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4.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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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진

정유성(鄭維城)을 내의 도제조(內醫都提調)로, 여성제(呂聖齊)를 장령으로, 정창도(丁昌燾)를 지평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집의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김우석(金禹錫)을 헌납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판서로, 조수익(趙壽益)을 형조 참판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김수흥(金壽興)을 승지로 삼았다.

 

사간 송시철(宋時喆)이 사장(辭狀)을 올려, 체직되었다.

 

정언 맹주서(孟胄瑞)가 ‘서필원의 일을 즉시 바로잡지 못하여, 논계하지 않았다는 배척을 이미 받았고, 지금까지 공론이 심하게 일어나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뒤에 소명을 받고도 나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6월 3일 갑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침을 맞았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과 지평 정창도(丁昌燾)가 모두 추함(推緘)이 마감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상이 그 추고를 탕척하도록 하였다. 그뒤 정창도는 소명을 받고도 나오지 않아서 체직되었다.

 

승지 남구만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근래 서필원의 일로 인하여 조정이 분열이 되고 엄한 비답이 자주 내려져 온 조정이 어수선하게 된 지 이제 반 년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애초에는 아주 작은 일이었는데 지금은 매우 중대한 문제가 되었으니,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전하께서 일찍이 믿고 의지하였던 신하들도 견책을 당한 자가 많으니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습니까. 서필원이 한 앞뒤의 일들은 전하께서 통촉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데 한 번도 옳고 그름을 분변하지 않으시고, 단지 대각 신하들의 거조와 관련된 작은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아 기를 꺾는 바탕으로 삼으시니,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 무슨 불평이 있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또 인조(仁祖)께서 남한 산성 아래에서 당한 굴욕은 우리 나라가 영원토록 잊지 못할 원한입니다. 선대왕의 평소의 뜻을 전하께서도 필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몸소 선왕의 뜻을 몸받아야 하는데, 지금 할아버지의 원수를 손자가 갚아야 한다는 말에 대하여 이와 같이 물리치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이것이 뭇 아랫사람들이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또 듣건대, 전일에 이정기(李廷夔)를 통신사(通信使)에 차임하지 않았던 일을 가지고 아뢰는 자가 있자, 상께서 ‘저번 일은 사대(事大)하는 일이니, 견주어서 같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니, 이것은 의리에 있어서 더욱 온당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본마음이 어찌 그러한 것이었겠는가. 이정기의 일에 대해서 지금과 같지 않다고 한 까닭은 대개 저들에게 견제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비록 나이 어리고 덕이 부족하나 조종 부형들의 백 대의 원수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록 사세에 몰려 여러 신하들이 사정(私情)을 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나, 단지 허락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엄한 분부를 잇달아 내리시어 여러 신하들이 죄를 얻어 대각에 행공하는 자가 없습니다. 송준길은 벼슬에서 물러나 지내면서도 오히려 전하를 잊지 못해 자신의 품은 생각을 진달하였는데 오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성상께서는 필시 이것을 불쾌하게 여겨서 답을 아니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어찌 불쾌하게 여겨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근래에 위아래가 서로 막혀서 언제 진정이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릇 일이라는 것은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한 뒤에라야 진정이 될 수가 있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에 어지럽게 말만 전파되니, 더욱 아름답지 못합니다. 서필원이 올린 상소에 괴이하고 망령된 말이 많아, 민유중이 바야흐로 그 잘못된 점을 논변하였는데 서필원이 민유중의 논변을 반박하였으니, 아주 터무니없는 짓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자기 당파를 비호한다고 의심하시나 오늘날 필원을 논박하는 자는 모두가 필원과 친한 자들이니 또한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필원이 지금 북관(北關)의 임무를 맡고 있는데, 공론이 거듭 발론되어 그가 행공을 하지 못한 지가 또한 오래입니다. 어찌 그대로 두고 체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김우석에 대한 비답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승지가 착실하게 논계하였다."
하였는데, 남구만이 아뢰기를,
"무릇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반드시 그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밝혀서 그 당연한 이치를 끝까지 궁구한 뒤라야 인심을 승복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채 신하를 문책하시고 신하는 그 문책을 받아서 죄를 삼는데, 역시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6월 4일 을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정언으로, 이일상(李一相)을 공조 판서로, 조수익(趙壽益)을 호조 참판으로, 임의백(任義伯)을 형조 참판으로, 안후열(安後說)을 병조 참지로 삼았다.

