 그 나머지 3보는 응당 1백 53명이 있어야 하니 여러 양역(兩役) 가운데에서 정원 이외의 노는 자들의 실제 숫자를 조사해 내어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홍처량(洪處亮)이 도성 밖에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5월 19일 경진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이홍연(李弘淵)·남구만(南九萬)을 승지로,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장선징을 장령으로, 안진(安縝)을 동래 부사로, 송시철(宋時喆)을 사간으로 삼았다.
대사헌 이일상이 소명을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5월 20일 신사
진휼청이 아뢰기를,
"본청에서 진휼하고 남은 쌀로서 경기 지방의 백성들에게 지급할 것이 6천 석인데 그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도내의 각읍이 받기를 원하지 않는 읍이 없는데 4천 석을 더 지급하여 1만 석을 채워서 먹기를 바라는 백성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혜택을 받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1일 임오
장령 장선징이, 옥당에 있을 때에 숙직을 빼먹고 경솔하게 나가버려 추감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하였다.
경상도에 굶주린 백성이 17만 6백 4명이었고 전염병에 걸린 자도 많았다.
5월 22일 계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김수흥(金壽興)을 병조 참의로, 권대운(權大運)을 예조 참의로, 장선징을 부교리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판으로, 김우석(金禹錫)·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삼았다.
함경 감사 서필원이 허통첩(許通帖) 1백 장을 얻어서 곡식과 바꾸어 진휼에 보태기를 원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개성 유수 오정위(吳挺緯)가, 본부에 기근이 아주 심하고 전염병이 크게 창궐하였다는 이유로 구제할 자본을 청하니, 진휼청에 내리어 쌀 3백 석을 지급하고 가을에 돌려받도록 하였다.
5월 23일 갑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5월 25일 병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제조 홍중보가 아뢰기를,
"영상 이 병이 있어서 비국의 공사가 많이 적체되었습니다. 예로부터 대신에게 병이 있을 경우에는 그에게 찾아가서 의논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비국의 당상으로 하여금 영상의 집에 가서 복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행 대사헌 홍중보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은 함경 감사 서필원을 파직하고 대간을 지방에 보임한 명을 다시 거두라는 논계에 처신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또 상피해야 할 혐의가 있는데, 단지 약방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출사하였습니다. 오늘 들어와 면대를 하여서는 다만 새로 제수한 대간에게 유지를 내리라는 것만 청하였고 본부의 전계는 감히 예에 따라 연계하지 않았으니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지평 신후재(申厚載)는 서필원의 상소 가운데 재신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였는데 그의 장인인 허적(許積)의 이름도 그 가운데에 들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였다. 장령 김우석(金禹錫)은 죄폐된 사람으로서 갑자기 분수 아닌 자리에 앉게 되어 물정이 모두 놀라고 있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다.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옥당이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에 전염병이 매우 심하여 감사 서필원이 약물을 보내달라고 계청하니, 상이 의사(醫司)로 하여금 내려보내게 하였다.
공주 영장(公州營將) 양일한(楊逸漢)이 강도 16명을 잡아서 가두고 다스려서 승복을 받아 감사 이익한(李翊漢)에게 첩보하였는데, 이익한이 이 장계를 치보하였다. 얼마 뒤에 6명이 갑자기 죽었는데 일이 알려지자, 승지 김익경이 아뢰기를,
"살인을 한 도적을 잡아 다스리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만, 옥사를 다스리는 데에는 또한 원칙이 있는 법이어서 토포사(討捕使)가 도적을 다스리는 일을 전담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도적들은 영장(營將)이 사람들의 발고한 것을 인하여 잡아서 보고하자, 감사가 토포사에게 보내지 않고 그대로 영장으로 하여금 끝까지 신문하여 승복받게 하였으니 일이 매우 합당하지 않습니다. 피살자에 대해서도 또한 잘 조사하지 않았으니, 옥사를 다스리는 체모를 많이 잃었습니다. 승복을 받은 뒤 며칠 만에 갑자기 죽은 것도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근래에 성질이 못된 무부(武夫)들이 망령되이 상전(賞典)을 바라는 마음으로 옥석을 가리지도 않고서 가혹한 형장을 마구 사용하여 오직 승복을 받을 생각만 일삼으니, 억울한 일이 생기는 폐단이 많습니다. 지금 이 양일한의 일도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충청 감사 이익한 및 양일한을 모두 추고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6일 정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장령 김우석(金禹錫)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기를,