 

행 판중추 정유성(鄭維城)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죄를 의율하여 감정(勘定)한 자문(咨文)이 이미 왔고 보면, 신은 바로 직명을 혁파해버려야 되는 사람이니, 그대로 이전의 직함을 띠고 있는 것은 결코 이러한 이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6월 5일 병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함경 감사 서필원이 잇달아 글을 올려 체직을 청하였다. 상소를 비국에 내리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관찰사는 한 도의 풍헌(風憲)을 담당하고 있으니, 탄핵을 참고 그대로 재임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6월 6일 정유

부호군 송준길의 상소에 오래도록 답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답하였다.
"경이 올린 상소를 살펴보고 매우 많은 것을 느꼈다. 나의 잘잘못에 대해 경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아, 내가 평소 경에게 바라던 바는 정의(情義)가 서로 미덥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 경의 상소를 보건대, 나더러 마음에 느낀 바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이토록 나의 소망과 반대가 되는가? 내가 비록 학문이 천박하고 지식이 형편없으나 어찌 찬성의 상소는 마음에 느낀 바가 없고 서필원의 상소가 내 뜻에 맞아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이것이 내가 한밤중에 일어나 탄식을 하면서 정의(情意)가 서로 미덥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는 이유이다. 성균관 유생들과 전조(銓曹)의 관원에 대해서는 이미 벌을 풀었다. 경은 몸을 조리하고 올라와서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검열 이세장(李世長)이 자녀가 전염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나가버려 당직을 빼먹었다. 정원이 추고할 것을 여러 차례 아뢰니, 상이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6월 7일 무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정유성이 아뢰기를,
"서필원의 일은 사소한 일이 점점 커진 것입니다.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비록 성상의 은혜로 파직을 면하기는 했으나 죄명이 이미 큰 것이었기 때문에 감히 편한 마음으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띠고 있는 직책도 모두 중요한 직책이니, 전하께서는 속히 진정시킬 방책을 강구하시어 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반열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6월 8일 기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6월 9일 경자

이유상(李有相)을 지평으로, 이지천(李志賤)을 우윤으로, 이원정(李元禎)을 승지로, 민정중(閔鼎重)을 함경 감사로, 권령(權坽)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6월 10일 신축

약방 도제조 정유성(鄭維城)이 여러 의원들을 거느리고 희정당에 들어와서 진료하였다. 정유성이 아뢰기를,
"올해는 전염병이 크게 번졌는데 서울은 더욱 심합니다. 일찍이 조종조 때에도 제문(祭文)을 직접 지어서 높은 신하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예를 따라서 제사를 올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여지껏 여제(厲祭)를 품의하지 않은 까닭을 해조에 묻도록 명하였다. 정유성이 또 아뢰기를,
"이만(李曼)은 죄를 감정(勘定)한 뒤에 정목(政目) 가운데 한 번도 의망된 적이 없습니다. 전에 김휘(金徽)도 역시 직책이 혁파되었었는데 내직과 외직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함경 감사가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유독 이만에게만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이만과 같은 죄를 지었는데, 이만이 이러하니 신만 어찌 얼굴을 들고 벼슬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과 같은 사람은 늙었고 이미 쓸모가 없음이 판명났습니다. 그러나 이만은 참으로 큰 인재이며 나이도 늙지 않았으니 어찌 오래도록 버려둔 채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연경(燕京)을 다녀올 때에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그가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지금 민유중이 강도(江都)에서 번고(反庫)를 하고 돌아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전후 유수(留守) 가운데에 그 직책을 잘 수행하여 임무를 맡긴 뜻을 저버리지 않은 자는 오직 이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만이 강도를 맡아 다스린 지가 지금 이미 10년이 되었는데, 민유중이 그의 치적을 매우 칭찬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에서 직책을 혁파한 것은 본래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눈병을 치료하는 법은 으레 혈기를 잘 순환시키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때때로 신하들을 불러 접견하시어 지기(志氣)를 펴시면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유성이 아뢰기를,
"비록 조섭 중에 편복(便服)으로 접견하시더라도 필시 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경연은 열 수 없더라도, 옥당의 관원을 불러들여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기도 하시고 대신이나 재신들을 접견하여 시대의 해야 할 일을 강구하기도 하신다면 어찌 이익이 없겠습니까."
하고, 남용익이 아뢰기를,
"본원에 밀려 있는 공사에 대해서 여쭈러 입시하고자 하나 조용히 조섭하시는 데에 방해가 될 듯하여 감히 청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병이 조금 차도가 있으니, 정원에 밀려 있는 공사를 자주 품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도성 안에 전염병이 매우 심합니다. 지난 임인년에는 유신(儒臣)이 올린 차자를 인하여 여제(厲祭)를 지냈습니다. 이 예에 의하여 13일에 산천 성황제(山川城隍祭)를 지내고 16일에 북교(北郊)에 중신을 보내서 여제를 지내게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병이 날로 위독하여져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 나라의 형세는 위태하다고 할 만합니다. 위아래가 서로 의심을 하여 멀리하고 조정이 분열되었으며,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직책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사건을 피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임금으로 하여금 위에서 고립되어 있게 하면서 끝내 아무도 돌보지 않으니,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통곡을 해야 하는 경우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헌부의 논계는 원래 대단한 이해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따르거나 논박을 하거나 오직 자기 자신의 의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수를 하면 내일 체직되기를 도모하여 임금의 명이 엄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피하여 게을리하는 죄를 고의로 저지릅니다. 심한 경우에는, 서울에 있을 때에 직책을 제수받고는 고향에 내려가서 사면을 하기도 합니다. 신은 이와 같이 나가다가는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의 병이 이러한 지경이 되었으니 염려스러운 나의 마음에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차자의 말은 참으로 충성스러운 본심에서 나왔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좌참찬 허적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뜻밖의 은총을 내려 돌보아 주신 것이 도리어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는데, 다시 숭반(崇班)에다 두는 것은 온전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이보다 앞서 허적이 성묘를 하기 위해서 휴가를 받아 떠나려 한 적이 있었다. 인견했을 때 상이 영상에게 이르기를,
"좌참찬이 휴가를 청하였는데, 서필원의 일을 곤란하게 여겨서 장차 내려가서 오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들은 소문을 아뢰었는데 상이 허적을 불러서 직접 효유하여 이에 내려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뒤에 승지 남구만이 등대했을 때에 상에게 아뢰기를,
"허적이 올라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전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바깥 의논이 전하께서 혹 다른 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고 의심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이 일을 듣고 마음이 편치 못하여 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허적은 교활하고 재주가 있었으며 이정(李楨)·이남(李柟) 등과 복심이 되었기 때문에 허적의 행동거지에 대해 상이 모르는 것이 없었다.

 

6월 11일 임인

승지 김익경을 전옥서에 보내어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들을 풀어주게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갔다. 여러 승지들이 승정원에 적체되었던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교리 장선징, 수찬 오두인도 함께 입시하였다. 승지가 공사를 품의하였다. 그 일을 마치고 장선징이 《통감(通鑑)》을 진강하였다. 당 태종(唐太宗)이 위수(渭水) 편교(便橋)에 나가서 돌궐(突厥)을 방비한 내용에 이르러, 장선징이 아뢰기를,
"당(唐)나라가 처음에 돌궐(突厥)의 힘으로 천하를 차지하여 융적(戎狄)을 신하가 되어 섬겼고, 태종이 큰 나라의 임금으로서 경솔하게 편교에 나갔으니, 모두가 후세에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종이 처음에는 비록 돌궐을 신하가 되어 섬겼으나 나중에는 힐리(頡利)를 사로잡아서 신하로 삼았으니,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몸소 위수의 편교에 나간 것은 용병(用兵)하는 책략이었으니, 상도(常道)로 논할 수 없다."
하였다. 승지 이경억이 아뢰기를,
"당 태종이 총명과 무략은 부족하지 않았으나 궁내에서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선유들이 훌륭하게 보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하였다. 장선징이 또 강하다가, 현덕전(顯德殿) 앞에서 습사(習射)하였다는 내용에 이르렀다. 도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효종 대왕께서도 후원(後苑)에서 기예를 시험하셨는데, 그때에 이상진(李尙眞)이 백제(百濟) 황창랑(黃昌郞)의 검무(劍舞)021)  의 일을 끌어대기까지 하면서 간쟁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아랫사람들을 대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장선징이 강하다가, 태종이 위징(魏徵)을 와내(臥內)로 불러들인 내용에 이르러 아뢰기를,
"삼대(三代) 때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가 아주 엄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후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눌러 예수(禮數)가 현격하게 달라졌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 사이의 예는 옛날에 견주어 볼 때 더욱 엄격합니다. 대개 고려(高麗)의 풍습이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고, 남용익이 아뢰기를,
"한나라 때에는 번쾌(樊噲)가 대궐 샛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갔고022) 원앙(袁盎)이 신부인(愼夫人)의 자리를 끌어다 밀쳤습니다.023)   이로써 보건대, 임금과 신하 사이가 후세처럼 엄격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조종조의 옛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하루는 눈보라가 몰아치며 추위가 심하고 밤이 깊었는데도 상께서 형방 승지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와내(臥內)에 입대하게 하고 죄수들에 대해서 물었는데, 필상이 대답하는데 입으로 줄줄 자세하게 말씀을 올렸습니다. 이때에 중전께서 병풍 뒤에 계셨는데, 상께서 중전을 돌아보고, 이 사람은 나의 보배와 같은 신하라고 하시면서, 술을 따라서 하사하셨습니다. 이 일은 오늘날까지 미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고, 장선징이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마땅히 그와 같아야 합니다."
하였다. 장선징이 강을 하다가, 대보잠(大寶箴)에 이르렀다. 상이 어좌 뒤에 있는 병풍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대보잠이다."
하니, 오두인이 아뢰기를,
"병풍에다가 잠(箴)을 쓰는 것은 항상 눈이 그것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상께서는 마땅히 깊이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경억이 아뢰기를,
"‘한 사람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지 천하로 한 사람을 봉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바로 격언(格言)입니다."
하였다.