"함경 감사 서필원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옥당의 처치한 관원들을 모두 체차하라 명하소서. 이규령과 조성보를 외임에 제수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민유중이 사당(私黨)을 비호하는 의논을 무엇 때문에 굳이 부화뇌동하여 다시 제기하는가? 나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승지 남구만이 아뢰기를,
"서필원을 들어 탄핵하는 의논이 대각에서 여러 차례 발론되었으니, 공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민유중이 당초에 논계한 것은 원래 사당을 비호한 말이 아니며, 지금의 헌부의 논계도 공론을 따른 것이지 실로 민유중 한 사람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으로 부화뇌동하였다고 한다면 신은 전하께서 너무 지나치게 의심을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일의 비망기로 내린 분부가 이미 매우 엄하였는데 지금 이 하교가 또 실정을 벗어났으니 대각의 신하를 대하는 도리를 완전히 잃은 것입니다. 신이 근밀한 자리에 있기에 삼가 복역(覆逆)하는 의리에 붙여서 구구한 생각을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헌부에 대한 비답을 문을 닫을 때에 내렸는데, 어디에 두었다가 삼경(三更)이 되어서야 이런 계사를 올리는가?"
하였다. 남구만이 대답하기를,
"구구한 생각을 진달하고자 하여 초고를 쓰는 사이에 밤이 깊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답이 이미 내려갔고, 또 표신(標信)을 청하는 일은 비답을 전한 뒤의 일이다. 복역하는 일이 이와 같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초저녁에 비답을 내렸는데 삼고(三鼓)가 반이나 되었다. 비록 생각한 것을 적어내느라 늦었다고는 하나 1백여 자의 생각을 쓰는 것이 어찌 밤이 깊은 데에 이른단 말인가? 명예를 얻고자 임금을 무시하는 작태를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병을 이유로 차자를 올려 본직과 겸대한 직책을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강화 유수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판에 옮겨 제수하셨습니다. 동전(東銓)의 아석(亞席)은 본디 매우 엄밀하게 뽑아야 합니다만, 강도(江都)도 또한 등한히 할 곳이 아닙니다. 오직 오래 임무를 맡겨 성과를 책임지워야지 자주 교체해서는 안 되는 지역입니다. 조복양이 임무를 맡은 지 5개월 만에 자못 민심을 얻었고 강화부의 일에 대해 겨우 두서를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번고(反庫)를 한 뒤에 폐단을 제거하여 바로잡는 책임을 일이 서툰 새로운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참으로 옳다. 조복양에게 이전의 직임을 그대로 주어서 일을 이루도록 하라. 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7일 무자
장령 김우석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서필원을 탄핵하는 의논은 옳고 그름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물정이 점점 격렬해집니다. 당초에 논계한 것이 비록 민유중에게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실로 이것이 온 세상의 공론입니다. 대각에서는 오직 공론을 따를 뿐이고 이미 발론된 의논을 갑자기 정지할 수는 없는데, 성상께서 통촉하지 않으시어 엄한 비답을 갑자기 내렸으니, 위아래가 한결같이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서로 버티고 있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옥당이 출사시킬 것을 계청하니, 따랐다. 지평 신후재와 대사헌 홍중보가 모두 소명을 받고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도승지 남용익은 밖에서 들어와 아뢰기를,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은 극악한 죄악입니다. 신하로서 이러한 죄를 지었다면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말씀이 온화하지 못하시어 누차 이와 같은 분부를 내리시어 여러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몹시 두려워 떨게 만들고 듣고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시니, 신은 늘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지난밤의 본원의 계사가 비록 늦은 잘못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사실은 말을 신중하게 다듬느라 시각이 늦어지게 된 것인데, 전하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허물을 삼으시고 또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니, 어찌 성인의 널리 포용하는 도량에 손상됨이 없겠습니까. 정원에 내린 비답을 도로 거두시고, 묘당에 자문하시어 안정시킬 계책을 속히 정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의 이 진계를 나는 경에게서 취하지 않겠다."
하였다.