 

6월 12일 계묘

대사간 이홍연 등이 아뢰기를,
"무릇 대관에게 논핵을 받은 자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간에 대각의 논의가 결말이 나기 전에는 감히 먼저 상소를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일의 체모로 보아 본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 함경 감사 서필원은 한갓 분한 마음으로 전례는 돌아보지 않고서 갑자기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말이 형편없고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바가 없었으니, 그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필원을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6월 13일 갑진

진주 정사(陳奏正使) 홍명하(洪命夏), 부사 임의백(任義伯), 서장관 이정(李程) 등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유황(硫黃)에 대한 금법(禁法)을 범한 죄인들에 대해서는 모두 사형시킬 것으로 논하였고, 그 당시의 사신에 대해서는 직책을 혁파하도록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우상 홍명하에게 이르기를,
"경이 무사하게 다녀왔으니 공사간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쌀을 공무(公貿)하는 햇수가 이미 다 찼기 때문에 비국에서 일찍이 면포 및 쌀의 편리 여부에 대해서 도내 백성들의 여론을 물었는데, 지금 감사 이상진(李尙眞)의 장계를 보니, ‘지금 복구하는 일을 인하여, 목면은 품(品)을 올리지 말고 또 쌀을 꾸어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면 아주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마도는 본래 곡식이 귀하여 도주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쌀을 구하는 것입니다. 햇수는 비록 찼지만 지금 정지를 하면 저들이 필시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전과 같이 쌀을 지급하더라도 만약 그 말[斗]수를 줄이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먼저 말수를 줄이는 말을 하여 부득이한 뒤에 허락을 하면 비록 줄이지는 못하더라도 필시 더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주가 섬으로 돌아오면 으레 역관(譯官)을 보내야 하는데, 그때에 의논해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일 함경 감사 서필원이 장계를 올려, 북병사(北兵使)는 문신(文臣)으로 차견하고 육진(六鎭)의 판관(判官) 및 북평사(北評事)를 모두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아직까지 처분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사(評事)는 무슨 일을 주관하는가?"
하였는데, 정태화가 아뢰기를,
"병사를 보좌하는 평사는 감사(監司)를 보좌하는 도사(都事)와 같은 것입니다. 이전부터 문신으로 참상(參上)이냐 참하(參下)냐를 막론하고 장수가 될 만한 명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양계(兩界)의 평사로 삼아 변방의 일을 익히게 하고 또 눌러 다스리는 바탕으로 삼았었습니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뒤로 국력이 피폐하여 임시로 줄였던 것입니다. 지금 만약 다시 설치를 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대단한 이익이 있고 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육진(六鎭)의 판관은, 북방이 이토록 피폐된 시기에는 하나의 관원도 다시 두어서는 안 되니 다시 설치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회령(會寧)은 개시(開市)하는 일이 있고 또 도회관(都會官)이니, 회령 판관은 다시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북병사에 대해서는, 문관과 무관을 교대로 차임할 것을 이미 복계하였으니, 상께서 일찍 발락을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홍명하에게 묻기를,
"청나라 의 형세는 어떻던가?"
하니, 홍명하가 대답하기를,
"들으니, 어린 황제가 비용을 절약하기 때문에 창고가 가득 차 있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인구가 늘어났고 물자는 풍부하다고 합니다. 도로에서는 모두 당나귀로 수레를 끌게 하고 있었는데, 물어보니 ‘말은 전쟁터에서 써야 하기 때문에 짐을 운반하는 데에 부려서 그 힘을 고갈시켜서는 안 된다. 4월 1일부터 수레를 끄는 일에는 당나귀를 써야 하고 말을 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다녀오면서 길에서 말은 한 마리도 보지 못했으니 명령을 내려 금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또 올해의 방목(榜目)을 보니, 13성(省)의 사람들이 모두 방목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통일을 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과거 제도는 어떻던가?"
하니, 명화가 답하기를,
"과거 제도는, 모두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고 과거장을 여는 것도 여러 날 동안 하여 책(策), 표(表), 논(論) 및 기타 문장이 모두 입격한 뒤에 참방(參榜)을 하는데, 그 문장은 지나치게 정식(程式)에 구애되는 우리 나라의 과문(科文)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신이 통주(通州)에 있을 때에 거자 한 사람을 만나서 왜 낙방을 했느냐고 물으니, 거자가 답하기를 ‘은(銀)이 없으면 진사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과거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도 시험에 떨어진 거자가 이런 말들을 하는데,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양서(兩西) 백성들의 원성이 매우 심합니다. 혹은 조적(糶糴)의 포흠(逋欠)을 징수하는 일로, 혹은 각사 노비 신공을 받아내는 일로 침탈이 친족과 이웃에게까지 미치고 있는데, 온 도내가 다 그러합니다. 관향 포자(管餉鋪子)는 그 폐해가 더욱 심하여 울부짖는 원성이 길에 가득하니, 혁파해서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견해를 진달하게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은 처음에는 물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익을 불려서 백성들을 도와 주려고 했던 것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 폐단이 과연 많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혁파하기를 바란 지가 오랩니다. 양서 모두 마땅히 일체 혁파해야 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폐단이 이러하다면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포자(鋪子)를 혁파하면 고마(雇馬)하기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니 반드시 먼저 입마(立馬)할 계책을 강구한 뒤라야 혁파할 수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우선 혁파하고 평안도는 도신(道臣)에게 하문한 뒤에 변통을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허적의 말을 따랐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조선(漕船)을 맡아서 운송하는 관원이 곡식을 손실하지 않고 잘 운송을 했을 경우, 논상하는 것이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법성포 만호(法聖浦萬戶) 정석달(鄭碩達)은 맡아 운송한 세미(稅米)가 앞뒤로 3만 7천 4백 석인데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광량 첨사(廣梁僉使) 정섬(鄭暹)은 관서(關西)의 조운미(漕運米)를 맡아 운송하여 창고에 들인 것이 앞뒤로 1만 9천여 석입니다. 모두 법전대로 논상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6월 14일 을사

정륜(鄭錀)을 정언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김소(金素)를 판결사로, 홍만형(洪萬衡)을 검열로, 이단하(李端夏)를 지평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성으로, 권대운(權大運)을 승지로, 목내선(睦來善)을 종성 부사로 삼았다.

 

사간 이정(李程)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사헌부의 직임을 맡고 있을 때에 정창도(丁昌燾)를 논핵한 것은 단지 그 당시에 전파된 말을 가지고 한 번 바로잡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지금 그 피혐한 말과 처치한 논계를 보니, 무함을 받았다느니 무함이라고 했다느니 하였습니다. 신의 논계를 이미 무함이라고 하였고 보면, 신이 어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여 내치소서."
하고, 대사간 이홍연이 아뢰기를,
"정창도를 처치할 때에 당초에는 참여된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하였는데, 그뒤에 다시 대각에 두는 것을 공론이 허락하였다면 그 당시의 전파되었던 말은 무함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이른바 무함이라고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인데, 사간 이정이 이것을 이유로 인피하였습니다. 신이 말을 자세히 살펴 신중하게 하지 못하여 동료 관원을 불안하게 하였으니, 신의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하며, 역시 인피하였다.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헌납 김우석 등이 아뢰기를,
"이정은 체직하고 이홍연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5일 병오

유생 전강에서 1등을 한 유학(幼學) 박문도(朴文道)에게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할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6월 16일 정미

이정(李程)을 수찬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김시진(金始振)을 경상 감사로, 남이성(南二星)을 교리로, 안후열(安後說)을 승지로, 이상진(李尙眞)을 이조 참판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예조 참의로, 이천기(李天基)를 호조 참의로, 권대운(權大運)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헌부가, 옥당과 대각의 처치한 관원을 체차하는 일에 대한 논계 및 이규령(李奎齡)과 조성보(趙聖輔)를 외방에 보임시킨 명을 다시 거두어들이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6월 18일 기유

장령 여민제가 상소하였다. 대략에,
"근래 위아래가 서로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는 것은 다만 서필원을 죄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것인데, 이 일로 대각(臺閣)과 전석(銓席)과 관학(館學)이 모두 비게 되었으니, 임금과 신하 위아래 모두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송시열과 송준길을 선왕께서 지우(知遇)로 허여하셨고 전하께서도 그들을 의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송시열이 대죄하는 상소와 서필원이 사직한 상소에 대하여 같은 날에 비답을 내렸는데 비답하는 내용이 현격하게 달랐으며, 송준길의 상소는 입계한 지가 두 달이 지나 지금에야 비로소 비답을 내리시면서도 시비를 판결한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 두 신하에 대해서 어찌 소홀하게 대하시겠습니까만, 사람들은 혹 이것을 가지고 의심을 하니, 이는 성상의 잘못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6월 19일 경술

호서(湖西) 지방에 비가 많이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다.

 

6월 20일 신해

대사간 이홍연 등이 아뢰기를,
"황헌(黃瀗)이 탐장죄를 저지른 실상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을 뿐만이 아니라 변방의 신하가 조사해서 올린 계문에도 아주 명백하였으니, 당초에 죽음을 면하게 해준 것은 이미 형벌을 아주 잘못 시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점차 관용을 입어 지금 다시 거두어 서용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신들은 참으로 성상의 뜻을 압니다만, 황헌이 지은 죄는 예사로운 죄가 아니니, 어찌 다시 조적(朝籍)에 끼워넣어 탐관오리들로 하여금 두려워 조심하는 바가 없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강원도 강릉 등 15개 읍에 전염병이 매우 심하게 번졌다.

 

6월 21일 임자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하였다. 김익경(金益炅)을 형조 참의로, 이만영(李晩榮)을 강원 감사로, 이회(李禬)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김수흥(金壽興)과 이원정(李元禎)을 승지로, 권대운(權大運)을 병조 참의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교리로 삼았다.

 

전라도 고부군(古阜郡)에서 12세 된 아이와 6세 된 아이가 벼락을 맞고 죽었다.

 

6월 22일 계축

오시수(吳始壽)를 부응교로, 이단하(李端夏)를 부수찬으로, 민시중(閔蓍重)과 이섬(李暹)을 지평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좌랑으로, 심지명(沈之溟)을 좌윤으로 삼았다. 남이성(南二星)을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전 감사 서필원의 건의를 따라 다시 설치한 것이다.

 

큰 비가 내렸다.