동부승지 남구만이 어제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5월 28일 기축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고 아뢰기를,
"나이 일흔이 되면 치사를 하는 것은 《예경(禮經)》에 분명하게 실려 있으며 신하에게는 영광된 절목입니다. 보잘것없는 신이 삼가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망령되게 옛 사람을 본받아 여러 차례 치사하는 글을 올렸습니다만, 정성이 부족하여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삼가 훌륭한 조정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신은 그 글을 올린 뒤로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말없이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벼슬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물러난 것도 아니며 의리도 없고 명분도 없으니 신의 처신이 신 스스로도 우습습니다. 성상께서는 이 늙은 신하를 특별히 생각하시고 물러가 몸을 돌볼 수 있게 은혜를 내리소서. 그러면 신이 비록 매우 어리석으나 어찌 감격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신하는 노년의 절조를 더욱 힘써야 하는 것이니, 바른 자리로 돌아가서 죽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요즈음 들으니, 간원의 신하가 상소를 올리자 비로소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여 신하의 절개를 면려하셨다고 하는데, 신은 죽기 전에 변함없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바라건대, 신이 전일에 올린 소청을 윤허해 주시어 신으로 하여금 여유있고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성스러운 시대에 이 늙은 몸이 보존된다면 예로써 부리는 도가 성덕을 빛나게 할 것이고 세상을 격려하는 문구가 저 개인의 다행일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아뢰기를,
"의리에 있어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신하가 녹봉을 반납하고 일을 사양하는 것은 그 뜻은 비록 가상하지만 치사를 가벼이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김익경이 아뢰기를,
"나이가 차서 치사를 하는 것은 예제(禮制)에만 분명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법전에도 실려 있습니다. 나라의 안위에 관계되는 자가 아니면 본디 그의 소청을 따라 허락하여 염치를 면려하는 것이 옳은데, 근년 이래로 이 일이 폐지되어 조정의 신하 가운데 혹 나이가 차서 물러가기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조정에서는 반드시 허락해서는 안 되는 일로 여기니, 식자들이 참으로 이 일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제 함릉군 이해가 녹봉을 받지 않고 일을 사양한 것이 이미 해가 넘었는데, 지금 또 치사(致仕)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 것이 앞뒤로 한두 번이 아닙니다. 미련두지 않고 물러나려는 뜻은 말세의 풍속을 면려할 수 있는 것인데, 해조가 회계하기를 ‘훈구 신하를 정성껏 대우하는 도리로 보아 가벼이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치사하는 법은 신하에게 있어서는 머물 곳을 알아서 머무는 고상한 절조이고, 조정에 있어서는 신하를 예로써 부리는 성대한 법전입니다. 그렇지만 구차스럽게 잡아두는 것으로 정성껏 대우하는 도리를 삼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 뒤로는 사대부가 치사하는 것을 장차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먼저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특별히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예전(禮典)》의 남긴 뜻을 보존하면 필시 나라에 빛남이 있게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29일 경인
승지 이경억과 남구만이 함께 숙직을 하였는데, 어제 헌부에 대한 비답이 내리자 남구만은 복역하는 계사를 올렸고, 이경억은 그 전에 서필원과 더불어 김만균의 일을 함께 아뢰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마음이 편치 못하여 연명을 하지 못하고 상소를 올리고 나가버렸다. 소명을 받들고도 나오지 않고 또 상소하기를,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요즈음 비답을 내리실 때에 임금을 업신여긴다느니 멸시하였다느니 하는 등의 분부를 매번 내리셨습니다. 왕의 말은 한 번 전파되면 사방에 전송되어 사람들이 놀라고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이 근밀한 자리에 있으면서 이미 앞에서 성상을 제대로 인도를 하지도 못했고 또 뒤에서 바로잡지도 못하였습니다. 죄가 이러하니 어떻게 용서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성상께서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시고 살펴 받아들이시어 후회하고 고치는 바가 있게 된다면 신은 비록 죽음의 형벌을 받더라도 영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진달한 말은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30일 신묘
정언 맹주서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민유중이 죄없이 견책을 받았다는 것을 극언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사성 민정중이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병으로 인하여 소명을 받기 전에 사장(辭狀)을 올렸는데, 이때에 와서 또 소장을 올리고 사직하였다. 상이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답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윤6월 (0) | 2025.12.04 |
|---|---|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6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5년 1664년 4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5년 1664년 3월 (1) | 2025.12.03 |
|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5년 1664년 2월 (0) | 2025.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