 

경상도 창령현(昌寧縣) 향교(鄕校)의 두 기둥이 벼락을 맞았다.

 

강도 어사(江都御史) 민유중이 돌아와서 강도의 미곡(米穀)과 군기(軍器)의 숫자를 아뢰었다.
인조조(仁祖朝) 이후로 강도를 보장(保障)으로 삼아 40, 50년 사이에 물자를 옮겨 저축하여 국력을 크게 갖추었었는데, 중간에 정축년의 병란을 겪어 완전히 없어졌다. 그뒤 정세가 조금 안정이 되자 더욱 잘 계획하여 거두어 모아 한결같이 완전하게 수선하고 저축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유수(留守)는 반드시 재능과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가려서 보내고 또 중신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각사에 있던 기계와 재화도 또한 모두 나누어 보내 저축을 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내탕고에 있는 어용(御用)에 쓸 여러 물품들까지도 나누어 보내 저축을 한 것이 많았다. 저축해 모은 것이 이미 많고 보니, 더러 빈 장부 및 쓰기에 합당하지 않은 기계들이 있었다. 이에 민유중을 보내어 점검하고 조사하여 아뢰게 한 것이다.
본부에는 각궁(角弓)과 목궁(木弓)이 모두 5백 17장(張), 장전(長箭) 4천 5백 30부(部), 편전(片箭) 7천 3백 77부, 조총(鳥銃) 6백 74자루, 연환(鉛丸) 87만 2천 4백 개, 진천뢰(震天雷) 1백 40좌(坐), 대완구(大碗口) 및 대포(大砲)와 중포(中砲)가 모두 65좌, 소완구(小匋口) 30좌, 호준포(虎砲) 37좌, 화약(火藥) 2만 6천 8백 92근(斤), 석류황(石硫黃) 7천 5백 72근, 염초(焰硝) 7천 1백 16근, 철갑(鐵甲) 52벌이었다.
월곶(月串), 제물(濟物), 용진(龍津), 초지(草芝), 광성(廣城), 사각(史閣), 승천(昇天), 인화(寅火) 등의 각보에 나누어 둔 것은, 흑각궁(黑角弓) 1천 3백 50장, 교자궁(交子弓) 4백 50장, 목궁 1백 50장, 장전 2천 1백 부, 편전 9백 부, 대조총(大鳥銃) 5백 84자루, 소조총(小鳥銃) 2천 1백 50자루, 대포 1백 79좌, 진천뢰 63좌, 남만 대포(南蠻大砲) 12좌, 불랑기(佛狼機) 2백 44좌, 화약 1만 6천 2백 근, 군향미 11만 2천 3백 47석, 콩 2만 8천 2백 28석, 조(租) 5천 4백 56석이었다. 호조에서 이송한 은(銀) 1만 3천 냥, 면포 10만 8천 필이었다. 기타 주사(舟師)의 비용과 깃발이나 그릇 등의 물건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6월 23일 갑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강도 어사 민유중이 별단(別單)으로 서계한 것을 가지고 조목조목 품달하였다.
1. 강도는 사방 어느 곳이나 배를 댈 수 있어서 방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연해 일대에 보루를 많이 설치하여 형세가 서로 의지되게 하여 긴급한 상황을 당하면 방패가 되게 하소서.
정태화가 아뢰기를,
"오래 전부터 이런 의논이 있었고 이완도 힘껏 주장을 하였는데, 소문이 번거롭게 날까 염려가 되어 시행하지 않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천천히 생각해보자."
하였다.
2. 바닷물 물살이 매우 급하여 배가 조수(潮水)를 따라 오르내리는데, 전선(戰船)을 갑진(甲津) 위아래에다 많이 배치한 뒤라야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조수를 살펴 나아가고 물러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월곶(月串) 등 네 개의 진(鎭)에는 원래 전선(戰船)이 없습니다. 전선을 넉넉하게 만들어서 급한 변란에 대비하소서.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무장(武將)들과 이 일을 의논해 보니, 모두들 전선으로 수호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습니다."
하고, 유혁연이 아뢰기를,
"수호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졸(水卒)을 얻기도 어렵습니다."
하고, 이완이 아뢰기를,
"배 한 척에 필요한 수졸이 80여 명이나 되는데, 어떻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강도는 물살이 매우 빨라서 큰 배를 다루기에는 불편합니다. 일찍이 선대에 방패선(防牌船)을 다시 만들었던 것은 실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방패선을 튼튼하게 만들면 전선보다 반드시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우선 그대로 두자고 하니, 상이 따랐다.
3. 이전미(移轉米) 및 양호(兩湖)에서 본부에 납부할 대동미(大同米)는 정밀하게 도정한 백미(白米)를 잘 가려서 바치게 하소서.
정태화가 서계에 따라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 강도의 쌀을 이전하여 개색(改色)하는 일은 가까이 있는 고을에 커다란 폐단을 끼칩니다. 양호(兩湖)의 대동미를 실은 배가 필시 강도를 거쳐서 서울로 가게 되니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대동미를 강도에다 내려두고 강도의 쌀로 바꾸어 경창(京倉)으로 운송해 가도록 하소서.
정태화가 아뢰기를,
"고 정승 김육(金堉)이 일찍이 이 의논을 주장하여 선대에 강구하여 결정했었는데,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세로 보아 어려움이 있으니 우선 그냥 두라."
하였다.
5. 창고의 곡식이 축나는 것은 문을 여닫는 일이 잦아 고자(庫子)가 농간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번고(反庫)할 때에 한 창고에다 회외(會外)를 별도로 두어 원곡(元穀)에다 섞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본부로 하여금 법례를 만들어 준행하게 하소서.
정태화가 서계대로 따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6. 강도의 백성들은 나라에서 빌려주는 쌀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나누어 주는 것이 점점 많아져서 포흠이 날로 불어납니다. 남한 산성에서 하는 것처럼 그 석수(石數)를 정해서 계문한 뒤에 나누어 빌려주게 하소서.
정태화가 서계대로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7. 각보(各堡)에 군향미를 나누어 준 것은, 본래 본곡(本穀)을 유지하면서 이자를 늘려 각보의 비용을 마련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별장(別將)들이 대부분 본부 사람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는 숫자를 맞추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많아, 본부에는 이익이 없고 공곡(公穀)만 축이 납니다. 본부로 하여금 각 창고로 수송해 들이게 하소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전부를 수송해 들이면 그것을 받아서 먹고 살던 백성들이 반드시 대부분 희망을 잃을 것입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우선 각보로 하여금 빌려주고 받아들이는 일을 전과 같이 하게 하되 받아들였는지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를 본부가 점검하여 만약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별장 및 본부의 관원을 모두 논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 화기(火器) 가운데에 작은 황자포(黃字砲) 및 작은 완구(碗口)나 측자포(昃字砲) 등은 멀리 나가지도 않고 긴요하게 쓰이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부수어 다른 화기를 만드는 데에 보태소서.
상이 이르기를,
"이미 만든 기구를 굳이 부술 것이 있겠는가. 우선 그냥 두라."
하였다.
9. 각진의 화기들이 뒤섞여 있어서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부에 신칙하여 혹 부족한 것은 보태고 혹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서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쓰일 수 있도록 하소서.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분부하라."
하였다.
10. 본부의 별파진(別破陣)에 대해서 재주를 시험하여 그 뛰어난 자에게는 별도로 상을 내리소서.
11. 화기 가운데 불랑기(佛狼器)를 특별히 넉넉하게 만드소서.
12. 화기 가운데 매우 무거워서 급할 때에 운반하기가 어려운 것들도 많으니, 본부로 하여금 몇 사람이 끌 수 있는 작은 수레를 별도로 만들어 싣고 운반할 수 있게 하소서.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 몇 가지 일은 서계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3. 월곶 등 4개의 진을 설치할 때에 수군(水軍)을 지급하지 않고 병조에서 가포(價布)를 지급하여 사람을 사서 번을 세우게 했는데, 중간에 줄여 깎아서 평소에도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급할 때는 힘을 얻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경기와 황해의 양도의 육군을 정해서 지급하고, 별장을 승진시켜 만호를 삼으소서.
정태화가 아뢰기를,
"수군과 육군은 그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매우 달라서 필시 죽음을 무릅쓰고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승진시켜 만호를 삼는 것은 연혁에 관계되니, 또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수(留守)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품의하라."
하였다.
14. 철곶(鐵串)과 덕포(德浦)의 배를 정박하는 곳을 더욱 파내도록 하소서.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수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우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이 북경에 있을 때에 송시열의 상소를 보았는데, 김만균이 아비의 명으로 상소를 했다가 잡혀서 갇히기까지 하였으므로 개탄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올린 것이었으며, 또한 원수를 점점 잊어버리게 될까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여러 의논들이 송시열의 본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이에 원수를 잊고 윤리를 어지럽혔다는 등의 말로써 서필원을 공격하여 심지어는 금수에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서필원이 올린 상소는 실로 식견이 어두운 탓에 나온 것입니다. 그 본래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어찌 윤리를 어지럽힐 뜻이 있었겠습니까. 또 서필원의 한 마디 말이 어찌 성상을 현혹시킬 수가 있겠으며 성상의 큰 뜻을 꺾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서필원이 대각의 논계가 한창이던 날에 진소하여 스스로를 변명하였으니, 간원이 파직시키기를 청한 것은 실로 사체에 있어서 잘못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속히 윤허를 내려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정태화도 아뢰기를,
"대각의 논계가 정지되기도 전에 상소하여 변명을 하는 것은 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간원의 논계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점점 서로 과격해져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매우 괴이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따르지 않는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성균관 유생들이 한 짓은 비록 지나치기는 하나 이미 공관(空館)을 하였으니, 다시 들어 오도록 개유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유생으로 대신 들어오게 하기까지 하였으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비록 지나간 일이기는 하나 뒤폐단에 관계가 되기에 아울러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국경을 넘어가서 산삼을 캐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저들이 이미 신칙하였으니, 지금 산삼을 캐는 때이니 우리도 금령을 신칙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양계(兩界)의 감사와 병사에게 분부하여 엄하게 금지시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홍연이 서필원을 파직하라는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니, 상이 윤허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대정(大政)이 막 끝났는데, 양사에서 단지 전계만을 전하고 다른 논핵을 하는 일이 없습니다. 어찌 논핵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겠습니까."
하였는데, 이홍연이 아뢰기를,
"신이 물의가 있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또 동료들과 더불어 상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논계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신이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굳이 혐의할 일이 아니다. 무슨 사피할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집의 이준구(李俊耉)가 또한 이 일로 인피하였는데, 상이 피혐하지 말라고 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이 자신의 노병을 진달하고 젊고 합당한 자로 자신의 임무를 대신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병이 조금 나았으니, 스스로 병조리를 하면서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젊은 사람 가운데 누가 경보다 나은 자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완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이 임무를 맡은 것이 이제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당초의 군오(軍伍) 가운데에도 나이가 많은 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나이 많고 쇠잔한 자가 더욱 많습니다. 신이 추려내어 간략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연하(輦下)의 친병은 다른 군대와는 달라서 계달을 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도감군은 앉아서 놀고 먹기 때문에 잘 걷지를 못한다. 능에 행행할 때에 보니 역시 쓰지 못할 자가 많았다."
하였다. 좌참찬 허적이 아뢰기를,
"경기의 대동(大同)과 쇄마(刷馬)에 대한 일은 우상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뒤에 의논해 정하라고 이미 명을 내렸었습니다. 지금 우상이 조정에 돌아왔으니,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객사(客使)가 나올 때의 쇄마는 민결(民結)에 분정하여 상평창에서 값을 지급하고, 기타의 쇄마는 관청에서 값을 지급하여 갖추어 쓰게 하되, 민결을 침범하지 않은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부교리 장선징이 아뢰기를,
"북평사 남이성은 병이 많아서 지금 만약 북쪽 변방으로 부임하게 되면 필시 가다가 죽을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도 역시 그가 병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질이 또한 술을 좋아하니, 비록 보낸다 하더라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개차하라."
하였다.

 

호남에 큰물이 졌다. 익산(益山)의 미륵산(彌勒山) 동쪽, 서쪽, 남쪽 세 곳이 무너져 내렸다. 임피(臨陂)의 공주산(公周山)과 오성산(五聖山)도 무너져 내렸다. 깔려죽은 사람이 있었다.

 

6월 24일 을묘

집의 이준구 등이 아뢰기를,
"병조(兵曹)의 낭관은 청선(淸選)의 계제이니, 천법(薦法)을 거듭 밝힌 것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새 천거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은 모두가 조정의 기강이 엄하지 못해서 사람들이 법을 두렵게 여기지 않아 생긴 일입니다. 그 천거를 삭제하고, 의논해 천거한 낭관들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의 도방군(到防軍)을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집을 짓는 곳에 부역시키도록 명하였다.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아뢰기를,
"도방군을 조발하여 사가(私家)의 일을 시키는 것은 이미 법례가 아니고, 전부를 보내어 부역을 시키는 것은 더욱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이렇게 덥고 비오는 여름에 먼 지방으로 새로 부방나갈 군대로 하여금 갑자기 과외의 일에 정역시키면 필시 원망이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이는 새로 만든 규례가 아니다."
하였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심하게 번졌다.

 

6월 25일 병진

헌납 김우석 등이 아뢰기를,
"우윤 이지천(李志賤)은 사람됨이 궤이하고 또 하자가 있어서 본직에 제수했을 때에 물의가 많이 일어났었습니다. 개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다가, 이튿날에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의관(醫官) 윤후익(尹後益)을 특별히 삭령 현감(朔寧縣監)에 제수한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집의 이준구와 장령 이유가 추고 공사 가운데 조율을 감정한 것이 마땅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27일 무오

좌의정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가 죽었다.
원두표는 포의(布衣)로 정사 훈록(靖社勳錄)에 참여하였다. 어릴 때부터 뜻이 크고 강직한 기풍이 있어서 스스로 웅걸임을 자부하였는데, 성질이 자못 거칠고 오만하여 사론의 추앙을 받지 못하였다. 인조 말년에 김자점과 틈이 벌어져 각각 붕당을 세워 배척을 하였는데, 얼마 뒤에 김자점이 모역으로 죽음을 당하자, 의논하는 자들은 또한 원두표를 군자의 당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두표는 정사 공신 가운데에서 가장 늦게 정승에 올랐고, 지위에 오른 지가 오래지 않아 정승으로서 한 일이 드러낼 만한 것은 없었으나, 집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고 기백과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임종에 임해서 올린 상소에서, 간절하게 사류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사류들도 이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아들 원만석(元萬石)과 원만리(元萬里)는 지위가 감사(監司)에까지 이르렀다.

 

6월 29일 경신

홍명하(洪命夏)를 내의 도제조로, 이정(李程)을 집의로, 정창도(丁昌燾)를 장령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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